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로 베루게테 〈종교재판을 주재하는 성 도미니쿠스 데 구츠만〉 패널에 유채 / 154×92cm / 1493~1499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0층 57b실


페드로 베루게테(Pedro Berruguete, 1450~1504)는 스페인 출생이지만 이탈리아로 건너가 우르비노의 공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Federico da Montefeltro)의 후원을 받으며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조반니 산티 등과 함께

그곳 궁정 벽화 작업에도 참여한 바 있다.


훗날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이탈리아에서 전수받은 르네상스 회화의 전통을 스페인에 이식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말년에 그는 주로 톨레도에 머물면서 대성당이나 부속 수도원을 장식하는 벽화를 그렸다.


〈종교재판을 주재하는 성 도미니쿠스 데 구츠만〉은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창시자인

성 도미니쿠스 데 구츠만(St. Dominicus de Guzman, 1170~1221)이 툴루즈에서 이단인 알비니파를 화형시키는

13세기 초엽의 종교재판을 주재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는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전통적인 복장인 하얀 옷에 검은 망토를 두른 채 한 손에 백합을 쥐고 서 있다.
그림 속 그는 이단자들을 용서하라고 명하고 있다.


그림 왼쪽에는 역시 도미니쿠스 수도사 복장을 한 남자가 이단자를 끌고 온다.
그림 오른쪽에는 화형식 모습이 보인다.


도미니쿠스가 서 있는 단상 등은 원근법에 입각해 그려졌지만,

인물 군상은 그림 전체의 비율에 그다지 맞지 않아 보인다.


성 도미니쿠스 데 구츠만은 로마의 스페인 총독 아들로 태어나 발렌시아 대학에서 수학한 뒤

성직자가 되어 평생 이단과 맞섰으며 도미니쿠스 수도회를 창시했다.


화가들은 그의 현명함을 강조하기 위해 주로 이마에 별을 단 모습으로 그리곤 했으며,

그가 순결한 삶을 살았다 하여 백합과 함께 그리기도 했다.


종교재판은 원래 12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황 루키우스 3세(Lucius III, ?~ 1185)가

이단으로 지목된 카타리파를 처벌하기 위해 시작했다가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된다.


스페인의 종교재판은 1478년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1세가 결혼해

통일 왕국을 이루면서, 무어인들의 침략 기간 동안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온 유대인과 무슬림을 내쫓기 위해

더욱 잔인하고 무모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종교재판은 16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로테스탄트를 탄압하는 방편으로도 이용되었다.
피비린내 나는 종교재판은 종교적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적을 없애거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악용되는 사례가 많아 스페인 지식인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스페인에서 종교재판은 1834년 이사벨 2세 시대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으로 금지된다.

로베르 캉팽 〈세례 요한과 프란체스코파의 하인리히 폰 베를〉 패널에 유채 / 101×47cm / 1438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8실


로베르 캉팽(Robert Campin, 1375?~1444)은 현재의 벨기에 지역 투르네에서 태어났다.

한동안 이 화가에 대한 정보가 없어 그저 ‘플랑드르의 거장’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는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5?~1441)와 함께 세심하고 정교한 선과 화려하고 선명한 색을 구사하는

플랑드르 초기 회화의 전통을 개척하고,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 같은 제자를 대가로 키우기도 했다.


아래〈성녀 바르바라〉와 함께 이 두 작품은 세 폭으로 된 제단화의 양쪽 날개에 해당하는 그림으로

중앙 그림은 현재 분실된 상태이다.


〈세례 요한과 프란체스코파의 하인리히 본 베를〉 속 세례 요한은 성경의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두르고”

《마태복음》 3장 4절의 구절처럼 동물의 털이 달린 가죽옷을 입고 있다.


그는 인류를 대신하여 희생한 예수를 의미하는 어린 양을 대동한 모습으로 자주 그려졌다.

그림 속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등을 지고 앉아 기도에 열중하는 수도자이자

이 그림의 주문자이기도 한 하인리히 폰 베를(Heinrich von Werl)을 쳐다보고 있다.


아마도 그는 지금은 분실된 중앙 그림 속 누군가를 향해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중일 것이다.
그림 속에는 오목한 거울이 보이는데, 이는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 속 거울을 떠올리게 한다.
거울 속에는 창틀이 비치는데, 가운데 십자가 모양이 예수의 수난을 상기시킨다.

로베르 캉팽 〈성녀 바르바라〉 패널에 유채 / 101×47cm / 1438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8실


〈성녀 바르바라〉는 얼핏 보면 수태고지의 마리아로 읽힌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그림은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자신의 그림

〈수태고지〉를 고스란히 본떠 다시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보통 백합이나 빈 물병 등은 마리아의 순결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녀 바르바라를 상징하는 지물이라 할 수 없다.
성녀 바르바라는 4세기 초 막시미아누스 황제 시절에 산 어느 작은 나라의 공주였다.


《황금전설》에 따르면 바르바라의 아버지는 미모가 출중한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탑을 세우고

그 안에 가두어놓았으나 그녀를 흠모한 구혼자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정작 바르바라는 탑에 갇혀 있는 동안 기독교로 개종해 자신이 갇힌 탑에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세 개의 창을 내도록 건축가에게 부탁할 정도가 되었다.


아버지는 그녀의 개종에 크게 노하여 딸을 직접 사형시킨다.
이 그림에서 바르바라를 상징하는 것은 창 너머 멀리 펼쳐진 풍광 속에 우뚝 서 있는 탑뿐이라고 할 수 있다.
활활 타오르는 그녀의 신앙 같은 난롯불 위 벽감에는 삼위일체의 조각상이 걸려 있다.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 〈십자가에서 내리심〉 패널에 유채 / 220×262cm / 1435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8실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Rogier van der Weyden, 1400~1464)은 투르네에서 태어나

로베르 캉팽의 공방에서 도제 생활을 했다.


그 뒤 브뤼셀로 이주해 그 도시의 공식 화가로 임명되면서 국제적인 명성과 부를 쌓아

15세기 플랑드르 최고 화가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벨기에에 위치한 작은 도시 국가인 플랑드르는 모피 산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14세기 플랑드르는 프랑스 동부에 위치해 있던 부르고뉴 공국과 정략결혼을 통해

나라를 합치고 세를 확장해 현재의 네덜란드 전역을 지배했다.


이 나라는 정략결혼을 다시 감행해 현재의 오스트리아와 독일 인근 지역을

광범위하게 통치하던 합스부르크 왕가와 하나가 된다.


합스부르크 왕가 역시 정략결혼을 통해 스페인의 왕가를 잇게 되는데,

이로써 부르고뉴 일대는 자연스레 스페인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들은 스페인의 강압 정치에 맞서 독립전쟁을 선포하지만,

벨기에를 포함한 남부 지역은 이내 스페인에 백기를 들었고
반면에 오늘날의 네덜란드에 속하는 북부 지역은 전쟁을 지속해 독립에 이르렀다.


프라도 미술관의 왕실 소장품 중 네덜란드 출신 화가의 작품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은

바로 스페인과 이 나라의 불편한 관계에서 기인한다.
 
이 작품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주제로 한 것으로,

화면의 중앙에는 십자가의 나무 기둥에 사다리를 놓고 예수를 내리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작품을 감싸던 원래의 액자 틀은 현재 소실된 상태이지만,

조각된 목재를 표현하고 있는 그려진 액자 틀이 이를 대신해주고 있다.


그림의 배경은 그려진 틀과 마찬가지로 도금된 목재로 묘사되어 있으며,

양쪽 모서리에는 곡선으로 굽이치는 장식무늬가 그려져 있다.
그 뒤로 보이는 어두운 갈색으로 드리워진 그림자는 인물들이 위치하고 있는 얕은 공간을 암시한다.


예수를 포함하여 이 작품에는 총 열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서 있는 공간은 마치 좁은 나무상자와도 같다.


인물들은 옆으로 길고 얕은 공간 속에서 입체적인 깊이 없이 평면적으로 병렬 배치되어 있으며,

각자 다양한 움직임을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 로지에르 반 데르 바이덴은 당대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을 대표하던

얀 반 아이크(Jan van Eyck, 1395-1441)의 사실적인 공간과 자연주의적인 세부묘사를 따르지 않았다.


또한 그는 과거로부터 이어져 오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의 도상적 전통을 과감하게 바꾸고
그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구성을 창출해냈다.


사실상 이 작품의 공간은 매우 불분명하게 설정되어 있다.
양쪽 모서리의 장식무늬 뒤로 가려져 있는 얕은 공간은 인물들의 발 밑에 보이는 식물이 있는 전경의 것과 부합하지 않는다.


또한 이같은 공간은 작품의 가장 뒤쪽, 사다리 위에 올라타 있는 인물로부터 앞쪽의 인물에 이르기까지

열 명의 인물들을 모두 포함할 수 없을 정도의 깊이를 가지고 있다.


작가가 설정한 모호한 공간설정은 분명 의도적인 장치였다.
로지에르 반 데르 바이덴이 작품 속에서 주의를 산만하게 할만한 세부적인 사항들을 제한하고 좁은 공간을 설정함에 따라

관람자는 빽빽하게 뭉쳐져 있는 듯한 인물들의 그룹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작가는 예수의 시신을 내리는 행위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그 순간 인물들이 느끼고 있는 불안과 슬픔의 감정을

극도로 강조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커다란 사선을 이루는 두 개의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그룹은 죽은 예수와 그를 받쳐 들고 있는 두 인물,
그리고 두 번째 그룹은 예수의 아래쪽에 쓰러져 있는 성모 마리아와 역시 그녀를 부축하고 있는 두 인물이다.


이 같은 구성은 양 끝에 위치한 성 요한(St. John)과 막달라 마리아(Magdalen)에 의해서 괄호로 묶이고 있다.

붉은 옷을 입고 있는 성 요한은 무릎을 굽히며 마리아를 부축하고 있으며, 막달라 마리아는 슬픔에 젖어 온 몸을 비틀고 있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죽은 예수의 자세는 기절한 성모 마리아에서 거의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반복된 자세는 표현적 효과를 위한 장치이며, 또한 마리아의 공동수난(compassion),

즉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 받는 순간을 묘사하기 위함이다.


이와 관련하여, 죽은 예수의 손과 활기 없이 축 늘어진 마리아의 손은 서로 닿을 듯 가깝게 그려져 있다.
열 명의 인물이 만들어내는 윤곽선은 다소 단순화되어 작품 속에서 리드미컬한 선적 패턴을 형성하며

다양한 색상은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져 균형을 이루고 있다.

알브레히트 뒤러 〈스물여섯 살 뒤러의 초상화〉 패널에 유채 / 52×41cm / 1498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5b실


15, 16세기 이탈리아가 르네상스 문화를 부흥하고 있는 동안

독일 인근 지역은 아직도 중세적인 사고와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이탈리아에는 후손들이 다시 재조명해 부활시킬만한 고대 로마의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독일 지역은 계승하고 싶은 직계 선조들의 수준 높은 문화가 없는 탓이기도 했다.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난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 는

자국의 문화적 후진성에 깊은 시름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미술가가 소위 인문학자의 수준으로까지 격상하는 동안 아직 독일은

그들을 그저 손재주 좋은 기술자 정도로만 치부하는 세태도 못마땅했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금세공업자인 아버지의 뒤를 잇다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몇 년의 도제 생활을 거쳐 드디어 꿈에도 갈망하던 이탈리아 여행길에 올랐다.


뒤러는 독일 최초의 이탈리아 유학파로서 이 지역에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유입시키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자의식 강한 화가가 창 아래 “1498, 내 모습을 그렸다.


난 스물여섯 살의 알베르트 뒤러다”라는 문구를 새겨 넣은

초상화와 함께, 〈아담〉과 〈이브〉의 그림이 소장되어 있다.

알브레히트 뒤러 〈아담〉 패널에 유채 / 209×81cm / 1507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5b실


두어 번의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알브레히트 뒤러는 〈아담〉과 〈이브〉에서 보는 바

인체를 완벽한 비율로 이상적인 아름다움으로 묘사하는 르네상스 회화의 기법에 통달하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플랑드르나 독일 지역의 회화는 다소 딱딱하고 너무나 정교해서 종종 오히려

사실성을 떨어뜨리기까지 할 정도였지만, 뒤러는 유려한 선과 부드러운 음영 처리,

자연스럽게 몸매를 강조하는 자세로 누드의 아름다움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알브레히트 뒤러 〈이브〉 패널에 유채 / 209×80cm / 1507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5b실


누드가 금기시되던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에 다다른 화가들은 단순하게 ‘훔쳐보기’라는 관음증적인 욕구 해소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심의 고취를 위해서’라는 아주 탄탄하고도 그럴싸한 명분을 댈 수 있는 존재들을 찾아내고자 했다.


애초에 옷이라는 것을 입고 있을 리 없던 아담과 이브는 그런 점에서 적격이었다.
이 그림은 독일 지역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2미터 크기의 대형 누드화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의 발가벗은 몸을 그린 거의 최초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고향 마을로 돌아온 뒤러는 우려와는 달리 단번에 국제적인 명사가 되었다.
미술가에 대한 대접이 소홀하기 짝이 없다고 탓하던 뉘른베르크는 그를 시의원으로까지 추대했으며,
유화보다 싸지만 대량 판매가 가능한 판화 작업에도 성공하면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화는 다 누리며 지냈다.


한스 발둥 〈인간의 세 시기〉 패널에 유채 / 151×61cm / 1541~1544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5b실


한스 발둥(Hans Baldung, 1484?~1545)은 독일 슈바벤의 그뮌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스트라스부르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미술 교육을 받았다.


이후 뉘른베르크에서 알브레히트 뒤러의 제자가 되어 그로부터 판화 기법을 전수받기도 했다.
뒤러의 공방에 이름이 같은 제자가 있었기에, 초록색을 뜻하는 ‘그린(Grien)’이라는 별명을 붙여 한스 발둥 그린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프라이부르크 대성당의 제단화 등 종교화부터 초상화, 태피스트리, 스테인드글라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을 제작했다.
말년에는 종교개혁가 루터를 추종하는 신교도가 되었고, 스트라스부르 시의회 의원까지 역임했다.


뒤러가 절대적으로 신임한 제자였던 만큼 그의 작품은 상당 부분 스승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선망하던 이탈리아 르네상스 그림들의 완벽한 균형감이나 조화로움

그리고 인체를 조각처럼 이상화하는 작업에서 점차 멀어져 갔다.

그는 이 작품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어딘지 모르게 기이한,

그래서 오히려 더 관능미가 풍기는 누드를 주로 그렸다.


〈인간의 세 시기〉는 그 의미하는 바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세상 모르고 잠을 자는 아기 시절을 거쳐 성숙한 여인의 시기가 지나면 노년이 된다.


이 세 시기를 거친 자들은 모두 죽음을 의미하는 해골에 이끌려간다.
해골은 당시 ‘허무’를 뜻하는 바니타스(vanitas) 양식에 자주 등장하는 모래시계를 들고 있다.


시간의 유한함 앞에 허무하지 않은 인생은 없다.
노년의 여인은 죽음을 앞두고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의 처녀 시절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
오른쪽 화면 상단에 십자가가 보인다. 화면 아래 왼쪽의 올빼미는 애도나 죽음을 의미한다.

한스 발둥 〈삼미신〉 패널에 유채 / 151×61cm / 1541~1544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5b실


〈삼미신〉은 주피테르(제우스)와 에우리노메 사이에 태어난 딸들로 음악에 능통했다.

류트나 비올라가 그려진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두 여인은 책을 들고 있는데, 이들이 음악만이 아니라 고도의 정신적 능력,

즉 지적 능력이 있었음을 과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림 하단의 아이는 악보를 펼쳐놓고 백조와 함께 노는데,

고대인들은 새가 죽음에 임박했을 때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한다고 생각했다.


한스 발둥이 그린 이 〈삼미신〉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그림 속 여신들처럼 우람하고 조각적인 몸이 아니다.
그저 매끈하고 유려한 선으로 이루어져 무게감보다는 경쾌함이 더하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09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10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11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12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13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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