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2장] 유신타도, 박정희와 전면대결

2013/02/02 08:00 김삼웅

 

 

함석헌은 5년 징역과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고도 집행유예로 구속을 면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함석헌과 윤보선 등 노령 인사들을 수감하지 않았다. 정적 김대중을 구속하여 정치활동을 봉쇄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까닭이다. 또 국내외 언론을 감안하여 이들을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게 하고 대법원의 원심확정에도 구속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여론 악화와 국제 인권단체들의 비난이 두려웠던 까닭이다.

모진 권력의 탄압에도 함석헌의 필봉은 결코 무뎌지지 않았다. 박정권의 폭압성이 높아질수록 그의 비판은 강해졌다. 정부가 1976년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자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 12월호에 <비상사태에 대한 우리의 각오>란 시론을 실었다.

“국민을 소경 귀머거리로 만들어놓고 이제와서 큰일났으니 끽 소리 말고 우리 하라는 대로 해라? 어디로 가란 말인가? 죽을 길인가? 살 길인가?” (주석 1)고 따졌다.

국가비상사태 선포로 언론이 더욱 위축되고 지식인, 정치인들이 숨을 죽일 때 그는 황야에서 외쳤다.

“비상시란다고 저마다 목을 움츠리고, 허리를 꾸부리고, 숨을 죽이고, 너도 나도 각각 제 살 실을 찾으려 제 발뿌리 앞만 보려 하지만, 그러다가는 죽는다. 누구만이 죽는 것 아니라 전체가 다 망하고 만다.” (주석 2)

1972년 3ㆍ1절을 앞두고 쓴 <3ㆍ1운동의 현재적 전개>에서는 “이런 때 3ㆍ1운동을 한 번 고쳐 씹어 볼 필요는 없을까?” 묻고 “3ㆍ1운동이라고 입으로는 염불처럼 외우면서도 사실로는 그 정신을 계획적으로 말살시켜 버리려는 운동이 대낮에 승냥이떼처럼 형행하고 있는 이때에 그 쉰세 돌을 맞이하게 됐다.” (주석 3)고 반 3ㆍ1운동 세력을 ‘승량이떼’로 비유하면서 비판했다.

정국이 경색되면서 <씨알의 소리>에 대한 정부의 간섭이 다시 강화되었다. 이번에는 ‘음성적’인 탄압이었다.

집에 돌아와 앉으면 발간했다가 경찰에 방해 받아 도로 걷어온 잡지 묶음이 시집갔다 쫓겨온 딸처럼 소리도 없이 우두커니 구석에 쌓여 있습니다. 그 꼴을 어떻게 보랍니까? 내가 그 잡지를 시작할 때 어떤 마음으로 했는데? 딸 시집 보내는 정도 따위가 아닙니다. 정보부에서는 무슨 돈으로 하느냐 묻고 묻더랍니다마는, 무슨 돈이야? 이름 없고 돈 없는 씨알들이 푼푼이 보내준 돈이지, 글을 쓸 때 어떤 심정으로 누구 위해 쓰는데? (주석 4)

함석헌의 분노는 이어진다. 절절한 분노가 담긴다.

내가 정부 비판의 장본인이면 차라리 죽이거나 살리거나 나를 잡아가면 좋겠는데 나는 아니 잡아가고 공연히 시키는 대로 일하는 주위의 사람만 못살게 학대합니다. 그리고는 나를 가르쳐서는 노망한다 하고 버리고 떠나라고 이간을 시키고, 심지어는 지방의 독자로서 찾아왔던 사람까지 잡아다 고생을 시키는 일까지 있습니다. (주석 5)

<씨알의 소리>는 승소한 뒤에 발행한 제3호는 4천부, 제4호부터 5천부, 신년호인 6호를 각각 정기독자와 시중에서 판매하였다. 발행부수가 늘어나면서 정부의 압력이 가중되었다. 1972년 1월 13일 문대골 업무부장이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구타를 당하고, 종로서적센터의 총판계약이 이유 없이 해제되었다. 계약된 인쇄소도 해약을 통보하고, 2월 초부터는 시중서점에 배부된 2,000여 부가 경찰에 의해 판금되었다. 2, 3월 합본혼도 서점에서 판금되었다. 법도 상식도 없었다. 합법 절차에 따른 간행물을 정부기관이 일방적으로 판금을 시킨 것이다.

1972년 6, 7월 합본호에 쓴 함선헌의 <민족통합의 길>은 6월 20일 민주수호 국민협의회 주최 강연회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민족통합을 참으로 하려면 우리의 대적이 누군가부터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분열시킨 도둑이 누구입니까? 일본? 미국? 소련? 중공? 아닙니까. 어느 다른 민족이나 어떤 이데올로기 때문 아닙니다. 국민을 종으로 만드는 이 국가지상주의입니다. 이제 정치는 옛날처럼 다스림이 아닙니다. 통치가 아닙니다. 군주주의 시대에 조타 군림은 하지만 통치는 아니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지금 남북을 구별할 것 없이 지금 있는 정권들은 다스리려는 정권이지 주인인 민중의 신부름을 하려는 충실한 정부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설혹 통일을 한다해도 그것은 정복이지 통일이 아닙니다. 민중의 불행이 더해 질 뿐입니다. 그래서 반대합니다. (주석 6)

정부는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등 이제까지의 적대정책을 버리고 금방 통일을 이루기나 할 것처럼 요란을 떨었다. 사실은 국민을 속이는 정치놀음이었지만, 한 때나마 남북 겨레의 가슴을 설레게 한 것도 사실이었다.


주석
1> <씨알의 소리>. 1971년 12월호 6쪽.
2> <씨알의 소리>, 1972년 1월호, 13쪽.
3> <씨알의 소리>, 1972년 2, 3월호, 6쪽.
4> <씨알의 소리>, 1972년 4월호, 6쪽, <춘래에 불사춘(春來不似春)>
5> 앞의 책, 7쪽.
6> <씨알의 소리>, 1972년 6, 7월호,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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