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씨지사(鮑氏支祠) 

1561년에 세우고 1791년에 중수한 당월포씨사당(棠樾鮑氏祠堂). 패방군 바로 옆에 있다.

지사(支祠)는 가사(家祠), 종사(宗祠) 등과 함께 사당의 한 종류.

 

 

포씨지사(鮑氏支祠)  포현륜(鮑賢倫, 1955?~ ) 서 


포가남사(鲍家男祠)

 속담에:”황실에는 태표가 있고 백성에게는 사당이 있다라는 말이 있다.

고휘주백성들은 한가문끼리 집거해서 살았다.


조상들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또 같은 가문들을 한데 집결하기 위해서 매 백성들에게는 규모가 같지 않는 사당이 있었다.

사당은 종사,기사,가사 세 가지로 나뉘어진다. 그 중 종사가 규모가 제일 크다.

 

세효사(世孝祠)  청 가경(淸 嘉慶) 6년(1801)에 세운 남사(男祠)

글씨는 청대 서예가 등석여(鄧石如, 1743~1805)가 썼다.

 

등석여(鄧石如) 


1742년 건륭(乾隆) 8년, 안휘성(安徽省) 회녕(懷寧)의 집현관(集賢關)에서 출생, 초명(初名)은 염(琰), 자는 석여(石如)였는데
1796년 가경(嘉慶) 원년에 즉위한 청나라 인종(仁宗)의 이름이 전염(芮琰)이어서 ‘염’자를 피해 ‘석여’라 이름지었다.
자는 완백(頑白), 호는 완백산인(完白山人)이며 흔히 호를 취해서 완백(完白)이라 부른다.


완백의 부친은 이름이 일지(一枝)이며 목재(木齋)라 호를 쓴 박학한 분으로 사체서(四體書)를 잘 모각(摹刻)했으며,
성품이 우뚝 두드러진 분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며 집안 살림이 넉넉지 못해 완백은 어려서 마을 아이들을 따라 산에 나무를 해다 팔아
양식을 바꾸어 먹는 간구한 생활이었으나 틈만 있으면 마을의 유식한 어른을 찾아 경서를 배우고,
부친 목재 선생의 전각과 예서 및 각 체를 본떠 흉내를 내었다 한다.


그의 서가(書家)로서의 출발은 이렇게 부친을 사사(師事)하는 일로 시작되었다.
완백은 63세 때 이승을 하직하기까지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글씨와 전각을 팔아서 전각과 서예에 전념하였다.


영국(寧國, 절강성에 가까운 안휘의 동쪽 끝)에서 구강(九江, 양자강을 거슬러 강서성으로 들어간 곳)으로 전전하면서
글씨를 팔면서 여행을 하던 중 20대의 어느 날 환산산맥을 넘어 수주(壽州)에 이른 완백은
그곳 수춘서원(壽春書院)의 강의 책임자였던 양문산(梁聞山)을 만나게 된다.


수춘서원 원생을 위해 새긴 전각과, 부채에 써준 소전(小篆)이 양문산의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이 자그마한 우연이 등완백의 일생을 크게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된다.


문산은 완백을 강녕의 거인(擧人, 과거에 鄕試를 합격하여 중앙의 會試를 볼 자격을 얻은 사람) 매류(梅熊)에게 소개한다.
그는 북송(北宋) 이래의 명문가로 진한(秦漢) 이래의 금석(金石)의 명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으며, 부친 곡성(捻成)은
역술(曆術)과 산학(算學)의 대가로 강희제(康熙帝)의 수우(殊遇)를 받아 궁중에 비장한 보배를 많이 하사 받은 사람이다.


매류는 완백을 신임하여 그에게 의식(衣食)과 지묵(紙墨)의 비용을 아낌없이 주었으며, 원 없이 공부하게 해주었다.
완백은 환산산맥 최고봉의 기상이 있었으며 이것이 매류를 매혹했던 것이다.


매류의 비호 아래 8년의 세월을 그는 무섭게 면학에 몰두했으며,
그가 공부하던 열광의 모습은 포세신(包世臣)의 『완백산인전(完白山人傳)』에 자세하다.


그는 먼저 전서(篆書)로부터 시작하였다.
<석고문(石鼓文)>,  <역산각석(辣山刻石)>, <태산각석(泰山刻石)>, <개모묘석궐(開母廟石闕)>,
<배잠기공비(裵岑紀功碑)>, <선국산비(禪國山碑)>, <천발신참비(天發神讖碑)> 및
이양빙(李陽啣)의 <성황묘비(城隍廟碑)>, <삼분기(三墳記)> 등을 각각 백 번 임서(臨書)하였다.


또한 전서가 갖추어지지 않음을 고심한 끝에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스무 번 수사(手寫)하였다.
그밖에도 삼대(三代)의 종정(鐘鼎), 진한의 와당(瓦當), 또한 비액(碑額)까지 샅샅이 더듬었다.


공부에 임해서는 매일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 먹을 갈아 큰그릇에 가득 채우고서
밤늦게까지 그 먹을 다 쓸 때까지는 자지 않았다.


추위와 더위에도 계속 멈추지 않고 정진하여 5년만에 전서에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한다.
그는 이처럼 체력 또한 비범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그는 예서에 착수하여 3년이 걸려 예서를 습득한다.
완백이 매류와 작별하면서 새겨준 <청소당(淸素堂)>이란 전각과 <의여고회(意與古會)>란 인장은
건륭 45년(1780) 작이라 한다.


이로 보아 그가 매류의 비호를 받기 시작했을 때는 건륭 37년 30세로 역산(逆算)된다.
그 뒤 완백은 폐의파모(弊衣破帽)로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유람하면서 매예(賣藝)생활로 돌아간다.


때마침 양주(揚州)에서 『통예록(通藝錄)』이란 대저(大著)로 유명한 석학 정요전(程瑤田)의 지우를 얻는다.
요전과는 마음 깊이 허여하는 사이가 되며, 요전은 양주에서 김방(金姪), 장혜언(張惠言) 등을 소개한다.


『완백산인전』에 의하면 김방의 집에서 교수를 하던 장혜언이 시내에서 완백의 서를 보고 돌아와 김방에게
“오늘 이사(李斯)의 진적(眞蹟)을 보았다.”고 하면서 놀라는 김방에게 자상한 내용을 얘기하니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같이 가자고 졸라, 둘이서 시내의 폐허가 된 절간에 유숙하던 완백을 찾아간 이야기가 전한다.
이를 계기로 이들은 서도사(書道史)에 희귀한 걸작들을 함께 남기게 된다.


완백의 『사마온공가의예서책(司馬溫公家儀隸書冊)』에 장혜언이 쓴 발(跋)에는 완백을 만난 것이
1786년, 건륭 51년이라 쓰여 있으므로 이때 완백의 나이는 44세였음을 알 수 있다.


김방은 이미 완성된 자기 집의 장려(壯麗)한 가묘(家廟)의 현액(懸額)을 모두 완백에게 의뢰했으며,
또한 장혜언은 1년간 완백을 따라 전서를 배웠다 하니 이들이 완백에게 얼마나 경도되었나를 알만 하다.


완백은 이 무렵 김방을 통해 향리에 돌아온 태자태부(太子太傅)이자 호조상서(戶曹尙書, 현 재무부장관)
조문식(曹文埴)과 친교를 맺었다.


그의 청으로 완백은 『사체천자문(四體千字文)』의 횡권(橫卷)을 휘호하여 하루 안에 완성하니
조상서는 그의 필력에 경탄하여 사람들에게 완백의 사체서는 온 나라에서 제일이라고 칭송했다 한다.


유석암(劉石庵)이 72세 때에 완백의 서를 보고 크게 놀라서
“천수백년(千數百年) 내에 이런 걸작은 없다.”고 경탄해 마지않았다 한다.


1805년 가경(嘉慶) 10년 10월, 63세로 고향 환공산 아래에서 죽기까지 12년간은 제국을 방랑하면서
매예생활 중 1802년 가경 7년 강소성(江蘇省)의 진강(鎭江)에서 일생의 지기(知己) 포세신을 만난다.


포세신이 완백을 만난 것은 장혜언의 아우 장기(張琦)에 의해서였다 한다.
뒤에 포세신은 『예주쌍즙(藝舟雙楫)』을 간행했는데 이 책은 완원(阮元)의 유명한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과 함께 청조의 서법을 첩학(帖學)에서 비학(碑學)에로 전환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포세신은 그 자신 뛰어난 서가이면서도 자신의 서론(書論)의 중심에,
이를테면 자설(自說)의 심볼로서 놓은 것이 완백의 서, 그 중에서도 전서·예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28세 때 만난 완백에의 존경심이 그에게 서론(書論)을 쓰게 했다 함이 옳을런지도 모르겠다.


『예주쌍즙』 중 청대(淸代) 101인의 작품을 품평(品評)한 「국조서품(國朝書品)」은 서론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그 중 최고의 신품(神品)으로 단 한 사람인 등석여의 예서와 전서를 들고 있다.


세상에 전하는 여러 『완백전(完白傳)』 가운데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완백산인전』이며 완백이 죽은지 한해 뒤
1806년의 것으로서 아쉬운 정에 찬 이 글은 현대의 우리들이 읽어도 깊은 감명을 받는다


흡현 당월촌에 있는 돈본당은 당월포씨의 남자사당이다. 포씨가문의 각세 조상들을 모시고 있다.



사당은 목석으로 구조되었고 조각은 비록 복잡하게 많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정밀하고 대범함을 잘 표현해 내고 있다.

사당은 건립 당시에 종인이 가문에서 장유의 순위와 덕망이 높은 조상들을 존경한다는것을 표현하는 곳이다.


동시에 또한 외지에 나가 있는 상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에 그 기파와 재능을 현시하는 곳이이기도 했다.

사당의 건축 특색은 각양각색이었다.


예를 들어서 돈본당의 구조는 들보가 천정을 받들고 빛겨서 기둥도 받쳐주는 식으로 되었고, 
량타 ,작체는 보편적으로 사용되어 그때 당시 통용된 건축수단을 반영하고 있다.


구조재의 장식은 또 농후한 지방특색을 구비하여 동곽량의 머리 끝부부은
코끼리머리 형태로 되었는데 아주 생동감이 있고 조각은 또한 다양하다.


침당처마밑에는 단풍나무가 접혀져 있는 것같고
두공은 순전히 장식으고 천정에 무게를 부담하지 않게 설계하였다. 


삼진 다섯개 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규모가 웅장하며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향당구조는  넓고 훤하며 큰 재료들을 사용하여 그 기세가 아주 웅장하다.


사당 안에 의전규례비석과 가경황제상유비 등17개 패각이 있다.
위에는 “공의돈본호규례”가 새겨져 있다. 
사당은 한 가문에 있어서 정신적 핵심이고 그 가문의 위엄을 보여주는 성전이다.

낙선호시(樂善好施)  조문식(曹文埴, 1735-1798) 서

돈본당(敦本堂)  왕문치(王文治, 1730~1802) 서.

 

왕문치(王文治)

청나라 강소() 단도() 사람. 자는 우경()이고, 호는 몽루()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워 12살 때 시를 지을 수 있었으며, 서법에도 뛰어났다.


자라서 경사()를 내왕하며 한림원() 시독()이던 전괴()를 따라

유구()에 사절로 가면서 마침내 문장이 해외에 알려졌다.


건륭() 25년(1760) 전시(殿)에서 일갑삼명(, 즉 )으로 진사 급제하고

편수()에 임명되고 시독()에 발탁되었다.


나중에 운남() 임안지부()로 임명받았는데,

사건이 있어 직급이 낮아지자 병을 핑계로 휴가를 청해 귀향했다.


오월() 지방을 왕래하며 주로 항주()와 진강()의 서원에서 강의했다.
서예에 일가를 이루어 풍운()이 뛰어났다.


희곡을 즐겨 집안에 악기를 쌓아놓고 노비를 사들여 그들에게 작곡을 가르쳤다.

연출할 때는 거리를 따지지 않고 몸소 따라다녔다.


고종()이 남방을 순행하자 명을 받들어 9곡의 희곡을 지었는데,

이들을 아울러서 『영란신곡()』이라 일컬었다.


나이 오십이 되기 전에 불학()에 전념했다.

저서에 『몽루시집()』과 『쾌우당제발()』이 있다.

 

 

 


충효염절(忠孝廉節)  주희(朱熹, 1130~1200) 서.

 

주희(朱熹, 1130~1200) 주자.


중국 남송의 유학자. 이름은 희(熹), 자는 원회(元晦), 호는 회암(晦庵). 주자는 존칭이다.
신안(안휘성) 사람. 주자학을 집대성하였다.


19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관계(官界)에 들어갔으며 그 전후에 도학 외에 불교, 도교도 공부하였다.
24세에 이연평(李延平)과 만나 그의 영향 하에서 정씨학(程氏學)에 몰두하고 다음에
주염계, 장횡거(張橫渠), 이정자(二程子)의 설을 종합 정리하여 주자학으로 집대성하였다.


주자의 학문은 이기설(理氣說 : 존재론), 성즉리(性卽理)의 설(윤리학), 격물규리(格物窺理)와
거경(居敬)의 설(방법론), 경전의 주석이나 역사서의 저술, 구체적인 정책론으로 되어 있고,
그 모두에 중세 봉건사회의 근간인 신분혈연적 계급질서의 관점이 관철되고 있다.


그의 업적은 '군신(君臣)ㆍ부자(父子)ㆍ부부(夫婦)의 도'(三綱)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 오상 五常)을
영원불변의 '인리천리(人理天理)의 지'(至)로 보는 입장에 서서 그것을 초월적 또는 내재적으로 이론화한 것이다.


주자의 학문과 그 실제 정책은 모두 봉건 사회의 질서원리가 관철되고 있으며
철학적으로 강고하게 체계화시켰던 것으로 주자학은 봉건 사회의 이데올로기로서 오랫동안 군림하였다.


주요저서 : 四書集註, 周易本義, 資治通鑑綱目, 朱子語類


포씨오륜술(鮑氏五倫述)  등석여(鄧石如)의 예서.



포가여사(鲍家女祠)


포가여사당은 청이당이라고 부른다.
포씨가문에 역대정부열녀들을 찬양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남자사당하고 반대로 남쪽에 자리잡고 북쪽을 마주하고 있으며 동쪽벽 측문으로 들어간다.
구시대 여성들은 남자사당을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청이당은 전국에 유일한 여자사당이며 세계부녀대회에서 네 번째로 지정한 참관점이다.
이는 휘주종법제도와 휘주의 상업역사 연구에 생동하는 교재이며
중국에서 "여자는 사당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전례를 타파한 보기드문 여사당이다.


휘주문화특색에서 건축에는 패방,민가,사당 3절이 있다.
이들은 휘쥐여성들의 운명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불효유삼,무후위대>라는 유가신조 하에서 휘주남자들은 일찍 결혼하고 아이를 가진 후
짐을 싸서 차자식을 버리고 부모들을 남겨둔 채, 집을 떠나서 멀리로 돈벌이하러 나간다. 


그 이후 일부는 사방을 떠돌며 소식도 없이 결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기도 한다.

일부는 성공한 다음 외로움을 못참아 술집을 들락거리면서 소탈한 생활을 누리고 
집에 조강지처는 완전히 잊어버린다. 


일부는 부자가 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그때는 벌써 삼처사첩을 가진 몸이다. 
신첩 웃음이 이뻐보이고 구인의 눈물은 보이지도 않는다.


오랜 세월 동안, 남편이 멀리 나가 사업하는 휘주여자들은 결코 방촌누각에서 자폐하고
천정으로만 들어오는 일편의 빛으로 온갖 힘을 다해서 애들을 키우고 시부모를 모시며
어쩔수 없이 꽃다운 청춘을 흘러버리고  생명은 시들어가고  독수공방으로 세월을 보낸다. 


이것은 그들이 뛰어 넘을수없는 운명이었다.

정부열녀의 패방은 정신상 그녀들을 억제하고 가문에 사당은 가문의 규정으로
행동상 속박해 버리고 마두벽의 봉쇄는 신체상 그녀들을 묶어버린다.


지붕보다 높은 계단식 마두벽은 벽돌로 만들어졌고 방풍방화할 수 있다.
높게 싸아진 마두벽 바로 위에만 작은 창문이 만들어져 있는데 도둑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독방 여자들의 외부 출입을 막을수 있고,
그들의 마음을 마비시키고 감정을 끊어 그녀들의 바람행위를 막기 위해서이다.

“높은 벽안에는 고독하여 휘주는 침묵한다” 
길고 긴 휘상들이 남긴 발자국에는 수많은 휘주여자들의 피눈물이 뿌려져 있고
패방, 사당 마두벽 수묵그림과 같은 아름다운 휘주식 건축 뒤에는
수많은 부녀들의 암담하고 씁쓸하고 처량한 처지가 숨겨져 있다.

청의당(淸懿堂) 


중국에서 유일한 여사(女祠)로 포씨비사(鮑氏妣祠).

'청의(淸懿)'라는 이름은 '淸白貞烈 德行美好(청백정렬 덕행미호)'의 뜻을 취한 것이다.

우리나라 창덕궁에도 '청의정(淸懿亭)'이 있다. * 懿 : 아름답다, 훌륭하다 (의)

 

 

입구 옆 안내판에 한글이 씌여 있다.

 

 

정효양전(貞孝兩全)  증국번(曾國藩, 1811~1872) 서. 청의당(淸懿堂)  포엽(鮑鉩, ?~?) 서 

 

증국번(曾國藩)


호남() 장사부() 상향현() 사람

본명은 자성()이고, 자는 백함(), 호는 척생()이다.

청()나라 때의 대신()이자 군사가, 문학가이다.


증자(; 증삼)의 70세손으로 도광() 18년(1838)에 진사() 출신이다.

벼슬은 한림원서길사(), 한림원검토(), 문연각교리(), 시강학사(),

내각학사(), 예부시랑(), 예부우시랑(), 병부우시랑(), 양강총독(),

직례총독(), 무영전대학사(殿) 등을 역임했고, 의용후()로 봉해졌다.


시호는 문정().
중국 청나라 말 태평천국의 혁명을 막기 위해 호남성을 중심으로 편성한 반혁명 군대인 상군()을 창립하고,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다. 


홍장(), 좌종당(), 장지동()과 더불어 만청사대명신()으로 일컬어진다.

산문()에 능통하여 상향파()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저서로 《치학논도지경()》, 《지가교자지술()》, 《빙감()》,

《증국번가서()》 등이 있다.


 






 

참고   http://www.paifangqun.com/   http://blog.daum.net/zeroko2000/7847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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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06월 15일 12:40분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하여 14:00 중국 항주국제공항에 도착.

(2시간 20분 소요, 시차 -1시간) 


▲ 항주국제공항에서 대학교 후배이기도 한 송영길 전 인천시장이 우리 인문기행 일행에 합류했다.

공항에서 숙소 크라운플라자 호텔로 이동 중.

  

▲ 황산 크라운플라자 호텔로 이동(3시간 30분 소요)





안휘성 지도  ⓒ《중국인문기행》p224.


안휘성은 중국 중앙부 양자강(揚子江) 하류 유역에 있다.

성수기에는 안휘성의 최남단인 황산까지 가는 인천발 직항이 있는데, 이번에는 비수기라 항주(抗州)를 거쳐서 갔다.


인천공항에서 항주공항까지는 1시간 45분, 항주공항에서 황산시내까지는 버스로 3시간 30분이 걸렸다.

* 항주공항 : 예전의 소산(蕭山)공항.


▲ 이번 인문기행에 참가한 분들이 함께한 기념 촬영.


부부로 오신 6쌍 12분, 부자 1쌍 2분, 중국에서 거주하고 있다가 항주공항에서 합류한 2분,

서울대, 서강대 등 대학에서 정년 퇴임하신 분들과 교장 선생님을 마치고 정년 퇴임하신 분들,

다산 인문학 강좌 등을 통해서 참여하게 된 분 등 34분과 송재소 교수 등 스텝 4분

그리고 조선족 현지 안내원을 더하여 총 39분이 이번 기행에 함께하고 있다.


 당월패방군(棠樾牌坊群) / 포가화원(鮑家花園)  


올해 국가급 여행 풍경구 AAAAA로 승격된 당월패방군은 총 7개의 패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패방은 명·청대에 이르는  400여 년 동안 당월촌의 포(鮑)씨 가문에서 배출한

충신, 효자, 열녀들의 공덕을 널리 선양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황산시(黃山市) 시정부 소재지인 둔계구(屯溪區)에서 27km, 흡현고성(歙縣古城)에서 10km 정도 가면 된다.

여기에는 송,원나라부터 명청시기에 이르기까지 800여 년된 고촌락-당월촌이 있으며

장엄한 7개 패방, 듬직하고 우렁찬 남사당, 청아하고 유일한 여사당,

포씨가문의 효도를 요해할 수 있는 효도사당과 각종 종법, 공익, 문회, 서원, 의창 등 기념 건축물이 있다.


  패방군과 연결되어 있는 포가화원은 역사를 전제로 하여 휘상저택원림을 배경으로 하였으며,

분재를 주제로 국내외 각종 유명한 분재가 있으며 정자 등 원림 건축물이 있다.


휘주문화의 대표로 손색이 없는 웅대한 규모를 보여주고 있고 정원의 중심에 위치하며

호수, 나무 ,가산, 꽃들이 잘 어우려져 황홀한 경관을 만들었다.


풍경구는 2005년도 국가여유국으로부터 4A급 여유경구로 평선되였으며 황산시 <10가> 여유명소로 되어 있다.

당월패방군에는 고대의 패방, 사당, 민가는 <휘주고건축 3절>로서 걸작들이 모여 있으며

한폭의 아름다운 휘상고리도를 그리고 있다.


* 위치 : 안휘성 황산시 흡현. www.paifangqun.com

* 당월(棠樾) : 팥배나무 그늘.《시경》<감당(甘棠)>편에 '蔽芾甘棠 勿翦勿伐 召伯所茇'이라 함.

棠은 '팥배나무, 아가위나무', 樾은 '나무 그늘'의 뜻.


고휘주문화여유구전경도(古徽州文化旅游區全景圖)  http://www.guhuizhouta.com


棠樾牌坊群(당월패방군) 강택민(江澤民, 1926~ ) 서


풍경구 개요


 황산 흡현 패방군 포가화원 풍경구는 산수가 아름다운 흡현 당월촌 내에 위치해 있다 .

고패방,고사당,고민가,포가화원으로 조성되었다.


여기는 고성흡현과 10 떨어져 있고 시정부가 위치해 있는 둔계하고는 27 떨어져 있다.

당월은 포씨 가문이 집거하고 있는 지역이다.


가문은 남송시 건연 년간에 자리를 옮겨 여기에 와서 정착하기 시작해서 거의 800여 년 동안 살았다고 한다. 

 ,,, 핵심으로 석패방은 양쪽에서 중간으로 순서대로 차례로 배렬되어 반호형으로 펼쳐져 있다.


서에서 동으로 순서가 포찬효행방,자효리방,포문령처왕씨결효방,락선호시방,

포문연처결효방,포봉창효자방,포상현상서방으로 되어 있다.


일곱개 패방은 엄숙하고 정엄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다.

 조용하고 품이 있게 서 있는 돈본당 남자사당은 북쪽에 앉아 남쪽을 향하고 있다.


세 개 문, 다섯 개 방이고 오풍루문정으로 전체 구조는 간결하고 훤하게 지여졌다.

은행나무를 기둥으로 하고 장목은 들보로 쓰고 벽돌, 나무, 돌조각들을 사용하여

곳곳마다 유가인생철리와 문화수양을 드러낸다.


중합지미 뚜렷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사당안에는 종족관리제도를 새긴 비각들과 <가경상유삼도비>들이 보존되어 있다.


이는 종법제도를 연구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실례들이다.

 둘도 없는 청이당 즉 여자사당은 남쪽에 앉아 있고 북쪽을 마주하고 있다.


다섯 개 문 삼진 마두벽으로 전체 사당의 구주는 치밀하게 잘 짜여져 있고

그 조형은 유창하고 안은 수려하고 밖은 소박하여  단정한 느낌을 준다 .


사당의 벽은 전부 벽돌조각으로 되어 있어 그 모습 또한 아기자기한 느낌을 줄 뿐만아니라 화채롭다.

그리하여 휘주지방에서 사당돌 조각의 으뜸으로 불리운다.


 패방군과 인접되어 있는 포가화원은 휘상개인 정원을 배경으로 하여 휘파분재를 주제로 삼아

휘파분재 예술의 정화들이  모여 있고 동시에 국내에서도 각지방파 분재들의

대표작품들이 집결되어 있어 이는 하나의 비교적 고품격의 분재 관광기지이다. 


이 정원 면적이 21.73 헥타르이고 그 중에 인공호수와 분재정원이 각각 5.33 헥타르 차지한다.

분재의 만발을 전시하고 정원에 여러가지 분재 품종이 모두 갖춰져 있다.


형태가 다양하고 아기자기하며 서로 아름다움 모습을 다투며 자랑하고 있다.  

다시말해서 하나의 대형산수조합이라고 할수 있다.


풍경구는 국가중점문물보호단위이고 세계문화유산신보지,국가4A급 여행풍경구이며

또한 "황산시십가여행 풍경구이다.



역사적 기원


 당월은 흡현시내에 15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북쪽 소나무 우거진 능선의 용산을 가까이 하고 있고  남쪽 분지-평원옥야을 인접하고 있다.


근원 황산의 풍낙하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멀리로는 부정산을 평벽으로 풍수설에서

산을 베고 물을 안고 평원을 마주하고 있다라고 선택할수 있는 이상적 위치다.


지금까지 여전히 마을 입구에 역대에 흥건된 일곱 높고 거대한 석패방군이 우뚝 솟아 있어

휘주에 둘도 없는 장려한 경관을 이루고 있다. 


동시에 마을안에 현재 보존하고 있는 사당 민가 화원도 휘주특색의 대표성을 반영하고 있다.

당월촌의 형성은 남송건연년간 ( 1130)까지 추적할 다.


부읍 (지금의 흡현현 시내) 서쪽문은 으로 유명한 포용이 높은 관직은 못했어도

평생 서향마을에서 산업을 넓혀 차츰 부자가 되었다.


그는 지금의 당월을 이상적인   휴한지소를 만들수 있는 곳임을 욕심내고 여기에 별장을 지었다.

후에 당월포씨는 그를 시조공으로 존칭했다.


포용이후 당월은 단지 한 곳의 포씨가문의 또 다른 원림업이었고 따로 건설을 하지 않았다.

사세종손 포거미는 산천이 아름답고 원전이 넓어 자자손손 백세대업을 일을수 있겠노라해서

부읍서문에 집식구들을 데리고 당월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팔백여년간 당월촌은 포씨씨족들만이 사는 곳으로 되었고 

성쇠기부를 거쳐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다.

 

 패방은 황산에 부여한 역사 훈장이다.

역사상에 매세대마다 황산(휘주)에서는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나왔다.


이팅구이, 주희, 호개문, 왕모음, 대진, 호정, 도행지, 황빈홍 등 걸출한 인물들이  태어났다.

흡현에서만 해도 명청 두 조대에 524명의 진사 ,1531명의 거인, ”부자상서”, ”동포한림들로 마을의 명성을 높였고

연과삼전선,십리사한림이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아 있다.


더우기 이 주리학의 고향에서는 부녀들은 봉건주의 절개를 지켜야 한다는 관념 때문에 깊은 해를 받았고

유림외사에서 나오는 왕삼구와 같은 절부열녀들이 아주 많이 나왔다.


 구시대에 충효결의우수했던이런 사람들을 표창하기 위해서 황산시 각 지방에는 대량의 패방들이 세워졌다

그 역사 흔적들은 여러번 파손을 당했지만 지금까지도 100여 좌의 패방들이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당월패방군이 바로 그 중에 대표작이다.

 당월패방군은 7 패방이 명나라 3 청나라 4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으며

봉건사회 충효결의론리도덕의 개요를 묘사해 냈다


그 중에 명나라 패방의 횡편에는 어제자효리라는 대자가 새겨져 있다

황제가 휘상 포수손부자를 표창하기위해서 세워준 거다


역사책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원나라 때 흡현의 수장이 달이 부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서 백성들을 노략하고 살해했다.

그때 당월포씨 부자는 반란군에게 잡히게 되었는데 한사람만 살려준다구 누가 죽고 누가 살지를 결정하라고 했다.


그런 부자는 서로 자기가 죽기를 다투고 대방을 살려 달라고 하는데

그 행동이 하늘도 감동시킬 정도로 심지어 반란군도 감동되어 차마 죽일수가 없어서 사람을 풀어 주었다고 한다.


 후에 조정에서 이 일을 알고 그들을 표창하기 위해서 이 패방을 하사하였다.

청나라 건융황제도 포씨종사를 위해 제련하기를 : ”자효천하무쌍리,금수강남제일향.” 

그리고 전해지기를 당월포씨 가문은 그 때 벌써 ””””패방이 있었고 패방만 없었다고 한다.


그 마을 포씨세가 에서 포숙방시기에 양회소금운송관리로 강남염업 명맥을 잡고 있었는데

그는 황제에게 자 패방을 세울 수 있게끔 청하여 가문을 더욱 빛내기 위해서

양식 십만단과 은3만 냥을 받쳐 제방을 팔백리나 재보수했고  세 개 성의 군사들의 양식을 부여하였다.  


그 공로로 결국 조정에서는 허락을 해 주었다.

그리하여 당월촌 마을 입구에는 또 하나의 호선락사라는 의자패방이 세워졌다

흡현에서 많은 패방들 중에서 이같은 이상입사,이사보상정치적 경제적 상호 일관성의 긴밀한 관계는 종종 볼수 있다.

 

일곱개 패방


패방(牌坊)은 문짝이 없는 대문 모양을 가진 중국 특유의 건축물이다.

본래 집의 출입문이나 마을의 입구에 마을을 드나드는 문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그리고 궁정, 능, 사당, 관청을 비롯하여 절의 어귀에도 세운다.

 패방은 훌륭한 인물을 기리는 기념물인 경우가 많다.


인물과 관련된 기념물로써의 패방은 국가에 공을 세웠거나 부모에 효도를 하거나

또는 남편을 위해 정절을 지킨 인물들, 즉 남에게 모범이 되만한 공로가 있는 사람들에게

국가에서 그의 공을 인정하여 황제의 명으로 세워진 것들이다.


공덕(功徳)패방 정절(貞節)패방 등이 있다.

따라서 패방이 많다는 것은 그 지역에 인물이 많이 났다는 것을 말하며

이는 지역 주민들에게는 매우 큰 자랑거리가 되는 것이다. 


패방의 기둥은 2~6개이며 낮게는 수 미터에서 높게는 10여 미터에 달한다.

지붕을 여러 층으로 얹은 것도 있다.


나무로 만든 것을 목패방이라 하고, 돌로 만든 것을 석패방 또는 석루(石樓) 그리고 패루(牌樓)라고도 부른다.

인재를 많이 배출한 후이저우에는 패방이 넘쳐난다.  


 이곳 패방은 모두 7개인데 명대(明代)의 것이 3개, 청대(淸代)의 것이 4개이다.

흡현 주변에서는 어디로 가든지 패방이 보이는데 이곳이 가장 아름답다.


드넓은 논 속에 7기의 패방이 일렬로 늘어선 모습은 음악적인 조화마저 느끼게 한다.

이것들은 소금장수를 하면서 부를 이룬 포씨(鮑氏)가 일족의 공적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포찬효행방

 

자효리방

포문령처왕씨 결효방


락선호시방


포문연처오씨결효방


포상헌상서방

 




Baojia 포가화원


포가화원은 청나라 건융, 가경년간에 저명한 휘상 염법도원춘추시기
이름있는 승상 “관포지교”에 나오는 포숙아의 후대 포기원의 개인화원이었다. 


현재 중국에서 제일 큰 개인 정원과 분재 관람지이다.
이는 세계에서도 둘도 없는 당월 패방군에 위치해 있다.



주로 휘파분경이 주제이고 동시에 국내에서도 유명한 분재들을 모은 정화라고 볼수 있다.
패방군풍경구와 한일체로 용합되어 있어 완벽한 휘상고려를 구성하고 있다.


이는 전영적인 고휘파정원과 휘파포가화원분재가 서로 결합된 중국 개인정원 정화이다 .
소주에 졸정원, 유원, 사자림과 무석에 려원, 매원기명,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 전쟁시기에 파괴되었다.


현재 보수공사를 하고 있는 이는 중국에서 제일 큰 개인정원과 분재풍경구이다.
지금 정식으로 비물질세계 문화유산과 세계기네스기록에 신청한 상태이고 “동방원림지모”라고 불리고 있다.


분재애호자들의 “매가”이다.
패방군풍경구와 한일체로 용합되어 있어 완벽한 휘상고려를 구성하고 있다.


이는 전영적인 고휘파정원과 휘파포가화원분재가 서로 결합된 중국 개인정원 정화이다 .
소주에 졸정원, 유원, 사자림과 무석에 려원, 매원기명,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 전쟁시기에 파괴되었다.


현재 보수공사를 하고 있는 이는 중국에서 제일 큰 개인정원과 분재풍경구이다.
지금 정식으로 비물질세계 문화유산과 세계기네스기록에 신청한 상태이고 “동방원림지모”라고 불리고 있다.


주요 관광 프로젝트의 분재 정원 : 포가화원에는 정품원, 유파원, 산석원이 있다.

분재정원은 산석분재를 주요로 하고 화초나무분재를 보조로 하고 있다.


휘주사람, 황산스타일, 천상인간 등을 주제로 했다.

제일 큰것은 정원에 제일 안쪽에 있는 강산유지다교이다.


정원내에 분재들은 대다수가 가지가 휘여든 목본식물로 주로 재배상대로 하고 있다,

모습들은 다양하여 줄기고 굵고 커서 신기한 것도 있고 형태가 구블구블하여 고풍스러운 것도 있고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도 있고 아기자기하게 귀여운 것도 있어 미감을 장식할수 있는것들로 있다.

그 중에는 분재예술인이 수년간 열심히 재배해낸 휘파특색이 농후한 남국풍정 있다.


 주로 넓은 풀밭, 입구광장, 광장합, 사계절화원(식물풍경구,춘하추과각색식물관광구),

향토화원(황산포가화원지구특색식물), 휘주문화 전시관(유명한 서예나 화가가 모은 진적들,문방사보 등), 다원파, 송림파,

유락호, 수조호, 관어지, 경제수생식물원(), 산수폭포, 유람선 부두, 분재재배기지, 도바, 다루, 주작방 산수폭포가 있다.

 

공원의 보물

 


"남국풍정"는 가지높이가 1.28 m,넓이는 2.8 미터이다. 
현재 중국에서 제일 으뜸으로 가는 대형고용분재 중의 하나로 이백여 년의 역사가 된다.


제일먼저 포씨화원의 수집품이었다. 후에 광동으로 유전되었다. 
포가화원에서 제일 비싼 가격으로 회수한 정품이다.


찐하게 그린 눈섭마냥 빽빽하게 자란 나무잎은 땅과 하늘을 덮었고 
엉켜서 자란 가지와 끝없이 자라는 뿌리는  평화롭고 국태민안을 빈다는 뜻을 품고 있다.
세계에서도 보기드문 이 분재는 곤명엑스포, 곤명 국제 원예 박람회에 나타난 적이 있다.





송재소 교수의 중국인문기행

 

1. 우리나라 한문학의 대가인 송재소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직접 유적지 안내와 해설을 위해 동행합니다.
2. 일반 여행사를 통해서는 갈 수 없는 특별하고 의미있는 중국 유적지(아름다운 한시의 배경이 된)를 방문하게 됩니다.
3. 여행내내 명실상부 최고의 호텔과 음식은 물론, 여행지 곳곳에 숨어있는 중국 전통 차와 술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매력적인 시간이 마련됩니다.
4. 더불어 역사, 문화에 관심있고 품격있는 참가자들과의 소중한 인연, 좋은 만남을 약속합니다.

* 일정 : 2015년 6월 15일(월)~ 20일(토) 5박 6일

 

일 정 표

일 자

지 역

교통편

시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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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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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천

 

항 주

 

황 산

 

 

 

 

 

 

 

OZ359

 

 

 

 

 

 

 

 

 

09:30

12:40

14:00

 

 

 

 

 

 

 

 

 

인천국제공항 3M카운터 집결

인천국제공항 출발

항주국제공항 도착 (2시간 20분 소요)

황산으로 이동 (3시간 30분 소요)

청대옛거리 : 송나라때 형성되어 명과 청에

가장 발전한 건물과 거리 모습을 재현한 곳

호텔 투숙 및 휴식

HOTEL : 크라운플라자

(TEL: 0559-259-1888)

:XXX :현지식

6/16 2

()

황 산

정감촌

 

 

흡 현

 

 

이 현

기 문

 

 

황 산

 

 

 

 

 

버스

전 일

호텔 조식 후

정감촌으로 이동(50분 소요)

정감촌 : 명나라때의 건축물이 완전하게 남아

있는 곳

흡현으로 이동(35분 소요)

흡현고성 : 중국의 4대고성 중 하나

허국석방 : 전형적인 명나라 석방건축물

당월패방군 : 포씨가 일족의 공적을 기념하여

세운 것

이현으로 이동(30분 소요)

서체촌, 굉촌 :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대민

가 건축군

황산으로 이동

호텔 투숙 및 휴식

HOTEL : 헌원국제대주점

(TEL: 0559-850-8828)

:호텔식 중:현지식 석:한식

 

 

일 자

지 역

교통편

시 간

일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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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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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산

경 현

 

 

 

신 성

 

 

마안산

 

화 현

 

 

 

 

버스

전 일

호텔 조식 후

경현으로 이동(2시간 소요)

도화담 : 이백이 이곳에서 필묵을 적시며 시편

을 많이 남김

신성으로 이동(1시간 소요)

사조루 : 강남의 4대명루중 하나이며, 중국

고대의 유명한 시인들이 와서 시를 짓던 곳

경정산 : 이백의 시로 인해 강남시산이 되었다

마안산으로 이동(1시간 30분 소요)

누실공원 - 17:00 입장

호텔 투숙 및 휴식

HOTEL : 마안산 해외해 황관홀리데이

(TEL: 0555-238-8888)

:호텔식 중:현지식 석:현지식

6/1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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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안산

 

 

 

저 주

 

 

 

남 경

 

 

 

 

 

 

버스

전 일

호텔 조식 후

청산 이백묘 : 당대의 시인 이백의 묘가 안치되어 있는 곳

채석기(태백루) : 이백이 여러번 올라 시를 남긴 곳

저주로 이동(2시간 소요)

취옹정 : 취옹정기로 유명한 구양수가 있던 곳

남경으로 이동(1시간 30분 소요)

명효릉 : 명 태조 주원장의 능원

중산릉 : 중국 근대화의 혁명정치가 손중산 선생의 묘가 안치됨

호텔 투숙 및 휴식

HOTEL : 은하소피텔

(TEL: 025-8371-8888)

:호텔식 중:현지식 석:현지식

 

 

일 자

지 역

교통편

시 간

일 정

6/19

5

()

남 경

버스

전 일

호텔 조식 후

석두성 : 손권이 남경으로 도읍을 옮겨 왕궁을

세울때 전초기지

연자기 : 청대 초기 시단의 영수 왕사진

시에서 언급되며, 남경의 북쪽 관음산에 위치하

여 장강을 바라보기 좋은 공원

중화문 : 명대에 있었던 13개의 성벽중에서

가장규모가크고 웅대했던 명나라 도성의 정남문

문묘 : 공자에 제사를 지내는 곳

왕사고거 : 육조 명문귀족 왕씨와 사씨의 병칭 고거

미향루, 진회하선유

오의항 : 동진의 지배귀족이던 왕씨와 사씨가 거주하던 지역

호텔 투숙 및 휴식

HOTEL : 은하소피텔

(TEL: 025-8371-8888)

:호텔식 중:현지식 석:무궁화식당

6/2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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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경

 

 

 

인 천

 

 

 

OZ350

 

 

 

 

 

14:55

18:20

 

호텔 조식 후

포구로 이동(1시간 20분 소요)

봉황각

남경 대학살기념관 :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일

본인들의 잔인한 만행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

공항으로 이동

남경국제공항 출발

인천국제공항 도착 (2시간 25분 소요)

:호텔식 중:현지식



** 중국인문기행이 기대되는 이유!!**


송재소 교수님의 말씀.
“이들 유적을 기행하면서 역사의 흥망성쇠를 체감하고 오늘의 중국을 있게 한 중화문명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번 여행은  중국의 ‘인문학적 유산'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아울러 중국 문화의 불가결의 요소인 중국술과 중국차에 대해서도 가능한 많이 소개하려고 한다. 술과 차를 빼놓고 중국문화를 이야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이번 여행의 행선지는 일반인들이 쉽게 가기 어려우면서도 인문학적 유적이 풍부한 안휘성의 황산에서 강소성의 남경까지 이어지는 기행이 될 것이다“
“안휘성에는 도처에 이백의 유적이 산재해 있다. 이백이 달을 잡으려 강으로 투신 했다는 채석강과 이백의 무덤 등을 둘러보며 그의 자취를 더듬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 여기에는 구양수의 취옹정과 풍락정이 있고, 풍자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유림외사'의 작가 오경재의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안휘성의 남쪽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서체촌과 굉촌이 명청시대 민간 건축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안휘성은 또한 흡연, 휘묵, 선지 등 문방사우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여기에다 덤으로 황산의 빼어난 경관도 즐길 수 있는 곳이 안휘성이다.”
"강소성의 남경은 육조고도라는 별칭에 걸맞게 수많은 고적을 보유하고 있다. 두목의 시로 유명한 진외하, 유우석의 시로 유명한 오의항과 석두성, 이백이 시를 읊었던 봉황대가 있다. 세계문화유산인 주원장의 무덤 명효릉의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고 태평천국의 유적도 눈길을 끈다. 그뿐만 아니라 손문의 무덤인 중산릉의 위용도 볼만하다. 중국 현대사의 아픈 상처인 남경 대학살의 실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념관도 이곳에 있다. “

 

< 중국인문기행(송재소 교수 저) 관련 기사>
*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3/08/2015030801338.html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 artid=201503062111205&code=960205
*머니투데이
http://www.mt.co.kr/view/mtview.php type=1&no=2015032515010864992&outlink=1

 

<이 글을 연재하는데 참고한 사진과 글 등 자료의 출처>

1. 중국인문기행에 함께 동반한 사진전문가 고형남 님이 사진작품을 공유할 수 있도록 보내 주셔서 연재하는데 전적으로 참고하였습니다. 사진 자료 중 거의 90% 이상을 고형남 님 작품 사진에 의존한만큼 일일이 사진 출처를 밝히지 않은 점 양해바랍니다.


2. 함께 동반한 고영표 시인 님의 블로그 ㅡ 고산지(高山芝) 블로그 http://blog.daum.net/zeroko2000 에서 기행 장소와 시간 공간, 사진 자료 등 자세한 해설을 참고하였습니다. 일일이 출처를 밝히지 않은 점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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