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1장] <씨알의 소리> 창간, 반유신투쟁의 선봉장

2013/02/01 08:00 김삼웅

 

 

1976년 3월 1일 저녁 서울 명동성당에서는 3ㆍ1운동 57주년을 기념하는 기도회가 열리고 있었다.
700여 명의 신구교신자들이 모인 가운데 열린 기도회는 예정대로 진행되다가 기도회가 끝날 무렵 이우정 전 서울여대 교수가 미리 준비한 <민주구국선언문>을 낭독함으로써, 유신체제에 재야지도자들이 정면대결하는 3ㆍ1민주구국선언사건이 일어났다.

구국선언문의 서명자는 함석헌을 비롯하여 윤보선ㆍ김대중ㆍ정일형ㆍ윤반웅ㆍ김승훈ㆍ안병무ㆍ이문영ㆍ서남동ㆍ장덕필ㆍ함세웅ㆍ김택암ㆍ이우정ㆍ문정현ㆍ이해동ㆍ김택암ㆍ은명기ㆍ문동환 등 정계ㆍ종교계ㆍ학계의 지도급 인사들이었다.

이날 전격적으로 발표된 <민주구국선언문>은 ① 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② 경제 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③ 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진 최대의 과업이다 라고 하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결론에서 “이 때에 우리에게는 지켜야할 마지막 선이 있다. 그것은 통일된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한 최선의 제도와 정책이 ‘국민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대헌장이다. 다가오고 있는 그날을 내다보면서 우리는 민주역량을 키우고 있는가, 위축시키고 있는가”라고 묻고 있다.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고 촛불시위를 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김대중은 2년 10개월 동안 감옥에 갇힌다. ⓒ김대중평화센터

선언문을 발표한 재야인사들과 신도들을 명동성당을 내려오면서 시위를 하려고 했으나 출동한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경찰은 이날 집회에 참석한 인사 가운데 이우정ㆍ장덕필ㆍ문동환ㆍ김승훈을 현장에서 연행하고, 일주일 사이에 선언문에 서명한 전원을 연행하였다. 윤보선만 전직대통령을 예우하여 불구속 입건하였다.

함석헌도 체포되어 남산 중앙정보부 조사실에서 며칠 밤을 세우며 조사받고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았다. 일제시대, 이승만시대에 이어 박정희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대문구치소에만 세번째였다. 그러나 얼마 뒤 노령을 감안한 것인지, 그 위상을 고려한 것인지 구속에서 풀려나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았다.

검찰은 3월 26일 구국선언 서명자 20명 중 김대중ㆍ문익환ㆍ함세웅ㆍ문동환ㆍ이문영ㆍ서남동ㆍ안병무ㆍ신현봉ㆍ이해동ㆍ윤반웅ㆍ문정현 등 11명을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구속 기소하고, 함석헌ㆍ윤보선ㆍ정일형ㆍ이태영ㆍ이우정ㆍ김승훈ㆍ장덕필 등 7명은 불구속기소, 김택암ㆍ안충석 2명은 기소유예 처분했다.

함석헌 선생은 어느 때부터인가 거친 베옷 두루마기를 입고 출정했다.
판사가 왜 베옷을 입고 나왔냐고 묻는 것이다. 그 의도를 몰랐다면 그는 미련한 사람이다. 알고도 물었다면 그의 의도를 나타낼 기회를 준 셈이다. 함 선생은 물론 상복을 나타낸 것이다. 그는 즉각 “한 집안의 어른이 돌아가도 상복을 입어 애도를 나타내거늘, 하물며 양심도, 법도 그리고 나라가 죽었는데 상복을 안 입을 수 있느냐”고 반문함과 동시에 일장의 연설을 했다. 백발노인의 그 행동은 그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판사를 향한 것이 아니라 청중을 향하여 애족의 분노를 터뜨렸다. 언제나 잔잔한 웃음이 눈가에서 시작하여 얼굴 전체에 흐르는 그의 얼굴이 그렇게 사납고 분노에 찬 것은 처음보는 일이다. 정말 모든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주석 23)

1974.7.16 제헌절 강연회에서 이병린, 함석헌

삼복더위에 재판이 계속되었다. 당초 이 사건은 시위가 크게 벌어진 것도 아니고 시민들이 합세하지도 않아서 단순 집시법위반 정도로 다루려던 것을 박정희가 서명자 중에 김대중의 이름을 보고 ‘진노’하면서 대통령 ‘관심 사항’으로 격상되었다. 그래서 복중에 재판이 강행되었다. 함석헌에게는 10년 징역에 자격정지 10년이 구형되었다.
그리고 1976년 8월 28일 1심 판결이 선고되었다. 담당 재판부(재판장 전상석, 배석 재차룡ㆍ황우여)는 피고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중형을 선고했다. 함석헌ㆍ김대중ㆍ윤보선ㆍ문익환에게는 각기 징역 8년과 자격정지 8년을, 문동환ㆍ문정현ㆍ신현봉ㆍ윤반응ㆍ이문영ㆍ이우정ㆍ이태영ㆍ정일형ㆍ함세웅 등 9명에게는 각기 징역 5년과 자격정지 5년을, 서남동에게는 징역 4년과 자격정지 4년을, 안병무ㆍ이해동에게는 각기 징역 3년과 자격정지 3년을, 김승훈ㆍ장덕필에게는 각기 징역 2년과 자격정지 2년에 집행유예 3년, 징역 1년과 자격정지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였다.

대통령 긴급조치 9호 등의 불법성과 유신체제는 용인될 수 없는 악법이고 현정부 또한 악정을 하고 있으므로 이에 저항하여 유신헌법의 폐지를 요구하는 것은 시민의 당연한 저항권이라는 피고인들과 변호인단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사실을 왜곡 전파하고 대한민국의 헌법을 왜곡 비방하면서 그의 폐지를 주장 선동하고 긴급조치 제9호를 공연히 비방하였다는 검찰의 공소사실을 그대로 인정하였다. 검찰의 기소장과 재판부의 판결문이 복사판이었다.

함석헌 등 피고인 전원이 항소하였다.
항소심에 기대를 해서가 아니라 법정투쟁을 통해 소신을 밝히고 역사적 진실을 재판기록에 남기기 위해서였다. 연말의 항소심에 이어 상고심은 1977년 3월 22일 대법정에서 열렸다.

최종심에서 함석헌은 김대중ㆍ윤보선ㆍ문익환과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
서명자 대부분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대법원 전원합의제(재판장 민복기 대법원장)는 ① 민주구국선언은 사실을 왜곡하고 있고 ② 긴급조치와 헌법을 비방하고 있으며 ③ 원심에 사실오인이 없고 공소사실은 인정된다는 판결 이유를 들어 피고인 전원에 대해 상고를 기각했다.

함석헌 등 피고인들은 “인간의 양심과 자연법 그리고 인간의 절대권과 우상화를 거부하는 신앙에 비추어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에 반대한다. 그 긴급조치에 의해 이 법정에 섰으므로 마땅히 재판을 거부해야 할 일이니 우리들의 정당성과 양심을 밝히기 위해 재판에 임한다”고 입장을 밝히면서 재판부의 판결을 비판하였다. 함석헌은 고령을 이유로 면소판결을 받아 옥고를 치루지는 않았다.

함석헌은 3ㆍ1구국선언사건에서 5년 징역, 5년 자격정지에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심회의 일단을 밝혔다.

나는 지난 1년 동안 소위 3ㆍ1사건으로 인해 재판받으러 왔다갔다 하느라고 거의 모든 시간을 다 써버렸고, 이제 5년 징역에 5년 자격정지에 형집행정지라는 처분을 받았습니다. 나는 재판을 받을 때마다 소크라테스를 생각하면서 앉아 있었습니다. 그가 제 손으로 독배를 들이마신 것은 결코 그 법을 옳다 생각해서도, 자기가 정말 죄를 지었다. 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자기의 옳은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자기를 죄 주고 죽이는 그 아테네 국민을 불쌍히 여겨 그도 하여금 제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한 일이었습다. (주석 24)

주석
23> 안병무, <3ㆍ1민주구국선언사건과 나>, <새롭게 타오르는 3ㆍ1민주구국선언>, 146쪽, 사계절, 1998.
24> 김용준, <긴급조치와 3.1민주구국선언>, <내가 본 함석헌>, 292~293쪽,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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