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 인류의 존재 이후 최악의 대참사, 인간의 잔혹성을 가장 잘 드러낸 홀로코스트인 난징 대학살은

1937년 12월부터 약 6주간 일본군에 의해 자행 되었다. 


공식기록으로 난징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30만명의 어린이와 부녀자를 포함한 민간인이 

일본군에 의해 게임하듯 잔인하게 도륙 되었고, 2만이 넘는 나이어린 소녀와 부녀자들이 강간당하고

심지어 임산부까지 강간한 후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 노는 만행이 이루어 졌다. 

 

▲ 일본군의 칼날에 목이 떨어져간 난징 시민들

 

난징대학살은 일본의 교묘한 술책으로 인해 수십년간 역사 속에 뭍혀 왔다가 미국에서 생활하던

30대 중국계 작가인 아이리스 장 (Iris Chang)이 "난징의 강간 - Rape of Nanking"이라는 책을 출판하여

베스트 셀러가 된 계기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37년 8월 상하이 침공시 양민을 학살하는 모습.


당시 무수히 많은 양민들이 일본군의 잔인한 총칼에 도륙 되었다.

불허가(不許可)라고 씌여진 일급 비밀사진으로 당시 출판금지된 사진 

 

일본군의 폭격으로 불타는 상하이


상하이 점령 후 난징으로 진격을 하면서 일본군의 만행은 도를 넘어서 난징을 쑥대밭으로 만드는데, 그
와중 죽은 인명의 수가 30만을 넘었고, 강간을 당하며 죽어간 여인네들의 수가 2만을 넘었다. 

마치 게임 즐기듯이 인간을 살육하기에 광기가든 일본군은 산 사람에 등유를 부어 태워죽이거나, 임
산부를 강간하고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는 등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을 저질렀다.



총으로 양민을 죽이는데 실증난 일본군은 산사람에게 디젤 오일을 부어 태워 죽였다.


강간후 옷을 벗겨 희롱하는 일본군 


일본군은 임산부를 강간하고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기도 하였다. 


일본군에 잔인하게 살해된 7살짜리 아이


3살 짜리 아이도 일본군의 총칼을 파해갈순 없었다.

거리청소라 불리워진 당시의 학살에 수천의 어린아이들이 잔인하게 학살 당했다.


칼날을 시험하듯 공개적으로 목을 치고 있는 일본군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총검술을 연습하는 일본군 


홀로코스트가 벌어지고 있는 난징은 더 이상 지구상의 땅이 아닌 생지옥 그 자체였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난징 대학살 사진
베이징=연합뉴스  http://www.huffingtonpost.kr/2015/10/15/story_n_8298406.html


난징(南京)대학살 당시 일본군이 중국군 포로들을 참수하는 장면이 담긴 사진들이

유네스코(UNESCO·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사실이 확인됐다.


연합뉴스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리스트에 오른 난징대학살 자료들을 입수해 분석한 결과

일본군이 중국인 포로들을 한 명씩 무릎을 꿇게 한 뒤 검으로 목을 베는 사진 등 사진은 총 16장이 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사진 속 중국인 포로들은 대체로 앳된 모습이었고 일부 사진 속에는 참수 직후의 참혹한 순간도 담겨 있었다.

이 사진은 당시 일본군들이 직접 찍은 것으로 1938년 난징의 한 사진관에서 견습공으로 일하던

중국인 청년 뤄진(羅瑾)이 몰래 추가로 현상해 숨겨두고 있던 것이었다.


그는 충격과 비통함 속에 사진들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사진첩'을 만들었고 지인을 통해 보관해 왔다.

이 사진은 일본군의 끔찍한 죄행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1945년 일본 패망 이후 개최된 난징 전범 군사법정에서 '1호 자료'로 채택됐다.



  • 연합뉴스/중국 제2역사당안관 홈페이지 캡쳐



  • 연합뉴스/중국 제2역사당안관 홈페이지 캡쳐


  • 연합뉴스/중국 제2역사당안관 홈페이지 캡쳐


  • 연합뉴스/중국 제2역사당안관 홈페이지 캡쳐


  • 연합뉴스/중국 제2역사당안관 홈페이지 캡쳐


  • 연합뉴스/중국 제2역사당안관 홈페이지 캡쳐

  •   연합뉴스/중국 제2역사당안관 홈페이지 캡쳐


이 사진들을 포함해 길거리에 중국인 시신 수십구가 널브러져 있는 사진과

일본군이 부녀자를 욕보이는 사진 등 총 16장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채택됐다.


일본군이 난징대학살 당시 얼마나 잔인하게 양민과 중국군 포로들을 학살하고 짓밟았는지를

직접적으로 증명하는 사진들이어서 심사위원들의 심사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난징대학살은 중일전쟁 당시인 1937년 12월 13일부터 이듬해 1월까지 국민당 정부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30만 명 이상(중국 측 추정)에 달하는 중국인을 학살한 사건이다.


이번에 등재된 기록물들은 일본군이 중국인 포로와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실을 증명하는 각종 기록물과

1945년 이후 전쟁 범죄자의 재판 관련 기록물 등 총 11종에 달한다.


이 중에는 난징대학살을 직접 목격하고 촬영해 전 세계에 알린 미국인 선교사 존 매기가 당시 촬영에 사용한 16㎜ 카메라와

원본 필름, 중국판 '안네의 일기'로 불리는 청루이팡(程瑞芳)의 일기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유네스코등재 '난징대학살' 자료에 中포로 참수사진 포함 1937년 중일전쟁 발발 당시

난징의 진링(金陵)여자대학 기숙사 사감이었던 그는 1937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자신이 직접 목격하거나 전해 들은 방화, 살인, 약탈, 강간 등 일본군의 각종 만행을 일기로 남겼다.


"이들은 미쳐 날뛰며 온갖 나쁜 짓을 다 한다. 죽이고 싶으면 죽이고 강간한다. 남녀노소를 가리지도 않는다",

"일본 헌병들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다",

"걸어 다닐 수 있는 곳이 없어 시체 사이를 뚫고 다닌다고 한다"는 등의

충격적인 내용과 함께 "죽고 싶을 만큼 괴롭다"는 심경고백도 담겨 있다.


당시 일본군에 저항하다 30여 군데를 찔린 뒤 가까스로 살아남은 중국인 리슈잉(李秀英)의

법정 증언도 등재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1947년 3월 난징시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일본군 중장 다니 히사오(谷壽夫)에 대한 판결문 원본도 포함됐다.

여기에는 난징대학살에 따른 사망자 총수가 30만명 이상이란 내용이 적시돼 있다.


또 난징시 임시 참의원이 난징대학살 범죄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만든 조사보고서와

난징시 군사법정에서의 범죄 조사 결과 등도 포함됐다.


난징국제안전처 위원이던 미국인 마이너 셜 베이츠의 증언,

당시 국제적십자사 소속 외국인 직원의 일기 등도 세계기록유산으로 채택됐다.


중국 정부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자국이 자체적으로 생산한 자료들 외에 일본군이 촬영한 사진,

외국인들의 기록 및 증언 등 객관성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자료 구성에도 신경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은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 등재 결정을 크게 환영했지만

일본 측은 유네스코 분담금 지급 중단까지 거론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에 대해 중국은 '쇼킹'이란 표현까지 동원하며 일본 측을 맹비난하는 등

난징대학살 자료들의 세계기록유산을 둘러싼 중일 간 공방은 계속되고 있다.



 



 고 박영심 할머니가 자신의 '위안부' 시절 사진을 들어보이고 있는 일본의 사진작가 이토 다카시의 사진.
ⓒ 뉴스타파 화면 갈무리



경남에 거주하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효순 할머니의 부음을 전해 들으면서
나는 난징에서의 둘째 날, 호텔에서 지척이었던 리지샹(利済港) 2호에 있는 '긴스이루(樓)'를 떠올렸다.

2014년에 장수성(江蘇省)의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된 유적은 굳게 잠겨 있었으므로
우리는 출입문 사이로 보이는 퇴락한 건물 앞에 세워진 표지석밖에 찍을 수 없었다.

난징 리지샹 위안소, 그리고 박영심

리지샹 위안소는 면적이 6700㎡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아시아에 세운 위안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온전하게 보존된 위안소 유적이다.

시멘트 담장과 가림막 너머 낡고 황량한 대형 건물 7동이 뉴스의 조명을 받게 된 것은
이곳이 일본군 위안소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2000년,
여기서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했던 조선인 위안부의 생존 사실이 확인되면서였다.

그이가 당시 북한에 생존해 있다가 이제는 고인이 된 박영심(1921~2006) 할머니다.
평남 출신의 할머니는 17살이던 1939년, 난징의 위안소에 끌려와
긴스이루에서 3년 동안 위안부 생활을 해야 했다.

일본군은 중국 침략전쟁 기간, 위안부 제도를 실시하면서 전국의 20여 개의 성(省)에 위안소를 설치했다.
이 비극적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귀국 후 위안부 생활의 후유증으로 힘들게 살아온 할머니가
2000년에 일본군의 전쟁범죄 행위를 단죄하기 위한 '여성 국제전범 법정'에 참석하는 등
피해 실상을 알리는 데에 적극 나섰기 때문이었다.

어린 나이에 일본군의 성노예가 되어야 했던 할머니는 지금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그이를 비롯하여 '위안부'들이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고통의 시간은 여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책임과 배상의 주체인 일본은 침묵하고 있고,
아베 일본 총리는 최근 미국 방문에서 2차대전에 대한 반성을 표명하면서도
'위안부' 문제와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는 끝내 회피하는 기만적 태도를 보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중국 침략전쟁 기간, 위안부 제도를 실시하면서 전국의 20여 개의 성(省)에 위안소를 설치했다.

이 위안소에는 수십만의 중국 부녀자들과 함께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 여성들도 위안부로 혹사당해야 했다.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하면서 바로 위안소를 설치했다.
난징 점령 후, 주둔군이 비교적 많았기 때문에 일본군 참모부 제2과에서는 난징 위안소 건립안을 제출,
군부의 심의를 거쳐 이를 확정했던 것이다.
난징대학살 기간 중에도 부후강과 철관항 등 두 군데의 위안소가 세워졌다.

일본군이 난징에서 운영한 위안소는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해도 40여 개소에 이른다.
일본군 위안소 문제 연구의 권위자인 난징사범대 역사학과 징성훙(經盛鴻) 교수에 따르면
위안부 제도는 당시 일본 군국주의 정부의 중요한 국책이었다.

난징의 위안소는 난징 점령 후,
중지나(中支那) 방면군 사령관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대장의 지시로 설치되기 시작했다.

마쓰이가 위안소 설치를 지시한 것은 민간인 학살과 부녀자 강간, 성병 만연 등으로
일본군의 질서가 무너지고 전투력이 저하되는 것을 우려해서였다.
그래서였던가, 난징은 일본군이 지배한 8년 동안(1937~1945) 위안소와 위안부가 가장 많은 도시가 됐다.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에 의해 세워진 리지샹 위안소. 열일곱 살 어린 나이로 박영심 할머니가 여기 끌려온 것은 1939년이었다.

ⓒ 난징대학살기념관 전시사진





 리지샹(利?港) 2호의 위안소의 현재 모습. 2014년에 장수성의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된 유적은 수리 중이었다.
ⓒ 홍소연





 난징의 화월루 위안소. 난징에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40개에 이르는 위안소가 세워져 운영되었다.
ⓒ 기념관 전시사진



일본군은 초기에는 한국과 일본 등지에서 위안부들을 대거 데려오기 어려웠으므로
예하 각 부대에 우선 자체적으로 임시 위안소를 설립하도록 했다.

이들 부대는 납치하거나 강제 연행한 중국 여성들로 위안소를 운영했다.
그 뒤에는 한국 등에서 끌려온 여성들을 위안소에 투입했다.
고 박영심 할머니가 리지샹 위안소에 끌려온 때(1939)는 대략 이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은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군사적 수단의 하나로 위안소를 설치했다.
군(軍)이 관리·감독하는 위안소를 설치한 것은 일반 여성에 대한 강간 방지,
병사의 성병 예방과 사기 고양, 정보 누설 방지 등 군사적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위안소 설치 이후에도 일반 여성에 대한 일본군의 강간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난징의 상주제 위안소 벽 위에 씌어 있다는 일본어 낙서는 위안소를 찾은 병사들의 심리적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병사들이 승자의 오만한 태도로 '위안부'를 능욕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게 해 주는 것이었다.

"개선하고 돌아온 사병이 이 방에 어찌 들어갈 수 없겠느냐. - 보병 145연대 이케다 부대"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한 뒤 설립한 위안소 일람표
ⓒ 장호철



난징에 아직 남아 있는 위안소 가운데 '안락(安樂)주점 위안소'는 주로 한국 여성들과 중국 여성들이,
'동운(東雲)위안소'는 주로 한국 여성들이 끌려가 있던 곳이었다.

당시 일본군 제15사단 군의부 위생업무 기록인 난징과 전장 등 4개 지역의 위안부 검사 연인수(延人數)에 따르면
반도인(조선반도 출신자)은 159명이었다.

남은 이 52명, 회복되지 못한 시간

우리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는 238명이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일본군의 성노예로 살아갔으리라고 추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 있다.

일본군의 폭행과 학대로, 병사를 따라 각 지역을 전전하다가, 지옥 같은 생활에서 벗어나려 탈출을 시도하다가……,
그예 돌아오지 못한 이는 얼마이며, 돌아왔으나 내로라 나서지 못한 이는 또 얼마일까.

그런 뜻에서 정부에 피해 사실을 등록한 이들은 자신의 온 생애를 걸고
일제의 저 가공할 폭력과 역사왜곡에  맞선 이들이었다.

생애 한번뿐인 '아름다운 고백'을 통해 그들은 오욕과 야만의 역사를 바로잡으려 하고 있지만,
여전히 일본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들 할머니들은 차례로 세상을 떠나 이제 남은 이는 52명뿐이다.



 난징대학살 기념관 입구의 재난의 벽. 영어, 일어, 포르투갈어, 그리스어, 네덜란드어 등 12개 국가의 문자로 '참사자 300,000'을 새겼다.
ⓒ 장호철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아버지. 일본군의 학살은 아이, 어른을 가리지 않았다.
ⓒ 기념관 전시사진





 일본군의 난징 입성. 난징은 1937년 12월 13일 함락되었다. 그리고 6주간에 걸친 대살육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 기념관 전시사진



난징대학살은 '위안부' 문제와 함께 일본의 악을 상징하는 치명적 약점이다.
1937년 12월 10일, 일본군은 중국군에 "항복하지 않으면 양쯔강을 피로 물들이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지만 중국군은 투항을 거부했다.
전면적인 공격에 들어간 일본군은 12월 13일, 난징을 점령하고 성안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피난을 떠나지 못한 채 성안에 남아 있던 50~60만의 시민들은 공황 상태 속에서 일본군을 맞이해야 했다.
그리고 이듬해(1938) 2월까지 6주간에 걸친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최대 30만이 희생된 아시안 홀로코스트(Holocaust), 이른바 '난징의 대도살'이었다.

1937년 12월 13일, 대학살의 시작

일본군이 난징에 도착할 무렵 모든 중국인 포로를 죽이라는 명령이 부대 내 하급 장교들에게까지 하달되었다.
난징을 점령한 12월 13일, 일본군 66대대가 받은 명령은 다음과 같았다.

전투지침
  (…)
- 모든 포로들을 처형한다. 
- 처형방법 : 포로들을 12명씩 나누어 총살한다.
 - 아이리스 장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The Rape of Nanking)>(미다스북스, 2014) 중에서

난징대학살의 주요 책임자로 꼽히는 중지나(中支那) 방면군 휘하 제16사단장 나카지마 게사고(中島今朝吾)는 일기에서
"포로는 남기지 않고 전부 처리한다"는 대학살 방침을 기록했다.

제6사단(사단장 타니 히사오) 사령부에서도
"여성과 어린이를 막론하고 중국인이면 모두 살해하고 집은 불사른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일본군들은 '전쟁포로의 처리' 문제 따위를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포로들을 죽이면 식량문제도 해결될 뿐 아니라 혹시 모를 이들의 보복도 예방할 수 있다고 여겼다.

무푸산(幕府山) 근처에서는 5만 7천 명의 민간인과 중국군 포로들이 살해되었다.
이는 난징에서 벌어진 학살 행위 가운데 단일 사건으로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첫 번째 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렸다.
두 번째 줄에 서 있던 포로들은 자신들의 목이 잘리기 전에 앞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린 몸통을 강물에 던져 넣어야 했다.
살육은 아침부터 밥까지 계속되었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2천 명밖에 처리할 수 없었다.
그 다음날 이런 처형 방식에 싫증이 난 일본군은 포로들을 한 줄로 세운 후 기관총을 난사했다.
타 타 타! 포로들은 강으로 뛰어들었지만 강 건너편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일본 중국 특파원 유키오 오마타의 기록(위의 책)



 난징 외곽 양쯔강에서도 일본군의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다. 항복한 중국군은 물론'모자를 오래 쓴 흔적이 있거나 손에 굳은살이 박힌 젊은 남자' 모두를 닥치는대로 끌어모아 기관총으로 양쯔강에 쓸어넣었다.
ⓒ 기념관 전시사진



이 대학살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희생당한 여성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게는 2만 명에서 많게는 8만 명 정도의 난징 여성이 강간당한 것으로 추산될 뿐이다.
여성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병사들에게 잔인하게 짓밟혔다.

일본군의 잔인성은 가족 전체를 파멸로 몰아넣기도 했다.
일본군은 아버지에게 딸을, 오빠에게 여동생을, 아들에게 어머니를 강간하라고 협박했다.
이에 대한 거부는 죽음이었다.

난징대학살에 대한 보고서로 불리는 아이리스 장(Iris Chang, 張純如)의 책 이름이
<난징의 강간(The Rape of Nanking)>(1997)인 이유다. 

군인들을 갓난아기를 총검으로 찔러 산 채로 끓는 물에 던져 버렸다.
군인들은 열두 살짜리 소녀부터 여든이 된 할머니까지 가리지 않고 윤간했고
이들이 자신의 욕구를 더 이상 만족시켜 주지 못하면 그 즉시 죽여 버렸다.
내가 목을 베거나 불태워 죽이거나 산 채로 파묻은 사람이 200명이 넘는다.
나 자신이 그런 짐승 같은 짓을 저질렀다니 정말 끔찍하다.
나는 인간이 아닌 악마였다.
- 나가토미 하쿠토(위의 책)

셀 수 없을 만큼 강간이 자행되었지만 강간으로 아이를 출산했다고 증언한 중국여성은 단 한 명도 없다.
아이들은 태어나는 대신 비밀리에 죽음을 당했다.

죄의식과 수치심, 자괴감에 시달린 중국여성들은 사랑할 수 없는 자식을 기르느니
차라리 영아 살해를 선택한 것이었다.

지옥에서 꽃핀 인간애, 국제위원회의 '난징안전지대'

6주에 걸친 대학살 기간 동안 난징은 아비규환의 지옥이었다고 말해도 좋았다.
그러나 이 절망적 인간성의 나락 가운데에도 인간의 이타적 선성(善性)을 확인해 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국제위원회를 구성하여 난징대학교, 진링(金陵)예술과학대학, 미국대사관 등이 있는 지역을
일본군이 들어올 수 없는 '난징 안전지대'로 설정해 이곳으로 들어온 중국인들에게 음식과 머물 곳을 제공했던 것이다.

선교사, 의사, 교수, 기업인에 지나지 않던 몇 십 명의 이방인들은 5만의 일본군에 맞서 수많은 난징시민을 구해냈다.
안전지대는 20~30만 명 정도의 피난민을 수용했는데 이는 피난을 떠나지 못한 난징 전체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나머지 절반은 일제에게 희생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으니 그들의 구명활동은 가히 기적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이 국제안전지대의 전설적 지도자는 '살아 있는 부처', '중국의 오스카 쉰들러'로 불린 독일인 사업가 
욘 라베(John Heinrich Detlev Rabe, 1882~1950)였다.

지멘스 차이나의 직원이기도 했던 이 나치 지지자는
자신의 소유지를 피난자들에게 내놓으며 난징 시민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또 '난징의 살아 있는 여신'으로 불린 선교사이자, 진링여자예술과학대학의 학장
미니 보트린(Minnie Vautrin, 1886~1941)은 대학교 안에 대피소를 제공하면서,
약 만 명의 여자와 어린이의 생명을 구해냈다.



 난징안전지대를 통해 5만의 일본군에 맞서 난징시민을 구해낸 국제위원회의 구성원들. 왼쪽에서 세 번째가 욘 라베다.
ⓒ 기념관 전시사진





 ‘난징의 살아 있는 여신’으로 불린진링여자대학의 학장 미니 보트린은 대학교 안에 대피소를 제공하면서, 약 만 명의 여자와 어린이의 생명을 구해냈다. 왼쪽에서 네 번째가 보트린.
ⓒ 기념관 전시사진



이들은 자신의 지위는 물론이거니와 생명의 위험마저 감수하면서 일본군으로부터 난징 시민의 목숨을 구하는 데 진력했다.
그뿐 아니라 이들은 고국으로 돌아가 기록과 필름 등을 통해 일본군의 학살을 증언하여 난징의 진상을 세계에 알리는 데 이바지했다.

난징 국제적십자사의 대표이자 아마추어 영화 제작자였던 존 마기(John Magee, 1884~1953)는
난징 대학병원에서 중요한 장면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16밀리 네거티브 필름 8롤에 담긴 이 영상은 난징 YMCA 대표 조지 피치(George Fitch)가
목숨을 걸고 낙타털 코트 속에 숨겨 난징 밖으로 반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이들 안전지대 지도자들이 기록한 '난징의 진실'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고국으로 돌아간 욘 라베는 귀국 후 난징대학살을 고발했다가 게슈타포의 조사를 받았으며 반강제적으로 은거했다.

만년에 그는 가난에 시달렸고 1950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난징대학살에 관한 2천 쪽 이상의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은 그 손녀에 의해 반세기 후에 공개되었다.

미니 보트린은 1940년 본국으로 돌아간 지 1년 만에 자책감과 참상을 목격한 후유증으로 자살했다.
종전 후 중국 정부는 보트린에게 난징 대학살동안 그녀의 희생을 기리는 'Emblem of the Blue Jade'를 수여했다. 

욘 라베도 사후, 그의 비석이 1997년 베를린에서 난징으로 옮겨졌으며, 난징 학살 기념지 안의 '영예로운 곳'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용기와 헌신은 그 보상 너머에 있는 고결한 것이었다. 

시민 상대 생체실험, 'Ei 1644 부대'

일본군이 난징에서 저지른 악은 이뿐이 아니다. 그들은 난징 시민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도 자행했다.
1939년 4월 일본군은 의학연구 기관을 설치하고 '자이모쿠(통나무)'라는 실험 대상을 모아 연구했다.
이 기관이 '이아이(Ei) 1644부대'다.

일본군은 중국인 죄수나 포로에게 독극물, 세균, 독가스를 주입하는 등 이들을 실험에 이용했다.
아세톤, 비소, 시안, 질산, 청산가리를 비롯해 코브라 독사에서 추출된 독도 사용되었다.
이 과정에서 매주 140여 명의 포로가 죽었고 그 주검은 소각로에서 불태워졌다.

난징대학살의 사상자수는 여러 갈래로 엇갈린다.
중국의 군사 전문가 류 팡 추는 43만 명, 극동 군사재판소의 재판관들은 26만 명 이상,
일본의 역사학자 후지와라 아키라는 20만 명을 주장한다.

일본의 극우 세력들은 '날조'와 '허구'라며 난징대학살 자체를 부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난징의 진실은 숫자에 있지 않다. 

희생자의 수가 적다고 해서 그것이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야만과 반문명의 잔혹한 범죄행위라는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범재판의 피고석에 서 있는 1급 전범들. 난징대학살의 주요 책임자들은 사형을 선고받고 각각 처형되었다.
ⓒ 기념관 전시사진





 악명 높은 ‘100인 목 베기 시합’을 벌인 노다 다케시·무카이 토시아키 중위는 비겁하게 범행을 부인했지만 총살형에 처해졌다.
ⓒ 기념관 전시사진



전쟁이 끝난 후에 대학살의 주범들에 대한 단죄가 이루어졌다.
악명 높은 '100인 목 베기 시합'을 벌인 노다 다케시·무카이 토시아키 중위는 비겁하게 범행을 부인했지만 총살형에 처해졌다.

중지나 방면군 사령관 마쓰이 이와네와 6사단장 타니 히사오는 전범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16사단장 나카지마 게사고는 지병으로 죽고 없어 단죄를 면했다.

답사단의 마지막 여정인 난징대학살 참사 동포기념관은
난징에서 자행된 이 끔찍한 인류적 범죄를 완벽하게 기록, 전시하고 있었다.

1937년 12월 16일, 일본군이 무장을 해제한 중국군과 평민 1만여 명을 학살한 강동문(江東門)의
'만인갱(萬人坑, 만인의 주검을 묻은 구덩이)' 유적지 위에 세워진 거대한 기념관을 한 바퀴 돌아 나오자
난징대학살의 전모가 어렴풋하게 손에 잡힐 듯했다.



 기념관 유적 지구 학살 참사자 유골진열실의 유골.
ⓒ 장호철





 비둘기를 받쳐 든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거대한 조각 입상 ‘화평’은 평화와 인류의 미래를 갈망하는 중국인민의 염원을 표현하고 있다.
ⓒ 장호철



기념관 전시 포맷은 난징 시민을 비롯한 중국인들이 겪어야 했던 중일전쟁과 학살 참상의 사실적 재현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날의 원한을 환기하기보다는 미래의 희망과 평화를 이야기한다.

기념관 입구에서 만나는 것은 죽은 자식을 안고 통곡하는 어머니를 조각한 '가파인망(家破人亡)'이다.
그러나 기념관 관람의 끝은 학살당한 이들의 유골 진열실을 거쳐 제사장과 추모청을 지나 이르게 되는 평화공원이기 때문이다.

한 손으로 비둘기를 받쳐 든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거대한 조각 입상 '화평(和平)'은
인류의 평화로운 미래를 갈망하는 중국인민의 염원을 표현했다고 한다.

결국 이 기념관이 웅변으로 전하고 있는 것은 '전사불망(前事不忘) 후사지사(後事之師)',
'지난 일을 잊지 말고 후세의 교훈으로 삼자'는 중국과 중국인의 다짐이다.

전후 70년, 배상도 사과도 없는 일본의 전쟁범죄

전쟁이 끝나고 70년이 지났다.
그러나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는 여전히 현재형이다.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지만 일본은 아직도 자신의 '과거와 대면하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자국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해 어떠한 배상도 하지 않았고 사과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난징대학살의 진상을 기록한 책. 원제는 <난징의 강간>. 원 안은 저자 아이리스 장.
ⓒ 미다스북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위안부였거나 일본군에게 능욕당한 여성들은 '강압에 의한 성적 노예'가 아니라 '자발적 매춘부'였다고 강변하는 등 일본의 역사왜곡은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역사 시간에 홀로코스트(Holocaust)를 가르치지 않으면 불법으로 간주되는 독일과 달리 일본에서 난징대학살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교과서에 언급되지 않고 누락되어 왔다.

난징대학살의 진상을 새롭게 알린 작가 아이리스 장(1968∼2004)은 난징이 남긴 마지막 교훈은 "사람들은 이런 대량 학살을 받아들였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 사건에 대해 수동적인 방관자가 되었다"는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비참한 교훈'이라는 것이다.

난징은 수만의 여성이 미친 병사들에게 강간당한 곳, 30만에 이르는 사람들, 아이·어른·노인·여자가 도륙당한 도시다. 식민지에서 끌려온 여성들이 마흔 개가 넘는 위안소에서 수십, 수백의 병사에게 학대당했던 도시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에서와 마찬가지로 난징에서의 강간과 학살을 방관자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이다.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삶과 죽음에 대한 아픔과 슬픔을 공감할 줄 아는 한, 우리가 스스로를 '인간'으로 매기는 이상은 말이다.








난징 대학살(南京大屠殺)


중일 전쟁 때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한 일본이 군대를 동원해 중국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약 30만 명의 중국인들이 학살되었다.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2월까지 6주간에 걸쳐 이뤄졌으며,

1939년 4월에는 1644 부대가 신설되어 생체실험 등이 자행되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이를 난징 대도살이라고도 부르며, 일본에서는 난징 사건으로 불리고 있다.

서구권에서는 아시아 홀로코스트라고도 한다.


대학살 배경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마르코 폴로 다리, 노구교 사건.)으로

중화민국과 일본 사이에 무력충돌이 터지면서 중일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초기에 일본군은 베이징, 톈진 등 북부 주요도시들을 손쉽게 점령하고, 진격에 진격을 거듭하면서

일본군 수뇌부는 "단 3개월 안에 중국대륙을 점령하겠다"고 큰소리 쳤을 만큼 기세등등했었다.


그러나, 상하이 전투에서 2~3개월이나 전투가 장기화되었는데,

여기서 일본군이 예상한 것과는 달리 중국 국민당군의 저항이 상상 이상이었다.


특히 상하이 전투에서 중국군은 장제스(蔣介石)의 엘리트 직계군대가 투입되었고

이들의 저항이 상당히 격렬했던데다가 여기서 일본군은 오송 상륙 전투에서 무모한 작전을 펼치다가

상당한 피해를 입으면서 일본군은 중국군과 중국인들에 대한 적개심에 악이 받칠 대로 받쳐 있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11월,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어렵게 상하이를 점령하고,

예정도 없이 곧바로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을 향해 진격을 한다.


대학살 전개


▲ 중화민국 장군 탕셩즈. 난징 전투 당시 중국군 지휘관이었다.


일본군이 난징으로 진격하는 동안 중화민국 정부는
난징을 포기하고 충칭(중경)을 임시수도로 정한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唐生智) 장군은 결사항전을 주장했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수도를 지키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난징을 삼면에서 좁혀들어오는 일본군의 포위 속에 중국 국민당 주요관리와 부유층들은
재빨리 손을 써서 도시를 빠져나갔고, 중일전쟁 이전에 약 110만 명에 육박했던 난징은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시민들과 일본군을 피해 도시로 피난들어오는 피난민 등이 뒤엉켜 아수라장이었다.

난징을 완전히 포위한 일본군은 중국군 사령관에게 투항하라는 경고를 했다.
그러나 난징을 지키고있던 탕셩즈 사령관 휘하의 15만 명의 중국군은 투항을 끝내 거부했다.

중국군의 당시 전략은 도시 밖 요충지를 포기하고
성 안에 고립한 채로 방어하겠다는 전략 방식으로 나가려 했었다.

12월 10일, 일본군은 중국군에 "항복하지 않으면 피의 양쯔강을 만들겠다"고 최후통첩을 한다.
결국 역시 중국군은 끝까지 투항을 거부했고, 일본군은 전면적인 공격에 들어간다.

12월 13일,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하고 난징성 안으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중국 군대가 제대로 저항해보지도 못하고 무참히 무너진 이유에 대해서는
흐뜨러진 군기와 지휘관들의 부재 및 무능함에서 비롯되었으며,
여기에 단합이 안되었던 것에 큰 한 몫을 했다.

결국 중국군은 제대로 전투도 못해본 채로 뒤숭숭한 혼란 속에 빠져있기만 했다.
그 무렵, 난징이 함락되기 직전 전날,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는
자신의 휘하 부대와 난징성에 고립된 시민들을 뒤로한 채, 양쯔강을 가장 먼저 건너 도망했다.

여기서 피난가지도 못한 채 남아있던 50~60만의 난징 시민들과 군인들은
공황 상태속에서 4~6주간 일본군에 의해 처참한 학살을 당한다.


6주간의 학살과 강간


▲ 1937년 12월 13일, 난징에 입성하는 일본군.


탕셩즈 사령관이 도망가면서 난징성이 허무하게 일본군 수중에 들어오게 되자,
난징에 남아있던 시민들과 병사들에게 재앙이 닥쳤다.

일본군은 백기를 들며 항복한 중국군 포로 뿐만 아니라 젊은 남자들을 색출하여 닥치는 대로 끌고가
성외곽 밖이나 양쯔강 하구에서 기관총 세례를 퍼부어,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만여 명이나 되는 단위로, 중국군 포로와 민간인 남자들은
일본군의 총검술 훈련용으로 되거나 목 베기 시합 희생물이 되기도 했다.

여기에 적지 않은 중국인들은 총알을 아끼려는 일본군에 의해
산 채로 파묻혀서 생매장 당하거나 칼로 난도질당했다.

난징의 한 광장에서는 천여 명의 사람들이 몇 개의 단위로 열로 구분되어 세워졌는데,
이들 가운데는 여자들과 어린아이등 수많은 민간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군은 이들에게 석유를 쏟자마자 곧바로 기관총을 난사했다.
총탄이 사람들의 몸을 꿰뚫을 때 석유에 불이 붙었고, 시체더미는 산처럼 이루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난징대학살에 참가한 어느 일본군의 일기가 발견되었는데,
일기내용에서는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랜다."면서
"산 채로 묻어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도 했다"고 적혀 있었다.

즉, 일본군들은 군인포로들이나 민간인들 가릴 것없이 무차별적으로 잔인하게 학살을 하였다.
이러한 잔인한 '인간 사냥'이 극에 달하면서 일본군은 여자들에게도 눈을 돌렸다.

이른바, '집단윤간', '선간후살'(先姦後殺, 먼저 강간하고 다음에 죽임)로
일본군은 여성을 성노리개로 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강간 후 참혹하게 살해했다.

그 대상은 10살도 채 안되어 보이는 어린이부터 60, 70대 노파까지 그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또한, 일본군은 수녀와 비구니를 포함하여 난징의 여성들을 보이는 대로 능욕했다.

▲ 난징 외곽 양자강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한 일본군.


일본군은 백기를 들고 항복한 중국군은 물론, "패잔병을 '처리'한다"는 명목으로
'모자를 오래 쓴 흔적이 있거나 손에 굳은살이 박힌 젊은 남자' 모두를 닥치는대로 끌어모아
기관총으로 양쯔강에 쓸어넣었다.
.
1938년 1월, 일본 외무대신 히로타 고키(廣田弘毅)가 주미 일본대사관에 보낸 비밀 전문 내용에는 다음과 같다.
"특별소식 : 믿을 만한 목격자들의 직접 추산과 신뢰도 높은 일부 인사들이 보내온 편지에 따르면
일본군이 저지른 모든 행위와 폭력 수단은 아틸라왕과 흉노족을 연상시킨다.
최소 30만명의 민간인이 살육됐고, 많은 수는 극도로 잔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방식으로 살해됐다.
전투가 끝난 지 수주가 지난 지역에서도 약탈과 아동 강간 등 민간에 대한 잔혹 행위가 계속되고 있다."

당시 일본 외무부는 난징에서의 학살 사실을 숨기기 위해 난징에 있던 서방 외교관들을 불러
맛있는 음식과 공연을 제공하며 매수를 시도했다고 한다.


난징 안전지대


독일 나치스당원이자 지멘스의 직원으로 난징에 근무하던 욘 라베는 외교관, 사업가 등

난징에 있던 다른 외국인들과 힘을 합쳐 '국제위원회’를 조직하고 자신의 자택과 대사관 부지 등을 중심으로

일본군이 들어올 수 없도록 '난징 안전지대’를 설정해 이곳에서, 피난하는 중국인들에게 음식과 머물 곳을 제공했었다.

'난징 안전지대'에 전체 약 20만 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일본군들로부터 대피할 수 있는 은신처 및 음식을 제공받았다.


▲ 난징에 있는 욘 라베의 집.


난징대학살 당시 욘 라베는 이 곳을 중심으로 난징 안전지대를 설정해 피난하는 중국인들을 도왔다.

난징안전지대 구역은 모두 난징 주재 외국대사관과 난징대학교 주변에 설치되었다.

또한, 이러한 안전지대를 주도한 욘 라베는 자신의 소유지를 650명이 넘는 피난자들이 피신할 수 있도록 개방하였으며,
안전구역 내의 행정 책임자들은 끔찍한 학살로부터 중국인들을 보호하고자 노력했다.


파나이 호 사건


파나이 호 사건은 1937년 12월, 난징 대학살이 한창 벌어지던 시기에

난징 인근의 양쯔강 유역에서 일본 해군(해군 소속 전투기)에 의하여 당시

난징인근 양쯔강 유역을 순찰중이던 미국 아시아함대 소속의 경비정인 파나이 호가 침몰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공식적으로 일본 정부에서 미국과 영국 정부에게 정중하게 사과하였고,

미국 정부에 배상금을 지불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100인 참수 경쟁


난징 대학살 시기인 1937년 11월 30일자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大阪每日新聞)과

12월 13일자 '도쿄 니치니치 신문'(東京日日新聞)에서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 소위와 노다 쓰요시(野田毅) 소위가

일본도(日本刀)로 누가 먼저 100인을 참살(斬殺)시키는지를 겨뤘다는 사실이 보도되었던 것을 말한다.


종전 후 무카이, 노다 두 소위는 함께 난징에서 군사재판을 받았고, 역시 최후까지

자신이 민간인 학살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육군 중장 다니 히사오(谷寿夫)와 함께 총살되었다.


▲ 1937년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서 보도 된 100인 참수경쟁 기사.


대학살 이후


1937년 12월 13일, 난징이 함락된 이후 6주간의 대학살이 계속되었고 1938년 봄에야 비로소 종결되었다.

그 후 일본군은 도시 전체를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한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일본정부는 난징에 있는 사람들을 피라미드형 위계질서에 따라 편재하는 방식으로 통제하는 방법을 고안했었다.
1938년 1월 1일, 일본은 새로운 시 정부인 '난징자치위원회'를 구성했다.


난징자치위원회는 도시의 행정, 복지, 금융, 상업, 치안, 교통 등을 담당하는

중국인 관리들로 구성되어 일본의 꼭두각시 역할을 했다.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의 통제 정책은 너무도 가혹하게 다뤘다.

1939년 4월에는 의학연구기관을 설치하고 마루타(통나무)같은 형식의 실험대상을 모아 생체실험 연구를 하곤 했었다.


이를 'Ei 1644부대'라 불리는데, 매주 10여 명의 사람들이 생체실험에 의해 희생당하고,

그 사체는 'Ei 1644부대'의 소각로에서 처리되었다.


이어서 1940년에는 왕징웨이(汪精衛)를 정부수반으로 친일성향의 괴뢰정부인

왕징웨이 정권이 난징을 수도로 수립되었다.


그러나, 민중들은 일방적으로 세워진 왕징웨이의 정권에 대한 지지가 거의 없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Ei 1644부대 등 일본군, 일본인들은

중화민국의 군대가 난징에 입성하기 전 모든 데이터를 파괴하고 도주했다.


난징전범재판


난징전범재판은 1946년 8월~1947년 2월까지 난징에서 B급, C급 전범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에서 1천 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460여 건의 살인, 강간, 방화, 약탈에 관해 증언했었다.


재판이 계속되면서 감춰졌던 증거들이 속속 공개되었는데,

여기서 일본 신문에 보도된 '100인 참수 경쟁'의 노다 쓰요시 중위와 무카이 도시아키 중위가 재판받게 된다.


두 사람은 '살인시합'을 벌인 장본인이었는데, 재판 도중 둘다 150명 이상을 죽였다는 사실을 일체 부인했으며

급기야 한 사람은 외국인 특파원이 멋대로 상상해 기사를 만들어 냈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 사람은 일본에 돌아갔을 때 아내를 놀라게 해주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 둘은 1947년 12월 18일 평결이 내려져 사형을 언도받는다.


또한 난징전범재판에서 다니 히사오 중장 역시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는 1937년 난징에 주둔한 일본군 6사단 육군 중장이었는데,

일본군 6사단은 난징 시내에서 온갖 많은 만행을 저질러왔던 부대였다.


1946년 8월, 재판에 회부된 다니 히사오 중장은 난징으로 소환되었다.

그를 기소하기 위해 법의학 전문가들이 난징시내 근처에 있는 매장지를 파헤쳐 수천 구의 유골을 발굴했다.


1947년 2월 6일, 다니 히사오에 유죄판결이 내려지면서 3월 10일 다니 히사오 중장은

전쟁법과 전쟁포로에 대한 대우에 관한 헤이그 협정을 위반하고 자신의 군대가

난징에서 30만 명 학살한 것에 동조한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으면서 공개총살이 집행된다.


극동국제군사재판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은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동아시아의 전쟁 범죄인을 심판한 재판이다.

도쿄 재판이라고도 한다.


60여 명 이상의 전쟁 범죄 용의자로 지명된 사람 중 28명이 기소되어,

판결 이전에 병사한 사람 2명과 소추가 면제된 1명을 제외한 25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는데,

이중 난징 대학살에 관련된 전범들 가운데 당시 난징대학살 지휘관이었던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朝香宮鳩彦王)는

일본 황족이란 이유로 처벌을 면해, 재판소에 출석하지 않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난징대학살 당시 총책임자였던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는 사형판결을 받아 교수형을 당했고,

중일전쟁 당시 일본 외무성 장관이었던 히로타 고키(広田弘毅)도 사형을 선고받아 교수형에 처했다.

하지만, 극동국제군사재판은 난징대학살 당시 주요 범죄자들이 단 한 명도 법정에 서지 않았다는 점이 한계다.


학살의 주요 책임자


▲ 조 이사무 (1895년 1월 19일 ~ 1945년 6월 23일)

- 난징전투 당시 아사카 야스히코의 참모.

난징대학살에 깊게 관여했고 포로 학살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 아사카 야스히코 (1887년 10월 2일 ~ 1981년 4월 12일)

- 일본의 황족으로서 난징대학살 당시 일본군 현장 책임자.

모든 포로들을 죽이라는 명령서에 서명했다.


▲ 마쓰이 이와네 (1878년 7월 27일 ~ 1948년 12월 23일)

- 난징대학살 당시 총책임자.

그러나 난징 함락될 당시 병으로 전선에 있지 않았다.


▲ 다니 히사오 (1882년 12월 22일 ~ 1947년 4월 26일)

- 난징에 주둔한 일본군 6사단 육군 중장.

난징 함락 직후 항복한 중국군 포로와 비무장 민간인을 대대적으로 학살하도록 지시하였다.


최근 상황 / 난징 대학살 논쟁


최근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7만평 규모의 난징 대학살 역사관을 설립하여 매년 12월 13일에 추모식을 가지며,

일본의 만행을 국제적으로 홍보하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하려고 하고 있다.


몇몇 중국인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학살했으며, 어린이는 물론 늙은 노인까지 잔인하게 강간한 뒤 잔인하게 살해했다."

라고 전해진다.


강간 직후 여성들은 즉시 살해됐는데, 주로 수족을 절단하는 방식으로 살해되었다고 증언한다.

또한 일본군은 누가 100명을 먼저 살해하는가를 놓고 경연대회를 열어 포상하기도 했는데,

당시 참수 경쟁 가담자는 1948년, 중화민국 정부에 의해 총살당한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쓰요시였다.


일본군은 심지어 중국인 군인 포로들을 총검 훈련에 이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일본의 만행은 사진 촬영이 취미였던 무라세 모리야쓰가 촬영하였다.


하지만 오늘날 일본에서는 일부 양심적 지식인을 제외하고는, 극우 및 우익 인사가

난징 대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환상설이나 부정론을 내세우거나

심지어는 교과서에서 난징 대학살을 언급하지 않거나 "난징 사건"이라고 사건을 일축하는 등

오히려 난징 대학살 언급을 금기시되고 있어서 중국측과 대립하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또한 난징 대학살 사상자의 숫자가 매우 제각각으로 엇갈리는데,

서양의 서적 중에서는 4만2천 명 설을 언급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15만이나 20만 명 설까지 다양하다.


또 일본 내에서는 양심적인 사학자라고 불리는 사학자들도

중국 측의 30만이라는 숫자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표자인 가사하라 토쿠시(笠原十九司) 츠루 문과대학 교수나 와세다 대학교 교수였던 호라 도미오조차도

25만 명 이상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기타 20만 명설, 15만 명설, 1만 명설, 3천 명설,

심지어는 일본 우익 진영에서는 40~50명 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많아 봐야 1~2명 설, 아예 없었다는 설까지 있다.


이러한 일본 극우 난징 대학살 부정파들이 존재하는 반면,

일본에서도 'No more Nanjing'이라는 이름의 시민단체가 있어 난징 대학살의 사실을 묵살하는 일본 극우 세력과

현 정부의 행태에 반대해 진실을 알리기 위해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난징 대학살을 소재로 한 영화나 다큐멘터리 등이 제작되어

난징 대학살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어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2010년 5월 16일에는 1937년 일본군의 `난징(南京) 대학살'에 군인으로 참가했던 일본인들이

최근 언론과 인터뷰하고 기록영화에 출연해 당시 상황을 증언하였다.


아이리스 장 -The Rape of Nanking(난징의 강간)


난징의 강간(The rape of Nanking)은 아이리스 장이 1937년 12월부터 1938년 사이에

6주간 일어난 난징 대학살에 관해 쓴 논픽션 책으로 1997년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책이다.


이 책은 저자 아이리스 장이 난징 대학살에 관한 자료조사에 기초하여 서술했으며,

저자는 '난징의 강간'을 통해 일본 정부가 1931년~1945년사이에 전쟁 범죄를 부끄러워할 만큼

충분히 사과하지 않았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난징의 강간'은 난징 대학살을 서구에 처음으로 소개한 영어로 쓰인 중요한 책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으며,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고 있다.


아이리스 장은 특유의 논리적인 웅변으로 "모르쇠"로 일관하는 주미 일본대사를

생방송으로 주미 일본대사의 논점을 조목조목 반박하여 제대로 논파하였다.


이를 계기로 아이리스 장은 미국내 중국 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에 일부 우익세력들은 '아이리스 장의 책은 왜곡과 날조'라 반박하며

아이리스 장에게 전화와 메일, 시위 등 방법으로 협박했었다.


한편, 이책을 일본에서 한 출판사가 번역출판을 시도하자,

일본 우익세력들은 출간을 저지하기 위해 대규모 규탄집회를 열었다.


결국 '난징의 강간' 일본어판 출간하려 했던 출판사는 계약을 파기하고

일본에서는 출판조차 되지 않은 이 책에 대한 비판서들이 등장하는 등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논란과 극우파들의 저지시도 끝에 일본어판은 2007년에 출간됐다.
아이리스 장은 일본우익들로부터 여러 협박과 우울증에 견디지 못해 2004년 11월,

자살로 추정되는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학살에 대한 피해 규모 논쟁


오래전부터 난징 대학살 피해 규모에 대해 논쟁이 격렬히 났었는데, 최근 중일 양국의 전문가로 구성된

중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난징 대학살의 피해 규모에 대해 논의를 놓고 2009년 12월 23일에

최종결론이라 불리는 보고서를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양측의 팽팽한 주장 대립속에 합의점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측은 난징 대학살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 수가 30만 명이며

“일본은 계획적인 침략을 감행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일본 측은 수만 명에서 최대 20만 명에 이른다는 다양한 주장이 존재하고 있다.

그 동안 일본에서는 난징 대학살을 '대학살'이라 부르지 않고 '사건'이라고 부르며 역사적 사실을 축소해 왔다.


일본 측은 "일본은 일부 군부 세력에 의해 전쟁에 끌려들어 갔고 그리하여 전선을 확대했다"라는

수동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1971년에 일본의 아사히 신문의 혼다 카츠이치 기자가 홍콩을 경유해 중국에 입국해서

당시 일본과 국교가 없던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내를 여행하며 신문상에 연재한 '중국 여행'이라는 르포가

화제와 인기를 끌면서 다시금 일본에 난징 대학살 논쟁의 불씨를 당겼으며,

이 과정에서 100인 참수 경쟁의 이야기나 731 부대의 이야기도 연재되었다.


이 르포기사를 반박하는 일본의 극우 언론인 산케이 신문의 스즈키 아키라 기자가

1973년에 난징 대학살의 환상이라는 책을 출판하였고, 일본내에서도 다시금 논쟁이 격해졌다.


그리고 1981년에 '중국 여행'이 책으로 출판되면서 또 다시 화제를 일으켰다.

그리고 일본의 교과서에는 1965년에 당시 사토 에이사쿠 총리 하의 문부과학성 검정 역사 교과서에서

난징 대학살이 삭제된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했었는데, 이에 이의를 제기한 이에나가 사부로 교수의

30년에 걸친 교과서 소송 재판이 1995년에 마침내 최고재판소의 판결로 교과서에 의무적으로 실리게 되었으나,

1999년부터 다시 학살 부정론이 우익 진영을 중심으로 크게 일어났다.


1937년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이 극에 달했을 무렵,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와 노다 쓰요시 소위가

100인 목베기 시합을 했다는 내용의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 개제되었던 게 있었는데, 최근 2005년에 그 유가족들이

100인 목베기 시합에 대해 보도했던 언론사들을 명예훼손을 이유로 고발하여 소송을 걸었다.


일본 극우 및 우익 단체들은 이 유가족들을 지원하는 모임도 결성하는 등 소송을 지원했다.

소송을 건 원고측은 "전쟁 수행 중에 일본군인들의 사기를 높이고, 국민들에게 선전하기 위해

언론에서 지어낸 얘기일 뿐 실제 목베기 게임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최근 이 사건에 대해 도쿄 지방 재판소는 100인 목베기 시합이 없었던 일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며

유가족 등 원고측에 패소판결을 내렸다.


2000년 1월 23일 오사카에서는 "20세기 최대의 거짓말! 난징 대학살을 철저히 검증하는 집회" 대회를 열어

부정파론자들이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난징 대학살 부정파론을 주장하는 부정파론의 대표적인 인물로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

아세아 대학교 교수 히가시나카노 슈도 등이 최선봉이 되어 다시금 부정론을 강하게 제기했다.


반면에 난징 대학살을 비롯해 일본 제국의 여러 전쟁 범죄에 대한 진실을 일본의 민간 단체 및 시민 단체에서

일본 제국의 전쟁 범죄를 규탄하고 진상규명을 밝히고자 하지만, 최근에는 일본의 부정파론이 대두되면서

난징 대학살에 대해 금기시되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다.


이들 일본 극우 세력들의 난징 대학살 부정파론이 대두되는 것은

일본 우익 세력들만의 선민사상이 극에 달한 광기이자 결과물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일본의 난징 대학살에 대한 반응은 크게 3부류로 나뉜다.


인정파 : 이들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전쟁에 의한 학살을 인정하고, 이를 반성하며, 난징 대학살의 실체를 인정하는 세력들.

대표적인 인물이 츠루문과대학교 교수로 지내고 있는 가사하라 도쿠시와 역사학자 이에나가 사부로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난징 대학살은 역사적 사실이다. 단지, 일본 정부가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도파 : 이들은 난징 대학살에서 민간인들의 희생은 인정하지만, 전쟁수행 중의 피해일 뿐,

희생자수도 불과 몇만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세력들.

대표적인 인물이 리쓰메이칸 대학교 교수로 지내고 있는 기타무리 미노루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일본군이 중국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입힌 적은 있다. 하지만, 계획적인 학살이 아닌 우발적이었다.'고 주장한다.


부정파 : 이들은 난징 대학살의 학살자체가 없었음은 물론,

아예 '난징 대학살 자체가 장제스의 중화민국 정부의 날조로 인한 거짓'이라는 이른바 '환상설'을 주장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세아대학교 교수로 지내고 있는 히가시나카노 슈도를 비롯한

도쿄도지사를 지내고 있는 이시하라 신타로 등 일본 극우세력들이다.

이들은 '난징 대학살은 전혀 근거가 없으며, 증거 사진들도 죄다 조작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일본 극우 세력 난징 대학살 부정파들의 주장


일본 극우세력들 가운데 난징 대학살에 대해서 이른바 '환상설'을 주장하는 부정파들은

오른쪽과 왼쪽 사진들을 예시로 들어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 난징 대학살 당시, 중국인을 목베는 일본군 사진.

일본 극우 부정파들이 '날조'라고 주장하는 사진들 중 하나이다.


오른쪽 사진의 설명은 '일본군이 난징 대학살 당시 중국인을 목베는 사진'인 것인데, 일본 극우 부정파들은

'난징이라는 증거가 없다. 먼저, 이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일본군이 죽이는 장면을 촬영하게 할 이유가 없다.'

라고 주장한다.


이어서 이들은 '일본군의 경우, 목을 벨 때 발을 뻗는 동작이 다르다.'는 등

갖가지 이유를 붙여서 결국은 '중국인이 일본사람 행세를 하는 조작한 사진'이라고 단정짓고 있다.


또한, 그 외에 강간 사진 등에 대해서도 부정파들은 온갖 논리를 내놓고 있다.

'중국인들이 일본군으로 변장해 조작한 이른바 포르노 사진'이라고 주장하면서 증거도 없이 무턱대고 부정을 하고 있다.


이들 일본 극우파들은 '난징 대학살에 관련된 사진들이라고 설명된 것들 가운데

단 한 장의 사진도 난징 대학살의 증거사진이 될 수 없다'고 결론을 짓고 있다.


즉, 이들 극우 부정파들은 '꼬투리'잡을 만한 빌미가 한가지 생겼을 때, 이를 최대한 과장한다.

특히 극우, 부정파들의 경우는 이를 빌미로 '난징 대학살이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라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아이리스 장의 '난징의 강간'이란 책의 경우,

여기서 책의 내용 중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게 되면 전부가 잘못되었다고 살짝 바꾸려고 하는 등인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주장하는 논리는 결국

'증거 사진이 없기 때문에 난징 대학살이란 사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란 논리적 비약으로 연결되고 있다.


일본 극우, 부정파들은

"난징 대학살은 연합국과 중국이 일본군을 비방하기 위해 정보전, 선전용으로 날조한 것이며,

일본 국민들에게 범죄 의식, 잘못했다는 의식 등을 심어주기 위한 선전용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말하고 있으며, "모든 게 일본을 비방하고 침몰시키기 위한 모략"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난징 대학살 부정론자들이 주축인 '새역모' 단체에서 발행한 '후소샤판 역사 교과서'에서는 '난징 대학살'이 아닌

'난징 사건'이라 축소하듯이 표현하고 있으며, 교과서에는 "지금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라고만 간단하게 정리되어 있다.

마치 '난징 대학살이란 것은 애당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라듯이 저술한 것이다.


이러한 일본 극우 부정파들의 역사왜곡 의식에 일본 역사학자들은

"이같은 일본의 역사 의식 배후에는 일본 정부가 있으며,

겉과 속이 다른 정책으로 이와 같은 역사 왜곡 등을 부추기고 있다."

라 말하고 있으며, 이러한 역사 왜곡에 대해서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원인


루스 베네딕트는 저서 《국화와 칼》에서 일본인이 전시중 보여준 특이성과 잔인성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그녀는 일본인들에게 최고의 가치는 일본을 사랑하는 애국심이 아니라, 천황에 대해 충성하는 충성심이라 분석했다.


일본 육군은 천황에 대해 봉사하게 돼 있고, 천황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목숨,

심지어 자신의 목숨조차도 가치 없는 것이라 교육받았기 때문에 그 도덕적 테두리를 벗어나는 범위에서는

아무런 거림낌 없이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말한다.


물론, 집단 학살은 서구에도 있었다.

그러나,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의 경우 독일과 자신을 동일시 했던 아돌프 히틀러 개인의 인격적 문제에서 출발한 것이었다면

일본군이 난징 대학살 등에서 행한 학살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차이이다.


난징 대학살의 원인을 평소에는 명령에 순순히 따라오는 일본인의 오랜 복종의 습성과

강압적인 수단으로 맹종을 요구하는 일본군의 체제가 복합되어 형성된 외형적인 군기가 전쟁 말기의 혼란상황에서

통제 및 감시 체제가 무너지자 필연적으로 함께 허물어진 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이는 학살에 대한 책임 회피의 논리가 되기도 한다. 그

러나, 이는 당시 대부분의 일본인이 근대적인 의미에서 자아가 확립되지 않아

정신적이고 자발적인 복종을 창출할 수 없는 무사상과 무신념의 맹종집단이었다는 것으로,

결국 일본인 스스로 전쟁을 수행할 자격이나 민주의식이 없었다는 걸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난징 대학살 사건


일본군은 난징 주변과 시내로 도망친 중국 국민당군 잔당을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6주 동안 포로들과 민간인들을 도륙했다.


학살의 정확한 규모는 불명확하지만,

전후에 일부 유골 매립지를 근거로 든 연구 결과가 수만 명 단위 이하로 내려가는 경우는 적다.


극동국제재판 판결에 따르면 최소가 12만 명이며 최대 추정숫자는 약 35만 정도이다.

일본 학계에선 10-20만명 정도가 중론이며 프랑스에선 약 9만명정도가 학자의 의견이다.


다만 여기서 9-20만명은 난징과 주변 변두리 정도에 한정한 것이며

주변 도시까지 포함한 것은 아니다.


당연하지만 20~30만 명은 난징 시내 학살 숫자가 아닌 난징 근교와 진격 도중 숫자도 포함한 것이며

당연히 난징 한곳에서 저렇게 나오기는 힘들다고 본다.


중국에서는 난징 대도살, 영어로는 Nanking Massacre.

일본에서는 '학살'이라는 명칭을 붙이지 않고 '난징 사건'으로 불렸었다.


물론 축소, 은폐하려는 의도였다.

치치지마섬 식인 사건을 '오가사와라 사건'으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


하지만 근래에는 일본의 교과서에서도 '대학살'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어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야마가와 출판사의 상세일본사(詳説日本史)와 도쿄서적에서는 여전히 난징 사건(南京事件)이라고 부르지만,

데이코쿠서원은 난징 대학살, 기요미즈서원은 난징대학살사건, 야마가와 출판사에서는

상세세계사(詳説世界史)와 일본문화출판에서는 난징학살사건 이라고 부르는 등이다.


또한, 2006년의 중일수뇌회담의 결과로 진행된 '일중역사공통연구' 논문의 일어판에서도

'난징학살사건' 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당연하겠지만, 일본 내에서도 정직한 인간들이 있다.

사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을지도 모른다.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킬 때는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시작해

빠른 시일 안에 주요 대도시를 점령하고 중국 국민당의 항복을 받아낸다는 속전속결이 기본방침이었다.


그러나 상하이 전투가 국민당군의 거센 저항으로 예상보다 길어지고 결국 오송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서야

승리를 거두게 되자 눈이 뒤집힐 대로 뒤집힌 일본군은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으로 진군했다.


1937년 10월 9일 상하이가 함락된 후 국민당 수뇌 멤버들은

난징을 전략, 전술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이동하기로 결정한다.


이 때 유일하게 탕성즈 한 사람만이 "난징을 필사적으로 지켜 생사를 함께 하겠다"고

방어전을 주장하면서 난징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남는다.


11월 15일 장제스는 수도를 충칭으로 옮겨 철퇴하고,

12월 10일 난징에 남아있는 중화민국군은 일본군의 최후통첩을 무시하자 일본군은 난징 점령작전을 개시했다.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난징 방어군 사령관 탕성즈는 전투 개시 직전에 더럭 겁을 먹고 장제스에게

퇴각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장제스는 당연히 거절했고 이에 탕성즈는 울며 겨자먹기로 전투에 임해야 했다.


12월 12일까지 중국군은 난징을 그런대로 잘 방어했지만 탕성즈가 처음부터 난징 외곽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방어할 수 있는 여러 요충지역들을 스스로 포기하는 등 방어 전략을 잘못 수립했는데다가

화력과 병력의 질적 측면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했기 때문에 장기적인 사수는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결국 12월 12일 일본군은 독가스를 뿌려 중국군 방어선을 무력화시켰고

탕성즈는 그날 오후 8시 전군에 퇴각명령을 내린 다음에 참모들과 함께 우한으로 달아났다.


사령관이 사라진 난징의 중국군은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히거나,

난징에 남아 계속 싸우거나, 난징을 어떻게든 벗어나는 등 완전히 와해된다.


양쯔강에는 수십만 난징 시민들과 중국군이 살기 위해 아수라장을 이루었고

일본군은 그곳을 집중 공격함으로 무수한 인명을 살상했다.


12월 13일 오전 4시에 난징의 정부 청사가 함락됨으로 난징은 일본군의 수중에 완전히 떨어졌다.

그리고 난징에는 아직 50~60만에 달하는 패잔병들과 시민들이 남아 있었다.


손쉽게 난징을 손에 넣은 일본군은 백기를 들고 항복한 국민당군은 물론, 패잔병을 처리한다는 명목으로

'모자를 오래 쓴 흔적이 있거나 손에 굳은 살이 박힌 젊은 남자' 모두를 닥치는 대로 끌어모아

기관총으로 양쯔강에 쓸어넣었다.


이들 중 과연 몇이나 패잔병이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애시당초 그 시대에 손에 굳은살이 안 박힌 남자가 많기나 할까 싶다.


물론 패잔병이 맞다고 쳐도 전투의지를 잃은 사람을 학살하는 것도 크나큰 전쟁범죄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야만적이나, 나중에는 총알이 아까워서 칼로 난도질하거나 생매장까지 했다고 한다.


전후에 학살에 참가한 한 군인의 일기가 발굴되었는데,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랜다."면서

"산채로 묻어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도 했다."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난징 대학살에 단일 규모로 가장 큰 학살은 무푸산 근처에서 일어났다.

난징의 북쪽, 곧 난징과 양쯔강의 남쪽 둑 사이에 있는 이 산에서는

5만 7,000명의 민간인과 중국의 전직 군인들이 살해되었다.


수많은 중국군의 시체를 처리하는 것은 일본군에게 또 다른 문제였다.

난징과 그 주변에서 학살당한 전체 중국군 가운데 일부만이 무푸 산에서 처형되었는데,

이 일부 시체 처리에만 며칠이 걸렸다.


시체를 매장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7천에서 8천구의 시체를 묻을 수 있는

커다란 구덩이를 팔 수 있는 곳을 찾기가 매우 힘들었다,


시체를 소각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일본군에게는 그럴만한 충분한 양의 연료가 없었다.

예를 들어 무푸산 학살 후, 일본군은 시체에 휘발유를 드럼통으로 부어 시체를 태우려고 했지만

불길이 시체를 재로 만들기 전에 연료가 바닥나는 일까지 있을 정도였다.


결국 대부분의 시체는 양쯔 강에 내던져졌다.

애초에 학살을 안했으면 이런 걸로 고생하지도, 연료를 낭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조난자 명단

실명이 확인되지 않은 분들은 그냥 김씨, 이씨 등으로 성씨만 씌여 있기도 하다.



조난자 300,000 만 명





조난자 한명한명의 신상정보를 정리해둔 자료





도서관처럼 조난자의 이름을 검색해서 열람할 수도 있다.












공중에서 본 난징대학살기념관 전경


난징대학살


1928년 남경에 국민정부가 성립되었다.

이에 일본에서는 동북 지역의 주도권 확보에 대한 위기감을 느껴 중국의 동북 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하려는 시도를 계속했고, 1931년 만주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수립해 만주지역을 점령한다.


장제스는 국제연맹에 만주 문제를 제소했으나 국제 연맹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물러서지 않았고,

이에 공산당과 국민당은 항일 전쟁을 위해 손을 잡고 국공합작을 행했다.


그러나 끝내 해소되지 않았던 공산당과 국민당의 갈등으로 인해

결국은 다시 갈라져 각각 항일 전쟁을 진행하게 된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1937년 11월에 상하이를 점령하였고

같은 해 12월, 중화민국의 수도 남경을 점령했다.


그리고 일본군은 상하이에서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입은 피해에 적개심을 불태우며

12월 13일부터 이듬해까지 약 두 달에 걸쳐 남경 시내 민간인들 및 포로들

수십만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는 대학살을 자행했다.


그 시기 일본군은 오늘날 중국에서 三光 作戰이라고 부르는, 무차별한 학살을 계속했다.

三光은 殺光, 燒光, 搶光으로, 당시 일본군이 닥치는 대로 죽이고, 불태우고, 빼앗았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난징대학살 기념관 건립 배경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열린 전범 재판에서는 난징대학살의 총 책임자였던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와

당시 외무대신이었던 이와타 고키가 그 책임을 지고 처형되었으나 대다수의 난징대학살 관련자들이 처벌을 받지 않았고,

처형된 이들도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에 합장되는 등 전범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다.


심지어 일본은 아직까지도 난징대학살이 본국의 소행임을 시인하지 않은 채

미온적인 태도만을 고수하고 있으며 일부 극우주의자들은 중국 공산당의 자작극이라는 주장까지 펼치고 있다.


난징대학살에 대한 논픽션 책《난징의 강간: 제2차 세계대전의 잊혀진 홀로코스트》

(The Rape of Nanking: The Forgotten Holocaust of World War II)의 저자 아이리스 장도

일본 극우주의자들의 협박에 못 이겨 정신이상을 앓던 끝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에 중국은 비극적인 역사를 잊지 않고자 난징대학살 기념관을 설립하였고

2014년에는 난징대학살 77주년을 맞이하여 12월 13일을 국가추모일(国际公祭日)로 지정하였다.


중국의 많은 유적들은 적지 않은 관람료를 받고 있는데 반해

이 곳 난징대학살 기념관은 예외적으로 입장이 무료이다.


최대한 많은 자국민들이 난징대학살이라는 사건을

생생히 기억하게 할 수 있도록 하려는 중국 정부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난징대학살 기념관 전시 구조


기념관은 1985년, 학살이 실제로 행해져 수많은 유골이 발견된 구덩이

만인갱이라는 곳에 건립되어 움푹 팬 형태를 띠며, 1995년 보수 및 증축 작업을 시행했다.


기념관은 야외와 실내로 나뉘어있는데 입장 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실외전시관에는

그대로 보존된 희생자들의 유골과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 동상들이 전시되어있다.


또한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비와 그들의 이름이 새겨진 통곡의 벽,

그리고 생존자들의 발자국을 그대로 본뜬 부조가 자리하고 있다.


실내전시장에는 다양한 기법을 활용한 전시물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우선 일본군들의 잔혹한 행위를 그대로 담아낸 사진자료들과 영상이 방대한 양을 자랑한다.


또한 알파벳 순서로 정렬된 희생자들의 명단 및 그들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파일,

난징대학살에 대한 자료, 현장복원모형, 영상, 유화, 학살에 사용된 무기 등이 전시되어있으며

다소 독특한 형태의 낙숫물 소리 전시장이라는 것도 있다.


낙숫물 소리 전시장의 이름은 12秒, 12초라는 뜻으로 어두컴컴한 홀 내부에서

12초마다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전시장이다.


이는 약 6주에 걸쳐 12초에 한명 꼴로 희생자들이 죽어나갔음을 의미하는 장치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죽어나갔는지 실감하기 위한 전시이다.


대학살의 참상과 희생자들의 삶, 유족들의 인터뷰 등 난징의 과거를 생생하게 재현해놓은 이 전시의 끝은

현재의 중국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몇 마디의 글이다.


"历史可以宽恕 但不可以忘却. 용서할 수는 있지만 잊어서는 안 된다.

前事不忘 后是之師. '과거를 기억해 미래의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등으로 결코 남경의 참상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해

두 번 다시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를 지켜 나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또한 전시관 출구 부근에는 분향소를 마련해 희생자들의 넋을 기릴 수 있도록 했다.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라는 공통적인 근현대사를 지나온 우리로서도 한번쯤 꼭 방문해 과거를 돌아보고

앞으로 일본과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해나가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학살당한 아이를 들고 절규하는 엄마의 동상
























학살 후 집단으로 매장된 현장


난징의 지앙동먼은 1만명의 사람들이 학살당해 매장된 장소다.

1998년 첫 발견시 208개의 해골이 발굴되었다.

발견된 뼈들에는 상당한 고문흔적과 총상 등이 발견되었다.












진회하(秦淮河)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 12 중 열 한 번째인 진회하(秦淮河)는

여섯 조대의 도읍이었던 고도 남경(南京, Nanjing)의 젖줄이면서 금릉 고 문화의 요람이기도 하다.


진회하의 안쪽 총 길이가 5킬로이어서 역사상 “10리 진회”라고 불린다.

진회하는 자연경치、산수원림、묘우학당、거리민가、향토인정을 일체로 담은

진회풍경의 중심이며 국가 AAAA급 관광지이기도 하다.


풍경구는 부자묘의 고건축물들을 중심으로, 10리 내의 진회하를 축선으로 하여

동쪽은 동수관공원으로부터 시작되어 서쪽은 서수관공원(지금의 수서문)까지다.


“강남의 금수지방, 금릉의 풍아지수”, “10리 주렴” 으로 일컬어지는 부자묘 —

진회풍경구에는 명승고적들이 해아릴수 없을 만큼 모여 있고 수많은 옛 이야기가 담겨 있다.


남경 도시 최초의 발상지이고 도시 발전상 2천여 년의 역사와 문화가 담겨져 있다.

또한 남경 역사상 제일 번화한 문화와 상업의 중심이기도 해서 남경 역사의 부침과 변화를 대표한다. 


진회하는 수려한 경치와 불빛 밝은 야경이 사람들의 발길을 끌지만

그 보다도 깊이를 알수 없는 역사의 뿌리와 강물에 어려 있는 전설이 더욱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사람들은 진회하라고 하면 장강(長江)의 한 지천이나 남경의 젖줄인 강물을 머리에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강가에 운집한 상인과 문인, 우아하고 옛 스러운 건물, 그 속의 아름다운 여인과 선비를 생각한다.


그토록 진회하는 자연명소보다는 인문명소에 더 어울린다.

과거 진회하 양안에 즐비한 절과 정원, 누각을 드나드는 사람들 모두가 귀족이었다면

오늘날 이 곳은 강남의 풍속을 보여주는 관광명소로 탈바꿈해 누구든지 다녀갈 수 있다.


진회하 기슭에서 가장 대표적인 문화명소로는 부자묘(夫子廟)를 들수 있다.

공자의 사당인 공묘(孔廟)격인 부자묘는 영성문(棂星門)과 대성문(大成門), 대성전(大成殿),

명덕당(明德堂), 존경각(尊敬閣) 등 건물들을 거느리고 있다.


단, 과거 성인을 기리던 곳이 오늘날은 번화한 상가로 변하고 옛 거리를 본따서 조성한 골목에는

남경의 온갖 음식과 특산물이 즐비해서 남경을 찾는 관광객들이 필히 거쳐가는 관광명소로 부상했다.


바로 이 부자묘에서 진회하 유람이 시작된다.

하지만 진회하 유람에서는 아름다운 강물과 화려한 야경만을 보는 것이 아니다.

진회하 물길 밑에 깊숙이 숨은 역사와 문화적 내용을 읽는 것이다.


진회하 기슭의 강남공원 (江南貢院)에서 장원급제자 58명이 나왔고

이름만 거론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명사들도 이 곳 출신이다.


사랑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명기들도 이 물가에서 자랐다.

과거 강남공원의 맞은켠에는 여인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곳이 있었고

그 곳에서 가장 유명한 강남의 명기 8명이 키워졌고 그들은 사랑을 위해 절개를 꺾지 않았다.


그들이 바로 진회팔염(秦淮八艶)이고 그들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다.

총명하고 아름답고 꿋꿋하며 재능을 갖춘 절색의 그 여인들이 있기에 오늘날 진회하는 여성다운 부드러움을 갖추고 있다.


첨원(瞻園)은 원래 왕부였다.

정자와 누각, 꼬불꼬불한 복도, 동산 등 강남풍의 아기자기한 정원으로 된 이 곳은

오늘날 중국역사의 한 단락인 태평천국(太平天國) 역사박물관으로 되었다.


옛스러운 건물과 고요한 정원을 거닐며 박물관에 전시된 1,600여 점의 문화재를 보면

기세좋게 시작되었다가 비극으로 끝난 태평천국의 그 한 단락 시대를 읽을 수 있다.


진회하는 수많은 이야기를 싣고 흐른다.

밤색이 짙어질 즈음 유람선을 타고 불빛이 명멸하는 속에서 노젖는 소리와 더불어

조용히 눈을 감으면 지난날의 장면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지난날의 진회하가 절망에 흔들리는 곳이었다면 오늘날 진회하는

그 아픔을 아련한 추억으로 감추고 아름다운 모습과 화려한 단장으로 남경의 관광승지로 탈바꿈했다.


진회하 유람선은 대부분 부자묘나 대성전앞 나룻터에서 출발한다.

소요되는 시간은 약 50분이다.


진회하 배놀이는 낮보다 밤에 하는 것이 좋다.

화려한 불빛이 어젯날의 비사를 더 잘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부자묘는 남경에서 가장 유명한 상가로 다양한 가게와 식당들이 다 모여 있고

따라서 이 곳에서는 남경의 모든 음식을 맛 보고 원하는 남경의 모든 특산물을 다 찾을 수 있다.



진회하에서 주원장과 유백온


명나라 개국 황제 주원장은 남경을 도읍으로 정한 후 홍무 5년(1372) 정월에

진회하 강변에 만 잔의 등불을 태우는 것으로 전쟁에서 죽은 병사의 차례를 지낸다고 반포했다.


이를 계기로 진회 등회는 그후 점차 화려하게 흥성하였을 뿐아니라 강 양안에도 하방(河房)이 생기고

수중에 화방(画舫)이 흥성해졌으며 10리진회에 무사가대(舞榭歌台)의 변화가 생겼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홍무 모년 8월 보름밤, 주원장이 군사 유백온(刘伯温)을 데리고 암행하였다. 

이 두 사람은 주인과 몸종으로 변장하고 누구도 몰래 살짝 황궁을 나가 진회야경을 구경하러 갔다.


그 누구가 알았으랴, 흐린 공중에는 달이라고는 없었다.

유백온은 화방을 하나 구해와 배위에서 술을 마시고 배의 주인더러 사주에 불을 달게 하고 흥을 돋구었다.


술자리에서 유백온은 황제께서 마음껏 즐길수 있도록 

화제를 주원장이 취미가 있어 좋아하는 대련(对联)으로 이끌었다. 


유백온은 주위를 둘러 본 다음 상연(上联)하기를 :

“추석에 달이 안 보이니 불을 몇잔 켜놓고 강산에 생기를 띄우는구나”라고 하니


말이 끝나기도 바쁘게 주원장이 받아서

“경첩에 우뢰 소리 안들리니 북을 수차례 두드려 천하에 위풍을 떨치더라”고 하였다.


유백온은 듣더니 좋다고 무릎을 탁쳤다.

주원장은 유백온과 같이 서서히 행진하는 화방에서 경치를 구경하거나

또는 술집, 가녀(歌女)를 주제로 시를 읊고 재미있게 즐겼다.


술좌석이 끝난후 유백온은 주원장과 함께 언저리 언덕에 올라 술집 간판기가 바람에 흩날리고

해금소리가 끝없이 들려오는 와중에 남녀들이 어깨동무하고 있는 낭만적인 모습을 구경하였다.

그들은 미녀를 흠상하고 해금소리를 들으면서 진회 강변을 밤늦도록 구경하고서야 돌아왔다.


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주원장은 흥에 겨워 진회의 시구를 한 소절 읊었는데 

“좋은 물에 좋은 산, 좋은 바람에 좋은 달, 천추의 좋은 자리여라;

색상에 반하고 소리에 반하고, 정에 반하고 꿈에 반하고, 대대손손 반할 사람이구나” 라는 내용이다.


마두장(馬頭墻)


지붕의 경사에 따라서 계단식으로 구성된 주택의 측벽으로, 집 사이에 설치되어 화재시 불길이 번지는 것을 차단하는 역할도 한다. 

휘주(徽州) 지방의 민가에서 특징적으로 사용되었다. 산처럼 높다고 해서 ‘산장(山墻)’이라고도 한다. 




































진회하(秦淮河) 선착장
진회하(秦淮河) 선착장은 부자묘 앞의 천하문추(天下文樞) 패방과 닿아 있다.



진회하(秦淮河)  선착장 주변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 12 중 열 한 번째인 진회하(秦淮河)는

육조의 도읍이었던 고도 남경(南京, Nanjing)의 젖줄(母親河)이다.


진회하의 옛 이름은 "회수(淮水)"였고, "용장포(龍藏浦)"라고도 했다.

원류는  동쪽으로 구용현(句容縣) 보화산(寶華山), 남쪽으로 율수현(溧水縣) 동려산(東廬山)이다.


두 물줄기가 강녕현(江寧縣) 방산태(方山埭)에서 만나서 남경성 동쪽 수문으로 흘러 들어와

성을 관통하여 서쪽 수문으로 빠져나가 장강으로 흘러들어가는데, 전체 길이는 약 110Km이다.


성밖의 물줄기는 외진회(外秦淮)라고 하고,

성내 물줄기는 내진회(內秦淮)라고 하는데, 내진회의 길이는 약 5Km이다.


전해지기로 진시황제가 이곳으로 순행 왔을 때 방산(方山)을 파고 장롱(長隴)을 잘라

금릉(현재의 남경)의 왕기(王氣)를 없앴던 연고로 진회하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연안에 부자묘(夫子廟), 첨원(瞻園) 등 고적들이 많아서 남경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夜泊秦淮(야박진회)   




泊秦淮 (박진회, 진회에 배를 대고)  / 두목(杜牧)


烟籠寒水月籠沙  (연롱한수월롱사)   안개는 차가운 물결을 감싸고 달빛은 모래밭을 덮는데
夜泊秦淮近酒家  (야박진회근주가)   오늘밤 진회에 배를 대니 술집이 가깝네  
商女不知亡國恨  (상녀부지망국한)   기녀들은 망국의 비애를 알지 못하고
隔江猶唱後庭花  (격강유창후정화)   강 건너에서는 오히려 후정화 노래를 부르네


롱(籠) : "휩싸이다. 둘러싸이다."
후정화(後庭花) : 후정화는 가곡의 이름으로 진숙보(陳叔寶)의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를 가리킨다.

진숙보가 진(陳 )나라의 後主로 재위시 황음무도하고 향락에 젖어 조정은 파탄지경이 되었다.

후에 진후주의 "옥수후정화"는 망국의 음악을 대표하는 용어로 쓰인다.  


-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 : 남북조 시대에 陳(진)나라의 마지막 왕 후주가 사치하고 놀기를 좋아 하여

항상 연회를 베풀고 빈객을 청하여 주색에 빠져 불렀던 음란한 노래를 말한다.

진(陳)나라 후주(後主) 진숙보(陳叔寶)가  지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악학궤범에 후전(後殿) · 후정화(後庭花), 북전(北殿)이라하여

고려 충혜왕(忠惠王)이 뒤뜰에서 여자들과 어울려 불렀다고 전해지는데 조선 세종 때 폐지되었다고 한다.

이어 성종 때 성현(成俔)이 왕명에 의하여 악가(樂歌)를 개산(改刪)할 때, 조선창업을 송축한 가사로 개작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향악공(鄕樂工)을 뽑을 때 시험곡으로 썼다는 기록도 있다.


- 진 · 후주(陳·後主) : 이름은 숙보(叔寶),자는 원수 선제의 아들이다. 황음무도하여 수(隋)나라에  망했다.

수의 대군이 이르렀을 때에도 궁중에 주악을 울리고 무녀들은 춤을 추고 있었다 한다.

그에게는 원래 기녀출신인 장려화(張麗華)란 후궁 장귀비가 있는데 키가 7척이고 아름다운 미모와 요염한 모습에

사람을 꿰뚫어보는 재주가 있어 조회 때에도 후주와 함께 정사를 논했다고 하며, 정궁인 광조전(光照殿) 이외에도

임춘(臨春), 결기(結綺), 망선(望仙)에게 누각(樓閣)을 지어 회랑으로 연결하여 서로 통하게 하고

건물의 높이는 구름을 꿰뚫을만큼 높았고 그 화려함이 마치 선경에 들어온 듯 했다고 한다.

진후주 자신은 임춘각(臨春閣)에, 장려화(張麗華)는 결기각(結綺閣)에 그리고 망선각(望仙閣)에는

공.공.(龔.孔) 2 귀비의 거처로 삼았다고 하며 그밖에 왕(王). 이(李) 두 미인、장(張). 소(薛) 등 2숙원(二淑媛)、

원소의(袁昭儀)、하첩여(何婕妤)、강수용(江修容) 등 천하일색의 미녀들이 있었다고 한다 . 

남북조 때 진(陳)나라 후주(後主)는 문집을 39권이나 남겼다고 할만큼 글을 대단히 좋아했다고 한다.

그가 작사한 가곡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 임춘악(臨春樂) 등이 남아 있다. 

주색에 빠져 주야로 음탕하게 놀다가 나라를 망쳤을 그 때 부른 음란한 곡조가

악부오성가곡(樂府吳聲歌曲)인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 혹은 玉樹曲(옥수곡)이라고도 한다.


시인 두목(杜牧)은 진후주(陳後主)의 고도(故都)를 지나다가 이와같은 역사를 떠올리면서

"상녀불지망국한(商女不知亡國恨) 격강유창후정화(隔江猶唱後庭花) :

장사치 계집들은 나라 망한 한도 모르고 강가에서 아직도 후정화(後庭花) 노래를 부른다"

고 하는 박진회(泊秦淮, 진회에 배를 대고)를 지었다고 한다.


진(陳)나라 마지막 임금 숙보(叔寶)는 수(隋)나라 군대가 왕궁을 공격하는데도 평소처럼

성 안에서 술을 마시고 시를 읊고 노래하기에 여념이 없다가 결국 포로가 되었다.

그는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 ㅡ 뒤뜰의 꽃 후정화(後庭花)라는 노래를 짓고

후궁의 미녀들에게 이를 익혀 노래하게 했다고 하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를 망국의 노래라고 했다고 전한다.


두목(杜牧, 803~852)

중국 당나라 말기의 시인. 자는 목지(牧之). 호는 번천(樊川).


두보(杜甫)에 상대하여 소두(小杜)라 부르며, 시풍은 호방하면서도 청신(淸新)하고 특히 칠언절구에 뛰어났다.

828년 진사(進士)에 급제했다.


근체시(近體詩)는 서정적이며 풍경을 읊은 것이 많은데 격조가 청신(淸新)하고 감정이 완곡하고도 간명하다.

박진회(泊秦淮) · 산행(山行) · 강남춘절구(江南春絶句) · 아방궁부(阿房宮賦)와 같은 소시(小詩)들은

예로부터 사람들이 즐겨 읊어왔다.


두목은 대화(大和) 7년(833), 개성(开成) 2년(837), 대중(大中) 2년(848) 세 차례에 걸쳐

배를 타고 금능에 와서 진회하 선착장 주변을 구경하고 진회를 노래하는 작품들을 후세에 남겼다.


그의 시는 청신하고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글이다. '박진회(泊秦淮)'는 진회의 아름다운 경치를 주제로

남조 멸망의 소리를 빌어 취생몽사하는 당조말기 통치자들을 풍자하여

“연기는 찬물을 뒤덥고 달은 휘장에 가리웠도다,

야박진회에 술집이 가깝더라.

장사꾼 여자는 나라를 잃은 원수를 잊었는가,

강을 마주하고 울안의 꽃을 노래하는구나.”

라고 읊었다.


두목의 진회를 노래하는 명작 '강남춘(江南春)', '청명' 등은 사람들이 널리 흥얼거리며 읊었고

또 진회의 역사와 경치를 찾는 까닭이 되기도 했다.


'박진회(泊秦淮)'는 중국 한시 전체를 망라해서도 몇 편 찾기 어려운 절창이라 평가되고 있다.

이 시는 번역을 하기보다는 입안에서 굴려서 마치 영롱 월롱들이 구슬 구르듯 입안에서 저절로 놀 수 있을 때까지

읽고 또 읽어야 비로소 그 음률과 주옥같은 글 한자 한자들의 맛이 살아 난다.


무심코 배를 댄 진회의 주가에서 들려오는 노래소리...

이는 망국의 노래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가 아닌가 

어찌 술 따르는 주점의 여인이 망국의 한을 알리오... 

나그네 마음만 쓸쓸하다...


진회하(秦淮河) 선착장 주변에 부자묘(夫子廟)라는 공자(孔子)의 사당이 있다.

이곳은 수많은 남경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공자의 사당에 참배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부자묘 맨 뒤편에 있는 존경각(尊經閣)이

무료 민간예술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고 주변에 상가도 많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남경 부자묘는 남경을 찾는 외지인들이나 외국인들도 많이 들를만큼 널리 알려진 곳이다.

부자묘 정문에서 진회하(秦淮河)를 따라 왼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고진회(古秦淮)’라는 초서체의 현판이 걸린 높다란 일주문이 하나 나온다.


그 앞으로 흐르는 진회하가 바로 이 시의 창작 현장이다.
당(唐)나라 시인 두목(杜牧)은 배를 타고 물길을 따라가다가 어느 날 저녁 이곳에 이르렀다.


그는 여기서 하룻밤을 지낼 요량으로 강가에 배를 댔다.

강물은 뿌옇게 안개에 덮여 있고 모래밭은 하얗게 달빛에 싸여 있었다.


이렇듯 아름다운 진회하의 야경을 만끽하고 있노라니 갑자기 귀에 익은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귀를 기울여 자세히 들어보니 부근에 있는 술집에서 기녀가 <옥수후정화>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그 노래에 얽힌 역사적 사실이 떠올랐다.
남경을 도읍으로 삼은 진(陳)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후주(後主, 582-589년 재위)는

정사에는 관심이 없고 궁녀들을 데리고 음주가무나 즐기며 세월을 보냈다.


북쪽에서 수(隋)나라 군사가 진나라를 치러 내려오고 있었지만 후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날도 후주는 손수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라는 노래를 지어

귀비 장려화(張麗華)에게 건네주며 불러 보라고 했다.


그때 수나라 장수 한금호(韓擒虎)가 쳐들어 왔다.

후주는 다급한 김에 장려화와 함께 연지정(臙脂井)이라는 우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후주는 이내 수나라 군사에게 붙잡혀 포로로 끌려가고 이로써 진나라는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러한 치욕적 사건이 있은 뒤로 연지정은 욕정(辱井)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게 되었는데

남경 사람들이 이 일을 잊지 않기 위하여 현무호(玄武湖) 남쪽의 계명사(鷄鳴寺)라는 절 안에 이 우물을 복원해 놓았다.


<옥수후정화>는 이처럼 나라의 운명을 갈라놓은 망국의 노래였다.

그런데 진나라의 도성이었던 금릉(金陵, 지금의 강소성 남경) 땅의 기녀가 아직도 생각 없이 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노래를 듣는 순간 시인은 심경이 어떠했을까?

아마도 정사에 힘쓰지 않고 환락이나 추구하는, 그래서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군신들이 한탄스러웠으리라.


아니 어쩌면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그래서 오히려 속 편하게 살 수 있는 기녀들이 부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진나라 후주는 일반적으로 정사는 돌보지 않고 가무음곡에만 도취하여 취생몽사한 무능한 군주라는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그가 만약 <옥수후정화>를 짓지 않았다면

과연 2백 몇 십 년이 지난 두목의 시대에 이르도록 여전히 민중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가 만약 예사 군주들처럼 근실하게 정사를 돌보는 범상한 군주로 살았다면

중국 역대 왕조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왕처럼 일찌감치 민중들의 기억에서 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그가 정치적으로는 비록 실패한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예술적으로는 후세에 길이길이 남을 시를 지어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를 무능한 군주였다고 비판만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군주의 자리에 앉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자신도 지키고 나라도 잃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적 능력도 없는 사람이 군주가 된 것이 문제였다.


능력이 없으면서 능력을 필요로 하는 자리에 앉는 것은 능력 있는 사람이

구성원들을 위해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빼앗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로 구성원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공공의 번영을 위해 일하는 사람에게는 무능도 큰 죄악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무능의 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없는가?

아니, 나는 과연 ‘무능의 죄’를 범하지 않고 사는가?






중국고대최대과거고시장 강남공원(江南貢院)의 명원루(明遠樓)


부자묘(夫子庙) ㅡ 진회(秦淮) 풍경구에 중국 고대 최대 과거고시장이었던 강남공원(江南貢院)이 있다.

중국을 지배해온 과거 시스템의 역사는 질기고 길다.

수나라 때부터 시작되어 청나라 광서 31년(1905)에 폐지령이 내려지기까지 무려 1300여 년,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인생이 과거에 웃고 울었을까.

그들 중 상당수가 거쳐 갔을 과거시험장이 바로 난징에 있다.


난징의 ‘강남공원(江南貢院)’은 최대 규모의 과거시험장이었다.

무려 2만 명이 동시에 시험을 치를 수 있었던 규모다.


강남공원이 세워진 송 건도(乾道) 4년(1168)부터 과거제가 폐지되기까지,

800여 명의 장원과 10만여 명의 진사가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명·청 시기에는 중국 전역에서 절반이 넘는 관리가 강남공원에서 나왔다.

명실상부한 ‘중국 관리의 요람’이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과거 수험생은 거지에서 비둘기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되풀이해야 했다.

강남공원의 수험생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던 이는 103세였다고 한다.

믿기 힘들긴 하지만, 아무튼 과거의 개방성을 대변하는 동시에 그 소모성의 끝을 보여주는 사례다.



과거시험에 응시하는 학생들의 복장에 대한 설명


중국역대장원명록

이태백, 소동파 3부자, 두보, 백거이, 원목, 이홍장, 증국번, 문천상, 오경신 등의 이름이 보인다.


과거시험과 합격자에 대한 급수와 명칭이 나와 있다. 성적이 가장 우수한 일등이 장원(狀元)이다.


청대 지역별 합격자 통계표


호사(號舍)  과거시험장  칸막이가 있고 한 사람씩 이 공간 안에서 시험을 본다.


공원, 즉 과거시험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공간은 일종의 개인 시험방이라고 할 수 있는 호사(號舍)다.

사방을 감시할 수 있는 명원루(明遠樓) 양쪽으로 1인 1칸의 호사가 마치 마구간이 늘어서 있듯 연이어 있었다.


폭이 1.5m도 되지 않는 호사는 수험생이 아흐레 동안 숙식하며 시험을 치르는 곳이었다.

물론 방의 문은 없었다.


양쪽 벽을 가로지르는 나무판 두 개 가운데 위판은 책상, 아래판은 걸상의 용도였다.

밤이면 위판을 꺼내고 아래판에서 잤다.


당연히 다리를 펴고 자는 건 불가능했다.

이런 공간에서 과거를 치른다는 것은 불편함 그 이상이었다.

심지어는 상한 음식을 먹고 죽거나 독사에 물려서 죽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시험감독관 임칙서(林則徐)


감독관이 답안 작성하는 유생들을 지켜보고 있다.

임칙서는 청말 아편거래를 근절시키기 위해서 흑차대신의 자격으로 광주로 내려가

불법거래로 적발된 아편을 모아서 불을 질러버렸는데 이것이 빌미가 되어 영국과 아편전쟁을 치루게된다.

이 일로 임칙서는 우루무치로 좌천되었다.



협대(夾帶)  과거시험에 등장했던 각종 컨닝페이퍼. 깨알같은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컨닝에 사용하던 기이한 서적 확대본


과거시험에서 컨닝하는데 쓰였던 기이한 서적


공원방벽도. 과거시험 합격자 명단 발표


과거시험 합격자 명단


오의(烏衣)


중국 관복 중에는 검은색이 있는데 오의(烏衣)라고 한다.

부자묘의 거리를 걷다보면 검은 관복을 입은 관리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골목을 만날 수도 있는데

오의항(烏衣巷)이라고 한다.


일품 무관(一品 武官)의 홍모(紅帽)


일품 무관(一品 武官)의 복장


장원급제하면 거리에 말을 타고 나가서 행사를 치루었다.

우리나라에선 장원에 급제하면 모자에다 어사화를 꼽고 말을 타고서  거리를 돌았다.


문천상(文天祥) 장원급제자 중 이름을 떨친 이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홍장(李鴻章)을 소개하고 있다.


증국번(曾國藩)


임칙서(林则徐)


과거제도를 폐기한 인물


청 광서제 1905년 7월 과거제도가 전국적으로 동시에 폐지되다.

이로써 13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시행해 왔던 과거제도가 중국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오경재(吳敬梓) 기념관


 오경재(吳敬梓, 1701~1754)는 서른셋에 고향 안후이 취안자오(全椒)를 떠나 난징으로 왔다.

그는 일찍이 열셋에 어머니를 여의고 스물셋에는 아버지를 여의었다.


유산을 둘러싸고 친척들과 다툼까지 있었던 고향에 더 이상 미련이 없었을 것이다.

난징으로 이사한 몇 년 뒤(1736) 추천을 받아 박학홍사과(博學鴻詞科)에 응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당뇨병이 심해져서 결국 시험을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형식적인 팔고문 중심의 과거제도를 혐오했기에 자발적으로 시험을 거부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유가 지식인 사회에서 부귀공명의 루트는 ‘과거’였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지속되어온 절대제도에 부작용이 없을 수 없다.


오경재는  부귀와 공명을 얻기 위해 몸부림치는 지식인, 그렇게 일그러진 괴물을 양산해내는 과거제도,

 ‘유림’의 심장부를 풍자소설 <유림외사(儒林外史)>를 통해 거침없이 희화화한다.


유림외사란 ‘유가 지식인 사회의 야사’라는 의미다.

부귀공명을 얻고자 한다면 과거제도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시대,

당시 지식인은 과거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부귀공명을 골간으로 한다.

부귀공명을 흠모하는 마음에 비열한 작자에게도 알랑거리는 이가 있고, 부귀공명에 의지해 거드름을 피우는 이가 있고,

부귀공명에 뜻이 없는 듯 고결하게 굴다가 남에게 간파되어 비웃음거리가 되는 이도 있다.

부귀공명을 끝까지 마다하며 최상의 품격에 도달한 이는 황허의 세찬 물살 속에서도 굳건한 기둥 같은 존재가 된다.”


부귀공명을 뼈대로 삼았노라고 서문에서 말하면서

<유림외사>는 그렇게 예속화된 지식인의 속물근성을 신랄하게 보여준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과연 오경재는 박학홍사과에 응시했을까?

분명한 사실은, 그랬다면 <유림외사>는 결코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는 것이다.


부조리한 시스템의 공모자가 아니었기에 그 부조리를 가차없이 비판할 수 있었다.

절대다수의 지식인이 그 시스템의 공모자였다는 게 시대의 비극이다.


오경재는 청나라가 번영을 구가하던 강희·옹정·건륭 시기에 살았다.

소위 강건성세(康乾盛世)라는 당시에 아이러니하게도 문자옥(文字獄)이 자행되었다.


문자옥은 한족 지식인을 옭아매는 수단이었다.

말과 글로 인해 죄를 입지 않기 위해서, 지식인은 감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지극히 형식적인 팔고문을 익혀 과거에 합격해 관리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지식인에게 정해진 루트였다.

‘권력-지식’을 구현한 이 루트에서 벗어나는 것은 소외와 배고픔을 의미했다.


<유림외사>에서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두소경(杜少卿)이 바로 오경재 자신을 비유한 인물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조상의 뜻을 따르지 않은 ‘불초(不肖)’한 자손이었다.


두 사람 모두 과거의 길을 걷지 않았다.

명망 있는 집안의 후손인 두소경은 돈을 하찮게 여기고 남을 돕기를 즐겼으며 세도가를 경시했다.


가산을 탕진한 그는 고향을 떠났지만 늘 즐겁게 살았다.

오경재의 삶은 바로 두소경과 같았다.


마음 가는 대로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던 오경재의 만년은 매우 빈곤했다.

글을 팔아 살면서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겨울날 저녁이면 그는 친구와 함께 성밖을 돌면서 노래했다.

오경재는 이를 난족(暖足), 즉 ‘발을 덥힌다’고 했는데, 난방을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것이다.


거지 · 죄인 · 벌 · 새 · 원숭이 · 파리 · 비둘기, 다름 아닌 과거 수험생의 7가지 모습을 빗댄 표현이다.

이 재미난 비유는 <요재지이(聊齋志異)>에 나온다.


포송령(蒲松齡, 1640~1715)은 여러 번 낙방한 뒤 과거에 마음을 접고 <요재지이> 창작에 몰두했다.

과거가 사람을 어떻게 쥐락펴락했는지, 앞의 7가지 비유를 통해 알아보자.


과거시험장에 들어갈 때는 맨발에 대바구니를 든 ‘거지꼴’이다.

부정행위를 방지하기 위해서 모든 지참물은 대바구니에 넣은 채 신발까지 벗고 검사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관리들이 호통 치면서 이름을 부를 때면 마치 ‘죄수’ 같다.

문이 없는 호사에 들어가 시험을 치를 때면 얼굴과 발이 드러나니, 늦가을 추위에 떠는 ‘벌’과 같다.


시험을 끝내고 나오면 정신이 어지럽고 하늘과 땅의 색깔마저 달리 보이니, 마치 새장에서 나온 병든 ‘새’와 같다.

시험이 끝났다고 끝이 아니다. 결과가 발표될 때까지 합격과 불합격의 길몽과 악몽에서 헤맨다.


고대광실이 바로 눈앞에 있는 듯하다가도 홀연 백골로 변한 느낌이 든다.

좌불안석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 마치 줄에 묶인 ‘원숭이’ 같다.


드디어 발표일, 합격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빠진 걸 알게 되는 순간 얼굴이 샛노래지고

죽은 사람처럼 멍해져서는 독약을 먹은 ‘파리’처럼 건드려도 감각이 없다.


처음엔 실망과 분노에 차서 과거 따위는 다시는 안중에도 두지 않을 기세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 마음도 가라앉고 다시 과거를 치르고 싶어 근질근질해진다.


마치 알을 깨버린 ‘비둘기’가 나뭇가지를 물어다 둥지를 틀고 다시 알을 품으려는 것과 같다.

이런 상황을 두고 포송령은 이렇게 말한다.

“당사자는 목메어 울면서 죽고 싶겠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이보다 더 우스운 게 없다.”


과거제 폐지와 더불어 강남공원 역시 용도 폐기된다.

민국 7년(1918)에 강남공원 대부분이 철거되고 명원루 · 지공당 · 형감당 및 호사(號舍) 일부만 남겨졌다.


난징국민정부가 수립(1927)된 뒤 명원루는 시정부 대문의 역할을 했고,

강남공원의 옛 건물들은 정부 각국(各局)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항일전쟁 시기에는 왕징웨이 정권의 행정원과 최고법원이 이곳에 들어섰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는 난징시 중의원(中醫院)이 이곳을 사용했다.


강남공원이 유적지로서 보호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다.

2014년 8월 11에 개관한 ‘중국과거박물관’은 바로 강남공원에 자리하고 있다.





강남공원(江南貢院) 옆으로는 진회하(秦淮河)가 흐르고 있다.


강남공원(江南貢院) 출구로 나오면 바로 진회하



강남공원 옆 진회하 위에 있는 이 다리는 급제한 유생들만이 다시 건너올 수 있었고 낙방한 고시생들은 다시 건너오지 못했다.




이향군(李香君)과 도화선(桃花扇) 


명말, 위충현(魏忠賢)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뜻있는 관료와 선비들이 결성한 동림당(東林黨)이라고 있었다.


위충현을 탄핵한 동림당은 그 후유증으로 수 많은 뜻있는 관료와 선비들이 목숨을 잃거나

폄직 및 귀양을 가서 큰 타격을 받았다. 


그 후 만주에서 흥기한 청나라가 북경을 점령하자

명나라의 잔존세력은 남쪽으로 도망쳐 금릉 즉 남경에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역사상 이를 남명왕조라라고 한다.

금릉에 남명왕조가 세워지자 장강 이남에 거주하던 동림당에 속했던 인사들이 모여들어

당을 만들었는데 이를 복사당(復社黨)이라고 했다.


후방역(侯方域)은 동림당 소속의 저명한 인사였던 조부와 부친의 후광으로 복사당의 영수가 되었다.

그때 남명정권의 실세는 위충현(魏忠賢)이 이끌던 엄당(閹黨)의 잔당인 완대성(阮大鋮)과 그 일당이었다.


당연히 엄당의 잔당들과 복사당은 대립했다.

복사당의 영수였던 후방역(侯方域)은 진회(秦淮)의 가기(歌妓) 이향군(李香君)과 우연히 만나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후방역은 서력 1618년에 태어나서 1655년에 죽은 명말청초의 3대 산문(散文)의 대가이다.

자는 조종(朝宗)이고 명조의 귀덕부(歸德府:今河南商丘) 출신이다.


후방역은 명조의 호부상서를 지낸 후순(侯恂)의 아들이고 조부 역시 북경의 명나라 조정에서

명망있었던 동림당의 일원이었다가 모두 환관일당을 지창하는 엄당에 의해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후방역은 이향군에게 부채에 시를 한 수 써서 비녀 한 개와 함께 보냈다.

다른 한편 완대성도 역시 이름을 감추고 다른 사람을 시켜 많은 혼수를 보내

이향군을 농락하려고 했으나 이향군이 알고 단호히 거절하고 돌려보냈다.


이로 인해 완대성이 마음속에 깊은 한을 품게 되었다.

남명의 황제로 새로 즉위한 홍광(弘光) 황제에 의해 기용된 완대성은 자기의 권력을 이용하여 후방역을 모함했다.


후방역이 화를 피해 사가법(史可法)이란 사람에게 몸을 의탁하기 위해 달아나자

완대성은 이향군을 다른 사람에게 강제로 결혼을 시키려고 했다.


이향군이 결연히 완대성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머리를 기둥에 부딪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머리에서 난 피가 후방역에게서 정표로 받은 부채를 적셨다.


이때 후방역의 친구 양용우(楊龍友)란 사람이 재빨리 부채에 떨어진 피를 이용하여

꽃이 핀 복숭아나무를 그렸다.


이윽고 남명이 멸망하자 이향군은 산으로 들어가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다.

계속해서 청나라에 의해 양주(揚州)가 함락되자 후방역은 도망쳐 이향군을 찾았으나

그도 결국 출가하여 도사가 되었다. 


공상임(孔尚任)의 도화선(桃花扇)이라는 희곡은 청왕조 시대 때의 최고의 걸작이다.

공상임은 도화선이라는 작품을 쓰는데 10여 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공자의 64대 손인 그가 도화선을 출간하자 북경천지를 뒤흔들었다.

사람들은 서로가 관람을 먼저 보기 위해 다투었으며 낙양의 지가를 폭등시켰다.


도화선이라는 희곡의 내용은 바로 이향군과 후방역의 사랑 이야기다.

공상임은 작품 속 여기저기에 춘추필법을 발휘하여 세태를 풍자했는데

‘ 연인들의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일을 빌려 나라의 흥망에 대한 감상을 그려냈다. ’고 했다.

도화선을 출간한 공상임은 강희제(康熙帝)에 의해 관직에서 파면되었다. 


이향군은 명나라 말 남경의 진회(秦淮) 구역 출신의 이름난 기생이었다.

그녀는 남명정권이 멸망하는 과정에서 낭만성을 지닌 비극적인 여주인공이다.


이향군의 종적에서 축소된 남명의 비극적인 운명이 조명된다.

이향군은 어려서부터 예인(藝人)들을 따라다니며

기예, 음률, 시사, 죽사(竹絲) 및 비파 등의 악기를 배워 모두 정통했다.


특히 남곡(南曲)에 정통하여 그 목소리가 감미롭기 그지없어

천하 사방의 선비들이 사모하여 찾아왔다.


후방역은 원래 하남(河南) 출신으로 강남의 풍물에 대한 소문을 듣고

금릉(金陵)으로 들어와 직업을 구했다.


풍류남아의 신분으로 가슴에 큰 뜻을 품고 기개가 높은 후방역은

재주가 넘쳐 이내 복사당(復社黨)의 명사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금릉의 진회(秦淮) 강변에 살고 있던 모벽강(冒辟疆)、진정혜(陳貞慧)、방이지(方以智) 등과 교유하여

사람들은 그들을 사공자(四公子)라고 칭했다.


그들은 온 종일 진회의 기루에 앉아서 시사(詩詞)를 논하고

기녀들을 희롱하며 노래를 즐겼다.


오경재(吳敬梓)는 일찍이 자신이 진회지간의 기루에서 방탕한 생활에 대한 심경을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노래한 바가 있다.


迩来愤激恣豪侈(이래분격자호치)  
얼마 전 격한 마음으로 달려와 맘껏 호사를 부리며  
千金一擲買醉回(천금일척매취회)  
천금을 던져 마신 술에 정신을 잃었다.  


老伶小蠻共臥起(노령소만공와기)  
자령과 소만을 옆에 끼고 딩굴다가  
放達不羈如癡憨(방달불기여의감)  
세속에 구애받지 않고 살기를 미친사람과 같았다.  


싯귀만으로도 그들의 생활이 얼마나 방탕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사공자는 당시 진희의 홍등가에서 거의 광란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와중에 후방역을 한 번 보게 된 이향군은 그 즉시 마음이 끌렸고,

후방역 역시 이향군의 재주와 미모에 반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방역의 집은 가난해서 많은 돈을 몸에 지니고 다니지 못했다.

그런 후방역을 향해 이향군은 오히려 위로하며 말했다.


“ 도포가 없어도, 가난해도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비록 포의를 걸쳤지만 이름에 향기가 있는 사람이면 됩니다.”

이것은 이향군이 고매한 인격과 절개를 갖춘 여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공상임의 도화선은 이향군을 일개 기녀로 대한 당시의 남명 학사들이나 문인들을

오히려 비속한 영혼을 갖고 있는 부류로 묘사했다. 


대명강산에 비바람이 몰아쳐올 때, 후방역은 반청운동에 투신하여 투쟁하고 있었다.

그때 봉양(鳳陽) 독무(督撫) 마사영(馬士英)은 복사당과의 원한으로 인하여

후방역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체포하려고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양용우(楊龍友)가 달려와 소식을 전해 후방역에게 몸을 피하라고 권하자

이향군은 눈물을 흘리며 금릉을 떠나는 후방역을 전송했다.


후방역은 그때 자신의 시를 쓴 부채를 맹세의 징표로 주었다.

부채에 쓰여진 후방역의 시는 다음과 같았다. 


夾道朱樓一径斜(겹도주로일경사) 
좁은 골목 경사길 옆 붉은 누각을 향해 
王孫初禦富平車(왕손초어부평거) 
부평거(富平車)를 타고 나타난 왕손을 처음 보았다. 


春溪盡是莘夷樹(춘계진시신이수) 
봄날 개울물은 모두 신이수(莘夷樹)에 빨리고 
不及東風桃李花(불급동풍도리화) 
동쪽에서 부는 바람은 도리화에 이르지 못했네 


공상임의 도화선은 바로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그러나 공상임은 도화선에서 차용하여 전조(前朝) 즉 명나라의 일을 말하려고 했다.


도화선을 집필하던 공상임은 몇 번이나 양주(揚州)를 들려 양주의 매화령(梅花嶺)에서

남명정권의 항청명장 사가법(史可法)의 묘 주위를 배회하며 도화선의 혼백을 찾으려고 했다.


도화선은 원래 명나라의 낭만적인 일을 그리려고 한 것이나

공상임의 필력으로 부채를 강조하다보니 명나라가 다소 쓸쓸하게 묘사되고 말았다.


'적막한 옛 릉 앞에서 이름 없는 신하는 눈물을 흘리고,

가을바람은 까닭 없이 옥하(玉河)의 강물을 출렁이게 하누나!'

라고 읊은 시구는 한족의 입장에서 명나라 왕조에 대한 아픈 마음을 표현했다. 


후방역이 금릉(金陵)을 떠난 후,

이향군은 두문불출하여 일편단심으로 후병역이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때 양용우(楊龍友)는 마사영(馬士英)의 천거로 남명왕조에서 예부주사(禮部主事)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사영은 오히려 양용우를 박해하고 마씨들의 친척인 전앙(田仰)을 앞세워

이향군과 연분을 맺으려고 했다.


이향군이 한사코 거절하자 이향군을 직접 찾아간 마사영은

자신의 권력에 의지하여 이향군을 위협하여 굴복시키려고 했다.


이에 이향군은 돌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스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자

새빨간 핏방울이 후방역이 주고 간 부채 위에 방울져 떨어졌다.


마치 낭군에게 바치는 한 곡의 순결을 위해 부르는 노래와 같았다.

이향군의 강고한 절개에 감동한 양용우가 갑자기 영감을 얻어 붓을 들고

부채위의 핏방울을 이용하여 의연한 복숭아나무로 만들고 싯귀를 적어 넣었다. 


濺血點作桃花扇(천혈점작도화선) 

흩뿌려진 핏방울로 도화선을 만드니

比作枝頭分外鮮(비작지두분외선) 

나뭇가지와 사람머리가 구분되어 밖으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구나


그러나 후방역은 후에 남명왕조를 배반하고 청나라가 실시하는 과거에 응시하여 조정의 관리가 되었다.

이에 대단히 실망한 이향군은 강산은 이미 청나라 세상으로 바뀌어 나라가 이미 없어진 세태를 비관하여

후방역과는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하면서 도화선을 찢어버리고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다.


그러나 공상임은 그의 회곡 작품에서 후방역의 배신행위를 언급하지 않고

희극과 비극의 교차를 강렬하게 묘사하지 않았으며 이향군 역할 역시

그녀의 개성이나 인격을 제고시켜 예술적 경지로까지 승화시키지 못했다. 


지금도 남경의 진회(秦淮) 강변의 미향루(媚香樓)가 다시 지어졌고

금릉(金陵)의 서하산 꼭대기에는 도화선정(桃花扇亭)이 있어 매년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도화꽃이 찬란하게 휘날리는 봄날 바람에 머금은 이향군의 미소를 기리고 있다. 



진회하로 연결되는 지하 통로


진회하 강변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






<桃花扇>  西园刻本,康熙、雍正年间据康熙重刻本再刻,另有多种覆刻本


작가 공상임(孔尙任·1648~1718)


공상임(1648-1718)은 청초(淸初)의 시인이자 희곡작가다.

자는 빙지(聘之) 또는 계중(季重), 호는 동당(東塘)․ 안당(岸堂) 또는 운정산인(雲亭山人)으로

곡부(曲阜 오늘의 산동성에 속함) 사람이다.


공자의 64대손이다.

아버지 공정번(孔貞璠)은 숭정 6년(1633)에 거인이 되었는데 박학하고 다재다능했지만

절개를 중시하여 평생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1.생애와 문학
 

공상임은 공자의 후예로서 유가의 사상적 전통과 학문을 계승하여

어릴 때부터 예‧악‧병‧농(禮樂兵農) 등 학문에 관심을 가졌고, 또한 악률(樂律)을 연구하여

나중에 희곡을 창작할 때 필요했던 기본적인 음악 지식을 갖추었다.


 20살을 전후하여 현부학(縣府學)의 생원이 되고

뒤에 세고(歲考)에 참가했지만 녹취(錄取)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관리가 되려는 생각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집안의 전답을 팔아서 예감(例監, 국자생 國子生)이 되었다.


31살 때 그는 현 북쪽에 있는 석문산(石門山)에 가서 독서와 저술로 소일하면서 고금의 득실을 논하였다.

소년 시절과 석문산 독서 시절 때부터 그는 이미 남송이 멸망한 사실에 주목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친구들로부터 이런 저런 소문을 수집하고 여러 사람들의 저작을 읽어

사실을 검증하면서 남송의 흥망을 배경으로 한 한 편의 전기(傳奇)를 쓸 준비를 하였다.

이 때가 바로 도화선(桃花扇)의 창작이 온축되던 시기였다.


 강희 21년(1682) 그의 나이 35살 때 연성공(衍聖公) 공소기(孔毓圻)의 권유에 응해서 산을 나와

가보(家譜)와 궐리지(闕里志)를 편찬하고 자제들에게 예악을 가르치면서 악사(樂師)를 방문하고

제기 제조를 감독하면서 강희제(康熙帝)의 제1차 남순제공(南巡祭孔)을 준비했다.


다음 해 강희제는 몸소 곡부에 가서 공자에게 제사를 올렸다.

이것은 청나라가 중국을 제패한 뒤 최초로 세인의 큰 주목을 받으면서 열었던 존공대례(尊孔大禮)였다.


공상임은 어전강경인원(御前講經人員)으로 선출되어 유가 경전을 정리하는 한편

강희제에게 대학을 강독하면서 강희제를 공림(孔林)의 성적(聖跡)으로 이끌고자 하였다.


강경과 도람(導覽)에서 남다른 능력을 발휘한 결과

강희제는 그를 파격적으로 국자감박사(國子監博士)로 승진시켰다.


뜻밖의 은총에 감격한 그는 청나라 통치자들의 은혜에 감사를 표시하고,

일면 크나큰 은혜에 몸둘 바를 몰라 하면서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였다.


이는 위치의 부침(浮沈)과 지우(知遇) 여부에 따라

통치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던 유생(儒生)들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강희 24년(1685) 초 공상임은 북경에 와서 정식으로 관료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유학적 경륜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을 때인 7월 초에 그는 칙명을 받아

공부시랑(工部侍郞) 손재풍(孫在豊)과 함께 회양(淮揚)에 가서

황하가 바다와 대면하는 지역의 준설 작업을 도왔다.


그의 본래 목적은 조정의 관리가 되어 “지체 높은 요직에 있고자(淸華要津 청화요진)”하였지만

한적한 바닷가에서 격에 맞지 않은 일을 하게 되자 크게 실망하였다.


회양에서 머문 4년 동안 그는 객지를 떠돌면서

처량한 신세가 된 자신에 대해 울적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직접 하정(河政)의 험난함과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목격하고

민중들이 고통을 이기지 못해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를 시로 작품화하였다.


이 기간에 쓰여진 630여 편의 작품은 호해집(湖海集)으로 편집되었다.

이들 작품은 초기 궁사(宮詞)나 응수(應酬)․송성(頌聖)을 일삼았던 문학적 경향에서 탈피하여

당시의 사회적 현실에 대한 자신의 달라진 인식을 비교적 심각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회양 일대는 명청 교체기에 정치․군사적 투쟁에 있어서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남명(南明)의 강북 하방(河防) 땅에 머물고 있었다.


양주(揚州)의 매화령(梅花嶺)에 올라 사가법의관총(史可法衣冠塚)에 참배(拜禮)하고,

남경에서는 명나라 고궁을 지나면서 명효릉(明孝陵)을 참배한 뒤

진회하(秦淮河)를 노닐다가 연자기(燕子磯)에 올랐다.


그는 특별히 서하산(栖霞山) 백운암(白雲庵)에 가서

나중에 도화선을 지어 선사했던 장요성(張瑤星) 도사를 방문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공상임이 도화선의 창작을 위해

실지 지형에 대한 고찰을 적극적이고 엄밀하게 진행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그는 이 지방에 모여 살던 명나라 유민들과 사귀었는데,

그들 중에는 명말의 정치 투쟁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던 인물이나 청나라 정부에 비협조적이었던

모양(冒襄), 황운(黃雲), 등한의(鄧漢儀), 허승흠(許承欽), 공현(龔賢), 석도(石濤) 등과

옛 일을 이야기하고 현재를 토론하면서 긴밀한 친분을 유지하였다.


그는 때로 “이야기한 내용을 아침에 모두 바꾸거나(所話朝皆換)”

비밀로 삼아 “외부인에게 말하지(門外人道)” 않았다.


회양에서의 4년간은 공상임이 현실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킨 시기일 뿐만 아니라

도화선을 창작하는데 있어 중요한 사상과 소재를 준비한 시기이기도 하다.


 강희 29년(1690) 공상임은 북경으로 돌아와 10년간 경관(京官)으로 생애를 보내기 시작했다.

5년 동안은 국자감박사를 지냈고, 강희 34년(1695) 가을에 승진해서

호부주사(戶部主事)로 있으면서 보천국(寶泉局)에서 동전 만드는 일을 감독했다.


강희 39년(1700) 3월 호부광동사원외랑(戶部廣東司員外郞)이 되자 같은 달 벼슬을 그만 두었다.

이 시기는 비록 호기에 찬 삶을 보내긴 했지만 시종 냉대를 받아

그가 자부했던 관리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10년 동안 그는 안당고(岸堂稿)와 장류집(長留集, 유정기 劉廷璣와의 공저) 등의 시문집을 썼는데,

때로 영락한 자신을 보며 느꼈던 근심과 아무런 성과도 없는 현실에 대한 탄식을 담았다.


“꼽아보니 십년 동안 관직은 초라하여, 짚신 신고 거리를 오가고 있구나 (彈指十年官尙冷 踏穿門巷是芒鞋)”

라고 한 시구는 바로 그가 10년을 관리로 있으면서 가졌던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그의 이런 고민은 의심할 바 없이 한 개인이 벼슬길에 나서서 겪는 부침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느낌에서 오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몇몇 시편에서는 사상적 깊이를 더하기도 했다.


군왕의 조명(造命)을 부정한다든가 관료들 사이의 알력을 폭로하고

성세(盛世)를 탁세(濁世)로 지적하는 등과 같은 행동을 통해,

강희제에게 입은 은덕에 대한 고마움과 험악하고 풍파 많은 관료 생활,

어둡고 혼탁한 현실 등 여러 방면에 대한 청신하고 각성된 인식을 표현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자신을 동로광생(東魯狂生)이라 부르면서

“서울 시장거리에서 칼을 두드리고(齊나라 풍환:馮驩의 고사),

홀로 노래하여 쫓으며 개처럼 짖지는 않는다(彈鋏燕市中 獨歌不逐吠)”

고 하여 억제할 수 없는 격분을 표출하였던 것이다.


공상임은 유가의 정통적 입장과 사상적 경향을 갖춘 사인(士人)이었다.

그는 통치 계급에 의지해야 할 필요와 강희제에게 한 차례 강렬한 감격의 정을 느끼긴 했지만,

관료로서 뜻을 얻지 못하자 그는 청나라 조정에서 권력을 쥔 일파들에 대한 불만과 함께

강희제의 지우(知遇)에 대해서도 조금씩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세상에 쓰여져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관료로서 경제를 논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혼탁한 관료 사회에서도 자신의 정조(情操)를 지키면서 역사와 현실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가졌다.


그는 때로 새 왕조를 찬양하다가도 고국 명 왕조를 추억했으며,

때로 권력가들에게 아부하다가도 명의 유민과 고로(古老)들과도 막역한 친분을 유지했다.


청초의 복잡한 민족적 모순과 계급간의 갈등, 통치 계급 사이의 모순은

그를 복잡하게 변화된 사상적 입장에 서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공상임이 희곡을 창작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 사상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강희 30년(1691) 공상임은 당대(唐代) 궁정에서 유명했던 악기인 소홀뢰(小忽雷)를 구입하였다.

33년(1694)에는 고채(顧彩)와 함께 그의 첫번째 전기(傳奇)인 「소홀뢰」를 완성했다.


작품은 양후본(梁厚本)이 소홀뢰를 구입하자 정영영(鄭盈盈)이 이를 연주하면서 마침내 두 사람이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된다는 내용으로 짜여져 있는데, 문인의 불평(不平)한 심정을 표현하고

정영영이 부귀를 추종하지 않고 폭력에도 굽히지 않으면서 정절을 굳게 지킨 반항 정신을 노래한 것이다.


작품은 제왕의 어리석음, 번진(藩鎭) 세력의 발호와 권신, 환관들의 전횡과 알력을 거듭 묘사해서

당대 원화(元和 806-820)에서 개성(開成 836-840) 연간까지의 조정의 부패상을 반영하였다.


사료의 취사에 있어서도 극본은 역사적 사건들의 진실성을 중시해서,

수많은 인물들과 사건들을 “철저하게 고증(斑斑可考)”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인물(양후본과 정영영 등)들의 관계나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서는 대담하게 허구를 삽입하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그가 도화선을 창작하기 이전의 탐색적인 시도로서 이루어진 성과다.

이 작품을 쓰면서 그는 도화선을 창작하는 데 긴요한 예술적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10여 년의 고심과 세 번에 걸친 수정을 거쳐 강희 38년(1699) 6월

공상임은 그의 전기 소설의 최대 걸작인 도화선을 완성하였다.


한 때 이 작품은 “이름난 지식인이면 누구나 빌려 베꼈고(王公薦神 莫不借鈔)”

무대에서 연출되어 “하루도 거른 날이 없을(歲無虛日)”정도로 호응을 받았다.


이 작품의 출현은 탕현조(湯顯祖 1550-1616) 이후 중국 희곡 문학의 발전에 일대 새로운 영역을 형성하였다.

그와 홍승(洪昇 1645-1704)은 모두 청대에 있어서 가장 명성을 떨친 희곡 작가가 되었다.


2. 도화선의 내용 및 사상적 의의 


도화선은 명말(明末) 복사(復社)의 문인인 후방역(侯方域)이 난리를 피해 남경으로 갔다가

진회(秦淮)의 유명한 기생인 이향군(李香君)과 알게 된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해 다음날 사랑을 확인한 뒤,

이향군은 결혼 비용 일체를 위충현(魏忠賢)과 완대성(阮大鋮)에게서 나오게 했는데,

그것은 후방역을 받아들여 악명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향군은 교태를 잔뜩 부리고는 목적을 이루자 화장기를 씻어내고는 돌아와 버렸다.

이에 원한을 품은 완대성은 좌량옥(左良玉)이 남경으로 병력을 이동하는 때를 타서

방역이 좌량옥과 내통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위험을 피하기 위해 방역은 회남(淮南)으로 달아나

사가법(史可法 1602-1645)에게 투항해서 참찬군무(參贊軍務)가 되었다.


갑신년 3월 이자성(李自成)이 입성하자 숭정제(崇禎帝)는 자결하고,

간신 마사영(馬士英)과 완대성은 곧 남경에서 복왕(福王)을 세워 남명(南明) 조정을 세웠다.


어리석은 왕과 간신들은 조정은 돌보지 않고 노래와 춤으로 환락의 극을 달렸다.

마사영과 완대성은 이향군(李香君)을 위협했지만 그녀가 끝내 굴복하지 않자 궁궐로 데려와 연금시켰다.


후방역은 남경으로 돌아와 복사의 문인들과 함께 완대성을 체포하려다가 오히려 잡혀 옥에 갇혔다.

얼마 후 청나라 군대가 남하하자 홍광(弘光)과 마‧완은 감옥을 탈출해 달아났다.


방역도 옥에서 나와 장요성(張瑤星)을 따라 서하산(栖霞山)으로 갔다.

이향군 역시 와중에 궁궐을 빠져 나와 사람들을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


나중에 두 사람은 제단에서 상봉하고 장도사가 국한(國恨)․가한(家恨)의 이야기로

그들을 설득하자, 두 사람은 함께 입도(入道)하게 된다.

작품은 한 줄기 비가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결말을 맺는다.


도화선의 사상적 의의는 다음과 같이 살필 수 있다.

명나라가 멸망한 뒤, 공상임은 희곡의 형식으로 명말의 복잡한 사회적 모순과

민족간의 갈등을 표현하고 남명의 역사를 평가했는데, 일단의 역사적 교훈을 예술적으로 총괄한 것이다.


그러나 공상임은 자신의 계급적 입장과 청나라 정부의 전제 통치에 이끌려

농민 혁명과 명 왕조의 모순을 왜곡시켰고, 청나라 군사들이 침입하면서 자행한 만행은 외면했으며,

때로는 청나라 통치자들을 미화하여 작품의 정확성과 심각성에 손해를 끼쳤다.


그러나 작품은 남명 조정의 부패와 어리석음을 폭로하고,

상층 통치 집단과 병권을 쥔 장군들간의 첨예한 모순을 보여 주었다.


또한 마사영․완대성 일파들이 청의파(淸議派)와 무고한 백성들을 수탈한 죄악상을 고발하면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적에게 투항해 버리는 기회주의적 본질에 대해 매서운 채찍을 가하고 있다.


주요 인물들을 표현할 때에도 공상임은 민족 영웅인 사가법의 항전의 결심을 묘사해서,

그가 “천하의 주인이 바뀌었을 때(江山換主)” 강물에 몸을 던져 순국한 영웅적 기개를 부각시켰다.


작자는 이향군이 국가의 운명을 염려하고 사악한 권력자들을 거부한 지조를 찬양했으며,

민간의 예인(藝人)들인 유경정(柳敬亭), 소곤생(蘇昆生) 등이 국가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몸을 돌보지 않고 힘쓴 사실과 기타 가기(歌妓)․ 예인․ 서상(書商) 등 하층 민중들이

권신들을 반대하고 국가를 걱정하며 적군에 순종하지 않는 정의감과 민족 정신을 높이 평가하였다.


부정적인 인물들과의 대비를 통해, 독자가 명나라 왕조

“삼백년의 기틀이 누구에 의해 무너졌으며 어떤 일로 붕괴했고 어느 해에 사라졌으며 어느 곳에서 끝났는지

(三百年之基業 墮于何人 敗于何事 消于何年 歇于何地)” (「도화선소인 桃花扇小引」) 알 수 있게 하였다.


이 한 편의 역사 비극은 당시 사람들에게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일깨우고

잠재적인 민족 의식을 환기시켰던 것이다.


3. 도화선의 예술적 성과 


도화선은 여러 방면에서 예술적 성과를 거두었다.

희곡 구성상에 있어서, 공상임은 인생을 개괄하는 뛰어난 예술적 재능과 독창성으로

후방역․이향군 두 사람의 애정의 우여곡절을 통해, 또한 그들의 애정 운명을 부채로 상징함으로써

남명 흥망사라는 방대한 내용을 담은 희곡의 구성을 성공적으로 포괄하고 유기적으로 결합시켰다.


부채를 주어 애정의 징표로 삼는 것을 시작으로, 그들의 애정은 명말의

청의당과 엄당(閹黨) 사이에 전개되었던 치열한 정치 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투쟁이 격화됨에 따라 두 사람은 결국 헤어지게 되고,

따라서 이야기는 후방역과 이향군 두 사람과 연관된 두 가지 이야기로 전개된다.


방역이 소속된 조종(朝宗) 네 군데의 부산한 상황이 한 단락으로 전개되면서,

남명 초창기와 사진(四鎭)의 내분과 같은 중대한 사건과 모순이 묘사된다.


이향군이 온갖 기만과 능멸을 감수하는 상황이 이어지는 한 단락에서는,

홍광과 마사영․완대성의 무리들이 반역을 자행하고 안락에 탐닉한 부패한 모습이 묘사된다.


이 두 방향의 이야기 전개는

“다툼을 벌이면 조종(후방역)이 그 근심을 나누게 되고, 쾌락에 빠지면 향군이 그 고통을 받게 되는데,

한 생애든 하루 아침이든 전체적인 강령이 되는 것은 남조의 정치가 보여주는 잘잘못과 연관이 있다

(爭鬪則朝宗分其憂 宴遊則香君罹其苦 一生一旦 爲全體綱領 而南朝之治亂系焉)”

는 것이다. 이는 곧 남명 조정의 넓고 다양한 역사적 국면들을 반영하는 것이다.


끝으로 작자는 이전의 문학에서 대단원을 맺으면서 쓰는 구투에서 벗어나, 장도사가 부채를 꺾고

두 사람은 입도하게 되는 애정상의 비극으로서 끝막음하여 나라는 무너지고 가정은 파괴된 엄연한 현실을 제시하였다.


작자는 “이별과 재회의 정을 빌려 흥망의 감정을 묘사한(借離合之情 寫興亡之感)”독특한 방식으로

명대 이후 꾸준히 발전한 애정극과 시사극(時事劇)의 흐름에 새로운 방향을 개척했다.


또한 애정 묘사와 정치 투쟁 사이의 관련을 성공적으로 긴밀하게 결합시켜, 희곡의 구성을 세밀하고 웅장하며

독창성이 풍부한 특징을 갖추게 만들어 전통적인 애정극과 시사극의 수준을 모두 새롭게 향상시켰다.


공상임은 인물 형상을 창출하는 데에도 뛰어난 희곡가였다.

그는 중대한 현실적 모순 속에서 전제되는 인물의 성격을 잘 묘사했고,

자그마한 움직임이나 얼굴 표정 같은 구체적인 정황 속에서 개성을 표현하는 데에도 뛰어났다.


그는 또 동일한 사물을 대하는 인물의 다른 태도를 통해 그들의 내면 세계의 미세한 변화까지 표현했으며,

붓끝에서 옮겨지는 묘사의 다양함으로도 예술 형상을 훌륭하게 구현하기도 했다.


도화선에 등장하는 인물 형상은 모두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절개를 중시하고

민첩한 정치적 안목을 가진 이향군이나 국가를 염려하고 의협심이 굉장한 유경정,

비분강개한 기상으로 몸을 던진 사가법, 초연히 풍류를 즐기고 연약한 성격에 타협적인 후방역,

붙임성이 좋고 세상사에 능란한 양용우(楊龍友) 등, 그들은 각기 다른 내면 세계와 외모를 가진 인물들이었다.


특히 독자들의 주목을 끄는 것은 작자는 단지 각기 다른 유형의 인물 성격을 창조해 냈을 뿐 아니라,

동일한 유형의 다른 인물일지라도 분위기에 걸맞는 독특한 개성과 복잡한 성격도 잘 묘사하였다.


같은 기생이지만 이향군은 이정려(李貞麗)나 변옥경(卞玉京)과는 다르며,

같은 예인이라 해도 유경정은 소곤생이나 정계지(丁繼之)와는 다르다.


같은 무장(武將)일지라도 좌량옥은 고걸(高杰)이나 공득공(貢得功)과 다르고,

같은 간신이지만 완대성은 마사영과는 다르다.


작자는 후방역․양룡우 등과 같은 복잡한 인물 형상을 지닌 인물을 성공적으로 창조해서 인물의 개성을 정확하게 파악했고,

복잡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다양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성격을 표현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보여 주었다.


인물을 묘사할 때에도 공상임은 그 인물의 역사적 의의와 자신의 가치 평가를 일관성 있게 추적하였다.

등장 인물들의 각기 다른 태도를 통해 작자는 자신의 진보적인 역사 인식을 표현했던 것이다.


이같은 선명한 경향성(傾向性)과 표현 수법의 다양성, 그 위치에 어울리는 적절한 묘사는

도화선에서 그려진 인물 형상의 현저한 특색을 형성하였다.


도화선은 일종의 역사극으로서 작자는 오랜 기간 동안의 꾸준한 모색을 통해 역사 속의 진실을 찾아

“조정의 득실과 문인들의 이합집산에 대해 모두 분명하게 때와 장소를 고찰해서

남의 의견이나 판단을 빌리지 않았을 (朝廷得失 文人聚散 皆確考時地 全無假借)” 정도에 이르러,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한 편의 “믿을 만한 자료(信史)”라는 평가를 얻었다.


그는 역사극은 우선 역사적 사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전통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도화선은 단순한 역사 교과서는 아니며, 참된 가치는 작자가 희곡 예술이 요구하는 원칙을 바탕으로

역사적 진실성과 예술적 진실성을 훌륭하게 통일했다는 사실에 있다.


사실(史實)은 예술적 욕구를 실현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골격이며,

적절한 예술적 가공은 역사의 본질을 심각하고 분명하게 반영해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이향군의 형상을 만들기 위해 작자는 천선(濺扇)․염선(染扇)․매연(罵筵)․입궁(入宮) 등과 같은

중요한 부분은 허구화시켜 인물의 형상을 풍만하게 확장하고 아울러 민중들의 희망을 반영하였다.


국가가 무너지고 가정이 파괴된 비극을 보여주기 위해 공상임은 후방역으로 하여금

양조(兩朝)의 과거에 응시하도록 한 뒤 결국 출가해서 입산하게 꾸몄는데, 비록 후방역의 행동에는

가식된 부분도 적진 않지만 명말청초 때의 일부 지식인들이 밟았던 보편적인 행적을 재현한 것이기도 하다.


작자는 사실의 가공과 허구화에 있어 대개는 그 내용에 맞는 적절한 변개를 가했고,

인물들도 전형성(典型性)을 가지게 되어 희극의 특성이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었던 것이다.


도화선의 언어도 희곡이 공연물이라는 성격에 맞게

풍부한 문체적 수식을 도모해서 희극성과 문학성의 통일을 달성하였다.


작자는 곳곳에 강렬한 서정과 개성적인 곡사(曲辭)를 구사하고 대사 또한 엄숙하고 적절하게 수용했는데,

이는 고대의 전기(傳奇)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실들이 도화선을 명청대 전기 희곡의 최고 걸작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도화선이 탈고된 지 9개월 뒤인 강희 39년(1700) 3월

공상임은 의안(疑案)에 걸려 파직되었는데 정확한 이유는 미상이다.


작자가 「방가증유우봉(放歌贈劉雨峰)」에서

“운명이 박복해서 문자의 미움을 받아, 입다물고 쇠사람처럼 비방을 듣는다(命薄忽遭文字憎 緘口金人受謗誹)”

고 한 시구와 친구들이 보낸 시로 추측컨대 파직된 이유가 도화선의 내용과 어떤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추론은 비교적 광범위하게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도화선의 공연이 중단되지도 않았고 출간이 금지되지도 않은 사실을 들어

이 주장에 회의를 가져 의안과 도화선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좀더 확실한 증거가 나올 때 이 의문은 해결될 것이다.


강희 41년(1702) 말 공상임은 비분한 심정을 가슴에 품고 고향으로 돌아와 적막하고 청고(淸苦)한 생활을 하였다.

그동안 그는 산서성 평양(平陽)과 하남성 대량(大梁), 호북성 무창(武昌) 등지를

잠시 유람하거나 막료로 있다가 곡부(曲阜)에서 별세했다.


​4.저작의 판본과 주석본 


  공상임의 저서 가운데 궁사(宮詞)와 노언(魯諺) ‧ 율려관견(律呂管見) ‧ 전당집(鱣堂集) ‧

개안당집(介安堂集) ‧ 안당문집(岸堂文集) ‧ 작약사(綽約詞) ‧ 절서동풍록(節序同風錄) ‧ 조정신기(祖庭新記)

등이 있지만 모두 없어지고, 안당시집(岸堂詩集)만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현전하는 시문집에는 석문산집(石門山集)과 호해집(湖海集) ‧ 장류집(長留集 ‧ 향금부(享金簿) ‧

인서록(人瑞錄) 등이 있는데, 근래에 공상임시문집(孔尙任詩文集)으로 묶여 출간되었다.


희곡 작품은 모두 남아 있어, 도화선은 강희각본(康熙刻本)과 난설당본(蘭雪堂本), 서원본(西園本),

난홍실본(暖紅室本), 양계초주본(梁啓超注本) 등이 있다.

근래에 인민문학출판사에서 왕계사(王季思)와 소환중(蘇寰中)이 합주본(合注本)을 냈다.

<이상 중국인명대사전에서>





이향군고거진열관((李香君故居陳列館)


이향군(李香君 1624년 ~ 1653 추정)


소주(蘇州) 창문(閶門) 풍교(楓橋) 사람으로 본래 성은 오(吳)씨이다.

명말청초(明末淸初) 시기의 명기(名妓)로, 부친은 본래 무관(武官)인데

동림당(東林黨) 성원으로 위충현(魏忠賢) 일파에 의해서 모함을 받아 몰락되었다.


이향군은 8세에 양모(養母) 이정려(李貞麗)를 따라 성을 이씨(李氏)로 바꾸고,

남경(南京) 말릉교방(秣陵教坊)의 명기로 활동했고다.


뒤에 난징의 문학결사 복사(複社) 운동의 우두머리였던 후방역(侯方域)의 첩(妾)이 되었다.

그녀는 유여시(柳如是), 마상란(馬湘蘭), 변옥경(卞玉京), 동소완(董小宛), 고횡파(顧橫波),

구백문(寇白門), 진원원(陳圓圓) 등과 더불어 명말청초 남경 진회 일대를 풍미했던 8명의 기녀와 함께

진회팔염(秦淮八豔)으로 일컬어진다.


진회팔염(秦淮八艳)


진회팔염(秦淮八艳)이란 명말 청초(明末 清初) 남경 진회하(南京 秦淮河)에 살던 

여덟 명의 이름난 명기(名妓)를 말한다.

또 다른 이름으로 금릉팔염(金陵八艳)이라고도 한다.


명나라 유신 여담심재의 "판교잡기(板桥杂记)"라는 기록에 따르면

처음 기록에는 고횡파(顾横波)、마상란(马湘兰)、구백문(寇白门)、변옥경(卞玉京)、이향군(李香君)、동소완(董小宛) 등

여섯 명이었는데 후인들이 유여시(柳如是), 진원원(陈圆圆)을 새로 추가하여 팔염이 되었다고 한다.


일흔 생일을 맞은 남자가 있다.

그의 생일잔치를 차려준 이는 한때 난징에서 이름을 날린 명기 마상란(馬湘蘭, 1548~1604).


마상란은 스물넷에 왕치등을 만난 뒤 삼십여 년을 그만 바라봤다.

난초를 누구보다 사랑했으며 ‘고결함’을 꿈꾸었던 마상란은 왕치등이

자신을 아내로 맞아주길 바라고 바랐지만 세월은 덧없이 지나갔다.


왕치등의 일흔 생일잔치를 치러주고 몇 달 뒤 마상란은 쉰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당시 예교와 명분과 명리의 벽을 뛰어넘는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마상란보다 70년 늦게 태어난 유여시(柳如是, 1618~1664),

그녀는 스물이 갓 지났을 때 문단의 거두 전겸익을 만났고 삼년 뒤(1641) 그에게 시집갔다.


본부인의 반대, 36살의 나이 차,

뭇사람들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전겸익은 정식으로 혼례를 치러 유여시를 맞이했다.


누가 알았으랴. 전겸익이 명성을 훼손하면서까지 맞이했던 기생 유여시의 덕을 보게 될 줄이야.

1644년, 이자성의 농민군이 베이징으로 쳐들어오고 숭정제는 목을 매 죽는다.


청나라가 들어서자, 명나라 유신들은 난징에서 주유숭을 황제로 옹립하고 남명(南明)을 세운다.

홍광제 주유숭이 제위에 오른 이듬해(1645), 청나라 군대가 난징으로 쳐들어온다.


이때 유여시는 전겸익에게 순국하자고 했다.

호수로 간 두 사람, 몸을 던지기 직전 전겸익은 망설인다.


“물이 너무 차구려. 들어갈 수가 없소.”

유여시는 끝까지 몸을 던지려 했지만 전겸익이 저지했다.


당시 전겸익의 벗들은 청나라를 섬기지 않기 위해 곡기를 끊고 죽기까지 했다.

그런데 천하에 명성을 떨치던 전겸익은 청나라 조정의 예부시랑이 된다.


유여시는 그를 따라 베이징으로 가지 않고 난징에 남는다.

전겸익은 반년 만에 병을 핑계로 조정에서 물러나지만 곧 감옥에 갇힌다.


유여시가 백방으로 노력한 덕에 그는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이후 전겸익은 명나라를 되살리려는 이들에게 힘을 보태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강희 3년(1664), 여든셋의 전겸익이 세상을 떠나고 뒤이어 유여시도 자결한다.

유여시는 전겸익을 감옥에서 빼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반청 세력과 연합하도록 고무했다.


유여시가 아니었다면 전겸익은 변절자의 낙인을 조금도 지우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학자 천인커(陳寅恪)가 무려 10여 년이라는 시간을 들여서 마지막으로 남긴 저서가 바로 <유여시 별전(別傳)>이다.


천인커는 유여시를 이렇게 평가했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사는 사람들은 그 시대의 운명을 공유하게 마련이다.


명나라 말 청나라 초, ‘십리진회’ 양쪽 기슭으로 펼쳐진 난징의 번화가에서 지냈던 여인들의 삶은 많이 닮아 있다.

마상란과 유여시, 그리고 다음의 여섯 여인(고미생·변옥경·진원원·동소완·구백문·이향군)은

소위 ‘진회팔염(秦淮八艶)’으로 통칭된다.

진회팔염, 진회하 일대의 여덟 미인은 모두 기생이었다.


유여시보다 한 해 늦게 태어난 고미생(顧眉生, 1619~1664),

그녀 역시 당시 문단에 이름을 날리던 공정자에게 시집갔다.


불과 몇 년 뒤 이자성이 베이징을 함락한다.

이때 두 사람은 우물에 빠져 죽으려 했지만 결국 죽지 않았다.


진실은 알 수 없다.

고미생은 공정자와 죽으려 했으나 공정자가 죽으려 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고,

우물로 뛰어들었지만 구조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가 하면 공정자가 이렇게 변명했다는 기록도 있다.

“나는 죽으려 했지만 소첩이 싫다고 하니 어찌하오?”


그가 정말 소첩 즉 고미생 때문에 죽지 못한 것일까?

아무튼 공정자는 이자성에게 귀순했고, 뒤이어 청나라의 품안에 들어갔다.


훗날 고미생은 일품부인(一品夫人)에 봉해진다.

기녀 출신으로, 조정으로부터 정식 봉호까지 받았으니 성공한 인생일까.


고미생은 마흔이 넘어 겨우 딸을 낳지만 몇 달 만에 딸이 죽고 만다.

이에 병이 깊어진 그녀는 시름시름 앓다가 몇 년 뒤 세상을 떠난다.


전겸익·공정자와 더불어 ‘강좌(江左) 삼대가’로 불리는 오위업 역시 진회의 명기와 사랑에 빠진다.

그녀의 이름은 변옥경(卞玉京, 1623~1665).


변옥경은 오위업에게 시집가길 바랐지만 오위업은 모른 척 외면했다.

시기도 좋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만난 때는 명나라가 망하기 직전이었다.

명나라가 망한 뒤 오위업은 남명 왕조에 잠시 몸담지만 곧 실망하고 조정을 떠난다.


황제는 무능하고 조정은 부패하고 당쟁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홍광제의 남명 정권이 청나라에 멸망당하자 오위업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생(生)’과 ‘의(義)’의 양자택일을 회피하는 방법이었다.

살고 싶었다. 그렇다고 불의를 저지르고 싶진 않았다.


만약 난징에 남았더라면 유약한 그의 성격상 전겸익처럼 청나라의 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을 터.

몇 년이 지난 뒤 오위업은 변옥경과 재회한다.


황색 도포를 걸친 변옥경은 스스로를 ‘옥경 도인’이라고 칭했다.

그녀 역시 난세에서 ‘생’과 ‘의’ 사이에서 고통스러웠던 것이리라.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이후 변옥경이 속세와 인연을 끊고 살아가는 동안, 오위업은 청 조정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삼 년 남짓 벼슬을 지낸다.


오위업이 자신의 생애 가운데 가장 통탄스럽게 여긴 시간이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변옥경은 세상을 떠난다.

삼 년 뒤 변옥경의 무덤을 찾은 예순의 오위업은 그녀를 기리는 시(過錦村林玉京道人墓竝序)를 바친다.


오위업은 진원원(陳圓圓, 1623~1695)의 사연을 노래한

‘원원곡(圓圓曲)’이라는 장편 서사시를 짓기도 했다.


“머리털이 관을 찌를 듯 격노한 것은 홍안 때문이라네(衝冠一怒, 爲紅顔)”라는 구절에서,

미녀를 의미하는 홍안은 진원원을 가리킨다.


진원원은 오삼계 때문에 진회팔염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

오삼계가 진원원을 알게 된 건 이자성이 베이징을 점령하기 바로 전해였다.


어쩌면 진원원은 숭정제의 여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황제와 인연이 닿지 않은 그녀는 결국 황제가 총애하던 전귀비의 아버지 전홍우의 가기(家妓)가 되고,

전홍우는 그녀를 오삼계에게 넘긴다.


진원원과 오삼계는 만나자마자 헤어져야 했다.

오삼계가 명나라 최후의 보루인 산하이관(山海關)을 지키러 떠났기 때문이다.


곧이어 이자성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숭정제는 자결한다.

오삼계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청나라 군대를 막아야 하는가, 이자성의 군대를 무찔러야 하는가?

외적과 역적을 동시에 상대할 힘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국 그는 역적을 무찌른다는 명분으로 외적에게 도움을 청한다.

청나라 군대는 산하이관을 넘어와 이자성 군대를 무찌르고 자금성을 접수했다.


오삼계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그가 만약 이자성의 편에 섰더라면 또 다른 역사가 전개되었으리라.


오삼계가 이자성을 향해 창끝을 겨누게 된 결정적 이유가 바로 진원원 때문이라고 한다.

이자성의 부하 유종민이 진원원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오삼계가 격분한 나머지

결국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아무튼 오삼계는 진원원을 되찾는다.

역사를 뒤흔든 뜨거운 사랑도 세월 앞에서는 무상하다.


청나라의 공신이 된 오삼계에게 부족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진원원을 향한 그의 사랑은 이내 식었다. 진원원은 결국 오삼계를 떠나 부처에 귀의한다.


사실 진원원은 마음에 두고 있던 남자가 있었다.

숭정 14년(1641) 봄날, 진원원은 모벽강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혼인까지 약속했다.

그런데 이듬해 봄, 진원원이 강제로 베이징 궁전으로 가게 되면서 두 사람의 인연은 끝이 난다.


바로 이때 모벽강의 삶 속으로 들어온 여인이 있으니 동소완(董小宛, 1624~1651)이다.

동소완은 진회팔염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애정을 추구한 여인이다.


요샛말로 스토커라고 할 정도로, 동소완은 모벽강을 끈질기게 쫓아다녔다.

그리고 결국 그와 함께하게 된다. 동소완은 모벽강을 많이도 좋아했나 보다.


모벽강이 등에 종기가 나서 똑바로 누울 수 없을 때,

동소완은 그가 편히 기대어 잘 수 있게 해주려고 자신은 꼬박 100일을 앉은 채 잤다고 한다.


동소완은 진회팔염 중에서 가장 짧은 생을 살았다.

원래 몸도 약한 데다 모벽강의 병시중을 자주 들어야 했고 생활까지 궁핍했던 게 그녀의 수명을 재촉했다.


동소완은 모벽강과 9년을 함께하고 스물여덟에 세상을 떠났다.

임종 직전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것은 ‘비익(比翼)’과 ‘연리(連理)’라는 글자가 새겨진 한 쌍의 팔찌.


어느 칠석날, 모벽강이 새겨준 것이다.

날개가 하나씩이라서 암수가 함께해야만 날 수 있는 비익조,


두 나무의 가지가 결이 통해서 하나의 가지가 된 연리지,

동소완은 그렇게 비익조와 연리지의 삶을 살고자 했다.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기녀의 운명
동소완 같은 여자라면 절대 견딜 수 없는 남자, 가장 혐오할 남자가 바로 주국필일 것이다.


주국필과 인연을 맺은 비운의 여인은 구백문(寇白門, 1624~?).

그녀가 시집간 지 3년이 지났을 때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왔다.


주국필은 명나라 공신의 집안 출신임에도 바로 청나라에 투항했다.

베이징으로 잡혀간 주국필은 집안의 모든 여인을 팔아서 자신의 몸값을 마련하려 했다.


구백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팔아버리는 대신 다시 진회하의 기루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했다.

대신 한 달 안에 그의 몸값을 마련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결국 구백문은 다시 기녀가 되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주국필의 몸값을 치러주었다.

일찍이 난징이 떠나가라 호화로웠던 혼인날은 아득한 꿈이었던 듯, 구백문은 주국필을 마음에서 떠나보냈다.


주국필은 다시 구백문을 찾지만 그녀는 단호히 인연을 끊는다.

“당신이 돈을 써서 나를 기루에서 빼냈고 나는 당신의 몸값을 치러줬으니, 이제 서로 빚진 게 없지요.”

이후 구백문이 진정한 사랑을 만났는지는 기록이 없으니 알 길이 없다.


누군가의 아내가 된다 해도 그저 여러 첩들 중 하나일 뿐이고 여의치 않으면 내쳐질 수도 있는 존재,

그게 바로 기녀의 운명이었다.


공상임(孔尙任)의 <도화선(桃花扇)>의 주인공 이향군(李香君, 1624~1653) 역시 그랬다.

이팔청춘 열여섯의 이향군이 첫사랑에 빠진 사람은 ‘복사(復社) 4공자(公子)’ 중 한 명인 후방역이다.


복사는 명나라 말 강남 지역에서 결성된 문학단체로, 비판적 정치성향이 강했다.

후방역이 이향군을 처음 만나는 데는 돈이 많이 들었다. 후방역의 벗 양용우가 그 돈을 지원해줬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돈의 출처가 후방역이 그토록 경멸하는 엄당의 완대성이 아닌가!

이 사실을 안 이향군은 돈을 마련해 후방역에게 주면서 완대성에게 돌려주게 한다.


이 일로 후방역은 앙심을 품게 된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남명이 세워진 뒤 완대성이 실권을 갖게 되자, 후방역은 난징을 떠나 피신한다.


완대성은 남명 왕조의 실력자 전앙을 부추겨서 이향군을 첩으로 들이게 한다.

이향군은 이를 거부하며 난간에 머리를 부딪친다.


이때 튄 피가 부채를 물들인다.

후방역이 정표로 주었던 부채다.

후방역의 벗 양용우가 부채에 그림을 그려 그 핏자국을 복숭아꽃으로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이향군의 시련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향군의 상처가 낫자 완대성은 그녀를 입궁하게 한다.


이번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향군이 입궁한 지 얼마 뒤, 청나라 군대가 난징을 공격하고 그 틈에 그녀는 도망친다.


이후 이향군과 후방역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향군이 후방역을 다시 만나 함께 지내게 되지만 시댁에서 그녀의 기생 신분을 알게 되어 쫓겨났다는 설도 있고,

이향군이 비구니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후방역은 복사 4공자의 나머지 셋과는 다른 선택을 했다.

진정혜와 모벽강은 끝까지 청나라에서 벼슬하지 않았고, 방이지는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지만,

후방역은 과거에 응시해 청나라 조정에 몸담는다.


훗날 그는 젊은 날을 후회하며 자신의 서재를 ‘장회당(壯悔堂)’이라고 명명했다.

‘장년의 후회’를 담은 이름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향군이 죽기 전 후방역에게 당부하길

 “절개를 지키고 이민족을 섬기지 말라” 했다고 한다.


‘진회팔염’이라는 여덟 명의 여인,

그리고 그녀들과 사랑했던 여덟 명의 남자.


진회하는 이들 만남의 증인이다.

진회하를 사이에 두고 강남공원(貢院)과 이향군 고거(故居)가 마주하고 있다.


강남공원의 수많은 과거 응시자들, 진회하에 늘어선 기루의 여인들,

얼마나 많은 이들 남녀가 만나서 사랑에 빠졌으랴.


기녀지만 사랑에 진실했던 여인도 있었을 터이고,

그런 여인을 그저 전리품이나 노리개로 생각했던 남자도 있었을 터.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은 진회하의 술집을 보며 박진회(泊秦淮 진회에 묵으면서)에서

“술파는 여인은 망국의 한을 모른 채 강 건너 편에서 아직도 ‘후정화(後庭花)’를 부르네” 라고 한탄했다.


‘후정화(後庭花)’는 남조 진(陳)나라의 마지막 황제 후주(後主)가 지었다는 노래다.

두목은 진회하의 술집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환락에 빠져 지내다가 수나라에 멸망당한 진나라의 전철을 당나라가 밟게 될까 저어한 것이리라.


하지만 두목이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 노랫가락의 주인공인 ‘그녀’가 ‘그’와 ‘조국’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자 피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는 것을.

<글 : 이유진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미향루(媚香樓)








▲ 이곳은 이향군과 복사문인들이 자주 만나던 곳이며 이향군이 손님을 접대하던 곳이다.



이향군의 침실

이향군과 후방역(侯方域 1618 ~ 1654년)은 이곳에서 신혼의 밤을 지냈고

후방역이 피난하여 떠나기 전에 이향군이 <비파>곡을 부르면서 부두까지 보내주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