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

근대 미술로 이끄는 안내자


다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 작품을 통해 불멸의 삶을 살던 거장들의 영향력도 영원하지는 못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를 요구했고, 미술계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거장들의 후광에 힘입어 이탈리아는 유럽의 모든 화가들에게 여전히 성지로 자리매김 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독일에서는 루벤스라는 걸출한 화가가 바로크 미술을 열었고,
프랑스에서는 푸생이라는 매우 사색적인 화가가 고전주의 회화의 한 획을 그었다.


유럽의 미술이 르네상스라는 출발점에서 바로크라는 종착지로 이어지면서

드디어 새로운 전환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


벨라스케스가 죽은 뒤 스페인은 유럽 미술계에서 거의 유명무실한 곳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몇몇 화가들이 벨라스케스가 일구어낸 서유럽 르네상스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급급할 뿐이었다.


그러나 변혁은 항상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어나는 아이러니한 변종과 같은 것이다.
'미술사의 전환'을 이끌어갈 주인공이 변방 스페인에서 출현했기 때문이다.


변혁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고야였다.

후대 미술사가들은 스페인 동북부 시골 출신의 이 화가가 '근대 미술'로의 전환을 이끌었다고 말한다.
고야가 그러한 변화를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역사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고야는 극적인 사실주의화로 유명한 18~19세기 스페인의 궁정화가이다.
주요 작품은 <전쟁의 참화>. 사라고사와 마드리드에서 공부한 후 이탈리아로 유학했고,
사라고사로 돌아와 대성당에 프레스코화를 그리는 일을 맡았다.


초기에는 바로크-로코코 양식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후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다양한 세상을 묘사하고 풍자하는 자신만의 다양한 양식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카를로스 4세 때 궁정화가가 되어 스페인에서 가장 성공한 화가가 되었다.
나폴레옹의 침략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의 공포와 비참한 결과을 담은 <전쟁의 참화> 연작 동판화를 그렸다.


마드리드의 민중봉기를 극적인 사실주의로 표현했으며,

이때의 인상주의적 양식은 후에 19세기와 20세기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귀먹은 화가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815, 46×35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고야의 자화상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은 1815년에 제작된 〈귀 먹은 화가의 자화상〉이다.
 1792년경 겨울, 고야는 세비야를 여행하던 중 이름 모를 중병을 앓고 그 후유증으로 청력을 잃게 된다.


이후 고야는 죽을 때까지 40년 가까운 세월을 귀머거리로 살게 된다.
아무 것도 들을 수 없는 적막에서 오는 공포가 작품 속 화가의 표정에 잔뜩 묻어나 있다.


그래서인지 〈귀 먹은 화가의 자화상〉에는 화가의 오른쪽 귀가 유독 도드라져 보인다.
적막함의 공포가 화가의 귀를 더욱 쫑긋하게 만든 것이다.


〈화실에서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791~1792, 42×28cm, 스페인 마드리드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아카데미


고야와 같이 시대와 시대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하는 화가의 작품들,

그 중에서도 특히 화가의 속내를 엿볼 수 있는 자화상은 작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이에게 커다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시대의 변곡점의 중심에 서 있는 화가에게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고야의 자화상은 약 스무 점 남짓 전해오는데,

그 중 몇몇 작품은 화가의 삶을 여러 각도로 비추는 프리즘 같은 구실을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프리즘을 발광시키는 작품이 바로 〈화실에서의 자화상〉이다.
밝은 빛이 들어오는 커다란 창문을 배경으로 서 있는 화가는 무언가를 바라보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젤이 화면 밖으로 노출되어 있지 않아 화가가 무엇을 그리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화가는 그림 밖 세상을 주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림 속 화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면

관람자가 화가의 모델이 된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고야는 자신을 그렸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림 속 화가는 스페인 전통 의상을 멋드러지게 입고 있는데,

이는 그림 밖에 있는 수많은 모델들에 대한 예우일 것이다.


고야의 아내 <호사파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205 x 130cm. 1799년. 프라도 미술관.


1773년 고야는 베이유의 여동생 호세파와 결혼한다.

그 후 그는 왕립 미술학회 회원이었던 베이유의 도움으로 엘 에스큐리알과 엘 파르도 궁전의 테피리스트 제작에 참여하여

5년 여 간에 걸쳐 42개의 패턴을 제작하게 된다.


고야는 이 작업으로 왕가의 주목을 받았고 성 프란시스코 성당의 제단화를 그려

실력을 인정받은 후 왕실 미술학회의 회원이 된다.

(그런데 위 그림은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그림이라고 하는 기록도 있다.)

<1808년 5월 2일 : 맘루크의 공격> 캔버스에 유채. 266 x 345 cm. 1814년. 프라도미술관


스페인의 독립전쟁이 끝난 뒤 스페인 밖으로 추방당했던 카를로스 4세의 장남이

1814년에 페르난도 7세로 스페인에 돌아왔다.


그리고 프랑스 군대에 맞서 싸운 마드리드 시민을 기리는 그림을 제작할 것을 고야에게 주문했다.
고야는 1808년 5월 2일과 이튿날인 3일에 일어난 사건을 두 점의 그림으로 제작했다.


먼저 〈1808년 5월 2일〉을 보자.

당시 나폴레옹 군대는 이집트에서 데려온 마멜루코 용병과 프랑스인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터번을 쓰고 둥글게 휘어진 칼을 사용하는 등의 아랍식 복장과 프랑스식 군복을 입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당시 마드리드에는 수도를 수호할 만한 군대도 없었기 때문에

마드리드 시민들은 맨손으로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시민들은 짧은 칼, 밧줄, 나무 몽둥이를 들고 싸웠다.

이 날의 시민 봉기부터 프랑스에 맞선 스페인의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땅바닥에는 프랑스 군인과 마드리드 시민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고,
앞줄의 마드리드 시민들은 말을 공격하고 마멜루코 용병을 칼로 찌르고 말에서 끌어 내리려 한다.


이 시기는 신고전주의가 유행했고 신고전주의자들은 역사화를 많이 제작했다. 

그러나 고야의 작품이 다른 역사화와 다른 점이 있다.


역사화에는 늘 영웅이 등장한다.

민중을 이끄는 영웅이라든지, 장엄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영웅이다.


그러나 고야의 이 그림에는 그런 비장한 인물이 없다. 

프랑스 군인들은 침략자니까 영웅일 리가 없고, 그렇다면 마드리드 시민은 어떤가?


가장 뒷줄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자.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한 무리의 무지한 군중들처럼 표현했다.
이와 같은 혼란한 시기에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태일 것이다.


붉은 바지를 입고 피를 흘리며 말에서 거꾸러져 있는 마멜루코 용병과 그를 찌르는 스페인 사람을 보자.
용병은 피도 많이 흘렸고 두 팔을 축 늘어뜨린 것이 이미 죽은 것 같다.


칼로 그를 찌르는 사람은 그것도 알지 못한 채 그를 계속 찌른다. 희번덕거리는 눈에는 광기가 보인다.
흰 점 하나, 검은 점 하나로 광기 어린 눈을 완벽하게 그린 고야의 기법은 훌륭하다.

<1808년 5월 3일> 캔버스에 유채 / 268×347cm / 1814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64실


그 다음날인 5월 3일 새벽, 봉기에 가담했던 마드리드 시민들이 프랑스 군대에게 처형당했다.
마드리드 시 외곽과 시내 곳곳에서 처형이 자행되었다고 하는데, 고야는 이 장면을 그린 것이다.


〈1808년 5월 3일(EI 3 de mayo en Madrid)〉에서 곧 죽음을 맞을 사람들의 표정과 반응은 다양하다.
기도하는 사람, 공포로 눈을 둥그렇게 뜬 사람, 좌절한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 두 팔을 벌리고 죽음을 마주보는 사람 등.
그러나 프랑스 군대는 비슷한 옷을 입고 같은 자세로 총을 들고 아무도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총살이 자행되는 순간의 프랑스 군대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일렬로 선 군인들과 마치 처형당하는 예수처럼 팔을 벌린 마드리드 시민 사이에는 불을 밝힌 초롱이 있어서
곧 죽게 될 사람을 밝게 비춘다. 고야의 남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응시한다.


고야는 전쟁의 공포와 프랑스의 점령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단순한 증인이 아니다.
그는 또한 나폴레옹이 패배하면 자신이 증오하던 반계몽적이고 중세적인 스페인의 보복이 시작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국왕의 초상화가였지만 영혼으로는 공화주의자였다.
예술가로서 완숙기에 도달한 1799년까지도 그는 이 모순을 해결하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완전히 귀먹게 되는데,
이 때문에 사회생활에 지장을 받고 많은 것을 포기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우여곡절 속에서 고야는 1800년대 들어서는 로코코를 포기하게 된다.
대중적이거나 풍자적인 암시들을 단순화시켜 환상적으로 나타내는 사실주의,
1810년 경부터 우세하게 나타나는 검은색과 갈색의 굵은 터치를 비롯하여

만년의 여러 작품에서는 검은색이 강박적으로 나타난다.


검은색은 19세기 불안의 시대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색인지도 모른다.
실존적인 불안은 두 가지로 나뉘어 나타나게 되는데,

아예 예술적 형상을 엄청나게 화려한 칼라로 표현하거나
아니면 고야처럼 무의식의 세계를 검은색 톤으로 직접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존적 불안의 감정적 동요는 고대 원시시대부터 면면히 이어져내려온

"삶의 권태"하고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듯이 보이는데,
여기에는 역사에 대한 실망이나, 성적인 위기 또는 전통적인 신앙의 상실 등

매우 다양한 원인이 잠복해 있을 것이다.


고야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불안감은 고스란히 작품들 속에 표현되는데,
그 은밀하고 지속적인 내면의 불안은 곧 죽음과도 밀접한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혁명"과 "나폴레옹의 제정"은 유럽 전역의 모든 사람들에게

막연하고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의 진입을 의미했다.


중세의 꿈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시대의 도래.

그 미지의 세계는 삶과 죽음이 직접적으로 교감하게 된다.   


위의 1814년에 그린 <1808년 5월 3일>의 작품에서 검은색과 갈색 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1808년 5월 2일 프랑스의 스페인 점령에 대항해 스페인 반란군이 봉기를 일으키자,
그 다음날 그 보복 조치로 마드리드의 양민을 학살한 사건을 묘사한 그림이다.


좁혀진 공간이 총살형의 공포를 더한다.
이 그림은 회화의 역사에서 인간의 외침을 들을 수 있는 거의 첫 번째 그림일 것이다.


병사들은 자동인형의 상태로 축소되어 있고, 그들의 표정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무런 감정 표현 없이 기계적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근대의 출현을 이 작품이 예고하는지도 모른다.


한편, 고야의 그로테스크한 판화 작품은 18세기 이후 여러 미술 사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고흐, 마네, 모네, 세잔과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에서부터 들라크루아와 같은 낭만주의 화가들에 이르기까지
고야에게 큰 영향을 받았음을 토로했다.


그의 판화집이 당시의 사회를 바꾸지는 못했지만 미술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프랑스 작가이자 평론가인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 1901~1976)는 『고야에 관해 논함』이란 책에서
"고야는 현대 회화의 전체적인 경향을 예견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옷을 벗은 마하〉캔버스에 유채 / 97×190cm / 1799~1800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36실


기존의 누드화들은 대부분 신화 속 존재들을 그리고 있다.
물론 종교화에서도 누드가 심심치 않게 발견되긴 하지만,

대부분 ‘이야기 전개상’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드물게 실제 여성의 누드를 그린 그림도 발견되지만,

대체로 화가가 자신의 연인을 담아 개인적으로 보관한 것이거나 습작용에 불과했다.


그러나 고야의 〈옷을 벗은 마하〉는 스페인 저잣거리를 활보하는 멋쟁이 여자 한량 ‘마하’가

그야말로 별 이야깃거리 없이 나체로 누어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여기에서 마하(Maha)는 집시에 가까운 자유분방한 여성을 뜻한다.


비너스 등 여성 누드화의 단골들은 인간이 아닌 상상 속의 인물(여신)들로,

9등신 8등신 등 완벽한 몸을 가지고 있다.


대체로 그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의 부활이라는 르네상스의 정신을 타고 그려지기 시작했고,
따라서 화가들은 그 모델을 완벽한 비율의 과거 조각상에서 찾았다.


체모는 당연히 그리지 않았다.
심지어 여성의 머리카락마저 남성들의 경건한 마음을 들쑤신다고 여기던 옛사람들에게

차마 체모를 드러내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체모는 여인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흠으로 보이기도 했다.

고야는 그 금기들을 뛰어넘었다.


여신도 아니고 완벽한 비율의 조각 같은 몸도 아닌 ‘그냥 진짜 여자’ 마하.

게다가 관람자를 빤히 쳐다보는 ‘도발적인 시선’.
옷을 벗은 마하는 제대로 말하자면 ‘nude(고상하고 이상적인 신체로서의 몸)’라기보다는

날것 그대로의 알몸, 즉 ‘naked’의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림의 주문자는 카를로스 4세 시절 왕비의 애인이자 왕을 대신해 나랏일을 쥐락펴락하던

재상 마누엘 고도이(Manuel Faria, 1767~1851)였다.


고야가 발가벗은 여자의 몸을 그리면서도 종교재판소의 매 같은 눈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주문자의 ‘권력’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를로스 4세와 고도이가 쫓겨나고 페르난도 7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고도이가 소장했던 작품들이 대거 국가에 귀속되는데,
그들 중에는 당연히 이 작품들을 비롯해 벨라스케스의 〈거울을 보는 비너스〉도 함께 있었다.


고야는 뒤늦게 〈옷을 벗은 마하〉로 인해 종교재판소의 호출을 받게 된다.
다행히도 고야는 페르난도 7세의 신임을 받던 화가였기에 처벌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술과 외설이라는 케케묵은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던 이 작품으로

고야는 당시 궁정화가로서의 직위마저 박탈당한다.

〈옷 입은 마하〉, 캔버스에 유채, 1805, 97×190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궁정화가 직위를 박탈당한 뒤 고야는 이 작품 속 누드 모델에게 그대로 옷을 입힌 작품

〈옷 입은 마하〉를 내놓아 다시 한 번 세간의 이목을 받는다.


작품 속 모델은 옷을 입고 있지만 여전히 선정적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옷 입은 마하〉를 보면서 〈옷 벗은 마하〉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경직된 스페인 사회에 대한 고야 특유의 통렬하고 냉소적인 항의 표시가 아닐 수 없다.


한편 고야의 이 그림이 대체 누구를 모델로 한 것인가에 대한 호기심은

최근까지도 사람들의 수다용 먹잇감이 되고 있다.


그중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가 바로 알바 공작부인이다.
고야는 스페인 실세 가문 알바 공작 부부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그녀와 만나게 되었다.


왕비보다 더 직함이 많을 정도로 지체 높은 알바 공작부인은 남편이 죽자

마드리드를 떠나 남부 안달루시아의 별장으로 갔는데, 고야도 그녀를 따라가 몇 달을 함께 머물렀다고 한다.


고야는 마하 복장 차림의 그녀가 손가락으로 바닥에 새긴 글자,
‘오직 고야(Solo Goya)’를 가리키고 있는 장면을 비롯해 그녀의 초상화를 자주 화폭에 담았다.


이 때문에 둘의 관계가 심상치 않았을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러나 둘의 신분 차이로 미루어보아 두 사람의 관계는 고야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었거나

설사 둘 사이에 심상치 않은 모종의 사건이 있었다 해도 고야는 알바 부인 정도의 권력자가 거느릴 수 있는

‘심심풀이 정부들’ 중 하나에 불과했을 거라는 말이 있다.


많은 사람이 이 그림의 모델을 알바 공작부인이라고 단정하지만 정작 알바 공작의 후손들은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공작부인의 유해까지 파내는 소동을 벌였다.


뜻밖에도 유해 검시관들이 그림 모델이 알바 공작부인과 비슷하다는 의견을 내놓는 바람에
또 한 차례 격론이 이어지기도 했다.

사실 고야가 그림을 그릴 때 공작부인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게다가 이 그림들이 재상 고도이의 주문을 받아 그린 것이라면
고도이의 집안과 정치적 숙적 관계에 놓여 있던 알바 집안 여자를 고야가 굳이 모델로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모델은 고도이의 또 다른 연인 페피타 투도라는 여성이라는 소문도 있다.

어쨌거나 현재 이 두 작품은 나란히 전시실 벽에 걸려 있어서
“저 옷을 벗으면 어떤 속살이 펼쳐질까?”를 상상하는 관람자들의 관음증적 욕구를 후련하게 해소해주고 있다


<알바공작 부인> 캔버스에 유화. 210×149cm  1797.


당시 스페인 사람들은 알바 공작부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요녀”라고 부르고,

고야는 “걸어 다니는 남성”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두 사람의 열애는 스페인에서 화젯거리가 되었으나, 타인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공작부인은
자신의 초상화에 또 다른 화젯거리를 남긴다.


고야는 값비싼 레이스와 반짝이는 비단의 질감을 당시 어느 화가보다 섬세하게 표현했다.
그의 재능이 번쩍이는 공작 부인 초상화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부인의 당당한 모습이 담겨 있다.


자존감이 가득한 고야는 그림을 통해 누구보다도 당당한 모습으로 그녀의 연인을 지목한다.
레이스로 화려하게 치장한 그녀의 손끝이 가리키는 흙바닥에는 “나에게는 오직 고야 뿐(Solo Goya)"이라고 쓰여 있다.


하지만, 요란한 화제를 제공한 두 사람의 열애는 오래가지 못하고 끝났다.
공작 부인에게 절교를 선언 받은 고야의 그림은 더욱 더 검은 어둠 속의 그림으로 변했다.


고야의 꿈에 나타나는 공작 부인이 어느 순간 마녀가 되어 그를 고통으로 몰고 가는 시간이 지속된다.
그의 작품에서도 마녀의 모습은 종종 나타난다.


알바 공작부인은 40세에 의문을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는 죽음에 이르러 고야의 아들에게도 유산을 남겼다.
그녀의 다른 정부는 그 시기 스페인 권력에 중심에 있었던 재상 고도이였고,
고도이의 또다른 정부가 카를로스 4세의 왕비인 마리아 테레지아였다.


이러한 이유로 ‘옷을 입은 마야와 옷을 벗은 마야’의 실제 모델이 귀족인 알바 공작부인이라는 추정에 대해
고야는 당시 유럽에서 악명 높던 스페인의 이단종교재판소에서 작품이 탄생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는 고통을 치르게 된다.


공작부인과의 열애는 고야의 전 생애에 걸쳐 지속적인 고통으로 남지만, 그는 한 번도 그녀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깊은 감정 역시 그가 스페인 민족에게 바치는 깊은 애정과 연관성 있게 다가온다.


참조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89XX25600010

http://blog.daum.net/jeongsimkim/29776




<이솝>. 캔버스에 유채. 179×94cm. 1639~1641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15실


〈이솝〉은 왕실 사냥터에 세워진 별장 토레다데라파라다(Torreda de la Parada)의 벽면을 장식하기 위해 그린 작품이다.
우리에게 <이솝 우화>로 유명한 이솝은 기원전 6세기 인물로,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


따라서 이 그림은 실제 모델을 두고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벨라스케스가

그에 대한 지식과 관념으로 만들어낸 상상적 인물형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벨라스케스의 이솝은 이탈리아의 화가 조반니 바티스타 델라 포르타(Giovanni Battista della Porta, 1542?~1597)가 쓴
인상학 서적의 ‘황소머리 유형’을 참고했다.


이솝은 학식과 재능에서는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였지만,
노예로 태어나 델포이 신전에 도둑질을 하러 들어갔다는 누명을 쓰고 절벽에 떠밀려 죽은 비운의 인물이다.


소크라테스도 추남 중의 추남이었다고 하나 이솝은 그보다 더 흉했고,

심지어 곱사등이에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그림 속 이솝은 허름한 옷차림과 주름 가득한 큰 얼굴의 볼품없는 중년 남성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무심한 듯 던지는 시선 속에서 알 건 다 아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현자의 총기가 서려 있다.
짙은 어둠의 왼쪽 벽 배경은 오른쪽으로 갈수록 점차 옅어져 바닥의 물건들과 함께 공간의 실제감을 높이고 있다.

<광대 파블로 데 바야돌리드>. 캔버스에 유채 / 214×125cm / 1636~1637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15실


〈광대 파블로 데 바야돌리드〉의 경우는 벽과 바닥을 가르는 경계도 없으며,
그곳을 실제 공간처럼 느끼게 하는 어떤 것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배경의 색조와 빛의 양을 미묘하게 조절한 뒤 마지막 방점처럼 찍은 그림자 때문에
인물이 허공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바닥에 발을 붙이고 서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기막힌 배경 처리는 고야나 벨라스케스 등 스페인 회화에 깊은 감동을 받은
프랑스의 19세기 화가 마네가 〈피리 부는 소년〉을 그리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바닥에 앉아 있는 난쟁이>. 캔버스에 유채. 106.5×81.5cm. 1645년경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15실


〈바닥에 앉아 있는 난쟁이〉는 돈 세바스티안 데 모라(Don Sebastian de Morra)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거의 움직이는 장난감 수준의 취급을 받던 이들 난쟁이는 꽤 높은 보수를 받긴 했지만

때로는 심지어 어린 왕자나 공주가 받아야 할 체벌을 대신 받기도 했다.


두 발을 나란히 한 채 앉아 있는 난쟁이는 아마도 화가의 눈높이보다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해 있던 것으로 보인다.
뭉툭한 손과 짧은 다리는 그의 신체적 결함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이고 있지만, 날카롭고 강직한 눈매에는 위엄이 살아 있다.


이처럼 벨라스케스는 비단 합스부르크 왕족이나 고관대작뿐 아니라 왕실을 지키는 시종, 시녀, 그리고 광대나 난쟁이 등도 자주 화폭에 담았다.
아무래도 왕가의 초상화보다는 이런 인물들을 그릴 때 좀 더 자유롭고 과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프란시스코 레스코노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107×83cm. 1643~1645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광대 돈 크리스토발>. 캔버스에 유채 / 200×121cm / 1637~1640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7. 디에고 벨라스케스 〈바쿠스〉 캔버스에 유채. 165×225cm. 1629년경 제작. 프라도 미술관


19세기의 위대한 프랑스 화가 마네로부터 ‘화가 중의 화가’로 격찬받은 벨라스케스는
16세기 마지막 해에 당대 스페인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 세비야의 이달고(Hidalgo)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달고’는 주로 돈을 주고 산 귀족 혹은 몰락하여 별 볼 일 없는 귀족을 의미한다.
벨라스케스가 그토록 자신의 ‘계급’에 집착한 것은 바로 이 출신 성분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훗날 자신의 장인이 된 프란시스코 파체코에게서 그림을 배웠는데, 파체코는 화가이기도 했지만 뛰어난 인문학자로

당대 지식인들과 교류가 왕성해서 벨라스케스에게 그림 이상의 많은 기회를 제공했다.


세비야는 당시 ‘보데곤’이라고 부르는 장르의 미술이 발달했다.

원래 ‘선술집’을 의미하는 보데곤은 현재 스페인에서는 정물화를 일컫는 말로 쓰이지만 17세기 스페인에서는

음식이나 부엌 집기, 그릇 등을 주제로 하고 그와 더불어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을 묘사하는 그림을 의미했다.


초기 벨라스케스는 이 보데곤의 전통을 담은 여러 그림을 제작하곤 했으나,

곧 종교재판소의 예술 분야 자문을 담당했던 장인 파체코의 의견을 좇아 종교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한 펠리페 4세는 국사의 대부분을 올리바레스(Gaspar de Olivares, 1587~1645) 재상에게 일임했는데,
세비야 출신인 재상은 같은 고향 사람인 벨라스케스를 궁정화가로 추천해 그의 마드리드 입성에 큰 도움을 주었다.


벨라스케스는 궁정화가들이 참여한 회화 시합에서 승리하면서 왕의 신임을 얻게 되고,

이윽고 〈바쿠스〉를 제작해 왕의 마음을 확고하게 사로잡게 된다.


이 작품은 술의 신 바쿠스(디오니소스)가 농부들 틈에 앉아 한 사람에게 화관을 씌워주는 장면으로 연출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농부들은 비천한 모습으로 그려지곤 했지만, 벨라스케스는 그들을 힘겨운 노동을 이겨낸,

그야말로 신의 축복을 받을 만한 존재로 그리고 있다.


한동안 〈술꾼들〉이라는 제목으로 불렸던 이 그림은 중앙의 모자를 쓴 남자의 흥겨운 표정에서 보듯

낙천적인 분위기가 압도적이다.


다른 인물들보다 훨씬 매끈하고 환한 피부를 가진 바쿠스는 카라바조의 〈바쿠스〉를 차용한 것으로 보이며,

중앙의 인물은 벨라스케스가 흠모하던 스페인 화가 호세 데 리베라의 인물 유형과도 흡사하다.


화면 아래 바쿠스의 발치에 놓인 술병, 그릇, 술잔 등은 보데곤 화가로서 쌓아올린 벨라스케스의 정확하고

사실적인 묘사 기술이 집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불카누스의 대장간〉 캔버스에 유채 / 223×290cm / 1630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11실


펠리페 4세의 신임을 얻게 된 벨라스케스는 당대 유럽 최고의 화가로 전성기를 맞고 있던 루벤스가

스페인에 잠시 체류하던 시절, 그와 직접 대면할 영광을 맞게 된다.


벨라스케스는 루벤스의 충고대로 이탈리아 여행을 꿈꾸게 되고,

이윽고 왕의 허락을 받아낸 뒤 제노바, 베네치아, 그리고 로마와 나폴리 등에 1년여 동안 머물게 된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에 머물던 시절 남긴 걸작이다.


화산을 연상시키는 용광로에서 일을 하느라 대장장이의 신으로 알려진 불카누스(헤파이스토스)는 신화에 의하면
주피터르의 바람둥이 기질에 잔뜩 독을 품은 아내 주노(헤라)가 남편의 질투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혼자 만들어 낳은 아이로,
화가 치민 주피터르의 발길질에 올림포스 산에서 떨어져 다리를 절게 되었다고 한다.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아폴론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이가 바로 불카누스로,
그의 몸이 비스듬한 것은 바로 그의 다리가 성치 못하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다.


이 비운의 불카누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것을 다 만들어내는 기막힌 기술로 신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며,
급기야 미의 여신 비너스와의 결혼에도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의 ‘바람둥이 양대 산맥’ 중 하나가 남신 주피터르라면, 여신은 단연코 비너스이다.
그녀는 마르스(아레스)와 사랑에 빠졌고, 그림은 이를 태양의 신 아폴론이 고자질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림 속 불카누스는 다른 일꾼들과 마찬가지로, 대장장이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서민적인 분위기를 풍기고는 있지만 군살 없이 탄탄하고 대리석 같은 피부를 지닌 그야말로 완벽한 몸매는 ‘

인체의 이상화’라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통을 벨라스케스가 습득한 결과로 보인다.


오른쪽 일꾼이 막 다듬고 있는 갑옷은 빛이 닿는 부분에 일어나는 색의 변화를

면밀하게 잡아내는 베네치아 화가들의 화풍을 떠올리게 한다.


마찬가지로 아폴론이 두르고 있는 붉은 옷의 색조를 빛의 강약에 따라 미묘하게 변주시켜낸다거나
쇠를 달구는 솥, 일꾼들이 걸친 옷가지 등의 질감을 표현해내는 능력은

티치아노나 틴토레토의 능숙함과 비견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이 작품은 벨라스케스가 애초에 누군가의 주문을 받아 제작한 것이 아니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진일보된 기량으로 완성한 이 작품은

스페인으로 돌아오자마자 펠리페 4세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팔렸다.

참고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39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35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36





 <로케비 비너스> 캔버스에 유채. 212×147cm. 1649~1651. 런던 내셔널 갤러리.


 1647년과 1651년 사이에 그려진 <로케비 비너스>는 미술 역사상 가장 유명한 누드화들 중 하나이며,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인도되기 전까지 영국의 로케비 홀에 소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제목이 붙었다.


후대 미술가들과 영화감독들에게 영감을 준 이 그림은 벌거벗은 비너스가 소파에 기대어,

그녀의 아들 큐피드가 붙잡고 있는 거울을 통해 관람자를 바라보며 누워있는 모습을 뒤에서 본 것이다.
신기하게도, 거울에 비친 비너스의 흐릿한 얼굴은 사람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다소 늙어 보이고 크게 보인다.


이 그림은 애초에 스페인 수석장관의 아들이었던 마르케스 델 카르피오를 위해 제작된 듯하며,
카르피오는 1651년 6월에 이 그림의 소유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 그림은 현존하는 유일한 벨라스케스의 여성 누드화이며,

스페인 화가가 그린 거의 최초의 누드화일 것이다.


그 당시 스페인의 종교적인 위신상 누드화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었기에

이 그림은 단지 개인적으로만 전시되었을 것이다.

<브레다의 항복> 캔버스에 유채 / 307×367cm / 1634~1635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9a실


〈브레다의 항복〉은 펠리페 4세의 명에 따라 여러 화가들이 부엔레티로 궁정의

‘세계의 전당’이라는 방을 장식하기 위해 그린 열두 점의 작품 중 하나로,

1625년 남부 네덜란드의 주요 요새 브레다 시가 스페인과의 전투에서 항복한 역사적 사건을 담고 있다.


펠리페 4세 시절 30여 년간 끌어온 전쟁은 결국 네덜란드의 독립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이 전투만큼은 네덜란드에서 가장 용맹하다고 소문난 장수를 무찔렀다는 일화로 인해

합스부르크 왕가의 치적을 과시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가 되었다.


그림 중앙에는 주인공 격인 두 남자가 서 있다.

왼쪽은 브레다 성의 유스티누스 판 나사우(Justinus van Nassau, 1559~1631) 장군이다.


브레다 성의 열쇠를 바치는 패장의 얼굴에는 슬픔과 체념이 가득하다.

오른쪽은 스페인의 암브로조 스피놀라(Ambrogio Spinola, 1569~1630) 장군인데

자세를 낮춘 네덜란드 장군의 어깨에 한 손을 얹은 채 그의 얼굴을 따사롭게 쳐다보고 있다.


그는 상대 장군이 들고 있는 열쇠에 굳이 시선을 맞추지 않음으로써 패자에 대한 예를 다하고 있다.
스페인은 넉 달 동안 브레다 성을 완전히 포위한 상태에서 성 내부로 가는 모든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고 고립시켜 승리를 얻어냈다.


네덜란드는 명예 항복을 요청했고, 이에 스페인은 그들이 최소한의 품위는 유지한 채

성을 떠나도록 허락함으로써 승국의 관용까지 과시할 수 있었다.


이 전투의 승리는 스페인의 사기를 한층 드높였으며, 스페인 최고의 극작가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 (Pedro Calderon de la Barca, 1600~1681)에 의해 연극으로까지 상연되었다.


벨라스케스가 이 연극을 보았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스피놀라 장군 뒤로 하늘을 향해 빽빽이 치솟은 창들의 질서정연함은 승전국 병사들의 기개를 적절하게 표현해내고 있는데,
덕분에 작품 제목이 〈창검〉으로 불리기도 했다.


화면 오른쪽을 압도하는 말의 뒷모습은 네덜란드 장군의 뒤편에 서 있는 말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등장하는 병사들의 모습은 하나씩 따로 떼어놓고 보면 개인 초상화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사실감이 압도적이다.
실제로 몇몇 인물들은 벨라스케스와 친분이 있었고, 개인 초상화도 이미 제작한 적이 있었다.


낮게 드리워진 구름, 곳곳에 피어오르는 연기가 불러일으키는 묘한 신비감은 색과 빛,

그리고 대기의 흐름을 잡아내는 데 치중한 베네치아 화가들을 연상시킨다.


전쟁을 주제로 하는 그림들은 이 그림과 마찬가지로 후경은 격전지

혹은 전투 장면을 연상시키는 배경으로 하고 전경에는 중심 인물들을 배치하곤 했다.


벨라스케스는 모든 수사적 기교를 배제하고, 이 사건의 핵심인 인간적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
줄을 맞춰 선 군인들은 어떤 과장된 몸짓도 취하지 않으며, 정복된 자와 정복한 자를 구분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군인들에게 전쟁이란 영웅적 행위의 여지가 없는 단지 소모적이고 더러운 사업일 뿐이다.


벨라스케스는 모든 수사적 기교를 배제하고, 이 사건의 핵심인 인간적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
줄을 맞춰 선 군인들은 어떤 과장된 몸짓도 취하지 않으며, 정복된 자와 정복한 자를 구분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군인들에게 전쟁이란 영웅적 행위의 여지가 없는 단지 소모적이고 더러운 사업일 뿐이다.

 실 잣는 사람들(아라크네의 우화). 캔버스에 유채 / 220×289cm / 1657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15a실


이 작품은 아라크네에 관한 고전 신화를 복잡하고 높은 지적 수준으로 묘사한 그림이다.

이 이야기는 로마 시대의 작가, 오비디우스가 쓴 <변신(Metamorphoses)>에 등장한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리디아의 염색(染色)의 명인 이드몬의 딸인 아라크네는 베 짜는 솜씨가 뛰어나

여신 아테나보다도 자기가 훨씬 낫다고 뽐냈다.


이 소문을 들은 아테나는 노파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그녀를 찾아가 신을 욕보이는 언행을 하지 말라고 충고하였으나
그녀는 듣지 않고 결국 아테나와 베 짜는 기술을 겨루는 시합을 열어 솜씨를 겨루었다.


아테나는 아라크네가 그녀보다 훨씬 베를 잘 짜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라크네가 짠 타피스트리 그림의 주제가 문제였다.


아라크네는 아테나의 아버지인 제우스가 님프인 유로파를 납치하기 위해

황소로 변신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꾸몄고, 아테나는 진노해 아라크네를 거미로 변신시켰다.


이 그림에서는 두 개의 내용이 등장한다.

먼저 전경에는 산타 이사벨의 로열 타피스트리 공방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의 두 단계가 묘사되어 있다.


후경에는 유로파의 납치에 대한 내용이 직조된 타피스트리가 벽에 결려 있다.

그 앞에는 갑옷을 입은 아테나가 아라크네를 응징하고 있다.


오른쪽에 있는 여인이 벌을 주고 있는 아테나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있는 아라크네다.

전경의 베 짜는 풍경은 베 짜기 시합을 묘사하고 있다.


아라크네가 털실을 감을 동안 아테나는 물레를 돌리고 있다.

연구자들은 이 작품에서 벨라스케스가 회화 장르의 고귀함을 강조하면서

벨라스케스 자신이 최고라고 단언하고 있음을 우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이 작품은 원래 궁정 사냥꾼인 페드로 데 아르스(Pedro de Arce)의 주문으로 그려졌다.
작품의 가장자리 부분은 1734년 마드리드의 알카자르 궁전(Alcázar Palace)의 화재로 손상을 입은 후 수리되었다.


이후 1734년부터 1772년까지 부엔 레티로 궁전(Buen Retiro Palace)에 보관되다가
이후 1772년부터 1794년까지 마드리드의 왕실이 소장하고 있는 재산 목록에 기재되어 있었다.
프라도 미술관의 소장품이 된 것은 1891년의 일이었다.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캔버스에 유채. 209×125cm. 1626~1627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궁정화가로서 벨라스케스가 해야 할 가장 큰 의무는 왕가 일원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사진보다 더 정확해 보이는, 그야말로 사실성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벨라스케스의 왕실 초상화는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남긴 가장 특별한 유산이었다.


유럽 그 어느 궁정도 벨라스케스가 있던 스페인만큼 훌륭한 초상화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발타사르의 카를로스 왕자는 펠리페 4세의 아들로 16세에 요절했다.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의 기마 초상〉캔버스에 유채. 211.5×177cm. 1635~1636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12실


앞발을 든 말에 타고 있는 것은 승마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가장 높은 수준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기교로,

인물의 권위를 한층 더 강조할 수 있었다.


벨라스케스는 겨우 혼자서 뛰는 것도 힘들었을 어린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마저도

이 고급 기술을 구사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왕비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234 x 132 cm. 1652~1653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펠리페 4세는 첫 아내인 이사벨과 사별한 후 누이의 딸, 즉 조카인 오스트리아의 여왕 마리아나와 재혼했다.
원래 마리아나는 펠리페 4세의 아들과 ‘4촌 결혼’을 계획했으나, 전처와 사별한 삼촌과의 결혼을 택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시녀들〉의 희미한 거울 속에 왕과 함께 등장한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역시 벨라스케스가 그린 〈왕비의 초상〉이 전시되어 있는데, 화려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옷과 머리 장식,
커튼 등에서 마치 마감이 덜 된 듯 붓 자국을 강하게 남기는 벨라스케스다운 대담함이 돋보인다.


〈시녀들〉의 공주를 그린 〈도냐 마리아 마르가리타 공주〉는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그린 작품인데,
그녀는 열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오스트리아의 왕인 레오폴드 1세와 결혼했다.


족보상으로 남편은 그녀의 외삼촌이었다. 지속되는 근친혼의 결과 약골인 그녀는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림은 벨라스케스가 죽던 해에 그린 미완성 작품을 그의 사위인 후안 바우티스타 마르티네스 델 마소가 마감했다.


<이사벨 데 보르본의 기마상> 캔버스에 유채. 301×314cm. 1634~1635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12실


 <펠리페 3세의 기마상>  캔버스에 유채 / 305×320cm / 1634~1635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12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정략결혼을 통해 자신들의 영토를 확장, 유지하였고 왕가의 근친혼도 불사했다.
그로 인해 조산, 기형, 단명 등의 후유증 역시 극심했는데,
펠리페 4세의 경우는 대대로 이어온 부정교합 때문에 음식을 제대로 씹을 수 없어 늘 병치레를 해야 했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펠리페 4세의 초상화에서 눈에 띌 정도로 튀어나온 그의 아래턱이

바로 그 병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마르그리트 왕비의 기마상> 캔버스에 유채. 297×309cm. 1634~1635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12실


 벨라스케스는 왕가 일원의 기마상 초상도 다수 제작하였다.

펠리페 4세의 첫 왕비인 〈이사벨 데 보르본의 기마상〉이나 그 뒤를 이를 후계자로 지명된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의 기마상>

그리고 익명의 원작을 수정하고 크게 보완하여 조수와 함께 제작한〈펠리페 3세의 기마상〉과

그 아내이자 펠리페 4세의 어머니인 〈마르그리트 왕비의 기마상〉 등은 올리바레스 백작의 주도에 따라 건축된

마드리드 근교의 새 궁전 부엔레티로의 접견실을 꾸미기 위해 제작되었다.


기마상은 소위 ‘야생의’ 거친 말을 길들이고 다룰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서구에서는 최고 권력가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 자주 그려졌다.


〈펠리페 4세의 기마상〉은 모자의 장식깃이나 갑옷의 문양, 소맷부리, 그리고 손 등에 다소 거친 붓 자국을 남김으로써
그림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을 잔뜩 품어낸다.


벨라스케스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종으로 소문난 스페인산 말을

왕실 마구간에서 면밀히 관찰한 뒤 그 자세와 형태를 정확하게 그려냈다.

그의 기마상 시리즈 속 말들의 사실감 넘치는 표현은 눈여겨볼 만하다.


〈펠리페 4세의 기마상〉 캔버스에 유채. 303×317cm. 1634~1635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12실


〈올리바레스의 기마상〉 캔버스에 유채. 313×239cm. 1636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12실.


<올리바레스의 기마상>은 그가 비록 왕족은 아니지만, 그만큼의 권력을 행사하던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소위 기마 초상화는 당시까지만 해도 주로 왕족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펠리페 4세의 기마상과 마찬가지로 올리바레스가 타고 있는 말도 두 앞발을 치켜들고 있다.


 참고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41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38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37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va Velazquez 1599~1660)


17세기 회화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재능은 그의 고향 세비야에서 연마되었다.
그는 프란시스코 에레라의 공방을 거쳐, 열두 살에는 화가 프란시스코 파체코의 작업실과 아카데미에서 실력을 쌓았다.


벨라스케스는 1617년에 독립 화가로서 일할 세비야 길드의 면허증을 얻었다.
그는 이론가와 인문주의자로서 유력한 친구들을 둔 파체코로부터 문화적 교육을 받았고 지적인 르네상스 사상들을 소개받았다.


또한, 그는 스승의 학술적인 동료들로 구성된 영향력 있는 모임에 소개되었다.
그는 1618년에 파체코의 딸인 후안나와 결혼하여 그와 파체코의 끈끈한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벨라스케스의 초기 작품들로는 솜씨 있게 그린 종교화와 풍속화가 있다. 스페인은 풍속화의 역사가 짧았고,
벨라스케스는 <세비야의 물장수>(1620경)와 같은 작품들에서 평범한 사람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불어넣으며

새롭고 정직한 사실주의를 추구했다.펠리페 4세 시절 궁정 화가가 된 후 평생 궁정 화가로 지냈다.


인물의 성격을 잘 표현한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초상화 중 하나이며,

<펠리페 4세 일가(시녀들)>는 많은 토론거리를 남겼다. 고야, 마네, 피카소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스물네 살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623.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는 신분에 대한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던 화가가 여럿 있었다.
당시만 해도 화가란 하나의 기능인으로 취급받는 경우가 빈번했다.


독일 르네상스 미술을 주도했던 뒤러 같은 화가도 예술가가 아닌 일개 화공으로 취급받았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고려해 자의식이 담긴 자화상을 여러 점 남겼다.


17세기 스페인 궁정회화의 대가로 불리는 벨라스케스도 젊은 시절부터
화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신분 상승의 길을 모색했다.


당시 많은 스페인 지식인들이 성공을 위해 저마다 왕궁이 있는 마드리드로 모였던 것처럼
세비야 출신 벨라스케스도 마드리드로 가서 많은 권력가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초상화를 곧잘 그리는 젊은 화가 벨라스케스의 명성은 어느덧 왕실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드디어 궁정화가로 발을 디디게 되었다.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한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벨라스케스는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을 왕궁 근처에서 활동하며 궁정화가로 살았다.


<스물네 살의 자화상>은 벨라스케스가 1623년경 궁정화가가 되었을 때 그린 작품이다.
인물의 윤곽선이 화면의 짙은 배경에 묻혔는데 이 화법은 다빈치의 명암 대조법에서 유래한다.


이를 통해 르네상스 시기 회화 예술의 표현 기법이 이미 스페인 등지의 서유럽에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고 있는 화가의 얼굴과 치켜 올라간 콧수염은 화면에 생동감을 불어 넣는다.
그러나 그림자 드리운 눈은 다소 무거운 느낌을 주면서 정서적으로 대립과 통일을 교묘하게 이룬다.


작품 속 화가는 스물네 살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성숙해 보인다.
화가는 스스로를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중·장년층으로 묘사했는데,

여기에는 당시 신분에 민감했던 벨라스케스가 자신을 근엄한 귀족처럼 보이려고 했던 의도가 담겨 있다.


작품 속 화가의 표정은 매우 거만하고 까다로운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 그림만 보면 그를 영락없는 귀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마흔 네 살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643, 110×81cm,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마흔네 살의 자화상>은 벨라스케스가 1643년에 그린 것이다.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서 얼굴 전체의 4분의 3만 나타내고 있다.


화면에 나타난 벨라스케스는 냉정하면서도 고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카리스마도 발산한다.


중년에 들어서도 벨라스케스는 여전히 화가라는 신분에 만족하지 못한 듯하다.
자기 내면을 향한 솔직한 성찰보다는 외향적인 시선에 초점을 맞춰 자화상을 완성한 인상이 짙다.


벨라스케스와 교분을 나누던 베네치아의 한 작가는 그를 가리켜

"권위가 느껴지는 인물로 위엄이 있고 고상한 신사"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예술가에게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평판이다.


벨라스케스는 순수 혈통을 지닌 귀족에게만 자격이 주어지는 산티아고 기사단이 되기 위해

평생에 걸쳐 노력했고,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 기사단의 제복을 입게 된다.


그러나 후대에는 이러한 신분이 예술가 벨라스케스를 다르게 평가하게 하는 요인이 되지는 않았다.
그가 피카소 같은 스페인 출신 화가들로부터 커다한 존경을 받게 된 것은 기사라는 작위 때문이 아닌,
미술사를 통틀어 너무도 위대한 〈시녀들〉이라는 걸작 때문이다.


 <시녀들>, 캔버스에 유채, 1656, 318×276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1656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최초에 마드리드 알카사르 왕궁 (Madrid Alcàzar)에 있는 왕의 개인 집무실에 소장되었다가,
왕궁의 다른 공간으로 몇 번 이전된 후 19세기 초에 프라도 미술관으로 옮겨졌다.


왕실 가족과 그 측근, 고위 성직자 등 소수의 인물들만이 볼 수 있었던 <시녀들>은
미술관에서 일반 대중에게 공개 되면서 큰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 이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시도되었다.
그러나 이 그림의 명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시녀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스페인 화가 안토니오 팔로미노(Antonio Palomino, 1653–1726)가 1724년 출간한
스페인화가들의 연대기 중 <시녀들>에 대한 설명 부분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팔로미노는 1678년에 마드리드를 방문하였을 때 벨라스케스와 친분이 있던 궁정 인사들을 만났고,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글을 작성하였다.


왼편에서부터 차례대로 당시 궁정화가였던 이젤 앞의 벨라스케스 자신과

시녀 도냐 마리아 아우구스티나 데 사르미엔토(Doña Maria Augustina de Sarmiento),

마르가리타 공주 (Doña Margarita María of Austria), 다른 시녀인 도냐 이사벨 데 벨라스코(Doña Isabel de Velasco),

우측 전경에 난쟁이 마리바르볼라(Maribárbola)와 니콜라시토 페르투사토(Nicolasito Pertusato)가 있다.


그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왕비의 시녀장인 도냐 마르셀라(Doña Marcela de Ulloa)와

확실치 않으나 왕비의 수행원인 돈 디에고 루이스(Don Diego Ruiz de Ascona)로 추정된다.


배경 중앙부의 좌측에는 거울에 비친 마리아나 왕비와 국왕 펠리페 4세의 모습이 보이고

그 우측 열린 문 틈 사이로 보이는 계단 위의 인물은

왕비의 시종 돈 호세 니에토 벨라스케스(Don José Nieto Velàzquez)이다.


이렇게 다양한 실제 인물들의 모습이 등장하는 <시녀들>은 1666년 왕실 소장 미술품 목록에서
"시녀들 및 여자 난쟁이와 함께 있는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화"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17세기 말 몇몇 궁정 문서들은 이 그림이 "벨라스케스 자신의 초상화"라고 언급하였으며, 다시 그 이후의 문서들은

<가족도(El Cuadro de le Familia)> 또는 <펠리페 4세의 가족 (La familia de Felipe IV)>이라는 제목으로 기재하고 있다.
현재 널리 알려진 <시녀들>이라는 제목은 1843년 이후에야 비로소 등장한다.


이 작품은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와 면밀한 관찰이 결합된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제작되는

벨라스케스 초상화의 전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는 서로 다른 신분에 속한 사람들의 다양한 조건, 직업 및 외형적 특성들을 정확하게 옮기면서도

이들이 자신이 설정한 체계 안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


또한 인물간의 관계에 있어 기반이 되는 태도와 미묘한 감정을 잘 포착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시녀 도냐 마리아 아우구스티나의 마르가리타 공주에 대한

존경 어린 태도와 다정한 친밀감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한편, 거울과 열린 문을 통해 공간을 확장시키는 방식은

벨라스케스가 다른 장르의 그림들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방식이다.


<시녀들>에서 거울 안에 반사된 이미지로 등장하는 국왕 부부가

실제로 어디에 위치해 있었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두 사람은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화를 제작 중인 벨라스케스를 방문하여

화면 앞, 즉 관람자의 위치에 서서 작업을 지켜보고 있거나,
혹은 그 위치에서 벨라스케스의 모델이 되어주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두 사람이 화면 내부의 다른 어딘가에 위치한다고 보거나 거울에 비친 이미지가

화면 안의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이 반사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복잡하면서도 모호한 시각적 장치는 화면 내부의 재현된 세계와

화면 밖 현실 세계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관람자가 실질적으로 궁중 생활의 일원이 된 것처럼 느끼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이렇게 관람자의 시선, 현실과 현실의 재현인 이미지, 실제와 환영의 관계가 교묘하게 얽히면서,
<시녀들>은 단순한 초상화의 차원을 넘어 보다 복잡하고 상징적인 의미 체계를 가지게 된다.


화면 왼쪽에 위치한 벨라스케스의 자화상은 이 작품의 해석에 있어

핵심적 역할을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이다.


벨라스케스는 캔버스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전통적인 '화가'의 도상으로 자신의 모습을 삽입함으로써

예술 창작과 회화의 고결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주제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화면 뒤쪽 벽에 걸린 두 점의 회화,

<팔라스와 아르크네(Pallas and Arachne)>와 <판과 아폴로의 시합(Contest of Pan and Apollo)>이 자주 언급된다.


벨라스케스의 사위인 후안 바우티스타 마르티네스 델 마소(Juan Bautista Martínez del Mazo, 1612-1667)가

루벤스(Peter Paul Rubens,1577-1640)의 그림을 본 따 그린 이 그림들은

모두 인간의 '공예'를 뛰어 넘는 뛰어난 신적 '예술'의 승리를 주제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수 예술의 신성화, 그 우월성과 고결함에 대한 강조는

왕과 왕실 구성원의 등장으로 한층 더 심화된다.


미술사학자 조나단 브라운(Jonathan Brown)은 르네상스부터 잘 알려져 있던 고대의 뛰어난 화가

아펠레스(Apelles)와 알렉산더 대왕의 관계를 <시녀들>에 대입시켜 비유적으로 해석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아펠레스의 화실을 방문하여 그의 작업들을 칭찬하고,

그에게만 자신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고 전해진다.


벨라스케스 역시 펠리페 4세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 유일한 화가였으며,
팔로미노의 기록에 따르면 펠리페 4세가 실제로 벨라스케스의 화실을 자주 방문했다고 한다.


<시녀들>은 펠리페 4세가 벨라스케스의 작업 공간을 방문한 장면을 포착하고 있다.
이를 통해 벨라스케스는 회화가 공예 상품으로서 낮게 평가되던 17세기 스페인에서 자신과 국왕의 특별한 관계를 강조하고,
왕의 예술적 취향을 반영하는 자신의 작품들이 가진 우월성과 고결성을 시각화하고자 했을 것이다.


<시녀들>에는 벨라스케스의 예술적 열망뿐 아니라 고귀한 신분에 대한 열망도 함께 투영되어 있다.
국왕과의 친밀한 관계는 화가로서의 영원한 명성을 보장해줄 뿐 아니라

귀족의 신분을 얻고자 했던 벨라스케스의 목표를 실현시켜줄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수단이었다.


<시녀들>에서 벨라스케스는 산티에고 기사단의 붉은 십자가가 드러나는 상의를 착용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가 기사단의 일원이 된 것은 그림이 그려지고 3년 후인 1659년의 일이다.

따라서 이 복장은 후대에 덧붙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시녀들>을 그릴 당시부터 이미 벨라스케스는 신분 상승에의 욕망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그림에 의도적으로 투영했음이 그림의 배경이 되는 공간에서 잘 드러난다.


엄밀하게 따졌을 때 <시녀들>은 벨라스케스의 실제 화실이 아닌
알카사르 궁전 내의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가 머물던 방을 묘사하고 있다.


이 방은 약 40점에 달하는 루벤스 회화의 모작들로 채워져 있다는 점에서 벨라스케스에게 특히 의미 있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1631년에 펠리페 4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 받은 루벤스는 동시대 다른 화가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자 일종의 롤모델이었다.


루벤스의 그림에 대한 왕실의 높은 평가와 선호를 대변하는 카를로스 왕자의 방을 <시녀들>의 배경으로 선택함으로써
벨라스케스는 루벤스와 마찬가지로 왕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고결한 사화적 신분을 획득하고자 하는
자신의 야심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화면 왼쪽에서 화가는 팔레트와 붓을 들고 잠시 멈춰서 모델을 관찰하고 있다.

왕과 왕비의 모습은 화면 속 벽에 걸린 거울에 반사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화판이 관람자를 등지고 세워져 있어서 화가가 그린 왕과 왕비의 모습은 화면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그림 밖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왕과 왕비이다.
왕과 왕비의 초상화를 그리는 상황을 묘사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그림의 실제적인 주인공은 화면 중앙에 위치한 공주 마리아 테레사(Maria Theresa)와

그 시녀들과 궁정 광대인 난장이가 된다.


그러나 이 위대한 작품에 숨겨진 주인공은 바로 벨라스케스 자신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벨라스케스만 알고 있었다.


벨라스케스가 그렇게도 열망했던 산티아고 기사단을 상징하는 붉은 십자가를 가슴에 단 본인의 모습이
비록 그림의 가운데는 아니지만 매우 비중 있게 담겨 있다.


붉은 십자가의 휘장은 그림 속 시녀들과 궁정 광대인 난장이와 자신의 신분은 엄연히 다름을,

이 그림을 관람하는 이들에게 간접적으로나마 각인시키고 있다.


당시 그림 속 인물들은 눈치 채지 못했지만 이 위대한 작품이야말로 벨라스케스가

세상에 길이길이 남기고 싶었던 '자화상'이었을 것이다.


<시녀들>은 17세기 스페인 화단을 대표하는 냉정하고 침착한 대가의 풍모를 느끼게 한다.
그림 속 왕, 왕비, 공주, 궁녀, 귀족과 하인 심지어 궁정의 어릿광대마저 모두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공주와 시녀들의 레이스 달린 의상은 창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반사되어 화려한 색감으로 묘사되었다.
공주의 금발 머리도 마치 바람에 휘날리듯 사실적이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이 그림을 가까이서 보게 되면 사진을 찍어놓은 것과 같은 섬세한 묘사는 사라지고 만다.
화려한 레이스 의상도 공주의 금발머리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붓 터치가 거칠다.


그러나 다시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그림을 보면 그림 속 섬세함이 다시 살아난다.
이 작품이 과연 17세기에 그려진 것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벨라스케스의 색채감과 원근감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며 빛을 발산한다.

 <계란을 부치는 노파>, 캔버스에 유채, 1618, 100.5×119.5cm,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국립 미술관


계란을 부치는 노파에서 교황까지, 계급을 뛰어넘는 작품 속 모델들 벨라스케스는

궁정화가가 되기 전인 1617년부터 1623년까지 고향 세비야에서 그림을 공부하면서

당시 유행하던 '보데곤'(bodegónes)을 주로 그렸다.


보데곤의 원래 의미는 싸구려 술집 또는 음식점을 말하고,

여기서는 세비야 지방 화파에서 유행하던 하층민의 삶을 그린 그림을 가리킨다.
그가 열아홉 살에 그린 〈계란을 부치는 노파〉는 대표적인 보데곤 작품이다.


<펠리페 4세>, 캔버스에 유채, 1623

 

 마드리드로 진출하면서 벨라스케스의 작품 속 모델의 신분도 급격히 바뀌게 된다.
1623년, 스페인의 재상 올리바레스(Olivares, 1587~1645)는 그를 불러 펠리페 4세의 초상을 그리게 했다.


작품을 본 왕은 매우 만족했고 벨라스케스를 궁정화가로 임명했다.

이 그림을 그릴 때 펠리페 4세는 열일곱 살 소년이었다.


<펠리페 4세> 캔버스에 유채. 198×101.5cm. 1623~1628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12실


펠리페 4세가 즉위한 해는 스페인 지배에 반기를 든 네덜란드와

12년의 휴전을 끝내고 다시 전쟁의 불씨가 붙던 시점이었다.


결국 1648년 펠리페 4세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해

이 지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즉위 당시 겨우 열여섯 살이었던 펠리페 4세는 시종 출신인 올리바레스에게 국사를 대부분 맡겨버리는

실정을 저지르긴 했지만, 문화와 예술에 대한 애정과 심미안이 지극한 왕이었다.


그는 스페인과 영국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외교관이자 화가로 방문한 루벤스를 특별히 아껴

그의 작품을 상당수 수집했고, 벨라스케스를 기용하여 스페인 미술의 발전을 도모했다.


스페인이 자랑하는 화가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호세 데 리베라,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등은 모두 펠리페 4세 시절 활동한 화가였다.


펠리페 4세의 전신상은 벨라스케스가 1625년에 완성했다가

3년이 지난 뒤 다시 수정한 것이다.


그림에는 왕의 왼발이 마치 두 개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세월이 지나면서 벨라스케스가 수정하여

덧씌운 물감 일부가 깎여나가는 바람에 생긴 현상이다.


<갑옷을 입은 펠리페 4세> 캔버스에 유채. 58×44.5cm. 1628년경 제작.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갑옷을 입은 펠리페 4세〉에서, 왕은 이전 시대 고위층이 즐기던 화려한 주름이 사라진,

접시 모양의 작고 단순한 깃을 목에 두르고 있다.


날이 갈수록 국운은 쇠퇴하고 경제가 파탄 날 지경에 빠지면서

펠리페 4세가 시행한 사치 규제법이 왕 자신에게도 적용된 것이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 캔버스에 유채, 1650, 140×120cm


궁정화가로 활동하면서 국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게 된 벨라스케스는 이탈리아를 잠시 여행하던 중에

교황 인노첸시오 10세(Innocentius X, 1574~1655)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면서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치게 된다.


교황이 입은 호화스러운 옷을 정교하게 그려낸 것은 직물 묘사에 대한 벨라스케스의 대가적인 감각을 보여주며,
교황의 뾰로통한 표정은 인물의 성격을 표현하는 그의 타고난 능력을 보여준다.


교황은 자신의 초상화를 본 뒤 "이렇게 똑같을 수가!"라고 감탄했다.

사실, 교황은 이 작품을 너무 사실적이라고 말하며 처음에는 싫어했다.


이 작품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초상화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20세기에 프랜시스 베이컨의 유명한 '날카롭게 소리 지르는 교황'  연작에 영감을 주었다.


그림 속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당시 일흔 살이 넘은 나이임에도 강렬한 카리스마와 위엄이 넘쳐 보인다.
 신도들 역시 회당 안에 걸어둔 이 초상화를 보고 실제로 교황이 앉아 있는 줄로 알았다.


바로크 미술의 대가들이 과장을 통해 고전미를 추구했던 것과는 달리 벨라스케스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 철저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따라서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보면 시대의 변화에 따라 표현 양식이 어떻게 변천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도냐 마리아 마르가리타 공주>, 캔버스에 유채, 1660, 212×147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벨라스케스가 말년에 그린 <마그리트 공주>는 화가로서의 재능이 정점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벨라스케스는 물감을 매우 두텁게 바르고 뚜렷하면서도 잦은 붓 터치로 세밀한 부분까지 표현하려 했다.


공주의 드레스는 원래의 질감까지 그대로 느껴질 정도로 사실적으로 묘사됐다.

배경에 육중하고 어두운 계열의 색을 사용한 반면
의상과 장식품에는 강렬한 보색으로 색채의 대비를 줘 화려한 시각적 효과를 만들어 냈다.


17세기 작품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벨라스케스만의 화법은

19세기 인상주의 회화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1599년 스페인 세비야에서 태어난 벨라스케스는 열두 살 때 세비야 미술계의 대표 인물인

프란시스코 파체코(Francisco Pacheco, 1564~1644)에게서 사사했고 1

617년 문하생으로서의 수련이 끝나자 직업화가가 되었다.


이후 거처를 마드리드로 옮긴 뒤 1623년에 국왕 펠리페 4세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왕의 신임을 얻어 궁정화가가 되었다.


당시 벨라스케스에 대한 펠리페 4세의 신임은 절대적이었는데,

왕은 "내 모습은 벨라스케스만 그려야 한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한편, 펠리페 4세의 신임은 궁정화가로서의 벨라스케스의 역할을 넘어서게 만들었다.
벨라스케스는 1627년부터 궁정의 내무를 감독하는 일까지 떠맡게 된 것이다.


이 일로 그의 명망은 높아졌으나 궁정의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낭비했다고 미술사가들은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기간에 벨라스케스는 왕실에서 소장하는 훌륭한 예술품들을 마음껏 연구할 수 있었다.


벨라스케스는 166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의 평생을 마드리드의 궁정에서 보냈다.
기사 작위까지 수여받기도 하는 등 대외적으로는 더 없이 영예로운 삶이었다.


그러나 그는 '화가 벨라스케스'가 주인공인 삶을 살지는 못했다. 그는 죽기 전까지도 '왕의 화가'였다.
그래서일까? 위대한 걸작 <시녀들> 속에 서 있는 벨라스케스는 기사 작위를 받은 고명한 인물로서가 아닌,
그저 궁정의 시녀들과 다르지 않은 처지의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스스로 귀족 못지 않는 신분을 얻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역사는 그를 수많은 명화를 남긴 한 사람의 화가로 기억할 뿐이다.



참고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89XX25600007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67349&cid=44533&categoryId=44533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38





<3월 8일>

아침에 일어나 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세미나실로 이동하여 공식일정으로 회원 내부 연수회를 가졌다.

이어서 마드리드 시내 식당으로 이동하여 현지식으로 점심식사를 한 후 시내 관광을 시작한다.


Prado 미술관


 마드리드 시내


 프라도 미술관 주변 지도


 국립 프라도 미술관(Museo Nacional del Prado) 정면


프라도 미술관은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함께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18세기 스페인을 대표하는 건축가인 후안 데 비야누에바가 세운 건물로

스페인 신고전주의의 신고전 양식 최고걸작으로서 유명하다.


원래는 왕가 수집품의 분산을 방지하기 위해 페르난도 7세에 의해서 1819년에 왕립미술관으로 발족했는데
1868년의 혁명 후에 국유화되어 프라도(지명으로 ‘목장’의 뜻)로 개칭되었다.



15세기 이후 스페인 왕실에서 수집한 미술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1819년 페르난도 7세의 명으로 스페인 왕실이 소장한 9,000여 점의 회화를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는 미술관으로 바꾸어 개관하였다.


18세기에 자연사 박물관을 개관하기 위해 지었지만 계속되는 전쟁으로 완공하지 못하다가,
1819년 페르난도 7세의 명으로 스페인 왕실이 소장한 9,000여 점의 회화를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는 미술관으로 바꾸어 개관하였다.


2007년에는 스페인 건축가 라파엘 모네오(1937년생)가 확장 공사를 설계하였고,

확장된 부분에는 박물관의 관리부, 보존팀, 새로운 도서관, 판화와 스케치 갤러리,

카페와 식당, 강당, 전시 공간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곳에는 스페인 회화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엘 그레코(El Greco), 고야(Francisco Goya), 벨라스케스(Diego Vel?zquez)를 비롯하여,

스페인 회화의 전성기였던 16-17세기 화가들의 귀중한 작품들은 물론,

이탈리아 화가였던 카라바조, 귀도 레니, 네덜란드의 렘브란트와

독일의 알브레흐트 뒤러,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도 많이 전시되어 있다.


프라도 미술관은 그림 5,000여 점과 700여 개의 조각품, 판화 2,000여 점, 장식물및 예술품 2,000여 점,
메달과 주화 1,000 여 점 등 무려 3만 여 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고, 그중 약 3,000 점의 작품만 전하되고 있다.


스페인 회화는 물론이고 중세부터 18세기까지의 유럽 회화들이 나라별로 전시되어 있기 때문에
나라별 회화 스타일을 미리 공부하고 관람하면 재미를 더해 줄 것이다.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 등 3대 거장의 전시관은 반드시 들러야 할 필수 코스이고,
그 밖에 티치아노, 루벤스, 리베라, 무리요, 수르바란의 작품들도 눈여겨 볼 만하다.


2013년부터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를 유료로 대여할 수 있어서

오디오를 통해 주요 작품의 설명을 들을 수 있다.


1층은 스페인 회화, 플랑드로 회화, 이탈리아 회화, 고야의 일부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2층은 이탈리아 회화와 조각작품들, 고야의 작품을 비롯한 스페인 회화가 전시되어 있는데,

전시품들의 위치는 수시로 바뀐다고 한다.


미술관 정면의 문 앞에 있는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동상


프라도 미술관에는 3개의 문이 있는데, 각각의 문 앞에는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va Velazquez 1599~1660),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 무리요(Bartolome Esteban Murillo 1618~1682)의 동상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궁중화가라는 점이다.


고야(Francisco Goya)의 동상


일반 관람객들이 들어가는 왼쪽 문 앞에 고야의 동상이 있다.

동상 하단에는 그가 그린 작품으로 유명한 <옷을 벗은 마하>의 조각상이 있다.



 무리요(Bartolome Esteban Murillo 1618~1682) 동상


 프라도 미술관 옆있는 산 헤로니모 왕립 성당 (성 예로니모, 성 제롬)


헤로니모 수도원의 일부분으로 1503년에 카톨릭 국왕부처에 의해 세워졌다.

1808년 프랑스 침공 때 프랑스 군대에 의해 건물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나,

이사벨 2세 때 나르시소 파르쿠알 콜로메르에 의해 신고딕 양식으로 재건 되었다.

펠리페 2세부터 이사벨 2세까지 왕위계승자의 서약식이 열린 곳으로,

스페인 왕들의 결혼식과 퇴위한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즉위식이 거행된 곳이다.


성당 내부



프라도 미술관 정면


 측면에서 본 프라도 미술관


 프라도 미술관 출입구


프라도 미술관 입구에 들어서서 마주하는 로비풍경


 프라도 미술관 입구 로비풍경. 어린 학생들이 바닥에 앉아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작품 <브레다의 항복>을 관람하고 있다.


프라도 미술관 입구 로비풍경. 두 노부부가 안토니오 데 페레다의 작품 <제노아의 구원>을 감상하고 있다.


 로비에 있는 조각상


 로비에 있는 조각상


참조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87XX41300040
http://cafe.daum.net/posung57/MK51/143?q=Prado%20%EB%AF%B8%EC%88%A0%EA%B4%80




알카사르를 떠나서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수도교 앞 오리엔트 광장으로 간다.
점심식사로 꼬르데로라고 하는 수프와 빵, 새끼양고기와 생선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오후 2시경 버스를 타고 근교에 있는 라그란하 궁전으로 이동.


산일데폰소(San Ildefonso) - '라그란하(La Granja)'라고도 한다.


울창한 삼림으로 둘러싸인 산일데폰소(San Ildefonso)는

세고비아시 바로 남동쪽, 페냘라라 산맥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1450년경 엔리케 4세가 세운 여름 휴양지에서 비롯된 이 시는

1477년에 가톨릭 군주 페르난도와 이사벨라에 의해 히에로니무스회 수사들에게 넘겨졌다.


그후 1720년에 수사들이 부르봉 왕가의 첫 스페인왕 펠리페 5세에게 이곳을 팔았으며,
펠리페 5세는 프랑스의 베르사유와 이탈리아의 파르마에 있는 여름 궁전과 비견될 만한 궁전을 지을 계획을 세웠다.


스페인의 예술가 테오도로 아르데만스는 16세기 건축가 후안 데 에레라의 단순하면서도 엄숙한 양식을 본떠 궁전을 설계했으나
필리포 주바라와 조반 바티스타 사케티를 비롯한 프랑스·이탈리아 예술가들이 이를 수정했다.


아름다운 원형 천장과 2개의 탑이 있는 궁전 부속 예배당에는
프란시스코 바이에우 이 수비아스가 그린 프레스코와 펠리페 5세와 그의 부인 이사벨라 파르네세의 무덤이 있다.


프랑스의 조경 설계사 에티엔 부텔루가 조경한 정원에는 분수가 많으며,

왕의 거소에는 화려한 태피스트리들이 수집되어 있다.


이 태피스트리들 중 어떤 것들은 플랑드르에서 만든 것들이며,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에서 따온 무늬로 이루어진 것들도 있다.
이 궁전은 1918년에 화재로 손상되었으나 여전히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1728년 라그란하에 왕립 유리공장이 세워졌다.

라그란하는 스페인 역사에서 여러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펠리페 5세의 폐위(1724), 여러 가지 협정체결(특히 1796년의 스페인과 프랑스의 동맹협정),
페르난도 7세가 여성 세습자의 왕위계승을 금지했던 살리카 법전(프랑크계 살리족의 법전)을

폐지하는 국사조칙을 선포한 일(1830) 등이 있다.


라그란하 여름궁전으로 들어가기 전 정원


라그란하 여름궁전으로 들어가기 전 정원


라그란하 여름궁전 외관 - Royal Palace of La Granja


라그란하 여름궁전 외관 - Royal Palace of La Granja


라그란하 여름궁전 외관 - Royal Palace of La Granja


라그란하 여름궁전 외관 - Royal Palace of La Granja


라그란하 여름궁전 방문 인증샷


라그란하 여름궁전 조형물


라그란하 여름궁전 조형물


궁전과 마주보고 나있는 정원의 큰 길과 계단형으로 만들어진 분수들


계단형으로 만들어진 정원 분수 위에서 궁전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정원



라그란하 여름궁전을 출발하여 남서쪽으로 67km 떨어져 있는 아빌라(Avila)를 향한다. 50분 소요.



 전망대에서 바라본 아빌라(Avila) 풍경


버스는 오후 3시경 아빌라가 잘 보이는 도로변의 전망대,
로스 쿠아트로 포스테스(4개의 기둥) 전망대에서 잠시 정차한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아빌라는 완벽하게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세 도시다.
높은 성벽 위에 원형의 망루가 촘촘하게 성벽을 둘러싸고 있다.


주로 중세 성벽은 언덕이나 절벽 등 자연조건을 잘 활용하여 그 위에 성을 쌓았는데,
아빌라 성은 자연조건을 이용하기보다는 완전히 사람의 힘으로 높은 성벽을 쌓아올린 모습이다.



아빌라는 마드리드 북서쪽 85km 지점에 위치한 인구 6만 명의 작은 도시이다.
해발 고도 1,131m로 스페인 도시 중에서 가장 높은 고도에 위치하고 있다.


아빌라 구시가지는 중세에 지어진 단단한 성벽에 둘러싸여 있다.

12세기 무어인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건설한 것이다.


성벽의 둘레 2,516m, 높이 12m, 9개의 성문, 그리고 88개의 원형 망루가

걸어서 1시간 거리인 성벽 길을 따라서 늘어서 있다.


 성벽 안의 풍경


성벽 안의 풍경


성벽의 안쪽에도 성벽만큼이나 오래된 건축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성벽과 성벽으로 둘러싸인 아빌라 구시가지는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성벽의 동쪽에 있는 16세기 건물,

카르니세리아의 집을 통해 성벽 안으로 들어간다.


카르니세리아의 집은 원래 와인 저장고와 정육점으로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관광 안내소로 이용하고 있다.


카르니세리아의 집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성벽 안으로 들어가니 회색빛 건물들과

황토색 성벽이 어울려 고풍스럽고 우아한 중세 시대의 세트장으로 들어선 기분이다.


아빌라 대성당


성벽 안으로 들어가면 아빌라 대성당이 나온다.
아빌라 대성당의 한쪽 벽이 성벽의 일부로 지어진 요새를 겸한 14세기 성당으로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아빌라 대성당


 메르카도 치코 광장 (정면이 아빌라 시청)


중세 시대 골목길을 따라서 구시가지의 중심에 있는 메르카도 치코 광장으로 향한다.
광장의 북쪽에는 아빌라의 시청 건물이 있으며,

1층 외벽이 아치로 이어진 중세 건물들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광장 주변에는 카페, 레스토랑들이 밀집해 있다.


 산타 테레사 수도원


다시 골목길을 지나서 성벽의 남쪽, 라 산타 광장에 있는 산타 테레사 수도원으로 간다.

아빌라 성벽과 함께 아빌라를 유명하게 만든 인물이, 중세 가톨릭 혁신을 주도한 테레사 성녀이다.


산타 테레사는 1515년 아빌라에서 유대교에서 개종한 귀족 집안의 12남매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
7세 때 순교 성인전을 읽고 오빠와 함께 아프리카로 가서 순교자가 되겠다고 가출한 일도 있다.


20세에 아빌라의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여 기도하며 환자 돌보는 일에 매진한다.
천사의 창으로 가슴을 찔린 환시를 체험한 테레사는

1562년 '기도와 침묵'이라는 엄격한 수도생활 규율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며

'맨발의 가르멜 수도회'를 시작하면서 아빌라에 '성 요셉 수녀원'을 창립했다.


이후 그녀가 설립한 수도원은 총 32개였다.

1582년 숨을 거둘 때까지 그녀는 중세 가톨릭의 개혁을 위해 헌신했다.


테레사 성녀가 태어나고 수녀가 된 이후 27년간 사역했던 아빌라에는

그녀의 족적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그녀의 족적을 더듬어보기 위해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아빌라를 찾고 있다.


 테레사 성녀의 동상


산타 테레사 수도원 앞 라 산타 광장에는 테레사 성녀의 동상이 서 있다.
오른 손엔 펜을 들고 시선은 하늘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테레사 성녀의 동상,

마치 이 땅 위에 왜 이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은지 하나님에게 하소연하는 모습 같다.
테레사 성녀가 태어난 자리에 지어진 수도원은 성지가 되었고, 지금도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고 한다.



 산타 테레사 수도원 내부


 아빌라 구시가지 거리 풍경


 아빌라 구시가지 거리 풍경


 아빌라 구시가지 거리 풍경


 아빌라의 마르케스 산토 도밍고 거리


 아빌라성 내부


아빌라성(무랄라)


 아빌라성 전경


아빌라성(무랄라)


아빌라성(무랄라)


아빌라성 골목


아빌라성 골목


아빌라성(무랄라)


아빌라성(무랄라)



카사데캄포(Casa de Campo)

아빌라(Avila) 성 관광을 마치고 마드리드로 돌아와 카사데캄포(Casa de Campo) 공원으로.


마드리드 중앙부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는 대규모 공원으로 에스파냐의 도시 공원 중 최대 규모이다.
원래는 왕실 사냥터로 사용했던 곳이다.


복잡한 도시 한가운데에서 사이클링, 피크닉, 산책, 일광욕, 야생동물 관찰 등 다양한 야외 활동을 즐길 수 있으며
편안한 휴식도 취할 수 있어 주말이면 50만 명 이상의 마드리드 시민들이 방문한다.


공원 안에는 넓은 호수와 울창한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는데, 소나무 숲에는 다람쥐와 야생 토끼를 비롯하여
다양한 조류가 서식하고 있어 자연 학습의 장으로 많이 이용된다.


공원 내에 조성된 마드리드 동물원 및 수족관(Zoo Aquarium de Madrid)도 인기 있는 장소이다.
이 공원 안의 전망대까지 오르는 케이블카는 마드리드를 방문하는 관광객이면
누구나 한 번은 이용하는 관광 코스로 자리 잡았다.








카사데캄포(Casa de Campo) 공원 관람을 마치고 시내 한식당에서 저녁식사 후

휴사 프린세사( Husa Princesa) 호텔로 이동하여 하루 일정을 마감한다.


참조 : https://blog.naver.com/come1747/221328229407

https://cafe.naver.com/hotellife/589432
http://cy.cyworld.com/home/40331097/post/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11s1391a

https://blog.naver.com/novisakkk/220346054253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470255&cid=51778&categoryId=51778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317277&cid=40942&categoryId=31922




 수도교 전망대에서 바라본 오리엔트 광장 전경


수도교 전망대에서 바라본 세고비아 진입로 방향 전경


캄포 광장에는 왼손에 칼을, 오른손엔 깃발을 들고 있는 동상이 우뚝 서있다.


  캄포 광장


산 마르틴 성당

캄포 광장 앞에 아치로 만든 회랑이 아름다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산 마르틴 성당이 있다.



      산 안드레스 성당

      마요르 광장에서 대성당 앞으로 이어지는 마르퀴스 델 아크로 카예를 따라가면

왼쪽으로 메르세드 공원이 있고, 그 앞에 산 안드레스 성당이 있다.


알카사르(Alcazar)


알카사르란 아랍어로 성채란 뜻.

알카사르는 로마시대부터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며 12세기, 13세기, 19세기에 확장, 복원되었다.


높이 80m의 망루, 궁전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움직이는 다리를 지나 성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에스파냐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으로 불리지만 수많은 전쟁을 치른 요새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만화영화 백설공주가 살았던 성의 모델이 바로 이곳이다.
1474년 12월 13일,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여왕이 즉위식을 가졌던 곳으로

스페인 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사벨 여왕은 페르난도 왕과 결혼한 뒤

1492년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스페인을 다시 통합한 통치자이다.
나아가 콜럼버스를 후원하여 신대륙 발견에 큰 역할을 한 여왕이기도 하다.






 알카사르 내부



성채 내부는 아랍의 영향을 받아

청색 아라베스크 벽면과 아치 형태가 매우 돋보인다.


특히 각 방의 천정 장식이 독특한데,

마치 티베트 사원을 연상하듯이 붉은색 계통의 단청으로 화려하게 꾸며 놓았다.

한 방에는 백설공주의 침대가 놓여 있다.






 성채의 벽 중간 중간 뚫린 창으로는 멀리 계곡 아래 마을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자로 잰듯 잘 정비된 정원


 알카사르(Alcazar)를 나와서 중세부터 보존되어 온 고풍스런 골목길을 걸어 내려온다.






참조 : http://sopia888.tistory.com/3198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ejina84&logNo=221345609709







<2006.03.07>

아침 6시 30분 경에 일어나서 Husa Princesa 호텔을 나와 근처에 있는 에스파냐광장(스페인광장)을 찾았다.

호텔에서 10여 분 거리에 있다. 먼동이 틀 무렵이어서 좀 어둑어둑한 편이다.


에스파냐광장은 주위보다 다소 높은 곳에 있어서 마드리드 시내가 잘 보였다.

스페인 사람들은 좀 늦게 일어나는 편인가 보다.


광장에 나와 운동하는 사람이 두어 명 뿐이다.

광장은 마치 공원처럼 나무도 많고 주변이 탁 틔어 있어 시원스럽다.


무엇보다 거리에 쓰레기가 전혀 없을 만큼 깨끗했다.

스페인은 어디를 가더라도 골목까지 청소가 잘 되어 있어 무척 깨끗하다.


에스파냐광장(스페인광장)


마드리드의 최고 번화가인 그란비아가 시작하는 곳에 있다.
사람들이 풀밭에 눕거나 벤치에서 휴식을 취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광장 중앙에는 에스파냐의 대표적인 작가 세르반테스 서거 30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기념탑이 있다.


탑 앞에는 에스파냐의 유명한 작가 세르반테스 동상과 소설 속 두 주인공인 로시난테를 타고 있는

날씬한 돈키호테와 당나귀를 탄 뚱뚱한 산초판자 동상이 있다.

호텔로 돌아와 1층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9시 10분 세고비아를 향해 출발한다.



세고비아(Segovia )

스페인 중북부 카스티야 주의 도시.


마드리드에서 북쪽 바야돌리드 방향으로 50km 가량 가면 나오는, 고즈넉한 인구 6만의 작은 도시이다.
마드리드에서 당일치기가 가능하기에 많은 관광객들이 찾으며,
시내에 웅장히 서 있는 로마 시대의 수도교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로마 유적이다.


수도교는 16세기에 보수 공사를 거쳐 20세기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외에 디즈니 잠자는 숲속의 공주와 백설공주에 영감이 되어준 알카사르 성도 인기가 높다.



 세고비아로 들어서기 전에 버스가 잠깐 멈춘다.

 안개가 잔뜩 머금은 날씨에 멀리 백설공주의 전설이 어린 알카사르(Alcazar) 성이 참으로 신비롭게 보인다.


 백설공주


널리 알려진 백설공주 이야기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옛날에 한 왕비가 창가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실수로 바늘이 손가락을 찌르자 피 한방울이 흑단으로된 창틀에 쌓인 흰 눈위로 떨어져 내렸다.
이것을 본 왕비는 "이 까만 흑단같은 머리결에 흰 눈같은 피부에 이 피처럼 붉은 입술을 가진 딸을 가졌으면"하고 소망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비는 아이를 가졌고 소원한 것과 같이 흑단같이 까만 머리결에
흰 눈처럼 하얀 피부, 피처럼 붉은 입술을 가진 딸을 낳았고 아이 이름을 백설공주라 지었다.


그러나, 왕비는 백설공주를 낳은 지 얼마 안 되어 죽고 말았다.

새로 맞이한 왕비는 아름다웠으나 허영심이 많았다. 특히, 욕심이 많은 마녀였다.


왕비는 마법 거울을 갖고 있었는데 이러 저러한 질문을 하면 그에 맞는 대답을 하였다.
이를테면 왕비가 "거울아, 거울아 이 나라에서 누가 가장 예쁘지?"라고 물으면,

거울은 "여왕님이십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백설공주가 점점 아름답게 자라 일곱살이 되었을 때 왕비가 거울에게 물었다.

"거울아, 거울아 이 나라에서 누가 가장 예쁘지?"


그러자 거울은 "왕비님은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그러나 백설공주가 더 아름답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다른 판본에서 거울은 그저 "백설공주입니다"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질투심에 휩싸인 왕비는 사냥꾼에게 백설공주를 숲으로 데려가 죽이고

그 증거로 심장을 가져오라 명령한다.


숲으로 백설공주를 데려간 사냥꾼은 차마 죽이지 못하고

숲 속으로 도망가라 이르고는 대신에 어린 멧돼지의 심장을 가져간다.
왕비는 심장을 요리하여 먹어버린다.


숲 속에서 백설공주는 일곱 난쟁이의 오두막을 발견한다.
난쟁이들은 "우리가 일을 하고 있는 동안 집을 돌봐 준다면 머물러도 좋다"고 백설공주를 받아들인다. 


세월이 흐른후 또다시 거울에게 "누가 가장 예쁘냐"고 물은 왕비는

백설공주가 살아있고 여전히 자기보다 예쁘다는 답을 듣게 된다.


이후 왕비는 백설공주를 없애고자 세 번에 걸쳐 난쟁이의 오두막을 찾는다.

세 번째 찾아가 건넨 독사과를 먹고 백설공주는 쓰러진다.


집으로 돌아와 쓰러져 있는 백설공주를 발견한 난쟁이들은 크게 슬퍼하며

유리로 된 관에 백설공주를 눕힌다.


시간이 흘러 숲을 지나던 왕자가 유리관에 놓인 백설공주를 보고 한 눈에 반한다.

왕자는 난쟁이들에게 사정하여 유리관을 얻는다.


숲을 지나 유리관을 옮기는 동안 유리관이 덜컹거리자

목에 걸린 독사과가 빠져나오고 백설공주는 다시 정신을 차린다.
왕자는 매우 기뻐하고 백설공주와 결혼한다.


한편 왕궁에 돌아온 왕비는 의기양양하게 거울에게 "누가 가장 예쁘냐"고 묻는다.
거울은 "왕비님은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그러나 새로 왕비가 된 백설공주가 당신보다 천 배는 아름답습니다"하고 대답한다.


양녀가 여전히 살아있을 뿐 아니라 이웃 나라의 왕비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왕비는

그 길로 백설공주의 결혼식장으로 달려간다.


결혼식에 나타난 왕비는 붙잡혀 처벌을 받게 된다.
왕비에게는 빨갛게 달구어진 쇠구두가 신겨졌고, 왕비는 죽을 때까지 춤추듯 뛰어다녔다.


백설공주는 반 신화화된 실존 인물의 설화와 고대로부터 전해지던 독일의 신화가 결합된 것이라 한다.
이미지의 주인공은 역사상 실존하였던 마르가레테 폰 발데크(1533년–1554년)를 모델로 한 것이라고.
마르가레테는 발데크의 탄광촌에 살았던 아름다운 처녀였다.


당시 탄광촌에서는 "난쟁이"처럼 작은 어린이들이 갱도에 들어가 일을 해야 했다.
백설공주와 같이 마르가레테 역시 계모에게 시달려야 했다.


마르가레테는 16세가 되던 해 브뤼셀에 가게 되었고

아름다운 미모로 인해 몇몇 귀족들과 교제가 있었다.


펠리페 2세는 마르가레타에게 한 눈에 반해 결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마르가레테는 무슨 까닭에선지 독살되고 말았다.


중세에서 왕가의 결혼은 서로간의 영토문제를 해결하고 동맹을 유지하는

매우 민감한 정치적 문제였기 때문에 모종의 음모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마르가레타는 21세가 되던 1554년 사망하였고

그녀 스스로가 기록한 글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경련으로 고통받았음을 알 수 있다.


백설공주와는 달리 마르가레테가 독살되었을 당시 계모는 이미 사망하고 없었다.
아름다운 아가씨의 애달픈 죽음은 여러 사람들의 기억에 각인되었고 이후 많은 이야기의 바탕이 되었다.


한편 독일의 전설에 의하면 구박받다가 집에서 쫓겨난 공주가

난장이들에 의해 구제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시골에 왕과 왕비가 존재하였다.

그들에게서 딸 백설공주가 태어났는데, 미모가 수려하였고

그의 아버지 왕은 그를 편애하였지만 어머니인 왕비는 딸을 오히려 미워하였다.


백설공주는 아버지 왕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이용하여 매우 오만하게 행동했다.

왕비는 공주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궁에서 쫓아낸다.
이때 어느 야산에서 난쟁이들에게 구제된 백설공주는 그들의 집에서 생활했다 한다.


한편 공주를 쫓아낸 왕비는 사냥꾼을 시켜서 공주를 암살하고

간을 빼서 가져오게 한 뒤 사냥꾼의 입을 막기 위해 사냥꾼을 살해한다.


사냥꾼은 공주를 죽이지 못하고 곰을 한마리 사냥한 뒤,

곰의 간을 빼서 왕비에게 증거로 갖다 바쳤던 것이다.


왕비는 딸인 백설공주를 목을 졸라 죽이려 했지만

일곱 난장이가 풀어주어 위기를 모면했다.


공주는 독이 든 사과 또는 약물을 먹고 죽었다고도 하고

독이 묻은 참빗으로 머리를 빗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후 한 귀공자가 숲을 지나가다가 일곱 난장이에 의해 장례식이 치뤄지던

백설공주의 시신을 보고 그녀를 치료해서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공주의 복수를 위해 친어머니인 왕비를 무도회에 초청한 후 납치,

불에 달군 쇠몽둥이 혹은 쇠구두로 고문하여 죽게 한다.


원래의 중세 독일에서 떠돌던 전설에 의하면

친어머니가 딸의 아름다움을 질투해서 쫓아냈다고 구전되었지만
그림 형제는 이를 아이들의 정서를 생각하여

친어머니가 아니라 계모인 것처럼 각색하여 발표하였다.


백설공주는 왕비의 독사과를 먹고 쓰러지고 다시 되살아난 후

왕자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다가 독이 몸에 남아있어 결국은 사망하게 된다.

그리고 프랑스의 한 숲속 깊은 곳에 묻혀 있다고 한다.


 수도교


수도교는 로마 트라야누스 황제(재위 98∼117년) 때 건설되었고 1906년까지 고지대에 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였다. 
전체 길이 728m, 최고 높이 약 30m에 167개의 2층 아치로 이루어져 있고 잘 다듬은 화강암을 끼워 쌓아올렸다.


수도교는 말 그대로 물이 흐르는 다리로, 지형의 높낮이와 상관없이 물을 원하는 곳까지 끌어오기 위해 만든 것이다.
아치 윗단 니치 부분에는 성인조각상이 모셔져 있다.

1906년까지 무려 2천 년 동안 물을 공급해 오다가 지금은 수도관이 그 위를 지나고 있다고.


  수도교의 건축 원리





 세고비아 대성당


대성당은 1525∼1768년에 걸쳐 고딕양식으로 건설되었고 수십 개의 첨탑을 하늘로 뻗어 있다.
가로 50m, 세로 105m, 신랑 높이 33m의 웅장한 규모이다.

3개의 볼트식 신랑과 익랑, 돔, 중앙후진, 7개의 예배실 등이 있다.
부속 박물관에 회화, 보물과 함께 유아의 묘비가 있다.


이 묘비는 유모의 실수로 창문에서 떨어져 죽은 엔리케 2세 아들의 묘비이다.
왕자를 실수로 죽게 한 유모도 즉시 그 창문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1985년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십자가에서 목숨을 잃고 내려져 누어 있는 예수의 조각상이 눈길을 끈다.









<2006.03.06>

인천공항에서11시 20분에 함께 동행하는 분들과 미팅이 있었다.  

마드리드는 직행편이 없어서 프랑스 파리를 경유하여 갈아타야 한다. 


13시 55분발 대한항공이 인천항을 이륙한 것은 14시 15분경. 20분 정도 지연되었다.

파리에 도착한 것이 한국시간으로 새벽 1시 37분,

현지시각으로는 오후 5시 37분(8시간 시차)이니 11시간 30분 정도 걸린 셈이다. 


오래된 공항이어서인지 파리 샤를드골공항은 상당히 혼잡스러웠다. 

터미널이 4개(A,B,C,F)로 나뉘어 있다.


 파리 샤를드골공항 조감도


파리 북쪽 25km에 위치한 프랑스의 대표적 국제공항으로 유럽의 주요 관문 중 하나이다.
1974년 3월 개항했는데, 프랑스 전 대통령인 샤를 드 골의 이름을 따 명명됐다.


1945년 설립된 파리공항관리공단이 운영하고 있다.
2010년 기준 승객 면에서 세계 7번째로 바쁜 공항이자 런던히드로공항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로 바쁜 공항이다.


비행 횟수로는 2010년 기준 세계에서 10번째, 유럽에서는 가장 바쁜 공항이다.

공항 면적은 32.38㎢. 여객 터미널 3개와 화물 터미널 1개를 갖추고 있다.


제1터미널은 가장 오래된 터미널로 낙지 모양의 혁신적 디자인을 취했다.

제2터미널은 7개의 부속 터미널들로 이루어진 전통적 양식의 터미널이다.


2007년부터 경전철(CDGVAL)이 운행돼 4개의 터미널과

기차역, 주차장 사이를 연결하고 있다.


파리의 지하철 네트워크와 고속철도(TGV)를 통해 파리와 프랑스 전역,
그리고 나머지 유럽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다.

또한 다양한 노선의 버스가 파리까지 운행된다.


 마드리드행으로 환승하기 위해서는 2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해서 공항 면세점을 둘러 보았다.


인천공항에 비하면 규모가 훨씬 작았다.

난생 처음 유럽땅을 밟고 서 있다는 묘한 감정에 이끌려 아이쇼핑을 하다가 ~


프랑스 파리에 와 있다는 걸 기념하기 위해서 왼쪽에 걸려있는 넥타이를 하나 샀다.


파리에서 20:00에 출발하여 22:05분 늦은 밤에

스페인 마드리드 바라하스 국제공항(Barajas Airport)공항에 도착,

20여 분 버스를 타고 마드리드 시내 중심부에 있는 휴사 프린세사( Husa Princesa)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바라하스 국제공항(Barajas Airport) 마드리드 중심부에 있는 국제공항


휴사 프린세사( Husa Princesa) 호텔에서 3박을 묵었다.



마드리드 시내 ⓒ falco/Pixabay | Public Domain


마드리드(Madrid)


스페인의 수도. 이베리아 반도 중부에 위치해 있고,

유럽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며 스페인 제1의 경제도시이다.


도시 어원에 대해서는 아랍어로  '수원(水源 물의 원천)'을 뜻하는

'마헤리트[Majerit, 알 마즈리트(المجريط)]에서 유래했다는 게 정설이다.


인구 3,255,950명. 또 다른 전설로는 딸기 나무와 곰에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한 소년이 나무 위에 올라가서 열매를 따고 있었는데 한참 따다가 밑에 보니까

곰이 소년이 내려오길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 장면을 목격한 소년의 어머니가 소년을 구하겠다고 딸기 나무 쪽으로 달려오자,

소년이 어머니에게 외친 한 마디가 '마드레 이드(¡Madre, id!, '엄마, 도망가!')'였고,

여기에서 마드리드라는 이름이 유래했다는 것.


이 지방은 대체로 하라마 · 에나레스 · 만사나레스 강이 흐르는

과다라마 산맥(2,430m)의 남쪽 경사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복이 별로 없는 중부 고원에 위치한 이 지역은 전형적으로 황토와

탁 트인 곡창지대인 카스티야의 풍경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스페인 내란(1936~39) 동안에는 몇 차례의 격전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산맥의 경사면에 있는 소나무 숲은 마드리드 시(마드리드 주의 주도이자 스페인의 수도)의 시민들에게
새로운 유형의 여름 피서지로 각광받고 있으며 겨울에는 스키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에나레스 강과 하라마 강을 따라 관개가 되는 두 줄기의 지역에서만

집약적인 원예가 이루어지고 있고, 대(大)마드리드의 외곽에는 주요 간선도로를 따라

별장과 공장들이 들어서고 있으며 가금과 돼지 농장들도 군데군데 있다.


과다라마 산맥에 화강암 채석장들, 남쪽에 점토지대가 있어서

마드리드 주에는 건축자재가 충분하게 공급되고 있다.


중요한 교통통신 수단으로는 이 지방 중앙에 있는 산악지대에 비교적 쉽게 넘을 수 있는 고개가 몇 개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북동쪽에 있는 소모산 고개(1,417m)에는 도로와 부르고스 철도가 지나며,
나바세라다 고개에는 마드리드 - 세고비아 철도가 지난다. 전국의 주요철도는 모두 이 지역을 지난다.



마드리드 근교

중북부 방향으로 세고비야 (Segovia), 북서 쪽으로 아빌라(Avila), 

남서 방향으로 톨레도(Toledo), 남쪽으로 아란후에스(Aranjuez)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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