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동지'를 꿈꾸며...(김진숙지도위원 편지글)

http://bsnodong.tistory.com/m/post/30

 

 

집회도 없고 수련회도 없는 휴일은 외려 잠이 일찍 깨요.
아무 일도 없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언제부터 저는 평화가 실감나지 않는 삶을 살게 된 걸까요.

아무 일도 없는 이상한 토요일.
아니나 다를까. 텔레비전 화면에 뉴스속보가 뜨는군요.


“노무현 전 대통령 뇌출혈로 입원”


검찰조사가 시작되면 입원으로 시작해서

휠체어나 마스크가 구명보트처럼 등장하는 꼴을 늘 봐오긴 했습니다만
당신은 그런 쇼를 할 사람은 아닌지라 스트레스가 어지간했나보다 생각했습니다.

10 여분 후 “노무현 전대통령 사망한 듯”이라는 자막이 뜨고

그제서야 뒹굴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나날이 일구 우일구하기 여념없는 시시껍절한 방송이 중단되고 속보가 이어지더군요.
경호원, 사저뒤편, 부엉이 바위, 세영병원, 양산부산대병원, 심폐소생술, 열상 따위의

일상과 밀접하지 않은 단어들이 바퀴벌레처럼 툭툭 튀어나와 소름을 돋게 했습니다.
정신적 공황상태까진 아니었지만 불면 탓으로 약간 멍한 채로 이틀을 보냈고

월요일 아침 부산역까지 가긴 했으나 조문은 못하고 역 광장을 몇 바퀴 빙빙 돌다 왔습니다.

선뜻 신발을 벗고 절을 하는 문상객들의 거리낌없는 몸놀림이 참 부럽다고 생각하며.
잠이 안오대요.


다음 날 다시 부산역엘 갔습니다.
역 광장을 또 빙빙 돌다가 그냥 돌아가면 다시 닥칠 불면의 밤이 성가셔
문상객들의 뒤에 얼른 붙어 섰습니다.
방명록에 몇 줄 쓰기도 했습니다. 잠을 자야하니까.


“오랜 세월 동지였고 짧은 시간 적이었습니다.
90년 변호사 접견 오셨을 때처럼
봉하마을 어딘가에 앉아 각자의 위치가 만들어 낸
그동안의 원망과 미움들을 두런두런 털어낼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곧..
고맙고 죄송합니다.“
 
90년. 제가 첫 징역을 살 때였습니다.
접견을 오셨었지요.
보통 변호사 접견은 재판 전날 와서(사실 재판 전날도 안 오는 변호사도 많습디다만)
재판절차를 일러주고 이빨도 맞추고 하는데 재판날짜와는 아무 상관없는 시기였던지라
많이 의아했던 만큼 20년 전인데도 이리 생생하네요.


접견실에 먼저 오셔서 기다리시더군요.
보통은 재소자들이 한 시간 이상씩 주리를 틀면서 기다리는데.
요샌 교도소 반찬이 뭐가 나오냔 얘기, 여사에선 뭐하고 노냐는 얘기,

변호사가 해주던 징역살이 얘기, 남사에선 뭐하고 논다는 얘기,
법무부 시계도 가니까 재밌는 놀이를 많이 개발해서 징역을 잘 깨라는 얘기.
변호사가 접견을 와선 재판이야긴 한마디도 없이 노닥거리기만 하다

그 더디기로 유명한 법무부시계가 세상에 한 시간이나 흘렀습니다.

 

“가야겠네” 일어서시길래 하도 황당해서 물었습니다.
“왜 오셨어요?”
“진숙씨 징역살이 힘들까봐 놀아 줄라고 왔지요”

 

그리고 당신은 정치권으로 갔고,
정치권으로 갔다는 건 권력을 탐하는 변절로 규정하는데 한치의 주저함도 없었으니
변호사 비용을 거침없이 떼먹고도 사기꾼의 돈을 떼먹은 것 마냥 일말의 부채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복직하면 갚으마. 유전 발견하면 갚으마.

보물선 찾는대로 갚으마. 막연한 약속이 선임비였던 시절이었으니.
그게 인권변호사의 당연한 책무였으니.
이제와 생각해보니 상실감이었어요.

 

그 시절 당신은 우리들의 유일한 빽이었는데.
공돌이 공순이 편을 들어주는 가장 직책 높은 사람이었는데.
당신이 있어 우린 수갑을 차고도 당당할 수 있었는데.


그때 직감적으로 생각했어요.
이제 더 이상 우리 편이 아니겠구나.
재판장 앞에서 수갑을 찬 채 잔뜩 주눅 든 우리를 향해, “피고인은 무죕니다.”
외쳐 줄 사람이 이젠 없겠구나.
이제 재판에서 지더라도 찾아가 울 데도 없겠구나.
노동자들이 그들의 부엉이바위인 크레인 위에 올라갈 때 따라 올라가지도 않겠구나.

 

그리고 당신을 잊었습니다.

용감해서가 아니라 아무도 없어서 혼자 진행했던 1심 재판에서 당연히 지고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
“왜 항소를 안했어요?” 라는 질문에 “항소가 뭔데요?” 라고 되묻던 저에게
“노동자가 항소를 알면 그건 노동자가 아니지.” 하던 말도 잊었고,
노동자도 이론이 있어야 세상을 바꾼다며 함께 했던 소모임도 잊었고,
군사정권 시절 해고된 노동자의 그 막막한 눈빛을 들여다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유일하게 내 얘기를 그대로 들어주던 무료법률 상담소도 잊었고,
어느 날은 밤에 오라 길래 밤에 찾아갔더니 그날이 전태일이라는 노동자의 기일이라고
변호사 사무실 구석에 조촐한 제상을 차려놓고 아무 말도 없이 유령들처럼 절을 하던
그 뭉클하던 밤도 잊었고,
함께 같은 거리를 달리던 6월 항쟁도 잊었고,
최루탄 가루가 싸락눈처럼 내린 범냇골 국민운동본부 옥상에서 막걸리를 나누던 걸판지던 뒤풀이도 잊었습니다.

 

그리고 침례병원이 초량에 있을 때였습니다.

노동조합 조합원 교육에 초청을 받았는데 앞 시간 강사가 당신이었더군요.
당신은 내려오고 나는 올라가던 계단에서 마주쳤습니다.
난 참 어색하기가 짝이 없습디다.
그냥 모른 척 할라고 했습니다만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지요?”
굳이 손까지 내미시더군요.
그때 대답을 했거나 웃기라도 좀 했으면 지금 잠을 이루기가 좀 쉬웠을까요.
 
그리고 당신이 출마한 대선에서 전 4번을 찍었습니다.
단 한 번도 단 한순간도 고민하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외포리를 한번도 벗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평생 1번을 벗어난 적이 없는
큰언니가 전화를 했더군요.


“이 노무헤니가 그 노무헤니지? 니 벤호사. 그 사람 찍었다.

너 인쟈 깜빵 안가지? 복직두 되갓지?”

 

얼른 대답할 말이 떠오르질 않더군요.

제가 왜 “내 변호사”를 놔두고 4번을 찍었는지 우리 큰언닌 죽을 때까지 이해 못할 거예요.
2번과 4번의 극심한 차이를 설명하는 일도 이리 막막한데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그 미세한 차이를 설명하는 일은 저의 재주로는 난망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기뻐서 우는 사람도 있습디다만

이회차이가 당선된 거보다 노무혀이가 당선된 게 노동자들에게는 더 힘들 거라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고립은 깊어졌고 고착화되었습니다.


김영삼이가 당선되었을 때 운동권이 1/3이 떨어져 나갔고,

DJ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이른바 재야가 사라졌고,
당신이 대통령이 되면서는 그야말로 오롯이 노동자들만 남았습니다.


한 사업장에서 수천 명이 한꺼번에 해고될 때 그 무지막지한 자본을 향해 호통쳐주는 어른 하나 없습디다.
노동자들이 핏발 선 눈으로 거리로 나설 때 역성들어주기는커녕 죄 우리만 나무랍디다.


그거 아세요.

당신은 조중동이랑 열심히 싸우셨습니다만 우리에겐 조중동이랑 한편처럼 보인 거.

 

 “야~ 기분좋다!” 시며 봉하로 가셨을 때 오리농법보다 더 중요한 일은 농민들의 삶의 실상을 들여다보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왜 목숨 걸고 한미 FTA를 반대했는지.
그리고 전용철, 홍덕표 그들의 죽음에 당신이 늦게나마 사과를 하면 참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랬다면 제가 봉하마을을 갔을까요. 아마 갔겠지요.
그리고.. 김 주익 얘기도 했을까요. 아마 그 얘긴 못했을 거예요.
말로 꺼내긴 크나큰 상처였으니까.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그 말씀.


유난히 노동자들에겐 가혹하셨습니다.
2003년도 한진중공업에서 저는 한꺼번에 두 명의 지기이자 동지를 잃었습니다.
김 주익은 600여명 조합원의 명퇴에 맞서 2년을 싸웠고 노사가 합의를 했고
그 합의를 회사가 번복을 했고 그래서 크레인에 올라갔고 그 크레인 위에 129일을 매달려 있다가
아시다시피 목을 맸습니다.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그런 시대는 정말 지났을까요.
벼랑 끝에 몰린 노동자들에게 종종 삶과 죽음은 자연의 한조각인 것을..

 

저는 당신을 부정한 게 아니라 당신을 넘어서고 싶었습니다.
착한 사람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지배가 없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시대에 그 꿈은 가장 허황되고 지리멸렬해졌습니다.
때론 우리가 품은 꿈이 너무 초라했고 궁색했습니다.


당신의 시대에 가장 많은 노동자가 짤렸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구속됐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비정규직이 됐고 그리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귀족으로 격상됐고 그들은 언론과 자본은 물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조차 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이기주의를 꾸짖으십디다만 동료가 수백 명씩 짤리는 걸 목격한 노동자가

비정규직에게 내밀 손이 남아 있겠습니까.
저 살아남는데 써야지.

 

징역을 살 때 만난 사형수가 있었어요.

이 여잔 영치금이 한 푼도 없는 개털이었는데
새로 신입이 들어오면 아주 불쌍한 표정으로 샴푸나 속옷을 사달라는 거예요.
출소한 사람들이 쓰다만 물건들도 다 그 여자 차지였죠.
언제 죽을지 모를 사람이 사소한 물건에 집착하는 게 도덕의 눈으로 보자면 참 추접스럽습디다.
그 여자 집행되고 보니 샴푸나 속옷 나부랭이가 구석구석에서 쏟아져 나옵디다.
백분의 일도 못쓰고 죽었죠. 생에 대한 나름의 집착이었던 거죠.
샴푸 생길 때마다 빌었겠죠. 이거 다 쓰고 죽자.


정규직 노동자들은 삶의 벼랑에서 그런 심정으로 잔업하고 철야를 합니다.
얼마가 남았을지 모를 정규직의 삶을 그딴 식으로 저축하면서.


그 무렵쯤이었을 거예요.
변호사비용을 이제 그만 갚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당신의 시혜나 은전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 건.
적이 될 거라면 호적수이고 싶었습니다.
실력도 한참 모자라고 열정도 전만 못하고 진정성마저 잃어 그리 되진 못했습니다.
그게 참 부끄러워요.


똑똑한 사람들은 다 떠나 우리를 속속들이 아는 가장 무서운 적이 되었고

남은 자들은 동네북이 되어 초딩들마저 두들겨대고 천덕꾸러기가 되어

크레인엘 올라가고 굴뚝엘 기어 올라가도 언놈 하나 눈길주는 놈이 없어졌습니다.

당신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고등학교 밖에 못나온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입 달린 사람은 죄다 침이 마릅디다만
고등학교도 못나온 저 같은 노동자들은 당신의 시대에 대부분 절감해야 할 원가가 되어
구조조정 당했고 효율화를 위해 비정규직이 됐습니다.


차라리 군사독재 시절엔 대드는 노동자만 짤렸으나 당신의 시대엔 남녀노소가 짤렸습니다.
서민의 벗이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나 부자와 빈자의 간극은 훨씬 더 까마득해졌습니다.
당신이 변호사에서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는 24년의 세월 동안

전 아직 복직도 못한 해고노동자로 찌질한 50대가 됐습니다.


생각해보니 짧은 시간 동지였고 오랜 세월 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뜨겁고 바른.
만고 씰데없는 소립디다만 그래서 대통령 같은 거 하지 말았으면 참 좋았겠단 생각
지금도 해요.

 

불안하고 불길한 기운으로 떠돌던 예감이 당신의 죽음으로 확연해집니다.
한 시대가 갔다는..

이제 상고출신이 변호사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양양한 가도가 보이고 그 길을 편하게 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의 있습니다!”
외칠 때, 그 외침에 뒤돌아보는 사람도 이제 더는 없을지도 몰라요.

 

만 명이 울어주면 천국에 간다했던가요.
천국에 가셨을 거라 믿어요. 진심으로.


김주익 곽재규 배달호 김동윤 최복남 이용석 이해남 이현중 정해진 하중근 박수일 허세욱..
당신의 시대에, 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서러움으로 억울함으로 목 놓아 울었던
죽음들입니다.

당신처럼 벼랑 끝에 내몰렸던..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죽음을 당신이 이해해주길 바란 적이 있었어요.
하도 야속해서. 노동자의 삶을 안다는 사람이 어찌 저럴 수가 있나 너무 미워서.
아무리 야속하고 미워도 그런 바람은 품지 말걸 그랬다 싶어요.
애증도 부질없어 졌습니다.

언젠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말들이, 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말들이 기형도의 시처럼
떠돌다 때때로 부딪히겠지요.


이제 변호사비용은 영원히 안 갚아도 되게 생겼습니다.
다음 생에 오실 땐, 너무 똑똑하게 오지 마시구려.
사법시험 같은 것도 합격하지 마시구요.

그냥 태생대로 기름밥 먹는 노동자로 만났으면 해요.


저는 당신에게 변절이라 손가락질 할 일 없이,

당신은 절더러 경직되었다거니 세상을 모른다거니 한심해 할 일 없이.

떠날 일도 보낼 일도 없이 그냥 내내 동지로.
그래서 언젠가 하셨던 말씀대로 자본가가 지는 해라면 노동자는 뜨는 해다.
그 멋진 말씀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순수한 열정, 남다른 정의감 그대로 만날 수 있길.
다시는 미워할 일도 상처 받을 일도 이렇게 미어질 일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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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1주기 강우일 주교 강론

 

오늘 우리는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았다.
 
세월호는 출항해서는 안 될 배였다.
1년 전 그날 인천항은 악천후였고, 가시거리는 800미터밖에 안 되었다.
그 때 출항한 배는 세월호 단 한 척뿐이었다.
그리고 출항 당시 세월호는 규정된 물량의 약 2배를 과적했고, 엄청난 화물들을 고정하지도 않고 적재했다.
그리고 화물을 더 싣기 위해 배의 균형을 잡아주는 배 밑바닥의 평형수를 절반 이상 빼버렸다. 출항 전에 인천항 운항관리자는 배 안으로 들어가 보지도 않고 안전점검 보고서에 ‘양호’라고 기재하고 출항허가를 내주었다.
심각한 기상악화가 풀리지 않아 단원고 아이들은 세월호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유가족들은 ‘아이들을 다시 태우고 돌아올 버스가 인천항으로 출발했었다.’고 증언한다.
그런데 세월호는 왜 무리한 출항을 했을까? 누가 그런 결정을 내렸는가? 아무것도 밝혀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도대체 왜 갑자기 세월호가 침몰했는지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검찰은 침몰 원인으로 급변침을 지목하며 ‘조타미숙으로 선체가 크게 기울었으며, 과적 및 고정 불량과 평형수 부족으로 복원력을 상실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급변침은 사고의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라고 한다.
세월호가 왜 급하게 방향을 틀었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7천 톤이나 되는 세월호가 100여분 만에 완전 침몰했고 선체가 1초에 14도나 기울어졌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급격한 침몰과 변침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세월호에서 자기 발로 나온 사람 말고는 해경이 들어가서 구조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세월호는 사고 후 1시간 동안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으라.’라고 하는 안내방송 외에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침몰 당시 아이들은 유리창을 두드리며 구조 요청을 했지만, 해경은 선실 유리창을 깰 생각도 안 했고, 탈출 안내도 하지 않다가 10시17분, 해경 함정 123정이 도착한 후 47분 만에 현장에 있던 해경 헬기와 선박, 잠수부는 돌연 일시에 철수했다.
후에 실종자 수색에 나섰던 잠수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해경이 “언딘”의 작업을 위해 철수를 요구했다.’ 고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일이다.
사고 해역 근처에 있었던 4만톤 급의 미 함정의 지원도 거부했다.
해군참모총장이 두 번이나 통영함 출동을 명했는데도 해경이 해군함정의 도움을 거절했다.
그리고 일본 해상보안청의 구조협력 제안도 거절했다. 이해가 안 된다.
 
그리고 사고의 원인과 경과를 분석해 줄 전문가들이 침묵하기 시작했다.
어떤 언론사에 따르면 세월호 문제를 제기해 온 전문가들이 4월21일부터 인터뷰에 응하지 않기 시작했다고 한다.
익명의 대학교수는 인터뷰에서 ‘압력이 들어온다. 주로 정보 부처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4월22일 방송통신위원회는 ‘세월호 관련 재난상황반 운영계획’이라는 문건을 통해 방송사 조정 통제 및 대응 임무를 하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
세월호는 국내 여객선 중 유일하게 해양 사고 발생 시 국정원에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국정원은 4월16일 오전 9시10분, 청해진해운 사장 등으로부터 사고 문자 메시지를 받았고, 9시28분에 해경상황실에 전화해 ‘원인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세월호 내부에서 발견된 자료에 의하면 국정원은 세월호에 99가지의 상세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왜 민간 여객선이 배의 시설 아주 작은 부분까지, 그리고 선원들의 수당이나 휴가까지 국정원 지시를 받아야 했는지 아무도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지난 3월 한국 주교단이 함께 로마를 방문하고 프란치스코 교종을 뵈었다.
5년마다 한 번 하도록 되어 있는 정기 행사다.
그 때 교종께서 우리에게 제일 처음 던지신 질문이 ‘세월호 문제는 어떻게 되고 있는가?’였다.
이 질문에 대해 나는 이렇게 답했다.
‘정부가 세월호 진상을 조사하겠다고 조사위원회 조직은 구성했는데 실제로 조사는 전혀 한 발자국도 진척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밖에 답할 수 없는 우리 현실이 너무 부끄러웠다.
교종께서는 아직 세월호 가족들의 비통함이 잊을 수가 없고 가슴 속에 가라앉아 있다고 하셨다.
 
세월호 참사 한 달 후인 5월16일 대통령은 가족들과 만난 자리에서 분명히 ‘특별법은 만들어야 하고, 검경수사 외에 특검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낱낱이 조사를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는 말씀까지 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도록 위원회는 한 발자국도 못 내딛고 있고, 해양수산부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의 독립적 진실규명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시행령을 발표했다.
해양수산부는 세월호 사고를 유발한 원인 제공 기관들인 한국해운조합, 지방항만청, 한국선급, 선박안전기술공단과 직접 연결된 상부 기관이다.
간단히 말하면 직접 사건의 피고가 되거나 피고와 아주 가까운 부서다.
피고 신분의 공무원이 세월호 진상 규명의 실무 전체를 책임 조정하는 역할을 맡도록 하는 시행령은 진실 규명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피고의 한 가족에게 판결을 내리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정부는 희생자 가족에게 보상비는 몇 억 원씩 줄 것이라고 흘리며 돈다발을 자꾸 펄럭이며 마치 유가족들이 돈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처럼 국민 여론을 오도한다.
이것은 유가족들에 대한 인격모독이다.
대통령이 눈물 흘리며 한 약속을 이런 식으로 변형하고 왜곡하면 국민은 국가를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이제 그만하면 되지 않았나 한다.
어떤 이들은 광화문 광장에 기한도 없이 농성하고 노숙하고 있는 가족들, 시민단체 사람들의 존재가 불편하고 피곤하고 혐오스럽게 느낀다.
언제까지 세월호 문제에 붙잡혀 있을 것인가, 나라 경제도 불황이고 민생 문제도 산적한데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마치 강도 만나서 얻어맞아 초죽음이 되어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웃을 보고도 내 갈 길이 바쁘다며 길 건너편으로 돌아서 지나가버리는 레위인이나 사제와 다를 바 없다.
이웃 형제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어질 수 없는 오늘의 메마른 우리 영혼이 서글프다.
형제의 신음 소리가 전혀 우리 가슴에 공명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콩크리트 벽 같은 불통의 우리 마음이 참으로 원망스럽다.
304명이나 되는 이웃 형제와 아이들이 하루아침에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버린 사건의 충격이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 오늘의 개인주의적 문화가 참으로 개탄스럽다.
국민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국가기관이 외면하고 밝히려 하지 않는 의혹 가득한 사건을 그냥 잊고 덮어버리자고 하는 것은 우리 몸에 돋아난 종기의 뿌리를 도려내지 않고 겉에 붕대만 감고 말자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종기는 속에서 더 곪아서 뼈 속까지 썩어 들어가고 나중에는 세월호보다 더 큰 재앙이 찾아올 것이다.
 
우리는 세월호의 비극을 잊으려하기보다는 도리어 거듭 상기해야 한다.
희생자들의 고통과 참담한 최후를 기억해야 다시는 그런 참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와 회심을 열매 맺을 수 있다.
세월호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자꾸 상기하여 질문하고 밝히려고 해야 진실한 원인에 접근할 수 있고 그 사악한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억으로 끊임없이 회귀하고 거기 머물고 있는 가족들과 연대하며 그들의 아픔을 함께 공감하고 나누고 아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걸린 몹쓸 개인주의의 염병에서 치유될 수 있다.
상처는 회피하고 어설프게 봉합해서는 속에서 갈수록 더 곪아간다.
 
우리는 오늘 성체 앞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억해내야 하겠다.
고인들의 명복을 빌고, 가족들의 상처를 주님께서 어루만져주시기를 청하도록 하자.
그리고 동시에 이런 참혹한 비극을 직접 초래한 사람들이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고 유가족들과 국민에게 용서를 청할 용기를 내도록 기도하자.
 
예수님은 진리의 증언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 치셨다.
우리는 오늘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죽음을 둘러싼 불의와 의혹과 고통에 대해 침묵하지 말고 살아있는 증언을 하도록 초대 받고 있다.

 

Helene Fischer / Ave Maria


독일인이 자랑하는 미녀가수 Helene Fischer의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가슴이 떨려온다.
헬레네 피셔는1984년 8월 5일에 러시아시베리아에서 출생,
1988년에 독일로 이주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프랑크프루트에 있는 예술대학교에서 뮤지컬배우를 전공,
대학에 다니는 동안에도 Rocky Horror Show(록키 호러 쇼)나
Fifty-Fifty같이 여러 뮤지컬에 참여했고.
그동안 헬레네의 어머니가 녹음한 데모씨디를 유명한 프로듀서한테 보냈는데
그의 주선으로 음반계약을 하면서 유명해지게 된다.


Ave Maria! Jungfrau mild,
er hore einer Jungfrau Flehen,
aus die sem Felsenstarrund wild
soll mein Gebet zu dirhin wehen.
Wir schlafen sicherbis zum Morgen,
ob Menschen noch so grausamsind.
O Jungfrau sichder Jungfrau Sorgen,
O Mutter, hor ein bittend Kind!


Ave Maria!

Ave Maria!  Unbefleck!
Wenn wir auf diesen Fels hinsinken
Zum Schlaf, und uns dein Schtz bedeckt
Wird weich der hancte Fels uns dunken.
Du lachelst, Rosendufle wehen
In dieser dumpfen Felsenkluft,
O Mutler, hore kindes Flehen,
O Junfrau, eine Jungfrau ruft!


Ave Maria!

Ave Maria!  Reine Magd!
Der Erde und der Luft Damonen,
Von deines Auges Huld verjagt,
Sie konnen hier nicht bei Schicksal beugen,
Da uns dein heil`ger Trost anweht;
Der Jungfrau wolle hold dich neigen,
Dem Kind das furden  Vater fleht.
Ave Maria!


아베마리아!  자비로우신 동정녀여,
이 어린 소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은 이 험한 세상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고통 가운데서 우리를 구해주십니다
쫒겨나고 버림받고 욕받을지라도
당신의 보살핌으로 우리는 편히 잠듭니다
동정녀여. 이 어린 소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성모여, 이 어린 소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아베 마리아!


아베 마리아!  순결하신 동정녀여! 
지금 우리는 곤고한 잠자리에 들어야하나
당신이 우리 위에서 돌보아 주신다면
솜털이나 새털 잠자리처럼 편안합니다.
암울한 이 동굴 속 공기도
당신의 미소가 함께 한다면 향유와 같습니다
하오니 성모여, 이 소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성모여, 이 어린아이의 간구를 들어주소서!
아베 마리아!


아베 마리아!  정결하신 동정녀여!
땅과 하늘의 사악한 마귀들이
지금 여기 이렇게 나타나지만
당신께서 임하시기 전에 사라질겁니다
당신의 보살핌에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이 어린 소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아버지가 아이의 바램을 들어주듯이.
아베마리아!


아베 마리아'는 가톨릭교회의 기도문 중 하나인 '성모송'을
많은 작곡가들이 노래로 만든 것이다.
라틴어로서 Ave는 "안녕하십니까?"  혹은 "문안드립니다."라는 뜻이고
Maria는 예수를 낳으신 여인을 말한다.
그래서 이 부분만 직역한다면 "마리아님, 안녕하십니까?"라는 뜻이 될 것이다.
‘마리아를 찬양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때론 천사의 기도(Angelic salutation)로 불리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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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6장] 88년의 거인 나래를 접다

2013/02/28 08:00 김삼웅

 

 

제100호(1989년 4월호)

함석헌이 생전에 그토록 기대했던 <씨알의 소리> 통권 100호는 그가 세상을 뜬 뒤에 나왔다. ‘통권100호 기념호’로 나온 “함석헌 추모특집” 형태의 4월호였다. 새 발행인이 된 김용준은 <선생님의 ‘글쎄’가 그리워집니다>에서 “편집위원들이 모여 <씨알의 소리>를 계속 펴나가기로 결정했다”는 뜻을 전했다.

통권 100호의 특집 ① “함석헌 선생의 인간과 사상”에는 노명식의 <함석헌의 고난사관>, 송건호의 <언론인으로서의 함석헌>, 김경재의 <함석헌의 종교사상>, 송현의 <시인 함석헌 연구>, 김영호의 <함석헌과 동양사상>, 이윤구의 <하늘만 믿은 님과 퀘이커 신앙>, 송기득의 <함석헌의 대듦, 그 삶과 얼과 생각>이 실렸다.

특집② “함석헌 선생과 나” 에는 장기려ㆍ김대중ㆍ김영삼ㆍ최태사ㆍ이태영ㆍ법정ㆍ서영훈ㆍ김상근ㆍ원경선ㆍ다나까ㆍ한승헌ㆍ강기철ㆍ장기홍ㆍ김숭경ㆍ배영기ㆍ문대골이 쓴 각각의 사연이 담겼다. 박두진의 시 <함석헌 선생>, 박재순의 <씨알의 소리와 씨알의 사상>, <씨알의 소리 총목차>, <사진으로 보는 함석헌 선생> 등 내용면에서 ‘함석헌 추모특집’에 모자라지 않았다.

박두진의 시 <함석헌 선생>

이 시대, 이 세기,
우리들의 이 시대의 한 의인 가셨느니.
참 사람 사랑의 사람
자유의 사람 가셨느니.

그 암담하고 처절한
악의 시대 횡포의 시대의 상처투성이의
그 하늘의 사람 빛의 사람의
형형한 정기,
질풍노도로 한 시대를 깨우쳤느니.

불의ㆍ무도ㆍ악을 쳐
번개처럼 번뜩이고,
사랑에는 촉촉한 봄비로 스며,
빛의 길 참의 길을
밝혀 가셨느니.

아, 불의 자유, 불의 사랑, 불의 의지 그 활력,
스스로 안에 삭혀 눈물 머금던
겨레사랑, 인간사랑, 인류사랑 끝없이
불멸의 넋 활활 태운
이 시대의 의인,
불의 사람 참의사람 가시었느니.
(주석 6)

인물은 두 가지 형태로 역사에 남는다. 생전에 세상을 요란하게 했던 인물 중에는 갈수록 세월의 더께에 묻혀 망각되는 경우, 세찬 풍상과 인위의 작용에도 씻기지 안고 샛별처럼 반짝이는 경우다. 함석헌의 경우는 기념사업과 연구사업이 활발하고 ‘20세기를 대표하는 한국인상’으로 조명된다. 함석헌기념사업회는 그동안 이사장이 장기려 ⟶ 이문영 ⟶ 김경재 ⟶ 문대골 ⟶ 김조년으로 이어지고, <씨알의 소리>도 격월간으로 최근 (2013년 봄)까지 김조년 교수가 발행 겸 주간을 맡아 통권 226호를 발간하였다.

함석헌기념사업회는 함석헌 탄신 100주년인 2001년 3월 13일 한국언론재단(프레스센터)에서 추념 및 후원의 밤 행사를 가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추념 메시지에서 “함석헌 선생이야말로 20세기 한국이 낳은 세계적 사상가요 문필가였으며, 행동하는 지성이었고, 민주화운동이 전개되었던 어두웠던 시절, 선생은 태산처럼 우뚝 서서 저와 민주화 동지들을 지탱해주고, 지도하시고 이끌어 오신 큰 스승이었다.”고 회고했다.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는 3월 10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인 충신교회에서도 열리고, 3월 13일 오산학교에서도 학생, 교사, 동문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오산학교 동창회는 1994년 2월 <함석헌선생추모문집>을 편찬했다.
고인의 희귀한 사진 화보와 부록으로 저술, 연설의 목록을 연대별로 정리하여 연구에 도움을 준다. 문집에는 육필 원고가 실리고, 오산학교 후배로서 함석헌이 3.8선을 넘어 서울에 정착할 때 도움을 준 최태사의 글, 50년 동안 지켜보았다는 최진삼의 기록 등 값진 내용이 많다. 60여 년 전 오산학교 제자였던 안이현ㆍ김극진ㆍ이동순ㆍ임상흠ㆍ김창화ㆍ윤창흠ㆍ이용서ㆍ왕지균ㆍ이기백ㆍ김경옥ㆍ선우양국 등의 회고담에서 ‘교사 함석헌’의 모습과 비화, 일화를 듣게된다.

오산학교 30회 졸업생인 역사학자 이기백은 <함 선생의 속마음>에서 일제가 학교에서 일본어를 상용토록 했는데도 여전히 우리말로 강의하다가 갑자기 장학관과 교장이 교실로 들이닥치자 유창한 일본어로 강의를 한 ‘현장’을 소개했다. 함석헌이 얼마 뒤 학교를 떠나게 된 것이 이와 관련되었을 것이라고 이기백은 적었다.

‘씨알사상’을 되살리는 <함석헌연구>지가 2010년 봄부터 씨알사상연구원에서 반년간으로 발행되고, 제22차 세계철학대회가 2008년 8월 서울대학교에서 ‘유영모ㆍ함석헌사상연구’를 주제로 열렸다.

2009년 7월에는 ‘제1차 한ㆍ일 철학포럼이 일본에서 열렸다. 한ㆍ일 두 나라 철학자 30여명이 모인 철학포럼은 함석헌과 유영모, 다나카 쇼조, 아라이 오스이의 사상을 탐구하면서 “씨알사상은 생태계를 구할 대안”이라는 데 뜻을 모았다. 2010년에 함석헌 사상을 본격 연구하는 ‘씨알학회’(회장 이규성)가 창립되었다.

함석헌기념사업회는 해마다 ‘씨알모임’ 의 행사를 갖고, 씨알학술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씨알정신 승계와 확장에 노력한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 소재 함석헌기념사업회관에는 고인의 각종 저서와 자료, 기록물을 전시하고 있다.


주석
6> <씨알의 소리>, 1989년 4월호,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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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6장] 88년의 거인 나래를 접다

2013/02/27 08:00 김삼웅

 

 

늙어가면서도 젊은이들 못지않게 맑은 정신으로 청청하게 활동하고 글을 쓰던 함석헌이 큰 수술을 받은 뒤부터는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 나이는 이미 미수(米壽)에 이르렀다. 거인은 1989년 2월 4일 새벽 5시 25분 88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서울대병원 12층 108호실에서였다. 빈소에서 <씨알의 소리>후원회가 구성되고, 준비위원장에 장기려 박사가 추대되었다. 장례는 2월 8일 오산학교 강당에서 오산학교장으로 거행되었다. 2,000여 명의 조문객이 참석하여 거인의 가는 길을 애도했다. 장지는 연천군 진곡읍 감파리 마차산 기슭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2002년 8월 15일, 그를 독립유공자로 선정하여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수여하고, 2006년 10월 19일 대전 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정부는 2001년 4월 ‘이달의 문화인물’ 로 선정하여 그의 업적을 기렸다.

함석헌은 1988년 11월 22일 오산고등학교 전제현 교장에게 ‘유언’을 남긴 바 있다.

남강(남강 이승훈 - 저자) 선생께서 이루지 못하신 소원을 내 유해를 가지고라도 이루어 드리면 좋겠습니다. 내 뼈를 골격표본으로 만들어 오산학생들이 공부하게 해 주시고 내 대뇌와 심장 등 모든 장기도 방부제에 담아서 두고 공부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내 살던 작은 집과 터가 있는데 그것도 남강재단에 드리니 써주세요. (주석 4)

함석헌의 ‘표본’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유족과 지인들은 장례준비 과정에서 유체를 표본으로 만들었을 경우 보관문제와 자칫 우상의 대상이 되어 고인의 뜻과는 달리 이용될 지 모른다는 점, 그리고 종교적 윤리적으로도 어려운 문제라는 의견에 따라 유택에 안장하게 되었다.

함석헌은 지인들에게 “내가 죽으면 비석을 세우지 말라” 면서 “만일 누가 비석을 세운다면 벼락을 쳐서라도 부셔버리겠다” 고 당부하였다. 지인들이 후대를 위해서라도 무슨 말이라도 새겨야 한다고 설득하자 “정말 무슨 말을 쓰고 싶으면 “겨울이 만일 온다면 봄이 어찌 멀었으리오” 라는 그 말만 조그마하게 써 달라”고 하였다.

장례 뒤 묘소를 정비하면서 유족이 기념사업회 쪽에 돌책에 세울 고인의 말씀을 50~60자로 골라달라고 요청하였다. 그이와 같은 거인의 생애를 50~60자로 압축한다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몇몇이 의논하여 유일한 시집 <수평선 너머>에서 고르기로 하였다.

“결국 생전에 함 선생님과 제일 가까운 사이였다고 생각되는 안병무 박사에게 의뢰했다. 안 박사님은 다음과 같은 시를 선정해 주셨다.

나는 빈 들에서 외치는 사나운 소리
살갗 찢는 아픈소리
나와 어울려 부르는 너희 기도 품고
무한으로 갔다 내 다시 돌아오는 때면
그 때는 이 나 소리도 없이
고요한 빛으로 오리라 - <나는 빈들에서 외치는 소리> 중에서”
(주석 5)

함석헌 부부에게는 2남 5녀가 있었다.
장남 국용, 차남 우용, 장녀 은수, 차녀 은삼, 3녀 은자, 4녀 은화, 5녀 은선이다. 함석헌이 1947년 3월 월남한데 이어 차남이 1948년 6월 30일 용암포를 통해 단신 월남했다. 그리고 이어서 부인과 남은 가족이 1950년 월남하고, 어머니와 장남, 장녀는 용천에 그대로 남았다. 어머니가 고향에서 사망한데 이어 장남이 1958년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북한에는 장녀 은수가 살아 있었으나 함석헌은 끝내 딸을 만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함석헌은 죽을 때까지 유영모처럼 매일 산 날짜를 그날그날 달력에 기록하였다. 탁상용 달력 1988년 8월 8일자에 31925를 기록한 것이 남았다. 8월 12일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뒤 귀가하지 못한 채 눈을 감은 것이다. 날짜로 정확히 31929일을 살았다.

1988년 5월의 화재로 장서 5천여 권이 다 소실된 이후 새로 준비한 1천여 권과 쌍문동의 낡은 집 한 채, 20여 권의 저서와 역서 몇 권이 유산의 전부였다. 함석헌 사상의 본향이고 <씨알의 소리>의 산실이었던 원효로 4가의 옛집과 부지 82평은 오산학교에서 운영하는 남강문화재단으로 기증, 소유권을 이전하였다.

함석헌의 별세 뒤 공석 중이던 <씨알의 소리> 발행인 및 편집인에는 1948년부터 함석헌을 사사하면서 고려대학에서 두 차례나 해직되는 등 민주화운동에 헌신해온 김용준 박사가 선임되었다. <씨알의 소리> 후원회는 명칭을 ‘함석헌선생기념사업회’로 바꾸고 후원회장 장기려 박사를 기념사업회 초대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주석
4> 전제현 <함석헌 선생님을 보내드리고>, <함석헌선생추모문집>, 324쪽, 오산학교동창회 편, 1994,.
5> <씨알의 소리>, 1989년 5월호, 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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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6장] 88년의 거인 나래를 접다

2013/02/26 08:00 김삼웅

 

 

노태우가 6.29 항복선언을 하던 날 함석헌은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리고 7월 13일 췌장, 담낭, 십이지장 등 종양부위의 절제수술이 4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입원 두 달 만인 8월 29일 잠시 퇴원했다가 9월 4일 백병원에 다시 입원하였다. 수술 상태가 좋지 않아서였다. 군부독재의 항복선언의 날에 함석헌이 입원한 것은 하늘의 섭리였는지 모른다. 독재세력의 항복으로 이제 그의 저항도 마무리할 시점이라는 섭리였을까, 그는 ‘섭리사관’을 믿어왔었다.

함석헌은 재입원하면서 <씨알의 소리> 복간의 뜻을 밝히었다.
1980년 7월 강제폐간 당한 지 7년 째가 되었다. 6월 항쟁으로 5공세력의 기가 어느 정도 꺾이면서, 그리고 직선제 개헌과 대선 국면으로 전환되면서 느리게나마 민주화가 진척되고는 있었다. 해서 <씨알의 소리> 복간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악명 높은 언론기본법이 폐기되고 언론출판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함석헌은 12월 22일 <씨알의 소리> 복간을 신청했다. 하지만 문공부는 꿀 먹은 벙어리였다. 12월 16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양김이 함께 출마하여 노태우에게 어부지리를 안겨주게되고, 6월항쟁은 결국 군부정권을 5년간 연장시키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노태우 정권이 <씨알의 소리>의 복간을 미루게 된 정치적 백경이 되었다.

함석헌은 12월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성치않은 몸으로 단일화를 위해 음으로 양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김대중ㆍ김영삼의 단일화가 되어야만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양김이 각각 잇따라 대통령 후보 출마를 선언한 후 그의 자택에는 양김과 그들의 측근들의 발길도 잦아들었다. 그리고 선거 결과를 예감한 듯 쌍문동 자택을 찾아온 양김 가운데 한 후보의 부인과 그 부인의 절친한 여성운동가 앞에서 <노자> 제29장의 한 구절을 써서 풀이해주었다고 한다.

將慾取天下而爲之 吳見基不得己 天下神器 不可爲也

장차 천하를 먹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자를 보면 나는 그 먹지 못함을 볼뿐이다. 천하란 신령스런 그릇이므로 거기에 무엇을 어쩌지는 못함을 볼뿐이다. 천하란 신령스런 그릇이므로 거기에 무엇을 어쩌지는 못하는 것이다.
(주석 2)

제96호(1988년12월호) 복간호

6월 항쟁으로 민주세력이 집권하지는 못했으나, 1988년 4.26총선에서 여소야대로 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면서 5공과 같은 폭압은 사라지고, 어느 정도 민주주의가 진행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씨알의 소리>는 1988년 7월 18일 폐간 8년만에 정기간행물 등록증을 교부받았다. 등록번호 <라 - 3676>였다. 법적 처리기간은 신청한지 1개월내로 내주게 되었으나, 정부는 무려 7개월 만에 등록증을 내주었다. 군사독재 잔당들에게 함석헌과 <씨알의 소리>의 존재가 그만큼 두려웠던 것이다.
함석헌은 새편집위원으로 계훈제ㆍ김경제ㆍ김동길ㆍ김용준ㆍ김영호ㆍ노명식ㆍ법정ㆍ송건호ㆍ송기득ㆍ안병무ㆍ이태영ㆍ조요한ㆍ한승헌을 위촉하고, 이중 김용준(위원장)ㆍ김영호ㆍ한승헌으로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편집기획과 자문 역할을 맡겼다.

1988년 12월호로 복간호를 발행하였다. 200여 쪽에 내용도 풍부했다. 함석헌의 <절대승리>, 특집 <씨알ㆍ반핵ㆍ통일>, 조요한의 <군사문화는 청산되어야 한다>는 시론, 박두진의 축시 <깃발>, 김경재의 <자유혼, 인간 김재준>, 김준엽ㆍ송건호ㆍ법정ㆍ계훈제의 <복간축사> 등이 실렸다.

함석헌은 8년 만에 다시 쓴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의 <씨알 뒤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에서 통한의 사연을, 그러나 정제된 언어로 정리한다.

저들은 씨알을 칼로 자르면 쉽게 죽을 줄 알았겠지만 씨알은 죽지 않습니다. 죽는 법 없습니다. 죽이면 죽은 것 같으나 다시 살고, 다 죽어 없어졌다가도 굳은 땅껍질을 들추고 일어나는 들풀같은 씨알입니다.

나는 그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불의한 세력들은 나를 연금, 미행, 도청 등 갖은 방법을 다해 나의 입을 막고 나의 붓을 꺾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보려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전국 곳곳, 어느 산 어느 골짜기 골짜기마다 이름모를 수많은 씨알들의 꿈틀거림, 작은외침, 부르짖음이 함성이 되고, 마침내 도도한 물결을 이루어 불의의 세력들을 밀어부친 것이 작년 6월의 싸움이 아닙니까? 이때 나는 갑작스런 병을 얻어서 병원에 누워 있었고 마침내 대수술을 받게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오늘까지 병원을 드나들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주석 3)

함석헌은 퇴원을 했으나 노령인데다 큰 수술을 하여 건강이 예전치 못했다. 그러나 타고난 건강체질과 정신력으로 <씨알의 소리> 발행에 전력하였다. 복간호에 이어 1988년 1.2월호에는 특별한 글을 쓰지 않았다. 4월호가 통권 100호이기에 여기 준비를 서둘렀다. 평상시라면 창간 10년에 통권 100호가 발행되지만 <씨알의 소리>는 독재와 싸우느라 두 차례나 목이 졸려서 19년 만에야 100호가 나오게 되었다. 통상적이라면 200호가 나올 시점이었다.

함석헌은 재복간과 100호 준비, 그리고 몇 차례 시국강연으로 다소 무리를 한 것인지, 8월 3일 서울대병원에 다시 입원하였다. 1년 만이었다. 의사는 안정을 권하였다.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제24회 서울올림픽이 개최되었다. 노태우정부는 올림픽평화대회의 공동의장으로 함석헌을 추대하였다. 그리고 올림픽개최의 날 노태우와 함께 평화대회의 공동의장으로서 평화의 문에 불을 지폈다.

노태우는 전두환과 함께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5공의 제2인자로서 헌정 유린과 인권탄압에 핵심적 역할을 한 장본인이었다. 위기에 몰리자 6.29선언을 통해 국면을 전환하고, 야당분열의 선거전에서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나마 전두환과 다른 점이라면 1988년 7월 7일 ‘대북정책 특별선언’을 통해 대북 화해무드를 조성한 것이다.

함석헌이 민주진영 일부로부터 “망령이 들었다” 는 격한 비난을 들어가면서 병중의 몸으로 서울올림픽평화대회 추진위원장으로서 노태우와 평화대회의 공동의장이 된 것은 올림픽의 평화정신과, 대북 화해 분위기를 살리고자 했던 것 같다. 이제까지의 삶과는 달리 군사정권이 주최한 ‘행사’에 참여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이에 앞서 1987년 10월 12일에는 동아일보사가 제정한 ‘인촌 언론상’을 수상했다.
인촌 김성수의 일제말기 친일행적을 둘러싸고 지인들 사이에서 비판이 제기되었다. 함석헌의 수상 소식이 알려지면서 지인들과 <씨알의 소리>독자들이 이 상을 거부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었다. 그러나 함석헌은 이 상을 수상했고, 상금 전액을 오산학교 남강문화재단에 장학기금으로 내놨다. 그는 1984년 남강 이승훈을 기리는 ‘남강문화재단’을 오산학교에 설립하고 원고료와 강연료 등을 털어 기금으로 희사해왔었다.


주석
2> 이치석, 앞의 책, 637~638쪽, 재인용.
3> <씨알의 소리>, 복간호 10~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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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6장] 88년의 거인 나래를 접다

2013/02/25 08:00 김삼웅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폭로> 20년 전 박종철 씨가 공안당국의 고문에 의해 사망했을 때 군사독재정권은 이를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신부들의 용기 있는 폭로가 있었기에 암흑 속에서 한 가닥 희망의 빛을 발견하게 되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자료사진

 

국민은 전두환 독재정권에 언제까지 굴종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청년ㆍ학생들이 금단의 철벽에 도전하였다. 1982년 3월 18일 일군의 학생들이 부산 미문화원에 방화하면서 광주학살에 미국의 역할을 성토한 것이 반독재 항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어서 1983년 9월 30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 결성되어 투쟁하면서 5공의 철옹성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경향 각지에서 노동자들의 저항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1984년 5월 18일 김영삼ㆍ김대중 계의 야당인사들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하면서 저항운동은 야당 진영에까지 확대되었다.

80년대 초기 민주화운동의 선두 그룹에는 유신체제에 저항하면서 연대를 이루어 온 재야인사들이 있었다. 1983년 5월 31일 함석헌ㆍ문익환ㆍ홍남순 등 재야 지도급 인사들은 “광주학살 진상” 등을 요구하는 <긴급민주선언>을 발표하고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이에따라 6월 16일 양심수가족협의회가 NCC사무실에서 양심수 석방 등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가고, 이것은 고려대학을 필두로 대학가의 시위로 확산되었다.

시대는 다시 함석헌을 부르고 있었다. 함석헌이 새시대를 열어가고 있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전두환의 폭정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가 형성되면서, 5공은 날이 갈수록 더욱 흉폭해지고 민심의 이반속도가 빨라졌다. 정부는 저항하는 민주인사들을 고문하고 용공으로 몰았다.

함석헌은 김재준ㆍ윤반웅ㆍ홍남순ㆍ이민우ㆍ문익환ㆍ지학순ㆍ김대중ㆍ김영삼 등과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1985년 11월 11일 <고문용공조작은 절대로 은폐될 수 없다>는 성명에 이어 농성을 시작했다. 위원회는 <우리의 주장>에서 5가지를 주장했다.

-. 고문과 용공조작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
-. 고문과 가혹행위를 자행한 수사기관원들을 색출ㆍ처단하라.
-. 국회에서 위증한 내무장관과 법무장관은 인책ㆍ사퇴하라.
-. 우종원 군의 사인을 공개수사를 통해 밝혀라.
-. 현정권은 다시는 고문 및 용공조작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국민과 세계 앞에 공약하라.
-. 우리는 국민의 자유로운 정부 선택권과 언론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총력을 경주할 것이다.
(주석 1)

많은 학생과 노동자, 시민들이 분신ㆍ투신ㆍ할복 등 극한적으로 저항에 나섰다. 전두환 정권은 막나갔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고문을 당하다가 숨졌다. 함석헌 등 민주인사들은 1월 26일 기독교회관에서 ‘고 박종철군 국민추모회준비위원회’ (추모위)의 발족식을 갖고, 고문살인 사건의 진상규명과 이 땅에서 영원히 고문 등 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을 추방하기 위한 국민연대를 결성했다. 그리고 박종철군 국민추모대회를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 ‘추모위’는 이후 민주쟁취의 대장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함석헌은 6월 5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국민운동본부)가 발족하면서 홍남순ㆍ강석주ㆍ문익환ㆍ윤공희ㆍ김지길ㆍ김대중ㆍ김영삼과 공동으로 고문을 맡아 이 단체를 이끌었다. ‘국민운동본부’ 는 전국에서 노도처럼 일어나는 6월항쟁의 중심이 되었다. 함석헌은 많은 집회와 시위 대열에서 빠지지 않았고, 국민운동본부의 주요 성명을 발표할 때이면 이를 낭독하였다.

시민의 궐기에 견디지 못한 신군부 정권은 6월 29일 마침내 노태우가 항복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것은 한국수구세력의 교활한 국면 전환용 전략이었다. 그들은 위기에 몰리면 어김없이 유화책을 쓰고, 가라앉은다 싶으면 다시 칼을 빼드는 숫법이었다. 최근에는 이명박이 촛불집회로 위기에 몰리자 반성하는 듯 하다가 곧 공안카드를 꺼낸 바있다.

들불처럼 번지던 6월항쟁은 6.29선언과 함께 보수야당이 체제내로 귀환하면서 곧 대선 정국으로 전환되고, ‘전두환 타도’의 열기는 사라졌다. 이번에도 혁명적 열기로 치솟던 민중의 역량이 비등점에서 사그라지고 말았다. 매번 그랬다. 반유신 항쟁이 10.26사태로, 반전두환 6월항쟁이 6.29선언으로, 반이명박 촛불집회가 MB의 반성 발언으로 수그러들었다.

함석헌이 늘 걱정했던대로 국민적 ‘의분’ 이 모자랐다. 4월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하자 눈물로 전송하고, 박정희가 암살되어 장례를 치를 때 수많은 국민이 연도에 나와 눈물을 흘렸다. 전두환이 백담사에 유폐되었을 때도 많은 국민(신도)들이 그를 찾아갔다. 인정이 많은 국민인지, 의분이 없는 국민인지, 그래서 압제의 역사가 되풀이 되는 것일 터이다. 1911년 중동, 아프리카 국가들의 반독재 투쟁의 치열했던 것과도 비교된다.


주석
1> <6월항쟁 10주년기념자료집>, 45쪽, 6월민주항쟁 10주년사업 범국민추진위원회 엮음, 사계절,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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