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 왕궁 관람을 마치고 바로 건너편에 있는 알무데나 성모대성당을 둘러보았다.



알무데나 성모대성당(Catedral Nuestra Senora de la Almudena)


흔히 줄여서 알무데나 대성당(Catedral de la Almudena)이라고 한다. 왕궁 주변에 있다.
16세기에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정치적 문제와 에스파냐 내전, 재정 결핍 등의 이유로 1789년에야 완성되었다.


에스파냐의 국토회복운동 당시 아랍어로 '알무데나'라고 부르는 성벽에서 성모상이 발견된 데서 이름이 유래했는데,
이슬람교도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침략한 후 마드리드를 정복했을 당시 성모상을 성벽에 숨겨둔 것으로 추측된다.


알무데나 대성당은 마드리드의 수호 성모 알무데나를 기리는 성당이라고 한다.
예전에 무슬림들이 스페인의 일부를 지배했었는데, 그 당시 무슬림 공격에 피해를 입을까봐
벽에 숨겨두었던 성모마리아 상이 300년뒤에 우연히 발견되면서 알무데나 대성당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알무데나 대성당 종탑


알무데나 대성당 돔


알무데나 대성당 기둥


요한 바오로 2세 동상









알무데나 대성당은 마드리드의 수호 성모 알무데나를 기리는 성당이라고 한다.
예전에 무슬림들이 스페인의 일부를 지배했었는데, 그 당시 무슬림 공격에 피해를 입을까봐
벽에 숨겨두었던 성모마리아 상이 300년뒤에 우연히 발견되면서 알무데나 대성당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여기 보이는 성모마리아 상이 바로 그 성모상




파이프오르간


스테인드 글래


천장에 그려진 그림도 다른 대성당과는 다르다. 마치 별이 떨어지는 것같은 느낌의 그림






알무데나 성모대성당 관람을 마치고 마요르 광장(Plaza Mayor), 솔(SOL), 시벨레스(Cibeles), 콜론 광장을 둘러본다.



마요르 광장(Plaza Mayor)

이 거대한 광장은 축하 행사, 종교 의식, 처형 등을 거행해 온 풍요로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


마요르 광장(Plaza Mayor) 입구


마드리드의 마요르 광장은 관광객들과 지역 주민들이 다 같이 즐겨 찾는 카페, 바, 상점들이 들어선 분주한 광장이다.
매주 주말이면 이 광장에서는 야외 골동품 시장이 열리며,
이곳은 매년 마드리드 시의 수호성인 성 이시드로 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마요르 광장 (Plaza Mayor) 전경


한때는 시장터였던 마요르 광장은 16세기에 바로크 양식의 광장으로 탈바꿈했고,
가로 90m에 세로 109m의 넓이로 유럽에서 가장 큰 공공광장 중 하나이다.


광장을 세우자는 계획은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1561년 마드리드의 왕궁으로 옮겨온 후 1580년에 처음 시작되었고,
건축가 후안 데 에레라가 이를 실행했다.


데 에레라는 1590년대에 광장에 들어선 첫 건물인 두 개의 탑이 있는

'카사 데 라 파나데리아'(예전에는 제빵사 길드가 있던 곳)를 지었다.


현재 이 건물을 치장하고 있는 우화적인 벽화는 1992년에 그려진 것이다.
데 에레라의 제자인 후안 고메스 데 모라가 펠리페 3세 시대인 1619년에 광장을 완성했다.


마요르 광장 (Plaza Mayor)


마요르 광장에서는 투우, 가면무도회, 왕실 결혼식, 대관식 등의 행사가 거행되어 왔다.
그러나 이곳이 항상 단순한 사교적 중심지였던 것은 아니다.


이 광장은 아빌라의 테레사, 이시도르,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등의 성인이 시성 받은 장소이다.
또한 17세기 스페인 종교 제판이 성행했을 때 이단자 등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이 공개적으로 처형당하거나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 보였던 장소이기도 하다.

마요르 광장 펠리페 3세의 청동 기마상


1616년에 제작된 펠리페 3세의 청동 기마상은 1848년에 광장으로 옮겨와 그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1631년, 1670년, 1790년 세 차례에 걸친 화재가 광장에 피해를 입혔다.


마지막 화재가 일어난 이후 광장을 재건축하는 작업은 건축가 후안 데 비야누에바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주변의 건물에 층을 더 지어 현재의 5층 높이로 만들었고 아치형 포티코 여러 개를 설치했다.
이 재건축 작업은 그의 사후에도 계속되어 1854년에 마무리되었다.



솔(SOL) 광장


푸에르타 델 솔(Puerta del Sol)은 마드리드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사랑받는 곳이다.
푸에르타 델 솔은 ‘태양의 문’이란 뜻인데, 흔히 솔 광장이라고 불린다.


약속 장소로 많이 이용되어 항상 사람들이 많다.
푸에르타 델 솔의 서쪽에는 마드리드 왕궁이, 동쪽에는 프라도 국립미술관이 도보로 이동 가능한 거리 내에 위치한다.


솔(SOL) 광장의 상징 곰 동상
마드리드 지역의 옛 이름은 우르사리아(Ursaria)였고 그 의미는 '곰의 땅'이라는 뜻이어서 곰 동상이 마드리드의 상징이 되고 있다.

소귀나무 열매(산딸기)를 먹는 곰 동상
곰의 왼쪽 발꿈치를 만지면 소원이 다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 부분만 칠이 다 벗겨져 있다.


솔(SOL) 광장 곰 동상 근처 이 자리가 버스킹을 하기에 명당 자리인가 보다.


 카를로스 3세 동상


카를로스 3세는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기 이전에 이미 파르마와 피아첸차의 공작으로,

이후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으로 통치한 바 있다.


그는 이러한 이탈리아 통치 경험과 기술을 바탕으로 1759년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면서

계몽전제군주로서 일련의 개혁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는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귀족층보다

중산층과 계몽 지식인들을 통하여 이러한 정책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부동주의에 갇혀 있던 스페인 민중은 1766년 에스킬라체 난을 통하여 반발하였고,
이후 카를로스 3세는 1767년 예수회의 추방이나 파블로 데 올라비데의 프로젝트와 같은

보다 분명하고 단호한 조치를 통하여 절대왕권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선왕의 중립정책을 포기하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면서 영국의 팽창주의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특히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해서는 행정 개편과 세 번째 부왕령의 설치를 통해

효율적인 통치와 외부세력으로부터의 보호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카를로스 3세 동상 윗부분


카를로스 3세는 펠리페 5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파르네제의 이사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수줍은 성격에 책임감이 강했으며 이복형들에 밀려 스페인 왕위계승은 요원해 보였다.


모친 이사벨은 이탈리아 영토들을 되찾아 자신의 아들들에게 주길 원했고, 실제로 1724년 비인조약을 성사시켜
카를로스가 안토니오 파르네제의 사후 파르마와 피아첸차의 공작이 되는 데 기여했다.


1724년 펠리페 5세의 장남인 루이스 1세가 스페인 왕으로 즉위한 지 7개월 만에 사망하자

이사벨은 왕세자로 있던 페르난도 대신 남편 펠리페 5세가 재차 통치하도록 종용하였다.


이는 노쇠해진 왕 대신 자신이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서였고,
아울러 왕세자의 건강이 이상 징후를 보일 때마다 자신의 아들 카를로스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다.

 
이사벨 왕비는 1733년 프랑스와 첫 번째 왕가협정을 체결하여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차지할 기회를 엿보았고,
실제로 다음 해 카를로스는 나폴리를 공격하여 부친의 이름으로 이곳을 통치하였다.


이후 비인평화조약을 통하여 카를로스는 파르마와 피아첸차에 대한 권한을 포기하는 대신

나폴리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카를로스 3세 초상화> 안톤 라파엘 멩스(1728–1779). 캔버스에 유화. 1765년경 제작. 151.1cm×109cm. 마드리드 프라다 미술관


이복형인 페르난도 6세가 자손이 없이 1759년 사망하자 카를로스는 앞서 체결된 1748년 아헨 조약에 따라서

스페인 왕위계승자가 되었고, 카를로스 3세의 이름으로 스페인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앞서 나폴리 왕국의 왕으로서 감행한 여러 개혁들은 그가 스페인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 자양분이 되었으며,
카를로스 3세가 모든 영역에서 계몽군주로서의 역량을 발휘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카를로스 3세는 프랑스 혁명을 통해 전개될 유럽의 대 격변을 보지 못하고

1788년 12월 14일 마드리드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죽기 전 뒤를 이을 카를로스 4세의 통치를 염려하여

1777년부터 자신의 대신으로 있었던 플로리다블랑카를 곁에 두도록 당부할 정도였다.


그는 스페인의 진정한 계몽전제군주로서 동시대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2세나

오스트리아의 요세프 2세와 비견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개혁적인 조치들은 스페인의 전통주의와 부동주의에 부딪혀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후대에 난항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오벨리스크 기념비
시벨레스 광장으로 가던 중, 오벨리스크 형태의 기념비 있다.


시벨레스(Cibeles) 분수


분수 중앙에 대리석으로 만들어지고 수사자 두 마리라 끄는 사륜마차를 타고 있는 여인의 조각이 있다.
풍요와 다산의 여신 시벨레스의 형상이며 광장의 명칭도 이 여신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조각작품은 18세기에 제작되었고 스페인 신고전주의 걸작품으로 꼽힌다.

시벨레스 궁전


시벨레스궁(스페인어: Palacio de Cibeles)은 마드리드 중앙우체국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문화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다.
원래는 코무니카시오네스궁(스페인어: Palacio de Comunicaciones)이라 했다.


알칼라 문


시벨레스 광장 맞은편에 있다. 1778년에 카를로스 3세의 명으로 궁정 건축가 사바티니가 건축했다.
문이 위치한 곳은 19세기 말까지 마드리드의 동쪽 경계가 되었는데,
아라곤에서 이 문을 통해 마드리드로 오는 상인들에게 마드리드가 얼마나 중요한 도시인지 보여주기 위해 세웠다.


문에는 5개 통로가 있는데, 중앙의 3개는 아치 형태이다.
양쪽 끝 통로 상단에는 장식이 붙어 있다. 알칼라문 주변을 에스파냐 독립을 기념해 독립광장이라고 한다.

콜론광장 콜럼버스 기념탑


콜론 광장에는 거대한 콜럼버스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거대하면서 높은 기념탑 꼭대기에는 콜럼버스가 서 있다.
콜럼버스의 스페인어 이름이 콜론이라고 한다.


콜럼버스, 하면 아무래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사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인도를 찾아 떠났지만 그가 찾아낸 건 거대한 아메리카 대륙이었던 것. 그는 죽을 때까지 그곳을 인도라고 믿었다던가.


그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덕분에 그 땅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이들의 운명은 바뀌었다.
엄청난 재앙이 그들에게 닥쳐왔던 것이다.

콜럼버스 기념탑 윗부분


1492년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아 떠난 해다. 이태리 제노바에서 태어난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는 확신을 가졌다.
대서양을 지나서 인도로 가고자 했던 그는 인도에서 엄청난 황금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배를 타고 신대륙을 찾아 떠나고 싶었던 그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물주였다.

포르투갈 국왕을 만나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자 그는 스페인으로 갔다.


이사벨 여왕을 만나 지원을 요청했고, 여왕은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1492년 8월 3일, 꿈에도 그리던 항해를 떠나게 된다.
그는 자신이 인도를 찾아내서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항해에 성공했을 경우 우선 세습귀족 자격과 해군제독의 계급

그리고 발견하는 모든 땅의 총독 겸 최고행정관의 직함을 요구했다.


경제적으로는, 새로운 땅에서 얻는 수입의 10분의 1과 무역거래에 8분의 1 지분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다.
더 나아가 이 모든 자격과 권리가 후손들에게 세습되어야 한다고 못 박았다.

 

꿈에도 그리던 신대륙을 찾아낸 콜럼버스는 이후 3차례 더 신대륙을 찾아 나섰고 성공을 거뒀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고, 그곳에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년은 불행했다고 한다.
그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이사벨 여왕이 죽자 더 이상 그를 받쳐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왕의 후광이 사라진 그는 54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콜럼버스 기념탑 아랫부분


예전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한 채 쓸쓸하게 죽어갔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요구했던 ‘세습’ 또한 이뤄지지 않았다. 그의 무덤은 세비야에 있는 까떼드랄에 있다.


외롭고 쓸쓸하게 죽어갔다고 하더라도 그는 죽은 뒤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의 이름은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고, 스페인 곳곳에 그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으며, 그의 이름이 들어간 광장도 생겨났다.

콜론 타워(Torres de Colón)


콜론 광장에서 그의 이름을 기리는 건물은 또 있다. 쌍둥이 빌딩인 콜론 타워(Torres de Colón).
스페인 건축가 안또니오 라멜라(Antonio Lamela)가 설계를 했다는 이 건물은

1968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976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높이가 102m인 이 빌딩들은 크기와 모양이 똑같은데, 위에서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다.
두 빌딩을 연결한 구조물의 모양이 플러그와 똑같아 스페인 사람들은 '엥추페(El Enchufe)'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스페인 국립도서관


콜론 광장에서 길을 건너면 스페인 국립도서관이 있다. 앞에서 보면 도서관이고 뒤로 돌아가면 국립고고학박물관인 건물이다.
국립도서관과 국립고고학박물관 안에는 일반 관광객이 들어가지 못한다.

스페인 국립도서관


고풍서린 건물에 여섯 사람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스페인 국왕 펠리뻬 5세가 1712년에 세운 왕궁도서관이 훗날 소유권이

왕실에서 내각으로 넘어가면서 국립도서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국립도서관 앞에 있는 스페인 국왕 알폰소 상


국립도서관 앞에 있는 세르반테스 상


이사벨 여왕 동상


도로 곁에는 이사벨 여왕이 말을 탄 채 십자가를 높이 치켜들고 있는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동상 옆에 설치된 두 개의 분수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스페인의 역사에서 이사벨 여왕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인물이다.



참조 : https://blog.naver.com/wnfusmlekd/221319063123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79705&cid=40942&categoryId=31593

https://jbhm1004.blog.me/220924476023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330694&cid=56790&categoryId=56799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79706&cid=40942&categoryId=40251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50491&cid=43081&categoryId=43081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65327&cid=42864&categoryId=50859
http://blog.ohmynews.com/olives/499019





마드리드 왕궁 (Palacio Real de Madrid)


마드리드 왕궁은 스페인 건축물의 절정이라고 평가받는 마드리의 대표적인 명소로 그 화려함과 규모에 놀랄 만하다.
18세기에 지어진 왕궁은 역사적으로도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다.


9세기 이슬람의 알카사르(요새)가 있던 자리에 세워져 펠리페 2세가 마드리드로 수도를 옮기면서 왕궁으로 사용했으나,
1734년 크리스마스 때 화재로 미술품과 함께 소실되고 말았다.


이후 루이 14세의 손자였던 펠리페 5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어린 시절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 이탈리아 건축가 유바라에게

베르사유 궁전처럼 지으라고 했지만 착공 전에 사망하는 등 다사다난한 역사를 거쳤다.


이후 그의 제자 사케티가 프란시스코 데 사바티니, 벤투라 로드리케스 등과 함께

1764년 왕궁을 완공하여 현재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왕궁의 주된 건축 양식은 고전주의 바로크 양식이다.
현재 국왕 일가는 교외의 사르수엘라 궁에 거처하고 있기 때문에 공식 행사가 있을 때 외에는 일반에게 공개된다.

사방 150m의 왕궁 내부에는 3,000여 개의 방이 있는데 그중 50개의 방을 관람할 수 있다.


사케티가 설계한 왕관의 방은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을 모방해 매우 화려하다.

베네치아 화가 티에폴로가 그린 천장화도 볼 수 있다.


가스파리니 방은 마테오 가스파리니가 설계한 로코코 양식의 드레스룸이다.
도자기 방은 벽면이 도자기로 장식되어 있고, 1880년에 지은 연회장은 알폰소 12세가 왕비를 위해 지었는데

164명이 식사할 수 있는 유럽 최대의 연회장이다.


천장 프레스코화는 콜럼버스가 가톨릭 부부왕에게 신대륙을 바치는 모습이다.
2,500여 개에 이르는 태피스트리와 고야, 보슈, 벨라스케스 등 거장들의 회화,

화려함의 극치인 금은 세공품, 샹들리에 등 볼거리가 매우 풍성하다.


마드리드 왕궁의 전면


원래 9세기에 세워진 무슬림의 요새가 있던 자리로, 무슬림이 물러난 후에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요새를 궁전으로 사용했으나 1734년 크리스마스 밤에 대형 화재로 소실되었다.


프랑스 부르봉 왕조 출신으로 베르사유 궁전에서 태어나고 자란 펠리페 5세가

이 자리에 베르사유 궁전과 비슷한 왕궁을 건립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탈리아 건축가였던 필리포 유바라(Filippo Juvara)가 설계를 끝내고 착공 전 사망하자

그의 제자였던 사게티가 승계받아 사바티니, 로드리게스와 함께 1764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완공하였다.


스페인 왕의 공식 거처이지만 현재는 공식 행사에만 사용되고 실제 거주하지는 않는다.
사방 150m의 왕궁 안에는 2,800개의 방이 있는데 그중 50개의 방만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특히 베르사유 궁전에서 가장 유명한 거울의 방을 모방해서 만든 ‘옥좌의 방’,

건축가 유바라가 설계한 로코코 양식의 걸작으로 정교함과 화려함이 더해져 호화스러움의 극치를 보여 주는 ‘가스파리니 방’,

벽 전체가 황금 비단으로 꾸며져 있는 ‘황금의 방’, 145명이 한꺼번에 앉아 식사를 할 수 있는 대형 식탁이 자리한 ‘연회장’에서

스페인의 화려했던 궁중 생활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왕궁 안의 아르메리아 광장에 있는 약물 박물관도 왕궁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코스이다.

마드리드 왕궁 전면
마드리드 왕궁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문을 여는데 3천여 개의 방중에서 50여 개만 개방하고 있다.


마드리드 왕궁


궁전 아래의 서쪽 편에는 정원이 있다. 스페인어로는 "캄포 델 모로"라고 하는데

이는 당시 이슬람 군주가 기독교 세력으로부터 다시 마드리드를 탈환하고자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남쪽에는 성당이 있고 북쪽으로는 사바티니 정원이 위치한다. 이 정원은 정원 건축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펠리페 왕자와 레티시아 오르티스 왕세자비 결혼식이 2004년 5월 22일 궁전의 중앙 광장에서 치러졌다.

펠리페 4세(Felipe IV)의 동상


광장 중앙에는 펠리페 4세(Felipe IV)의 동상이 있다. 마요르 광장 중앙에 있는 펠리페 3세의 아들이다.
그런데 펠리페 3세는 정치를 등한시하고 사치를 일삼는등 스페인의 전성기를 끝내기 시작했고

펠리페 4세는 30년간의 전쟁에서 패하는 등 그리 존경 받을만한 인물들이 아님에도 이들이 마드리드의 중심지에 있는 것은

이들도 스페인 역사의 분명한 일부이기 때문일 것이다.


기마상은 17세기 이탈리아 조각가 피에트로 타카(Pietro Tacca)의 작품.
기마상 주변으로는 네 귀퉁이에 청동 사자상이 있고 우화를 기반으로한 조각들과 분수가 있는데 19세기에 추가된 것이라 한다.



마드리드 왕궁 옆면


매월 첫째 수요일 정오에는 왕궁의 위병 교대식이 있다.

마드리드 왕궁 조감도


마드리드 왕궁 후면



마드리드 왕궁 후면 상단


카를로스 3세 조각상

1층 통로에 카를로스 3세의 조각상이 있다.


제우스 조각상

우측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르면 제우스 조각상이 있다.


계단을 올라서 바라본 천정


계단 위 천장에 그려진 로코코 양식의 천장화가 눈길을 끈다. 
18세기 이탈리아 출신의 화가인 코라도 지아갱토(Corrado Giaquinto)의 프레스코화이다.

계단 위 프레스코화 아래쪽으로는 자연 채광이 들어오는 창이 배치되어 있다.


계단 위에서 바라본 마드리드 왕궁 내부의 모습


제우스 조각상 아래에 걸려 있는 스페인 국장은 스페인 왕을 상징하는 왕관 아래로 15세기 스페인 통일 이전의 다섯 왕국인 
카스티야 왕국, 레온 왕국, 아라곤 왕국, 나바라 왕국, 그라나다 왕국을 의미한다고 한다.

여왕의 거실 천장화


18세기 이탈리아 출신 화가인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Giovanni Battista Tiepolo)의 그림으로
비너스라고도 불리는 아프로디테와 로마의 시조라 불리는 그의 아들 아이네이아스(Aeneas)의 이야기를 담은 것.

태피스트리(Tapestry)


이 태피스트리는 성경 사도행전 13:6~12의 이야기를 그린 것으로 중간에 새겨있는
"L. SERGIVS PAVLIVS ASIAE PROCOS: CHRISTIANAM FIDEM AMPLECTITVR. SAVLI PREDICATIONE"

라는 라틴어는 성경 사도행전 13:6~12에 등장하는 서기오 바울이 믿음을 갖게 된것을 말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화가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da Urbino)의 작품이다.

유럽의 왕궁과 귀족이 사는 집에는 어김 없이 등장하는 태피스트리


태피스트리(Tapestry)는 염색된 실로 짠 그림으로 인한 장식 효과 뿐만 아니라

방한, 방풍, 방음, 햇빛 가림 등의 실질적인 효과를 발휘했다고도 한다.

웅장한 기둥과 벽을 장식한 태피스트리


내부 장식

마드리드 왕궁은 벨라스케스를 비롯해 티에폴로, 고야 등 당대 최고 화가들이 궁전의 보수 작업에 착수하였다.



내부 장식


내부 장식


스페인 왕가가 수집해온 역사적인 작품들이 궁전에 전시되어 있다.
13세기 이전의 무기를 비롯하여 포르셀린, 가구 등도 소장품에 속한다.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보틴 레스토랑은 1725년에 오픈하여 지금까지 계속 영업을 해온 곳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레스토랑이다.
기네스북에도 공식적으로 등재되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프레데리 포사이드 등 마드리드를 배경으로 하는 유명작가의 소설에도 자주 등장한다.

헤밍웨이는 실제로 자주 왔다고 한다.


스페인 마드리드를 대표하는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가 어렸을 때 이곳에서 접시닦이 아르바이트를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여기에서 많이 먹는 음식은 당연히 장작화덕에 구운 코치니요(애저구이)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에서 점심식사 기념으로 인증샷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레스토랑이라고 기네스북 등재되었다는 인증서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의 역사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의 역사를 간단하게 정리한 듯.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요리 방법인 듯.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내부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내부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내부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내부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내부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내부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주인이 직접 요리하고 서빙도 한다.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주인이 직접 요리하고 서빙도 한다.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주인이 직접 요리하고 서빙도 한다.


Baby pig 요리 하몽. 돼지다리를 몇 개월에서 몇 년간 말리면 하몽이 만들어진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출입구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요리실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요리실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요리실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테이블. 식전 빵


구운샐러드와 새끼통돼지구이와 감자 요리


왼쪽 Baby lamb과 오른쪽 Baby pig 요리.


양고기는 소고기보다 엷으나 돼지고기보다 진한 선홍색이다.
근섬유는 가늘고 조직이 약하기 때문에 소화가 잘 되고 특유의 향이 있다.


성숙한 양고기는 향이 강하며, 이 특유의 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조리할 때, 민트(박하)나 로즈메리를 많이 이용한다.
생후 1년 미만인 어린 양의 고기는 새끼양고기(lamb)라고 하며

생후 12 ~ 20 개월의 고기는 이얼링머턴(yearling mutton)이라고 한다.

Baby pig 요리


Black sausage from Burgo.

순대같이 생긴 이 음식은 블랙 소시지이다.




참조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87XX39500416
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B%93%9C%EB%A6%AC%EB%93%9C_%EC%99%95%EA%B6%81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64655&cid=42864&categoryId=50859
http://yaraba.tistory.com/1041
http://yaraba.tistory.com/1042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ksrmfkal&logNo=220100106861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601099&cid=48180&categoryId=48246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v5photo&logNo=221100483697

https://blog.naver.com/planet_tour/220004955504




렘브란트 하르먼스 판 레인 〈아르테미시아〉 캔버스에 유채 / 142×152cm / 1634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16b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는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한 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기를 구가한 화가였다.


바로크 시대의 화가답게 그는 카라바조를 연상시키는 명암법을 주로 썼으나

훨씬 부드럽고 서정적인 빛을 구사해 다소 슬프고도 애잔한 분위기를 주도한다.


이 그림은 샤스키아와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그녀를 모델로 그린 그림이다.

그림 속 여주인공은 기원전 4세기경 오늘날 터키 보드룸에 있던

카리아의 여왕 아르테미시아(ArtemisiaⅡ ?~BC 350?)이다.


그녀가 남편을 위해 지은 마우솔로스의 묘 ‘마우솔레움(Mausoleum)’은

그 거대함과 정교함으로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힌다.


아르테미시아에 관해서는 죽은 남편을 잊지 못해

그의 유해를 태운 뒤 남은 재를 잔에 넣어 마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따라서 아르테미시아는 강한 부부애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고혹적인 빛을 듬뿍 받은 채 아르테미시아가 앉아 있고, 그 앞에는 여종이 잔을 들고 앉아 있다.


렘브란트는 여종의 등에 닿는 빛뿐 아니라,

여왕을 비췄다가 반사되어 다시 여종의 얼굴을 밝히는 빛까지 그려냈다.


화면 왼쪽은 짙은 어둠이지만 여분의 빛으로 어렴풋하게 형체를 드러낸

또 다른 여종의 모습이 보인다.


레이덴 출신의 렘브란트는 초상화로 명성을 얻었고,

엄청난 지참금의 소유자였던 샤스키아와 결혼에 성공하면서 인생의 절정을 달리게 된다.

그러나 샤스키아가 죽은 뒤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과감한 붓질에 물감 덩어리를 그대로 노출시키는 대담한 그의 화풍은
매끈한 채색과 명료하고 단정한 고전적인 취향으로 돌아선 네덜란드 사회에 더 이상 먹혀들지 않게 된 것이다.


그의 몰락은 비단 자신의 진보적인 그림 세계에 대한 몰이해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샤스키아가 죽자 그는 하녀로 있던 헤이르테 디르크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렘브란트가 자신을 배신하고 또 다른 하녀 헨드리케 스토펠트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자 일종의 혼인빙자 간음죄로 고발, 그를 법정에 세움으로써

엄격하고 도덕적인 생활을 강조하던 네덜란드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렘브란트는 이후 헨드리케 스토펠트와 동거하면서 아이까지 낳았지만,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아 또 세간의 입방아에 올랐다.


욕을 먹으면서도 그녀를 호적에 올리지 않은 것은 아내 샤스키아가 남편이 다른 여자와 결혼할 경우
남겨진 유산을 한 푼도 사용하지 못하게 막아놓았기 때문이었다.

루이스 멜렌데스 〈정물화〉 캔버스에 유채 / 42×62cm / 1772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2층 87실


루이스 멜렌데스(Luis Egidio Melendez, 1716~1780)는 화가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 1752년에 정식으로 출범한
산페르난도 왕립미술아카데미의 전신 격인 곳에서 공부했고 상을 탄 이력도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회원들 간의 불화로 인해 부자가 모두 아카데미에서 제명을 당하자 적당한 후원자를 구할 수 없게 되었다.
문제 많은 집 아들이라는 식의 낙인 때문에 왕실 화가로의 입성 역시 좌절한 그는 이탈리아 등지를 전전하다 마드리드로 돌아왔다.


재력 있는 후원자를 구하지 못한 많은 화가들이 그러하듯

멜렌데스는 주로 정물화를 선주문 없이 그려 직접 판매해가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신양명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멜렌데스는 자신이 그린 그림 몇 점을
훗날 카를로스 4세로 왕위에 등극하는 왕세자 부부에게 보내 인정받으면서 그림 주문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왕세자 부부가 멜렌데스의 그림을 걸어두려고 했던 곳이 하필이면 왕립아카데미 건물 2층이어서
결국 전시되지 못하고 있다가, 훗날 아란후에스 궁정으로 옮겨져 소장되었다.


이는 당시 스페인 사회가 심지어 미술계마저도 실력보다 인맥과 처세술에 좌지우지되는 상황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검은 배경, 명료한 선 그리고 사진을 방불케 하는 사실적인 묘사는 산체스 코탄이나 수르바란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의 그림 속 대상들의 표면 처리가 너무나도 뛰어나 눈으로 보는 그림이 아니라
거의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루이스 멜렌데스 〈정물화〉 캔버스에 유채 / 49×37cm / 1770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2층 87실


물고기를 뜻하는 그리스어 ‘이크티스(Ichthys)’는 ‘Iesous Christos Theous Yios Soter’
즉 ‘구세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글자를 딴 말과 일치한다.


기독교 박해시절, 신자들은 물고기 그림으로 자신의 종교를 암호처럼 드러내곤 하였다.
따라서 그의 정물화 속 물고기들은 바로 신앙의 고백이라 설명할 수 있으며,
빵이 놓여 있는 식탁은 ‘빵과 포도주’로 대변되는 미사 의식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멜렌데스의 작품은 이런 설명보다는 그저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사실감으로,
일상에서 무심하게 보아오던 것들이 그림으로 그려졌을 때 찬란하게 회복하는

‘사물 그 자체의 존엄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라파엘 멩스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 152×110cm / 1765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20실


라파엘 멩스(Anton Raphael Mengs, 1728~1779)는 독일에서 태어났다.
화가인 아버지로부터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로마에 머물면서 고대 로마와 그리스 문화를 동경하던 당대의 유행을 좇아

엄격한 데생과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고전주의적 화풍을 전개했다.


드레스덴의 궁정화가로도 활동했던 그는 주로 초상화 작업을 했다.
그는 고전의 아름다움을 칭송한 미학자 요한 요아힘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 1717~1768)과

함께 고대 조각상을 연구하기도 했다.


빙켈만은 ‘근대의 그리스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였는데,

특히 고대 그리스의 미술을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이라 칭하며

모든 미술의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빙켈만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라파엘 멩스의 작품은 따라서 고대 조각상과도 같이
단단하고 완성미 높은 데생에 입각하여 차분하고도 고고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그 또한 빙켈만 못지않은 이론가로 《회화에서 미와 취미에 관한 성찰》(1762)이라는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멩스는 이탈리아 문화에 높은 취향과 관심을 가지고 있던 카를로스 3세에게 발탁되어 스페인 궁정에 입성하게 된다.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의 초상〉 속 그녀는 왕세자 시절의 카를로스 4세와 결혼한 직후의 모습이다.
고야가 그린 합죽이 할머니와는 전혀 다르다.


열네 살 어린 나이에 결혼한 그녀는 주로 아란후에스에 거주하였는데,
그림 속 배경도 그녀가 자주 거닐던 그곳 정원일 것으로 짐작된다.


멩스는 이런 저런 잡다한 배경을 가능한 한 생략하고 단순화했고,

파스텔 색조에 꼼꼼한 세부 묘사, 선명한 윤곽선으로 인물의 품위를 드높였다.

라파엘 멩스 〈왕세자 시절의 카를로스 4세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 152×110cm / 1765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20실


〈왕세자 시절의 카를로스 4세의 초상〉 속 카를로스 4세 또한 아직 젊어서인지 제법 훈훈한 미남이다.
멩스의 그림 속 그들은 30년 뒤 고야의 그림 속에서 보듯이 타락하고 다소 지쳤으며,
음모와 배신의 희생양이 되어 자신이 고용한 화가 고야에게조차 조롱거리가 되지만,
그조차도 깨닫지 못한 바보 아닌 바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49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50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54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체포〉 캔버스에 유채 / 344×253cm / 1620~1621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16b실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1599~1641)는 루벤스의 수제자로 안트베르펜에 있던 공방에서 그림을 익혔다.
그는 루벤스가 바쁠 때 스승을 대신하여 공방 일을 건사할 만큼 신임이 두터웠고, 그만큼 실력 또한 출중했다.


루벤스의 추천을 입고, 이탈리아 여행을 하는 동안 재력과 권력을 겸비한 후원자들을 만나면서
초상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된 그는 역시 루벤스의 도움으로 영국으로 건너가 찰스 1세의 궁정화가로 활동했다.


프라도 미술관에 걸려 있는 그의 작품들은 초기작으로,
말년의 엄격하고 기품 있는 단정하고 정적인 선과 색을 주로 사용한 그림들과 달리 루벤스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그리스도의 체포〉는 겟세마네에 올랐다가 유다를 대동한 로마 병사들에게 예수가 체포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암흑을 밝히는 횃불 하나가 그림 왼쪽 중앙에 그려져 있다.
이 작은 빛에 노출된 그림 속 인물들의 꿈틀거림은 단번에 루벤스를 연상시킨다.

〈그리스도를 모욕함〉 캔버스에 유채 / 223×196cm / 1618~1620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28실


〈그리스도를 모욕함〉에서는 예수가 빌라도의 병사들에게 당하는 모욕을 담고 있다.
성서에 적힌대로 “가시로 왕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린”(《마테오의 복음서》 27장 29절) 예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벤스의 그림 속 남자들처럼 탄탄하고 다부지고 늠름하기까지 한,

소위 아이돌 스타 같은 몸을 자랑한다.

<구리뱀> 캔버스에 유채 / 205×235cm / 1618~1620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16b실


〈구리뱀〉 속 다부진 체격의 남자들과 흐트러진 금발의 여인,

과장된 자세와 박진감 넘치는 구도 또한 스승을 닮아 있다.


그림은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주제로 한다.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인들이 힘겨운 여정에 지쳐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자

노한 하나님은 독이 있는 뱀을 풀어 많은 사람들을 죽게 했다.


이에 모세가 간절히 기도하자 하나님은 “불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고 뱀에게 물린 사람마다

그것을 쳐다보게 하여라. 그러면 죽지 않으리라”(8절)라고 말했다.


모세는 구리로 뱀을 만들어 T자형 기둥에 달아, 이들이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했다.

구약과 신약의 예표론에 의하면, T자형 십자가에 매달린 구리뱀은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예시한다.


이 그림들은 모두 안토니 반 다이크가 스무살 남짓 때 그린 것으로,
당시 마흔을 넘겨 절정에 달한 스승 루벤스의 관록을 그 어린 나이에 이미 모두 섭렵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48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파리스의 심판>. 패널에 유채. 199×379cm. 1639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29실


페테르 파울 루벤스는 플랑드르 바로크 최고의 반열에 오르는 화가였다.
카라바조의 바로크가 극적인 명암의 대비를 통해 관람자의 심리를 압박한다면 루벤스는 단연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선과

다채로운 색으로 동영상의 한 장면 같이 살아 꿈틀대는 느낌을 주는 ‘동적인 바로크’의 대가라 할 수 있다.


루벤스는 훤칠한 외모와 언변, 그리고 그 언변을 든든하게 받쳐줄 방대한 지식의 소유자로,
심지어 다섯 개 언어를 능통하게 구사할 수 있었고, 사교적인 성품까지 겸해 합스부르크 왕가의 외교관 노릇까지 했다.


새로 지은 부엔레티로 궁을 장식하기 위해 펠리페 4세는 플랑드르와 이탈리아 등으로부터 다량의 작품을 주문하였다.
루벤스의 경우는 거의 100여 점이 넘는 작품을 제작하기로 계약되었는데, 〈파리스의 심판〉도 그중 하나다.


그림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자신 앞에서 한껏 미모를 과시하는 세 여신을 심사하는 장면이다.
올림포스 신들의 연회에 정식으로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은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라는 글자가 새겨진 사과를 신들의 식탁에 던졌다.


하지만 누구를 뽑아도 뒤끝이 좋지 않을 것을 염려한 신들은 그 사과를 인간 세상으로 던져버렸다.
신들의 분란이 인간 세계의 분란으로 이어진 것을 그림 속 파리스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그의 뒤에는 뱀이 꼬여 있는 지팡이를 늘 들고 다니는 머큐리(헤르메스)가 서 있다.

물망에 오른 세 여신 중 가장 왼쪽은 미네르바이다.


곁에 있는 방패를 통해 전쟁의 여신인 그녀를 식별할 수 있다.
중앙의 여신은 화살통을 맨 아들 큐피드를 대동하고 있어 비너스임을 알 수 있다.


화려한 모피 옷을 걸친 오른쪽 여신은 주피터르의 아내 주노이다.
유난히 광채가 나는 비너스의 머리에 아기 요정이 장미가 달린 화관을 씌우려는 모습으로 보아,
사과는 사랑의 여신 비너스에게로 돌아갈 듯하다.


장미는 종교화에서는 주로 마리아를 상징하지만, 신화에서는 비너스의 꽃으로 그려지곤 한다.
그녀는 자신에게 사과를 주면, 인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할 수 있게 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예쁜 여자’에 대한 집착은 파리스도 비켜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러나 비너스가 소개해준 여인은 하필이면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로, 유부녀였다.


이판사판, 파리스가 그녀를 데리고 야반도주를 감행하자 스파르타가

트로이에 전쟁을 선포해 그 기나긴 트로이 전쟁이 시작되었다.


여신들의 몸매는 살집이 강하게 느껴진다.
풍만한 여체는 루벤스 특유의 밝고 환한 빛을 타고 꿈틀대며 농밀한 관능을 자극한다.


〈사랑의 정원〉캔버스에 유채. 198×283cm. 1633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16b실


<사랑의 정원>은 바로 자신과 엘레나 푸르망의 재혼을 기념하여 그린 작품이지만

펠리페 4세가 특히나 좋아한 그림이라고 전해진다.


그림 속 어느 한 구석에서도 직선을 찾기가 쉽지 않다.
붓끝이 마치 춤이라도 추듯 꾸불꾸불하게 이어지면서 화사한 색과 함께 화면 곳곳을 누빈다.

이 역동성이 바로 루벤스의 힘이다.


다채로운 색과 반짝이는 빛이 가득한 아름다운 옷차림의 귀족 남녀들이

무리지어 한껏 흥에 겨워 있는 동안 화면 왼쪽에는 춤을 추는 두 남녀가 보인다.

바로 루벤스 자신과 엘레나 푸르망이다.


그림 속 젊은 귀족 여인은 죄다 얼굴이 비슷한데, 당시에 설마 ‘규격형 성형미인’이 존재하지는 않았을 테고,
루벤스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아내 엘레나 푸르망의 얼굴을 여러 각도로 그려놓은 것이 아닌가 싶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는 돌고래에 앉아 있는 여신상이 보인다.
여신상의 젖가슴은 분수가 되어 물을 흘려보내고 있다. 다산을 기원하는 장치이다.

<삼미신> 목판에 유채. 220.5×182cm. 1630~1635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29실


루벤스의 말기 작품 중의 하나로, 죽을 때까지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작품이기도 하다.
그림 속에는 아글라이아, 탈레이아, 유프로시네 등 세 명의 미의 여신이 등장하고 있으며,

풍만한 여성미가 극대화되어 표현되어 있다.


맨 왼쪽에 그려진 여인은 루벤스가 만년에 만난 두 번째 부인 헬레나 푸르망을 모델로 하여 그려졌다.

루벤스는 첫 아내와 사별한 뒤 나이 쉰을 넘어 자기보다

무려 서른일곱 살이나 어린 엘레나 푸르망과 재혼했다.


결혼 당시 그녀의 나이는 열여섯이었다.
아내들에 대한 루벤스의 애정이 각별했는지,

이 그림 속 왼쪽 여신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은 엘레나 푸르망을,
그리고 오른쪽은 전 부인 이사벨라 브란트를 모델로 했다.


부인들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다분한 만큼 루벤스는

이 작품을 누구에게도 팔지 않고 평생 간직했다고 한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와 (대)얀 브뤼헐과〈시각과 후각의 우의화〉 캔버스에 유채 / 175×263cm / 1620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16b실


<죽음의 승리>등을 그린 피터르 브뤼헐에게는 화가인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이 같은 장남은 구분하기 위해 (소)피터르 브뤼헐이라고 부른다.


둘째 아들은 (대)얀 브뤼헐이라고 부르는데, 그의 아들 역시 이름이 같아 (소)얀 브뤼헐로 표기하기 때문이다.
(대)얀 브뤼헐(Jan Bruegel de Oudere, 1568~1625)은 루벤스의 공방에서 작업하면서 서로 친분을 쌓아갔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그가 인간의 오감, 즉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등을 주제로 하여
루벤스와 공동 작업한 그림들의 일부가 걸려 있다.


이 그림들 속에 빼곡한 갖가지 사물들은 정물화의 거장인 (대)얀 브뤼헐이 그렸고, 인체 묘사 등은 루벤스가 맡았다.

오감과 관련한 그림들은 농업의 발달과 각종 무역으로 인해 풍요로워진 물질세계에 대한 일종의 예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많은 것들을 탐하는 기쁨은 에로틱한 쾌감에 가까웠기에,

이들 감각을 의인화한 여인은 주로 누드나 반쯤 벗은 몸으로 그려져 있다.


〈시각과 후각의 우의화〉는 말 그대로 눈과 코가 하는 일에 관한 그림이다.
탁자에 기대서서 푸토(putto, 미술 작품 속 날개 달린 귀여운 어린아이의 이미지)가 건네는

향기로운 꽃을 받아드는 여인은‘후각’의 의인화이다.


그와 달리 앉아서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은 ‘시각’이다.
그림 속 실내에는 환한 햇살이 들어온다.


이 빛과 더불어 실내에 가득한 그림은 모두 시각과 관련된 것이다.
그림 오른쪽의 사향고양이는 항문에서 냄새를 풍기는 동물이며,

그 앞의 강아지는 역시 냄새를 잘 맡는 동물로, 여러 꽃들과 함께 후각을 상징한다.

그림 속 그림들 중 오른쪽 귀퉁이에는 두 화가가 함께 작업한 〈성모자상〉이 보인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와 (대) 얀 브뤼헐 〈성모자상〉 패널에 유채 / 79×65cm / 1620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페테르 파울 루벤스와 (대) 얀 브뤼헐 〈청각〉 패널에 유채 / 64×109.5cm / 1618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16b실


〈청각〉 역시 그 감각이 의인화된 여인을 둘러싸고, ‘듣는 것’과 관련된 모든 것을 그려놓았다.
특히 이 그림은 17세기 플랑드르, 네덜란드 지역에서 연주되던 모든 악기들을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사료로도 쓰인다.


의자에 기대놓은 사냥총마저도 이 그림에서는 ‘탕!’ 하는 소리와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시계들 역시 ‘시간’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째깍째깍’이라는 직접적인 감각의 세계를 상징한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와 (대) 얀 브뤼헐〈촉각〉 패널에 유채 / 65×110cm / 1618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대)얀 브뤼헐이 묘사한 갖가지 정물들은 그 세부 묘사가 워낙 뛰어나

이미 그림 그 자체로 우리의 오감 전체를 자극한다.


그의 그림들은 단지 보는 것에서 벗어나 손으로 만져질 듯하고, 소리가 들리는 것 같으며,
툭툭 씹힐 것 같은 식감을 자극하고 입 안 가득히 향기가 번질 듯 치밀하고 사실적이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와 (대) 얀 브뤼헐〈미각〉패널에 유채 / 64×108cm / 1618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페테르 파울 루벤스와 (대) 얀 브뤼헐〈후각〉패널에 유채 / 65×109cm / 1618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45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46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47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안토니오 데 페레다 <제노아의 구원> 캔버스에 유채 / 290×370cm / 1634~1635년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9a실


안토니오 데 페레다(Antonio de Pereda, 1611~1678)가 제작한 <제노아의 구원>은 스페인의 동맹국인 제노아가
사보이 공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포위된 것을 스페인의 명장 산타크루즈 후작이 구원하는 장면을 담았다.


호호백발로 그려진 제노아의 통수권자는 중앙에 갑옷을 입고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산타크루즈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그림 속 이들이 입고 있는 의상, 예컨대 모자 소매 장식 등은 워낙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티치아노를 연상시킨다.
화면 왼쪽의 창들은 그가 벨라스케스의 〈브레다의 항복>을 참고한 것으로 추정된다.

후안 바우티스타 마이노 <바히아 탈환> 캔버스에 유채 / 309×381cm / 1634~1635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9a실


〈바히아 탈환〉을 그린 후안 바우티스타 마이노(Fray Juan Bautista Maino, 1581~1649)는 엘 그레코의 제자로,
이탈리아 고전 바로크의 대가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i, 1560~1609)에게도 그림을 배웠다.


한때 도미니쿠스 수도회에 들어가면서 붓을 꺾었지만, 펠리페 3세의 명을 받고 궁정에 들어와

당시 왕자였던 펠리페 4세의 개인 그림 교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 시절 그는 궁정에서 열린 그림 경연대회에서 우승자로 벨라스케스를 선택하는 탁월한 안목을 자랑하기도 했는데,
이윽고 벨라스케스와 함께 부엔레티로 궁정의 방을 장식하게 된다.


그림은 스페인-포르투갈 연합군이 신대륙 브라질에서 네덜란드를 대파시킨 장면을 담고 있다.
오른쪽에는 네덜란드 군대의 장수가 초록에 노란 옷을 덧입은 스페인-포르투갈 연합군 총지도자

돈 파드리코 데 톨레도에게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돈 파드리코 데 톨레도가 가리키는 태피스트리에는 전쟁의 여신 미네르바로부터

승리의 월계관을 받아 쓰는 펠리페 4세의 모습이 보인다.


펠리페 4세의 곁에는 올리바레스 공작이 있다.

그림 왼쪽에는 바히아에 사는 포르투갈 여인이 쓰러진 병사를 치료해주고 있다.


후안 바우티스타 마이노는 살육이나 피비린내 나는 장면 대신 진지하고 침착한 표정의 여성들이
남성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아이들과 더불어 아군이건 적군이건 상관없이 고통받는 이들을 보살피는 모습을 그려 넣었다.
이른바 전쟁 속에 핀 자비의 꽃을 보는 듯하다

클라우디오 코에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승리>. 캔버스에 유채. 271×203cm. 1664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18a실


클라우디오 코에요(Claudio Coello, 1642~1693)는 카를로스 2세 때 활동한 궁정화가였다.
당대 화가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루벤스나 티치아노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벨라스케스처럼

사실주의적인 화풍을 펼쳤지만, 바로크 화가답게 웅대하고 환상적이며 동적인 구성이 가득한 화면을 펼쳐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승리>에서 성자의 근엄하고도 우아한 형상은 극도의 사실감을 과시하지만
하늘을 떠다니는 천사, 기이한 형태와 색으로 얼룩진 구름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


“마땅히 사랑해야 할 신을 사랑하는 자가 의인(義人)이고, 신을 미워하면서까지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악인(惡人)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성인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는 기독교 초기 시절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사상가로
중세 신학의 기틀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세계 3대 참회록의 하나로 자서전격인 신앙 고백서 <고백론>을 저술했다.

그림 속 아우구스티누스는 발치에 놓인 조각상을 무심한 듯 쳐다보고 있다.


고대 조각상들은 이른바 우상숭배를 암시하며, 그 곁에 악마의 상징이자 상상 속의 동물인 용이 그려져 있다.
너풀거리는 그의 하얀 옷은 구름과 뒤섞이며 푸른빛을 발하는데, 이는 주홍색 겉옷과 황금색 주교관의 색과 대비된다.

클라우디오 코에요 <성 루이 왕의 경배를 받는 성모자>. 캔버스에 유채. 229×249cm. 1665~1668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18a실


<성 루이 왕의 경배를 받는 성모자>는 십자군 전쟁에 두 번이나 참여했고,
역시나 전쟁 중 튀니지에 원정을 떠났다가 흑사병에 걸려 사망한

프랑스의 왕 성 루이 9세(Saint Louis, 1226~1270)를 그린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프랑스의 왕권을 물려받은 그는 열두 살에 왕위에 올라 카스티야 출신 어머니의 섭정에 의존했지만,
여러 개혁 정치를 통해 약한 자를 구제하는 데 앞장섰다.


아기 예수는 성모의 무릎에 앉아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자신의 외할머니 안나가 건네는 꽃을 받아들고 있다.
그림 하단 왼쪽에는 양을 이끌고 있는 세례 요한이 자신의 상징이기도 한 낙타 털옷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림 오른쪽에는 성 루이가 이들 가족에게 경배를 드리는 모습이 보인다.
그의 앞에는 홀과 왕관이 놓여 있다. 바로 자신의 신분을 상징하는 것이다.


드라마틱한 빛의 구성, 늘어진 커튼이나 호사스러움 등은

높은 경지에 오른 클라우디오 코에요의 바로크적 회화 기법을 반영한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42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44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괴물>. 1680년경 제작. 캔버스에 유채. 165cm×108cm / 프라도 미술관 1층 16a실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후안 카레뇨 데 미란다(Juan Carreno de Miranda, 1614~1685)는

화가인 아버지에게서 그림을 배웠고, 마드리드로 건너와 벨라스케스의 도움으로 왕실 화가가 되었다.


그 역시 알카사르궁 장식에 동원되기도 했으며 몇몇 종교화도 제작했지만,

무엇보다도 왕실 가족의 초상화로 이름을 높였다.

<괴물>. 캔버스에 유채. 165cm×107cm. 1680년경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16a실


<괴물>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이 두 그림은 에우헤니아 마르티네스 바예호(Eugenia Martinez Vallejo)라는

여자 아이의 초상화로 한 점은 누드로 연출되어 있고, 또 다른 한 점은 옷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들은 고야의 <옷 입은 마하>와 <옷 벗은 마하> 만큼이나 수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스페인을 비롯한 서구 옛 왕실에서는 가끔 신체적으로 기형인 이들을 기용해
왕실 아이들이 장난감이나 애완동물처럼 데리고 놀도록 했다.


그녀의 선천적인 기형에 대한 세인들의 호기심은 벗은 몸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졌을 것이고,
화가는 그러한 관음증적 욕구에 부응해 이처럼 잔인하고 비인격적인 초상화를 제작했다.

<마리아나 데 아우스트리아의 초상화>. 캔버스에 유채 / 211×125cm / 1670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16a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도 등장하는 마리아나 왕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3세와

스페인의 마리아 안나 사이에서 태어난 큰딸로, 펠리페 4세의 조카였다.


그녀는 펠리페 4세의 아들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와 결혼할 예정이었으나 왕자가 요절하자
예비 시아버지였던 펠리페 4세와 결혼한다. 펠리페 4세는 첫 아내 이사벨과 사별한 터였다.


마흔이 넘었던 펠리페 4세로서는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다른 나라의 이익과는 전혀 상관없는 혈통이어야 했기에
며느리로 삼을 뻔한, 심지어 조카인 겨우 열다섯 살의 그녀와 막장 드라마 같은 결혼을 추진했던 것이다.


왕은 전처 이사벨과의 사이에서도 제법 많은 자식을 두었지만 거의 요절했고,
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다섯 명의 자식 역시 그리 수명이 길지는 않았다.


겨우 살아남은 두 아이 중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 나오는 공주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하는 삼촌 레오폴트 1세와 결혼한 후 역시 요절했으며,

아들 카를로스 2세는 발달이 늦고 몹시 허약한 채로 왕위를 계승했다.


그림은 펠리페 4세가 사망한 후 병약한 아들을 대신해 섭정을 펼치는

마리아나 데 아우스트리아의 근엄하고도 강직한 모습을 담고 있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43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아누스 데이(하나님의 어린 양)〉 캔버스에 유채 / 37.3×62cm / 1635~1640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10a실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Francisco de Zurbaran, 1598~1664)은 17세기

스페인에서 가장 번성했던 곳인 세비야에서 도제 생활을 거친 뒤 그곳에서 주로 활동했다.


그의 작품은 주로 검은색에 가까운 어두운 배경에 정물과 인물들을 그려 넣어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인상을 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한 여운을 남긴다.


예수의 희생을 상징하는, 줄에 묶인 양을 그린 〈아누스 데이(하나님의 어린 양)〉는 연극 무대 같은 빛과,
극도로 자제된 색상, 모든 군더더기를 생략한 오직 ‘양 한 마리’만으로 겸손한 ‘신앙인의 자세 그 자체’를 설파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 화가인 성 루가〉 캔버스에 유채 / 105×84cm / 1650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10a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 화가인 성 루가〉는 흔히 화가였다고 전하는

《루가의 복음서》의 저자 루가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그리는 모습을 담고 있다.


수르바란은 대부분의 작품을 수도회를 위해서 제작했기에 주로 기도하거나 명상에 잠긴 수도사

혹은 성인들의 모습을 그리곤 해서 ‘수도사들의 화가’라는 별명을 얻었다.

〈성 베드로 놀라스코에게 나타난 성 베드로〉 캔버스에 유채 / 179×223cm / 1629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10a실


〈성 베드로 놀라스코에게 나타난 성 베드로〉는 초대 교황으로 훗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채 순교한
성 베드로의 모습을 그와 이름이 같은 또 다른 성인 베드로 놀라스코가 목격하고 놀라워 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마치 연극 무대의 스포트라이트 같은 빛이 순교자의 몸을 환히 밝힌다.
그 어떤 군더더기도 없이 빛과 어둠의 강력한 대비를 통한 절제와 명료함만으로

관람객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 이런 화풍은 역시 카라바조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수르바란은 카라바조의 명암법을 가장 완벽하게 구사한 스페인 화가로 칭송받으며

‘스페인의 카라바조’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말년에는 지나치게 금욕적인 그의 화풍에 흥미를 잃은 후원자들이 새로이 등장한 신세대 화가

무리요에게 환호하면서 주문이 극감해 빈곤 속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해야 했다

〈카디스 방어전〉 캔버스에 유채 / 302×323cm / 1634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서는 수르바란이 그린 전쟁화 〈카디스 방어전〉도 감상할 수 있는데,

이 작품은 1625년 영국 윔블던 경이 이끄는 해군들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카디스에서 한참 작전을 수행 중인 스페인 군 지휘관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은 수르바란이 주로 다루던 주제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기에 한동안 그가 아닌 다른 화가의 작품으로 알려져 왔다.
이 작품은 벨라스케스의 <브레다의 항복>과 나란히 부엔레티로 궁에 걸려 있었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31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산체스 코탄 〈사냥감과 과일, 채소가 있는 정물화〉 캔버스에 유채 / 68×88.2cm / 1602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8a실


후안 산체스 코탄(Juan Sanchez Cotan, 1560~1627?)은 오르가스에서 태어나 주로 톨레도에서 활동했다.
많은 미술사학자들은 검은 배경이 인상적인 그의 깔끔하면서도 섬세한 정물화를 두고 고대 로마의 학자

대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 23~79)의 《박물지(Naturalis Historia)》에 나오는 일화를 언급하곤 한다.


이야기는 이렇다. 고대 그리스의 제욱시스는 자신이 그린 포도송이가 너무나 완벽한 나머지

새가 날아들어 그것을 쪼려다가 죽었다며 의기양양해 했다.


자만에 찬 그는 파라시우스에게 어서 그림을 보여달라며 그림 앞 커튼을 열어젖히려 했는데

알고 보니 그 커튼이 바로 파라시우스의 그림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림이 ‘완벽할 만큼 진짜’ 같을수록 훌륭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사람의 눈을 속여 그것을 그림이 아니라 실제 같이 느끼도록 하는 기법은

트롱프뢰유(trompe l’oeil, ‘눈을 속이다’라는 프랑스어에서 나온 말이다)라고 불리는데,
이 작품은 그런 면에서는 단연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정물화는 16, 17세기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화가들이 자주 그렸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를 받는 만큼 이 지역 회화의 특성이 전해진 스페인에는 ‘보데곤(bodegon)’이라 하여
식기나 요리 재료들을 그린 그림이 유행했다.


그림은 스페인 가정의 부엌 모습을 마치 사진으로 찍은 듯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천정에는 레몬과 사과가, 그 곁에는 사냥물이 매달려 있다.


아래 왼쪽에도 잡은 새들을 꼬챙이에 꿰어 놓은 모습이 보인다.
선반 위 늘어진 당근과 무 옆에 엉겅퀴과의 채소 카르둔도 있다.


화가 자신이 카르투지오 수도회의 평신도 자격으로 세고비아의 한 수도원에 들어간 전력까지 있어

그의 작품은 말 그대로 영적인 훈련을 위한 묵상의 대상으로,

인간의 죄와 그 정화에 대한 일종의 종교화로 읽히기도 한다.


예를 들면 카르둔은 창세기의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게 되리라”(3장 18절)라는

구절을 근거로 원죄를 안고 낙원에서 추방된 뒤 시작된 인간의 노동, 그 힘겨움을 암시하는 것으로 본다.


나아가 사과는 원죄를 의미하며, 레몬은 독을 제거하는 효능으로 인해 죄의 정화로 읽기도 한다.
하지만 정물화를 무조건 종교적 상징으로만 읽는 것은 동전의 한 면만 바라보는 것과도 같다.


당시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 모든 것’에 대한 호기심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고,
그만큼 늘 봐오던 것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관찰이 요구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프란시스코 리발타 〈성 베르나르두스의 환상〉 캔버스에 유채 / 158×113cm / 1626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7a실


프로테스탄트의 위협에 대한 저항과 가톨릭 자체의 개혁을 위해 몇 차례의 긴 공의회를 거친 교회는
신도들의 신앙심을 더욱 견고히 할 수 있는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 미술을 주도하였다.


대체로 반종교개혁 성향의 그림에는 성인의 일화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신도들로 하여금 그들의 삶을 그저 머릿속으로만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체험하게 함으로써
보다 크고 깊은 감동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였다.


스페인의 17세기 미술에서 유난히 성인들의 모습이 많이 보이고, 나아가 그들의 모습을 마치 실제 인물의 초상화처럼
크게 클로즈업해 등장시키곤 하는 것은 스페인이 그만큼 강력한 가톨릭 국가였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성 베르나르두스의 환상〉은 발렌시아에서 활동하던 화가 프란시스코 리발타(Francisco Ribalta, 1565~1628)가
자신의 후원자인 후안 데 리베라(Juan de Rivera) 대주교가 소장하고 있던 카라바조의 모사본들을 연구한 결과 탄생할 수 있었다.


극명한 빛의 대비와 압도적인 사실감이 특징인 카라바조의 화풍이

이제 지중해를 거쳐 발렌시아 항구를 통해 리발타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림은 예수가 친히 십자가에서 내려와 성 베르나르두스를 보듬는 신비한 체험의 순간을 담고 있다.
성 베르나르두스는 클레르보 대수도원을 설립하고 수도원 제도를 창시한 성인이다.


짙은 어둠에 가려 있지만 성인을 바라보는 예수의 시선이 얼마나 따사로운지는 성 베르나르두스의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두 사람의 친밀도는 거의 관능적인 느낌까지 준다.


감정적인 자극을 강조하는 바로크 미술에는 딱 꼬집어 ‘그렇다’고 말할 수 없지만,
왠지 야릇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이 드물지 않았다.

프란시스코 리발타 〈천사에게 위안받는 성 프란체스코〉 캔버스에 유채 / 204×158cm / 1620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7a실


〈천사에게 위안받는 성 프란체스코〉는 성 프란체스코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한 천사가 나타나 음악을 연주해 주어
어린 시절 성인이 즐긴 음악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켜 그 병을 치유했다는 전설을 담은 그림이다.


천사나 성인이 입고 있는 옷 그리고 침대보와 양털의 질감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리발타가 사물에 닿는 빛의 변화를 세밀하게 관찰해낸 결과라 할 수 있다.


천사의 몸에서 뿜어나오는 빛과, 바로 오른쪽 어둠 속에 모습을 드러낸 어느 존재는 그림의 분위기를 한껏 신비롭게 연출한다.
다소 과장된 바로크적 자세를 취하고 있는 성인의 발과 손에 난 상처는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오상을 실제로 체험했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호세 드 리베라 〈아르키메데스〉 캔버스에 유채 / 125×81cm / 1630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호세 데 리베라(Jose de Ribera, 1591~1652)는 발렌시아에서 태어났지만, 스무 살이 되기 전 이탈리아로 건너가

로마에서 활동했으며, 이후 합스부르크의 통치하에 있던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에 머물며 작업했다.


그의 이름 ‘호세’는 종종 이탈리아어 식으로 ‘주세페(Giuseppe)’라고도 표기되며,
‘스파뇰레토(사랑스러운 스페인 사람)’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그의 그림은 한눈에 카라바조가 연상된다.
강렬한 명암 대비로 인한 치밀한 사실주의는 감상자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 마력이 있다.


리베라는 카라바조로부터 명암법만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탁월한 현실 감각까지 전수받았다.
카라바조는 위대한 성자나 성녀 들을 저잣거리를 활보하는 갑남을녀의 모습으로 그려
교회 관계자들의 우려 아닌 우려를 낳곤 했다.


이전의 종교화에 등장하는 성인들은 대체로 화려한 의상에 조각같이 군더더기 없는 몸매를 과시하곤 했지만,

카라바조는 고난 속에서 핍박받고 산 이들이 그렇게 우아하고 세련되게 치장하고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사실주의’를 구축했다.


호세 데 리베라 역시 성서 속의 인물들뿐 아니라 신화나 고대 철학자의 모습까지도 평범하다 못해
심지어 다소 비천한 모습으로 묘사하곤 했다.

호세 데 리베라 〈성 필립보의 순교〉 캔버스에 유채 / 234×234cm / 1639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9실


〈성 필립보의 순교〉는 스페인의 왕 펠리페 4세(Felipe Ⅳ, 1605~1665)의 수호성인 필립보(Philippus)를 주인공으로 한 그림이다.
한때 이 그림은 성 바르톨로메오(Bartholomew)의 순교 모습을 담은 그림으로 추정되었다.


성 바르톨로메오는 인도까지 가서 그곳의 귀신 들린 공주를 치료함으로써 왕가 일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킨 성자이다.
그러나 그는 곧 왕의 동생에게 붙잡혀 살가죽을 통째로 벗기는 고문을 당했고, 머리를 아래로 하는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한다.


이 때문에 바르톨로메오는 자신의 벗겨진 살가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그림 속 주인공에게는 그런 지물이 없다.


학자들은 성인 필립보의 이름이 후원자인 펠리페 4세(펠리페는 한국어로 필립보로 표기하는,

라틴어 필리푸스의 스페인식 이름이다)와 이름이 같다는 것, 그리고 결정적으로 필립보가

십자가형에 처해 순교했다는 사실을 들어 그림 주인공이 성 바르톨로메오가 아닌 성 필립보라 주장한다.

순교를 당하는 성인의 하얀 피부와 그에 닿는 빛에 비해 성인의 뒷부분은 칠흑 같은 어둠이 드리워 긴장감이 고조된다.
매달린 성인과 그를 고문하는 이들의 몸, 즉 근육과 뼈의 이음새 하나하나까지

해부학 교과서에 실어도 될 만큼 정확하고 사실적이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28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29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30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엘 그레코 (El Greco, 1541~1614) 


엘 그레코 (El Greco, 1541~1614)는 그리스 크레타 섬의 칸디아에서 태어나

베네치아와 로마를 거쳐 스페인의 수도였던 톨레도로 이주했다.


엘 그레코는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의 스페인어 별명으로,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Domenikos Theotokopoulos)이다.


그의 스페인 행은 펠리페 2세가 마드리드 인근에 에스코리알 궁을 짓기 시작하면서

건축가들을 포함한 미술가들에 대한 수요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것과도 관련이 있다.


당연히 엘 그레코도 에스코리알 궁 안의 교회당을 장식할 제단화 제작에 참여했지만,
당대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독특한 화풍 탓에 교회 내부 전시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펠리페 2세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지 못한 탓에 궁정화가 발탁이라는 행운에서도 멀어졌지만,
이탈리아 체류 시절부터 제법 행세깨나 하는 지식인이나 귀족층과의 친분을 쌓아둔 덕에

톨레도를 제2의 고향으로 삼아 살 수 있었다.


엘 그레코는 반듯하고 완벽한 인체 묘사와 비례, 균형 등을 최고의 규범으로 생각하는

르네상스의 고전적 그림에서 많이 동떨어진 매너리즘 화풍의 대가였다.


매너리즘 화가들은 라파엘로나 미켈란젤로 등과 같은 대가들의 정점에 달한 ‘기교’를 답습하면서도

그것을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법’으로 변형시키곤 했다.


매너리즘(이탈리아어로 마니에리스모(manierismo))은 기교,

방법을 뜻하는 ‘마니에라(maniera)’라는 말에서 비롯된 단어이다.


엘 그레코의 역량이 고스란히 담긴 〈수태고지 1596~1600년 제작〈그리스도의 세례 1596~1600년 제작〉

〈십자가 처형 1597~1600년 제작〉<오순절 1596~1600년 제작><부활 1596~1600년 제작> 이 다섯 작품은

현재 마드리드 마리나 에스파뇰라 광장(Plaza de la Marina Espanola)에 있던 수도사를 위한 아우구스티노 교단 소속

부설 학교 예배당의 제단화로 제작된 일곱 점의 작품 중 일부다.


궁정화가가 되겠다는 야망을 실현하지 못한 엘 그레코는

1596년 이 제단화들뿐 아니라 내부 장식을 위한 조각품 제작도 의뢰받았다.


그는 이전까지 자신이 번 것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사례로 받고 3년여의 작업 끝에 이 작품을 완성했다.

안타깝게도 그가 그린 제단화 일곱 점은 나폴레옹의 침략 기간 동안 이리저리 흩어졌다.

 
이후 이 다섯 작품은 스페인으로 반환되었지만, 여섯째 작품인 〈목자들의 경배〉는 루마니아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일곱째 그림은 소실된 상태이지만 학자들은 그것이 〈성모의 대관식〉을 주제로 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삼위일체〉 캔버스에 유채 / 300×179cm / 1577~1579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8b실


구름과 빛이 가득한 신비롭고도 기이한 배경과 길쭉길쭉하게 늘어진 신체,

화려하면서도 생경한 느낌이 드는 원색 등은 매너리즘 화가 엘 그레코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림 속 하나님은 죽은 예수의 몸을 받쳐 들고 있다.

그들 주위로 날개 달린 천사들이 마치 새 떼처럼 부산스럽게 모여들고 있다.
염려와 공포 그리고 두려움으로 가득한 이들의 표정은 감상자의 ‘공감’을 자극적으로 유도한다.


축 처진 상태에서도 위엄을 잃지 않는 예수의 몸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연상시킨다.
노랑, 빨강, 파랑 그리고 초록 등의 생생한 색이 화면 곳곳을 채우는 동안

예수의 피부만큼은 말할 수 없이 창백해 보여 시선을 압도한다.


가슴에서 허리 사이에 난 작은 상처는 십자가 처형 당시의 고통을

가능한 한 빨리 덜어주기 위해 롱기누스가 창으로 찔러 생긴 것이다.


<수태고지> 캔버스에 유채. 315×174cm. 1596~1600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9b실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의 <수태고지>에는 노란 빛에 싸인 성령의 비둘기가 천상과 지상을 나누고 있다.
성령의 비둘기 바로 아래로 천사들의 머리가 마치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하다.


이 천사들의 형체는 구름과 이어지다 끊어지길 반복하며 감상자들을 두려움에 가까운 경외심에 휩싸이게 한다.
오른편의 가브리엘 천사가 날개를 퍼덕이며 내려와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를 하고 있고,
이에 마리아는 다소 놀란 모습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다.


<수태고지>. 캔버스에 유채 / 315×174cm / 1596~1600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9b실


같은 주제의 작품으로 그가 베네치아에서 로마로 떠나기 전에 완성한 초창기 작품과 비교하면 그의 화풍이 어떤 식으로

변화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데, 베네치아 체류 시절에 그린 그림이 훨씬 더 자연주의적 르네상스의 이상을 실현하고 있다.


비록 천정 어디선가부터 들이치는 모호한 빛 처리는 꿈이나 환상 등의 신비감으로 가득해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긴 하지만,
후기에 그려진 그림보다 인체 왜곡이 훨씬 덜해 비교적 적절한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바닥의 타일과 중앙 출입문 밖으로 이어지는 건물들에서 보이는 잘 계산된 원근법은
화면 속 공간을 현실의 그것처럼 자연스럽게 연출한다.


<그리스도의 세례>. 캔버스에 유채 / 350×144cm / 1596~1600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9b실


<그리스도의 세례>도 <수태고지>처럼 천상과 지상의 두 부분을 화면 전체 구성에 이용했다.
그림 상단에는 하나님이 갖가지 자세의 천사들에 둘러싸여 있고, 하단에는 세례 요한이 세례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세례 요한은 조개에 물을 담아 예수에게 세례를 하고 있다.


종교화에서 조개는 종종 예수의 ‘빈 무덤’을 상징하므로 앞으로 그가 죽은 뒤 다시 부활하게 됨을 암시하는 장치로 볼 수 있다.
중앙에는 성령의 비둘기가 강한 빛과 함께 수직으로 내려오고 있다.
천사들이 예수의 머리께로 들고 있는 붉은색 천이 이 길쭉한 화면을 구획하고 있다.

〈십자가 처형〉 캔버스에 유채. 312×169cm. 1597~1600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9b실


〈십자가 처형〉에는 흔히 이 내용을 주제로 한 그림에 주로 등장하는 마리아와 사도 요한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가 등장한다.
사도 요한은 예수가 가장 사랑한 제자로,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인 마리아를 특별히 보살펴줄 것을 부탁할 정도였다.


화면 오른쪽이 사도 요한, 왼쪽이 마리아이다.
십자가 아래 예수의 발치를 지키고 있는 여인은 매음굴을 전전하다 회개한 막달라 마리아이다.


그녀는 자신의 죄를 참회하며 예수의 발에 향유를 바른 일이 있는데, 그로 인해 주로 예수의 발과 가까운 곳에 그려지곤 한다.
그림은 좌우 대칭의 르네상스적 구도를 취하고 있다.


상단에는 두 천사가, 중앙에는 마리아와 사도 요한이,

그리고 하단에는 날개달린 천사와 막달라 마리아가 서로 대칭하며 균형을 이루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와 천사는 수건으로 십자가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고 있다.

〈오순절〉 캔버스에 유채. 275×127cm. 1596~1600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9b실


<오순절>은 《사도행전》 2장 1절~13절에 기록된, 오순절에 사도들에게 일어난 기적의 순간을 담고 있다.
오순절은 유대인들이 시나이 산에서 모세의 율법을 받은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예수가 승천한 뒤 오순절을 함께 지내기 위해 모인 사도들은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를 듣게 되었고,
이어 ‘불의 혀가 각자의 머리 위에 나타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강한 바람 소리와 불의 혀는 곧 성령 체험이자 그 은혜를 입은 자들이 쏟아내는 방언의 기적으로 해석되어
이후 이 작품은 ‘성령강림절’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게 된다.


엘 그레코는 빛과 어둠의 강한 대립, 강하고 거친 붓질과 연극 배우들처럼 과장된 자세를 취한 등장인물을 통해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강한 심리적 압박감을 주고 있다.


〈부활〉캔버스에 유채. 275×127cm. 1596~1600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9b실


〈부활〉은 〈오순절〉과 같은 크기로 제작되어 있다.

아마도 이 둘은 제단의 양측에 걸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가 든 깃발은 죽음에 대한 승리를 상징한다.
예수의 몸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단단하고 이상적인 신체를 살짝 벗어나 있다.


신비로운 빛에 둘러싸인 예수를 목격한 병사들은 소란스러울 만큼 과장된 자세로 현장을 드라마틱하게 연출한다.
놀라 나자빠진 병사의 몸과 공중에 떠 있는 예수의 몸이 서로 대조되며 묘한 긴장감을 유도한다.


현재 톨레도의 타베라 병원에 있는 조각상 〈부활한 예수〉는 엘 그레코가 직접 제작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이 그림 속 예수를 모델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엘 그레코 <가슴에 손을 얹은 기사> 캔버스에 유채. 81.8×66.1cm. 1580년경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8b실


왕실 입성은 실패했지만, 엘 그레코는 스페인 지식인들과 활발히 교류했으며,

귀족들로부터 많은 초상화를 의뢰받았다.


그야말로 잘생긴 손이 압권인 〈가슴에 손을 얹은 기사〉는

‘스페인 신사’의 한 유형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톨레도에 체류할 당시 《돈키호테》의 저자 미겔 세르반테스가 엘 그레코와

자주 교류했다는 주장으로 인해 그가 이 그림의 주인공일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혹자는 톨레도 시장이었던 후안 데 실바 이 리베라 3세(Juan de Silva y Rivera III)를 그린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가슴에 손을 얹은 자세는 맹세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 아래로 왕에게서 받은 메달이 보인다.
화면 오른쪽에 보이는 검은 당시 수준 높은 검 제작으로 유명한 톨레도의 장인이 만든 최고급 제품으로 보인다.

〈우화〉 캔버스에 유채. 50.5×63.6cm. 1580년경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8b실


〈우화〉는 한 소년이 막 초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담고 있다.
투박하고 거친 붓질이지만 어둠 속에서 환한 빛에 노출되었을 때 변화되는 피부색의 표현이 참으로 예리하다.


‘불씨를 붙인다는 것’을 성적 행위로 보는 일반적인 해석에 따르면,
원숭이나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의 오른쪽 남자는 성적 방종을 의미한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25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26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27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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