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2장] 유신타도, 박정희와 전면대결

2013/02/07 08:00 김삼웅

 

 

제44호(1975년6월호)

날조된 인혁당사건으로 애꿎은 청년 8명의 사형 집행 소식을 전해 듣고 에둘러 썼다. 직설로는 책이 나가지 못한 때문이다. 사형집행 소식을 듣고 달려가다가 집앞에서 경찰에 저지당하고 쓴 글이다.

<사상계>에 ‘장준하사단’이 있었듯이, <씨알의 소리>에는 ‘함석헌 사단’이라 일컬어도 될 일군 지식인그룹이 있었다. 편집위원들을 중심으로 박정권의 모진 탄압에도 굴하지 않는 식자들이었다.

송건호ㆍ장준하ㆍ김성식ㆍ김재준ㆍ김경재ㆍ이태영ㆍ계훈제ㆍ이문영ㆍ오충일ㆍ전경연ㆍ신복룡ㆍ한승헌ㆍ법정ㆍ이병린ㆍ문동환ㆍ장일조ㆍ안병무ㆍ고은ㆍ백기완ㆍ김관석ㆍ김승훈ㆍ김찬국ㆍ김동길 등이 정기적으로 또는 가끔씩 글을 썼다. 물론 원고료는 지급되지 않았다.(필자도 몇 차례 기고하였다)

함석헌은 결절이나 정보기관에 구금되기를 수없이 하면서도 그에 관해 구체적인 언급은 해오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1974년 여름 중정에 끌려갔다와서는 간접요법으로 이를 피력한 바 있다.

얼마 전 남산(중정-필자)에 가서 이틀 동안 참선을 하고 왔습니다. 정말 참선입니다. 골목의 친구들과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데 거기 사람들과는 참 통하지 않았습니다. 이치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논리도 소용없었습니다. 통치 않는 문답을 자꾸 거듭하면서 지연 신경이 흥분합니다. 흥분하면 아니되겠기에 참습니다. 대답해도 못 알아 듣기에 잠잠합니다. 잠잠하면 왜 대답이 없느냐고 찌릅니다. 그래도 잠잠하긴 참 힘듭니다. 그래 정신을 모으고 참선을 했습니다. (주석 20)

유신의 광기가 극심했던 1975년, 동아일보가 정부의 탄압에 굴복하여 114명의 기자를 해고하고, 긴급조치 7호의 선포와 인혁당 관련자 8명의 사형집행, 서울농대생 김상진 열사의 긴급조치 항의 할복자살, 긴급조치 9호 선포, 사회안전법 제정, 장준하 의문사 등이 잇따른 해였다.

함석헌은 이해 6월호에 <수선화에게 배우라>는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정치적 폭염과 살을 에는 찬서리가 교차되는 시국에서,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신선한 산문이었다. 그는 시론, 평론, 사론 등에서 독특한 문제를 보이지만 산문체 글쓰기가 일품이다.

수선을 왜 수선(水仙)이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 생활 양식을 보면 과련 탈속한 신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들은 여름날 사나운 볕(폭양)의 찌고 내리지짐을 넝쿨식의 복종이나 응달에 피는 꽃식의 아첨으로 지내든지 그렇지 않으면 사막의 드문 오아시스의 종려 야자식으로 간신히 지하수의 샘에 뿌리를 박고 버티어 봄으로 지내는데, 이 연한 수선은 종려식의 영웅주의를 나타낼 맘도 없지만 또 넝쿨식의 아첨도 차마 할 수 없어 겸손의 길을 취해 신선답게 굴복도 대항도 아니하고 써늘하게 땅 속에 눈을 감고 조용히 명상을 하여 들어오는 악(惡)을 제 속에서 장차 올 랄을 위한 신비론 선(善)의 양식으로 전환을 시킵시다. 그러니 결코 잠이 아닙니다. 때를 거꾸로 이용하는 지혜의 싸움입니다. (주석 21)

함석헌의 글은 그것이 평론이든 사론이든 사론이든 산문이든 서한문이든 각기 ‘글 말’이 있고, ‘속내’가 깊고, ‘여운’이 남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 글도 마찬가지다.

“수선은 높은 지대가 아니라 낮은 누습한 늪 지대에 잘 됩니다. 높은 지대는 살고 싶다는 강자에게 주십시오. 뺏는대로 뺏기십시오. 그리고 겸손히 땅 속에서가 아니고는 살아 지낼 수 없는 사회의 누습 지대를 하늘만 주는 땅으로 알고 여름 잠을 자십시오. 봄이 올 때 조그만 한들 바람만 불어도 억억만만이 일시에 춤을 추어 부르는 황금 노래는 씨알이 아니고는 못할 것입니다.” (주석 22)


주석
20> 함석헌, <모산 야우(毛山 夜雨)>, <씨알의 소리>, 1974년 10월호, 8쪽.
21> <씨알의 소리>, 1975년 6월호 4~5쪽.
22> 앞의 책,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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