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2장] 유신타도, 박정희와 전면대결

2013/02/05 08:00 김삼웅

 

 

제31호(1974년3월호)

1974년 3월호에는 <씨알의 소리> 편집장을 하면서 오랫동안 함석헌을 지켜보아온 박선균이 <74회 생신 맞은 함선생님>을 기고하였다. 글은 10여 일 동안 독감으로 누워계셨다는 소식부터 삶의 역정과 가족의 근황까지 전한다.

그동안 선생님을 존경하는 이들이 표현했듯이 “마지막 남은 지사적 사상가요”, “씨알철학의 야인이요”, “개성 있는 역사가요”, “한국의 간디요”, “진리의 화살맞은 사람이요”, “민족적 대서사시인이요”, “한국의 목소리”라고 했지만, 선생님의 정신적 고향은 결국 팔레스타인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때로는 HㆍG 윌스, 앨도우스 헉슬리, 제럴드 허드 등 서구적 사상가에 심취되기도 하지만 “팔레스타인에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중국을 거쳐 한국에 와서 살고 있는 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하지만 선생님은 스스로 이르기를 “나는 실패한 사람”이라 하고 바보새(信天翁)이라 이름 지었다. 나를 때는 2미터나 되는 날개로 끝없는 하늘을 날 수 있지만, 지상에 내려앉으면 걷는 것이 서투르고 고기잡을 줄 몰라 먹다남은 찌꺼기를 먹고산다는 바보새. 선생님이 왜 ‘바보새’라고 부르시는지 그 뜻을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다.
(주석 13)

함석헌의 아호처럼 된 ‘바보새’얘기는 뒤로 미루고, 근황과 가족문제를 인용한다. 이 무렵 치열했던 일면을 살필 수 있다.

선생님은 요즘 자신의 삶의 동그라미를 마주 그리시겠다는 씨알 집필 외에도 계속 바쁜 일정을 보내시는 편이다. 주일예배(봉원동 퀘이커 모임 오전 10시), 성서모임(명동가톨릭여학생회관 주일 오후 3시), 고전강좌(정동 전센기념관 매월 요일 오후 7시), 부산모임(복음병원 매월 둘째 주일 오후 3시)등을 이끌어 오시고 있다.

선생님의 슬하에는 2남 5녀가 있으나 장남과 장녀는 이북에서 월남하지 못하고 말았다. 금년 73세인 사모님 황득순 여사는 와병으로 기동을 못하신 지가 만 5년, 선생님은 가족과 함께 사모님의 간호에 또한 여념이 없으시다.
(주석 14)

주석
13> <씨알의 소리>, 1974년 3월호, 71쪽.
14> 앞과 같음.

 




01.jpg
0.23MB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