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우스 신전 (Temple of Zeus)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
그리스 신화의 최고 신인 제우스를 기리는 신전으로 코린트식 기법으로 지어졌다.


‘올림피에이온(Olympieion)’이라고도 한다.
아테네 중심지에 있는 거대한 신전 유적으로 신들의 왕인 제우스에게 바쳐졌던 신전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독재적인 참주(僭主)가 국가를 지배하던 시기인 BC 6세기에
아테네의 정치가인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BC 600~?BC 527)가 짓기 시작했지만 자금 부족으로 중단되었고

이후 650여 년 후인 AD 2세기 로마제국 황제 하드리아누스(Aelius Hadrianus 재위 117∼138) 때에야 완공되었다.


로마시대에 그리스에서 가장 큰 신전으로 유명했지만 3세기경에는 이방인들의 침략으로 약탈당했다.
이후 복원되지 못했으며 로마시대가 끝난 후 수세기 동안 신전 석재가 파내져 아테네 밖의 다른 건물들을 짓는 데 사용되었다. 
 

제우스 신전과 아테네 시가지


그리스에서 가장 큰 규모의 신전으로 기원전 6세기 경에 건립을 시작하여 완성하기까지 700년이 걸렸다.
아테네의 제우스 신전은 고트족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파괴되어 84개 돌기둥 가운데
현재는 15개만이 남아 있는 코린트 양식의 건축물로 그리스 최대의 신전이다.


제우스에게 바쳐진 신전으로 한때는 규모 면에서 그리스 여느 신전들보다 웅장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과거의 그 융성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많이 파괴되어 있다.

왼쪽 중앙에 근대 올림픽의 산실인 판아테나이코스 경기장이 살짝 보인다.


제우스 신전과 맨 앞에 하드라리안의 문이 살짝 보인다.


제우스 신전 가는 길에 국립정원(National Gardens)을 지나게 된다.


제우스 신전 가는 길에 국립정원


길 옆에 있는 하드라리안의 문


제우스 신전 건축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어진 하드리안의 문
로마 하드리아누스(Aelius Hadrianus) 황제 시절에 완공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라고.


하드라리안의 문


제우스 신전


제우스 신전


멀리 아크로폴리스가 살짝 보인다.



제우스 신전에서 보이는 아크로폴리스


지금도 발굴, 보수 중인 제우스 신전


지금도 발굴, 보수 중인 제우스 신전


로마 하드리아누스(Aelius Hadrianus) 황제

참고로 로마 하드리아누스(Aelius Hadrianus) 황제에 대해서 알아본다.


로마 전성기에 해당하는 오현제 시기의 로마 황제들에서
오현제는 네르바, 트리야누스, 하드리아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이다.

오현제 중 트라야누스 황제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왕후의 총애를 받고 있던 하드리아누스가 황제를 계승했다.
하드리아누스는 크라야누스 사촌의 아들이었고 부인도 황제의 친족이었다.


21년 재위 기간 동안 12년을 로마제국 이곳저곳을 여행하였다.
로마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기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뛰어난 군인이자 정치가였고 예술분야에 조예 또한 깊었으며

여행을 좋아하여 5년간 로마를 떠나 있기도 했다.

안티노우스(Antinous)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사랑했던 안티노우스. 이 청년은 나일강에서 익사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안티노우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왕비가 있었지만 동성애에 빠진 황제였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금화



천사의 성.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영묘


그리스 - 제우스 신전 (EBS 동영상)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445274&cid=51670&categoryId=51672


참고 ; https://blog.naver.com/slds2/221383569835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79887&cid=40942&categoryId=31604
https://blog.naver.com/hakkkkk/221342685333




불르 게이트와 아테네 시내


아크로폴리스 입구에 있는 문으로 들어서면 아테나 니케 신전(Athena Nike)이 있다.
이 문은 3세기에 로마인들이 방어를 위해 세운 문이다.


니케 신전과 프로필라이온(오른쪽)


아크로폴리스에 세워진 세 곳의 신전 가운데 나머지 하나는

서남쪽 끝에 자리한 아테나 니케(Athena Nike) 신전이다.


승리의 여신 니케(Nike)를 모신 신전으로, 파르테논이나 에레크테이온 신전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흥미로운 사연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니케 신전이 처음 설계될 당시,

델로스 동맹에 참여한 아네테를 비롯한 여러 도시 국가와 페르시아는 전쟁 중이었다.


그래서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니케 신전을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사가 끝났을 때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의 의도와는 다르게 아테네의 승리를 기원하는 신전이 되고 말았다.


니케 신전은 에레크테이온 신전과 더불어 이오니아 양식을 대표하는 신전이다.
이오니아 양식은 원래 에게 해 연안에 살았던 이오니아인들이 사용하던 건축 양식으로

도리아 양식의 파르테논 신전에 비해 여성적이고 우아한 것이 특징이다.


이런 특징을 보여 주듯 니케 신전을 받치고 있는 기둥들은 하나같이 부드럽다.
그리고 기둥과 지붕 사이의 프리즈에 새겨진 조각도 파르테논 신전에 비해 훨씬 부드러운 것을 알 수 있다.


니케 여신은 승리를 가져다주는 천사였다.
아테네 시민들은 승리의 천사가 아테네를 떠나면 자신들이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낀 나머지 천사의 날개를 잘라 숨겨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프로필라이온(propylaion)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크로폴리스에 가려면 서쪽 통로를 따라 이동해야 한다.
서쪽을 제외한 나머지 세 방향은 모두 낭떠러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서쪽 통로를 따라 불규칙적인 바위를 절묘하게 이용해 만든 대리석 계단을 지나면

아크로폴리스의 출입문인 프로필라이온이 나온다.
프로필라이온은 웅장함과 우아함이 조화를 이룬 멋진 출입문이다.


프로필라이온(propylaion)


프로필라이온(propylaion)의 거대한 기둥


에레크데테이온(Erechtheion) 신전


이오니아식의 대표적인 신전으로서 파르테논과 같이 아크로폴리스 구릉 위에 있으며
B.C. 421년 건축가 필로클레스(Philokles)의 지도하에 기공되어 B.C. 393년경에 완성된 것이다.


이 건축은 아테네 최성기의 최후의 걸작이라 하겠다.
이 신전은 포세이돈 에레크테우스(Poseidon Erechteus)를 주신(主神)으로 하고

그 외의 제신(諸神)을 위하여 건축된 것으로, 그 평면은 매우 복잡하다.


동쪽면에 이오니아식 기둥이 6개 서 있는 전주랑실(前柱廊室)이 있고 북쪽면에 4개의 기둥을 세운 전주랑실이 있으며,
남쪽면에는 아름답게 조각된 여신상주(女神像柱)가 있는 전주랑실이 있었다.


이 신전이 특별히 다른 형식을 가진 것은 서로 다른 신을 제사하는 3전을 집합하여 만든 까닭이라 하겠다.
북쪽면 전주랑실의 이오닉 오더는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많은 조각장식을 하였으며,
색석·유리 등이 감입되었고 청동의 장식을 붙였다.


이 신전의 입면구성에는 많은 고심을 하였다고 하며, 동·북·서측의 건축 외관의 변화를 조화시키기 위하여
장식과 스타일(style)의 통일로 디자인의 효과를 얻었다고 생각된다.
이 신전의 디테일(detail)과 장식의 아름다움은 특기할 만한 것이다.


6명의 여인상 기둥, 에레크테이온 신전


고대 그리스에서는 한 지역에 여러 신을 모시는 일이 많았는데,

에레크테이온(Erechtheion) 신전에는 처음부터 3명의 신을 위한 3개의 신전 건물을 지을 예정이었다.


동쪽에는 아테나 신을, 서쪽에는 포세이돈과 헤파이스토스 신을 위한 신전을 건설하였다.
하지만 신전을 다 짓고 보니 전체적으로 하나의 신전처럼 보여서 세 신전을 분리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신전의 이름은 아테네의 전설적인 왕으로 전해 내려오는

에레크테우스의 이름을 따서 에레크테이온으로 지었다.


세 신전이 모여 하나의 신전이 된 에레크테이온 신전은

건축학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신전으로 유명하다.


그중 하나가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여인 형상을 한 6개의 기둥인데,

그리스의 어느 신전에서도 볼 수 없는 형태를 갖고 있다.


건물을 떠받치는 기둥으로 사용된 여인상을 ‘카리아티드’라고 한다.
6명의 여인들은 똑바로 서 있는 딱딱한 자세를 하고 있는데도

부드럽고 섬세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여인들에 관한 여러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어떤 학자는 6명의 여인이 귀족의 딸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학자는 노예의 딸이라고도 하는데 일반적으로 뒷이야기가 많이 인정되는 편이다.


6명의 여인상 기둥


이 여인상을 자세히 감상하려면 에레크테이온 신전에 가는 것보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가는 것이 더 낫다.
신전에 가까이 갈 수 없도록 막아 놓은 데다가 현재 신전에 있는 조각은 모두 모조품이기 때문이다.

진짜 조각들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에레크테이온 신전은 각 방향마다 공간과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인위적으로 높이를 조절하지 않고 암벽 지형을 그대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또 에레크테이온 신전의 건물들은 기둥을 비롯한 문간, 창문, 신전의 크기까지 똑같은 것이 없다.

이렇게 자유롭고 다양한 모습을 모두 받아들이면서도 조화로운 모습의 에레크테이온 신전은

그리스 문화의 뿌리인 포용성과 융합성을 잘 보여 주는 대표적인 신전이라고 할 수 있다.


에레크데테이온 신전 조감도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있는 조각상 진품

얇은 천으로 지어서 여인의 몸에 입힌 듯 하늘하늘한 느낌으로 와 닿는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있는 조각상 진품 뒷태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있는 조각상 진품 부분


에레크데테이온 신전


에레크데테이온 신전 기둥


에레크데테이온 신전


디오니소스 극장(Theater of Dionysos) 전경


유적으로만 남아 있는 디오니소스 극장은 아크로폴리스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기원전 6세기 때 지어진 고대 아테네의 극장으로서 드라마 예술의 근원지였으며,
소실되었다가 로마시대에 이르러 예술가이자 집정관인 리코우르고스(Lykourgos)에 의해 복구되었다.


이후에는 확장 공사를 통해 검투장으로 사용하였는데, 오늘날에도 그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은 이곳에서 매년 디오니소스 축제가 펼쳐지고 있다.

디오니소스(Dionysos) 극장


디오니소스(Dionysos) 극장


극예술의 탄생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주변에는 두 개의 극장이 있다. 하나는 '오데온'이라 불리며 로마인들에 의해 지어졌다.


더 유서 깊고 중요한 다른 하나가 바로 디오니소스 극장이다.

우리가 서구 세계에서 알고 있는 개념의 '연극'은 고대 아테네에서 시작했으며,
따라서 극예술을 즐기는 이들이라면 이 극장을 반드시 방문해 보아야 한다.


디오니소스는 연극과 포도주를 관장하는 그리스의 신이다.
그는 미스터리로 싸여 있으며, 그를 추종하는 여성들 –

'박칸트'(디오니소스의 로마식 이름, '바쿠스'에서 유래)라 불렸으며 에우리피데스의 희극 『박카이』에 강력하게 묘사된 –

은 그의 지배를 받을 때면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는 거친 여성들로 알려져 있다.


디오니소스 극장에서는 기원전 5세기의 뛰어난 극작가들,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 등
오늘날 서양 연극의 창시자라 알려진 희곡 작가들의 작품이 공연되었다.
그 이후로 이 극장은 그리스인과 로마인에 의해 개조되고 증축되어 왔다.


아크로폴리스의 남쪽 절벽에 위치한 디오니소스 극장은 돌로 지은 최초의 극장이었다.
최대 1만 7천 명의 관객이 앉을 수 있었던 이 극장은 아테네에서 가장 중요한 연극 경연 대회였던

'디오니시아'를 개최하기에 이상적인 장소였는데, 이 대회는 세 부류의 연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스 희극, 비극, 사티로스극이었다.


4세기 중반까지는 나무로 된 벤치에 대부분의 관객들이 앉았으나,
이후 더 많은 관객을 수용할 수 있도록 돌로 된 관람석이 도입되었다.


무대는 전통적인 그리스 방식에 따라 배치되어 오케스트라, 즉 코러스가 공연되는 장소가 무대 앞에 있었다.
이 극장은 원형 극장으로, 열려 있는 무대는 점점 높아지는 타원형 구역 안에 위치했다.


매우 탁월한 음향 효과를 제공해 주었던 이러한 설계는 고대 그리스 전역에 생겨난 다른 극장의 원형이 되었다.
4세기 이후 극장은 사용되지 않았으나, 뛰어난 가수였던 네로 황제가 대규모 개조 작업을 펼쳤다는 증거가 있다.

디오니소스 극장 안내석


디오니소스 조각상


디오니소스 조각상


디오니소스 조각상 해설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바라본 아크로폴리스 성벽


디오니소스 극장 안내석


그늘을 찾아서 잠깐 인증샷


헤로데스 아티쿠스(Herodes Atticus) 극장


아크로폴리스의 가파른 낭떠러지 아래에는 두 개의 극장 유적지가 있다.
한 곳은 파르테논 신전 절벽 아래 자리한 디오니소스 극장이고

다른 한 곳은 니케 신전 아래 세워진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이다.


아테네 극장을 대표하는 두 극장은 자연 환경을 최대한 활용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모두 경사가 가파른 아크로폴리스 언덕 아래쪽에 세워져 있다.


관중석이나 시민들이 모이는 장소는 지형이 높은 곳에,

연설자나 배우들이 서는 장소는 낮은 곳에 설치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의 예술회관이나 영화관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헤로데스 아티쿠스(Herodes Atticus) 극장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은 지금 남아 있는 고대 극장 중 가장 아름다운 극장으로 알려져 있다.
아크로폴리스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는 로마시대에 지어진 극장으로

1955년에 복원하여 현재 야외 콘서트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헤로데스라는 사람이 아테네에 기증한 것으로 실제로 극장이 건설된 시기는

로마가 그리스를 지배한 이후라서 로마 극장이란 표현이 더 어울린다.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은 지금도 여름이면 세계적인 악단과 예술가들이 찾아와

오페라, 연극, 음악 공연을 펼치고 있어 누구나 밤하늘에 펼쳐진 은하수를 벗 삼아 멋진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종교적 중심일 뿐만 아니라 문화와 삶의 중심이었다.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은 기원전 161년에 건설되어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음악당으로서 5,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다


헤로데스 아티쿠스(Herodes Atticus) 극장 입구


헤로데스 아티쿠스(BC 101년 ~ BC 178년)는 고대 그리스의 변론가이며, 고대 제일의 대부호의 아들이다.
변론술에 뛰어나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제의 지우(知遇)를 얻었으며, 이후 여러 대의 황제를 받들게 되었다.


또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비롯해서 많은 유명인의 스승이었다.
그는 아테네의 고건축을 수복시키고, 아테네나 코린토스에 오디온을 설치,

델포이에 경기장을 기증하는 등 그리스 말기의 학예보호에 진력했다.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 뒤가 바로 아레오 파고스(Arios Pagos) 언덕이다.



[그리스 여행-아테네]도시의 보물들/Acropolis/Nike/Erechtheion/Parthenon/Arios




참고 ; https://blog.naver.com/hakkkkk/221342685333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582345&cid=47318&categoryId=47318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50580&cid=43081&categoryId=43081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52393&cid=42692&categoryId=42692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9254&cid=42636&categoryId=4263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445268&cid=51670&categoryId=51672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425515&cid=51339&categoryId=51339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65293&cid=42864&categoryId=50859





2006. 3. 12. 파르테논 신전을 배경으로


BC 479년에 페르시아인이 파괴한 옛 신전 자리에 아테네인이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에게 바친 것으로서,
도리스식 신전의 극치를 나타내는 걸작이다.


조영(造營)은 조각가 페이디아스의 총감독하에, 설계는 익티노스, 공사는 칼리크라테스의 손으로 진행되어

BC 447년에 기공하여, BC 438년에 완성하였다.


플랜은 정면 8주식(柱式)의 직사각형 주주당(周柱堂:30.87×69.51m)이며,

내부는 동서로 나뉘어 동쪽에 전면 6주의 프로나오스[前室]를 두고 3면을 열주로 둘러싼 나오스[本殿]가 있고,

서쪽에는 오피스토도모스[後室]에 이어져 파르테논(처녀의 실)이라 부르는 보고(寶庫)가 있다.


본전에는 페이디아스가 금과 상아로 만든 높이 12 m에 이르는

본존(本尊)인 아테나 파르테노스(처녀 아테나)상이 안치되어 있다.


신전의 장식 조각에는 동 ·서 양박공(兩牔栱)에 여신 아테나를 칭송하는 대군상조각을 배치하고
상부 4면 외벽에는 ‘라피타이족과 켄타우로스족의 싸움’을 비롯하여,

네 가지 신화에 의한 태고(太古)의 전쟁이 도합 92면의 메토프(작은 벽)에 부조되어 있다.

2006. 3. 12.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본전 외벽 상부 4면에는 길이 163 m에 이르는 도리스식 대(大)프리즈 장식(현존 130 m)이 있다.
이 프리즈는 아테나에게 바치는 장대한 파나테나이아의 대제(大祭)를 부조한 것이며,

인물은 신들을 합쳐 총수 360여 명, 말 219필을 헤아린다.


그 귀중한 잔존부분 가운데 아직도 건축에 남아 있는 일부와 아크로폴리스미술관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조각은 영국의 수집가인 토마스 엘긴경이 수집하여 '엘긴마블스'라는 컬렉션으로 대영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이들 대조각군은 거장 페이디아스가 직접 지도하여 아르카메네스 등 뛰어난 조각가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신전의 안정된 비례와 장중함은 고전시대 그리스 정신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파르테논 신전


파르테논 신전은 지금도 산성비에 노출되어 조금씩 부식되고 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자리잡고 있는 아름답지만 폐허에 가까운 파르테논 신전은 기구한 시절을 지나왔다.


아테나 여신에게 바치는 신전으로 지어진 이곳은 비잔틴 제국이 통치할 때는 동방정교의 교회가 되었다가,
십자군에 의해 점령당한 후 가톨릭 교회가 되기도 했다.


오스만 투르크가 지배할 때는 모스크가 되기도 하였으나,

성격이야 어찌되었건 비교적 잘 보존된 셈이었다.


하지만 1687년 베네치아공화국이 아테네를 점령하고 있던 오스만 투르크를 공격했을 때

파르테논 신전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


탄약고로 사용하던 파르테논 신전에 베네치아 군의 구포탄이 날아들어 파괴되어 버린 것이다.

이후 이어진 베네치아군의 약탈, 영국의 엘진의 유물 반출 등을 통해 파르테논 신전은 되돌릴 수 없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


현재 파르테논 신전의 적은 ‘산성비’다.

파르테논 신전을 구성하고 있는 석회석, 대리석은 탄산칼슘을 주성분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또한 산에 녹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아테네가 대도시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공해에 의한 그리스 고대유물들의

침식 현상이 본격적인 문제로 대두된 것은 1970년대.

그리스 문화부에서는 에렉테이온의 여상주와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 등에서 심각한 훼손의 흔적을 발견했다.


1990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아테네 시가 본격적인 오염 규제정책을 발표하면서 피해는 줄어들고 있지만,
공해에 노출된 파르테논 신전으로서는 공해자체를 현격히 줄이는 것 이외에는 다른 보호방책이 없다.
다행히 시끄럽고 공해로 가득차 있기로 유명한 아테네도 최근들어 상당한 개선을 보이고 있다고.


KBS 걸어서 세계 속으로. 495회.
그리스의 대표 건축물. 유네스코 심벌마크로 사용될 만큼 인류의 대표적 건축물.

그리스 건축물의 각 부분별 명칭


파르테논 신전의 동-서쪽에서 보이는 9대 4의 비율.
이 비율은 위에서 보거나, 남-북쪽으로 보았을 때에도 같은 비율을 보인다.


그리스 고전 건축의 최고봉


파르테논 신전이 그리스 고전 건축의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로 찬미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건축 자재의 대부분이 최고급 백대리석이었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건축의 기본이 모두 곡선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대들보와 기단, 기둥 등 신전을 구성하는 소재들이 모두 곡선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여기서 그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도록 하자.


신전을 지탱하고 있는 기단부의 바닥 부분은 미묘한 굴곡이 있는 컵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데,

바닥의 가운데 부분은 모서리 쪽보다 17센티미터가 높다.


눈으로 식별하기는 어렵지만 엔타블레이처(기둥 위의 대들보 부분)도

중앙 쪽이 6센티미터 더 높아서 완만한 아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신전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의 직경은 위치에 따라 다르지만

정면 중앙부 하단의 직경이 1.9미터인 것에 비해 테두리 쪽에 있는 기둥의 직경은 1.94미터이다.
이처럼 신전 전체는 미묘한 곡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파르테논 신전처럼 곡선을 주조로 한 건축은

오늘날처럼 건축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도 상당히 구현하기 힘든 기술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인들은 왜 신전을 곡선으로 만들었을까?

첫째는 시각 효과를 들 수 있다. 신전 곳곳을 곡선으로 만듦으로써

실제 크기보다 더 크게 보이게 하는 효과를 노렸다.


그리고 또 하나는 당시 건축물은 예술품이었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건축가는 예술가이자 조각가이기도 했다.


그들은 건축과 동시에 조각 작품을 만들었던 것이다.
파르테논 신전은 신들에게 바치는 최고의 작품이어야 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런 생각으로 최고의 자재와 최고의 인재를 동원해 신전을 건설했던 것이다.

파르테논 신전 프리즈


외벽 상부 프리즈에는 아테나에게 바치는 파나테나이아의 대제(大祭)를 부조한 장식이 있으며,
인물 360여 명, 말 219필이 부조되어 있다.

신전 동쪽 메토프와 박공벽의 모습.


박공벽에는 태양신 헬리오스의 말이 새겨져 있고(위), 메토프에는 희미하지만

헤르메스, 디오니소스, 아레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신전 내부 프리즈 : 판아테나이아 제전 행렬


신전 내부의 프리즈는 세로 1m, 가로 총길이 160m에 이르는며,
하나의 연속된 띠 속에 아테네에서 열린 판아테나이아 제전의 행렬이 묘사되어 있다.
그 내용은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내에 묘조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스 고전기(B.C. 4세기~B.C. 5세기)의 최고 걸작품으로 손꼽히는 파르테논 신전은

B.C. 480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했으나 페르시아 군의 침공으로 한 차례 중단되었다.


B.C. 480년 가을,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는

마라톤 전투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20만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했다.


압도적인 전력으로 아테네를 점령한 페르시아 군은 당시 건설 중이던 파르테논 신전을 파괴해버렸다.
이때 파괴된 신전을 구파르테논 신전이라고 부른다.


그후 그리스 군은 살라미스 해전(B.C. 480년)과 플라타이아이 전투(B.C. 479년)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침내 아테네를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B.C. 447년, 신전 건설이 재개되어 당시 그리스의 저명한 건축가들이었던

페이디아스와 익티노스, 칼리크라테스 등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페이디아스는 신전 내 아테나 상과 신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부조들을 직접 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파르테논 신전은 B.C. 447년부터 B.C. 432년까지 약 15년간의 재공사 끝에 완성될 수 있었다.


그후 파르테논 신전은 세계의 중심이 그리스에서 로마로 이동하고,

기독교가 보급되면서 성 마리아 교회로 전용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아테네를 지배한 15세기에는 이슬람 교도들에 의해 모스크로 개조되기도 했다.

아테나 여신의 탄생을 표현한 조각 중 디오니소스의 조각


1687년에는 오스만 투르크 군과 베네치아 군과의 전투로 신전의 일부가 파괴되는 일도 일어났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파르테논 신전에는 건설 당시의 아름다움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전쟁의 참화를 견뎌온 파르테논 신전도 약탈에는 속수무책이었다.
1801년 영국이 당시 전쟁으로 피폐해진 오스만 투르크를 통해 신전의 대부분을 약탈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때의 약탈을 진두지휘했던 엘긴 경은 후에 같은 나라의 시인 바이런으로부터

'약탈자'라고 매도당했을 만큼 철저하게 신전을 파괴하고 약탈했다.


그리고 1981년에는 지진이 발생해 기둥 상부가 떨어져 나가는 피해를 입었으며,

최근에는 산성비로 인해 아름다운 대리석이 훼손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그리스 정부는 인류의 유산인 파르테논 신전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수리와 복원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신전 동쪽 박공벽의 모습.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소장.


중앙에는 제우스가 왕좌에 앉아 있고, 그 오른쪽에 무장한 채로 아테나가 서 있다.
그리고 그 두 신 사이로 승리의 여신 니케가 조각되어 있었다고 한다.


신전 메토프의 묘사 : 그리스의 투쟁과 영광
파르테논 신전의 외벽을 장식한 메토프는 신전 4면에 총 92개가 있었다고 한다.
동서면에 각각 14개, 남북면에 각각 32개의 메토프가 배치되어 있었다.


동쪽 메토프 : 신과 거인들의 싸움
서쪽 메토프 : 아테네인과 아마조네스의 싸움
남쪽 메토프 : 인간과 켄타우로스의 싸움
북쪽 메토프 : 트로이 전쟁


신전 내부 프리즈의 내용.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모조품.


아테나의 신상


파르테논 신전 내부에 안치되어 있었던 아테나 파르테노스의 신상은 조각가 페이디아스가 만들었다.
그 높이가 무려 12m 였다고 한다. 현재 신상의 원형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 원형을 추정할 수 있는 묘조품이 아테네 국립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투구 : 중앙에는 스핑크스, 좌우에는 그리핀의 상이 조각되어 있다.
오른손 : 승리의 여신 니케 상
왼손 : 창과 방패. 창 옆에는 뱀 1마리가 몸을 도사린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갑옷 : 상반신 갑옷 가운데에는 메두사의 얼굴이 달려 있다.

아테나 파르테노스 신상의 묘사본.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 소장.


이 작품은 페이디아스가 만든 원작에 비해 예술성은 떨어지지만,
파르테논 신전에 안치되어 있었을 원작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이라고 한다.


파르테논 신전 동쪽 지붕에 있던 세 여신의 조각. 영국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파르테논신전 원주기둥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신전.


BC 479년에 페르시아인이 파괴한 옛 신전 자리에 아테네인이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에게 바친 것으로서
도리스식 신전의 극치를 나타내는 걸작이다.


[그리스 여행-아테네] 세계문화유산 1호, 프레테논 신전/Parthenon/Temple




파르테논(Parthenon) 신전 건축 과정 조감도 입체 영상




참고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54329&cid=40942&categoryId=33084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11209&cid=42664&categoryId=42664

https://blog.naver.com/mjahn21/60058890366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15663





아크로폴리스 모형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와 그곳의 기념물은 고전주의의 정신과 문명의 보편성을 상징하며,
고대 그리스가 세계에 남긴 가장 위대한 건축과 예술의 복합체로서 칭송받고 있다.


기원전 5세기 후반, 아테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민주주의를 성립시키면서
고대의 도시 국가 사이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했다.


이 시기에 세워진 가장 중요한 기념물은 파르테논 신전, 에레크테이온 신전,

아크로폴리스 신전 입구인 프로필라이온 그리고 아테나 니케 신전 등이다.

아크로폴리스 모형


사람들은 신화와 전설이 살아 숨 쉬는 그리스를 서양 문명이 태어난 고향이라고 말한다.
아폴론이 태어난 델로스 섬과 제우스가 살았던 델포이, 포세이돈의 신전이 있던 수니온 곶에 이르기까지
어느 곳을 가더라도 신화 속의 주인공들이 살던 매력적인 유적지와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를 찾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찾아가는 곳이 있다. 바로 아테네 아크로폴리스다.

아크로폴리스 모형


아크로폴리스는 오늘날 서양 문명의 기틀을 마련한 중요한 장소이다.
서양 문명의 뿌리가 되는 고대 그리스의 신화, 정치, 문화가 태어난 곳으로

다채로운 문명의 흔적들을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리스어로 ‘아크로’는 높은 곳, ‘폴리스’는 도시 국가란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아크로폴리스란 높은 언덕에 세워진 도시를 말한다.

이름대로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아크로폴리스 모형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지역은 기원전 1500년경부터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활용되었다.
현재 출입구로 사용하는 서쪽을 제외한 동, 남, 북쪽이 60~70m에 이르는 거대한 낭떠러지로 되어 있어
적의 공격을 쉽게 방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원전 800년경부터 아크로폴리스는 새로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아테네의 수호 여신 아테나를 비롯하여 여러 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전과 여러 건물을 지으면서 신성한 장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약 300년 동안 신성시되었던 아크로폴리스는 기원전 480년에 일어난 페르시아 전쟁으로 대부분 파괴되었다.
하지만 같은 해,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격파한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의 성벽을 다시 세웠다.

아크로폴리스 모형


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는 아테네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아크로폴리스를 다시 짓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수많은 건축가, 예술가, 철학자, 장인을 아테네로 불러 모아 커다란 신전을 건설하게 되었다.
아크로폴리스는 3곳의 신전과 입구에 해당하는 프로필라이온, 그리고 2개의 극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크로폴리스 모형


아크로폴리스 모형


아크로폴리스 모형


아크로폴리스 모형


아크로폴리스 모형


아크로폴리스 모형


아크로폴리스 전경


아크로폴리스 전경


아크로폴리스 전경


2006. 3. 12. 아크로폴리스를 배경으로 인증샷




아크로폴리스의 전망대


아크로폴리스 전망대에서 아테네 유적지와 시내를 배경으로


2006. 3. 12. 아크로폴리스 전망대에서 아테네 유적지와 시내를 배경으로


아레오 파고스(Arios Pagos) 언덕


참고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582345&cid=47318&categoryId=47318
https://www.tripadvisor.co.kr/Attraction_Review-g189400-d735521-Reviews-Acropolis_Museum-Athens_Attica.html



3월 10일 호텔에서 아침식사 후 공식일정.
18:30분에 아테네로 출발하여 23:00 도착. Divani Caravel 호텔에 투숙.
3월 10일 호텔에서 아침식사 후 공식일정.


KBS 걸어서 세계 속으로. 495회. 태양과 바람의 나라 그리스


KBS 걸어서 세계 속으로. 아테네


현대 아테네 지도


아테네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 아티카 지방의 중심지였다.
고대 서양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아티카 지방 전역을 포함한 도시국가(폴리스)를 ‘아테네’라고 불렀다.


고대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 중에서도 아테네는 특히 유력한 폴리스였다.
중심시(中心市) 아테네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아크로폴리스에서는 미케네 · 티린스에서와 같은

거석(巨石) 성벽의 유적이 발견되고 있어 먼 옛날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에게해(海)의 원주민이 살고 있는 곳에 그리스인(人)의 제1차 남하자인,

동부 그리스 방언군(方言群) 중 이오니아인의 한 파가 들어와서 정착하였다.


그러나 고대 아테네인들은 자신들이 이곳의 ‘본토박이(아우토크토네스)’라고 뽐내었는데,
이는 그들이 제2차 남하자의 침입과 정복을 모면했기 때문이며,

아티카반도가 자루 모양으로 에게해에 돌출해 있어 침입자의 통로에서 벗어나 있는데다가

그다지 비옥하지도 않아서 침입자가 매력을 느끼지 못한 탓이었다.

고대 그리스 영웅들의 주요 무대


그리하여 이곳은 많은 제1차 남하자의 피난처가 되었는데, 많은 인구를 모두 포용할 수 없어서
그들은 바다를 건너 소(小)아시아로 옮겨가 이오니아 식민시를 건설하였다.


이러한 관계로 이오니아의 여러 도시는 아테네를 모시(母市)로 여겼다.

아테네가 폴리스의 중심이 된 것은, 전설에 따르면 테세우스로부터라고 한다.


테세우스는 아테네의 왕이었으며, 그의 아버지 아에게우스도 왕이었다고 한다.
아테네의 원시적인 왕제(王制)는 점차 귀족(Eupatridae)의 지배로 바뀌었으며,

귀족 중에서 복수(複數)의 장관(아르콘)이 나와 정치를 하였다.


‘아르콘’은 처음에는 종신관(終身官)이었으나, 나중에 10년 임기로 되었다가 1년 임기로 바뀌었다.
이 아르콘 전임자(前任者)들은 ‘아레오파고스 회의’의 종신의원이 되었다.


BC 7세기경부터 상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하고 화폐의 유통도 개시되었는데,

농민 중에는 토지와 자유를 상실하여 노예로 전락하는 사람이 급증하였다.

고대 그리스 세계


그러나 드라콘의 성문법 제정(BC 621), 솔론의 개혁(BC 594),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권 수립(BC 561),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BC 508) 등으로 양자간의 조정이 꾀해지고 아테네의 민주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아테네의 상공업과 문화가 많이 발달하였으며,

도기 제조업에서 그리스의 중심지가 되었고, 뛰어난 조각작품이 만들어졌다.


BC 5세기 초에 페르시아의 침략을 여러 차례 받았는데,

BC 490년의 침공 때에는 아테네군이 혼자 힘으로 마라톤에서 싸워 이를 물리칠 수 있었다.


또 BC 480∼BC 470년의 침공 때에는 스파르타도 잘 싸웠으나,

승패의 결정점이 된 살라미스해전에서 BC 482년부터 급조(急造)된 아테네의 해군이 주력이 되어 싸웠다.


이 두 차례의 승리로 아테네는 자국의 민주정치에 자신을 가지게 되었으며,

또 살라미스해전에서 활약한 일반대중의 정치적 발언권이 커진 끝에
그들에게까지 참정권이 확대되어 민주정치가 철저해졌다.


기원전 5세기 초반 그리스와 페르시아 지역



델로스동맹의 체결(BC 478)부터 펠로폰네소스전쟁의 개시(BC 431)까지가 아테네의 황금시대였으며,
민주정치가 철저해지고 경제적 번영은 절정에 이르렀다.


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그리스의 학문·예술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여러 나라로부터 학자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아테네인 중에서도 소크라테스·플라톤 등의 학자와 아이스킬로스 · 소포클레스 ·

에우리피데스 · 아리스토파네스 등의 극시인(劇詩人)이 배출되었다.


또 파르테논 · 에레크테이온 등의 신전 건조가 성행하고

조각 · 회화 등의 미술도 꽃을 피워 페이디아스 등의 예술가가 등장하였다.


아테네는 그리스 제1의 해군국으로서 델로스동맹 도시들 사이에

정치적 · 경제적 · 군사적으로 강력히 군림하였기 때문에 이 시대를 ‘아테네제국시대’라고도 부른다.


이때에 아테네에서 독재적인 권력을 가졌던 사람은 페리클레스였기 때문에

이 시대를 ‘페리클레스시대’라고도 한다.


아테네의 횡포한 지배에 대한 여러 도시국가의 불만과,

스파르타의 질시·불안 등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것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델로스동맹을 거느리는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동맹의 맹주 스파르타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은 27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일시적인 화평이 이루어진 때도 있고 아테네가 우세한 때도 있었으나 결국 스파르타가 승리하였다 (BC 404).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쟁 말기 및 전후에는 한동안 민주정체 체제가 중단되고 과두정체(寡頭政體)가 수립되었으나,

이는 오래가지 못하고 민주정치로 되돌아갔으며 오히려 제도적으로는 전후에 더욱 철저해졌다.


델로스동맹은 해산되고 함선은 몰수되었으며, 페이라이에우스와 아테네를 둘러싼 장성(長城)은 파괴되었다.
아테네는 그리스의 지배자 지위에서 물러나고 경제적으로도 한동안 곤궁하였으나

여전히 그리스의 유력한 폴리스의 하나였다.


따라서 스파르타의 강압적인 지배에 불만을 품은 테베·코린토스 등의 폴리스들이 아테네를 앞세워

 ‘코린토스전쟁(BC 395∼BC 386)’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스파르타는 패배하였으며, 그 결과로 장성도 재건되고

아테네는 에게해의 여러 폴리스와 제2회 해상동맹을 체결하였다.


아테네는 ‘델로스동맹’에서 실패한 경험을 살려 여러 시책을 취하였으나,

역시 동맹 도시들의 불만을 사서 ‘동맹시전쟁(同盟市戰爭)’을 겪어야 했다.


이 무렵 북방에 마케도니아가 등장하여,

필요한 곡물의 태반을 흑해 연안에서 들여오던 아테네로서는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데모스테네스 등의 반(反)마케도니아파(派)는 민회(民會)를 움직여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에게 선전포고하였으며,
아테네 · 테베 등의 그리스 연합군은 BC 338년에 카이로네아에서 분전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아테네는 패전 후에도 자치와 독립이 용인되었으며, ‘헬라스 연맹’에도 참가하였다.
그러나 완전한 자주독립을 누리는 폴리스로서의 아테네의 역사는 여기서 끝났다.


아테네는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한때 마케도니아에 대해 반기를 들었으나 실패하였다.


그뒤 로마가 동방을 향해 세력을 뻗치기 시작하였는데,

아테네는 로마에 대해 비교적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로마도 아테네의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여 비록 명목적인 것이기는 하였으나 독립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BC 146년에는 그리스의 다른 도시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속주(屬州)의 하나가 되었다.
이 시대에도 문화적으로 아테네는 그리스 및 지중해 세계의 학문·예술의 중심지로서 계속 그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화와 더불어 차츰 그 문화적 번영은 빛을 잃게 되었다.


서(西)로마의 몰락 후에는 동(東)로마제국(비잔틴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13세기에는 프랑크 공국의 하나가 되었다.


15세기 중엽에는 오마르가 거느리는 투르크인에게 점령당했으며,

그로부터 400년 동안 유럽사 밖으로 밀려났다.


이 기간 중에 그리스도교회로 사용되던 여러 신전은 이슬람교의 사원이 되었으며,

고대건축의 파괴가 진행되었다.


1687년에는 베네치아군(軍)이 아테네시를 공격하여

화약고로 쓰이던 파르테논신전을 포격하였기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다.


그리스독립전쟁(1822∼1829) 때에는 독립군과 투르크군이 시의 쟁탈을 되풀이하였는데,

그리스의 독립이 인정된 뒤 수도가 되었다(1834).


아테네


고대 그리스어(語)로는 아테나이(Athénai), 현대 그리스어로는 아티나이(Athínai), 고어로는 Athenae이다.

이름은 시(市)의 수호신 아테나 여신과 관계가 있다.


아티카반도 중앙 사로니크만(灣) 연안에 있는데 동쪽은 히메토스산(山), 북동쪽은 펜텔리콘산,

북서쪽은 파르니스산, 서쪽은 아이갈레오스산에 둘러싸인 평야가 사로니크만으로 기우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시는 키피소스강(江)과 그 지류인 일리소스강 사이에 끼어 있으며,

아크로폴리스(해발고도 156m)를 중심으로 몇 개의 작은 언덕이 있는데,
북동쪽에 있는 리카베토스 언덕이 해발고도 277m로 가장 높다.


남서쪽에는 필로파포스·프닉스·아레오파고스 등의 언덕이 있다.

오늘날 아테네는 아크로폴리스의 북동부가 시의 중심부이며, 왕궁·의사당·관청·대학 등이 있다.


이곳에 '헌법광장(신타그마토스)'과 '오모니아광장'이 있으며, 이들을 잇는 2개의 병행하는 거리,
즉 '스타디온거리'와 '대학거리(또는 베니젤로스거리)'를 따라 큰 호텔과 상점이 있다.


아크로폴리스의 북서부는 상업의 중심지이며, 길들이 뒤얽혀 있다.

시는 북동쪽과 남동쪽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새 시가와 주거지가 만들어지고 있다.


고대에는 아크로폴리스 주변, 특히 북쪽이 시의 중심이었는데,

고대 그리스시대의 ‘아고라’는 아크로폴리스의 북서쪽 기슭에 있었다.
로마시대의 아고라는 지금보다 약간 동쪽에 있었다.


시는 정치와 소비의 중심지인 동시에 항공·항해 등 교통망의 기점이기도 하며,

근대적 신흥도시로서 활기가 있다.

외항인 피레에프스와 함께 그리스 경제활동의 중심으로 직물·피혁제품·기계·화학약품·포도주·브랜디·가구 등을 생산하며,
그리스 공업생산액의 60∼70%를 차지한다.


시중에는 고대 유적이 많고 박물관도 있기 때문에 관광도시로서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외항 피레에프스는 그리스 제일의 항구로 번영을 누리고 있다.


고대의 유적으로 유명한 아테네에는 동로마시대의 여러 교회와, 투르크시대의 유물을 진열한 박물관 등이 있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그리스 여행-아테네] 도시의 보물들/Acropolis/Nike/Erechtheion/Parthenon/Arios



신화와 역사의 땅, 그리스 EBS Documentary (EBS 다큐) •

세계테마기행 - World theme travel_그리스 1부 아테네와 스파르타_#001 ~ 004




아크로폴리스의 역사 (The Acropolis of Athens)



참고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08575&cid=40942&categoryId=33469




톨레도 알카사르(Alcazar)


알카사르(Alcazar)는 스페인어로 '성'이라는 뜻이며, 레콩키스타 시절 이슬람과 싸우기 위한 요새로 지어졌다.
톨레도의 알카사르는 스페인 전국에 있는 여러 알카사르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꼽힌다.


톨레도의 알카사르는 도시에서 가장 높은 지대인 세르반테스 언덕 위에 해발 548m에 세워졌다.
로마 시대인 3세기에 처음 지어져 관아로 사용되었고, 이후 이슬람 지배를 거쳐 카스티야가 수복한 후

이슬람 세력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로 사용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통일 스페인 왕국의 첫 국왕이 된 카를로스 1세가 낡고 오래된 요새를 개축할 것을 명하여
1538년부터 1551년에 걸쳐 당시 최고의 건축가들을 동원하여 왕궁으로 개축되었다.


그러나 아들 펠리페 2세가 완공된지 10년만에 천도 이후 화재와 나폴레옹 전쟁, 스페인 내란 등으로 파괴었으나

1939년부터 1957년에 걸쳐 복구되었다. 현재는 군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무데하르 양식과 고딕 양식이 혼합된 빼어난 건축물이다.
최초 건축은 고대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서고트인, 이슬람교도인,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여러 번 재건축되었다.

방어를 목적으로 건설된 성이므로 이곳의 역사는 에스파냐 전쟁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나폴레옹 군대가 이곳에 불을 질렀고, 스페인 내란 때는 프랑코군의 모스카르도 대령이

공화파의 포위에 맞서 72일 동안 격렬하게 저항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알카사르는 폐허가 될 정도로 심한 피해를 입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그 뒤 다시 지은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현재 군사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카를로스 5세의 튀니지 정복 기념동상, 무기 변천사를 보여주는 전시실,

스페인 내란 당시 모스카르도 대령의 집무실, 군복 전시실 등이 있다.
도시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해 전망도 좋은 편이다.







군사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전시품도 모두 군사에 관련된 것들이다.
시대별 전쟁과 무기 등의 모습이 전시되어 있다.






참고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81182&cid=40942&categoryId=40283
https://blog.naver.com/roh_ys/221201525561





산토 토메 교회(Iglesia de Santo Tomé)


톨레도의 산토 토메교회(스페인어: Iglesia de Santo Tomé)는 무데하르 양식의 탑과
엘 그레코가 1586년에 완성한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이 소장되어 있어 매우 유명한 교회이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성화에 관한 설명을 듣는 일행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 (The Burial of Count Orgaz)

엘 그레코. 1586경 제작. 캔버스에 유채물감. 480×358㎝. 에스파냐 톨레도, 산토 토메 교회


이 작품은 산토 토메 교회의 수호성인이며 250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난 신실한 오르가즈 백작(곤살로 루이스 데 톨레도)의

죽음을 기념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시신을 무덤에 안치하기 위해 두 명의 성인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 그림은 위쪽의 천국과 아래쪽 지상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갑옷을 입힌 창백한 시신이 땅 속으로 내려지는 동안에 그의 영혼은

천국의 가장 위에 있는 예수의 무릎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


겨자 빛이 나는 노란색, 선홍색, 어두운 파란색이 내는 튀는 색조들이

이 장면을 어둠속으로 삼켜버리는 검은 배경과 뚜렷하게 대비된다.


뒤쪽의 군중들 사이에서 화면 밖을 응시하고 있는 얼굴은 엘 그레코의 자화상으로 생각된다.
횃불을 들고 왼쪽 아래에 서 있는 아이는 엘 그레코의 아들을 모델로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 부분


예수님을 중심으로 왼쪽-성모, 오른쪽-세례 요한 혹은 다른 성인...

이런식의 구도는 정교나 비잔틴미술-성화에서 볼 수 있다.


이를 디시스(Deesis)라고 하며 이콘Icon 그림의 대표적인 양식이다.
엘 그레코는 고향 그리스에서 배운 비잔틴의 특징(디시스)을 스페인 기독교의 그림에 접목시켰다.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 부분


그림은 하늘과 지상의 모습으로 나뉜다.
하늘에는 예수님을 비롯하여 성모, 세례요한이 있고 주변에는  성서 속의 성인과  펠리페2세, 식스투스5세도 함께 있다.
가브리엘 천사가 오르가즈백작의 어린 영을 하늘의 자궁으로 올려 보내고 있습니다.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 부분


지상에는 죽은 오르가즈 백작을 들고 있는 성인 스데반(왼쪽)과 성오거스틴(오른쪽)이 있고,
주변에는 카톨릭 신자와 그 지역의 유지들, 스페인의 문호 세르반테스도 있다.


정면을 응시하는 사람은 엘 그레코 자화상, 아들-호르헤 마뉴엘도 보인다.
맨 오른쪽 안드레 누녜즈는 이 작품을 의뢰한 사람이다. 
완성된 작품이 훌륭해서 값을 후하게 주었다고 한다. 
 

엘 그레코의 아들-호르헤 마뉴엘


성 스테파노의 맨 밑 옷자락에 순교하는 장면과 소년은 엘 그레코의 8살 아들로
옷에 삐져나온 손수건에는 출생연도 1587년이 적혀 있다.

위 그림 네모 안에 있는 인물이 엘 그레코 자화상


참고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875463&cid=42645&categoryId=42645

https://blog.naver.com/heredoggy/221379667394 





성구실(Sacristia, Sacristy) 입구


성가대석과 내진(메인 미사집전)을 마주보고 왼쪽에 위치한 성구실은

단순한 성구실이 아니라 톨레도의 작은 미술관이다.


작품도 평범한 것들이 아닌 엄청난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고,

다른 방에는 중세 성직자들이 입었던 미사용 제복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성구실 천정


성구실 천정 부분


성구실 천정 부분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엘 그레코. 1579년 제작. 캔버스에 유채. 285×173cm. 톨레도 대성당


톨레도에서 엘 그레코에게 처음으로 작품을 주문한 사람은

로마의 파르네제 그룹에서 사귀게 된 친구와 인연이 있던 톨레도 대성당의 사제장이었다.


대성당에서 사제가 의식용 옷을 입는 장소에 걸릴 예정이었던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The Disrobing of Christ (El Espolio)>은 톨레도에서의 첫 작품이자,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돌며 오랜 수업을 거쳐 만든 엘 그레코만의 양식이 처음으로 나타난 걸작이다.


그림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 병사들이 예수의 옷을 벗기려는 장면이다.
이는 복음서에 특별히 기록된 순간은 아니고,

비잔틴 미술에 선례는 있지만 서유럽 기독교 미술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주제이다.


전경 오른쪽에는 십자가에서 못이 박힐 부분에 구멍을 뚫는 사람이 보이고,

이를 보는 세 명의 마리아가 전경 왼쪽에 보인다.

 
화면 중앙의 예수는 그를 둘러싼 사람들에 의해 옷이 벗겨지고 조롱을 당하고 있으며,

이들의 모습은 예수의 옷을 갖기 위해 제비를 뽑았다는 복음서의 기록을 연상시킨다.


중앙 왼쪽 갑옷을 입은 병사는 관람자를 바라보며 관심을 예수 쪽으로 돌리게 하고 있다.
그는 예수의 죽음을 보고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한 로마군의 백부장,

혹은 [황금 전설]에서 예수의 피로 잘 안보이던 눈을 치료받고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군인 롱기누스,

혹은 본디오 빌라도 등으로 추측되고 있다.


예수 손의 밧줄은, 처형장으로 가던 예수가 지쳐 십자가를 다른 사람이 지자

군인들이 예수를 밧줄에 묶어 끌고 갔다고 한 성 보나벤투라의 글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이 작품은 엘 그레코의 그림 중에서는 가장 자연주의적으로 그려져

고전적 드로잉 수업의 흔적을 보여준다.


그러나 많은 인물들로 화면이 빈틈없이 채워져 있고, 순차적으로 일어난 사건을 한 화면에 모아놓고,

공간 묘사가 명확하지 않은 점 등은 피렌체의 폰토르모나 로마의 로소 피오렌티노가 개발한 매너리즘 회화의 특징이다.


눈물이 어린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표정은 엘 그레코가 창안한 것으로 이후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예수와 하늘의 소통은 수직의 구름 기둥으로 표시되고, 그의 희생은 화면의 시각적 중심인 붉은 의상에서 강조된다.


주요 인물 의상의 선명한 붉은색, 노란색, 초록색은

화면 왼쪽 군인의 갑옷에 반사되어 색채의 화음을 들려주는 듯하다.


이 작품은 교회의 만족을 얻지 못했다.

성직자들은 군중의 머리가 예수보다 높은 곳에 있는 점,

복음서에 없는 세 명의 마리아가 등장하는 점 등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작품 완성 후 화가와 주문자가 합의해서 가격을 결정했는데,

이 작품의 경우 양자가 생각한 금액의 차이가 4배 정도나 되었다.


결국 둘 사이에 분쟁이 났다.

그 결과 화가는 원하는 가격의 반도 안 되는 금액을 받았고, 교회와는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다.
이후에도 엘 그레코는 그림 값 문제로 분쟁을 자주 일으켰다.


이탈리아에서의 경험을 통해 그는, 화가가 고객의 요구에 맞추어 물건을 제작하는 장인이 아니라,

인문적 지식과 독창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라는 신념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그래서 주문자의 수정 요구에도 대부분 응하지 않았고, 가끔은 소송 비용이 그림 값보다 더 들더라도

작품 가격을 낮게 매기려는 주문자에 대항해, 예술적 자유와 자존심을 지키려고 했다. 김진희 / 미술평론가


<베드로의 눈물> 엘 그레코. 1607년경 제작. 캔버스에 유채. 102 x 84cm. 톨레도 대성당


엘그레코(ElGreco)는스페인이 낳은 화가다.

원래는 그리스 사람이었는데 일찍부터 미켈란젤로의 영향을받아 로마에서 수학한 후

나중에는 톨레도에 정착하면서 스페인의 대표적인 화가가 되었다.


그의 그림은 종교화와 초상화가 대부분이었고 색채와 명암의 교묘한 대비로 인해

모든 화면에는 엘그레코 특유의 황홀한 흥분 상태가 감도는 독특한 그림이다.


수많은 빼어난 종교화를 남겼지만 그중에서도‘베드로의눈물’(1605~1610년제작)은 걸작 중의 걸작이다.

왼쪽 팔목에는 주님으로부터 약속받은“하늘나라의 열쇠”(마태16,19)를 건채 두손을 꼭 마주잡고

허공을 우러러 보고 있는 베드로의 얼굴은 엘그레코 특유의 길쭉한 얼굴로 묘사되어 있다.


흰머리칼과 얼굴 가득한 턱수염,완강한 근육을 가진 어부출신의 베드로는

알 수없는 허공의 한점을 우러러 보고 있는데 그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있다.


실제로 베드로는 주님이 승천하신 후 매일 새벽 첫닭의 울음소리와 함께 일어나 기도를 하고 몹시 울었다고 한다.
항상 수건 한 장을 가슴에 넣고 다니며 주님을 모른다고 세번이나 부인한 일을 생각할 때마다

뉘우쳐져 크게 울었다고 한다.


너무 많이 울었으므로 베드로의 얼굴은 눈물에 젖어서 항상 짓물러 있었다고 한다.
 엘그레코가 그린‘베드로의눈물’이란 작품이 걸작으로 손꼽힌 것도 알 수 없는

허공을 우러러보며 울고 있는 베드로의 비통한 표정이

초자연적인 영성의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베드로가 처음으로 울기 시작했던 것은 새벽닭이 운 순간이다.

이때“주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똑바로 바라보셨으므로”(루가22,61) 비로소 주님의 눈과 마주친 베드로는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하신 주님의 말씀이 떠올라 슬피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서에는 베드로의 눈물에 앞서 또 한사람의 눈물이 등장한다.

그것은 주님의 눈물이다.


주님은 평소에 사랑하시던 마리아 자매와 따라 온 유다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신 후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올라 눈물을 흘리셨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주님의 눈물. 우리는 울고 계시는 주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우리는 살아 있지만 이미 죽은 사람의 냄새가 나는 라자로처럼

비참하고 절망적일 때 우리는 문을 걸어 잠그고 흐느껴운다.


그러나 우리보다 먼저 문밖에서 울고 계시는 주님이 계시다.

주님은 눈물을 흘리시면서 이렇게 큰소리로 외치신다.“이제 그만 나오너라.”


베드로가 주님의 으뜸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눈물을 엘그레코의 그림처럼

 ‘베드로의눈물’로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 제 눈에도 주님처럼 눈물이 넘쳐 흐르게 하소서.
주님을 생각할 때마다 베드로처럼 흐느껴 울도록 하소서.

눈물로 우리는 영혼을 정화시키어 하느님의 영광 속에 죽음의 동굴을 벗어나게 하소서. 최인호 / 소설가

<화가의 모습을 한 성 누가> 엘 그레코. 1608년경 제작. 캔버스에 유채. 53 x 71cm. 톨레도 대성당


16세기 종교화의 대가 엘 그레코는 톨레토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화가다.
그는 그리스령 크레타에서 태어났지만 40 여 년 간 톨레도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생을 마감했다.


때문에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라는 본명이 있지만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의 엘 그레코로 통칭된다.
엘 그레코의 흔적은 톨레도 곳곳에 남아 있다.

그의 집은 박물관이 되었고 산타 크루즈 미술관, 톨레도 대성당 등에도 그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제단 병풍 뒤쪽
승천을 의미하는 엘 트란스파렌테(투명하다는 의미)에는 창을 통해 빛이 들어와 신비함을 더한다.

제단 병풍 뒤쪽 부분


회랑 끝에 있는 묘지
대주교 Tenorio 에 의해서 지어진 것으로 그의 무덤 역할을 겸한  예배당을 계획한 듯하다.

회랑 끝에 있는 묘지


참사회 회의실(Sala Capitular)
여기는 역대 추기경들의 초상화들이 전시되어 있고, 추기경들이 사용하던 물품들도 있다.


톨레도 대성당 (Toledo Cathedral)


[스페인 여행-톨레도]금실로 그리는 그림 ‘다마스키나도’/Damasquinado/Film/Lord of the Ring/Golden Yarn



참고 : https://minipak93.blog.me/30145776148





톨레도 대성당 (Toledo Cathedral)


톨레도 대성당은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고딕 양식 성당 중 하나이며, 중요한 예술적 보배들을 간직한 곳이다.
이 유명한 성당은 스페인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인상 깊은 건물 중 하나이다.


샤르트르 대성당 같은 유럽 북부의 거대한 고딕 성당에서 영향을 받았으나, 매혹적인 새로운 요소가 이에 더해졌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만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다양한 문화적 양식이 하나로 혼합된 모습이다.

톨레도 대성당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마스터 마르틴이라는 건축가가 처음 짓기 시작했으나,

대부분의 기초 작업은 페트루스 페트리가 맡았는데 그는 1291년에 사망했다.


고딕 양식이 지배적이지만, 건물이 오랜 시간에 걸쳐 세워졌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다른 양식의 영향을 받은 흔적도 보인다.
지금도 오래된 서고트 족의 예식에 따라 미사를 거행하는 '모사라베 예배당'(1504)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


이와 반대로 회랑은 무데하르 양식, 즉 기독교 통치기까지 살아남은 무어 양식의 특징을 몇 가지 갖추고 있다.
고딕 양식 요소는 세 개의 중앙 현관 위편에 새겨진 복잡한 조각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톨레도 대성당 (Toledo Cathedral)


아마 톨레도 대성당이 가장 유명한 이유는 두 가지 뛰어난 보배 덕택일 것이다.

하나는 '트란스파렌테'(1721~1732)라는 이름을 가진 나르시소 토메의 작품으로,

대리석과 설화 석고로 제작한 놀라우리만치 화려한 제단 장식이다.


그는 윗편의 둥근 천정을 깎아 구멍을 내 자신이 조각한 인물상들이

태양 광선을 받아 영적인 빛으로 이루어진 후광 안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를 자아냈다.

아마 이보다 더 훌륭한 작품은 엘 그레코의 장엄한 그림 <엘 에스폴리오>(그리스도의 옷을 벗김)일 것이다.


엘 그레코는 크레타 섬에서 태어났으나 예술적 이력 대부분을 톨레도에서 쌓았으므로

톨레도 대성당이 그의 걸작 중 한 점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썩 어울리는 일이다.
이러한 예술적 보물들 덕택에 이 건물은 성당인 동시에 박물관이기도 하다.


성체현시대(聖體顯示臺)


톨레도 대성당에서 보물실의 백미라 불리는 가장 유명한 보물이 바로 "성체현시대(聖體顯示臺)" 이다.
성체(聖體, 예수님의 몸) 강복 때 성체를 올려놓는 대(臺),  금은보석으로 꾸민 높이 3m, 무게 180Kg의 화려한 모습이다,
성체현시대 중앙에는 다이아몬드 십자가가 있다.


성체현시대(聖體顯示臺)

금은보석은 주로 남미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성체현시대(聖體顯示臺) 부분


성체현시대(聖體顯示臺) 아랫부분


왕관


보물


톨레도 대성당 내부


톨레도 대성당 내부


톨레도 대성당 내부


톨레도 대성당 내부


파이프오르간


[스페인 여행-톨레도]그라나다 정복 역사가 새겨진 ‘톨레도 대성당’/Toledo Cathedral/Transparent



참고 : http://blog.daum.net/nhk2375/7165936




톨레도(Toledo)


톨레도는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서 70킬로미터(km) 거리에 있는 인구 6만 여 명의 작은 도시로,

마드리드가 수도가 되기 전 1천 여 년 동안 스페인의 중심지였다. 


도시는 로마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서고트 왕국, 이슬람 왕국, 레온 왕국,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로 번영을 누렸다. 


삼면이 타호 강으로 둘러싸인 바위산 위에 건설되었고,

‘라 만차의 기사 돈키호테’의 고향인 카스티야-라 만차 지방 톨레도 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덕분에 톨레도에는 로마시대 유물인 원형경기장부터

이슬람교, 유대교, 그리스도교 유산까지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사실상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며,

단위 면적당 문화유산이 가장 많은 도시 중에 하나로 꼽힌다. 


각종 종교 시설이나 박물관은 물론 일반 가정집까지 문화유산으로 가치를 지닌 것들이다. 
이 때문에 1561년 필리페 2세의 천도로 정치적 영향력이 상실되었어도

톨레도는 여전히 스페인의 정신적인 수도로 불리고 있다.


톨레도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무데하르 양식 건축물이다. 
무데하르는 이슬람 지배가 끝난 뒤에도 스페인에서 살았던 이슬람교도들을 일컫는 말이며,

무데하르 양식이란 스페인에서 발달한 이슬람과 서구 문화가 결합된 건축 양식이다.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볼 수 없는 스페인 특유의 양식이다.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 이전의 건축물로는 비브알마르돔 모스크, 라스토에르네리아스 모스크 등이 있으며,
그리스도교도가 지배한 이후에도 무데하르 양식은 계속되었다. 


 산티아고 데 아라발 성당, 산타 마리아 라 블랑카와 트란시토 시나고그(유대인 교회) 등도

무데하르 양식의 건축물이다.


16세기 종교화의 대가 엘 그레코는 톨레토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화가다.
그는 그리스령 크레타에서 태어났지만 40 여 년 간 톨레도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생을 마감했다.


때문에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라는 본명이 있지만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의 엘 그레코로 통칭된다.
엘 그레코의 흔적은 톨레도 곳곳에 남아 있다.

그의 집은 박물관이 되었고 산타 크루즈 미술관, 톨레도 대성당 등에도 그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톨레도는 세르반테스 언덕을 타호강이 둘러싸고 있어 로마 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발전해왔고,

스페인 역사에서 오랜 동안 수도 내지는 중심지 역할을 했던 도시다.


오랜 역사를 거치며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유적이 공존하며 스페인 문화를 잘 대변하는 곳이어서

도시 전역이 국립기념지로 선포되었다.


로마시대의 원형극장, 중세 가톨릭 성당, 이슬람 왕궁 등

여러 문화의 유적이 공존하는 여러모로 역사가 깊은 도시이다.


고딕 양식 대성당들 가운데 가장 스페인적이라고 평가받는 이 도시의 대성당에는

엘 그레코, 고야, 반 다이크 등 화가들의 그림들이 소장된 미술관도 있다.

1986년 역사성과 문화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되었다.


톨레도(Toledo) 전경

톨레도는 세르반테스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1547~1616)의 소설 돈키호테의 배경이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사랑받는 광기, 돈키호테(Don Quixote)


세르반테스가 창조한 돈키호테는 400년이 흐른 지금도 세상 사람들이 친숙하게 화제에 올리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 오랜 시간 동안 여러 가지로 변형되고 재창조되면서 늘 사람들 곁에 머물러왔다.


돈키호테는 스페인 작가 세르반테스가 쓴 소설

<재기 발랄한 시골 귀족 라 만차의 돈키호테(El Ingenioso Hidalgo Don Quijote de la Mancha)>의 주인공이다.


소설이 발표된 이후 돈키호테는 과대망상에 빠져 어이없는 소동을 일삼는 충동적 몽상가로 회자돼왔다.
다른 한편으로는 꿈과 이상을 위해 행동을 아끼지 않는 불굴의 인간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면서 우스꽝스럽긴 하나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한번쯤은 그처럼 살아보고 싶게 만드는 매력을 가진 인물이 됐다.


돈키호테의 장엄한 이야기는 라 만차라는 스페인의 어느 시골마을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마을에 사는 알론소 키하노는 쉰 가까운 나이에도 군살 없이 골격이 튼튼하고 얼굴이 삐쩍 마른 시골 귀족이었다.


마흔이 넘은 가정부와 스무 살이 채 안된 조카딸과 함께 농사일을 관리하며 살아가던 그는 언제부터인가 기사소설에 탐닉하게 된다.

당대 유행하던 기사소설에 너무 빠져든 그는 좋아하던 사냥도 그만두고, 책을 사느라 경작지까지 모두 팔아치운다.


며칠이고 잠도 자지 않고 밤을 새워 책을 읽던 그는 소설 속 이야기들을 모두 현실이라고 믿기 시작한다.
결국 ‘머릿속 골수가 다 말라’ 미쳐버린 그는 스스로 기사가 되어 세상을 떠돌아다니기로 마음먹는다.


증조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낡은 칼과 창, 그리고 얼굴을 가리는 아래 덮개가 떨어져 나간 투구를 어설프게 손질한다.
그리고 당당한 기사로서 ‘돈키호테 데 라 만차(라 만차의 돈키호테)’라는 이름을 스스로에게 붙인다.


또 머리는 부스럼투성이인데다 볼품없이 삐쩍 마른 자신의 말에도 ‘로시난테(Rosinante)’라는 근사한 이름을 붙여준다.

돈키호테 못지않게 흥미로운 인물은 같은 마을 농부인 산초 판사(Sancho Panza).
어리석어 보이면서도 입담 좋고 착한 그는 돈키호테의 충직한 하인이 된다.


산초 판사는 섬 하나를 정복한 후 그 섬의 영주로 앉혀주겠다는 돈키호테의 약속에 솔깃해져 처자식을 남겨두고

험난한 모험의 길에 함께 나선다.


돈키호테는 도탄에 빠진 세상을 구하고 부정과 비리를 바로잡으며

가난하고 천대받는 자들을 도와주겠다고 다짐하며 긴 여정을 시작한다.


비록 망상에서 비롯된 다짐이었지만 실제로 그는 약하고 상처받은 자에게는

부드럽고 겸손한 태도를 보이며 악당으로 ‘보이는’ 상대를 마주하면 불굴의 용기를 발휘한다.


돈키호테가 벌인 우스꽝스러운 소동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에피소드는 풍차와 벌인 싸움이다.
평원을 지나던 중 멀리 풍차 30~40개가 나타나자 풍차들을 거인들로 착각하고 로시난테에 박차를 가하며 달려든다.

산초 판사가 그건 풍차일 뿐이라며 만류하지만 어느새 세차게 돌아가던 풍차 날개에 부딪혀 로시난테와 함께 나둥그러진다.


기행은 멈추지 않는다.

신부가 인도하는 장례 행렬을, 억울하게 죽은 자의 시신을 탈취한 악당의 무리로 여겨,

신부에게 시신을 내놓으라며 생떼를 쓴다.


초원의 양떼를 적군의 행렬로 착각해 양들을 공격하다 목동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다.
비를 피하기 위해 머리에 쓴 어느 이발사의 면도용 대야를 빼앗고는 그게 진귀한 황금투구라며

자신의 머리에 쓰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기도 한다.


‘사악한 무리’를 무찌르기 위한 공격에서 어쩌다 재수 좋게 ‘승리’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두들겨 맞는 등 수난을 당하기 일쑤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일으키는 돈키호테의 소동으로 산초 판사는 물론 로시난테,

그리고 산초의 당나귀도 함께 고초를 입는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온몸 성한 곳 없이 다치더라도 모험을 포기하지 않는

강인한 돈키호테지만 마음 한편에는 따뜻한 연민도 스며 있다.


한번은 양떼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구실로 여러 달 밀린 품삯을 주지 않고

어린 하인을 학대하는 농부를 크게 꾸짖으며 매질을 멈추게 하고 밀린 품삯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연인으로부터 버림받은 어느 사내의 슬픈 사연을 들을 때는 자신의 일처럼 아파하며 위로를 보내는 모습도 보인다.

돈키호테의 기이한 모험은 서서히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다.


많은 이들은 그에게 조롱을 보낸다.

하지만 세상과 인간에 대한 깊은 지혜와 이해심이 그의 광기 이면에 숨어 있음을 인정하는 이들도 생겨난다.


흥미 반 장난 반으로 돈키호테를 자신들의 저택에 정중히 초대해

돈키호테의 망상에 맞장구치며 함께 생활한 어느 공작 부부도 있었다.


이들은 돈키호테가 산초에게 섬의 영주를 시켜주겠다고 약속한 사실을 알고는

실제로 산초에게 바라따리아라는 섬을 다스리도록 해준다.
섬으로 떠나기 전 산초에게 건넨 충고에서 돈키호테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행동으로 벌을 주어야 될 사람을 말로 학대하지는 말게.
그 불행한 자에게는 형벌의 고통만으로도 충분한데, 다른 나쁜 말까지 덧붙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자네의 관할 아래서 죄를 지은 사람은 타락한 우리 인간 본성의 양태를 벗어나지 못한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나."


라 만차 마을 신부는 돈키호테를 이렇게 평가한다.
“이 착한 양반이 순진한 엉터리 소리를 해서 미친 것 같아 보이지만, 다른 일을 말하는 걸 보면 아주 기막히게 논리정연하고,
무엇에든 온건하고 밝은 지혜를 가진 것 같거든요...”


돈키호테와 같은 고향 사람인 산손 카르라스코라는 학사는 신부와 함께 돈키호테가 제정신을 되찾아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도와주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그런 그에게 어떤 지체 높은 부자가 만류한다.

“돈키호테가 그의 허튼 짓으로 우리 모두를 재미있게 한 그 즐거움에 비하면

그가 정신이 말짱해져서 얻는 이득은 그에 못 미칠 거라는 것을 모르세요?...”


결국 신부, 이발사, 학사 등 고향 마을 사람들은 속임수를 써서 돈키호테와 산초를 마을로 데려온다.
고향에 돌아온 지 얼마쯤 지나 돈키호테는 제정신을 되찾고 알론소 키하노 영감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며칠 후 돈키호테는 숨을 거둔다. 제정신을 되찾자 곧 세상을 떠난 것이다.
꿈꾸지 않고 이상을 향해 돌진하지 않는 돈키호테는 더 이상 돈키호테가 아니며, 그런 그에게 삶이란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죽은’ 후 400년 동안 돈키호테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되살아났다.

톨레도 구 시가지 전경


톨레도 구시가의 구불구불한 골목길도 이슬람 문화의 흔적이다. 
도심의 미로처럼 얽힌 좁은 길은 이슬람 도시의 특징으로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바이신 지구에서도 볼 수 있다. 


이슬람 점령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골목길 곳곳에는 중세의 향기가 가득하다.

구시가 중심에 위치한 톨레도 대성당은 순수한 스페인 고딕양식의 건축물이다. 


길이 120미터(m), 폭 60미터의 위풍당당함에 세련된 건축과 조각,

엘그레코, 발라스케스 등의 예술 작품들 때문에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중에 하나다.


로마 시대에 건축되어 서고트인, 이슬람교도, 기독교도에 의해서 여러 번 재건축 된 알카사르도 톨레도의 빼어난 건축물이다.
스페인 내전 중에 폐허가 되다시피 한 건축물을 다시 복원한 것으로 무데하르 양식에 고딕 양식이 어우러져 있다.

언덕 위에 알카사르(Alcazar) 건물이 보인다.


산마르틴 다리(San Martin Bridge)에서


성밖 타호(tajo)강 풍경


타호(tajo)강

타호(tajo) 강이 반원을 그리며 도시전체를 휘감아 흐르는 중세도시로서, 언덕에서 바라 본 경치 또한 아름답다.


타호(tajo)강


산마르틴 다리(San Martin Bridge)


타호강(江)에 놓인 고딕 양식의 다리이다.

이전에 있던 다리는 1023년의 홍수로 손상되었고 14세기 말에 페드로 테노리오(Pedro Tenorio) 주교가 보수하였다.


산마르틴 교구와 가깝다고 하여 산마르틴 다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5개의 아치형 구조로 이루어졌으며 중앙에 있는 가장 큰 아치는 길이가 40m이다.

양쪽 끝에는 방어를 목적으로 한 탑이 있는데 하나는 13세기에, 또 다른 것은 16세기에 세워졌다.


오랜 시간 톨레도를 바깥 세상과 연결하고 톨레도를 지켜온 다리로

오늘날에는 중세 도시의 자취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한다.
타호강에는 알칸타라 다리(Puente de Alcantara)도 놓여 있다.

산마르틴 다리(San Martin Bridge)


산마르틴 다리(San Martin Bridge)에서


산마르틴 다리(San Martin Bridge)에서 가이드와 함께


알칸타라 다리(Alcantara Bridge)


타호강을 건너 톨레도로 들어가는 다리이며 중세의 산세르반도성(城) 기슭에 위치해 있다.
로마제국 오현제(五賢帝) 중 두 번째 황제인 트라야누스 치세인 104년에서 106년 사이에 건축된 뒤 파괴되었다가
이슬람 지배 시대에 다시 세워졌으나 1257년 교각과 받침대만 남고 모두 떠내려갔다.


이후 레온-카스티야왕국의 왕인 알폰소 10세(재위 1252∼1284) 때 재건하였고 15~16세기에 복원되었다.

다리의 양끝에는 방어를 목적으로 한 탑이 있었으나 현재는 시내와 가까운 쪽에만 남아 있고

다른 하나는 1721년에 다리에 들어가는 입구로 바뀌었다.


다리 석재로는 로마시대, 비사고틱(Visagothic) 시대, 아랍 시대의 돌이 사용되었으며

다리 서쪽 끝의 거대한 탑은 무데하르 양식으로 되어 있다.


알칸타라는 아랍어(語)로 '다리'라는 뜻으로 톨레도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오랜 시간 톨레도를 바깥 세상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타호강에는 산마르틴 다리(Puente de San Martin)도 놓여 있다.


알칸타라 다리를 건너면 다리끝 아래 타호강 강변에 La Cubana (애저 요리 전문점 34-925-220088) 레스토랑이 있다.


우리 일행은 애저 요리로 유명한 라쿰바나 레스토랑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이 레스토랑은 창가에서 바라다보이는 타호강과 알칸타라 다리 또한 일품이다.



애저 요리


애저요리는 스페인의 전통요리 중 하나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고 배내에 있거나 막 태어나 사료를 먹기 전까지의 새끼 돼지.
우리나라에서 새끼 돼지를 이용하는 애저 요리는 조선 시대 중엽에 시작됐다.


생후 1개월 남짓한 새끼 돼지에 마늘과 생강 등을 넣고 푹 삶아 초장에 찍어먹는 요리이다.

전라북도 진안의 토반(土班)들이 즐겨 먹은 보양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진안에서는 생후 1개월 남짓한 새끼 돼지를 찬물에 1~2시간 담가서 핏물을 제거한다.
돼지가 잠길 정도로 물을 부어 전피·인삼·마늘·생강·청주를 넣어 2시간 정도 삶는다.


다 삶아지면 밤·은행·대추·양파·대파를 넣어 한 번 더 끓여 양념한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데,
삼베 보로 싸서 편으로 만들어 먹기도 하며 탕으로 끓이기도 한다.

애저 요리


스페인에서는 도살장에서 태어난 지 20일에서 21일 된 새끼 돼지를 구입하여 레스토랑으로 전달되는데
이미 도살장에서 배를 갈라 창자 등의 내장을 모두 꺼내 보내진다.


커다란 타원형의 질그릇에 새끼 돼지는 가느다란 나무 판을 대고 올려지는데

그 아래엔 사분의 일의 물이 고여 있어야 한다.


배를 뒤집어서 올린 후 소금을 뿌리고 장작 오븐에 넣어진다.

180도의 온도로 1시간 30분 살이 부드럽게 익혀지도록 한다.


물을 넣는 이유는 수분으로 살이 퍽퍽해지는 것을 미리 방지하는데 목적이 있다.

오븐이 가장 중요한데 전기 오븐으로는 이러한 맛을 내기 어렵다고 한다.


장작 오븐은 지붕을 둥그런 것을 가장 고급 재질로 사용하는데

이러한 오븐에 따라 맛이 승부를 낸다고 한다.

둥그런 지붕안에서 열이 회전을 하면서 맛이 좋게 익혀진다.


하얀상태에서 익혀지면 다시 꺼내 뒤집는데 (배가 밑으로)

이번에는 돼지 기름으로 만든 버터를 껍질에 칠을 하고200도로 온도를 조절한 후 45분을 더 익힌다.

금색으로 껍질이 서서히 변해갈때까지 익힌다.

성벽
점심을 먹고 산마르틴 다리를 건너 성 안으로 들어간다.

성벽 출입문


톨레도 대성당 앞 골목길



스페인 미궁의 고도, 톨레도



참고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56691&ref=y&cid=40942&categoryId=40240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267827&cid=51089&categoryId=51089
https://structurae.net/structures/san-martin-bridge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90178&cid=51949&categoryId=55209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79724&cid=40942&categoryId=40283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83383&cid=40942&categoryId=32348
https://cafe.naver.com/firenze/5831137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iamgomna&logNo=221358712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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