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 왕궁 관람을 마치고 바로 건너편에 있는 알무데나 성모대성당을 둘러보았다.



알무데나 성모대성당(Catedral Nuestra Senora de la Almudena)


흔히 줄여서 알무데나 대성당(Catedral de la Almudena)이라고 한다. 왕궁 주변에 있다.
16세기에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정치적 문제와 에스파냐 내전, 재정 결핍 등의 이유로 1789년에야 완성되었다.


에스파냐의 국토회복운동 당시 아랍어로 '알무데나'라고 부르는 성벽에서 성모상이 발견된 데서 이름이 유래했는데,
이슬람교도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침략한 후 마드리드를 정복했을 당시 성모상을 성벽에 숨겨둔 것으로 추측된다.


알무데나 대성당은 마드리드의 수호 성모 알무데나를 기리는 성당이라고 한다.
예전에 무슬림들이 스페인의 일부를 지배했었는데, 그 당시 무슬림 공격에 피해를 입을까봐
벽에 숨겨두었던 성모마리아 상이 300년뒤에 우연히 발견되면서 알무데나 대성당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알무데나 대성당 종탑


알무데나 대성당 돔


알무데나 대성당 기둥


요한 바오로 2세 동상









알무데나 대성당은 마드리드의 수호 성모 알무데나를 기리는 성당이라고 한다.
예전에 무슬림들이 스페인의 일부를 지배했었는데, 그 당시 무슬림 공격에 피해를 입을까봐
벽에 숨겨두었던 성모마리아 상이 300년뒤에 우연히 발견되면서 알무데나 대성당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여기 보이는 성모마리아 상이 바로 그 성모상




파이프오르간


스테인드 글래


천장에 그려진 그림도 다른 대성당과는 다르다. 마치 별이 떨어지는 것같은 느낌의 그림






알무데나 성모대성당 관람을 마치고 마요르 광장(Plaza Mayor), 솔(SOL), 시벨레스(Cibeles), 콜론 광장을 둘러본다.



마요르 광장(Plaza Mayor)

이 거대한 광장은 축하 행사, 종교 의식, 처형 등을 거행해 온 풍요로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


마요르 광장(Plaza Mayor) 입구


마드리드의 마요르 광장은 관광객들과 지역 주민들이 다 같이 즐겨 찾는 카페, 바, 상점들이 들어선 분주한 광장이다.
매주 주말이면 이 광장에서는 야외 골동품 시장이 열리며,
이곳은 매년 마드리드 시의 수호성인 성 이시드로 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마요르 광장 (Plaza Mayor) 전경


한때는 시장터였던 마요르 광장은 16세기에 바로크 양식의 광장으로 탈바꿈했고,
가로 90m에 세로 109m의 넓이로 유럽에서 가장 큰 공공광장 중 하나이다.


광장을 세우자는 계획은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1561년 마드리드의 왕궁으로 옮겨온 후 1580년에 처음 시작되었고,
건축가 후안 데 에레라가 이를 실행했다.


데 에레라는 1590년대에 광장에 들어선 첫 건물인 두 개의 탑이 있는

'카사 데 라 파나데리아'(예전에는 제빵사 길드가 있던 곳)를 지었다.


현재 이 건물을 치장하고 있는 우화적인 벽화는 1992년에 그려진 것이다.
데 에레라의 제자인 후안 고메스 데 모라가 펠리페 3세 시대인 1619년에 광장을 완성했다.


마요르 광장 (Plaza Mayor)


마요르 광장에서는 투우, 가면무도회, 왕실 결혼식, 대관식 등의 행사가 거행되어 왔다.
그러나 이곳이 항상 단순한 사교적 중심지였던 것은 아니다.


이 광장은 아빌라의 테레사, 이시도르,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등의 성인이 시성 받은 장소이다.
또한 17세기 스페인 종교 제판이 성행했을 때 이단자 등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이 공개적으로 처형당하거나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 보였던 장소이기도 하다.

마요르 광장 펠리페 3세의 청동 기마상


1616년에 제작된 펠리페 3세의 청동 기마상은 1848년에 광장으로 옮겨와 그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1631년, 1670년, 1790년 세 차례에 걸친 화재가 광장에 피해를 입혔다.


마지막 화재가 일어난 이후 광장을 재건축하는 작업은 건축가 후안 데 비야누에바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주변의 건물에 층을 더 지어 현재의 5층 높이로 만들었고 아치형 포티코 여러 개를 설치했다.
이 재건축 작업은 그의 사후에도 계속되어 1854년에 마무리되었다.



솔(SOL) 광장


푸에르타 델 솔(Puerta del Sol)은 마드리드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사랑받는 곳이다.
푸에르타 델 솔은 ‘태양의 문’이란 뜻인데, 흔히 솔 광장이라고 불린다.


약속 장소로 많이 이용되어 항상 사람들이 많다.
푸에르타 델 솔의 서쪽에는 마드리드 왕궁이, 동쪽에는 프라도 국립미술관이 도보로 이동 가능한 거리 내에 위치한다.


솔(SOL) 광장의 상징 곰 동상
마드리드 지역의 옛 이름은 우르사리아(Ursaria)였고 그 의미는 '곰의 땅'이라는 뜻이어서 곰 동상이 마드리드의 상징이 되고 있다.

소귀나무 열매(산딸기)를 먹는 곰 동상
곰의 왼쪽 발꿈치를 만지면 소원이 다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 부분만 칠이 다 벗겨져 있다.


솔(SOL) 광장 곰 동상 근처 이 자리가 버스킹을 하기에 명당 자리인가 보다.


 카를로스 3세 동상


카를로스 3세는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기 이전에 이미 파르마와 피아첸차의 공작으로,

이후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으로 통치한 바 있다.


그는 이러한 이탈리아 통치 경험과 기술을 바탕으로 1759년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면서

계몽전제군주로서 일련의 개혁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는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귀족층보다

중산층과 계몽 지식인들을 통하여 이러한 정책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부동주의에 갇혀 있던 스페인 민중은 1766년 에스킬라체 난을 통하여 반발하였고,
이후 카를로스 3세는 1767년 예수회의 추방이나 파블로 데 올라비데의 프로젝트와 같은

보다 분명하고 단호한 조치를 통하여 절대왕권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선왕의 중립정책을 포기하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면서 영국의 팽창주의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특히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해서는 행정 개편과 세 번째 부왕령의 설치를 통해

효율적인 통치와 외부세력으로부터의 보호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카를로스 3세 동상 윗부분


카를로스 3세는 펠리페 5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파르네제의 이사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수줍은 성격에 책임감이 강했으며 이복형들에 밀려 스페인 왕위계승은 요원해 보였다.


모친 이사벨은 이탈리아 영토들을 되찾아 자신의 아들들에게 주길 원했고, 실제로 1724년 비인조약을 성사시켜
카를로스가 안토니오 파르네제의 사후 파르마와 피아첸차의 공작이 되는 데 기여했다.


1724년 펠리페 5세의 장남인 루이스 1세가 스페인 왕으로 즉위한 지 7개월 만에 사망하자

이사벨은 왕세자로 있던 페르난도 대신 남편 펠리페 5세가 재차 통치하도록 종용하였다.


이는 노쇠해진 왕 대신 자신이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서였고,
아울러 왕세자의 건강이 이상 징후를 보일 때마다 자신의 아들 카를로스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다.

 
이사벨 왕비는 1733년 프랑스와 첫 번째 왕가협정을 체결하여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차지할 기회를 엿보았고,
실제로 다음 해 카를로스는 나폴리를 공격하여 부친의 이름으로 이곳을 통치하였다.


이후 비인평화조약을 통하여 카를로스는 파르마와 피아첸차에 대한 권한을 포기하는 대신

나폴리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카를로스 3세 초상화> 안톤 라파엘 멩스(1728–1779). 캔버스에 유화. 1765년경 제작. 151.1cm×109cm. 마드리드 프라다 미술관


이복형인 페르난도 6세가 자손이 없이 1759년 사망하자 카를로스는 앞서 체결된 1748년 아헨 조약에 따라서

스페인 왕위계승자가 되었고, 카를로스 3세의 이름으로 스페인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앞서 나폴리 왕국의 왕으로서 감행한 여러 개혁들은 그가 스페인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 자양분이 되었으며,
카를로스 3세가 모든 영역에서 계몽군주로서의 역량을 발휘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카를로스 3세는 프랑스 혁명을 통해 전개될 유럽의 대 격변을 보지 못하고

1788년 12월 14일 마드리드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죽기 전 뒤를 이을 카를로스 4세의 통치를 염려하여

1777년부터 자신의 대신으로 있었던 플로리다블랑카를 곁에 두도록 당부할 정도였다.


그는 스페인의 진정한 계몽전제군주로서 동시대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2세나

오스트리아의 요세프 2세와 비견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개혁적인 조치들은 스페인의 전통주의와 부동주의에 부딪혀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후대에 난항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오벨리스크 기념비
시벨레스 광장으로 가던 중, 오벨리스크 형태의 기념비 있다.


시벨레스(Cibeles) 분수


분수 중앙에 대리석으로 만들어지고 수사자 두 마리라 끄는 사륜마차를 타고 있는 여인의 조각이 있다.
풍요와 다산의 여신 시벨레스의 형상이며 광장의 명칭도 이 여신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조각작품은 18세기에 제작되었고 스페인 신고전주의 걸작품으로 꼽힌다.

시벨레스 궁전


시벨레스궁(스페인어: Palacio de Cibeles)은 마드리드 중앙우체국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문화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다.
원래는 코무니카시오네스궁(스페인어: Palacio de Comunicaciones)이라 했다.


알칼라 문


시벨레스 광장 맞은편에 있다. 1778년에 카를로스 3세의 명으로 궁정 건축가 사바티니가 건축했다.
문이 위치한 곳은 19세기 말까지 마드리드의 동쪽 경계가 되었는데,
아라곤에서 이 문을 통해 마드리드로 오는 상인들에게 마드리드가 얼마나 중요한 도시인지 보여주기 위해 세웠다.


문에는 5개 통로가 있는데, 중앙의 3개는 아치 형태이다.
양쪽 끝 통로 상단에는 장식이 붙어 있다. 알칼라문 주변을 에스파냐 독립을 기념해 독립광장이라고 한다.

콜론광장 콜럼버스 기념탑


콜론 광장에는 거대한 콜럼버스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거대하면서 높은 기념탑 꼭대기에는 콜럼버스가 서 있다.
콜럼버스의 스페인어 이름이 콜론이라고 한다.


콜럼버스, 하면 아무래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사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인도를 찾아 떠났지만 그가 찾아낸 건 거대한 아메리카 대륙이었던 것. 그는 죽을 때까지 그곳을 인도라고 믿었다던가.


그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덕분에 그 땅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이들의 운명은 바뀌었다.
엄청난 재앙이 그들에게 닥쳐왔던 것이다.

콜럼버스 기념탑 윗부분


1492년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아 떠난 해다. 이태리 제노바에서 태어난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는 확신을 가졌다.
대서양을 지나서 인도로 가고자 했던 그는 인도에서 엄청난 황금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배를 타고 신대륙을 찾아 떠나고 싶었던 그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물주였다.

포르투갈 국왕을 만나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자 그는 스페인으로 갔다.


이사벨 여왕을 만나 지원을 요청했고, 여왕은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1492년 8월 3일, 꿈에도 그리던 항해를 떠나게 된다.
그는 자신이 인도를 찾아내서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항해에 성공했을 경우 우선 세습귀족 자격과 해군제독의 계급

그리고 발견하는 모든 땅의 총독 겸 최고행정관의 직함을 요구했다.


경제적으로는, 새로운 땅에서 얻는 수입의 10분의 1과 무역거래에 8분의 1 지분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다.
더 나아가 이 모든 자격과 권리가 후손들에게 세습되어야 한다고 못 박았다.

 

꿈에도 그리던 신대륙을 찾아낸 콜럼버스는 이후 3차례 더 신대륙을 찾아 나섰고 성공을 거뒀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고, 그곳에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년은 불행했다고 한다.
그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이사벨 여왕이 죽자 더 이상 그를 받쳐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왕의 후광이 사라진 그는 54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콜럼버스 기념탑 아랫부분


예전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한 채 쓸쓸하게 죽어갔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요구했던 ‘세습’ 또한 이뤄지지 않았다. 그의 무덤은 세비야에 있는 까떼드랄에 있다.


외롭고 쓸쓸하게 죽어갔다고 하더라도 그는 죽은 뒤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의 이름은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고, 스페인 곳곳에 그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으며, 그의 이름이 들어간 광장도 생겨났다.

콜론 타워(Torres de Colón)


콜론 광장에서 그의 이름을 기리는 건물은 또 있다. 쌍둥이 빌딩인 콜론 타워(Torres de Colón).
스페인 건축가 안또니오 라멜라(Antonio Lamela)가 설계를 했다는 이 건물은

1968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976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높이가 102m인 이 빌딩들은 크기와 모양이 똑같은데, 위에서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다.
두 빌딩을 연결한 구조물의 모양이 플러그와 똑같아 스페인 사람들은 '엥추페(El Enchufe)'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스페인 국립도서관


콜론 광장에서 길을 건너면 스페인 국립도서관이 있다. 앞에서 보면 도서관이고 뒤로 돌아가면 국립고고학박물관인 건물이다.
국립도서관과 국립고고학박물관 안에는 일반 관광객이 들어가지 못한다.

스페인 국립도서관


고풍서린 건물에 여섯 사람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스페인 국왕 펠리뻬 5세가 1712년에 세운 왕궁도서관이 훗날 소유권이

왕실에서 내각으로 넘어가면서 국립도서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국립도서관 앞에 있는 스페인 국왕 알폰소 상


국립도서관 앞에 있는 세르반테스 상


이사벨 여왕 동상


도로 곁에는 이사벨 여왕이 말을 탄 채 십자가를 높이 치켜들고 있는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동상 옆에 설치된 두 개의 분수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스페인의 역사에서 이사벨 여왕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인물이다.



참조 : https://blog.naver.com/wnfusmlekd/221319063123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79705&cid=40942&categoryId=31593

https://jbhm1004.blog.me/220924476023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330694&cid=56790&categoryId=56799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79706&cid=40942&categoryId=40251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50491&cid=43081&categoryId=43081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65327&cid=42864&categoryId=50859
http://blog.ohmynews.com/olives/499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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