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1장] <씨알의 소리> 창간, 반유신투쟁의 선봉장 2

013/01/24 08:00 김삼웅

 

 

함석헌은 1970년 4ㆍ19혁명 10주년에 맞추어 개인잡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했다.

제도언론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사상계>마저 발행인이 바뀌면서 더욱 쪼그라들고 있던 시점이다. 등록번호는 문화공보부 정기간행물(월간) 등록번호 라-1257호였다.

창간 당시에는 편집위원 제도가 없었으나 1972년 4월에 편집위원회가 구성되었다. 편집위원에는 참여에 시차가 있었으나 함석헌(주간)ㆍ이병린ㆍ이태영ㆍ김성식ㆍ안병무ㆍ송건호ㆍ법정ㆍ장준하ㆍ천관우ㆍ김용준ㆍ계훈제ㆍ김동길 등이었다. 창간호의 글은 모두 함석헌이 쓰고, 편집위원들은 나중에 집필에 참여했다. 창간 1,2호 때는 전덕용이 편집 실무를 맡았다.

시대는 점차 악화되고, 그래서 할 말이 많은데, 지면이 봉쇄되었다. 지식인들은 벙어리가 되고, 언론은 할 말을 못하였다. 3선개헌으로 박정희의 장기집권이 가시화되면서 이같은 현상은 하루가 다르게 심화되어 갔다. 잡지를 내게된 배경이었다.

함석헌은 나이 70에 이르러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쉽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저항의 횃불을 켜든 것이다. 남들이 사업을 접을 연차였다. 사업 경험은커녕 잡지를 낼 경제적 여건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도전에 나섰다. 믿는 것은 도처에 산재한 씨아이고, 솟구치는 것은 학정에 대한 저항의식이었다.

개인 잡지로는 김교신이 <성서조선>을, 해방 뒤에는 믿음의 동지 노평구가 1946년부터 <성서연구>를 꾸준히 발행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단재 신채호가 중국 베이징에서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천고(天鼓)>를 힘겹게 펴낸 바 있었다. 3천부를 찍은 <씨알의 소리> 창간호(4월호)는 56쪽, 값 100원이었다. 일체의 상업광고를 배제한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500쪽이 넘는 여느 잡지보다 알찬 내용과 시대의 경고음을 담고 있었다.

창간호에는 5편의 글이 실렸다. 모두 주간 함석헌이 썼다.
<4월혁명 열돐에 되새겨 보는 말 - 썩어지는 씨알이라야 산다>
<나는 왜 이 잡지를 내나?>
<씨알>
<씨알의 울음>
<하나님의 발길에 채워서(1)>이다.

창간사 격인 <나는 왜 이 잡지를 내나?>에서 함석헌은 잡지 발행의 이유를 소상히 밝혔다. 이 글은 그의 언론관과 시대의식이 들어 있는, 대표적 논설 중의 하나에 속한다. 띄엄띄엄 소개한다.

“잡지를 했으면 하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해방 후 줄곧 해오는 생각입니다. 아시는 분은 알지만 <말씀>도 그래서 냈었습니다. 6호까지를 내다가 5ㆍ16 파동으로 중단됐습니다. 그 담은 월간보다도 주간을 했으면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꿈을 꾸는 데는 나는 반드시 남에게 떨어지지 않는 듯 합니다.”

“그 후 알아 보니 주간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민중의 입을 열기보다는 틀어막기만 밤낮 연구하는 집권자들은 이상 야릇한 법을 만들어서 굉장한 시설과 자금이 없이는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돈이 많을수록 정의감과 기백은 줄어드는 것이므로 그 법령의 그물을 통과하고 나오는 놈이면 묻지 않고 자기네의 심부름꾼으로 생각해도 좋다 하는 심산에서 나온 법입니다. 하여간 그래서 다시 월간지 생각을 했습니다.”

“군사정권에서 제1차 공화당 집권으로, 거기서 제2차 집권으로, 또 거기서 3선개헌 파동으로 나감에 따라 민주주의는 전락의 길로만 줄다름쳤습니다. 국민의 정신은 점점 더 떨어졌습니다. 전에는 겁쟁이라고나 했겠지만 이제는 겁쟁이 정도가 아니라 얼빠진 놈입니다. 그럴수록 기대되는 것은 지식인인데 그 지식인들이 왼통 뼈가 빠졌습니다. 이상합니다. 학문이란 다 서양서 배운 것이라는데 무엇을 어떻게 배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서양 역사라면 민권투쟁의 역사, 서양 정치라면 권위주의에서 자유주의로 달리는 정치인데, 어째서 배운 것을 하나도 실천하려 하지 않을까? 시저 죽은 것을 배웠으면 오늘의 시저도 죽여야 할 것 아닙니까? 프랑스혁명사를 읽었으면 민중의 앞장을 서야 할 것 아닙니까? 소크라테스ㆍ예수의 수난을 보았으면 그와 같이 죽어도 옳은 건 옳다, 그른 건 긇다, 말을 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저들은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학원에 기관총, 최루탄이 들어와도 모른 체 하고 친구가 바른 말 하다가 정치교수로 몰려 쫓겨나가도 못 본척 하고 있었습니다.”

“풍토를 어떻게 고칩니까? 뒤집어엎어야 해! 누가 뒤집어엎습니까? 씨알 이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미운 것은 신문입니다. 신문이 무엇입니까? 씨알의 눈이오 입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씨알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가리고 보여주지 않고, 씨알이 하고 싶어 못견디는 말을 입을 막고 못하게 합니다. 정부가 강도의 소굴이 되고 학교, 교회ㆍ극장ㆍ방송국이 다 강도의 앞잡이가 되더라도 신문만 살아 있으면 걱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정치 강도에 대해 데모를 할 것이 아니라 이젠 신문을 향해 데모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국민이 생각이 있는 국민이면 누가 시키는 것 없이 동맹을 해서 신문이 몇 개 벌써 망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싸움터는 국회의사당도, 법정도, 학교도, 교회도, 신문사조차도 아닙니다. 직장, 다방, 선술집, 소풍 놀이터에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일만도 아니요, 누가 해줄 수 있는 일도 아니요, 생활의 한 부분이 아니라 모두의 일, 내가 해야 하는 일, 생활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왜 정치에 관계된 말을 하나? 강도가 들어왔는데, 그럼 ‘도둑놈이야!’ 하고 내쫓을 생각도 아니해야겠습니까? 이런 때, 정치가 온갖 사회발전을 방해하고 있는 때에 입을 닫고 중립을 한다는 것은 결국 정치 한패입니다. 도둑이 왔어도 도둑이야 소리 아니하는 놈은 도둑 한패 아닙니까? 나의 바라는 것은 정치가, 아주 없어지는 것은 감히 못바라도, 적어도 손에 무기 쥔 정치 무리가 판을 치는 날이 어서 지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바보의 생각을 좀 말하리다. 나는 씨알에 미쳤습니다. 죽어도 씨알은 못 놓겠습니다. 나 자신이 씨알인데, 나는 농사꾼의 집안에서 났습니다. 참 농사꾼은 굶어 죽어도 ‘종자갓은 베고 죽는다’고 우리 마을에선 표본적인 농부였던 우리 할아버지한테 들었습니다. 농사는 나만이 하는 농사입니까? 밥은 나만이 먹는 밥입니까? 천하 사람이 영원히 먹을 밥입니다.”

“이제 내가 이 잡지를 내는 목적을 말합니다.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한 사람이 죽는 일입니다. 씨알의 속에는 일어만 나면 못 이길 것이 없는 정신의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어나라는 명령을 받아야지, 누가 명령하나?(…) 순교자는 처음부터 강하지만 한 번 순교하고 난 다음 돌아보지 않으면 순교자의 씨는 끊어지고 말 것입니다. 순교자 자신은 물론 그것을 생각하지 않지만 교회는 그것을 일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희생자의 뒤를 봐주는 조직적인 활동은 설교보다도 중요합니다.”

“씨알의 소리를 해보자는 것은 길르기위해서입니다. 나라에 늙은이(중심세력-필자) 없으면 못생긴 우리 끼리라도 서로 마음을 열고 의론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노라면 우리 다음 세대는 늙은이를 가질 것입니다.”
(주석 4)

주석
4> <씨알의 소리>, 창간호, 1~14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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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1장] <씨알의 소리> 창간, 반유신투쟁의 선봉장

2013/01/23 08:00 김삼웅

 

 

1969. 9.13 3선 개헌 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

박정희의 권력욕은 군정 2년과 민선 2기 8년 도합 10년 세도로도 욕심이 차지 않았다.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김용태 등 공화당 의원들이 국민복지연구회를 만들어 김종필을 후계자로 옹립하려다 철퇴를 맞고, 이른바 ‘항명파동’으로 김종필은 정계를 은퇴하였다. 박정희는 1968년 초의 무장공비 청와대 습격사건을 빌미로 향토예비군을 창설하여 청장년들을 한 묶음으로 엮고, 국민교육헌장을 선포하여 교육계와 학생들의 통제에 나섰다.
박정희는 초대대통령 이승만이 장기집권을 기도하다가 4월혁명으로 쫓겨난 지 10년도 채 안 되어 1968년 말부터 권력지향의 충성분자들을 앞세워 개헌에 대한 애드벌룬을 띄우기 시작했다. 1968년 12월 17일 공화당 당의장서리 윤치영이 부산에서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의 과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이같은 지상명제를 위해서는 대통령 연임조항을 포함한 현행헌법상의 문제점을 개정하는 것이 연구되어야 한다”고 3선개헌의 물꼬를 텄다.

6ㆍ8 부정선거를 통해 이미 개헌선을 확보하고, ‘항명파동’을 진압하여 공화당내 개헌반대 세력을 숙청한 터였다. 언론계도 그동안 채찍과 당근 정책으로 대부분 순치시켰다. 문제는 학생과 야당이었다. 당시만 해도 재야는 아직 이렇다할 세력이 형성되지 못한 상태였다.

박정희가 1969년 7월 25일 여당에 공식적으로 개헌안을 발의할 것을 지시하면서 그동안 지하에서 맴돌던 3선개헌 공작이 양성화되고, 정계는 개헌정국으로 파란에 휩싸였다. 개헌안은 공화당 108명, 정우회 11명, 신민당에서 변절한 3명 등 모두 122명이 서명하여 국회에 제출되었다. 30일 간의 공고기간이 끝난 9월 13일 국회본회의장이 야당 의원들에 점거되자 14일 새벽에 국회 제3별관에서 서명의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단 6분만에 개헌안이 변칙 처리되었다. 박정희의 3선, 곧 장기집권의 길을 튼 것이다.

 


1969.9.12 3선개헌반대 시위현장에서 경찰에 의해 강제 귀가조치를 당하는 함석헌선생 (이 사진은 경찰청 홈페이지에서 인용)

야당인 신민당은 당내 기구로 3선개헌저지투쟁위원회를 설치하고, 원내외에 걸쳐 저지투쟁에 나섰다. 재야에서는 3선개헌반대범국민발기준비위원회를 구성한 데 이어 신민당과 연합하여 3선개헌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함석헌은 여기에 참여하여 전국 주요 도시를 돌며 개헌반대 연설을 하였다. 그의 연설을 듣고자 수많은 씨알이 강연장을 매웠다.

1969년 4월 19일에는 4ㆍ19기념 강연회를 마친 뒤 범청년민주투쟁위원회 소속 인사들과 광화문에서 침묵시위를 벌였다. 7월 19일 오후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범야 3선개헌반대 강연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국민에게 호소했다.

3선개헌은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민족의 역량을 깨뜨리는 것이므로 바로 민족의 역량으로 이를 저지해야 한다. 오늘날 사태가 여기까지 온 것은 반드시 공화당만의 책임을 아니다. 여기 앉아 있는 신민당 사람들에게도 책임은 있다. 제대로 저지운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소속 의원 3명이 이탈하는 것도 막지 못하였다. 요즘 우리나라 신문은 신문이 아니다. 한심하다. 학생 데모는 제대로 보도도 못하면서 아폴로 발사만 대서특필하고 있다. 이것이 신문이냐.

여러분! 신문에 국민이 무섭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자.
사실보도도 하지 못하는 신문에 본떼를 보여주자.
우리가 단결하면 신문사 한 두 개쯤은 문 닫게 할 수 있다.
(주석 3)

학생들의 3선개헌 반대투쟁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전국의 대학은 물론 일부 고등학생들까지 교문을 박차고 나와 3선 반대 시위를 벌였다. 3선개헌 반대투쟁에는 변호사ㆍ교수ㆍ문인ㆍ종교인 등 사회 각계의 양심적 인사들이 참여했다. 신문 중에서는 <동아일보>만 8월 8일치 사설에서 <우리는 개헌주장의 동기가 결코 합치될 수 없으리라고 확신한다>고 주장, 사실상 반대 입장을 밝히고, 대부분의 언론이 지지하였다.

3선개헌은 결국 박정희의 의지대로, 오로지 일 개인의 장기 집권을 위한 방편으로 헌법을 장식물로 변개시키면서 국론을 분열시키고, 막대한 국고를 낭비하여 요식적인 국민투표의 절차를 거쳤다. 유진오 신민당 총재가 박정희의 3선개헌을 ‘건널 수 없는 다리’ 라고 명명한 대로, 건너지 말아야 할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국가의 비극이고, 그 자신의 단초가 되었다.

함석헌은 다시 한 번 깊은 좌절과 통분을 삼키면서, 씨알을 일깨우는 방안 찾기에 몰두하였다. 세상은 역류되고, 시름은 깊어만 갔다.


주석
3> <김삼웅 취재수첩>, 1969년 7월 19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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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1장] <씨알의 소리> 창간, 반유신투쟁의 선봉장

2013/01/22 08:00 김삼웅

 

 

1964년 신촌 종교친우회(퀘이커) 모임집 앞마당에서

함석헌은 1967년 7월 21일 미국을 방문하기 위해 출국했다. LA에서 퀘이커 집회에 강연을 초청받은 것이다. 6개월여 간 미국에 머물면서 퀘이커들과 함께 생활하고, 심도 있는 토론을 하면서 퀘이커에 대해 이해를 하게 되었다.

오래 전부터 퀘이커에 관심을 갖고, 미주 여러 나라의 퀘이커 지도자들과 서신 교류를 하였다. 무교회주의를 떠나면서 퀘이커는 그의 정신적 구원의 종교가 되었다.

함석헌이 입문한 퀘이커교(Quaker)에 대한 일반의 인식은 여전히 낯설다.
기독교의 한 유파이면서도 전통적인 기독교와는 크게 다른 퀘이커교는 예배 때에 찬송가나 기도, 성례의식과 같은 일체의 행사가 없이 진행된다. 기독교처럼 목사나 가톨릭처럼 신부가 있어서 설교를 하거나 성례를 주관하는 일도 없다. 기록된 교리도 없고 교회나 성당과 같은 지정된 예배 장소도 없다. 선교(mission)란 말을 선호한다. 한국에는 현재 신촌의 퀘이커교 모임 등 꾸준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모임이 있다. 전 세계의 교도는 20만 명 정도이다.

퀘이커교는 “지리를 믿는다고 스스로 내놓고 말하는 사람”을 뜻하며 17세기 중반 영국의 조지 폭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특정 교파라기보다는 ‘친우회(The Society of Friencis)'라고 부르는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퀘이커가 본격적으로 한국에 소개되고 모임이 시작된 것은 함석헌에 의해서였다. 함석헌은 1962년 미국 국무성과 영국 외무성의 초청으로 미국 여행 중에 퀘이커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왈링포드에 세워진 학교 펜들 힐과 영국 퀘이커대학이 있는 우드브룩에 머물면서 퀘이커신앙에 접하고 그곳 지도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이때까지도 함석헌은 퀘이커에 입문한 것 이 아니었다.

함석헌이 한국최초의 퀘이커 교도인 이윤구의 소개로 퀘이커교도인 아서 미첼을 만난 것은 6.25 한국전쟁 시기였다.

“나중에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역임한 이윤구는 당시 군산도립병원 복구사업을 하던 미국 퀘이커 봉사회를 만나 한국인 최초의 퀘이커교도가 되었고, 그때가 한국에서 퀘이커 모임이 시작될 즈음이었다. 그는 이단자가 된 함석헌의 모임에 계속 나왔고 ‘서로 통하는 점이 많을 것’을 느껴서 그들 사이에 중개역을 했다. 그들 덕분에 함석헌의 전쟁반대와 평화사상은 한층 깊어졌을 것이다.” (주석 1)

함석헌 이전에 퀘이커는 이미 한국에 전래되고 있었지만 퀘이커가 한국의 식자층에 깊이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함석헌의 역할이 컸다. 5.16 군사쿠데타 이래 강력한 저항운동을 펴온 함석헌의 위상은 퀘이커의 홍보에도 일역을 하게 되었다.

함석헌은 1983년 월간 <마당> 5월호에서 퀘이커와 관련 특별 대담을 갖고 자신이 퀘이커가 된 과정과 퀘이커사상에 대해 소상하게 밝혔다.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인 함석헌이 퀘이커에 대해 본격적으로 언급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월간 <마당>은 “함석헌은 원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장로교ㆍ무교회주의를 거쳐 현재 퀘이커교 한국 대표로 있으면서 최근에는 노장 철학을 비롯한 동양사상에 심취되어 모든 종교사상을 통합하는 경지에 이르고 있다”고 소개했다. 인터뷰 내용 중 퀘이커 관련 부문을 발췌한다.

문 : 함 선생님이 퀘이커교도이신 줄 아는데 퀘이커교 교리가 무교회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답 : 우리(퀘이커교도)는 교리가 없고 제도도 없어요. 전연 없을수야 없지만, 가능한 한 그것 없이 하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한번 제도나 교리가 결정이 되어 놓으면 변경이 잘 안되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달라지고 시대도 달라지는데….

문 : 사실 제도나 교회 때문에 본래의 기독교 정신이 구애를 받거나 생명력이 제약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답 : 그렇지요. 퀘이커는 원래 대단히 개방적이야요. 극단적으로 나가는 사람들은 기독교란 말을 꼭 해야 되나 하고 있으니까니, 종교적인 생각에 대해 가능한 한 ‘가타’ ‘그르다’ 그러지 않지요.

문 : 퀘이커교는 가장 규모가 작은 기독교파 가운데 하나로 압니다. 어떻게 이 교단과 인연을 갖게 되었습니까?
답 : 6.25 직후라 우리나라 복구사업을 하는데 퀘이커교에서 영ㆍ미 합작으로 수십여 명의 사람을 보내 왔었지요. 그들이 군산에서 파괴된 도립병원을 복구했는데 여기에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참가해 처음으로 퀘이커를 알게 되었지요. 그 다음 유엔에서 한국부흥단을 파견했는데, 여기에 퀘이커 사람이 서너 명 있었지요. 나는 그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그들로부터 시작된 것이지요. 그래서 1962년 처음으로 미국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문 : 퀘이커교는 제도나 교리가 없다는 것이 곧 교리가 아닌가 생각되는데요, 교회나 예배 형식도 없는지요?
답 : 예배도 형식 없이 하자는 것이나, 전연 없을 수는 없지 않아요? 그러니까 교회란 말을 쓰지 않고 단순히 모임(meeting)이라고 하지요. 성직자라는 것도 없고 목사 신부라는 이름도 없으며 조직 자체가 없지요. 예배 시간에는 강단이 있어서 격식을 차려 앉는 법도 없고, 모든 사람이 똑같이 앉아서 한 시간 동안 명상과 침묵하는 거야요.

문 : 설교가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울 수가 없지 않습니까?
답 : 성경공부는 다른 시간에 하지요. 예배는 명상으로 하다가 감동을 받은 사람은 자기 맘대로 기도도 하고, 찬송도 부를 수 있으며, 성경을 읽고 싶으면 읽을 수도 있고 감동ㆍ감화를 자유롭게 표현합니다.

문 : 남녀동등권 문제가 제일 먼저 퀘이커교에서 나오는 등 앞질러 가는 운동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만 ….
답 : 남녀동등 문제도 퀘이커에서 나왔고, 노예 해방문제도 제일 먼저 제안했었지요. 그 다음 퀘이커교도들이 감옥에 많이 드나들면서 인간 대접을 아니 한다고 항의하고 감옥제도를 개선하자는 발언도 제일 먼저 했습니다. 그리고 정신질환자들에게도 너무 인간대접을 아니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대책을 부르짖는 등 이런 착상을 먼저 해왔지요.

문 : 평화운동과 반전운동도 퀘이커에서 제일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습니까?
답 : 퀘이커 수가 많지 않은데 이 운동을 굉장히 진지하게 벌이고 있어요. 그중에서도‘평화증언’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해 제1차 세계대전과 2차 대전 때에도 크게 활동했습니다. 한 예를 든다면 적국에도 모금을 해 보내고 적국의 부상자들을 위해 의약품을 보내지요.

문 : 조지 폭스를 창사자로 봐야겠군요?
답 : 그렇지요. 그러나 제일먼저 시작한 사람은 아니야요. 농민들 사이에 자연히 일어났는데 이들은 대개 무식한 사람들이었지. 폭스도 남의 집 구두수선공이었고, 그러나 솔직하고 정직하게 생긴 사람인데 장점이 있었나 봐요. 폭스는 상당히 번민을 했다 그래요. 왜 그런고 하니, 종교가 본래 뜻은 그렇지 않은데 왜 이렇게 타락했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지. 그래서 회의를 크게 느끼고 캠브리지, 옥스퍼드에 찾아가 신학자들에게 물어보아도 신통한 대답 안 해주고 그래서 내 문제 해결해 줄 사람은 예수밖에 없다하고 명상하는 가운데 깨달은 것이야요.
(주석 2)


주석
1> 이치석, 앞의 책, 464쪽.
2> <퀘이커와 평화사상>, <월간 마당>, 1983년 5월호, 인터뷰어 한용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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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0장] 매국외교 반대의 격랑 속에서 2

013/01/21 08:00 김삼웅

 

 

1960년대는 <사상계>의 전성시대라 할 수 있다. 특히 정부가 한일회담을 추진하고 민족주의세력이 이를 매국외교라 단정하면서 <사상계>는 반대투쟁의 본영이 되었다. 이때부터 함석헌은 더 많은 글을 이 지면에 쓰게 되고, 잡지의 권위와 파워가 그만큼 신장되었다.

<5ㆍ16을 어떻게 볼까?>에서부터 함석헌과 군부정권의 첨예한 대립각이 세워졌다.
함석헌은 <사상계> 1963년 3월호에 <우리 민족의 이상>, 4월호에 <민중이 정부를 다스려야 한다>, 8월호에 <꿈틀거리는 백성이라야 산다>, 9월호에 <한일회담을 집어치우라>, 10월호에 <새 혁명>, 1964년 3월호에 <양한재조재차일념>, 4월호에 <매국외교를 반대한다>, 9월호에 <우리는 알았다>, 1965년 1월호에 <비폭력혁명>, 5월호에 <세번째 국민에게 부르짖는 말>, 10월호에 <싸움은 이제부터>, 12월호에 <대담-민중의 증언>, 1966년 3월호에 <레지스탕스>, 5월호에 <우리 역사와 민족의 생활신념>, 1967년 1월호에 <언론의 게릴라전을 제창한다>, 2월호에 <저항의 철학>, 4월호에 <4자회담 좌담회>, 1968년 4월호에 <혁명의 철학>, 5월호에 <혁명공약의 행방>, 7월호에 <역사의 격전지를 찾아서(남한산성)>, 8월호에 같은 연재 2회로 <행주산성>, 10월호에 같은 연재 3회로 <사상계>를 각각 썼다.

이 시기 함석헌은 60대 초ㆍ중반기의 나이였다.
왕성한 필력이고 놀라운 정력이었다. 모두 다 열정을 쏟은 글이고 그때마다 정치적ㆍ사회적 파장이 컸다. 그는 어느 언론인보다 많은 글을 쓰고, 어떤 학자보다 심도 있는 논설을 발표하였다.

1967년 장준하가 국회의원이 되면서 <사상계>의 판권이 부완혁에게 넘어가면서 이 잡지에 글쓰기는 다소 뜸해졌다. 1968년 7월호부터 ‘역사의 격전지’ 연재는 현장(현지)을 탐방하여 다큐멘터리방식으로 집필할 계획이었다. 1회에 남한산성과 2회에 행주산성에 이어 3회에는 <사상계>를 찾아서 그 피어린 격전지의 사력을 집필하였다. 당시 <사상계>는 장준하와 부완혁 사이에 판권 문제를 둘러싸고 ‘격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사상계가 자살을 하고 있습니다. 장준하가 옳아서 이겨서도 아니되고 부완혁이 옳아서 이겨서도 아니됩니다. 누가 이겨도 사상계는 자살입니다. 두 사람이 의견이 다르다는 것 그것을 바루 듣는다면 이렇습니다.

“사상계가 죽게 됐습니다. 제발 살려줍시오.”

사상계가 다 죽게 되어도 누가 살려 주려고 들지도 힘을 쓰지도 않기 때문에 내분은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은 물론 도덕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 개인적인 시비를 따져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옳고 그름은 개인적인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5ㆍ16에 대하여는 그 일을 일으켰던 사람들이 도덕적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도학선생의 도덕이 나라와 시대를 못 건지는 것은 그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잘잘못을 가리는 동시에 그 역사적 시점에서는 박 모나 김 모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으면 아니 됐던가 하는 것을 가려내어야 역사는 구원됩니다. 사상계의 비극의 원인은 개인적인데 있지 않습니다.
(주석 30)

함석헌은 <사상계>의 분열이 장준하와 부완혁 간의 사적 이해관계가 아닌 군사정권의 탄압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5ㆍ16쿠데타를 주동한 인물들이 출현하게 된 배경을 알아야만 ‘격전’의 원인을 알게 된다고 풀이한다.

격전지가 남한산성에 있는 줄 알고, 행주산성에 있는 줄 알고, 한라산 백록담에 있는 줄 알고 헤매이며 눈물 뿌렸던 나는 어리석었습니다. 서로 목을 찔러 너도 죽고 나도 죽는 비참한 자살적인 전쟁의 격전지는 다른 데 아닌 서울 복판에 있습니다. 대강이를 개구리 얻어 문 독사처럼 내저으며 근대화라 발전이라 미쳐 돌아가는 이 수도 서울에 있습니다. 인권선언을 내붙인 유엔의 깃발과 자유평등을 그 건국정신으로 한다면서 월남전쟁을 하는 값으로 자유를 부르짖고 일어나던 체코가 소련군대의 군화발에 무참히 짓밟히는 것을 보면서도 못 본 체 외면하는 대미국의 국기가 펄펄 날리고 있는 이 서울에 있습니다.

함석헌에게 <사상계>의 ‘격전’은 지난날 어느 ‘역사적 격전지’에 못지않는 아픔의 상처였다. 날이 갈수록 이빨과 발톱이 날카로워지는 독재 세력에 맞설 언론매체란 <사상계>밖에 없는 터에, 이곳이 허물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상계 하다가 망하는 것이 그리 큰 일 입니까? 그것은 크고 작은 허다한 자살, 자살의 탈을 쓴 살인이 이 수도를 휩쓸고 있는 것을 절규하는 부르짖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단 하나인 마지막 촛불이 꺼진다면 그어이 얼마나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사상계를 이날껏, 읽는 사람이거나 아니 읽는 사람이거나, 단 하나의 바른 말하는 잡지라고 했지오? 5천년 문화민족이노라고 하면서 신문잡지를 몇 천 몇 백으로 하면서 ‘단 하나’ 라는 말도 부끄럽지만 또 지나친 과장인지도 모르지만 부끄러운 과장일수록 그 단 하나의 촛불이 꺼지도록 두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주석 31)

함석헌은 굴욕회담의 격동기에 <사상계>뿐만 아니라 다른 신문ㆍ잡지에도 적지 않은 글을 썼다.

<경향신문>(1963. 7. 8)에 <그 사람들은 살았더라>, <한국일보>(1963.7.22)에 <누구 믿을 때 아니다>, <신세계>(1963. 9)에 <나는 왜 갑자기 돌아왔나>, <경향신문>(1963. 9.9~10)에 <국민의 당 여러분께 애원합니다>, <소설계>(1963. 10)에 <호소, 국민에게 다시 호소한다>, <동아일보>(1963.10.14)에 <한 발걸음 바로 앞에서>, <20세기 사상강좌 5>(1964, 박우사)에 <한국은 어디로 가는가>, <동아일보>(1964. 1~10), <새해의 말씀>, <조선일보>(1964.1.28)에 <3천만 앞에 또 한번 부르짖는다>, 같은 신문(1964. 3. 5)에 <휴전에서 군정종식까지>, <동아일보>(1964.8.26)에 <데모학생을 건집시다>, <조선일보>(1964.9.6)에 <이 나라의 오늘을 말한다>, <인물계>(1964. 9.10)에 <이 가난한 백성들을 위하여>, <올 다이제스트>(1964. 12)에 <준비 없는 통일 말하지 말라>, <크리스찬 신문>(1965. 2. 13)에 <우리의 살길은 무엇인가>, <경향신문>(1965.2.19)에 <일본은 대답하라>, <동아일보>(1965.7.1~2)에 <단식에 앞서 동포에게 드립니다>, <신동아>(1965.10)에 <대학이란 무엇이냐>, <종교계>(1966.1)에 <대중과 종교>, <여상>(1966.2)에 <우리들의 비너스에게 주는 말>, <종교계>(1966.7.8)에 <종교인은 죽었다>, <조선일보>(1968.4.10~12)에 <미국문명과 흑인문제>, 같은 신문(1968. 6.23)에 <개화백경> 등을 집필하였다. (주석 32)

함석헌이 이 무렵에 얼마나 많은 글을 쓰면서 매국외교를 반대하고, 씨알의 시대정신을 일깨우며, 언론ㆍ지식인들의 각성을 촉구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중심매체는 <사상계>였다. 이 잡지가 박정권의 탄압으로 고사상태가 되고, 일시 부완혁에게 넘겨주었던 판권이 회수되지 못하면서, 함석헌과 장준하는 매체를 잃은 ‘삼손’이 되었다. 


주석
30> <사상계>, 1968년 10월호, 21쪽.
31> 앞의 책, 22쪽.
32> 정현필, 앞의 글, 252~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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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0장] 매국외교 반대의 격랑 속에서 2

013/01/20 08:00 김삼웅

 

 

1959 백죽문화사

함석헌은 해외 순방 중이던 1962년 12월 국내에서 <생활철학>이란 단행본을 서광사에서 출간했다.
4ㆍ19 이후에 신문ㆍ잡지에 쓴 글을 모은 것이다. 1959년 3월에 출간한 <새 시대의 전망>이래 두번째 펴낸 평론집이다. <새 시대의 전망>은 1979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게제되어 발행되었다.

<생활철학>의 서문에서 저자는 ‘누에의 철학’을 강조한다. 미국 벤틀 힐에서 쓴 글이다. 우리나라 땅 생김이 누에 닮았으니 푸른 뽕을 먹어 흰 실을 뱉는 신비의 누에가 되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땅 생김이 누에 같지 않은가? 어떤 이는 호랑이라 하고 어떤 이는 토끼라 하지만 차라리 누에라 할 것이다.
힘을 자랑하고 싶으면 호랑이라 할 것이고, 업신여기려면 토끼라 하겠지만, 이럴 것도 저럴 것도 아니요, 누에처럼 겸손히 누에처럼 부지런히, 누에처럼 평화롭게 살 것이니라. 그 땅만 아니라, 그 사람도 누에 같다. 그럼 또 누에와 같이 변화해야 할 것이다.(…)
 
그 힘은 비록 약하고, 그 입은 비록 적으며, 날카로운 이빨이 있는 것 아니어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먹는 날, 천하라고 다 먹을 수 있다. 유교문화도 옴질옴질, 불교문화도 옴질옴질, 기독교문화도 옴질옴질, 과학에 가 붙어도 살금살금, 정신에 가 붙어도 살금살금, 다툴 것 없이, 시기할 것 없이, 떠밀면 돌아눕고, 뺏으면 또 다시 가 붙으면서, 소리도 없이, 떠듦도 없이 먹고는 자고, 자고 나면 한 껍질 벗고, 새로 나서 또 먹어서 애기 잠, 두 잠, 석 잠, 그리고 한 잠을 자고 나면 백옥(白玉) 같은 문화의 전당 지을 수 있지 않겠나?

누에 - 번데기 - 나비의 생활철학이야말로, 씨알의 생활철학이다.
(주석 23)

함석헌의 글 ‘누에의 철학’은 연구가들이 놓치는 경향이 있는데, 이 머리말은 그의 어느 글 보다 의미와 상징성이 깊은 내용은 담고 있다. 하여 책의 내용보다 ‘누에의 철학’을 소개하기로 한다.

잠사(蠶史)란 말이 있겄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이른 말이다. 그가 흉노와 싸우다가 져서 항복한 이릉(李陵)이를 동정해서, 잘못이라 하지 않았다는 죄로 임금이 노하여, 궁형(宮刑)곧 자지를 잘라서 잠실 속에 던졌다. 잠실은 감옥이란 말이다. 그랬더니, 그 안에서 <사기>를 씀에 임금이 도로 좋아해서 중서경(中書令)을 시켰다는 것이다. 그래 잠실 속에서 쓰고, 그 때문에 살아나온 것이라 해서 잠사라 한다.

예로부터 정치한다는 것들이 그랬다.
제게 나쁘면 남의 생명 뿌리라도 자르고, 제게 좋으면 벼슬 주고 그러니 오늘 와서 보면 누가 정말 무서운가?
사마천의 자지를 잘랐던 임금인가? 그 잠실에서 실 뽑듯하는 글로 그것을 뚫고 나왔고, 그 뿐 아니라 오늘까지 살아, 그 따위 정치가란 것들은 목을 자르는 역사가인가?
(주석 24)

함석헌은 이름 없는 씨알을 누에에 비유하면서 권력을 도둑질하여 백성을 억압하는 정치가들을 매섭게 비판했다. 그리고 자신도 한 마리 누에로 자처했다.

번쩍 번쩍하는 네 옷이 그게 무어냐? 네 군복에 흔들흔들 춤을 추는 그 솥 다리가 그게 어디서 온 거냐? 얼마나 많은 누에가 죽어서야 된지 아느냐?
한 번 번드쳐, 빛 나라에 날아 보자던 나비를, 그 잠을 채 자기 전 그 집을 뺏고, 그 몸을 솥에 삶아 살로 뽑아내서 짠 것이 그 비단, 그 영광 아니냐?
살아나면 그리스도가 될 얼마나 많은 씨을 죽이고, 그 공로를 빼앗서 되는 너희 권력이요, 너희 도덕이요, 너희 종교요, 너희 명예인 줄 아느냐?
비단을 짜기 위해, 누에치는 계집의 손에서 고치를 뺏지 마라. 실을 뽑기 위해, 애매한 번데기를 솥에 삶지 마라.
한 잠을 자려고, 이 벤들 힐 뽕나무 가지에 깃들이는 나를 시끄럽게 굴지 말아라. 내가 채 변화하기 전에 너희가 내 무덤을 연다면, 가락꼬치나 미운 돌밖에 있을 것이 없느니라.
(주석 25)

함석헌은 안반덕 산골짜기에 머물 때 장준하의 요청으로 또 한 편의 평론을 썼다. <레지스탕스>였다. 자신이 ‘신을사조약’이라 명명한 한일조약 이후 <사상계>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가중되었다. 필자들은 글 쓰기를 망설이고, 인쇄소도 압력을 받았다. 그래서 신년호와 2월호의 발간이 늦어졌다며, 장준하는 추락하는 국민정신을 살리는 것과 항거 정신에 대해 써 달라고 요청하였다. 여러 날 망설임 끝에 찬 바람이 흔들리는 촛불 앞에 정좌하여 필을 들었다. 이 평론 역시 밑 줄을 치고 읽을 대목이 많다.

생명의 길은 끊임없는 반항의 길이다. 생명은 스스로 하는 것이다. 생명 있기 전에 무엇이 있던 것 아니요, 생명이 다 산 다음에 또 무엇이 있을 것 아니다. 적어도 우리는 그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이외를 생각할 수 없다. 생명이 처음이며 끝이요, 생명이 목적이며 수단이다. 다른 무엇이 또 있어서 생명의 가는 길을 규정할 수 있는 것 아니고, 생명 그 자체가 규정이요 범주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은 스스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되어진 것이 아니라 영원히 되려는 것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부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주석 26)

함석헌은 역사의 진보를 믿었다. 비록 당장은 권력이 승리하고 패악이 선을 누르는 것 같아도 궁극적으로는 진보하고 선이 승리한다고 믿었다.

“역사는 절대의 진보요. 인생은 절대의 긍정이다. 작게 보면 진보의 시대도 있고 퇴보의 시대도 있으나 그것은 마치 올라가는 산길에, 한때 내려간 언덕도 결국 올라간 길인 것 같이, 스스로의 뜻이 목적이 되는 전체의 과정에서 볼 때, 다 진보의 과정이다.” (주석 27)

한·일협정 비준 반대

함석헌은 한일조약 비준 과정에서 드러난 국민정신에 문제가 많다고 보았다. 그래서 항거정신을 잃어버린 국민정신에 대해 비판한다.

5천년 역사를 대체로 통틀어 볼 때, 이 민족이란 것이 무엇인가? 남의 세력에 기운을 못 펴고, 겨우 생존하여 온 사람들 아닌가? 백 가지 불행의 원인이 모두 거기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역사를 새로 짓는다는 이 마당에 있어서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이 국민으로 하여금 먼저 쪽지를 펴고 내로라는 기상을 가지도록 길러 주는 일 아닌가? 한 마디로 해서 항거하는 정신의 고취다. 그런데 이제 그것을 더 북돋고 가꾸어 주지는 못하고, 겨우 돋우려는 싹도 잘라 버리니 어떻게 하나?

숨김없이 말해보자. 한일조약이 아주 체결이 된 이후 오늘까지 얼마 아니되는 시일이나, 그 동안에 국민의 의기는 올라갔다고 할 것인가, 내려 갔다고 할 것인가?
(주석 28)

함석헌이 강원도 산골짜기로 들어가 은거할 만큼 굴욕회담 과정에서 보인 지식인들과 국민의 태도는 충격적이다. 그래서 국가(민족)의 미래를 위해서는 국민의 의기를 살리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점을 절감하면서, 이 원고를 썼다. 여전히 생명력이 있는 글이다.

나라는 하루만 하고 마는 것도 아니요 일부 사람을 위해 있는 것도 아닌데, 국민의 마음을 이꼴을 만들어 놓고는 도저히 나라를 이루어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의기 없는 국민을 가지고 무엇을 할 터인가? 제 나라 안에서도 감히 정치의 비평을 못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보자는 용기를 못내는 백성이 어떻게 외국 세력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을까? 더구나 국민을 덮어 누르는 이 정책이 이 나라의 정치한다는 그들 자신의 생각에서 나온 것도 못되고 첨부터 남의 나라 세력에 끌려서 된 것임에서일까.

항거할 줄 알면 사람이요, 억눌려도 반항할 줄 모르면 사람 아니다. 그리고 혼자서 하는 항거는 참 항거가 아니요. 대중이 조직적으로 해서만 역사를 보다 높은 단계로 이끄는 참 항거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하지 않았느냐고 네가 묻느냐? 그렇다.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하는 인격만이 할 수 있다. 노예에게는 도덕이 없다.
(주석 29)



주석
23> 함석헌, <생활철학>, 머리말, 서광사, 1962.
24> 앞과 같음.
25> 앞과 같음.
26> 함석헌, <레지스탕스>, <사상계>, 1966년 3월호.
27> 앞과 같음.
28> 앞의 책.
29>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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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0장] 매국외교 반대의 격랑 속에서 2

013/01/19 08:00 김삼웅

 

 

한일국교정상화와 베트남 파병을 통해 미국의 신임을 얻게 된 박정희의 정치적 행보는 거칠 것이 없었다.
앞의 두 사안의 투쟁 과정에서 야당은 신한당과 민중당으로 갈라지고, 언론은 박정권의 회유와 탄압이라는 강온 전략에 말려 제 기능을 잃어갔다.

제6대 대통령선거가 1967년 5월 3일로 예정된 상태에서 야권은 윤보선ㆍ유진오ㆍ이범석ㆍ백낙준 등이 자천타천으로 거론되었다. 국민은 단일후보를 기대했으나 조정이 쉽지 않았다. 장준하가 중심이 되어 후보단일화 작업의 일환으로 ‘4자회담’을 주선했다. 거론 인사 4명을 모아 화합을 성사시킨 것이다.

곡절 끝에 윤보선이 야권 단일 후보가 되었다. 장준하는 이범석이나 백낙준이 후보가 되기를 바랐으나 뜻대로는 아니었다. 윤보선을 통해 박정희 정권을 교체하는 길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한일회담 과정에서 위기를 맞은 박정희는 군을 동원하여 반대세력을 제압하고 눈엣가시와 같은 장준하와 <사상계>에 보복의 칼을 뽑았다. 굴욕회담 반대의 이념적, 이론지적 역할의 중심에 장준하와 <사상계>가 있고, 그 배후에 함석헌의 존재에 주목한 것이다. 1965년 3월 중순 종로세무서 직원 10명이 사상계사에 들이닥쳐 세무조사를 실시했다. 10일 동안의 조사에도 꼬투리를 잡지 못하자, 이번에는 국세청의 증원부대까지 포함된 20여 명이 본사는 물론 인쇄소, 제본소, 지업상, 광고주, 지방 거래 서점까지 찾아가 이잡듯이 뒤졌다. 고사작전이었다. 또 <사상계> 편집위원 중에도 ‘정치교수’로 찍어 대학에서 추방시키는 등 전방위적인 탄압을 자행하였다.

1966년 10월 26일 장준하는 국가원수모독죄로 구속되었다.
그가 삼성계열사의 밀수행위 규탄대회에서 “박정희가 밀수왕초”라는 발언과 존슨 미국 대통령의 방한은 “한국 청년의 피가 더 필요해서”라는 발언 때문이었다. 광복군 장교출신 장준하와 일본군 장교출신 박정희의 맞대결이었다.

<사상계>는 1967년 4월호에 ‘4자회담’을 주제로 좌담회를 마련했다.
좌담회를 마련한 것은 ‘4자회담’의 내막을 국민에게 알리는 데 의미가 있었다. 참석자는 함석헌ㆍ백낙준ㆍ이범석과 사회자 양호민이었다. 양호민은 당시 <사상계> 주간이었다.

좌담회에 참석한 함석헌은 “이번만은 정상적인 정권교체에만 국한되지 말고 한번 어려운 시국을 인식하여, 사람이야 누가 명색을 지고 나서든지간에, 중요한 이 시기에 공동의 정치책임으로 정치를 일신하는, 역사로 보면 나라를 건진다는 그런 의식에서 일을 한다면 공동으로 같은 책임을 지는 것으로 이번에는 일이 되는가보다 해서, 국민이 갑자기 ‘4자회담’이 되는 것에 감흥을 올렸었는데, 그 후에 못된 것을 보고는 아주 섭섭하군요.” (주석 21) 라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박정희는 두번째로 맞붙은 윤보선과의 접전에서 쉽게 승리했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성과가 어느 정도 나타나기 시작하고, 야당후보에 식상한 국민은 박정희의 손을 들어주었다.

박정권의 탄압으로 <사상계>가 고사 상태에 빠지게 되고, 국가원수모독죄로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된 장준하는 더 이상 언론인의 길을 걸을 수 없게 되었다. 하여 박정희를 물리치기 위해 직접 정치에 나서는 방법을 찾았다. 그래서 6월 8일로 공고된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기로 작심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서울 동대문 을구에 옥중 출마를 결심한 것이다. 함석헌은 이때 장준하의 선거연설원이 되기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신민당에 입당원서를 냈다. 그리고 지원 연설을 하였다.

여러분! 장준하를 살려주세요.
장준하 사상계 사장을 국회로 보내주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장준하 이 사람은 죽습니다.
자살할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주석 22)

함석헌은 장준하의 당선을 위해 선거구를 찾아 여러 차례 강연을 하였다. 후보는 감옥에 갇혀 있고, 자금도 조직도 없는 선거전이었다. 흰 두루마기, 흰 머리, 흰 수염의 함석헌이 연단에 서면 우선 호기심에서 사람들의 발길이 멈추고, 장준하와 박정희, 그동안 <사상계>의 역할 등을 이야기하면 박수가 쏟아졌다.

함석헌의 지원연설로 여론이 움직이고, 지식층을 중심으로 장준하의 독립운동과 <사상계>의 가치가 알려지면서 선거 판세가 하루가 다르게 바뀌었다. 정보기관이 장준하를 석방하는 것이 ‘동정여론’을 차단할 수 있다는 보고에 따라 정부는 투표 일주일 전에 그를 석방하였다. 석방된 후보의 얼굴이라도 보자는 유권자들이 몰려왔다.

대세는 장준하에게 쏠렸다. 5만 7천여 표(차점은 3만 5천여 표)를 얻어 압도적인 표차이로 당선되었다. 6월 8일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장준하는 당선되었으나 신민당은 참패를 면치 못했다. 박정희 정권의 3ㆍ15가 무색케하는 관권ㆍ부정선거로 공화당이 압승했다. 박정희는 장기집권을 구상하면서 개헌선 확보를 위해 총선에서 부정을 자행한 것이다. 야당과 학생들은 선거무효를 선언하고 부정선거 규탄운동에 나섰다. 6월 9일 연세대에서 부정선거규탄시위가 일어난 이후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박정권은 6월 15일 전국 28개 대학과 57개 고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부정선거를 자행하고, 이를 규탄하는 학생들을 탄압하면서 거침없이 휴교령을 내리는 파스시트적 수법이었다. 


주석
21> <사상계>, 1969년 4월호, 20쪽.
22> 고성춘, <장준하선생의 옥중당선 이야기>, <민족혼ㆍ민주혼ㆍ자유혼>, 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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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0장] 매국외교 반대의 격랑 속에서

2013/01/18 08:00 김삼웅

 

 

 

1999년 신문ㆍ방송ㆍ통신사ㆍ편집ㆍ보도국장과 언론학 교수들에 의해 한국의 ‘20세기 최고언론인’으로 선정된 송건호는 1971년 <언론인 함석헌>을 썼다. 몇 대목을 뽑아본다.

함옹은 이른바 직업적 언론인으로서는 전혀 경험이 없는 인물이면서도 이 양반이야말로 죽은 언론계가 언제나 생기와 양심과 용기를 붙어 넣어주는 참된 언론인으로서 높이 평가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는 함옹을 누구도 언론인이라고 보지 않는데도 기실 이 분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아마 가장 진정한 언론인이 될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이 바로 이 점(자유롭고 독립된 지식인 - 필자)에 있는지도 모른다. 자칭 언론인이 구름처럼 많은 이 세상에서 오직 유일한 진짜 언론인으로서 활동해 온 것은 이 분의 그 아무것에도 매어 살지 않는 자유롭고 독립된 생활이 한 조건이 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함옹이 기자들이 우글우글한 신문사 밖에 있으면서도 빛나는 언론활동을 하게 된 것은 이른바 언론을 업으로 삼고 있는 자들이 제 구실을 못하고 있을 때 그의 언론 활동이 상대적으로 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한 때문이다.

직업적 언론인이 감히 엄두도 못내는 한 시대의 본질적 문제에 핵심을 찌르는 비판활동을 벌인다. 이런 때의 함옹 글은 비수보다도 더 예리하고 날카로운 글이 된다. 그래서 흔히 권력자들은 함옹을 옥에 가두기도 하고, 그가 내는 잡지를 압수처분하기도 하고, 그를 위협, 겁을 주기도 하고, 때론 미행ㆍ감시ㆍ연금하기도 하며 그의 글을 꺾으려고 하였다.

지킬만한 재산도 없고, 보호할 만한 감투도 없고, 유지하여야 할 정치적 지위도 없었다.
함옹은 철저하게 무욕하고 따라서 잃을 것이 없는 노인이기 때문에 누구도 그를 어찌하지 못했다. 그의 빛나는 언론활동은 바로 이러한 ‘무욕의 지위’에서 나온 정론이었다.
(주석 17)

송건호의 글을 인용한 것은 언론계 사주들이 서울 시내 중심가에 거대한 사옥을 짓고, 언론인들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비틀거리는 제도언론의 타락에 대해 질타한 모습을 찾기 위해서이다.

함석헌은 <사상계> 1967년 1월호에 <언론의 게릴라전을 제창한다>는 권두시론을 썼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장준하를 면회갔다가 청탁받아 쓴 글임을 서두에 밝혔다.

말인즉, 대통령을 밀수 왕초라 했고 존슨이 온 것은 한국 청년의 피를 더 요구하기 위해서라고 말했기 때문이라 하지만 그것은 꺼리가 될 뿐이고, 정말 까닭인즉 군사정권 이래 오늘까지 이 정권과 싸워왔기때문 아닌가? 존슨이 왔던 것이 월남전쟁 때문인 것은 과학적인 사실 아닌가? 대통령이 밀수 왕초라 하는 것은 춘추필법 아닌가? 이 나라 모든 일의 책임이 잘잘못 간에 나 대통령한테 돌아갈 것은 정한 일 아닌가? 그럴라기에 대통령으로 놓은 것이지, 만일 아무 책임 아니진다면 무슨 대통령이라 할 것이 있나? (주석 18)

함석헌은 송건호가 지적한대로 “언론을 업으로 하는 자들이 제구실을 못하고” 있을 때 거침없이 이른바 ‘성역’을 비판하였다. 당시 언론은 박정희를 성역화하면서 직접 비판에서 비켜갔다. 함석헌은 예외였다.

좋기는, 이상대로 된다면, 현 대통령이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여 한 번 용퇴를 하는 일이다. 공화당 당수를 그만두고 대통령 입후보를 아니할 것을 선언해 주는 일이다. 그렇기만 한다면 일은 훨씬 쉽고 나라를 위하여 참으로 축제할 일이다. 그러나 그럴 수 있을까? 그는 설혹 그럴 마음이 있다하더라도 그 주위의 사람들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능히 물리치는 데가 그의 정치가로서의 성의와 역량을 증명하는 데다. 한 사람의 값이 큰 것을 또 한 번 생각한다. (주석 19)

함석헌은 박정희가 공화당 대표와 차기 대선 후보로 나오지 말고, 당장 하야할 것을 제의한다. 야당 대표라도 하지 못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함석헌이 이 글에서 제기한 문제는 언론(인)의 책임, 나아가서 거대한 공룡으로 성장한 족벌신문에 대해 ‘게릴라전’을 펴라는 주장이다. 해방 이후 이 같은 발언은 최초였다. 금단의 성역에 불화살을 쏘았다.

다음에 오는 선거가 성공이 되거나 실패가 되거나, 실패되면 될수록,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언론의 게릴라전이다. 국민의 양심을 대표하던 사상계가 경영이 극도로 어려워졌다. 읽고 싶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다. 계획적으로 하는 압박 때문이다. 이것이 전쟁에서 대규모의 정규군의 싸움의 시대가 지나가고 게릴라전이 그 승부를 결정하듯이, 언론에서도 큰 신문 큰 잡지로 여론을 지배해가던 시기는 지나간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규군이 깨지면, 그 패잔부대를 무수한 게릴라부대로 재편성하여 대부대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방방곡곡을 보내어 도리어 승리를 거둘 수 있듯이 우리 사상의 싸움에서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전차 간에서나 버스 간에서나, 결혼식에서나 장례식에서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우리의 정의혁명 사상을 고취하고 지금 잘못된 정치의 비판을 하자는 것이다.

새해에는 그대로만 올 수 있을 것이다. 폭력정치, 정보정치, 당파주의의 정치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 와야한다. 천지에 버젓한 정의혁명을 청천 백일에 내놓고 생활로 하잔 말이다.
(주석 20)

함석헌이 주창한 ‘언론게릴라전’은 반세기가 다 되어가는 오늘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제도언론(인)의 과제가 되어 있는 한편 진보신문의 창간과 주간지, 월간지와 특히 인터넷신문과 방송, 각종 전자 매체가 속속 나타나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주석
17> 송건호, <언론인 함석헌>, <씨알ㆍ인간ㆍ역사>, 26~29쪽, 발췌.
18> 함석헌, <언론의 게릴라전을 제창한다>, <사상계>, 1967년 1월호, 16~17쪽.
19> 앞의 책, 20쪽.
20> 앞의 책,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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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0장] 매국외교 반대의 격랑 속에서

2013/01/17 08:00 김삼웅


 

 

함석헌은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명상과 독서를 하는 한편 또 한 권의 저서를 펴내는 데 열중하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오산고보에 재직하면서 1936년 5월호부터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를 연재하였다. ‘조선역사’의 자매 편인 셈이다. <성서조선> 제88호부터 110호까지 2년여에 걸쳐 연재한 세계역사였다. <성서조선>이 폐간되면서 이 연재도 중단되었다. 함석헌은 해방 뒤 <영단(靈斷)>에 썼던 글까지 모아 책으로 묶었다.

함석헌은 해인사에서 ‘조선역사’를 보완, 개작한 것과는 달리 ‘세계역사’는 예전에 쓴 글 중에 골라서 펴냈다. 제목도 ‘성서적 입장에서 본’을 빼고 <역사와 민족>으로 바꾸었다.

<성서조선>이나 <영단>에 냈던 글을 묶어 책으로 내자는 의견이 왔습니다. 그럴 때 나는 반대했습니다. 내자는 이의 말은, 그 글들이 나왔을 때는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말하자면 한 구석에서 된 것이니 이제 그것을 다시 내놔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 생각이 그 때와는 많이 달라졌으므로 그럴 마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자는 이의 주장은 또 이러했습니다.

지금 생각이라고 다 옳은 것도 아니요, 옛날 생각이라고 다 그른 것도 아니며 또 일단 내는 다음에는, 내 생각이라 해서, 거기 독재권을 쓸 수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번 의논이 오고 간 끝에 그 중에서 비교적 내 마음에 허락이 되는 것을 후린 것이 이것입니다.
(주석 12)

함석헌은 당초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 그리고 동기집회에서 발표한 기독교사를 3부 자매편으로 낼 계획이었으나 ‘기독교사’는 원고를 잃어서 영영 햇볕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정말 어려운데 빠졌습니다. 정말 깊이 생각할 때 아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고 있을 겨를이 없다고 ‘어떻게, 어떻게’ 하고 ‘방안’을 찾아서 미치나, 방안이 어디 있겠습니까?

속 그 자체가 잘못됐는데, 깊이 생각이라 했지만, 무엇이 깊은 것이겠습니까? 독자적으로, 나로서 하는 것 밖에 없을 것입니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 열 번 스무 번 뒤져 왔던 방구석을 또 다시 뒤지는 모양으로 그런 심리로 지나간 날에 했던 생각을 또 다시 뒤집어 봅니다.
(주석 13)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일반에 비교적 많이 알려진데 비해 <역사와 민족>은 덜 알려진 편이다. 책은 △ 서언 - 우리들의 세계역사, 성서사관과 진화론에 이어 △ 창시시대 △ 성장기 △ 민족 위에 나타난 신의 섭리로 큰 장을 나누었다.

△ 창시시대 - 1. 우주의 창조. 2. 생명의 창조. 3, 인류의 출현까지. 4. 인류의 진화. 5. 인간의 특질. △ 성장기 - 1. 석기시대. 2. 지리와 인종의 배포. 3. 요람 안의 여러 운명. 4. 종교. 5. 무력국가. △ 민족 위에 나타난 신의 섭리 - 1. 서풍의 노래. 2. 프로테스탄트의 정신. 3. 순교의 정신. 4. 하나님의 정의. 5. 산 신앙. 6. 무교회 신앙과 조선. 7. 존재하는 종교. 8. 제2의 종교개혁. 성삼문과 스테반. △ 20세기의 출애굽 - 1. 민족 위에 나타난 신의 섭리. 애소랜도의 발시로 구성되었다.

함석헌은 이 책의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프로테스탄트의 근본 정신이란 어떤 것인가? 이것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려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프로테스탄트라는 그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다. 명사는 그 사물을 대표하는 것이므로 그가 지는 성질을 단적으로 잘 나타낸다.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의 근본이 되는 프로테스트 라는 말은 번역하여서 ‘반항한다’, ‘항의한다’, ‘선언한다’, ‘공증한다’ 등의 말로 된다. 대체로 말해서 자기의 주장을 공공연히 선언 증거한다는 말로 전투적 기분이 짙은 말이다. 곧 의가 불의에, 진리가 사론에, 선이 악에 강압을 받을 때에 프로테스탄트가 일어난다. 이렇게 하는 사람을 프로테스탄트, 그 주의를 프로테스탄티즘이라 한다. 이 명사의 해석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위인(爲人)이 어떠함은 대체로 짐작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재미 있는 것은 이 명사가 프로테스탄트 자신이 붙인 것이 아니고, 반대자가 붙여주었다는 것이다.(…) 제 2스파에르회의 때에 정통파 구교 사람들이 그 결정한 법안에 반항한다 하여서 그들을 불러 프로테스탄트 곧 반항자라 경멸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후에는 자타가 다 승인하여 공용하게 되었다.
(주석 14)

함석헌은 프로테스탄트였다. 진정한 기독교의 정신을 잇고자 하였고, 그 정신으로 압제자들에게 대들었다. 기독교가 근본정신을 잃고 타락하자 이를 비판하고, 독재권력과 야합하자 거침없이 떠났다. 하지만 기독교의 기본인 성서를 죽는 날까지 놓지 않았다. 그 대신 저항을 통해 프로테스탄트가 되었다. 함석헌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역사, 그 원류를 설명한다.

프로테스탄티즘 운동의 배후에는 중세의 종교적 질곡에 반항하는 문예부흥 이래의 자유사상, 인문주의사상이 흘러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오히려 불충분하다. 한층 더 올라가서 바울주의에서 우리는 근원은 찾을 수 있다. 바울은 그 자신이 주장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 같이, 무엇보다 자유독립의 사람이다. 유대교의 율법주의, 의식주의(儀式主義)의 묵은 물결이 때때로 침입하려는 모양을 보고는 그는 열화 같이 일어서서 신앙의 자유독립을 외쳤다. 갈라디아서를 읽는 사람은 누구나 이를 알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의문(儀文)의 노예가 아니요, 신앙에 의한 자유의 아들이라는 것을 주장하여 온 유대교도들을 상대로 싸우는 바울은 프로테스탄트가 아니고 무엇인가? (주석 15)

함석헌은 또 이 책의 <하나님의 정의>편에서, 양심이 마비되고 진실을 보는 눈이 까막눈이 된 사람들을 질타한다.

눈먼자야, 네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네가 죽음 구렁이 속에 빠져죽고 생각이 없거든 두드려라. 열심히 두드려라. 정의의 빛이 있을 지어라 하며. 그러면 네 눈을 덮은 두터운 암흑의 빗장이 깨어지고, 눈이 부신 정의의 빛이 스스로 나타나 네 앞을 환하게 비칠 것이다. 만고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정의다. (주석 16)


주석
12> 함석헌, <역사와 민족>, 머리말, 제일출판사, 1964.
13> 앞과 같음.
14> 앞의 책, 242~246쪽.
15> 앞의 책, 249쪽.
16> 앞의 책, 2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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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0장] 매국외교 반대의 격랑 속에서 2

013/01/16 08:00 김삼웅

 

 

플리커(@Dan Stovall)

함석헌의 비폭력주의는 투항이나 패배주의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비폭력저항이었다. 독재세력과 싸우되 비폭력으로 저항하자는 것이다.
간디의 비폭력사상을 배운 것이다. 그의 “비폭력이라는 좁고 곧은 길 외에는 희망이 없다”면서 “진리는 곧을 때는 금강석 같으면서도 연할 때는 꽃 같은 것이다”란 신념대로였다. “오직 비폭력만이 인류의 희망”이란 간디의 철학은 바로 함석헌의 철학이었다. <사상계> 1967년 2월호에 쓴 <저항의 철학>에서 잘 나타난다.

사람은 저항하는 거다. 저항하는 것이 곧 인간이다. 저항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왜 그런가? 사람은 인격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인격이 무엇인가? 자유하는 것 아닌가? 우선 나는 나다 하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나는 나를 위한 것이다 하는 자주하는 의지로써, 내 뜻 대로 내 마음껏, 나를 발전시켜 완전에까지 이르자는 것이 인격이다.
(주석 7)

다음은 앞 장에서도 인용하였지만, 함석헌의 저항사상의 핵심 부문이다.

저항! 얼마나 좋은 말인가? 모든 말이 다 늙어 버려 노망을 하다가 죽게 된다 해도, 아마 이 저항이라는 말만은 새파랗게 살아나고 또 살아나 영원의 젊은이로 남을 것이다.
아마 “맨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하던 그 말씀은 바로 이 말 곧 ‘저항’이었을 것이다.
왜 그러냐고? 말씀은 근본이 반항이다. 가슴 속에 갇혀 있지 못해 터지고 나오는 기(氣) 즉, 음(陰)한 주머니 속에 자지 못해 쏟아나오는 정(精), 맨숭맨숭한 골통 속에 곯고 있지 못해 날개치고 나오는 신(神), 그것이 곧 말씀이다. 깨끗하다는 동정녀의 탯집도 그냥 있을 수는 없어 말구유 안으로라도 박차고 나오는 아들이 곧 말씀이다.
(주석 8)

함석헌의 저항정신을 연구한 송기득(한신대) 전 교수는 “함석헌의 저항은 단순히 인간의 개체적 존재와 삶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사회와 역사의 현장에서 육화(肉化)시켰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이것을 우리는 ‘역사적 저항’이라고 부를 수 있는 데 그것은 그대로 ‘존재적 저항’의 연장이다. 그는 나와 역사를 따로 떼어서 보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에게 있어 전체이다.” (주석 9)고 분석한다.

송기득의 분석대로 함석헌의 저항은 역사적이었다.
일제로부터 시작된 그의 저항은 소련, 이승만ㆍ박정희ㆍ전두환에게까지 이어진다.

“정치가 깡패식 폭력주의로서 민중을 억압하는 채제로 나갈 때 그것은 함석헌에게 있어서 무섭게 저항하는 상대로 부상한다. 어떤 이데올로기로도 어떤 이유로서도 민중을 억누를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주석 10)

함석헌이 좋아했던 러시아의 저항인 베르쟈예프는 “나는 일생을 통하여 저항인이었다”고 고백할만큼 비판적 지식인이었다.

“그는 역사의 위대한 반역에 모두 찬성투표를 한다고 했다. 루소의 ‘자연’의 반역, 프랑스혁명의 반역, 객체의 권력에 대한 관념론의 반역,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반역, 이성과 도덕에 대한 니체의 반역, 사회에 대한 입센의 반역, 역사와 운명에 대한 톨스토이의 반역 등 모두가 베르자예프의 반역과 동질적인 것이었다.” (주석 11)는 평가는 함석헌이 이은 비판과 저항정신이다.


주석
7> <사상계>, 1967년 2월호, 10쪽.
8> 앞의 책, 13쪽.
9> 송기득, <함석헌의 저항론>, <씨알, 인간, 역사>, 88~89쪽.
10> 앞의 책, 89쪽.
11> 신민현, <저항의 자유인 베르쟈예프>, <기독교사상>, 1970년 4월호, 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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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0장] 매국외교 반대의 격랑 속에서

2013/01/15 08:00 김삼웅

 

 

미국은 동북아에서 일본을 다시 키워 소련을 봉쇄하려 했다. 1965년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 정권은 야당과 시민ㆍ학생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강행하면서 협정을 밀고 나갔다. 1964년 6월 3일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시내에 투입하여 난폭하게 시위를 진압했다.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에 군대를 동원하는 군사통치 수법의 효시가 되었다.
정부는 학생시위를 배후에서 조종, 정권타도와 국가변란을 음모했다는 혐의로 1차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을 날조하면서 국면전환을 시도했다. 이것 역시 박정희 정권이 위기에 몰리면 어김없이 써먹은 공안카드의 효시가 되었다. 국민을 겁박하기 위한 수법이었다.

공화당 정권은 야당의원 61명이 총사퇴한 가운데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 비준안과 전투사단 베트남파병안을 날치기로 처리했다. 학생시위가 격화되면서 정부는 무장군인들을 고려대와 연세대에 난입시키고, 서울 전역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해방 20년 만에 일본군 출신 대통령이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강행 처리하고 말았다. 정부는 12월 18일 한일협정 비준서를 교환하면서 마침내 국민의 뜻에 배치되는 협정이 이루어졌다.

함석헌은 분노하고 좌절하였다. 국민에 대한 실망도 적지 않았다. 그처럼 목이 터지도록 외치고 호소해도 국민은 정권의 폭력성에 겁을 먹고, 그리고 구차스런 먹고 살기의 일상 때문에 침묵하거나 외면하였다. 그래서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강원도 인적이 드문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씨알농장 동지들이 땅을 개간해 농장을 일군 안반덕 골짜기였다. 이곳에서 오랜 명상과 자책으로 날들을 보냈다. 프랑스의 사상가, 철학자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인간현상>, <인간의 장래>, <과거의 비전> 등을 읽고 그에게 푹 빠져들었다.

함석헌이 “떼이야르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59년 말이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에서 소개된 그의 기사를 우연히 읽은 직후였다.” (주석 1) 이후부터는 그의 모든 책을 구해 읽고 특히 <인간현상>에서 많은 감명을 받았다.

원어는 프랑스말로 났을 테고, 내가 본 거는 영어 번역으로 보고 그랬는데 우리말로 번역됐으니까 한 번씩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보시오. 사람을 하나의 현상으로 보는 거예요. 현상, 이거 다 우리가 모양살이로 사람은 이렇게 생겼다든지 저 나무는 저렇게 생겼다든지,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현상의 세계 아니예요? 현상의 세계, 물질세계라 그렇게 말해도 좋지만 물질이나 뭐나 다 현상으로 나타난 거니까 사람을 하나의 현상으로 보고 설명하잔 책이에요. 그는 제주이트(Jesuit)파의 신부였는데, 그이가 전공한 것은 고생물학이고 독실한 크리스찬 신앙을 지닌 사람이었지요. 이제 그런 신앙을 가지고 학문적인 말로 이 우주를 설명해보자는 내용이에요. 그래서 한 마디로 말하면 이 우주는 마지막에 어느 한 점으로, 학문적으로는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라는 그 어느 ‘오메가 점’을 향하여 나간다고 그런 말 하는 사람이에요. (주석 2)

함석헌이 강원도 산골짜기에 파묻혀 샤르댕의 ‘인간현상’에 몰두하게 된 것은 “역사를 위한 투쟁을 좀 더 확실하게 인간의 미래를 위한 투쟁과 일치시켜서 생각했던 것이 분명해보였다.” (주석 3) 함석헌은 이어서 샤르댕의 <인간의 장래>를 읽고, 그의 주장대로 “인간의 미래와 미래의 세계가 ‘폭력도 없고 증오심도 없는’ 인간의 세계화(Plane'tarisation)로 진행될 수 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등장했던 피(血)의 전체주의에 대한 사랑의 전체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석 4)

함석헌은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비폭력혁명>을 썼다. 장준하가 이대로는 물러설 수 없다면서 그에게 원고를 청탁했고, 이제 날로 흉포해진 박정희 정권에 대응하여 승리하기 위해서는 비폭력을 통한 줄기찬 싸움을 전개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이 글을 썼다.

우리 나갈 길은 오직 한 길 밖에 없습니다. 비폭력혁명의 길입니다. 그것은 참입니다. 누구나, 어떤 일에서나, 지켜야 할 진리입니다. 영원한 진리가 이 시대의 나갈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 곧 이 비폭력의 길입니다. 이날까지 이 역사를 이끌어 온 것은 폭력주의였습니다. 그 결과 세계는 오늘에 보는 것 같이 이렇게 어지럽게 참혹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것이 이 이상 더 나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빠졌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참이 아니요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 생각과 행동과 살림을 근본적으로 전체적으로 고치지 않으면 아니되는 대목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혁명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주석 5)

함석헌은 생애를 통해 폭력을 거부하고 비폭력 저항을 추구했다. 비폭력 투쟁의 원칙은 모든 인간에게(상대에게도) 양심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상대도 동물이 아닌 인간이라면 폭력이 아닌 비폭력을 써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의 비폭력주의는 개인이나 국가를 넘어 국제간에도 필요성을 역설한다.

정말 문제되는 것은 민족감정은 아닙니다. 그것을 타고 들어가기 쉬운 폭력주의, 침략주의입니다. 그러므로 비폭력주의를 잘 이해하면 각 민족이 서로 제각기 자기의 특성을 가지면서도 잘 화합하여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비폭력주의는 서로 경쟁이 아니고 문제가 있는 때에도 자기희생에 의하여 서로 저쪽의 속에 숨어 있는 좋은 힘을 끌어내도록 하자는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주석 6)

함석헌의 비폭력주의운동에 대해 더러는 비판하거나 오해하기도 하였다. 민주주의를 짓밟고 씨알들의 생존권을 박탈한 무리들을 방치, 방관하려느냐는 반박이 따랐다. 하지만 그의 비폭력주의는 정확하게는 ‘비폭력저항운동’이다.

알제리아 전쟁이 한창일 때 신학자 카잘리스는 “폭력에는 자유롭게 하는 폭력과 속박하게 하는 폭력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속박의 폭력’에 저항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1984년 전두환 정권의 폭력성이 극에 달하고 있을 즈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폭력이란 도덕적 정당성이 없이 타인의 자유와 인권, 생명과 재산을 침해하고 짓밟는 힘”이라고 정의했다.

박정희 정권은 구조적인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었다. 쿠데타 자체가 폭력이고, 따라서 폭력정권이었다. 굴욕회담을 반대하는 학생들을 폭력으로 진압하고 대학에 무장군인들을 투입하여 제압했다. 씨알이 현대무기로 무장한 군경에 당해낼 힘이 없었다. 그래서 비폭력주의 저항운동을 제시한 것이다. 간디가 걸었던 길이다. 비폭력을 통해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폭력세력을 제압하자는 주장이었다.


주석
1> 이치석, 앞의 책, 501쪽.
2> 함석헌, <내면의 예수>, <전집> 19, 140쪽.
3> 이치석, 앞의 책, 504쪽.
4> 앞의 책, 504~505쪽, 재인용.
5> <사상계>, 1965년 1월호, 41쪽.
6> 앞의 책, 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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