김근태 평전/[11장] 집권대체세력 ‘국민회의’ 결성

2012/09/10 08:00 김삼웅

 

김근태가 2년 여의 옥살이를 마치고 출소할 때는 그의 나이 어느새 45세의 중년이었다. 30~40대를 온통 수배와 고문, 옥고를 치루느라 청춘을 박해 속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의 출옥 뒤에 실시된 제14대 총선(3월 24일)에서 민자당이 과반수 의석에 실패했다.
민자당 149, 민주당 97, 국민당 31, 무소속 21석이었다. 이런 가운데 정국은 대통령 선거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정주영이 국민당을 창당하여 총선에 참여한 데 이어 대통령후보에 나서고, 당권투쟁 끝에 김영삼이 민자당 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통합민주당에서는 김대중이 입후보하였다. 정국은 바야흐로 대선국면으로서 삼복 무더위를 무색케하는 선거 열기로 달아올랐다.

국민의 관심은 1980년에 이어 1987년의 대선에서 다시 분열하였던 ‘민주화의 동지’ 김영삼ㆍ김대중이 두 번째 맞붙어 자웅을 겨루는 상황에 모아졌다. 달라진 것이라면 김영삼이 군부세력과 협력하여 창당한 여당의 후보가 되었다는 점이었다. 김근태는 그가 3당 야합으로 군부세력과 손을 잡을 때부터 크게 실망하면서 그에 대한 가치 판단을 달리하게 되었다.

김근태가 옥중에 있을 때 남북관계를 비롯, 대 공산권 관계에서 큰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1990년 7월 20일 노태우의 ‘남북간의 민족대교류를 위한 특별선언’의 발표에 이어, 9월 14일 남북고위급회담이 서울에서 개최되고, 9월 30일 소련과 국교를 수립했다. 1991년 9월 17일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고, 12월 13일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북한간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되었다.

이어서 ‘남북비핵화선언’도 채택되었다. 바야흐로 남북 간에는 대화가 진척되고, 한국은 동서냉전 틈바구니에 갇혔던 공산권과의 교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노태우 정권으로서는 역행하기 어려운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김근태는 출소 6일 뒤인 8월 18일 서울 외신기자클럽 초청으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민주대연합을 통한 민주정부 수립의 길로>란 기조연설에 이어 질문을 받았다. 그는 이 자리에서 자신에 대한 노태우정권의 투옥이 정치보복이라고 밝혔다.

90년 1월, 3당 야합으로 민자당이 만들어진 이후 부동산가격 인상, 물가폭등, 민주화의 정체, 개혁정책의 폐기 등으로 초래된 총체적 난국 속에서 항의하는 민중을 침묵시키려고 결행된 탄압이다. 독자정당 창당에 반대하며, 민자당 야합에 대응하기 위해 내가 구속된 후 시도되었던 평민당, 민주당, 재야 3자의 통합된 수권민주정당(야당) 창설 추진에 대한 권력의 사전 예방적 정치보복이었다. (주석 2)

이 연설문은 김근태가 오랫동안 옥중에서 생각을 거듭해온 민족문제, 민주주의, 민중생활 등 담론과 90년대 한국사회가 추구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3년여 동안 다듬어진 시국관이고 정치철학이다.

1. 머리말
① 민주주의 발전에 대한 관심과 지지
② 정치적 탄압

2. 한국의 인권상황
① 한국의 사법현실 - 한국판 드레퓌스사건, 유서대필 조작 강기훈 사건
② 민주주의의 허구화
③ 민주화가 아닌 권위주의의 상대적 완화일 뿐

3. 동아시아 질서와 한반도의 통일
① 화해와 협력 분위기의 확대
② 남북합의서는 경제적 민족공동체의 중요한 기초
③ 통일의 기본원칙은 민족자주
④ 통일한국은 동아시아 지역의 균형추 역할을 할 수 있다.

4. 한국의 민주화와 민주정부 수립의 길
① 민족통일의 원동력은 민주주의 실현
② 민주대연합을 통한 민주정부 수립의 길로
③ 국민회의를 통한 재야의 통일ㆍ단결 실현
④ 이번 대통령 선거에 민주대연합 후보를 내세워야
⑤ 분열을 배제한 선택은 우리의 책임과 의무

5. 맺음 말 
(주석 3)

이 연설문에 나타난 내용을 보면 김근태는 운동가에서 정책ㆍ평론가의 모습을 보인다. 어느 대목에서는 경륜과 철학도 제시한다. 5년 여의 옥중에서 지적으로 연마한, 그리고 깊은 사유의 산물이다. 다음의 몇 대목에 주목해보자.

문익환 목사, 문규현 신부, 임수경 대표 등은 단순한 북한을 방문하여 북한 사람을 접촉했다는 이유 때문에 중형으로 처벌되고, 권력층 인사나 재계인사들은 아무런 법적 구속없이 북한을 방문하고 북한 사람을 접촉하고 있는 이런 이중적 상황은 법치주의와 정면 충돌하는 것이다.

비록 개인적 자유의 신장, 인권의 부분적 개선이 있고, 총선거가 시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진전이 있지만, 그것은 여전히 민주주의는 아니며, 고압적 권위주의로부터 상대적으로 완화된 권위주위로 변화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실현은 지금도 우리 운동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다.

한반도에서의 통일은 누구도 침해하고 간섭할 수 없는 우리 민족의 권리이다. 아직 통일방안, 과정, 절차에 대한 구체적이고 심각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주한미군의 존재와 그 지위에 대한 검토 또한 의미 있는 수준까지 나아가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기본합의서, 그리고 남쪽 정부의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과 북쪽 정부의 고려연방제안을 토대로 하여 그 공통점, 접근 가능한 유사점과 차이점을 비교하여 본다면 잠정적으로 이러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연방제 성격을 가미한 국가연합과 국가연합적 성격을 가미한 연방제 사이의 어떤 지점에서 통일방안은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통일된 한반도는 소극적으로 본다면 지역의 세력관계에서 균형추의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일본의 민주세력과 더불어 지역내의 민주발전에 기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중국의 경제성장과 발전을 얼마만큼 도울 수도 있으며, 그런 과정에서 개발독재식의 지나친 경제주의적 편향을 수정하고 극복하는 것을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야권의 승리를 통한 민주정부 수립만이 민주주의 실현을 전면적으로 담보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과 조건에서 이것은 민주당의 힘만으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 민자당은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거부함으로써 대통령선거에서 행정권의 광범한 개입을 이미 추구하고 고무하고 있는 셈이다. 언론에 대해서도 협조요청이라는 이름으로 광범한 개입과 간섭이 본격화되고 있다.

재야는 이제 자신의 오만했던 점과 분열을 반성하고 있다. 이것을 토대로 전체 재야세력의 통일ㆍ단결을 곧 국민회의 결성을 통해 실현해 낼 것이다. 나는 여기에 겸허하게 그러면서 책임 있게 결합할 작정이다. 하지만 국민회의가 성과 있게 결성되더라도 지난 시기와 비슷한 정치적 영향력은 되찾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 자신도 알고 있다. 그러나 통합된 기초 위에서 우리가 노력한다면 일정한 부분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석 4)


주석
2> 김근태, <희망의 근거>, 106쪽, 당대, 1995
3> 앞의 책, 목차.
4> 앞의 책, 107~114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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