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5세의 기마상〉 캔버스에 유채 / 335×283cm / 1548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27실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90~1576)는 베네치아와 신성로마제국의 경계에 위치한 피에베디카도레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베네치아로 이주해 처음에는 모자이크부터 시작해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스스로 100세를 넘어섰다는 등 ‘노익장’을 과시하는 허풍이 심해 태어난 연도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장수한 화가로 피렌체나 로마와는 다른 베네치아 화풍을 절정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대상을 정확한 선으로 묘사하여 완벽하고 이상적인 형태를 잡아내는 것에 집중했던 피렌체나 로마에 비해,
그는 빛과 색의 완숙한 묘사에 더욱 치중하곤 했는데, 이는 스승으로 모셨던 벨리니 형제로부터 익힌 것들이었다.


세계적인 무역도시였던 베네치아를 근거지로 삼은 그는 값비싸고 귀한 안료들을

이탈리아 내륙 지방의 화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게 구할 수 있었고, 그만큼 색을 사용하는 감각이 뛰어났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그는 데생으로 형태를 잡은 뒤 색을 입히는 전통적인 방법 대신
붓으로 물감을 발라가며 자연스레 형태를 완성해내는 방법으로 작업하곤 했다.


그의 그림 솜씨는 베네치아를 넘어 유럽 각국의 군주와 귀족 들에게 알려졌는데,
그가 그린 당시의 초상화만 가지고도 궁정 인물사를 한 권쯤 쓸 수 있을 정도이다.


이 때문에 티치아노가 그린 초상화 한 점 없는 자는 소위 유럽 실세 치곤

뭔가 좀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이다.


특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스페인까지 통치했던 카를 5세는 티치아노를 어찌나 신임했던지
그가 붓을 떨어뜨리자 친히 허리를 숙여 집어주었다는 일화까지 전해진다.


〈카를 5세의 기마상〉은 뮐베르크에서 프로테스탄트 연합을 무찌른 황제의 위용을 담은 작품이다.
주인공을 빼고 봐도 완벽한 황혼녘의 풍경화로 손색이 없는 이 작품은 거친 말(자연)을 제압하는 영웅상으로,
훗날 궁정화가들이 그리는 많은 ‘황제 기마상’의 모범이 되었다.


물론 티치아노의 기마상은 로마제국 시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 조각상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개와 함께 있는 카를 5세〉 캔버스에 유채 / 192×111cm / 1533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프라도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정화가였던 초상화가 야콥 자이제네거가 이미 그렸던 그림을

다시 제작한〈개와 함께 있는 카를 5세〉도 걸려 있는데,

이 그림에 반한 황제는 티치아노에게 기사와 백작의 작위까지 수여한 것으로 알려진다.

〈안드로스 섬의 주신 축제〉 캔버스에 유채 / 175×193cm / 1523~1526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42실


〈안드로스 섬의 주신 축제〉는 안드로스 섬 마을에서 벌어진

술의 신 바쿠스(디오니소스)를 위한 축제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 정중앙에는 하얀색의 그리스 옷차림을 한 남자가 포도주 잔을 높이 들고 있다.


중앙 아래 한 여인이 한손엔 플루트를, 다른 손으로는 술잔을 높이 쳐들어 술을 받고 있는데,
무릎에 놓인 악보에는 “술을 맘껏 마실 줄 모르는 사람은 술을 모르는 사람이다”라는 내용의 가사가 적혀 있다.

중앙에 있는 남자의 높이 치든 포도주 병은 그야말로 ‘술에 대한 예찬’ 그 자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티치아노가 참고한 고대 그리스 신화는 3세기 경의 그리스 철학자 필로스트라토스(Philostratus, 190~?)의 저서
《상상(imagines)》에 기록된 것으로, 필로스트라토스는 “포도주를 적당히 마시는 것은 정신에 유익하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예나 지금이나 주당들의 핑계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절제되지 못한 술의 역효과 역시 티치아노는 놓치지 않았다.
화면 오른쪽 언덕에는 술에 곯아떨어진 한 사람이 바닥에 드러누워 있고,
그 아래 오른쪽 모퉁이에는 제 몸이 다 노출되는 것도 잊은 님프 하나가 널브러져 있다.


술 하면 음악이, 음악이 나오면 춤이 나오기 마련이라
화면 오른쪽에는 티치아노 특유의 ‘고급스러운 붉은색’ 옷을 입은 남자가 여인과 춤을 추고 있다.
남자의 손에 들린 것은 포도넝쿨로 만든 화관인데, 이는 디오니소스가 쓰고 다니던 것이다.

〈비너스를 경배함〉 캔버스에 유채 / 172×175cm / 1516~1518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42실


〈비너스를 경배함〉은 오른쪽에 놓인 비너스(아프로디테) 상을 숭배하는 수많은 아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 상단의 날개 달린 세 아이는 아마도 큐피드(에로스)를 포함한 님프들로 비너스의 상징인 사과를 모아들고 있다.


그림은 ‘사랑의 여신’ 비너스가 결국 우리에게 선물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풍부한 생식력을 바탕으로 한 ‘풍요’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규모가 큰 유치원의 모습을 능가하는 수많은 어린아이들은 바로 그 사랑의 힘으로 생산된 결과물이다.

〈황금비를 맞는 다나에〉 캔버스에 유채 / 129.8×181.2cm / 1553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44실


<황금비를 맞는 다나에>는 딸이 낳은 아이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들은 왕이 딸 다나에를 탑에 가둔 사건부터 시작된다.
꽁꽁 가두어 그 어떤 남자와도 관계하지 못하게 하면 결국 외손자를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만,
희대의 바람둥이 신 주피터르는 황금비로 변신하여 그녀의 몸을 적신 뒤 결국 다나에를 임신하게 만든다.


그림은 바로 그 황금비가 탑을 뚫고 들어와 그녀에게 닿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펠리페 2세는 다나에를 ‘그 어떤 이유도 묻지 말고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백성’으로 해석하고

주피터르를 자신으로 생각한 듯, 이 그림에 크게 기뻐했다.


하녀로 보이는 노파는 왕이 베푸는 풍요로움, 즉 ‘금화’ 모양의 비를 앞치마로 한 가득 받고 있다.
좋게 보면 능력 있는 왕이 베푸는 일종의 ‘성은’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삐딱한 시선으로 보자면,
‘돈’으로 여자의 성을 사는 매음굴의 모습으로도 읽힌다.


바사리의 《예술가 열전》에 따르면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을 실제로 본 뒤 “색채의 적용이 인상적”이라고 말했지만
“베네치아에서 제대로 된 드로잉 교육이 기초부터 이루어지지 못한 점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선과 형태보다 색채와 빛을 중요시한 베네치아 화가에 대한 불편한 심정을 드러냈다.


<황금비를 맞는 다나에>에서 몰아치는 폭풍우를 뚫고 들어오는 변신한 주피터르의 황금비는 미켈란젤로 식의 명료한 선을 거부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붓질 속에서 윤곽선을 잃고 오로지 ‘색의 유희’로만 존재한다.


빛과 색에 대한 뛰어난 감각은 다나에의 침실에 놓인 커튼이나 침대보, 노파 하녀가 입고 있는 옷 등의 질감을
예의 ‘성긴 붓질’만으로도 완벽하게 재현해놓고 있다.

〈비너스와 아도니스〉 캔버스에 유채 / 186×207cm / 1554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44실


〈비너스와 아도니스〉는 무겁게 드리워진 구름과 그 사이 선명하게 제 존재를 드러내는 푸른색 하늘이 압권이다.
그 푸른 하늘과 대조를 이루는 붉은색 옷차림의 사냥꾼 아도니스가 외출하려고 하자 비너스가 온몸을 다 바쳐 막고 있다.


큐피드는 자신의 화살통을 나무에 걸어놓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고 하늘은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듯하다.
이 불길함은 결국 아도니스의 죽음으로 귀결된다.


비너스의 예감대로 아도니스는 사냥을 강행하다 결국 멧돼지에 물려 죽게 된다.
신화는 그날 그가 흘린 피가 땅을 적셔 피어난 꽃이 바로 아네모네라고 전한다.


화면 오른쪽 상단의 하늘에는 마차 하나가 지나고 있는데,
그곳에서 뿜어나온 빛나는 광채가 닿는 곳에 아마도 그 아네모네가 피어날 것이다.


티치아노는 이 그림을 완성한 뒤, 비너스가 등을 보이지 않고 정면을 향하도록 그렸어야 했다며 아쉬움 가득한 글을 남겼다.
등보다 앞이 더 궁금한 남성 관람자들의 갈망을 티치아노가 뒤늦게 간파한 것이다.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 86×65cm / 1562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41실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90~1576)는 100세가 되어도 질긴 고기를 뜯을 수 있다며 건강을 자랑했지만
실제로 그는 아흔이 못 된 나이에 당시 떠돌던 전염병에 걸려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평생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유럽 실세들의 초상화를 비롯해 신화, 종교, 역사화 등 그 모든 것에서
미켈란젤로에 버금가는 유럽 최고의 화가로 군림한 그는 마지막 작품으로 자화상을 남겼다.


미켈란젤로는 티치아노에게 색채 감각은 뛰어나지만 제대로 된 소묘가 부족하다고 비평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정확한 선과 명료한 형태를 으뜸으로 치는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이탈리아 내륙 화가들의 편견에 가득 찬 평가에 불과하다.


그는 사물의 표면에 닿는 빛이 그 본래의 색을 다채롭게 변화시키는 모습을

예리하게 관찰해낼 줄 아는 그야말로 뛰어난 색 감각의 소유자였다.


그를 일러 색 감각이 뛰어나다고 하는 것은 많은 색을 다채롭게 사용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그림에서처럼

단출한 색 몇 가지만을 가지고도 다양하게 변주해 완벽한 데생만으로는 잡아낼 수 없는 미묘한 지점들을 포착해내는 데 있다.


그는 “훌륭한 화가에게는 오직 세 가지 색, 검은색, 흰색, 빨간색만 필요하다”라고 말하곤 했다.

이 자화상에서도 역시 꼼꼼하고 성실한 세부 묘사를 많이 벗어난 그의 감각이 돋보인다.


이 작품은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면 붓이 닿은 흔적이 과감하게 노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적당히 떨어져서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형태감이 느껴진다.


뭉개진 물감층이 만들어낸 그의 수염은 손을 대면 그 부드러운 촉감이 그대로 전해질 듯하다.
카를 5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으면서 하사받은 두 줄 목걸이는 몇 번 툭툭 찍어낸 붓질만으로
놀라우리만큼 선명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이 목걸이의 찬란한 빛은 그림 전체의 분위기를 압도한다.
입고 있는 검은 옷은 미묘하게 그 음영을 드러내고 있어 사진보다 더한 극도의 사실감을 선사한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19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20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21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22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23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건초 수레〉 패널에 유채 / 135×190cm / 1516년경 제작/ 프라도 미술관 0층 56a실


현재 벨기에와 접한 네덜란드의 국경 도시 스헤르토헨보스(s-Hertogenbosch)에서 태어나 평생 그곳에서 살았다고 해서
‘보스(Bosch)’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는
태어난 연대나 지도한 스승 혹은 후원자 등에 대한 기록이 무척 미미하다.


다만 먹고 살기 위해 그림을 그릴 필요는 없을 정도로 탄탄한 재정적 뒷받침이 있어
그 시대가 규범으로 삼는 그림보다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지극히 도발적이고 실험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그도 종교적 주제의 그림을 다수 그렸고, 〈건초 수레〉나 <쾌락의 정원>등에서 보듯
전통적인 교회 제단화 형식의 세폭화(triptych)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평범한 사람이면 상상조차 하기 힘든 반인반수의 생명체를 화면 가득 채운다거나
엉뚱하고도 기발하며 때론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선정적이기까지 한 장면들을 여과 없이 그려 넣곤 해서,
과연 그의 그림이 교회에 세워질 수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실제로 이들 작품들을 소장했다는 교회에 대한 정보도 정확하지 않다.


왼편 날개 그림에는 상단에 하나님과 타락한 천사의 추락을 그려 넣었고,
그 아래로 ‘아담과 이브의 탄생’, ‘뱀의 유혹’, 그리고 ‘낙원에서의 추방’까지를 담고 있다.
가운데 그림은 시끌벅적하게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중앙에 언덕처럼 높이 솟아 오른 건초더미는

“세상은 건초 수레와 같다. 우리 인간은 될 수 있는 한 더 많이 갖고자 욕심낸다”라는
네덜란드의 속담에서 비롯된 것으로 ‘탐욕’을 상징한다.


그림 하단에는 건초 더미 위에 도사리고 있는 악마나 자신들을 위해 기도하는 천사의 존재,
심지어 하늘 높은 곳에서 자신들을 위해 희생한 예수의 존재에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 어리석은 이들이 흥에 겨워 노래하고 있다.


수풀 속에는 희희낙락 사랑을 나누는 커플도 있다. 사다리를 놓고 수레 위에 올라가려는 사람이 보이는가 하면,

바로 그 곁에는 교황과 황제까지 말을 타고 탐욕의 건초 수레를 따르는 것이 보인다.


중앙 그림 오른쪽에 등장하는 반인반수의 물고기나 머리 잘린 모습 등은 바로 인간이 악마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이 결국 닿는 곳은 오른쪽 날개에 그려진 불타는, 그야말로 생지옥이다.

히에로니무스 보스 〈일곱 가지 죄악〉 패널에 유채. 120×150cm. 1480년경 제작. 프라도 미술관 0층 56a실


이 작품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이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일곱 가지 죄악인

‘교만, 인색, 음욕, 질투, 탐식, 분노, 나태’를 그린 것으로, 탁자 상판을 장식하는 그림이었다.


중앙 그림에는 하나님의 동공이 그려져 있고, 그 안에 예수의 모습이 비친다.
바로 아래 “주의하라, 주의하라, 하느님께서 보고 계신다(Cave, Cave, Deus Videt)”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이 글은 전체 그림의 위아래 띠에 적힌 성경 <신명기>의 구절

“그들은 모략이 없는 민족이라 그들 중에 분별력이 없도다”(32장 28, 29절)
그리고 “내가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숨겨 그들의 종말이 어떠함을 보리니”(32장 20절)의 내용과 이어진다.


동공 바로 아래 칸에는 옷까지 벗어던지고 싸우는 두 남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바로 ‘분노’이다.
‘교만’의 칸에는 보석함을 곁에 둔 한 여인이 새로 산 모자를 뒤집어 쓴 채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다.


예로부터 거울은 허영과 교만의 상징이었다.

심지어 그 거울은 머리는 늑대이고 다리는 메뚜기인 괴물이 들고 있다.


‘음욕’의 칸에는 남녀가 광대를 대동한 채 희희낙락하는 모습이 보인다.

‘나태’에는 성경과 묵주를 들고 교회에 가기 위해 여자가 남자를 깨우는 모습과 벽난로 앞에서 자고 있는 개가 있다.
주인 남자나 개나 게으르긴 마찬가지다.


‘식탐’의 칸에는 식탁 가득한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남자, 그리고 술을 통째로 들이키는 남자가 보인다.
아이가 칭얼대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인다.


‘탐욕’은 재판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가난한 자로부터 뇌물을 받아 챙기는 모습이다.

‘질투’에는 자기 가까이에 있는 것은 그냥 둔 채 남자가 손에 쥔 닿지 않는 뼈만 쳐다보며 짖는 개들이 있다.


이 질투 장면에 대한 설명은 여러 가지인데, 창 안의 부부 역시 남에게 일을 시키고

편히 노는 잘 차려입은 남자를 질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해석도 있는가 하면,

구혼을 거절당한 부자가 처녀와 속삭이고 있는 남성을 질투하며 쳐다보고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사각형의 모퉁이, 네 개의 원에는 사람이 죽어 천국과 지옥에 이르는 장면을 담았다.
그림 왼편 상단에는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이 막 임종하는 이를 지켜보고 있다.

그의 곁에는 흰색 천사와 검은색 악마가 함께 있다.


오른쪽 상단은 최후의 심판으로 죽은 자들이 땅에서 솟아오르는 동안

예수가 천사들과 12사도를 대동하고 심판하고 있다.
아래에는 각각 천국과 지옥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 〈쾌락의 정원〉패널에 유채 / 1500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6실


히에로니무스 보스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가 그린 악마 같은 생명체들 중 일부는
중세부터 죄의 심판과 그에 대한 두려움을 극대화하기 위해 기도서 등의 필사본에 삽화로 그려진 것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스는 그 삽화본의 악마들에 더 선명하고 짙은 색을 입혔고, 그 형상을 더욱 비틀고 과장했다.
그리고 수많은 유혹과 그 유혹에 지배되어 곧 다가올 운명의 날을 애써 외면하는

인간 군상의 타락을 무서우리만치 세밀하게 그려냈다.


이 그림은 누가 주문했는지, 또 어떤 의도로 제작했는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그림 속 장면들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그저 추측만 난무할 뿐 정확하게 주장하는 바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쾌락의 정원〉이라는 제목도 화가가 지은 것이 아니라 후대 사가들이 붙인 것으로,

과연 타당한 제목인가에 대한 이견도 적지 않다.


세면의 제단화 형식으로 제작되었지만 이 그림 역시

어느 교회의 제단에 걸려 있었는지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다.

히에로니무스 보스 〈쾌락의 정원〉 (왼쪽) 패널에 유채 / 220×195cm / 1500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6실


왼쪽 날개 그림에는 아담과 이브의 탄생을 담았다.
또 앞으로 인간과 함께 살아가게 될 온갖 종류의 동물이 역시나 갖가지 종류의 나무나 풀 등과 함께 그려져 있다.


이 중에는 더러 눈에 익숙한 생물도 있지만, 상상에나 존재하는 괴이한 모습의 것들도 많고,
부리 달린 새가 책을 읽는 등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행동이나 몸짓들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히에로니무스 보스 〈쾌락의 정원〉 (가운데) 패널에 유채 / 220×390cm / 1500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6실


중앙 면에는 그야말로 삶 그 자체를 즐기는 여러 군상이 그려져 있다.
짝을 지은 남녀가 도색 잡지에나 나올 듯한 포즈로 사랑을 나누는 모습도 보인다.


먹고 죽어도 남을 만큼 큰 딸기도 눈에 띄는데, 이 그림에 〈딸기 그림〉이라는 별칭이 붙은 이유이기도 하다.
딸기나 앵두 등 과장된 크기로 그려진 과실은 비뚤어진 인간의 욕정, 탐욕, 그리고 그로 인한 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밖에도 도처에 먹을 것이 떠다니는 이곳은 한편으로 보면 풍요로움이 넘치는 복된 공간이지만,
결정적으로는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마구잡이로 해소하고 있는 ‘타락과 과욕의 정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그림에 대한 다소 뜻밖의 해석도 존재한다.
빌헬름 프랑거(Whilhelm Fraenger)라는 학자는 이 그림이 인간의 타락상을 나열한 것이라기보다는

보스가 몸담았다고 추정되는 자유정신형제회에서 말하는 ‘성적 혼교를 통해

아담 이전의 순수함으로 돌아가자’는 종교적 실천을 위한 그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 〈쾌락의 정원〉 (오른쪽) 패널에 유채 / 220×195cm / 1500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6실


왼쪽 날개 그림이 창조의 순간이고 중앙이 쾌락의 정원이라면, 오른쪽 날개는 이 모든 일의 귀결인 심판의 세계를 담고 있다.
화면 중앙 하얀색 나무다리 모양에 둥그런 몸통을 가진 이상한 형태의 존재가 눈에 띄는데,
자세히 보면 심각한 표정을 한 어느 남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체 그림 중 가장 사실적으로 그려진 이 얼굴은 화가 자신의 것으로 추정된다.
상단에 사람의 귀와 같은 형태에 뾰족한 무언가가 튀어나와 있다.

아마도 귀를 뚫는 칼로 보이는데, 전체적으로 남성 성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이나 동물의 내장 혹은 신체 일부 같은 이상한 형태들, 공상과학 영화에나 나올 법한 특수한 고문 장치,
사람이 사람을 먹고 배설하는 장면 등은 보스가 상상하던 지옥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중앙 그림에서 누릴 수 있는 쾌락을 다 맛본 그 인간 군상들은 이제 속수무책으로 지옥의 기계 속에 고통스레 끌려들어간다.

히에로니무스 보스. 천지창조(재단화 닫힘면) 패널에 유채 / 220×110cm / 1500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6실


이 작품은 평상시에는 양쪽 날개를 접어 닫아놓게 되어 있는데,

닫았을 때의 면에도 심상찮은 그림이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닫힌 면 상단에는 각각 “말씀 한마디에 모든 것이 생기고”와 “한마디 명령에 제자리를 굳혔다”라는

《시편》33장 9절의 글귀가 적혀 있다.

수정 구슬 속에 들어 있는 세계는 그만큼 약하고 부서지기 쉬워 보인다.
왼쪽 면 상단 귀퉁이에는 책을 들고 앉은 창조주가 있고,

책은 하나님이 《시편》의 글처럼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는 중임을 상기시킨다.


첫째 날에는 빛, 둘째 날은 물, 그리고 셋째 날에 땅과 식물을 만든 하나님은 아직 해와 달은 만들지 않은 상태이다.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고심이 얼마나 컸을까 싶지만,

정작 그렇게 만들어진 피조물들은 앞면의 그림에서 보듯 죄에 허덕이고 있다.

안토니스 모르 〈메리 튜더의 초상화〉 패널에 유채 / 109×84cm / 1554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6실


안토니스 모르(Anthonis Mor Van Dashorst, 1516?~1576?)는 영국 체류 시절

메리 튜더 여왕의 초상을 비롯해 왕실 초상화를 다수 그렸다.


죽어서도 영원히 남게 되는 ‘흔적’으로서의 기념품,

경우에 따라선 얼굴 한 번 못 보고 혼사를 진행하는 정략결혼을 위해 보내지곤 하던 왕실 초상화들은 사진이 없던 시절,

사진만큼이나 정확하되 오늘날의 사진 보정술만큼의 교묘한 ‘성형’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화가가 아무리 열심히 그렸어도 주인공의 비위를 거스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눈치껏’이 요구되는 왕실 초상화 작업은
최고의 경지에 오른 화가라 할지라도 손을 떨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메리 튜더는 헨리 8세와 그의 첫 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 사이에서 낳은 딸로
영국 여왕이자 펠리페 2세의 두 번째 왕비이기도 했다. 메리 튜더와 펠리페 2세는 꽤 가까운 혈족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결혼은 족보를 왕창 꼬아 놓는 근친혼이었지만,
사실 합스부르크 왕가에게 ‘가족끼리 그러면 안 돼!’ 수준의 금기쯤은 이권을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서른여덟까지 독신을 고수하던 메리가 굳이 스물일곱의 애송이 연하남 펠리페 2세와 결혼한 것은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수준의 외교적 정략에 의한 것이었다.


<메리 튜더의 초상화>는 그녀가 펠리페와 결혼하던 해에 그려졌다.
그림 속 메리 튜더는 튜더 왕가를 상징하는 장미를 가슴에 안은 채, 다소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알론소 산체스 코에요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 공주와 막달레나 루이스〉

 캔버스에 유채 / 200×129㎝ / 1585~1588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6a실


훗날 마드리드에서 활동하던 안토니스 모르는 프로테스탄트에 동조했다는 의혹을 받고

종교재판에 회부될 처지에 놓이자 이를 피하기 위해 서둘러 궁정을 떠나게 되는데,

산체스 코에요(Alonso Sanchez Coello, 1531~1588)가 그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코에요의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 공주와 막달레나 루이스〉는 펠리페 2세의 딸 이사벨 공주와
그녀의 보모이자 궁정의 시녀이기도 했던 막달레나를 함께 그린 초상화이다.


막달레나는 펠리페 2세의 두터운 신임을 얻은 덕분에 왕이 국내외 순방을 떠날 때 수행하기도 했고,
가끔은 직언을 서슴지 않아 왕실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일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플랑드르 화가답게 이루 말할 수 없이 정교하고 꼼꼼한 터치로 그려진 공주의 의상은
막달레나가 입은 검은색의 수수한 옷과 대비되면서 더욱 압도적으로 그 화려함을 자랑한다.


이들은 서 있거나 무릎을 꿇은 자세의 차이뿐 아니라,

각자의 배경이 되는 고급스러운 커튼과 칙칙한 벽으로도 대비를 이룬다.


이사벨 공주의 손에는 이 모든 부와 권력을 가능케 해준 아버지

펠리페 2세의 얼굴이 새겨진 카메오가 들려 있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14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15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16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17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페드로 베루게테 〈종교재판을 주재하는 성 도미니쿠스 데 구츠만〉 패널에 유채 / 154×92cm / 1493~1499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0층 57b실


페드로 베루게테(Pedro Berruguete, 1450~1504)는 스페인 출생이지만 이탈리아로 건너가 우르비노의 공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Federico da Montefeltro)의 후원을 받으며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조반니 산티 등과 함께

그곳 궁정 벽화 작업에도 참여한 바 있다.


훗날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이탈리아에서 전수받은 르네상스 회화의 전통을 스페인에 이식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말년에 그는 주로 톨레도에 머물면서 대성당이나 부속 수도원을 장식하는 벽화를 그렸다.


〈종교재판을 주재하는 성 도미니쿠스 데 구츠만〉은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창시자인

성 도미니쿠스 데 구츠만(St. Dominicus de Guzman, 1170~1221)이 툴루즈에서 이단인 알비니파를 화형시키는

13세기 초엽의 종교재판을 주재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는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전통적인 복장인 하얀 옷에 검은 망토를 두른 채 한 손에 백합을 쥐고 서 있다.
그림 속 그는 이단자들을 용서하라고 명하고 있다.


그림 왼쪽에는 역시 도미니쿠스 수도사 복장을 한 남자가 이단자를 끌고 온다.
그림 오른쪽에는 화형식 모습이 보인다.


도미니쿠스가 서 있는 단상 등은 원근법에 입각해 그려졌지만,

인물 군상은 그림 전체의 비율에 그다지 맞지 않아 보인다.


성 도미니쿠스 데 구츠만은 로마의 스페인 총독 아들로 태어나 발렌시아 대학에서 수학한 뒤

성직자가 되어 평생 이단과 맞섰으며 도미니쿠스 수도회를 창시했다.


화가들은 그의 현명함을 강조하기 위해 주로 이마에 별을 단 모습으로 그리곤 했으며,

그가 순결한 삶을 살았다 하여 백합과 함께 그리기도 했다.


종교재판은 원래 12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황 루키우스 3세(Lucius III, ?~ 1185)가

이단으로 지목된 카타리파를 처벌하기 위해 시작했다가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된다.


스페인의 종교재판은 1478년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1세가 결혼해

통일 왕국을 이루면서, 무어인들의 침략 기간 동안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온 유대인과 무슬림을 내쫓기 위해

더욱 잔인하고 무모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종교재판은 16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로테스탄트를 탄압하는 방편으로도 이용되었다.
피비린내 나는 종교재판은 종교적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적을 없애거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악용되는 사례가 많아 스페인 지식인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스페인에서 종교재판은 1834년 이사벨 2세 시대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으로 금지된다.

로베르 캉팽 〈세례 요한과 프란체스코파의 하인리히 폰 베를〉 패널에 유채 / 101×47cm / 1438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8실


로베르 캉팽(Robert Campin, 1375?~1444)은 현재의 벨기에 지역 투르네에서 태어났다.

한동안 이 화가에 대한 정보가 없어 그저 ‘플랑드르의 거장’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는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5?~1441)와 함께 세심하고 정교한 선과 화려하고 선명한 색을 구사하는

플랑드르 초기 회화의 전통을 개척하고,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 같은 제자를 대가로 키우기도 했다.


아래〈성녀 바르바라〉와 함께 이 두 작품은 세 폭으로 된 제단화의 양쪽 날개에 해당하는 그림으로

중앙 그림은 현재 분실된 상태이다.


〈세례 요한과 프란체스코파의 하인리히 본 베를〉 속 세례 요한은 성경의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두르고”

《마태복음》 3장 4절의 구절처럼 동물의 털이 달린 가죽옷을 입고 있다.


그는 인류를 대신하여 희생한 예수를 의미하는 어린 양을 대동한 모습으로 자주 그려졌다.

그림 속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등을 지고 앉아 기도에 열중하는 수도자이자

이 그림의 주문자이기도 한 하인리히 폰 베를(Heinrich von Werl)을 쳐다보고 있다.


아마도 그는 지금은 분실된 중앙 그림 속 누군가를 향해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중일 것이다.
그림 속에는 오목한 거울이 보이는데, 이는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 속 거울을 떠올리게 한다.
거울 속에는 창틀이 비치는데, 가운데 십자가 모양이 예수의 수난을 상기시킨다.

로베르 캉팽 〈성녀 바르바라〉 패널에 유채 / 101×47cm / 1438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8실


〈성녀 바르바라〉는 얼핏 보면 수태고지의 마리아로 읽힌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그림은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자신의 그림

〈수태고지〉를 고스란히 본떠 다시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보통 백합이나 빈 물병 등은 마리아의 순결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녀 바르바라를 상징하는 지물이라 할 수 없다.
성녀 바르바라는 4세기 초 막시미아누스 황제 시절에 산 어느 작은 나라의 공주였다.


《황금전설》에 따르면 바르바라의 아버지는 미모가 출중한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탑을 세우고

그 안에 가두어놓았으나 그녀를 흠모한 구혼자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정작 바르바라는 탑에 갇혀 있는 동안 기독교로 개종해 자신이 갇힌 탑에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세 개의 창을 내도록 건축가에게 부탁할 정도가 되었다.


아버지는 그녀의 개종에 크게 노하여 딸을 직접 사형시킨다.
이 그림에서 바르바라를 상징하는 것은 창 너머 멀리 펼쳐진 풍광 속에 우뚝 서 있는 탑뿐이라고 할 수 있다.
활활 타오르는 그녀의 신앙 같은 난롯불 위 벽감에는 삼위일체의 조각상이 걸려 있다.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 〈십자가에서 내리심〉 패널에 유채 / 220×262cm / 1435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8실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Rogier van der Weyden, 1400~1464)은 투르네에서 태어나

로베르 캉팽의 공방에서 도제 생활을 했다.


그 뒤 브뤼셀로 이주해 그 도시의 공식 화가로 임명되면서 국제적인 명성과 부를 쌓아

15세기 플랑드르 최고 화가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벨기에에 위치한 작은 도시 국가인 플랑드르는 모피 산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14세기 플랑드르는 프랑스 동부에 위치해 있던 부르고뉴 공국과 정략결혼을 통해

나라를 합치고 세를 확장해 현재의 네덜란드 전역을 지배했다.


이 나라는 정략결혼을 다시 감행해 현재의 오스트리아와 독일 인근 지역을

광범위하게 통치하던 합스부르크 왕가와 하나가 된다.


합스부르크 왕가 역시 정략결혼을 통해 스페인의 왕가를 잇게 되는데,

이로써 부르고뉴 일대는 자연스레 스페인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들은 스페인의 강압 정치에 맞서 독립전쟁을 선포하지만,

벨기에를 포함한 남부 지역은 이내 스페인에 백기를 들었고
반면에 오늘날의 네덜란드에 속하는 북부 지역은 전쟁을 지속해 독립에 이르렀다.


프라도 미술관의 왕실 소장품 중 네덜란드 출신 화가의 작품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은

바로 스페인과 이 나라의 불편한 관계에서 기인한다.
 
이 작품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주제로 한 것으로,

화면의 중앙에는 십자가의 나무 기둥에 사다리를 놓고 예수를 내리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작품을 감싸던 원래의 액자 틀은 현재 소실된 상태이지만,

조각된 목재를 표현하고 있는 그려진 액자 틀이 이를 대신해주고 있다.


그림의 배경은 그려진 틀과 마찬가지로 도금된 목재로 묘사되어 있으며,

양쪽 모서리에는 곡선으로 굽이치는 장식무늬가 그려져 있다.
그 뒤로 보이는 어두운 갈색으로 드리워진 그림자는 인물들이 위치하고 있는 얕은 공간을 암시한다.


예수를 포함하여 이 작품에는 총 열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서 있는 공간은 마치 좁은 나무상자와도 같다.


인물들은 옆으로 길고 얕은 공간 속에서 입체적인 깊이 없이 평면적으로 병렬 배치되어 있으며,

각자 다양한 움직임을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 로지에르 반 데르 바이덴은 당대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을 대표하던

얀 반 아이크(Jan van Eyck, 1395-1441)의 사실적인 공간과 자연주의적인 세부묘사를 따르지 않았다.


또한 그는 과거로부터 이어져 오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의 도상적 전통을 과감하게 바꾸고
그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구성을 창출해냈다.


사실상 이 작품의 공간은 매우 불분명하게 설정되어 있다.
양쪽 모서리의 장식무늬 뒤로 가려져 있는 얕은 공간은 인물들의 발 밑에 보이는 식물이 있는 전경의 것과 부합하지 않는다.


또한 이같은 공간은 작품의 가장 뒤쪽, 사다리 위에 올라타 있는 인물로부터 앞쪽의 인물에 이르기까지

열 명의 인물들을 모두 포함할 수 없을 정도의 깊이를 가지고 있다.


작가가 설정한 모호한 공간설정은 분명 의도적인 장치였다.
로지에르 반 데르 바이덴이 작품 속에서 주의를 산만하게 할만한 세부적인 사항들을 제한하고 좁은 공간을 설정함에 따라

관람자는 빽빽하게 뭉쳐져 있는 듯한 인물들의 그룹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작가는 예수의 시신을 내리는 행위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그 순간 인물들이 느끼고 있는 불안과 슬픔의 감정을

극도로 강조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커다란 사선을 이루는 두 개의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그룹은 죽은 예수와 그를 받쳐 들고 있는 두 인물,
그리고 두 번째 그룹은 예수의 아래쪽에 쓰러져 있는 성모 마리아와 역시 그녀를 부축하고 있는 두 인물이다.


이 같은 구성은 양 끝에 위치한 성 요한(St. John)과 막달라 마리아(Magdalen)에 의해서 괄호로 묶이고 있다.

붉은 옷을 입고 있는 성 요한은 무릎을 굽히며 마리아를 부축하고 있으며, 막달라 마리아는 슬픔에 젖어 온 몸을 비틀고 있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죽은 예수의 자세는 기절한 성모 마리아에서 거의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반복된 자세는 표현적 효과를 위한 장치이며, 또한 마리아의 공동수난(compassion),

즉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 받는 순간을 묘사하기 위함이다.


이와 관련하여, 죽은 예수의 손과 활기 없이 축 늘어진 마리아의 손은 서로 닿을 듯 가깝게 그려져 있다.
열 명의 인물이 만들어내는 윤곽선은 다소 단순화되어 작품 속에서 리드미컬한 선적 패턴을 형성하며

다양한 색상은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져 균형을 이루고 있다.

알브레히트 뒤러 〈스물여섯 살 뒤러의 초상화〉 패널에 유채 / 52×41cm / 1498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5b실


15, 16세기 이탈리아가 르네상스 문화를 부흥하고 있는 동안

독일 인근 지역은 아직도 중세적인 사고와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이탈리아에는 후손들이 다시 재조명해 부활시킬만한 고대 로마의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독일 지역은 계승하고 싶은 직계 선조들의 수준 높은 문화가 없는 탓이기도 했다.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난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 는

자국의 문화적 후진성에 깊은 시름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미술가가 소위 인문학자의 수준으로까지 격상하는 동안 아직 독일은

그들을 그저 손재주 좋은 기술자 정도로만 치부하는 세태도 못마땅했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금세공업자인 아버지의 뒤를 잇다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몇 년의 도제 생활을 거쳐 드디어 꿈에도 갈망하던 이탈리아 여행길에 올랐다.


뒤러는 독일 최초의 이탈리아 유학파로서 이 지역에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유입시키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자의식 강한 화가가 창 아래 “1498, 내 모습을 그렸다.


난 스물여섯 살의 알베르트 뒤러다”라는 문구를 새겨 넣은

초상화와 함께, 〈아담〉과 〈이브〉의 그림이 소장되어 있다.

알브레히트 뒤러 〈아담〉 패널에 유채 / 209×81cm / 1507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5b실


두어 번의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알브레히트 뒤러는 〈아담〉과 〈이브〉에서 보는 바

인체를 완벽한 비율로 이상적인 아름다움으로 묘사하는 르네상스 회화의 기법에 통달하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플랑드르나 독일 지역의 회화는 다소 딱딱하고 너무나 정교해서 종종 오히려

사실성을 떨어뜨리기까지 할 정도였지만, 뒤러는 유려한 선과 부드러운 음영 처리,

자연스럽게 몸매를 강조하는 자세로 누드의 아름다움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알브레히트 뒤러 〈이브〉 패널에 유채 / 209×80cm / 1507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5b실


누드가 금기시되던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에 다다른 화가들은 단순하게 ‘훔쳐보기’라는 관음증적인 욕구 해소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심의 고취를 위해서’라는 아주 탄탄하고도 그럴싸한 명분을 댈 수 있는 존재들을 찾아내고자 했다.


애초에 옷이라는 것을 입고 있을 리 없던 아담과 이브는 그런 점에서 적격이었다.
이 그림은 독일 지역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2미터 크기의 대형 누드화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의 발가벗은 몸을 그린 거의 최초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고향 마을로 돌아온 뒤러는 우려와는 달리 단번에 국제적인 명사가 되었다.
미술가에 대한 대접이 소홀하기 짝이 없다고 탓하던 뉘른베르크는 그를 시의원으로까지 추대했으며,
유화보다 싸지만 대량 판매가 가능한 판화 작업에도 성공하면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화는 다 누리며 지냈다.


한스 발둥 〈인간의 세 시기〉 패널에 유채 / 151×61cm / 1541~1544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5b실


한스 발둥(Hans Baldung, 1484?~1545)은 독일 슈바벤의 그뮌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스트라스부르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미술 교육을 받았다.


이후 뉘른베르크에서 알브레히트 뒤러의 제자가 되어 그로부터 판화 기법을 전수받기도 했다.
뒤러의 공방에 이름이 같은 제자가 있었기에, 초록색을 뜻하는 ‘그린(Grien)’이라는 별명을 붙여 한스 발둥 그린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프라이부르크 대성당의 제단화 등 종교화부터 초상화, 태피스트리, 스테인드글라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을 제작했다.
말년에는 종교개혁가 루터를 추종하는 신교도가 되었고, 스트라스부르 시의회 의원까지 역임했다.


뒤러가 절대적으로 신임한 제자였던 만큼 그의 작품은 상당 부분 스승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선망하던 이탈리아 르네상스 그림들의 완벽한 균형감이나 조화로움

그리고 인체를 조각처럼 이상화하는 작업에서 점차 멀어져 갔다.

그는 이 작품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어딘지 모르게 기이한,

그래서 오히려 더 관능미가 풍기는 누드를 주로 그렸다.


〈인간의 세 시기〉는 그 의미하는 바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세상 모르고 잠을 자는 아기 시절을 거쳐 성숙한 여인의 시기가 지나면 노년이 된다.


이 세 시기를 거친 자들은 모두 죽음을 의미하는 해골에 이끌려간다.
해골은 당시 ‘허무’를 뜻하는 바니타스(vanitas) 양식에 자주 등장하는 모래시계를 들고 있다.


시간의 유한함 앞에 허무하지 않은 인생은 없다.
노년의 여인은 죽음을 앞두고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의 처녀 시절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
오른쪽 화면 상단에 십자가가 보인다. 화면 아래 왼쪽의 올빼미는 애도나 죽음을 의미한다.

한스 발둥 〈삼미신〉 패널에 유채 / 151×61cm / 1541~1544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5b실


〈삼미신〉은 주피테르(제우스)와 에우리노메 사이에 태어난 딸들로 음악에 능통했다.

류트나 비올라가 그려진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두 여인은 책을 들고 있는데, 이들이 음악만이 아니라 고도의 정신적 능력,

즉 지적 능력이 있었음을 과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림 하단의 아이는 악보를 펼쳐놓고 백조와 함께 노는데,

고대인들은 새가 죽음에 임박했을 때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한다고 생각했다.


한스 발둥이 그린 이 〈삼미신〉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그림 속 여신들처럼 우람하고 조각적인 몸이 아니다.
그저 매끈하고 유려한 선으로 이루어져 무게감보다는 경쾌함이 더하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09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10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11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12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13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안드레아 만테냐〈성모 마리아의 장례식〉 목판에 유채 / 54.5×42cm / 1462년경 / 프라도 미술관 0층 56b실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가 활동하던 시기,

이탈리아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인간중심적 문화를 재탄생시키는 르네상스

(Renaissance, 프랑스어로 부활이라는 의미다)를 맞고 있었다.


중세시대 미술, 특히 회화는 대상을 자연스럽고도 아름답게 미화시키는 작업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림 속 인물들이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처럼 단단한 입체감을 입고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공간을 점유하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가 무르익으면서부터였다.


파도바 출생의 만테냐는 만토바를 지배하는 루도비코 곤차가(Ludovico Gonzaga) 후작의

궁정화가로 일하면서 곤차가 가문의 예배당을 위해 이 작품을 제작했다.


그림은 외경에서 전해지는 성모의 죽음을 주제로 했다.

그림 속에는 총 열한 명의 제자가 있다.

 
원래 예수의 제자는 열두 명인데,

예수를 은전에 팔아넘긴 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유다를 제외하면 숫자가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화가들은 유다로 인해 생긴 빈자리를 기독교인을 박해하다가 개심하여

사울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개명한 ‘사도 바울’로 채우곤 했다.


만테냐가 제자를 열한 명으로 그린 것은 유다의 부재를 확실히 하기 위함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보다는 제자 중 하나인 토마스의 부재를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부활한 예수를 도저히 믿지 못하여 의혹을 제기하는 토마스를 위해 예수는

자신의 옆구리에 난 상처에 손을 넣게 하여 확인해준 적이 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마리아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이어 성모가 승천하는 장면마저 목격하지 못해 또 한 차례 의심을 품게 된다.


이에 마리아는 토마스의 의혹을 풀어주기 위해 승천하는 순간 허리띠를 토마스에게 던져준 일화가 있다.
만테냐는 토마스를 제외함으로써 이어질 그 이야기를 암시한 것이다.


소실점을 향해 점점 작게 모이는 타일의 모양은 만테냐의 원근법에 대한 관심과 기량을 어김없이 보여준다.
창 밖에 그려진 풍경은 만토바의 당시 모습을 꼼꼼하게 담고 있어 지형학 연구에도 큰 도움을 준다.


이런 장치들로 인해 마리아의 죽음은 평평한 2차원의 화면에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

3차원의 현실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보인다.


그림 가장 왼쪽에 있는 제자는 사도 요한이다.
13세기에 보라기네의 야코부스(Jacobus de Voragine)가 쓴 《황금전설(Legenda Aurea)》은 기독교 성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마리아는 자신의 하관식 때 요한으로 하여금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서 있도록 명했다.
종교화에서 종려나무는 대체로 순교자들의 승리의 상징물로 통한다.


안토넬로 다 메시나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천사〉 패널에 유채 / 74×51cm / 1475~1476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6b실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e Messina, 1430~1479)는 바사리의 《예술가 열전》에 따르면

플랑드르에서 발명한 유화를 베네치아를 통해 처음으로 이탈리아로 도입한 화가다.

그는 플랑드르 지역인 브뤼주에서 잠시 활동하면서 유화 기법에 크게 열광했고, 이후 자신의 고향 시칠리아로 건너온

플랑드르 출신 화가들로부터 유화를 이용한 정교한 표현의 ‘플랑드르 회화’ 기법을 습득하였다.


그의 무덤에는 “물감과 기름을 섞어서 이탈리아 회화에 화려함과 내구성을 선사해준 선구자”라는 글이 적혀 있다.

 유화는 기름에 물감 안료를 섞어 사용하는 기법으로,

시간이 지나도 심하게 변색되거나 훼손되지 않아 내구성이 뛰어났다.


그뿐 아니라 몇 번이고 수정할 수 있기 때문에

치밀할 정도로 세밀한 플랑드르 회화의 전통을 일구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플랑드르 회화는 붓이 아니라 거의 바늘 끝으로 그린 듯이 정확하고 꼼꼼하게 대상을 묘사했다.
따라서 작품 속 예수의 땀과 고통에 젖은 머리칼과 코와 턱에 듬성한 수염은 만질 수 있을 듯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죽은 예수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아기 천사의 고운 머리칼, 날개 결,

예수의 몸을 두르고 있는 천 역시 사실적인 미감을 마음껏 발휘한다.


또한 안토넬로 다 메시나는 고통 속에 막 숨을 거두느라 채 입을 다물지 못한 예수의 모습과

이를 슬퍼하는 아기 천사의 애절한 표정을 기품 있게 그려냄으로써,

다소 도식적인 느낌이 드는 플랑드르 회화보다 한발 앞서 있다.


풍부하고도 자연스러운 표정, 조각처럼 단단한 형태를 갖춘 예수의 몸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특히 화면 전체를 골고루 밝히는 고운 빛과 그림 상단 짙푸르다가

아래로 갈수록 점차 옅어지는 하늘색의 부드러운 변화는
색과 빛의 표현에 능숙했던 베네치아 화가들의 전통을 잘 습득한 결과로 보인다.


배경에 그려진 풍경은 그의 고향 마을 메시나를 담은 것이다.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예수와 천사에 비해 이 배경은

컴퓨터 그래픽을 방불케 할 정도로 지나치게 정교한데, 그래서인지 딱딱한 느낌마저 든다.


따라서 학자들은 이 배경 부분과 다소 자연스러움이 결여되어 보이는 예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그가 아니라 제자이자 아들인 야코벨로가 그린 것으로 보고 있다.

요하힘 파티니르 <스틱스 강을 건너는 카론이 있는 풍경> 패널에 유채. 64×103cm. 1520~1524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0층 56a실


르네상스 시대만 해도 몇몇 예외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이탈리아 화가들에게 풍경은

그림 속 인물들을 도드라지게 보이게 한다거나어떤 사건을 설명하기 위한 배경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알프스 북쪽의 화가들은 그림 속 풍경의 비중을 훨씬 높이곤 했다.
안트베르펜에서 활동한 요하힘 파티니르(Joachim Patinir, 1480?~1524)는 북유럽 최초의 풍경화가로 불리기도 한다.


물론 〈스틱스 강을 건너는 카론이 있는 풍경〉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다룬 신화를 주제로 하고 있고,

실제 자연을 그린 것은 아니어서 오늘날 말하는 풍경화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아름답고 신비로운 어떤 지역의 풍광을 마치 새처럼 높은 곳에서 바라보듯 펼쳐 보이고 있어서

그림 속 일화들은 거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이다.


화면 왼쪽의 낙원으로 굽이치는 강은 레테의 강이다.
생을 다한 이가 이 강의 물을 마시면 이승에서의 일은 모두 잊고, 영원히 늙지 않는 몸으로 낙원에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


그림 속 낙원에는 천사들이 유유히 산책을 하고 있다.

정중앙 지하 세계로 들어가는 스틱스 강 위에 떠 있는 카론의 배는 죽은 자들의 영혼을 실어 나른다.


배는 아마도 그림 오른쪽의 지옥을 향하는 듯하다.
활활 타오르는 화염과 더불어 괴이하게 생긴 건물 안에 머리가 셋인 개가 버티고 있는데,

이는 지옥의 문을 지키는 케르베로스이다.

요하힘 파티니르와 캉탱 마시 <성 안토니오의 유혹> 캔버스에 유채. 155cm×173cm. 1520~1524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0층 56a실


〈성 안토니오의 유혹〉은 파티니르와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료였던

캉탱 마시(Quentin Matsys, 1466~1531)와 함께 그린 그림으로, 파티니르는 풍경을 그리고 캉탱 마시는 인물들을 그렸다.


성 안토니오는 3세기경의 수도사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스무 살 시절부터 깊은 산속에 홀로 살면서 금욕적인 수도 생활을 했다.


화가들은 그가 수많은 유혹을 이겨내는 장면들을 자주 그림으로 그리곤 했다.

이 그림 속 성 안토니오에게 닥친 유혹은 바로 ‘미인계’다.


괴물처럼 흉측한 얼굴의 노파는 현재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된 〈기괴한 노부인〉의 모습과 닮아 있다.
노파 덕분에 성 안토니오를 유혹하는 젊은 미인의 아름다움이 한층 강조된다.


이 그림에는 이야기의 중심에 선 인물들의 모습이 〈스틱스 강을 건너는 카론이 있는 풍경〉보다는 크게 그려져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역시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네덜란드나 벨기에 어느 지방의 마을을 떠올리게 한다.
종교화이지만 풍경화이고, 반대로 풍경화이지만 결국 종교화인 셈이다.

산드로 보티첼리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 이야기 첫 번째〉패널에 템페라 / 83×138cm / 1483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6b실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대부호인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가득 받으며 화가로서의 삶을 이어나갔다.


종교적인 이유로 한때 붓을 꺾기도 했지만 그는 중세 동안 금지되다시피 한 고대 그리스 신화를 그림으로 옮김으로써
고대의 부활이라는 르네상스 회화의 진수를 펼쳐보인다.


프라도 미술관에 걸려 있는 이 작품들은 지오반니 보카치오

(Giovanni Boccaccio, 1313~1375)의 《데카메론(Decameron)》에 나오는 일화를 담고 있다.


라벤나의 오네스티 가문 상속자 나스타조는 지체 높은 신분의 여인 파울라를 지극히 사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차갑게 그를 거절했고, 이에 나스타조는 상사병에 걸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보다 못한 친구들이 그로 하여금 잠시 라벤나를 떠나 있기를 권했다.
첫 그림 왼쪽 모퉁이에는 라벤나를 떠난 나스타조가 머물던 천막이 그려져 있다.


빨간색 옷을 입은 나스타조는 망연자실한 채 숲을 산책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나뭇가지를 집어 개를 쫓는 모습으로 두 번 등장한다.


그날 나스타조는 산책을 하다 우연히 칼을 든 기사 한 명이 말을 타고 알몸의 여자를 쫓는 장면을 보게 되었는데,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여인이 기사가 풀어놓은 사냥개에게 잡혀 쓰러지기 직전인 것을 보고 그 개를 물리치려고 한다.

산드로 보티첼리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 이야기 두 번째〉 패널에 템페라 / 82×138cm / 1483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6b실


인물과 사건을 실제 현장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그려서 마치 오늘날의 사진과도 같은 효과를 노리는 것이

르네상스 회화의 특징이라면, 이 그림은 그런 자연주의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


동일한 인물이 한 화면에 두 번 등장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숲에 가득한 나무들 역시 요즘 동화책에서 흔히 보듯 도식적이어서 사실성보다는

그림으로서의 장식적 기능에 더 충실한 것 같다.

산드로 보티첼리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 이야기 세 번째〉 패널에 템페라 / 83×142cm / 1483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6b실


나스타조는 그 기사로부터 슬픈 이야기 하나를 듣게 된다.

기사는 여인을 지극히 사랑하였으나 여인이 거부하자 실의에 빠져 자살하고 만다.


얼마지 않아 여인도 죽게 되는데 기독교에서 금하는 자살을 한 기사와

그를 죽게 만든 여인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벌을 받게 된다.


금요일마다 남자는 여자를 쫓아 칼로 찔러 죽인 뒤 그녀의 내장을 꺼내 개에게 던져주는 일을 반복하고,

그녀는 늘 그런 죽임을 당하면서도 다시 살아나 매번 다시 쫓기고 죽는 일을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나스타조는 이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쫓고 죽이는 일을 반복하는 그 장소에서 성대한 파티를 연 다음

자신이 흠모하는 파울라를 초대하여 그 장면을 목격하게 하였다.

파울라는 비로소 마음을 열고 그의 청을 받아들이게 된다.

산드로 보티첼리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 이야기 네 번째〉 패널에 템페라 / 83×142cm / 1483년 / 개인 소장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05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06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07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08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수태고지>. 목판에 템페라 / 194×194cm / 1426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6b실


프라 조반니(Fra Giovanni, 형제 요한)라 불리던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400~1455)는

한 세기 후 미술가이자 저술가였던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가

르네상스 시절 활동했던 예술가들의 작품과 삶에 대해 기술한 <예술가 열전>에

‘천사와 같은 화가’라는 뜻의 ‘픽토르 안젤리쿠스(Pictor Angelicus)’라고 소개되었다.


현재 그는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천사같은 형제)’

혹은 ‘일 베아토 안젤리코(Il Beato Angelico, 축복받은 천사 같은 사람)’로도 부른다.


그는 도미니쿠스 수도회 소속의 수도사로 출발하여,

훗날 피렌체 인근 도시 피에솔레에서 수도원장 직에까지 오른 성직자이기도 했다.


그는 인간 각자에게 부여된 재능을 최대한 발휘해

신의 뜻을 전하라는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가르침을 ‘그림’을 통해 수행했다.

그림으로 기도를 대신한 것이다.


<수태고지>는 자신이 몸담고 있던 피에솔레 수도원에 속한 교회를 위해 그린 것이다.
성경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뒤 충만한 신앙심으로 경건한 삶을 살고 있던 중,

천사 가브리엘의 뜻하지 않은 방문과 함께 ‘임신’이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된다.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 속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잉태하게 되리라는

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소식에도 순종의 예를 다하고 있다.


화면 왼쪽 모퉁이에서 시작된 빛은 성령을 의미한다.

중앙의 기둥을 통과하는 빛줄기 안에 비둘기 한 마리가 보인다.


비둘기 역시 성령을 의미한다. 마리아의 임신은 바로 이 성령의 힘, 이른바 은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중앙 기둥 윗부분에 하나님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가슴에 포갠 두 팔은 ‘순종’을 의미한다.
가브리엘과 마리아가 위치한 공간은 ‘로지아’라고 부르는데 한쪽 면은 벽으로,

반대쪽은 기둥을 세워 외부와 연결되도록 트여놓은 곳을 말한다.
로지아의 천정은 푸른 하늘과 황금빛 별들로 장식되어 있다.


주목할 것은 화면 왼쪽의 외부세계이다.

두 남녀가 맥 빠진 모습으로 걷고 있고, 천사는 그들을 재촉한다.


이들은 낙원에서 추방되는 아담과 이브이다.

구약과 신약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예표론(Typology)’이라 하는데,
예표론적으로 보면 아담과 이브로 인해 만들어진 원죄는

바로 그 ‘죄’ 없이 잉태되어 세상에 오실 예수에 의해 사해진다는 것으로 연결된다.


‘순종하지 않은’ 자들이 만든 원죄의 늪에 빠진 인류는

‘순종하는’ 자로 인해 비로소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


미술에는 늘 이야기가 있다.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그림을 주문한 사람이 하고 싶은 이야기일 수도 있다.


유럽 인구의 대다수가 문맹이던 시절, 교회에서 성서의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림을 그려서 붙이거나 벽화를 그리는 것,

혹은 조각을 하거나 교회에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들어 넣는다거나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시각예술이 메시지 전달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성서의 내용이나 교회 쪽에서 신도들에게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 외에도,

어떻게 하면 사람을 실제처럼 도톰해 보이게 그릴 것인지,

어떻게 하면 3차원이라는 공간을 평평한 2차원 공간에 표현할 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화가들의 시도가 쌓여서 공간의 입체감이나 인체의 볼륨감 등이

완성된 형태로 눈에 띄게 나타났던 때가 보통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시기다.


화가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87-1455)도 이런 기법을 잘 구사했다.
‘프라(Fra)’라는 말은 이탈리아어로 수사라는 뜻인데, 고로 이 분은 수사이면서 화가였다.


‘수태고지’라는 단어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인해 예수를 임신(수태)한다는 것을

가브리엘 천사가 찾아와서 알려 준다(고지)는 뜻이다.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의 집에 찾아왔을 때 마리아는 성서를 읽고 있었는데(무릎 위에 조그마한 책이 놓여 있다),

천사는 그녀가 예수를 잉태하게 될 것임을 알려 주었다.


마리아는 처녀였으므로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겠냐며 놀랐으나 결국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있는 것이 받아들이겠다는 제스처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순간 성령이 내려와서 예수를 잉태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림 왼쪽 위에는 하느님의 손이 보이고 거기에서 장풍처럼 빛이 나와 마리아에게 오는 것이 보인다.


그 빛 가운데에는 흰색 비둘기가 있는데, 성령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존재가 아니다 보니

이를 표현하는 방식이 늘 흰색 비둘기였다.

<수태고지> 중 비둘기 부분


마리아의 집을 보면 기둥 여러 개가 뒤로 갈수록 작아 보이는데, 이것이 원근법이다.
두 개 이상의 사물이 다른 위치에 놓여 있을 때 앞의 것이 커 보이고 뒤의 물건이 작아 보이도록 그리는 것,

즉 사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그림에서 가장 크게 그려진 것은

가장 가까이에 있거나 가장 커 보이는 물건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사람이나 사물이었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원근법을 적용하여 그림을 그렸던 시기에도

다른 지역에서는 중요한 것을 가장 크게 그리는 방식을 고수했다.


그리고 하나의 사물에서 앞부분과 뒷부분의 크기를 달리 표현하는 것을 단축법이라고 한다.
마리아의 무릎 부분이 엉덩이 부분보다 앞으로 나오면서 기울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든지,

방 안의 긴 벤치 같은 것을 표현한 방법이다.


프라 안젤리코는 원근법이나 단축법을 능숙하게 다룰 줄도 알았지만

마리아와 가브리엘 천사의 얼굴이나 목 부분을 부드러운 음영으로 처리한다든지,

뺨의 발그레한 부분을 자연스럽게 표현한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생동감과 볼륨감을 표현했다.


이 그림은 나무판에 템페라(안료를 달걀노른자에 섞는 방식)로 그려졌다.
나무라는 재료는 시간이 지날수록 마르면서 크기가 줄어들기 때문에

당시 나무판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나무판을 삶은 뒤 최소 십 년 이상을 말렸다고 한다.


당시에 캔버스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그림의 크기만큼 넓적한 나무는 없을 테니 나무판 여러 개를 이어 붙였다.


그리고 천을 한 겹 씌우고 밑칠을 해서 최대한 표면을 매끈하게 만들어 그림을 그릴 준비를 했다.
템페라로 그린 그림의 특징은 달걀노른자를 생각하면 된다.


달걀 프라이를 먹다가 안 익힌 노른자가 그릇에 묻었을 때

재빨리 설거지하지 않으면 씻어 내기가 쉽지 않았던 경험은 한 번쯤 다들 있을 것이다.


템페라화도 그렇다.

템페라로 그린 그림은 빨리 마르고, 한번 마르면 좀처럼 물감이 떨어지지 않아서 견고하다.


그러나 덧칠이 불가능하고 수정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템페라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매우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 마리아와 가브리엘의 후광, 가브리엘 천사 뒤에서 나오는 빛,

성령에서 나오는 빛 등은 금색으로 칠해졌는데, 이것은 금색이 나는 무언가가 아니고 진짜 금이다.


금화를 곱게 갈아서 가루 상태로 만든 다음에 칠했다.
금화를 갈아서 그림용 가루로 만드는 전문가가 따로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시대의 그림은 그림을 얼마나 잘 그렸는가,

얼마나 구도가 혁신적인가 등으로도 가치가 매겨지지만 표면 자체의 물질의 가치가 꽤 높은 경우도 많다.

금도 금이지만, 마리아의 치마에 쓰인 푸른색은

라피스라줄리(lapis lazuli, 청금석)라는 파란색의 준보석을 갈아서 칠한 것이다.


아주 귀한 파란색이었기 때문에 아무 곳에나 쓰지는 않았고,

성모 마리아를 그릴 때만 주로 쓰던 비싼 물감이다.


집 밖의 풀이 우거진 정원에는 한 남자와 여자가 등장하는데,

이들이 인류의 첫 번째 남녀, 아담과 이브다.


둘 다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니

이미 하느님이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인 것 같다.


선악과를 먹은 대가로 남녀 모두 영원히 살지 못하고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노동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아기를 낳을 때 고통스러우며, 부끄러움을 알게 되어 옷을 입었고, 낙원에서 쫓겨났다.
이 장면은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장면인데,

아담과 이브가 살던 때와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던 순간은 몇 천 년이나 차이가 나지 않는가?


수태고지 장면과 아담과 이브가 한 화폭에 등장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아담과 이브는 첫 번째 남녀로 인류의 대표자라고도 할 수 있다.


즉 하느님이 성령을 통해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그가 스스로를 희생하여 인류가 지은 죄를 씻어 줄 것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수태고지>라는 그림은 프라도뿐만 아니라 유럽의 어느 미술관에 가도 볼 수 있는데,
자꾸 반복되어 제작되었다는 것은 교회 측에서 그만큼 중요하게 여긴 메시지라는 의미다.

<수태고지>의 프레델라 중 앞의 세 개의 그림


이 작품의 아래를 보면 조그마한 그림들이 만화처럼 ‘조르륵’ 붙어 있는데,

제단화 밑에 작게 그려진 이런 부분을 ‘프레델라(predella)’라고 부른다.


프레델라에는 주로 위쪽 큰 그림의 주인공에 대한 부연설명이 나온다.
우리가 보는 그림의 주인공은 마리아이므로 이 프레델라에는 마리아의 일생이 그려져 있다.


프레델라의 가장 왼쪽 그림, 그중에서도 방 안의 장면은 아기 마리아가 태어나는 순간이다.

그 옆은 마리아와 요셉이 약혼하는 장면이다.


사실 마리아가 남편인 요셉과 어떻게 만나서 결혼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성서에 나오지 않는다.
요셉이 누구의 자손이며, 목수였고 성실한 남자였다는 설명 정도만 나와 있다.


그런데 성서의 내용으로만 온갖 그림을 다 그리기에는 세부사항이 너무나 부족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참고로 삼곤 했던 것이 ‘외경(Apocrypha)’이다.


외경은 성서처럼 쓰이긴 했으되 교회로부터 정식으로 성서로는 인정을 받지 못한 책이다.
그래서 야사나 전설 같은 이야기가 많다.


요셉이 어떻게 하여 마리아의 남편감이 되었는지도 ‘외경’에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다.

마리아가 결혼할 나이가 되자 어려서부터 비범했던 마리아와 누가 결혼을 할 것인지가 동네 사람들의 이슈가 되었다.


그리하여 동네 사제는 ‘마리아와 결혼하고 싶은 남자는 다들 나무 작대기를 하나씩 준비해서 회당으로 모이시오.

가장 적당한 남자에게는 기적이 일어나서 마른 나뭇가지에서 꽃이 피어날 것이오’라고 공고를 했다.


온 동네 총각들이 다들 작대기 하나씩을 들고 회당에 모여 열심히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나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 어리둥절해 할 무렵,

다른 후보자들에 비해 나이가 많았던 요셉의 나뭇가지에서 꽃이 피어났다.


그래서 요셉이 마리아의 남편감으로 결정되었고,

요셉과 마리아가 손을 맞잡으려는 중 낙방한 다른 총각들은 화가 나서 나뭇가지를 다리로 부러뜨리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자칫 심각할 수 있는 종교화에 생생한 느낌을 불어넣어 주는 부분이다.


이후 약혼만 했을 뿐 아직 결혼은 하지 않은 상태에서 위의 큰 그림에서처럼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났고,

마리아가 예수를 임신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안 요셉은 착한 남자였기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파혼하려 했다.
그때 하느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다 하느님이 시킨 일이니 참고 살거라’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요셉은 가정의 수호성인이면서 인내의 상징이기도 하다.
아들이 자기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도 키우려면 그 옛날 사람들이 보기에도 인내심이 꽤 필요했던 것 같다.


이 프레델라를 보면 요셉은 거의 대머리에 머리칼도 허옇다.

프라 안젤리코의 이 그림뿐만 아니라 요셉은 대부분의 서양 회화에서 할아버지로 묘사되는데,

이는 마리아가 예수를 임신했을 때도 처녀였고 죽을 때까지도 처녀였다는 것 때문에 그렇다.


평생을 남자를 모르고 살았다는 여자의 남편이 젊고 건장하고 잘생긴 남자라면

제아무리 신심이 깊은 사람이라도 마리아가 평생 동정이었다는 것을 믿기가 힘들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대부분의 그림에서 남자구실을 잘 못할 것 같은 할아버지로 묘사된다.

<수태고지>의 프레델라 중 뒤의 두 개의 그림


이어지는 그림은 임신한 마리아가 사촌이자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장면,

그 옆은 아기 예수가 마구간에서 태어나는 장면이다.


이어서 아들을 성전에 봉헌하는 장면이 나오고 마지막으로는 시간이 훌쩍 흘러서 마리아가 숨을 거둔 장면이 나온다.
이 그림 속 마리아처럼 등을 똑바로 대고 누워 있는 인물을 보면 옛날 사람들은 ‘아, 죽었구나’라고 이해했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사람이 잠자거나 쉬려고 누운 것은?

그것은 우리가 거실에서 쿠션을 베고 누워 텔레비전을 보는 자세처럼 옆으로 비스듬하게 그렸다.

대부분은 팔 한쪽을 괴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식으로 등을 붙이고 누운 사람은 죽은 사람, 비스듬하게 누워 있으면 살아 있는 사람,

젊은 여자와 날개 달린 젊은 사람 사이에 흰 비둘기가 있으면 수태고지 장면 등

‘척하면 척’ 하고 알아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도상(iconography)이다.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끼리 암묵적으로 정해 놓은 약속 같은 것이다.


지금 우리는 시대도 다르고 지역도 다르므로 책을 보고 그리스도교 종교화의 도상을 공부하거나

따로 이야기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도상을 알아본다지만,

피렌체에서 1400년대에 살던 사람들은 웬만하면 이 그림을 이해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화라는 것은 메시지를 알리는 것이 본래 목적이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야 했기 때문이다.


도상이라는 것은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존재한다.

늘 묻혀서 살기 때문에 인지를 못할 뿐이다.


몸 좋은 서양 남자가 바지 위에 팬티를 입고,

가슴의 오각형 안에는 S자, 망토를 두르고 서 있다면 그건 누구? 슈퍼맨이다.


심지어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도 그것이 슈퍼맨인 줄은 안다.

그러나 500년 정도가 지난 뒤에 누군가 우연히 슈퍼맨 이미지를 봤다고 치자.


이 남자가 누구인지 알려면 190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의 문화에 대해 공부를 해야 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이탈리아에서 1400년대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무슨 내용인지 모르는 것은 그래서다.

도상을 몰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의 회화를 이해하려면 도상을 알아야 하는데,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나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유럽 여행을 가서 미술관에 갈 텐데 아무것도 몰라요. 무슨 책을 봐야 되나요?’

라는 미술관 초보의 질문에는 성서와 그리스 · 로마 신화가 답이다.

덧붙여 역사책도 읽으면 좋겠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44XXX6600003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추기경〉캔버스에 유채. 79×61cm. 1510~1511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0층 49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르네상스 최전성기를 구가한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1483~1520).


그가 교황청에 머물면서 그린 〈추기경〉의 모델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대담한 시선의 카리스마 넘치는 그림의 주인공으로는 잔혹하기로 악명 높았던

프란체스코 알리도시(Francesco Alidosi, 1455~1511) 추기경,


라파엘로와 자신의 딸의 혼사를 추진했던 비비에나(Bibbiena, 1470~1520) 추기경,

나아가 교황이었던 율리우스 2세까지 언급되고 있다.


살짝 몸을 비튼 자연스러운 자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를 떠올리게 한다.
그뿐 아니라 라파엘로는 피부와 눈, 코, 입 등이 만나는 부분 윤곽선을 흐릿하게 처리하여

사실감을 드높이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푸마토 기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라파엘, 토비아 그리고 성 히에로니무스와 함께 있는 성모자(성모와 물고기)〉

캔버스에 유채. 215×158cm. 1512~1514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0층 49실


〈라파엘, 토비아 그리고 성 히에로니무스와 함께 있는 성모자(성모와 물고기)〉는

성모자를 중심으로 왼편에는 성서 《토비트서》(5장 15절)에 나오는 일화의 주인공들이 있고,

오른편에는 성 히에로니무스가 함께한다.


토비트는 어느 날 몸을 씻다가 자신의 발을 깨물려고 하는 물고기를 만나게 되는데,

천사 라파엘은 그에게 물고기의 내장을 뺀 다음 잘 보관하라고 일렀다.


얼마 뒤, 토비트는 사라와 결혼하게 되는데,

사라는 본래 결혼해 첫날밤을 보낼 때마다 악마의 습격을 받아 신랑의 목숨을 내주어야 했었다.


그러나 토비트는 천사 라파엘이 일러준 대로 물고기의 내장을 태워 이를 물리친다.
그림 왼편에는 날개 달린 천사 라파엘과 자신을 나타내는 지물인 물고기와 함께하는 토비트가 그려져 있다.


성 히에로니무스(Eusebius Hieronymus, 347?~ 420)는

그리스어 역본의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학자로, 주로 성경책과 함께 그려진다.


또 그는 광야에서 스스로 금욕적인 고행을 하던 중

사자의 발에 꽂힌 가시를 빼준 경험이 있어 사자와 함께 등장하곤 한다.

〈갈보리 가는 길〉패널에 유채 / 318×229cm / 1515~1516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49실


〈갈보리 가는 길〉은 라파엘로가 공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작업한 작품으로 시칠리아, 팔레르모의

산타 마리아 델로 스파시모(Santa Maria dello Spasimo, 전율하는 성모 마리아 교회)를 위해 그려졌다.


고통받는 예수를 바라보며 슬픔과 분노에 사로잡힌 성모 마리아를 추모하며 지은 교회니만큼 그림 역시

십자가를 지고 끌려가는 예수와 이에 전율하는 마리아의 시선을 드라마틱하게 교차시켜 놓았다.

 
‘시칠리아의 전율(Lo Spasimo di Sicilia)’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이 그림은 완성 후 시칠리아 섬으로 옮기는 중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분실되었다가 놀라울 정도로 멀쩡한 상태로 제노바에서 발견되어 사람들을 ‘전율’케 했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03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Bartolome Esteban Murillo 1618~1682)


안달루시아 세비야 출생. 17세기 에스파냐 회화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고아가 되어 불운한 소년기를 보냈지만, 1639년까지 J.카스틸료 밑에서 그림공부를 하여 화가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이어 세비야화단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주로 이탈리아의 S.라파엘로(1483∼1520), I.코레조(1494∼1534) 등과

북유럽회화의 거장 P.P.루벤스(1577∼1640), A.반다이크(1599∼1641) 등의 명작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그 때까지 색조에 약간 차가운 느낌을 주던 세비야파적(派的) 그림에서
점차 안정감과 미감(美感)을 띤 훈훈한 느낌을 주는 화풍으로 바뀌었다.


그가 즐겨 그린 성모화는 미묘한 명암과 우아한 형태, 따사로운 색조 속에 자애와 경건함이 가득한 감미로운 작풍그림으로

그를 ‘에스파냐의 라파엘로’라고까지 불렀다.


거리의 거지를 소재로 한 작품도 많으며,

그들 작품에서는 어떤 감미로움이 감돌면서도 날카로운 사실력에 의해 독특한 매력이 풍긴다.


한편 1660년에 신설한 세비야 아카데미의 회장이 되어서는 많은 조수와 제자를 길러냈다.

벨라스케스(1599∼1660)와 함께 에스파냐 바로크의 대표적 화가로,

풍속화가 ·초상화가로서도 재능을 발휘하였으며, 다작의 화가였다.


작품으로 1645∼1646년 세비야프란시스코수도원의 복도에 그린 11장의 그림은 풍속화와 종교화, 사실과 종교적 정감의 결합이고,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원죄 없는 마리아의 발현>(1678)은 그의 예술을 대표하는 작품이며,

<로마 지방관의 꿈>(1664)에는 깊은 종교적 정열이 담겨져 빛과 색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다.


무리요의 작품은 프라도 미술관 이외에도 런던 내셔널 갤러리,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

독일 러시아 미국 등 전세계 중요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다.


〈무염시태〉 캔버스에 유채 / 274×190cm / 1678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무염시태’는 예수와 마찬가지로 마리아 역시 원죄없이 태어났다고 믿는 가톨릭 교회의 교리이다.
마리아는 흔히 그 순결함을 강조하는 백합과 더불어 장미, 초승달 등과 함께 그려지곤 했다.


백합이나 장미가 주로 ‘수태고지’ 장면에 그려진다면, 초승달은 특히 ‘무염시태’의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이는 《요한의 계시록》 12장에 기록된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아래에는 달이 있고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라는 구절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는 처녀의 신으로 초승달이 상징인데,
마리아의 순결함을 강조하기 위해 그를 차용한 것으로도 본다.


엄격한 가톨릭 국가였던 17세기의 스페인에서는 반종교개혁의 정신을 드높이는 종교화 제작이 활발하였고,

특히 무염시태와 관련한 그림이 프란시스코 파체코(Francisco Pacheco, 1564~1654)가 제시한 기준에 따라 그려지곤 했다.

파체코는 벨라스케스의 장인이자 당대 최고의 화가이며 미술 이론가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회화의 기술(arte de la pintura)》(1649)에서 마리아는

“햇살 가득한 천국에서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순백의 옷과 푸른 외투를 입고

머리에는 열두 개의 별이 빛나는 후광과 왕관을 쓰고 발밑에는 초승달을 딛고 서서 두 손은 가슴에 기도하듯 포갠”

모습으로 그려야 한다고 말했다.

<마리아의 무염시태> 캔버스에 유채. 144×206cm. 1660~1665년경 제작. 프라도 미술관


17세기 세비야의 대표적 화가로, 한때 수르바란이 차지하고 있던 모든 영광을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돌려버린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Bartolome Esteban Murillo, 1617~1682)는 성모상을 무려 50여 점이나 그렸는데

그중 무염시태와 관련한 그림이 절반에 가깝다.


성모는 파체코의 말대로 햇살 가득한 천국 어딘가에서 하얀 옷을 입고,

푸른 외투를 걸친 채 발치 아래 초승달을 두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성모 주변에 가득한 앙증맞은 천사들은 라파엘로의 귀엽고 통통한, 그리고 장난기 가득한 천사들과 많이 닮아 있다.
수르바란의 그림들이 신비롭고 명상적이긴 하지만 지나치게 근엄한 반면,

무리요의 그림은 따뜻하고 다정한 색감과 좀 더 인간적인, 따라서 친밀한 느낌을 준다.

<조개껍질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 캔버스에 유채. 124 x 104 cm. 프라도 미술관


〈성가족〉 캔버스에 유채 / 144×188cm / 1650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무리요는 세비야의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읜 그는 삼촌의 도움을 받아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이내 벨라스케스의 눈에 띄어 그로부터 본격적인 수업을 받게 되었다.

무리요가 태어날 무렵인 17세기 초반의 세비야는 파리, 나폴리 등과 함께 당시 유럽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도시였다.
인구 15만에 육박했던 세비야는 수도인 마드리드보다 규모가 훨씬 큰 도시로,

과달키비르(Guadalquivir) 강의 항구를 통해 신대륙과의 무역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경제 발전은 예술 작품에 대한 수요로 이어져 벨라스케스, 수르바란, 무리요와 같은

스페인 최고봉의 화가들이 마음껏 기량을 펼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무리요는 세비야의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의 수집품에 섞인 라파엘로, 루벤스,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1599~1641) 등의 작품에 큰 영향을 받았다.


‘스페인의 라파엘로’라 불릴 만큼 세련되고, 또 다정하며 감미로운 화풍의 무리요는 종교화뿐 아니라

당대 소시민들의 삶을 담은 장르화나 초상화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성가족〉은 제목을 모르고 본다면, 고아로 자란 무리요가 꿈꾼 따사로운 가정을 담은 장르화로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이 예수의 가족(성가족)을 그린 종교화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그림 속 인물들이 가진 지물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왼쪽의 마리아는 물레를 놓고 실을 풀고 있다.

성서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 책에 따르면 마리아는 성전의 휘장을 만드는 일에 동원되었을 만큼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다.


서양으로 전해진 서아시아 지방의 전설에 따르면 운명을 지배하는 달의 여신은

‘숙명의 실을 감는 자’라 하여 거미줄 한가운데 있는 거미로 묘사되기도 했다.


그리스 신화에서 이 달의 여신은 ‘처녀의 신’ 아르테미스이다.
동정녀로 인류 전체의 숙명을 책임질 마리아가 가끔 실을 잣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런 전례를 따르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림 중앙에는 아기 예수가 새를 잡은 채 강아지와 장난치는 모습이 보인다.

손에 잡힌 새는 곧 예수 자신의 희생을 의미한다.
더없이 따사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아버지 요셉 옆의 탁자에는 그가 목수임을 가리키는 이런저런 공구가 그려져 있다.

<주화를 든 소녀 (갈리시아인)> 캔버스에 유채. 43 x 63 cm. 1650년작. 프라도 미술관


<로사리오를 든 성모> 캔버스에 유채. 110 x 164 cm. 프라도 미술관


<레베타와 엘리에셀> 캔버스에 유채. 171 x 107 cm. 프라도 미술관


<적선하는 성 토마스 드 빌라뉘에바> 캔버스에 유채. 283 x 188 cm. 세비아 미술관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22cm x 107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참조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32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33






〈자화상 : 광상곡 1〉, 부식동판화. 13.5x11cm. 1797~1798년 제작.


18세기부터 19세기 초반까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교차하는 시대를 살았던 그는

뛰어난 초상화가이자 풍속화가로서 명성을 드높였다.

 

고야는 귀족적인 화려함과 민중적인 빈곤함을 모두 경험했다.

그를 단지 궁전에 봉사했던 화가로만 본다면

그의 예술은 다른 대부분의 화가들처럼 천편일률적인 찬사만을 받았으리라.


그러나 그는 동시대를 살았던 힘없는 스페인 민중들의 고통과 절규에 귀 기울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층의 무지와 포악함에 촉각을 세우고 그림으로 표현해 냈다.


고야가 살았던 시대는 정치적으로 앙시앵 레짐(전제정치)에서 시민 사회로 이전하는 혁명의 시대였다.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였으며 프랑스는 대혁명으로 왕정을 몰아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고야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그해에 궁정화가로 임명되었다.

그가 궁정화가로 있던 1808년 나폴레옹의 군대가 스페인을 침략했다.

그는 참혹한 정복전쟁의 고통을 맛보았다.


고야는 프랑스의 계몽주의를 받아들인 진보적인 정신의 소유자였으며,

시민 사회를 추종한 혁명의식을 가진 화가였다.


고야는 청력을 잃으면서 특이하고 병적인 상상력을 발휘해서 뒤틀리고 난해한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판화집 〈광상곡 변덕〉 시리즈다.


에칭 형식으로 구현된 80여 점의 동판화에는 고야의 모습도 들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광상곡: 자화상 1〉이다.


작품 속 화가의 표정은 매우 불만에 가득 차 있는데, 이는 당시 부패한 성직자와 무자비한 전제군주와

그 사이에서 기생하는 귀족들이 지배하는 사회에 대한 무언의 항의로 해석된다.


당시 프랑스 계몽주의에 깊이 경도돼 있던 고야는

이 판화집에 수록한 어둡고 기괴한 작품들을 통해서 부조리한 사회를 꼬집었다.


그러나 이 판화집이 종교재판에 회부될 것을 걱정한 고야는,

시장에 내놓은 지 열흘도 안 되어 모두 회수하고 만다.
사회 풍자를 통한 계도적 효과가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카프리초스> 연작 중 ‘다 뜯기고 간다’1799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비록 왕가의 녹을 받으며 처세술에도 강한 고야였지만, 그는 분명한 계몽주의자였다.
무지한 백성들에 대한 비판, 탐욕으로 정신줄을 놓은 성직자들, 마녀사냥에 열을 올리는 종교재판소,

착취를 일삼는 귀족과 먹고 놀기에 급급한 이달고나 한량 등을 비판하는 판화집 <카프리초스: 변덕>은

‘깨어 있는 이성’에 대한 고야의 동경을 의미했다.


이런 저런 볼 꼴, 못 볼 꼴 다 보며 살던 고야는 때론 비판의 그림을,

때론 생계를 위한 타협의 그림을 반복하며 자기 앞의 생을 이어나갔다.


말년에 그는 마드리드 교외에 집을 구했다.

이미 병으로 청력까지 상실한 고야는 심각하게 쇠약해진 상태에서

첫 부인과 사별한 뒤 만난 마지막 연인 레오카디아 웨이스와 함께 지낸다.


정식 결혼이 아니어서 구설수에 오르내리기 쉬운 이 관계를 숨기느라 레오카디아 웨이스는 가정부로 위장했고,

고야는 외부인의 출입을 되도록 금한 채 은둔하다시피 살았다.


고야는 일명 귀머거리의 집이라 불리는 그 집의 방 두 개의 벽에 석고를 바른 뒤 유화를 사용해 그린 그림으로 가득 채웠다.
그림들은 주로 검은색과 흰색, 그리고 갈색조를 이루고 있어 ‘검은 그림’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현재 캔버스에 유화로 옮겨져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 혹은 보관되고 있다.

〈이성이 잠들자 악마가 태어나다〉(The Sleep of Reason Produces Monsters) 판화, 1799,


위와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1799년에 출판한 80점의 판화 연작 ‘카프리초스’ 중 한 점인 ‘잠자는 이성은

괴물을 낳는다’는 그의 이러한 대중의 불안과 불신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두 팔을 베고 엎드린 화가 자신은 곧 잠자는 이성이고

그 사이에서 활개 치는 올빼미와 박쥐 떼는 광기와 무지를 상징한다.


물론 이 판화는 이성을 잠재우면 인간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상상력, 감정이 자연스레 분출되고 심

지어 악몽 같은 무의식의 세계까지도 그 모습을 선명히 드러냄으로써 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

악몽 같은 무의식의 세계는 여기에서는 개인의 무의식이라기보다는 사회적 무의식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 무의식의 세계는 프로이트의 출현까지 100년을 더 기다려야 했지만,

프로이트조차도 사회적 무의식보다는 개인적 심연의 무의식에 초점을 맞추어 정신을 분석한다.

사회적 무의식이 어떻게 개인적 무의식에 침잠하게 되는지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귀머거리의 집 (Quinta del Sordo)


47세에 앓은 병으로 이후 반평생을 귀머거리로 산 고야는 말년에

마드리드 외곽에 위치한 전원주택을 구입해 은둔생활을 했다.


이 집의 별칭은 '귀머거리의 집(Quinta del Sordo)'였는데,

이 전의 주인 역시 귀머거리여서 이런 별칭이 붙었다고 한다.


고야는 귀머거리의 집 1층과 2층에 각각 7점씩 14점의 벽화를 장식하였는데,

석회벽에 직접 유화물감을 채색하여 일반적인 벽화 채색양식과 다른 방법을 이용하였다.


일반적으로 이 그림들은 검은 그림들(Black Painting)로 불리워지는데,

그 색채와 주제가 음울하고 괴이하기 때문이다.


<마법사의 안식일> 1820~23년, 회벽에서 캔버스로 옮김, 140x438cm, 프라도 미술관


그림을 보면 염소 머리를 한 악마가 둥그렇게 무리를 이뤄 쭈그리고 있는 마법사들을 향해 무엇인가 설교하고 있다.
마법사들은 저마다 겁에 질려 있는 표정이다.


금방이라도 자신들에게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닥치리라는 공포감에 저마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작품 역시 흑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고 점이나 마법사들이 광기 어린 눈동자를 하고 있는 점이 사티로스의 그것과 마찬가지다.


고야 생존 당시 대중의 미신, 특히 마법사에 대해 품고 있는 두려운 감정은 심각한 수위에 도달한 상황이었다.
계몽주의 사상의 세례를 받은 자유주의자였던 그에게 이런 대중의 미신 숭배는 사회의 안정을 저해하는 위험천만한 행위로 비쳤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대중의 무지를 사탄의 발호로 규정하고 무자비한 마녀사냥을 통해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려던 교회와 왕정의 구태의연한 중세 회귀적 행태였다. 


‘마법사의 안식일’은 곧 대중의 무지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구세력이 자행하고 있는

또 다른 무지를 동시에 신랄히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의 참화> 부식동판. 1820년대 제작. 프라도 미술관


이웃나라 프랑스는 스페인과 달리 변혁의 시대를 구가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라는 새로운 영웅을 탄생시켰다.


고야는 나폴레옹이 스페인 민중들을 해방시켜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세운 스페인 왕조(조셉 왕)에서 궁정화가로 봉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스페인에서 자행되었던 점령자 프랑스군의 전횡을 목격했고,

그 경험은 〈전쟁의 참화(Desastres de la Guerra)〉라는 연작 판화를 낳았다.


이 작품은 1810년에 착수하였지만 찍어 내지는 못하고,

훗날 그가 프랑스로 이주했을 때 거기서 한정판으로 찍어 냈다.


<전쟁의 참화〉에서 고야는 죄 없이 학살당한 민중들의 모습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표현해 냈다.
때론 이 사실적 표현이 너무나 참혹하고 혐오스러워서 초현실적으로 비춰지기까지 했지만,

그림 속 잔혹함은 현실이었다.

<그들은 예하고 선착 구혼자에게 손을 내민다> 18×12.5cm.

They Say Yes and Give their Hand to the First ComerEtchingPrivate collection.


결혼을 통해서 사회적 지위와 부를 획득하는 당대의 악습을 풍자한 그림.
신부가 아버지인 듯한 남자에 의해 계단 위로 인도되고 뒤에는 호색적인 미소를 띤 신랑이 뒤따른다.

신부가 쓰고 있는 가면은 위선을 상징한다.

신부의 머리 위에 기만적인 결혼 현장을 냉소적으로 비웃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치아를 사냥하다(Out Hunting For Teeth)> 1797~1798년 제작. 판화시리즈. 18×12.5cm.


주술에 사용할 마법약을 만들기 위해서 두려움에 떨며

사형수의 시신에서 이를 뽑는 젊은 여인을 그린 작품.

<이래도 그는 그녀를 알 수 없다(Even Thus he cannot make her out)> 18×12.5cm.


단안경으로 살펴보지만 신사는 여자의 외모와 미소에 현혹되어

그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비틀어진 둔부와 돌려진 두 발은 당시의 마드리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매춘부의 표정이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풍자하고 있다.

<신이여 용서하소서. 이 사람은 어머니입니다(For Heaven's sake-and was her Mother)> 18×12.5cm.


어릴 때 시골에서 집을 나간 젊은 여인은 지금은 마드리드에 제일 비싼 매춘부가 되어 있다.
구걸하는 노파를 쫓아버렸지만 끝까지 뒤따라와 '누가 이리 귀찮게 구나" 싶어 뒤돌아보니 어머니가 아닌가.

당시 스페인 사회의 한 단면이다.


<우리를 풀어줄 사람은 없는가?(Can't Anyone untie us?)> 18×12.5cm.


한 쌍의 남녀가 한 나무 속에 묶여 안경낀 올빼미의 발톱 아래에서 서로 떨어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나무의 기둥은 남자의 오른 다리와 연결됨과 동시에 여자의 양 팔은 나뭇가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남녀는 서로로부터 자유스러워지기를 원하지만 율법의 화신인 올빼미가 이들의 불리를 막기 위해 여자의 머리를 움켜쥐고 있다.
이혼을 금지하는 교회의 독단을 비판하고 있다.


참조 : https://blog.naver.com/rsk1227/80161205134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89XX25600010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da1201&logNo=221373561025
http://magazine.hankyung.com/money/apps/news?popup=0&nid=02&c1=2004&nkey=2012122400091069542&mode=sub_view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rsk1227&logNo=80161205134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1820-1823, 캔버스에 회반죽, 146x83cm. 프라도 미술관


프라도 미술관 0층 한쪽에는 고야의 일명 ‘검은 그림들(Pinturas negras)’만 모아 놓은 전시실이 있다.
그는 1819년에 마드리드 외곽에 집을 마련하여 실내 벽화를 직접 그렸다. 이 집을 ‘귀머거리의 집’이라고 부른다.


벽화들은 검은색이 주조를 이루기 때문에 ‘검은 그림들’이라고 불렀다.
이 집은 철로가 들어서면서 철거되었는데, 철거되기 전에 벽면을 떼어 내서 캔버스에 붙이는 식으로 고야의 벽화를 보존했다.


당시 이 집의 소유주는 ‘검은 그림들’ 시리즈를 루브르 박물관에 기증하고자 했으나 루브르 측에서 거절했고,

결국 프라도 미술관에 이 연작이 오게 되었다.


고야는 ‘검은 그림’ 연작을 비롯하여 유화, 판화 등을 주문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그렸다.
누군가의 주문을 받지 않고 예술가의 의지와 영감에 의해 자유롭게 그리는 그림,

이것이 현대미술의 특징 중 하나이며 이 점에서 고야는 선구자다.

'검은 그림' 연작 중 가장 관람객들의 시선을 끄는 작품은 바로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인 것 같다.
티탄(Titan)의 왕인 사투르누스(Saturnus)는 그의 자식이 자신을 죽이고 왕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저주를 받았다.


그래서 자식이 태어나자마자 먹어치웠는데, 이를 보다 못한 부인 레아(Rhea)가 한번은

아기 대신 돌을 주어 삼키게 하고 그 아기를 몰래 키운다.

이 아이가 바로 후대 올림포스 신들의 왕이 되는 유피테르다.


이 작품에 대해서도 여러 해설이 가능하겠지만,

그중 하나는 말년의 고야가 자신을 스스로 사투르누스처럼 묘사했다는 점이다.


고야의 부인인 호세파 바예우는 고야와의 사이에서 여러 번 임신을 했지만,

사산된 아이도 많았고 태어나더라도 일찍 죽어서 결국 성인이 된 자식은 딱 한 명뿐이었다.


고야가 젊었을 때 문란한 생활을 한 탓에 매독에 걸렸고,

이 때문에 아기들도 태어나지 못하고 죽거나 일찍 죽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또한 고야가 청력을 잃게 됐던 열병도 매독이 원인이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나이가 든 고야는 자신의 잘못 때문에 죽게 된 아이들을 생각하며,

자신을 자책하고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를 그린 것 같다.


고야의 인생을 살펴보면, 그는 확실히 성인군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훌륭한 화가가 꼭 훌륭한 인간은 아니며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고야처럼 현대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화가가 아닌 한 인간의 모습으로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화가의 업적과 장점뿐만 아니라단점들까지 알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The Colossus 거인>, 캔버스에 유화. 120×100cm. 1808 제작. 프라도 미술관


고야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뭐랄까 불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멜랑꼴리하기도 하고,

묘하게 복잡한 느낌을 갖게 된다.


고야의 작품은 제라르 르그랑에 따르면 유럽 전체의 무의식의 표현이기도 하다.
부지불식중이었지만, 그 역시도 18세기 말 고딕의 유행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신세계를 예언했다.


<거인>에서는 거인의 그림자에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과 짐승들이 산을 넘어 도망치고 있지만,

정작 거인은 달빛 속에 몽상하며 이 공황상태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이는 단지 나폴레옹의 침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듯하고,

마치 무의식의 거대한 출현에 모든 사람들이 혼비백산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고야의 가장 드라마틱하고 유명한 그림으로 평가되어 온 ‘거인( The Colossus)은 고야의 작품이 아니라,

문하생이었던 아센시오 훌리아가 그린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고 한다. (조선일보 2009.01.28)


나폴레옹 군대에 맞선 스페인의 저항을 상징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던 이 작품은  미술관의 전문가들이 6개월이 넘는 연구 과정을 거쳐

캔버스 구석에 적혀 있는 AJ가 그림을 그린 이의 이름 이니셜이라는 설명이다.


프라도 미술관에서는 그림을 계속 전시할 것이지만 고야의 작품이라는 설명은 수정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19세기 초반에 그려진 ‘걸작’으로 평가되던 문제의 작품을 그리는 데, 고야가 참여했을 것이라는 반론도 여전히 존재한다.

<The Witches' Sabbath> 캔버스에 유채. 43×30cm. 1789. 프라도 미술관


위의 작품은 사람들의 미신을 직접 전사한 그림으로, 야회(夜會)에서 악마는 그를 찬양하는 여성들에게 마술사로 나타난다.
살아 있는 어린이들이나 죽은 어린이들, 심지어는 태아까지도 악마를 존중하여 경의를 표한다.

 
거친 장소, 거리의 부재, 황혼녘의 빛 등이 이미지로 가득 찬 악몽에 몽환적인 사실감을 부여한다.
이 그림은 빈곤한 지성과 모호성에 근거한 모든 종교를 우회적으로 고발하고 있는 듯하다.

마술사들은 '낙태 시술가'를 상징하기도 한다.


고야의 이 작품 ‘마법사의 안식일’에 잘 드러나듯이, 그 당시 대중의 미신, 특히 마법사에 대해 품고 있는 두려운 감정은

심각한 수위에 도달한 상황이었으나, 이는 전통 종교의 흔들림, 믿음의 흔들림에 근원을 두고 있었다.


큰 기둥이 흔들릴 때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한다.
사회의 술사들과 시정잡배들, 그리고 대중들을 등쳐먹는 그 모든 사람들은 마법사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다.


<성 이시드로 순례 여행> 캔버스에 유채. 138.5×436cm. 1821~1823년. 프라도 미술관


고야의 검은 그림 연작시리즈중 하나다.

이 작품을 보면 마드리드의 수호성인인 산 이시드로의 은거지로 순례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광기에 어린 혹은 공포와 경악으로 물들어진 사람들이 보인다.


한때 이성을 믿었고, 출세를 위해 다양한 권력자들 아래서 쉼없이 일하며 예술가로서의 자유를 얻기를 소원했던 그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자발적으로 그린 그림은 어둡고 비관적이다.


그가 사회에서 몰아내기를 원했던 ‘괴물’이 다른 곳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고야의 집 벽면에 검은 잉크를 칠하고 그 위에 덧칠해 사람들의 표정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그림이 재미있는 점은 고야가 젊은시절에 같은 주제를 두고 아래 <성 이시드로의 축제>처럼 밝은 그림을 그렸다는 것.

<성 이시드로의 축제> 438 X 140 cm, 회반죽을 바른 캔버스에 유채, 1819, 프라도 미술관


이 작품은 고야가 젊은 시절 위에 있는  <성 이시드로 순례 여행>과 같은 주제로 그렸던 버전이다. 
젊었을 때는 아마도 세상이 아름다워보였을 테니까 그렇겠지 라고 생각해 본다.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Judith and Holofernes)> Oil mural transferred to canvas. 1819~1823.​ 146 x 84 cm. 프라도 미술관


원래 고야가 자기 집 킨타 델 소르도에 그린 벽화였으나

1873-74년 프라도 미술관 큐레이터 Salvador Martínez Cubells의 감독 하에 캔버스로 옮겨졌다.

그 과정에서 많이 손상되었다고.


여기에서 '유디트'라고 불리는 여성은 경외성서인 <유디트 書>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으로,

팔레스타인의 베투리아에 사는 과부였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Judith Beheading Holofernes)는 서양예술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며,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카라바지오, 렘브란트, 고야, 클림트 등 많은 화가들이 그렸다.


<유디트 書>의 내용을 간추리면 아시리아 네부카드네자르 대왕 때의 장군 홀로페르네스가 유대인 도시 베툴리아를 함락하기 직전.
물 공급이 막혀 항복할 수 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신앙심 깊고 부유한 과부 유디트가 도시를 구하기 위해 나선다.


아름답게 치장하고 거짓투항하여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환심을 산 뒤 만취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어 돌아온다는 대범한 계획을

하녀 아브라와 단 둘이서 성공시켜버린다. 고야의 <유디트>는 이 설화에서 유래했다.

 

16세기와 17세기에는 이 이야기가 화가들의 흥미를 끌었는지,

마드리드 왕궁에는 이 주제를 다룬 그림이 틴토레토를 비롯하여 여러 점 더 있다.
 

<말년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93 X 75cm 1826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고야는 알바 공작부인과의 기이한 인연에 이은 헤어짐과 청각장애를 얻으면서부터 외부인과의 접촉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집인 '귀머거리 집'에 틀어박혀 거의 나오지 않고 칩거하게 된다.


그 당시에 그린 그림은 캔버스 위에 그린 것이 아니라 집에 있던 하얀 벽 위에 그렸는데 검은색 바탕,

기괴할 정도로 일그러진 사람들의 형상과 얼굴, 우울한 주제의식 때문에 '검은 그림'이라고 불린다.


또한 병의 재발에 대한 불안감과 더불어 당시의 유럽 전역에서 일어나는 침략과 전쟁에서

인간의 광기를 지켜보며 인간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게 된다.


말년에 그린 그의 자화상에서 보이는 눈빛은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시대의 모습을 꿰뚫는 예리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고야의 눈빛이 잘 반영된 듯하다.


참조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44XXX6600025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89XX25600010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캔버스에 유채, 1800, 280×336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태피스트리 화가로 활동하던 고야는 초상화로 각광받으면서 왕실 화가로 등극하게 된다.
초상화는 오늘날의 인물 사진이 과감한 후 보정을 마다하지 않는 것처럼

모델을 실제 생김새보다 다소 미화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출세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현실 감각이 뛰어난 고야 역시 왕실 화가로서,
궁정 인물들의 초상을 가능한 한 세련되고 우아하게 포장하는 일에 서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부패와 타락의 길을 걷는 왕가에 스페인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품는 불만을

무조건 숨기고 있을 수 만은 없는 반골 기질도 분명히 있었다.


이 작품은 그가 오랫동안 모신 카를로스 4세 왕가의 집단 초상화이다.
얼핏 보면 잠시 틈을 내 모인 왕가의 일원들이 번쩍거리는 옷과 장신구로 치장한 채

자신들의 권위를 한껏 과시하고 있는 모양새이지만,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많은 부분에서 이 무능력한 왕가를 고야가 조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보통 정중앙에는 왕이 차지하고 있기 마련인데 그곳에 왕비가 서 있다는 사실은

무너진 가장의 위상을 가늠하게 한다.


이가 성하지 못했던 왕비의 합죽한 얼굴, 그 얼굴보다 더 두터운 거대한 팔뚝 등은

고야가 그녀를 위해 그 어떤 이상화도 시도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왕의 모습도 마치 술에 취한 듯 얼굴 가득 붉은 기운이 감돌아 어딘가 모르게 얼빠져 보인다.
도드라져 보이는 매부리코는 붓 끝만 조금 줄였어도 충분히 감출 수 있었겠지만 고야는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았다.


튀어나온 배는 왕의 게으름을 짐작하게 한다.

이 두 부부 이외의 인물들도 어린아이들을 제외하곤 죄다 멍해 보이거나 야릇해 보인다.


카를로스 4세는 왕비 마리아 루이사가 재상인 고도이와 놀아나는 것을 묵인했을 뿐 아니라,

그에게 모든 국사를 맡겨버린 채 사냥에만 몰두했다.


고도이와 왕비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하늘을 찌르는 동안 둘의 사랑은 훨훨 타올라

왕비가 낳은 두 아이가 고도이의 자식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두 아이는 왕비 좌우에 서 있다.

카를로스 4세는 수많은 실정을 저질렀고, 결국은 아들 페르난도 7세에 의해 폐위되는 치욕까지 맞보았다.
그림 왼쪽에서 두 번째가 바로 아버지를 배반한 페르난도 7세이다.


고야는 궁정화가로 있으면서 수많은 왕족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 중 특히 유명한 것이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이다.


이 작품은 흔히 벨라스케스의 걸작 〈시녀들〉과 비교되곤 하는데,

왕실을 배경으로 한 두 작품 모두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다만 벨라스케스에 비해 고야는 매우 희미하게 묘사돼 있다.

이 작품을 두고 존경하는 벨라스케스에 대한 오마주라고 평하기도 한다.


한편, 그림 속에 등장하는 사람의 수가 모두 열세 명이었는데, 서양에서 13을 불길한 숫자로 여기기 때문에

화가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모습을 추가했다고 하는 재미있는 속설도 전해진다.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기마 초상화> 1799, 캔버스에 유채, 338x282cm.


이 초상화는 카를로스 4세의 부인인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기마 초상화다.
카를로스 4세의 기마 초상화와 한 쌍을 이루는 작품인데,

전시실 안에서도 두 작품이 마주보게 전시되어 있다.


굳이 왕이 아니라 왕비의 초상화를 선택한 이유는,

여러 왕비를 그린 초상화 중에서 아마도 이런 초상화는 드물지 않을까 싶어서다.


카를로스 4세의 기마 초상화와 더불어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초상화에서는

벨라스케스의 영향이 눈에 띄게 드러난다.


말의 자세, 풍경 등이 벨라스케스가 그린 왕실 기마 초상화와 꽤 닮았다.
고야는 ‘나의 스승은 자연, 벨라스케스, 렘브란트다’라고 할 정도로

벨라스케스를 존경했으며 그의 그림을 연구했다.


마드리드에서 궁정화가가 된 이후에는 벨라스케스의 작품들을 판화로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백 년이 넘는 시대 차이가 나기도 하고,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스페인 왕은 

지난 시절처럼 화려한 옷을 입고 번쩍거리는 장식을 두른 초상화를 공식 초상화로 내놓을 수가 없었다.


이웃 나라에서는 왕이 단두대에 오르는 와중에(게다가 사형당한 프랑스 왕과 스페인의 왕은 친척이었다)
왕이 사치스러운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과 왕비는 벨라스케스 시대의 왕보다 훨씬 수수한 옷을 입고 있다.


마리아 루이사 왕비가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을 다시 보자.

옛날에 여자들은 말을 탈 때 다리를 한쪽으로 모으고 몸을 옆으로 돌려서 말을 탔다.


다리를 벌리고 말의 몸 한쪽에 한 발씩을 놓고 등자에 발을 걸친 자세는 남자들만의 자세였다.

아마도 여자들만의 말 타는 기술이 있었을 것이다.


다리를 한쪽으로 모아서 말을 타자면 등자를 이용할 수 없으니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 루이사 왕비는 남자처럼 다리를 벌리고 앉아 등자에 발을 걸친 채 말을 타고 있다.


게다가 등은 꼿꼿이 세우고, 한 손으로 고삐를 잡고 턱을 살짝 든 자신만만한 자세다.

왕비는 이런 사람이었다.


무능하고 특별한 성격 없는 카를로스 4세에 비해 왕비는 남편을 휘어잡고,

자기의 젊은 애인을 총리 자리에 앉히는 여자였다.


카를로스 4세는 좋게 말하자면 사람 좋게, 안 좋게 말하자면 조금 ‘맹하게’ 생겼다.

기세등등해 보이는 왕비와 기싸움에서 밀리게 생긴 것이다.


고야는 이런 식으로 왕비의 성품까지 초상화에 잘 녹여 냈고,

왕비는 이 초상화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오수나 공작 부부와 자녀들> 캔버스에 유화. 174 x 225 cm. 1787~1788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태피스트리 밑그림은 고야의 재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그의 진수는 초상화에서 잘 나타난다.


오수나 가문은 스페인 귀족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항력 있는 가문들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고야는 왕실 사람들의 멋진 모습이 아니라 약간 겁먹은 듯한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오수나 공작은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거물이지만,

고야가 보기에는 약한 식솔들을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무능한 아버지일 뿐이다.


오수나 부인은 뛰어난 여인으로, 아이가 넷이었던 첫번째 가족을 잃은 후,

두 번째 가정에서는 좋은 어머니가 되려고 애썼던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몸에서 여성적인 면은 전혀 보이지 않고,
꼿꼿하게 윗몸을 세운 모습에서는 도도함만이 느껴진다.


측은해 보이는 아이들은 착하게 행동하려고, 눈을 크게 뜨고 화가를 주시하고 있다.
여기서 자유롭게 놀고 있는 대상은 개뿐이고,

다른 이들은 모두 '오수나 가문의 사람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에 짓눌려 있다.


고야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아무런 주석도달지 않는다.

그는 그저 보여줄 뿐이다.

〈친촌 백작부인〉1800, 캔버스에 유채, 216x144cm. 프라도미술관


작품 속 젊은 귀부인은 친촌 백작부인(La condesa de Chinchón)이다.
남동생이 친촌 백작 작위를 받았으나 성직자의 길을 선택하면서 작위를 누나에게 넘겨주었다.


당시 왕인 카를로스 4세와는 사촌 간으로, 왕의 최측근인 마누엘 고도이와 결혼했다.
물론 이 결혼은 정략적인 결혼이었는데, 그래도 이 젊은 여인은 남편을 꽤 좋아했다고 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마누엘 고도이는 왕비의 애인이었고, 물론 그에게는 왕비 외의 다른 애인도 있었다.

고야가 이 여인을 그린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은 아닌데, 백작부인의 아버지이자 카를로스 3세의 동생인

인판테 돈 루이스(Infante Don Luis) 가족의 그룹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고,

3살 때의 백작부인을 단독 초상화로 그린 적도 있었다.


이 초상화를 그릴 때 스무 살이었던 백작부인은 임신 중이었고,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초상화 모델로 앉아 있을 때 남편인 마누엘 고도이가 언제 오는지 하도 기다리는 통에

약간만 인기척이 나도 뒤를 자꾸 돌아봤다고 한다.


이런 상태를 표현한 고야의 방식은, 화면 왼쪽 앞을 향해 앉아 있지만

고개는 약간 오른쪽 뒤로 돌리고 있는 백작부인의 자세다.


남편을 좋아하는 마음은 부인의 손에 있는 반지에서도 보인다.

반지에 작고 둥근 미니어처 초상화가 붙어 있는데, 남편 고도이의 초상화라고 한다.


고야는 모델의 아버지인 돈 루이스와도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을 테고, 어린 시절부터 알았던 아이가

자라서 결혼하고 아기까지 가진 것을 보고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고도이와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관계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

남편을 좋아하는 젊은 부인이 애처로워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야는 백작부인을 청순하고 연약하게 그렸다.

어쩌면 임신한 여인들 특유의 분위기일지도 모르겠다.


이 초상화에는 모델인 친촌 백작부인의 감정뿐만 아니라 화가인 고야의 감정도 투영되어 있다.
이것이 고야의 초상화가 가지는 특징이자 힘이다. 바로 대상의 내면까지 잘 표현한다는 점이다.


그림 표면으로 눈을 돌리면, 이 그림에 쓰인 색채는 단순하다.
배경의 어두운 색과 드레스의 크림색, 드레스 끝자락과 머리장식에 추가된

약간의 파란색 정도가 전부인데도 화폭은 매우 아름답게 빛난다.


드레스의 빳빳한 질감과 빛을 반사해서 빛나는 천의 느낌도 좋다.

고야가 얼마나 색을 잘 다루는 화가인지를 보여 주는 예다.


당시 아카데미풍의 신고전주의 화가들은 다양하지만 차가워 보이는 색으로 그렸던 것에 비해

고야는 밝게 빛나는 화폭을 만들어 냈다.


고야가 동시대의 화가들과 얼마나 다른 그림을 그렸는지는

프라도 미술관 0층에 전시된 신고전주의 작품들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이 작품을 미술관에서 직접 본다면 작품의 표면이 갈라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친촌 백작 가문의 후손들이 그림을 소유하고 있다가 2000년에 프라도 미술관에 소유권을 넘겼는데,
적절한 환경에서 보관되지 못했기 때문에 작품의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하다.
그럼에도 백작부인의 얼굴빛이라든가 자잘하게 수놓인 빛나는 드레스 등의 아름다운 색감은 여전하다.

<파라솔> 캔버스에 유채. 104cmx152. 1777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고야는 궁정화가였던 처남 바예우(Francisco Bayeu, 1734-1795)의 알선으로

1775년부터 마드리드의 산타바바라 태피스트리 공방에서 장식디자이너로 일했다.


이 일을 시작한 지 일 년여 만에 고야는 엘 파르도 궁으로 보낼 태피스트리의

밑그림을 그리는 일을 맡게 되었고, <파라솔>도 그때 그려진 것이다.


이 밑그림을 바탕으로 완성된 태피스트리는

엘 파르도 궁의 식당 벽에 걸렸다고 전해지는데 현재 유실되었다.


엘 파르도 궁은 카를로스 4세가 왕세자(아스투리아 공작) 시절에 거처로 사용했고

즉위한 후에는 왕비 마리아 루이자와 함께 겨울을 지내는 별궁으로 삼았다.

훗날 고야는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들을 신랄한 필치로 묘사한 인상적인 그룹초상화를 그렸다.


고야의 초기작에 속하는 <파라솔>은 전체적으로 화려한 색채와 경박한 느낌이 지배적이다.
예쁘장한 소녀가 풀밭에 앉아 있고 소년은 녹색 양산을 펼쳐 들어 따가운 햇살을 가려주고 있다.


마치 스크린처럼 옅게 채색된 풍경이 사랑스러운 두 인물을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만든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젊은 멋쟁이들로 여성은 마하(Maja), 남성은 마호(Majo)라고 불렸다.


마하, 마호는 집시 풍의 화려한 옷차림과 자유분방한 행동으로 당시 마드리드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고,

귀족들마저 이들의 유행을 따라 할 정도였다.


풍성한 노란 스커트와 몸에 꼭 맞는 하늘색 상의

그리고 흰 망토를 걸치고 풀밭에 앉아있는 마하는 인형처럼 예쁘장하다.


양산이 마하에게 작은 그늘을 드리워주고 있지만,

노란 스커트에 반사된 빛이 마하의 얼굴을 은은하게 밝혀준다.


입가에 요염한 미소를 띠고 관람자를 빤히 바라보는

마하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당돌한 매력을 뿜고 있다.

마하의 무릎 위에는 검은 털을 가진 작은 강아지가 웅크리고 있다.
맑고 산뜻한 햇살 아래 바람이 부는 지 나뭇가지들이 오른쪽으로 휘어 있고 나뭇잎은 바람에 나부낀다.

한가롭고 유쾌한 정경이다.


<파라솔>은 별 볼 일 없는 시골 출신의 무명화가가 마드리드에 입성해서

18세기 스페인 미술의 역사를 새롭게 쓴 대가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의 첫 단계를 보여준다.


아직 고야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필치가 나타나지 않고 다소 어색한 표현도 보이는데,
아마도 장식품의 도안으로서 주제나 형식 면에서 여러 가지 제약을 받았을 것이다.


고야가 이때 그린 밑그림들은 사냥, 소풍, 어린아이들의 놀이, 장터 등

시골의 풍경과 풍속을 다루고 있다.


당시 왕실의 취향이 신화적 주제나 역사화 일변도에서 벗어나

소박하고 대중적인 주제로 변화하고 있음도 엿볼 수 있다.

란시스코 데 고야 〈겨울-눈보라〉 캔버스에 유채. 275×293cm. 1786~1787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고야가 소시민들의 모습을 담은 것은 〈파라솔〉처럼 성 밖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왕실 여자들에게

스페인 사람들의 낙천적인 일상을 보여주기 위함도 있었지만,

신화나 종교적 주제를 다루는 ‘역사화’에 대한 왕실의 선호가 주춤하기 시작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18세기가 무르익으면서 프랑스를 위시한 서구 미술계는 딱딱하고 고루한 역사화보다는

귀족들의 향락적인 문화를 담는 아기자기하고 세속적인 로코코 미술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스페인 왕가 역시 프랑스 왕가 부르봉의 혈통으로 이어지면서 소위 ‘프랑스적인 것’에 대한 애정이 두드러졌고,

로코코 역시 그런 연유에서 자연스레 흡수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이 퇴폐적이기까지 한 귀족 놀음들에 대한 계몽주의의 비판이 거세지자

스페인 지식인들 역시 각성하기 시작했다. 


 〈겨울-눈보라>나  아래 그림 <부상당한 석공>은

가난하고 혹독한 삶을 겪어내고 있는 스페인 소시민들의 삶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 〈부상당한 석공〉 캔버스에 유채 / 268×110cm / 1786~1787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부상당한 석공〉은 원래 술 취한 사람을 동료들이 옮기는 내용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고야는 가톨릭의 엄격함이 몸에 베어 있던 스페인 왕실에서 술에 취해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들의

추태나 주사를 혐오한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는 이를 부상당한 모습으로 바꾸어 버렸다.


졸지에 이 작품은 소위 산업재해보험처럼, 작업 중에 부상당한 노동자들에게 국가가 지원하는 법령을

막 발표한 왕실의 업적을 선전하는 그림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기게 되었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 〈결혼〉 캔버스에 유채 / 267×293cm / 1791~1792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결혼〉은 소시민들의 생활상을 담은 네덜란드 장르화의 전통을 일견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장르화는 신화, 종교의 역사적 주제를 벗어난, 그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가감 없이 묘사한 그림을 일컫는다.

 
정중앙 검은 옷을 입고 화면 왼편을 바라보는 신부의 얼굴은 결혼에 대한 환상이나 설렘보다는

왠지 슬픔과 체념, 그리고 두려움이 더 가득해보인다.


그런 신부의 뒤를 쫓는 붉은색 옷차림의 남자는 여자들이 애정을 느끼기 힘든 추남으로 그려져 있다.
말하자면 이 그림은 돈에 의해 팔리다시피 하는 가난한 여자의 모습을 담은 슬픈 풍속사라 할 수 있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 〈꼭두각시〉 캔버스에 유채 / 267×160cm / 1791~1792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꼭두각시〉는 한편으로는 귀족 여인네들의 즐거운 놀이문화를 담은 로코코 풍의 유쾌한 그림으로도 볼 수 있지만,
돈 많은 여자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스스로를 조롱거리로 만들고 살아야 하는

광대의 슬픔을 인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포도수확> 1786년. 캔버스에 유채. 190 x 275 cm. 프라도 미술관


참조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44XXX6600020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52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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