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1장] 집권대체세력 ‘국민회의’ 결성

2012/09/15 08:00 김삼웅

 

 

김근태의 관심은 재야민주세력을 정치적 대안세력으로 묶는 작업이었다.
과거 일부 재야인사들의 진보정당운동의 실패를 돌아보면서 제도정치권과 재야세력의 조직적인 연계와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구상이었다. 여러날 동안 준비 끝에 마침내 이를 위한 1단계 작업이 이루어졌다.

1994년 4월 23일 오후 충정로 동아일보의 18층 대강당, 400여 명의 재야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 (국민회의)가 결성되었다. 최고지도부인 공동대표단에는 종교계 원로와 재야 원로 5명을 선출하였다. 가톨릭대표 김병상 신부, 개신교대표 김상근 목사, 법조계대표 한승헌 변호사, 재야여성대표 김희선 전국연합자주통일위원장, 불교계대표 조계종 개혁의 핵심인 지선 스님, 그리고 이 단체를 오랫동안 준비해온 김근태가 각각 선임되었다. 김근태는 실질적인 상임대표였다. 대변인에는 천정배 변호사가 임명되었다. 김근태는 ‘국민회의’ 결성 과정을 다음과 같이 털어놨다.

93년 김영삼 정권 수립 후 ‘민주개혁과 민주정부수립을 위한 국민회의’ 평가가 움직임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93년 상반기에는 ‘정치적 국민운동체’를 추진하지 못하다가, 7월 16일에 가서야 1백 30여 명 활동가들이 서울 꼼뺑뜨왈 수녀원에 모여 토론을 시작했다. 각 지역과 부문 활동가들인 이들이 토론해서 7월 말 ‘새정조’를 만들고 책임자 회의를 성립시켰다. 가능한한 많은 합의를 통해서 정치운동과 대중운동으로 분화 발전하기 위해서였다.

8개월간 민주대연합에 동의하는 진영내에서 활발한 토론을 했지만 잘 안 되었다. 대부분의 활동가들이 운동의 침체와 자기 조직정비에 골몰하고 있었다. 단결된 모습으로 전진하고 힘에 기초해야 할 재야운동은 폭넓은 합의와 단결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주로 제도정치권만 모색한다는 우려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94년 초반에 새정조는 15차 책임회의를 개최하고 4월 중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했다. 그리고 3월 12일 숭실대에서 확대회의를 개최해 4월 23일 결성대회를 갖기로 하고 운영규정, 사업계획, 추진일정 등을 정했다.
(주석 16)

 



‘국민연합’은 또 다른 재야 연합체인 ‘전국연합’을 흡수하지는 못했지만, 개인자격으로 많은 명망가들이 참여했다. 이들 외에도 상당수 문화계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시인 고은과 김규동ㆍ신경림ㆍ문병란ㆍ도종환ㆍ신초혜, 소설가로는 천승세ㆍ조정래ㆍ윤정모ㆍ송영ㆍ김하기ㆍ정도상 등이 참여하고, 행사 당일 가수 신형원은 축가를 불렀다.

영화인 장신우 감독, 화가 홍성남, 만화가 이희재, 오페라 연출가 문호근, 전대협 2기 의장 오영식, 전대협 4기 대변인 김재웅, 전 고려대 총학생회장 허인회 등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다수 참여했다. 이밖에 상당수의 의사와 중소상공인, 교수, 변호사, 언론인 등이 참여하여, 과거의 재야 단체와은 달리 폭넓은 광장이 되었다. 김근태는 ‘국민회의’ 출범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92년 대선 후 상황정리가 우선 필요했다.
첫째, 92년 국민회의는 대선패배로 무너졌고, 전국연합이나 기층민중운동 진영에서도 변화된 상황에 대한 논의가 합의되지 않았다. 둘째, 평가결과 폭넓게 꾸리는 민주대연합이 필요하다고 결론내리고 민중중심의 공감대를 가졌지만 구체적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셋째, 김영삼 정권이 민중의 기본권문제, 남북관계에서 아무런 진전을 보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인 변화가 없었다고 정리했다.
(주석 17)


주석
16> <월간 말>, <김근태와 국민회의 사람들>, 86쪽, 1994년 6월호
17> 앞의 책, 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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