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타그마 광장 위의 국회의사당과 무명 용사의 묘. 근위대가 군악대와 함께 행진하는 근위병 교체식으로 유명한 곳이다.
아테네 국회의사당 무명 용사의 묘 근위병 교대식
무명용사의 비 전사한 그리스 병사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1929년 건설하기 시작해 1932년 완공한 기념비
2006. 3. 12 무명용사의 비 방문기념 인증샷
= KOPEA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용사들
= KOPEA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용사들
영웅들에게는 세상 어디라도 그들의 무덤이 될 수 있다. 페리클레스(BC495~429)
영웅들에게는 세상 어디라도 그들의 무덤이 될 수 있다. 페리클레스(BC495~429)
2006. 3. 12 근위병과 함께 기념샷
2006. 3. 12. 비둘기와 함께 방문기념 인증샷
파나기아 고르고에피쿠스 성당
아테네 대성당인 메갈리 미트로폴리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성당이다. 12세기에 길이 약 7.5m, 폭 12m의 규모로 지어진 작은 성당으로 '미트로폴리'라고도 불리운다.
흰 대리석 건물이지만 오랜 세월을 견디며 변색이 되어 황색을 띠고 있다. 성당의 원래 이름인 파나기아 고르고에피쿠스는 기도에 응답하시는 성모 마리아를 의미한다.
성 아포스톨루 (Apostles) 교회 (성 사도교회)
아테네 고대 아고라 언덕에 위치한 성 아포스톨루 교회(성 사도교회)이다. 바울이 아고라 전도를 기념하여 1000년 경에 세워진 비잔틴 양식의 교회로
실내에는 17세기에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있다.
카프니카레아 성당
아테네 에르무(Ermu)거리에 위치한 11세기에 건축된 성당이다.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그리스 정교회이다.
아테네 리카비토스 언덕 (Lycabettus Hill)
아테네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해발 295m의 언덕을 말한다. 아테네시에서 가장 높으 언덕으로 아테네의 최고봉으로 불리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매우 아름다워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케이블카가 정상까지 운행되는데 정상에는 하얀색의 작은 교회인 아기오스 조르기오스(Agios Georgios)가 있다.
리카비토스의 민머리에서 보는 아테네의 전경은 훌륭하다.
아테네는 벌거벗은 산에 둘러싸여있다. 큰 강이 없는 아테네는 늘 물 부족에 시달린다. 그 이유는 “아테네”라는 도시 이름의 유래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어느날 포세이돈과 아테네는 이 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달겠다며 다투었다.
결국 이들은 시민들을 모아놓고 그들이 좋아하는 선물을 준 신의 이름을 도시에 달겠다고 제안했다.
포세이돈이 준 선물은 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삼지창으로 바위를 내리쳐, 물이 솟아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물은 소금물이었다.
아테네는 방패로 땅을 내리쳐 올리브나무가 자라나게 하였다.
올리브 기름과 올리브 열매를 시민들에게 준 것이다. 이를 본 시민들은 아테네의 손을 들어주었고, 이에 화가 난 포세이돈은 아테네에 ‘물 부족’이라는 저주를 내렸다.
이토록 물이 부족한 아테네에 산에까지 물이 안 올라가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리카베투스가 민둥산인 이유는 신화에서 나온 바로 그 이유 때문일까?
하지만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바위는 물을 품기에 좋다. 그 덕분에, 리카베투스는 완전히 헐벗은 산은 면하게 되었다.
리카베투스는 ‘늑대들의 언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산기슭에 우거진 소나무숲에 늑대들이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리카비토스 언덕 (Lycabettus Hill)
아테네는 막 태어난 에리크토니오스를 바구니에 담아
케크롭스의 딸들에게 맡기며 “절대 열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리고는 아크로폴리스를 만들 산을 가지러 팔레네로 갔는데,
그 사이를 참지 못한 케크롭스의 딸들이 바구니를 열어본 것이다.
이 사실을 안 아테네는 화를 내며 들고오던 산을 집어던졌는데,
그것이 바로 리카베투스가 되었다고 한다.
리카베투스의 맨숭맨숭한 정상에는 아기오스 조르기오스라는 교회가 있는데,
이곳까지 오르면 아테네의 전망이 기다리고 있다. 민둥산이기에 얻을 수 있는 선물이다.
리시크라테스 기념비
아크로폴리스 동쪽에 있는 고대 그리스의 기념비. 높이 약 7m, 너비 2.75m. BC 334년에 거행된 디오니소스제(祭)의 경기에서
리시크라테스의 합창단이 우승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정사각형의 높은 기단 위에 6개의 코린트양식 반주(半柱)를 지닌 원통형 건물을 세우고,
그 위에 원추형 지붕을 얹었다.
정상에는 우승자가 받은 삼각배(三脚杯)를 올려놓기 위한 대(臺)가 있다. 전체 높이 약 7m, 너비 2.75m의 작은 건물이지만,
고전기 말기의 우아한 양식을 보여주는 뛰어난 조각 건축물이다.
아테네 국립극장
아테네 국립도서관
아테네 아카데미(Athens academy)
아테네 아카데미 (Athens academy)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Plato, BC 428/427~BC 348/347)이 기원전 385년에 설립한 고등교육기관.
아테네 아카데미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 있었던 사설 교육기관이다.
주로 웅변과 화술(話術), 논리를 많이 가르쳤다.
아테네 아카데미가 세워지기 이전 고대 그리스의 교육은
스파르타식 교육 체계와 아테네식 교육 체계로 나뉘어 있었다.
도시국가 그리스의 대표적이었던 두 폴리스(polis)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각자의 성격에 맞는 교육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스파르타는 7세 이상 어린이들을 한 곳의 기숙학교에 모아
20세까지 강력한 군사훈련 위주로 교육을 시켰다. ‘스파르타식 교육’이라는 말의 어원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반면 민주주의를 지향했던 아테네는 주로 대화 방법과
논리 등 상대를 설득하는 요령을 깨치는 교육이 성행했다.
또 스파르타와 달리 문화 지향적이었던 폴리스의 성격에 따라
음악과 미술, 체육 교육도 활발한 편이었다.
아테네에서 가장 발달했던 교육 형태는 수사학교(修辭學校)라는 것이다.
수사학교란 웅변술을 가르치는 학교를 말한다.
최초의 수사학교는 기원전 392년 그리스의 저명한 변론가
이소크라테스(Isokrates, BC 436~BC 338)가 세운 변론술학교였다.
수사학교는 기초적인 문법을 가르치는 초등학교와 달리
비교적 나이와 학식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아테네 아카데미도 기원전 385년 아테네 교외의 아카데미아(Akademia)에 세워진 수사학교였다.
당시 학교 대부분은 당대의 철학자들이 제자를 키워내기 위해 설립했다. 아테네 아카데미의 설립자는 형이상학의 수립자로 일컬어지는 플라톤(Plato, BC 428/427~BC 348/347)이었다.
이후 ‘아카데미아’는 플라톤이 세운 학교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플라톤이 숨진 후 스페우시포스(BC 395?~BC 339), 크세노크라테스(BC 396?~BC 314?) 등이 아카데미아를 이어 받았다.
기원전 270년에는 에포케(epokhe, 판단 중지)의 사상을 처음으로 주창한
아르케실라오스(Arkesilaos, BC 315~BC 240?)가 학교를 계승했다.
이 시기 아카데미아에서 배출한 폴레몬(Polemon, BC 314~ BC 269),
크라테스(Crates, BC 269~ BC 266) 등의 학자들이 아카데미아 학파를 형성했다.
이후 아카데미아는 ‘아카데미’라는 단어로 변형되면서 고대와 중세에 교육기관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됐다. 특히 13~14세기 이탈리아에서 교육기관으로서 아카데미가 새로 확립됐고 15~16세기 크게 번성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인문주의자들의 모임을 아카데미라고 부르기도 했다.
플라톤과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오른쪽)
플라톤 (Plato, BC 428/427~BC 348/347)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객관적 관념론의 창시자, 소크라테스의 제자. 귀족 출신.
40세경 아테네 교외의 아카데미아에 학교를 열어 교육에 임하였으며,
또한 많은 저작(30권이 넘는 대화편)을 썼다.
그의 철학은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당시의 유물론자 데모크리토스의 사상과 대립하였다.
그는 유명한 이데아설을 제창, 이데아(혹은 eidos=형상)는 비물질적, 영원, 초세계적인 절대적 참실재이며 이에 대하여 물질적, 감각적인 존재는 잠정적, 상대적이고, 이 감각에 호소하는 경험적인 사물의 세계는 이데아의 그림자, 모상(模相)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내세웠다.
세계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세계 영혼이며, 인간의 영혼은 세계 영혼이 주재하는 이데아계에 있던 것으로 이 영혼은 불멸(不滅)이며 이데아를 상기하는 것에서 진정한 인식이 얻어진다고 하였다.
감각적 지식은 단순한 '억견'(doxa)에 지나지 않고 영혼에 의한 지적 직관으로써 상기되는 것이 참지식으로, 이들 양자 사이에는 합리적 지식인 수학적 대상의 지식이 있다.
이때 그는 개념적 인식에 대하여 변증법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점차 일반적인 개념으로 전진하여, 가장 일반적인 것에 이르는 과정과,
이 발전적 개념으로부터 점차 일반성의 낮은 단계로 하향(下向)하는 2개의 과정을 취한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인간에게는 육체에 임시로 머물고 있는 영혼에 의해 이데아계를 인식하는 곳에 인간의 최고의 기쁨이 있으며, 철학자는 현실 세계를 이 이상에 근접(近接) 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는 아테네 귀족의 대표로서 이상적 귀족국가의 구상을 내놓고 철학자에 의한 지배를 제창하여 이 지배자 아래에 군인이 있고 그 아래에 상인이 있는 계층을 생각하였다.
이것은 그가 영혼에는 이성적, 의기적(意氣的), 욕정적(欲情的)인 것이 있다고 한 것에 대응한다. 플라톤의 철학은 그 후 계속 관념론 철학에 강력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BC 384년 ~ BC 322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학문 전반에 걸친 백과전서적 학자로서 과학 제 부문의 기초를 쌓고 논리학을 창건하기도 하였다.
트라키아의 스타게이로스에서 출생하여 플라톤의 학교에서 수학하고,
왕자 시절의 알렉산더 대왕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B.C. 335년에 자신의 학교를 아테네 동부의 리케이온에 세웠는데,
이것이 페리파토스 학파(peripatetics : 소요학파, 逍遙學派)의 기원이 된다.
그는 플라톤의 비물체(非物體)적인 이데아의 견해를 비판하고 독자적인 입장을 취하였지만, 플라톤의 관념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에서 동요하였다.
그의 연구는 1) 존재와 그 구성ㆍ원인ㆍ기원을 대상으로 하는 이론학, 이것에는 제1철학, 수학, 자연학이 포함되고, 2) 인간의 활동을 대상으로 하는 실천학, 여기에는 윤리학, 경제학, 정치학이 포함되며, 3) 창조성을 대상으로 하는 제작술(製作術), 여기에는 시(詩) 등 예술 활동이 포함된다.
제1철학은 후에 형이상학이라 불리워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 학문 연구의 대상은 일반적인 것의 획득이고, 이 획득은 감각에 기초한 지각에 의해 개개 사물 가운데 있는 일반적인 것을
인식함으로써 성립하며, 감각적인 것을 통하지 않고는 체험될 수 없다고 보고 귀납을 인식의 조건으로 삼았다.
그에 따르면 사물 생성의 조건이라는 의미에서의 원인으로 1) 질료(質料, 그 hylē, 영 matter) : 생성의 수동적인 가능성,
2) 형상(形相, 그 eidos, 영 form) : 질료에 내재하는 본질, 3) 운동의 시원(始原), 4)목적 등 네 가지를 들었다.
이렇게 일체의 존재는 질료와 형상의 결합이며, 가능성(질료)이 현실성(형상)으로 전화ㆍ발전하는 것으로 보았다. 질료에는 수동성을, 형상에는 활동성을 부여함으로써 운동의 시원과 목적을 형상에 귀착시켰다.
여기에서, 운동의 시원으로서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것을 움직이는 것,
즉 '움직이지 않는 최초의 움직이는 것'으로 신(神)을 내세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같이 초월적인 이데아를 인정하는 관념론자는 아니지만
역시 위에서 볼 수 있듯이 관념론적 입장이 보인다.
그러나 그가 자연을 논하는 경우에는 유물론적 색채가 농후하다. 그의 논리학은 존재론, 인식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인식은 단순히 실험의 검증을 최후의 근거로 삼는 것이 아니라, 감각에 의하지 않고 정신의 작용만으로도 진리가 추정된다고 하면서, 귀납뿐만 아니라 연역의 중요성도 주장하고 있다.
그가 수립한 우주론(宇宙論)은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기까지 오랜 세월을 지배하여 온 천동설이었다.
윤리학에서는 노예제 사회에서의 유한(有閑)계층의 사고에 부합하여 관조(觀照)를 정신 활동의 최고 형태라 하고, 그 모범을 가장 완전한 철학자, 자기 자신을 사고하는 사상으로서의 신(神)에게서 찾았다.
사회학에 있어서는, 노예제를 자연에 기인한 것이라 주창하고, 국가 권력은 그 최고 형태를 권력의 이기적 행사가 아닌, 사회 전체에 도움을 주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념론과 유물론의 2면성은 후세의 철학 사상에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중세의 기독교는 그의 관념론을 받아들여 신학 체계를 세우는 데 크게 이용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사상은 이러한 관념론을 타파하는 유물론의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아테네 아카데미(Athens academy)
아테네대학교(National and Kapodistrian University of Athens)
1837년 5월 처음 세워져 신학과 법학, 의학, 예술의 4개 학부가 설치되고,
33명의 교수와 52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였다.
근대 그리스 국가와 발칸 및 동부 지중해지역에서 처음 세워진 대학으로,
당시 교명은 그리스 왕국의 초대 국왕이었던 오톤의 이름을 따 오톤대학교라 하였다.
1862년에는 국립대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1904년 예술학부가 예술과 과학부로 나눠지고 이후 과학부에 물리학과와 수학과가 설치되고 화학과가 추가되었으며, 약학과, 치의학부 등이 설립되었다.
1911년부터 1932년까지 카포디스트리아대학과 국립대학으로 나눠서 운영되다가,
1932년 두 학교는 아테네국립카포디스트리아대학으로 병합되었다. 이는 그리스 제1공화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를 기념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009년 기준으로 경제정치과학, 법학, 과학, 교육학, 철학, 신학, 건강과학, 물리교육 및 스포츠과학부의
8개 학부에 36개 학과가 설치되어 있으며, 학부와 석사, 박사과정이 제공된다.
EU 통합 펀딩제도로 유럽연합 내외의 학생과 청소년, 자원봉사자, 교수, 교직원 및 시민단체 등에게
국외연수나 연구, 강의 등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에라스무스 플러스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2006년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와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하였다.
주 캠퍼스는 조그라푸(Zorgrfou)에 위치하며 이 곳에는 과학과 신학, 철학부 등이 있다. 이 외에도 건강과학은 가우디 지역, 경제정치과학부와 행정시설 등은
아테네 중심지, 물리교육과 스포츠과학과는 다프네 캠퍼스에 있다.
대학 본관 건물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물로 각각 본관의 왼쪽과 오른쪽에 위치한 그리스 국립도서관,
아테네 학술원과 더불어 아테네 신고전주의 3부작으로 불린다.
내부 정면 내벽 상단에 오스트리아 화가 칼 랄(Carl Rahl)이 그리스 신화와 역사 속 인물들을 그린 벽화가 유명하며, 본관 앞에는 오스만 제국 지배하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작가 리가스 페레오스의 조각상이 있다.
학내에는 1886년에 설립된 인류학 박물관을 비롯하여
고고역사예술박물관, 성서고고학박물관, 아테네대학교박물관 등의 여러 박물관이 있다.
졸업생으로는 하릴라우스 트리쿠피스(Charilaos Trikoupis)와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Eleftherios Venizelos), 최초의 여성 총리인 바실리키 타누 크리스토필루(Vassiliki Thanou-Christophilou) 등을 비롯한 15명의 국무총리와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Konstantinos Karamanlis), 카롤로스 파풀리아스(Karolos Papoulias) 등 3명의 전직 대통령이 있다.
또한 1963년과 1979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조지 세페리스(Giorgios Seferis)와
오디세우스 엘리티스(Odysseas Elytis)가 졸업했다.
마라톤 승전을 알리고 죽은 병사
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776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
4년마다 한번씩 열렸던 이 경기는 시민권이 있고, 범법행위를 한 적이 없으며,
제우스에 대해 불경한 행동을 한 적이 없던 남자만 참가할 수 있었다.
여성의 경우는 관전조차도 금지되어 있었는데,
이 경기에 참여한 모든 선수들이 벌거벗은 채였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될까?
색다른 것은, 당시 고대 올림픽에는 운동선수만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시인, 철학자, 예술가들도 참가해 문학, 예술, 연극 등을 겨루었다는데
현재에는 그 전통이 이어지지 않는 것이 아쉽다.
서기 393년 로마제국의 데오도시우스 1세가 반 기독교행사라고 규정하면서
제293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고대 올림픽은 막을 내렸다.
역사 속에 묻힌 올림픽을 1896년 되살린 이는 프랑스의 쿠베르탕 남작. 빈곤한 그리스를 대신하여 돈을 쾌척한 그리스의 대부호 아베로프 덕분에,
아테네는 고대 경기장을 복원하여 제 1회 근대올림픽 개최지에 걸맞는 대리석 좌석의 경기장을 갖게 되었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아베로프의 동상을 볼 수 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리석으로만 된 이 경기장의 또 하나의 특징은
고대경기장과 같이 말발굽 모양의 구조라는 것.
5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곳은 로마시대에는 투기장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에도 각종 육상경기와 행사 등에 사용되고 있다.
28회 2004 아테네 올림픽 당시에는 개막식과 폐막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이곳은 또한 마라톤의 도착지점이기도 하다.
BC490년, 아테네를 공격한 10만의 페르시아군을 1/5밖에 안 되는 2만의 아테네시민군이 물리친
마라톤 전투의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42.195km를 달려온 병사의 죽음을 기리는
이 뜻깊은 경기는 올림픽의 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나저나, 그 병사도 누드였을까?
디오게네스는 헐벗고 다녔지만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대왕 알렉산드로스다. 네가 원하는 것을 말하라.”
라며 위풍당당하게 그를 내려다보는 청년 앞에서 남루한 옷자락 속으로 손을 넣어 긁적거리며
“햇볕을 가리지 말고 비켜주시오”라고 말했다는 철학자 디오게네스.
시노페에서 태어나 일명 “시노페의 디오게네스”라 불리는 그는 퀴닉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문명을 반대하고 원시적인 생활을 추구한 그는 가능한 한 욕망을 줄이고
수치심을 느끼지 않으며 스스로 만족하는 것에 큰 가치를 두었다.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가 되어야 신에게 가까워진다고 생각했던 것.
그의 세계관에 맞게, 그의 외양은 초라했다.
한 벌의 옷, 한 개의 지팡이, 그리고 약간의 소지품이 든 자루. 그리고 그의 집은 통이었다. 그의 철학이 퀴닉학파라는 이름을 얻은 이유는 통속에 사는 그의 모습이 개(퀴온 Kyon)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무것이나 잘 먹고 잠자리를 걱정하지 않으며 불평없이 정직하게 살아가는 개에게 찬사를 보내며
개처럼 살고자 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과의 에피소드만큼이나 알려진 그의 기행은,
환한 대낮에 등불을 켜서 들고 다녔다는 것이다.
진실한 사람, 정직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며 들고 다녔던 그 등불은 “디오게네스의 등불”이라는 이름으로 구전되었다.
현재 아테네에는 ‘디오게네스의 등불’ 기념비라고 알려진 것이 있다.
아크로폴리스의 동쪽에 있는 리시크라테스 기념비(Lysikrates Monument)는
BC 335 년경 소년 합창대회의 스폰서들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석이다.
그러나 그 생김새 때문인지 사람들은 이 비석을 디오게네스의 등불이라 부른다. 현재 이 비석이 자리하고 있는 수도원은 1810년 바이런 경이 아테네를 방문했을 때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스 조각들은 사실적인 미를 추구했다.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 누드조각상들이 가득한 곳 벌거벗은 옛 그리스인들을 보고싶다면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에 가면 된다.
물론 당시의 그리스인들이 이토록 멋진 몸매를 하고 있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사실적으로 묘사된 나체의 조각상들이 박물관을 꽉꽉 채우고 있다.
아프로디테 여신이 기원전 4세기의 조각가 프락시텔레스가 만든 자신의 조각상을 보고 놀라 "도대체 프락시텔레스는 어디서 내 벌거벗은 모습을 보았는가?"라 했다는 이야기는 물론 지어낸 에피소드이겠지만, 당시 그리스인들이 그 조각상을 보고 놀라
“도대체 프락시텔레스는 언제 아프로디테 여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았는가?”라며 수근거렸을 법하다.
1891년에 문을 연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은 고대 그리스의 건축을 본떠 지어졌다. 조각상뿐 아니라 선사시대에서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만들어진 조각, 회화, 공예품들이 한곳에 모였다. 조각상은 대부분 그리스의 신들을 모델로 하고 있는데, 입고 있는 옷이 없다보니 소지품으로 정체를 판단할 수밖에 없다.
BC46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유명한 포세이돈 청동상은 멋진 자세로 뭔가를 던지기 위해 팔을 뻗고 있는데, 그 손에 든 것이 삼지창인지 번개인지 알 수 없어 “제우스 또는 포세이돈 청동상”이라 표기해놓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널리 포세이돈 청동상이라 알려진 이유는 아마도 바닷 속에 빠져있던 것을 건져올렸기 때문인 게 아닐까. 1928년 아르테미시온의 바닷속에서 건졌기에, 아르테미시온의 포세이돈상이라 불리기도 한다.
디필론에서 시작되는 페이라이에우스(현대명 피레우스)로 향하는 길과 이와 병행해서 성문에서 시작되어 에레우시스로 향하는 도로가 다같이 케라메이코스를 횡단한다.
묘지로서의 사용은 적어도 B.C 12세기 경까지로 소급되며, 특히 B.C. 6세기 이후는 아테네의 부유한 시민 및 공인의 묘지로서 많은 귀인, 전몰자 등이 묻혔다.
근래에 행해진 독일조사대의 발굴에 의해서 많은 도기가 발견되었다.
특히 미케네 말기부터 원(原, 프로토) 기하학적 양식기로 연결되는 도기유품의 발굴은, 선사에서부터 역사시대의 연속을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중요시된다. 그 대부분은 케라메이코스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케라메이코스(Kerameikos) 입구
피레우스 항구로 가는 길목에 있는 ‘무덤의 거리’ 입구와 덱실레오스(Dexileos)의 묘비석
왼쪽 언덕으로 넓게 가족묘가 몰려있다. 아직까지 유명한 묘들이 상당수 남아있다. 다만 여기에 설치된 묘비석과 유물들은 대부분 복제품으로 진품은 케라미코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묘지들 가운에 가장 앞에 위치하여 눈에 띄는 것이 말을 탄 청년상이다. 묘비에 조각된 상은 무덤의 주인공의 직업과 출신 배경, 죽음의 원인 등을 짐작하게 해준다. 망자 한명을 조각한 경우도 있지만, 기원전 5세기경에는 주로 가족을 함께 조각하기도 했다.
이 무덤의 주인은 아테네 전사 덱실레오스(Dexileos)다. 그는 BC 394년 코린토스 전쟁 때 스파르타 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원래 청동으로 만들어져 부착되어 있었다는 창과 말고삐가 소실된 점이 아쉽다.
말을 타고 돌진하여 적을 물리치는 장면을 부조함으로써
그의 가족은 덱실레오스의 용맹을 오래도록 후손에게 기억시키고자 했던 것 같다.
현장에 설치된 이 말을 탄 청년상은 복제품이다.
오른쪽으로 묘비석 상단에 조성된 황소상이 보이는데 역시 야외의 현장에 있는 황소상은 복제품이다. 진품은 케라미코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케라미코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덱실레오스(Dexileos) 묘비석 말을 탄 청년상 진품
곧게 선 갈기와 앞발을 높이 쳐들어 적을 짓밟는 말의 기세와, 쓰러진 적을 창으로 제압하는 청년의 자세가
휘날리는 망토와 어울려 더욱 역동적으로 보인다. 쓰러진 적이 방어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도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다.
콜리톤의 디오니시오스 장례 기념물 황소상
헤게소의 묘비 맞은 편에는 황소 대리석 상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디오니소스 신에게 바쳐진 장례 기념물이다. 콜리톤은 기원전 345년 기둥 위에 황소 대리석 상을 올려놓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고 한다.
'이름을 날리던 귀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디오니소스여, 당신은 생전에 존경을 받을 만한 일을 했고,
이제는 우리 모두 언젠가는 가야 할 페르세포네의 영호(명부)에서 살고 있습니다."
케라미코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묘비석 황소상 진품
이 조각상 역시 복제품이고 케라미코스 박물관에 진품이 소장되어 있다.
케라미코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묘비석 여인상 진품
매우 정교하고 화려하게 조각된 두 자매의 묘비 부조이다.
데메트리아(Demetria)와 팜필레(Pamphile) 자매다. BC 325-310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테네에서는 부유한 이들의 묘비 장식이 점점 화려해지자 4세기 말에 데메트리오tm(Demetrios)가
묘비의 규모와 양식을 검소하게 제한하는 법을 만들기도 했다. 이 묘비는 이 법 제정 이전의 마지막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케라메이코스(Kerameikos) 안내판
케라메이코스(Kerameikos) 전경. 뒤쪽으로 아테네 고대 성벽이 보인다.
우리가 죽으면 갈 곳은 어디일까? 정말 죽음 이후의 세계가 존재하기는 할까?
신실한 종교인에게 이는 금기된 불경스런 의문이다.
그래서 사후 세계의 인정여부는 종교적 믿음의 갈림길이기도 하다. 모든 종교는 기본적으로 구원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된다.
모든 종교는 교리의 방식을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현세(現世)의 고통과 질곡의 삶을 넘어서 내세(來世)의 평화와 안녕으로 보상받고 징벌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문명이 시작된 이래 완전하게 풀지 못한 인간의 오랜 숙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죽고 나면, 어떤 사람도 주변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칭송을 얻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살아있는 동안 살아있는 다른 사람들과 호의를 주고받을 뿐이다.
죽은 자는 가장 나쁜 것을 받을 뿐이다.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인생의 고뇌를 노래한 걸출한 서정시인 아르킬로코스(Archilochos)의 ‘죽음 이후’란 시다. 그는 기원전 8세기 후반 에게 해 파로스 섬 태생으로 호메로스와 견줄 만한 명성을 누린 시인이다.
그는 트라케와 파로스의 식민지 전쟁 등 숱한 전쟁에 직접 참여한 전사이기도 했다. 그는 죽음보다 현실의 삶이 소중하다고 노래했다.
그의 시가 그리스인에게 사랑받았다는 것은
그리스인의 죽음에 대한 사유방식의 일단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오디세이아'에도 그리스인의 사생관(死生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이후 귀향하는 과정에서 사후세계를 다녀오게 된다.
오디세우스는 저승세계에 산 채로 들어가, 지하세계의 그림자 영혼이 된
아킬레우스, 아가멤논, 아이아스 등 많은 영웅들을 만나 그들의 하소연을 듣게 된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의 전우였던 아킬레우스를 만나 그를 위로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대가 여기 사자(死者)들 사이에서 강력한 통치자이니 그대는 죽었다고 해서 슬퍼하지 말라."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애절한 표정으로 이렇게 응답한다. "나는 세상을 떠난 모든 사자(死者)들을 통치하느니 차라리 지상에서 머슴이 되어
농토도 없고 재산도 많지 않는 가난한 사람 밑에서 품이라도 팔고 싶소이다."
아킬레우스의 말에서 망자(亡子)의 서러움이 진하게 묻어난다.
현실의 어떤 구차한 삶도 사후 세계의 어떠한 영광보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인의 사생관(死生觀)을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사후 세계가 있다고 믿었다. 하데스(Hades)신이 주재하는 지하세계는 돌아올 수 없는 죽은 자들의 세상이었다. 뱃사공 카론(Charon)에 의해 죽음의 강 스틱스(Styx)를 건너면 다시는 현세로 돌아올 수 없다고 믿었다.
케라미코스의 전체 평면도
신전의 오른쪽 길이 엘레우시스로 이어지는 ‘신성한 길’이고, 왼쪽이 피레우스 항구로 가는 길이다. 오른쪽 굵은 선의 평면도가 그려진 곳이 폼페이온(pompeion)이다.
성벽과 성문의 복원도
고대 아테네의 이 성벽은 전쟁으로 여러 차례 허물어졌지만, 그 위치와 모습은 별로 변한 것이 없다고 한다. 현재 케라미코스 유적지에 남아 있는 성벽은 고대 아테네의 것을 바탕으로
로마 통치 시대에 다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트리토파트레이온(tritopatreion) 신전이 있던 자리다.
그리스인의 매장풍습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장례식은 부유한 가문이 가족 구성원인 고인을 기리고
가문의 부와 명예를 과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장례 절차는 일련의 의식들로 구성되었는데 도기에 그려진 회화 장면들을 통해서
우리는 이러한 장례가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추측할 수 있다.
이를테면 거대한 기념 항아리에는 두 가지 의식이 재현되어 있는데
하나는 프로테시스, 즉 의식용 침상에 시체를 누여서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애도자들이 주변을 에워썬 채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애가를 부르는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엑포라, 즉 애도자들에게 둘러사여서 묘지로 행진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들 다음으로는 예식에 따라 고인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옷을 입히고
마지막으로 화환으로 장식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후대(헬레니즘)에 와서 장례 절차에 스틱스 강을 건너는 배삯을 지불할 수 있도록
망자에게 동전을 주는 행위가 더해졌다.
묘지에서는 화장이나 매장이 행해지게 된다.
이때 종교 의식에 따라 도살이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매장지들에서 말들의 뼈가 끊임없이 발견되어 왔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또한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기원전 6세기 후반에 밀티아데스의 아버지인 키몬의 장례식에서
그가 상으로 탄 암말들이 함께 묻혔다고 한다.
포도주, 꿀과 물을 섞은 포도주, 우유 등의 헌주(눈물 역시 신에게 바치는 헌주로 여겨졌다)가 고인에게 바쳐졌고, 무덤 또는 무덤 근처에 파진 도랑에 선물이 놓였다.
그 밖의 절차로는 장례 연회와 죽은 이의 집을 정화하는 의식이 있었다. 유명한 디필론 암포라처럼 크고 화려하게 장식된 기념물이 죽은 이의 무덤 위에 세워지는 경우에는
그 가문의 부를 확실하게 과시하는 징표가 되었다.
뒷편에 보이는 나무 두 그루 앞이 트리토파트레이온(tritopatreion) 신전이 있던 자리다.
폼페이온(pompeion)이 있던 자리다. 기단만 남아 있다.
케라미코스 유적 한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건축물은 폼페이온(The Pompeion)이었다. 폼페이온은 아테네의 주성문인 디필론과 신성문 사이에 있었다.
디필론과 신성문은 아테네로 입성하는 주 성문으로 다양한 조각 등으로 장식되었던 것 같다. 인근에서 발굴된 사자상, 스핑크스, 쿠로스 등이 이를 짐작하게 해준다.
폼페이온은 아테네의 최고 축제인 판아테나이아 축제를 준비하는 곳이다. 가로 세로가 각각 70m, 30에 달했다고 하니 대단한 규모의 건물이다.
이곳에서 축제를 위한 준비물, 각종 제물과 도구들이 보관되었다. 이곳에서 아크로폴리스의 관문인 프로필라이아로 향하는 축제 행렬이 출발했다.
하지만 기원전 86년에 로마가 아테네에 침공하여 폼페이온, 디필론, 신성문을 비롯한 주요 시설들을 대부분 파괴했다. 그들로서는 아테네 시민들이 자신들의 영광을 노래하고 결속을 다지는 최고의 축제인 판아테나이아 제전을 분쇄함으로써 아테네인들의 문화를 말살하고 저항의지를 꺾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헤게소의 묘비(사진 왼쪽). 코로이보스 가족의 묘역(사진 오른쪽 두 비석)
헤게소의 묘비. 기원전 400년경. 대리석. 높이 약 5피트(1.58미터) 아테네 국립 박물관 소장.
장례용 부조
이 부조는 기원전 4세기 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두 여인 사이에서 두 남자가 장례식 만찬에 참여중이다.
발 아래의 배는 저승으로 가기 위해 스틱스 강을 건너는 여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배 안에는 죽은 이들을 인도하는 뱃사공 키론이 앉아 있다.
그리스인들은 죽은 후에 가게 될 사후 세계의 존재를 믿었지만, 그곳이 현대 종교의 관념과 동일한 죄악에 대한 구원의 세계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스인들은 현세주의자들이었다. 현실의 삶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했다. 물론 미지의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엘레우시스(Eleusis)에 있는 데메테르 신전에서 비밀스런 종교의식
엘레우시스 비의(Eleusinian Mysteries)가 행해졌던 게 그 증거다.
엘레우시스는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20km 떨어진 곳에 위치했고 아테네 영토에 속했다. 엘레우시스 비의(秘儀)는 입문자들에게 영적인 해탈에 이르는 비법을 전수하였다고 하나
구체적인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입문자는 비밀 엄수 서약을 해야 했고,
아테네가 비의를 주관하면서 비밀을 누설하는 자를 사형에 처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신비스런 이 비교(秘敎)에 입문해서
“의식에 참석하기만 하면 어떤 행동을 하건 상관없이 불멸의 축복을 얻을 수 있다고 약속했다.
즉 비교는 개인의 구원을 목적으로 했다.”
모든 종교의 기원이 구원에 대한 약속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재확인시켜 준다. 비의 참가자들이 어떻게 구원을 보장받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참가자들이 “엘레우시스 비의를 통해 우리들은 삶의 시작에 대해 배웠고, 현생을 행복하게 사는 힘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희망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고 말했던 것을 보면, 이들이 비의를 통해 어느 정도 영적인 위안을 얻었음에 틀림없다.
엘레우시스 비의(秘儀)는 아테네로부터 인정받고 보호를 받는 혜택을 누렸다. 매년 9월에는 대규모 의식이 거행되었다.
아테네에서 엘레우시스에 이르는 길은 ‘신성한 길(The sacred Way)’이라 불렸다.
강위 아치형 통로 오른쪽에 신성문이 있었다.
아테네 성벽의 15개의 문 중 케라미코스(Keramikos)에 인접한 디필론(Dipylon) 성문과 신성문(Sacred Gate)이 있었다. 신성문과 연결된 ‘신성한 길’, 즉 ‘히에라 호로스(Hiera Hodos)’에서 출발하여 엘레우시스까지 이르는 20km의 길은 매년 9월이면 비의에 참가하려는 아테네인들의 신성한 행렬로 붐볐을 것이다.
케라미코스는 공동묘지였지만, 중요한 건축물도 몇몇 있었다. 엘레우시스로 이어지는 ‘신성한 길’과 피레우스 항구로 가는 길의 출발지점인 삼각지에
트리토파트레이온(tritopatreion)신전이 있었다.
아테네 시가지를 떠나는 마지막 신전이자, 아테네 시가지로 입성하는 첫 신전이었다.
신전의 정확한 기능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테네의 번영과 아테네인의 축복을 빌지 않았을까?
아테네의 관문인 피레우스 항으로 가는 길은 바로 아테네가 에게 해로 뻗어가는 번영의 길이었고, 엘레우시스로 가는 길은 사후 세계의 축복을 기원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물품의 수출입이 피레우스 항구를 통해 이루어졌으니 아테네에서 상업적으로,
군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길이었던 셈이다.
‘신성한 길’ 역시 메가라, 코린트, 델피, 펠로폰네소스로 향하는 길이니
그리스 본토와 소통하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케라미코스는 바로 두 길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에 위치했다.
아치 가까운 쪽에 에리다노스 강이 복개되어 있다.
아치형 문 사이 가운데로 에리다노스(Eridanos) 강이 흐른다.
우리나라의 작은 개천 정도에 비교된다.
강의 오른쪽에 ‘신성한 길’이 위치하고, 아치 통로 오른쪽에 신성문이 있었다고 한다.
죽음은 남은 자에게 더욱 슬픈 일이다. 케라미코스에 조성된 숱한 망자의 무덤은 말이 없지만,
묘비석마다 새겨진 다양한 부조 속에 망자가 생전에 가족과 나누던 정겨웠던 장면들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한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애끓는 슬픔과 허망함, 망자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히 느껴진다. 살아남은 가족들은 망자의 기일(忌日)이 되면 케라미코스를 방문하여 꽃을 바치고,
묘비에 새겨진 망자의 모습을 쓰다듬으며 다감했던 추억들을 되새겼으리라.
몇몇 묘비석들은 망자와의 이별의 슬픔을 짧은 글귀의 비문으로 덧붙이고 있어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암파레테(Ampharete)의 묘비도 그 중의 하나다.
"나는 여기에서 내 딸의 사랑스런 자식을 안고 있다.
우리가 살아서 태양 빛을 바라볼 때, 나는 이 아이를 무릎에 안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죽어서 역시 죽은 그 손자를 안고 있다."
손자를 애지중지하던 할머니의 슬픔이 애잔하게 느껴진다. 할머니가 오른손에 살아있는 새를 쥐고 아이를 어르고 있는 모습이 생생하다. 아버지가 딸을 보내는 슬픔이 잔잔하게 담긴 묘비 부조도 인상적이다.
“여기 아리스톤(Ariston)과 로디라(Rhodilla)의 딸 아리스틸라(Aristylla)가 잠들어 있도다.
너는 우리에게 너무나 훌륭한 자식이었다. 사랑하는 딸아!”
이별의 슬픔이 깃든 딸의 모습에 비해 슬픔을 안으로 삼키며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딸의 손을 지그시 잡은 아버지의 모습이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케라미코스는 국립묘지답게 숱한 전투에서 전사한 아테네의 청년들이 수없이 많이 묻혔다. 하지만 용사들의 무덤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묘비 장식에서 뚜렷한 걸작품 몇 기가 남아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무덤 감실(naiskos)에 조각된 아테네 전사 아리스토나우테스(Aristonautes)의 묘비가 대표적이다.
왼손에 방패를 들고 소실된 오른손에 창을 들었을 것이다.
왼발과 오른발을 땅이 파일 듯 굳게 딛고 있고,
발을 벌리고 버티고 선 품새가 쉽게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굳건해 보인다.
더구나 상체와 하체의 근육과 핏줄이 팽팽하게 표출되어
곧바로 적과 육박전이라도 벌이려는 상황을 묘사한 듯 긴장감을 준다.
얼굴 표정의 결연함도 압권이다.
조각의 뛰어난 작품성을 자랑하듯 감실에 조각가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는 것도 이채롭다.
아리스토나우테스(Aristonautes)의 용맹한 모습을
오래도록 생생하게 기억하도록 만든 이는 조각가 스코파스(Skopas)다.
죽은 자들의 슬픔에 산 자들이 언제까지나 매달릴 수는 없는 법이다.
아크로폴리스를 오른쪽으로 바라보며 케라미코스 옆으로 난 넓은 길을 따라
5 분여 정도 걸어가면 아고라쪽으로 가는 길에 늘어선 벼룩시장을 만나게 된다.
여기는 궁색하지만 살아있는 자들의 거래가 활발하다.
고대 아테네 시절에도 이랬으리라. 케라미코스 바로 옆이 아고라였다.
시장의 시끌벅적한 활력이 케라미코스의 우울과 슬픔,
좌절의 분위기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만드는 촉매가 되었을 것이다.
가장 치열한 현세의 공간 옆에 망자들의 묘지를 둔 것도 아테네인들의 또 다른 지혜가 아닐까?
2006. 03.11 케라미코스(Keramikos) 방문 기념 인증샷
케라메이코스 고고학 박물관 (Archaeoloical Museum of Keramekos)
케라미코스 박물관 입구.
박물관 옆에 진열된 석관과 무덤 장식물들.
케라메이코스(Kerameikos) 입구 묘비석 기단 위에 설치된 황소상 진품
이 무덤의 주인공은 사모스 섬 출신의 알피노스(Alphinos)의 아들 디오니소스(Dionysios)다. 그는 기원전 4세기 중엽 헤라 신전(Heraion)에서 보물지기로 봉직한 것 같다.
그는 케라미코스 인근인 콜리토스(Kollytos) 구에 살았고 미혼이었다. 백색의 대리석으로 조각된 힘이 넘치는 황소의 야성미가 물씬 풍기는 걸작품이다.
이중섭의 ‘황소’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이런 석우(石牛) 작품은 신전이나 묘역에 자주 조성되는 양식이다. 청동기 시대부터 시작된 오랜 석우숭배(石牛崇拜)의 관념이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여전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정도의 훌륭한 거대 조상을 봉헌 받은 것을 보면 디오니소스가 헤라 신전에서 꽤 중요한 소임을 맡았던 것 같다. 아니면 그의 가문이 매우 부유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묘비석 기단 위에 설치된 황소상 진품
케라메이코스(Kerameikos) 입구 묘비석 기단 위에 설치된 여인상의 진품
매우 정교하고 화려하게 조각된 두 자매의 묘비 부조이다. 데메트리아(Demetria)와 팜필레(Pamphile) 자매다. BC 325-310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테네에서는 부유한 이들의 묘비 장식이 점점 화려해지자 4세기 말에
데메트리오tm(Demetrios)가 묘비의 규모와 양식을 검소하게 제한하는 법을 만들기도 했다. 이 묘비는 이 법 제정 이전의 마지막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루트로포로스(loutrophoros)
묘비를 장식한 큰 물동이 루트로포로스(loutrophoros)이다. 결혼식 전날 밤 신랑과 신부의 목욕 의식에 루트로포로스를 사용했다.
그래서 결혼하기 전에 죽은 사람의 무덤에 올려놓는 장식으로 널리 쓰였다.
묘비석은 인물부조 식, 오벨리스크 식, 화병장식 등으로 다양하다.
‘프로크세노스의(딸 아니면 처) 헤게소(Hegeso)’로 알려진 묘비석.
‘무덤의 거리’입구 쪽에 있다. BC400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두 여인의 자태가 아름답게 조각되었다. 의자에 앉은 이가 망자(亡子)인 헤게소이다.
머리를 우아하고 세련되게 손질했고 옷맵시도 훌륭한 것으로 보아 높은 신분의 여인으로 보인다. 앞에 선 시녀가 내민 상자에서 보석을 고르는 장면이다.
돌이 아니라 얇은 천으로 만든듯 매우 섬세하고 사실적이다.
신성문 지역에서 발굴된 쿠로스(Kouros) 석조상.
묘비석 상단에 조상된 스핑크스(Sphinx) 상. BC 560-550년 경 작품. 신성문 지역에서 발굴.
신성문의 사자상. BC 590-580 사이 작품으로 추정.
간결하면서도 아름답게 조상된 숫사자상이다. 페르시아 전쟁 통에 용케 땅에 묻혔다가 신성문 구역에서 발굴되었다.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푸스 신들을 모시던 신전, 회의장으로 쓰이던 볼레우테리온, 법정 등의 시설이 있었으나 지금은 건물은 물론 기둥도 거의 남아있지 않고 바닥, 기초만이 그 옛날의 영광을 대변하고 있다.
고대 아고라의 서쪽에는 아테네의 전설적인 왕 테세우스를 기리는 테세이온 신전이
그 모양을 거의 온전히 보전하고 있다.
그러나 발굴 결과 이 신전은 헤파이스토스(대장장이신)의 신전으로 밝혀졌다. 고대 아고라의 동쪽에는 아탈로스 주랑이 있는데 이 건물은 상점 역할을 했었던 것을 현대에 들어서서 복원하다.
아레오파고스 언덕에서 바라본 고대 아고라
아레오 파고스 언덕을 내려와 고대 아고라로 들어선다
아레오 파고스 언덕
아레오파고스(아레이오스 파고스)는 '아레스의 언덕'이다.
그 유래는 그리스 신화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아테네 인근 숲속에서 할리로티오스가 알키페를 겁탈했다. 알키페는 전쟁신 아레스와 아테네 왕 케크롭스의 딸 아글라우로스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딸의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온 아레스는 할리로티오스를 때려 죽였다.
할리로티오스는 포세이돈과 요정 에우리테의 아들이다. 포세이돈은 죽은 아들의 복수를 위해서 아레스를 아테네 법정에 고소했다.
아테네의 언덕에 올림푸스 신들이 모여 이 재판을 진행했다.
신들은 아레스의 살인을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이때부터 이 언덕은 아레이오스 파고스(아레스의 언덕)로 불리게 되었다. 아테네 사람들도 이곳에서 살인죄 등의 많은 재판을 열었다. 오레스테스가 모친 살해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은 곳도 이곳이라고 한다.
아레오파고스 언덕에서 고대 아고라로.
아레오파고스는 아크로폴리스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그 사이로 길이 지나간다.
모나스티라키 역에서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면
오른쪽이 아레스의 언덕이고 왼쪽이 아크로폴리스로 가는 길이다.
아테네 안내책자에는 이곳이 마르스 힐(Mars Hill)로 나와 있다. Mars(마르스)는 로마신화의 전쟁신으로 그리스 신화의 아레스 신에 해당한다.
아레오파고스는 고대에 재판이 열리던 곳이었다.
오늘날 그리스의 대법원 명칭이 바로 아레오파고스다.
그래서 명칭의 혼동을 피해서 이곳을 Mars Hill로 표기한 모양이다. 이곳은 출입구도 따로 없고 당연히 표도 필요없다.
이곳은 또한 사도 바울이 기독교를 선교하기 위해 활동한 초창기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 언덕은 올라가는 길도 미끄럽고 언덕 위도 바위가 매우 미끄럽다. 바람도 무척 세게 분다.
아레오파고스 바로 북쪽 아래에는 고대 아고라가 펼쳐져 있다. 아고라의 동쪽 끝에는 아탈로스 주랑이, 왼쪽 둔덕에는 테세이온 신전이 있다. 멀리 북동쪽으로는 리카비토스 언덕이 자리하고 있다.
사도 바울의 행적<사도행전> 17장 22절 ~ 31절을 새긴 동판 앞에서 인증샷
서기 51년 사도 바울이 로마 지배하에 있던 아테네에 와서 최초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곳이다.
그는 드로아(터키 트로이 근처)에서 환상을 보았다.
꿈에 마케도니아 사람이 바울에게 ‘마케도니아로 건너와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바울은 유럽행을 택했다. 베뢰아에선 홀로 배로 타고 아테네로 갔다.
바울은 아테네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격분했다. 그는 회당과 아고라에서 토론했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은 바울과 논쟁하고는 “이 떠버리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했다.
그들은 바울을 아레오파고스로 데리고 가서
“당신이 말하는 새 가르침이란 무엇이오? 우리에겐 낯서니 말해보시오”라고 말했다.
최고법정의 역할을 했던 이곳,
아레오파고스에서 사도 바울은 '미지의 신에 관하여'라는 설교를 했다.
사도 바울이 아레오파고스 언덕 정상에서 아테네 사람들에게 새로운 종교를 가르침으로써
몇몇 아테네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알려진다. 개종한 사람들 중에는 아레오파고스회 관원 디오누시오도 있었다.
사도 바울의 행적을 새긴 <사도행전> 동판 앞에서 인증샷
바울로는 아레오파고 법정에 서서 이렇게 연설하였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여러모로 강한 신앙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내가 아테네시를 돌아다니며 여러분이 예배하는 곳을 살펴보았더니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까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미처 알지 못한 채 예배해 온 그분을 이제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므로 사람이 만든 신전에서는 살지 않으십니다. 또 하느님에게는 사람 손으로 채워 드려야 할 만큼 부족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으십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조상에게서 모든 인류를 내시어 온 땅위에서 살게 하시고
또 그들이 살아 갈 시대와 영토를 미리 정해 주셨습니다. 이리하여 사람들이 하느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 간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또 여러분의 어떤 시인은 '우리도 그의 자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느님을, 사람의 기술이나 고안으로
금이나 은이나 돌을 가지고 만들어 낸 우상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택하신 분을 시켜 온 세상을 올바르게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고
또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그 증거를 보이셨습니다."
(공동번역 사도행전 17장 22절 ~ 31절)
헤파이스토스 신전 (Temple of Hephaestus)
고대 아고라 헤파이스토스 신전이 눈에 확 들어온다. 신전의 모습이 주변의 현대적인 건물과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고대 아고라에 들어서서 올려다 보는 아크로폴리스
고대 아고라와 주요 건축물
고대 그리스에서 아고라는 전체 시민이 모이는 정치의 공간이었으며, 아테네인들의 경제활동의 중심지였고,
아테네 시민의 여론을 모으는 공동의 광장이며, 또한 다양한 신들의 거주지였다.
고대 아고라와 주요 건축물
아고라의 서쪽 구역은 주로 정치적인 성격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바실레우스 주랑, 협의회관, 톨로스, 장군단, 법정 등이 그렇다.
아고라의 동쪽 구역은 아탈로스 주랑에서 처럼 많은 아테네 시민의 시장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리고 아테네 곳곳에 헤파이스토스 신전, 아폴론 신전, 제우스 신전, 12신전 등의 신전 터 등이
지금도 남아 있어, 그들의 신앙의 공간임을 확인할 수 있다.
협의회관과 메트로온
협의회관은 500인 협의회가 정기적인 회의를 열며 업무를 보던 곳이다. 협의회의 의원은 아테네의 10개 부족에서 각각 50명식 추첨으로 선출되었다고 한다.
협의회는 민회를 소집하고 민회에서 논의할 문제를 미리 협의하고 또 민회의 일정을 주관했다. 협의회의 회의 기록이나 다른 공식 문서들은 협의회관 바로 옆에 있는 메트로온에 보관되었다고 한다.
바실레우스 주랑 이 곳은 당시의 왕궁에 해당하는 건물로, 최고집행관 바실레우스가 거처하면서 집무를 보는 곳이다.
메트로온 터
협의회관 터와 입구(아고라에서 볼 때 메트로온 뒤 건물인 것 같음)
시조 영웅들의 대좌
메트로온 건너편에는 좁고 기다란 대좌가 있던 흔적이 있다.
이 대좌 위에는 아테네 10개 부족의 시조 영웅들을 묘사한 청동 상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고 한다.
아테네인들은 각 부족의 시조 영웅들의 상을 아테네 시민이 오가는 아고라에 설치함으로써,
각 부족의 소속감을 높이고 연대감을 강화하려고 했을 것이다.
장군단 본부 터(오른쪽 아래 둥근 모양의 건물)
장군단 본부는 아테네의 군사적 지도자인 장군들이 모여 회의를 하던 곳이다. 장군은 10인의 장군단으로 구성되었으며, 연임 제한도 없었다고 한다.
장군단 본부 터
감옥터
장군단 본부 터에서 남서쪽으로 좀 더 걸어가면 감옥터가 나온다. 우리 일행은 사형선고를 받은 소크라테스가 투옥되어 있었던 감옥터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확인하지 못했다.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다만 아고라는 지금도 발굴 중인지, 그 발굴 현장을 잠시 지켜본 후 돌아섰다.
필로파포스(Philopappos) 언덕에 소크라테스의 감옥이라고 하는 유적지가 있지만
소크라테스는 거기에서 갇힌 것이 아니라 이 근처 감옥에 투옥되었고 이곳에서 사형당한 것이라고 한다.
아고라의 시민 법정 터
이 시민법정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아마도 인류의 스승 소크라테스에 대한 재판일 것이다. 재판의 한 단면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이 저술한 <소크라테스의 변론>일 것이다.
플라톤은 당시 방청석에서 스승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았고, 그를 구명하기 위하여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는 법정에서의 소크라테스의 말이나 재판 과정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고, 그에 자신의 예술가적인 창의력을 발휘하여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