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2장] 유신타도, 박정희와 전면대결

2013/02/03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 8월호에 <민족통일의 구상①>의 주제를 발표하고, 천관우ㆍ안병무ㆍ장준하ㆍ선우휘ㆍ김용준ㆍ법정 등과 토론 내용을 실었다. 이어서 9월호에는 <5천만 동포 앞에 눈물로 부르짖는 말>을 통해 남북의 위정자와 양측의 동포들이 하나가 되어 통일을 이루자고 호소한다. 이번 호에는 특히 장준하의 필생의 역작으로 평가되는 <민족주의자의 길>이 함께 실렸다.

1972년 11월호에 <생각하는 씨알이라야 산다>를 쓰고, 12월호에는 갈릴 지브란의 <예언자>를 전문 번역하여 실었다. 37~101쪽에 걸친 파격적인 시도였다. 10월 17일 갑작스런 유신선포와 계엄령으로 불가피하게 택하게 된 듯 하다. 이 글은 1964년 함석헌이 번역하여 단행본으로 출간했던 것을 대폭 수정하고 첨가하여 실었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이 20년 가까워 오지만 오늘까지 잊지 못하는 글입니다. 첫 번 번역판을 낸 것만도 10년이 넘습니다. 이것을 낸 후 친구를 많이 얻었고, 곧 다 팔려서 당시 인쇄하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출판사 사정으로 이날껏 못했습니다.” (주석 7)라고 저간의 사정을 밝혔다.

유신체제는 <씨알의 소리>에게 힘겨운 시대였다. 기획, 편집, 경영에서 어려움이 겹쳤다. 우선 계엄사의 검열이 심했다. 1973년 1월호에는 준비된 글이 대부분 빠지고 갈릴 지브란의 <사람의 아들 예수>를 새로 번역 연재하고 <세계구원과 양심의 자유>를 썼다. 2월호의 <끝까지 버티는 것이 씨알이다>에서는 검열의 상황에서도 ‘할 말’을 했다.

“바람의 칼보다 집의 칼이 더 사납고 어름의 조여듬보다 제도의 조여듬이 더 고약합니다. 끝까지 꺼지지 않는 불을 혈관 속에 품고 버티어야 하고, 마침내는 폭발하는 기운으로 때를 지켜보아야 합니다.” (주석 8)라고 의지를 천명한다.

함석헌은 씨알에게 유신의 폭압에서 포기하지 말고 버티라고 힘주어 말한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이런 일이 있을까?’ 생각이 되는 모든 현상은 이러한 역사적 전통에서 오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버텨야 합니다. 버티지 못하면 둘이 다 죽습니다. 죽기로써 버티면 둘이 다 구원됩니다.” (주석 9)

함석헌은 유신의 폭압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씨알의 소리>를 통해 민중을 일깨우고 위로하는 글쓰기를 계속하였다. 1973년 3월호의 <통욕 3ㆍ1절>, <참 목자의 모습>, 4월호의 <4ㆍ19는 혁명이다>, 5월호의 <젊은 세대에게 주는 말>, 6월호의 <한국역사의 의미 - 김동길과 대담>, 7월호의 <정치와 미신>, 8월호의 <형벌과 인간>, 9월호의 <내가 겪은 관동대진재>, 10월호의 <외래문물의 호수와 민족문화의 위기 - 안병무ㆍ김동길ㆍ장준하와 대담>, 11월호의 <우리는 왜 이래야 합니까?>, 12월호의 <안창호를 내놔라>등을 연달아 썼다.

유신체제와 거듭 선포한 긴급조치로도 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분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학생ㆍ종교인ㆍ문인ㆍ언론인들의 저항이 불물처럼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1973년 11월 5일 함석헌은 서울 YMCA 강당에서 강기철ㆍ법정ㆍ지학순ㆍ조향록ㆍ김재준ㆍ천관우ㆍ홍남순ㆍ계훈지ㆍ정수일 등 15인이 서명한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선언’>에서 ‘강요된 침묵’에 함거하고, “인권과 민권을 기본으로 했던 민주체제 재건을 위해 전 국민이 각자의 위치에서 궐기 투쟁할 것”을 호소했다. 이어서 “현 정권의 독재정치는 국내외적으로 최악의 상태에 국민을 처해 놓았다. 권력에 의한 법치 원칙 파괴, 정보정치로 인한 불신 풍조, 특권층의 부정부패, 빈부격차 극심, 집회ㆍ언론ㆍ학원ㆍ종교의 자유 억압, 3권 장악에 의한 독재체제 구축을 규탄한다”면서 유신체제를 정면 비판하였다. (주석 10)

함석헌은 노령을 돌보지않고 민주회복을 위한 투쟁의 선두에 섰다. 1973년 11월 16일, 한국 신학대학 교수들의 삭발과 학생들의 단식투쟁을 격려차 방문했다가 고려대 이발관으로 직행하여 정만수의 손을 빌어 삭발하고 단식에 동참하였다. 이승만 독재에 항거하여 천안 씨알농장에서 40일간 단식, 1965년 7월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 비준저지 투쟁 과정에서 14일 간의 삭발ㆍ단식에 이어 세 번째였다.

하지만 72세의 나이에 1일1식으로 버티던 그에게 삭발 단식은 쉽게 건강을 해치게 되었다. 장준하 등 편집위원들이 달려와 만류하면서 단식투쟁은 2일만에 그쳤으나,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반독재 진영에서 잇따른 단식투쟁이 전개되었다.

긴급조치 시대에 함석헌은 크고 작은 시국사건에 앞장서거나 연루되어 중앙정보부와 경찰에 잡혀가기를 밥먹듯이 하였다. 자료에 남아 있는 것만도 그렇다. 가택 연금 등은 일일이 기록하기 어렵다.

1974년 긴급조치 1, 2호 선포에 따라 1월 13일 천관우ㆍ안병무ㆍ문동환ㆍ법정 등과 함께 기관원에 연행되었다가 새벽에 귀가, 9월 23일 중정에 연행되어 3일만에 귀가, 1975년 1월 16일 중정에 연행, 3월 1일 자택 노상에서 경찰에 의해 2시간 연금, 이후 자택 연금 계속, 1976년 3월 2일 정보부에 연행, 3일 만에 귀가, 3월 3일 <씨알의 소리> 사무실 및 자택 수색, 3월 26일 3ㆍ1사건으로 불구속기소, 8월 21일 장준하 선생 1주기 추모 예배를 드리고자 기독교회관 강당을 계약했으나 당국 저지로 무산, 11월 2일 중정의 전태일 열사 추모에서 집회금지, 1977년 7월 5일부터 3일간 자택연금, 11월 16일 대구강연 출발 경찰 폭력으로 저지, 1979년 3월 1일부터 10일간 가택연금, 3월 5일 검찰 소환, 3월 22일 목요기도회 참석 봉쇄한 경찰과 가두 대치, 3월 27일부터 4월 22일까지 가택연금, 6월 1일 금요기도회 참석 저지, 6월 2일 김대중 자택 방문차 출발 도중 경찰 대치로 두루마기 모두 찢겨, 6월 18일 윤형중 신부 장례식 참석 저지, 11월 24일 YMCA강당에서 통대대통령 선출저지 국민대회 참석 뒤 중부서에 연행, 다음날 새벽에 귀가했다가 계엄사에 다시 연행, 11월 26일 YMCA사건으로 계엄사에 또 연행되었다가 15일만인 12월 1일 귀가, 12월 27일 계엄사 검찰부에 소환되어 심문….

이것이 박정희 치하에서 당한 수난의 대강 줄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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