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2장] 제15대 국회의원 당선, 원내 진출

2012/09/22 08:00 김삼웅

 

사람이 출세하면 목이 굳어진다고들 한다. 특히 정치 속물들이 의원 뱃지를 달거나 청와대에 들어가면 목에 기브스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김근태는 늘 자성하는 마음으로 의정활동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어려웠던 지난 날을 잊지 않으려고 서민들의 생활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틈이 나면 지역구의 어려운 고아나 독거노인들을 찾았다. 그에게는 아픈 상처가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 수배 중일 때 가족의 생계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에 친구들이 가족을 격려하려고 김근태의 집을 찾았다가 단칸방에서 아내 인재근과 갓난 아기 병준이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했을지 모르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이 소식을 뒤늦게야 들은 김근태는 평생을 서민들을 위해 살고자 마음을 다지고 다졌다.

그리고 겸손하고 도덕적 바탕에서 원칙과 상식을 지키면서 정치활동을 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런 자세는 재선에 이어 장관이 되고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민주화운동에 오랫동안 몸담아온 것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강경한 투사라는 인상을 먼저 떠올립니다. 정계에 나온 뒤의 나의 모습이나 행보를 보고서 또 어떤 사람들은 진지하고 원만한 것은 좋은데 유약해 보인다, 너무 점잖고 도덕적이다. 논리적이어서 차가워 보인다고도 합니다. 최근에는 균형감각이 있고, 내재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는, 과분한 평가도 듣곤 합니다.

칭찬이든 비판이든 모두 달게 듣고자 합니다. 또한 반성도 하고 때론 힘도 얻습니다. 그런 평가들이 ‘나’라는 사람 됨됨이와 꼭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크게 틀리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은 도덕적인 자신감에서 오는 자유로움을 갖추고 균형감각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는 것입니다. 진지하게 고민하며 더 나은 내일에의 비전을 가질 만큼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내가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고 노력은 하고 있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주석 18)

국회의원 김근태는 남다른 길을 걸었다. 그의 투명한 의정활동으로 우선 유관기관과 기업인들이 긴장했다. 그리고 여의도에 똬리를 틀고 있는 각종 로비스트들이 겁을 먹었다. 그에게는 로비가 통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후원금이 모이지 않았고, 명절 때이면 국회 의원회관에 산더미처럼 쌓이는 선물 꾸러미가 그의 방은 피해갔다.

새로운 정치는 어떻게 시작되는가. 나는 그 출발점이 정치자금의 투명성과 민주적 공천제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피감기관에는 후원회 초청장을 돌리지 않았다. 한 번도 촌지를 주지 않은 나를 이해해주는 기자들이 고맙다. 당론과 다르게도 투표할 수 있는 크로스보팅과 표결 내용을 그대로 공개하는 표결실명제를 통해서 정책 투명성을 높일 수 있게 되면 참으로 좋겠다.
(주석 19)

국민회의 총재 김대중은 김영삼 정권의 야당 파괴를 막고 차기 집권을 위해 자민련 총재 김종필과 연합을 서둘렀다. 두 총재는 5월 4일 국회에서 전격 회동하고 대여 공동투쟁을 다짐했다. 이것은 사실상 DJP공조의 신호탄이 되었다. 두 김 총재는 △ 검찰의 표적수사 중단 △ 과반수 확보 중단 △ 입당자의 원상회복을 촉구하면서, 이같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15대 국회 원구성을 거부키로 합의했다.

또 5월 26일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국민회의는 자민련과 함께 대규모 합동집회를 열고 양당공조를 통해 ‘총선민의 수호투쟁’을 결의, 등원 거부 투쟁을 전개하였다. 두 당의 공조체제는 9월 정기국회에서 더욱 강화되어 10여 차례의 합동의총과 정책토론회, 양당 인사들간 식사모임 등으로 이어졌다.

1997년의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은 자민련이 후보 단일화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의원내각제 개헌에 대해 “15대 국회에서는 어려우나 16대에 가서는 추진할 수도 있다.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제 개헌을 선거공약으로 내걸 수 있다”는 등 유연한 자세를 보였다.

이와 관련 김근태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수평적 정권교체를 오래 전부터 절체절명의 가치로 추구해 왔다. 박정희 정권 이래 36년 동안 철옹성을 쌓아오며 구축된 특정 지역의 패권주의를 깨뜨리는 일이 쉽지 않다는 현실정치의 장벽을 지켜보면서도 5ㆍ16군사쿠데타와 유신정변의 핵심 중의 한 사람인 김종필과의 정치연대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김근태는 의원총회와 기자회견을 통해 “내각제 개헌을 전제로 하는 자민련과의 후보단일화 에 찬성할 수 없다”고 천명하였다. 당 부총재의 위치에서 이같은 발언은 국민회의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김대중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원칙과 대의를 중시해온 그로서는 하지 않을 수 없는 발언이었다. 김근태가 원칙과 타협, 이상과 현실, 가치와 실용의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에 대세는 이미 ‘DJP연합'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김근태는 민주당과의 통합을 서둘렀다. 정치적 ‘친정’이기도 하지만, 옛 재야 시절 상당수 동지들이 둥지를 틀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들은 4ㆍ11총선에서 대부분 낙마하고, 당내 갈등과 분열로 심한 내홍을 앓고 있었다. 자민련과의 연합도 중요하지만 정통민주세력의 연대가 더욱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인식이었다.

“옳게 또 떳떳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오직 그러한 사실만으로서 능히 불행을 견디어 나갈 수 있다는 점을 나는 입증하고 싶다.”라는 베토벤의 말이 이즈음 김근태의 심경이 아니었을까 싶다. 

주석
18> 김근태, <부드러운 힘>, <희망은 힘이 세다>, 22~23쪽.
19> 김근태, <시린 겨울을 보내며>, <희망은 힘이 세다>, 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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