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5장] 살육의 5공시대, <씨알의 소리> 또 폐간

2013/02/24 08:00 김삼웅

 

 

983년 3월 한길사

함석헌의 80순을 넘긴 1982년 암담한 시국에서도 지인들이 ‘함석헌선생 8순기념문집 간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씨알ㆍ인간ㆍ역사>라는 390쪽 분량의 문집을 발간하였다. 문집편집위원에는 김동길ㆍ김성식ㆍ김용준ㆍ송건호ㆍ법정ㆍ안병무 등이 참여했다.
문집은 안병무의 <선생님께 드리는 글>, 박두진의 기념시 <빙원행>에 이어 제1부는 안병무의 <순수와 저항의 길>, 송건호의 <언론인 함석헌>. 김경제의 <뜻ㆍ역사ㆍ민족>, 송기득의 <함석헌의 저항론>을 묶었다.
제2부는 양호민의 <마르크스ㆍ레닌의 민족이론>, 박현채의 <한국농업의 상황과 농업혁명에의 길>, 장을병의 <평등이념의 정치적 접근>, 제3부는 안병무의 <세례요한과 예수>, 유동식의 <한국사상과 기독교신학>, 장일조의 <인간의 자기해방과정으로서의 역사>, 남정길의 <정의관념의 붕괴와 그 결과에 대한 고찰>, 제4부는 장회익의 <인간:우주적 실재에 대한 역사적 모형>, 김용준의 <분자생물학의 현재>, 장기홍의 <지구의 초기사>, 제5부는 김성식의 <이집트 문화의 재음미>, 김정환의 <페스탈로찌의 정치철학적 저작 연구>, 이태영의 <자녀의 양육에 관한 연구>가 쓰였다.

한길사는 1983년 3월부터 함석헌전집 편찬위원회를 구성하고 1988년까지 20권의 전집을 펴냈다.
편집위원은 계훈제ㆍ고은ㆍ김동길ㆍ김성식ㆍ김용준ㆍ법정ㆍ송건호ㆍ안병무로 구성되었다.
전집은
1. 뜻으로 본 한국역사.
2. 인간혁명의 철학.
3.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4. 죽을때까지 이 걸음으로.
5. 서풍의 노래.
6. 수평선 너머.
7. 간디의 참모습 / 간디 자서전.
8.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9. 역사와 민족.
10. 달라지는 세계의 한길 위에서.
11. 두려워 말고 외치라.
12. 6천만 민족 앞에 부르짖는 말.
13. 바가바드 기타.
14.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15. 예언자 / 퀘이커 3백년 외.
16. 사람의 아들 예수 / 예언자 [칼린 지브란]
17. 민족통일의 길.
18. 씨알의 옛글 고쳐 읽기.
19. 영원의 뱃길.
20. 함석헌의 삶과 사상.
(주석 14)

당시 생존 인물의 저작물이 20권의 전집으로 묶여나온 것은 최초의 일이었다. 함석헌은 80여 년의 생애에서 그만큼 많은 글을 쓰고 강연, 인터뷰 그리고 여러 권을 번역한 노력의 결정이었다. 편집위원회의 간행사 몇 대목이다.

“이 시대에 살면서 글줄이나 읽은 사람치고 ‘함석헌’이라는 이름 석 자를 기억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삶과 뜻을 훌륭하다 칭찬하는 사람, 또는 부질없다 나무라는 사람, 또는 마땅치 않다 욕하는 사람이 다 있어 그 의견이 한결같을 수는 없으나, 그 누구도 함석헌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잡아떼지는 못할 것이다. 뭐니뭐니해도 해방 후 40여 년, 아니 그 이전 일제시대부터의 이 나라 이 민족 역사에 있어서 그의 이름은 언제나 그 현장에 있었고 또 매우 아름다운 이름이 되어오고 있다.”

“그러나 막상 ‘함석헌이 어떤 사람인가?’하고 누가 묻는다면 성큼 ‘이런 사람이다’ 라고 대답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그런 인물이다. 금강산에는 만물상이 있는데, 이렇게 보면 이런 것 같고 저렇게 보면 저런 것 같아서 무어라 이름 짓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이런 면이 있는가 하면 또 저런 면이 있으니, 어떤 형용사도 그 바위산의 특정을 나타내지 못하여 만물상이라는 이름이 붙였을 것이다.”

“학자이기도 하고 학자가 아니기도 하고, 문인이면서 문인이 아닌 함석헌은 또한 종교인이면서 종교인이 아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 기독교를 배우고 우찌무라ㆍ유영모 같은 이들의 여향을 받았으며, 현재는 퀘이커 교도들 모임에 몸을 담고 있는 그가 크리스찬인 것만은 확실하지만, 그러나 그는 전통적인 신앙의 기독교인은 아니다.”

“그는 정치와는 아주 거리가 먼 곳에서 늘 살아왔지만 해방 이후 이땅의 가파른 정치사에 큰 선을 긋는 영향을 미쳤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언론인이 아니지만 칼날같은 날카로운 붓끝으로 한 시대의 잘못을 고발한 언론인이 또 누구이겠는가? 그의 붓끝을 따라 한 시대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였다.”

“함석헌은 누구인가? 만물상이기 때문에 뭐라고 잘라서 말하기는 어렵다. 몇 마디로 굳이 표현하자면, 그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이며 ‘죽어가는 시대의 양심’이다. 그는 ‘민중의 대변자’로서 ‘시대의 예언자’로서, 이 날 이 시간까지 살아왔다. 그는 ‘씨알’을 위해 씨알과 더불어 깊이 생각하고 멀리 내다보면서 가시밭길 80년을 헤치고 예까지 걸어온 우리 시대의 자랑스런 얼굴이다. 에머슨이 ‘위대한 것은 오해받기 마련’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지만, 인간 함석헌은 바로 그럴 수밖에 없는 삶과 역사를 살아온 우리 시대의 참 인간상이다.”
(주석 15)

함석헌전집은 민주화의 열기를 타고 20권의 분량에도 불구하고 공전의 인기를 불러모았다. 그런데 뒷날 함석헌기념사업회는 이 전집의 많은 오ㆍ탈자를 비롯 문장의 부분적인 탈락 등편집상의 여러 가지 부실성을 들어 판매금지를 요구하고, 출판사가 이를 수용하면서 서점에서 절판되었다. 전집 편찬 이후에 발굴된 각종 자료까지 포함하여 새 전집의 발간이 기대된다. 


주석
14> <씨알ㆍ인간ㆍ역사>, 차례, 한길사, 1982.
15> <전집>, <함석헌전집 간행에 부쳐>, 3~5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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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5장] 살육의 5공시대, <씨알의 소리> 또 폐간

2013/02/23 08:00 김삼웅

 

 

한승헌 변호사가 조작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생계형’으로 삼민출판사를 차렸다. 그리고 1982년 5월 함석헌의 <씨알의 옛글풀이 하늘 땅에 바른 숨 있어>를 펴냈다. 그동안 <씨알의 소리> 등에 연재한 동양고전을 묶은 것이다. <제1장, 동양정신의 뿌리>, <제2장 장자>, <제3장 둬두는 정치 (속 장자)>, <제4장, 노자>, <제5장 맹자>, <제6장 잡편>이다. <예와 이제(古今)>이란 서문의 한 대목을 보자. 그의 고전에 관한 인식의 편린을 알게 된다.

길을 찾기 위해 나는 옛길을 다시 읽어보자는 것이다. 왜? 그 안에야말로 인간의 인간다운 기본적인 모습, 그리고 그렇게 살고 죽는 길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 때야말로 초창시기기 때문에 사치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고, 비교적 간사한 지혜가 없이 순전히, 너도 살고, 나도 살며, 나도 인간답게 죽고 너도 인간답게 죽어, 이 인생을, 이 생명을 이 하늘을 한 뜻 속에 실현해보려고 애썼던 것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중략) 세상 풍조는 새것만을 좋아하고 옛것을 존중할 줄 모르지만 뜻 있는 이는 그렇지 않다. 옛날에 위대했던 이들은 예외 없이 다 옛길을 찾았다. 모든 종교, 모든 철학이 그것을 증거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고등기술의 급작스런 발달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날마다 변하는 새 풍조만을 따르고 옛 정신을 거의 무시하게 됐지만, 이대로 오래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주석 11)

이 책의 <잡편>에 풀이한 굴원(屈原)의 글 <고기잡이 늙은이가 묻기를>에서는 이 무렵 함석헌의 심기와 통함을 느끼게 한다.

굴원이 이미 내침을 받음에 강담에 놀아 못가에 걸으며, 읊조리니 낯빛이 바싹 마르고 모양이 마른 나무처럼 시들었더라. 고기잡이 늙은이가 보고 묻기를, 그대 삼려대부가 아닌가. 무슨 까닭으로 여기 이르렀는고,

굴원이 가로되, 온 세상이 다 흐렸는데 나 홀로 맑았고, 뭇 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 홀로 깨었노라. 이러므로 내침을 보았노라. 고기잡이 늙은이가 가로되, 어진 이는 무엇에나 걸림이 없어 세상으로 더불어 잘 어울려 옮겨가는 것이다. 온 세상이 다 흐렸거든 어찌하여 그 진흙을 휘저으며 그 물결을 일으키지 않는고. 그러고는 깊이 생각하고 높이 서서 스스로 내침을 받도록 하는고. 굴원이 가로되, 나는 들으니 새로 머리 감은 이는 반드시 감투를 튕겨서 쓰고 새로 몸 씻는 이는 반드시 옷을 털어서 입는다하니, 어찌 내 몸의 깨끗함을 가지고 남의 얼룩덜룩한 것을 받을 수 있겠는가. 차라리 소상강에 나가 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낼 지언정 또 어찌 차마 희고도 흰 맑음을 가지고 더러운 세상의 티끌을 무릅쓸 수 있겠는가. 고기잡이 늙은이 빙긋이 웃고 뱃삯을 쳐 떠나가면서 노래하기를, 창랑물 맑거들랑 내 갓끈을 씻읍세나, 창랑물 흐리거들랑 내 발을 씻읍세나. 드디어 가 버린 다음 서로 다시 말이 없더라.
(주석 12)

함석헌은 죽을 때까지 퀘이커교인으로 생활하였다. 세계적으로 연대를 갖고 국제 모임은 물론 국내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였다. 그리고 1985년 11월에는 삼민사에서 <현대의 선(禪)과 퀘이커신앙>을 편역하기도 했다. 함석헌은 영문학자로서 일본 퀘이커의 원로인 이기에 유끼오의 <퀘이커의 길>은 1958년 호주 퀘이커 연회에서 퀘이커신앙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소개할 목적으로 펴낸 것을, 그쪽에서 한국의 청소년들을 위하여 펴내기를 희망하여 번역하게 되었음을 서문에서 밝힌다.

이 책은 <제1부 기독교는 달라져야 한다>, <제2부 종교의 원천을 찾아서>, <제3부 퀘이커의 길>로 구성되었다. 1부는 함석헌이 퀘이커 예배모임에서 발표한 내용이고, 2부는 유끼오의 글을 조형균의 번역, 3부는 부길만이 각각 옮겼다. 함석헌은 이 책을 펴내는 이유를 말한다.

이상하게도, 그 진실하고도 담대한 정신의 개척자들이 북아메리카에도 가고, 아프리카에도 가고, 인도에도 가고, 일본에까지 오면서도 오직 우리, 졸고 있는 은둔자라 불리던 우리에게만 늦었다. 그래서 인류역사에서도 드물게 보는 끔찍한 환난인 6ㆍ25에 와서야 비로소 그 개척자들의 발길이 우리나라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먼저 그 물결에 접한 우리의 정성이 부족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이 수난의 여왕의 지침이 너무해서 그랬는지, 30년이 넘는 동안 우리는 이렇다할 만한 새 정신의 증거를 한 것이 없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차차 젊은 혼들로부터 “퀘이커란 무엇입니까” 하는 고마운 질문을 받게 된다. 지금 여기 펴내는 조그만 책자도 그러한 질문에 대답을 함으로써 새로 남의 꿈틀거림을 일으켜보자는 하나의 움직임이다. (주석 13)

여기서 함석헌의 책 얘기를 덧붙이기로 한다. 그의 사회적인 명성이 높아지면서 출판사들의 책 출판이 이어졌다. 1959년 3월 생각사에서 처음으로 펴낸 <새 시대의 전망>은 반응이 좋아지면서 1979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게재하여 몇 달 만에 5쇄까지 찍었다. 기왕에 발표했던 글을 묶은 책이다.

이에 앞서 1969년 1월 칼릴 지브란의 번역서 <예언자>가 삼중당에서, 역시 번역한 지브란의 <사람의 아들>이 1976년 5월 한샘문화원에서 출판되었다. 1978년 10월 휘문출판사가 <씨알은 외롭지 않다>, 1979년 4월 동광출판사가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1985년 11월 한길사가 산문을 모은 <들사람 얼>을 각각 펴냈다. 이들 책에는 중복된 내용이 많아서 독자들을 실망시켰다는 평도 따랐다. 휘문출판사는 1989년 “나의 인생관” 시리즈 10권을 편찬하면서 함석헌의 책을 <씨알은 외롭지 않다>라는 제목을 달아 펴냈다.


주석
11> 함석헌, <하늘 땅에 바른 숨 있어>, 5~6쪽, 삼민사, 1982.
12> 앞의 책, 315~316쪽.
13> 함석헌 외, <현대의 선과 퀘이커의 신앙>, 2~3쪽, 삼민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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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5장] 살육의 5공시대, <씨알의 소리> 또 폐간

2013/02/22 08:00 김삼웅

 

 

5공 시대에 잡지와 가진 인터뷰는 <월간 마당>이 처음이었다.
1981년 5월에 갓 창간한 잡지였다. 앞 장에서도 인용한 바 있는 퀘이커 관련 회견이 중심이었다. 인터뷰어는 “꿋꿋한 허리, 정정한 목소리, 조리 있는 말은 80대 노인을 장년처럼 느끼게 한다”고 적었다. 이 잡지 25~37쪽에 실린 회견문 중에서 ‘발문’을 소개한다. 당시 함석헌의 정신을 살필 수 있다.

“꼭 기독교에만 진리가 있다든지 그런 입장이 아니라는 말이야. 종교라는 것은 어느 종교나 스스로 절대화해서 우리에게만 진리가 있다고 하죠.”

“기독교가 찾는 하나님이란 자리를 노장(老莊)이 말하면 도(道)라 하지 않겠는가, 그걸 관념적으로 분석하면 다를 지 모르지만, 믿는 입장에선 그 자리가 같아.”

“사회적인 문제가 해결될려면 기독교인을 통해서 해야될 것인데 이 사람들이 이렇게 썩어가니 어떻게 해야될지! 그들이 도무지 이렇게 무식한 짓을 할 줄 몰랐어요.”

“이 도교(道敎)가 평화주의야요. 우리나라 선비사상도 그렇고, 단군신화에 전쟁 이야기가 안 나오는 것은 주의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다가 압박을 받으면서 비겁하게 달라져 버렸어.”

“진리가 다수에만 있는 법이 어디 있느냐, 한 사람에게도 있을 수 있는데, 이런 뜻에서 퀘이커에서는 다수 가결이 없어요. 전원일치제지요. 절대 서두르지 않고 토론을 충분히….”

“쓸데 없는 곳에 돈을 가장 많이 들여 하는 게 전쟁이니 최고의 사치지요. 실제로도 사치 생활과 전쟁은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기업 유지 위해 전쟁하는 것 아닙니까?”

“국민 전체는 말할 것도 없고 젊은 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을 만한 인격이 솔직한 말로 한 사람도 없다면 이것은 참 걱정 아닙니까? 재목은 길러야지 내 생각과 다르면….”

“난 흑백논리가 아주 싫어요. 이 우주의 본의가 뭔고 하니, 온갖 꽃과 수만 가지 식물, 곤충들만 보더라도 다원의 세계지요. 다(多)이면서 하나, 하나이면서 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물었다.

“함 선생님을 비난한 책을 최근 서점 주인들이 진열하지 않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그건 그러라고 그래요. 내버려 두라고 그래요. 나는 믿으니까. 하나님 일 아닌 것 없다고 생각하는 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걸 누가 어떻게 하겠나, 무슨 까닭이 있어 그러시갔디. 내 잘못이 없다는 것 아니야, 있기야 있지만…. 이런 것을 내가 말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한국의 지성에 대한, 도덕에 대한 시험인지도 몰라요.
(주석 9)

당시 정보기관의 후원으로 제작된 <위선자 함석헌> 등의 책을 서점 주인들이 판매를 거부하였다. 이런 경우는 찾기 드문 현상이었다. 함석헌은 온갖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이만큼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함석헌은 1983년 5월에는 <신동아>에서 언론인 최일남과 인터뷰하였다. 5공체제에서 제도권 언론과는 쉽지 않았던 인터뷰였다. 최일남은 3년 전에도 인터뷰를 한 적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질문과 답변 몇 대목을 뽑았다.

- 민족주의가 왜 뒤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근거는?
◇ 한 민족에도 우리 편이 있고 우리 편 아닌 것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역사의 문제도 세계적으로 해석해야지 민족주의만으로 풀어가서는 안됩니다. 물론 민족 자체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고, 내셔널리즘만 가지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걸 모르고 민족주의만 내세우는 걸 보면 안타까와요. 식민지에서 해방된 것은 사실이나, 그것만 가지고는 우리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어요. 세계 인류가 같은 운명으로 나가야 합니다. 민족은 영원한 것이니까 그걸 잊어버리는 것은 아니나, 모든 문제를 풀어가는 기본이 민족에 있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나는 찬성할 수 없어요.

- 우리 민주주의의 수준을 어떻게 보십니까?
◇ 맞아요. 자꾸 가르쳐야 합니다. 의식이 박약해요. 여기에는 언론의 힘이 큰데… 우리는 고려 이후부터 그랬습니다. 국민의 기운을 키워주어야 하고 이것은 정치의 양심입니다.

- 야인이란 말은 저같은 속물에게는 멋있게도 들립니다.
◇ 멋이란 것이 있나요. 우리나라는 껍데기만 보니까 그럴지 몰라도, 이상주의로 보는 게 옳습니다. 좀 경지를 높이자면 엄자릉(嚴子陵)이나 허유 소부(許由 巢父) 같은…. 그와 관련해서 한 마디 할 것은, 나는 굉장히 간소한 생활을 내세우는 사람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래 가지고는 안 됩니다.

- 때로 좌절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 살아오시는 동안에 말입니다.
◇ 마음은 약한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극복이 됩니다. 낙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나는 절대 긍정주의자입니다. 살고 싶다고 살고 안 살고 싶다고 안 살수 있습니까. 어떻든 살아야 하니까. 좌절까지는 모르지만 힘껏 살아오고 있습니다. 정신 가다듬고 목숨 있는 한은 말입니다.

- 함석헌, 그는 평생 돈과는 인연이 먼 사람으로 보인다.
◇ 그래요. 돈 모을 줄 모르지만 생각도 안해봤으니까. 그 대신 나는 아끼는 사람입니다. 천성이 그래요. 물건을 아끼는 사람입니다. 내게 돈은 없고, 돈이 나를 거쳐갈 뿐이지요. 1928년부터 38년까지 10년 동안 선생 노릇을 한 후로는 줄곧 무직자로 있었는데, 내 수중에는 무슨 형식으로든지 돈이 들어왔다가 나를 거쳐 나갑니다. 따라서 마음은 자유로와요. 살아가는데 걱정 안해요.

- 얼마 전 함옹의 조카되는 분이 분명히 함옹을 가리키는 <거짓 예언자>라는 책을 낸 일이 있다.
◇ 조카도 아닙니다. 괜히 그 놈이 그러는 거지. 개 어머니가 생모가 아니에요. 책 보지도 않았습니다. 보나마나 그까짓거….

- 생애를 후회하지는 않습니까.
◇ 내 마음에 차지는 않지만 후회는 안해요. 고통이 많으나, 그것은 어느 정도 적응해서 이겨나가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믿어서도 그렇겠으나, 노장자(老莊子) 사상의 도움이지요. 그분들도 우리 같은 처지를 겪으면서, 그 가운데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를 터득한 분들이지요. 속된 얘기로 초탈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문제가 나와도 상관없어요. 자기 마음의 자유를 안 잊으니까. 그런 인생관은 어느 정도 되어 있어요. 감히 됐다 안 됐다는 말을 할 수 없을지 모르나, 어떤 사람이고 사람이 무섭다는 생각은 안 해요.
(주석 10)

함석헌은 1982년 1월 30일 YMCA 강당에서 열린 간디 34주기 추모강연회에서 작심하고 전두환 정권을 비판했다. “내란음모라고 왜곡된 광주사태는 반드시 진실이 규명되고 바로 잡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개석상에서 5공비판은 이것이 최초의 발언이 아니었는가 싶다.

이 해 함석헌은 26년간 살았던 원효로 4가 70번지의 집에서 아들이 사는 도봉구 쌍문동으로 이사하였다.
낡은 원효로 집을 혼자 관리하고 지내기가 어렵다. 쌍문동 집은 1985년 8월 28일 의문의 화재로 평생 아끼던 책과 자료가 몽땅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함석헌은 이 해 10월 퀘이커 세계협회의 초청으로 멕스코 종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과 캐나다를 다시 방문했다. 워싱턴 수도 장로회에서 <정치와 종교>, 워싱턴 한인교회에서 <그리스찬의 사명>, LA한인교회에서 <새사람>을 주제로 각각 강연을 하였다. 그리고 연말에는 일본 와세다 교회에서 <한국의 민중운동과 나의 걸어온 길>이란 주제의 강연을 하고 돌아왔다. 이 해에 두번째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추천되었다. 행운의 여신은 끝내 그를 비껴갔다. 그의 꿈은 15년 뒤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이루어졌다.

주석
9> <월간 마당>, 1983년 8월호, 인터뷰어 한용상.
10> <신동아>, 1983년 10월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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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5장] 살육의 5공시대, <씨알의 소리> 또 폐간

2013/02/21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절망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시국의 참담함에 절망하고, 자신을 나락으로 빠뜨리려는 정보기관의 음모에 비관하면서도, 자책을 거듭하였다. 잡지가 강제로 폐간되고, 언론이나 학계 어디를 둘러 봐도 의분이 보이지 않는 삭막한 환경이었다. 그런 속에서도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고전을 강의하고 씨알들의 모임에 달려갔다.

<씨알의 소리> 강제 폐간 이후 함 선생님의 글이나 근황도 매스컴에서는 일체 보도금지 되었으나, 함 선생님은 노자(老子) 모임, 장자(莊子) 모임, 성서모임, 부산모임 등 정기집회와 용기를 가지고 선생님께 초청이 오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말씀을 계속하시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선생님을 연금, 도청, 미행 등 각종 방법으로 선생님의 입을 봉하려고 온갖 탄압을 계속했다. (주석 6)

5ㆍ17쿠데타 세력은 5ㆍ16선배들의 판박이처럼 정치정화법을 만들어 구정치인들을 묶고 양심적 지식인, 언론인들을 추방하면서 5공권력을 구축했다. 광주학살의 잔혹상은 가끔 외국(인)을 통해서나 알려질 정도로 철저히 통제되었다.

1981년 초 오산학교에서는 동문들이 모여 함석헌을 동창회장으로 추대하였다. 1989년 2월 숨질 때까지 유지되었다. 함석헌은 1987년 10월 제11회 인촌 언론상을 받았는데, 상금 1천만원 전액을 오산학교에 기증하였다. 3월에는 몇 지인들이 YWCA 강당에서 80회 생신 강연회를 열어서 <되돌아보는 나의 일생>을 주제로 1시간 여 동안 강연하였다. 8월에는 퀘이커 모임을 원주에서 갖고 요한복음을 풀이하는 여름 수양회에 참석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온갖 음해가 나부껴도 함석헌은 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1959년에 이미 다짐했던 길이었다.

장담은 못하지만 나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걸이를 놓지 않으련다. 삼일운동이 몰아쳐 내세워준 이 걸음 늦추지 않을 것이다. 부자는 뚱뚱해 앉았을는지 모르고, 세력 있는 자는 자가용 자동차 안에서 바아크샤처럼 드러누웠는지 몰라도, 나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걸으련다. 장안 길거리를 두리번거려도 내가 주워가지라고 떨어진 금덩이는 없을테니, 나는 가난한 순조선종 틈에 끼어 뒤도 돌아볼 것 없이 걷고 싶다. 영원히 영원히 빠르나 급하지는 않게, 뚜벅뚜벅 걸으나 느리지는 않게, 길이길이 걸었으면! (주석 7)

정치변혁기가 되면 어김없이 변절자가 생긴다. 정치인 뿐만 아니라 지식인들도 다르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이래 계속되어 온 악습이었다. 잦은 정세의 격변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정치인, 지식인들의 신념과 절조가 낮은 까닭이다. 함석헌은 3ㆍ1운동으로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한 이래, 이 길을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반제, 반공, 반독재의 길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1981년 1월 동광출판사는 <함석헌 수상록 바보새>를 펴냈다.
기왕에 발표되었던 글을 묶어 낸 것이다. <안창호를 내놔라>, <남강 선생님 영 앞에>, <농촌을 살려야 한다>, <늙은 이의 옛날이야기>, <큰 도둑 작은 도둑>, <역사의 격전지를 찾아서>, <내가 맞은 8ㆍ15>, <내가 겪은 관동대지진>, <예수의 비폭력 투쟁>, <간디의 참모습>, <벤들 힐의 명상>, <여자 한 사람으로도 나라를 건질 수 있다>등이 실렸다.

5공 초기의 암담한 상황에서 비록 지난 글이라도 재생하여 씨알들에게 읽히자는 출판사의 뜻이었다. 기획 의도는 적중하여 짧은 기간에 몇 쇄를 찍을 만큼 반응이 좋았다.

함석헌은 1982년 가을 퀘이커 교인들의 초청으로 미국과 캐나다를 방문하였다.
펜실베니아주에서는 젊은날의 스승이었던 우찌무라의 일화가 남아 있던 레딩을 찾았다. 연말에 귀국하였다.

1983년 5월 5일 좀 이색적인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장소는 수유리 안병무 교수의 뜰이다. 신랑은 시인 고은, 신부는 이상화 교수, 주례는 함석헌이었다.
1979년 11월 24일 YMCA강당에서 통대 대통령선출 저지를 위한 위장 결혼식과는 달리 이번에는 정식 결혼식이었다. 신랑 고은은 당시 50세의 만혼, 주례 함석헌은 84세의 고령이었다. 함석헌의 주례사는 길기로 이미 소문이 난 터였다. 이날 주례사도 장장 1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신랑ㆍ신부나 결혼식 장소나, 하객이나 모두 시대와 불화하는 처지였다. 주례는 모처럼 할 말이 많았을 것이고, 듣는 하객들도 지루해하지 않았다.

고은은 오래 전부터 함석헌을 무척 존경하였다.
50 중년에 장가를 들면서 함석헌에게 주례를 맡긴 데서 알 수 있다.
그는 70년대에 <만인보>에서 <어린 함석헌의 스승>을 지었다.

어린 함석헌의 스승

어린 함석헌
평안북도 정주 서당훈장
붓글씨 쓰는 시간
훈장은 일어서서
엎드려
글자 한 자 한 자 쓰는 학동을 살폈다.

먹 확실히 갈고
붓 확실히 꼬나잡은 것도
공부라

훈장이 뒤에서 학동의 붓 낚아챈다
낚아채지는 놈
네끼 이놈

붓을 그렇게 힘없이 잡아서야
어찌 힘찬 글이 써지겠느냐

왜놈 글씨는 이쁘지만
조선 글씨는 첫째 힘차야 하느니라.
(주석 8)


주석
6> 박선균, 앞의 책, 170쪽.
7> <죽을때까지 이 걸음으로>, <전집> 4, 137쪽.
8> 고은 <만인보> 15, 176쪽, 창작과비평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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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5장] 살육의 5공시대, <씨알의 소리> 또 폐간

2013/02/20 08:00 김삼웅

 

 

함석헌이 전두환 정권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주변의 한 켠에서는 음습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독재시대 공권력으로 처리하기 어려운 상대에게 사적 폭력을 자행하는 것은 독재자들이 즐기는 수법이었다. ‘사적 폭력’에는 암살, 테러, 비리조작, 스켄들 날조 또는 과장 등이 동원되었다.

함석헌에게는 아무리 뒤져봐도 엮을 건덕지가 없었다. 그렇다고 돈이나 권력을 탐하지 않아서 재물이나 감투로 유혹할 수도 없고, 재산이 없어서 이를 강탈한 방법도, 잡지 발행 과정을 정보기관이 훤히 꿰고 있어서 세무조사를 해봐야 나올 것이 없었다. 해서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히는 방법 뿐이었다. 함석헌에게는 마침 그런 ‘헛점’이 있었다.

함석헌의 외조카라는 조순명이 1982년 7월 합동 출판사에서 사생활 문제 등을 담은 <거짓 예언자>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책에는 <운명의 여인>, <나이롱 단식>, <사탄아 물러가라> 등 저주 섞인 항목이 들어 있었다. 그는 1965년부터 함석헌에게 “거짓말쟁이”, “색마”, “후안무치” 등 극렬한 용어로 비난해왔다고 한다. 조순명은 이후 1986년에 이 책의 증보판을 펴냈다. 그리고 1992년 <함석헌과 한국 지성들 上下>를 홍익재라는 출판사에서 간행하였다.

1986년 증보판을 낼 때에는 초판 때보다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고 책 제목도 <왠말인가 함석헌>으로 바꾸어서 간행했다. 조순명은 “그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건만, 두번째 역시 그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못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주석 2)고 서문에서 썼다.

1982년 <거짓 예언자>가 나왔을 때 함석헌의 주위에서는 이를 전두환 정권 정보기관의 소행으로 치부했다. 그리고 이심전심으로 이 책에 대해 외면하였다. 독자들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의 ‘외도’와 관련한 소문은 주변에서 끊임없이 회자되었고, 본인도 공개석상에서 이를 시인하면서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거짓 예언자>들의 내용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김용준 교수의 지적이다.

나는 지난 번에 함 선생님이 “아내 아닌 다른 여인을 범하였다”는 표현을 쓰기는 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절대적인 차원에서 하는 소리다. 풍문에 여러 말들이 떠돌았지만 확실치도 않다. 이런 풍문을 여기에 옮겨 놓을 수도 없지만, 다만 씨알농장에서 자진해서 선생님의 취사와 살림살이를 돕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나온 오모 여인과의 사건인 것만은 확실하다.

내가 알기로는 그런 일이 있은 다음 이 여인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자기의 은사인 김석목 교수에게 고백한 것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주석 3)

함석헌이 1957년 천안에서 씨알농장을 경영할 때 오모 여인과 관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일로 그는 참회를 거듭했다. 당시 44일 간의 긴 단식 기도에는 이에 대한 반성도 포함되었다. 1960년 9월(30일) 당시 독일에서 공부 중이던 안병무에게 보낸 함석헌의 편지에도 ‘참회’의 내용이 엿보인다.

내가 분명 죄 되는 일을 한 게 있습니다. 벌써 전부터 있던 일이지만 그것이 금년 1월에 와서 가까운 친구들에게 알려져 문제가 되었습니다. 단식도 그래 했고 글과 말을 그만두고 모임을 중지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지금 할 수 없고, 한 마디로만 들어주십시오. 여성문제에서 잘못한 것입니다. 놀라고 슬퍼하실 줄 압니다마는 사실입니다. 친구들 다 소식 끊어졌고 류 선생(유영모-필자)도 매우 섭섭하게 여기시는 중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우선 형이 나를 친구로 계속해 대해주겠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나로서는 그럴 염치 없고 형의 넓은 생각에 달렸습니다.(…) 하지만 내 혼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나를 버리지 않거든 또 소식 주십시오. 아아! (주석 4)

함석헌의 이런 ‘외도’를 빌미로 조순명은 줄기차게 ‘외삼촌’을 비방하고 다녔다.
<거짓 예언자>가 별 효과를 보지 못하면서 <웬말인가 함석헌>에 이어 <함석헌과 한국 지성들>을 두 권으로 묶어 펴냈다. 이를 두고 함석헌과 오랜 교분을 가졌던 김용준은 ‘정보기관의 후원’이라 지적한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할 수 없지만 함 선생님에게는 조카뻘 되는 조순명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정보기관의 후원까지 받아가면서 그는 당시 민주화운동의 선봉에서 주야장천 사자후를 토하고 있는 함석헌을 마치 희대의 색한이나 되는 듯 비난하는 <거짓 예언자>라는 책을 출판하여 화제를 모은 일이 있다.

이 책을 낸 출판사는 일확천금을 노려 초판을 5만부나 찍었다. 그러나 당시 시민운동으로 불매운동이 벌어져 이 책은 서점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와 같은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불매운동을 일으킨 젊은이들에게 고마움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시던 함 선생님의 모습을 나는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주석 5)

한국현대사에는 독재자가 적대시하는 인물들에 관한 각종 위서(僞書)가 끊이지 않았다.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의 <시역의 고민>, 김대중을 음해한 함윤식의 <동교동 25시>, 최근 김근태를 고문한 이근안의 책, 그리고 <거짓예언자 함석헌>이 대표적이다.

이와는 별개로 함석헌의 도덕적 일탈행위는 그것이 실수이든 아니든 비판의 대상이다. 도덕성의 상징인 재야 지도자의 위치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일생일대의 오점이고 실수였다. 그는 80회 생신 자리를 비롯 몇 차례 공개석상에서 참회하는 발언을 하였다.


주석
2> 조순명, <함석헌과 한국지성들 上>, 홍익재, 1997.
3> 김용준, 앞의 책, 126~127쪽.
4> 앞의 책, 127쪽, 재인용.
5> 앞의 책, 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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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5장] 살육의 5공시대, <씨알의 소리> 또 폐간

2013/02/19 08:00 김삼웅

 

 

 

민주주의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다.
외상으로 들여온 민주주의가 4ㆍ19혁명으로 많은 시민ㆍ학생들의 피를 흘렸지만, 5ㆍ16도벌꾼들의 도끼질을 당하면서 지체아가 되었다. 긴 세월 학생, 민주인사들의 수혈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오던 민주주의의 가녀린 묘목은 박정희가 죽고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을 맞아 새 순이 돋고 부활하는 듯 보였다.

장장 18년의 군부독재에 시달려 온 국민들은 이제 민주주의시대가 오는 것으로 알고 환호하였다.
학생과 노동자들의 시위가 없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유신잔당의 퇴진과 악덕기업의 처벌을 주장하는 정당한 요구였다. 여전히 신군부의 계엄사령부가 언론을 검열하고 있었으나 긴 세월 움츠렸던 기자들도 활력을 찾아가고 있었다.

한국의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 불릴만큼 화창난만하다. 생명이 약동하여 만화백초가 다투어 피어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5월은 4월을 대신하여 ‘잔인한 계절’로 바뀌고 있었다. 5ㆍ16쿠데타 때문이었다. 다시 정치의 계절 5월을 맞은 국민은 지난 폭압의 세월보다 새 시대에 희망을 걸었다.

간혹 외신에서 불길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보도관제로 일반 국민은 전두환 일당의 음모를 까맣게 몰랐다. 야당 정치인들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채 근거없이 낙관론을 폈다.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 창간 10주년 기념행사차 5월 16일 제주에 머물고 있었다.
서남동 교수와 제주학생회관에서 강연을 마치고 숙소에서 5ㆍ17전국계엄 확대조치 소식을 들었다. 사실상 전두환의 군사변란이었다. 5월 17일 자정에 서남동이 미리 대기하고 있던 정보원들에 의해 연행되고, 함석헌은 이날 오후에 서울 자택에 연금되었다.

신군부는 5월 초순부터 이른바 ‘충정작전’이란 구실로 충정부대의 서울 투입을 17일 이전에 이미 완료시켰다. 그리고 광주에는 공수부대의 핵심인 7공수부대를 은밀히 파견했다.

치밀하게 짜여진 작전계획에 따른 조치였다. 신군부는 5월 18일 0시를 기해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하고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표했다. 정치활동의 중지와 옥내외 시위금지, 언론의 사전검열, 각 대학의 휴교령 등 비상계엄령이었다.

이어서 18일 새벽에는 김대중ㆍ김상현 등 정치인과 재야인사 등 거물급 26명을 구속하고, 김영삼을 자택에 연금했다. 학생운동, 노동운동 관련자 수십명도 이날을 전후하여 구속하였다. 5ㆍ17군사반란이 자행된 것이다.

5월 18일부터 광주시민들이 군사변란에 저항하자 신군부는 학생,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하면서 정권찬탈에 나섰다. 사망 240명, 행방불명 409명, 부상 2052명이라는 만행을 저질렀다. 신군부는 이미 소집 공고된 임시국회를 무산시키기 위해 수도군단 30사단 101연대 병력으로 국회의사당을 봉쇄하고 헌법에 규정된 비상계엄령의 국회통보 절차조차 밟지 않은 채 사실상 국회를 해산시켰다. 헌정유린이고 국가변란이었다.

신군부는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면서 권력을 도득하고, 이땅에서는 18년 전의 5월보다 더 잔혹한 5월이 반복되었다. 역사는 한 번은 희극으로 한 번은 비극으로 되풀이 된다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두 번씩이나 비극으로 반복되었다. 함석헌은 위험을 무릅쓰고 5월 26일 광주항쟁의 현장을 찾아 희생자들을 추모하였다. 가누기 어려운 분노를 삼켜야 했다.

7월호 <씨알의 소리>에는 분노에 떨리는 손으로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제목은 <治人事天莫若人-사람 다스리고 하늘 섬기는 데는 아끼는 것만한 것이 없다>를 썼다.

옛날 두목지(杜牧之)란 사람의 아방궁부(阿房宮賦)라는 글이 있습니다. 명문이라고 이름이 높습니다. 내용인 즉 진시황이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하고, 그것이 옳은 이치로 된 것이 아니고 강제로 억지로 된 것이므로 그것을 위압으로 천하 민중의 기운을 죽임으로써 하려고 만리장성을 쌓고 아방궁을 지었는데, 몇 날이 못가고 망했다.

그 원인이 뭐냐? 스스로 옳은 일을 하지 않고 악으로 억지로 했기 때문이다, 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끝에 가서 누구나 보는 사람이 책을 덮어놓고는 긴 한숨을 쉬고 깊은 생각에 잠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한 절이 있습니다.(한문 생략)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감히 말도 못하고 감히 노하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았으니
외로운 한 지아비(진시황) 마음이 날로 갈수록 교만하고 완고하게 되었구나
(그렇지만 그것이 도리어 천하 인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이곳 저곳서 반군이
일어나 아우성을 치게 되어, 어떤 군대를 가지고도 깨칠 수 없다던 함곡관이
그만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구나! (후략)

욧점을 말한다면, 씨알 하나에 있습니다. 씨알 사랑하면 나라 될 것이고,
씨알 사랑 아니하면 진시황만 아니라 그 누구도 다 오래갈 수 없고 훗 사람이
불쌍히 여길 것 뿐일 것입니다.
(주석 1)

제95호(1980년7월호)

무서운 글이다. 함석헌은 광주시민 학살과 민주헌정을 짓밟는 전두환을 진시황에 비유하면서 반드시 망하는 날이 있을 것임을 예고한다. 계엄령의 서릿발치는 5공 초기에 쓰인 글이다. 5ㆍ16때 <5ㆍ16을 어떻게 볼까?> 보다 훨씬 강도가 높은 내용을 담았다. 하지만 검열에서 무사했다. 무식한 검열관들이 놓친 것이다. 옛날 고사를 끌어와 현실을 비판한 함석헌의 전략이 성공했다.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7월 31일 전두환 정권은 이른바 언론통폐합의 조치로 사전에 말 한마디 없이 <씨알의 소리>를 폐간시켰다.
1970년 4월 창간하여 통권 95권을 발행하고, 1970년 5월의 폐간 이후 두번째 당한 폐간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계약된 인쇄소가 아니라는 이유라도 댔지만 전두환은 그런 저런 이유도 없었다. 막무가내 막가파식이었다. 함석헌은 망연자실의 상태에서 영구독자 및 정기독자들에게 구독료 환불의 통지를 보냈으나 대부분의 독자들은 잡지의 운명과 함께 환불은 거부하고 받아가지 않았다. <씨알의 소리>는 죽여도 ‘씨알’은 죽이지 못한 것이다.


주석
1> <씨알의 소리>, 1980년 7월호,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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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4장] 유신체제에 마지막 타격 날리다

2013/02/18 08:00 김삼웅

 

 

제91호(1980년1.2월호합본호)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씨알의 소리>는 힘겨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10ㆍ26사태 이후 사실상 처음 발행한 1980년 1,2월 신년호에서 함석헌은 <민족적 비전을 기르라>는 “새해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와 시론으로 <시대의 낌새를 뚫어보는 지혜>를 썼다. '편지’의 한 대목이다.

80년대 들었다고 무엇을 조금 아노라는 사람들이 제각기 떠들어 댑니다. 씨알은 그 소리에 끌려들어 가서는 아니됩니다. 지나간 일을 잠깐 돌이켜 생각해보면 곧 알 수 있습니다. 70년대가 됐을 때 어떠했습니까? 그때도 지금 같이 떠들었고, 큰 소리를 펑펑 했습니다. 그때에 그 해 79년 10월 26일에 시국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안 놈이 하나나 있었습니까? 그런데 70년대에 이보다 더 큰 사건이 무엇입니까? 세상에 정치 설계나 해설처럼 실없는 것은 없습니다. (주석 14)

정치선동꾼이나 기회주의 언론인들의 시세영합적인 설계나 해설에 함부로 현혹되지 말고 시국을 바로 보라는 내용이다. <시대의 낌새를 뚫어보는 지혜>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이 글은 11월 23일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금요기도회의 설교 내용을 보완한 것이다. 강연에서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낌새)는 분별하지 못하느냐?”는 예수의 말씀을 들어 ‘시대의 낌새’를 알아차리도록 경고하였다. 글의 도입 부분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대통령 자리를 맡는 분이 이것을 ‘위기관리내각’이라고 이름을 붙이리만큼 위태한 대목에 부딪쳤습니다. 위태하다는 것은 역사의 나가는 길이 갑자기, 미리 짐작도 못하게, 굉장히 험한 난관에 빠졌기 때문에 자칫하다가는 여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나라가 아주 망해버리던가, 그렇지 않으면 설혹 살아 남는다 해도 제대로 올바른 궤도에 올라 발전의 길을 밟게 되려면 몇 십년, 혹 몇 백년의 혼란기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자칫하다가는”이라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아주 덮어놓고 희망이 없다는 건 아닙니다. 잘만 하면, 정신을 톡톡히 차리기만 하면, 정면으로 날아드는 화살을 앞 이빨로 물어 멈추고 다시 그것을 잽싸게 시위에 먹여 돌이켜 쏘아 적장을 잡는 옛 명장의 솜씨같이, 나라를 건질 뿐 아니라 전화위복으로 민족의 빛을 더하게 할 수 조차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온 민족의 정신이 통일되지 않고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자칫하다가는”입니다.
(주석 15)

계엄령 선포로 언론의 검열이 강화되면서 <씨알의 소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글도 사전검열 때문에 12ㆍ12사태 등을 직접 거론하지 못하고 “자칫하다가는” 식의 표현으로 에둘러 쓴 것이다. “다시 군인이 정치에 나오다가는”의 변형이었다. 하지만 박정희 밑에서 권력의 단맛을 즐겨온 하나회 출신 신군부는 정치야욕을 버리지 않았고, ‘서울의 봄’은 점차 짙은 안개 속에 덮혀갔다.

함석헌은 2월 29일 복권이 되었다. 무슨 로또 복권에 당첨된 것이 아니라 박정희 치하에서 반독재ㆍ반유신 투쟁을 벌이다 투옥, 자격정지 등을 받았던 민주인사들에 대한 자격회복이었다. 이날 687명이 함께 복권되었다. 함석헌은 3월호의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복권>이란 제목의 글을 썼다.

나는 정치 문제에 관한 한, 내가 죄를 지었다는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었고, 징역을 시킨다 했더라도 억울하단 맘도, 밉단 생각도 별로 하지 않았다. 따라서 풀어줬다 해도 속임 없는 말로 고맙단 생각 조금도 없었으니, 이제 와서 복권 어쩌고 해도 별 큰 일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은 속임 없는 말이다. 왜 그랬나? 나도 사람이고, 그러는 그들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의 국가(정부)란 것은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어서 벗어버려야 하는 낡은 옷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석 16)

여기서 함석헌의 아나키즘적 성향을 다시 살피게 한다. 그의 탈권력, 탈국가주의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 즈음에는 더욱 강화되었다.

“정부가 복권조치를 한 것은 씨알의 입김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왕 그런 이상이면 이제라도 씨알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어진 일일 것이다.” (주석 17)

제93호(1980년4월호, 창간 10주년 기념호)

1980년 4월은 함석헌이 70대 이후 필생의 과업으로 삼고 독재정권의 갖은 탄압을 견뎌 가면서 발행해 온 <씨알의 소리> 창간 10주년이 되는 달이었다. 3, 4월이 되면서 지층에서는 혹독한 냉기류가 흐르고 있었지만, 지상에서는 새봄이 오는 듯 제법 활기를 띠어가고 있었다. 함석헌도 대학가는 물론 각종 사회단체와 언론의 초청으로 강연, 인터뷰를 하였다. 그때 마다 ‘시대의 징조’를 설명하면서 군부의 정치개입을 경계하였다.

1980년 4월호 <씨알의 소리>는 모처럼 126쪽에 이르는 두툼한 지면으로 제작되었다. 10주년기념호였다. 함석헌은 4ㆍ19 스무돌을 기념하여 <오늘 우리에게 4ㆍ19는 무엇인가>라는 장문의 평론을 실었다. CBS 공개방송의 내용을 수정 보완한 글이다. 그리고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로 <글세, 어떡허지?>를 썼다. 이 글에서는 고난에 찼던 지난 10년을 되돌아 본다.

나는 글을 깎이울 때 살을 깎이우는 것 같았고, 붓을 깎이울 때 등뼈를 꺾이우는 것 같았습니다. 죽고 싶었지만 죽어서는 안 된다 했습니다. 사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가 갈렸지만 이는 풀을 갈아 생명을 만들기 위한 것이지 대적을 물고 찢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대적은 없다고 했습니다. 물면 어서 더 물게 하고 짓밟으면 어서 더 짓밟히라고 했습니다. 소리가 있어 외치기를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다” 했습니다. 나더러는 원수 갚을 생각 말라 했습니다. (주석 18)

창간 10주년 행사는 다채롭게 진행되었다. 4월 18일 서울 강연회를 기점으로 대구, 부산, 전주, 광주를 1차로 하고, 제주ㆍ청주, 원주, 대전, 청주를 2차 계획으로 잡았다.

YWCA 대강당에서 열린 서울 강연회는 1,500여 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연사는 함석헌ㆍ안병무, 대구는 함석헌ㆍ김용준ㆍ송건호, 부산과 전주는 함석헌ㆍ송건호가 각각 나서고, 광주는 함석헌과 장을병이 맡았다. 가는 곳마다 민주화의 열망과 함께 많은 시민이 모여 함석헌과 연사들을 환영하고, 그간 <씨알의 소리>의 역할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화창한 5월의 푸른 하늘에 서리를 품은 먹구름이 잔뜩 몰려오고 있었다.


주석
14> <씨알의 소리>, 1980년 1,2월호, 6~7쪽.
15> 앞의 책, 63~64쪽.
16> <씨알의 소리>, 1980년 3월호, 4쪽.
17> 앞의 책, 9쪽.
18> <씨알의 소리>, 1980년 4월호,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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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4장] 유신체제에 마지막 타격 날리다 2013/02/17 08:00 김삼웅

 

 

궁정동 만찬장의 시해 현장을 재연하고 있는 김재규. ⓒ1980 보도사진연감

함석헌은 해외여행의 복이 없었는지 모른다. 1963년 모처럼 세계일주 여행길에 5ㆍ16주체들이 공약을 어기고 민정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한 데 이어, 이번에도 퀘이커의 도움으로 세계여행 중 10.26사태 소식을 듣고 여행을 중단한 채 돌아왔다. 박정희와는 전생에 악연이 켜켜히 쌓였던 것 같다.

함석헌은 오래 전부터 박정희의 불행한 최후를 ‘예측’하고 있었다. 특히 가장 사랑하고 ‘대통령감’으로 기대했던 장준하의 죽음을 지켜보면서는 더욱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 측근은 증언한다.

어느 날이었다. 원효로 선생님댁이자 <씨알의 소리>사를 찾아온 몇몇 씨알들과 함 선생님은 대화 중 말씀하신 한 마디를 잊지 못한다.

“내가 그의 끝을 보기 쉽지….” 하시고 더 말씀을 잇지 않으셨다. 여기서 ‘그’는 ‘박정희’를 가리키고, ‘끝’이란 ‘박정희의 최후’를 가르킨다. 풀어서 말하면 “내가 박정희의 최후를 볼 것이다.” 하는 말씀이다.

이것은 장준하의 죽음에 대한 어떤 분노나 감정으로 한 말씀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군사정권과 함 선생님만큼 철저하게 싸운 사람도 없지만, 대적이라도 미워하는 마음으로 하면 안 된다 하시고 언제나 평상심으로 돌아와 꽃을 가꾸시고, 뜰을 쓸고, 기도와 명상 가운데, 자연스럽게 느껴진 어떤 영감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주석 12)

함석헌의 저항의 대상은 법과 제도 또는 체제이지 결코 개인은 아니었다. 이승만이나 박정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개인을 미워하거나 업신여길 이유가 없었다. 또한 자신이 어떤 위치나 권력을 탐하여 반독재 저항운동에 앞장선 것도 아니었다.

한때 사회 일각에서 그를 대통령후보 또는 야당 당수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1969년 가을, 박정희의 3선개헌 반대투쟁 과정에서 신민당 당수 유진오가 병으로 쓰러지고, 야당은 와해 위기에 내몰렸을 때였다.

이무렵 재야인사 영입케이스로 야당 당수가 됐던 유진오 씨가 물러나고 야당의 새 당수를 뽑아야 할 때라고 기억한다. 우리는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야당 정치계에서 함석헌 선생을 당수로 모셔야한다는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을 가졌던 것 같다. 국민의 지지를 받고 박정권에 대해 당당히 맞설 인물로 함 선생님 외에 다른 인물이 없다는데 의견이 모아진 듯 했다. 그래서 야당 국회의원들을 위시한 중진 인물들이 줄줄이 원효로 함 선생님 댁을 찾아왔다. 정일형 박사, 윤보선 전대통령까지 찾아와 함 선생님을 설득한 것으로 안다. 정치계뿐만 아니라 재야 지성인들까지 가세하여 함 선생님께 권유했다고 들었다. 재야 지성인들이 함 선생님이 야당 당수가 되어야한다는 이유는 있었다. 지금까지의 야당은 야당이 아니었다. 돌아다니는 말 그대로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인 야당이었다. 진정한 야당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정치를 바로잡고 요즘 말대로 ‘물갈이’를 하기 위해서는 함 선생님 같은 참신한 인물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석 13)

이같은 요청을 함석헌은 단호히 거부하였다. 자신은 결코 성격이 정치적이지 못하고 그런 역량도 없다는 뜻이었다. 1963년 가을 쿠데타 세력이 민정이양을 둘러싸고 번의에 번의를 거듭하면서 일부에서 함석헌을 범야단일후보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 때도 그는 완강히 거부하였다.

함석헌은 자유당 말기 윤형중 신부와 논쟁을 할 때 “모가지가 아흔 아홉 번 잘려도 대통령은 아니한다”고 호언하였다. 여러 가지 이유를 달면서 “부통령만 돼도 백주에 경찰이 총을 쏘는 데”(장면 부통령에 대한 경찰의 암살음모)라고 예시를 했지만, 이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지배자가 되는 것, 즉 감투를 쓰고 누구를 지배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래서 기독교를 믿으면서도 장로, 목사가 되는 것을 마다하고, 이승만을 쫓아내고도 장면 정부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의 글과 말이 순수하고 무게가 실린 것은 개인적 이해를 떠나 공론(公論)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강권과 지배가 없는 무권력주의의 진정한 아나키스트였다. 퀘이커에 들어간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함석헌이 해외순방 중일 때 박정희 정권은 도처에서 말기현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신민당사에 들어와 농성을 하는 여성노동자들을 새벽 2시에 이른바 ‘101호 작전’을 개시, 경찰 1천여 명을 당사에 난입시켜 노동자들은 끌어내고, 당직자와 취재기자들까지 무차별 폭행했다. 이 과정에서 여성노동자 김경숙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박정권은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회견을 빌미로 김총재를 국회에서 제명하는 등 단말마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야당 의원들의 국회농성에 동조하여 종교계, 해직 언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해직교수협의회, 민주청년협의회 등 민주단체들이 반유신투쟁에 떨쳐나서고, 마침내 10월 16일 부산대학생 4천여 명의 궐기를 시작으로 부마 민주항쟁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10월 26일 저녁 7시경 박정희는 궁정동 안가에서 젊은 여성들을 불러 질펀한 술판을 벌이다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5·16쿠데타로부터 18년 6개월, 유신변란으로부터 7년 여 만이다. 그날은 안중근 의사가 국적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날이기도 했다.

함석헌은 미국 오하이오주 컬럼부스에서 이 소식을 듣고 모든 일정을 취소하면서 11월 15일 귀국하였다. 절대권력자가 장기독재 끝에 절명하면서 정국은 앞날을 내다보기 어려운 혼돈에 빠져들었다. 계엄령이 선포된 상황에서 유신세력은 여전히 체육관 선거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재야 민주인사들이 이를 거부하는 투쟁에 나섰다. 11월 24일 YWCA집회를 통해 통일주체 대의원 선거를 통한 대통령선거를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일체의 집회가 금지된 계엄상태에서 ‘위장결혼식’을 이유로 재야인사들이 모이게 되고, 선언문에서 “유신잔당 물러가라”, “거국내각 수립하라”, “통대선거 결사반대” 등을 요구하고 시위에 나섰다가 긴급 출동한 경찰과 심한 몸싸움을 벌였다.

계엄사는 양순직ㆍ박종태ㆍ백기완ㆍ임채정 등 14명을 구속했다. 이들은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포고령위반으로 처벌되었다.

함석헌은 아직 긴 여행의 노독이 풀리지도 않는 상태에서 서빙고 분실에 끌려가 혹독한 조사를 받고 15일 만에 풀려났다. 노령을 이유로 구속을 면했지만, 박정희가 암살 당한 이후에도 다시 구금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리고 불구속 상태에서 기소되었다.

 


979년 10월 부마항쟁. 부마항쟁은 박정희 유신독재체제의 종말을 알리는 항쟁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권력 정당성이 취약해져 있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한 장면. ⓒMBC

독재자가 암살되고 외신에서는 ‘서울의 봄’을 보도하기 시작했으나 정치의 봄은 쉽게 오지 않았다.
12월 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군 하나회 출신들이 하극상 사건으로 군권을 장악하면서 한국의 정세는 또 새로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함석헌은 12ㆍ12사태로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의 계엄사 검찰부에 의해 12월 27일 다시 소환되었다.
군검찰에 소환되어 조사받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승냥이를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만난 격이었다. 해가 바뀐 1980년 2월 25일 함석헌은 군법회의에서 1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형 확인 과정에서 형 면제 처분을 받았다. 신군부도 그의 위상에는 함부로 하지 못했다.

주석
12> 박선균, <씨알 소리 이야기>, 108쪽, 도서출판 선, 2005.
13> 앞의 책, 100~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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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4장] 유신체제에 마지막 타격 날리다

2013/02/16 08:00 김삼웅

 

 

함석헌은 1979년 8월 11일 퀘이커 세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스위스로 출발하였다. 국내사정이 어려웠으나 이 회의는 빠지기 어려운 국제대회였다. 그는 국제사회에서 퀘이커의 주요 인물로 인정되었다. 이에 앞서 1947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바 있는 미국 퀘이커봉사회는 2월 26일 함석헌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였다. 이어서 3월 5일에는 미국 퀘이커봉사회를 대표하여 바우만 여사가 노벨평화상 추천서를 갖고 함석헌을 찾아왔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미국 퀘이커봉사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적ㆍ아군을 가리지 않고 부상자 치료를 위한 의료기구 및 간호원 파견과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위해 세계적 모금운동 등 적극적이며 희생적인 봉사활동이 평가되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미국 퀘이커봉사회는 1월 24일자의 전문을 통해 “한국의 함석헌을 1979년도 노벨평화상 후보에 추천한다. 함석헌은 정의와 인권을 위하여 비폭력적 운동으로 일생 동안 헌신했고, 세계평화를 위한 씨알들을 상징화하고 있으며 고취하고 있다.”고 알려왔다.

또 1월 31일자 소개 편지에서는 “눌린 자와 가난한 자를 위한 정의실현에 대한 함 선생의 확고부동한 신념과 정의를 방해하는 것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은, 그의 깊은 종교적 신앙으로 밑받침되어 있기 때문에, 그가 반대하는 현정부일지라도 그의 반대는 정권욕이나 개인의 이득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고 말하고, “함 선생은 그의 동포들의 사랑을 받고 있고 투옥하는 자들과 또는 그를 제어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존경을 받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함 선생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하는 것은 그가 깊히 염려하고 사랑하는 모든 한국사람들에게 격려와 지지를 보내는 것이 될 것이다”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주석 8)

함석헌은 자신이 이와 같은 노벨평화상에 추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 퀘이커들이 나를 추천한 것 같으나 사실 나는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겸손해하였다. 그의 노벨상 추천 소식은 2월 26일치 <중앙일보>가 <워싱턴 스타>를 인용, 1단 기사로 보도했을 뿐 대부분의 언론이 이를 외면하였다.

함석헌은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250여 명의 퀘이커들과 회의를 마치고 독일로 건너갔다. 함부르크, 괴칭겐,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를 방문했다. 헤이그에서는 이준 열사 묘소를 참배하고 영국으로 들어갔다. 여행 중에는 그 나라 퀘이커들과 한인교회, 유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숙식을 해결하고, 간혹 우리나라 외교관들의 안내를 받기도 했다. 캐나다를 거쳐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 피츠버그에 머물던 중 10월 26일 박정희의 암살 소식을 듣고, 11월 15일 남은 일정을 모두 취소, 귀국하였다.

해외에 머물면서도 ‘씨알의 독자들’을 위해 여러 차례 <해외 통신> 보냈다. 이 소식은 <씨알의 소리> 에 실렸다. 스위스 베른에서 보낸 편지에는 다음의 내용도 있었다.

회의를 마치고 마당에 나오니 어떤 할머니가 조그마한 싼 물건을 내밀면서 “뉴멕스코연회에서 왔습니다. 우리 연회 어떤 부인이 이것을 주면서, 대회에 가서 누구나 줌직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드리라고 했는데, 내가 보니 당신이면 될 듯해 드립니다.” 했습니다. 놀라면서 그것을 받아 그 속에 든 것을 꺼내보니, 은으로 조그만 비둘기를 만들어 가슴에 차도록 한 것입니다. 나는 뭐라 말 할 수, 사양조차 할 수 없어, 그저 절을 하고 받았습니다. 노벨상은 받을 자격이 없지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시는 조그만 표적인 줄 압니다.(주석 9)

함석헌은 이번 해외순방에 두 가지 목적을 두었다고 밝혔다.

“하나는 세계 각지의 퀘이커들을 찾아보는 것이고 그 담은 또 간 곳 마다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퀘이커들 찾는 것은 본래 퀘이커 협의회에서 나를 초청해 주었고 세계일주를 하며 각지의 모임과 혹은 개인을 찾아보도록 일정을 꾸며주었기 때문입니다. 협의회가 그렇게 한 데는 두 가지 뜻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하나는 나로 하여금 세계 각지에서 한국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될수록 한국의 진상을 알려주도록 하잔 것이고, 또 하나는 나도 좀 더 경험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석 10)

함석헌은 평화주의자였다. 끊임없는 저항과 도전은 평화를 위한 수단이었다. 국내적으로는 반독재와 반국가주의, 국제적으로는 반제국주의와 반침략주의를 주창하면서 싸워온 것은 궁극적으로 국제평화의 실현에 있었다.

<씨알의 소리> 1979년 7월호에 “평화”를 특집으로 꾸미고 송건호ㆍ김용준ㆍ김동길과 함께 <세계평화의 이상과 그 실현을 위한 문제>를 주제로 하는 좌담회를 연 겻도 그 일환이었다. 함석헌은 이 좌담에서 우리나라가 단군신화에서부터 평화사상이 깃들어 있음을 지적한다.

난 우리나라도 고대 처음에 있어서는, 우연히 됐는지 어떻게 됐는지 그걸 고증할 수가 없지만, 단군신화에서부터 전쟁이야기는 없이 개국을 했다고 하는건 퍽 크게 우리로서는 아주 주목할 점이라고 그렇게 보는데, 서양처럼 전쟁을 꼭 해가지고 나라를 세웠다든지, 동양에서 일본만 해도 역사 처음에는 전쟁으로 개국을 했다고 그러고, 아마 세계 어느 나라의 처음치고 싸움 없이 개국했다는 건 별로 없을 거고…. (주석 11)

주석
8> <씨알의 소리>, 1979년 3월호, 102쪽.
9> <씨알의 소리>, 1979년 10월호, <해외통신> 제3신, 9~10쪽.
10> 앞의 책, 27쪽.
11> <씨알의 소리>, 1979년 7월호, 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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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4장] 유신체제에 마지막 타격 날리다

2013/02/15 08:00 김삼웅

 

 

산모에게 네 속에 있는 애기가 나올 때가 되어서 그런데 이제 나와야지. 낳는 것 네 책임이야. 이런 진통을 겪어야 돼. 그렇게 해서 죽기를 각오하고 낳을 작정을 하면 고통을 넘어설 수가 있어요.

함석헌은 지금이 새 시대를 열기 위한 ‘진통기’로 보았다. 아무리 포악한 권력이라도 결코 민중의 항거를 언제까지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씨알들을 격려하였다. 그리고 맹자의 말을 인용한다.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큰 소임을 맡길 때(天將降大任於是人也)
우선 그 마음을 괴롭게 만들고(必先苦其心志)

이 말은 생명의 법칙이 그렇다는 거예요. 종교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한단 이 말이에요.

함석헌은 자신의 고통을 비롯하여 국민의 고난을 새시대를 열기 위한 하늘의 시련으로 인식하면서 두려움 없이 독재정권과 싸웠다. 싸우고 싸우다보니 어둠은 더욱 짙어갔으나 국민을 배반한 권력은 반드시 망한다는 신념은 더욱 굳어졌다.

함석헌 선생과 김대중 전 대통령

1979년 3ㆍ1절 60주년을 앞둔 함석헌의 감회가 각별했다. 18세 때 3ㆍ1운동에 참여한 이래 40여 년이 더 지난 세월이다. 해방된 나라는 두 쪽이 나고, 가족을 남겨두고 택한 남쪽에서는 백색독재에 이어 군사독재가 극성을 부리게 되었다. 그래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달랬다.
생각해 보라. 이렇게 죽은 민족이 어디 있나? 감각이 있고, 의분이 있고 결단이 있나?
금년이 3.1운동의 예순 돌이니, 한번 크게 뜻 있는 기념을 하여, 침체해 가는 정신을 가다듬고, 나날이 심해가는 사회부정의를 일소하여, 두 동강이 난 나라를 어서 빨리 하나로 묶고, 남북이 하나로 어우러져 회개와 용서의 눈물로 이 강산을 적시고 감사와 희망의 노래로 저 산천초목을 들뛰게 하며, 그리하여 세대의 모든 압박당하고 찌저진 민족으로 하여금 용기를 갖도록 하잔 생각을 어느 누가 아니했겠느냐?

함석헌은 이같은 심경에서 다시 행동에 나섰다. 1979년 3월 1일, 3ㆍ1운동 60주년인 이날 재야 민주인사들과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민민연합)을 결성했다. 김대중의 석방을 계기로 그동안 다소 미온적이던 ‘국민연합’을 확대 개편하여 ‘민민연합’으로 확대한 것이다. ‘민민연합’은 윤보선ㆍ함석헌ㆍ김대중을 공동의장으로 선출하면서 전권을 3인 의장단에 맡기고, 보다 광범한 활동과 조직기반을 위해 지방조직에 착수했다.

‘민민연합’은 3월 4일 <발족선언문>을 통해 유신체제 철폐와 민주정부 수립을 당면목표로 밝히고,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해 평화적으로 투쟁할 것을 천명했다. 5월 1일에는 3인 의장단 명의로 최근 사태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는데, 민주인사들에 대한 장기 연금과 구치소 내의 심각한 인권침해, 폭행사건과 인권유린 사태를 검찰에 고발하고, 카터 미국 대통령의 방한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시했다. 함석헌은 이 <발족선언문>을 힘차게 낭독했다.

권력과 부조리의 구조를 비판하는 모임에서 그가 글을 읽는 횟수가 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요즘은 그러한 기회에 ‘낭독 전문가’가 되어 가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나이로 보아 비교적 젊은 것들이 읽지 못하는 일들을 그는 서슴치 않고 해낸다. 후배들이 선생님께 낭독을 부탁하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몰라도 거절하지 않으시고 태연하게 허락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젊음 앞에 부끄러워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늙은 젊은이, 물과 같은 부드러움과 불과 같은 의지와 어울리고 있는 늙은 젊은이, 바로 그가 멋쟁이 함석헌이다.

정부는 반체제 투쟁과정에서 시국선언문의 낭독자, 집필자, 서명자 순으로 체포한다. 그래서 민주화운동 단체들은 공동대표 체제를 갖추고, 서명자도 명망가들을 동원한다. 구속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다. 또 발표자는 명망가 중에서도 저명 인사를 택한다. 잡혀가는 순서이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선정된 함석헌은 각종 시국선언의 낭독을 한 번도 꺼리지 않았다. 해서 구속, 연행된 일이 수없이 많았다.

6월 23일에는 함석헌ㆍ윤보선 등 20여 명이 화신백화점 앞에서 카터 방한 반대 시위를 벌였다.
함석헌은 이번에도 연행되었다가 다음날 풀려났다. 박정권은 7월 31일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이 김영삼 총재의 대정부 질의 내용(개헌)을 게재한 것을 문제 삼아 문부식 주간을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구속하였다.

8월 9일에는 YH무역 여성노동자 170여 명이 신민당사에 진입하여 회사 정상화와 노동자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면서 농성을 시작했다. 시국은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고 있었다. 박정희가 5ㆍ16쿠데타로 권력을 탈취한 지 18년 째였다. 함석헌은 거듭 ‘시대의 징조’를 느끼면서 반독재 투쟁의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주석
4> <씨알의 소리>, 1977년 7월호, 22쪽.
5> 앞의 책, 23쪽.
6> <씨알의 소리>, 1979년 3월호, <가시나무 가지의 외침>, 4쪽.
7> 한완상, <평화주의자 함석헌의 멋>, <씨알의 소리>, 1979년 7월호, 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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