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4장] 유신체제에 마지막 타격 날리다

2013/02/14 08:00 김삼웅

 

 

함석헌에게 박정희라는 통치자와 유신체제는 어떤 명분으로도 이해되지 않는 존재였다.
무고한 인명의 살상과 인권유린, 헌정질서 파괴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해서 끝없는 비판에 나서게 되고, 저항의 횃불을 내릴 수 없었다. 압제가 있는 곳에 저항이 따른다는 것은 그의 오랜 신념이었다.

유신체제에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변형된 선거제에 의해 두번째 치른 총선이었다. 국회의원 3분의 1은 대통령이 지명함으로써 국민의 뜻을 왜곡하는 선거제였다. 이같은 구도에서도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32.8%, 여당인 공화당이 31.7%를 얻어 야당이 1.1%를 더 득표했다. 하지만 국회의석은 야당이 3분의 1석에도 이르지 못했다. 박정희는 이에 앞서 7월 6일 이번에도 체육관 선거를 통해 99.9%의 득표로 5선 대통령이 되었다.

근대적 정당제도가 생기게 된 것은 반란단체를 만들지 못하게, 그리고 선거제도는 폭력혁명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유신체제는 정당과 선거제도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정상이 파괴되면 변칙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정한 이치다. 유신체제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데모와 각종 시위는 시민저항권사상의 발로이고 정당한 생존권투쟁이었다.

1978년 1월 19일 함석헌은 정구영ㆍ지학순ㆍ천관우ㆍ박형규ㆍ조화순 등 재야 지도자들과 <민주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을 통해 유신체제하의 모든 선거는 인정할 수 없다면서 양대 선거를 보이콧할 것을 호소했다. 이어서 2월 24일에는 윤보선 등 각계 인사 66명과 유신체제와 학원 및 언론 탄압을 비판하는 <3ㆍ1 민주선언>을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함석헌은 정보부에 연행되어 3월 1일까지 구금당하였다.

유신체제 붕괴의 서막인 YH사건이 터졌다.
5월 9일 YH무역 여성근로자들이 불법해고와 부당감원, 전직, 감봉, 인권유린 등에 항의하면서 농성을 시작했다. 함석헌은 거듭 양대선거의 부당성을 강조하면서 5월 18일 이희호 등 양심수 가족들과 투표용지 소각식을 갖고, 해직교수, 해직 언론인, 재야 인사들과 함께 유신철폐, 체육관선거 시정 등을 요구하는 <오늘의 우리 주장>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런 활동은 제도언론에서는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6월 2일에는 구속자 가족들과 금요기도회를 마치고 기독교회관 정문 앞에서 시위를 하다가 경찰과 대치했다.

함석헌은 6월 26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박형규 등 민주인사를 비롯하여 대학생 1,000여 명과 함께 유신체제 비판과 독재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유신체제 이후 서울 중심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인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날 시위대는 경찰의 폭력으로 해산되었다가 다시 모여 “유신철폐”, “박정희 퇴진” 등의 구호와 반체제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이 시위가 진행되는 동안 인근의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양심수들도 때를 맞춰 유신반대를 주장하며 옥중농성을 벌였다.

시위에 참가한 대학생 20여 명과 가톨릭 신부 5명이 구속되고, 함석헌도 정보기관에 연행되었다가 풀려났다. 7월 5일 함석헌ㆍ문익환 등 각계 인사 402명은 ‘민주주의국민연합’(국민연합)을 발족했다. 서명 인사들의 연금 사태로 창립총회는 유산되었으나, 민주인사 402명 및 12개 재야 단체가 공동 서명한 <민주국민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소식도 제도언론은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함석헌은 퇴약볕이나 혹한의 추위를 가리지 않고 반유신 시위에 참석했다. 그리고 경찰(전경)과 대치하는 맨 앞줄에 섰다. 학생들과 재야 단체에서 집회, 시위에 초청하면 거의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를 방관하는 지식인들과 외면하는 언론에 의분을 느꼈다.

함석헌에게 ‘의분(indignation)'이란 용어가 마음깊이 각인되는 계기가 있었다. 3ㆍ1운동 때 우리를 도왔던 스코필드 박사의 위급 소식을 듣고 병원에 위문 갔을 때, 그가 손을 꼭 잡으면서 “한국 사람들 의분을 몰라요!” 했다는 것이다. (주석 1) 이후 시대의 격랑 속에서 의분을 느끼며 끝이 보이지 않는 저항의 길을 시지프처럼 걸었다.

재판에 왔다갔다 하는 동안 나는 여러 외국신문, 잡지의 기자들을 만났는데 (국내의 기자는 정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나는 내게 조직의 능력과 상대의 앞을 내다볼만한 식견이 부족한 것을 솔직히 말했고, 그러면서도 나는 성공이거나 실패하거나 그 때문에 마음을 쓰는 일은 없고, 다만 이것이 내 할 의무이기 때문에 할 뿐이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옳은 이상, 몇 해가 되겠는지 몇십 몇백 년이 되겠는지 그것은 알 수 없어도, 마침내는 우리가 이기고야 말 것이라는 확신에는 까닭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낯빚을 고쳐서 알았노라 동의를 했습니다. (주석 2)

함석헌은 1977년 7월 8일 기독교수협의회의 초청으로 ‘고난을 받는 형제들을 위한 기도회’에서 <고난>을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이 무렵 여기저기에서 초청을 하여 여러 차례 강연을 했지만, 이날 강연장에는 수백 여 명의 청중이 모였다. 함석헌은 이 강연에서 예언자적인 말을 남겼다.

지금 시점이 어려운 때에요. 애기가 꿈틀거리며 나오려고 그래요. 애기는 신시대 아니에요? 그런데 산모는 그걸 몰라. 그냥 고통스러워 해. 그래.

 


1978년 5월 8일 함석헌 선생님의 부인 황득순님의 장례식에서 말씀하시는 송두용선생. 뒷편에 서 계신 문익환, 백청수, 김제태 (오른쪽부터)

1976년 5월 평생을 함께해 온 아내 황득순이 눈을 감았다. 1917년 동갑내기로 결혼하여 61년을 살아온 아내였다. 10여 년 전부터 앓아누운 아내의 수발을 하면서 제대로 남편 역할을 하지 못한 통한을 삼켰다. 한 때는 외도로 아내의 가슴을 아프게 한 적도 있었다.

황득순은 글을 몰랐다. 해서 남편의 글을 한 편도 읽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함석헌은 아내에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일본 유학생들이 조혼의 아내를 버리고 신여성을 택할 때도 그는 부모가 맺어준 아내를 사랑하며 끝까지 지켰다. 아내는 남편이 평생 변변한 직장을 갖지 못하고 월급봉투를 갖다주지 못했어도 불평하지 않고 어려운 가계를 꾸렸다. 함석헌이 생애를 두고 저항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데는 이같은 아내의 내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고은은 읊었다.

함석헌옹 부인

세상에 바람 같은
훨훨 날아가는 학 같은
서천에서 내려온
신선 같은

그런 함석헌 옹에게 부인이 있다니
봉건시대 여성 호칭으로 부인 황씨
세상에 얼굴 한 번 내보이지 않은 채
영감은
온 세상의 얼굴인데
온 세상의 정신인데
부인 황씨 오래 몸져 누워

영감과 달리 몸집도 항아리처럼 큰 데
세상의 그 누구에게도
그 부은 얼굴 내보이지 않은 채
평생 불화 그대로
어느 날 숨졌다
그때에야 부랴부랴 사람들은
장례식 준비하였고
날씨는 사나운 개처럼 사납게 추웠다.
(주석 3)



주석
1> <씨알의 소리>, 1977년 2월호, 3쪽.
2> 함석헌, <정신 바짝 차려>, <씨알의 소리>, 1997년 4, 5월호, 6쪽.
3> 고은, 앞의 책, 8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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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3장] 동서양 고전 넘나들며 통섭하다

2013/02/13 08:00 김삼웅

 

 

1983년 12월 한길사

함석헌이 쓴 <마하트마 간디>에 대해 부문적으로 살펴보자. 간디의 길은 곧 함석헌의 길임을 보게 된다.

나는 꽃들을 사랑하지만 누가 묻기를 어느 꽃이 가장 아름다우냐 하면 대답을 못하고 “글쎄….”하고 만다.
여러 가지 책을 감격을 가지고 가장 읽지만 좋은 책을 골라 추천하라면 “글쎄….” 하다 마는 일이 많다.
인물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요새 누가 만일 추천을 해달라고 청한다면, 그보다도 청이 오기 전에 내 편에서 권하고 싶은 것은, 간디의 자서전이다. 그것은 물론 내가 그 책을 지금 우리말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또 깊이 반성해 봐도 그런 것만이 아닌 것이 있다.
(주석 15)

인용문대로 함석헌은 이 무렵 <간디 자서전>을 번역하였다.
1927년과 1929년 마하데브 데자이가 1, 2권으로 번역한 영문판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간디는 1925년에 이 자서전을 썼다. <간디 자서전> 관련해서는 뒤로 미루고, 함석헌의 글을 다시 조명한다.

“어느 사람의 생애는 아니그럴까마는, 특히 간디의 일생은 마치 큰 나무의 자라나는 것을 보는 것 같다. 날 때에는, 모든 도토리가 꼭 끝이 뵈는 도토리 알이듯이, 간디도 각별히 천재적인 면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자람에 따라 점점 그것이 보통이 아닌 위대함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해서 간디는 자기를 개발한 사람이다. 이 의미에서 내가 한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한 그의 말은 그대로 옳은 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서전을 읽어가노라면 꼭 소금을 집어 먹는 것 같다. 언제든지 같은 맛이다. 같은 맛인데 싱거운 대목이 하나도 없다.”

“사람은 나기는 물질적인 존재로 나지만 나중에는 정신적인 존재에까지 올라가야만 한다는 것이 힌두교의 올짬이라면, 인도 민족이 간디에게 마하트마라는 칭호를 준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간디 자신은 물론 그것을 아주 싫어했다. 참의 사람인 그가 그런 우상숭배적인 떠들썩을 좋아할 리 없다. 그러나 역사를 굽어보는 견지에서 한다면 그것은 역시 인도 씨알의 자기 발견의 한 발걸음, 나아가는 한발 걸음이라해야 할 것이다.”

“마하트마란 마하 곧 크다는 말과 아트만, 곧 영혼 혹은 자아라는 말을 합해서 만든 말인데 인도 역사에는 여러 마하트마가 있다. 민중에 의해서 불리워진 이름이지 어떤 제도에서 나온 자위가 아니다. 동양 말로는 대성(大聖)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간디의 본명은 모한다스인데 마하트마에 이르렀으니 m에서 M으로 올라간 것이다. 힌두교에서 인생의 목적이 self(小我)에서 Self(大我)의 발견에까지 가야한다는 그대로다.”

“그러면 간디를 마하트마에까지 올라가게 한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을 그는 ‘힘’(진리-필자)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서전의 이름을 “나의 힘에 대한 실험”이라고 했다. 그 실험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자기 일생을 하나의 실험으로 보는 데 간디의 간디된 점이 있다.”

“하나 더 말한다면, 그를 몰아 총알에 쓰러지는 순간까지 지칠줄을 모르고 그저 올라만 가게한 것은 씨알에 대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소위 말하는 자신이니, 박애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간디는 자기와 씨알의 구별이 없다. 자기가 곧 씨알이 돼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하는 불가촉민제도를 철폐할 것을 주장했고, 완전히는 못되어도 제도상으로는 평등의 기초를 놓아 줄 수 있었다.”

“자서전을 읽어가며 놀랍고도 또 눈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저 페이지마다 사건마다 씨알, 씨알, 봉사, 봉사로 옷의 실밥처럼 무늬가 놓여있다는 점이다.”
(주석 16)

함석헌은 간디 자서전을 번역하여 <나의 진리 실험이야기 - 간디 자서전>을 1983년에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여기에는 기왕에 쓴 간디 관련 논설도 한데 묶였다.

여러 군데서 눈시울이 뜨거워 그냥 써 내려갈 수가 없어서 손수건을 찾곤 했다. 특히 말하고 싶은 것은 간디의 인격적 매력이라 할까. 영어로 한다면 참말 스위트한 점이 있다. 선배의 존경을 어쩌면 그렇게 하는지 자기의 위대함은 전면 잊고 그저 어린애처럼 선배를 위한다. 자기의 위대함을 잊으니 정말 위대하지 않겠는가? (주석 17)


주석
15> <씨알의 소리>, 1976년 10월호, 19쪽.
16> <씨알의 소리>, 1976년 10월호, 19~22쪽, 발췌.
17> <씨알의 소리>, 52쪽, 한길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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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3장] 동서양 고전 넘나들며 통섭하다 2

013/02/11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오산학교 시절 유영모에게 <노자>를 처음 배웠다. 그리고 험난한 시대를 살아오면서, 또 이질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기독교를 믿고 인도철학을 배우면서, 고난의 삶을 지탱하였다. 항일ㆍ반소ㆍ반독재 투쟁의 질곡에서도 정신적으로는 노ㆍ장의 세계에서 ‘소요유’를 함으로써 균형을 유지하게 되었다.

나도 2차대전이 끝나면서 우리는 동양고전 속에 지혜가 있지 않겠느냐, 자유하는 민중으로 가는데 무엇이 있지 않겠느냐 생각한데서 공맹이나 노장을 파기 시작한 거지요. 될 수 있는 대로 크게 생각하자는 거지요. (주석 10)

함석헌은 가파른 생애만큼이나 정신적ㆍ종교적ㆍ학문적으로도 가파랐다. 그의 시대가 전통사회 - 식민지 - 분단 - 전쟁 - 독재로 점철되면서 이에 대응하는 학문, 정신세계도 변화와 융합을 거듭하게 되었다.

한 연구가의 분석이다.

함석헌은 기독교인이면서 유가와 노장은 물론 불교에까지 넘나들면서 진리관에 있어서는 일종의 진리다원론적인 진리관을 펼친다. 기독교와 노장은 매우 이질적인 것에 속한다. 기독교가 유일절대신을 섬기는 종교라면 노장은 창조적인 신의 개념을 부정하고 ‘자연스럽게 그러한 것(自然而然)’과 ‘스스로 생하고 스스로 화(自生自化)’ 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석헌에게는 그것이 공존한다.

함석헌이 진리다원론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그는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났고 초등학교 때에는 기독교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대체로 기독교적 인생관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어렸을 때에는 비록 기독교의 교리가 진리의 전부였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오산 시절에 종교를 과학적인 자리에서 바라보게 되면서부터 그것에 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주석 11)

함석헌은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는 하나이요, 그 알짬되는 진리에 있어서는 국경이나 시대를 초월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진리다원설을 체득한다. 이로 인해 ‘정통기독교’ 측에서는 이단으로 배척했다. 그의 진리관은 기독교적인 유일신관을 뛰어넘고, 진리는 시대에 따라 적합해야 한다고 보았다. 신채호가 말한 “불교의 조선, 유교의 조선, 기독교의 조선”이 아니라, “조선의 불교, 유교,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맞닿는다.

그럼 여기서 다원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을 노장과 관련지어보자.
함석헌은 1978년 그의 나이 여든이 다 되었을 때 생각하는 방식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 -or)'라는 사고방식은 안 된다는 말을 한다. 다원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노장의 말을 빌면 무위(無爲)의 정신으로 판단하라고 한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성인도 판단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기 마음으로 판단한 것이 아니고 백성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아 판단했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말은 함석헌이 노자의 말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말 중의 하나인 “어진 이는 지어먹은 마음이 없고 씨알의 마음으로 삼는다”를 응용하여 말한 것이다. 함석헌이 말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즉 전체의 자리에 서 있으면 자기주장만을 고집하지 않으며, 비록 선택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절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석 12)

1996 한길사. 함석헌 주석

함석헌은 힌두교 경전 중 가장 중요하다는 <바가바드 기타>와 세계에서 가장 긴 시(詩)라고 하는 <마하바라타(Mahabharashtra)>를 번역하였다. 그는 ‘기타’를 번역하면서 간디 이야기를 서문에 썼다. 간디가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이 책을 읽었고, 젊어서 공부할 때 이 책을 외우기 위해 아침마다 세수할 때는 그 한 절씩을 써붙여 놓고 칫솔질을 하는 동안 그것을 속으로 외웠다고 전했다. 그리고 자신이 이 책을 처음 만나게 된 과정을 밝힌다.

 


마음에는 항상 기억하면서도 못 보고 있었는데 6·25전쟁에 쫓겨 부산 가 있는 동안 하루는 헌책 집을 슬슬 돌아보고 있었는데 우연히 어느 집 책 틈에 에브리맨스 문고판에 <바가바드 기타>가 한 권 끼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의 나의 놀람, 기쁨! 주도 설명도 하나 없으니 옳게 이해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읽고 또 읽으니 좋았습니다. 그 이래 오늘까지 놓지 않고 읽습니다. (주석 13)

‘기타’의 연대는 기원전 4~5세기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신의 노래”라는 뜻을 갖는다고 한다. 힌두교에서는 신이 직접 인간에게 계시해준 경전으로는 알지 않고 화신이나 성자, 예언자가 경전에 주를 달아서 한 가르침으로 한다. 함석헌의 번역으로 두 책이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되었고, 우리나라는 이슬람경전의 무지로부터 조금은 벗어나게 되었다.


주석
10> <전집>17, <언로 열려야 시민정신 깬다>.
11> 조민환, <함석헌의 노장이해>, <한국사상과 문화> 제11집, 229쪽, 수덕문화사, 2001.
12> 앞의 책, 231~232쪽.
13> <전집>13,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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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3장] 동서양 고전 넘나들며 통섭하다

2013/02/10 08:00 김삼웅

 

 

함석헌은 반독재 투쟁의 선두에서 힘겹게 싸우면서도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는 늘 생각하고 책 읽고 글 쓰고 행동하였다. 생각하는 사람, 탐구하는 지식인, 행동하는 실천인이다. 그에게 나이는 시쳇말로 숫자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노인들이 늙어가는 데 비해 그는 정신적으로 학문적으로 성숙해갔다. 그만큼 사유와 독서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져갔다.

갈릴 지브란의 <사람의 아들 예수>,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를 번역하여 잡지에 연재하고, 동양고전을 풀이하고, 여행기를 쓰는 등, 4,50대의 학자가 하기도 어려운 작업을 계속하였다. 학문의 질양면에서 어느 학자도 따르기 쉽지 않았다.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 1976년 6월호에 “한국사상의 발굴과 창조”를 특집으로 꾸미면서 <이능화의 조선도교사>를 번역하여 실었다. 백낙청의 <분단시대 문학의 사상>, 김경재의 <기독교사상과 한국사상>, 이경식의 <한국정치사상의 모색>이 함께 실렸다.

함석헌은 이능화의 <조선도교사>중에 우선 3장만 번역하여 여기에 실었다. 이때까지도 한문으로 쓰인 이 책의 한글 번역이 없었다고 한다. 함석헌은 오래 전부터 도교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관심 분야가 유ㆍ불을 비롯 기독교사상, 인도사상, 힌두교경전 등 미치지 않는 부문이 드물지만 도교에 대한 관심이 각별했다. 동양 고전은 20대 시절부터 그의 책상에서 떠나지 않았다. 닦고 익힌 한문 실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70년대 중반부터 노자의 <도덕경>과 장자의 <장자>와 <소요유>, <제물론> 등을 번역했다.

뿐만 아니라 맹자의 <맹자>, 굴원의 <어부사>, 왕양명의 <대학문>, 두보의 <병거행>, 문천상의 <정기가>등을 강론, 풀이하였다. 불교 경전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법정 스님이 머문 여수 불일암을 찾아서는 “나도 나이만 젊었으면 승려가 되었으면 싶다”고 토로할 정도였다.

동서양 고전을 두루 섭렵하고 천착하면서 씨알들에게 쉽게 풀이하여 읽혔으며, 고전풀이 시민 강좌를 통해 대중화하려고 애썼다. 그의 성서와 고전 강좌에는 많은 시민이 참석하였다.

"오늘날 씨알이 씨알 노릇을 하기 위하여 반드시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의 하나는 옛글, 곧 고전을 고쳐 읽는 일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동양의 옛글이다. 이날까지 서양문명, 더구나 물질주의적인 문명이 주가 되어 인류를 이끌어왔다. 그래서 동양은 오랜 정신적인 특색을 드러내는 문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기 눌려서 거의 그 값을 인정받지 못했고, 동양사람 자신까지 동양의 생각을 업신여겨왔다. 더구나 종교에서 그러했다. 그러나 이제 그 서양문명이 막다른 골목에 들었고, 인류의 장래를 위해 참되게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동양 소리를 하게 됐다.” (주석 5)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 창간 이후 연속적으로 ‘씨알의 옛글풀이’를 이 잡지에 연재하였다.
그의 한문실력은 ‘오산 도깨비’의 소문이 빈말이 아닐 만큼 출중해서 거침이 없었다. 단순히 번역 수준을 넘어서 주석을 달아 ‘함석헌식 해석’을 시도하였다. 동양의 대표적 고전을 자신의 정신적 양식으로 삼고 더불어 생의 활력으로 삼았다.

나는 일제시대에 구약성경의 이사야, 예레미아를 많이 읽었다. 그 압박 밑에서 낙심이 나려 하다가도 그들의 굳센 믿음과 위대한 사상에 접하면 모든 시름을 다 잊고 다시 하늘을 향해 일어설 수가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말을 해주는 산 영(靈)이었지 결코 죽은 글이 아니었다. 내가 그들을 다 알지 못해도 좋다.

마찬가지로 이 몇 십년의 더러운 정치 속에서도 내가 살아올 수 있는 것은 날마다 노자ㆍ장자와 대화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썩 잘함은 물과 같다. 물은 모든 것에 좋게 잘해주면서도 다투지 않고 누구나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있으려 한다. 그러므로 거의 도(道)에 가깝다”하는 노자의 말을 듣지 못했던들 씨알을 잊어버리고 낙심을 했을지도 모르고, 아침 저녁으로 장자를 따라 무용(無用)의 대수(大樹)를 아무도 없는 동리나 넓은 광야(無何有之鄕 廣莫之野)에 심어놓고 그 옆에 한가히 서성이며 그 밑에 거닐며 누워 잘 줄을 몰랐던들(<장자>, <소요유>), 이 양육강식과 물량 퇴폐의 독한 공기 속에서 벌써 질식이 되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주석 6)

함석헌은 공자와 맹자의 철학보다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더 좋아했다. “유교는 실천도덕으로 단계적으로 지도하자는 것이요, 노ㆍ장의 가르침은 궁국의 자리를 뚫어 단번에 현실을 초월하는 자리에 가자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관계를 생각하면 자연 예수가 밤에 찾아와서 “선생님은 하늘에서 오신 분인 줄 압니다”한 니고데모에 대해, “새로 나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 하여 첫머리에서부터 까버리던 장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 후에도 두고두고 논쟁이 있었다.

예수가 바리새적인 길로 구원이 될 수 없는 것을 알았던 것 같이 노자ㆍ장자도 유교의 가르침으로 춘추전국시대가 건져질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가 자기의 길은 좁고 험하다고 했던 것 같이, 노자는 자기의 길을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했다. (주석 7)

함석헌이 특히 노자에 매료된 것은 그의 평화주의 사상때문이었다.

“나는 노자를 평화주의의 첫째 사람이라고 한다. 물론 그전에 이미 이사야가 있어 ‘칼을 보습을 만들 것’을 외친 일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노자처럼 시종일관해서 순수한 평화주위를 부르짖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더구나 그것이 살벌한 부국강병주의의 춘추전국시대였다. 그리고 장자는 그것을 우주적인 나팔로써 외쳤다.” (주석 8)

노자와 장자는 함석헌의 스승이었다. 그리고 제자는 실천교사가 되었다. 그는 노ㆍ장을 닮고자 했고, 해서 그의 사유와 행동에는 2000년이 넘는 시차에도 스승들의 체온이 스민다. 기독교와 노ㆍ장철학, 인도사상, 힌두교사상을 통섭하는 그의 사유의 세계는 가히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에 접한다.

“사람의 마음이 밖에서 오는 여러 가지 구속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소한 생각에서 벗어나서, 완전히 자유하는 초월적 정신계에 사는 것”이라 풀이한 소요유에서 함석헌의 모습을 대하게 된다.

함석헌이 동양고전 중에서도 가장 즐겼던 것의 하나가 문천상(文天祥)의 <정기가(正氣歌)>였다. 일찍이 안중근이 소시적에 암송하고, 신채호가 여순 감옥에서도 놓지 않았던 글이다. 함석헌은 특유의 문장으로 풀이했다.

정 기 가

하늘 땅에 빠른 숨 있어서
온 가지 흐르는 꼴 지어냈으니
아래선 가람이며 뫼가 되었고
위에선 해요 별이 됐으며
사람에서 허허라 부르는 것이
누리에 또한 가득 들어 찼더라(…)
제(齊)에 있어서 태사의 글
진(晋)에 있어서 동고의 붓
진(秦)에 있어서 장랑의 망치
한(漢)에 있어서 소무의 절개
엄 장군의 머리가 됐고
희 시중의 피가 됐으며
장 저양의 이가 됐고
안 성산의 혀가 됐더라
혹은 요동의 삿갓되어
맑은 뜻 어름 눈을 가다듬었고
혹은 출사표 되어
그 장렬함, 귀신을 울렸으며
혹은 강 건너는 뱃대 되어
분한 한숨 오랑캐를 삼켰고
혹은 도둑 치는 홑 되어
안 된 놈 대가리가 부셔졌더라.(…)
아아, 슬프다, 이 진탕 속이
나의 즐거운 나라 됐구나
어찌 무슨 다른 잔재주 있어
음양이 도둑질 못한 것일까
돌아보아 이 속에 깜작이는 빛
우러러 저기 떠도는 흰 구름
푸른 하늘인들 다하라만은
어진이들 가신 날은 이미 저물어도
그 본 때는 아직 엊그제로다
처마 밑에 책 펴 읽고나니
옛 길 내 낮을 비쳐 주노나.
(주석 9)


주석
5> 함석헌, <옛글 고쳐씹기>, <전집 20>, 13쪽, 한길사, 1982.
6> 앞의 책, 26쪽.
7> 앞의 책, 29쪽.
8> 앞의 책, 31쪽.
9> 함석헌, <하늘땅에 바른 숨 있어>, 279~281쪽(발췌), 삼만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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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3장] 동서양 고전 넘나들며 통섭하다

2013/02/09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 1976년 1ㆍ2월호부터 표지 뒷면에 <우리의 내세우는 것>을 제정하여 실었다.
일종의 사시(社是)인 셈인데, 8가지를 들었다. <씨알의 소리>의 나갈 길과 존재 목적을 뚜렷하게 제시한 것이다. 자신의 신념의 일단이기도 하다.

ㅇ 씨알의 소리는 순수하게 씨알 자신의 힘으로 하는 자기 교육의 기구입니다.
ㅇ 씨알은 하나의 세계를 믿고 그 실현을 위해 세계의 모든 씨알과 손을 잡기를 힘씁니다.
ㅇ 씨알의소리는 어떤 종교ㆍ종파에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ㅇ 씨알의 소리는 어떤 정치세력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ㅇ 씨알은 어떤 형태의 권력 숭배도 반대합니다.
ㅇ 씨알은 스스로가 역사의 주체인 것을 믿고, 그 자람과 활동을 방해하는 모든 악과 싸우는 것을 제 사명으로 압니다.
ㅇ 씨알의 소리는 같이 살기 운동을 펴 나가려고 힘씁니다.
ㅇ 씨알은 비폭력을 그 사상과 행동의 원래로 삼습니다.
(주석 1)

이것은 함석헌의 기본철학이고 사상이기도 하다. 그러면 왜 새삼 통권 50호인 1976년 신년호에 이와 같은 사시를 내걸게 되었을까. 한 해 전에 인혁당 관련 8명의 처형과 긴급조치 9호의 발동, 장준하의 의문사 등을 목격하면서 유신체제와의 정면 싸움을 위해서 자신의 입장을 보다 선명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곧 3ㆍ1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나타난다.

이즈음 함석헌의 관심은 국내문제에 국한되지 않았다. 1975년 4월 베트남 전쟁이 종식되고, 1976년 1월 중국에서는 실용주의 노선의 주은래가 사망했다. 그래서 중국의 국가주의의 팽창을 우려했다. <씨알의 소리>에 쓴 <세계구원의 꿈>이라는 대논설은 그의 폭넓은 국제정세, 특히 중국관을 투시한다. 40여 년이 되는 오늘에도 생명력이 넘치는 논설이다.

앞을 내다볼 때 가장 걱정되는 것은 중국의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다.
지금 중국은 공산국가요 아직 세계는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의 긴장 속에 있지만 나는 공산주의는 그리 두렵지 않다고 본다. 그것은 하나의 사상인데 사상은 아무리 험악하다 하더라도 멀지 않아 변하는 날이 올 것이다. 두려운 것은 민족감정 혹 국가주의적 횡포다. 그것은 좀해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세계 여러 약소민족을 괴롭히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그들의 국가주의다. 국가라는 이름 아래 민중을 완전히 그 수단으로 삼고 지배하려는 생각이다. 그 점에서는 두 진영이 일반이다. 그런데 중국은 이제 강력한 폭력 밑에 통일이 됐고 남들은 거의 바닥이 난 천연자원을 풍부히 가지고 있는 그동안 오래 서구 세력에 눌렸던 반감은 불같이 솟으려 하기 때문에, 그것이 큰 나라로 강해질 때 주위에 대한 그 교만과 횡포가 얼마나 할까? 지나간 긴 역사에 비추어 보아 거의 확실한 것 아닐까?

그렇다면 그 턱 밑에 있는 우리 운명은 어떤 것일까? 그래서 그것을 일찍이 곤륜산에서 내리 구르는 바위 앞에 놓인 달걀로 비유했던 것이다. 그 점을 생각한다면 남북이 이렇게 갈라져 싸우는 이 민족은 참 어리석은 민족이다. 예로부터 생각있는 선인들이 우리의 소량(小量)과 천식(淺識)을 걱정해 지적해 오지만, 참말 새삼 걱정되는 일이다.
(주석 2)

함석헌은 우리가 살 길은 탈민족주의, 탈국가주의에 앞장 서는 것과 “동남아의 군소국이 그것(공동체-필자)을 만들어야 한다”고 방법론을 제시한다. 함석헌은 이어진 글에서 “우리 이상대로 한다면 세계가 한 나라가 되고 그 다음 각 지역별로 자치하는 공동체가 생겨나는 것이지만,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기 전 우선 그 중간 과정으로 몇 개의 연방이 있어서 마치 미합중국 모양으로 대소에 관계 없이 한 표의 권리를 가지고 연합해 나가야 할 것” (주석 3)이라 피력한다.

함석헌은 이 책에 김계숙(건국대) 교수의 <영구평화란 가능할 것인가>를 실어 자신의 ‘세계구원의 꿈’을 밑받침하는 현실적 방안을 강구한다. 김계숙은 “인류의 앞날은 몰락이나 평화냐 하는 준엄한 양자택일의 위기에 직면하여 참다운 민주주의적 이념의 구현을 위하여 전인류가 최선을 다할 때에 비로소 영구평화는 가능할 것이다” (주석 4)라고, ‘민주주의적 이념의 구현’을 제시한다. 이것은 함석헌이 추구하는 길이었다.


주석
1> <씨알의 소리>, 1976년 1,2월호, 2쪽.
2> <세계구원의 꿈>, <씨알의 소리>, 1976년 1,2월호, 27쪽.
3> 앞과 같음.
4> 앞의 책,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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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2장] 유신타도, 박정희와 전면대결

2013/02/08 08:00 김삼웅

 

 

함석헌에게 ‘씨알’이 정신적ㆍ이데올로기적인 호라면 바보새ㆍ신천옹ㆍ알바트로스는 상대적이라 해도 될 듯하다. 그는 살아온 방식이 바보스러웠다. 항일운동을 하고도 남한에서 애국자연하지 않았고, 반독재투쟁을 하고도 4월혁명과 10ㆍ26사태 뒤에 민주인사연하지 않았다. 특히 반독재투쟁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래서 바보새ㆍ신천옹ㆍ알바트로스로 자처한 호는 적격이다.

1962 일우사

함석헌은 한때 ‘넝마주이’로 자처하기도 하였다. 1961년 8월 평론집 <인간혁명>을 내면서 서문을 <한 넝마주이의 말>이라고 붙였다. 민중의 쓰레기, 역사의 쓰레기를 좁은 넝마주이라는 것이다.

“민중아, 네 가슴은 쓰레기통이지! 못 받을 것 없이 다 받아가지고 거기서 재생을 시켜 보자. 네가 쓰레기통이 되면 나는 넝마주의가 되마. 인생의 넝마, 역사의 넝마 주워보자! 내 말은 쓰레기통 뒤지는 넝마의 말이다.” (주석 23)

넝마주이는 바보새와 알바트로스와 상통하는 것 같다. 함석헌에게 이것들은 한 묶음이다. 그의 ‘넝마철학’을 더 들어보자.

세상은 살게 마련이다. 쓰레기를 더럽다고 버리는 양반 집이 있는가 하면 또 그것으로 살아간다고 사자는 사람이 있다. 주워 모은 쓰레기 사겠다기에 가져다 팔았더니 국가재건최고회의 어느 어른이 나를 “정신분열증 들린 사람 같다”고 했다고 한다. 최고의 자리에서 보니 넝마주의쯤은 미친놈으로 뵈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내 눈에는 사람이란 다 내 친구, 곧 넝마를 주워 먹고 사는 것으로만 보여서 한 말인데, 재건이라 하면서 재생의 진리를 모르나 봐. 아기씨의 고운 살갗이 새우, 조개를 통째 먹고 된 것인 줄 모르고, 영웅 선비의 훌륭한 이론, 옛 사람의 먹고 난 찌꺼기 모아놓은 것인 줄 모르나 봐! 세상 제일 큰 넝마주이, 우리 왕초가 누군지 아느냐? 천지의 쓰레기통을 안고 있는 하나님이다. (주석 24)

좀 뒷날 얘기지만, 1982년 1월 한 출판사는 함석헌의 수상록을 펴내면서 <바보새>란 제목을 부쳤다.
당시는 <씨알의 소리》가 두번째 폐간기였다. 편집위원을 지냈던 법정 스님이 서문을 썼다.

“바보새(信天翁)을 좋아한다는 선생님, 아니 바보새처럼 살아가시는 선생님! 이 수상록은 바보새처럼 살아가려는 많은 씨알들에게 글들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읽겠습니다.” (주석 25)

1961 일우사

함석헌이 1948년 쯤 지은 시 <수평선 너머>에는 이미 알바트로스를 ‘예감’하고 있었다.
바다! 넓이 끝없이 까만
깊이 한없이 아득한! 바다 또 바다! 저 바다 너머는 무엇이 있나?!! 물결
앞에도 앞에도 푸른 푸른 . 옆에도 옆에도 하얀 하얀
물결 또 물결
이 물결 뒤에는 또 무엇이 있나?
(후략)
(주석 26)

함석헌은 노년에 알바트로스를 좋아하고 이 새를 바보새라고 이름하면서 자기를 신천옹이라 하였다.

“유동식 교수의 함석헌의 기독교 중심사상을 소개하는 글에서 신천옹인 자신을 바보새에 비유한 것을 시사하고 있다. 얼핏 보면 알바트로스는 거대한 새지만 바보스럽고 부끄러워하는 연약한 마음의 새이고 독수리 같은 사나운 새는 아니라는 것이다. 바보새는 하늘을 믿고 좋아하며 하늘을 날기를 좋아하고 우주를 바라보며 밤낮을 날고 있는 새로서 죽을 때까지 날다. 떨어지는 고상한 새임을 함선생은 자랑하며 존경하고 귀여워했던 것 같고 이것을 거룩하고 신비스럽게 느끼는 것은 나만의 느낌이 아닐 것이다.” (주석 27)

‘바보’새, 씨알들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씨알은, 민중은 교활한 출세주의자보다 바보스러운 함석헌을 더 존경하고 사랑하였다.

함석헌은 ‘겉으로가 아니라 속내가 알짬 씨알이고 들사람이다. 권력은 탐하고 부를 추구하고 종교나 교육계의 자리를 원했다면, 그의 능력이나 성실성과 치열함으로써 얼마든지 성취가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들사람이고 야인정신이기 때문에 세속의 부나 관직 따위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반면에 그는 어리숙하고 바보스럽고 타산적이지 못하고 처세에 약하고 세상의 물정을 잘 몰랐다.
그는 자신을 우리말로 바보새, 한자로 신천옹(信天翁), 영어로 알바트로스(allbatros)라고 부르는 ‘바보새’가 되었다. 바보새를 닮았고, 휘호에도 신천을 낙관으로 썼다. 프랑스 <악의 꽃>의 시인 보들레르는 가난한 민중, 소외된 자, 고아, 창녀들을 노래하며 그들의 벗이 된 ‘저주받은’ 시인이다. 보들레르는 알바트로스의 모습을 자신의 자화상으로 그렸다.

뱃사람들은 자주 장난거리로
항해의 벗인 양
뱃길따라 미끄러지는 선박을 뒤쫒는
아주 커다란 알바트로스를 붙잡는다.

간판 위에 막 던져진 순간.
이 창공의 임금님은 힘들게 노를 젓듯
조롱을 받으면서
그 큼직한 흰 날개를 질질 끌어댄다.(후략)
(주석 28)

함석헌이야말로 20세기 알바트로스다. 장자, 노자, 제논, 디오게네스, 플로티노스, 두보, 비용, 김시습, 이탁오, 브르노, 이달, 허균, 스피노자, 소로, 셀리, 하이네, 조르주 상드, 애드가 앨런 포우, 보들레르,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의 혼과 얼과 행동이 전해지고 융합된 바보새이고 신천옹이고 알바트로스다. 


주석
23> <인간혁명>, 머리말, 제일출판사, 1961.
24> 앞과 같음.
25> <함석헌 수상록 바보새>, 12쪽, 동광출판사, 1982.
26> <수평선 너머>, 78쪽.
27> 김해암, <함석헌과 알바트로스의 비유>, <씨알의 소리>, 2010년 9ㆍ10호, 108쪽.
28> 이치석, 앞의 책, 35~36쪽, 재인용, 시대의 창,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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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2장] 유신타도, 박정희와 전면대결

2013/02/07 08:00 김삼웅

 

 

제44호(1975년6월호)

날조된 인혁당사건으로 애꿎은 청년 8명의 사형 집행 소식을 전해 듣고 에둘러 썼다. 직설로는 책이 나가지 못한 때문이다. 사형집행 소식을 듣고 달려가다가 집앞에서 경찰에 저지당하고 쓴 글이다.

<사상계>에 ‘장준하사단’이 있었듯이, <씨알의 소리>에는 ‘함석헌 사단’이라 일컬어도 될 일군 지식인그룹이 있었다. 편집위원들을 중심으로 박정권의 모진 탄압에도 굴하지 않는 식자들이었다.

송건호ㆍ장준하ㆍ김성식ㆍ김재준ㆍ김경재ㆍ이태영ㆍ계훈제ㆍ이문영ㆍ오충일ㆍ전경연ㆍ신복룡ㆍ한승헌ㆍ법정ㆍ이병린ㆍ문동환ㆍ장일조ㆍ안병무ㆍ고은ㆍ백기완ㆍ김관석ㆍ김승훈ㆍ김찬국ㆍ김동길 등이 정기적으로 또는 가끔씩 글을 썼다. 물론 원고료는 지급되지 않았다.(필자도 몇 차례 기고하였다)

함석헌은 결절이나 정보기관에 구금되기를 수없이 하면서도 그에 관해 구체적인 언급은 해오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1974년 여름 중정에 끌려갔다와서는 간접요법으로 이를 피력한 바 있다.

얼마 전 남산(중정-필자)에 가서 이틀 동안 참선을 하고 왔습니다. 정말 참선입니다. 골목의 친구들과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데 거기 사람들과는 참 통하지 않았습니다. 이치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논리도 소용없었습니다. 통치 않는 문답을 자꾸 거듭하면서 지연 신경이 흥분합니다. 흥분하면 아니되겠기에 참습니다. 대답해도 못 알아 듣기에 잠잠합니다. 잠잠하면 왜 대답이 없느냐고 찌릅니다. 그래도 잠잠하긴 참 힘듭니다. 그래 정신을 모으고 참선을 했습니다. (주석 20)

유신의 광기가 극심했던 1975년, 동아일보가 정부의 탄압에 굴복하여 114명의 기자를 해고하고, 긴급조치 7호의 선포와 인혁당 관련자 8명의 사형집행, 서울농대생 김상진 열사의 긴급조치 항의 할복자살, 긴급조치 9호 선포, 사회안전법 제정, 장준하 의문사 등이 잇따른 해였다.

함석헌은 이해 6월호에 <수선화에게 배우라>는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정치적 폭염과 살을 에는 찬서리가 교차되는 시국에서,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신선한 산문이었다. 그는 시론, 평론, 사론 등에서 독특한 문제를 보이지만 산문체 글쓰기가 일품이다.

수선을 왜 수선(水仙)이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 생활 양식을 보면 과련 탈속한 신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들은 여름날 사나운 볕(폭양)의 찌고 내리지짐을 넝쿨식의 복종이나 응달에 피는 꽃식의 아첨으로 지내든지 그렇지 않으면 사막의 드문 오아시스의 종려 야자식으로 간신히 지하수의 샘에 뿌리를 박고 버티어 봄으로 지내는데, 이 연한 수선은 종려식의 영웅주의를 나타낼 맘도 없지만 또 넝쿨식의 아첨도 차마 할 수 없어 겸손의 길을 취해 신선답게 굴복도 대항도 아니하고 써늘하게 땅 속에 눈을 감고 조용히 명상을 하여 들어오는 악(惡)을 제 속에서 장차 올 랄을 위한 신비론 선(善)의 양식으로 전환을 시킵시다. 그러니 결코 잠이 아닙니다. 때를 거꾸로 이용하는 지혜의 싸움입니다. (주석 21)

함석헌의 글은 그것이 평론이든 사론이든 사론이든 산문이든 서한문이든 각기 ‘글 말’이 있고, ‘속내’가 깊고, ‘여운’이 남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 글도 마찬가지다.

“수선은 높은 지대가 아니라 낮은 누습한 늪 지대에 잘 됩니다. 높은 지대는 살고 싶다는 강자에게 주십시오. 뺏는대로 뺏기십시오. 그리고 겸손히 땅 속에서가 아니고는 살아 지낼 수 없는 사회의 누습 지대를 하늘만 주는 땅으로 알고 여름 잠을 자십시오. 봄이 올 때 조그만 한들 바람만 불어도 억억만만이 일시에 춤을 추어 부르는 황금 노래는 씨알이 아니고는 못할 것입니다.” (주석 22)


주석
20> 함석헌, <모산 야우(毛山 夜雨)>, <씨알의 소리>, 1974년 10월호, 8쪽.
21> <씨알의 소리>, 1975년 6월호 4~5쪽.
22> 앞의 책,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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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2장] 유신타도, 박정희와 전면대결

2013/02/06 08:00 김삼웅

 

 

제32호(1974년4,5월호)

<씨알의 소리>에 대한 박정권의 억누름은 날이 갈수록 악랄하고 고약해져갔다.

 

1974년 4ㆍ5월호에는 표지에 함석헌의 <민청학련사건의 반성>이 검은 바탕이 흰 활자로 맨 위에 소개되었다. 한데 이 글은 송두리째 뽑히고 말았다. 중정의 짓이었다. 대신 서울대학교 가정대학 <아람> 제2호에 썼던 <인도의 지성 간디>로 그 자리를 메꿨다.

민청학련사건은 박정권이 유신체제 반대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1974년 4월 3일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면서 날조한 사건이었다. 함석헌은 정부의 처사를 통렬히 비판하였는데, 이를 통째로 뽑아버린 것이다. 이렇게 뽑히고 잘리고 한 원고가 적지 않았다. 이 글 이전부터, 그러니까 긴급조치가 발동되면서부터 정부는 언론을 검열하면서 특히 <씨알의 소리>에는 강도가 심했다.

1974년에서 1975년 사이는 이른바 유신헌법 하의 대통령 긴급조치를 마구 휘두르던 때다.
<씨알의 소리>는 이때에 가장 많은 탄압을 받았고 또한 가장 치열하게 저항했던 시절이기도 하다. 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가 벼락처럼 떨어지면서 씨알에 대한 압수, 사전검열, 연행, 연금, 조사는 가속화되었다. 74년 1월호 4천부가 전부 압수당하고, 직원이 끌려가고, 함선생님이 연행되고, 장준하 편집위원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15년이 선고되고, 동년 4월 20일 씨알 창간 4주년 기념강연 후 김동길 편집위원이 민청사건으로 끌려가 15년 선고를 받는 등 수난의 연속이었다.

<민주청년학생연맹사건과 우리의 반성>(함석헌), <기원 2000년의 한국>(김동길), <학법의 한계>(박형규)는 이 시기에 쓰여진 것이었으나 전면 삭제된 것이다.
(주석 15)

박정권은 귀에 거슬리는 내용은 필자가 누구이건 가리지 않고 전면 삭제 또는 부분 삭제를 자행했다. 1974~1975년 <씨알의 소리>에서 전면 삭제된 글과 필자는 다음과 같다.

<양심 선언>(김상진), <박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김상진), <고 김상진군의 영전에 이 노래를 바친다>(고은), <오둘툴 보고서>(채광석), <총>(양성우), <친구에게>(유시산), <만세>(김가영), <민주청년학생연맹사건과 우리의 반성>(함석헌), <한국의 정치현실>(김대중), <기원 2000년의 한국>(김동길), <올바른 국민총회의 실현>(장을병), <악법의 한계>(박형규), <동아일보사태의 진상>(장윤환), <조선일보사태의 진상>(정태기), <동아일보경영주에게>(표문태), <백골도 산다>(오충일), <여기 그러한 현실>(함세웅), <제3시국선언문,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 <선언문, 서울대학교 비상총학생회>. (주석 16)

1976~1977년 정부의 <씨알의 소리>전면 및 부분 삭제분은 다음과 같다.

<씨알들의 소리>(조남기),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양성우), <나도 한번 효도하고 싶네>(김경락), <모깃불 외 3편>(박몽구),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쭈구렁 밤송이의 한숨>(함석헌), <씨알의 제소리>(함석헌), <슬픈 노래를 부르자>(함석헌), <정신 바짝 차려!>(함석헌), <우리는 임자다, 종이 아니다>(고은), <박동선사건의 의미>(한완상), <1977년을 돌아보며>(법정), <장준하선생 2주기, 영원한 추모>(계훈제), <테러의 문학>(송기원), <갇혀 있는 자유에게>(이현주), <목소리>(김경수), <수기, 평화시장에서>(전태일), <전태일 7주기 추도사>(전국노조 청계피복지부), <누가 이참의 바통을 받을 것인가?>(함석헌). (주석 17)

1976년부터 1977년 사이에는 <씨알의 소리>가 찢기고 잘리고 상처받아 가장 약화되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1976년 3월 1일 신구교 통합 미사 후 구국선언문 발표로 3ㆍ1명동사건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함석헌 선생, 안병무 박사 등 구국선언문서명자 전원이 연행됐고, 3월 3일 <씨알의 소리> 사무실과 함 선생님 가택 전체가 수색당했다.

창간 기념행사는 76년, 77년 모두 거부당했고, 장준하 선생 1주기 추도회, 전태일 6주기 추도회를 <씨알의 소리>주관으로 열려고 장소 계약까지 했으나 좌절되었고, 76년 8월 28일 명동사건으로 함석헌 선생, 김대중 선생, 문익환 목사 등 징역 8년 자격정지 8년의 선고를 받았다. 77년 3월 18일 함석헌 선생 77회 생신기념모임까지도 장소불허로 흥사단 뒤뜰에서 겨우 열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1만 2천부까지 <씨알의 소리>가 75년 하반기부터 철저한 사전검열로 인해 떨어지기 시작하여 2500부까지 되었던 것이다. 당시 문공부가 정보부는 인쇄 직전 최종 교정지를 인쇄소를 통해 두 벌을 내 가지고 붉은 줄을 치고 있었다.
(주석 18)

해방 뒤 한국에서 발행된 잡지 중에서 <씨알의 소리>만큼 정부의 심한 탄압으로 찢기고 얼룩진 잡지는 없을 것이다. 어느 측면에서 일제에 못지않았고 무원칙했다. 독재정권의 야수적인 탄압에도 함석헌의 의지와 필격은 꺽이지 않았다. 온갖 억누름 속에서도 잡지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버티었다. 그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동안 편집장도 박선균ㆍ박청수ㆍ박선균ㆍ정연주ㆍ최민화ㆍ박선균으로 이어졌다.
함석헌은 독재정권의 탄압에 찢기는 아픔을 이렇게 토로하였다.

씨알 여러분, 나는 요새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슬픕니다. 때로는 거의 나를 잃어버릴 지경입니다. 그러나 물론 나를 잃어서는 아니되지요. 나는 나의 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또 여러분의 나요, 민족의 나요 인류의 나요, 하나님의 나이기 때문입니다.

공장에서 육중한 기계가 악마 같은 입을 벌이고 그 아래 들어오는 쇳덩이 나무통을 덜커덕 덜커덕 짤르듯이 사형! 사형! 사형! 하는 소리가 들려올 때 나는 미칠 것 같습니다.

내가 왜 살았더냐?
이 꼴을 왜 보아야 하느냐?
인생의 말로가 어쩌면 이렇게도 참혹하냐?
아, 하나님 맙시사!
(주석 19)

주석
15> 박선균, <금지된 씨알의 소리>, 24쪽, 생각사, 1987.
16> 앞의 책, 6~7쪽.
17> 앞의 책, 7~8쪽.
18> 앞의 책, 166쪽.
19> 함석헌, <밤숨을 끊지 말라>, <씨알의 소리>, 1974년 7월호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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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2장] 유신타도, 박정희와 전면대결

2013/02/05 08:00 김삼웅

 

 

제31호(1974년3월호)

1974년 3월호에는 <씨알의 소리> 편집장을 하면서 오랫동안 함석헌을 지켜보아온 박선균이 <74회 생신 맞은 함선생님>을 기고하였다. 글은 10여 일 동안 독감으로 누워계셨다는 소식부터 삶의 역정과 가족의 근황까지 전한다.

그동안 선생님을 존경하는 이들이 표현했듯이 “마지막 남은 지사적 사상가요”, “씨알철학의 야인이요”, “개성 있는 역사가요”, “한국의 간디요”, “진리의 화살맞은 사람이요”, “민족적 대서사시인이요”, “한국의 목소리”라고 했지만, 선생님의 정신적 고향은 결국 팔레스타인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때로는 HㆍG 윌스, 앨도우스 헉슬리, 제럴드 허드 등 서구적 사상가에 심취되기도 하지만 “팔레스타인에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중국을 거쳐 한국에 와서 살고 있는 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하지만 선생님은 스스로 이르기를 “나는 실패한 사람”이라 하고 바보새(信天翁)이라 이름 지었다. 나를 때는 2미터나 되는 날개로 끝없는 하늘을 날 수 있지만, 지상에 내려앉으면 걷는 것이 서투르고 고기잡을 줄 몰라 먹다남은 찌꺼기를 먹고산다는 바보새. 선생님이 왜 ‘바보새’라고 부르시는지 그 뜻을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다.
(주석 13)

함석헌의 아호처럼 된 ‘바보새’얘기는 뒤로 미루고, 근황과 가족문제를 인용한다. 이 무렵 치열했던 일면을 살필 수 있다.

선생님은 요즘 자신의 삶의 동그라미를 마주 그리시겠다는 씨알 집필 외에도 계속 바쁜 일정을 보내시는 편이다. 주일예배(봉원동 퀘이커 모임 오전 10시), 성서모임(명동가톨릭여학생회관 주일 오후 3시), 고전강좌(정동 전센기념관 매월 요일 오후 7시), 부산모임(복음병원 매월 둘째 주일 오후 3시)등을 이끌어 오시고 있다.

선생님의 슬하에는 2남 5녀가 있으나 장남과 장녀는 이북에서 월남하지 못하고 말았다. 금년 73세인 사모님 황득순 여사는 와병으로 기동을 못하신 지가 만 5년, 선생님은 가족과 함께 사모님의 간호에 또한 여념이 없으시다.
(주석 14)

주석
13> <씨알의 소리>, 1974년 3월호, 71쪽.
14> 앞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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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2장] 유신타도, 박정희와 전면대결

2013/02/04 08:00 김삼웅

 

 

제30호(1974년1,2월호)

함석헌은 민주화 투쟁의 최전선에서 독재와 맞서 투옥ㆍ연행ㆍ연금을 거듭하면서도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씨알의 소리>는 꾸준히 발행하였다. 압수와 제작방해가 심했으나 결단코 멈추지 않았다. 1973년 11월호부터는 50쪽 분량으로 축소되었다. 비용문제도 없지 않았으나 당국의 방해로 원고가 통째로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1974년 신년호는 1,2월호 합병이었다. 함석헌은 <망(亡) 불망(不忘)>을 “새해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의 제목으로 붙였다. 잡지를 계속 펴내게 되는 속내를 들려주는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씨알 여러분께 간곡히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씨알의 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나 개인으로는 페스질롯지의 이른바 “채 익지 못하고 버러지 먹고 병들어 여름철에 빨리 떨어지는 과일”의 심정이었습니다. 올차게 자라지는 못했지만 이것으로나마 석어 나를 낳고 길러준 그 뿌리로 돌아가 거름이 돼보잔 생각이었습니다. 그후 몇몇 친구들이 마음을 모아 도와주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카네기의 스스로 쓴 그의 묘비의 글귀를 자주 생각합니다. “자기보다 위대한 많은 사람들을 자기 위주에 모았던 카네기”라고 했다는. 확실히 지금 씨알의 소리를 놓고 모인 중만한 동지들은 우리나라에서는 다시 없는 어진 마음들이라고 나는 고맙게 생각합니다. 내 분에 넘치는 양심들이요 핵심입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이 어려운 상황에서 견디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말씀 드리기 전에 여러분이 이미 잘아시는 중 압니다마는 이 소리의 목적은 지식을 전해드리자는 것도 아니요, 소위 말하는 교양도 아닙니다. 여러분, 속에 스스로 가지고 계시는 뜻 하나를 키워가자는 것뿐입니다. 장작은 마주 대여야 불길이 서고, 눈은 마주 보여야 사랑이 생기고, 뜻은 마주 잡아야 위로 솟습니다. 우리 뜻을 길러 이 역사의 흐름을 돌려가야 합니다.
(주석 11)

함석헌은 1973년 여름 천안 - 온양 사이의 모산(毛山)에 있는 구화고등공민학교를 인수하였다. 천안의 씨알농장을 처분하여 그동안 밀린 빚을 청산하고 남은 돈으로 인수한 것이다. 어떤 분이 17년 동안 운영해오던 것을 씨알농장처럼 이것도 떠맡아 경영을 하게 되었다. 함석헌은 이 소식을 <망불망>에 상세히 전한다.

한 때는 여러 백명 학생이 있었는데 중학교가 지역제로 된 이후 학생을 천안, 온양에 대부분 뺏기고 지금은 130명 가량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맡은 이후 교사진영을 새로이 했고 건축하다 말고 내버려두었던 교사를 수리하고 변소를 새로 짓고 하나씩 정돈을 하여 자라나는 생명에 맞는 환경을 만들려 노력하는 중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다 그렇듯이 무슨 자금이 넉넉히 있어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도 해야할 일이니 무슨 손을 댄 것입니다. 나는 맡아 놓기는 하고도 “왜 내게는 되지 않을 일만이 오느냐”고 몇 번이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동안 계선생(계훈제-필자)이 교장으로 가 계셨고, 나는 이따금밖에 못갔습니다.

그러나 장차로는 이것을 직업학교로 충실시켜 가자는 계획입니다. 생활교육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함으로써 씨알교육의 터를 닦자는 생각입니다.
(주석 12)

함석헌은 민족의 선각자들이 오산에 민족학교 오산고보를 세우고, 자신도 거기서 민족혼과 민중의 얼을 배웠듯이, 오산에 그와 같은 학교를 만들어 씨알교육의 전당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하지만 일제치하와 크게 다르지 않는 유신치하에서 ‘민족학교’의 운영이 순탄할리는 없었다. 얼마 뒤에 이 학교의 운영을 접었다.

주석
11> <씨알의 소리>, 1974년 1,2 합병호, 4쪽.
12> 앞의 책,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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