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4장] 유신체제에 마지막 타격 날리다

2013/02/16 08:00 김삼웅

 

 

함석헌은 1979년 8월 11일 퀘이커 세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스위스로 출발하였다. 국내사정이 어려웠으나 이 회의는 빠지기 어려운 국제대회였다. 그는 국제사회에서 퀘이커의 주요 인물로 인정되었다. 이에 앞서 1947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바 있는 미국 퀘이커봉사회는 2월 26일 함석헌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였다. 이어서 3월 5일에는 미국 퀘이커봉사회를 대표하여 바우만 여사가 노벨평화상 추천서를 갖고 함석헌을 찾아왔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미국 퀘이커봉사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적ㆍ아군을 가리지 않고 부상자 치료를 위한 의료기구 및 간호원 파견과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위해 세계적 모금운동 등 적극적이며 희생적인 봉사활동이 평가되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미국 퀘이커봉사회는 1월 24일자의 전문을 통해 “한국의 함석헌을 1979년도 노벨평화상 후보에 추천한다. 함석헌은 정의와 인권을 위하여 비폭력적 운동으로 일생 동안 헌신했고, 세계평화를 위한 씨알들을 상징화하고 있으며 고취하고 있다.”고 알려왔다.

또 1월 31일자 소개 편지에서는 “눌린 자와 가난한 자를 위한 정의실현에 대한 함 선생의 확고부동한 신념과 정의를 방해하는 것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은, 그의 깊은 종교적 신앙으로 밑받침되어 있기 때문에, 그가 반대하는 현정부일지라도 그의 반대는 정권욕이나 개인의 이득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고 말하고, “함 선생은 그의 동포들의 사랑을 받고 있고 투옥하는 자들과 또는 그를 제어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존경을 받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함 선생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하는 것은 그가 깊히 염려하고 사랑하는 모든 한국사람들에게 격려와 지지를 보내는 것이 될 것이다”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주석 8)

함석헌은 자신이 이와 같은 노벨평화상에 추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 퀘이커들이 나를 추천한 것 같으나 사실 나는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겸손해하였다. 그의 노벨상 추천 소식은 2월 26일치 <중앙일보>가 <워싱턴 스타>를 인용, 1단 기사로 보도했을 뿐 대부분의 언론이 이를 외면하였다.

함석헌은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250여 명의 퀘이커들과 회의를 마치고 독일로 건너갔다. 함부르크, 괴칭겐,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를 방문했다. 헤이그에서는 이준 열사 묘소를 참배하고 영국으로 들어갔다. 여행 중에는 그 나라 퀘이커들과 한인교회, 유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숙식을 해결하고, 간혹 우리나라 외교관들의 안내를 받기도 했다. 캐나다를 거쳐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 피츠버그에 머물던 중 10월 26일 박정희의 암살 소식을 듣고, 11월 15일 남은 일정을 모두 취소, 귀국하였다.

해외에 머물면서도 ‘씨알의 독자들’을 위해 여러 차례 <해외 통신> 보냈다. 이 소식은 <씨알의 소리> 에 실렸다. 스위스 베른에서 보낸 편지에는 다음의 내용도 있었다.

회의를 마치고 마당에 나오니 어떤 할머니가 조그마한 싼 물건을 내밀면서 “뉴멕스코연회에서 왔습니다. 우리 연회 어떤 부인이 이것을 주면서, 대회에 가서 누구나 줌직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드리라고 했는데, 내가 보니 당신이면 될 듯해 드립니다.” 했습니다. 놀라면서 그것을 받아 그 속에 든 것을 꺼내보니, 은으로 조그만 비둘기를 만들어 가슴에 차도록 한 것입니다. 나는 뭐라 말 할 수, 사양조차 할 수 없어, 그저 절을 하고 받았습니다. 노벨상은 받을 자격이 없지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시는 조그만 표적인 줄 압니다.(주석 9)

함석헌은 이번 해외순방에 두 가지 목적을 두었다고 밝혔다.

“하나는 세계 각지의 퀘이커들을 찾아보는 것이고 그 담은 또 간 곳 마다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퀘이커들 찾는 것은 본래 퀘이커 협의회에서 나를 초청해 주었고 세계일주를 하며 각지의 모임과 혹은 개인을 찾아보도록 일정을 꾸며주었기 때문입니다. 협의회가 그렇게 한 데는 두 가지 뜻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하나는 나로 하여금 세계 각지에서 한국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될수록 한국의 진상을 알려주도록 하잔 것이고, 또 하나는 나도 좀 더 경험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석 10)

함석헌은 평화주의자였다. 끊임없는 저항과 도전은 평화를 위한 수단이었다. 국내적으로는 반독재와 반국가주의, 국제적으로는 반제국주의와 반침략주의를 주창하면서 싸워온 것은 궁극적으로 국제평화의 실현에 있었다.

<씨알의 소리> 1979년 7월호에 “평화”를 특집으로 꾸미고 송건호ㆍ김용준ㆍ김동길과 함께 <세계평화의 이상과 그 실현을 위한 문제>를 주제로 하는 좌담회를 연 겻도 그 일환이었다. 함석헌은 이 좌담에서 우리나라가 단군신화에서부터 평화사상이 깃들어 있음을 지적한다.

난 우리나라도 고대 처음에 있어서는, 우연히 됐는지 어떻게 됐는지 그걸 고증할 수가 없지만, 단군신화에서부터 전쟁이야기는 없이 개국을 했다고 하는건 퍽 크게 우리로서는 아주 주목할 점이라고 그렇게 보는데, 서양처럼 전쟁을 꼭 해가지고 나라를 세웠다든지, 동양에서 일본만 해도 역사 처음에는 전쟁으로 개국을 했다고 그러고, 아마 세계 어느 나라의 처음치고 싸움 없이 개국했다는 건 별로 없을 거고…. (주석 11)

주석
8> <씨알의 소리>, 1979년 3월호, 102쪽.
9> <씨알의 소리>, 1979년 10월호, <해외통신> 제3신, 9~10쪽.
10> 앞의 책, 27쪽.
11> <씨알의 소리>, 1979년 7월호, 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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