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1장] 집권대체세력 ‘국민회의’ 결성

2012/09/10 08:00 김삼웅

 

김근태가 2년 여의 옥살이를 마치고 출소할 때는 그의 나이 어느새 45세의 중년이었다. 30~40대를 온통 수배와 고문, 옥고를 치루느라 청춘을 박해 속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의 출옥 뒤에 실시된 제14대 총선(3월 24일)에서 민자당이 과반수 의석에 실패했다.
민자당 149, 민주당 97, 국민당 31, 무소속 21석이었다. 이런 가운데 정국은 대통령 선거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정주영이 국민당을 창당하여 총선에 참여한 데 이어 대통령후보에 나서고, 당권투쟁 끝에 김영삼이 민자당 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통합민주당에서는 김대중이 입후보하였다. 정국은 바야흐로 대선국면으로서 삼복 무더위를 무색케하는 선거 열기로 달아올랐다.

국민의 관심은 1980년에 이어 1987년의 대선에서 다시 분열하였던 ‘민주화의 동지’ 김영삼ㆍ김대중이 두 번째 맞붙어 자웅을 겨루는 상황에 모아졌다. 달라진 것이라면 김영삼이 군부세력과 협력하여 창당한 여당의 후보가 되었다는 점이었다. 김근태는 그가 3당 야합으로 군부세력과 손을 잡을 때부터 크게 실망하면서 그에 대한 가치 판단을 달리하게 되었다.

김근태가 옥중에 있을 때 남북관계를 비롯, 대 공산권 관계에서 큰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1990년 7월 20일 노태우의 ‘남북간의 민족대교류를 위한 특별선언’의 발표에 이어, 9월 14일 남북고위급회담이 서울에서 개최되고, 9월 30일 소련과 국교를 수립했다. 1991년 9월 17일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고, 12월 13일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북한간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되었다.

이어서 ‘남북비핵화선언’도 채택되었다. 바야흐로 남북 간에는 대화가 진척되고, 한국은 동서냉전 틈바구니에 갇혔던 공산권과의 교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노태우 정권으로서는 역행하기 어려운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김근태는 출소 6일 뒤인 8월 18일 서울 외신기자클럽 초청으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민주대연합을 통한 민주정부 수립의 길로>란 기조연설에 이어 질문을 받았다. 그는 이 자리에서 자신에 대한 노태우정권의 투옥이 정치보복이라고 밝혔다.

90년 1월, 3당 야합으로 민자당이 만들어진 이후 부동산가격 인상, 물가폭등, 민주화의 정체, 개혁정책의 폐기 등으로 초래된 총체적 난국 속에서 항의하는 민중을 침묵시키려고 결행된 탄압이다. 독자정당 창당에 반대하며, 민자당 야합에 대응하기 위해 내가 구속된 후 시도되었던 평민당, 민주당, 재야 3자의 통합된 수권민주정당(야당) 창설 추진에 대한 권력의 사전 예방적 정치보복이었다. (주석 2)

이 연설문은 김근태가 오랫동안 옥중에서 생각을 거듭해온 민족문제, 민주주의, 민중생활 등 담론과 90년대 한국사회가 추구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3년여 동안 다듬어진 시국관이고 정치철학이다.

1. 머리말
① 민주주의 발전에 대한 관심과 지지
② 정치적 탄압

2. 한국의 인권상황
① 한국의 사법현실 - 한국판 드레퓌스사건, 유서대필 조작 강기훈 사건
② 민주주의의 허구화
③ 민주화가 아닌 권위주의의 상대적 완화일 뿐

3. 동아시아 질서와 한반도의 통일
① 화해와 협력 분위기의 확대
② 남북합의서는 경제적 민족공동체의 중요한 기초
③ 통일의 기본원칙은 민족자주
④ 통일한국은 동아시아 지역의 균형추 역할을 할 수 있다.

4. 한국의 민주화와 민주정부 수립의 길
① 민족통일의 원동력은 민주주의 실현
② 민주대연합을 통한 민주정부 수립의 길로
③ 국민회의를 통한 재야의 통일ㆍ단결 실현
④ 이번 대통령 선거에 민주대연합 후보를 내세워야
⑤ 분열을 배제한 선택은 우리의 책임과 의무

5. 맺음 말 
(주석 3)

이 연설문에 나타난 내용을 보면 김근태는 운동가에서 정책ㆍ평론가의 모습을 보인다. 어느 대목에서는 경륜과 철학도 제시한다. 5년 여의 옥중에서 지적으로 연마한, 그리고 깊은 사유의 산물이다. 다음의 몇 대목에 주목해보자.

문익환 목사, 문규현 신부, 임수경 대표 등은 단순한 북한을 방문하여 북한 사람을 접촉했다는 이유 때문에 중형으로 처벌되고, 권력층 인사나 재계인사들은 아무런 법적 구속없이 북한을 방문하고 북한 사람을 접촉하고 있는 이런 이중적 상황은 법치주의와 정면 충돌하는 것이다.

비록 개인적 자유의 신장, 인권의 부분적 개선이 있고, 총선거가 시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진전이 있지만, 그것은 여전히 민주주의는 아니며, 고압적 권위주의로부터 상대적으로 완화된 권위주위로 변화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실현은 지금도 우리 운동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다.

한반도에서의 통일은 누구도 침해하고 간섭할 수 없는 우리 민족의 권리이다. 아직 통일방안, 과정, 절차에 대한 구체적이고 심각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주한미군의 존재와 그 지위에 대한 검토 또한 의미 있는 수준까지 나아가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기본합의서, 그리고 남쪽 정부의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과 북쪽 정부의 고려연방제안을 토대로 하여 그 공통점, 접근 가능한 유사점과 차이점을 비교하여 본다면 잠정적으로 이러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연방제 성격을 가미한 국가연합과 국가연합적 성격을 가미한 연방제 사이의 어떤 지점에서 통일방안은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통일된 한반도는 소극적으로 본다면 지역의 세력관계에서 균형추의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일본의 민주세력과 더불어 지역내의 민주발전에 기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중국의 경제성장과 발전을 얼마만큼 도울 수도 있으며, 그런 과정에서 개발독재식의 지나친 경제주의적 편향을 수정하고 극복하는 것을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야권의 승리를 통한 민주정부 수립만이 민주주의 실현을 전면적으로 담보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과 조건에서 이것은 민주당의 힘만으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 민자당은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거부함으로써 대통령선거에서 행정권의 광범한 개입을 이미 추구하고 고무하고 있는 셈이다. 언론에 대해서도 협조요청이라는 이름으로 광범한 개입과 간섭이 본격화되고 있다.

재야는 이제 자신의 오만했던 점과 분열을 반성하고 있다. 이것을 토대로 전체 재야세력의 통일ㆍ단결을 곧 국민회의 결성을 통해 실현해 낼 것이다. 나는 여기에 겸허하게 그러면서 책임 있게 결합할 작정이다. 하지만 국민회의가 성과 있게 결성되더라도 지난 시기와 비슷한 정치적 영향력은 되찾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 자신도 알고 있다. 그러나 통합된 기초 위에서 우리가 노력한다면 일정한 부분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석 4)


주석
2> 김근태, <희망의 근거>, 106쪽, 당대, 1995
3> 앞의 책, 목차.
4> 앞의 책, 107~114쪽, 발췌.


01.jpg
0.1MB

김근태 평전/[11장] 집권대체세력 ‘국민회의’ 결성

2012/09/09 08:00 김삼웅

 

 

짙은 어둠이 깔린 1992년 2월 12일 0시 30분, 소낙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이윽고 옥문이 열리고 2년 3개월 옥살이를 한 김근태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띄우고 홍성교도소 문을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인재근과 가족이 함께하였다.

김근태가 2년 실형선고를 받고도 3개월을 더 산 것은 이른바 ‘미결통산’을 제외한 때문이었다. 군사정권의 철저한 보복이 자행된 것이다. 양심수의 경우 수형 일수가 줄어든 경우는 있어도 늘어난 일은 없었다.

환영객들이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이 빗속에서 더욱 비장감으로 들렸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서울ㆍ부산ㆍ광주ㆍ대구ㆍ청주에서 밤길을 달려온 선후배와 동료 150여 명이 그의 출소를 지켜보았다. 환영객 중에는 김병걸ㆍ고광석ㆍ지선ㆍ최민화ㆍ김희택ㆍ유기홍ㆍ장기표 등 재야의 동지와 장영달ㆍ이해찬ㆍ원혜영ㆍ신계륜 등 민주당 관계자, 손학규ㆍ정운찬 등 학계인사가 포함되었다. 특별 환영객 미국인 에드워드 베이커의 모습도 눈에 띠었다.

우중에 민족민주운동연구소 최민화 소장의 사회로 한밤중의 ‘김근태 석방 환영대회’가 열렸다. 교도소 당국은 그의 석방에 전국에서 민주인사들이 몰려 올 것을 우려하여 출감 시간을 꼭두 밤중을 택했지만,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빗속에서 환영대회가 열렸다.

김근태 선생이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 곁으로, 민족의 품으로 돌아와 기쁘다. 역시 훌륭한 지도자는 사람을 모으는 힘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이야말로 확실한 지혜와 용기를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다. 기필코 정권을 교체하기 위해 큰 역할을 해 주시길 바란다. - 지선 스님.

너무 기뻐서 말이 잘 나오질 않는다. 우리 생애에 이처럼 감격스럽고, 또 이처럼 기쁜 날이 언제 있었겠는가. 김근태 선생이 지금 이 어둠의 벽을 박차고 나타났다. 함박웃음을 웃으며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가슴이 뛰어오른다. 그럼에도 한편 우리는 언제까지 이 어둠의 역사를 헤쳐가야 하는지, 민족의 비극을 노래해야 하는지 한없이 통탄스럽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꺾이지 않는다. 항상 어둠 저편에 밝은 빛이 있으며 구름에 가려도 하늘은 늘 푸르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제 김근태 선생과 더불어 민주화와 통일의 한 길로 나가자. - 소설가 김병걸.

자연인 김근태를 사랑하고 운동가 김근태를 존경하는 재외 교포의 한 사람으로서 사랑과 우정을 전한다. 김근태를 따르는 모임은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의 교포, 양심적 외국인까지 많이 있다. ‘김근태 석방위원회’는 이 자리에 참석한 에드워드 베이커를 포함해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쿠우모 뉴욕주지사, 투투 주교, 오갈 하벨, 그레고리 팩 등 전 세계 16개국 61명의 위원이 참여하고 있다. 나는 이 분들을 대신해 인사를 전하며, 김근태 씨의 민주화운동이 승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재미 언론인 신기섭.

지금 우리는 이 자리에서 이 나라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우리가 이루고자 하고 이룰 수 있는 민주정부 수립의 전기를 맞고 있다. 지난 시절 우리 운동의 어려움은 김근태 동지가 없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었다. 이제 김근태 동지의 석방을 기점으로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예비하자. - 장기표.

 


1990년 2월 11일, 28년 간의 감옥생활에서 풀린 넬슨 만델라를 환영하기 위해서 5만의 군중이 로벤섬 연안에 모였다. 그는 웃고 있었고 “자유를 향한 우리의 행진은 돌이킬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남아공 정부는 아무리 정적이라도 한밤중에 풀어주는 따위의 꼼수는 부리지 않았다.

김근태는 답사를 통해 “민주주의를 향한 우리의 행진은 멈출 수가 없다”고, 여전히 자신에 찬 소신을 밝히고, 감옥에서 생각했던 소회의 일단을 털어놓았다.

우리 운동에 고통을 가져다 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관념적인 운동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소련ㆍ동구의 붕괴 등 세계적 규모의 변화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지만 주요하게는 운동과정에서 나타난 수많은 전술상의 착오가 우리 운동에 많은 어려움을 가져다주었다고 본다. 나는 ‘남북합의서’ 의 발표를 전후해서 통일의 현실적 가능성이 높아지자 비교적 올바른 관점에서 있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조차도 “통일 다 됐다”, “통일운동 끝났다”는 분위기에 휩싸이는 것에 깜짝 놀랐다.

이것은 지배세력이 통일의 실현가능성을 고의적으로 외면하거나 지배세력이 통일의 가능성을 선동적으로 부추기는데 도취되어 비교적 실현가능성이 있는 통일에 대해 비판하는 것과 같다. 나는 통일의 궁극적인 이상형만을 제시해 그것에 이르는 아무런 전술적 대안도 없이 민중적 통일운동이라는 것에 경도되는 상황에 대해 경고하고 싶다.
(주석 1)

김근태는 이어진 인사말에서 “문익환ㆍ임수경ㆍ문규현 등 통일운동과 민주화ㆍ노동운동을 하다가 옥살이를 하는 분들을 남겨 둔 채 석방되어 이들에게 송구스럽다” 면서, 정부에 이들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하였다. 목이 메어 간간히 연설이 중단되기도 했으나, 그는 옥중에서 더욱 단련되고 다듬어진 언어를 통해 출감소감을 밝혔다. 빗줄기는 그치지 않았다.


주석
1> 김택수, <출소 인터뷰 김근태>, <월간 말>, 1992년 9월호.


02.jpg
0.08MB
01.jpg
0.72MB

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012/09/06 08:00 김삼웅

 


지학순 주교 구속 사건부터 시작된 김수환 추기경과 인권변호사들의 동지적 관계는 70~8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왼쪽부터 송건호, 김수환, 황인철, 홍성우.ⓒ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김근태는 1992년 1월 황인철 변호사에게 편지를 쓴다. 그는 민변소속으로 반독재투쟁의 재야ㆍ청년ㆍ학생ㆍ노동자들의 변론을 도맡다시피 하였다. 다음은 편지의 뒷부분이다.

지금은 아직 우리에겐 겨울입니다. 지난 시기처럼 지독히 캄캄한 겨울은 아니지만, 여전히 뿌우연 그러나 봄은 머지않은 아니 이미 봄이 우리를 향하여 어느 정도 와있는 겨울이라고 저는 느낍니다. 그런 겨울의 짓누름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새로운 관계 속에서 연합해야 하겠지요.

그런 새로운 관계, 이것은 우리 내부에서의 상호의 힘의 관계, 그러나 적대적이지 않고, 제한적으로만 경쟁적이며 기본적으로는 우호적인 토대 위에서의 상호관계에 대한 적절한 평가 위에서 구축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복잡하고 미묘해서 꼬일 수 있는 것이지만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오늘의 위기적 상황에 직면케 된 것이고 다가오고 있는 총선ㆍ대선에서 만일 우리의 연합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정말 비싼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지난 몇 년간의 것보다 훨씬 크고 결정적인 것이 될 것이며 이 유동적인 국제환경 속에서 우리의 민족 역사에 민중의 삶에 그리고 이 지역 평화와 인류 진보에 큰 부담과 정체를 안겨주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떨굴 수가 없습니다.

이 일을 서둘러야 하는데 정말로 서둘러야 하는데 하며 마치 발을 동동 구르는 것 같은 초조함을 안고 지금 저는 징역을 살고 있습니다. 결국 지금 이런 부담은 누가 짊어져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선배님들, 황 선배님을 포함한 선배님들에게 부과되고 요구되어지고 있는 엄중함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희 후배들이 뒷받침해드려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주석 12)

김근태는 비슷한 시점에 홍성우 변호사에게도 편지를 썼다.
그 역시 인권변호사로서 독재시절 민주인사들을 변론하고, 김근태 사건도 맡았었다. 홍성우는 이 무렵 조영래의 <진실은 감옥에 가두어둘 수 없습니다>라는 글모음집을 발간하여 신문에 광고가 실리고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김근태도 홍성우가 보내준 이 책을 읽은 터였다.

이곳 감옥은 바깥의 역사로부터 배제되어 있고 소외되어 있지만 동시에 그런 역사의 흐름과 결과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이 면제될 수 있으며, 또한 그에 대한 승인거부, 그리하여 유보도 일종의 특권처럼 부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저는 이 특권에 집착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데도 추모집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연이어 광고로 나오고 그리로 시선도 자꾸 갔습니다.
그러다가 호흡이 가빠지면서 화들짝 놀라 눈길을 서둘러 돌리곤 했습니다. 저도 결국 다 읽긴 읽었습니다. 그러나 광고의 이 모퉁이, 저 모퉁이, 한 구절 또 한 구절 이렇게 보았는데 그걸 다 읽는데 얼마나 걸렸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기막힌 슬픔”이라고 하셨지요.
“영래의 손때 묻은 글 줄”이라도 만져서 감당하기 어려운 허전함, 상실감을 메우려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셨지요. 생명의 불꽃이 스러져가는 과정을 직접 보셨을 홍 선배님에겐 정말로 가혹한 형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로선 희망없음에 대한 생각은 선배님과 전적으로 동일합니다.
그렇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이고, 또 그런 원인들의 무겁고 가벼움에 대한 판단은 다를 수 있지만, 지금 이대로 가면 더 큰 좌절과 캄캄함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타개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시급하게 그리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초조감도 생깁니다.

홍 선배님을 비롯한 선배님들이 그렇게 하실 수 없을까, 그렇게 되도록 여건이 마련될 수는 없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통일된 재야가 다시 시급히 꾸려지고, 그것과 통합야당이 민주대연합의 원칙아래 발전적 차원에서 다시 결합하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저도 한 역할을 하고 싶지만 그래 봐야 현재로선 별 소용없는 일이고, 바깥에 대한 기대로, 안타까운 희망으로 까치발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마음이 되고 있습니다.)

그럴 때만이 “진실은 감옥에 가두어 둘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죽음 속에도 더 이상 가두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래나 병곤이의 죽음은 결국 지난 번 우리의 좌절과 실패의 결과였기 때문에 더욱 그래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주석 13)


주석
12> 앞의 책, 244쪽.
13> 앞의 책, 246쪽.


01.jpg
0.05MB

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012/09/05 08:00 김삼웅

 

김근태는 감옥에서 민청련의 동지 장영달, 변호사 황인철과 홍성우에게도 편지를 썼다. 사적인 관계로부터 역사관, 시국관이 담기고, 변론으로서 도와준데 대한 감사의 뜻을 담았다.

 


2012년 8월, 장영달 민주통합당 경남도당 위원장은 '밀양 송전철탑 반대'하는 문구와 그림이 새겨진 옷을 입고 있다. ⓒ 윤성효

민청련 부의장 등을 맡아 함께 반독재 투쟁을 벌였던 장영달에게 보낸 편지에는 1991년 2월 7일자의 소인이 찍혔다. 먼저 부인과 아들 ‘돌민’이의 안부를 묻고 ‘본론’으로 이어진다. 편지의 뒷부분이다.

제도 정치세력에 대한 대중의 불신이 광범한 것은 사실입니다.
또 명백히 그럴 만한 이유도 또 그들의 한계도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바로 대중이 재야운동을 지지하고 있는 것을 의미할까요. 지금도 지배세력과 비판적 제도언론이 끊임없이 부추기고 있는 대중의 정치 불신은 우리가 뼈를 깎는 자기반성과 결단을 통해 저기 보이는 희망으로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저 30년대 그랬던 것처럼 그것이 파시즘의 대중정서 동원으로 활용될 여지도 충분히 있다고 나는 단언합니다. 아니 1989년도 공안정국 이래 지금까지 오히려 지배세력의 그런 조작이 외세와의 협조와 국내 일부세력의 오류 때문에 상당한 성공을 보여 온 것이 사실 아니겠어요.

여기 들어오기 전에 내가 이런 경고를 하고 다니자 상당히 여러 사람이 동의하지 않고, 저어기 저처럼 발전하는 대중운동을 왜 못 보는가 하고 준엄하게 반박하곤 했지요. 그것을 못 본 게 아니라 그것을 진정한 자주, 민주, 통일을 실현하는 튼튼한 힘으로 전진시켜 나아가기 위해서 해야 할 활동가들의 몫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습니다. 포퓰리즘 편향에 크게 휘둘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획득했던 대중의 신뢰의 상당한 부분을 잃어버리고 말았지요. 이제 우리는 냉정히 돌아보고, 차이를 인정하면서 또 함께 해야겠지요. 도덕성, 과학성, 힘 등 전차원에서 심각한 되돌아봄이 다급하게 요구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제 지자제와 임투기간 직후 전면적 실천평가에 기초하여 새로운 편제를 발전시켜내야 합니다. 그를 위해 장 선생도 나도 노력하기로 하십시다.

지금 창 밖에는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습니다. 이 비온 뒤 섣달 마지막 추위가 제 모습을 보이면서 달려들겠지요. 제법 대응력이 생겼지만 이 징역에서의 추위 앞에는 가끔 “속절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런 속절없음 속에서 견뎌내는 끈질김을 다시 가슴 속에 품으려하고 있습니다.

장 선생의 따스한 마음은 우리 모두 잘 아는 일이지요. 바쁜중에도 편지 주고, 책도 부쳐주고, 재판정까지 와주어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 외상값은 내가 여기서 튼튼하게 지내는 것으로 갚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장 선생!
끝으로 부인에게 꼭(!) 인사 좀 전해주시오.
그리고 돌민이에게도 얘기해주고……. (주석 11)

주석
11> 앞의 책 221 ~ 222쪽

 



01.jpg
0.08MB

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012/09/04 08:00 김삼웅

 

김근태는 김병곤을 ‘지혜 있는 용기’의 인물로 평가한다. 백범 김구의 천 길 낭떨어지에서 붙잡았던 나뭇가지를 놓아버리는 용기를 일컽는다. 김근태와 김병곤 등 민청련 집행부는 ‘죽는 것이 사는 길’, 곧 지사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대중운동은 기본적으로 전투적이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지금의 상황에서 그것은 전략적으로 그래야 되고, 전술적으로는 용기와 더불어 정말로 지혜있는 유연함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더 높은 도덕성과 명분은 지난 시기에 투쟁을 통해서, 아니 투쟁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왜 우리가 이렇게 투쟁할 수밖에 없는지를 지혜롭게 대중에게 알리고 동의를 구하는 데서만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병곤이는 또한 벌써 지혜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지혜있는 지도자라 할까요.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고 하던가요. 서(書)는 어떨까요만, 나머지에 관한 한 정말 뚜렷하게 두드러졌습니다. 요새 정치군인들인 별자리들과는 전혀 달리 진짜 장군의 피가 흐르는 번듯한 허우대와 기상에서 그것은 넉넉히 엿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보스 기질과는 다른 것입니다. 열려 있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면서, 그러면서도 자신의 의견 또한 분명하고, 줏대 없이 그리고 대책없이 흔들리는 경우란 없고, 그리고 결정을 내려야 될 때는 주저하지 않고 그렇게 하고 결정된 것은 강력하게 밀고 나가는 그런 병곤이었죠.

1984년 당시 병곤이가 역할을 맡고 있었던 상임위는 정치, 경제, 국제, 운동론 등을 연구, 분석, 토의하는 모임과 기층 대중 운동을 연구하고 부분적으로 그와 연계되는 모임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대치 최전선에 일상적으로 노출되는 것이 아니어서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괜찮은 조건이기도 하였지만, 상임위의 활동이 그처럼 매우 활발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요인은 병곤이의 그런 지도력, 지혜있음이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주석 8)

김근태의 ‘김병곤회고’는 더 이어진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얘기는 자주 들어서인지, 오래 전 일이기 때문인지, 그러고 어쩌면 지나치게 신화가 되어서인지, 병곤이의 ‘용기 있음’을 예증하는데 설득력과 감동이 오히려 떨어지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또한 당시 재판정이 극단적인 경우였기 때문에 그에 대해 즉자적인 반발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혐의로부터도 완전히 자유롭기 어려운 점도 있는 것 같구요.

병곤이가 민청련 조직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84년 9월 경부터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민청련이 발족하여 움직인 지 1년 여가 지나서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간부 역량이 부족하여 큰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병곤이의 참여를 요청하게 되었지요.

이유는 또 있습니다. 1980년의 공간에서도 전술 구사를 둘러싸고 일정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점차 심각해져 갔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학생 운동에서 주류를 형성했던 쪽의 대표적 선배 활동가가 병곤이었습니다. 1980년 광주 이후, 그리고 1983년 공간에서 학생운동의 주류를 형성했던 부분이 그 영향만큼, 또 기대되는 만큼 활발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를 타개하는 계기로서,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러한 것은 촉발하는 뇌관으로서 병곤이의 적극적 활동이 기대되었습니다.
(주석 9)

김병곤의 용기야말로 진정한 용기임을 근태는 깨달았다. 그것은 사형구형에 대한 ‘영광’이라는 반응보다 살얼음판 같은 5공 초기에 청년조직을 기획하고, 맨 앞에 서서 압제자들과 싸운 용기를 더욱 평가한 것이다.

김근태가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던 김병곤은 그처럼 허망하게 너무 일찍 세상을 떴다. 뜻과 행동에서 분신과 같았던 김근태도 그의 뒤를 따랐다. 김근태가 그의 영원한 동지에게 바치는 헌사는 다른 누가 김근태에게 바쳐도 손색이 없겠다. 김근태의 ‘헌사’는 이어진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장합니다.
오늘 우리가 정말로 신화로 만들어야 되는 것은 “사형을 주어서 영광입니다.”가 아니고, 병곤이의 바로 이 점, 자신의 의견과는 달리 내려진 공적 결정일 경우에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단호히 그것을 보위하는 것, 이것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병곤이의 위대한 승리입니다. 신비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 모두의 미래가 되어야 할 것이구요.(……)

아직은 아닙니다.
우리가 병곤이 보고 “눈 감고 고이 잠드소서.” 라고 말할 때가 오지 않은 것입니다. 여전히 남아 있는 역사적 과제 앞에 더 큰 힘으로 개입해야 되는 분명한 이유가 이처럼 나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병곤이를 떠나보내지 않았고, 또한 떠나보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병곤이는 우리의 가슴 속에, 눈빛 속에, 그리고 오늘의 이 역사 속에 타오르는 불길로, 불꽃으로 여전히 타올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석 10)

주석
8> 앞의 책, 269 ~ 270쪽.
9> 앞의 책, 266~267쪽.
10> 앞의 책, 269 ~ 270쪽.


01.jpg
0.06MB

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012/09/03 08:00 김삼웅

 

김근태는 이 해 12월 18일 역시 홍성교도소에서 <고 김병곤회고집, 영광입니다>의 편찬위원회로부터 청탁을 받고 <지혜 있는 용기>라는 제목의 회고담을 다시 썼다. 11쪽에 달하는 장문의 글을 하룻만에 다 썼다. 그만큼 고인에 대한 사랑, 동지애, 생전의 역할, 빈자리의 공허함, 천도의 무심 등이 배인 까닭이었다.

지금도 어쩌다가 잡지나 신문에서 병곤이의 사진과 마주치게 되면, 나는 상당히 긴장을 하게 됩니다. 흘끔 쳐다보고 딴청을 부리다가 또 쳐다보고, 그러다가 시선을 돌리는 것이지요. 병곤이의 안경 너머 그 시선과 마주치는 것이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이렇게 여전히 나의 눈과 가슴에 친구, 동지들의 가슴에 살아 숨쉬고 있는 병곤이가 이젠 죽었고, 그래서 우리 곁을 떠난 것이며, 생동하는 오늘과 내일에서 그 큰 손을 뗀 것이라는 그 얘기를 도저히 수긍할 수가 없습니다. 병곤이의 떠났음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은 우리가 그를 저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생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아직 그 때가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주석 5)

먼저 떠나간 동지에 대한 절절한 아픔이 서린다. 혈육이나 부부 중 상처의 경우에 사망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본성과 같은 ‘골육지정’의 발로였다.

지난 1960년대 이래, 1970년대, 1980년대 내내 올곧은 청춘들 상당수가 감옥에 갇혀 살 수밖에 없었을 때, 그 한 가운데서 병곤이는 한 번도 물러서지 않고 맞서 나아갔습니다. 캄캄한 어둠이 짙게 내리누를 때는 물론이고, 낮은 수준의 민주주의이기는 하지만, 그것의 실현에 대한 기대가 다시한번 산산이 부숴져 내렸을 때, 그리하여 폐허 같은 잿빛이 온통 사방을 휘둘러 감고 비통한 침묵에 빠져 우리 모두가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도, 그는 또 분연히 일어나 맨 앞에 서서 나아갔습니다.

그러다가 그 참을 수 없는 허망함과 분노, 그리고 고뇌를 부둥켜안고 버티다가 치명적인 암에 걸렸던 병곤이. 그런 그의 감옥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내가, 그리고 전국의 많은 양심수들이 어떻게 지금 이런 상황에서 병곤이를 순순히 떠나보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는커녕 그 큰 허우대로 되살아나 지금의 위기 상황에, 그러면서 동시에 다시 기회인 이 오늘과 내일에 철저히 개입해 줄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병곤이의 민청련 시대를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병곤이가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요. 이제는 거의 신비가 되어 있는 “사형을 받아서 영광입니다.”라는 말 속에서 지금도 그의 담대함과 용기의 힘찬 꿈틀거림이 느껴질 것만 같습니다. 교도관들의 한결같은 증언에 따르면, 일단 사형 선고를 받으면 그 누구든지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의자에 풀썩 주저앉아 멍한 상태에 빠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픽 하고 옆으로 쓰러지기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병곤이는 그 아득함과 답답함을 딛고 일어서 그렇게 맞서 외쳤던 것입니다. ‘용기’ 이외에 어떤 말로 이것을 지칭할 수 있겠습니다.
(주석 6)

우리 항일독립운동과 반독재 민주화운동 과정에는 스스로 고난을 택한 많은 독립지사와 민주인사들의 희생이 있었다. 민족ㆍ민주제단에 바쳐진 ‘제물’이었다. 그들의 희생의 대가로 독립된 국가에서 친일파들과 군사독재의 후예들이 다시 주역이 되는, 가치전도의 세상이 되었다. 김근태는 홍성감옥에서 김병곤을 추모하면서 민청련 시대를 회상한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절실한 이유가 더 있었습니다.
당시 민청련을 대표하는 공개 운동에 대해 “소영웅주의적이며, 결국 저들의 아가리에 운동역량을 똘똘 말아 처넣고 말게 될 것”이라는, 어떻게 보면 당시로서는 그럴 듯하게 들릴 수 있는 비판과 비난이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1980년 광주의 좌절과 패배, 그리고 그와 동시에 덮쳐 온 공포 아래서 있을 수도 있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는 사실 당시도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근원적 패배주의의 다른 표현일 뿐이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안전과 보신을 가장 중시하는 비겁한 비열함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연성수가 ‘두꺼비’를 들고 나와 민청련의 상징으로 하자고 했을 때 이구동성으로 동의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런 비겁함에, 비열함에 반대하면서,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죽지도 않을 것이지만, “지금이야말로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지금은 죽는 것이 바로 몇 배로 되살아나는 것이다.”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미 저명한 활동가이고 많은 수난과 고난을 겪어 온 병곤이가 다시 적극적으로 이러한 대열에 참여하는 것이 저 희극적이면서 비극적인 논리, 심한 경우 “머리카락 보일라 꽁꽁 숨어라.”는 이른바 안테나론을 결정적으로 물리치는 데 큰 힘이 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병곤이는 참으로 선선히 수락했습니다. 오랫동안 그 대답을 가슴에 담아 두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그렇게 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그 모든 것에 부응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생활의 타성에 묶이지 않고 언제나 자유로울 수 있는 그것은 그 밑바탕에 큰 용기가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지요.
(주석 7)

주석
5> <고 김병곤회고집, 영광입니다>, 264쪽, 거름, 1992.
6> 앞의 책, 264 ~ 265쪽.
7> 앞의 책, 266쪽.





01.jpg
0.06MB

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

012/09/02 08:00 김삼웅

 

김병곤 약전. 푸른나무에서 출판.

김병곤은 유신과 5공시대 그리고 1987년 12월 16~18일 노태우 당선자의 구로구청 부정투표함에 항의 농성 중 경찰 백골단의 무차별 폭력행사로 심한 구타를 당해 몸이 망가지고 이로 인해 병세가 도져 신음하다가 젊은 나이에 숨졌다.

다섯 번인가요, 여섯 번인가요. 병곤이가 체포되어 구속된 것이. 그것은 대치의 최전선에 늘 서 있었다는 증거지요. 더러 몸을 빼고 싶은 때가 왜 없었겠습니까마는 이것은 그러한 유혹에 이끌리지 않고 당당하게 언제나 맞섰다는 사실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것이지요.

마라톤을 비롯, 장거리 달리기할 때 맨 앞에 서는 것이 힘들고 외롭다지요.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웃었습니다. 말이 되는 것 같지만 다소 감상적이고 과장되어 있는 것처럼 들렸던 것이지요.

그러나 대치의 최전선에서 맞서고 있는 사람들이나 그런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알지요. 그것이 얼마나 아픈 진실인가를. 그럼에도 이렇게 맞서는 자신이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 얼마나 엄청난 피곤과 외로움이 몰려오는지 운동은 이런 대치와 대치 속에서만 전진하지만 개인개인들은 이 과정에서 지치고 소모되고 낙오되는 것이 아직 우리 운동의 현주소이지요. 거짓 예언자들에 의해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도 많고요.

그 과정에서 더욱 깊어지고 넓어지는 개인들이 아직 대량으로 등장하고 있지는 못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병곤이 또한 피곤했을거고, 동시에 채워지지 않는 내용, 민중이 주인이라는 그 믿음이 실현되어 나타나지 않는 그 안타까움에 허전해 하고 허망해하기도 했을거예요.
(주석 3)

김근태는 김병곤의 부인을 위로하면서 “병곤이의 삶은 승리이고 완성이었다”라고 위로하였다.
김병곤과 조영래 그리고 유신ㆍ5공ㆍ6공의 폭압에 저항하다가 고문사ㆍ의문사ㆍ투신ㆍ할복ㆍ분신 등으로 자기몸을 던진 민주화의 의열사들은 하나같이 ‘승리이고 완성’된 삶이었다. 김근태 자신까지 포함하여.

이런 생각입니다. 병곤이의 삶은 승리이고 완성이었다. 그의 떠나감에서 이런 우리의 주장은 격심하게 동요되고 무효화될 지경에까지 나아갔지만 승리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인간의 연약함, 부스러지기 쉬움이 그 완성 속에서 치명적인 약점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승리, 반성과 연약함과 치명적 취약성은 서로 대립되면서 통일되는 것이다. 병곤이는 승리를 통하여 우리에게 치열함과 의지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주었고 또한 그런 연약함을 통해 겸손함, 겸허, 되돌아봄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에 나 자신도 아직 완전히 설득되고 있지는 않지만 대강은 이렇습니다. 그렇게 달래고 있지요. (주석 4)

주석
3> 앞의 책, 232~233쪽.
4> 앞의 책, 236쪽




01.jpg
0.06MB

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

012/09/01 08:00 김삼웅

 

 강경대 열사의 죽음에 분노하는 학생들. 권위주의 정권의 군경에 맞아 죽은 학생은 열사란 이름으로 기억됐다. 하지만 경제적 불평등에 맞아 죽은 학생은 자살이란 이름을 얻을 뿐이다. 이 세상은 그들이 나약했다고 꾸짖는다. 더욱이 우리 같은 '별종'들이 죽으면 관심 한번 끌어보기 위한 '쇼'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강경대열사추모사업회

 

김근태가 두번째 옥살이를 하게되는 1990~1992년은 3당 야합을 계기로 한국의 보수세력이 대동 결속하여 5공 못지않게 전제를 일삼은 시점이었다. 한때 국민의 시선을 의식하는 듯 하던 노태우는 3당야합으로 거대 여당을 거느리면서 비판하는 저항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민주화를 지도해온 김영삼의 민자당 참여는 일생일대의 실책이었다. 노태우는 박정희 → 전두환에서 정치적 혈통을 이어받은 그대로를 내보였다.

1991년 4월 24일 상명여대의 학원자주화 집회에서 지지 연설을 하고 돌아오던 명지대 박광철 총학생회장이 불법으로 연행되자, 학생들은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다. 그러나 경찰은 최루탄을 난사하며 강경하게 진압하였고, 학생들은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경제학과 1년생 강경대는 4월 26일 ‘학원자주화 완전 승리와 노태우 군사정권 타도 및 총학생회장 구출을 위한 결의대회’ 에 동료학생 300여 명과 함께 참가했다가 경찰에 붙잡혀서 무자비하게 휘두른 쇠파이프에 집단 구타당해 병원으로 옮기던 중 숨졌다.

박승희 열사의 영정 사진 ⓒ 김은숙

이튿날부터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 (대책회의)가 결성되고, 살인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대학가의 격렬한 항의시위가 전개되었다. 학생ㆍ시민들은 죽음으로써 노태우폭압에 맞섰다. 4월 29일 전남대생 박승희 분신, 5월 1일 안동대생 김영균 분신, 3일 경원대생 천세용 분신, 6일 한진중공업노조 위원장 박창수 안양병원에서 변사체로 발견, 8일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분신, 18일 전남 보성고생 김철수와 광주 운전기사 차태권 분신, 20일 권창수 광주에서 시위도중 전경의 폭행으로 중태, 22일 광주 정상순 분신, 25일 성균관대생 김귀정, 경찰의 폭력시위 진압과정에서 압사 등이 잇따랐다.

이런 와중에 시인 김지하는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는 시론을 쓰고, 서강대 총장 박홍은 ‘어둠의 세력’ 운운하는 기자회견을 하여 국민의 분노를 샀다.

노태우 정권은 김근태를 다시 감옥에 보냈지만, 국제사회는 그의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높이 평가했다. 1991년 5월 미국 하원의원 17명이 김근태의 구속수감에 대해 한국정부에 항의서한을 보내고, 12월에는 미국 하원의원 44명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항의서한을 보냈다.

김근태가 옥고를 치르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가슴아팠던 일은 민청련을 함께 조직하고 반독재투쟁의 일선에 섰던 김병곤이 위암투병 중 1990년 12월 6일 사망한 소식이다. 그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군사법정에서 공안검사의 사형구형에 “영광입니다”고 거침없이 외칠만큼 담대한 청년지도자였다.

또 한 사람은 같은 해 12월 12일 인권변호사로, 학생ㆍ청년기에는 반독재 투사로 활동하고 <전태일 평전>을 써서 문명을 날린 조영래의 죽음이었다. 두 사람과는 너무 각별한 사이였고 동지 관계여서 이들의 부음 소식은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할만큼 충격이 컸다.

김근태는 김병곤의 사망소식을 항소심 재판정에 나갔다가 돌아온 날 저녁에 어느 신문 귀퉁이에서 보았다. 충격이었다. 망연자실했다.

침이 마르고 목이 잠겼습니다. 머리속에서는 깨진 종소리가 계속해서 울리는 듯했습니다. 눈을 감고 생각하고자 했지만 갈피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학생ㆍ노동자의 푸르른 죽음도 아프고, 서남동ㆍ성내운 선생님 돌아가심도 그랬지만 이것은 또 다른 아픔이었습니다. 인정될 수 없는 것이지요. 종철의 죽음 때, 석규ㆍ한열이 때 많이 울었고, 조성만의 죽음 때도 어깨를 들먹거리며 울었는데, 이상하게 병곤이 기사를 보고 또 보는 데도 눈물은 나지 않았습니다.

안절부절하면서 섰다 앉고 앉았다 일어서고 참 이상하고 곤혹스럽기도 하고 한편 내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불안불안하였습니다. 약간 과장해서 말한다면 병곤이의 떠나감에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에 절망하면서 혼란에 빠져갔습니다.

너무 많은 죽음에 부닥쳐서 이제 지쳐버린 것인가. 병곤이의 그 참혹한 모습에 정이 다 달아나고 만 것인가. 내 징역에 빠져서, 내 서러움에 갇혀서 그런 것인가. 내 뇌리를 채우는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이 엉뚱함과 당혹 속에서 밤새 이튿날 접견실에서 인재근을 만나고 그로부터 직접 병곤이 얘기를 듣는 순간 더 이상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참고 참았지만 말이 잘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병곤이의 캄캄한 죽음은 정서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차디찬 현실에 맞부딪쳤을 때 그것을 직접 얘기로 들었을 때 파열된 것처럼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주석 1)

 


민변, 조영래추모모임 등이 10일 인권변호사 조영래 20주기 추모 행사를 연다. ⓒ 조영래추모모임

김근태는 김병곤과 조영래의 너무 이른 죽음 앞에 하늘을 우러러 원망하고 탄식했다. 앞의 인용문은 1991년 3월 홍성감옥에서 고인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의 일절이다.

우리는 정말 역사 속에서 얼마나 더 제물을 바쳐야 하는 것인지 아직도 인지……. “아직도 ……이니이까” 하는 성서 속의 그 절규와 신음이 가슴을 후벼파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처럼 겨울 징역을 살고 또 살고 또 더 살아야 하고, 그래야 할 것이고 …… 운동은 모두 시간 속에서 변화ㆍ발전할 터이지만 지겹게 반복되고 있는 거의 순환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좌우 편향 속에서 동요하고 있는 오늘의 이 풍경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큰 목소리로 “때가 왔다. 지금은 그때이다. 모두 일어서라”하던 그 많은 거짓 예언자들, 이론가들 그리고 뒤에서 아우성치던 평론가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가. 그중에 몇은 이제는 “압도적으로 우리가 열세”라고 또 다시 근엄한 목소리로 설교를 하기 시작하고 있고…….
(주석 2)


주석
1> 김근태, <열려진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에서>, 235쪽.
2> 앞의 책, 231쪽.





03.jpg
0.06MB
01.jpg
0.11MB
02.jpg
0.05MB

김근태 평전/[9장] 짧은 자유, 또 투옥되다

2012/08/31 08:00 김삼웅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한 가운데, 2011년 12월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유가족들이 영정사진을 모시고 빈소로 향하고 있다. ⓒ유성호

 

세상에 어느 아빠가 딸을 귀여워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만은 김근태의 딸 사랑은 각별했다.
“(남편이) 딸을 어찌나 예뻐하는지 꼭 자기만 딸 있는 거 같아요. 시집도 안 보낼 거래요. 딸애도 아빠 앞에서는 듣기 좋으라고 시집 안 간다고 하는 데 제가 슬쩍 ‘너 어느날 갑자기 뒤통수 치고 갈 거지?’ 했더니 ‘물론이죠’ 하더라구요.”  (주석 22)할만큼 병민이를사랑했다.

김근태의 남다른 딸 사랑의 편지 한 꼭지를 더 소개한다. 5월의 병민이 생일날 <드높은 자존심은 흉이 아니다>는 제목의 편지다.

병민에게
네 말마따나 병민이와 아빠는 짝꿍이란다. 병준이와 엄마가 그런만큼,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병민이 너를 좋아하고 사랑한단다.

어느 땐가 엄마가 와서 네 흉을 보던 얘기가 생각나는구나, 네가 괜히 징징거리고 짜면서 “내 편을 들어줄 아빠는 감옥에 가 있고……” 라고 하면서 꼴이 가관이라고 하더라, 이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콧등이 찡하면서 매캐해졌었다. 아, 우리 병민이가 이렇게 커가는구나. 이렇게 아빠가 멀리 자주 떨어져 있는 데도 잘 자라고 있고, 또 그런 식으로 기억해주고 있고 말이다.
(주석 23)

병민아. 부모들은 자식들의 변화를 보고 느끼면서 감동을 하곤 한단다. 그리고 그런 변화를 자랑스러워하고 말이다.

김근태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세상의 모든 여성들에게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아갈 것을 바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병민이 너는 네 일을 네가 스스로 하고 또 그에 대해 책임질 줄 알기 때문에 그런 드높은 자존심은 흉이 아니라 자랑이 되고 아름다움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병민이를 아빠는 자유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노예처럼 아무에게나 머리를 숙이고 대신 동정을 받는 그런 사람과는 전연 관계가 없는 독립된 사람이지. 병민이는 아빠가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가까워지고자 노력하고 있는 자유인에 벌써 한쪽 발을 들여놓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구나. 이런 의미에서도 또 병민이와 이 아빠는 정말 친구이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할 수 있을게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병민아.
(주석 24)

딸 얘기만 하다보니 아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는가 하는 의문이겠지만, 역시 어느 부모가 아들, 딸 차별해서 사랑하겠는가. 이 무렵 병준이는 12살짜리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어릴적부터 가정의 풍파를 겪어서인지, 그 나이에도 무척 어른스러웠다. 김근태는 8월 16일 병준이에게 편지를 썼다. <한 줄기 바람처럼 향기로운 너의 노래>란 제목을 달았다. 병준이가 면회를 와서 불러준 노래를 듣고 감동한 것이다.

병준에게.
지난 번에 내려와 병준이 네가 불러준 노래 정말 잘 들었다. 워낙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날은 더욱 각별한 것 같았다. 네 노래를 들으면서 노래에 빨려 들어갔고 괜히 콧등이 시큰해지면서 네 노래에 공명되어 아버지 가슴 속에서는 어떤 떨림의 물결이 일어났다.

처음 듣는 노래여서 그 가사가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 또 곡조의 어디에 아름다움의 무게가 집중되어 있는지 가늠이 잘 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이런 것들이 느껴졌다. 상당히 긴 노래인데도 지루하게 생각되지 않았고, 비교적 밝고 명랑하며 또 호소력도 있는 멜로디를 갖고 있는 노래구나라고 말이다.(……)

병준이의 시원한 한줄기 바람 같았던 노래를 생각하면서, 지난날 아버지의 어둡고 슬프고 서러웠던 노래들, 그리고 실패했던 노래 ‘사랑의 미로’를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노래는 무엇인가, 그리고 음악은 무엇인가도 약간 생각해보았다.

결론은 이렇다. 노래는, 음악은 정말 해볼 만한 것이다. 특히 병준이처럼 재능이 있는 경우에는 정말로 고려해 볼 만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물론 그 결정은 병준이 네가 하는 것이고…….

그러나 큰 성취를 이루고자 하는 경우에는 열정과 노력이 재능 못지않게 중요한 것임을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내년엔 중학생이 되는 병준이가 깊이 생각해 볼 만한 일일 것이다.
(주석 25)


주석
22> 인재근, <엄마가 뿔났다>, 41쪽.
23> 김근태, 앞의 책, 55쪽.
24> 앞의
책, 57쪽.
25> 앞의 책, 56~57쪽.




01.jpg
0.12MB

김근태 평전/[9장] 짧은 자유, 또 투옥되다 2

012/08/30 08:00 김삼웅

 

김근태 부부에게는 보통사람들의 부부와는 다른 ‘비화’가 적지 않았다.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평생동지’인 까닭이다. 옥중에서 남편은 ‘고무신을 거꾸로 신을 자유’를 부인에게 주는 편지를 썼고, 이것이 ‘운동권’ 인사들에게 알려지면서 화제가 되었다.

김근태가 1차 감옥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 감옥에서 아내의 두번째 생일을 맞은 ‘기념’으로 편지를 썼다. 편지가 지극히 ‘황당한’ 내용이었다.

당신의 생일이어서 좋은 날인 오늘 나는 자유를 돌려드리겠소. 생일선물로서는 최상인 신발을 거꾸로 신을 수 있는 자유말이오. 선택의 자유, 떠날 수 있는 그 자유말이오. 끝으로 당신의 생일을 재삼 축하하면서….

김근태는 민주화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면서 ‘진반농반’으로 아내에게 말하곤 했다.

“징역가게 되어, 5년 이상 옥살이를 하게 되면 상대방을 결단코 자유롭게 하겠다. 무조건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일체의 면회, 편지를 단절시키겠다. 부담과 동정의 대상이 되는 삶을 살지 않겠다.”

그런데 공교롭게 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수형생활 2년 차가 되는 아내의 생일날에 ‘신발을 거꾸로 신을 자유’를 주겠다는 편지를 쓴 것이다.

물론 징역생활 1년을 넘기고, 대법원 판결을 받은 후의 감옥 안에 있는 사람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이 마지막 대목은 나를 열받게 만들었다.

이 편지를 받은 그 날 밤 나는 앞뒤를 모두 채운 5장의 편지를 남편에게 썼다.
주제는 신발을 거꾸로 신을 자유는 언제고 나 자신에게 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우리가 10년간 같이 살아오는 동안 어려웠던 일, 특히 섭섭했던 일 등을 속사포처럼 쏟아내었다. 특히 두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나의 활동의 중단에 대해서 제일 많이 썼던 것 같다. 나의 이 편지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났다.

“여보! 나의 소원은 남자 파출부를 두고 사는 것이예요.”

그 후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면회를 가려고 노력했고, 나는 두 아이를 데리고 대관령 고개를 굽이굽이 넘어 남편을 찾아갔다. 아이들을 데려가면 특별면회라는 것을 하게 된다.

나는 남편을 보자마자 “아니 그 자유가 누구 자유인데 되돌려주고 말고 해. 김근태 씨!”라고 쏟아냈다.
남편은 쑥스러워 하면서 “당신이 너무 바빠서 그런 자유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릴까봐 알려줬어!”하며 웃었다.
(주석 19)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인병준과 인병민에게’ 쓴 편지를 살펴보자.
빨래하면서 느낀 생각을, 아이들에게 서스럼없이 적었다.

여기서 이번 징역살이는 밝고 명랑하게 살려고 하고 있단다. 그러나 얘들아,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인지 지내다보면 가슴에는 설움이 고이곤 하는구나. 너희들이 보고싶고, 너희들을 껴안고 싶고, 그리고 자유로운 공기도 실컷 마시며 저 높은 하늘로 힘껏 머리를 제껴 바라보고 싶구나. 너희들하고 엄마와 함께 말이다.

바로 그런 기분이 될 때 이럴 때쯤 나는 빨래를 한다. 정신없이 빨래를 하다보면 비누거품과 함께 헹구는 물과 함께 눈물처럼 고여 있던 슬픔이 나에게서 빠져나가버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보너스처럼 그와 함께 노곤함, 유쾌한 피곤함도 몰려오고 말이다. 이러고 나면 며칠 동안 랄랄라........ 하면서 산단다. 아주 쾌활하게 말이다.

그러나 빨래는 쉬운 것이 아니다. 쪼그려 앉아서 하니까 허리가 아프고, 또 빨래가 많으면 어깨쭉지와 등도 뻑쩍찌근할 때도 있고 심한 경우 특히 담요 같은 것을 빨고 난 다음에는 몸살기 같은 것으로 인해 드러눕게 되기도 할 때가 있다.
(주석 20)

 



김근태는 빨래하는 일을 통해 아이들에게 남녀차별 문제와 남녀평등을 가르친다.

아빠가 남녀차별 문제, 여자평등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공부한 것은 사람이 사는 이 세상을 어떻게 하면 보다 밝고 사랑스럽고 눈물과 한숨 그리고 원한이 없는 곳으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또한 이런 방향으로 아빠가 많이 나아가게 된 것은 엄마에게 잘해주고 싶고,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함께 결혼해 살면서 너희들 남매가 그렇듯이 엄마와 아빠도 서로 대립갈등하면서 타협하고, 물러서고 하면서 배우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또 그런 생각에서 할머니도 생각해보고, 지금 부천에 살아계시는 엄마의 엄마, 방순이 할머니의 아름다운 마음과 자신에 찬 생활을 보면서 한층 깊어진 것이다.
(주석 21)

주석
19> 앞의 책, 53쪽.
20> 김근태, <열려진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에서>,
50쪽.
21> 앞의 책, 52쪽.




01.jpg
0.44MB
02.jpg
4.91MB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