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레도(Toledo)


톨레도는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서 70킬로미터(km) 거리에 있는 인구 6만 여 명의 작은 도시로,

마드리드가 수도가 되기 전 1천 여 년 동안 스페인의 중심지였다. 


도시는 로마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서고트 왕국, 이슬람 왕국, 레온 왕국,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로 번영을 누렸다. 


삼면이 타호 강으로 둘러싸인 바위산 위에 건설되었고,

‘라 만차의 기사 돈키호테’의 고향인 카스티야-라 만차 지방 톨레도 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덕분에 톨레도에는 로마시대 유물인 원형경기장부터

이슬람교, 유대교, 그리스도교 유산까지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사실상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며,

단위 면적당 문화유산이 가장 많은 도시 중에 하나로 꼽힌다. 


각종 종교 시설이나 박물관은 물론 일반 가정집까지 문화유산으로 가치를 지닌 것들이다. 
이 때문에 1561년 필리페 2세의 천도로 정치적 영향력이 상실되었어도

톨레도는 여전히 스페인의 정신적인 수도로 불리고 있다.


톨레도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무데하르 양식 건축물이다. 
무데하르는 이슬람 지배가 끝난 뒤에도 스페인에서 살았던 이슬람교도들을 일컫는 말이며,

무데하르 양식이란 스페인에서 발달한 이슬람과 서구 문화가 결합된 건축 양식이다.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볼 수 없는 스페인 특유의 양식이다.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 이전의 건축물로는 비브알마르돔 모스크, 라스토에르네리아스 모스크 등이 있으며,
그리스도교도가 지배한 이후에도 무데하르 양식은 계속되었다. 


 산티아고 데 아라발 성당, 산타 마리아 라 블랑카와 트란시토 시나고그(유대인 교회) 등도

무데하르 양식의 건축물이다.


16세기 종교화의 대가 엘 그레코는 톨레토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화가다.
그는 그리스령 크레타에서 태어났지만 40 여 년 간 톨레도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생을 마감했다.


때문에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라는 본명이 있지만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의 엘 그레코로 통칭된다.
엘 그레코의 흔적은 톨레도 곳곳에 남아 있다.

그의 집은 박물관이 되었고 산타 크루즈 미술관, 톨레도 대성당 등에도 그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톨레도는 세르반테스 언덕을 타호강이 둘러싸고 있어 로마 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발전해왔고,

스페인 역사에서 오랜 동안 수도 내지는 중심지 역할을 했던 도시다.


오랜 역사를 거치며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유적이 공존하며 스페인 문화를 잘 대변하는 곳이어서

도시 전역이 국립기념지로 선포되었다.


로마시대의 원형극장, 중세 가톨릭 성당, 이슬람 왕궁 등

여러 문화의 유적이 공존하는 여러모로 역사가 깊은 도시이다.


고딕 양식 대성당들 가운데 가장 스페인적이라고 평가받는 이 도시의 대성당에는

엘 그레코, 고야, 반 다이크 등 화가들의 그림들이 소장된 미술관도 있다.

1986년 역사성과 문화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되었다.


톨레도(Toledo) 전경

톨레도는 세르반테스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1547~1616)의 소설 돈키호테의 배경이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사랑받는 광기, 돈키호테(Don Quixote)


세르반테스가 창조한 돈키호테는 400년이 흐른 지금도 세상 사람들이 친숙하게 화제에 올리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 오랜 시간 동안 여러 가지로 변형되고 재창조되면서 늘 사람들 곁에 머물러왔다.


돈키호테는 스페인 작가 세르반테스가 쓴 소설

<재기 발랄한 시골 귀족 라 만차의 돈키호테(El Ingenioso Hidalgo Don Quijote de la Mancha)>의 주인공이다.


소설이 발표된 이후 돈키호테는 과대망상에 빠져 어이없는 소동을 일삼는 충동적 몽상가로 회자돼왔다.
다른 한편으로는 꿈과 이상을 위해 행동을 아끼지 않는 불굴의 인간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면서 우스꽝스럽긴 하나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한번쯤은 그처럼 살아보고 싶게 만드는 매력을 가진 인물이 됐다.


돈키호테의 장엄한 이야기는 라 만차라는 스페인의 어느 시골마을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마을에 사는 알론소 키하노는 쉰 가까운 나이에도 군살 없이 골격이 튼튼하고 얼굴이 삐쩍 마른 시골 귀족이었다.


마흔이 넘은 가정부와 스무 살이 채 안된 조카딸과 함께 농사일을 관리하며 살아가던 그는 언제부터인가 기사소설에 탐닉하게 된다.

당대 유행하던 기사소설에 너무 빠져든 그는 좋아하던 사냥도 그만두고, 책을 사느라 경작지까지 모두 팔아치운다.


며칠이고 잠도 자지 않고 밤을 새워 책을 읽던 그는 소설 속 이야기들을 모두 현실이라고 믿기 시작한다.
결국 ‘머릿속 골수가 다 말라’ 미쳐버린 그는 스스로 기사가 되어 세상을 떠돌아다니기로 마음먹는다.


증조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낡은 칼과 창, 그리고 얼굴을 가리는 아래 덮개가 떨어져 나간 투구를 어설프게 손질한다.
그리고 당당한 기사로서 ‘돈키호테 데 라 만차(라 만차의 돈키호테)’라는 이름을 스스로에게 붙인다.


또 머리는 부스럼투성이인데다 볼품없이 삐쩍 마른 자신의 말에도 ‘로시난테(Rosinante)’라는 근사한 이름을 붙여준다.

돈키호테 못지않게 흥미로운 인물은 같은 마을 농부인 산초 판사(Sancho Panza).
어리석어 보이면서도 입담 좋고 착한 그는 돈키호테의 충직한 하인이 된다.


산초 판사는 섬 하나를 정복한 후 그 섬의 영주로 앉혀주겠다는 돈키호테의 약속에 솔깃해져 처자식을 남겨두고

험난한 모험의 길에 함께 나선다.


돈키호테는 도탄에 빠진 세상을 구하고 부정과 비리를 바로잡으며

가난하고 천대받는 자들을 도와주겠다고 다짐하며 긴 여정을 시작한다.


비록 망상에서 비롯된 다짐이었지만 실제로 그는 약하고 상처받은 자에게는

부드럽고 겸손한 태도를 보이며 악당으로 ‘보이는’ 상대를 마주하면 불굴의 용기를 발휘한다.


돈키호테가 벌인 우스꽝스러운 소동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에피소드는 풍차와 벌인 싸움이다.
평원을 지나던 중 멀리 풍차 30~40개가 나타나자 풍차들을 거인들로 착각하고 로시난테에 박차를 가하며 달려든다.

산초 판사가 그건 풍차일 뿐이라며 만류하지만 어느새 세차게 돌아가던 풍차 날개에 부딪혀 로시난테와 함께 나둥그러진다.


기행은 멈추지 않는다.

신부가 인도하는 장례 행렬을, 억울하게 죽은 자의 시신을 탈취한 악당의 무리로 여겨,

신부에게 시신을 내놓으라며 생떼를 쓴다.


초원의 양떼를 적군의 행렬로 착각해 양들을 공격하다 목동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다.
비를 피하기 위해 머리에 쓴 어느 이발사의 면도용 대야를 빼앗고는 그게 진귀한 황금투구라며

자신의 머리에 쓰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기도 한다.


‘사악한 무리’를 무찌르기 위한 공격에서 어쩌다 재수 좋게 ‘승리’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두들겨 맞는 등 수난을 당하기 일쑤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일으키는 돈키호테의 소동으로 산초 판사는 물론 로시난테,

그리고 산초의 당나귀도 함께 고초를 입는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온몸 성한 곳 없이 다치더라도 모험을 포기하지 않는

강인한 돈키호테지만 마음 한편에는 따뜻한 연민도 스며 있다.


한번은 양떼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구실로 여러 달 밀린 품삯을 주지 않고

어린 하인을 학대하는 농부를 크게 꾸짖으며 매질을 멈추게 하고 밀린 품삯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연인으로부터 버림받은 어느 사내의 슬픈 사연을 들을 때는 자신의 일처럼 아파하며 위로를 보내는 모습도 보인다.

돈키호테의 기이한 모험은 서서히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다.


많은 이들은 그에게 조롱을 보낸다.

하지만 세상과 인간에 대한 깊은 지혜와 이해심이 그의 광기 이면에 숨어 있음을 인정하는 이들도 생겨난다.


흥미 반 장난 반으로 돈키호테를 자신들의 저택에 정중히 초대해

돈키호테의 망상에 맞장구치며 함께 생활한 어느 공작 부부도 있었다.


이들은 돈키호테가 산초에게 섬의 영주를 시켜주겠다고 약속한 사실을 알고는

실제로 산초에게 바라따리아라는 섬을 다스리도록 해준다.
섬으로 떠나기 전 산초에게 건넨 충고에서 돈키호테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행동으로 벌을 주어야 될 사람을 말로 학대하지는 말게.
그 불행한 자에게는 형벌의 고통만으로도 충분한데, 다른 나쁜 말까지 덧붙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자네의 관할 아래서 죄를 지은 사람은 타락한 우리 인간 본성의 양태를 벗어나지 못한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나."


라 만차 마을 신부는 돈키호테를 이렇게 평가한다.
“이 착한 양반이 순진한 엉터리 소리를 해서 미친 것 같아 보이지만, 다른 일을 말하는 걸 보면 아주 기막히게 논리정연하고,
무엇에든 온건하고 밝은 지혜를 가진 것 같거든요...”


돈키호테와 같은 고향 사람인 산손 카르라스코라는 학사는 신부와 함께 돈키호테가 제정신을 되찾아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도와주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그런 그에게 어떤 지체 높은 부자가 만류한다.

“돈키호테가 그의 허튼 짓으로 우리 모두를 재미있게 한 그 즐거움에 비하면

그가 정신이 말짱해져서 얻는 이득은 그에 못 미칠 거라는 것을 모르세요?...”


결국 신부, 이발사, 학사 등 고향 마을 사람들은 속임수를 써서 돈키호테와 산초를 마을로 데려온다.
고향에 돌아온 지 얼마쯤 지나 돈키호테는 제정신을 되찾고 알론소 키하노 영감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며칠 후 돈키호테는 숨을 거둔다. 제정신을 되찾자 곧 세상을 떠난 것이다.
꿈꾸지 않고 이상을 향해 돌진하지 않는 돈키호테는 더 이상 돈키호테가 아니며, 그런 그에게 삶이란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죽은’ 후 400년 동안 돈키호테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되살아났다.

톨레도 구 시가지 전경


톨레도 구시가의 구불구불한 골목길도 이슬람 문화의 흔적이다. 
도심의 미로처럼 얽힌 좁은 길은 이슬람 도시의 특징으로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바이신 지구에서도 볼 수 있다. 


이슬람 점령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골목길 곳곳에는 중세의 향기가 가득하다.

구시가 중심에 위치한 톨레도 대성당은 순수한 스페인 고딕양식의 건축물이다. 


길이 120미터(m), 폭 60미터의 위풍당당함에 세련된 건축과 조각,

엘그레코, 발라스케스 등의 예술 작품들 때문에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중에 하나다.


로마 시대에 건축되어 서고트인, 이슬람교도, 기독교도에 의해서 여러 번 재건축 된 알카사르도 톨레도의 빼어난 건축물이다.
스페인 내전 중에 폐허가 되다시피 한 건축물을 다시 복원한 것으로 무데하르 양식에 고딕 양식이 어우러져 있다.

언덕 위에 알카사르(Alcazar) 건물이 보인다.


산마르틴 다리(San Martin Bridge)에서


성밖 타호(tajo)강 풍경


타호(tajo)강

타호(tajo) 강이 반원을 그리며 도시전체를 휘감아 흐르는 중세도시로서, 언덕에서 바라 본 경치 또한 아름답다.


타호(tajo)강


산마르틴 다리(San Martin Bridge)


타호강(江)에 놓인 고딕 양식의 다리이다.

이전에 있던 다리는 1023년의 홍수로 손상되었고 14세기 말에 페드로 테노리오(Pedro Tenorio) 주교가 보수하였다.


산마르틴 교구와 가깝다고 하여 산마르틴 다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5개의 아치형 구조로 이루어졌으며 중앙에 있는 가장 큰 아치는 길이가 40m이다.

양쪽 끝에는 방어를 목적으로 한 탑이 있는데 하나는 13세기에, 또 다른 것은 16세기에 세워졌다.


오랜 시간 톨레도를 바깥 세상과 연결하고 톨레도를 지켜온 다리로

오늘날에는 중세 도시의 자취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한다.
타호강에는 알칸타라 다리(Puente de Alcantara)도 놓여 있다.

산마르틴 다리(San Martin Bridge)


산마르틴 다리(San Martin Bridge)에서


산마르틴 다리(San Martin Bridge)에서 가이드와 함께


알칸타라 다리(Alcantara Bridge)


타호강을 건너 톨레도로 들어가는 다리이며 중세의 산세르반도성(城) 기슭에 위치해 있다.
로마제국 오현제(五賢帝) 중 두 번째 황제인 트라야누스 치세인 104년에서 106년 사이에 건축된 뒤 파괴되었다가
이슬람 지배 시대에 다시 세워졌으나 1257년 교각과 받침대만 남고 모두 떠내려갔다.


이후 레온-카스티야왕국의 왕인 알폰소 10세(재위 1252∼1284) 때 재건하였고 15~16세기에 복원되었다.

다리의 양끝에는 방어를 목적으로 한 탑이 있었으나 현재는 시내와 가까운 쪽에만 남아 있고

다른 하나는 1721년에 다리에 들어가는 입구로 바뀌었다.


다리 석재로는 로마시대, 비사고틱(Visagothic) 시대, 아랍 시대의 돌이 사용되었으며

다리 서쪽 끝의 거대한 탑은 무데하르 양식으로 되어 있다.


알칸타라는 아랍어(語)로 '다리'라는 뜻으로 톨레도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오랜 시간 톨레도를 바깥 세상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타호강에는 산마르틴 다리(Puente de San Martin)도 놓여 있다.


알칸타라 다리를 건너면 다리끝 아래 타호강 강변에 La Cubana (애저 요리 전문점 34-925-220088) 레스토랑이 있다.


우리 일행은 애저 요리로 유명한 라쿰바나 레스토랑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이 레스토랑은 창가에서 바라다보이는 타호강과 알칸타라 다리 또한 일품이다.



애저 요리


애저요리는 스페인의 전통요리 중 하나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고 배내에 있거나 막 태어나 사료를 먹기 전까지의 새끼 돼지.
우리나라에서 새끼 돼지를 이용하는 애저 요리는 조선 시대 중엽에 시작됐다.


생후 1개월 남짓한 새끼 돼지에 마늘과 생강 등을 넣고 푹 삶아 초장에 찍어먹는 요리이다.

전라북도 진안의 토반(土班)들이 즐겨 먹은 보양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진안에서는 생후 1개월 남짓한 새끼 돼지를 찬물에 1~2시간 담가서 핏물을 제거한다.
돼지가 잠길 정도로 물을 부어 전피·인삼·마늘·생강·청주를 넣어 2시간 정도 삶는다.


다 삶아지면 밤·은행·대추·양파·대파를 넣어 한 번 더 끓여 양념한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데,
삼베 보로 싸서 편으로 만들어 먹기도 하며 탕으로 끓이기도 한다.

애저 요리


스페인에서는 도살장에서 태어난 지 20일에서 21일 된 새끼 돼지를 구입하여 레스토랑으로 전달되는데
이미 도살장에서 배를 갈라 창자 등의 내장을 모두 꺼내 보내진다.


커다란 타원형의 질그릇에 새끼 돼지는 가느다란 나무 판을 대고 올려지는데

그 아래엔 사분의 일의 물이 고여 있어야 한다.


배를 뒤집어서 올린 후 소금을 뿌리고 장작 오븐에 넣어진다.

180도의 온도로 1시간 30분 살이 부드럽게 익혀지도록 한다.


물을 넣는 이유는 수분으로 살이 퍽퍽해지는 것을 미리 방지하는데 목적이 있다.

오븐이 가장 중요한데 전기 오븐으로는 이러한 맛을 내기 어렵다고 한다.


장작 오븐은 지붕을 둥그런 것을 가장 고급 재질로 사용하는데

이러한 오븐에 따라 맛이 승부를 낸다고 한다.

둥그런 지붕안에서 열이 회전을 하면서 맛이 좋게 익혀진다.


하얀상태에서 익혀지면 다시 꺼내 뒤집는데 (배가 밑으로)

이번에는 돼지 기름으로 만든 버터를 껍질에 칠을 하고200도로 온도를 조절한 후 45분을 더 익힌다.

금색으로 껍질이 서서히 변해갈때까지 익힌다.

성벽
점심을 먹고 산마르틴 다리를 건너 성 안으로 들어간다.

성벽 출입문


톨레도 대성당 앞 골목길



스페인 미궁의 고도, 톨레도



참고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56691&ref=y&cid=40942&categoryId=40240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267827&cid=51089&categoryId=51089
https://structurae.net/structures/san-martin-bridge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90178&cid=51949&categoryId=55209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79724&cid=40942&categoryId=40283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83383&cid=40942&categoryId=32348
https://cafe.naver.com/firenze/5831137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iamgomna&logNo=221358712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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