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479년에 페르시아인이 파괴한 옛 신전 자리에 아테네인이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에게 바친 것으로서, 도리스식 신전의 극치를 나타내는 걸작이다.
조영(造營)은 조각가 페이디아스의 총감독하에, 설계는 익티노스, 공사는 칼리크라테스의 손으로 진행되어
BC 447년에 기공하여, BC 438년에 완성하였다.
플랜은 정면 8주식(柱式)의 직사각형 주주당(周柱堂:30.87×69.51m)이며,
내부는 동서로 나뉘어 동쪽에 전면 6주의 프로나오스[前室]를 두고 3면을 열주로 둘러싼 나오스[本殿]가 있고,
서쪽에는 오피스토도모스[後室]에 이어져 파르테논(처녀의 실)이라 부르는 보고(寶庫)가 있다.
본전에는 페이디아스가 금과 상아로 만든 높이 12 m에 이르는
본존(本尊)인 아테나 파르테노스(처녀 아테나)상이 안치되어 있다.
신전의 장식 조각에는 동 ·서 양박공(兩牔栱)에 여신 아테나를 칭송하는 대군상조각을 배치하고 상부 4면 외벽에는 ‘라피타이족과 켄타우로스족의 싸움’을 비롯하여,
네 가지 신화에 의한 태고(太古)의 전쟁이 도합 92면의 메토프(작은 벽)에 부조되어 있다.
2006. 3. 12.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본전 외벽 상부 4면에는 길이 163 m에 이르는 도리스식 대(大)프리즈 장식(현존 130 m)이 있다. 이 프리즈는 아테나에게 바치는 장대한 파나테나이아의 대제(大祭)를 부조한 것이며,
인물은 신들을 합쳐 총수 360여 명, 말 219필을 헤아린다.
그 귀중한 잔존부분 가운데 아직도 건축에 남아 있는 일부와 아크로폴리스미술관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조각은 영국의 수집가인 토마스 엘긴경이 수집하여 '엘긴마블스'라는 컬렉션으로 대영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이들 대조각군은 거장 페이디아스가 직접 지도하여 아르카메네스 등 뛰어난 조각가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신전의 안정된 비례와 장중함은 고전시대 그리스 정신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파르테논 신전
파르테논 신전은 지금도 산성비에 노출되어 조금씩 부식되고 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자리잡고 있는 아름답지만 폐허에 가까운 파르테논 신전은 기구한 시절을 지나왔다.
아테나 여신에게 바치는 신전으로 지어진 이곳은 비잔틴 제국이 통치할 때는 동방정교의 교회가 되었다가, 십자군에 의해 점령당한 후 가톨릭 교회가 되기도 했다.
오스만 투르크가 지배할 때는 모스크가 되기도 하였으나,
성격이야 어찌되었건 비교적 잘 보존된 셈이었다.
하지만 1687년 베네치아공화국이 아테네를 점령하고 있던 오스만 투르크를 공격했을 때
파르테논 신전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
탄약고로 사용하던 파르테논 신전에 베네치아 군의 구포탄이 날아들어 파괴되어 버린 것이다.
이후 이어진 베네치아군의 약탈, 영국의 엘진의 유물 반출 등을 통해 파르테논 신전은 되돌릴 수 없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
현재 파르테논 신전의 적은 ‘산성비’다.
파르테논 신전을 구성하고 있는 석회석, 대리석은 탄산칼슘을 주성분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또한 산에 녹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아테네가 대도시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공해에 의한 그리스 고대유물들의
침식 현상이 본격적인 문제로 대두된 것은 1970년대.
그리스 문화부에서는 에렉테이온의 여상주와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 등에서 심각한 훼손의 흔적을 발견했다.
1990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아테네 시가 본격적인 오염 규제정책을 발표하면서 피해는 줄어들고 있지만, 공해에 노출된 파르테논 신전으로서는 공해자체를 현격히 줄이는 것 이외에는 다른 보호방책이 없다. 다행히 시끄럽고 공해로 가득차 있기로 유명한 아테네도 최근들어 상당한 개선을 보이고 있다고.
KBS 걸어서 세계 속으로. 495회. 그리스의 대표 건축물. 유네스코 심벌마크로 사용될 만큼 인류의 대표적 건축물.
그리스 건축물의 각 부분별 명칭
파르테논 신전의 동-서쪽에서 보이는 9대 4의 비율. 이 비율은 위에서 보거나, 남-북쪽으로 보았을 때에도 같은 비율을 보인다.
그리스 고전 건축의 최고봉
파르테논 신전이 그리스 고전 건축의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로 찬미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건축 자재의 대부분이 최고급 백대리석이었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건축의 기본이 모두 곡선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대들보와 기단, 기둥 등 신전을 구성하는 소재들이 모두 곡선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여기서 그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도록 하자.
신전을 지탱하고 있는 기단부의 바닥 부분은 미묘한 굴곡이 있는 컵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데,
바닥의 가운데 부분은 모서리 쪽보다 17센티미터가 높다.
눈으로 식별하기는 어렵지만 엔타블레이처(기둥 위의 대들보 부분)도
중앙 쪽이 6센티미터 더 높아서 완만한 아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신전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의 직경은 위치에 따라 다르지만
정면 중앙부 하단의 직경이 1.9미터인 것에 비해 테두리 쪽에 있는 기둥의 직경은 1.94미터이다. 이처럼 신전 전체는 미묘한 곡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파르테논 신전처럼 곡선을 주조로 한 건축은
오늘날처럼 건축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도 상당히 구현하기 힘든 기술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인들은 왜 신전을 곡선으로 만들었을까?
첫째는 시각 효과를 들 수 있다. 신전 곳곳을 곡선으로 만듦으로써
실제 크기보다 더 크게 보이게 하는 효과를 노렸다.
그리고 또 하나는 당시 건축물은 예술품이었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건축가는 예술가이자 조각가이기도 했다.
그들은 건축과 동시에 조각 작품을 만들었던 것이다. 파르테논 신전은 신들에게 바치는 최고의 작품이어야 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런 생각으로 최고의 자재와 최고의 인재를 동원해 신전을 건설했던 것이다.
파르테논 신전 프리즈
외벽 상부 프리즈에는 아테나에게 바치는 파나테나이아의 대제(大祭)를 부조한 장식이 있으며, 인물 360여 명, 말 219필이 부조되어 있다.
신전 동쪽 메토프와 박공벽의 모습.
박공벽에는 태양신 헬리오스의 말이 새겨져 있고(위), 메토프에는 희미하지만
헤르메스, 디오니소스, 아레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신전 내부 프리즈 : 판아테나이아 제전 행렬
신전 내부의 프리즈는 세로 1m, 가로 총길이 160m에 이르는며, 하나의 연속된 띠 속에 아테네에서 열린 판아테나이아 제전의 행렬이 묘사되어 있다. 그 내용은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내에 묘조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스 고전기(B.C. 4세기~B.C. 5세기)의 최고 걸작품으로 손꼽히는 파르테논 신전은
B.C. 480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했으나 페르시아 군의 침공으로 한 차례 중단되었다.
B.C. 480년 가을,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는
마라톤 전투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20만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했다.
압도적인 전력으로 아테네를 점령한 페르시아 군은 당시 건설 중이던 파르테논 신전을 파괴해버렸다. 이때 파괴된 신전을 구파르테논 신전이라고 부른다.
그후 그리스 군은 살라미스 해전(B.C. 480년)과 플라타이아이 전투(B.C. 479년)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침내 아테네를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B.C. 447년, 신전 건설이 재개되어 당시 그리스의 저명한 건축가들이었던
페이디아스와 익티노스, 칼리크라테스 등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페이디아스는 신전 내 아테나 상과 신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부조들을 직접 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파르테논 신전은 B.C. 447년부터 B.C. 432년까지 약 15년간의 재공사 끝에 완성될 수 있었다.
그후 파르테논 신전은 세계의 중심이 그리스에서 로마로 이동하고,
기독교가 보급되면서 성 마리아 교회로 전용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아테네를 지배한 15세기에는 이슬람 교도들에 의해 모스크로 개조되기도 했다.
아테나 여신의 탄생을 표현한 조각 중 디오니소스의 조각
1687년에는 오스만 투르크 군과 베네치아 군과의 전투로 신전의 일부가 파괴되는 일도 일어났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파르테논 신전에는 건설 당시의 아름다움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전쟁의 참화를 견뎌온 파르테논 신전도 약탈에는 속수무책이었다. 1801년 영국이 당시 전쟁으로 피폐해진 오스만 투르크를 통해 신전의 대부분을 약탈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때의 약탈을 진두지휘했던 엘긴 경은 후에 같은 나라의 시인 바이런으로부터
'약탈자'라고 매도당했을 만큼 철저하게 신전을 파괴하고 약탈했다.
그리고 1981년에는 지진이 발생해 기둥 상부가 떨어져 나가는 피해를 입었으며,
최근에는 산성비로 인해 아름다운 대리석이 훼손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그리스 정부는 인류의 유산인 파르테논 신전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수리와 복원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신전 동쪽 박공벽의 모습.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소장.
중앙에는 제우스가 왕좌에 앉아 있고, 그 오른쪽에 무장한 채로 아테나가 서 있다. 그리고 그 두 신 사이로 승리의 여신 니케가 조각되어 있었다고 한다.
신전 메토프의 묘사 : 그리스의 투쟁과 영광 파르테논 신전의 외벽을 장식한 메토프는 신전 4면에 총 92개가 있었다고 한다. 동서면에 각각 14개, 남북면에 각각 32개의 메토프가 배치되어 있었다.
동쪽 메토프 : 신과 거인들의 싸움 서쪽 메토프 : 아테네인과 아마조네스의 싸움 남쪽 메토프 : 인간과 켄타우로스의 싸움 북쪽 메토프 : 트로이 전쟁
신전 내부 프리즈의 내용.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모조품.
아테나의 신상
파르테논 신전 내부에 안치되어 있었던 아테나 파르테노스의 신상은 조각가 페이디아스가 만들었다. 그 높이가 무려 12m 였다고 한다. 현재 신상의 원형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 원형을 추정할 수 있는 묘조품이 아테네 국립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투구 : 중앙에는 스핑크스, 좌우에는 그리핀의 상이 조각되어 있다. 오른손 : 승리의 여신 니케 상 왼손 : 창과 방패. 창 옆에는 뱀 1마리가 몸을 도사린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갑옷 : 상반신 갑옷 가운데에는 메두사의 얼굴이 달려 있다.
아테나 파르테노스 신상의 묘사본.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 소장.
이 작품은 페이디아스가 만든 원작에 비해 예술성은 떨어지지만, 파르테논 신전에 안치되어 있었을 원작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이라고 한다.
파르테논 신전 동쪽 지붕에 있던 세 여신의 조각. 영국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파르테논신전 원주기둥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신전.
BC 479년에 페르시아인이 파괴한 옛 신전 자리에 아테네인이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에게 바친 것으로서 도리스식 신전의 극치를 나타내는 걸작이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와 그곳의 기념물은 고전주의의 정신과 문명의 보편성을 상징하며, 고대 그리스가 세계에 남긴 가장 위대한 건축과 예술의 복합체로서 칭송받고 있다.
기원전 5세기 후반, 아테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민주주의를 성립시키면서 고대의 도시 국가 사이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했다.
이 시기에 세워진 가장 중요한 기념물은 파르테논 신전, 에레크테이온 신전,
아크로폴리스 신전 입구인 프로필라이온 그리고 아테나 니케 신전 등이다.
아크로폴리스 모형
사람들은 신화와 전설이 살아 숨 쉬는 그리스를 서양 문명이 태어난 고향이라고 말한다. 아폴론이 태어난 델로스 섬과 제우스가 살았던 델포이, 포세이돈의 신전이 있던 수니온 곶에 이르기까지 어느 곳을 가더라도 신화 속의 주인공들이 살던 매력적인 유적지와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를 찾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찾아가는 곳이 있다. 바로 아테네 아크로폴리스다.
아크로폴리스 모형
아크로폴리스는 오늘날 서양 문명의 기틀을 마련한 중요한 장소이다. 서양 문명의 뿌리가 되는 고대 그리스의 신화, 정치, 문화가 태어난 곳으로
다채로운 문명의 흔적들을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리스어로 ‘아크로’는 높은 곳, ‘폴리스’는 도시 국가란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아크로폴리스란 높은 언덕에 세워진 도시를 말한다.
이름대로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아크로폴리스 모형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지역은 기원전 1500년경부터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활용되었다. 현재 출입구로 사용하는 서쪽을 제외한 동, 남, 북쪽이 60~70m에 이르는 거대한 낭떠러지로 되어 있어 적의 공격을 쉽게 방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원전 800년경부터 아크로폴리스는 새로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아테네의 수호 여신 아테나를 비롯하여 여러 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전과 여러 건물을 지으면서 신성한 장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약 300년 동안 신성시되었던 아크로폴리스는 기원전 480년에 일어난 페르시아 전쟁으로 대부분 파괴되었다. 하지만 같은 해,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격파한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의 성벽을 다시 세웠다.
아크로폴리스 모형
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는 아테네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아크로폴리스를 다시 짓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수많은 건축가, 예술가, 철학자, 장인을 아테네로 불러 모아 커다란 신전을 건설하게 되었다. 아크로폴리스는 3곳의 신전과 입구에 해당하는 프로필라이온, 그리고 2개의 극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톨레도 대성당은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고딕 양식 성당 중 하나이며, 중요한 예술적 보배들을 간직한 곳이다. 이 유명한 성당은 스페인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인상 깊은 건물 중 하나이다.
샤르트르 대성당 같은 유럽 북부의 거대한 고딕 성당에서 영향을 받았으나, 매혹적인 새로운 요소가 이에 더해졌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만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다양한 문화적 양식이 하나로 혼합된 모습이다.
톨레도 대성당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마스터 마르틴이라는 건축가가 처음 짓기 시작했으나,
대부분의 기초 작업은 페트루스 페트리가 맡았는데 그는 1291년에 사망했다.
고딕 양식이 지배적이지만, 건물이 오랜 시간에 걸쳐 세워졌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다른 양식의 영향을 받은 흔적도 보인다. 지금도 오래된 서고트 족의 예식에 따라 미사를 거행하는 '모사라베 예배당'(1504)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
이와 반대로 회랑은 무데하르 양식, 즉 기독교 통치기까지 살아남은 무어 양식의 특징을 몇 가지 갖추고 있다. 고딕 양식 요소는 세 개의 중앙 현관 위편에 새겨진 복잡한 조각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톨레도 대성당 (Toledo Cathedral)
아마 톨레도 대성당이 가장 유명한 이유는 두 가지 뛰어난 보배 덕택일 것이다.
하나는 '트란스파렌테'(1721~1732)라는 이름을 가진 나르시소 토메의 작품으로,
대리석과 설화 석고로 제작한 놀라우리만치 화려한 제단 장식이다.
그는 윗편의 둥근 천정을 깎아 구멍을 내 자신이 조각한 인물상들이
태양 광선을 받아 영적인 빛으로 이루어진 후광 안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를 자아냈다.
아마 이보다 더 훌륭한 작품은 엘 그레코의 장엄한 그림 <엘 에스폴리오>(그리스도의 옷을 벗김)일 것이다.
엘 그레코는 크레타 섬에서 태어났으나 예술적 이력 대부분을 톨레도에서 쌓았으므로
톨레도 대성당이 그의 걸작 중 한 점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썩 어울리는 일이다. 이러한 예술적 보물들 덕택에 이 건물은 성당인 동시에 박물관이기도 하다.
성체현시대(聖體顯示臺)
톨레도 대성당에서 보물실의 백미라 불리는 가장 유명한 보물이 바로 "성체현시대(聖體顯示臺)" 이다. 성체(聖體, 예수님의 몸) 강복 때 성체를 올려놓는 대(臺), 금은보석으로 꾸민 높이 3m, 무게 180Kg의 화려한 모습이다, 성체현시대 중앙에는 다이아몬드 십자가가 있다.
성체현시대(聖體顯示臺)
금은보석은 주로 남미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성체현시대(聖體顯示臺) 부분
성체현시대(聖體顯示臺) 아랫부분
왕관
보물
톨레도 대성당 내부
톨레도 대성당 내부
톨레도 대성당 내부
톨레도 대성당 내부
파이프오르간
[스페인 여행-톨레도]그라나다 정복 역사가 새겨진 ‘톨레도 대성당’/Toledo Cathedral/Transparent
초원의 양떼를 적군의 행렬로 착각해 양들을 공격하다 목동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다. 비를 피하기 위해 머리에 쓴 어느 이발사의 면도용 대야를 빼앗고는 그게 진귀한 황금투구라며
자신의 머리에 쓰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기도 한다.
‘사악한 무리’를 무찌르기 위한 공격에서 어쩌다 재수 좋게 ‘승리’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두들겨 맞는 등 수난을 당하기 일쑤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일으키는 돈키호테의 소동으로 산초 판사는 물론 로시난테,
그리고 산초의 당나귀도 함께 고초를 입는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온몸 성한 곳 없이 다치더라도 모험을 포기하지 않는
강인한 돈키호테지만 마음 한편에는 따뜻한 연민도 스며 있다.
한번은 양떼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구실로 여러 달 밀린 품삯을 주지 않고
어린 하인을 학대하는 농부를 크게 꾸짖으며 매질을 멈추게 하고 밀린 품삯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연인으로부터 버림받은 어느 사내의 슬픈 사연을 들을 때는 자신의 일처럼 아파하며 위로를 보내는 모습도 보인다.
돈키호테의 기이한 모험은 서서히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다.
많은 이들은 그에게 조롱을 보낸다.
하지만 세상과 인간에 대한 깊은 지혜와 이해심이 그의 광기 이면에 숨어 있음을 인정하는 이들도 생겨난다.
흥미 반 장난 반으로 돈키호테를 자신들의 저택에 정중히 초대해
돈키호테의 망상에 맞장구치며 함께 생활한 어느 공작 부부도 있었다.
이들은 돈키호테가 산초에게 섬의 영주를 시켜주겠다고 약속한 사실을 알고는
실제로 산초에게 바라따리아라는 섬을 다스리도록 해준다. 섬으로 떠나기 전 산초에게 건넨 충고에서 돈키호테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행동으로 벌을 주어야 될 사람을 말로 학대하지는 말게. 그 불행한 자에게는 형벌의 고통만으로도 충분한데, 다른 나쁜 말까지 덧붙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자네의 관할 아래서 죄를 지은 사람은 타락한 우리 인간 본성의 양태를 벗어나지 못한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나."
라 만차 마을 신부는 돈키호테를 이렇게 평가한다. “이 착한 양반이 순진한 엉터리 소리를 해서 미친 것 같아 보이지만, 다른 일을 말하는 걸 보면 아주 기막히게 논리정연하고, 무엇에든 온건하고 밝은 지혜를 가진 것 같거든요...”
돈키호테와 같은 고향 사람인 산손 카르라스코라는 학사는 신부와 함께 돈키호테가 제정신을 되찾아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도와주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그런 그에게 어떤 지체 높은 부자가 만류한다.
“돈키호테가 그의 허튼 짓으로 우리 모두를 재미있게 한 그 즐거움에 비하면
그가 정신이 말짱해져서 얻는 이득은 그에 못 미칠 거라는 것을 모르세요?...”
결국 신부, 이발사, 학사 등 고향 마을 사람들은 속임수를 써서 돈키호테와 산초를 마을로 데려온다. 고향에 돌아온 지 얼마쯤 지나 돈키호테는 제정신을 되찾고 알론소 키하노 영감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며칠 후 돈키호테는 숨을 거둔다. 제정신을 되찾자 곧 세상을 떠난 것이다. 꿈꾸지 않고 이상을 향해 돌진하지 않는 돈키호테는 더 이상 돈키호테가 아니며, 그런 그에게 삶이란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죽은’ 후 400년 동안 돈키호테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되살아났다.
톨레도 구 시가지 전경
톨레도 구시가의 구불구불한 골목길도 이슬람 문화의 흔적이다. 도심의 미로처럼 얽힌 좁은 길은 이슬람 도시의 특징으로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바이신 지구에서도 볼 수 있다.
이슬람 점령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골목길 곳곳에는 중세의 향기가 가득하다.
구시가 중심에 위치한 톨레도 대성당은 순수한 스페인 고딕양식의 건축물이다.
길이 120미터(m), 폭 60미터의 위풍당당함에 세련된 건축과 조각,
엘그레코, 발라스케스 등의 예술 작품들 때문에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중에 하나다.
로마 시대에 건축되어 서고트인, 이슬람교도, 기독교도에 의해서 여러 번 재건축 된 알카사르도 톨레도의 빼어난 건축물이다. 스페인 내전 중에 폐허가 되다시피 한 건축물을 다시 복원한 것으로 무데하르 양식에 고딕 양식이 어우러져 있다.
언덕 위에 알카사르(Alcazar) 건물이 보인다.
산마르틴 다리(San Martin Bridge)에서
성밖 타호(tajo)강 풍경
타호(tajo)강
타호(tajo) 강이 반원을 그리며 도시전체를 휘감아 흐르는 중세도시로서, 언덕에서 바라 본 경치 또한 아름답다.
타호(tajo)강
산마르틴 다리(San Martin Bridge)
타호강(江)에 놓인 고딕 양식의 다리이다.
이전에 있던 다리는 1023년의 홍수로 손상되었고 14세기 말에 페드로 테노리오(Pedro Tenorio) 주교가 보수하였다.
산마르틴 교구와 가깝다고 하여 산마르틴 다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5개의 아치형 구조로 이루어졌으며 중앙에 있는 가장 큰 아치는 길이가 40m이다.
양쪽 끝에는 방어를 목적으로 한 탑이 있는데 하나는 13세기에, 또 다른 것은 16세기에 세워졌다.
오랜 시간 톨레도를 바깥 세상과 연결하고 톨레도를 지켜온 다리로
오늘날에는 중세 도시의 자취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한다. 타호강에는 알칸타라 다리(Puente de Alcantara)도 놓여 있다.
산마르틴 다리(San Martin Bridge)
산마르틴 다리(San Martin Bridge)에서
산마르틴 다리(San Martin Bridge)에서 가이드와 함께
알칸타라 다리(Alcantara Bridge)
타호강을 건너 톨레도로 들어가는 다리이며 중세의 산세르반도성(城) 기슭에 위치해 있다. 로마제국 오현제(五賢帝) 중 두 번째 황제인 트라야누스 치세인 104년에서 106년 사이에 건축된 뒤 파괴되었다가 이슬람 지배 시대에 다시 세워졌으나 1257년 교각과 받침대만 남고 모두 떠내려갔다.
이후 레온-카스티야왕국의 왕인 알폰소 10세(재위 1252∼1284) 때 재건하였고 15~16세기에 복원되었다.
다리의 양끝에는 방어를 목적으로 한 탑이 있었으나 현재는 시내와 가까운 쪽에만 남아 있고
다른 하나는 1721년에 다리에 들어가는 입구로 바뀌었다.
다리 석재로는 로마시대, 비사고틱(Visagothic) 시대, 아랍 시대의 돌이 사용되었으며
다리 서쪽 끝의 거대한 탑은 무데하르 양식으로 되어 있다.
알칸타라는 아랍어(語)로 '다리'라는 뜻으로 톨레도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오랜 시간 톨레도를 바깥 세상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타호강에는 산마르틴 다리(Puente de San Martin)도 놓여 있다.
알칸타라 다리를 건너면 다리끝 아래 타호강 강변에 La Cubana (애저 요리 전문점 34-925-220088) 레스토랑이 있다.
우리 일행은 애저 요리로 유명한 라쿰바나 레스토랑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이 레스토랑은 창가에서 바라다보이는 타호강과 알칸타라 다리 또한 일품이다.
애저 요리
애저요리는 스페인의 전통요리 중 하나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고 배내에 있거나 막 태어나 사료를 먹기 전까지의 새끼 돼지. 우리나라에서 새끼 돼지를 이용하는 애저 요리는 조선 시대 중엽에 시작됐다.
생후 1개월 남짓한 새끼 돼지에 마늘과 생강 등을 넣고 푹 삶아 초장에 찍어먹는 요리이다.
전라북도 진안의 토반(土班)들이 즐겨 먹은 보양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진안에서는 생후 1개월 남짓한 새끼 돼지를 찬물에 1~2시간 담가서 핏물을 제거한다. 돼지가 잠길 정도로 물을 부어 전피·인삼·마늘·생강·청주를 넣어 2시간 정도 삶는다.
다 삶아지면 밤·은행·대추·양파·대파를 넣어 한 번 더 끓여 양념한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데, 삼베 보로 싸서 편으로 만들어 먹기도 하며 탕으로 끓이기도 한다.
애저 요리
스페인에서는 도살장에서 태어난 지 20일에서 21일 된 새끼 돼지를 구입하여 레스토랑으로 전달되는데 이미 도살장에서 배를 갈라 창자 등의 내장을 모두 꺼내 보내진다.
커다란 타원형의 질그릇에 새끼 돼지는 가느다란 나무 판을 대고 올려지는데
그 아래엔 사분의 일의 물이 고여 있어야 한다.
배를 뒤집어서 올린 후 소금을 뿌리고 장작 오븐에 넣어진다.
180도의 온도로 1시간 30분 살이 부드럽게 익혀지도록 한다.
물을 넣는 이유는 수분으로 살이 퍽퍽해지는 것을 미리 방지하는데 목적이 있다.
오븐이 가장 중요한데 전기 오븐으로는 이러한 맛을 내기 어렵다고 한다.
장작 오븐은 지붕을 둥그런 것을 가장 고급 재질로 사용하는데
이러한 오븐에 따라 맛이 승부를 낸다고 한다.
둥그런 지붕안에서 열이 회전을 하면서 맛이 좋게 익혀진다.
하얀상태에서 익혀지면 다시 꺼내 뒤집는데 (배가 밑으로)
이번에는 돼지 기름으로 만든 버터를 껍질에 칠을 하고200도로 온도를 조절한 후 45분을 더 익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