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3장] 동서양 고전 넘나들며 통섭하다

2013/02/10 08:00 김삼웅

 

 

함석헌은 반독재 투쟁의 선두에서 힘겹게 싸우면서도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는 늘 생각하고 책 읽고 글 쓰고 행동하였다. 생각하는 사람, 탐구하는 지식인, 행동하는 실천인이다. 그에게 나이는 시쳇말로 숫자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노인들이 늙어가는 데 비해 그는 정신적으로 학문적으로 성숙해갔다. 그만큼 사유와 독서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져갔다.

갈릴 지브란의 <사람의 아들 예수>,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를 번역하여 잡지에 연재하고, 동양고전을 풀이하고, 여행기를 쓰는 등, 4,50대의 학자가 하기도 어려운 작업을 계속하였다. 학문의 질양면에서 어느 학자도 따르기 쉽지 않았다.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 1976년 6월호에 “한국사상의 발굴과 창조”를 특집으로 꾸미면서 <이능화의 조선도교사>를 번역하여 실었다. 백낙청의 <분단시대 문학의 사상>, 김경재의 <기독교사상과 한국사상>, 이경식의 <한국정치사상의 모색>이 함께 실렸다.

함석헌은 이능화의 <조선도교사>중에 우선 3장만 번역하여 여기에 실었다. 이때까지도 한문으로 쓰인 이 책의 한글 번역이 없었다고 한다. 함석헌은 오래 전부터 도교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관심 분야가 유ㆍ불을 비롯 기독교사상, 인도사상, 힌두교경전 등 미치지 않는 부문이 드물지만 도교에 대한 관심이 각별했다. 동양 고전은 20대 시절부터 그의 책상에서 떠나지 않았다. 닦고 익힌 한문 실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70년대 중반부터 노자의 <도덕경>과 장자의 <장자>와 <소요유>, <제물론> 등을 번역했다.

뿐만 아니라 맹자의 <맹자>, 굴원의 <어부사>, 왕양명의 <대학문>, 두보의 <병거행>, 문천상의 <정기가>등을 강론, 풀이하였다. 불교 경전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법정 스님이 머문 여수 불일암을 찾아서는 “나도 나이만 젊었으면 승려가 되었으면 싶다”고 토로할 정도였다.

동서양 고전을 두루 섭렵하고 천착하면서 씨알들에게 쉽게 풀이하여 읽혔으며, 고전풀이 시민 강좌를 통해 대중화하려고 애썼다. 그의 성서와 고전 강좌에는 많은 시민이 참석하였다.

"오늘날 씨알이 씨알 노릇을 하기 위하여 반드시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의 하나는 옛글, 곧 고전을 고쳐 읽는 일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동양의 옛글이다. 이날까지 서양문명, 더구나 물질주의적인 문명이 주가 되어 인류를 이끌어왔다. 그래서 동양은 오랜 정신적인 특색을 드러내는 문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기 눌려서 거의 그 값을 인정받지 못했고, 동양사람 자신까지 동양의 생각을 업신여겨왔다. 더구나 종교에서 그러했다. 그러나 이제 그 서양문명이 막다른 골목에 들었고, 인류의 장래를 위해 참되게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동양 소리를 하게 됐다.” (주석 5)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 창간 이후 연속적으로 ‘씨알의 옛글풀이’를 이 잡지에 연재하였다.
그의 한문실력은 ‘오산 도깨비’의 소문이 빈말이 아닐 만큼 출중해서 거침이 없었다. 단순히 번역 수준을 넘어서 주석을 달아 ‘함석헌식 해석’을 시도하였다. 동양의 대표적 고전을 자신의 정신적 양식으로 삼고 더불어 생의 활력으로 삼았다.

나는 일제시대에 구약성경의 이사야, 예레미아를 많이 읽었다. 그 압박 밑에서 낙심이 나려 하다가도 그들의 굳센 믿음과 위대한 사상에 접하면 모든 시름을 다 잊고 다시 하늘을 향해 일어설 수가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말을 해주는 산 영(靈)이었지 결코 죽은 글이 아니었다. 내가 그들을 다 알지 못해도 좋다.

마찬가지로 이 몇 십년의 더러운 정치 속에서도 내가 살아올 수 있는 것은 날마다 노자ㆍ장자와 대화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썩 잘함은 물과 같다. 물은 모든 것에 좋게 잘해주면서도 다투지 않고 누구나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있으려 한다. 그러므로 거의 도(道)에 가깝다”하는 노자의 말을 듣지 못했던들 씨알을 잊어버리고 낙심을 했을지도 모르고, 아침 저녁으로 장자를 따라 무용(無用)의 대수(大樹)를 아무도 없는 동리나 넓은 광야(無何有之鄕 廣莫之野)에 심어놓고 그 옆에 한가히 서성이며 그 밑에 거닐며 누워 잘 줄을 몰랐던들(<장자>, <소요유>), 이 양육강식과 물량 퇴폐의 독한 공기 속에서 벌써 질식이 되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주석 6)

함석헌은 공자와 맹자의 철학보다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더 좋아했다. “유교는 실천도덕으로 단계적으로 지도하자는 것이요, 노ㆍ장의 가르침은 궁국의 자리를 뚫어 단번에 현실을 초월하는 자리에 가자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관계를 생각하면 자연 예수가 밤에 찾아와서 “선생님은 하늘에서 오신 분인 줄 압니다”한 니고데모에 대해, “새로 나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 하여 첫머리에서부터 까버리던 장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 후에도 두고두고 논쟁이 있었다.

예수가 바리새적인 길로 구원이 될 수 없는 것을 알았던 것 같이 노자ㆍ장자도 유교의 가르침으로 춘추전국시대가 건져질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가 자기의 길은 좁고 험하다고 했던 것 같이, 노자는 자기의 길을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했다. (주석 7)

함석헌이 특히 노자에 매료된 것은 그의 평화주의 사상때문이었다.

“나는 노자를 평화주의의 첫째 사람이라고 한다. 물론 그전에 이미 이사야가 있어 ‘칼을 보습을 만들 것’을 외친 일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노자처럼 시종일관해서 순수한 평화주위를 부르짖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더구나 그것이 살벌한 부국강병주의의 춘추전국시대였다. 그리고 장자는 그것을 우주적인 나팔로써 외쳤다.” (주석 8)

노자와 장자는 함석헌의 스승이었다. 그리고 제자는 실천교사가 되었다. 그는 노ㆍ장을 닮고자 했고, 해서 그의 사유와 행동에는 2000년이 넘는 시차에도 스승들의 체온이 스민다. 기독교와 노ㆍ장철학, 인도사상, 힌두교사상을 통섭하는 그의 사유의 세계는 가히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에 접한다.

“사람의 마음이 밖에서 오는 여러 가지 구속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소한 생각에서 벗어나서, 완전히 자유하는 초월적 정신계에 사는 것”이라 풀이한 소요유에서 함석헌의 모습을 대하게 된다.

함석헌이 동양고전 중에서도 가장 즐겼던 것의 하나가 문천상(文天祥)의 <정기가(正氣歌)>였다. 일찍이 안중근이 소시적에 암송하고, 신채호가 여순 감옥에서도 놓지 않았던 글이다. 함석헌은 특유의 문장으로 풀이했다.

정 기 가

하늘 땅에 빠른 숨 있어서
온 가지 흐르는 꼴 지어냈으니
아래선 가람이며 뫼가 되었고
위에선 해요 별이 됐으며
사람에서 허허라 부르는 것이
누리에 또한 가득 들어 찼더라(…)
제(齊)에 있어서 태사의 글
진(晋)에 있어서 동고의 붓
진(秦)에 있어서 장랑의 망치
한(漢)에 있어서 소무의 절개
엄 장군의 머리가 됐고
희 시중의 피가 됐으며
장 저양의 이가 됐고
안 성산의 혀가 됐더라
혹은 요동의 삿갓되어
맑은 뜻 어름 눈을 가다듬었고
혹은 출사표 되어
그 장렬함, 귀신을 울렸으며
혹은 강 건너는 뱃대 되어
분한 한숨 오랑캐를 삼켰고
혹은 도둑 치는 홑 되어
안 된 놈 대가리가 부셔졌더라.(…)
아아, 슬프다, 이 진탕 속이
나의 즐거운 나라 됐구나
어찌 무슨 다른 잔재주 있어
음양이 도둑질 못한 것일까
돌아보아 이 속에 깜작이는 빛
우러러 저기 떠도는 흰 구름
푸른 하늘인들 다하라만은
어진이들 가신 날은 이미 저물어도
그 본 때는 아직 엊그제로다
처마 밑에 책 펴 읽고나니
옛 길 내 낮을 비쳐 주노나.
(주석 9)


주석
5> 함석헌, <옛글 고쳐씹기>, <전집 20>, 13쪽, 한길사, 1982.
6> 앞의 책, 26쪽.
7> 앞의 책, 29쪽.
8> 앞의 책, 31쪽.
9> 함석헌, <하늘땅에 바른 숨 있어>, 279~281쪽(발췌), 삼만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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