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2장] 제15대 국회의원 당선, 원내 진출 2

012/09/21 08:00 김삼웅

 

 

김근태의 심성이나 행동방식은 국회의원이 되고서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겸손하고 나서길 즐겨하지 않았다. 직업 정치인으로서는 적격이지 못한 체질이다. 강준만 교수(전북대)의 평가다.

“김 부총재가 너무 솔직한 면이 있다는 것 하나만큼은 지적해야겠다. 아니 그건 둔감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오로지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화를 냈겠지만, 나라 생각 이전에 중요한 게 개인의 밥그릇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주석 13)

김근태는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제1야당 부총재 직함의 3선급 초선의원으로서 항상 ‘영혼을 지키면서’ 정치를 하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은 것이 한국의 정치판이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강성발언이 항상 언론과 여론의 주목을 끄는데 비해 김근태는 온건하고 합리적인 발언을 하여 매스컴에서 묻히기 마련이었다. 말뿐만 아니라 행동에서도 민첩하지 못하고 사색형이어서 여의도 정가에서는 ‘햄릿’이라는 평이 나돌았다.

요즘 김근태 부총재에게는 별명이 하나 더 생겼다. ‘햄릿’이 그것이다. 늘 고뇌하고 망설이는 듯한 태도가 그런 이미지로 비춰졌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짧은 정치인 생활 동안 그는 선택이 쉽지 않은 일들을 연속적으로 겪어야 했다. 민주당에 입당하고 얼마 되지 않아 김대중 총재가 정계에 복귀했고, 국민회의가 창당되면서 민주당이 쪼개졌다. 그는 김 총재의 복귀와 신당 창당을 반대하였지만 결국 국민회의에 합류하였다.

4ㆍ11 총선 이후에는 신한국당의 야권에 대한 차별적인 검찰 수사와 여소야대 뒤집기 정국이 전개되었다. 국민회의는 자민련과 공조체제를 이루면서 대여투쟁에 나섰고, 두 당의 연대는 대선 후보 단일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발전하였다.

그는 과거 민주세력을 탄압하던 보수세력과 연합하는 문제를 놓고 고심하다가 결국 전술적으로 불가피한 일로 받아들였다. 신한국당의 법안 날치기를 규탄하는 노동자들과 민주세력의 투쟁이 가속화되는 정국도 그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국민회의는 뭐하는 당이냐, 김근태는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냐 하는 따가운 비판이 쏟아진다. 이래저래 그는 괴롭다.
(주석 14)

김근태는 그러나 ‘영혼을 지키면서’ 정치를 하고자 하는 초심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애초 권력을 탐하여 정계에 입문한 것이 아니었기에 천박한 언술이나 대중영합의 포풀리즘에 기대하는 것을 금기시하였다.

정치권은 비판의 소지를 많이 안고 있다. 하지만 국민들이 야유와 냉소를 고집한다면 정치권은 아예 붕괴돼 버릴 것이다. 정치권이 점차 발전되고 나아지고 있다는 점은 평가해 주는 일도 중요하다. 희망을 갖고 격려와 기대를 아끼지 않았으면 한다. 개인적으로는 고뇌와 주저의 심경이었다. 좌절감도 깊었다. 반대로 투지도 생겼다. 정치세계는 나에게 ‘깊은 고뇌’와 ‘냉철한 교활함’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은 ‘진실한 결단’일 것이다. 최선을 다해 노력할 작정이었다. 그러면 이에 응답하는 시대적 분위기가 올 것이라 믿는다. (주석 15)

김근태는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과 남북통일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평적 정권교체가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위해 제도권에 진출하여 국회의원이 되었다. 맑은 이성으로 판단하고 적응하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정치판은 이성보다는 감성이 판치는 곳이다. 여간 쉽지가 않았다.

현실 제도정치는 여전히 낯선 동네이다. 대단한 관심과 추적이 오랫동안 있어왔고 군사독재에 대항해 함께 어깨를 걸고 수십년 지내왔기 때문에 퍽 많이 안다고 내심 자부해왔는데도 그렇다. 우선 대표적인 지도급 인사들 말고는 안면이 있는 사람이 가뭄에 콩 나듯 드문드문 해서 그렇겠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말하는 어법과 문법도 다르고 역사성도 분명히 다른 바가 있다. 늘 신문이나 방송에 어떻게 비쳐질 것인가를 의식해야만 하는 것도 또 다른 긴장과 마음의 준비를 필요로 한다. (주석 16)

 



초선의원 김근태가 낯선 국회에서 ‘준비운동’을 하고 있을 즈음, 그가 예측한대로 총선 뒤의 정국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김영삼 정부는 날이 갈수록 실정과 부패가 거듭되면서 검찰과 정보기관에 정권의 안위를 의탁하는 형국이 되었다.

정부여당은 4ㆍ11 총선에서 과반수의석 확보에 실패하면서 야당 및 무소속 영입작전을 계속했다. 야권은 “정보기관이 나서 사법처리 등을 빌미로 공간과 협박으로 야당ㆍ무소속 의원들을 입당시키고 있다.”고 비난할만큼 정부 여당은 노골적으로 야당의 파괴활동에 나섰다. 이로써 자민련은 정당 존립 자체가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실제로 민주당, 자민련, 무소속의원 10여 명이 신한국당에 입당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김종필 자민련 총재는 회담을 거듭하면서 정부 여당의 ‘의원 빼가기’에 공동전선을 폈다. 김영삼 정부의 독주는 계속되었다. 1996년 12월 26일 새벽에 여당 단독으로 본회의를 소집해 안기부법과 노동관계법 등 11개 안건을 날치기로 처리하는 등 군사정권의 행태를 방불케 하였다.

한때 김근태가 몸담았던 통합민주당은 4ㆍ11총선에서 참패, 원내교섭단체조차 구성하지 못했으며, 그나마 정부 여당의 ‘당선자 빼내기 공작’으로 당선자 15명 중 5명이 이탈하였다. 김원기ㆍ장을병 등 비주류가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발족시키고, 총선 후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당선된 이기택 측은 이를 ‘해당행위’로 규정하여 민주당은 사실상 분당 상태가 되었다. 지리멸렬이었다. 정국은 1997년 겨울의 대선을 앞두고, 분열과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야권통합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도대체 야당에 들어간 김근태는 뭐 하고 있는 거냐”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이나 재야운동을 하던 동료들의 질책하는 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야당출입 기자들도 왜 본격적으로 발언을 하지 않는가 하고 걱정과 우정의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 아직 낯설기도 하고 정치적 이해관계의 착종이 순차적으로 파악이 되지 않아 형광등처럼 껌벅껌벅 하기도 한다.… 지금은 참고 기다리고 있다.

기회를 노리는 그런 방향이 아니라 보다 많은 책임 있는 사람들과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통로와 다리를 어떻게 놓아갈 것인가를 준비하고 타진하고 결단할 그 시기를 기다리고 준비하려 하고 있는 중이다.
(주석 17)

김근태는 대선을 앞두고 야권과 재야가 통합하는 ‘민주대통합’의 큰 그림을 구상하고 있었다.


주석
13> 강준만, <국민회의 부총재 김근태의 딜레마>, <인물과 사상>(계간) 제10호, 70쪽.
14> <월간 말>, 1997년 2월호, 김경환 기자.
15> <일요서울>, 1999년 1월 24일, 엄상현 기자.
16> 김근태, <희망의 근거>, 420~421쪽.
17> 앞의 책, 4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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