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5세의 기마상〉 캔버스에 유채 / 335×283cm / 1548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27실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90~1576)는 베네치아와 신성로마제국의 경계에 위치한 피에베디카도레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베네치아로 이주해 처음에는 모자이크부터 시작해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스스로 100세를 넘어섰다는 등 ‘노익장’을 과시하는 허풍이 심해 태어난 연도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장수한 화가로 피렌체나 로마와는 다른 베네치아 화풍을 절정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대상을 정확한 선으로 묘사하여 완벽하고 이상적인 형태를 잡아내는 것에 집중했던 피렌체나 로마에 비해,
그는 빛과 색의 완숙한 묘사에 더욱 치중하곤 했는데, 이는 스승으로 모셨던 벨리니 형제로부터 익힌 것들이었다.


세계적인 무역도시였던 베네치아를 근거지로 삼은 그는 값비싸고 귀한 안료들을

이탈리아 내륙 지방의 화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게 구할 수 있었고, 그만큼 색을 사용하는 감각이 뛰어났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그는 데생으로 형태를 잡은 뒤 색을 입히는 전통적인 방법 대신
붓으로 물감을 발라가며 자연스레 형태를 완성해내는 방법으로 작업하곤 했다.


그의 그림 솜씨는 베네치아를 넘어 유럽 각국의 군주와 귀족 들에게 알려졌는데,
그가 그린 당시의 초상화만 가지고도 궁정 인물사를 한 권쯤 쓸 수 있을 정도이다.


이 때문에 티치아노가 그린 초상화 한 점 없는 자는 소위 유럽 실세 치곤

뭔가 좀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이다.


특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스페인까지 통치했던 카를 5세는 티치아노를 어찌나 신임했던지
그가 붓을 떨어뜨리자 친히 허리를 숙여 집어주었다는 일화까지 전해진다.


〈카를 5세의 기마상〉은 뮐베르크에서 프로테스탄트 연합을 무찌른 황제의 위용을 담은 작품이다.
주인공을 빼고 봐도 완벽한 황혼녘의 풍경화로 손색이 없는 이 작품은 거친 말(자연)을 제압하는 영웅상으로,
훗날 궁정화가들이 그리는 많은 ‘황제 기마상’의 모범이 되었다.


물론 티치아노의 기마상은 로마제국 시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 조각상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개와 함께 있는 카를 5세〉 캔버스에 유채 / 192×111cm / 1533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프라도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정화가였던 초상화가 야콥 자이제네거가 이미 그렸던 그림을

다시 제작한〈개와 함께 있는 카를 5세〉도 걸려 있는데,

이 그림에 반한 황제는 티치아노에게 기사와 백작의 작위까지 수여한 것으로 알려진다.

〈안드로스 섬의 주신 축제〉 캔버스에 유채 / 175×193cm / 1523~1526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42실


〈안드로스 섬의 주신 축제〉는 안드로스 섬 마을에서 벌어진

술의 신 바쿠스(디오니소스)를 위한 축제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 정중앙에는 하얀색의 그리스 옷차림을 한 남자가 포도주 잔을 높이 들고 있다.


중앙 아래 한 여인이 한손엔 플루트를, 다른 손으로는 술잔을 높이 쳐들어 술을 받고 있는데,
무릎에 놓인 악보에는 “술을 맘껏 마실 줄 모르는 사람은 술을 모르는 사람이다”라는 내용의 가사가 적혀 있다.

중앙에 있는 남자의 높이 치든 포도주 병은 그야말로 ‘술에 대한 예찬’ 그 자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티치아노가 참고한 고대 그리스 신화는 3세기 경의 그리스 철학자 필로스트라토스(Philostratus, 190~?)의 저서
《상상(imagines)》에 기록된 것으로, 필로스트라토스는 “포도주를 적당히 마시는 것은 정신에 유익하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예나 지금이나 주당들의 핑계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절제되지 못한 술의 역효과 역시 티치아노는 놓치지 않았다.
화면 오른쪽 언덕에는 술에 곯아떨어진 한 사람이 바닥에 드러누워 있고,
그 아래 오른쪽 모퉁이에는 제 몸이 다 노출되는 것도 잊은 님프 하나가 널브러져 있다.


술 하면 음악이, 음악이 나오면 춤이 나오기 마련이라
화면 오른쪽에는 티치아노 특유의 ‘고급스러운 붉은색’ 옷을 입은 남자가 여인과 춤을 추고 있다.
남자의 손에 들린 것은 포도넝쿨로 만든 화관인데, 이는 디오니소스가 쓰고 다니던 것이다.

〈비너스를 경배함〉 캔버스에 유채 / 172×175cm / 1516~1518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42실


〈비너스를 경배함〉은 오른쪽에 놓인 비너스(아프로디테) 상을 숭배하는 수많은 아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 상단의 날개 달린 세 아이는 아마도 큐피드(에로스)를 포함한 님프들로 비너스의 상징인 사과를 모아들고 있다.


그림은 ‘사랑의 여신’ 비너스가 결국 우리에게 선물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풍부한 생식력을 바탕으로 한 ‘풍요’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규모가 큰 유치원의 모습을 능가하는 수많은 어린아이들은 바로 그 사랑의 힘으로 생산된 결과물이다.

〈황금비를 맞는 다나에〉 캔버스에 유채 / 129.8×181.2cm / 1553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44실


<황금비를 맞는 다나에>는 딸이 낳은 아이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들은 왕이 딸 다나에를 탑에 가둔 사건부터 시작된다.
꽁꽁 가두어 그 어떤 남자와도 관계하지 못하게 하면 결국 외손자를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만,
희대의 바람둥이 신 주피터르는 황금비로 변신하여 그녀의 몸을 적신 뒤 결국 다나에를 임신하게 만든다.


그림은 바로 그 황금비가 탑을 뚫고 들어와 그녀에게 닿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펠리페 2세는 다나에를 ‘그 어떤 이유도 묻지 말고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백성’으로 해석하고

주피터르를 자신으로 생각한 듯, 이 그림에 크게 기뻐했다.


하녀로 보이는 노파는 왕이 베푸는 풍요로움, 즉 ‘금화’ 모양의 비를 앞치마로 한 가득 받고 있다.
좋게 보면 능력 있는 왕이 베푸는 일종의 ‘성은’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삐딱한 시선으로 보자면,
‘돈’으로 여자의 성을 사는 매음굴의 모습으로도 읽힌다.


바사리의 《예술가 열전》에 따르면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을 실제로 본 뒤 “색채의 적용이 인상적”이라고 말했지만
“베네치아에서 제대로 된 드로잉 교육이 기초부터 이루어지지 못한 점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선과 형태보다 색채와 빛을 중요시한 베네치아 화가에 대한 불편한 심정을 드러냈다.


<황금비를 맞는 다나에>에서 몰아치는 폭풍우를 뚫고 들어오는 변신한 주피터르의 황금비는 미켈란젤로 식의 명료한 선을 거부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붓질 속에서 윤곽선을 잃고 오로지 ‘색의 유희’로만 존재한다.


빛과 색에 대한 뛰어난 감각은 다나에의 침실에 놓인 커튼이나 침대보, 노파 하녀가 입고 있는 옷 등의 질감을
예의 ‘성긴 붓질’만으로도 완벽하게 재현해놓고 있다.

〈비너스와 아도니스〉 캔버스에 유채 / 186×207cm / 1554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44실


〈비너스와 아도니스〉는 무겁게 드리워진 구름과 그 사이 선명하게 제 존재를 드러내는 푸른색 하늘이 압권이다.
그 푸른 하늘과 대조를 이루는 붉은색 옷차림의 사냥꾼 아도니스가 외출하려고 하자 비너스가 온몸을 다 바쳐 막고 있다.


큐피드는 자신의 화살통을 나무에 걸어놓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고 하늘은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듯하다.
이 불길함은 결국 아도니스의 죽음으로 귀결된다.


비너스의 예감대로 아도니스는 사냥을 강행하다 결국 멧돼지에 물려 죽게 된다.
신화는 그날 그가 흘린 피가 땅을 적셔 피어난 꽃이 바로 아네모네라고 전한다.


화면 오른쪽 상단의 하늘에는 마차 하나가 지나고 있는데,
그곳에서 뿜어나온 빛나는 광채가 닿는 곳에 아마도 그 아네모네가 피어날 것이다.


티치아노는 이 그림을 완성한 뒤, 비너스가 등을 보이지 않고 정면을 향하도록 그렸어야 했다며 아쉬움 가득한 글을 남겼다.
등보다 앞이 더 궁금한 남성 관람자들의 갈망을 티치아노가 뒤늦게 간파한 것이다.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 86×65cm / 1562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41실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90~1576)는 100세가 되어도 질긴 고기를 뜯을 수 있다며 건강을 자랑했지만
실제로 그는 아흔이 못 된 나이에 당시 떠돌던 전염병에 걸려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평생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유럽 실세들의 초상화를 비롯해 신화, 종교, 역사화 등 그 모든 것에서
미켈란젤로에 버금가는 유럽 최고의 화가로 군림한 그는 마지막 작품으로 자화상을 남겼다.


미켈란젤로는 티치아노에게 색채 감각은 뛰어나지만 제대로 된 소묘가 부족하다고 비평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정확한 선과 명료한 형태를 으뜸으로 치는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이탈리아 내륙 화가들의 편견에 가득 찬 평가에 불과하다.


그는 사물의 표면에 닿는 빛이 그 본래의 색을 다채롭게 변화시키는 모습을

예리하게 관찰해낼 줄 아는 그야말로 뛰어난 색 감각의 소유자였다.


그를 일러 색 감각이 뛰어나다고 하는 것은 많은 색을 다채롭게 사용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그림에서처럼

단출한 색 몇 가지만을 가지고도 다양하게 변주해 완벽한 데생만으로는 잡아낼 수 없는 미묘한 지점들을 포착해내는 데 있다.


그는 “훌륭한 화가에게는 오직 세 가지 색, 검은색, 흰색, 빨간색만 필요하다”라고 말하곤 했다.

이 자화상에서도 역시 꼼꼼하고 성실한 세부 묘사를 많이 벗어난 그의 감각이 돋보인다.


이 작품은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면 붓이 닿은 흔적이 과감하게 노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적당히 떨어져서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형태감이 느껴진다.


뭉개진 물감층이 만들어낸 그의 수염은 손을 대면 그 부드러운 촉감이 그대로 전해질 듯하다.
카를 5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으면서 하사받은 두 줄 목걸이는 몇 번 툭툭 찍어낸 붓질만으로
놀라우리만큼 선명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이 목걸이의 찬란한 빛은 그림 전체의 분위기를 압도한다.
입고 있는 검은 옷은 미묘하게 그 음영을 드러내고 있어 사진보다 더한 극도의 사실감을 선사한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19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20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21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22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23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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