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2장] 제15대 국회의원 당선, 원내 진출

2012/09/18 08:08 김삼웅

 

 

김근태가 국민회의에 참여할 당시 야권은 크게 분열돼 있었다. 김대중이 신당을 창당하면서 신당에 참여하지 않는 통합민주당으로 나누어졌다. 민주당은 개혁신당과 통합하여 ‘통합민주당’(민주당)으로 발돋움하면서 이기택 대표를 제치고 김원기ㆍ장을병을 공동대표로 선출하였다.

1995년 12월 6일, 김영삼의 민자당이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꾸어 여전히 여당이 되고, 김대중이 국민회의를 창당, 제1야당으로 부상하면서 민주당은 제2야당으로 전락하였다. 또 이 해 벽두 김종필이 의원내각제를 기치로 내걸고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 6ㆍ27 지방자치선거에서 크게 약진, 충청권을 기반으로 한 보수정당으로 자리매김했다. 언론에서 ‘신3김시대’라고 부를만큼 세 김씨가 호각세를 이루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정통야당 세력이 국민회의와 민주당으로 분열하기에 이르렀다. 김근태는 무엇보다 야권통합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김근태는 사분오열, 지리멸렬 상태에서 노선투쟁에 빠진 민주당보다 국민회의를 택해 정치를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김대중을 통한 민주세력의 집권이 가장 가능성이 있는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야권의 통합이 급선무였다.

민주대연합이 이뤄지면 개혁과 민주주의가 힘을 얻고 한반도 상황도 크게 개선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난관 때문에 이것이 당장은 힘들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야권통합을 주장한 것입니다. 강력한 야당은 김영삼 대통령의 수구화를 저지하고 그를 견인해 민주대연합을 끌어낼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대교체는 과거 양 김씨가 민주화투쟁에 기여한 바를 냉소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대중을 동반하면서 신중하게 추진해야지, 형식에 매달리면 세대교체만 한다고 지역정치 구도나 낡은 정치행태가 타파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석 4)

‘정치는 생물’이란 말이 있듯이 한국의 정치판은 변화와 변동의 파고가 심한 편이다.
6월항쟁 이후 민주주의의 제도화가 어느 정도 정착되어가는 듯 했지만 정당은 여전히 특정 인물중심으로 개편되거나 운영되었다. 국민회의도 다르지 않았다. 김대중 총재의 리더십에 크게 의존하였다.

김영삼 정부는 김대중의 정계복귀와 신당창당에 즉각 검찰권을 발동하여 탄압했다.
국민회의 소속 박은태ㆍ최락도 의원과 최선길 노원구청장, 이창승 전주시장이 이런저런 이유로 구속되고, 종로구청장과 은평구청장 등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었다. 신당에 국회의원과 자치단체장들의 참여를 막으려는 일종의 정치적 보복행위였다.

이즈음 민주당 박계동 의원의 폭로로 시작된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정계의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이어서 5ㆍ18특별법 제정과 특검제 도입을 둘러싸고 정국은 또 한 차례 격랑에 빠져들었다.

국민회의는 정치적 격랑 속에서도 정기국회가 끝난 연말에 지역구 조직책 선정작업에 들어가 김근태는 20년 이상 살아온 서울 도봉구에 신청, 조직책으로 선정되었다. 이제 야당의 지구당위원장이 된 것이다.

김근태는 원외 지구당위원장과 제1야당의 부총재로서 정당(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한국의 정당구조상 원외의 부총재는 발언권이나 영향력을 발휘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원칙을 지키면서 국민회의의 집권채비에 정력을 쏟았다. 이 시기의 김근태를 한 언론인은 ‘개방적 명분주의자’로 분류하였다.

95년 천정배ㆍ유선호ㆍ김영환ㆍ박용석 씨 등 쟁쟁한 인사들을 이끌고 마지막 재야인사로 제도권에 진입할 때도 민주당 지분 10%를 인정받고 들어가는 등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당시 김대중 총재와 대등한 협상당사자 자격이었다.

정치권에 들어온 이후 자기지분을 고집하지 않고 ‘정치를 배우는 자세’를 취했던 것은 김근태의 독특한 스타일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아마추어 출신의 정치력의 한계 탓으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근본을 중시하고 논리적 일관성을 추구하며 동시에 현실정치의 힘의 관계를 인정하는 실사구시형 성격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말과 명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현실세계의 큰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점에서 그는 ‘개방적 명분주의자’로 분류될 수 있겠다.
(주석 5)


주석
4> 앞의 책, 115쪽.
5> <국민회의 부총재 김근태>, <월간중앙WIN>, 1999년 1월호,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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