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좌에 앉은 '전능하신 지배자 그리스도(Ο Χριστός Παντοκράτωρ)'에게 엎드려 경배하는 사람은 레온 6세 현제(866~912, 재위:886~912) 또는 콘스탄티노스 7세 포르피로옌니토스 황제(905~959, 재위:913~959)로 추정된다.
그리스도가 든 책에 적힌 문구는 요한 복음서 20장 19절 "평화가 너희와 함께"와 8장 12절 "나는 세상의 빛이다"이다. 좌우의 원형 공간에는 각각 성모 마리아와 대천사 가브리엘을 나타냈다.
의장과 모자이크
원래의 하기아 소피아 내부는 유스티니아누스의 닥달로 인해 빠르게 완성해야 했기 때문에 비교적 장식이 간단한 편이었다. 기둥 하단 등도 조각 장식이 없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비교적 이른 기독교 시절이라 성인들의 인물묘사인 이콘의 법칙이 확립되지 않았던 시기였다는 점도 있다. 아무튼 성당 내부는 금빛 모자이크를 쓰되 간단한 도안들로만 장식되어졌다.
그러나 이후 수백년 동안 성당은 다채로운 마감재를 사용해
성모와 예수, 성인, 황제, 황후 및 각종 도안으로 구성된 모자이크로 장식하게 되었다.
하기아 소피아가 성당에서 모스크로 바뀌면서 비잔티움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던 모자이크 성화들은 회칠로 덮였지만 20세기부터 시작된 복원작업으로 몇몇 모자이크가 다시 세상에 드러났다.
하지만 위에 나온대로 회칠하고 그려진 이슬람 문양 제거에 반발도 커서
이젠 회칠 제거 및 모자이크 복원은 80년 넘게 중단된 상태이다.
남서쪽 입구 복도에서 비잔틴제국의 자존심인 성 소피아 성당 모자이크를 본다.
예수에게 콘스탄티노플 성을 바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성 소피아 성당을 바치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하기아 소피아를 성모자에게 바치고 있는 모습
남서쪽 입구 복도 모자이크
우측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좌측에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하기아 소피아를 성모자에게 바치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옥좌에 앉은 성모는 무릎에 앉힌 아기 예수를 감싸고 있는데,
아기 예수는 왼손에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
성모자의 좌우에 있는 ΜΡ와 ΘΥ는 Μήτηρ(어머니)와 Θεού(하느님의)의 모노그램으로
'하느님의 어머니', 곧 성모 마리아를 의미한다.
2006. 3. 13 관람 기념 인증샷
위층으로 올라가는 길
후진(apse) 모자이크
후진의 반 돔 위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쎄오토코스(Θεοτόκος, 하느님의 어머니) 모자이크라고도 한다. 6세기에 제작되었다가 8세기의 성상 파괴 때 훼손되었던 것을 9세기 경에 복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옥좌에 앉은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서 받침대 위에 발을 올려놓았는데
대좌와 옥좌 모두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알렉산드로스 3세 황제 모자이크
2층 천장 어두운 구석에 위치한 이 모자이크는 알렉산드로스 3세 황제(866~913, 재위:912~913)가 왼손에 보주를, 오른손에는 두루마리를 든 모습을 표현했다.
조이 여제와 그 남편이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는 모습 모자이크
조이 여제와 그 남편이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는 모습 모자이크
조이 여제(978 경~1050, 재위:1028~1050)와 그 남편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호스(1000경~1055, 재위:1042~1055)가
파란색 옷을 입고 왼손에 성경을 든 '전능하신 지배자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는 모습을 형상화했으며 11세기에 제작되었다.
그리스도의 좌우에 있는 IC와 XC는 Ιησούς Χριστός(예수 그리스도)의 모노그램이다.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호스 황제가 들고 있는 돈자루는 교회에 대한 황실의 기부를 상징한다.
여담이지만 조이 여제는 결혼을 3번 했는데 남편이 바뀔 때마다
이 모자이크의 남편 얼굴과 문구도 바뀌었다고 한다.
콤니노스 황제와 황후와 황태자 모자이크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 황제(1087~1143, 재위:1118~1143)와 이리니 황후(1088~1134), 그리고 황태자 알렉시오스 콤니노스(1106~1142, 측면에 그려져 있어서 정면에서는 안보인다)가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짙은 청색 옷차림의 성모로부터 축복을 받는 모습을 형상화했으며 1122년에 제작되었다.
조이 여제의 모자이크에서와 마찬가지로,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 황제의 손에 들린 돈자루 역시
교회에 대한 황실의 기부를 의미한다.
콤니노스 황제와 황후 황태자 모자이크
데이시스(Deësis) 모자이크
'데이시스'란 간청, 애원을 뜻하는 단어로, 심판자 그리스도가 죄인의 벌을 가볍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을 거느린 모습을 형상화했으며 1261년에 제작되었다.
하기아 소피아 내부의 다른 모자이크보다 훼손 상태가 심각해 성모는 얼굴과 왼쪽 어깨 부분만 남아 있고 그리스도와 세례자 요한은 그보다는 양호한 편이라 상반신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다.
데이시스(Deësis) 모자이크
2006. 3.13 관람 인증샷
북쪽 박공벽(tympanon) 모자이크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역임한 성 요안니스 흐리소스토모스(왼쪽)와 성 이냐시오(오른쪽)가
십자가로 장식된 하얀색 성의를 입은 모습과, 이들을 포함한 여러 성인들을 형상화했다.
이 모자이크들에는 유독 회칠이 가해지지 않았는데,
그리스나 기독교권은 높은 곳에 못 올라서 회칠을 칠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터키에선 그럼 높이로는 무시 못할 블루 모스크라든지 그런 건 누가 지었냐며 반론하고 그냥 놔둔 거라고 주장한다.
결국 정확한 이유는 불명. 다만 트라브존의 아야 소피아도 그렇고,
오스만 시대에 모스크로 개조된 많은 옛 동로마 건축물에서 이런 현상이 발견된다. 아마도 자잘한 성화 한 두개 정도는 남겨두어 이 건물이 원래 성당이었음을 밝히는 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참고로 트라브존의 아야 소피아 같은 경우, 같은 건물을 둘로 나눠 한쪽은 정교회 성당으로,
한쪽은 모스크로 사이좋게 나누어 썼었다.
옴팔리온(Omphalion)
내부 바닥에는 세계의 중심을 상징하는 옴팔리온이 있다.
옴팔리온은 그리스어로 배꼽이라는 뜻이다.
원형 대리석들이 바닥에 끼워져 있는 형태이며,
비잔티움 제국의 역대 황제가 이 자리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하기아 소피아를 세운 이래 니케아 제국 시대를 제외하면
이곳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지 못한 처음이자 마지막 황제는 콘스탄티노스 11세이다.
서예 원판. 술탄 압뒬메지트 1세 때 추가된 원판이다.
직경은 7.5m이고 8개의 원판이 있는데 각각 알라, 무함마드, 4명의 정통 칼리파와 무함마드의 손자 2명(하산과 후세인)이다. 현재 이 원판은 이슬람에서 가장 큰 서예 원판이다.
성 소피아는 기독교를 처음으로 공인한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재위 기간 306~337년)시대부터
건립되기 시작하였다고 하지만, 첫 번째 교회가 완공된 것은 360년, 즉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 때였다.
이 첫 번째 건물은 기본적으로 장방형 바실리카(basilica) 형태에 목재 지붕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실리카란 원래 로마의 공공건물을 이르는 말이지만, 기독교 공인 이후 교회를 짓기 시작했을 때 달리 본받을 만한 건축 양식이 없었으므로 초기 교회는 바실리카의 형태로 지어졌다. 이후 장방형 평면을 갖는 교회 건물을 바실리카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성 소피아 사원 입면도
첫 번째 교회는 404년 대지진으로 극히 일부만 남고 거의 파괴되었다. 두 번째 교회는 오랜 기간에 걸친 재건과 보수 끝에 415년 완공되었다.
그 구조는 첫 번째 교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두 번째 교회는 532년의 폭동(Nika Riot) 때 완전히 불에 타고 파괴되었다.
세 번째 교회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Justinianus)의 재위 기간 중인 532년부터 537년까지
약 5년에 걸쳐 두 번째의 교회 건물과 매우 다른 새로운 형태로 지어졌다.
그동안 여러 차례의 지진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파괴되어 보수를 거쳤고 19세기에 또 한번 크게 보수를 거쳤지만 현재의 건물은 537년에 완성된 건물의 기본적인 구조를 보인다. 즉 바실리카 형과 돔(dome)을 가진 원형 로마 건축의 형태가 배합된 독특한 새로운 구조가 바로 그것이다.
돔을 강화하기 위한 외부 벽 버팀
이 교회의 가장 신기한 특징은 내부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이 가운데에는 지름이 약 32m 정도인 돔이 있고 그 돔은 지상 57m 되는 높이에 올라앉아 있는 것이다.
이처럼 큰 돔을 이렇게 높이 올리기 위하여 건축가들(Anthemius of Tralles와 the Elder Isidorus of Miletus)은
새로운 공법을 고안하였다.
그것이 곧 펜덴티브(pendentive)라고 하는 구조로
돔의 바로 아래 네 군데에 보이는 구면(球面)의 일부처럼 굽은 삼각형 벽이다. 현재 내부 수리 공사로 복잡한 이 사진에서는 하나는 완전히 보이고 또 하나는 반쯤 보인다.
이 펜덴티브는 평면도의 가운데 부분에서 보이는 도형(⌼)처럼 돔의 원형을 안에 넣을 수 있는 가상의 사각형에서 원형을 제한 네 모서리의 삼각형을 입체적으로 상상하면 된다.
돔 바로 아래의 동·서 양쪽에는 각각 이 돔과 같은 지름의 반(半) 돔이 있고
이들 각각의 양쪽에는 또 작은 반쪽 돔 두 개씩이 붙어 있다.
즉 돔의 무게를 네 개의 아치(반 돔 두 개, 그리고 남·북쪽의 아치형 벽면)가 받치고, 또 이 네 개의 펜덴티브는 무게를 그 바로 아래 기둥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그 밖에도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돔에 쓰인 벽돌의 무게는
그 이전까지 만들어진 벽돌 무게의 12분의 1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창문으로 밑 부분을 빙 돌린 그 커다란 돔이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인상을 창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전통적인 비잔틴 양식의 주두(柱頭)
비잔틴 건축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겉모습보다 내부 장식에 치중하는 것이라면
이 성 소피아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겉에서 보면 높은 돔의 무게를 받쳐주기 위해 세운 버팀벽(buttress)들이 여기저기 있어 하나도 아름답게 보이지 않으나 내부에는 아름답게 부조된 비잔틴 특유의 주두(柱頭)를 가진 대리석 기둥, 모자이크(mosaic)로 장식된 벽면들, 기타 찬란한 금빛의 여러 가지 장식품들로 화려했던 원래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대성당의 변화 양상 조감도 오른쪽 테오도시우스 대제 때 모습. 가운데 537년 때 모습. 왼쪽 끝 557년 때의 모습.
동로마 제국 건축의 최고 걸작이자 정교회의 총본산이었던 곳.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한 후 메흐메트 2세의 명으로 모스크로 바뀌었다.
터키 공화국 수립 후 아타튀르크의 지시로 박물관으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5년 이스탄불 역사지구의 일부로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명칭인 아야 소피아(Αγία Σοφία)는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으로, 동방 교회에서는 말씀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한국에서는 하기아 소피아, 아야 소피아, 성 소피아 사원, 성 소피아 성당, 성 소피아 대성당 등으로 불린다. 터키에서 터키 리라가 굉장히 인플레이션이 심했을 때에는 미국 달러로 입장료를 받은 적도 있다.
하기아 소피아는 로마 제국의 기술력이 만들어낸 최고의 건축물 중 하나일 뿐더러,
당시 세워진 그 어떠한 건축물보다도 광대한 실내 공간을 가진 건물이었다. 이 성당은 16세기에 스페인 세비야의 대성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세계 최대의 성당이기도 했다.
돔의 직경만 하더라도 31.87m로, 로마의 건축물인 판테온 다음 가는 크기였으며 수백 년 뒤의 르네상스 시대에 세워진 피렌체의 두오모 이전까지 세계 최대의 석조 돔이기도 했다. 물론 이 건축물이 르네상스 건축물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대성당 입면도
초기의 대성당
330년 5월 11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한 후 30년이 지난
360년 2월 15일 대제의 아들인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가 첫 번째 하기아 소피아를 건설했다.
당시에는 '위대한 교회(Μεγάλη Ἐκκλησία, 메갈리 에클리시아)'라고 불렸으며 건축은 목조 지붕의 바실리카였던 것으로 추정되나 창건한지 40년도 지나지 않은 404년 6월 20일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아내 에브도시아 황후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Ο Άγιος Ιωάννης ο Χρυσόστομος)를 박해하여 추방할 때
수도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소실된 대성당은 11년 뒤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 치세 때인 415년 10월 10일에 재건되었으나 120여년 뒤인 532년 1월 13일경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휩쓴 니카의 반란 때 일어난 대화재로 잿더미가 되었다.
첫 번째 하기아 소피아와는 달리 두 번째 하기아 소피아의 흔적은
현존하는 하기아 소피아의 일부 원기둥 등에 약간 남아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재건
대성당이 전소된지 열흘 후인 532년 2월 23일,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하기아 소피아의 세 번째 재건을 결정하면서 이전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바라며 물리학자인 밀레투스의 이시도로스와
수학자인 트랄레스의 안시미오스에게 설계를 맡겼다.
유스티아누스는 그의 정복 사업이 그러하였듯이 이 공사에도 엄청나게 빠듯한 기한을 주고 닥달했다. 그리스인인 두 사람은 전문적인 건축가가 아니었지만 1만명 이상의 인력이 동원되어 532년부터 537년까지 채 6년도 걸리지 않은 공사기간을 통해 당시까지 사상 유례가 없는 광대한 규모의 대성당을 완성하는데 성공했다.
대성당의 건설을 위해 제국 전역에서 각종 자재들이 공수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던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이 원기둥들을 징발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마침내 537년 12월 27일,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참석한 가운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메나스가 집전한 하기아 소피아의 헌당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대성당의 웅장함에 감동한 황제는 하기아 소피아가 솔로몬이 지은 성전을 능가했다고 생각해 "솔로몬이여, 내 그대를 이겼노라!"라고 외쳤다는 일화가 있다.
완공 이후 하기아 소피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주교좌가 위치한 정교회의 총본산으로 자리매김했으며, 비잔티움 제국 역대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을 비롯한 중요 정치적·종교적 의례가 거행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또한 오랜 세월에 걸쳐 수집된 다양한 성유물들이 봉안된 성소 중 하나이기도 했지만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십자군에게 털렸다.
동로마 건축의 전성기의 정수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크고 웅장하며 또한 대단히 빠르게 완공한 역사적 건물이다. 하지만 기존 건축물을 뛰어넘는 규모와 공사기간을 맞추기 위한 무리한 공사와 실패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건물이기도 하다.
지진으로 인한 피해
헌당식 이후 20년이 지나기도 전인 553년 8월과 557년 12월 14일 두 차례에 걸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강타한 지진으로 하기아 소피아의 상징인 중앙돔에 금이 갔고, 결국 558년 5월 7일에 발생한 지진을 견디지 못해 중앙돔이 무너졌다.
붕괴 직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밀레투스의 이시도로스의 조카인 이시도로스에게 즉각적인 복구를 명령했으며, 이에 따라 젊은 이시도로스는 중앙돔을 원래의 위치보다 6.25m 가량 낮추고 구조를 보강하여 건축했다.
그로부터 약 3백년이 흐른 859년에 발생한 화재와 869년 1월 8일에 발생한 지진으로
대성당의 버트레스(half dome)가 파괴되었다가 바실리오스 1세 황제에 의해 수리되었다.
120년 뒤인 989년 10월 25일의 대지진으로 서쪽 돔의 아치가 붕괴되자 바실리오스 2세 불가록토노스 황제는 아르메니아인 건축가 티리다티스에게 수리를 명령해 6년간의 공사 끝에 994년 5월 13일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약 350년이 지난 1344년 10월에 발생한 지진으로 중앙돔에 다시 금이 가더니
2년 후인 1346년 5월 19일에 대성당 곳곳이 또 무너졌다. 이때의 피해는 8년 동안 공사에 들어가서 1354년에 끝났다.
성상 파괴와 십자군의 약탈
730년, 레오 3세 황제(Λέων Γ΄, 685~741, 재위 : 717~741)가 모세의 십계명 중 우상숭배 금지를 내세워
성상을 파괴할 것을 내용으로 한 칙령을 공포하면서 제국 전역이 헬게이트로 빠져들었다.
성상파괴론자와 성상옹호론자가 너 죽고 나 살자를 외치며 갑론을박 하는 사이, 비잔티움 제국의 대표적인 성당인 하기아 소피아를 장식하던 수많은 조각상과 모자이크 예술품들이 훼손되어 철거되었다.
성상 파괴의 광풍은 아테네의 이리니 여제(Ειρήνη η Αθηναία, 752경~803, 재위 : 797~802)가 제2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면서 일단락되었고, 하기아 소피아에는 다시금 성상과 성화상들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1204년 4월 9일, 공격하라는 이슬람은 공격하지 않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해 점령한 십자군은 도시를 마구잡이로 약탈하고 파괴하는 반달리즘을 자행해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당대의 재부가 모여 부유하기로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때의 약탈로 전성기의 화려함이 괴멸되었다.
도시 곳곳에 있던 수많은 보물들이 십자군들에게 털렸으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모후 성 헬레나 이래로 비잔티움 제국이 열성적으로 수집해 하기아 소피아를 비롯한 여러 성당에서 소중하게 모시던 각종 성유물 또한 십자군들의 손에 의해 강탈되어 서유럽으로 빼돌려졌다.
이 덕분에 비잔티움 제국 동방정교회 신도들은
"십자가 든 악마에 견주면 초승달 이교도가 그래도 사람이다."이라면서 두고두고 이를 갈았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십자군들은 하기아 소피아를 가톨릭 성당으로 바꾸고 정복 직후 사망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의 시신을 매장하여 무덤을 만드는 폭거를 저지르기에 이른다.
다만 단돌로의 무덤은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후
모스크로 개조하면서 파괴되어 사라졌으나, 그 자리는 아직도 남아있다.
2층 오른편에 가보면 Henricus Dandolus라고 라틴어로 쓰여진 돌판을 볼 수 있는데
거기가 무덤 자리로 오스만 제국 시절에도 이미 그 위치가 알려져 있었다.
다만 아무래도 죽은 사람 무덤이라 그런지 터키인들도 건드리긴 영 껄끄러웠는 듯하며 19세기 이탈리아에서 무덤이 있던 자리에 돌판을 세웠다.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탈환된 후에야 황폐해진 하기아 소피아도 정교회 성당으로 환원되었으며 1317년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 황제가 대성당 북쪽과 동쪽에 새로운 버트레스를 증축했다.
입면도 절충적인 원개 바실리카식 성당, 돔을 직접적으로 지탱하는 기둥을 볼수 없다. 허공에 떠있는 듯하다.
예언, 최후의 순간, 전설
로마 제국에서는 언젠가 제국이 멸망할 것이라는 숙명론적 예언이 오랫동안 전해졌다.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목표로 1453년에 병력을 동원하자 사람들은 "로마 제국은 창건자의 이름과 같은 황제 때 멸망한다"는 예언을 떠올리고는 로마 제국 최초의 기독교도 황제이자 비잔티움 제국의 실질적인 창건자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마지막 황제가 될 거라며 불길하게 여겼다.
또한 달이 차 있을 때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도 있었지만, 5월 24일에 보름달이 떠서 이제 달이 기우는 일만 남은데다가
하필이면 바로 그날 밤에 월식이 일어나 시민들을 공황상태에 빠지게 했다.
5월 25일에는 폭우가 쏟아졌고, 비가 그친 5월 26일에는 짙은 안개가 도시 전체를 뒤덮었는데,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호하던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가
도시에서 떠나는 걸 숨기기 위해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고 수군거렸다.
오스만 제국의 총공세가 시작된 5월 28일, 시민들은 하기아 소피아로 향해 "이교도가 성벽을 넘어 대성당 안으로 들어오더라도 대천사 미카엘이 강림해 빛나는 검으로 그들을 지옥불에 던져 넣으리라"는 오래된 예언이 실현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5월 29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오스만 병사들이 하기아 소피아로 몰려들자 대성당의 거대한 청동문이 닫혔지만 얼마 못가서 병사들이 청동문을 때려 부수고 내부로 난입했다.
반항하던 몇몇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고 예배를 드리던 나머지 사람들은 포로로 잡혔으며 성찬예배를 집전하던 사제들은 지성소에서 끌려나가는 순간까지 쉬지 않고 성가를 불렀다.
여기서 전설이 하나 생기는데, 최후의 순간 몇몇 사제들이 성반과 성작을 움켜쥐고 대성당의 벽 너머로 사라졌으며, 하기아 소피아가 모스크에서 성당으로 바뀌는 날 다시 나타나 성찬예배를 마칠 것이라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단면도
오스만 제국
1453년 5월 29일 메흐메트 2세(1432~1481 재위:1444~1446, 1451~1481)가 이끌던 오스만 제국에게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던 날, 이 성당도 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메흐메트 2세는 이 성당만은 남겨두라고 엄명을 내리고
말에서 내려 성당 안을 보며 감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다른 이야기론 병사들이 성당을 약탈하자 메흐메트 2세가 탐욕스런 약탈행위를 기분이 나쁘듯 쳐다보긴 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면 병사들에게 대가로 사흘 동안의 약탈 행위를 허락한다고 약속했던게 있어서 놔두었다.
다만 몇몇 병사들이 메흐메트 2세가 보는 앞에서 소피아 대성당에 불을 지르자 분노하면서 불을 끈후에 그들을 잡아와서 채찍질하며 '약탈은 허락해도 소피아 대성당을 불태우는 짓은 절대 허락 안했다'며 주의를 줬다고 한다.
사실 국왕이 보는 앞에서 국왕이 절대 손대지 말라고 한 대성당에 불을 지른 행동은 사형당해도 할말이 전혀없는데 해당 병사들을 채찍질만하고 주의를 주는데서 끝난걸 보면 메흐메트 2세는 정말로 관대한 국왕이라고 할수있다.
다른 이야기로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고나서
그날 저녁으로 이 성당에서 저녁예배를 드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병사들에게 약속한 사흘 동안의 약탈 기간이 끝나고 나서 그는 공석이 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자리에 옌나디오스 2세 스콜라리오스를 임명하고 정교회와의 공존을 허락했다.
정교회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대대로 비잔티움 황제가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메흐메트 2세가 총대주교 취임식에 필요한 은제 십자가도 손수 마련해 옌나디오스 2세 스콜라리오스를 임명한 것은 종교적 관용을 베푸는 것과 동시에 자신이 비잔티움 황제와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의 적법한 계승자임을 나타낸 것이기도 했다.
단, 하기아 소피아는 아야 소피야라는 이름을 그대로 보존한 채 이슬람 성원으로 개조하고 내부의 모자이크에 회칠을 하여 성화들을 가리며 건물 자체는 그대로 남게 되었으며, 성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바예지드 2세(1447~1512 재위:1481~1512.)와 셀림 2세(1465~1520, 재위:1512~1520) 때 건물 주변에 네 개의 미나레트(첨탑)을 증축했다.
위의 성당 내부 사진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건물과 제대의 방향이 약간 틀어져 있다. 이는 원래 예루살렘 방향으로 세워진 제대를 모스크로 개조하면서 메카 방향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에서 모든 예배는 메카 방향으로 이뤄져야 하기 때문.
평면도
터키 공화국 오스만 제국을 멸망시키고 터키 공화국을 수립한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 1881~1938)는 국교를 없애고 세속주의 정책을 취하면서 아야 소피아 이슬람 성원을 개방한다.
이슬람 신도만이 출입할 수 있었던 이곳을 비이슬람인도 보게 만들었고, 미국 및 유럽 고고학자들이 오스만 제국의 정복 당시 덧칠했던 회칠을 제거하여 성화가 드러나게 하는 것도 허락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회칠 위에 그려진 코란의 내용과
이슬람의 온갖 문양이 훼손된다는 반발에 1931년 회칠 제거를 금지시킨다.
그리고 1935년에 새롭게 박물관으로 문을 열게 했다. 이와 함께 하기아 소피아 내부에서의 모든 종교 행위를 금지시켰다. 그런데 2013년에 들어와 하기아 소피아를 다시 모스크로 환원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잇따라 논란이 일고 있다.
왼쪽은 로마의 판테온, 오른쪽은 537년 당시 하기아 소피아 성당.
기본 구조는 "막센티우스 바실리카"와 같은 석조 볼트 천장을 활용한 광대한 면적의 건물과 "판테온"과 같은 돔형 천장을 가진 건물의 조합을 시도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로서는 새로운 형태의 건물이었다.
물리학자인 이시도로스와 수학자인 안시미오스가 설계한 것도 특징적인 부분인데, 당시의 건축물은 일반적으로 장인 집단의 축적된 경험적 지식을 기반으로 설계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부분이다.
물리와 수학 이론을 동원하여 건축물의 구조를 설계하려고 했던 것은
오늘날의 건축 공학으로 이어지는 초기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전례없이 큰 건축물을 원했고, 전례가 없다는 것은
기존 장인들의 경험적인 지식을 뛰어넘는 것이었기에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물리적인 계산이 불가능했던 당시로서는 한계가 명확하여 하기아 소피아의 구조는 불완전했고, 완공되기 전부터 거대한 돔과 단기간의 완공을 위한 부실 공사 때문에 붕괴될 위험이 많았다.
하기아 소피아가 가진 문제의 핵심은 거대한 반구형의 돔 무게를 버티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돔은 가볍고 내구성이 좋은 건축자재들을 활용해 만들어졌지만, 높이 56m에 직경 31m가 넘는 거대한 크기로 인해 엄청난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지지하기 위해서는 돔을 받쳐주던 30.5m 폭의 대형 아치 4개로도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볼트의 일종인 펜덴티브(삼각궁륭)를 사용해 대원개를 형성한 결과, 펜덴티브가 각 아치 사이의 틈을 메꾸어 돔의 무게로 인해 옆으로 벌어지려는 아치의 수평추력을 완화시켜줬다.
그러나 돔은 계속해서 아치와 그 밑의 기둥을 짓눌렀고, 기둥은 바깥으로 쓰러질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 공사 와중에 붕괴 위기가 오자 돔을 지탱하는 중앙 기둥들의 바깥 부분인 회중석 부분에 좌·우에 4개의 대형 버팀목을 만들고, 한쌍의 버팀목을 연결시켜 위·아래로 아치형의 회랑들을 개축해 기둥이 밀려나는 것을 버티게 하였다.
이런 급한 땜질에도 불구하고 회랑들의 가장 윗쪽 아치에 균열과 함몰, 뒤틀림이 발생했는데, 이는 아직도 버티는 힘이 모자란다는 증거였다.
만약 회랑의 아치를 좀 더 작게 만들거나 메꿔버렸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각 버팀목마다 4군데의 아치형 회랑을 너무 크게 뚫었기에 버팀목이 약해진 것이었다.
결국 버팀목 위에 기둥과 아치를 더 세워 힘을 보태고, 가로 지지대를 추가한 후 가장 위에 있는 아치를 벽돌로 겉을 메꿔서 좁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미 진행된 상단부의 뒤틀림을 고칠 수는 없어
지금도 이 공간에 가면 천장이 뒤틀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중앙 기둥들이 밀려나게 되자 당연히 돔이 올라갈 공간 역시 정사각형이 아니라
좌우로 길죽한 직사각형 모양이 되게 되었다.
결국 시간이 부족했던 건축가들은 그 위에 완전한 원형 돔은 포기하고,
대신 타원형으로 돔을 완성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구조적을 봤을 때 타원형 돔은 완전한 원형 돔보다 비균일하게 무게를 전달하므로 다소 불안정했다. 아무튼 이런 과정을 거쳐서 성당은 완공될 수 있었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성당이 건설될 때부터 이시도로스와 안시미오스는 이 지역이 지진대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기둥이 허용된 것 이상으로 이동하는 것을 방지하는 턱을 만드는 등 어느정도 내진 설계를 했다.
그러나 완공 이후 20년이 지나기도 전에 발생한 기록적인 지진으로 결국 558년에 돔이 붕괴되고 만다. 안시미오스와 이시도로스는 이미 사망하였기에 이시도로스의 조카인 젊은 이시도로스가 공사를 맡게 되었다. 새로운 이시도로스는 이 성당의 돔을 연구한 뒤 돔의 결함을 발견하게 된다.
기존의 돔은 채광을 위해 짧은 기둥들을 빙 둘러 원형으로 세운 드럼인 스트롱길롱을 놓은 뒤
그 위에 돔을 올렸는데, 이는 지진에 매우 취약하였다.
그래서 젊은 이시도로스는 기둥을 사용한 스트롱길롱 대신 훨씬 두꺼운 벽들로 바꾸고 돔의 위치를 6.25m 정도 낮춰 벽에 좀 더 안정되게 지지되도록 바꾸었다.
또, 젊은 이시도로스는 전체 공사기간과 비교하면 매우 긴 4년이란 시간동안 돔을 보수 할 수 있었고, 돔에 쓰인 회반죽 등이 마른 후에야 건축용 지지대를 철거하는 등 안정된 방법을 쓸 수 있었다.
외벽에 추가된 버팀목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후로도 지진 등으로 인해 돔과 성당은 부분적으로 계속 파손되었고, 수백년이 흐르면서 돔의 무게 때문에 점점 기둥들이 바깥쪽으로 기우는 것이 보이게 되었다.
9세기에 이르러서는 건물 외부에 서유럽의 고딕 성당에서나 볼 수 있는 버트레스와 비슷한 버팀목을 추가하기 시작했고, 훗날 오스만 제국 시절에도 비슷한 땜질을 해야 했다.
그래서 지금도 기울어져 있는 기둥들이 보인다.
하기아 소피아에서 설계상의 문제가 계속해서 터져나오고, 세월의 풍파를 맞아오는 와중에도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고 유지가 가능했던 것은 자재의 품질 덕도 있다.
먼저 벽돌의 경우 로도스 섬의 점토로 만들어진 것인데 물에 던져도 뜰 정도로 가볍다고 한다. 또 로마의 시멘트와 콘크리트 기술이 쇠퇴한 중세 유럽과는 달리, 포졸란 시멘트와 콘크리트 기술이 이어져서 이를 성당을 개축할 때 사용하였다.
포졸란 시멘트는 지중해 서부의 채석장에서 발견되는 화산재인 포졸라나와
석회 등을 사용하여 만든 시멘트로 인장강도가 매우 우수하다.
하지만 최대 강도에 이를 때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길어서 위에서 말한 것처럼 단기간에 공사가 이루어졌다면, 뒤틀림 문제에 꽤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포졸란 시멘트 기술은 계속 전승되어서 오스만 제국까지 이어졌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접수한 오스만 제국의 사람들은 하기아 소피아를 존중하는 뜻에서 파괴하지 않고 모스크로 고쳐 사용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들도 이와 비슷한 위대한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16세기에 술레이만 대제는 건축가 시난에게 좀 작지만,
하기아 소피아와 유사한 구조의 술레이마니예 모스크를 세우게 하였고, 이후 술탄 셀림 2세는 역시 시난에게 하기아 소피아와 거의 비슷한 크기의 모스크를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 맞은편에 세우게 하였다.
그것이 1574년 완성된 셀리미예 모스크다.
하기아 소피아보다 돔 실내 면적은 약간 작지만 구조적, 외형적으로는 보다 발전되었다.
또한 1617년에 술탄 아흐메트는 건축가 메흐메트 아아(Mehmet Ağa)에게 하기아 소피아의 가까운 곳에
보다 넓은 면적을 가진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메트 자미)를 세워 마주보게 하여 자신들의 업적을 과시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하기아 소피아는 이들보다 천년이나 전에 지어졌다는 점이다.
인근에는 이리니 성당이 톱카프 궁전 바로 앞에 있지만,
오스만시대 이후로 창고로 쓰고 있어서 공개하지 않으며, 이스탄불 서쪽의 에디르네카프(Edirnekapı) 너머 에윱구(Eyüp Belediyesi)에
카리예 박물관(Kariye Müzesi)이라는 이름의 비잔틴성당이 하나 더 있는데, 비잔틴양식의 성당건축과 모자이크를 보기 위해서는 그쪽도 함께 참고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카리예 박물관 또한 오스만 시기에 회칠로 덮여 모스크로 사용된 적이 있지만,
오히려 회칠로 덮힌 덕에 훨씬 더 나은 상태로 이콘들이 보존될 수 있었다.
이곳은 트라브존(구 트레비존드)의 아야소피아 성당과 마찬가지로 13-14세기,
즉 팔라이올로구스 양식의 이콘들 가운데서도 걸작품들을 볼 수 있으며, 회칠 전부가 벗겨진 상태라 성당으로서의 옛 모습도 확인해볼 수 있다.
가장 유명한 데이시스 중앙부 전통적인 비잔틴 양식의 그리스도 모자이크
이들 모자이크는 이 건물이 모스크로 전환된 후 모두 회칠을 하여 몇 세기 동안 그 존재가 잊혀졌었으나 1935년 박물관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한 후 벽을 씻어내는 작업을 한 결과 상당수 모자이크는 빛을 보게 되었다. 몇 세기를 걸쳐 제작된 이들 모자이크는 각 시대 양식을 반영하여 그 자체로도 상당히 귀중하다.
이 그림에 보이는 예수상은 양쪽에 각각 세례 요한과 성모 마리아가 자리를 같이한
'Deesis(전 인류를 위한 기도의 표현)'라는 테마의 가운데 예수 상이다.
이 작품의 연대에 관해서는 13세기 후기라는 설과 14세기 초기라는 설이 있지만
얼굴의 음영 변화를 세밀하게 나타낸 것으로 보아 14세기 초기의 작품일 가능성이 많다.
세계 각지에서 민족적 종교적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이 성 소피아는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들 분쟁을 초월하고 살아남은 증인이다.
당시 모슬렘 지도자들의 종교적 관용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이겠지만, 시공을 초월한 절대적 가치를 지닌 예술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보존된 것으로 생각된다.
원래의 하기아 소피아 내부는 유스티니아누스의 닦달로 인해
빠르게 완성해야 했기 때문에 비교적 장식이 간단한 편이었다.
기둥 하단 등도 조각 장식이 없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비교적 초대 교회 시절이라
성인들의 인물 묘사인 이콘의 법칙이 확립되지 않았던 시기였다는 점도 있다. 아무튼 성당 내부는 금빛 모자이크를 쓰되 간단한 도안들로만 장식되었다.
그러나 이후 수백년 동안 성당은 다채로운 마감재를 사용해 예수와 마리아를 비롯한
성인, 천사, 황제, 황후 및 각종 도안으로 구성된 모자이크로 장식하게 되었다.
1204년 십자군이 성 소피아 성당을 점령하면서 1000년 가까이 이어지던 성화들을 다 지우고
가톨릭 화가가 그린 성화들을 채웠기 때문이다.
당연한 게 이교도가 더럽힌 곳을 탈환했다고 명분을 내세운 십자군이
정작 그 이교도가 그린 성화를 놔둔다면 말이 많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교도가 세운 곳이지만 성당은 정화해 우리 종교의 성전으로 만든답시며
개조하고 성화들을 싹 지우고 다시 그렸던 것.
그러다가 1261년 여길 되찾은 정교회 측은 가톨릭 성화들을
싸그리 지우고 다시 그림들을 기록 및 그림을 토대로 재현, 복원했다.
하기아 소피아가 성당에서 모스크로 바뀌면서
동로마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던 모자이크 성화들은 회칠로 덮여졌다.
20세기부터 시작된 복원 작업으로 몇몇 모자이크가 다시 세상에 드러났지만, 회칠하고 역시 5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문화재인 이슬람 문양을 제거하는 데 따른 반발이 커
이 작업은 80년 넘게 중단된 상태이다.
사실, 1000년에 이르던 옛 성화들을 제거하던 게 다름아닌 기독교 십자군이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하여 제거된 성화들이나 모자이크를 복원한 것도 1261년 일이므로, 200년 남짓 남아있다가 1453년 이후 회칠로 덮여졌기에 500여년이 넘은 이슬람 문양도
문화재로 값어치가 있는 만큼, 함부로 제거하기에 그렇다.
설계, 구조와 재료, 보수
비잔티움 건축의 전성기의 정수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크고 웅장하며
또한 대단히 빠르게 완공한 역사적 건물이다.
하지만 기존 건축물을 뛰어넘는 규모와 공사기간을 맞추기 위한 무리한 공사와
실패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건물이기도 하다.
기본 구조는 "막센티우스 바실리카"와 같은 석조 볼트 천장을 활용한 광대한 면적의 건물과 "판테온"과 같은 돔형 천장을 가진 건물의 조합을 시도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로써는 새로운 형태의 건물이었다.
물리학자인 이시도로스와 수학자인 안시미오스가 설계를 한 것도 특징적인 부분인데, 당시의 건축물은 일반적으로 장인 집단의 축적된 경험적 지식을 기반으로 설계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부분이다.
물리와 수학 이론을 동원하여 건축물의 구조를 설계하려고 했던 것은
오늘날의 건축 공학으로 이어지는 초기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전례없이 큰 건축물을 원했고, 전례가 없다는 것은
기존 장인들의 경험적인 지식을 뛰어넘는 것이었기에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물리적인 계산이 불가능했던 당시로써는 한계가 명확하여 하기아 소피아의 구조는 불완전했고, 완공되기 전부터 거대한 돔과 단기간의 완공을 위한 부실 공사 때문에 붕괴될 위기가 많았다.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로 ‘신성한 지혜(Holy Wisdom)’를 의미한다. 라틴족의 지배를 받았던 1204년에서 1261년까지를 제외하고 360년에서 1453년까지의 오랜 기간 동안
콘스탄티노플 대성당(cathedral of Constantinople)이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던 1453년 5월 29일부터 1931년 까지는
이슬람사원으로 사용되었으며 1945년 2월 1일 미술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성 소피아 성당의 교회당은 서기 360년, 이스탄불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불렸던 동로마 제국시기
콘스탄티누스 2세에 의해 처음으로 건립되었다.
첫 번째 건물은 궁전 근처에 위치했으나
404년경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 남아있지 않다.
415년 테오도시우스 2세의 명으로 두 번째 교회가 축성되었으나
이 건물도 532년경의 화재로 인해 성 이레네 성당과 함께 사라졌다. 몇몇의 대리석 조각들만이 오늘날까지 남아 전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세 번째 건물로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명으로
532년에서 537년 사이에 지은 것이다. 황제는 이전 건물과 완전히 다른 거대하고 웅장한 바실리카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이를 위해 그리스 물리학자 밀레투스의 이시도르스(Isidore of Miletus)와
수학자 트랄레스의 안테미오스(Anthemius of Tralles)를 고용했다.
건물을 완성하기 위해 시리아, 이집트 등 제국의 각 지역에서 재료가 조달되었으며
고용된 인부들은 10,000여 명에 이르렀다.
황제는 대주교와 함께 537년 12월 27일 거대한 행사와 새로운 바실리카를 열었다. 그러나 교회 내부의 모자이크는 후대(565–578)에야 완성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순례자들의 기록을 보면,
대성당 안에 현재는 없어진 시설이나 성유물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553년에서 557년의 지진으로 건물의 메인 돔과 동쪽의 돔이 피해를 입었으며
558년 5월 7일에는 추가적인 지진으로 메인 돔이 붕괴되었다.
황제는 즉시 복원할 것을 명하며 밀레투스의 조카 이시도르스(Isidorus)에게
이 일을 맡겼는데 그는 돔의 형태를 바꾸었다.
그는 정방형의 평면 위에 돔을 설치할 때
돔 밑바닥에 쌓아 올리는 구면 삼각형의 부분과 함께 늑골이 있는 돔을 만들었다.
이후에도 건물과 내부의 인테리어는 지속적인 시련을 겪었다. 726년경에는 많은 이콘들이 파괴되었으며 종교적인 그림과 조각들은 사라졌다.
1204년에서 1261년까지는 유럽인의 지배를 받았으며
1453년부터는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다.
종, 제단 등은 제거되었으며 대부분의 모자이크는 회반죽으로 덮였고
이슬람적인 상징물들이 오스만 제국 지배하에서 추가되었다. 현재는 다시 복원 중에 있다.
멀리서 바라본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이스탄불(Istanbul)은 아시아와 유럽을 경계짓는
보스포러스(Bosphorus) 해협에 임한 터키의 가장 큰 항구 도시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비잔티움(Byzantium)으로,
동로마제국의 수도였을 때는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1453년 시작된 오토만 터키시대에는 흔히 이스탄불로 불리었다.
1922년 터키 공화국이 수도를 앙카라(Ankara)로 옮긴 후
1930년 정식으로 이스탄불이라고 명명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로마가 476년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멸망한 이후에도 동로마제국은 중세 기간 동안
이 곳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유지되었다.
위에서 본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전경
성 소피아는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들 분쟁을 초월하고 살아남은 증인이다. 당시 모슬렘 지도자들의 종교적 관용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이겠지만, 시공을 초월한 절대적 가치를 지닌 예술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보존된 것으로 생각된다.
위에서 본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전경
1,700여 년 전 건축되어 비잔틴 건축의 으뜸으로 꼽히는 성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제국의 멸망 이후 이슬람 건축물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오스만 제국의 건축가들은 성 소피아 성당처럼 거대하고 웅장한 이슬람 사원을 만들고 싶어 했고, 그것은 대 건축가 시난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졌다
시난의 건축물은 오스만 제국의 전형적인 이슬람 사원 형태를 띠고 있으며, 사원과 함께 학교, 숙소, 시장, 묘지 등의 복합 부속 건물을 함께 지었다.
건물 전체는 피라미드 모양으로 큰 돔을 중심으로
주변 부속 건물들이 사원을 떠받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시난과 제자들은 이스탄불에만 3,000여 개의 이슬람 사원을 세웠는데 그 중에서도 성 소피아 성당 맞은편의 술탄 아흐메트 사원은 블루 모스크란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전경
모슬렘 건축의 특징적인 뾰족 탑 미나렛(minaret) 두 쌍이 15세기와 16세기에 각각 추가되었다. 그리고 건축사적으로 가장 주목할 만한 건물은 성 소피아일 것이다.
'소피아(sophia)'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육신의 형태로 세상에 나타난
하느님의 말씀이나 지혜'를 가리킨다.
1935년부터는 현대 터키의 수립자 아타튈크(Atatürk)의 명에 의하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원래는 기독교회로 건립되었으며 동로마제국의 멸망 후에는 모슬렘 교도들에 의해 모스크로 사용되면서 모슬렘 건축의 특징적인 뾰족 탑 미나렛(minaret) 두 쌍이 15세기와 16세기에 각각 추가되었다.
2006. 3.13 방문 기념 인증샷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전경
○ 비잔틴제국이 기독교 세계에서 이슬람 세계로 바뀜에 따라
교회를 필두로 제국의 기독교 문화유산도 운명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는 성소피아성당이 이슬람제국 아래서 겪은 수난을 살펴보기로 한다. 아테네의 파르테논신전도 결국 이슬람교 사원으로 바뀌었으나,
그들은 다음해인 1454년에 성당을 개조해 이슬람교 사원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성소피아성당은 이미 제4회 십자군에게 한 차례 능욕을 당했다.
교황에게 파문당한 바 있는 제4회 십자군은 비잔티움을 점령하고 마음껏 노략질했을 뿐만 아니라
성소피아성당의 제단을 파괴하고 성물을 나누어 가졌다.
성 소피아성당 입구 군악대 메흐테르 (Mehter Military Band)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출입구
○ 성당 안으로 끌고 들어온 말과 당나귀들이 미끄러져 넘어지면
그들은 그 자리에서 칼로 찔러 죽여 성당을 피로 물들였다.
그런 오욕의 역사를 가진 성당은 이번에는 이교도의 소유물이 됨으로써
더 큰 수난을 겪어야 했다.
비잔티움이 이스탄불로 개명된 다음 성소피아성당은 곧바로
기독교 교회에서 이슬람교 사원으로 바뀌었지만 수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성당 중앙 출입문. 옛날에는 황제와 황후만 출입할 수 있어 황제의 문이라 불렸다.
문 위 천장에 모자이크가 살짝 보인다.
성당 출입구는 모두 9개가 있다.
중앙의 황제문을 중심으로 살짝 보이는 양쪽의 작은 2개의 문으로는 귀족들,
그 옆으로 더 작은 문으로 세례를 받은 일반인이 출입했다.
그나마 세례를 받지 못한 일반인들은 성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외랑에서 예배를 보았다.
황제의 문 위의 모자이크
문 위에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 레오 6세가 예수님께
자신의 죄를 사해달라고 청하는 모습이 모자이크로 만들어져 있다.
○ 성당 내부를 장식했던 모자이크 성화들은 오늘날 거의 모습을 감추었다. 현재 2층 한쪽 벽에 그야말로 손바닥 만하게 남아 있는 기독교 성화 모자이크가
원래 성당 내부의 모습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새로 세운 첨탑 4개는 그것이 모스크임을 일깨워준다.
하지만 2001년 봄에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부가
느닷없이 자국 영역 안에 있는 바미얀대불을 폭파해 버린 것과 견주어 볼 때, 오스만 투르크족이 성소피아성당 및 기타 기독교 문화유산에 대한 조처는
그나마 이성적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성모와 황제 모자이크
성모와 황제 모자이크
성모 마리아에게 콘스탄티노플과 아야 소피아를 바치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모습으로 944년에 만들어졌다.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봉헌된 그림으로 가각 4세기 6세기 인물들을 그린 상상화이다. 성모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는 그의 신성을 암시하는 종이 두루마리를 들고 있고, 오른손으로 황제들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다.
성당의 외랑에 있는 문을 통해서 안쪽으로.
성당의 외랑
내랑으로 들어가면서.
내랑으로 들어가면서.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실내 전경
○ 이슬람교 탈레반 정부는 자신들의 신앙과 배치되는 불상이라 하여
폭파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자 결국 대포를 동원해 폭파했다.
광신 집단이 인류의 빛나는 문화유산을 무참히 파괴한 것이다. 오스만제국은 적어도 성소피아성당과 그밖의 로마 유산을 가능한 보전하려고 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오스만 투르크족은 이교도와 이교 문화에 비교적 관용을 베풀었다고 평가한다.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실내 전경
여기에서 보면 바닥에서 돔 가운데가 미흐라브(mihrab),
왼쪽으로 슐탄이 예배드리는 장소가 있다.
오른쪽에 민바르(Minbar)는 살짝 보일듯 말듯.
바닥은 일반대리석, 벽면은 데칼코마니 양식의 타일식 대칭으로,
기둥은 통대리석으로, 천장은 비잔틴 양식의 돔으로 되어 있다.
건축 당시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성당이었지만 후대에 지어진 성당에 밀려 현재는 4번째 성당이다.
자연광을 조명으로 사용하도록 지었다.
터키에서는 1백년마다 대형 지진이 발생하는데
내진 구조가 뛰어나 15번 이상의 지진을 이겨내기도 했다.
미흐라브(mihrab)와 민바르(Minbar)가 공존하여 예배드리는 곳
성소피아 성당은 916년 동안 교회로, 481년 동안은 이슬람 사원으로
그리고 1935년 이후부터는 박물관으로 그 생명을 이어왔다.
성모 마리아와 이슬람의 알라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그 두 종교가 함께 공존할 수 있다는 게 정말 놀랍다.
1453년 성 소피아 성당은 이슬람 사원이 되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기존의 교회를 파괴하지 않고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이슬람 사원의 건축물과 장식을 만들어 놓은 점이다. 코란의 문구를 새겨 넣은 스테인드 글라스도 그 중의 하나다.
좌측 중앙에 있는 것이 미흐라브(mihrab)이다.
이슬람 사원에서 기도하는 방향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를 향해 있다.
이것은 기독교의 정 동방향에 비해서 메카 방향인 동남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중앙제단이 서로 방향이 다른 것이 한꺼번에 있다는 것이 가장 이색적이고 특징적이다.
정동향에 위치한 성모자상을 직선으로 따라 내려가면 그 자리에서 약 15도 정도 빗겨난 자리에
이슬람의 예배 방향인 미흐라브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 오른쪽으로는 금요 예배 때 설교하는 장소인 민바르(Minbar)가 있고 이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왼쪽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예배를 보는 장소가 있다. 종교가 다르고 900년 뒤에 건축한 부속물이지만 어느것 하나 튀는 곳도 어색한 곳도 없다.
미흐라브(mihrab)
미흐라브(mihrab)란 이슬람 건축에서 모스크의 예배실은 메카의 방향으로 향하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그 안쪽 벽에 설치된 작은 니치(壁龕)모양의 오목상(凹狀, 들어간모양)을 말한다.
우상(偶像)이 없는 모스크는 미흐라브가 예배하는 방향을 가리키는 목표로서 중요시되고,
가장 정성들여 장식되어 있다.
미흐라브가 모스크에 도입된 것은 8세기 초로 생각되며,
그리스도 교의 교회당 아프시스에서 착상된 것으로 추측한다.
규모가 작은 모스크의 경우 벽의 일부 중앙 부분만 만들기도 하며, 모스크의 규모가 클 수록 키블라의 방향이 틀어질 수 있는 것을 감안하여 한 벽면 전체를 미흐라브로 사용한다.
기원은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제자들이 예배 방향에 대하여 묻자 무함마드가 두 기둥 사이에 깃발을 꼽아 '이곳을 향해서 기도하라'라고 이야기 한데서 비롯되었다.
전형적인 모습은 8세기 초에 확립된 것으로,
주로 양쪽에 기둥이 있고 안쪽으로 움푹 들어가있는 니치(壁龕) 형태를 하고 있다.
학자에 따라서 고대 성당의 니치나 비잔틴 교회의 내부 공간 애프스(apse)을 모방하였다고 보는 측면도 있다. 후대에는 공간을 따로 만들어 방의 형태를 띠기도 하며, 천장 부분에 돔을 축조하기도 한다. 정해진 형태는 없으며, 지역과 왕조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민바르(Minbar)
민바르는 이슬람교에서 설교(khuṭbah)를 행하는 연단이다. 가장 단순한 것은 3칸의 계단이 이어져 있으며, 대체로 계단의 위쪽에 반구형의 상자가 달려 있고 또 여닫이문이 있어서 그것을 통해 오를 수 있게 생겼다.
마호메트는 원래 메디나의 모스크에서 종려나무 기둥에 기대어 설교했다. 〈하디스 Ḥadῑth〉(마호메트의 언행록)는 마호메트가 그뒤 모스크에서 대표단을 영접하기 위해
2개의 계단이 달린 의자를 사용했고 또한 그리스인 또는 아비시니아인 목수가
위성류 나무로 만든 이 이동 민바르에서 설교했다고 전한다.
그의 후계자인 칼리프들은 권위의 상징으로 이 민바르를 사용했다. 이슬람 시대가 시작되어 첫 세기 동안에는 지방 총독도 주로 통치자로서의 관할권을 과시하기 위해
민바르에서 연설하거나 청원을 들었다.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통치하에서 설교가 정보의 제공이나 정치적·논의적 특성을 상실하고
단순히 종교적 설교가 되자 민바르도 종교적 상징물이 되었다.
사실상 그것은 좀더 견고하게 만들어졌으며, 계단의 수도 점점 늘어났고
보통 돌이나 벽돌로 만들어 카티파(qaṭῑfah)라는 천을 씌우기도 했다.
슐탄이 예배드리는 장소 알라와 무함마드 사이에 마리아와 예수가 있어 서로 공존하고 있다.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실내 부분
○ 세계 각지에서 민족적 종교적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이 성 소피아는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들 분쟁을 초월하고 살아남은 증인이다.
당시 모슬렘 지도자들의 종교적 관용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이겠지만, 시공을 초월한 절대적 가치를 지닌 예술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보존된 것으로 생각된다.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실내 부분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실내 부분
천장까지 20층 높이의 건물이다. 중앙돔을 두 개의 반돔이 받치는 기둥도 없이 버티는게 참으로 대단하다.
2006. 3.13 방문 기념 인증샷
2006. 3.13 방문 기념 인증샷
6개의 날개가 달린 천사 세라펨.
본당 천정을 올려다 보면 가운데 돔의 네 귀통이에 6개의 날개가 달린 천사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는데 현재도 여전히 복원 작업이 진행중이다.
1층 본당 둘러 보고는 2층의 갤러리로 올라가는 가는 길. 1,500년 동안 있어 온 역사의 통로.
2층에서 찍은 성모상
천국의 문과 지옥의 문이라 불리는 대리석 문. 12세기에 이곳에서 중요한 종교회의를 했다고 한다.
이레네 황후의 모자이크.
12세기 초 작품으로 성모에게 안긴 아기 예수에게 봉헌하는 황제 요한 콤네누스 2세와 황후 이레네의 모습이다. 헝가리 출신의 황후 이레네는 조에 황후와 달리 금발 머리와 붉은 뺨으로 표현되었다. 이레네 황후의 옆 벽면에는 이 모자이크가 만들어지고 얼마 후 결핵으로 죽은 왕자 알렉시오스의 그림이다.
엔리코 단돌로의 무덤.
베네치아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로 제4차 십자군 원정을 이끌며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다. 베네치아 역사에 있어서는 영웅이겠지만 비잔틴 제국과 콘스탄티노플의 위대한 문화유산들이 십자군에 의해 약탈 되고 파괴하는 등 엄청난 문명적 재앙을 겪는데 일조한 면이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조국 베네치아가 아닌 적국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에 묻혀 있는 것도 흥미롭다.
연결 통로.
소원의 기둥
소원을 빌며 엄지손가락을 구멍에 넣은 채 손바닥을 기둥 바닥에 대고 360도를 다 돌리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한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 기둥에 기대어 두통을 치료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후대인들도 그 치유의 능력을 믿고 기도하면 들어준다고 한다.
소원의 기둥에서 소원을 빌며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넣고 열심히 돌리는 모습.
소원의 기둥
제례주 보관통 1천 사오백년은 되었을 역사적 유물일텐데 사람들이 자연스레 만지고 기대어 서 있는 모습이 살짝 충격적.
성 소피아 성당 분수(우물)
입구에 있는 이 분수(우물)는 모스크에 들어가기 전 손발을 씻기 위해서 1740년 마흐무드 1세때 건설한 것이다.
2006. 3.11 오후 6시 40분 아테네를 출발하여 오후 8시 15분 터키 이스탄불에 도착. 1시간 35분 소요.
이스탄불 ERESIN TOPKAPI 호텔에 여장을 풀고 숙박.
3. 12. 호텔에서 조식 후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가 공존하는 성소피아 사원으로 이동.
이스탄불
도시가 형성된 기원전 660년 그리스 시대에는 비잔티움(Byzantium)이라고 불렀으며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가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삼으면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고 불렀다.
1453년 술탄 메메드 2세(Mehmet Ⅱ1432~1481)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오스만제국(Osman Empire)의 중심적인 도시가 되었다.
보스포루스 해협(Boğaziçi denizi)과 마르마라 해(Marmara denizi), 할리치 만(Haliç) 사이에서 유럽 대륙과 아시아 대륙의 경계선 위에 위치한 터키의 도 및 그에 속한 동명의 도시.
도시가 두 대륙에 걸쳐 있다는 지리적 특이성으로도 유명하다.
인구는 2014년 기준 14,377,018명.
과거 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수도였으며,
동로마 제국 시기인 중세 시절부터 지금까지 계속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다. 물론 터키의 최대 도시이기도 하다.
베욜루 남부의 갈라타 지구는 중세에 제노바나 베네치아의 무역상사가 있었던 곳이며, 부두에는 국내외의 배들이 모이고 아시아쪽의 하이달파샤역(驛)으로 떠나는 페리보트도 이곳을 기점으로 삼았다.
금융·무역의 중심지로서 오스만은행을 비롯하여 국립은행·외국은행이 많다.
베욜루 동부는 택시광장을 중심으로 일류 호텔·레스토랑·극장·대상점 및 각국의 영사관이 늘어서 있다.
골든혼의 남쪽인 이스탄불은 옛날의 이스탄불이 자리잡았던 전통 있는 지구로, 지금도 비잔틴시대의 성벽이 서쪽 경계를 둘러싸고 있다.
아흐메드 사원(블루모스크) · 쉴레이만 사원의 2대 이슬람 사원을 비롯하여 예니성당 · 하기아 소피아(현재 박물관) · 토프카피 궁전(현재 박물관) · 고고학박물관 ·
터키-이슬람 미술관, 고대 오리엔트미술관, 그리고 이스탄불대학 등이 있으며
이 도시의 전성기를 생각나게 하는 대시장(그랜드 바자르)도 있다.
보스포루스해협을 사이에 둔 아시아쪽의 위스퀴다르는 전형적인 터키 양식의 도시로 많은 이슬람교 사원이 있으나 지금은 신흥주택지로 발전하고 있으며, 유럽 쪽과는 페리보트가 왕래한다.
세리미에 병영(兵營)과 나이팅게일 병원이 있으며
남부에는 바그다드 철도의 시발역인 하이다르파샤역이 있다.
터키 최대의 공업도시이기도 한 이스탄불은 섬유 · 식품가공 · 농기구 · 고무 등의
공업이 발달하였으며 군수공업도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이스탄불항은 전국 수입액의 70%, 수출액의 20%를 취급하며
매일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는 선박은 130척이 넘는다.
고대
신화에 따르면 메가라라고 불리는 도시에 비자스(Βύζας)라고 하는 왕자가 있었다. 그는 장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왕좌를 이어받지 못했다.
그래서 새로운 식민지 도시를 개척하고자 아폴론 신전의 여사제였던 델포이 신탁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그녀는 "눈 먼자의 도시의 반대 편에 도시를 세우라"라고 말했다.
이 눈 먼자의 도시의 정체는 칼케돈(Χαλκηδών)이며
이 도시의 개척자가 장님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것.
여사제의 조언을 들은 비자스는 메가라의 개척자들과 함께
그 땅을 찾아 항해했다.
목적지 근처에 다다른 비자스 왕자 일당들은 한 땅을 발견하였는데 그 땅은
북쪽으로는 금각만이 있고 동쪽으로 보스포루스 해협을 끼고 있어서
항구도시의 입지조건으로 매우 좋았다.
흑해 연안에 있는 도시들은 지중해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가야 하므로 이 지역의 중요성이 높다.
그래서 그들은 BC 667년 여기에 도시를 세웠고
사람들은 도시의 이름을 왕자의 이름을 따서 비잔티온(Βυζάντιον)으로 불렀다.
칼케돈의 개척자가 장님이라고 여겨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칼케돈 또한 메가라 사람들에 의해 개척되었고 비잔티움 개척 이전인 BC 685년에 세워졌다.
그런데 그들은 금각만을 끼고 있어서 입지조건이 더 좋은
보스포루스 해협 서쪽에 개척하지 않고 해협 동쪽에 도시를 세웠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칼케돈을 세운 집단들이 도시를 해협 서쪽에 건립하는 것의 이점을
"보지 못하였다"고 판단해서 개척자를 장님이라고 여기게 된 것.
그 후 이 도시는 바다와 바다를 낀 항구도시로 발전한다.
그리스 상인을 위한 지역 거점의 역할을 하던 이 도시는 동시대 사람들한테는 그 방탕함과 해이함으로 악명이 높아 어느 여행자는 비진티움 사람들을 두고 "술독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비판했다고 한다.
비잔티온은 BC 491년 다리우스 1세 치세의 페르시아가 점령하였으나
BC 477년 아테네를 위시로 한 델로스 동맹에게 다시 탈환되어 그리스계 도시로 쭉 남다가
AD 46년 로마 제국이 점령했으며 로마식 이름인 비잔티움(Byzantium)으로 불리게 되었다.
중세
본디 비잔티움(Byzantium)이라는 이름의 고대 그리스 시절 건설된 로마 제국의 지방도시였다. 비록 인구 100만의 수도 로마나 인구 50만의 제국 제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수준으로 번영한 것은 아니었지만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거점이자 제국의 무역 도시 중 하나였는데 평범한 무역 도시였던 이 도시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꾼 사람은 바로 콘스탄티누스 1세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사두정치 시절 서방 부제의 자리에 있었을 때부터 150여 년 간의 위기로 쇠락할 대로 쇠락하였으며 전통적인 다신교 문화와 공화주의적 정치 관례가 남아있던 로마를 대체할 제 2의 수도 건설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가 생각한 조건은 이집트나 소아시아 등의 경제적 중심지와 문화적 중심지인 그리스를 포함하는 제국의 동방과 가까운 곳이며 당시 제국을 위협하던 가장 큰 세력인 다뉴브 강 이북의 이민족 및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국경과 가까워 이들의 침입 시 신속한 대응이 가능한 곳이었다.
본디 그는 새로운 수도를 건설할 자리로 모이시아 속주의 세르디카(Serdica)를 생각하고 있었고 "세르디카는 짐의 로마가 될 것"이라는 말 또한 여러 번 언급했으나 사두정치를 끝내기 위한 리키니우스와의 내전 도중 벌인
비잔티움 공성전을 통해 비잔티움이 자신의 이상을 구현할 최적의 장소라는 곳을 깨닫게 되었다.
324년 내전을 종결짓고 제국 유일의 황제 자리에 오르자마자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을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선포하였고 곧바로 비잔티움을 제국의 수도에 걸맞는 도시로 바꾸는 대공사에 착수했다.
수도 완공식이 있었던 330년 5월 11일, 콘스탄티누스는 친히 이곳을 로마 노바(Roma Nova), 즉 '새로운 로마'라 명명하였으나, 좀 더 세세한 명칭은 로마 노바 콘스탄티노폴리타나(Roma Nova Constantinopolitana). '콘스탄티누스의 새로운 로마'라는 뜻이다.
역사적으로는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의미의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η)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다.
일단 이름은 이렇게 붙었지만, 도시가 동로마 제국을 넘어서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유명한 도시가 되면서 점차 '도시 중의 여왕(바실리사 톤 폴레온/Βασιλὶς τῶν πόλεων)',
이걸 넘어서 더 흔하게는 그냥 도시(이 폴리/ η Πόλη)라고 불렀다.
즉, 제국 제2의 도시인 테살로니키마저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앞에선 '도시'가 아닌 마을로 불리고
시골 취급 당할 정도로, 도시라는 이름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의미로 널리 쓰였다.
마치 조선시대부터 한양이라는 자기만의 이름이 있었음에도
우리들은 그 도시를 계속 수도라는 의미의 '서울'로 불러온 것처럼. 그 뜻을 생각하면 나중에 나오는 터키어 명칭 '이스탄불'과도 상통하는 명칭이다.
중세시대에 도시가 일단 삼각형의 양변이 보스포루스 해협에 면해 있기에
육지의 한변만 방어하면 되는 천혜의 요지이다.
게다가 당대 어떠한 공성병기로도 뚫을 수 없다는 테오도시우스의 삼중 성벽의 위엄은 대단했다. 도시를 노리고 쳐들어 온 수많은 이민족들을 모조리 트라키아 땅의 양분으로 만들어 버렸다. 물론 4차 십자군 전쟁 당시엔 동맹걸고 들어온 십자군에게 패하긴 했지만.
게다가 삼각형의 양변이 접한 바다가 단순히 외딴 곳이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보스포루스 해협이다 보니 전시가 아닌 평시 상황에서는 지정학적인 이점을 살려 사통팔달의 교통의 요지가 될 수도 있는 땅이다.
콘스탄티누스 사후 제국이 콘스탄티누스의 자식들 및 조카들에 의해 나뉘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콘스탄티노플은 제국 동방, 즉 동로마 제국의 수도를 맡게 되었다.
중세 서양 세계의 강대국 중 하나였던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만큼 세계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들 중 하나였으며 특히 제국이 경제적으로 절정기에 달했던 콤니노스 왕조 마누엘 1세의 치세에는 총 인구 40만여 명 중 외국인 인구가 6만에서 8만에 달했을 정도로 코스모폴리탄적인 도시로서 번영했다.
그러나 1204년 도시를 침략해온 4차 십자군에 의해 3일 동안 도시 전역이 약탈당하고 그들이 세운 괴뢰국, 라틴 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하고 1263년, 니케아 제국이 도시를 탈환하고 제국을 재건했으나 도시는 이미 활기를 잃은 지 오래, 그 뒤로 제국이 점차 쇠락하면서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당시에 도시 인구는 겨우 4만 밖에 남지 않았다.
결국 1453년, 도시를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기를 갈망한
메메드 2세의 오스만 제국에 의해 끝내 함락된다.
역사적으로 이 함락은 함대포를 끌고 와서 포격을 하고,
방어군의 10배가 넘는 정예 예니체리들의 돌격으로 무너졌다고 하지만, 야사에 따르면 성문 샛길을 잠그지 않아서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샛길을 잠그고 안 잠그고를 떠나서 이미 전황은 오스만 제국 쪽으로 압도적으로 기운 상태였고, 그보다 10만 공격군에 방어군이 7천 명밖에 없었으니 그때까지 버틴 게 오히려 용하다.
삼각형 모양의 비잔티움 모습
콘스탄티노플은 두 면이 바다에 인접해 있고, 나머지 1면은 3중의 성벽으로 적의 공격을 철통같이 방어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거대한 3중 성벽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 광개토대왕 쯤 되는 시기에 오스만 제국 메흐메트 2세에게 1453년 점령을 당하여 2200 여 년을 이어온 로마제국 및 비잔틴제국은 처참하게 멸망하고 만다.
특히 오스만 군은 해전에 매우 약했던 만큼, 방어 측은 육지의 성벽 한 곳만 집중하면 되었다. 오스만은 바다에서 싸우고 싶어도 바다가 매우 거칠었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바다에 접한 두 면 중, 위쪽 면이 금각만(Golden horn)이다. 금각만은 바다에 능한 방어군이 그 입구를 쇠사슬로 막아 놓아서 오스만 공격군이 갈 수 없었던 곳이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의 정복왕답게 메흐메드 2세는 육지에 기름칠한 통나무를 깔고,
마르마라해(sea of Marmara)에 있던 배를 사람의 힘으로 밀어서 금각만으로 진입한다는 대담한 작전을 세운다. 잔잔한 금각만에서 오스만이 공격해 오자 병력이 부족한 방어군은 힘없이 패하고 만다.
벨리니가 그린 메흐메트 2세
결국 콘스탄티노플은 이 도시를 수도로 정한 인물과 이름이 같은 콘스탄티누스2세에게 점령당하고 만다. 오랜 기간 많은 희생이 따른 전쟁이었기 때문에 메흐메트는 정복군에게 4일 간의 약탈 시간을 주게 된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겁탈당하고 노예로 전락했다. 더불어 수많은 비잔틴 문화유산들도 사라졌다.
메흐메트 2세는 빠르게 혼란을 해결해 나간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스탄불로 이름이 바뀌고 거대한 오스만제국의 수도로 470년 동안 이어지게 된다.
금각만 (Golden Horn)에서 바라본 모습.
남동쪽을 향해 찍은 사진으로, 오른쪽의 육지가 파티흐(Fatih) 구, 즉 테오도시우스 성벽 안의 콘스탄티노플 시가지이다.
만(灣)의 상류는 이스탄불 북부를 흐르는 알리베이쿄이(Alibeyköy)강과 카이타네(Kağıthane)강과 연결되며, 하류는 서쪽으로 마르마라해와, 동쪽으로는 보스포루스해협과 닿아 있다.
총 길이는 7.5km이며, 폭이 가장 넓은 곳은 750m, 수심이 가장 깊은 곳은 약 35m이다.
만의 명칭은 지형과 역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만에 위치한 수많은 무역항을 통해 들어오던 재화(財貨) 또는 수면에 비치는 석양의 금빛 색조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지정학적으로 이스탄불의 역사적인 중심지를 감싸고 흐르면서 자연적인 방어선을 이루고 있으며, 내해로서 파도가 잔잔하고 수심의 변동이 적어 항구로 활용되었다.
고고학 발굴 기록에 따르면 B.C. 7세기경부터 만 주위에 항구ㆍ창고ㆍ주거지 등이 밀집한
대규모 정착지가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로마 제국 시대 이후로 경제적, 전략적 요충지로 발전하였다.
비잔티움제국 시대에는 해군본부가 주둔하였으며, 해안을 따라 군사적 목적의 성벽을 쌓았다. 또한 높은 감시탑을 세우고 수중에 대형 쇠사슬을 걸어 만으로 드나드는 선박을 통제하였다.
비잔틴 시대의 감시탑은 1204년 십자군 전쟁 때 크게 손상되었고, 1348년에 제노바인(Genoese)이 새로이 탑을 세웠는데, 이것이 현존하는 갈라타 타워이다.
1453년 오스만투르크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뒤에도 메흐메드 2세가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상업 및 주거지역을 보전할 만큼 무역항으로서의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근대 이후 이스탄불 인구 증가와 산업화로 인하여 수질 및 주변지역이 오염되었지만, 1980년부터 정화작업을 시작하여 현재는 깨끗한 수질과 생물다양성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양쪽 해안을 따라 다양한 유적지ㆍ공원ㆍ상업지구가 공존하며
이스탄불의 주요 관광지로 명성을 얻고 있다.
만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다섯 개가 있다. 상류에는 1974년 완공된 할리쉬 다리(Haliç Bridge)가 있고, 1912년에 완공되어 교통 및 관광 목적으로 사용되다가 1992년 화재로 유실된 뒤 현재는 관광 목적으로 일부만 복원된 에스키 갈라타 다리(Eski Galata Bridge, 옛 갈라타 다리)가 있다.
중류에는 1940년 완공된 아타튀르크 대교, 인도교이자 도시철도가 지나가는 골든 혼 메트로 다리가 있으며, 하류에는 화재로 유실된 옛 갈라타 다리를 재현하여 새로 제작한 갈라타 다리(Galata Bridge, 1994년 완공)가 있다.
현대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 당시에 불가리아군이 차탈자(Çatalca)까지 내려와서 이스탄불을 위협한 적이 있었다. 더군다나 이 지역은 오늘날 이스탄불 광역시에 포함되어있을만큼 이스탄불과 지척에 있는 거리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코앞인 보스포루스 해협에 영국 함대가 몰려와 위협을 가한 바 있다.
오스만 제국이 1차대전에서 패하자 세브르 조약으로 인해 제국은 사분오열될 위기에 처했고 그리스 왕국은 승전국이라고 신나서 이스탄불을 탈환하겠다고 터키로 진공했다.
그리스는 이스탄불을 탈환할 뻔했지만 무리한 진공으로 인해 아타튀르크에게 패퇴당했고, 이미 연합군(주로 영국군)측이 이스탄불을 접수한 상태로 그리스군이 코 앞까지 다가오자 영국이 개입한다.
영국은 에게 해의 섬과 코스탄티니예를 포함한 동트라키아 지방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압력을 넣었고 아타튀르크는 후자를 선택. 이로써 도시는 다시 터키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
1922년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터키 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수도의 지위는 상실하고, 아타튀르크를 수반으로 하는 신생 터키 정부는 오스만 왕가와 귀족들을 반역자로 규정하여 모두 추방시켰고 기존 세력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기 위해 수도를 아나톨리아 땅의 튀르크계의 발원지와 같은 척박한 땅 앙카라로 천도하였다.
이 때 도시 이름은 코스탄티니예에서 이스탄불(Istanbul)로 바뀌었고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뷔윅아다(Buyuk Ada). 프린세스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섬.
이스탄불은 한때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만큼 그리스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1923년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 협정 당시에 이스탄불 전체 인구의 1/3 이 그리스인인 현실을 고려해 이스탄불의 그리스인들은 추방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박해는 아타튀르크 사후 특히 1950년대 들어 키프로스 문제와 관련해 그리스와의 갈등이 심해지자 가속화되었으며 이 시기 터키 정부의 묵인 속에 이루어진 시민들의 조직적인 약탈과 폭행까지 행해져 1960년대를 기준으로 인구는 급감하게 된다.
1955년은 아직 영국 식민지였던 키프로스에서 키프로스는 그리스라며
그리스와 통합을 요구하는 시위와 폭력 행위가 극에 달해 있을 시절이다.
아테네에서도 반 터키 시위가 있었고, 특히 이스탄불과 마찬가지로 로잔 조약을 통해 추방에서 제외된 트라키아 서부 지방의 튀르크계 주민들에게도 박해가 벌어졌다. 그러자 터키에서도 반 그리스 여론이 치솟기 시작했고, 그게 폭력 사태로까지 번졌다.
1930-40년대까지만 해도 터키와 그리스 관계는 상당히 좋은 편이었지만, 동구권의 공산화로 인해 잔뜩 긴장한 양측 정부는 극단적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강조하기 시작했고,
둘 다 제정신은 아니었다.
또 오스만 제국이 소멸되고 나서 오스만 제국 국적이 말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적을 터키 공화국으로 신청하지 않은 그리스계 무국적자들이 이스탄불에 상당히 많이 살고 있었는데,
그동안 이들은 외국인도 아니고 자국인도 아닌 상태로 거주허가증만으로 버티며 살아가고 있었지만, 이때의 키프로스의 반 튀르크 시위 이후 법적 이유를 들어 하나 둘 추방시킨다.
백여 년이 지난 2015년 현재는 거주민의 겨우 0.01%만이 그리스계이다. 이들은 정교회를 믿는 인구만 한정한 것으로 마찬가지로 그리스 혈통이지만 19세기 말과 터키 독립전쟁 시기 그리스에서 추방된 무슬림인 기리틀리(Giritli)의 수는 훨씬 더 많으며, 오스만 제국 시절에 터키화된 그리스계 인구는 여전히 이스탄불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갈라타 다리 (Galata Köprüsü)
사진 속 나무다리인 갈라타 다리 (Galata Köprüsü)는 여러번 불이 나서 여럿차례 재건되었다가
지금은 돌 및 콘크리트로 만든 다리로 남아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사이에는 터키의 산업화와 더불어 이스탄불의 인구가 폭증하기 시작했다. 비록 수도는 앙카라로 이전했지만 오스만 제국시절부터 남아있던 인프라는 어디 안 가고 남아있었고, 비록 그리스인들이 추방되었다지만 정작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엘리트 계급으로 군림하던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유력 가문들은 대부분 그대로 남았고, 지리적으로 유럽과 인접하기 때문에 이스탄불 위주로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스탄불 하면 오늘날 관광 중심지인 구 성벽 내와 갈라타, 위스퀴다르, 카드쾨이 정도로
한정되어 있었지만 그 전까진 논밭이나 임야지였던 곳에 시골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마구자비로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난개발이 시작되었다.
물론 정부도 가만히 있진 않아서 단속도 했지만, 이들은 공무원들이 죄다 퇴근한 밤중에 건물을 지었고, '밤에 지어진 집'이라는 뜻의 게제콘두(Gecekondu)가 여기저기 들어서자
정부도 하는 수 없이 수도와 전기를 공급해주었다.
우리나라 개발독재 시절에야 그냥 국유지 무단점유로 다 구속하고 불도저로 죄다 밀어버렸겠지만 이슬람 관념상 집없는 사람을 내쫓긴 좀 그래서 일단 지어진 집들은 인가를 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밤중에 몰래몰래 날림으로 지은 달동네가 멀쩡할 리는 없었고,
지진이나 각종 사고로 피해를 많이 겪었다.
한때 이스탄불 내 주택의 무려 65%가 무허가 게제콘두였던 시절도 있었지만,
현재는 대부분 제대로된 주택이나 아파트로 개선된 상태이다.
하지만 이미 개발된 부지에 대한 전면재개발은 현재까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게제콘두 시절 형성된 비좁고 구불구불한 도로도 개선되지 못하고 남아있어
이스탄불의 악명높은 교통정체의 원인이 되고 있다.
갈라타 다리 (Galata Köprüsü)
도개교(跳開橋)로 총 길이는 490m이고, 폭은 42m이다. 양방향으로 각각 3차선 차도와 도보가 있으며, 중앙에 트램(Tram) 노선이 지나가도록 건축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골든 혼에 처음 다리가 놓인 것은 6세기부터였다. 동쪽의 갈라타(Galata) 지구와 서쪽의 에미뇌뉘(Eminönü)를 잇는 위치에 다리를 건축하고자 처음 시도한 것은 1502년 술탄 바예지드 2세(Bayezid II, 1481~1512 재위)였다.
당시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설계를 의뢰하였으나 기술적인 문제로 건설되지 못하였다.
1845년에 술탄 압둘마지드 1세의 어머니 발리데(Valide) 왕비의 명령으로
최초의 다리가 건설되었고, 18년간 사용되었다.
1863년에 술탄 압둘아지즈(Abdulaziz, 1861~76 재위)가 다리를 재건하였고, 7년 뒤 프랑스 회사에 의해 증축되어 1875년에 완공되었다. 그 결과 다리의 길이는 480m, 폭은 14m가 되었다.
이 다리는 1912년에 철거되어 골든 혼의 상류로 옮겨졌으며, 현재 구 갈라타 다리(Old Galata Bridge)로 불린다. 1912년에 독일 회사가 놓은 새 다리는 길이 466m, 폭 25m이며, 1992년에 화재로 파괴되기 전까지 사용되었다. 현 다리는 터키 건축회사에서 제작한 것으로 1994년에 완공되었다.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은 그리스 코린토스(Corinth)에 있다. 건축가 스튜어트 톰슨(W. Stuart Thompson)이 1932년 완공한 것으로 세 개의 전시실과 대형 뜰로 구성돼 있다.
코린토스에서 발굴된 조각, 도자기, 선사시대의 유물들은 두 개의 주 전시관에 진열되어 있다. 제3전시실에 소장된 아스클레피온(Asklepieion)에서 출토된 테라코타는 예약에 의해서만 볼 수 있다.
박물관은 선사시대로부터 헬레니즘을 거쳐 비잔틴시대까지 다양한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소장품으로는 기원전 6세기경의 <대리석 스핑크스>,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의 아들로 추정되는 <젊은이의 대리석 초상>, <디오니소스의 머리가 장식된 모자이크>, <비잔틴 꽃병> 등이 있다.
출입구 옆에 도리아식(doric style), 이오니아 양식(Ionic Order), 코린토식 기둥을 전시해 놓았다.
그리스의 건축 양식
도리아식(doric style) 그리스 미술양식의 하나로 주로 건축양식에 쓰이며 간소한 장중미가 특징이다. 기둥은 기반부가 없는 형상이며, 수직방향의 흠은 매우 얕고 모서리는 각을 이루고 있다.
원래는 목조건축양식을 석조건축에 응용한 것이라고 하는데, 아폴로(Apollo), 파르테논(Parthenon), 헤라(Hera) 신전 등이 대표적인 도리아식 건축물이다.
이오니아 양식(Ionic Order), 그리스 고전 건축양식의 한 가지로, 이오니아로부터 일어나 아테네 전성시대 이래 한 세기동안을 지배하였다. 기둥에 주춧돌이 있고 곡선상의 소용돌이 모양을 한 기둥머리에 그 특색이 있는데 우미(優美)·경쾌한 느낌을 준다.
코린트 양식 (Corinthian order) 알렉산더에 의해 거대한 제국이 건설되자 그리스 미술에도 상당한 변화가 찾아오게 되는데 이는 작은 도시국가의 한계에서 벗어나 아시아까지 뻗어나간 거대한 제국에 기인한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그리스 미술과 구분되는 이 시대의 미술을 동방에 건설한 제국의 이름을 쫓아 헬레니즘 미술이라고 부른다.
이런 헬레니즘 미술에서 나타난 화려한 장식적 특징을 코린트양식이라고 하는데 코린트라는 이름은 당시 지중해 연안의 교역으로 부유한 상업 도시명이다.
아칸서스 잎을 묶은 듯한 모양의 주두(柱頭)가 특징적인 모습으로 알려져 있으며 전반적으로 건축물에 화려한 장식이 많이 가미되었다.
특히 동방에 새롭게 건설되는 도시에서 많이 나타났으며 건물은 호화롭게 장식되었다. 아테네의 올림피에이온, 에피다우로스의 원당(圓堂) 등의 열주(列柱)는 그 좋은 예이다.
이 양식은 화려한 장식효과를 즐기던 로마인에 계승되어 곧 복잡하게 구성된 콤포지트양식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건축과는 별도로 BC 7세기경 코린토스 지역에서 만들어진 동방화 양식의 도기(陶器)도 코린트양식이라고 불린다.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 앞 석상들
박물관 앞뜰에 머리가 없는 석상들이 서 있다. 로마시대 복제품들이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조각 작품과 벽화들을 동경하고 부러워했다.
그리스가 로마에 예속되자마자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수많은 미술 작품들을 반출하였다. 그리스의 조각 작품을 많은 로마인들이 소유하게 되면서
그리스에서 들여온 조각 작품들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이상한 결과이지만 이 작품을 복사한 사람들 덕분에 그리스 원작이 보전될 수 있었다. 로마시대에는 미리 조각상을 만들어 두었다가
주문자에 맞추어 두상만 따로 만들어 조립해서 납품했다고 한다.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 앞 석상들
로마인들은 그리스 조각뿐 아니라 자신의 초상 조각을 개별 주문해서 자신의 집을 장식했다. 주문자들이 전신을 제작해 달라고 하면 이상적인 신체의 모습을 고를 수 있도록 몸체 조각을 미리 만들어 놓고 주문하는 사람의 취향에 맞추어 몸체에 머리를 얹어 전신 조각으로 조립했다.
이렇게 해서 자기 집 대문 앞에 집 주인을 알리는 문패 삼아 세워 두기도 했다. 박물관 앞에 머리 없는 석상들은 아마도 이런 용도로 사용할려고 미리 만들어 놓은 몸체 조각들인 듯하다.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 출입구
리아체 청동상. 이탈리아 칼라브리아의 마냐 그레치아(Magna Graecia) 국립박물관
로마인들이 그리스 조각 작품들을 반출하기 위해 배에 싣고 가다가
폭풍우나 파도로 바다 속에 잠긴 귀중한 작품들도 많았다.
로마인들이 다른 작품들과 함께 배에 싣고 가다가 바다 속에 있던 리아체 청동상(The Riace Bronzes)이다.
기원전 5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청동 전사상 2점은
1972년 이탈리아 리아체 해변에서 발굴될 때까지 2천 여 년 동안 바다 속에 잠겨 있었다.
위 왼쪽의 머리에 띠를 맨 전사상은 피디아스의 작품(BC460~450)으로, 오른쪽 투구를 쓰고 있는 전사상은 폴리클리투스의 작품(BC430)으로 추정하고 있다.
리아체 청동상은 1972년 8월 16일, 모나스테라체에서 휴가를 즐기던
이탈리아의 젊은 화학자 스테파노 마리오티니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는 칼라브리아 근처의 리아체 해변에서 다이빙을 즐기고 있었고, 해저에서 사람의 다리로 보이는 물체를 발견한 곳은 해변에서 300미터 떨어진 거리에 수심은 8피트였다.
리아체 청동상
리아체 청동상(이탈리아어: Bronzi di Riace)은 나체의 전사를 조각한 두 점의 유명한 그리스 전신 청동상으로, 약 기원전 460년~430년 사이에 주조된 것이다. 현재 이탈리아 칼라브리아의 마그나 그라이키아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두 청동상은 각각 "A"와 "B"로 구분한다.
원래는 방패와 검을 쥐고 있었으며, 지금은 눈동자도 사라졌고 머리숱도 한 움큼 빠졌다. 주로 사용된 것은 청동이지만 이빨은 은이고 눈의 각막은 상아와 대리석, 입술, 젖꼭지, 눈썹은 구리로 되어 있다.
젊은이의 대리석 초상
기원전 550년 제물용 대리석 스핑크스
이집트의 스핑크스가 그리스로 와서 그리스 스핑크스가 되었다. 스핑크스 옆에 날개 달린 대리석 석상이 있는데 코린토스 공예 조각가의 솜씨라고 씌여 있다.
훼손되었지만 아주 아름다운 작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코린토스의 뛰어난 조각 작품이다.
로마시대의 동상들과 모자이크 등이 전시되어 있는 제3 전시관
아프로디테(Aphrodite) 대리석 초상. 고대극장에 있었던 기원전 2세기 원작의 복제품.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올림포스 12신 중 하나로 미와 사랑의 여신이다. 여성의 성적 아름다움과 사랑의 욕망을 관장하는 여신이다.
제우스의 딸이라고도 하고 우라노스의 잘린 성기에서 흐른 정액이
바닷물과 섞여 생겨난 거품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주로 탐스러운 가슴을 드러낸 벌거벗은 몸으로 표현된다.
로마 신화의 베누스와 동일시된다.
아프로디테(Aphrodite) 대리석 초상. 옥타비아 신전 페디먼트 장식의 일부.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 대리석 초상.
로마 제정의 초대 황제이자 로마 제국의 첫 번째 왕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The Julius Claudius Family)"의 시조다.
본명은 옥타비아누스이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이자 후계자였다. 카이사르 사후 경쟁자였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해
권력을 쥐었고, 공화정 로마는 제정으로 변하게 된다.
재위 기간은 기원전 27년부터 서기 14년까지이며,
죽은 뒤, 원로원과 민회에 의해 신격화되었다.
이후 모든 로마 황제들이 그의 황제명인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를 이름으로 썼다. 또한 그를 기념하기 위해 기존의 "여섯 번째 달(Sextilis)"을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바꾸어 불렀다.
그의 뒤는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큰 아들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인 티베리우스가 물려받았다. 옥타비아누스의 친구이자 유능한 군사적 조력자였던 장군 아그리파도 유명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Gaius Julius Caesar) 대리석 초상. 1세기 경 제작.
영어 단어 시저(Caesar)는 독일에서는 카이저(kaiser),
러시아에서는 차르(czar) 라고 하지만 모두 황제를 뜻하는 말이다.
황제 중에서도 실권을 장악하고 마음껏 휘두르는 전제군주나 독재자에게 이러한 호칭을 붙인다. 이 절대적인 힘을 가진 황제를 뜻하는 시저라는 단어는 실은 로마의 정치가였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부터 비롯되었다.
카이사르라는 이름이 각국에서 다르게 발음되며 모두 황제를 가리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황제가 아니었다.
네로(Nero) 흉상
네로 황제가 고린도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여 기원후 60년 경에 제작되었다.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이어지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기도 하다.
방탕한 생활로 인한 막장성과 정신병자 수준의 광기를 동시에 갖춘 인물로
오늘날까지도 폭군의 대표주자로 꼽히고 있다.
네로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제정신 아닌 짓들을 많이 저지르기는 했으나 네로 본인은 크게 잔인하지도, 정국에 아예 관심이 없지도 않았다.
단지 정치적으로 무능하고 예술가적 기질이 너무 강한데다 몇가지 심각한 실책을 저지르면서 반란으로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스스로 자살하는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후대에는 악명이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다며 동정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로마 대화재의 배후에 네로가 있었다는 루머는 거의 중상모략에 가깝다.
물론 그렇게 보더라도 네로는 분명 폭군이자 암군이었으며, 여러모로 거대한 제국 로마의 통치자 노릇을 하기에는 부적격한 인물이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스클레피에이온에서 출토된 제우스(Zeus) 두상의 모습. 고대 로마시대 제작.
주신(酒神) 디오니소스(Dionysus) 두상. 기원후 2세기.
로마 황제 카라칼라(Caracalla)의 두상.
옷 조각상
조각상
머리와 아래 치마 부분이 잘려나간 여인 조각상.
대리석으로 마치 얇고 부드러운 천을 짜듯 섬세하기 그지없다.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조각상. 기원전 1세기 후반~ 기원후 1세기 초반.
오른쪽 디오니소스(Dionysus) 흉상
디오니소스는 포도나무와 포도주의 신이며 풍요의 신이자 황홀경의 신이다. 카드모스와 하르모니아 여신의 딸 세멜레와 제우스의 아들이다.
로마 신화의 바쿠스(Bacchus)에 해당한다.
고대 코린토스 투구
고대 코린토스 투구
로마시대 조각 작품들
물, 분수가 나오는 입구
로마시대 부조작품. 원형극장 벽면에 있던 것이라고.
조각 양을 메고 있는 헤르메스
올림포스 12주신에 속하는 헤르메스는 제우스와
티탄 아틀라스의 딸 마이아(혹은 산의 님페라고도 한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전령의 신이자 여행의 신, 상업의 신, 도둑의 신이다. 날개 달린 모자를 쓰고 날개 달린 신을 신고 두 마리 뱀이 감겨 있는 독수리 날개가 달린 지팡이를 들고 있다.
헤르메스는 지상에서부터 지하까지 가지 못할 곳이 없다. 그는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지하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드리옵스의 딸 페넬로페 혹은 드리옵스와 사이에서 판을 낳았고, 아프로디테와 사이에서 헤르마프로디토스를 낳았다
로마시대 부조작품. 원형극장 벽면에 있던 것이라고.
Crafted corinthian stonecarvers 코린트식 조각가 공예
그리스인과 아마존의 전투. 코린토스 고대극장 무대에는 3가지의 주제를 묘사하는 부조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이다.
아마존(Amazons)은 복수형으로 아마조네스라고도 한다. 전투의 신 아레스와 님프인 하르모니아의 자손으로서, 캅카스 또는 소(小)아시아 지방에 살았다.
여자만의 부족이어서 남자가 태어나면 모두 이웃나라로 보내거나 죽여 버렸고,
씨를 얻기 위해서는 일정한 계절에 다른 나라의 남자와 만났다고 한다. 여자는 활을 쏘기에 편하도록 하기 위해서 어렸을 때 오른쪽 유방을 도려내 버리고 키웠다고 전한다.
싸움의 신 아레스를 숭배하며 사냥과 전투를 즐겨, 트로이 전쟁에도 참가, 아마존족(族)의 여왕 펜테실레이아는 아킬레우스의 손에 죽었는데도
아킬레우스는 아름다운 여왕의 죽은 얼굴을 사랑하였다고 한다.
영웅 헤라클레스는 아마존의 여왕 히폴리테가 가지고 있던 허리띠를 빼앗고자 원정을 하였고, 테세우스도 공격해 왔으므로, 그녀들이 나서서 반격하였으나 패하였다고 한다.
그리스인과 아마존의 전투
그리스인과 아마존의 전투
헤라틀레스의 12가지 과업 중 아리만토스의 멧돼지 생포
에리만토스(Erymanthus)는 그리스 아르카디아 북부 아카이아에 있는 산이다. 에리만토스의 멧돼지(Erymanthian Boar)는 사방으로 날뛰면서
주변 논밭을 파헤치거나 곡식을 시들게 하는 등의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헤라클레스는 네 번째 노역으로 이 메돼지를 생포하기 위해 메갈리아로 가던 중
켄타우로스들이 모여 사는 폴로에 숲으로 들어가 족장인 폴로스를 방문하였다.
폴로스는 그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포도주 항아리를 보여주는데,
오래전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켄타우로스들에게 준 선물이었다.
헤라클레스가 그에게 포도주 항아리를 열도록 하자,
물로 희석시키지 않으면 취하게 만드는 포도주 냄새를 맡고 켄타우로스들이 몰려왔다.
이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한 헤라클레스는 히드라의 독이 묻은 화살로 그들을 쏘았고,
화살에 맞은 많은 켄타우로스가 죽게 된다.
켄타우로스 중 우두머리인 알레토스는 케이론의 동굴로 도망친다. 헤라클레스가 알레토스에게 쏜 화살은 그의 팔을 꿰뚫고 형제 케이론의 무릎에 꽂히게 된다.
케이론은 영생불사의 능력이 있었기에 죽지는 않았지만, 대신 불치의 상처로 엄청난 고통을 느끼게 되자 후에 자신의 불멸을 프로메테우스에게 양도하고 죽게된다.
한편 켄타우로스 폴로스는 강력한 헤라클레스의 화살의 위력을 궁금해하며
만져보다 떨어뜨려 자신의 발굽에 찔리게 되어 죽게 된다.
메갈리아에 도달한 헤라클레스는 큰 소리를 질러 멧돼지를 수풀에서 몰아내고
골짜기에 두껍게 쌓인 눈 더미로 몰아서 지치게 하였다.
멧돼지를 생포하는데 성공한 헤라클레스는 멧돼지를 어깨에 매고 에우리스테우스에게로 갔다. 멧돼지를 보고 겁이 난 에우리스테우스는 항아리에 숨어서 멧돼지를 없애라 요청하는데, 이 장면은 고대의 화가들이 즐겨 그리는 소재가 되었다. 멧돼지는 헤라클레스가 아르고스의 왕 앞에서 때려죽인 것으로 전해진다.
신들과 기간테스(Gigantes, 거인족)의 전쟁
올륌포스 신들과 기간테스(Gigantes, 거인족)의 전쟁은 마지막 신들 간의 전쟁이었다. 올륌포스 신들은 먼저 티탄족(Titanes)과 전쟁을 치른 후에 튀폰 (또는 튀포이오스)과의 대결을 치르고
마지막으로 기간테스와 전쟁을 한다.
기간테스는 크로노스가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할 때 떨어진 핏방울을 가이아가 받아서 처녀생식으로 낳은 자식들로
바로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의 자식들이다. 그들은 티탄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올륌포스의 젊은 신들과 전쟁을 벌였다.
올륌포스 신들은 기간테스를 이기기 위해 인간 어머니들에게서 태어난 두 명의 신들이 필요했다. 그들이 바로 디오니소스와 헤라클레스였다. 이들 외에도 제우스의 자식들도 맹활약을 벌였다.
특히 아테나 여신은 자신의 유명한 별칭들 중 하나인 팔라스(Pallas)라는 이름과 동일한 거인을 만나
그의 살갗을 벗겨내 방패가죽으로 사용했으며, 또
한 엥켈라도스(Enkelados)라는 거인을 시실리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영웅을 숭배함
고대 그리스 신앙생활의 독특한 영웅숭배를 묘사한 작품.
영웅숭배는 고대 그리스 종교생활의 독특한 양상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영웅들이 죽은 후에 무덤이나 야외 신전에서 의식을 행하여 그들을 추앙하였다.
그리스인들은 그들을 기리는 무덤이나 신전에는 마치 연회인 듯한 곳에서 영웅들이 카우치 (소파와 침대의 중간 기능을 하는 의자)에 누어 숭배자의 제물들을 받는 것처럼 표현된 조각물을 봉헌했다.
레카이온 대로 서쪽에 있던 바실리카 파사드를 장식했던 프리기야 노예조각.
테베를 공격하는 일곱 장군(Seven Against Thebes)의 출발을 묘사한 석관.
테베(Thebes) 왕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친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고 친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뒤
스스로 두 눈을 찔러 장님이 되고 나라 밖으로 쫓겨났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는 1년씩 번갈아 테베를 다스리기로 하고
먼저 에테오클레스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1년이 지난 뒤 에테오클레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폴리네이케스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를 거부하였다. 아르고스로 간 폴리네이케스는 왕의 궁전 입구에서 칼리돈 왕 오이네우스의 아들로서
살인죄를 짓고 쫓겨난 티데우스와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한편 두 딸을 각각 사자와 멧돼지에게 시집보내라는 신탁(神託)을 받은 아르고스 왕 아드라스토스는
두 사람의 행색을 보고 신탁의 의미를 깨달았다.
폴리네이케스와 티데우스는 각각 사자 가죽과 멧돼지 가죽을 몸에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아드라스토스는 두 딸 데이필레와 아르게이아를 폴리네이케스와 티데우스의 아내가 되게 하였다.
아드라스토스는 두 사위가 차지하여야 할 테베와 칼리돈의 왕권을 되찾기로 하고,
먼저 테베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모았다.
아드라스토스가 총사령관이 되고 폴리네이케스와 티데우스를 비롯하여 파르테노파이오스·카파네우스·히포메돈·암피아라오스 등 7명의 장수가 군사들을 지휘하였다.
7장군에는 총사령관 아드라스토스를 빼고 이피스의 아들 에테오클로스를 넣기도 하고, 폴리네이케스 대신 아드라스토스의 형제인 메키스테우스를 넣기도 한다.
예언자 암피아라오스는 이 전쟁에서 질 것이고 전쟁에 참가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가담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 에리필레가 폴리네이케스로부터 하르모니아의 목걸이와
결혼 예복을 뇌물로 받고 부추기는 탓에 참전하게 되었다.
아드라스토스는 군사들을 이끌고 테베를 포위한 뒤 공격에 앞서 티데우스를 협상 사절로 보냈으나, 에테오클레스가 왕위를 양보하지 않을 뜻을 분명히 하여 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티데우스는 테베에 머무는 동안 테베인들과 운동시합을 하여 모두 이겼다. 화가 난 에테오클레스는 티데우스가 돌아가는 길에 50명을 매복시켜 죽이려 하였다. 티데우스는 이들과 싸워 49명을 죽이고 하이몬의 아들 마이온만 살려 주었다.
폴리네이케스는 아테네 부근 코로노스에 살고 있던 아버지 오이디푸스를 찾아가
테베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축복을 내려달라고 간청하였는데,
이는 오이디푸스의 지지를 받는 쪽이 승리할 것이라는 신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아들에게 모욕을 당한 바 있는 오이디푸스는 축복 대신 저주를 내렸다. 이에 반하여 테베 측은 승리를 보장하는 예언을 들었다.
7장군의 공격이 한창 치열할 때,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스파르토이의 자손으로서
동정을 지키고 있는 남자가 희생해야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에 크레온의 아들 메노이케우스가 성벽에서 용의 동굴로 몸을 던져 희생하였다. 이는 테베를 건설한 카드모스가 군신(軍神) 아레스의 아들인 용을 죽여 신의 저주를 산 데 대한 속죄의 의미였다.
테베의 성에는 7개의 문이 있었다. 폴리네이케스는 에테오클레스가 지키는 힙시스타이 문, 티데우스는 멜라니포스가 지키는 프로이티다이 문,
파르테노파이오스는 악토르가 지키는 보라이아이 문, 카파네우스는 폴리폰테스가 지키는 에렉트라이 문,
히포메돈은 히페르비오스가 지키는 온카이다이 문, 암피아라오스는 라스테네스가 지키는 호모로이다이 문, 에테오클로스는 메가레우스가 지키는 네이스타이 문을 각각 공격하였다.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는 격투를 벌이다 모두 죽어 오이디푸스의 저주가 이루어졌다. 티데우스는 멜라니포스와 치열한 싸움을 벌인 끝에 그를 죽였으나, 자신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티데우스는 여신 아테나의 뜻으로 불사신이 될 수도 있었으나, 암피아라오스의 방해로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이길 수 없는 전쟁에 자신을 끌어들인 폴리네이케스와 티데우스를 증오한 암피아라오스가 여신의 의도를 눈치채고 멜라니포스의 목을 잘라 티데우스에게 던져 주었던 것이다. 티데우스는 잘린 목의 골을 파먹었고 이 광경에 아테나도 그가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밖에 파르테노파이오스는 페리클리메노스가 던진 돌을 맞고 죽었으며, 카파네우스는 제우스도 자신을 막지 못할 것이라는 오만한 말을 한 벌로 제우스의 벼락을 맞고 죽었다. 암피아라오스는 페리클리메노스의 창에 찔리려는 순간, 제우스가 벼락으로 갈라 놓은 땅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결국 7장군의 테베 공략은 실패로 끝났으며 아드라스토스만이 살아서 아르고스로 돌아갔다. 10년이 지난 뒤, 암피아라오스의 아들 알크마이온 등 7장군의 후예들인
에피고노이(단수형은 에피고넨)가 다시 테베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테베공략 7장군에 관한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에서 인기있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였다. 이를 소재로 한 문학작품으로는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테베공략 7장군 Hepta epi Thēbās》,
안티마코스의 서사시 《테바이스 Thebais》 등이 있다.
디오니소스 얼굴이 있는 모자이크 바닥. 2세기 중반에서 3세기 초반 작품으로 추정.
코린토스에 있던 로마시대의 한 빌라에서 발굴된 디오니소스 모자이크. 원의 중심에 머리를 상아와 과일로 장식한 디오니소스 얼굴이 그려져 있고
그 둘레를 삼각형이 연이어진 기하학적 문양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목가적 풍경의 목동 모자이크
출입구 위 천장 아래를 장식했던 모자이크
벽을 장식했던 프레스코화
각종 신체부위 조각 작품
고대 코린토스에서는 사람이 병에 치유된 신체 부분을 점토로 만들어
치유의 신 아스클레오피스에게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각종 신체부위 조각 작품
남성 성기 조각. 매음업이 번성했던 환락과 타락의 도시 코린토스에 성병이 만연했던 까닭인듯.
석관. 코린토스 돌 조각가의 작품.
코린토스 인들은 석회석을 능숙하게 깎아 신전과 공공건물과 심지어 석관까지도 조각하였다. 코린토스인 돌 조각가들은 인기가 많아 에피다우로스와 델피의 중요한 신전을 건설하는데 초빙되었다.
고대로부터 로마, 비잔틴, 베네치아, 투르크인들에게 차례로 정복하고 정복당하며 재건설되고 보완되었다. 베네치아군과 터키군이 이곳에서 공방전을 벌이면서 외벽을 경쟁적으로 증축한 것이
현재 아크로 코린토스에서 볼 수 있는 베네치아 성채이다.
제우스 신으로부터 형벌을 받은 시시포스(Sisyphus)가 바위를 굴려서 언덕 위로 올라가야 하는 일을 영원히 반복한다는 이른바 시시포스의 산이란 전설도 간직하고 있는 곳.
바위를 어깨에 짊어지고 언덕 위로 올라가는 시시포스. 티치아노.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아크로 코린트(Acros Corinth) 성벽의 모습
아크로 코린트 (Acros Corinth)
코린트인들은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고도가 높은 이 지역에 요새를 지어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았고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을 세웠다.
고대시대에는 이곳에 많은 신전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신전이
북동쪽 정상에 있는 아프로디테 신전이며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신전 남동쪽에 있는 피레네 샘은 코린트 유적지의 페이레네(Peirene)샘과 쌍을 이루는 것으로
이 샘 덕분에 아크로코린트는 오랫동안 공격에 대항할 수 있었다.
신화에 의하면 아르테미스(Artemis)가 살해당한 자신의 아들을 위해
눈물로 마술을 걸어 여자인 페이레네를 샘으로 변신시켰다고 한다.
그리스 로마의 신화에 등장하는 시시포스(Sisyphus)는
어렸을 적부터 너무 익히 아는 이야기다.
시시포스가 산꼭대기를 향해 돌을 굴려 올리고 굴러 내려오면
다시 올리는 형벌을 받아 영원히 반복한다는 신화가 얽힌 산이 바로 눈 앞에 있다. 산꼭대기에는 베네치아 성벽에 둘러쌓인 환락의 도시가 있다.
다시 오기 힘든 여정에 꼭 올라가 보고 싶었지만 일행과의 일정상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 시시포스의 신화 이야기와 함께
인터넷의 도움으로 꼭대기를 답사한 분들의 자료를 빌려서 살펴본다.
세 개의 문을 지나야 성 안으로 들어간다는 난공불락의 요새 베네치아 성 첫 번째 문.
코린토스 유적지에서 자동차로 굽이굽이 산허리를 돌아 올라가면 성곽 정문 아래쪽에 조성된 주차장에 이른다. 이곳에서 걸어서 100 미터쯤 올라가면 외성의 제1 문을 만난다.
입구는 산의 서쪽에 있고 문은 3개가 있는데 각각 투르크식, 프랑크식,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졌다. 깎아지른 바위에 겹겹이 성벽을 쌓고 성벽과 성벽을 이어주는 성문 3개가 살짝 보인다.
시시포스(Sisyphus) 신화 이야기 01 / 아우톨리코스(Autolycos)의 도둑질을 잡아낸 시시포스
아우톨리코스는 전령의 신이자 도둑들의 수호신인 아버지 헤르메스로부터
절대로 들키지 않고 훔치는 기술을 물려받은 도둑질의 명수다.
아우톨리코스는 시시포스의 소떼를 훔친 뒤 색깔과 모양을 바꾸어 더 이상 누구의 소인지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우톨리코스의 신출귀몰한 재주도 교활한 시시포스 앞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시시포스는 소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알아채고 소의 발굽에 칼로 글자를 새겼다. 그리고는 글자가 찍힌 소의 발굽 자국이 어디로 갔는지 확인하여
아우톨리코스로 하여금 소를 훔쳐간 사실을 자백하게 만들었다.
아우톨리코스는 시시포스가 도둑맞은 소들을 되찾기 위해 찾아왔을 때
그의 소떼를 훔친 데 대한 보상으로 자신의 딸 안티클레이아를 시시포스와 동침시켰다.
일설에는 도둑질을 빌미로 시시포스가 아우톨리코스에게 딸을 요구했다고도 한다. 그 뒤 안티클레이아는 이타카의 왕 라에르테스와 결혼하여 오디세우스를 낳았는데,
결혼할 때 이미 오디세우스를 임신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래서 오디세우스는 시시포스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베네치아 성 두 번째 문.
난공불락의 천혜의 요새 아크로 코린트 .
아크로 코린트는 그리스 본토에서 가장 높은 산에 구축된 아크로폴리스이다.
그리스 시대의 아크로폴리스 위에 이곳을 지배했던 로마인들, 중세의 프랑크인들, 베네치아인들이 여러번 개축하고 증축하면서 다양한 축성 양식이 혼재된 성곽을 보여주고 있다.
아크로 코린트는 깎아지른 바위 산위에 구축된 난공불락의 요새이다. 산꼭대기와 7부에서 9부 능선을 감싼 성곽 둘레가 무려 2 Km에 달한다.
1821년 그리스가 오스만 투르크와 독립전쟁을 벌일 때에도 이 요새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어떠한 외적도 감히 범접하기 힘들만큼 험악한 지형과 성곽의 견고함이 대단해 보인다.
시시포스(Sisyphus) 신화 이야기 02 / 티로와 시시포스
시시포스와 살모네우스 (Salmoneus)는 형제였지만 사이가 몹시 나쁜 원수지간이었다. 시시포스는 델포이 (Delphoi)의 신탁에 어떻게 해야 살모네우스를 죽일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살모네우스의 딸 티로 (Tyro)에게서 얻은 자식이 살모네우스를 죽이게 될 것이라는 신탁이 내려졌다. 이에 시시포스는 티로와 결혼하였고, 티로는 시시포스에게 두 아들을 낳아 주었다. 하지만 나중에 시시포스에게 내려진 신탁의 내용을 알게 된 티로는 결국 제 손으로 두 아들을 죽이게 된다.
베네치아 성 세 번째 문.
제3문을 넘으면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던 산꼭대기에 오른다. 제1문에서 제3문까지 오르는 산길은 200여 미터 정도의 험준한 등산로이다.
시시포스(Sisyphus) 신화 이야기 03 / 이스트미아 제전의 창설
코린토스에서는 해신 팔라이몬을 기리는 이스트미아 제전이 열렸다. 코린토스에서 이 제전이 열리게 된 유래는 다음과 같다.
카드모스와 하르모니아의 딸 이노는 시시포스의 형제인 아타마스와 결혼하여 멜리케르테스를 낳았다. 하지만 이노는 자매인 셀레네가 제우스에게서 낳은 디오니소스를 돌봐주었다가 헤라 여신의 분노를 사게 되어 멜리케르테스와 함께 바닷물에 몸을 던져 죽음을 맞게 된다.
이때 돌고래 한 마리가 메가라와 코린토스 인근 해안에서 멜리케르테스의 시신을 건져다 소나무에 걸어놓았는데 이를 당시 코린토스를 다스리던 시시포스가 발견하고는 조카의 장례를 치러주었다.
시시포스는 멜리케르테스에게 팔라이몬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신으로 예우를 하였으며, 그를 기리는 장례 경기로 이스트미아 제전을 창설하였다고 한다.
베네치아 성 세 번째 문.
세 개의 문을 지나야 비로소 베네치아 성 안으로 들어간다는 난공불락의 요새.
아크로 코린트는 그리스 최고의 성채이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성채의 견고함이나 규모면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성채는 목숨과 재산을 지키는 보루이다. 이토록 험악한 바위산에 성채를 쌓는 인간의 처절한 노력과 절박한 심정을 현대인들이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런 난공불락의 성채를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희생이 따랐을 것이다.
시시포스(Sisyphus) 신화 이야기 04 / 죽음을 피한 시시포스
코린토스의 왕이 된 시시포스는 어느 날 제우스가 강의 신 아소포스의 딸 아이기나를 유괴해가는 것을 보았다. 제우스는 그녀를 오이노네 섬으로 데려가 범하여 아들 아이아코스를 낳게 하였다.
아소포스는 사라진 딸을 찾아 그리스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지만 소용이 없었다. 시시포스는 아소포스에게 아이기나의 행방을 알고 있다면서
코린토스의 아크로폴리스에 샘물이 솟아나게 해주면 알려주겠다고 했다.
아소포스가 요구를 들어주자 시시포스는 그에게 커다란 독수리 한 마리가 아름다운 아이기나를 품에 안고 오이노네 섬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해 주었다.
아소포스는 아이노네 섬으로 쳐들어갔지만 제우스는 벼락을 내리쳐서
아소포스를 다시 원래의 물줄기로 되돌려 보냈다. 이때부터 아소포스 강의 바닥에서는 시커먼 석탄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편 제우스는 시시포스의 고자질에 분노하여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보내 그를 저승으로 데려가라고 했다.
하지만 꾀 많은 시시포스는 오히려 타나토스를 속여 토굴에 감금해 버렸다.
그러자 지상에서는 아무도 죽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이에 신들은 전쟁의 신 아레스를 보내 타나토스를 풀어주었고,
타나토스는 다시 시시포스를 찾아가 기어코 저승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이를 미리 예상한 시시포스는 저승으로 끌려가기 직전에
아내 메로페에게 절대로 자신의 장례를 치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저승의 왕 하데스는 지상에서 그의 장례가 치러지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시시포스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시시포스는 아내의 경건하지 못한 행실을 한탄하며 하데스에게 다시 지상으로 보내주면 아내를 응징하고 잘못을 바로잡은 뒤 돌아오겠다고 하였다.
이에 하데스는 그를 다시 지상으로 돌려보냈다. 일설에는 하데스의 아내 페르세포네가 장례를 치르고 오라고 시시포스를 지상으로 돌려보냈다고도 한다. 그러나 지상으로 간 시시포스는 다시 돌아오지 않고 오래오래 장수를 누리며 살았다고 한다.
요새 출입문 바닥 돌은 대리석처럼 반질반질하다.
세계2차대전 때, 독일군이 주둔했을만큼 요충인 이곳은
비잔틴, 프랑크족, 베네치아, 오스만 투르크가 차례로 지배했다.
1208년 수성을 하던 레온 스구로스는 성이 함락되려하자
말을 탄 채 산 정상에서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 자결했다.
눈 앞에 성벽이 위압적으로 펼쳐지고 그 왼편으로 멀리 평야가 바다를 향해 펼쳐진다.
어느 신전에선가 사용되었을 기둥이 초소의 대들보로 재활용되고 있다.
견고한 성채는 외적을 막아낼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성곽은 외적의 공격이 아니라
내부의 분열과 타락에 의해 스스로 열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을 쌓던 절박감과 단결력은 성곽이 보호해주는
안일과 평온에 젖어 부지불식간에 무너지기 일쑤이다.
코린토스 역시 그랬다. 세상에 둘도 없는 철벽의 성채를 만들었지만,
번영이 가져다준 사치와 향락이 견고한 성채를 허물었던 것이다. 물리적 성채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들의 의지와 덕목으로 다져진 마음의 성채인 것이다.
200평 정도 되는 공터에서 고고학자들이 측량을 하고 있다. 저 돌담이 2000 여년 전에 쌓은 성이라고.
사진 앞쪽 돌 창문의 모양이 이슬람 모스크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정상 근처에는 평평한 연병장 같은 공터가 있다. 산 아래 고속도로가 평야를 가로지른다.
한때 천 여명의 여사제이자 창녀들이 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마음껏 나누어주던 신전으로 가는 길은 백척간두 절벽 위의 오솔길이다.
산 정상
시시포스(Sisyphus) 신화 이야기 05 / 시시포스의 형벌
하지만 시시포스의 속임수와 약은 행실은 나중에 저승에서 커다란 벌로 돌아왔다. 저승에서 시시포스가 받은 벌은 무거운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힘겹게 정상까지 밀어 올리면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 내렸기 때문에
시시포스는 영원히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알베르트 카뮈는 수필집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이와 같은 시시포스의 노역을 인간이 처한 실존적 부조리를 상징하는 상황으로 묘사하였다.
쇠락하는 성벽 너머로 코린토스 지협과 두 개의 바다. 이오니아해(Ionian Sea)와 에게해(Aegean Sea)가 뚜렷이 보인다.
주변엔 무수히 많은 토기 파편들이 2500여 년의 세월동안 여기에 그대로 있어 왔다.
코린토스는 항구 도시다. 그런 탓에 외지인들의 왕래가 많았고,
물산이 집산되고 상품 교역이 빈번하여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
경제적 번영은 시민들의 생활을 전반적으로 풍요롭게 했지만, 부를 축적한 사람들의 사치와 방탕한 생활은 쾌락을 추구하는 퇴폐적 문화를 확산시켰다.
물론 험한 바다를 누비는 뱃사람들의 거친 욕망을 분출시키는 해방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코린토스는 오랜 기간 항해하는 동안 억제되었던 성적 욕망을
마음껏 풀 수 있는 환락의 장소가 되었던 것 같다.
해발 575 미터의 아크로 코린토스에 있던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일천여 명에 가까운 여사제이자 창녀들이 거주했었다고 하니 코린토스의 퇴폐적 분위기가 어느 정도였을지 가늠할 수 있을 듯싶다.
정치, 경제, 종교, 사교 등 시민 공공생활의 중심지이며 대부분의 경우 로마시대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아테네와 코린토스 등의 고대 아고라(agora) 유적에서 그 규모를 엿볼 수 있다.
고대 아고라 상점
상점이 있었던 자리. 고대 코린토스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림으로 복원을 해 놓았다. 아고라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까 상점이 형성되고 자연스럽게 코린토스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던 듯.
코린토스 서쪽 레카이온 항구를 향해 길게 뻗어 있는 레카이온(Lechaion) 대로.
아고라에서 코린토스 항구까지 쭉 뻗어 난 큰 길 레카이온(Lechaion) 거리 양편을 가득 채웠을 회랑의 빈자리도 쓸쓸하다. 상점을 지나 이어지는 코린토스 정치, 종교, 상업의 중심지 아고라 터
레카이온 대로와 아크로 코린트 아우구스트 시대까지 비포장이었던 레카이온 대로는 베스파시안 시대에 도로포장이 되어 보행자 전용으로 바뀌었다.
2천 여 전에 조성된 대리석 바닥. 아크로 코린트가 바로 보인다.
대로 양쪽에 빗물이 흘러갈 수 있게 배수로를 만들고 상점들도 만들어져서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 온 상인들이 물건을 살 수 있었다.
고대에는 이 길이 바다까지 쭉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레카이온 대로의 입구에는 아고라로 들어가는 입구인 프로필라이아가 있었다. 세 개의 아치로 이루어졌고 도금한 헬리오스와 파에톤의 청동전차상이 아치 위에 놓여져 있었다.
길게 뻗은 도로 또 아고라 광장과 더불어 그 당시 상가와 신전 등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오갔으리라. 멀리 계단 중간에서 보면 바다까지 연결된 길이 반듯하게 되어 있어 바다로 갈수록 길이 넓어졌다고.
고대 코린토스 유적에서 길 만은 제자리에 세월의 흔적을 머금고 굳건하게 남아 있다.
이 길을 따라가면 코린토스의 서항인 레카이온 항에 이르고 거기에서부터 로마로 가는 뱃길이 이어졌다고 한다. 이 길을 따라 양 옆에 상점으로 이루어진 아치형 지붕의 건물이 길 가로 늘어서 있었다.
오데이온(Odeion)
오데이온(Odeion)은 고대 그리스의 음악당이나 대극장으로 지붕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당시 65만의 인구를 자랑하던 그 시절은 대단한 문화의 요람이었으리라.
그리고 번성된 도시로서 각 상점과 위락 시설 또한 대단했으리란 생각이 든다. 뒷편으로 아크로 코린트 산이 바라다 보인다.
코린토스 서쪽 레카이온 항구를 향해 길게 뻗어 있는 레카이온 대로. 코린토스의 유적지는 황량한 폐허가 되어 있다. 화려하고 흥청거리던 거리를 상상하기 어렵다.
중앙광장 아고라
현재 폐허가 된 유적지. 고린도의 지하엔 고대에 형성된 도시 유적의 한 단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529년 대지진과 1858년 지진으로 내려앉은 모습 그대로 있다. 시지프스 왕국은 그 자하도시보다 한층 더 아래에 있다고 한다.
베마 (bema). 사도 바울이 코린토스 사람들에게 1년 반 동안 기독교를 전파했던 곳.
베마란 1) 고대의 아테네에서 사용하던 낮은 연단, 2) 초기 그리스도교 성당의 아프시스에 설치된 높은 마루. 아프시스 벽 옆을 따라 사교좌(司敎座)를 중심으로 해서 성직자의 좌석을 배치하고, 프페스비테륨으로 한다.
3) 그리스 정교의 본전 프레스비테륨으로서의 아프시스 앞에 주제단을 배치하고,
그 전면에 분전장벽을 세워서 본당으로부터의 시선을 차단한다.
지성소(至聖所)라고도 하고,그 마루는 대개 본당보다 높이 만들어졌다. 4) 유대교 교회당 내의 율법 낭독용 교단을 뜻한다.
바울이 재판받았던 곳. 베마 (bema)
사도 바울이 기독교를 박해하던 유대인들의 고발을 받아 코린토스 총독 갈리오에게 재판을 받았던 장소이기도 했던 베마. 이곳은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당시 1년 6개월을 머물던 곳이라고 한다.
이 위에서 사도 바울이 기둥에 묶이고 갈리오 총독이 심문했던 곳이라고 한다.
사도 바울이 코린토스에 와서 전도를 하던 중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 코린토스의 총독 갈리오에게 고발당했다. 고발을 받은 갈리오가 당시 유대인들에게 바울에 대한 고발이 유대인들의 율법에 의한 것이니
유대인들이 알아서 하라고 연설했던 곳이 베마이다.
베마는 그리스어로 난간이라는 뜻. 그 베마가 코린토스의 아고라 한가운데에 있다. 사도 바울이 서기 51년 코린토스를 처음 방문했고, 6년 후 다시 찾았다.
사도 바울이 전도하다가 잡혀서 심문을 받을 때 묶여 있었다고 하는 바위.
KBS 걸어서 세계 속으로. 495회. 베마 고대 아테네에서 사용하던 낮은 연단. 사도 바울이 총독 갈리오에게 재판받았던 곳.
사도행전에 바울의 재판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갈리오가 아카이야 지방 총독으로 있을 때 유다인들이 작당을 하여 바울로를 붙잡아 법정으로 끌고 가서
"이 사람은 하느님을 예배하라고 사람들을 충동하여 법을 어기고 있습니다"하고 고발하였다.
바울로가 답변하려 하자 갈리오는 유다인들에게
"유다인 여러분, 만일 이 사건이 무슨 범법이나 악한 범행에 관련된 것이라면 당신들의 고발을 들어 주겠소.
그러나 이것은 말과 명칭과 당신들의 율법에 관련된 것이니만큼 당신들이 알아서 처리하시오.
나는 이런 사건을 처리하는 재판관 노릇을 하고 싶지 않소"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들을 법정에서 몰아내자 드들은 일제히 회당장 소스테네를 붙들어가가 법정 앞에서 매질을 하였다.
그러나 갈리오는 그 일에 도무지 참견하지 않았다.
<공동번역 사도행전 18장 12~17절)
"이 일이 사람들에게 더 퍼져 나가서는 안 되겠으니 다시는 아무에게도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단단히 경고해 둡시다."
<공동번역 고린도후서 4장 17절>
고대 아고라 상점터
사치와 향락에 물든 코린토스 유적지
16개의 상점이 줄지어져 있었던 레카이온 대로의 서쪽 상점터. 인구 75,000명이 거주했던 상업도시였다.
프로필라이아 입구 서쪽에는 재판장으로 사용된 거대한 바실리카가 있었다. 레카이온 대로는 10세기부터 그 중요성이 줄어들다가 1858년 지진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페이레네(Peirene) 샘
레카이온 대로의 프로필라이아 동쪽, 아고라 중앙에 로마의 상점가와 페이레네(Peirene) 샘이 있다. 중간에 기둥과 상부 가로대의 일부가 남아 있는 곳의 하부에 페이레네 샘이 있다. 벨레로폰테스가 이곳에서 물을 마시던 천마 페가수스(Pegasus)를 만났다고 한다
벨레로폰테스는 천마를 타고 키마이라를 퇴치한다. 이오바테스는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한 임무를 완수한 벨레로폰테스를
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영웅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벨레로폰테스를 죽여 달라던 사위 프로이토스의 청탁을 무시하고, 오히려 벨레로폰테스를 자신의 사위로 삼고 왕위 계승자로 선포한다.
고향 코린토스에서 추방된 벨레로폰테스는 리키아에서 자신의 무용(武勇)을 과시하고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이제 그는 소아시아의 강자 리키아의 왕이 될 사람이었다.
장밋빛 미래가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의 진정한 위기는 고난이 닥쳤을 때가 아니라 승승장구할 때 찾아온다. 성공 뒤에 오는 오만이 파멸의 위기를 몰아오는 법이다.
왕위 계승자 벨레로폰테스는 자신을 영웅으로 만들어준 페가수스의 탁월한 역량을 끝까지 시험하고 싶었다. 그는 날개 달린 페가수스를 몰아 하늘까지 올라가려고 했다.
이에 격노한 제우스는 등에를 보내 페가수스를 찌르게 하였고, 놀라 날뛰는 페가수스에서 떨어진 벨레로폰테스는 눈이 멀고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가 하늘에서 추락한 것은 곧 잘 나가던 인생의 추락을 의미했다. 추한 모습이 된 그는 절망하여 들판을 방황하다 비참하게 생을 마친다.
벨레로폰테스는 날개를 단 이카루스(Icarus)가 하늘 높이 태양까지 이르려 무한 비상을 시도하다 신의 노여움을 받아 추락하여 죽었던 그 교훈을 잊었던 것이다.
코린토스가 낳은 영웅 벨레로폰테스는 신의 성역에 무모하게 도전함으로써 파멸을 자초했던 것이다. 그리스 신들은 이렇게 늘 인간의 오만(hybris)를 심판했다. 코린토스에 와서 벨레로폰테스의 삶을 되새겨 보며 인생을 겸허하게 돌아보는 지혜를 얻는다.
페이레네(Peirene) 샘
아고라 밑에서 끌어온 물은 네 개의 거대한 저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영웅 벨레로폰테스가 괴물 키마이라를 물리치기 위해서 필요했던 페가수스를 붙잡은 곳이 페이레네 샘이다.
페이레네(Peirene)
페이레네는 강의 신 아소포스(Asopos)를 아버지로 둔 님프이다.
스파르타의 왕 오이발로스(Oebalus)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
구전과 전승에서 페이레네의 어머니에 대해 분명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일설에는 그녀가 아소포스가 라돈(Ladon) 왕의 딸 메토페(Metope)와
결혼하여 낳은 열두 명의 딸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페이레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고대 도시 코린토스에 있는 '페이레네(Pirene) 샘'에
이름을 준 명조(名祖)로도 알려져 있다.
고대인들은 이곳에 영감의 원천인 뮤즈 여신이 머무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샘물을 마시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왔다. 또한 페이레네 샘에 가면 날개달린 천마(天馬) 페가수스(Pegasus)를 볼 수 있다고 믿었다.
파우사니아스(Pausanias, 2세기경?)의 ≪그리스 이야기(Description of Greece)≫, 6세기 경 비잔틴 제국에서 활동한 지리학자 스테파누스(Stephanus of Byzantium, ?~?)의
기록에 관련 신화가 다양하게 남아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페이레네는 포세이돈과의 사이에서 레케스(Leches)와
켕크리아스(Cenchrias)라는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어느 날 켕크리아스가 죽자 아들을 잃은 슬픔에 휩싸인 페이레네는 너무 울다 그만 샘물이 되어 버렸다.
고대 코린토스에는 레케스와 켕크리아스의 이름을 딴 항구들이 있었다고 한다.
다른 전승에 따르면 페이레네 샘은 강의 신 아소포스가 딸 아이기나(Aigina)를 납치한 자의 이름을 가르쳐준 대가로 코린토스의 왕 시시포스(Sisyphus)에게 만들어 준 것이라고 한다.
수로의 흔적. 수량이 풍부하여 우물은 근대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레카이온 대로 옆 상점터.
레카이온 대로 양쪽으로 상점과 신전, 목욕탕 등 공공건물들이 있었다.
레카이온 대로 옆 건물터.
고대 아고라 상점터
현재 남아있는 코린토스 유적지는 기원전 3세기에 로마인들이 파괴했던 고대 그리스 유적지 위에 자신들이 새롭게 재건한 유적이다.
레카이온 대로 옆 건물터.
고대 코린토스에서 가장 큰 전랑이 있었던 건물 중의 한 곳.
71개의 도리아식 열주(列柱).
열주랑 뒤편에는 우물과 와인저장소, 식당과 상점들이 있었고, 주랑의 한복판에 기원후 1세기 켄크레아이 항구와 이어지는 긴 포장도로가 만들어졌다.
도리아식 열주랑(列柱廊)
안쪽에는 길이 164m나 되는 37개의 이오니아식 열주로 이루어진 열주랑이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다 무너졌다. 원형을 보존했다면 참으로 장관이었을 듯.
열주랑(列柱廊)과 시시포스(Sisyphus)의 영원한 형벌 장소 아크로 코린토스
시시포스(Sisyphu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코린토스의 왕으로 코린토스 시의 창건자이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에피라였다. 교활하고 못된 지혜가 많기로 유명했다.
시시포스는 제우스의 분노를 사 저승에 가게 되자 저승의 신 하데스를 속이고 장수를 누렸다. 하지만 그 벌로 나중에 저승에서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영원한 형벌에 처해졌다고 한다.
시시포스는 그리스인의 시조 헬렌의 아들인 아이올로스와 에나레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살모네우스, 아타마스, 크레테우스와 형제이다.
시시포스는 플레이아데스 자매 중 한 명인 메로페와 결혼하여
글라우코스, 오르니티온, 테르산드로스, 할모스 등 네 아들을 낳았다.
글라우코스는 니소스의 딸 에우리노메와 결혼하여 영웅 벨레로폰을 낳았다. 하지만 벨레로폰은 에우리노메가 해신 포세이돈과 정을 통해서 낳았다는 설도 있다. 일설에는 라에르테스와 안티클레이아의 아들 오디세우스가 실은 시시포스와 안티클레이아 사이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사우스 스토아(South Stoa)를 지나 박물관 후문으로 가다보면 서 있는 옥타비아 신전의 열주(列柱).
아우구스투스의 여동생 옥타비아에게 바쳐진 신전.
처음에는 여섯 개의 도리아식 열주를 가진 형태였지만 아우구스투스 사망 이후 이 신전은 3~4미터의 단위에 코린트식 기둥이 세워지고, 가로 12개 세로 6개의 기둥으로 둘러쌓인 형태로 바뀌었다. 페디먼트에는 아폴론, 아프로디테 등의 장식이 있었지만 지금은 일부만 남아서 코린토스 고고학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옥타비아 신전 기둥 확대 부분
옥타비아 신전 기둥 확대 부분
옥타비아 신전의 경우 코린트인이 창안해낸 화려한 코린트 양식의 머리 기둥으로 건립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기둥의 일부와 기둥이 받친 가로대의 일부일 뿐이지만, 아칸서스 잎을 부조한 화려한 코린트 양식의 아름다움을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다. 풍요를 넘어 사치스런 도시였던 코린트에서 여성미가 풍기는 코린트 양식이 창안된 것도 자연스런 결과인 듯싶다.
옥타비아 신전 기둥 확대 부분. 아칸서스 잎 문양으로 화려하게 부조되어 있다.
옥타비아 신전을 배경으로 기념 인증샷
코린토스 박물관 (후문). 옥타비아 신전의 열주 앞에 있다.
코린토스 유적 / Corinth Remains / Apollo Temple / Acanthus
고대 그리스에서 상업과 문명이 가장 번성했던 곳. BC 146년 로마군이 침입해 폐허로 만들어 버린 것을 로마 황제 카이사르(Caesar)가 BC 44년에 재건함
코린토스 유적지 조감도
유물과 역사를 연구해서 추정한 당시의 조감도를 찍은 사진. 아폴론 신전 터 바로 옆이 고대 아고라 광장. 이곳에는 역시 오데온, 스토아를 비롯해 화려했던 고대 코린토스 시가지의 각종 건물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아폴론 신전과 글라우케(Glauce)의 샘
글라우케(Glauce)의 샘
글라우케(Glauce)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코린토스 왕국 크레온 왕의 공주로 크레우사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이아손은 글라우케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인 메데이아를 버리고, 이에 메데이아는 복수하기로 마음먹는다. 글라우케는 메데이아가 결혼 선물로 보낸 웨딩드레스를 입고 불길에 휩싸여 죽는다.
이아손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버지와 조국을 배반하고 동생까지 끔찍하게 죽인 메데이아, 그녀는 이아손과 함께 이올코스로 와서 이아손의 아버지 아이손을 회춘시켜주고, 아이손의 왕위를 찬탈한 아이손의 의붓형 펠리아스에게 처참하게 복수를 한다.
이아손은 메데이아가 이올코스에서 행한 잔인한 복수 때문에 고향에서 쫒겨나 코린토스로 망명한다. 이아손과 메데이아는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의 환대 속에서 자식들을 낳고 행복한 삶을 누린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마법의 힘을 가진 이방인 메데이아를 꺼려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들이 없는 크레온 왕은 이아손을 자신의 딸인 글라우케와 결혼시켜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하고, 섬뜩한 느낌을 주는 메데이아에게 싫증이 난 이아손은 왕의 제안을 수락한다.
그리고는 메데이아에게 자신이 공주와 결혼하는 것은 공주를 원해서가 아니라 이방인 마녀인 그녀를 구하고 자식들에게 왕가의 피가 흐르는 형제자매를 만들어주어 안전한 울타리를 만들어주기 위함이라고 변명을 한다.
한편 메데이아가 공주에게 치유할 수 없는 재앙을 가져오리라고 예감하는 크레온 왕은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계획에 장애물이 될 메데이아와 그녀의 자식들에게 추방령을 내리고, 이아손은 글라우케와의 결혼에 마음이 들떠 메데이아와 자식들은 안중에도 없다.
이아손을 위해서라면 어떤 끔찍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메데이아는 이아손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떠난 것을 확인하고 처절하게 복수하기로 결심한다.
메데이아는 크레온 왕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척 하면서 아이들을 위해서 하루만 머물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크레온 왕으로부터 하루의 기한을 얻은 메데이아는 그 하루 동안에 이아손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기로 결심하고 크레온 왕과 글라우케 공주 그리고 남편 이아손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
메데이아는 글라우케에게 결혼 축하 선물로 할아버지인 태양신 헬리우스가 자손들에게 준 값진 장신구와 함께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자신할 수 있는” 그러나 독이 묻은 웨딩드레스를 보낸다.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글라우케는 신랑의 전처인 메데이아가 보낸 선물을 보고 기뻐하며 웨딩드레스를 입어본다. 옷을 입는 순간, 글라우케는 옷에 묻은 독이 몸에 퍼지면서 온 몸에 불이 붙는다. 결국 글라우케는 불길에 싸여 숨을 거두고, 딸을 구하고자 한 크레온도 불에 타 죽는다.
나중에 코린토스 지역에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글라우케는 연기를 견디다 못해 우물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이후로 그 우물은 글라우케 샘이라고 불리운다. 글라우케는 그리스 말로 푸른 물빛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글라우케의 샘 언덕의 송수관을 통해 글라우케의 샘에 있는 4개의 저수지가 채워진다고 한다.
글라우케를 살해한 메데이아의 뒷이야기
이아손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온갖 끔찍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메데이아는 이아손의 새 신부 글라우케를 살해하고 난 후 이아손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에게 죽음보다도 더 큰 괴로움을 주기로 결심한다.
메데이아는 급기야 이아손에게 낳아준 자식들, 메르메로스와 페레스를 죽인다. 그리고는 태양신 헬리오스로부터 날개달린 용들이 끄는 수레를 얻어 타고 아테네로 도망간다.
아테네의 왕 아이게우스는 메데이아를 따뜻하게 맞이해주고는 그녀와 결혼하여 아들 메도스를 낳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를 모른 채 자라 어른이 된 테세우스가 아버지 아이게우스 왕을 찾아온다.
메데이아는 테세우스의 정체를 파악하고는 그를 죽일 음모를 꾸민다. 아이게우스는 메데이아의 음모로 테세우스가 위험에 빠진 결정적인 순간에 그가 자기 아들임을 알게 된다. 아이게우스는 테세우스를 구해내고는 메데이아를 추방한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메데이아는 다시 조국 콜키스로 돌아가는데, 아버지 아이에테스가 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긴 것을 알고는 아버지를 다시 왕위에 올린다.
아폴론 신전과 코린토스 상점터 유적지
고대 코린토스가 쇠락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로마의 파괴와 약탈 때문이었다. 코린토스는 기원전 146년 로마군을 막기 위해 아카이아 동맹군(펠로폰네소스 반도 도시국가들의 동맹)을 형성하지만 아카이아 동맹군은 로마에 대패하고 만다.
로마의 장군 무미우스는 코린토스를 약탈하고 철저하게 파괴했다. 기원전 44년 코린토스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간파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자신의 병사들이 살아 갈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코린토스 재건을 시작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완성하지 못한다.
그러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코린토스는 재건설되어 옛날의 부귀와 영화를 되찾았다. 사도 바울이 왔을 때 코린토스는 로마 속주 중 가장 발달하고 부유한 곳이었다.
아폴론 신전과 코린토스 상점터 유적
옛 코린토스 유적지에 지금까지 남아있는 아폴론 신전. 이것도 로마시대에 파괴된 것을 재건한 유물이다. 이 지역은 코린트가 번성할 당시 정치적, 종교적, 상업 중심지역.
코린트는 기원전 8세기에 문명이 시작되어 기원전 5세기에는 그리스에서 중요한 도시국가중의 하나로 발전.
기원전 146년에 로마에 파괴. 이후에 로마에 의해 새로운 부흥시기를 맞는다.
바다와 항구가 보이는 코린트 유적지 전경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방문한 알렉산더. 세바스티아노 리치. 18세기 이탈리아 화가.
거지 철학자 디오게네스와 세기의 영웅 알렉산드로스
벨레로폰테스의 성공과 몰락이 코린토스 사람들에게 히브리스를 경계하도록 해주었다면, 거지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허영과 쾌락에 흥청거리던 코린토스 사람들에게 검소한 삶을 통해 절제의 미덕을 가르쳐주었다. 절제 곧 소프로쉬네(sophrosyne) 또한 그리스 인들에게 중요한 삶의 좌표가 된 덕목이었기 때문이다.
코린토스에 기인 철학자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알렉산드로스가 디오게네스를 찾아왔다. 그는 당당한 모습으로 디오게네스에게 ‘그대는 짐이 두렵지 않은가’ 물었다.
디오게네스는 ‘도대체 당신은 누구입니까? 선한 자입니까? 아니면 악한 자입니까?’라고 되물었다. 알렉산드로스가 ‘물론 선한 자이다’라고 대답하자, 그는 ‘그러면 누가 선한 자를 두려워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디오게네스의 침착함이 빛나는 대목이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알렉산드로스와 디오게네스의 일화는 ‘햇빛’과 관련된 것이다. 디오게네스가 담대하고 욕심 없는 사람이라는 점은 알렉산드로스가 디오게네스에게 ‘나에게 원하는 소원이 있으면 말해 보라’며 그리스 전역을 굴복시킨 왕의 위세를 과시했을 때 나타났다.
디오게네스는 단지 ‘부디 햇볕을 가리지 말아주시오’라고 응대했던 것이다. 순간 불쾌해진 알렉산드로스가 칼을 뽑아 그를 죽이려하다가 멈추고, 이내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 디오게네스는 코린토스 사람은 아니었다. 또 일찍부터 철학을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지금의 터키의 흑해 연안의 그리스 식민 도시인 시노페 출신이었다.
그의 부친은 환전상이었는데, 통화를 조악하게 개조하는 바람에 투옥되어
감옥에서 죽고 디오게네스는 조국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아무튼 디오게네스가 위폐 주조라는 황당한 사건을 저지르게 된 배경이 흥미롭다. 그는 세상에서 큰 명성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델포이의 신탁을 구했다. 신탁은 ‘나라 안에서 적용하고 있는 것을 바꾸라’는 것이었다.
이 신탁의 의미는 통용되는 제도와 문화를 혁신하라는 뜻이었지만, 디오게네스는 화폐의 개주(改鑄)로 잘못 해석했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그는 멀리 아테네로 망명했고, 이런 과거는 종종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된다. 그때마다 그는 더 이상 과거의 부정한 행위를 했던 자신이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하곤 했다.
디오게네스가 극도로 청빈한 철학자가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위조 화폐 주조 사건이 계기가 된 것 같다. 그가 조국에서 추방당한 후 아테네로 망명하여 금욕주의 철학인 키니코스학파(Cynics, 견유 학파)의 창시자인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 BC 445?~BC 365?)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견유(犬儒)학파라는 명칭에서 혹 ‘개 같은 삶’과 무슨 연관이 있나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사실 키니코스학파라는 명칭은 안티스테네스가 자주 들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던 체육장의 이름 키노사르게스(kynosarges)에서 유래되었다. 키노사르게스는 '흰 개‘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디오게네스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안티스테네스를 만남으로써 소크라테스의 집요한 지혜 추구 정신과 스승 안티스테네스의 지독한 절제의 정신을 배워 무욕(無慾)과 자족(自足)의 철학을 실천하는 철학자로 거듭났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 “조국을 빼앗겨 나라도 없고 집도 없는 자. 일상의 양식을 동냥하고 방황하는 인간”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디오게네스는 어린애가 두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시는 것을 보고, 자신의 바랑에서 컵을 꺼내 내던졌고, 어린애가 빵의 패인 곳에 수프를 넣어 먹는 것을 보고 자신의 밥그릇도 내던졌다. 그가 통나무로 만든 술통에서 살았던 것도 간소한 삶을 실천하는 방안의 하나였다.
디오게네스가 아테네를 거쳐 환락이 넘치는 코린토스까지 간 것도 끝없는 욕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대중들의 그릇된 삶에 경종을 주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디오게네스는 대낮에도 등불을 켜고 다니며, ‘나는 인간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스스로 노숙자와 같은 자신의 삶을 탐욕에 찌든 코린토스 시민들에게 보여주면서 육체적 안락과 쾌락을 멀리하고 덕을 쌓을 것을 권면했던 것이다.
그는 “경주를 할 때에는 옆 사람을 팔꿈치로 치거나 발로 차거나 해서 사람들은 서로 겨루려는데, 훌륭하고 선한 인간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 한 사람 서로 겨루려고 하는 자가 없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디오게네스는 그리스 사회에 만연한 쾌락과 탐욕의 사회 문화를 지혜와 덕을 추구하는
아름다운 사회 풍조로 바꾸려 애썼던 것이다. 이는 자신이 받았던 신탁의 본래의 참뜻인 나라에 통용되는 사회문화를 바꾸는 소명을 실천했던 셈이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후세에까지 명성이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노력이 완전한 결실은 거두지 못했지만, 늘 사회의 목탁 역할을 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듯싶다. 디오게네스가 죽은 후 코린토스 시민들이 그를 찬양하여 청동상을 세우고 시구를 새겼던 것이 이를 입증해 준다.
청동도 세월이 지나면 늙는 것. 하지만 그대의 영예는 디오게네스여, 영원히 썩지 않으리. 그대만이 홀로 죽어야 할 자들에게 자족(自足)하는 방법과, 가장 쉬운 삶이 길을 가르쳤으므로.
디오게네스는 지협(地峽) 이스트모스로 통하는 성문 옆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그곳이 어딘지는 알 수 없다.
또 지금의 코린토스에서 디오게네스가 거닐던 체육장인 크라네이온(Craneion)이 어디쯤인지도 찾을 길이 없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검약과 절제의 삶은 사치와 방탕에 빠져 갖가지 유혹에 노출되어 있던 코린토스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욕망의 제동장치가 되어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아폴론 신전 유적지 전경
아크로 코린토스(Acros Corinth)를 배경으로 서 있는 아폴론 신전
아크로 코린토스(Acros Corinth)는 제우스 신으로부터 형벌을 받은 시시포스가
바위를 굴려서 언덕 위로 올라가야 하는 일을 영원히 반복한다는 이른바
시시포스의 언덕이란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아폴론 신전
코린토스가 전성기였던 기원전 6세기에 다른 신전이 있던 자리에 태양신 아폴론을 모시기 위해 세워졌다. 가로 53m 세로 21m의 대좌를 38개의 기둥이 감싸는 모습이었고 내부에는 16개의 기둥이 신전을 떠받치고 있었는데 지금은 기둥 7개만 남아 있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은 중간중간 잘라져 만들었는데 여기 아폴론 신전은 한덩어리의 돌로 만들어진 도리아식 기둥이 특징이다. 도리아식은 남성미가 풍기며 간결하고 장중하다.
고대 코린토스 유적 중 유일하게 그리스 유적이며, 올림피아의 헤라신전 다음으로 오래된 신전이라고 한다. 돌 하나로 만들어진 기둥으로 신전을 만든 것이 다른 신전과 구별되는 특징.
아폴론 신전
지역에서 생산되는 석회석으로 만들어졌는데 신전을 둘러싸는 38개의 도리아식 기둥과
내부의 16개 기둥으로 이루어진회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폴론 신전
신전의 내부는 분리된 2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고, 지붕은 화려한 건축적 요소들로 장식되었다고 한다. 로마인들 역시 신전으로 사용했다가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로는 교회로 사용되었다.
아폴론 신전을 배경으로 인증샷
코린토스에 남겨진 유적 / Ruins/Sanctuary of Apollo / Lechaion road / Bema
코린토스 (Korinthos)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잇는 코린트 지협(地峽)에 있었던 고대 폴리스 및 현대도시.
코린트(Corinth)라고도 한다.
그리스 남북육상교통의 요지인 동시에 이오니아해(海)와 에게해를 잇는 해상교통의 요지였다.
호메로스의 시(詩)에는 중요한 도시로 되어 있지 않으나, 시(市)의 유적에서
미케네 시대 전기의 도기(陶器)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먼 옛날부터 번영해 온 도시임을 알 수 있다.
코린토스 시는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상업 ·무역으로 크게 번영을 누려 왔고,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가 쇠퇴한 헬레니즘시대에도 상업도시로서 번성하여 ‘헬라스의 별’이라고 일컬어졌다.
일찍부터 그리스 제일의 도기제조 중심지가 되어 코린트식 도기를 생산하였으나,
나중에는 그 지위를 아테네에 빼앗겼다.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고대에는 여러 차례 국제회의의 개최지가 되었다. BC 146년 로마가 이를 철저히 파괴해버렸는데, BC 44년에 재건되어 다시 번영하였으며,
신약성서에도 그 이름이 나온다(고린도書).
그러나 521년에 지진으로 큰 타격을 입어 중세 이후 쇠퇴하다가 1858년 지진으로 다시 파괴되었다.
고대의 코린토스는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하고 부유한 도시 국가 중 하나로,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동쪽의 좁다란 지협에 위치하고 있어 무역 활동이 수월했기 때문에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기원전 8세기부터 6세기 중반까지 코린토스는 주요한 도기 수출 국가였으며, 그리스 세계 전역에서 동물, 전사, 식물 모티프의 프리즈로 장식된 코린토스의 특징적인 작은 플라스크가 발견되었다.
고대 코린토스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들 중 하나는 아크로코린토스 아크로폴리스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고용되어 있던 수많은 매춘부들로 유명한 아프로디테 신전이다.
코린토스의 두 번째 참주인 페리안드로스 치세 때인 기원전 7세기에는 대단한 기술적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고전 건축 양식 중 세 번째인 매우 장식적인 코린트 양식이 발전했다.
루키우스 뭄미우스가 통치하던 때인 기원전 146년 로마인들이 이 도시를 파괴했으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4년 다시 재건하여 이 도시에는 남부 그리스의 정부가 위치하게 되었다.
신약 성서에 많은 글을 남겼으며 성 베드로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초기 기독교 전도자였던
사도 바울은 서기 51년 처음으로 코린토스를 방문했다.
그는 6년 후 도시를 다시 찾았고, 두 편의 서간을 썼다.
바로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로, 신약 성서에 포함되어 있다.
현재의 새 코린토스시는 구(舊)코린토스시의 북동쪽 약 5 km의 지점에 있으며
코린토스현(縣)의 주도(主都)이다.
코린트만의 연안에 위치하며 아테네 등의 도시와 철도 ·간선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자체자원은 거의 없으며, 카란토(코린토스의 건포도라는 뜻) · 올리브유 · 견직물 ·
펠로폰네소스의 북동부에서 생산되는 곡류 등을 수출하고 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위성 사진
코린토스 만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본토 사이의 좁고 긴 만이다. 서쪽으로는 이오니아해(Ionian Sea)와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은 코린토스 지협으로 막혀 있다. 코린토스 지협에는 코린토스 운하가 건설되어 있어 에게 해로도 연결된다.
아테네와 코린토스 지도
이오니아해(Ionian Sea)와 에게해(Aegean Sea) 사이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코린토스가 있다. 아가야(Achaia)는 고대 그리스 마게도냐 남단의 지명으로 수도는 고린토스. 고린도 교회가 있었다.
바울이 2, 3차 전도여행 때 방문했던 로마의 한 속령으로 고대 그리스 마게도냐 남단을 일컫는다(롬 15:26; 살전 1:7). 원래는 펠로폰네소스 북쪽의 비옥한 지역을 말했으나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마게도냐를 포함한 넓은 지역을 아가야라고 불렀다.
BC 27년에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아가야를 분할하여 다시 북쪽을 마게도냐로, 남쪽을 아가야로 명칭했다. 바울 당시 아가야 총독은 갈리오, 수도는 고린토스였다(행 18:12; 고후 1:1).
마케도니아(Macedonia)는 바울이 선교했던 유럽의 첫 지역이다.
발칸 반도의 그리스 북쪽에 위치했던 왕국이다.
마케도니아는 BC 7세기경 페르디카스 1세가 세웠으며,
BC 4세기 알렉산더 대왕 때 전성기를 맞아 그 세력이 인도에까지 미쳤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 이후에는 분열하였고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성경에서도 마케도니아는 바울이 선교했던 유럽의 첫 지역.
바울은 마케도니아의 네압볼리, 빌립보, 암비볼리, 아볼로니아, 데살로니가 등을 방문했다.
(행 16:12; 17:1; 고전 16:5; 고후 7:5; 빌 4:15; 살전 4:10; 딤전 1:3).
마케도니아의 성도들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를 위해 헌금했고
바울이 마케도니아를 떠나 아가야로 갈 때 바울을 유일하게 후원하였다.(롬 15:26; 고후 8:1-5; 빌 4:15)
코린토스(Corinth)는 그리스의 항구 도시로 상업과 무역이 번창한 상업도시이자
동서문화와 종교의 혼잡을 이루었던 도시이다.
BC 8세기경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지닌 도시였으나 BC 146년에 로마의 뭄미우스 장군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BC 46년 율리우스 시이저에 의해 재건되어 로마인들이 이주하여 살았다.
그 후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아가야 지방의 수도가 되었으며(BC 27)
상업, 무역, 정치의 중심지로 번창하였다.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극장이 있었고 여기서 운동경기가 수시로 열렸다. 코린토스에는 적어도 12개의 신전이 있었는데 도시 중앙에는 아폴로 신전이 있었고
북쪽에는 치료의 신인 아스클레피우스 신전이 있었다.
또 코린토스에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바쳐진 신전이 유명했다.
이곳에는 1,000명 정도의 신전 매춘부들이 있어 도시 전체를 도덕적으로 타락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코린토스인이 되다’라는 헬라어 ‘코린티아조마이’(Korinthiazomai)가
‘성적으로 부도덕하게 되다’라는 의미를 가질 정도였다. 이러한 도시의 타락은 코린토스 교회 내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전 5:1).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 지도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때 이곳에 들러 1년 반 동안 머물면서 전도하여 고린도 교회를 세웠다(행 18:1-11). 바울은 이곳에서 로마서,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후서를 썼다.
바울 이후 교회 역사에서 고린도는 중요성을 잃어갔으며,
1458년 사라센에게 점령되었고 1858년 대지진으로 폐허의 도시가 되었다.
위성 사진으로 본 코린토스 운하
코린토스 운하(Corinth Canal)는 코린토스 만과 에게 해의 사로니코스 만을 연결하는 운하이다. 코린토스 지협을 따라 1881년부터 1883년까지 6.3 km의 길이로 건설되었다. 운하의 폭이 24m, 깊이가 8m로 규모가 작기 때문에 운하를 이용하는 선박은 대부분 관광용 여객선이다.
위성 사진으로 본 코린토스 운하
코린토스가 일찍부터 그리스 세계의 상업 중심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를 잇는 동시에 두 만의 바다를 이어주는 지협에 위치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배라도 한쪽 바다에서 다른 쪽으로 옮기는일은 고되고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 까닭에 고대부터 이 지협에 운하를 파려는 수많은 계획과 시도가 있었다.
고대 코린토스와 코린토스 다리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
이미 기원전 6세기 초에 코린토스의 참주 페리안드로스는 이곳에 운하를 팔 계획을 세웠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로마의 칼리굴라 황제 역시 운하를 팔 계획을 세웠지만 비명횡사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못했다.
그러나 네로 황제는 6000명의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에서부터 코린토스로 이주시켜 운하를 파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공사는 골족의 로마 침입으로 중단되었지만 유대인들은 계속 코린토스에 남아 살게 되었다. 이 유대인들이 나중에 사도 바울을 맞아 코린토스에 유럽 최초의 그리스도교 교회를 세우게 된다.
코린토스 운하 전경
운하의 양쪽 끝에는 조그만 포구가 있고 운하의 양쪽을 차가 다닐 수 있도록 수면에서 겨우 몇 미터 떨어져 있는 나지막한 다리가 놓여 있다.
이 다리는 배가지나갈 때는 물밑으로 가라앉는다. 다리가 가라앉고 그 위를 배가 지나는 광경은 평화롭기만 하다.
코린토스 운하 (Corinth Canal)
길이 6.3km. 바닥 너비 21m. 표면 너비 25m. 깊이 8m. 프랑스 자본으로 1882∼93년에 굴착되었다. 이 운하가 완성됨으로써 아테네의 외항 피레에프스와 이탈리아의 브린디시 사이의 항로를 320km 단축하였다.
예로부터 이 운하를 만들 계획이 있었으며,
로마의 황제 네로도 6,000명의 유대인 포로를 동원하여 공사에 착수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운하의 수면 위 60m에 길이 33m의 다리를 놓았으나 철도교(鐵道橋)는 폐쇄하였다. 수위가 일정하여 갑문이 없으나 약간의 조류에도 항행에 주의가 필요하다.
여객선이 오가는 코린토스 운하
2006. 03.11 코린토스 운하 방문 기념 촬영
2006. 03.11 코린토스 운하 방문 기념 인증샷
멀리 보이는 쪽이 에게해(Aegean Sea), 안쪽이 이오니아해(Ionian Sea)이다. 운하를 가로지르는 80m 다리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난간을 붙들고 있는 손에서 땀이 솟고 발끗이 찌릿해 온다. 다리 아래로 고개를 내밀어 물빛을 쳐다보고 있으면 고소공포증이 밀려와 두렵기도 하다.
코린토스 운하 다리
코린토스 시내
KBS 걸어서 세계 속으로. 495회. 고대 코린토스
도시 사이에 뚫린 코린트 운하 / Corinth Canal / Peloponneso s / Railroad brid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