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2장] 유신타도, 박정희와 전면대결

2013/02/04 08:00 김삼웅

 

 

제30호(1974년1,2월호)

함석헌은 민주화 투쟁의 최전선에서 독재와 맞서 투옥ㆍ연행ㆍ연금을 거듭하면서도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씨알의 소리>는 꾸준히 발행하였다. 압수와 제작방해가 심했으나 결단코 멈추지 않았다. 1973년 11월호부터는 50쪽 분량으로 축소되었다. 비용문제도 없지 않았으나 당국의 방해로 원고가 통째로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1974년 신년호는 1,2월호 합병이었다. 함석헌은 <망(亡) 불망(不忘)>을 “새해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의 제목으로 붙였다. 잡지를 계속 펴내게 되는 속내를 들려주는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씨알 여러분께 간곡히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씨알의 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나 개인으로는 페스질롯지의 이른바 “채 익지 못하고 버러지 먹고 병들어 여름철에 빨리 떨어지는 과일”의 심정이었습니다. 올차게 자라지는 못했지만 이것으로나마 석어 나를 낳고 길러준 그 뿌리로 돌아가 거름이 돼보잔 생각이었습니다. 그후 몇몇 친구들이 마음을 모아 도와주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카네기의 스스로 쓴 그의 묘비의 글귀를 자주 생각합니다. “자기보다 위대한 많은 사람들을 자기 위주에 모았던 카네기”라고 했다는. 확실히 지금 씨알의 소리를 놓고 모인 중만한 동지들은 우리나라에서는 다시 없는 어진 마음들이라고 나는 고맙게 생각합니다. 내 분에 넘치는 양심들이요 핵심입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이 어려운 상황에서 견디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말씀 드리기 전에 여러분이 이미 잘아시는 중 압니다마는 이 소리의 목적은 지식을 전해드리자는 것도 아니요, 소위 말하는 교양도 아닙니다. 여러분, 속에 스스로 가지고 계시는 뜻 하나를 키워가자는 것뿐입니다. 장작은 마주 대여야 불길이 서고, 눈은 마주 보여야 사랑이 생기고, 뜻은 마주 잡아야 위로 솟습니다. 우리 뜻을 길러 이 역사의 흐름을 돌려가야 합니다.
(주석 11)

함석헌은 1973년 여름 천안 - 온양 사이의 모산(毛山)에 있는 구화고등공민학교를 인수하였다. 천안의 씨알농장을 처분하여 그동안 밀린 빚을 청산하고 남은 돈으로 인수한 것이다. 어떤 분이 17년 동안 운영해오던 것을 씨알농장처럼 이것도 떠맡아 경영을 하게 되었다. 함석헌은 이 소식을 <망불망>에 상세히 전한다.

한 때는 여러 백명 학생이 있었는데 중학교가 지역제로 된 이후 학생을 천안, 온양에 대부분 뺏기고 지금은 130명 가량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맡은 이후 교사진영을 새로이 했고 건축하다 말고 내버려두었던 교사를 수리하고 변소를 새로 짓고 하나씩 정돈을 하여 자라나는 생명에 맞는 환경을 만들려 노력하는 중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다 그렇듯이 무슨 자금이 넉넉히 있어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도 해야할 일이니 무슨 손을 댄 것입니다. 나는 맡아 놓기는 하고도 “왜 내게는 되지 않을 일만이 오느냐”고 몇 번이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동안 계선생(계훈제-필자)이 교장으로 가 계셨고, 나는 이따금밖에 못갔습니다.

그러나 장차로는 이것을 직업학교로 충실시켜 가자는 계획입니다. 생활교육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함으로써 씨알교육의 터를 닦자는 생각입니다.
(주석 12)

함석헌은 민족의 선각자들이 오산에 민족학교 오산고보를 세우고, 자신도 거기서 민족혼과 민중의 얼을 배웠듯이, 오산에 그와 같은 학교를 만들어 씨알교육의 전당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하지만 일제치하와 크게 다르지 않는 유신치하에서 ‘민족학교’의 운영이 순탄할리는 없었다. 얼마 뒤에 이 학교의 운영을 접었다.

주석
11> <씨알의 소리>, 1974년 1,2 합병호, 4쪽.
12> 앞의 책,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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