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2장] 제15대 국회의원 당선, 원내 진출 2

012/09/19 08:00 김삼웅

 

 

김근태는 총선을 앞둔 1996년 3월,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제15대 총선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절차적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위해서는 국민회의가 원내 제1당이 돼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두말 할 필요 없이 이번 총선은 김영삼 정부에 대한 중간평가의 장입니다. 우리 국민은 이번엔 반드시 수평적 정권교체를 위한 발판을 마련해야 합니다. 우리의 정당은 정치노선에 따라 분류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여야가 정치적 노선이나 역사적 뿌리에 있어서 별로 다르지 않다는 지적에 동의합니다. 그럼에도 야당에 의한 정권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되면 절차적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독일과 프랑스도 브란트와 미테랑이 집권하면서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주석 6)

김근태는 총선 이후의 정국을 진단한다. 대단히 예리한 분석이라는 평이 따랐다.

대략 세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먼저 신한국당이 과반수에 훨씬 못 미치는 제1당이 되었을 경우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마 민주당과 자민련, 무소속을 끌어들여 여소야대를 뒤집으려 할 겁니다. 두 번째는 국민회의가 제1당이 되는 경우지요. 그러면 신한국당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민주당, 자민련과 손을 잡고 3당 합당을 시도할 겁니다. 세 번째는 어떤 당이 제1당이 되든 상관없이 신한국당과 국민회의가 대연정을 이루는 경우입니다. 실현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지만 그래도 이 길을 선택하는 것이 개혁을 위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주석 7)

김근태는 진정으로 재야와 제도권 야당의 결합을 바라왔다. 그것만이 공룡화된 군사정권 후예들의 수구세력을 견제하고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19세기 말 개화파와 동학농민혁명 세력이 결속하지 못한 점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총선 후에 격렬한 징계개편이 올 겁니다. 그리고 수평적 정권교체를 실현하면 다시 한번 기회가 올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도 독자정당을 주장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먼저 주관적인 열정과 초조함이 그 내면에 있어요. 그런 한편 개인적인 입지를 생각하고 있는 거에요. 그게 명분으로 포장되어 있는데 참으로 걱정스러운 상황입니다. 모두 다 눈앞의 현실만 염두에 두고 있지 중장기적인 계획이 없어요. 난 사실 이 기획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요. 과연 진보진영의 집권전략이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어요?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거야. 이건 일종의 거짓이야. 진정한 집권전략을 또다시 교란시키는 것이고... (주석 8)

그는 아직도 재야 일각에서 독자정당 준비를 하고 있음을 준열하게 비판한다.

지난 시기 자기의 생활을 헌신하고 바쳤던 젊은이들에게 간곡히 충고하고 싶습니다. 깊은 고뇌를 하는 것은 좋지만 상식적인 기준으로 판단해야지요. 소위 진보진영이라면 70, 80년대에 군사독재와 몸으로 싸운 세력을 뜻하는 것 같은데 그들만으로 과연 집권이 가능하겠습니까? (주석 9)

김근태는 1996년 4월 11일 실시된 제15대 총선에 출마하여 서울 도봉갑구에서 당선되었다.
1995년에 사면복권이 되어서 공직 후보가 가능하게 되었다. 민자당의 양경자 의원을 누르고 원내진출에 성공했다. 정치인으로서는 늦은 49세의 초선이다. 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한 재산은 2억 8천 900만으로 최하위의 수준이다. 이때 종로구에서 당선된 이명박의 재산은 262억 6,200만원이었다.

김근태는 당선되었으나 국민회의는 이번 총선에서 의석을 크게 신장하지 못하였다.
선거결과 전국 253개 지역구 가운데 신한국당 121, 국민회의 66, 자민련 41, 민주당 9, 무소속 16석이었다. 전국구는 신한국당 18, 국민회의 13, 자민련 9, 민주당 6번까지 당선되었다.

국민회의는 전통적인 텃밭으로 알려진 수도권에서 1당을 신한국당에 내주는 수모를 당했다.
47개의 의석이 걸린 서울에서 겨우 18석을 차지, 27석을 얻은 신한국당에 패배했다. 종로 이종찬, 중구 정대철, 성동을 조세형, 관악갑 한광옥, 중랑을 김덕규, 동작을 박실, 영등포갑 장석화 등 국민회의 중진들이 줄줄이 낙선되었다.

야권분열과 한 해 전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국민회의가 서울지역을 거의 휩쓸다시피한 데 대한 유권자의 견제심리가 작용한 것으로 풀이되었다.


주석
6> <월간 말>, 1996년 3월호, 52쪽, <김근태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김경환 기자.
7> 앞의 책, 52~53쪽.
8> 앞의 책, 54쪽.
9> 앞의 책, 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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