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4장] 유신체제에 마지막 타격 날리다

2013/02/14 08:00 김삼웅

 

 

함석헌에게 박정희라는 통치자와 유신체제는 어떤 명분으로도 이해되지 않는 존재였다.
무고한 인명의 살상과 인권유린, 헌정질서 파괴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해서 끝없는 비판에 나서게 되고, 저항의 횃불을 내릴 수 없었다. 압제가 있는 곳에 저항이 따른다는 것은 그의 오랜 신념이었다.

유신체제에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변형된 선거제에 의해 두번째 치른 총선이었다. 국회의원 3분의 1은 대통령이 지명함으로써 국민의 뜻을 왜곡하는 선거제였다. 이같은 구도에서도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32.8%, 여당인 공화당이 31.7%를 얻어 야당이 1.1%를 더 득표했다. 하지만 국회의석은 야당이 3분의 1석에도 이르지 못했다. 박정희는 이에 앞서 7월 6일 이번에도 체육관 선거를 통해 99.9%의 득표로 5선 대통령이 되었다.

근대적 정당제도가 생기게 된 것은 반란단체를 만들지 못하게, 그리고 선거제도는 폭력혁명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유신체제는 정당과 선거제도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정상이 파괴되면 변칙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정한 이치다. 유신체제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데모와 각종 시위는 시민저항권사상의 발로이고 정당한 생존권투쟁이었다.

1978년 1월 19일 함석헌은 정구영ㆍ지학순ㆍ천관우ㆍ박형규ㆍ조화순 등 재야 지도자들과 <민주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을 통해 유신체제하의 모든 선거는 인정할 수 없다면서 양대 선거를 보이콧할 것을 호소했다. 이어서 2월 24일에는 윤보선 등 각계 인사 66명과 유신체제와 학원 및 언론 탄압을 비판하는 <3ㆍ1 민주선언>을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함석헌은 정보부에 연행되어 3월 1일까지 구금당하였다.

유신체제 붕괴의 서막인 YH사건이 터졌다.
5월 9일 YH무역 여성근로자들이 불법해고와 부당감원, 전직, 감봉, 인권유린 등에 항의하면서 농성을 시작했다. 함석헌은 거듭 양대선거의 부당성을 강조하면서 5월 18일 이희호 등 양심수 가족들과 투표용지 소각식을 갖고, 해직교수, 해직 언론인, 재야 인사들과 함께 유신철폐, 체육관선거 시정 등을 요구하는 <오늘의 우리 주장>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런 활동은 제도언론에서는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6월 2일에는 구속자 가족들과 금요기도회를 마치고 기독교회관 정문 앞에서 시위를 하다가 경찰과 대치했다.

함석헌은 6월 26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박형규 등 민주인사를 비롯하여 대학생 1,000여 명과 함께 유신체제 비판과 독재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유신체제 이후 서울 중심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인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날 시위대는 경찰의 폭력으로 해산되었다가 다시 모여 “유신철폐”, “박정희 퇴진” 등의 구호와 반체제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이 시위가 진행되는 동안 인근의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양심수들도 때를 맞춰 유신반대를 주장하며 옥중농성을 벌였다.

시위에 참가한 대학생 20여 명과 가톨릭 신부 5명이 구속되고, 함석헌도 정보기관에 연행되었다가 풀려났다. 7월 5일 함석헌ㆍ문익환 등 각계 인사 402명은 ‘민주주의국민연합’(국민연합)을 발족했다. 서명 인사들의 연금 사태로 창립총회는 유산되었으나, 민주인사 402명 및 12개 재야 단체가 공동 서명한 <민주국민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소식도 제도언론은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함석헌은 퇴약볕이나 혹한의 추위를 가리지 않고 반유신 시위에 참석했다. 그리고 경찰(전경)과 대치하는 맨 앞줄에 섰다. 학생들과 재야 단체에서 집회, 시위에 초청하면 거의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를 방관하는 지식인들과 외면하는 언론에 의분을 느꼈다.

함석헌에게 ‘의분(indignation)'이란 용어가 마음깊이 각인되는 계기가 있었다. 3ㆍ1운동 때 우리를 도왔던 스코필드 박사의 위급 소식을 듣고 병원에 위문 갔을 때, 그가 손을 꼭 잡으면서 “한국 사람들 의분을 몰라요!” 했다는 것이다. (주석 1) 이후 시대의 격랑 속에서 의분을 느끼며 끝이 보이지 않는 저항의 길을 시지프처럼 걸었다.

재판에 왔다갔다 하는 동안 나는 여러 외국신문, 잡지의 기자들을 만났는데 (국내의 기자는 정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나는 내게 조직의 능력과 상대의 앞을 내다볼만한 식견이 부족한 것을 솔직히 말했고, 그러면서도 나는 성공이거나 실패하거나 그 때문에 마음을 쓰는 일은 없고, 다만 이것이 내 할 의무이기 때문에 할 뿐이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옳은 이상, 몇 해가 되겠는지 몇십 몇백 년이 되겠는지 그것은 알 수 없어도, 마침내는 우리가 이기고야 말 것이라는 확신에는 까닭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낯빚을 고쳐서 알았노라 동의를 했습니다. (주석 2)

함석헌은 1977년 7월 8일 기독교수협의회의 초청으로 ‘고난을 받는 형제들을 위한 기도회’에서 <고난>을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이 무렵 여기저기에서 초청을 하여 여러 차례 강연을 했지만, 이날 강연장에는 수백 여 명의 청중이 모였다. 함석헌은 이 강연에서 예언자적인 말을 남겼다.

지금 시점이 어려운 때에요. 애기가 꿈틀거리며 나오려고 그래요. 애기는 신시대 아니에요? 그런데 산모는 그걸 몰라. 그냥 고통스러워 해. 그래.

 


1978년 5월 8일 함석헌 선생님의 부인 황득순님의 장례식에서 말씀하시는 송두용선생. 뒷편에 서 계신 문익환, 백청수, 김제태 (오른쪽부터)

1976년 5월 평생을 함께해 온 아내 황득순이 눈을 감았다. 1917년 동갑내기로 결혼하여 61년을 살아온 아내였다. 10여 년 전부터 앓아누운 아내의 수발을 하면서 제대로 남편 역할을 하지 못한 통한을 삼켰다. 한 때는 외도로 아내의 가슴을 아프게 한 적도 있었다.

황득순은 글을 몰랐다. 해서 남편의 글을 한 편도 읽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함석헌은 아내에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일본 유학생들이 조혼의 아내를 버리고 신여성을 택할 때도 그는 부모가 맺어준 아내를 사랑하며 끝까지 지켰다. 아내는 남편이 평생 변변한 직장을 갖지 못하고 월급봉투를 갖다주지 못했어도 불평하지 않고 어려운 가계를 꾸렸다. 함석헌이 생애를 두고 저항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데는 이같은 아내의 내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고은은 읊었다.

함석헌옹 부인

세상에 바람 같은
훨훨 날아가는 학 같은
서천에서 내려온
신선 같은

그런 함석헌 옹에게 부인이 있다니
봉건시대 여성 호칭으로 부인 황씨
세상에 얼굴 한 번 내보이지 않은 채
영감은
온 세상의 얼굴인데
온 세상의 정신인데
부인 황씨 오래 몸져 누워

영감과 달리 몸집도 항아리처럼 큰 데
세상의 그 누구에게도
그 부은 얼굴 내보이지 않은 채
평생 불화 그대로
어느 날 숨졌다
그때에야 부랴부랴 사람들은
장례식 준비하였고
날씨는 사나운 개처럼 사납게 추웠다.
(주석 3)



주석
1> <씨알의 소리>, 1977년 2월호, 3쪽.
2> 함석헌, <정신 바짝 차려>, <씨알의 소리>, 1997년 4, 5월호, 6쪽.
3> 고은, 앞의 책, 8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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