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2장] 유신타도, 박정희와 전면대결

2013/02/06 08:00 김삼웅

 

 

제32호(1974년4,5월호)

<씨알의 소리>에 대한 박정권의 억누름은 날이 갈수록 악랄하고 고약해져갔다.

 

1974년 4ㆍ5월호에는 표지에 함석헌의 <민청학련사건의 반성>이 검은 바탕이 흰 활자로 맨 위에 소개되었다. 한데 이 글은 송두리째 뽑히고 말았다. 중정의 짓이었다. 대신 서울대학교 가정대학 <아람> 제2호에 썼던 <인도의 지성 간디>로 그 자리를 메꿨다.

민청학련사건은 박정권이 유신체제 반대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1974년 4월 3일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면서 날조한 사건이었다. 함석헌은 정부의 처사를 통렬히 비판하였는데, 이를 통째로 뽑아버린 것이다. 이렇게 뽑히고 잘리고 한 원고가 적지 않았다. 이 글 이전부터, 그러니까 긴급조치가 발동되면서부터 정부는 언론을 검열하면서 특히 <씨알의 소리>에는 강도가 심했다.

1974년에서 1975년 사이는 이른바 유신헌법 하의 대통령 긴급조치를 마구 휘두르던 때다.
<씨알의 소리>는 이때에 가장 많은 탄압을 받았고 또한 가장 치열하게 저항했던 시절이기도 하다. 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가 벼락처럼 떨어지면서 씨알에 대한 압수, 사전검열, 연행, 연금, 조사는 가속화되었다. 74년 1월호 4천부가 전부 압수당하고, 직원이 끌려가고, 함선생님이 연행되고, 장준하 편집위원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15년이 선고되고, 동년 4월 20일 씨알 창간 4주년 기념강연 후 김동길 편집위원이 민청사건으로 끌려가 15년 선고를 받는 등 수난의 연속이었다.

<민주청년학생연맹사건과 우리의 반성>(함석헌), <기원 2000년의 한국>(김동길), <학법의 한계>(박형규)는 이 시기에 쓰여진 것이었으나 전면 삭제된 것이다.
(주석 15)

박정권은 귀에 거슬리는 내용은 필자가 누구이건 가리지 않고 전면 삭제 또는 부분 삭제를 자행했다. 1974~1975년 <씨알의 소리>에서 전면 삭제된 글과 필자는 다음과 같다.

<양심 선언>(김상진), <박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김상진), <고 김상진군의 영전에 이 노래를 바친다>(고은), <오둘툴 보고서>(채광석), <총>(양성우), <친구에게>(유시산), <만세>(김가영), <민주청년학생연맹사건과 우리의 반성>(함석헌), <한국의 정치현실>(김대중), <기원 2000년의 한국>(김동길), <올바른 국민총회의 실현>(장을병), <악법의 한계>(박형규), <동아일보사태의 진상>(장윤환), <조선일보사태의 진상>(정태기), <동아일보경영주에게>(표문태), <백골도 산다>(오충일), <여기 그러한 현실>(함세웅), <제3시국선언문,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 <선언문, 서울대학교 비상총학생회>. (주석 16)

1976~1977년 정부의 <씨알의 소리>전면 및 부분 삭제분은 다음과 같다.

<씨알들의 소리>(조남기),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양성우), <나도 한번 효도하고 싶네>(김경락), <모깃불 외 3편>(박몽구),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쭈구렁 밤송이의 한숨>(함석헌), <씨알의 제소리>(함석헌), <슬픈 노래를 부르자>(함석헌), <정신 바짝 차려!>(함석헌), <우리는 임자다, 종이 아니다>(고은), <박동선사건의 의미>(한완상), <1977년을 돌아보며>(법정), <장준하선생 2주기, 영원한 추모>(계훈제), <테러의 문학>(송기원), <갇혀 있는 자유에게>(이현주), <목소리>(김경수), <수기, 평화시장에서>(전태일), <전태일 7주기 추도사>(전국노조 청계피복지부), <누가 이참의 바통을 받을 것인가?>(함석헌). (주석 17)

1976년부터 1977년 사이에는 <씨알의 소리>가 찢기고 잘리고 상처받아 가장 약화되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1976년 3월 1일 신구교 통합 미사 후 구국선언문 발표로 3ㆍ1명동사건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함석헌 선생, 안병무 박사 등 구국선언문서명자 전원이 연행됐고, 3월 3일 <씨알의 소리> 사무실과 함 선생님 가택 전체가 수색당했다.

창간 기념행사는 76년, 77년 모두 거부당했고, 장준하 선생 1주기 추도회, 전태일 6주기 추도회를 <씨알의 소리>주관으로 열려고 장소 계약까지 했으나 좌절되었고, 76년 8월 28일 명동사건으로 함석헌 선생, 김대중 선생, 문익환 목사 등 징역 8년 자격정지 8년의 선고를 받았다. 77년 3월 18일 함석헌 선생 77회 생신기념모임까지도 장소불허로 흥사단 뒤뜰에서 겨우 열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1만 2천부까지 <씨알의 소리>가 75년 하반기부터 철저한 사전검열로 인해 떨어지기 시작하여 2500부까지 되었던 것이다. 당시 문공부가 정보부는 인쇄 직전 최종 교정지를 인쇄소를 통해 두 벌을 내 가지고 붉은 줄을 치고 있었다.
(주석 18)

해방 뒤 한국에서 발행된 잡지 중에서 <씨알의 소리>만큼 정부의 심한 탄압으로 찢기고 얼룩진 잡지는 없을 것이다. 어느 측면에서 일제에 못지않았고 무원칙했다. 독재정권의 야수적인 탄압에도 함석헌의 의지와 필격은 꺽이지 않았다. 온갖 억누름 속에서도 잡지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버티었다. 그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동안 편집장도 박선균ㆍ박청수ㆍ박선균ㆍ정연주ㆍ최민화ㆍ박선균으로 이어졌다.
함석헌은 독재정권의 탄압에 찢기는 아픔을 이렇게 토로하였다.

씨알 여러분, 나는 요새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슬픕니다. 때로는 거의 나를 잃어버릴 지경입니다. 그러나 물론 나를 잃어서는 아니되지요. 나는 나의 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또 여러분의 나요, 민족의 나요 인류의 나요, 하나님의 나이기 때문입니다.

공장에서 육중한 기계가 악마 같은 입을 벌이고 그 아래 들어오는 쇳덩이 나무통을 덜커덕 덜커덕 짤르듯이 사형! 사형! 사형! 하는 소리가 들려올 때 나는 미칠 것 같습니다.

내가 왜 살았더냐?
이 꼴을 왜 보아야 하느냐?
인생의 말로가 어쩌면 이렇게도 참혹하냐?
아, 하나님 맙시사!
(주석 19)

주석
15> 박선균, <금지된 씨알의 소리>, 24쪽, 생각사, 1987.
16> 앞의 책, 6~7쪽.
17> 앞의 책, 7~8쪽.
18> 앞의 책, 166쪽.
19> 함석헌, <밤숨을 끊지 말라>, <씨알의 소리>, 1974년 7월호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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