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1장] 집권대체세력 ‘국민회의’ 결성

2012/09/12 08:00 김삼웅

 

 

김근태는 1992년 10월 재야 인사들과 ‘민주대개혁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회의’ (국민회의)를 결성하고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이다. 보수대연합 함대인 민자당은 5~6공의 모든 자원, 심지어 박정희의 유산까지 합동하여 정권재창출에 혈안이 되었다.

반면에 초라해진 민주당은 다시 김대중을 내세워 혈투를 전개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보수 언론ㆍ검찰ㆍ관료ㆍ재벌이 총동원되고, 부산복집기관장회의 관권개입, 뒷날 드러났지만 재벌에서 3천억 원을 김영삼에게 지원하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금권선거를 치렀다.

김근태는 1992년 9월 17일, <정세연구>지의 초청을 받고 <90년대 민족민주운동의 방향>이란 주제의 대담을 가졌다. 대선 정국에서 이번에도 야권은 분열되고, 과거 학생운동 재야의 지도자급 인사중에는 민자당 후보 진영에 참여한 이도 적지 않았다.

이 대담에서 김근태는 재야 단체의 문제점으로 두 가지를 들었다. 급진적 관념론과 세력관계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어서 몇 가지 문제를 더 제기하였다.

우리가 유리할 때 준비하지 않으면 그것은 불리한 시기로 반전되는 상황속에서 굉장히 많은 희생을 내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전쟁에서 공격할 때는 사상자가 별로 발생하지 않지만 후퇴할 때는 사상자가 많이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공격할 때는 사기가 충천하고 대오를 갖추어서 공격하는 데 반해, 후퇴할 때는 오합지졸 상태로부터 시급히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대오를 제대로 갖춰내지 못한다면 사상자가 굉장히 많이 발생할 것이고, 후퇴하는 대오 속에서 지배세력의 공격 앞에서 동요하는 상황과 우리 내부에서 반복해서 위기를 주장하는 것에 대해 단호히 대처해야 합니다.
(주석 7)

어느 나라나 보수세력은 대단히 계략적인데 비해 진보세력은 단순한 편이다.
한국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4월 혁명, 10.26사태, 6월 항쟁 그리고 김대중ㆍ노무현 집권기가 그렇다. 유리한 국면에서 대비하지 않았다가 5.16쿠데타와 5.17변란, 6.29와 3당 야합 그리고 이명박의 민간파쇼를 불러왔다. 김근태는 이것을 우려한 것이다.

김근태는 대선 정국에서 민족민주운동 진영의 단결을 위해 순회 강연 등 여러 가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9월 10일 <월간 말>은 김근태와 장기표를 초청하여 긴급좌담을 열었다. 사회는 서강대교수 손학규가 맡았다. 다음은 “92년 대선에 어떻게 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자의 질문에 김근태의 답변이다.

92년 대선에서는 87년도 이루지 못한 단계적인 민주주의, 절차적인 민주주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남겨진 과제를 완수해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권력의 교체가 이루어진다면 우리 사회의 문제해결에 상대적으로 매우 원만한 분위기가 조성될 것이고, 그런 조건 속에서 우리 민주화운동전선, 민주대연합이라는 구도 하에서 단결을 유지했던 부분이 향후에 일정한 분화의 과정을 거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대담에서 김근태의 오랜 동지 장기표는 김근태의 역할을 당부했다.

나는 김근태 위원장이 오랫동안 징역 살다가 나온 이 기회야말로 우리 민민운동의 정치적 권위를 회복, 강화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나 자신은 민중당을 했던 사람으로 분열에 중요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더라도 이를 계속 고집하면 분열을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양보하는 것이야말로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김 위원장의 출소를 전후해 어떻게 함께 해 나가는 것이 좋겠는가 의견을 나눠본 바 있는데 대체로 다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 손잡고 같이 나가려고 단단히 마음먹고 있습니다. (주석 8)

김근태는 1992년 11월 중순 미국을 방문하였다. 그동안 워싱턴에 있는 케네디 재단으로부터 여러 차례 방문을 요청받았지만, 짬을 내기 어려워서 미뤄왔던 터였다.

대통령선거를 불과 한 달여 앞두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때여서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구속의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서 제발 갔다오라는 권유에 못 이겨 워싱턴으로 향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며칠인가 워싱턴에서 사람을 만나고 있었는데, 돌아오면 또 공항에서 체포한다는 소식이 서울에 유포되고 있고 신문에도 그런 기미가 보도된다는 말을 국민회의 간부들이 전화로 알려왔다. 미국 국무부의 지원으로 근 보름 만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덕에 구속은 면했지만 시간은 거의 열흘 정도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주석 9)

주석
7> 앞의 책, 131쪽.
8> <월간 말>, 1992년 10월호.
9> 김근태, <아직도 벗지못한 공안의 굴레>, <산민항승헌선생화갑기념논총>, 653쪽.

 


01.jpg
1.45MB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