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0장] 매국외교 반대의 격랑 속에서 2013/01/15 08:00 김삼웅

 

 

미국은 동북아에서 일본을 다시 키워 소련을 봉쇄하려 했다. 1965년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 정권은 야당과 시민ㆍ학생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강행하면서 협정을 밀고 나갔다. 1964년 6월 3일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시내에 투입하여 난폭하게 시위를 진압했다.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에 군대를 동원하는 군사통치 수법의 효시가 되었다.
정부는 학생시위를 배후에서 조종, 정권타도와 국가변란을 음모했다는 혐의로 1차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을 날조하면서 국면전환을 시도했다. 이것 역시 박정희 정권이 위기에 몰리면 어김없이 써먹은 공안카드의 효시가 되었다. 국민을 겁박하기 위한 수법이었다.

공화당 정권은 야당의원 61명이 총사퇴한 가운데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 비준안과 전투사단 베트남파병안을 날치기로 처리했다. 학생시위가 격화되면서 정부는 무장군인들을 고려대와 연세대에 난입시키고, 서울 전역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해방 20년 만에 일본군 출신 대통령이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강행 처리하고 말았다. 정부는 12월 18일 한일협정 비준서를 교환하면서 마침내 국민의 뜻에 배치되는 협정이 이루어졌다.

함석헌은 분노하고 좌절하였다. 국민에 대한 실망도 적지 않았다. 그처럼 목이 터지도록 외치고 호소해도 국민은 정권의 폭력성에 겁을 먹고, 그리고 구차스런 먹고 살기의 일상 때문에 침묵하거나 외면하였다. 그래서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강원도 인적이 드문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씨알농장 동지들이 땅을 개간해 농장을 일군 안반덕 골짜기였다. 이곳에서 오랜 명상과 자책으로 날들을 보냈다. 프랑스의 사상가, 철학자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인간현상>, <인간의 장래>, <과거의 비전> 등을 읽고 그에게 푹 빠져들었다.

함석헌이 “떼이야르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59년 말이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에서 소개된 그의 기사를 우연히 읽은 직후였다.” (주석 1) 이후부터는 그의 모든 책을 구해 읽고 특히 <인간현상>에서 많은 감명을 받았다.

원어는 프랑스말로 났을 테고, 내가 본 거는 영어 번역으로 보고 그랬는데 우리말로 번역됐으니까 한 번씩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보시오. 사람을 하나의 현상으로 보는 거예요. 현상, 이거 다 우리가 모양살이로 사람은 이렇게 생겼다든지 저 나무는 저렇게 생겼다든지,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현상의 세계 아니예요? 현상의 세계, 물질세계라 그렇게 말해도 좋지만 물질이나 뭐나 다 현상으로 나타난 거니까 사람을 하나의 현상으로 보고 설명하잔 책이에요. 그는 제주이트(Jesuit)파의 신부였는데, 그이가 전공한 것은 고생물학이고 독실한 크리스찬 신앙을 지닌 사람이었지요. 이제 그런 신앙을 가지고 학문적인 말로 이 우주를 설명해보자는 내용이에요. 그래서 한 마디로 말하면 이 우주는 마지막에 어느 한 점으로, 학문적으로는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라는 그 어느 ‘오메가 점’을 향하여 나간다고 그런 말 하는 사람이에요. (주석 2)

함석헌이 강원도 산골짜기에 파묻혀 샤르댕의 ‘인간현상’에 몰두하게 된 것은 “역사를 위한 투쟁을 좀 더 확실하게 인간의 미래를 위한 투쟁과 일치시켜서 생각했던 것이 분명해보였다.” (주석 3) 함석헌은 이어서 샤르댕의 <인간의 장래>를 읽고, 그의 주장대로 “인간의 미래와 미래의 세계가 ‘폭력도 없고 증오심도 없는’ 인간의 세계화(Plane'tarisation)로 진행될 수 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등장했던 피(血)의 전체주의에 대한 사랑의 전체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석 4)

함석헌은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비폭력혁명>을 썼다. 장준하가 이대로는 물러설 수 없다면서 그에게 원고를 청탁했고, 이제 날로 흉포해진 박정희 정권에 대응하여 승리하기 위해서는 비폭력을 통한 줄기찬 싸움을 전개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이 글을 썼다.

우리 나갈 길은 오직 한 길 밖에 없습니다. 비폭력혁명의 길입니다. 그것은 참입니다. 누구나, 어떤 일에서나, 지켜야 할 진리입니다. 영원한 진리가 이 시대의 나갈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 곧 이 비폭력의 길입니다. 이날까지 이 역사를 이끌어 온 것은 폭력주의였습니다. 그 결과 세계는 오늘에 보는 것 같이 이렇게 어지럽게 참혹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것이 이 이상 더 나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빠졌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참이 아니요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 생각과 행동과 살림을 근본적으로 전체적으로 고치지 않으면 아니되는 대목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혁명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주석 5)

함석헌은 생애를 통해 폭력을 거부하고 비폭력 저항을 추구했다. 비폭력 투쟁의 원칙은 모든 인간에게(상대에게도) 양심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상대도 동물이 아닌 인간이라면 폭력이 아닌 비폭력을 써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의 비폭력주의는 개인이나 국가를 넘어 국제간에도 필요성을 역설한다.

정말 문제되는 것은 민족감정은 아닙니다. 그것을 타고 들어가기 쉬운 폭력주의, 침략주의입니다. 그러므로 비폭력주의를 잘 이해하면 각 민족이 서로 제각기 자기의 특성을 가지면서도 잘 화합하여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비폭력주의는 서로 경쟁이 아니고 문제가 있는 때에도 자기희생에 의하여 서로 저쪽의 속에 숨어 있는 좋은 힘을 끌어내도록 하자는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주석 6)

함석헌의 비폭력주의운동에 대해 더러는 비판하거나 오해하기도 하였다. 민주주의를 짓밟고 씨알들의 생존권을 박탈한 무리들을 방치, 방관하려느냐는 반박이 따랐다. 하지만 그의 비폭력주의는 정확하게는 ‘비폭력저항운동’이다.

알제리아 전쟁이 한창일 때 신학자 카잘리스는 “폭력에는 자유롭게 하는 폭력과 속박하게 하는 폭력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속박의 폭력’에 저항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1984년 전두환 정권의 폭력성이 극에 달하고 있을 즈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폭력이란 도덕적 정당성이 없이 타인의 자유와 인권, 생명과 재산을 침해하고 짓밟는 힘”이라고 정의했다.

박정희 정권은 구조적인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었다. 쿠데타 자체가 폭력이고, 따라서 폭력정권이었다. 굴욕회담을 반대하는 학생들을 폭력으로 진압하고 대학에 무장군인들을 투입하여 제압했다. 씨알이 현대무기로 무장한 군경에 당해낼 힘이 없었다. 그래서 비폭력주의 저항운동을 제시한 것이다. 간디가 걸었던 길이다. 비폭력을 통해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폭력세력을 제압하자는 주장이었다.



주석
1> 이치석, 앞의 책, 501쪽.
2> 함석헌, <내면의 예수>, <전집> 19, 140쪽.
3> 이치석, 앞의 책, 504쪽.
4> 앞의 책, 504~505쪽, 재인용.
5> <사상계>, 1965년 1월호, 41쪽.
6> 앞의 책, 55쪽.


01.jpg

 

01.jpg
0.05MB

저항인 함석헌 평전/[9장] 민권투쟁의 중심에 서다

2013/01/14 08:00 김삼웅

 

 

함석헌은 박정희 정권의 반역사적, 반민족적인 굴욕회담의 강행에 믿을 것은 국민의 힘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절절한 심경으로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민족혼을 이어온 국민의 정신을 일깨운다.

돌이켜 생각해 보라. 그렇게도 모르나? 이 4천년 넘는 역사가 무슨 역사인가? 결국 고난의 역사가 아닌가? 왜 고난인가? 제 정신 하나 부족했기 때문에 당한 고난이요, 욕 아닌가? 그러나 고난을 당하면서도 아주 망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부족은 하지만, 그 때문에 늘 욕은 봤지만, 그래도 제 정신을 아주 잃지는 않고 지켜왔기 때문 아닌가? 4천년 동안 먹고 입고 놀아온 것이 귀한가?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중국에 압박을 받아도 중국 사람이 못 되고, ‘만주 되놈’의 침입을 받으면서도 되놈이 못되며, ‘왜놈’의 짓밟음을 입으면서도 왜놈이 못돼 버린 그것, 그 무엇, 그 정신이 귀하지 않은가? 미약은 하지만 그래도 이것이 보배요, 실날 같지만 그래도 이것이 생명 아닌가? 실로 우리가 해방을 당한 것은 우리 생활이 풍부해서도 아니요 우리 기술이 높아서도 아니다. 거지같은 생활이요 뒤떨어진 기술이지만, 그래도 한국 사람이란 정신 하나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주석 31)

함석헌은 정치군부세력과 이에 놀아나는 정치인들의 행태를 신랄하게 규탄한다. 그는 이 글을 쓰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 같다.

그런데 이제 이 나라의 생명이 되는 이 정신은 잊고 그것을 일부러 짓밟으면서 남의 세력을 힘입어 부흥을 꾀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또 일부 물욕과 권세에 미친, 민족과 역사를 모르는 정치인이란 것들은 비록 더럽고 옅은 이기주의에서 그렇다 하더라도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민중이 그것을 능히 막아내지 못하고 주춤하고 서서 걱정만 하는 것은 얼마나 비겁하고 못생긴 일인가?

함석헌은 1965년 8월 30일 재야ㆍ종교계ㆍ학계ㆍ문인ㆍ예비역 장성 등 각 분야 지도급 인사 30여 명이 결성한 조국수호국민협의회의 상임대표로 선출되어 박정권의 굴욕회담 반대 투쟁을 지도하였다. 정부에 굴욕회담을 중지시킬 것을 호소했으나 막무가내였다. 오히려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반대시위에 나선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서울법대생 90여 명이 단식에 들어갔다. 졸도하는 학생이 생겼다. 함석헌은 ‘신을사조약’으로 명명된 한일협정을 정치문제가 아닌 하나의 죄악으로 인식하고 단식을 시작했다. 비폭력 투쟁의 방법은 단식밖에 달리 길이 없다고 보았다. 이번에도 삭발을 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기약없는 단식에 들어갔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단식의 절박한 이유를 밝혔다.

오늘부터 문제의 해결이 나는 때까지 단식을 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생각하여 얻은 뜻을 여러분 앞에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첫째, 내 죄를 회개함으로써 내 혼을 맑히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다시 한 번 진정 겸손한 마음으로 정부 당국에 대하여 정성껏 반성을 독촉해보기 위해서입니다. 근본 문제는 내 죄에 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미안한 말입니다만 그동안 여러분은 제게 유언 중 무언 중 민중을 대표한 발언권을 허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내 말은 힘이 없었습니다. 옳은 듯 하면서 악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의도 씨알 스스로의 의요, 죄악도 씨알 스스로의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살아나는 길은 진정한 국민운동에만 있습니다.
(주석 32)

한 연구가는 함석헌의 단식투쟁을 두고 “단식이라는 희생적 저항권을 강력한 도덕적 무기로 삼고, 굴욕외교에 대한 민족적 수치를 개인의 죄 문제로 접근함으로써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자각시키기 위한 자신의 도덕적 입헌성을 확고하게 만들어 놓을 줄 아는 정치력을 발휘하였다.”고 분석하고 “그것은 역사를 도덕적 의미의 행위로 인식한 자신의 역사관에 충실한 태도이기도 하다.” (주석 33)고 평가했다.

어느 시대나 권력의 비호를 받은 어용 곡필배가 있다. 언론계나 학계에서 많이 서식한다. 함석헌의 신문 연재가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에서 중상모략하는 글이 쏟아졌다. 7월 26일부터 4일간 <서울신문>에 <억지울음 속에 숨은 음모 - 함석헌 씨의 ‘울음으로 부르짖는다’를 박함>이란 글이 연재되었다. 박달수라는 가명으로 쓰인 이 글은 반지성, 비상식의 인신공격이었다.

‘박달나무’ 또는 ‘박달몽둥이’를 뜻하는 익명의 박달수는 언론계의 중진 모씨로 알려졌으나 끝내 실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박달나무’는 “협조와 건설을 부르짖는 이 나라에서 분열과 파괴를 노리는 씨의 악랄한 매명 선동, 안정과 긍정을 찾고 있는 이 날 이 겨레에 불안과 부정을 던져주는 씨의 너무나 역리적인 소영주의의….”라고 매도하고, 그는 함석헌이 “노망하여 명예욕을 채워보고자” 날뛰고 있다고 비난했다.
(주석 34)


주석
31> 앞의 책, 22~23쪽.
32> <단식에 앞서 동포에게 드립니다>, <동아일보>, 1965년 7월 1일치.
33> 이치석, 앞의 책, 498쪽.
34> <서울신문>, 1963년 7월 26~30일치.



저항인 함석헌 평전/[9장] 민권투쟁의 중심에 서다

2013/01/13 08:00 김삼웅

 

 

정치권력에 맛이 들린 박정희세력은 권력을 내놓지 않으려 했다.
함석헌이 황야에서 아무리 목메이게 외치고 글을 써도 그들은 들은 채도 않고 오히려 선동가로 몰아치면서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추진했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소련 봉쇄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을 일본에 예속시켜 미ㆍ일ㆍ한 동맹체제화하고자 박정희 정권에 압력을 넣었다.

1961년 6월 케네디ㆍ이께다(池田) 회담에 이은 11월의 박정희ㆍ케네디 회담을 통해 이 문제가 깊숙히 논의되었다. 쿠데타 이후 미국의 지원에 목을 매단 박정희로서는 미국의 제의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야당인 신민당은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전국 유세에 들어갔고, 학생들의 반대 시위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함석헌은 장준하와 전국을 돌며 강연을 하였다.

<사상계> 1964년 3월호에 함석헌은 비감한 마음으로 <양한재조 재차일념(兩韓再造在此一念)>을 썼다.
평소 한자 제목을 잘 붙이지 않았는데, 이번은 달랐다. 편집자는 “한 마음 한 끝 먹고 조선을 새겨 보니 조은 땅 조은 빛이 한 글월 피웠구나. 한 조선 첨서 한난걸할 알속에 지키네”란 알듯 모를 듯한 발문을 붙였다.

우리는 또 다시 “나라를 지키자”고 외치지 않으면 아니되게 됐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부끄럽고 분한 일입니다. 부끄럽다는 것은, 남이 다 잘 사는 이 때에, 우리 만이 못 살고 밤낮이 이꼴이니 부끄럽지 않습니까? 분하다는 것은 했으면 했을 것인데 번히 알고 못하니 분하지 않습니까?

함석헌은 자신들이 일제감옥에서 혹독한 옥살이를 할 때에, 일본군 장교가 되어 동포들에게 총질을 한 친일군인들이 권력을 잡아, 굴욕적인 한일회담으로 마땅히 요구해야 할 청구권과 문화재 반환 등이 묵살당한 데 하염없는 분노를 느끼면서 이 글을 썼다. 박정희 권력의 비리와 인권탄압, 실정을 낱낱이 열거하면서, 당시의 상황이 한말의 망국기와 비슷하다고 비판했다.

요새 나라 꼴 그 때와 꼭 같습니다. 한일회담, 그 때의 5조약, 7조약, 맺으려던 꼴과 꼭 같고, 창가학회니 뭐니 그 때의 흑룡회, 일진회와 터럭도 다를 것 없습니다. 그 때에도 미ㆍ러ㆍ중이 뒤에서 어물어물하다 우리를 팔아넘기더니, 오늘도 또 셋이 관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나라를 지키자!”하는 글을 짓게 하는 교사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교사가 있기나 한지 모르겠습니다.

함석헌의 이 글의 핵심은 후반 다음의 대목이 아닐까 싶다.

그 옛날 나라가 일본 침략자들 때문에 위태했을 때 그것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이성계를 나가 맞으며 최영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三韓再造 在此一擧 (삼한재조 재차일거)

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이성계가 가슴 속에 나라라는 일념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일거(一擧)는 삼한을 재조(再造) 못하고 잃는 일거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또 다시 나라는 남으로 일본침략주의의, 북으로 중공침략주의의 엿봄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보내며,

兩韓再造 在此一念

이라 할 것입니까? 여러분은 이 일념을 품었습니까?
나라가 임(臨) 하옵소서!
일체 중생이 다 이 한 나라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또 씨알에게!

- 念, 念, 念 , 아멘.
(주석 29)

박정희의 대일 굴욕회담이 강행되면서 장준하는 1965년 <사상계> 긴급증간호를 발행했다.
160쪽 전 지면을 털어 <신을사조약의 해부>라는 특집으로 꾸몄다. 이 책은 야당, 재야ㆍ학생들의 굴욕회담 반대 투쟁의 이론적 전거가 되었다.

박두진ㆍ박남수ㆍ조지훈의 <우리는 또 다시 노예일 수 없다>는 연작시에 이어 함석헌의 <한국은 어디로 가는가>란 권두시론, 백낙준의 <한국근대화와 일본침략>, 이범석의 <이제는 더 침묵할 수 없다>, 양호민ㆍ부완혁ㆍ정문기ㆍ김철ㆍ김원룡이 각 전문 분야에서 집필한 <한ㆍ일협정문의 분석>, 각계 지도급 인사 105인의 앙케트 <105인의 발언>, 한일협정비준을 반대하는 각계의 성명서가 실렸다. 특히 예비역 장성들의 반대 성명에는 김홍일ㆍ김재춘ㆍ박병권ㆍ박원빈ㆍ송요찬ㆍ손원일ㆍ이호ㆍ장덕창ㆍ조흥만ㆍ최경록 등이 서명하였다. 박정희 정권에서 요직을 지낸 장성들까지 참여하여, 국민이 얼마나 굴욕회담에 반대했는가를 보여주었다.

함석헌은 “결정권은 결국 국민에게 있다”는 부제가 붙은 이 시론에서 처연한 심경으로 국민에 호소한다.

한국은 어디로 가나?
이 4천만 문화민족은 어떤 운명으로 떨어지려 하고 있는가?
5천년 고난의 역사는 이제 어떻게 마무리를 하려하고 있나?
지금 한ㆍ일조약의 비준이라는 한 순간을 놓고 민심은 마치 회오리바람 밑에 노는 물결처럼 미치고 있다. 소위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떤 것을 해서라도 기어이 이 조약을 성립시키려 하고 있고, 정의와 자유의 정신에 불타는 학생들은 거기 대해 뭉치와 최루탄과 철창의 고통을 무릅쓰며 혹은 주린배, 어지러워지는 머리를 움켜쥐고 단식을 하면서 싸우고 있고, 일반 국민은 그 두 사이에 불안과 의심과 분노와 두려움에 떨고 서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고, 어느 순간에 가서는 결정이 나고야 만다. 그리고 그 결정권은 결국 국민에 있다.
(주석 30)



주석
29> <사상계>, 1964년 3월호, 45쪽.
30> <사상계>, 긴급증간호, 20쪽, 1965.

 

 


01.gif
0.5MB

저항인 함석헌 평전/[9장] 민권투쟁의 중심에 서다

2013/01/11 08:00 김삼웅

 

 

함석헌은 1963년 2월 영국 체류 중일 때 장준하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박정희가 민정이양을 거부하고 군정 4년 연장을 시도하는 등 국내 정세가 위급하니, 이를 질타하는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이었다.

<사상계>는 1963년 4월호를 ‘창간10주년 기념특대호’로 꾸미면서 권두에 함석헌의 <민중이 정부를 다스려야 한다>는 시론을 실었다. 28~31쪽에 실린 짧은 글이지만, 그의 글 어느 것 못지 않는 알찬 내용으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부제 “자유는 감옥에서 알을 까고 나온다”가 의미하듯이, 주권자가 주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 말라는 메시지였다.

민정으로 넘어가는 길을 묻느냐? 여러운 것 아니다. 간단명료하지 않으냐? 군인은 단도직입(單刀直入)이라더라, 이야말로 사뭇 들어가는 칼 같이 뻔한 진리지. 군인이 정권 쥐었으니 민정 되려면 군인이 물러서는 거지, 무슨 복잡한 것이 있겠냐? 물러설 마음이 없기에 헌법개정이요, 민의요 하지, 깨끗이 물러서는 사람이 토론이 무슨 토론이냐? 군인은 깨끗해야 한다고 늘 하는 말 아닌가? 소견이 옳았거나 글렀거나, 하여간 생각에 군정을 꼭 해야겠다 하거든 군정이라 하고 해! 또 권력을 좀 쥐고 해 먹고 싶거든 그렇다 하고 해! 호랑이도 호랑이 노릇하고 독수리도 청천백일에 내놓고 남의 고기 먹는데 너라고 못할 것 없지. (주석 23)

함석헌은 예리한 필봉으로 부정어법을 통해 진정한 ‘군인정신’을 알리고, 정직하지 못한 ‘정치군인’을 질타한다.

또 민정으로 넘어가는 길 말할까? 그것도 같은 말이다. 민중이 곧 일어서야지. 도대체 정권 넘겨준단 말부터 고쳐야 한다. 정권이 뉘건데 누가 뉘게 넘겨주어? 천하는 천하의 천하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란 말을 벌써 몇 천 년 전 사람이 했는데 정권을 민중에게 넘겨주다니 그런 시대착오가 어디 있나? 이양이란 글귀를 쓰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민중 모욕이다. 이양이 아니라 대정봉환(大政奉還)이지. 가져갔던 정권을 도로 바치는 것이다. 아직도 그런 글귀를 쓰는 것은 민중을 속여 바치는 척 하면서도 속살로는 그냥 쥐고 있자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글의 논점은 군인들이 탈취해간 정권을 꼼수 부리지 말고 원래 주인인 국민에게 돌려주라는 것이다. “천하는 천하요….”의 구절은 맹자의 주장을 상기시킨 대목이다.

당초 잘못은 민중이 깨지 못한 데 있다. 민중 스스로가 제 노릇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됐지, 죽음으로 자유 지키는 민중에 도둑이 어디 둘 수 있나?
또 바른 길 말할까? 이것도 다 알면서 못 본척 하는 길이다. 무슨 길? 언론의 자유다. 민중이 깨는데 언론의 자유 없이 어떻게 되겠냐?
(주석 24)
 
박정희의 군정연장 의도가 노골화되면서 신문들은 점차 연골화되어 갔다.
쿠데타 초기에 <민족일보> 사장의 처형 등을 지켜보면서 공포감에 빠진 언론(인)은 ‘민정이양’의 공약이 군정연장에서 다시 민정참여로 번의에 번의를 거듭하는 데도 크게 비판의 목소리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함석헌은 ‘감옥행’을 권한다. 자유를 찾기 위해서이다.

그렇다. 감옥문 만이 정말 민정으로 건너가는 직통로다. 진리란 참 묘한 것이다. 자유를 구속하는 자들이 민중의 자유를 빼앗으려고 감옥을 짓지만, 자유는 감옥에서 알을 까 가지고 나오는 것을 어찌하나? 그러므로 진리는 막강하다. 압박하는 자는 그것을 알면서도 할 수 없이 감옥을 넓히고 높일 것이다. 그러나 감옥이 넓어지고 높아질수록 자유의 길은 열리는 것을 어찌나.
민권을 찾고싶거든 감옥으로 들어가라!
살고 싶거든 죽음의 입으로 들어가라!
(주석 25)

함석헌이 좋아했던 사람 중의 하나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시민의 불복종>에서 “불의한 시대에 의인의 갈 곳은 감옥뿐”이라 썼다. 함석헌의 이 시론이 소로와 맥이 닿아 있음을 본다. 함석헌이 <민중이 정부를 다스려야 한다>는 시론을 쓴 <사상계> 4월호에는 창간 10주년 특집의 하나로 유진오ㆍ김팔봉ㆍ안수길ㆍ현승종ㆍ김성한ㆍ신상초ㆍ안병욱이 “나와 사상계”란 주제로 각기 인연과 사연을 피력했다. 당시 주간이던 안병욱의 글은 함석헌이 ‘세상에 불려나와’ 글을 쓰게 된 과정이 소상하다.

연대에서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함 선생 댁에 들렸다.
지금은 원효로에 살고 계시지만 그때는 신촌 이대 앞에서 사셨다. 열 칸 쯤 되는 조그만 기와집이었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함 선생을 뵈었다. 두 칸쯤되는 장판방에 조그만 책상을 놓고 공부를 하고 계시다가 반가히 맞아주셨다. 톨스토이는 바이블을 읽기 위해서 54세 때부터 히랍어공부를 시작했지만, 함 선생의 히랍어는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물어보지 못했지만 실력이 대단하시다.

한자에 능하시고 영어를 잘하시지만 그런 빛이 통 없다. 오산고보에서 영어선생들이 모른 것이 있으면 함 선생한테 가서 물었다. 그는 정말 도깨비였다.

<사상계>에 글을 쓰시라고 하였더니 “내가 뭘” 하시면서 사양을 하신다. 그 후 몇 번 들렸다. 안 쓰신다고 고집하다가 결국은 쓰셨다. 그후 내 성화에 못견뎌서 여러 번 쓰셨고, 쓰실 때마다 남이 못하는 소리를 하셨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소리를 쓸래면 뭣 때문에 글을 써, 글이란 나 아니면 못하는 소리를 써야 돼”.

언젠가 나 보고 하신 말씀이다. 글 다운 글을 쓰라고 책하시는 말씀 같았다.
<사상계>의 집필을 통하여 오산의 도깨비는 한국의 도깨비가 되었고, 그의 예리한 필봉은 독재정권의 아성을 겨누게 되었다. 의를 위해서 죽기를 각오한 사람은 천하에 두려운 것이 없다. 함 선생의 글은 언제나 피의 맥박과 생명의 리듬이 약동했다.
(주석 26)

1965년 8월 한·일협정 비준 반대 시위

함석헌이 유럽을 방문하고 있을 즈음 국내 정세에 더욱 소연해졌다. 군부세력이 4대의혹사건으로 거액의 정치자금을 조성하고, 이 돈으로 민정당을 사전 조직한데 이어 박정희는 민정 불참의 선서를 했다가 번복하여 민정 참여를 선언했다. 이와 함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오히라(大平) 일본 외상과 비밀 회동하고, 한일 국교 정상화의 대가로 무상공여 3억 달러, 상업차관 2억 달러로 대일 청구권 문제를 합의한 사실이 폭로되었다.
함석헌은 귀국을 서둘렀다. 안병무의 회고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한국서 온 신문을 보고 군정세력이 자리를 굳힌다는 사실과 대일(對日) 태도를 보고 선생님께 자극적인 말씀을 드렸지요. 그때 선생님은 들었던 숟갈을 놓고 낙류(落류)하시면서 모든 여행계획을 취소하고 급거 귀국하셨지요.” (주석 27)

이 부문과 관련, 함석헌의 ‘육성’을 들어보자.

그래서 이탈리아, 일본 그리고 무엇보다 소원이던 인도여행 계획도 취소했지. 그래 돌아와서는 <사상계>의 장준하 한테 갔고 사상계사가 주최해서 시민회관에서 그리고 대광학교 운동장에서도 강연을 했는데, 그때 사람이 8, 9만이나 모였다고 해요. 그게 사회참여의 시작이라면 시작인데, 나는 사회참여니 한다는 생각은 없었어. 그러던 중 6ㆍ3 데모가 터졌지. 이런 때 가만 드러누워 있으니 이걸 어떡하지 그러다가 나온 거지요. 그래서 나와서 머리 깎고, 세상이 다 알거나 말거나 나대로 책임을 지는 생각을 하고, 깊이 생각을 해야지, 그런 생각에 두 주일 단식하고 그랬지요. (주석 28)




주석
23> <사상계>, 1963년 4월호, 28~29쪽.
24> 앞의 책, 30쪽.
25> 앞의 책, 31쪽.
26> 안병욱, <나와 함석헌선생>, <사상계>, 1963년 4월호, 266쪽.
27> <씨알의 소리는 왜 내고 있었는가 - 안병무와의 대담>, <씨알의 소리>, 4월 창간호, 1970년.
28> 앞과 같음.



01.gif
0.05MB

저항인 함석헌 평전/[9장] 민권투쟁의 중심에 서다

2013/01/10 08:00 김삼웅

 

 

1963 영국 우드블록

함석헌은 1962년 2월 10일 미국무성 초청으로 3개월간 예정으로 미국 순방길에 올랐다. 그의 갑작스런 방미에는 세간의 의혹이 따랐다. 당시 미국무성은 후진국의 정계ㆍ학계ㆍ종교계 등의 중진급 인사들을 초청형식으로 미국으로 불렀다. 본질적으로는 미국에 우호적인 오피니언 리더를 양성하려는 전략이었다. 한국에서도 자유당 시대부터 노태우정권기까지 적지 않은 ‘친미파’가 육성되었다.

함석헌의 경우는 달랐다. 주한미대사관 문정관 그레고리 핸더슨이 <5ㆍ16을 어떻게 볼까?>를 영역하여 미국무성에 보내고, 국무성은 군사쿠데타의 와중에서도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 있느냐고 하여 그를 초청한 것이다.

함석헌은 오래 전부터 유럽, 인도, 아프리카의 콩고, 슈바이처가 사는 곳, 특히 퀘이커가 많이 거주하고 있는 케냐를 거쳐 이집트와 그리스 등을 돌아보고 싶었다. 미국무성의 초청을 받아들이게 된 배경이기도 했다.

함석헌은 출국하기 전날 밤을 밝혀 <수난의 여왕께 드리는 유언ㆍ예언 - 잠시 고국을 떠나면서>를 쓰고 한국을 떠났다. 이 글은 <사상계> 3월호에 실렸다. 편집자 이름으로 이같은 사실과 함께 귀국이 반년 내지 1년 후가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이 밤이 새면 나는 간다. 말은 미국을 간다지만 미국을 향하여 가는 것이 아니다. 어딘지 모르는 먼 나라를 향하여 가는 것이다. 계획은 세계를 한 바퀴 돌고 한 해 있다 돌아온다지만 한 해가 아니다. 언제 올 지 모르는 길이요, 세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바퀴를 도는 것이다. 미국 국무성이 불러서 간다지만 미국이란 것이 어디 있으며, 그 국무성이 어떻게 나를 부르며 내가 뭐하자고 그 명령에 복종할까? 미국이 어디 있을까? (주석 21)

함석헌은 이 글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길”이라 쓴 대로, 당초의 여정이 크게 앞당겨졌다.
박정희가 민정이양을 거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단순한 ‘이별가’ 수준이 아니었다. 군부세력이 쉽게 민간에게 정권을 넘겨주지 않을 것, 어려움이 올 것을 예상했다.

“이제 어려움이 올 것이다. 역사는 싸움이다. 시대와 시대, 사상과 사상의 싸움이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삼켜 버리기 전은 쉽지 않는 싸움이다. 시대를 넘겨 주기를 초등학교 교장이 졸업장을 주듯이 한 줄로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다. 이날껏 자유는 인사로 얻어진 일이 없다. 기성복처럼 입혀줌을 받은 일이 없다.” (주석 22)

함석헌은 미국 여행 중에 국내 정세, 특히 박정희 정권에 대해 전혀 비판하지 않았다. 당시 워싱턴에는 탈권 당한 민주당 정부 요인과 5ㆍ16에 반대한 장성 등 정치망명자가 많았고, 교포들도 <사상계>에 쓴 그의 글을 연상하면서 사자후를 기대하였다. 하지만 그는 국내 문제에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교포들의 오해가 따랐으나 이에 개의치 않았다. 국내에서는 날을 세워 군사독재를 비판하지만, 해외에 나와서는 삼가는 것이 국민의 도리라는 생각이었다.

3개월 간의 미국 시찰을 마친 함석헌은 워싱턴 D.C 소재 물리학자 김용준 교수의 아파트에서 그와 함께 지냈다. 해외 순방중에도 이전부터 시작된 1일 1식과 한복차림을 유지하였다. 한인 교회를 비롯하여 교포들의 초청으로 여러 차례 강연을 하였지만, 군사정부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아서 ‘함석헌 사쿠라’란 비난도 나돌았다.

함석헌은 퀘이커들의 모임인 펜들힐로 가서 지내다가 1963년 1월 초 영국 외무성의 초청으로 영국으로 건너가서 버밍험에 있는 퀘이커대학 우드브록 컬리지에서 3월 말까지 한 학기를 보냈다. 이때에 퀘이커에 대해 깊이 공부하고 퀘이커 교도가 되었다. 이어서 영국 서부 지역과 스코틀랜드, 글라스코, 에든버러를 돌아보았다. 4월 28일 독일로 건너가 민중신학자 안병무 교수의 안내로 스위스, 핀란드, 노르웨이를 거쳐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주석
21> <사상계>, 1962년 3월호, 40쪽.
22> 앞의 책, 43쪽.

 

 



01.gif
0.14MB

저항인 함석헌 평전/[9장] 민권투쟁의 중심에 서다

2013/01/09 08:00 김삼웅

 

 

함석헌은 1961년 8월 논설집 <인간혁명>을 일우사에서 펴냈다.
자유당 말기부터 최근까지 쓴 논설 10편이 실렸다. 이에 앞서 논설집 <새 시대의 전망>과 시집 <수평선 너머>, 번역서 칼 지브란의 <예언자> 그리고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속속 출간되었다. <인간혁명>은 두번째 논설집인 셈이다. 이 책은 군사쿠데타의 살벌한 상황에서도 1년 만에 4쇄를 찍을만큼 널리 읽혔다.

여기에 실린 논설은 <국민감정과 혁명완수>, <간디의 길>, <새나라 꿈틀거림>, <3ㆍ1정신>, <들사람 얼>, <크리스찬의 기백>, <하나님에 대한 태도>, <젊은 여성에게 주고 싶은 말>, <아름다움에 대하여>, <인간혁명>이다. 다음은 머릿말의 끝 부문이다.

친구여, 내가 주제넘게 왜 말을 하는지 아나? 깨쳐 말하면 싱거운 것이지만 정신이 분열됐다는 말까지 들은 담엔 부득이 깨쳐 말 아니할 수 없다. 내가 내 죄를 속해 보려고 말을 하는 것이다. 나는 죄가 많은 사람이라, 전날의 점잖은 친구에게 버림을 당했다. 그러니 죽어 마땅하지만, 하나님이 걷어가지 않는 목숨 내가 버리고 싶지도 않고, 사는 밖에는 지금 죽어 마땅하지만, 하나님이 걷어가지 않는 목숨 내가 버리고 싶지도 않고, 사는밖에는 조금이라도 죄를 속해 봐야지.

죽어야 할 목숨이니 될수록 낮은 일을 해야지. 그러나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러워” 평생에 배운 것이 글인지라 부득이 붓대를 끄쩍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 글의 넝마장수 사상의 넝마장수가 된 것이다.

혁명, 그것은 넝마 모으기 아닐까?
(주석 15)

이 책에는 내가(필자) 함석헌의 많은 글 중에서 으뜸으로 평가하는, <들사람 얼>을 비롯하여 표제 논설 <인간혁명>과 그가 대단한 페미니스트임을 보여 주는 <젊은 여성에게 주고 싶은 말>등은 반세기가 지냈지만 지금의 독자에게 읽혀도 생동감이 넘치는 내용이다. 좋은 문장은 시공을 초월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젊은 여성에게 주고 싶은 말

젊은 여성이라면?
생김생김을 관계 말고, 태어난 집안의 높고 낮음을 생각말고, 돈이 있거나 없거나, 지식이 많거나 적거나, 재주가 깊거나 옅거나, 그 차이를 도무지 보지 말고, 그저 젊은 여성이기만 한다면?
스물에서 마흔까지, 살갗에 꽃이 피어나 있으며, 숨에 향기가 들어 있고, 목소리에 사람의 혼을 어루만지고 흔드는 보드라움과 맑음이 잠겨 있고, 눈동자에 영원을 향해 애타는 속삭임이 들어 있는 때라면?
그것은 거룩한 생명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과 신비로움이 볼 수 있게 나타난 것이다.
젊은 여성의 할 일은 그 받아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스스로 깨달아 잘 쓰느냐 하는 데 있다.
잘 쓰면 심청이요, 잔 다크요, 마리아지. 잘못 쓰면 양귀비요, 크레오파트라요, 살로메지.
(주석 16)

함석헌은 여성을 ‘풀무’요 ‘용광로’라 했다. 불을 피울 때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가 풀무다. 모든 쇠붙이를 녹여 쇠를 만드는 용광로를 달구기 위해선 풀무가 있어야 한다. 글은 이어진다.

여자는 풀무요 용광로다.
산을 빼는 항우가 우미인 앞에서 녹아 버려 영웅답지 못하게 질질 울었다 해서가 아니요, 사자를 찢는 삼손이 드보라 앞에서 혼이 빠져 믿음의 사람답지 못하게 딩글었다 해서가 아니다.
모든 쇳돌, 모든 녹슨 파쇠가 반드시 한 번 풀무 속에 들어가 가지고야 찌끼를 벗고 새 쇠가 되어 나오듯이, 모든 역사 모든 문화의 낡은 찌끼와 썩음을 벗겨 치우고 새 시대를 짓는 새 사람은 반드시 여자의 탯집 속에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역사의 갈려 새로워짐은 반드시 세 세대로야 되는 것인데, 새 세대의 양심의 클거리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잡힌다.
모든 혁명은 여자의 탯집 속에서 시작된다.
(주석 17)

함석헌의 여성론은 전통적인 여성관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다. 여성으로서 시대적인 사명과 함께 ‘여성스러움’을 강조한다. 한 대목을 더 들어보자.

예로부터 착함과 슬기로움과 날쌤을 천하에 뚫린 세 덕이라 하지만, 그 덕을 다 갖추고라도 거기 만일 아름다움, 사랑스러움, 신비롬이 없다 해 봐! 그럼 인생이 어찌 됐을까?
또 요샛 사람들이 자유와 정의를 목소리를 다투어 서로 부르짖지만, 그 두 가지 권리를 다 보장 받았다 하더라도 거기 만일 조금이라도 아름다움, 사랑스러움, 신비롬이 들어있지 않다 해 봐! 그럼 이 세상이 어찌 됐을까?
그런데 길을 가노라면 하늘에서 받은 그 귀한 자격을 제 손으로 다 뜯어 망가치우고, 여성 아닌 여성, 여성도 남성도 아닌, 사람도 짐승도 아닌, 흉측하고도 가엾은 형상들이 어찌도 그리 많은가?
풀무가 깨졌으니 역사는 장차 어찌되는 것일까?
(주석 18)

함석헌의 이 책에는 또 그가 이화대학에서 한 강연 <아름다움에 대하여>가 실렸다. 내용 중에는 “너희의 너희 이상으로 잘 뵈잔 모든 허영심의 화장을 긁어 치워라”고 하면서 다음의 내용을 강조한다.

억만 년이나 살 듯 문화주택을 지어 단꿈에 취해 보자던 이 땅을 박차고 너희가 정말 영원 무한한 정신의 우주에 머리를 하늘 가에 대고 높이 선다면, 그런다면 그때 해 달이 너희 귀고리가 되고, 수없는 별들이 너희 머리에 보석이 되고, 흐르는 구름이 너희 어깨에 쇼율을 던지는데, 옷은 무슨 옷이 걱정이 되며 단장은 무슨 단장이 문제가 된단 말이냐? (주석 19)

이 구절에서 천의무봉한 사유의 세계와 함께 그의 여성관을 읽을 수 있다.

내 사랑아, 마음을 아름답게 가져야지, 어떤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이냐? 무한을 안은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이지. 어떤 마음이 무한한 마음이냐? 참된 마음이지. 허영심이 가장 작고 착한 마음이다. 네 마음 속에서 허영심을 버려라. (주석 20)



주석
15> 함석헌, <인간혁명>, 7쪽, 일우사, 1961.
16> 앞의 책, 248~249쪽.
17> 앞의 책, 249~250쪽.
18> 앞의 책, 251쪽.
19> 앞의 책, 276쪽.
20> 앞과 같음.

 


 

 


01.gif
0.04MB

저항인 함석헌 평전/[9장] 민권투쟁의 중심에 서다

2013/01/08 08:00 김삼웅

 

 

1961년 함석헌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개정판을 낸데 이어 12월에는 그동안에 쓴 시를 모아 시집 <수평선 너머>를 간행했다. 생각사에서 나온 이 시집은 6ㆍ25전쟁 전 개성에서 <영원의 젊은이>, 월남 뒤 공주에서 <장작불> 그리고 대전에서 <기러기>라는 프린트로 나왔던 것을 1953년 3월에 인쇄판으로 묶었고, 이번에 이 모든 것에서 고르고 장정을 바꾸어 새로 활자판으로 펴냈다.

함석헌은 이 시집에도 실린 초판 서문에서 자신은 시인이 아니라고 하면서, 시를 쓰고 시집을 낸 이유를 말한다.

의사를 배우려다 그만두고, 미술을 뜻하다가 말고, 교육을 하려다가 교육자가 못되고, 농사를 하려다가 농부가 못 되고, 역사를 연구했으면 하다가 역사책을 내던지고, 성경을 연구하자 하면서 성경을 들고만 있으면서, 집에선 아비노릇을 못하고, 나가선 국민 노릇을 못하고, 학자도 못되고, 기술자도 못되고, 사상가도 못되고, 어부라면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사람이 시를 써서 시가 될 리가 없다. 이것은 시 아닌 시다.

시라 할 터면 하고 말터면 말고, 그것은 내게 문제가 아니다. 나는 내 맘에다 칼질을 했을 뿐이다. 그것을 님 앞에다 바칠 뿐이다.
(주석 9)

함석헌은 <두 번째 내놓은 말>에서 개정판을 낸 이유를 설명한다.

남의 병신 자식을, 감추어 기르는, 사랑과 미움, 귀여움과 뉘우침, 불쌍히 여김과 죽기를 기다리는 감정이 한데 섞인, 원수의 아들을 한번 봤으면 그만이지 또 다시 보자는 건 무엇인가? 그것은 너무도 잔혹한 일 아닌가? (주석 10)

이 시집에는 <그 사람을 가졌는가>를 비롯하여 120편이 실렸다. <선전>과 같은 격렬한 선언문 투의 시가 있는가 하면, <인생은 갈대>와 같은 서정시도 있다. 몇 절씩만 소개한다.

선전

이 세상의 주권자야, 나는 오늘 너를 향해 선전하노라.
네 힘이 아무리 강하고
네 법이 아무리 엄하고
네 조직이 아무리 치밀하여도
오늘부터 나는 네 시민이 아니도다,
나는 너를 향하여 싸움을 펴노라. -자유의 이름에서

친구들아, 나는 오늘 너희를 향하여 싸움을 펴노라.
선생들아, 나는 오늘 너희를 향하여 싸움을 펴노라.
나에게 속빈 말의 충고를 하였고
나에게 너희도 모르는 거짓 길을 가르쳤고
나에게 영원한 집을 찾지 말라 달래였으니
나는 오늘 너희를 향하여 맹렬한 싸움을 시작하노라.
(주석 11)


인생은 갈대

인생은 연한 갈대 여린 순 날카로운 맘
쓴 바다 노한 물결 단숨에 무찌르자
끝끝이 뜻 머금고서 다퉈가며 서는 듯

인생은 푸른 갈대 비바람 치는 날에
자라고 자라란 뜻 하늘에 달뜻 컨만
떠는 잎 한데 얽히어 부르짖어 우는 듯.
(주석 12)

함석헌은 무교회주의를 벗어나면서, 인제대학교 전 총장 이윤구의 안내로 퀘이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잠깐 소개한 적이 있지만 1953년에 쓴 시 <대선언>에서 이미 변화의 낌새를 찾을 수 있다. 시의 일부를 소개한다.

나는 옛날의 모험가 한 가지 노래하련다
나가는 역사의 수레채를 메고 달려나 보련다.
내 아직 얻었담도 아니요
허린 거울 속 보듯 내 눈에 희미는 하나
앞엣것 잡으려 뒤엣것 잊고 나는 닫노라
이제부터 나를 붙잡지 말라

내 즐겨 낡은 종교의 이단자가 되리라
가장 튼튼한 것을 버리면서 약하면서
가장 가까운 자를 실망케 하면서 어리석으면서

나는 산에 오르리라
거기는 꽃이 피는 곳
히말라야 높은 봉 그윽한 골 피는 이상한 꽃 같이
그 향 냄새 맡는 코를 미치고 기절케 하는 꽃
그 꽃을 맡기 전 나는 벌써 취했노라.
(주석 13)

중국 17세기 초의 문인, 문학이론가로 유명한 장유(張維)는 저서 <시사서(詩史序)>에서 시(詩)와 사(史)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세상의 변화를 기록하고 득실을 밝히는 것이 사(史)이고, 마음을 흡족하게 하면서 음악과 어울리는 것이 시(詩)라고 하고, 그 둘은 서로 섞일 수도 없고 겸할 수도 없다고 했다. 사람은 재능이 한정되어 있어, 사가(史家)가 시인일 수 없고, 시인이 사가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뛰어난 시인은 그 두 영역의 구분을 넘어서서, 세상일에 대한 깊은 근심을 절실하게 나타내 사실의 핵심에 이른다고 했다.”
(주석 14)

3세기 전에 장유가 마치 함석헌을 예비하여 한 말 같이 들린다. ‘사가와 시인’의 좀처럼 어울리기 어려운 작업을 그는 해냈다. 뿐만 아니라 맹렬한 언론인과 격렬한 민권운동가로 이어진다.


주석
9> <수평선 너머>, 1953년 머릿말, 생각사, 1961.
10> 앞의 책, 9쪽.
11> 앞의 책, 191쪽.
12> 앞의 책, 36쪽.
13> <수평선 너머>, 170쪽.
14> 조동일, <한국시가의 역사의식>, 5쪽, 문예출판사, 1994.


 


01.gif
0.05MB

저항인 함석헌 평전/[9장] 민권투쟁의 중심에 서다

2013/01/07 08:00 김삼웅

 

 

쿠데타세력은 1961년 10월 진보성향의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과 사회당 간부 최백근을 처형하고 혁신계 인사들을 중형에 처하는가 하면 1962년 3월 정치활동정화법을 공포하여 구정치인들을 묶고 자신들의 정치적 발판을 구축했다. 윤보선 대통령이 이에 항의하여 하야하자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대통령권한대행까지 꿰찼다.

박정희의 ‘원대복귀’ 혁명공약은 헌신짝이 되고, 그가 노골적인 정치참여의 의지를 내보이는 가운데 12월 17일 개헌안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 중심제 헌법을 제정하고, 몇 차례의 번의를 거듭한 끝에 12월 27일 대통령 출마 의사를 표명했다. 5ㆍ16쿠데타가 권력찬탈을 위한 수단이었음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함석헌은 1950년 3월 28일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역사>를 간행했던 것을 1961년 겨울 한 달 동안 해인사에서 대대적인 개작을 하여 간행하였다. 제목도 ‘성서적’을 빼고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바꾸었다. 개정신판은 1962년 3월 일우사에서 간행되었다. 그런데 개정판을 내고 제목을 바꾸면서도 1950년판의 ‘서문’을 ‘머릿말’로만 바꾸었을 뿐 내용은 그대로를 실었다. 왜 그랬을까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성서적 입장’의 제거가 “사슴에게서 뿔을 제하는 일”과 같고, “성서적 입장에서도 역사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 입장에서야만 역사는 쓸 수 있다”고 다짐했던 터였다. 그런데 개정판에서 ‘뜻으로 본’으로 제목을 바꾸었다. 뒤에 다시 간행한 책의 서문이다.

그래서 책을 내게 되는 전해 겨울 해인사에 한 달 가 있으면서 전체에 걸쳐 크게 수정을 하여 모든 교파주의적인 것, 독단적인 것을 없애버리고 책 이름도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고 고쳤다. ‘성서적 입장’이라는 대신 ‘뜻으로 본’이라고 붙일 때에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하였다. 많은 기독교인 더구나 무교회 신자들을 섭섭하게 할 것과 심하면 거침돌이 될 것까지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기독교인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다. 그들이 불신자라는 사람도 꼭 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게는 이제 믿는 자만이 뽑혀 의롭다 함을 얻어 천국 혹은 극락세계에 가서 한편 캄캄한 지옥 속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는, 보다 많은 중생을 굽어보면서 즐거워하는 그런 따위 종교에 흥미를 가지지 못한다. 나는 적어도 예수나 석가의 종교는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석 1)

내가 보기에 <뜻으로 본 한국 역사>는 1962년 2월 30일자로 일우사에서 종서로 발행된 (456쪽 정가 2,500환) 것이 정본이 아닌가 싶다. 저자 스스로 꼼꼼히 교정을 보아서 오탈자도 거의 없다. 말미에는 유달영의 <책 끝에 붙이는 글>을 실었다. 표지 안쪽에는 회갑날의 저자 흑백 사진도 실렸다.

또한 1950년과 1954년 재판본에 비해 1962년 판본에는 제4부가 추가되었다.
제4부 <생활에 나타난 고민하는 모습>에 <고난의 의미>, <역사가 지시하는 우리의 사명>이 추가된 것이다. 이후 몇 곳 출판사가 바뀌면서 나온 책은 1962년 판본을 횡서로 고치고, 유달영의 발문을 제한 것이 대부분이다.

함석헌의 주저인 이 책의 기조(基調)는 ‘고난의 사관’이다. 신라의 통일 이래 한민족이 걸어온 길은 고난이었다는 주장이다. 당당하게 출발하여 열국시대를 거치고 풀무 속에 다듬어진 삼국시대에 고구려 아닌 신라가 통일을 주도하면서 광대한 대륙을 잃게 되고, 그 땅에 고려가 세워졌으나 ‘다하지 못한 책임’으로 민족사의 고난이 잉태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성계의 덕 없는 창업, 사대주의를 국시로 내걸고 나라를 세움으로써 ‘중축(中軸)이 부러진 역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수난인가? 두 말할 것 없이 그 다하지 못한 책임 때문이요, 그 잃어버린 정신 때문이다. 이조(李朝) 한 대의 역사는 한 마디로 하면 중축이 부러진 역사다. 축이 부러진 수레가 어찌 나갈 수 있을까? 정도 없이 국민 이상도 없이, 수레의 바퀴 같은 모든 제도 조직이 있다 한들 어떻게 역사의 진행이 있을 수 있을까? 수레의 가장 중요한 것이 축이 둣이 역사에 가장 요긴한 것도 민족정신이요 국민 이상이다.

중축 없는 바퀴를 밀면 밀수록 더 어지러이 이리 굴고 저리 굴듯이 역사도 정신이 빠지면 아무리 정치를 하고 모든 문화 활동을 하여도 어지러울 뿐이다. 그러므로 수난이다.
(주석 2)

함석헌은 동명왕ㆍ혁거세ㆍ온조ㆍ왕건까지 관인대도(寬仁大度) 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성계에서는 그것을 볼 수 없다고 지적하고, 사대국시를 비판한다.

중축이 부러진 역사! 그것이 욿은 제도를 밟아 바른 길을 나갈 수 있을 리가 없다. 500년 동안의 일은 그저 어긋남이요. 거꾸러짐이요. 깨짐이다. 당초부터 이소사대(以小事大)를 표어로 삼고 된 구차한 건국인지라, 구차 아닌 것이 없다. 내 나라를 가지고도 남에게 줬다가 다시 빌어 받기에 힘이 들었고, 내 스스로 된 임금이건만 남의 승인을 얻기에 부끄럼이 그지 없었다. 그러면서도 두 세 임금과 신하를 내놓고는 분해 하지도 아쉬워 하지도 않고 멍청하고 있었다. (주석 3)

함석헌의 이 책에는 ‘조선’을 ‘이조’로 표기하는 등 용어 사용에서 ‘한계’도 없지 않다. 우리 역사에 ‘이조’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하면서 ‘조선’을 ‘이조’ 또는 ‘이씨조선’ 라고 쓴 것을 그대로 표기한 것이다.

일제는 조선(대한)이 한 왕조가 못 되고, ‘이씨’의 씨족사회라고 비하하는 뜻으로 이런 용어를 써 온 것이다. 교과서는 물론 역사학자들의 연구서적도 마찬가지였다. 함석헌 역시 이 책을 펴낼 때 그대로 사용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우리는 역사를 배우면서 E. H. 카의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내용이나, 아놀드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의 사관”은 알아도, 신채호의 “역사란 아(我)와 비야(非我)의 투쟁과정”이란 말은 잘 모른다. 또한 함석헌의 씨알사관에도 백지상태다.

지나간 것(과거)이라 하지만 역사는 결코 지나간 것이 아니다. 정말 지나간 것이라면 지금(현금)의 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을 것이요, 따라서 기록할 필요도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또 기록하고 알려해도 알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조금이라도 기록할 필요, 알 필요를 느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지나간 것이 아니다. 현재 안에 아직 살아있다. 완전히 끝맺어진 것이 아니라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주석 4)

다음은 연구가와 언론에서 많이 인용하는 부문이다.

쓰다가 말고 붓을 놓고 눈물을 닦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눈물을 닦으면서도 그래도 또 쓰고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써 놓고 나면 찢어버리고 싶어 못 견디는 이 역사, 찢었다가 그래도 또 모아대고 쓰지 않으면 아니 되는 이 역사, 이것이 역사냐? 나라냐? 그렇다. 네 나라며 내 나라요, 네 역사며 내 역사니라. (주석 5)

이 책의 마지막 부문은 이렇게 장식된다.

그러면 젊은 혼들아, 일어나라. 이 고난의 짐을 지자. 위대한 사명을 믿으면서 거룩한 사랑에 불타면서 죄악에 더럽힌 이 지구를 메고 순교자의 걸음으로 고난의 연옥을 걷자. 그 불길에 이 살이 다 타고 이 뼈가 녹아서 다하는 날 생명은 새로운 성장을 할 것이다. 진리는 새로운 광명을 더할 것이다. 역사는 새로운 단계에 오를 것이다. (주석 6)

함석헌의 사관은 강단사학자들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어떻게 다를까.

과거의 다수한 사가들이 공정한 역사를 쓰기 위하여 해석 없는 사실기록을 하다가 수십 백권의 납골당명록(納骨堂名錄) 만을 쓰고 만 것이다. 그것은 역사가 아니다. 적어도 민중의 역사는 아니다. (주석 7)

사실 기록은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역사에 대한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가 ‘납골당명록’ 만이어서는 의미가 없다.

“함석헌은 역사를 이렇게 정의한다. 과거란 현재에 살아 있는 과거이고, 역사적 사실이란 현재와의 관련에서 선택된 유의의(有意義)한 것이고, 의미 없는 사실은 사실이 아니고 사실의 중요성은 그 의미에 있다. 따라서 역사서술은, 그 의미 있는 사실들을 인과관계적 상호연관의 연쇄 속에 통일적인 체계로 엮어야 한다. 그 체계는 생명체와 같은 것으로 부분들이 전체에서 유리될 수 없다.” (주석 8)


주석
1> <네째 판에 부치는 말>, <전집> 1, 18쪽.
2> <뜻으로 본 한국역사>, 223쪽, 일우사, 1962.
3> 앞의 책, 227쪽.
4> 앞의 책, 229쪽.
5> 앞의 책, 302쪽.
6> 앞의 책, 452쪽.
7>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13쪽,
1954년판.
8> 노명식, <한국의 역사가 함석헌>, <한국사시민강좌> 제20집, 121쪽, 일조각, 2000.

 


03.gif
0.04MB
01.gif
0.04MB
02.gif
0.05MB

저항인 함석헌 평전/[8장] 독재자의 심장을 겨눈 독화살

2013/01/06 08:00 김삼웅

 

 

영등포구 문래동 문래공원에 세워진 박정희 흉상.ⓒ오마이뉴스 권우성

쿠데타세력은 <사상계>가 서점에 깔린지 4, 5일이 지나서 장준하와 취재부장 고성훈을 체포했다. 장준하는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의 집무실로 끌려갔다.
김종필은 장준하에게 “정신분열자 같은 영감쟁이의 이따위 글을 도대체 어떤 저의로 갖다가 여기에 실었소? 성스러운 혁명과업 수행과정에서 당신은 우리 군사혁명을 모독하는 거 아니오? 이것을 싣게 된 목적과 경위를 말해보시오.”하고 마치 죄인 다루듯이 윽박질렀다.

장준하는 이 자리에서 자신이 직접 부탁하여 원고를 실었고, 남의 글을 전체를 보고 평가해야지 부분적인 대목을 가지고 말하느냐고 젊잖게 따졌다. 궁지에 몰린 김종필은 장도영(5·16쿠데타 당시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내각수반, 국방장관을 맡고, 장준하 대면 전날 반혁명죄로 구속 -필자)과 동향이라, 그의 사주를 받는 것이 아니냐고 엉뚱한 방향으로 몰아갔다. 김종필은 심지어 함석헌이 정치를 할 의향이 있느냐고 생뚱한 질문을 하였고, 장준하가 그를 모독하는 발언이라고 질타했다.

함석헌은 끌어가지 못했다. 3년 전 이승만 정권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이유로 끌어다가 20일간 투옥하는 등 ‘서툰 짓’을 한 이래 그의 존재는 아무리 쿠데타세력이라도 함부로 하기 어려운 우뚝한 민중의, 씨알의 대변자가 되어 있었다. 박정희 - 김종필은 이승만보다는 한 수 위였다. 정치적으로 더욱 교활해진 것이다.

쿠데타 주체들 사이에 최고회의에서 함석헌의 구속 여부를 둘러싸고 투표까지 했다는 설이 있다.

“노명식(전한림대 인문대) 교수의 말을 빌리면 ‘이 때의 함석헌은 3년 전의 함석헌이 아니었기 때문’에 감옥에 가두지 못했다고 확실하게 주장하고 있다. 당시 풍문으로는 최고회의에서 함석헌을 구금할 것인가를 두고 투표를 했는데 3대 3으로 팽팽히 맞섰다는 것이다. 결국 최고회의에 참석하여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부표를 던지는 바람에 찬성 3표, 반대 4표로 함석헌은 구금을 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풍문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김종필은 군에서 정군운동을 하다가 예편되어 실직상태일 때 장준하가 책임자로 있던 장면 정부의 국토건설본부에 취직하겠다고 이력서를 들고 찾아갔다. 마침 장준하가 부재중이어서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하였다. 이를 두고 장준하는 뒷날 자신이 그때 김종필을 만나 직원으로 채용했었다면 한국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고소를 금치 못했다.

김종필은 젊은 시절 <사상계>를 읽었고, 함석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정보 업무에 종사하다보니, 그를 구속하여 국제적으로 특히 미국 조야의 여론이 비등할 것을 내다보았을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함석헌은 구속을 면했지만, 이로써 그의 용기와 저항정신, 정치평론의 입지와 위상은 따를 사람이 없게 되었다.

함석헌은 이제까지는 주로 종교비평의 글을 많이 썼으나, 5ㆍ16 비판부터는 정치비평가의 일역을 도맡게 되었다. 쿠데타세력이 당초 ‘원대복귀’의 약속을 어기고 민정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그는 더욱 열정적으로 정치비평의 논설을 쏟아냈다. 한 정치학자는 “함석헌이 사상ㆍ종교ㆍ철학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형성한 정치 사상가의 면모와 민주화에 앞장서서 반독재 투쟁을 한 정치행동가로서의 행보 외에도, <사상계>나 <씨알의 소리> 등에 게재한 글을 통해 정치평론가로서의 역할을 선구적으로 시도하였다고 본다.”고 평가하였다.

그의 정치평론은 시비곡직을 떠나서 성역을 두지 않았다. 최고 권력자를 피해가거나 둔사로 어물쩍 넘어가는 여타의 식자들과는 달랐다. 이승만ㆍ박정희를 표적으로 삼았다. 감히 따르기 어려운 일을 그는 해냈다. <할 말이 있다>와 <5ㆍ16을 어떻게 볼까?>는 반독재자와 군부독재자의 심장을 겨눈 독화살이었다.



주석
31> 장준하, <사상계지수난사>, <장준하문집> 3, 사상, 1985, 32쪽.
32> 김용준, 앞의 책, 143쪽.
33> 이동수, <함석헌과 정치평론>, <한국정치학 회보>, 2001년 겨울호, 89쪽.


 

 


01.jpg
0.09MB

저항인 함석헌 평전/[8장] 독재자의 심장을 겨눈 독화살 2

013/01/05 08:00 김삼웅

 

 

 

4ㆍ19 뒤 한 때의 혼란은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구체제가 무너지면서 생기는 피할 수 없는 혼란상이었다. 일부 학생과 혁신계의 과도한 주장도 있었지만,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차츰 진정되어갔다. 연말부터는 정국의 안정을 찾고 있었다. 민주당의 분당사태로 장면 정부가 취약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군사쿠데타의 요인이 될 수는 없다.

함석헌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로 나타났다.
1961년 5월 16일, 일본군 출신 박정희와 그의 조카사위 김종필이 주도하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반란군의 주모자 박정희가 일본군 다카키 마사오인 것 같다는 장준하의 말을 듣고는 분노와 함께 허탈감을 가누기 어려웠다. 반란군은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권을 장악, 4월혁명으로 태어난 장면 정부를 타도했다. 쿠데타를 첫 모의한 시점은 1960년 9월 10일이다. 이들은 1961년 4월 19일을 거사일로 잡았다가 좌절되고, 5월 12일로 연기했다가 16일에 쿠데타를 결행했다.

반란군은 최고권력기구로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했다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고, 입법ㆍ행정권과 사법의 통제권을 장악하면서 국회ㆍ정당ㆍ사회단체를 해산하고 언론을 장악했다. 미군정 3년과 이승만 12년 독재에 시달려온 국민은 4월혁명으로 짧은 기간이나마 모처럼 자유를 찾았다가 1년여 만에 다시 포악한 군사독재를 맞게 되었다. 언론은 사전 검열로 군사반란에 대한 비판이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언론인ㆍ지식인들이 겁을 먹고 비판은커녕 사실 보도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공포분위기였다.

함석헌은 절망했다. 일본 유학시절에 일본 군부의 정치개입과 군국주의가 어떻게 득세하고, 얼마나 폐악을 저질렀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망감이 더욱 깊었다. <사상계>는 6월호 제작이 거의 진행된 와중에 5ㆍ16을 겪으면서 권두언과 화보 그리고 편집후기에 쿠데타의 내용이 실렸다.

필자의 주관인지는 몰라도 <사상계> 15년의 역사에서 1961년 6월호의 권두언, 화보, 편집후기는 ‘사상계 정신’을 가장 크게 훼손한 내용이 아닐까 싶다. 화보 <혁명 새벽에 오다>에서는 쿠데타의 전개 과정을 장도영과 박정희의 인물사진과 함께 24컷으로 장식했다. 1년 여 전 “민중의 승리 기념호”와는 180도 달라진 모습이다. 무기명으로 실린 권두언 <5ㆍ16혁명과 민족의 진로>는 아무리 계엄하의 상황이라 해도 이것이 과연 <사상계>의 권두언일까 싶을 정도의 글이다. (주석 25)

박정희 추종자들은 이 대목을 들어 장준하도 5ㆍ16쿠데타를 지지했다고 선전한다. ‘오해’받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합법 정권이 총칼로 전복되고, 정부 각료를 비롯하여 수천 명이 갖가지 이유로 체포ㆍ구금되고 국회가 해산된 공포정치의 상황에서 장준하나 <사상계> 편집위원들이라고 어찌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장준하와 <사상계>의 일탈은 오래가지 않았다. 7월호는 ‘사상계 정신’을 회복하여 군사반란 세력에 포문을 열었다. 함석헌이 저격수로 나섰다. 7월호 권두논문으로 36쪽에서 47쪽까지에 실린 200자 100매 분량의 <5ㆍ16을 어떻게 볼까?>는 반란군 세력의 서릿발치는 계엄하에서 쓰이고 게재되었다. 함석헌은 감옥행을 각오하고 글을 쓰고 장준하는 잡지사의 문을 닫을 결심을 하고 실었다.

글은 어떤 내용인가도 중요하지만 언제, 어떤 상황에서 썼는가는 더욱 중요하다. 일제 패망 뒤에 광복군이 되거나, 해방 후 독립만세를 부른 것과 비유된다.
함석헌은 논설의 말미에서 결연한 의지를 담았다.

“3년 전 이 밤엔 잠 못 자고 한 생각 말했더니, ‘나라 없는 백성이라’ 했다고 이 나라가 나를 스무 날 참선을 시켰지, 이번엔 또 무슨 선물 받을까?” (주석 26)

함석헌은 먼저 5ㆍ16쿠데타가 가져온 공포분위기를 지적한다.

그런데 나 보기에 걱정은 이 혁명에 아무 말이 없는 것이다. 말이 사실은 없지 않은데, 만나면 반드시 서로 묻는데, 신문이나 라디오에는 일체 이렇다는 소감비평이 없다. 언론인 다 죽었나? 죽였나? 이따금 있는 형식적인 칭찬 그까짓 것은 말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의 말이 아니다. 의사보고 가뜬히 인사하는 것은 병인이 아니다. 의사 온 줄 모르면 죽은 사람이다. 참말 명의는 병인이 허튼 소리를 하거나 몸부림을 하거나 관계 아니한다. 왜?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 사람들이 총칼보고 겁을 집어먹었지. 겁 난 국민은 아무것도 못한다. 국민이 겁나게 하여가지고는, 비겁한 민중 가지고는, 다스리기는 쉬울지 몰라도 혁명은 못한다. 다스리기 쉽기야 죽은 시체가 제일이지, 시체를 업어다 산 위에 놓고 스스로 무슨 공이 있다 할 어리석은 사내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공동묘지의 매장인부 아닌가?
(주석 27)

함석헌은 5ㆍ16을 준열하게 비판했다. 4월의 학생들이 잎이라면 5월의 군인들은 꽃이라는 비유를 들어 조속히 부대로 돌아가라고 타일렀다. 그런데 최근까지 박정희 추종자와 사이비 언론인 중에는, 함석헌이 5ㆍ16을 꽃에 비유할 정도로 지지했노라는 허튼 언설을 편다. 전후 문맥을 무시하고 거두절미한 것이다.

학생이 잎이라면 군인은 꽃이다. 5월은 꽃달 아닌가? 5ㆍ16은 꽃 한 번 핀 것이다. 꽃은 찬란하기가 잎의 유가 아니다. 저번은 젊은 목청으로 외쳤지만, 이번은 총칼과 군악대로 행진했고 탱크로 행진했다. 잎은 영원히 남아야 하는 것이지만, 꽃은 활짝 피었다가는 깨끗이 뚝 떨어져야 한다. ‘화락능성실(花落能成實)’이다. 꽃은 떨어져야 열매를 맺는다. 5ㆍ16은 빨리 그 사명을 다하고 잊혀져야 한다. 노량진두에서 많지는 않지만 흐른 피는, 그 알고 모르고를 물을 것 없이 전국민이 스스로 흘려 역사의 제단에 바친 것이다. 그것은 부득이하여 한 번 잠깐 할 것이요, 될수록은 없어야 하는 것이요, 있다 하여도 곧 잊혀야 하는 것이다. (주석 28)

함석헌은 5ㆍ16의 군사반란을 결코 혁명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혁명은 민중의 것이다. 민중만이 혁명할 수 있다. 군인은 혁명하지 못한다. 어떤 혁명도 민중의 전적 찬성, 전적 지지, 전적 참가를 받지 않고는 혁명이 아니다. 그러므로 독재가 있을 수 없다. 민중의 의사를 듣지 않고 꾸미는 혁명은 아무리 선의로 했다하여도 참이 아니다. 또 민중의 의사를 모르고 하는 것이 자기네로서는 아무리 선이라 하더라도 또 사실 민중에게 물질적인 행복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선의는 아니다. (주석 29)

한 사학자는 함석헌의 이 글과 관련 다음과 같은 의미 있는 분석을 내놨다.

“그 잘못을 꾸짖는 준엄한 질타이기는 하나 그저 질타에 그치지 않고, 스승이 제자에게 타이르듯이 무엇이 잘못이며 그 잘못은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는가를 누누이 설명한다. 쿠데타는 크게 잘못된 불장난이지만, 이제는 어차피 돌이킬 수 없게 되었으니 첨에 약속한 대로 하루라도 속히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는 대로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한다. 쿠데타를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감행하였지만, 혁명이 무엇인지나 알고 했느냐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이다.” (주석 30)

함석헌의 글이 세상에 나오면서 민중은 막혔던 숨통이 다소나마 터지는 듯한 쾌감을 느끼고, 지식인ㆍ언론인들은 자신들의 처신에 몸 둘 바를 몰라했으며, 쿠데타 주역들은 분개했다.


주석
25> 김삼웅, <장준하 평전>, 423쪽, 시대의 창, 2009.
26> <사상계>, 1961년 7월호.
27> <사상계>, 1961년 7월호.
28> 앞과 같음.
29> 앞의 책.
30> 노명식, <함석헌 다시 읽기>, 608쪽, 인간과 자연사, 2002.

 

 


01.jpg
0.05MB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