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4장] 정계의 차세대 지도자로 성장하다 2

012/10/08 08:00 김삼웅

 

 

 

김근태가 1991년 10월 중순에 가진 한 언론인터뷰가 보도되면서 정계와 시민사회에 뜨거운 파문을 일으켰다. 특히 민주화운동 유가족들에게 충격을 주고 비판의 소리도 높았다.

“이근안 전경감은 고문의 가해자이면서, 결과적으로는 어두웠던 군사독재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지난 고문사건의 진상을 고백하고 국민에게 용서를 구한 다음 나에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면, 그 손을 맞잡을 용의가 있다”고 발언한 것이다.

용서는 가치 있는 덕목임에 틀림없다.
“남의 허물을 덮어 주면 영광이 돌아온다.”(구약성서 잠언 19:1), “남을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신약성서 누가복음 6:37). 공자는 세상에 한 글자만 남긴다면 ‘용서할 서(恕)’자 라고 하였다.

어느 날 베드로가 예수께 물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태복음 18:22) 김근태는 자신의 육신을 끔찍하게 고문하고 영혼을 파괴한 이근안이 고문사건의 “진상을 고백하고 국민에게 용서를 구한 다음 화해의 악수를 청한다면” 이란 전제로 용서의 뜻을 밝혔다. 30자가 넘은 전제를 2자로 압축하면 ‘용서’가 된다. 언론은 거두절미 ‘용서’의 단어를 주제어로 삼았다.

고문의 피해자들, 폭력정권의 피해자와 그 희생자들은 김근태가 이근안을 ‘고문의 가해자이면서 군사독재의 피해자’ 라는 내용에도 심한 비판을 쏟아냈다. 김근태에게는 삼키기도 뱉기도 어려운 대목이었다.

이제 정치인이 되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두루뭉실하게 얘기하고 넘어가려고 하는 것이냐, 과거 정보기관의 윗선에 있었던 사람들이 대체로 처벌받지 않고 유야무야 지나갔기 때문에 그 하수인들만이 사법적 처벌을 받는 것은 공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반인간적인 고문을 직접 가한 사람을 ‘피해자’ 라고까지 말하며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유발케 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조롱이고, 역사를 희화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 이야기를, 잘 알려진 고문사건의 대표적인 경우인 내가 함으로써 다른 고문피해자들이나 가족들의 선택의 폭을 줄여버리지 않았는가 하는 등의 비판을 받았다. (주석 8)

 

 


김근태는 심성이 선하고 부드러운 편이어서 진심으로 이근안을 용서하고자 했다. 그 역시 군사독재의 피해자란 것도 진정성 있는 말이었다. 다만 그가 먼저 용서를 빌고 참회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근안과 군사독재자들은 끝내 사죄하지 않았고, 정보기관의 ‘윗선’에 있던 자들도 전혀 반성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그동안 고문의 피해자들은 대체로 용서를 하고자 하는데, 도리어 가해자들이 ‘시대상황’에 핑계를 대며 자신들의 악한 행위를 숨기려 들었다. 김대중은 1997년 대통령에 당선되어 수감 중인 전두환ㆍ노태우를 풀어주었다. 선거과정에 대구에서는 박정희기념관 건립을 약속하고 국가예산을 지원하였다. 자신을 죽이려 한 가해자들을 용서한 것이다. 그런데도 전ㆍ노와 그 추종 세력은 사죄하지 않았고, 박정희기념관은 5ㆍ16쿠데타와 유신변란 따위를 미화하는, 박정희 우상화의 장으로 만들었다. 가해자들의 반성이 없는 ‘용서’의 뒤틀린 현상이라 하겠다.

뿐만이 아니다. 가해 세력에 대한 청산이 없으므로 하여 악의 뿌리와 가지가 번창하여 다시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선량한 국민을 억압한다. 이명박 정부에서 용산참사와 민간인 사찰은 작은 사례에 불과하다. 그들은 민주체제를 역행하였다.

김근태의 고뇌에 찬 호소를 들어보자.

나는 간곡히 호소하고 싶다. 이분들의 깊은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십사하고 말이다. 이른바 남아공연방의 ‘만델라 모델’을 말하는 사람이 많다. 이제는 모두 화합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말한다. 나도 이에 동의한다. 그런데 만델라 모델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반인간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스스로 자백하는 경우에는 기소를 면제해주는 것이다. 스스로 결단을 하고, 진실을 밝히는 노력을 할 때에만 화해와 화합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주석 9)


주석
8> 김근태, <내가 그에게 악수를 청한 까닭>, <희망은 힘이 세다>, 32~33쪽.
9> 앞의 책,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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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4장] 정계의 차세대 지도자로 성장하다

2012/10/07 08:00 김삼웅

 

 

 

김근태(전민련 정책실장)와 노무현(민주당 국회의원)은 1989년 2월 23일 한 여성지의 주선으로 한강변 포장마차에서 새벽 3시까지 소주잔을 나누며 대담하였다. 잡지사는 “재야 출신 국회의원과 재야운동가의 뜨거운 논쟁 6시간 생중계”란 제목으로, 흥미진진한 내용을 실었다.

“애초 두 사람이 만난 장소는 여의도의 맨하탄 호텔 1층 그릴. 그러나 두어마디 수인사가 오갈 때부터 마음이 통한 그들은 왠지 호텔 그릴 같은 데서 맥주를 들이키는 게 영 거북해서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주종(酒種)을 바꾸기로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가까운 고수부지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주석 6)

대담 중 두 사람은 김근태 고문, 노무현의 청문회 스타, ‘소파동’과 농민자살 문제, 노태우 정권의 폭력성 등을 폭넓게 나누었다. ‘재밌는’ 부문을 골랐다.

노무현 : 느낌은 아주 오래 전부터 만나 몸에 익은 구면인 것 같은데, 이런 자리에서 뵙게 되어 참 반갑습니다. 늘 마음은 있었으면서도 기회가 오겠지 하며 기다렸지요.

김근태 : 저도 처음엔 노 의원에 대해 아는 게 없었습니다. 총선이 끝나고 이런 저런 매스컴에 나오는 보도를 보고 괜찮은 사람이 있구나 하는 정도였지요. 그후 변호사란 비교적 보장된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도 시위대열에 끼어 구타당하고 끌려 다니기도 했다는 얘길 듣고 내가 생각했던 것과 틀리지 않는 사람이구나 했어요. 언젠가 만나지리라 했는데 그게 좀 늦어진 셈이지요.

노무현 : 전 김 선생님을 훨씬 오래 전부터 알았습니다. 83년부터 제가 운동권 조직을 변호사란 간판으로 뒤를 봐주고 있었을 때만해도 무슨 양심가인양 우쭐하기도 했었지요. 그러다 김 선생님의 그 처절한 고문 진술을 들었을 때, 운동권에 뒷돈 좀 댄다고 으쓱했던 나 자신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었습니다. 출옥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꼭 한 번 뵈어야겠다고 벌려 온 것이 그만….

노무현 : 고문 후유증으로 당분간 활동을 못 하시지 않나 했었는데 의외로 자리에 한번 눕지도 않고 일하시는 걸 보고 감탄했습니다. 근데 거, 무슨 돈도 좀 생기셨다지요? 그것마저 몽땅 다른 데 바치셨다면서요?

김근태 : (웃음) 작년에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받을 때 생긴 상금 말씀하시는 모양인데 (그는 그 돈 3만 달러를 민청련 부설 민족민주운동연구소 설립 기금으로 내놓았다) 무슨 상 받았다는 부담에서 좀 해방되고 싶었을 뿐입니다.

김근태 : 이런 말은 제가 직접 하긴 좀 쑥스런 질문이긴 하지만, 아까 기자가 꼭 좀 물어달라는 내용입니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을 민가협에서 현상금을 걸고 수배하지 않았습니까? 이 문제에 대해 야당에선 변변한 관심을 보여온 것 같지 않은데요.

노무현 : 민가협에서 수배를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참 좋은 아이디어구나 싶었어요. 한편으론 국회에서 이근안 문제를 심각하게 제시해오지 않았다는 부끄러움도 있었지만, 그래서 그 현상금을 제가 내볼까 생각하고 있던 참입니다. 민가협 쪽에서 반가와하실진 모르지만.

김근태 : 노 의원께선 세비갖고 여기저기 쪼개쓰기도 바쁘다고 하시던데…

노무현 : 변호사할 때 벌어둔 돈이 아직 조금 남아 있습니다. 정 안되면 우리 집사람에게 결혼 직전 했던 약속을 포기할 수도 있고요. 무슨 약속이냐면 고시 합격했으니 변호사 여편네로 더운물 찬물 나오는 팬션에서 살게 해 주겠다는 거였어요. 이건 제가 정말 선생님께 부러운 점인데, 부인과 안팎이 다 그렇게 민중운동에 전념하실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바람직한 모습입니까.

여의도 고수부지 포장마차엔 늦은 손님마저 모두 다 뜨고 없었다.

현재 시간 새벽 두시 삼십분.
벌써 일곱 병의 소주병이 쓰러지고 안주는 거의 동이 났다. ‘이 잔만 들고 이젠 일어서시죠’ 하는 비서관들을 제치고 두 사람은 또 다시 “아줌마, 여기 한 병 더”를 외쳤다. (주석 7)


주석
6> <주부생활>, 1989년 3월호.
7>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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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면이 THE END 로 끝나는 4분짜리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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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4장] 정계의 차세대 지도자로 성장하다

2012/10/05 08:00 김삼웅

 

 

 

6월 항쟁이 군사독재 세력의 청산에는 실패했으나 대통령의 5년 단임제 헌법을 마련하는 등 민주화의 제도적 장치에는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 이후 누구도 이승만이나 박정희처럼 헌정을 짓밟으면서 장기집권을 획책하지는 못하였다.

국민의 관심사이기도 하지만 특히 언론은 대선이 끝나기가 무섭게 ‘차기’를 거론하는 조급성을 보인다.
대선을 2년 쯤 앞두고 이에 대한 여론조사 등이 실시되고 ‘예상후보’가 나타난다. 김근태는 국내외의 언론에서 주목받는 정치인이 되었다.

1998년 월간 <신동아> 8월호는 여론조사에서 정치부 기자 100명이 뽑은 ‘차세대 정치인 1위’로 김근태가 선정된 사실을 보도했다. 이회창ㆍ이인제 등 쟁쟁한 후보군을 제치고 ‘1위’에 뽑혔다. 기자들에게 술밥 사주고 명절 때에 촌지 주어서 나타난 결과가 아니었다.

같은 해 11월 3일, 유엔인권이사회는 한국 정부에 김근태를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 수감한 사건의 구제를 권고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그는 국제사회가 주목하는 인물이 되고 있었다.

1999년 1월호 <뉴스위크(일본편)>는 “21세기를 움직일 세계의 100인”에 김근태를 선정하였다. 각계의 유망한 인물들을 제치고 그를 선정한 <뉴스위크>의 안목은 대단했다.

같은 해 4월 아시아ㆍ태평양 지도자회의(FDL-AP)의 이사에 위촉되고, 5월에는 국민회의의 당 쇄신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당 쇄신위원장은 능력과 도덕성에서 ‘쇄신’된 인물이어야 했다. 같은 달 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 겸임교수로 위촉되어 사망 때까지 유지되었다. 한양대 뿐만 아니라 경향 각 대학에서 특강의 요청을 받고 정치현안과 자신의 역사관을 강의했다. 6월에는 군부쿠데타로 실종되었던 인도네시아가 44년 만에 총선거를 실시하면서, 국제적으로 저명인사들을 ‘국제선거감시단’으로 위촉하였다. 카터 전미국대통령 등이 함께 참여 했다.

김근태는 2000년 7월 13일 (사)한국여성유권자연맹으로부터 ‘남녀평등 정치인상’을 받았다.
오래 전부터 시민사회운동 과정에서 그리고 의정활동에서 성실하게 노력해온 것이 평가되었다. 그의 도봉구 비좁은 집에는 부인과 함께 나란히 문패가 걸렸다. 2001년 4월에 ‘한반도 평화와 경제발전 전략 연구재단’(한반도재단)을 창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국회외무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더욱 익히게 된 문제들을 중심으로, 당내외 인사, 사계의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설립한 것이다. 그는 오래 전부터 한반도의 평화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가져왔던 터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으로 그동안 국제적으로 유일하게 남은 냉전지대 한반도가 어느 정도 해빙되어가고 있던 시점이다.

김근태는 한반도재단을 설립하면서 <희망의 한반도를 만드는 세 가지 키워드>를 천명하였다. ‘세 가지 키워드’로 평화ㆍ경제시스템ㆍ리더십을 제시한다. 다음은 주요 부문이다.

평화

지난 세기 내내 이룰 수 없는 꿈처럼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지만, 이제는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우리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유일한 방책이 되었다. 또한 평화가 동아시아의 경제협력 방안과 연결될 때, 그 힘은 가히 폭발적일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우리가 평화에 주목하는 것은 그것이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공존과 발전의 문제이기도 하다.

1970년 동서독 정상의 만남이 20세기 말 동구의 민주화와 개방으로 이어졌듯이 지난해 남북 정상의 만남은 21세기 한반도 평화의 시원(始原)이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한반도의 평화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평화협력 방안과 공동의 발전모델을 만드는 것이 지금 우리 모두에게 부여된 과제라는 생각이다.

경제 시스템

지금은 세계화를 적극 수용하고, 정보화 인프라를 기반으로 새로운 전략을 짜야 할 시점이다. 이제 우리가 핵심기술과 세계표준을 만들어야 한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지지 못한 제품은 살아남지 못할 만큼 세계화는 이미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한 우리의 유일한 길은 위기를 관리하면서 구조개혁을 지속하는 것 뿐이다.

또한 시장의 자율성을 확대해가면서, 정부 역할의 한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기업의 투명성을 강화하고 정책의 예측성을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경제의 일차적 과제인 것이다. 경제에서 실패하면 모든 것이 실패한다는 심정으로 공동의 전략과 목표를 세우고, 계획과 실행이 일치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할 때 우리는 다시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리더십

새로운 시대는 그 시대 정신에 부응하는 새로운 지도력을 필요로 한다. 도덕적 일관성, 민주적 포용력, 비전과 자질이 지도자의 덕목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물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바위처럼 굳세게 버티면서 국민과 함께, 국민을 이끌어가는 리더십이 바로 국민 ‘속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권위주의적 리더십의 시대를 극복하고 민주적 리더십이 우리 사회에 정착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경제시스템의 변화에 걸맞는 ‘정치구조와 인식의 대전환’을 모색하면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을 강구하고자 한다. ‘더 많은 민주주의, 미래에 대한 책임’에 복무하는 리더십의 형성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한 사회의 리더십은 그 사회의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선택된 지도자의 역량이, 그 사회를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인지 아니면 뒤로 물러서게 할 것인지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을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주석 1)


주석
1> 김근태, <한반도재단을 창립하며>, <희망은 힘이 세다>, 101~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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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3장] 성실한 의정활동, 대안과 정책제시

2012/10/04 08:00 김삼웅

 

 

'사랑의 집' 건설현장을 찾은 김근태 최고위원

 

2000년 4월 13일 제16대 총선이 실시되었다. 김근태는 선거구인 서울 도봉갑구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손쉽게 당선되었다. 유효표의 50.9%인 34.233표를 얻어 한나라당 후보를 크게 따돌렸다. 15대 (38.9%)보다 2% 포인트를 더 득표, 유권자들이 지난 4년 동안 의정활동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었다.

민주당은 여당이면서도 다수당이 되지 못했다. 총의석 273석 중 한나라당 133, 민주당 115, 자유민주연합 17, 민주국민당 2석이었다.

김대중 정부와 공동정부를 구성한 김종필의 자민련이 내각제 개헌을 둘러싸고 분열하여 ‘2여 1야’의 후보난립이 주요 패인이 되었다. 민주국민당과 민주노동당(1.2%)은 정당 존립이 무너졌다.

민주당은 의석수에서는 약진했으나 다수당은 한나라당에 넘겨줘야 했다. 민주당 소속의원 4명이 자민련에 입당하는 ‘의원 꿔주기’ 형태로, 자민련이 간신히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면서 DJP연대는 다시 복원되었으나 여전히 불안한 공동정부였다.

김근태는 15대와 16대 국회에서 두 차례 ‘백봉 신사상’을 받았다.
이 상의 첫 수상자가 된 것은 1999년 11월이었다. 독립운동가 출신 백봉 라용균 전의원을 기려 제정된 상이다. 육탄과 욕설로 뒤범벅이 된 국회를 ‘신사적’으로 운영하라는 취지에서 제정돼 ‘신사적인’ 의원에게 주어진다.

김근태는 1,2회 백봉 신사상을 받고, “연속 두 번의 ‘백봉 신사상’ 수상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솔직히 조금 과분한 영광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훌륭한 인격을 갖춘 다른 의원들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번 제2회 백봉 신사상 수상은 신사와 대중정치인이라는 문제를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주석 8)고 소회를 밝혔다.

여기에는 한국정치의 실상, 그리고 국회의 운영이 ‘신사’가 서식하기가 어렵다는 문제의식이 깔렸다.

끊임없는 줄세우기와 편가르기, 계보만들기와 수에 의한 힘겨루기….
그래서 정책을 위한 대화와 타협이 아니라 지역 패권에 의지한 보스의 힘에 의한 독선과 오만이 리더십으로 인식되는 것이 오늘날의 한국적 정치현실이라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현실에서 신사와 정치인은 양립할 수 없다. 오랜 벗 하나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백봉 신사상 계속 받으면 대중정치인으로는 낙제라는 얘기야!”

나는 이 말을 웃으며 받아넘겼지만, 옆구리에 뭔가가 걸리는 듯한 느낌이 없지는 않았다.
(주석 9)

 


술잔을 나누는 한나라당 김덕룡 의원과 민주당 김근태 최고의원

 

김근태에게 ‘대중정치인과 신사’는 양립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대중정치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언론과 대중의 눈길을 끄는 발언과 적절한 쇼맨십을 발휘해야 하는데, 이건 딱 질색이다. 점잖게, 신사적으로 하면 언론에 뜨지 않고, 대중의 관심을 받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신사적’ 또는 ‘영혼을 지키면서’의 심성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김근태의 딜레마는 여기가 근원인 셈이다. 강준만 교수의 뼈아픈 지적이다.

김 부총재의 경우 그런 쇼맨십이랄까 쇼에 대한 감각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아마도 자신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서일 것이다. 김 부총재가 지나치게 신중하고 자기방어적이라는 평가도 자신의 ‘영혼을 지키려는’ 노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주석 10)

김근태가 재선에 성공하고 집권당의 지도부가 되면서 언론과 국민 중에 그를 지켜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당연히 ‘차기 대권주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고, 이런 저런 주문이 따랐다. 역시 딜레마는 친화력은 좋은데 ‘대중성’이 모자란다는 지적이 많았다. 정치인이 큰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대중성을 확보해야 하는데, 그는 천성적으로 신사적이어서 대중성과는 거리가 있었다. 다시 강준만의 지적이다.

나는 김 부총재의 경우 친화력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건 그의 겸손과 성실 덕분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걸 마냥 좋게만 보진 않는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보통 사용되는 ‘친화력’의 정체에 대해선 깊은 의구심을 갖고 있다. 나는 기자들에게 술은 커녕 밥 한끼 사지 않아 욕을 먹는 정치인들이 적잖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런 정치인은 아무리 능력이 탁월해도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기자들로부터 욕먹게 마련이고 또 그런 부정적인 평가는 언론에 그대로 반영돼 대중의 인식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모든 걸 원칙대로 하려는 정치인도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 마련이다. 반면 능력과 윤리에 있어서 상당한 문제가 있어도 술 잘 마시고 마당발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 정치인들도 적지 않다. 물론 이건 비단 정치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서 통용되는 문화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문화를 거스르면서 리더가 될 수는 없으니 이게 바로 딜레마라는 것이다.
(주석 11)

김근태는 ‘신사정치인’이 되었으나 ‘대중정치인’으로 성공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대중성과 친화력, 쇼맨십이 부족했다. 그래선지 백봉 신사상의 의미를 바꾸었으면 하고 바랐다. 김근태가 바라는 ‘정치인상’이기도 하다.

백봉 신사상이 단지 점잖고 교양 있고 예의바른 정치인에게 주는 상에 머물지 않고, 시대정신이 살아 있는 사람을 기념하는 상으로 더욱 발전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내가 속으로 암암리에 꿈꾸는 바람이다. (주석 12)


주석
8> 김근태, <정치인과 신사>, <국회보>, 2001년 1월호.
9> 앞과 같음.
10> 강준만, <국민회의 부총재 김근태의 딜레마>, <인물과 사상> 제10권, 87~88쪽, 1999.
11> 앞의 책, 89쪽.
12> 앞의 책, <국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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