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의 역사극장

정의의 군대가 북을 쳐도 일어나지 않으니

내몽골 3만 정보 개간권을 획득하고 200억원의 자금을 모집하려

1925년 밀입국한 김창숙

 

1925~1926년 국내 비밀활동을 할 즈음의 김창숙. 눈매가 형형하고 날카롭다. 임경석 제공

 

김창숙이 국경을 넘은 때는 1925년 8월23일께였다. 그의 나이 47살이었다. 1919년 4월 망명길에 오른 지 6년4개월 만에 다시 고국 땅을 밟으려는 참이었다. 하지만 합법적인 귀국길이 아니었다. 행여 남의 눈에 뜨일세라 몰래 잠입하는 길이었다.

 

조선으로 밀입국하려면 어느 경로를 택해야 할까? 그는 압록강을 건너기로 했다. 신의주와 건너편 중국 쪽 국경도시 안동(현재 단둥) 사이를 오가는 철교가 놓인 코스였다. 이 철교는 일본 경찰과 헌병의 삼엄한 감시 아래 관리됐다. 1909년 5월 착공하고 1911년 11월 준공한 이 철교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세운, 길이 944m의 현대식 교량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 진출을 위해 부설된 이 철교는, 국외로 망명하는 지사들과 국내로 비밀리에 잠입하는 혁명가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기도 했다.

 

국경을 관리하는 신의주경찰서는 바쁘고 사건이 많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1928년의 보기를 들면 1년간 관내 검거 사건은 3109건으로 조선의 모든 경찰관서 가운데 1위였다. 당연히 정치·사상범 사건도 많았다. 제령 위반과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이 각각 47건, 84건으로 이를 합하면 131건에 이르렀다. 대다수가 국경을 넘으려다가 적발된 경우였다.1

 

김창숙은 걸어서 넘기로 결심했다. 철로를 따라 기차에 탑승한 채 월경을 시도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허름한 농민 복장을 했다. 거기에도 검문과 감시망이 깔려 있었다. 경찰과 헌병이 경쟁적으로 운용하는 밀정이 도처에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누런 베옷을 입은 40대 후반 추레한 농민에게 주의를 돌리지 않았다.

 

1927년 2월, 용수를 쓰고 포승에 묶인 채 재판정에 들어가는 유림단사건 피고인들. 갓 쓰고 두루마기를 갖춰입은 방청객들이 도열한 채 피고인들을 지켜보고 있다. 임경석 제공

 

면우 선생의 문집 간행을 기회로 삼아서

김창숙이 비밀스레 조선으로 되돌아온 까닭은,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결사입국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2 죽음을 무릅쓰고 모험을 벌이는 까닭은 바로 독립운동자금 모금 때문이었다.

 

1924년 10월께 중국의 진보적 군벌 펑위샹(馮玉祥, 1882~1948)이 집권할 때, 김창숙은 중국 정부와 교섭해 내몽골 미간지 3만 정보의 개간권을 어렵사리 획득했다. 쑤이위안성 바오터우 일대였다. 그곳에 재만주 동포를 불러모아 농업과 군사훈련을 병행하는 둔전 농장을 개척할 수 있게 됐다. ‘3만 정보’란 9천만 평의 넓이로 대농장을 경영할 만한 땅이었다. 농장 자립 기반을 확충하면서 사관학교를 세우고 병농일치의 군대도 준비할 수 있었다. 중장기 전망을 갖고 조선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었다.

 

문제는 사업비였다. 조선 농민들을 이주시키고, 가옥을 짓고, 토지를 개간하는 데 큰 자금이 필요했다. 모두 합쳐 20만원이 들 것으로 추산됐다. 오늘날 구매력으로 얼마나 되는 돈인가? 1919년 당시 관청 ‘서기’의 1개월 급여는 본봉 30원에 수당을 합해 약 50원이었다. 1920년 일용노동자의 하루 품삯은 1원 내지 1원10전이었고, 1925년 <동아일보> 지방부 기자의 월급은 40원이었다. 따라서 사업비 20만원을 오늘날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대략 150억∼200억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김창숙은 국내 모금으로 사업비를 마련하기로 결심했다. 조선의 유교 역량과 자신의 네트워크를 활용한다면 가능할 것 같았다. 유교 학맥으로 연결된 대지주 출신의 부호 10명에게서 1만~2만원씩 모금하고, 나머지는 각 지방 문중을 통해 형편 닿는 대로 수백~수천원씩 거둘 수 있다고 계산했다. 혹여 동의하지 않는 부호가 있다면 강제로라도 징수할 생각이었다. 권총 두 자루와 실탄을 산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게다가 좋은 기회가 왔다. 면우 곽종석 선생의 사후 6주기에 즈음해 문집을 간행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곽종석은 그의 스승이었다. 또 1919년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유학자 137명의 연명으로 독립청원서를 제출할 때 그 첫머리에 서명한 대표 유학자였다. 그 사건으로 옥고를 견디지 못하고 순국한 애국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전국 여러 곳에서 문집 간행을 도모하기 위해 결집하고 있었다. 김창숙은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겠다 판단하고 비밀 입국을 기획했다.

 

두터운 인맥이 겹겹이 보호

 

김창숙의 국내 비밀활동은 예상보다 길었다. 경성에 도착한 1925년 8월25일 시작한 비합법 지하운동은 이듬해 3월24일 출국할 때까지 만으로 7개월이나 계속됐다. 신분을 보장해줄 아무런 합법적 보호 장치가 없는데도 그랬다. 그 자체로도 놀라운 현상이었다.

 

장기간 비밀활동을 가능하게 해준 원동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먼저, 다층적 협력자들이 있었다. 20대 중반의 중국 베이징 유학생 청년 그룹이 있었다. 송영호, 김화식, 이봉로가 그 사람들이다. 이들은 김창숙의 망명지인 베이징에서 2년 전부터 친교를 맺은 혁명계 후배였다. 베이징 고등교육기관에 재학 중인 이들은 김창숙과 크고 작은 일을 상의했다. 김창숙은 기록하기를, “때때로 내가 있는 곳을 찾아와 경서의 뜻을 질문했는데, 그 질박하고 진실함이 서로 의지할 만하여” 기뻤노라고 썼다. 이들은 국내 비밀활동 계획을 입안 단계부터 함께 논의했다. 여비 조달, 권총의 구매와 국내 반입, 밀입국과 물품 반입 정보, 국내 사전 잠입 등도 나눠 맡았다.

 

다음으로 학맥과 문중, 망명시 교유 등의 경험으로 신뢰감을 갖게 된 측근 그룹이 있었다. 곽윤, 김황, 정수기, 손후익 등이 그들이다. 연령층은 다양했다. 두 살 차이의 동년배(곽윤)이거나 9년(손후익) 혹은 17년 차이(김황, 정수기)의 연하자였다. 이들은 김창숙을 대리해 각지를 순방하면서 모금 활동을 대행했다. 걷어들인 자금을 보관하는 일도 맡았다(정수기). 김창숙이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허리를 다쳐서 요양이 필요할 때는 기꺼이 자기 집을 내주기도 했다(손후익).

 

혈연, 지연, 학연을 통해 형성된 인맥도 김창숙의 협력자 네트워크 구실을 했다. 김창숙은 전통사회 내부에 두터운 인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의성 김씨, 동강 김우옹의 13대 종손이었다. 그로 인해 문중과 친척 사이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그의 가문은 경북 성주군 대가면 사도실마을에서 450년 동안 세거(대대로 살다)해온 까닭에 지역사회에서도 우뚝한 존재였다. 경북 봉화군도 그의 지역 기반 가운데 하나였다. 아버지 김호림이 봉화군 해저마을에서 성장하다가 23살 성년이 된 뒤에야 성주의 동강 김우옹 가문의 종손 자격으로 입양돼 왔기 때문이다. 성주 사도실마을과 봉화 해저마을의 의성 김씨 문중은 2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변함없이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했다.3

 

요컨대 다중 동심원 같은 협력자층 존재가 김창숙의 장기 비밀활동을 가능하게 했다. 동지적 유대를 맺은 유학생 청년 그룹, 두텁게 신뢰를 쌓은 측근 그룹, 전통사회의 두터운 인맥 등이 겹겹이 그를 보호하는 형상이었다.

 

법정에 선 유림단사건 피고인들. 앞줄 오른쪽부터 송영호, 김화식, 손후익, 이종흠, 이우락. 두 사람이 상투를 튼 모습이 이채롭다. 머리카락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 유교 윤리의 근본이라 하여 형무소 쪽 박해를 무릅쓰고 버텨냈다고 한다.

임경석 제공

 

“누이동생을 보더라도 나에 대해 말하지 마라”

장기간 비밀활동의 또 하나 원동력은 김창숙 자신의 재능이었다. 그는 지하운동에 요구되는 엄격한 절제력을 시종일관 유지했다. 은신처를 한번 정하면 그곳에 출입하는 사람을 극소수 필요한 동지로만 한정했다. 예컨대 1925년 9월께 경성 적선동 한적한 곳에 은신처를 정했을 때는 오직 곽윤, 김황, 송영호, 김화식 네 사람만이 때때로 연락할 수 있게 했다. 그 외에는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가족과 연락도 일절 시도하지 않았다. 사촌동생 김창백과 접선했을 때다. 김창백은 때마침 넷째 여동생이 경성에 체류 중이니 한번 만나볼 것을 권유했다. 김창숙은 정색하면서 거절했다. “내가 이번에 온 것은 친척에게 인사를 닦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니니, 비록 내 본가라 하더라도 절대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누이동생을 보더라도 나에 관해서는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4 말이 돌고 돌아서 결국 일이 실패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비밀활동 기간이 늘어난 가장 큰 이유는 모금이 순조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심이 1919년 3·1운동 때와 달랐다. 일신의 위해를 무릅쓰고 공공선을 증진하려 헌신하던 혁명적 열정의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 김창숙이 각지에 파견한 유학생과 측근 등 대리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민심을 전했다. “백성의 기운이 이미 죽어 냉담하게 불응하는 자도 있고, 겁이 나서 불응하는 자도 있으며, 비록 응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몇 사람의 일시 노잣돈 정도에 지나지 않으니 매우 한심합니다” 5라고 말했다.

 

각별한 수단을 택해야 했다. 김창숙은 직접 전면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첫 넉 달 동안 경성에 거점을 두고 지방 각지에 대리인을 파견하던 방식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1925년 12월25일 김창숙은 대구로 거점을 옮겼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최후의 일책을 결행해보겠다”는 작정이었다.

 

목표액 1.8%, 요즘 돈으로 3억5천만원

 

석 달이 더 흘렀다. 1926년 3월 초, 부산 범어사 금강암에서 은밀한 회의가 열렸다. 김창숙은 7명의 가까운 청년과 측근, 친척을 불러모았다. 국내 비밀활동을 매듭짓는 마지막 회합이었다. 김창숙은 입국 목적이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국민이 호응해주리라 기대했다고 한다. 실제는 달랐다. 지난 7개월 동안 정의의 군대가 북을 쳐도 민심이 일어나지 않고, 지금은 일본 경찰이 사방으로 흩어져 수사망을 좁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하운동을 종결짓고 다시 망명하겠다고 심경을 밝혔다. 밖에서 다시 국내 민심을 고무할 새로운 운동을 준비하겠노라고 밝혔다.

 

모금한 자금은 3500원이었다. 목표액의 1.8%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약 3억∼3억5천만원 되는 돈이었다. 휴대한 채 국경을 넘기에는 큰돈이었다. 김창숙은 일족이자 무역상인 김창탁에게 동행을 요청했다. 기차 편으로 압록강 너머 봉천까지 그 자금을 반출해줄 것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3월22일 부산 삼랑진역에서 기차에 올라타 24일께 압록강을 넘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국경의 1년간 검거된 범죄 수’, <매일신보> 1928년 12월23일

2. 김창숙, ‘벽옹 73년 회상기’, <국역 심산유고>, 748쪽, 1979년

3. 최미정, ‘봉화 해저마을 의성김씨 문중의 유림단 의거 참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9, 96쪽, 2014년

4. 김창숙, 앞의 책, 750쪽

5. 김창숙, 앞의 책, 753쪽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6, Nikolai N. Ge, The State Russian Museum.

 

니콜라이 게 (Nikolai Nikolaevich Ge 1831- 1894)는
러시아 사실주의 화가로 역사적, 종교적 그림으로 유명하다. 
니콜라이 게는 조부가 18세기에 러시아로 이민 온 프랑스 혈통의 귀족 가문 태생이다.   
그는 조실부모하고 농노 유모의 손에 컸다.   
키에프와 상 페테르부르그 대학에서 물리학과 수학 전공하다 황립예술학교로 옮긴다.   

니콜라이 게는 우크라이나 사실주의 화가이면서 상징주의자로,  
역사화와 기독교적 주제를 색다른 해석으로 진지하게 탐구했다.  
니콜라이 게의 작품은 점점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어려서부터 물리학과 화학을 공부하던 게(Ge)는 제정(帝政) 러시아 시절에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 대학 (Kyiv University)과 상트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공부하던 과학도였다.  
20세이던 1850년이 되어서 그동안 자신의 경력을 포기하고, 뒤늦게  
상트페테르부르크 제국 미술학교에 입학해서 화가 수업을 쌓았다. 

 

The With of Endor Summoning the Prophet Samuel's Spirit (King Saul at the Witch of Endor), 1856.
by Nikolai N. Ge. oil on canvas. 288 x 341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6,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중요한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자신의 운명을 알고 싶었다. 
엔도르의 마법사는 예언자 사무엘의 그림자를 불러들였다. 
선지자는 어느날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통치자와 그의 아들들이 끔찍한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1857년 니콜라이 게는 이 그림으로 제1위 금상과 미술가 칭호, 해외 출장을 받았다.

 

Peter I interrogates Tsarevich Alexei in Peterhof, 1872. by Nikolai N. Ge. oil on canvas. 134.5 x 173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6,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표트르 1세 대제께서 황제의 궁전 페테르호프에서 황태자 알렉세이 페트로비치를 심문하다. 
이 작품은 역사화라는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림의 배경이 되는 페트르호프는 황금빛 조각과 분수로 장식된 표트르 대제의 여름궁전이다.  
표트르 대제의 위업을 아름답게 빛내 주는 이곳은 실내 벽면에  
대제가 수입한 서유럽의 명화들이 줄지어 걸려 있다. 

당당한 풍채에 다리를 꽈아 자신감을 드러낸 대제에 비해  
큰 키에 마른 체형의 황태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나약한 인상을 풍긴다.  
강렬한 눈빛으로 자신을 배반한 아들을 노려보는 대제의 얼굴에서 비극이 암시된다.  
좌우로 나누어진 구도에 의한 대립적 인물 배치 역시 마찬가지다.  
비극에 대한 반복적인 복선을 설치한 작품이라 볼 수 있다. 

황제에 오르기 전 형인 이반과 동생인 소피아를 물리치고 
어머니 세력을 덥고 황위에 오른 표트르 대제는 총병들의 반란을 격은 후 
형, 동생과 그 세력을  척결하고 자리를 공고히 굳혔다.  
그리고 그 힘으로 서구화 정책을 밀고 나가기 시작한다.   
그후 유럽과의 통로 확보를 위해 스웨덴과 2차례 전쟁을 거쳐  
발트해 연안을 확보하고 상테폐테르부르크를 건설하였다.  

황태자 알렉세이는 표트르 대제와 첫 번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알렉세이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서 버림을 받았다.  
알렉세이는 아버지를 미워하면서 자라났으며 옛 러시아 방식을 숭상했다.  
대제의 개혁을 탐탁치않게 여겼던 보수주의자들은 알렉세이를 지지했다. 

이를 알고 있는 포트르대제는 아들에게 생활방식을 바꾸던지  
제위 계승을 포기 하던지 선택할 것을 강요했다.  
아들은 결국 제위 계승을 포기하고 국외로 도피한다.  
이것은 단순한 부자간의 갈등이 아니고 러시아의 미래에 대한 심각한 사상적 대립이었다.  

알렉세이는 1718년 러시아로 돌아왔으나 국가 반역죄로 체포된다.  
아버지는 아들을 고문하고 자백을 받아냈으며, 사형선고라는 잔혹한 결정을 내린다.  
그런데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알렉세이는 사체로 발견된다.  
그림 속에서 벌어진 논쟁의 결론은 일단 역사가 증명한다.  
제위 계승의 포기와 해외 도피로 이어진 알렉세이의 행보가 반증하듯이  
그에게는 표트르 대제의 정책을 뛰어 넘을 대안이라는 것이 없었다. 

실제로 이 그림이 그려진 1870년대 지식인들을 

행동하게 했던 것은 서구주의자들의 사상이었다.  
벨렌스키, 헤르첸, 바쿠닌의 사상은 헤겔 등의 독일 관념론에 기초한 것이며  
훗날 사회주의 혁명의 기반이 되는 마르크시즘 역시 서구 사상이었다.  
이들이 주장하는 진보와 발전, 이것은 당시 지식인들의 

마음 속 깊이 새겨진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은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는 법이다.  
헤르첸의 영향을 받은 인민주의자(나로드니키)들은 혁명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서  
민중 속으로 흩어져 들어가는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 운동가들은 민중들의 몰이해와 불신 속에서 좌초하고 말았다.  
진리는 현실에서는 결코 단선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결국 승리는 표트르 대제의 것이었지만,  
그는 아들을 살해한 혐의를 받은 인륜에 어긋난 아버지였다.  
그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 것인가?   
부정과 악에 대해서 예술이 어떤 답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스스로가 확신을 할 수 없었던 니콜라이 게는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가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대문호 톨스토이 때문이었다.  
니콜라이 게는 톨스토이 철학의 신봉자가 된다.  
화단에 복귀한 그가 남긴 명작 가운데 하나가 예수와 빌라도의 대화를 그린  
<진리란 무엇인가?> 라는 작품이다. 

1870년 역사 주제의 이 그림 '페테스부르크에서 알렉세이 황태자를 심문하는 표토르 대제'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같은 쟝르의 다른 그림들은 냉대를 받자 니콜라이 게는 
'화가는 농사를 지어먹고 살아야지 그림을 판다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 니콜라이 게는 우크레이나에 농장을 사서 이주했다.  
게는 톨스토이와 친하게 됐고 그의 철학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그림의 배경이 되는 페트르코프는 황금빛 조각과 

분수로 장식된 표트르대제의 여름궁전이다 . 
표트르대제의 위업을 아름답게 빛내주는 이곳은 실내 벽면에  
대제가 수입한 서유럽의 명화들이 줄지어 걸려 있다.   

아버지 표트르 대제는 자신감 있는 자세로 앉아 아들을 매섭게 노려본다. 
바닥에 떨어져 잇는 문서는 방금 그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테이블에 한손을 엊고 비스듬히 서 있는 아들 알렉세이의 허약한 실루엣은  
아버지의 당당한 풍채와 비교가 된다. 

표트로대제의 발밑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나가는
체스판 모양의 바닥은 심리적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다 종국에는 반란까지 획책한  
아들을 심문하는 대제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이 작품은 트레치야코프(Tretyakov) 미술관에 있는 1871년 동명의 그림을 반복한 것이다.

 

Portrait of Leo Tolstoy, 1884. by Nikolai N. Ge. oil on canvas. 96 x 71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6,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작가 레오 톨스토이의 초상
레오 톨스토이는 세상의 질서를 운용하는 진리를 찾기 위해 

문학작품을 쓴 작가이자 사상가이다.  
그의 작품의 예술성은 바로 치열한 진리 탐구로 생겨난 것이다.  
그럼에도 톨스토이는 자신의 작품들이 진리를 

직접 표현하지 못한다며 항상 불만스러워했다.  
그는 예술로 직접 진리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불멸의 진리를 밝혔음에도  
그는 독자들이 진리를 금방 알아챌 수 있도록 후기에는 아예 예술을 부정하고  
쉬운 민담 투의 단편이나 단순한 구도의 희곡, 심지어는 짧은 경구들을 쓰기까지 했다.  
톨스토이에게 예술로 하여금 진리작용을 일으키게 하는 점은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였던 셈이다.  


그런데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은 이동파 화가 니콜라이 게는  
<안나 카레니나>의 한 부분을 묘사한 그림 <진리가 무엇인가?>에서  
관람자가 직접 진리를 체험할 수 있게 표현했다.  
톨스토이가 평생 고민한 문제를 화가 니콜라이 게가 그의 영향을 받아 이룬 것이다. 

니콜라이 게는 톨스토이와 친하게 됐고 그의 철학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후기의 니콜라이 게는 종교화와 인물화로 돌아왔다.  
그의 신약에 근거한 종교화는 진보파의 환영을 받았으나, 동시에 보수파의 비난을 받았다.  
1894년 체르니코프주 이와노프촌에서 6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니콜라이 게는 자신의 그림을 스위스의 한 후견인에게 넘겼는데 그 후 행방이 묘연했다.   
1974년 스위스의 어느 수집가가 중고매매상에서 그림이 가치 있다 생각해 대부분 구입했다.  
그림들이 분산 소장되는 걸 막기 위해 결국 트레치코프 갤러리가 나서서  
러시아 국가 은행의 후원으로 전량 구매하여 영구 소장하게 되었다.

 

Portrait of Elena Likhacheva, 1892. by Nikolai N. Ge. oil on canvas. 103 x 71.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6,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작가이자 사회 운동가인 엘레나 리카체바(Elena Osipovna Likhacheva 1836~1904)의 
초상화 구성 솔루션은 니콜라이 게의 초상화 작업의 전형이 아니다. 
리카체바는 그녀의 서재 테이블에서 묘사되어 있다. 
다양한 오브제에 둘러싸여 검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작은 모습은 길을 잃은 것 같다. 
리카체바의 눈은 시청자를 집중적으로 바라보고 지성과 영적 깊이를 읽는다.
지적이면서도 조용한 노부인의 표정과 궤뚫어보느 듯한 예리한 시선이 매혹적이다. 
초상화 속의 나이든 여인이 살아 숨쉬며 바로 앞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6, Nikolai N. Ge, The State Russian Museum.

 

The Last Supper, 1863. by Nikolai N. Ge. oil on canvas. 283 x 382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6,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누군가 서 있다. 
어떤 불길한 예감이 찾아온 듯하다가 어둠 속에 놀란 베드로의 눈과 
호기심 가득한 제자들 사이에 예수가 마지막 만찬의 침상에 비스듬이 누워 있다. 
다가 올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다빈치의 것과는 다른 분위기가 당시의 분위기를 실감하게 한다.
“유다의 검은 그림자가 일으킨 화면의 균열은 마치 <죄와 벌> 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 (균열이라는 뜻의 단어 ‘라스콜’에서 유래)를 떠올리게 한다”

이 작품 최후의 만찬 (The Last Supper)은 압권이다. 
이제 최후를 맞아들여야 하는 예수의 고뇌에 찬 표정, 즐거운 작별의 만찬 모습은 아니다. 
그 순간 모든 제자들이 바라보고 있는 시선은 불길한 어둠 속의 검은 그림자를 응시하고 있다. 
정말 놀라운 그림이다. 

전통적인 최후의 만찬 그림은 서구식 식탁 의자에 두루 앉아 있는 모습이지만, 
니콜라이 게의 최후의 만찬은 예수께서 비스듬히 누워 마지막 만찬을 맞고 있다. 
십자가 처형에서 티(T)자형 십자가가 그렇듯이 유대인의 만찬 모습에 가까운 현장이다. 
그가 절절한 사실주의 화가이듯이 얼마나 고증에 충실했던 화가였는지를 보여준다. 

뛰어난 초상화이자 역사적 화가인 니콜라이 게는 윤리적, 

철학적 의미로 가득 찬 이미지와 주제에 끌렸다. 
'최후의 만찬'은 미술가의 첫 번째 주요 작품이자 최근 학생이자 예술 아카데미의 연금 수령자다. 
그리스도와 유다의 대조, 한 학생의 배신을 예견했지만 
자기 희생을 준비한 교사의 비극은 캔버스의 극적인 갈등의 기초이다. 
피렌체에서 썼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져 뜨거운 논란을 일으켰다. 

예술 아카데미는 그림이 "특별한 예술로" 완성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대담한" 붓으로 동시대의 표현으로 구체화된 복음 이야기의 비정경적 해석은 
저자에게 "유물론"과 "천박함"에 대한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교회 당국은 그림에 대해 반대했고, 그것을 복제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동시에 주요 비평은 작품의 중요성, 전통적인 플롯에 대한 깊은 인간적 해석, 
시대와 매우 관련이 있는 그림의 사회적, 도덕적 문제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했다. 
1863년 이 그림으로  니콜라이 게는 교수의 칭호를 받았다

 

Portrait of Leo N. Tolstoy, Bust. 1890. by Nikolai N. Ge. Bronze. 74 x 54 x 31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6,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1890년 가을 니콜라이 게는 톨스토이의 저택 야스나야 폴리아나(Yasnaya Polyana)에 
머무는 동안 레오 톨스토이의 흉상을 제작했다.
이 동상은 톨스토이의 첫 번째 조각 초상화가 되었다.

 

[영상] Nikolai N. Ge, Hall 26, The State Russian Museum 

 

 

 

28.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5, Vasily V. Vereshchagin, The State Russian Museum.

 

바실리 베레시차킨 (Vasily Vasilyevich Vereshchagin, 1842~1904)은 러시아 제국의 
가장 유명한 전쟁 화가로 해외에 널리 알려진 최초의 러시아 화가이다.  
러시아 제국의 중앙아시아 정복과 러시아-투르크 전쟁에 종군하여 

전장을 테마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러일 전쟁 취재를 위해 타고 있던 러시아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가 침몰하면서 사망했다.  
그는 사실주의 화풍으로 인해 많은 작품들이 출판되거나 인쇄나 전시가 금지되었다 

바실리 베레시차킨은 러시아 제국 노브고로드주 체레포베츠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8세 때 부모의 희망에 따라 군에서 운영하는 유년학교에 들어갔다.  
185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해군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858년에 프리깃함 ‘캄차카’를 타고 서유럽과 이집트를 방문했다.  
1859년에 장교가 되지만, 군을 제대하고 이듬해부터 페테르부르크 미술 학교에서 배웠다.  

우수한 성적이었지만 지루한 수업 방식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3학년 때 자퇴를 했다.  
트빌리시에서 장기간 체류한 뒤, 프랑스로 건너 가 

피레네 산맥 등을 찾아 파리에서 1년을 보냈다.  
파리에서 에콜 데 보자르에서 배웠고, 장레옹 제롬에게 사사했다.  
화가로서 그는 프랑스 파에 속하는 정밀한 묘사, 날카로운 조형,  
그리고 부드럽고 밝은 다채로운 색상 조합을 특징으로 했다. 

1867년, 콘스탄틴 폰 카우프만 장군과 함께 
투르키스탄 원정에 종군하여 사마르칸트 공격 등을 목격했다.  
1868년 카우프만 장군의 후원으로 투르키스탄을 주제로 개인전을 개최했다.  
1870년 뮌헨에 머물면서 종군을 하는 동안 그려 모은 스케치와 연구를 
그림으로 완성시키는 작업을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의 관심사는 전투 장면보다는 
오히려 중앙아시아의 이국적인 건축과 풍속이었다.  
1874년에는 인도를 오랫동안 여행을 하고 
영국에 식민지 지배를 받는 인도의 실태를 보고 듣는다. 

1877년 러시아-투르크 전쟁에 종군하여, 사령관의 조치로 부관의 지위와  
군 내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권리를 부여받고 시푸카 고개 전투를 목격했다.  
플레벤 공략전에서는 군인으로 복무한 그의 형제가 죽고, 자신도 중상을 당했다.  
이 비참한 전투는 그의 세계관을 바꾼 계기가 되었다. 

이후 그는 평화주의자로서, 전쟁의 비참함을 
현지에서 스케치를 바탕으로 한 사실적인 그림으로 표현했다.  
따라서 전쟁을 그린 그의 그림에는 사망자, 부상자, 약탈, 
야전병원, 눈에 덮힌 병사의 시신이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테마는 평소 그림이나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의 민주주의 사상은 이동파에 가까운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영웅 예찬이었던 전쟁 회화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게 된 것이었다. 

연속작이 많아 투르키스탄 원정 (1871년 ~ 1874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1877년 ~ 1878년, 1880년 이후), 러시아 원정을 테마로 그린 것이 있는데, 
특히 후자에서는 보로디노 전투를 그린 대표작 ‘보로디노의 나폴레옹’이 탄생했다.  
그의 그림은 그 주제로 인해 선전 선동(프로파간다)의 도구로 이용될 수도 있었다. 

다른 대표작 ‘전쟁의 결말’은 두개골의 산을 그린 것이지만 1980년에 출판된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대해 쓰여진 책 표지에 ‘1916년 서부 아르메니아에서 터키에 의한 잔학 행위’라는 
캡션을 달아 게재된 후에 베레샤긴의 작품으로 판명되었다. 

1881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비엔나와 베를린 등 긴 여행을 떠났다.  
온천에 체류 중인 바트엠스는 성 알렉 교회의 제단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렸다.  
1884년에는 두 번째 인도 여행을 떠나,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도 발길을 뻗었다. 

팔레스타인 성지를 방문한 그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그린 일련의 작품으로, 
지금까지 서구의 유럽화된 그리스도 상이 아니라 현지에서 실제로 
보고 들은 풍속과 풍경을 그려 넣은  자연주의적 기법을 이용하여 
그리스도를 중동의 인간상으로 묘사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그의 발길은 고향 러시아, 동유럽은 물론, 심지어 미국까지 가게 된다.  
미국에서 미국-스페인 전쟁의 전장이 되었던 쿠바, 필리핀을 방문했다.  
또한 1903년에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의 문화와 역사에 친숙 인물상 등을 남겼다. 

1904년에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러시아 조차지 뤼순으로 갔다.  
여기에서도 종군한 그는 여순 함대사령관 스테판 마카로프에 초대를 받아  
기함인 〈페트로파블롭스크〉에 탑승하여, 전쟁의 풍경을 그렸다.  
그러나 4월 13일 페트로파블롭스크가 일본군이 부설한 기뢰에 닿아 폭발하였고,  
불과 몇 분 만에 화약고가 폭발했기 때문에 
마카로프 제독과 베레시차킨을 비롯한 승무원 대부분이 전사했다. 

베레시차킨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던 마카로프의 회의의 모습을 그린 스케치가
파도에 떠다니다 무사히 회수되었다. 
그의 죽음은 적국 일본에서도 보도되어 
사회주의자였던 고토쿠 슈스이와 나카자토 카이자 등이 추모의 글을 남겼다.

 

In Jerusalem. Tombs of the kings, 1884. by Vasily V. Vereshchagin. oil on canvas. 199 x 149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5,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예루살렘에서. 왕들의 무덤
바실리 베레시차킨 (Vasily V. Vereshchagin)은 열렬한 여행자였으며 
유럽, 아시아, 미국의 많은 국가를 방문했다. 
베레시차킨은 "세계 역사의 살아있는 연대기에서 배워야 한다"는 주장으로 유명하다. 
1884년 그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방문했다. 
이 여행의 결과 고대 동양의 역사적 기념물과 건축 앙상블에 헌정된 많은 작품이 나타났다. 

예술가는 기념비적인 사이클로피안(Cyclopean) 구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많은 빛과 그림자, 따뜻하고 차가운 색조의 장엄한 놀이는 고대 의식을 수행하는 
백의를 입은 여성의 조용한 의식 행렬의 신비를 강조한다. 

 

30. Interior of the Church of St John the Evangelist on the Ishnya near Rostov Yaroslavsky, 

1880s - 1900s. by Vasily V. Vereshchagin. oil on canvas. 60 x 4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5,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로스토프 야로슬라브스키(Rostov Yaroslavsky) 근처 이쉬나(Ishna)에 있는 
복음사가 성 요한(St. John Evangelist) 교회의 내부 모습.
1887~1888년에 베레시차킨은 러시아 도시를 여행했다. 
그는 국가 고대의 세계에 매료되어 짧은 시간에 민속 생활, 러시아 민족 의상의 
독특한 컬렉션을 수집하고 고대 러시아 건축 연구에 종사하며 열렬히 옹호한다. 

로스토프 야로슬라브스키 여행의 결과로 만들어진 이 스케치는 
성숙한 예술가의 기술을 완전히 드러내고 러시아 자연과 고대 건축물의 
특별한 아름다움에 대한 미묘한 이해를 보여준다. 
그들은 로스토프에서 남서쪽으로 3km 떨어져 있다. 

이쉬나(Ishna) 강의 복음사가 성 요한교회는 1687년에 아브라함 수도원 
게라심(Gerasim)의 대주교가 로스토프의 아브라함에게 
성 요한 신학자가 나타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일반적인 구성으로 보면 17세기 말 러시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층 교회 유형에 속한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5, Vasily V. Vereshchagin, The State Russian Museum.

 

Iconostasis of the Church of St John the Evangelist on the Ishna near Rostov Yaroslavsky, 1888.
by Vasily V. Vereshchagin. oil on canvas. 60.5 x 4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5,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로스토프 야로슬라브스키(Rostov Yaroslavsky) 근처 이쉬나(Ishna)에 있는 
복음사가 성 요한(St. John Evangelist) 교회의 내부 모습.
높은 지하실에 있는 사원은 정확하게 찾아낸 비율과 볼륨 비율의 완벽함에 감탄한다. 

그 내부는 여전히 외부보다 덜 인상적이다. 
후미 창문이 있는 낮고 반쯤 어두운 갤러리는 사원 자체 및 
식당의 밝고 채광이 좋은 공간과 뚜렷하게 대조된다. 
이사야 마스터가 조각한 금박을 입힌 왕실 문과 아이콘이 이 인상을 완성한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예술가는 놀랍도록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닌 스케치를 만들 수 있었다. 
이 그림은 미묘한 다색 팔레트와 결합된다. 
아이콘의 페인트, 금색과 은색 프레임과 촛대는 교회 내부의 반쯤 어둠 속에서 빛납니다. 
작가는 러시아인의 손이 만들어낸 아름다움 앞에서 
위대한 작가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러시아 고대의 그림 같은 이미지를 만들었다.

 

hipka-Sheinovo (Skobelev at Shipka), Until 1890.  by Vasily V. Vereshchagin. oil on canvas. 188 x 40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5,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바실리 베레시차킨의 이 그림 은 1878-1879년에 작가가 
불가리아에서 가져온 스케치와 원본 항목 모음을 기반으로 파리에서 만든 
약 30개의 캔버스를 통합한 대규모 "발칸 시리즈" 를 완성한다. 
러시아는 오스만 멍에에서 불가리아의 해방을 위해 터키와의 전쟁에 참여했다. 
그의 작업 과정에서 베레시차킨은 첨예하게 대립한 전쟁터 근처에 두 번을 다녀갔다. 

1878년 1월 9일 셰이노프에서 터키군이 패배한 후 적군은 무기를 내려놓았다. 
러시아 박물관에 속한 그림은 작가의 반복이다. 
그것은 사건의 극적인 긴장의 동기를 강화하고 적에 대한 승리가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렀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얼어붙은 러시아 군인의 시체가 그림 전경의 눈덮인 들판을 덮고 있다. 
왼쪽 산맥 기슭에서 미하일 스코벨레프(Mikhail Dmitriyevich Skobelev 1843~1882)장군이 
러시아 군인들의 행렬을 순회하며 승리를 축하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떨어진 곳에는 기수 옆에 흰색 재킷을 입은 예술가 자신이 묘사되어 있다. 
병사들은 지휘관에게 "만세!"라고 외치며 모자를 던진다.

 

At the Doors of a Mosque, 1873. by Vasily V. Vereshchagin. oil on canvas. 315.5 x 237.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5,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모스크의 문에서"라는 이 그림은 바실리 베레쉬차긴이 1860년대 후반 
중앙 아시아 여행에 대한 인상을 바탕으로 쓴 이른바 투르키스탄 연작의 일부이다.
캔버스에 묘사된 장면은 작가가 목격한 한때 강력했던 동부 국가의 삶의 에피소드를 나타낸다. 

헤진 가지각색의 로브를 입고 특징적인 길고 상징적인 모양의 
모자를 쓴 그들은 성가신 곤충을 찾기 위해 분주하다. 
그림은 거의 눈에 띄게 양각으로 새겨져 있고 공간과 조명이 설득력 있게 전달된다. 
세부 사항에 대한 관심, 전체 및 부분의 궁극적인 완전성을 위해 노력하는 
베레시차킨 작업의 이러한 측면이 그림에서 완전히 나타났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5, Vasily V. Vereshchagin, The State Russian Museum.

 

An Outing in a Boat, 1903. by Vasily V. Vereshchagin. oil on canvas. 70 x 103.5 cm.

 

평생 동안 작가는 일본에 진정한 관심을 보였다. 
동양의 나라는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다소 다르게 발달한 독특한 문화로 그를 매료시켰다. 
1874년 그는 이 나라로 여행을 떠날 예정이었고 불과 7년 만에 그의 꿈이 이루어졌다. 
일본에 대한 인상은 작가의 작품 중 일부에만 반영되며 그 중 하나는 "배를 타고 산책"이다. 

일본을 주제로 한 작품은 구도의 불균형, 캡처된 에피소드의 무작위성, 
이미지의 일반화된 해석, 경쾌한 팔레트, 인상주의적 기법에 대한 호소를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떠오르는 태양의 땅"에 헌정된 그림에서 작가는 
보다 자유롭고 편안한 글쓰기에 의지하여 그림 팔레트를 확장했다.

 

[영상] Vasily V. Vereshchagin, Hall 25, The State Russian Museum

 

 

 

임경석의 역사극장

“자녀 셋과 아내, 어디 사는지 모릅니다”

사회주의자 방준표가 입산하기 전 거쳐간 서울·부산·모스크바…

노동조합운동, 반탁 진영과의 싸움, 10월 항쟁 속으로

 

자필로 작성한 방준표의 ‘간부이력서’ 첫 페이지. 임경석 제공

 

1945년 8월15일 해방되던 날, 방준표는 경상남도 밀양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덧 나이 40살이었다. 읍내 ‘밀양의원’이라는 이름의 병원에서 ‘고용인’으로 일했다. 의료 부문 종사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의 전력이 인쇄소 직공, 정미회사 사무원 등이었음을 고려하면 원무 행정을 맡은 사무직이나 관리직 노동자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해방 뒤 서울, 운동 현장으로 되돌아가

 

해방되자 그는 즉시 상경했다. 익숙한 운동 현장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서울에 도착한 때는 해방된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은 8월17일이었다. 그는 곧 30대 전반기를 불태우던 서울지역 노동조합운동에 복귀했다. 29~35살 용산과 영등포 일대의 인쇄소, 서적회사, 맥주공장, 철도공장 노동자들 속에서 사회주의 비밀결사 활동을 한 경험이 있지 않았던가.

 

그가 전념한 부문은 철도였다. 용산철도공장을 비롯해 서울 철도노동자의 모든 직장이 그의 활동 무대가 됐다. 용산철도공장은 26만㎡(약 7만9천 평)의 드넓은 면적에 들어선 중공업 기지였다. 기관차와 객차, 화차를 제작하고 수리하는 곳이었다. 종업원이 1500명에 이르는 대규모 공장이었다. 그중 현장노동자는 1300명인데 선반, 조립, 마무리, 쇠불림, 원통 제조, 주물, 객차, 도색, 전기, 강판 등 11개 제조공정별로 나뉘어 일했다.1 철도노동자를 조직하고 의식화하는 일이 그의 주력 활동 분야였다. 사업장 속에서 노동조합 조직을 짜고 노동자를 대중투쟁으로 이끌었다.

 

비밀결사운동에도 가담했다. 그해 10월15일 조선공산당 용산·마포 지구당에 입당했다. 줄여서 ‘용마구’라고 부르던 이 지구당은 영등포지구당과 더불어 노동자 밀집 지구로 손꼽히는, 당내 요충지였다. 그는 평당원이 아니라 지구당 상임 간부로 일했다. 당증 번호도 부여받았다. 1275번이었다.2

 

노동조합과 비밀결사, 두 분야에서 행한 맹렬한 활동 탓일까. 그는 감옥살이를 겪어야 했다. 해방 뒤 첫 투옥은 1946년 1월23일에 일어났다. 이날 미소공동위원회 개회에 즈음해 ‘미소대표환영시민대회’가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서울시인민위원회가 주도하는 이 대회에 거대한 군중이 모였다. <조선일보> 기사에는 10만 명, <해방일보>에는 30만 명이 모였다고 적혔다. 서울 인구가 120만 명으로 추산되던 때의 일이었다.

 

군중집회는 거리행진으로 이어졌다. 서울운동장을 기점으로 종로, 안국동, 광화문 앞 대로, 신문로, 남대문으로 이어진 거리행진은 해 질 녘에야 끝났다.3 이 시위 행렬은 도중에 신탁통치 반대 세력의 습격을 받았다. 종로2가 종각 사거리에 숨어 있던 ‘반탁전국학생연맹’의 극우 청년 약 300명이 벽돌, 돌멩이, 기왓장 등을 집어던졌다. 그때 방준표는 시위 대열 속에 있었다. 그는 철도노동자를 동원해 반탁 진영의 테러에 맞섰다. ‘반동분자들과 격투’를 불사했다. 결국 그는 미군에 체포돼 군사재판에 넘겨졌다. 마침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징역 1년에 벌금 6만원형이 선고됐다.

 

첫 투옥 기간은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서대문형무소를 거쳐 마포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방준표는 그해 4월18일에 석방됐다. 수감 기간이 3개월이 채 안 됐다. 형기를 채우지 않았는데도 풀려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미소공동위원회 제5호 공동성명 덕분이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4월17일 합의문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지지를 서명하는 한국 쪽 정당과 단체는 모두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케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합의가 곧 제5호 공동성명이었다. 이 성명 때문에 정세가 일시적으로 호전됐다. 적대적 대치 국면이 부드럽게 이완됐고, 투옥된 사상범들은 석방됐다. 방준표는 그 덕을 봤다.

 

북한 주재 소련민정청 간부부장 아바세예프가 발급한 1948년 10월20일자 유학 대상자 신원 증명서. 방준표의 사진이 첨부돼 있다. 임경석 제공

 

‘반동분자들과 격투’ 반탁 진영과 싸우다 투옥

 

석방된 방준표는 지체 없이 운동 현장으로 복귀했다. 이때 그의 당내 소속이 변경됐다. 용마구 당부에서 서울 철도구 당부로 옮겨갔다. 직급은 상임위원이었다. 용산과 마포 지구에 국한되지 않고 서울 전역의 철도노동자 사업을 총괄하는 위치로 바뀐 셈이다. 그의 책임과 권한 수준이 더 높아졌다. 그해 메이데이에는 ‘철도노동자 투쟁 열성자’로 선정돼 표창장까지 받았다.4 그는 해방공간에서 철도노동자 투쟁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부산은 방준표의 삶에서 적잖은 인연을 맺은 곳이다. 그가 부산과 첫 인연을 맺은 시기는 20대 초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한 23살 때 부산보통학교 교원으로 발령이 나서 1년간 근무했다. 부산 영주동에 있는 초등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일본인 교장과 갈등을 겪었고, 좌익으로 지목받은데다 호흡기 질환을 앓은 탓에 그만두고 말았다.

 

41살 되던 1946년 8월, 그는 다시 한번 부산에 옮겨가 살았다. 경남도당 간부로 발령 났기 때문이다. 도당위원회 상임위원으로서 노동부장직을 맡았다. 8월4일자로 임기가 시작됐다.

 

경남도당에서 그가 역점을 둔 활동 분야는 <자서전>에 쓰인 바에 따르면, ‘철도노동자들 사이의 당조직 견고화’ ‘반당분자와의 투쟁’이었다. 철도 부문에서 당조직을 강화하는 일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서울에서 줄곧 해온 일이고 노동부장이라는 그의 소임에 비춰봐도 그렇다.

 

흥미로운 점은 반당분자와의 투쟁이다. 반당분자란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즈음 삼당 합당이 현안이었다. 공산당과 인민당, 신민당이 합해 근로대중의 단일정당을 표방하는 남조선노동당을 수립하는 문제였다. 삼당 내에서 합당을 추진하는 열기가 뜨거웠지만, 그와 동시에 합당 추진 방법을 둘러싸고 반대파가 형성됐다. 공산당 내에서는 이정윤과 김철수를 중심으로 하는 6인 반간부파가 만들어졌다. 경남도당에서도 그를 지지하는 흐름이 강력했다. 경남 출신의 당내 중진인 윤일 등이 앞장서서 각 도의 대표 40여 명을 규합해 당대회 소집을 요구했다. 이른바 대회파가 만들어졌다. 방준표는 경남도당 간부의 입장에서 이 흐름에 맞섰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반당분자와의 무자비한 투쟁을 전개”했다.

 

부산에서의 10월 항쟁 뒤 ‘야수적 고문’

 

방준표가 부산에서 직면한 최대 사건은 9월 총파업과 그에 뒤이은 ‘10월 항쟁’이었다. 9월 총파업이란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전국적인 노동자 파업투쟁을 가리킨다. 1946년 9월23일 부산지역 철도노동자 7천여 명의 파업이 출발점이었다. 경남도당 노동부장인 방준표의 역할이 중요했을 것이다. 그 자신의 표현으로도 “9월의 철도 파업을 부산서 조직 지도함에 전적으로 가담하였다”고 한다. 그가 맞섰던 대상은 대한노총, 무장 경찰, 미군 헌병 ‘3자의 합작적 공세’였다. 9~10월 “장렬한 피투성이 반항 투쟁에 직접 참가 지도하였다”고 기록했다.5

 

9월 총파업은 10월1일 대구 경찰의 발포로 사망자가 난 사건을 계기로 해서 전국적 군중봉기로 확산됐다. 방준표는 이 와중에 또다시 투옥됐다. 해방 뒤 두 번째 겪는 불운이었다. 그해 10월7일 경찰에 체포된 그는 ‘야수적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고문 피해를 더 자세히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야수적’이란 표현이 그가 겪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깊이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재판에 넘겨져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해방 뒤 겪은 두 번째 징역살이는 10개월가량 계속됐다. 이듬해인 1947년 7월14일 부산형무소에서 출옥했다. 이번에도 형기를 다 채우지 않고 석방됐던 이유는 미소공동위원회 덕분이었다. 그해 5월21일 재개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6월 말, 7월 초에 이르러 서울과 평양에서 본회의를 거치며 큰 진전을 보이는 듯싶었다. 그에 힘입어 정치범 석방 요구를 미군정 쪽이 수용했다.

 

1947년 12월, 방준표는 38선을 넘어 월북했다. 러시아 모스크바 당간부학교 입학 대상자로 선정된 까닭이었다. 당 집행부는 중견 간부 양성 기지를 모스크바에 세웠다. 장래가 촉망되는 신진·중견 간부를 유학시켜 당의 근간을 튼튼히 하려 했다. 남로당 부위원장 박헌영이 작성한 추천서에는 “방준표 동무는 노동조합 운동조직에 열성적으로 참여했고, 민주조선 건설 사업에 충실하다”고 적혀 있다.6

 

방준표는 1948년 2월1일부터 8월1일까지 평양에 개설된 러시아어 예비과정에 재학했다. 이 기간에 러시아공산당사와 러시아어를 배웠다. 이어서 1948년 9월15일부터 1950년 7월1일까지 모스크바 당간부학교에서 수학했다. 이 기간에 사회주의 이론과 정책에 관한 14개 과목을 수강했다.

 

뜻밖의 현상이 눈에 띈다. 당학교 성적표가 남았는데, 다른 유학생들보다 성적이 그리 좋지 않다. 5개 과목에서 5점 만점을 받았고, 4개 과목에서 4점을 받았다. 1개 과목은 과락이었다. 동료 유학생 박종근이 12개 전 과목에서 5점인 것에 비하면 상당히 뒤처졌음을 알 수 있다. 젊어서 경성사범학교 입학생으로서 ‘진정한 수재’라는 지목을 받던 방준표가 아닌가?

 

방준표가 해방 직후 철도노동운동의 거점으로 삼았던 서울 용산철도공장 전경. 임경석 제공

 

모스크바 당간부학교, 고질병 폐질환

 

이 의문을 당학교 교무 담당자 니콜라예프의 의견서를 통해 풀 수 있다. 그는 방준표에 대해 평가하기를, “인내심이 강하고 열심히 공부한다. 오래 병을 앓아서 장기간 결석했는데도, 학업 성적에서 뒤처지지 않았다. 근면함과 노력 덕분이다”라고 썼다.7 원인은 질병이었다. 방준표는 모스크바에서도 병을 앓았다. 장기 결석이 불가피할 정도였다. 폐질환은 그의 고질이었다. 23살 때 호흡기병에 걸려서 6개월간 정양했고, 35~37살 때는 폐디스토마로 각혈이 심해 2년간 치료에 전념해야 했다. 그의 폐질환은 10년에 한 번꼴로 재발했다. 43~45살 모스크바 유학 중에도 질병으로 장기 결석한 것을 보면 말이다.

 

방준표에게도 가족이 있었다. <자서전>에는 가족에 대해 이렇게 쓰였다.

 

“가정 형편은 대단히 곤란하다. 부양가족으로서 처와 아이가 셋이 있으나 지금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고, 특히 처는 여성운동에 참가한 관계로 경찰의 추궁을 받고 있다.”8

 

놀랍게도 가족이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전혀 가사를 돌보지 않고 운동에만 전념했음을 알 수 있다. 아내 ‘김정’은 32살, 11년 연하의 젊은 여성이었다. 그도 당원이었고 합법적 공개 영역에서 부녀총동맹 일을 맡은 까닭에 경찰의 사찰을 받는 형편이었다. 자녀는 2녀1남이었다. ‘영희, 명희, 성부’라는 이름을 가진 10살 미만의 어린아이였다. 이들은 아버지가 부재하고 어머니가 경찰의 시달림을 받는 불안정한 가정에서 자라야 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용산철도공장, 일반에 縱覽’, <조선일보> 1934년 6월28일치

2. 방준표, ‘간부리력서’, 1쪽, 3쪽, 1948년 8월10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4 л.12-13об

3. ‘환영의 깃발을 고양, 미소대표환영 시민대회’, <조선일보> 1946년 1월24일치

4. ‘간부리력서’, 3쪽

5. 김준(방준표), <자서전>, 3쪽, 1948년 8월10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4 л.14-16об

6. Зам.Председатель ЦК Трудовой партии Южной Корея Пак Хенен(남조선노동당 부위원장 박헌영), Характеристика на зав.отделом труда провинциального комитета Трудовой Паприи Южной Кореи, Пан Дюн Пе(남조선노동당 경남도당 노동부장 방준표에 대한 평가서), 1948년 7월31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4 л.9

7. Учевная характеристика на слушателя Корейской партийной школы Пан Дюн Пе(조선당학교 수강생 방준표의 학업 평가서), 1950년 7월25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4 л.4

8. <자서전> 3쪽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4, Alexei K. Savrasov. The State Russian Museum

 

Spring evening. Alder blooms, 1880s. by Alexei K. Savrasov. oil on canvas. 66.5 x 97.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4,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알렉세이 사브라소프 (Alexei Kondratyevich Savrasov 1830~1897)는 러시아의 
풍경화가이자 서정적 풍경 스타일의 창작자로 모스크바에서 출생하고 사망했다. 
그는 이동파 창설자의 한 사람으로 모스크바의 미술학교에서 많은 풍경화가를 배출했다. 
그의 작품 <산까마귀 떼가 돌아오다>(1871)는 러시아 풍경화의 걸작으로 유명하다. 
사브라소프의 작품은 자연의 미를 서정적으로 파악하면서 
동시에 전혀 새로운 뜻을 더해 주고 있다는 데에 특징이 있다. 

러시아 자연의 풍부한 표정을 최초로 주목한 것은 이동파 화가들이었다.  
이전에 아카데미 풍의 풍경화는 아름다운 풍경, 

곧 그려질 가치가 있는 풍경을 그린 그림을 의미했다.  
아름답고 그려질 가치가 있는 풍경이란 찬란한 태양이 빛나는 남국의 이상향을 

연상시키는 그림, 구체적으로는 이탈리아 같은 지중해 지방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었다. 

추운 겨울이 6개월 이상 지속되는 러시아의 자연이 

그림의 주제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러시아 사회에 대한 애정을 함양하고자 했던 이동파는 

풍경을 보는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주었다.  
이동파 풍경화가들은 조국 러시아 자연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했으며 그려질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러시아 시골 모습을 고스란이 담아낸 19세기 대표적인 풍경화가 
알렉세이 사브라소프는 심오하고 가치 있는 삶을 화폭에 담아냈다. 
1871년 사브라소프는 딸의 죽음 이후 예술 활동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결국 알콜중독에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거지생활을 하다 쓸쓸히 죽었다고 한다.

알렉세이 사브라소프의 작품 '저녁 봄(Spring evening)'은 풍경 이미지의 
따뜻함과 성실함, 회화적 솔루션의 부드러움과 미묘함이 특징이다. 
그레이, 브라운, 화이트, 블루톤의 부드러운 조합을 기반으로 한 
칙칙하고 미묘한 컬러는 봄의 부드러움을 전달한다. 

사브라소프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러시아 풍경의 아름다움과 서정을 
이처럼 깊고 시적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미묘한 봄 풍경 속에는 봄의 향기가 모든 것에 느껴지는 것처럼 
공기가 서서히 따뜻해지면서 북방 지역 자연의 특징인 천천히 깨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브라소프는 러시아 자연의 아름다움, 가난한 시골 오두막을 묘사하며 
이 모든 것이 미묘한 진동 봄 빛으로 가득 차 있다. 

 

Early Spring. High Water, 1868. by Alexei K. Savrasov. oil on canvas. 66.5 x 97.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4,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사브라소프(Savrasov)는 원래의 낭만적인 전통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다. 
나무의 모든 줄기, 가지 대부분이 그의 관심을 끌고 있다. 
태양에 끌리면서 나무의 변덕스러운 굴곡, 직조 등 사브라소프는 초봄에 매력을 느낀다. 
이 작품은 "꿈을 통해 일년 중 아침에 만나는" 깨우침의 성격을 보여주는 훌륭한 그림이다.

사브라소프는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렸다.  
8살에 모스트바 미술 조각 건축학교에 입학하여 20세에 졸업하고 풍경화에 전념했다. 
1854년 황립예술학교 교장의 초청으로 상페테르부르그로 이주했다.  
이삭 레비탄(Isaak I. Levitan), 콘스탄틴 코로빈(Konstatin Korovin)이 그의 제자였다. 
그는 파벨 트레티야코프(Pavel M. Tretyakov) 등과 교류했고, 
특히 바실리 페로프(Vasily G. Perov)와는 아주 친해서 서로의 그림에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페로프의 새 잡는 사람의 풍경을 사브라소프가 그렸고, 
사브라소프의 "Volga near Yuryevets"의 보트 예인선은 페로프가 그렸다.

그는 1860년 영국과 스위스를 여행하고 영국화가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7), 
스위스 화가 알렉상드르 카라메(Alexandre Calame 1810~1864)의 영향을 받았다.
1870년대 말, 아마도 1871년 딸의 죽음이 시작이었던듯, 

사브라소프는 알콜 중독자가 되어갔다. 
미술 활동에도 지장이 오고 모스크바 미술학교에서 파직당하고, 

가족 친지의 도움도 소용이 없었다.  
그의 만년은 술에 쩔고 가난했으며 넝마를 걸치고 다닐 정도였고 

급기야 구호소를 전전하다 사망했다. 
모스크바 미술, 조각, 건축학교의 수위와 파벨 트레치코프만이 

그의 장례식의 유일한 참석자였다.

 

Rainbow, 1873. by Alexei K. Savrasov. oil on canvas. 45 x 56.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4,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사브라소프는 단순하고 평범한 풍경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있었다. 
그의 그림은 토착 공간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작가의 붓 아래에서 러시아의 단순한 구석이 나타나지만 마음과 영혼이 달콤하다. 
구부러진 오두막, 울창한 덤불, 협곡, 흐릿한 도로, 고르지 않은 해안과 넓은 강, 
이 모든 것이 매우 평범하고 자연스럽다.

이 작품 '무지개(Rainbow)'는 마을의 외곽에 회색으로 된 집들이 있고, 
나무 계단 형태로 강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비가 내린 후 무지개가 마을 위에 나타나고 시냇물이 언덕에서 흘러나와 홈을 형성한다.

멀리서 마을의 연속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비를 동반하는 검은 구름이 있다. 
사람들 중 강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한 여성만 묘사했다. 
그녀는 물이 가득찬 양동이가 달린 로커를 나른다. 
비가 내린 후에도 길은 여전히 ​​진흙 투성이다.

하늘은 캔버스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리고 아래쪽 절반에는 육즙이 많은 채소가 비로 씻겨진 풀이 지배한다. 
강한 뇌우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비는 끝났고 구름은 사라졌지만 시냇물은 여전히 ​​흐르고 있다. 
공기가 맑고 먼지가 없다. 그것은 침묵과 평온함을 만든다.

무지개는 그림에서 가장 밝은 부분이지만 동시에 밝지 않고 인공적이지 않다. 
공기와 빛처럼 가볍고 무겁다. 
무지개로 이어지는 것같은 산책로, 그리고 무지개 자체가 하늘과 땅을 연결한다.

그림을 세로로 두 부분으로 나누는 긴 선의 눈을 추적할 수 있다. 
캔버스의 아래쪽 가장자리에서 시작하여 언덕으로 이어진다. 
이 등반은 무지개를 계속 높이 올라간다. 
어쩌면 지구와 하늘의 연결이 반영될까? 아니면 이곳의 조화? 
여기 사람들은 자연을 정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녀와 단결하여 사는 법을 배우고 그녀의 힘에 물러났다. 
그들은 강한 뇌우 후에 신선하고 즐거운 무지개가 곧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풍경은 전혀 슬프고 무겁지 않고 가볍고 가볍다.

 

Steppe during the Day, 1852. by Alexei K. Savrasov. oil on canvas. 73.5 x 104.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4,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알렉세이 사브라소프는 우크라이나 여행으로 그의 예술 형성에 큰 도움을 받았다. 
이 여행의 결과로 러시아 박물관에 보관된 두 가지 풍경 

'대초원의 새벽 (Steppe at Dawn F-7941)'과 
'오후의 대초원 (Steppe during the Day F-6660)' 두 작품이 나왔다. 
이 작품 '오후의 대초원'에서 사브라소프는 우크라이나 대초원 확장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인상을 반영하려고 노력하고, 첫 번째 작업의 어두운 색에서 벗어나 
태양에 비추는 대초원의 색으로 팔레트를 풍부하게 만든다. 

'오후의 대초원' 풍경에서 사브라소프는 무더운 대초원의 상태를 전달한다. 
한 마리의 새가 구름없는 하늘에서 솟아 오르고, 땅 아래에는 노랗게 물든 잔디 속에서 
한낮의 태양으로부터 휴식을 취하기 위해 두 자고가 있다. 
이 시기에 그의 제자들은 자연을 깊이 느끼는 원조 마스터로서 

사브라소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삭 레비탄(Isaak I. Levitan)은 그의 선생님에 대해 매우 정확하게 말했다. 
“사브라소프는 우리의 고향 풍경에서 너무나 강하게 느껴지고 

영혼에 저항할 수 없는 영향을 주는 친밀하고 깊이 감동적인 종종 슬픈 특징을 

가장 단순하고 평범한 것에서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풍경화의 서정과 고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사브라소프와 함께 등장했습니다. "

 

View of the Moscow Kremlin. Spring, 1873. by Alexei K. Savrasov. oil on canvas. 46 x 36.8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4,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1871~1875년에 사브라소프는 주로 모스크바에서 살고 일하면서 
새로운 풍경 원칙을 찾기 위해 많은 일을 했다. 
이 작품 '모스크바 크렘린의 전망. 봄 (View of the Moscow Kremlin. Spring)'에서
봄은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았고 전혀 의식적이지 않으며 변형 가능성을 숨긴다. 
떠다니는 빙원과 함께 넘쳐나는 모스크바 강은 약간의 신선한 녹지와 함께 언덕에 접근했다. 


전경에는 오래된 울타리가 있는데, 약간 붉어지는 새싹이 주스를 ​​집어 올리는 나무이다. 
그리고 깊숙한 곳에서 돌 다리 뒤에서 크렘린 건물은 희게 보인다.
푸른 하늘, 밝은 초록빛, 천천히 흐르는 강, 주위의 모든 것이 반사되어
이 모든 것이 자연의 창조 이미지에 미묘한 서정과 전율을 준다. 
이 작품이 만들어졌던 1870년대는 사브라소프의 작품이 가장 많이 꽃을 피웠던 시기였다.

 

The Volga spill near Yaroslavl, 1871. by Alexei K. Savrasov. oil on canvas. 48 x 72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4,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알렉세이 사브라소프(Alexei Savrasov)는 창의적인 개성을 개발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 당시 러시아의 풍경화 장르가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이트에서 

자신을 식별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작품에서 분명히 볼 수 있는 풍경을 쓰는 것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접근 방식을 식별할 수 있었다.

작가는 그림에서 그의 시적 능력을 묘사하여 낭만주의와 영혼의 노트를 숨긴다. 
그는 동면에서 깨어나는 자연, 그 느슨함과 꽃이 만발한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느꼈다.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달은 정확히 3월이었고, 

첫 꽃의 순수함과 점차 녹는 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진정한 아름다움은 당신이 평범한 것을 통해 보는 것, 

당신이 마음에 두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 진술을 1년 중 몇 달과 비교하면서 그는 주위의 색채가 때때로 

그의 눈을 태웠던 5 월에 관심을 끌었다.

이 작품과 관련하여 관객은 한 가지 색상 범위로 유지되는 열린 공간을 관찰한다. 
이 경우 제작자가 가장 좋아하는 강이 여러 마을에 범람하여 우연히 쏟아졌다. 
하늘에서는 어두운 겨울을 지나 남쪽으로 돌아오는 새 무리를 볼 수 있다. 
사브라소프에 따르면 새는 직접적으로 봄의 도래를 예고한다.

사브라소프는 또한 멀리 있는 빛의 장소에 도달하려는 사람들과 
작은 얼음 블록을 헤치고 지나가는 보트를 묘사했다.
작품을 들여다 보는 관객은 상상할 수 없는 대자연의 웅장함을 느끼게되는데, 
사브라소프는 자유분방한 요소의 도움으로 자신을 매우 크고 분명하게 선언한다. 
캔버스의 수평선과 하늘이 넓은 지역을 차지한다. 
홍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대한 항의를 의인화한다. 
따라서 작품에는 반대되는 감정의 조화와 다가오는 따뜻함이 있다.

러시아 예술의 놀라운 현상 중 풍경 장르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풍경화가들은 그림에서 평범한 농촌 자연의 의미있는 세계를 발견했다. 
들판과 숲을 시적으로 묘사하면서 그들은 민주적 예술가로서 
풍경 분야에 머물면서 사회적 의미로 이미지를 채웠다. 
사브라소프는 현실적인 풍경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 중 한 명이다. 
사브라소프가 선택한 단순한 동기에서 미묘하고 동시에 강한 그림으로 

다른 어떤 것과도 달리 깊은 시적 느낌을 가진 러시아 자연의 영혼, 

그 부드러운 매력을 드러냈다.

사브라소프는 이 작품을 그렸던 볼가 강둑에서 몇 달 동안을 살았다. 
이 그림은 인간의 삶과 자연의 삶 사이에 극적인 연결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볼가의 봄 홍수는 장엄하고 아름답다. 
얼음은 수 마일을 흘러 강을 따라 엄숙하게 떠 있다. 
그러나 그 요소는 사람들에게 불안을 가져온다. 
그리고 사람들은 용감하게 자연과 싸운다. 
깨지기 쉬운 배를 타고 빙원을 통해 침수된 마을로 향한다. 

 

Thaw. Yaroslavl, 1874. by Alexei K. Savrasov. oil on canvas. 53.5 x 75.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4,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해동, 야로슬라블(Thaw, Yaroslavl) - 추운 날이 오래 지속되는 겨울은 항상 끝이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많은 기대를 모으면서도 봄은 조용히 다가오고 있다. 
봄이 다가오는 첫 징후는 해동이다. 
해동은 따뜻한 날의 지표로가 아니라 외부의 시원한 공기와 습도에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해동은 여전히 겨울 내내 차가워진 냉기로 겁을 먹은 퇴각의 시작이다. 
해동은 임박한 봄의 표시이다.

사브라소프는 특이하거나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을 묘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단순한 그림에서 우리 모두에게 친숙한 

특별한 따뜻함과 아늑함이 놓여 있다. 
방금 도착한 새들이 있는 작은 나무들이 둥지를 틀기 시작한다. 
녹은 눈의 웅덩이는 봄의 시작을 나타낸다. 
초가 지붕이 있는 겸손한 몇몇 주택은 

감동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여 신선함을 호흡한다. 
그리고 첨탑이 솟아오른 고대 러시아 건축 기념물을 생각할 때 

그림에서 엄숙한 메모가 울린다.

그림의 주인공은 하늘이다. 

푹신한 보라색 구름으로 집과 나무 위에 펼쳐저 있다. 
하늘 자체가 무거워 보이고 풍경이 더욱 단단해져 표현력이 강조되었다. 
모든 세부 사항이 중요해 보이며 관심을 끌고 있다.

관객은 예술가의 색상 접근 방식에 매료되어 있다. 
파스텔 색상의 차가운 색상을 선택하더라도 사진의 따뜻함과 성실함을 잃지 않는다. 
모든 것이 숨쉬고 감정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색으로 재생된다. 
태양은 없지만 웅변적인 표현력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가벼운 피어싱 느낌을 만든다. 
이미지의 신뢰성은 사브라소프의 예술성을 보여준다.
보는 사람에게 서정적으로 흥미진진한 것은 자연의 봄, 각성의 신호인 해동의 동기이다. 
또한 풍경은 낮의 끝, 황혼에 사람을 사로 잡는 불안한 느낌을 불러 일으킨다. 

 

Winter, 1880s. by Alexei K. Savrasov. oil on canvas. 53.5 x 71.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4,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먼 거리로 이어지는 길을 통해 하얀 눈으로 덮인 공간의 크기를 알 수 있다. 
측면에는 자작나무가 꼬여 있고 심지어 부러져 있다. 

왼쪽에는 작은 숲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나무는 너무 부드럽게 눈으로 덮여 영혼에 감동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사브라소프는 흰색 음영에 주의를 기울인다. 
관객의 촛점은 낮게 매달려 있는 구름이 있는 밝은 하늘에 반향되어 
이 러시아 구석의 눈 속에서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Early Spring, 1880s~1890s. by Alexei K. Savrasov. oil on canvas. 51.3 x 37.8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4,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이 작품 '이른 봄(Early Spring)'은 알렉세이 사브라소프의 대표작
'산까마귀 떼가 돌아오다 (The Rooks Have Come Back, 1871. Tretyakov Galler)'를

반복한 변형이다. 
말년에 이르러 창의력이 쇠퇴한 시기에 사브라소프는 

그가 사랑하고 큰 인기를 누린 모티프를 다양화하는 것처럼 

이전의 그림을 그렇게 많이 반복하지는 않았다. 


이 작품은 사브라소프에 의해 영원한 생명 갱신이라는 주제로 확인되었다. 
자작나무와 오래된 사원이 있는 전형적인 러시아 풍경에서 
그는 시적으로 영감을 받은 고국의 이미지를 본다. 
풍경의 그림 같은 구조에는 1871년의 그림과는 다른 
고통스럽고 예리한 긴장감과 비극적인 절망감이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주로 밝은 반점과 어두운 반점의 강한 대비에서 

색상의 일반적인 음소거와 황혼에서 나타난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4, Alexei K. Savrasov. The State Russian Museum

 

Sunset over the swamp, 1871. by Alexei K. Savrasov. oil on canvas. 88 x 139.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4,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사브라소프의 이 작품 '늪 위의 일몰 (Sunset over the swamp)'에서 
자연의 이미지는 죽어가는 우울한 저녁의 슬픈 분위기로 가득차 있다. 
작가는 저 부동 습운 구름과 멀리서 소용돌이 치는 안개의 윤곽과 움직임, 
구름과 물에 비치는 일몰의 수많은 반사, 여기를 통해 엿보는 저녁 하늘의 
순수한 황록색 빛과의 조합을 잘 전달하고 있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4,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View from the Environs of the Village of Porechye, 1869. by Lev L. Kamenev. oil on canvas. 
92 x 143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4,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레프 카메네프 (Lev Lvovich Kamenev 1834~1886)는 러시아의 풍경화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규모 상인인 그의 아버지는 카스피해 연안 
아스트라한(Astrakhan)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를 했다. 
그곳에서 레프 카메네프는 현지 문법 학교에서 공부했지만 
아버지가 자신의 가게에 조수가 필요했기 때문에 학업을 끝내지 못했다. 
하지만 레프 카메네프가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차 있어 아버지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예술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아들에게 5,000 루블을 주었다.

21세의 나이인 1854년에 그는 모스크바에 가서 이반 쉬스킨(Ivan Shishkin)과 
바실리 페로프(Vasily Perov)와 같은 장래 유명한 화가들과 함께 
모스크바 회화, 조각 및 건축 학교에 입학했다. 
1858년에 카메네프는 전문 화가의 칭호를 부여받았고 

모스크바 예술 아마추어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는 장학금을 받고 2년 동안 서유럽 예술을 배우고 숙달하기 위해 해외 여행을 떠났다. 
카메네프는 이반 쉬스킨과 함께 독일과 스위스를 여행하면서 유학했다.

레프 카메네프는 러시아의 자연과 농부의 삶을 묘사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 예술가는 자연에 대한 시적 해석을 선호하는 것으로 구별된다. 
카메네프는 사실적인 서정적 풍경의 발전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1860년대에 그는 겸손하지만 충만한 러시아 풍경을 여러 작품 만들었다. 

연중 어느때나, 더운 여름날이나 저녁 황혼에 그는 들판에서 방목하는 소와 
강에서 보트 낚시하는 장면, 눈으로 덮인 마을 오두막, 수도원 교회의 돔, 
건초더미 및 겨울 길 썰매를 따라, 풍경을 따라 여행했다. 
그의 그림에 묘사된 자연에 대한 단순함과 자연스러움은 위대한 성실함과 결합된다. 
이 작품과 1869년에 "모스크바 주변에서 바라본 전망"으로 카메네프는 학자의 칭호를 받았다. 
1870년 그는 이동파의 창립 회원이 되었다.  

 

The Rest at the Harvest, 1860. by Alexander I. Morozov. oil on canvas. 46 x 63.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4,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알렉산더 모로조프 (Alexander Ivanovich Morozov 1835~1904)는 

러시아의 쟝르화 화가이자 판화가였다.  
그는 1851년 황립 미술학교에서 알렉세이 마르코프(Alexey Tarasovich Markov)의 지도를 받았다. 
1861년 이 작품 '건초 수확 중 휴식 (The Rest at the Harvest)'에서 
납작한 구조물은 밭에서 일할 때 사용하던 오두막이다. 


알렉산더 모로조프는 이 작품으로 금메달을 받았고
2년 후 이동파에 가담하여 학교의 고전적 스타일이 아닌 사실주의를 지향한다.  
훗날 모로조프는 "교회를 떠나며, 프스코프에서"로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영상] Alexei K. Savrasov, Hall 24, The State Russian Museu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3, Vasily G. Perov.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바실리 페로프 (Vasily Grigorevich Perov 1834~1882)는 시베리아에서 
지방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모스크바 회화 조각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이때의 스승들 중에는 <M.V. 보론초바의 초상>의 작가 S. K. 자랸코가 있었다.  
학교를 마치던 무렵 러시아 현실에 대한 분노와 민초들에 대한 연민을 버무려 
그가 그려낸 풍자화들은 러시아 화단이 페로프(Perov)란 이름에 주목하도록 만든다.  

‘키치(Kitsch)’라는 용어가 있다.  
고매한 품격을 갖지 못한, 싸구려 또는 사이비 미술품을 조롱하는 말이다.  
예전 우리나라에서는 머리 깎는 곳에 꼭 그런 그림들이 걸려 있었으므로  
흔히 ‘이발소 그림’이라고 불리던 것들이 그런 부류이다. 

세계 미술사의 주류에 속하지 못했던 19세기 러시아 회화들을 
서유럽 쪽 화단에서는 흔히 키치로 취급했었다.  
외관상으로 어딘지 그 ‘이발소 그림’의 냄새가 나는 듯한 작품들이 없지 않다.  
현란한 빛이 세련되게 부서지는 인상파 그림들을 익숙하게 보며 자라온 우리 눈에는 
러시아 회화들의 칙칙한 색채나 가끔 좀 갸우뚱한 사실적 묘사는 
뭔가 촌스러운 느낌을 줄 때가 있는 것이다. 

Pugachev's trial, 푸가체프의 재판, 1879. by Vasily G. Perov. oil on canvas. 226 x 330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3,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표트르 3세(Peter III)의 죽음은 많은 전설과 사기꾼의 출현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773~1775년에 있었던 농민 전쟁의 지도자인 
푸가체프(Emelyan Ivanovich Pugachev 1742~1775)였다. 
푸가체프는 돈 코사크(Don Cossacks) 출신으로 17세부터 프로이센과 터키와의 
전쟁에 참전했고 전투에서 용감한 코넷의 하급 장교 계급을 받았다. 
그는 여러번 코사크(Cossacks)와 농민의 청원자로 행동하여 
감옥에 갇히고 1773년 우랄(Urals) 지방로 도망쳤다. 

같은 해 9월 80명의 야익 코사크 앞에서 자신을 황제 표트르 3세로 선포하고 
2만 명 이상의 군대를 모아 귀족과의 무자비한 전쟁을 시작했다. 
푸가체프는 뛰어난 군사 및 조직 기술을 보여 주었지만 1774년 9월 

정부로부터 사면을 받기 위해 측근과 교환되었고 1775년 1월 

모스크바의 볼로트나야 광장에서 처형되었다. 

1870년대 초 바실리 페로프(Vasily Perov)는 푸가체프가 이끄는 

농민 전쟁으로 주제를 전환했다. 
페로프는 푸가체프 봉기의 역사를 펼치려는 삼부작을 제작하는 어려운 작업을 시작했다. 
예술가의 의도에 따르면, 삼부작의 첫 번째 부분에서 그는 봉기의 이유로 
토지 소유자의 통치 하에 농민의 힘든 삶을 보여주고 싶었다. 
두 번째에서 봉기 자체를 묘사하기 위해, 
세 번째는 토지 소유자의 재판으로 지주에 대한 보복을 전달한다. 

바실리 페로프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 신중하게 준비했다. 
그는 푸가체프 봉기에 대해 많은 글을 읽고 볼가 지역, 우랄(Ural) 지역을 여행했다. 
18세기 말에 봉기가 일어났다. 
계획 중 작가는 세 번째 부분만 구현할 수 있었다. 

그림은 매우 슬프고 우울한 생각을 암시한다. 
그것은 사람들의 무작위 운동을 묘사한다. 
그림의 중앙에는 귀족 묘지에 투옥된 토지 소유자가 묘사되어 있다.
불길하고 우울한 궁정 장면은 화가에 의해 민속 비극으로 해석되며, 
참석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진실을 전달한다. 
푸가체프는 나머지 영웅들에게 반대하거나 순종하는 맹렬한 폭군으로 그림에 나타난다. 

푸가체프는 농부들이 그들의 주인에 의존하지 않기를 바랬다. 
이 그림은 매우 많은 사람들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집주인의 재판을 관리하는 푸가체프이다. 
배경에서는 푸가체프의 사람들에 의하여 사건의 중심으로 허용되지 않는 평민을 보여준다. 
그들 중에는 노인들, 울부짖는 여자들이 있다. 

석조 건물의 현관에는 푸가체프 자신이 보좌에 앉아 있다. 
그는 붉은 카프탄을 입고 발에 부츠를 신고 있다. 
그의 시선은 결단력으로 가득 차 있다. 
그와 가까운 사람들이 그 근처에 있다. 
그는 매우 중요한 표정으로 앉아 있고 일어나고 있는 일을 관찰한다. 
그림의 배경에는 교수대가 있고 멀리에는 불타는 듯한 빛, 연기 구름 등이 
수평선에 도달하면서 그것들을 감싸고 있다.

바실리 페로프의 그림은 역사적인 사건의 영향을 받아 명백하게 기록되었다. 
저자가 보여주고 자했던 모든 역사적 중요성을 가장 잘 반영하기 위해 

페로프는 풍부한 색상을 사용했다. 
광장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도 그 어려운 시기에 군림했던 감정과 경험을 분명히 보여준다. 

 

First Christians in Kiev, 1880. by Vasily G. Perov. oil on canvas. 156 x 243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3,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키예프에서 최초의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정보는 거의 보존되지 않았다. 
866년 콘스탄티노플에 대항한 캠페인 이후 전사인 애스콜드(Askold)와 디르(Dir)가 
기독교를 채택했다는 연대기의 언급은 그러한 사례가 

고립되어 있지 않다고 믿는 이유를 제공한다. 
945년 그리스인과의 조약에서 키예프 바랑기아인(Varangians) 사이에 

많은 기독교인이 있었고 키예프에는 성 엘리야 교회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올가 공주는 957년에 침례를 받았다. 
그러나 983년에 블라디미르 왕자에 의해 이교도 신들에게 희생된 것으로 알려진 사례가 있다. 
블라디미르 왕자는 나중에 러시아 두 명의 바랑기아 기독교인, 
존(John)과 그의 아버지 테오도르(Theodore)를 세례받도록 했다. 

 

Orphans in the cemetery, 1864. by Vasily G. Perov. oil on canvas. 156 x 243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3,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소외 계층 아동의 존재라는 어려운 주제는 19세기 중반 러시아 미술에서 널리 퍼졌다. 
바실리 페로프의 그림 '묘지의 고아(Orphans in the Cemetery)'에서 
이 의미는 깊은 사회적 일반화로 발전한다. 
파리 이후 시대에 속한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에는 비난의 애정이 있으며 
동시에 페로프 작품의 성격에 대한 공감이 스며든다. 

 

Bob guitarist, 1865. by Vasily G. Perov. oil on canvas. 31.2 x 22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3,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페로프의 창의적인 태도와 열망은 젊었을 때 형성되었다. 
나중에 그는 파리 예술 아카데미의 연금 수급자로서 사람들의 

일상 생활에서 얻은 주제와 이미지에 대한 헌신을 바꾸지 않았다. 
페로프의 일상적인 그림의 유형 윤곽선이 그려졌다. 
크기가 작고, 한 사람에 대한 일종의 예술적 단편 소설 또는 
그의 삶의 방식, 태도, 운명을 가진 사람에 관한 것이다. 


이 캔버스에서 세속적, 정신적으로 "불안정한"사람들에 대한 참여가 특히 드러났다. 
러시아로 돌아온 후 그의 작품 '밥 기타리스트(Bob guitarist)'는 

페로프의 가장 진심어린 작품이다. 
사랑스럽고 신중한 글쓰기, 조화로운 회색 황토색 톤의 고상한 스케일은 
이미지에 섬세한 서정적 성격을 부여한다. 
따뜻함이 돋보이는 이 방의 작품은 높은 인본주의로 가득 차 있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3, Vasily G. Perov.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Monastic Refectory, 1865~76. by Vasily G. Perov. oil on canvas. 31.2 x 22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3,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페로프의 이 작품은 1870년대 러시아 미술에서 비판적 사실주의 작품의 가장 놀라운 예라고 할 수 있다. 
식사 - 음식과 일반적인 수도원 잔치. 
걸출한 장르 회화 대가의 이 작품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일종의 유죄 문서로 인식되었다. 
식사를 묘사한 줄거리는 수도원의 위선에 대해 이야기했다. 
폭식, 이기심, 자부심, 부러움과 같은 다양한 인간의 악은 
자선을 구걸하는 거지의 이미지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이미지 사이에 
상징적으로 위치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 교회 목사의 이미지에 담겨 있다. 
밝은 햇빛이 창문에 쏟아져 영적 정화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준다.

 

Hunters at Rest, 1877. by Vasily G. Perov. oil on canvas. 58 x 89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3,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바실리 페로프는 열정적인 사냥꾼이었으며 사냥이라는 주제는

그의 창작 활동 전체에 걸쳐 그를 매료시켰다. 
페로프는 1877년에 '휴식 중인 사냥꾼 (Hunters at Rest)' 그림을 그렸다. 
1871년에 그린 같은 이름의 그림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State Tretyakov Gallery)에 보관되어 있다.

이 작품은 휴가를 보내는 세 명의 사냥꾼을 묘사한다. 
왼쪽에는 아마도 가난한 귀족 출신의 숙련된 사냥꾼이 
그의 "착취"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사람은 모스크바의 유명한 의사이자 총 사냥 애호가인 쿠브시니코브(D. P. Kuvshinnikov)였다. 
그림을 전시한 후 그의 이름은 문학, 예술 및 연극계에서 인기를 얻었다.

배경에는 러시아 농민 옷을 입은 중년 남성이 야릇한 웃음을 머금고 사냥 이야기를 듣는다. 
의사이자 아마추어 예술가인 베소노프(V. V. Bessonov)도 그를 위한 모델로 활동했다. 
오른쪽에는 노련한 사냥꾼의 이야기를 들으며 믿을 수 있는 젊은 신참이 있다. 
이 이미지를 위해 쿠브시니코브와 베소노프의 친구이자 동료인 
26세의 나고르노브(N. M. Nagornov)가 아티스트를 위해 포즈를 취했다. 
그림을 그린 직후, 그는 위대한 작가 V. V. 톨스토이의 조카와 결혼했고 
1890년대 초 모스크바 시의회 회원이 되었다.
이 작품은 1869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 전시회에서 전시되었다.

 

Head of a Kyrgyz Convict, 1873. by Vasily G. Perov. oil on canvas. 64.5 x 58.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3,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키르기즈(Kirghiz) 죄수의 초상화는 러시아 미술에서 비판적 사실주의의 
가장 유명하고 대표적 화가 중 한 명인 바실리 페로프의 작품 전성기에 속한다. 
유명한 사회 장르 작품 시리즈와 동시대 사람들의 화려한 초상화 갤러리를 만든 후, 
바실리 페로프는 푸가체프(Emelyan Ivanovich Pugachev)가 이끄는 
대중 봉기에 헌정된 미술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미래의 역사적인 캔버스의 특징적인 유형을 찾기 위해 1873년 
페로프는 우랄(Urals)과 오렌버그(Orenburg) 지방으로 여행했다. 
그 당시 만들어진 많은 삶의 연구 중 러시아 박물관 컬렉션의 키르기스스탄 초상화는 
이미지의 특별한 깊이를 나타낸다. 
이 작품에서 주인은 죄수의 외모와 운명의 사람의 내면 상태의 

심리적 특성 사이의 완벽한 균형을 찾는다.

 

Girl with a Jug. 1869​. by Vasily G. Perov. oil on canvas. 72 x 53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3,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러시아 회화사에서 빠트릴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바실리 페로프지만,
그의 작품 중 상당수는 이발소 그림을 닮은 데가 있다.  
그의 독특한 카키와 우울한 화면 분위기는 세련된 도회인들의 입맛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처음 러시아 회화들에 매혹되었을 때도 그 대상은 주로 레핀이나 크람스코이,
세로프처럼 기존의 취향으로도 충분히 전율할 수 있는 화가들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페로프 미학의 핵심은 시대정신과 휴머니티이다.  
우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변함 없이 피어나는 모네의 수련이나  
고흐의 해바라기와는 다른 관점에서 그의 그림에 접근해야 한다.  
페로프가 살았던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현실에 발을 딛고 하나하나 뜯어보면,  
그의 그림은 어떤 예술 작품들보다도 깊은 감동을 가져다준다.  
그런 점에서 페로프의 그림들은, 투박하지만 씹을수록 깊은 맛이 나는 러시아의 흑빵을 닮았다.  

그의 장르화들을 특징에 따라 구분해보면 사회비판, 해학, 
그 외 인물과 역사쯤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현실 비판적 시각의 그림들을 살펴보자.  
그가 비판한 ‘현실’, 즉 19세기 러시아 사회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당시 러시아 국민의 대다수는 농노이거나 가난한 농민들이었다.  
농노는 지주의 토지를 경작하고 지대를 납부할 뿐 아니라 
주 3일 이상 지주의 직영지에서 부역으로 노동을 제공해야 했다. 

국가는 그들로부터 인두세를 걷고 병역의무를 부과하였지만

그 대가로 어떤 보호도 제공하지 않았다.  
지주는 재판 없이 그들에게 체형을 가할 수 있었으며 매매할 수도 있었다.  
농민들은 농노에 비해 다소 덜 예속적이었지만, 그 궁핍한 삶은 농노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것은 상상 속의 지옥 풍경이 아니고 노예가 콜로세움에서 
사자와 싸우던 글래디에이터 시대의 이야기도 아니다.  
불과 150년 전의 러시아 사회는 그런 곳이었다. 

그뿐이랴. 

갓 불붙은 산업혁명으로 노동자계급이 탄생하면서 지옥은 농촌에서 도시로 확산된다.  
초기자본주의 시절, 서로 먹고 먹히는 자본 간의 처절한 전쟁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던 그때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본이 노동자의 육신과 영혼을 

깡그리 망가뜨리는 데에 아무런 제약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런 러시아 사회의 정점에는 무능하며 폭압적인 로마노프 황실과 
한줌도 안 되는 귀족들의 화려한 삶이 놓여 있었다.  
이런 세상을 점진적으로 바꾸어 보고자 했던, '브나로드 운동'처럼 
평화적이고 낭만적인 시도는 무참히 좌절되었다.  
당신이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이제 달리 무얼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들의 혁명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영상] Vasily G. Perov, Hall 23, The State Russian Museu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1, by Henryk H. Siemiradzki.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Phryne at the Poseidon Festival in Eleusis, 1889. by Henryk H. Siemiradzki. oil on canvas. 
390 x 763.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1,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헨리크 지미라즈키 (Henryk Hektor Siemiradzki 1843~1902)는 
로마에 거주하는 폴란드 화가였으며 그의 기념비적인 학술 예술로 가장 잘 기억된다. 
그는 특히 유럽의 많은 국립 미술관이 소유한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와 
신약성경의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지미라즈키의 그림 중 많은 부분은 고대의 장면을 묘사하며, 
종종 햇볕에 쬐인 목가적 장면이나 초기 기독교인의 삶을 보여주는 장면을 묘사한다. 
그는 또한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장면, 풍경 및 초상화를 그렸다. 

1864년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제국 예술아카데미에서 
회화를 공부하고 졸업 후 금메달을 받았다. 
1873년에 그는 알렉세이 톨스토이(Aleksey Tolstoy)가 쓴 신너(Sinner) 구절을 
바탕으로 한 작품 "Christ and a Sinner"로 제국 예술 아카데미의 학자 칭호를 받았다. 
1878년 그는 프랑스 군단 명예 훈장을 받았으며 

파리 세계박람회에서 화병 그림으로 금메달을 받았다. 
1876 ~1879년에 지미라즈키는 다른 대규모 프로젝트 중에서 
모스크바에 있는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의 프레스코화 작업을 했다. 

지미라즈키는 고대의 영감을 받은 화가로서 러시아와 유럽 예술의 역사에 남았다. 
작가의 비범한 화보 기술, 고대 고고학에 대한 그의 깊은 지식, 
작품에서 눈에 띄는 화려함과 재미있는 주제를 결합하는 능력은 
언제나 그의 캔버스로 관객을 매료시켰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고대 그리스 역사에서 빌려온 것이다. 
묘사된 사건은 우리를 기원전 364년으로 인도한다.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헤테라 프린(Hetera Phryne)은 일레우시니안(Eleusinian) 축제에서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묘사한다. 
청중의 감탄하는 시선 아래 프린은 옷을 벗고 계단을 내려가 바다의 파도 속으로 뛰어 들었다. 
왼쪽에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시인, 오른쪽에는 소녀의 발에 꽃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극장처럼 지어진 무대는 태양이 가득한 무성한 남부 자연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다양하고 밝은 군중, 수많은 "골동품 럭셔리" 개체가 캔버스에서 거대한 정물로 합쳐져 
각 개체가 엄격하게 정의된 장소를 차지한다. 
구성을 구축하면서 지미라즈키는 사건의 현실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은 후기 학업의 그림 체계의 모든 전형적인 특징을 담고 있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1, Konstantin Flavitsky,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Christian Martyrs at the Colosseum, 1862, by Konstantin Flavitsky. oil on canvas, 385 x 539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1,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화가 콘스탄틴 플라비츠키 (Konstantin Flavitsky 1830~1866)는
1830년 9월 모스크바에서 관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곧 고아가 되었고 7년간을 꼬박 보육원에서 지냈다. 
그림에 대한 재능은 일찍부터 있었으나 알려지지 않았다가, 미술 단체의 후원으로 

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하였고, 회화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1855년 황금메달을 받으면서 졸업을 했고, 그 덕택으로 이탈리아에서 6년간 유학했다.

콘스탄틴 플라비츠키는 비극적인 운명을 지닌 <타라카노바 황녀>를 그려 
단 한 장의 작품으로 19세기 러시아 최고의 화가가 된 사람이다. 
현재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타라카노바 황녀>가 1864년 공개되면서, 
미술계 내에서뿐 아니라 외적으로도 세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모두들 앞으로의 그의 미술활동에 큰 관심을 나타내었고, 
그가 훌륭한 그림을 많이 그려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타라카노바 황녀>를 그리고 있을 당시부터 그는 이미 폐결핵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에 있을 당시 병을 얻어서,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후 더욱 심해졌다. 
그는 병을 고치기 위해 유럽으로 갈 생각이었으나, 
안타깝게도 36세의 나이로 1866년 9월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 작품 “콜로세움의 기독교 순교자(Christian Martyrs at the Colosseum)"에서
플라비츠키는 서기 1세기 말 로마 제국의 역사에 나온 에피소드를 묘사했다.  
사나운 맹수들을 풀어서 그리스도인들을 처음으로 공개 처형한 
역사상 가장 고통스러운 종교적 박해의 예를 묘사한 것이다.  
플라비츠키는 경비원이 경기장의 문을 열고 그리스도인들이 

감옥에서 나가서 죽어야 할 순간을 선택했다.

고대 형태의 고문은 잔인하고 극심한 고통을 주는 독특한 방법으로 유명하다. 
순교한다는 것은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믿는 것에 충실함을 의미한다. 
수년 동안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표명한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여러 종류의 고문을 겪었다.
믿음으로 고통을 받은 사람들은 영감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기독교에서는 가장 끔찍한 죽음을 견뎌낸 가장 충실한 사람들이 

시성화되어 이제는 성인으로 추앙되었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종교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치른 희생 중 일부에 불과하다. 
오늘날까지도 기독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만연해 있다.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신자들이 신앙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 
종교가 억압의 기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도 순응하지 않고 

자신이 믿고 싶은 신앙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1, Vasily S. Smirnov,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Death of Nero, 1888. by Vasily S. Smirnov. oil on canvas. 177.5 x 400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1,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바실리 세르게예비치 스미르노프 (Vasily Sergeyevich Smirnov 1858~1890)는 
고대 역사의 장면을 전문으로 하는 아카데믹 스타일의 러시아 화가였다. 
그는 러시아 귀족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바실리 스미르노프는 가족의 친구인 바실리 페로프(Vasily Perov)의 영향을 받아 
예술을 직업으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1875년에 그는 모스크바 회화, 조각 및 건축학교에 등록했다. 
바실리 스미르노프는 1878년 그곳에서 전시회에 참가하여 은메달을 획득했다.

같은 해에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제국 예술 아카데미로 편입하여 
표트르 샴신(Pyotr Shamshin)과 파벨 치스티야코프 (Pavel Chistyakov)와 함께 공부했다. 
1882년에 바실리 스미르노프는 폐의 "만성 카타르"로 인해 아카데미에서 휴가를 받았다. 
이듬해 그는 "예술가"라는 칭호와 유학을 위한 수당을 받았다.

바실리 스미르노프는 비엔나를 거쳐 이탈리아로 갔고 결국 로마에 정착했다. 
여름 더위가 너무 심해서 그는 토리노로 이사를 갔고 

파리에서 시간을 보내며 살롱에서 전시했다. 
북서부 유럽을 여행한 후 바실리 스미르노프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그곳에서 
일종의 멘토가 된 바실리 사빈스키(Vasily Savinsky)와 함께 살았다.

1885년에 바실리 스미르노프는 고전 주제에 대한 

관심의 시작이었던 폼페이에서 스케치를 그렸다. 
이듬해 그는 이 작품 "네로의 죽음(Death of Nero)" 작업을 

시작했으며, 완성하는 데 2년이 걸렸다. 
이 작품은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보내졌고 여러번의 전시 후에 
알렉산더 3세(Tsar Alexander III)가 구입하게 되었다.

1889년 바실리 스미르노프는 아카데미의 부교수가 되었지만 

폐 질환이 계속 악화되면서 잠깐 머물렀다. 
그는 기차에서 이동 중에 사망했고 그의 형은 1891년에 
여러 미완성 그림을 포함하는 주요 전시회를 조직했다.

이 작품 "네로의 죽음"은 바실리 스미르노프의 최고이자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그의 재능은 그의 초기 죽음으로 인해 완전히 드러날 시간이 없었다. 
1887년에 바실리 스미르노프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예술 아카데미의 연금 수령자로 
로마에 있는 동안 고대 로마 역사의 극적인 사건에 헌정된 그림을 처음으로 스케치했다. 

로마 황제 네로 (Nero 37~68 AD)는 무고한 사람의 처형, 어머니의 살해, 
로마의 불태움 등등 수많은 역사적 범죄를 저질렀다. 
군대와 시민들이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네로는 전복되었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2, Solomatkin.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Watchmen Singing Praises, 1870. by Leonid I. Solomatkin. oil on canvas, 42.5 x 59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2,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레오니드 솔로마트킨 (Leonid Ivanovich Solomatkin 1837~1883)은 
사실적 스타일의 러시아 장르 화가였다.
그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고아가 되었다. 
처음에는 목자로 일한 다음 아이콘 판매자로 일했다. 
몇 년 동안 그는 추막으로 일하면서 마을에서 마을로 여행하면서 
도중에 본 흥미로운 사람들을 스케치했다. 

그 스케치들을 손에 들고 모스크바로 가서 조각가이자 교사이자 
미술 평론가인 니콜라이 라마자노프 (Nikolai Ramazanov)에게 선물했다. 
그의 그림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다루었다. 
아마도 그의 가장 인기있는 그림은 크리스마스 때 상인의 집에 가서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고" 팁을 얻기 위해 과시할 정도로 경건한 경찰 중 한 명일 것이다. 
원본은 손실되었지만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여러번 복사하고 복제했다. 
사실, 그는 자신의 그림 (변형 포함)을 여러장 복사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대부분이 작기 때문에 쉽게 만들었다.

그는 아카데미를 떠난 후 공식 전시회를 열지 않았다. 
약간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가난하게 살았으며 종종 노숙자 생활을 했다.
그는 46세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병원에서 결핵으로 사망했다.

이 작품은 어느 정도 그로테스크한 형태로 잘하는 관리의 가족에 머머의 도착을 묘사한다. 
크리스마스 이후 2주 동안은 다양한 의식과 오락으로 표시되는 자유로운 즐거움의 시간이었다. 
가면과 변장을 하는 것은 러시아에서 널리 퍼진 관습이었다. 
이것은 크리스마스 이후 8일 동안 지구를 방황하는 악마가 
악마적인 모습으로 옷을 입혀 속지 않으면 사람을 고문하거나 
사로 잡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악령들에게 겁 먹은 머머들은 집집으로 이사했고, 주인은 음식과 음료로 그들을 대해야 했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2,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Watchmen Singing Praises, 1882. by Leonid I. Solomatkin. oil on canvas, 36 x 62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2,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레오니드 솔로마트킨 (Leonid I. Solomatkin)은 현대 거리와 
작은 도시 사람들의 삶을 날카롭고 종종 그로테스크하게 인식했다.  
자연의 철저한 이전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그는 때때로 그의 캐릭터를 거칠게 만들어 
청중의 관심을 삶의 추악한 측면으로 끌어들였다. 

솔로마트킨은 이 작품에서 자모스크보레치예(Zamoskvorechye) 삶의 다채로운 장면을 재현한다. 
경찰은 주인의 감사를 바라며 “그리스도를 찬양”하기 위해 상인의 집에 왔다. 
방, 얼굴, 포즈의 모든 세부 사항에는 너무 많은 코믹하고 다양한 진실이 담겨 있다. 
1864년 원본 버전으로 솔로마트킨은 첫 번째 은메달을 받았다. 
이 그림은 솔로마트킨에 의해 여러번 반복되고 변경되었다.

 

 

[영상] Siemiradzki, Flavitsky, Smirnov, Solomatkin. Hall 21~22, The State Russian Museu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0, Fyodor A. Vasilyev.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Thaw, 1871. by Fyodor A. Vasilyev. oil on canvas. 55.5 x 108.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0,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표도르 바실리예프(Fyodor Alexandrovich Vasilyev 1850~1873)는 
가난한 페테르부르크 우편 관리의 가족으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 4년 후 부모가 결혼했지만 그는 항상 사생아로 여겨졌다 한다.   
바실리예프는 12살부터 우편배달, 사본 필사,  
미술품 재생의 일로 돈을 벌었고, 부친의 사후에는 가족을 부양했다. 
돈이 부족하여 12세의 청년이 우체국에서 일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미를 포기하지 않았다.  

1863년 13세 때 바실리예프는 미술학교의 야간학생으로 다니며, 

그를 돌봐준 여러 화가를 만났다.   
15살 때 예술진흥협회의 드로잉 스쿨에 입학하여  
크람스코이(Ivan Kramskoy) 등 저명한 예술가들을 만났다. 
크람스코이는 표도르 바실리예프보다 나이가 13살이 더 많았지만  
나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매우 가까워졌다.  

1866년 유명한 풍경화가 이반 쉬스킨(Ivan Shishkin)이 그의 누나와 

사랑에 빠졌고, 틈틈이 바실리예프에게 풍경화를 가르쳤고, 

후에는 크람스코이, 트레치아코프 등에게 소개도 해 주었다.   
그러나 바실리예프가 자신의 그림과 강한 경쟁 상대가 되자 쉬스킨은 

집행부의 영향력을 이용해 자신이 상을 받도록 했다는 비난도 받았다고.

아티스트로서 바실리예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은 이반 쉬스킨(Ivan Shishkin)이 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은 친척이 되었다.  
쉬스킨은 바실리예프의 여동생 예브게니(Yevgeny Vasilyeva)와 결혼했다.  
쉬스킨은 처남에게 최대한 정확하게 전달하도록 가르치고 그림의 기술에 대해 이야기했다.  
젊은 예술가 바실리예프가 쉬스킨 부부에게 보낸 편지가 여러 통 남아 있다.  

1872년 8월 11자 그들 중 한 명은 얄타(Yalta)에서 쓰여졌으며
그곳에서 바실리예프는 폐질환 때문에 움직였다.  
“저는 항상 그렇듯이 돈 때문에 일을 해야 하는데 이것이 항상 저를 화나게 합니다.  
이미 내 그림 중 하나를 받은 대공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Brand Duke Vladimir Alexandrovich)는 4점을 더 주문했습니다.  
그러나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이 그림들은 12월 24일 마감일까지 완료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작된 그림은 낭비되고 올해 내년 1월과 2월에만
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대회에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2개월 후 1873년 10월 6일에 일을 끝내지 못했다. 

이 작품 "해동(Thaw)"은 특별한 유형의 풍경이다.  
추위에 휩싸인 음울하고 탐욕스럽지 않은 바람에 휩쓸리는 공간을 묘사한 것이다.  
작가는 시야를 넓게 확대하여 거의 파노라마처럼 보이도록 하여  
어렵고 목적없는 여정, “고통으로 가득 찬 길”의 느낌을 육체적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절망감은 배경의 세부 사항에서 강조된다.  
얼음으로 덮인 나무와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농민 오두막.  
삶의 순환을 상징할 수 있는 여행자와 어린이는 
길과 약간 녹은 개울로 형성된 교차로의 중심에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단어의 직접적인 의미에서 “충돌”이다. 

바실리예프의 "해빙"은 발표되자마자 그를 유명하게 했다.   
알렉산더 왕자 즉 미래의 알렉산더 3세가 카피 한 점을 주문했고,  
예술가 진흥회 (Society for Promotion of Artists)는 그에게 일등상을 수여했다.   
이 그림은 1872년 런던 박람회에서 메달을 받았다.  
바실리예프는 황립예술학교의 인턴이 되었고, 군대 징집을 면제받았다. 

그러나 바실리예프가 러시아 예술가들 사이에 불렸던 "천재소년"에겐 
그 인기를 즐길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폐결핵 진단을 받아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영원히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크리미아로 이주했던 바실리예프를  예술가 진흥회가 계속 후원했으나,  
그는 그림으로 치료 비용을 갚아야 했다.

 

 

Marsh in a Forest. Autumn, 1872. by Fyodor A. Vasilyev. oil on canvas. 81 x 115.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0,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1871년에 막 성숙기에 이르렀고 인생의 30년에 겨우 들어간 바실리에프는 결핵에 걸렸다.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우크라이나 코텐(Khoten) 마을로 간 다음 
돌아올 운명이 아닌 크림 반도로 가야 했다. 
얄타에 살면서 그는 인생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예술가 장려협회의 소액 대출은 가족과 그림 작업에 필요한 

비용을 지원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신선함과 넓음, 친척 및 친구들과 함께 
그에게 소중한 북부 숲과 늪에 대한 그의 갈망은 위대했다. 
그리고 주인은 살아남은 스케치와 그의 비정상적으로 끈질긴 기억을 사용하여 
중앙 러시아 자연의 그림 작업을 계속했다. 

마지막 작품 중 하나는 “숲의 늪. 가을(Marsh in a Forest. Autumn)"이다. 
1872년에 시작되었고 1870년대의 가장 주목할만한 러시아 풍경에 속한다. 
그림의 색 구성표, 넓은 동적 붓놀림을 사용하는 그림 시스템에서 

바실리예프는 1890년대 러시아 그림의 업적을 기대하면서 

당시 예술의 일반적인 수준과 가능성을 크게 능가했다.

죽기 직전에 그는 크람스코이(I. Kramskoy)에게 편지를 보냈다. 
“오, 늪, 늪! 무거운 예감으로 인해 심장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수축합니까! 
글쎄요, 이 자유를 다시 숨 쉴 수 없을까요? 
아침의 이 생명을 주는 힘은 김이 나는 물 위에서 깨어나지요? " 

짙은 회색 구름을 배경으로 가을 나무를 묘사함으로써 작가는 무성한 잎이 달린 
참나무의 구리-황금 왕관을 특별한 힘으로 타게하여 자작 나무에 
노란색과 빨간색 음영의 복잡한 색상 악센트를 지원했다. 
바실리예프는 러시아 숲의 아름다운 가을 장식에 대한 

기억을 크림 산에서 관찰한 것과 결합했다. 

그는 가을에 비정상적으로 밝고 신선한 색의 반점으로 채색되었다. 
저녁의 고요함 속에 얼어 붙은 가을 참나무는 저녁 햇살의 따뜻한 햇살에 빛을 발한다. 
흔들림, 초록색과 녹슨 붉은색 초목 사이에 섭식하는 새의 신비한 실루엣은 
바실리예프의 마지막 그림에서 매우 전형적인 일반적인 분위기에 수수께끼, 
사려 깊음 및 슬픔을 더한다. 

이 작품은 모든 스트로크에서 자유롭고 표현력이 뛰어나며 매우 정확하고 사려깊다. 
이 그림에 대한 그의 인상에 대해 크람스코이(I. Kramskoy)는 바실리예프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진짜 그림은 어떤 것과도 다르고, 누구를 모방하지도 않으며, 
어떤 예술가나 학교와도 아주 조금도 닮지 않았습니다. 
그런 정도의 독창적이고 모든 영향으로부터 분리되어 현재의 
전체 예술 운동의 외부에 서서 한 가지만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전히 ​​... 그다지 좋지 않지만 ...하지만 훌륭합니다."

 

 

Clouds, 1873. by Fyodor Vasilyev. oil on canvas. 32 x 37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0,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1870년, 20세의 표도르 바실리예프는 러시아 국민화가 일리야 레핀(Ilya Repin) 및  
예브게니 마카로프(Evgeny Makarov)와 함께 볼가 강을 따라 여행을 갔다.  
몇 년 후, 일리아 에피모비치 (Ilya Efimovich)는 그의 저서 “먼 거리”에서  
그 젊은이가 일하는 방식에 대해 동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그의 오랜 동지들에게 “훌륭한 교사”가 되었다고 썼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훌륭한 교사였다.  
”그에 따르면“ 머그컵 앨범의 작은 잎을 따라 재봉틀 바늘의 속도를 가진 얇은 연필은  
가파른 곳으로 구부러진 집들이 있는 가파른 은행의 사실적이고 인상적인 전체 그림을 그렸다.  
먼 거리에서 뾰족한 곤경과 뾰족한 스파이크 ...  
" 여행 중에 만들어진 연구는 나중에 볼가 라군을 포함한 여러 그림의 기초로 사용되었다.  
앞으로 캔버스는 파벨 트레치야코프(Pavel Tretyakov) 컬렉션에서 소장하게 되었다.  
파벨 트레치야코는 바실리에프가 병과 사망으로 인해 후원자에게 
지불할 수 없는 부채 때문에 1874년 작가의 그림을 사후에 전시한 후에 그것을 소장했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0, F. A. Vaslliev.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In the church fence. Balaam, 1867. by Fyodor A. Vasilyev. oil on canvas. 43 x 67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0,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쉬스킨(Shishkin)의 초청으로 바실리예프는 1867년에 발라암(Valaam)으로 갔다. 
바실리예프의 발라암 풍경화는 진심어리게 서정적이다. 
이러한 기능은 바실리예프의 작품 전체에 내재되어 있으며 그의 초기 작품에서 이미 볼 수 있다. 
발라암에 대한 작업은 뛰어난 예술가의 짧은 수명을 고려할 때 "초기" 기간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 "발라암의 교회 울타리에서(In the Church Fence, Balaam)"는 
고요하고 평온한 분위기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큰 나무의 힘은 교회 울타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의 힘을 나타낸다. 
"교회 울타리"가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에서 
"여기"와 "거기" 사이에 명확한 구분은 없다. 
바실리예프의 경우 주변 세계가 조화를 이루고 울타리 안에서만 영적 긴장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Countryside, 1869. by Fyodor A. Vasilyev. oil on canvas. 61 x 82.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0,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1869년 이 작품이 만들어졌을 때 바실리예프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졌다. 
바실리예프는 민속 생활의 장면과 자연의 그림에 똑같이 관심이 있었다. 
동시에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그 표현의 회화적 수단이 그에게 무르익고 있었는데, 
이는 명암 계획의 배열에 반영된 학문적 기준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러시아 마을은 낡은 오두막, 마른 소, 지나갈 수 없는 흙과 같은 풍경이 

꾸밈없이 실제 형태로 묘사된다. 
이것은 최근 개혁 이후 마을이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와 관련이 되어 있다. 
그러나 비판적 사실주의의 다른 풍경화가와 마찬가지로 작가는 조국에 대한 아이디어와 함께 
사람들의 정신의 아름다움과 관련된 러시아 자연의 아름다움을 마음으로 보고 인식했다. 

 

 

After Rain. Country Track, Late l860s. by Fyodor A. Vasilyev. oil on canvas. 57.5 x 82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0,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바실리예프는 여름 비가 내린 후 시골 풍경을 묘사하는 데 자주 눈을 돌렸다. 
그 구성은 거리로 멀어지는 길을 주제로 한다. 
이 유형의 풍경에 없어서는 안될 요소인 소를 이끄는 외로운 농부 인물은 
그림의 정서적 구조에 흥분을 더한다. 
이 풍경 속에서 길의 동기는 철학적 의미를 갖게 된다. 
부서진 검은 울타리, 비에 의해 씻겨진 바위 길의 이미지에서, 
사람은 마을 생활의 어려움에 대한 반성뿐만 아니라 애수를 띈 분위기도 들을 수 있다. 
도로 웅덩이의 밝은 반점, 햇빛에 의해 비춰지는 곡물 밭, 

서로 반향하는 것은 비오는 날의 우울한 색 구성표에 반대하며 

풍경의 전체적인 예술적 솔루션에 낙관적인 메모를 가져온다.

"자연 속의 소음과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정신적 신경"은 
풍경화가 바실리예프가 부여했다. 
이것은 바실리예프의 최고의 작품 중 하나이다. 
겸손한 풍경은 날씨와 조명의 가장 어려운 조건에서 묘사된다. 
묘사된 삶의 생동감은 사물의 정확한 묘사와 

세부 묘사 없이 자유로운 글쓰기 방식으로 대답된다. 
작가가 작은 그림으로 재창조한 소박한 모습은 자연 속에서 
끊임없이 순환하는 큰 법칙에 따라 살아가며 생명의 힘과 에너지를 보여준다.

 

 

View of the Volga. Barques, 1870. by Fyodor A. Vasilyev. oil on canvas. 67 x 10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0,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바실리예프는 러시아 미술에서 풍경 장르의 발전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그는 특정한 자연적 동기나 눈에 띄는 외모를 그다지 많이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삶,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종종 그는 비가 내린 후 뇌우나 깨달음이 있기 전에 자연의 힘의 긴장에 매료되었다. 
바실리예프는 누구누구처럼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예술의 높은 사회적 목적을 확신하고 그 강력하고 고상한 힘을 끝없이 믿었다.

일리야 레핀(I. E. Repin) 및 마카로프(E.K. Makarov)와 함께 볼가를 여행하는 동안 
만들어진 이 풍경은 바실리예프의 낭만적으로 열정적인 세계 인식을 증명한다. 
1860년대에서 1870년대까지 이 작품은 국가 경관을 묘사한 그림의 정점으로 판명되다.

“푸른 하늘은 수평선 근처에서 소용돌이 치는 구름으로 덮여 있습니다. 
고요하고 거울같은 물에 반사되는 뜨거운 저녁 빛이, 갈색의 새끼 사슴 빛을 띠는 
바지선의 반쯤 내려 앉은 돛, 뜨거운 해안 모래 위에 스며 들었습니다. 
진심 어린 느낌의 ... 그림은 긴장, 심지어 불안까지도 감추고 있습니다 ... 
그리고 들어온 뇌운에서 뿐만 아니라 그림의 전체 구조에서 느껴집니다"

1870년 겨울 바실리예프는 심한 감기에 걸렸고 소비 진단을 받았다.  
스트로가노프 백작의 초청으로 1871년 여름을 지방에 있는 자신의 영지에서 보냈지만 
바실리예프는 건강을 개선하지 못했다.
예술가 장려협회는 바실리예프에게 크리미아로 여행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했다. 
떠나기 전에 바실리예프는 예술 아카데미에서 1급 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바실리예프는 크리미아에서 2년을 보냈고 많은 그림 외에도
 "Swamp"와 "Crimean View"라는 두 개의 그림을 그렸으며, 
이로 인해 1872년 예술가 장려협회에서 상을 받았다.

 

 

[영상] Hall 20, Fyodor Vasilyev. The State Russian Museu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9, Ivan N. Kramskoy.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반 크람스코이(Ivan Nikolaevich Kramskoy 1837~1887)는 러시아의 화가이자 
미술 비평가이며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대표적인 미술그룹인 '이동파'의 창시자이다. 
그는 또한 예술아카데미의 교수로 일리야 레핀과 니콜라이 야로셴코 같은 
훌륭한 제자들을 키워낸 스승이기도 하다.

이반 크람스코이는 1837년 러시아 오스트로고쥬스크 시의회 서기의 아들로 태어났다. 
185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해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1863년 아카데미 졸업 작품 주제에 반발해 다른 13명의 학생들과 함께 

작품 주제 선정의 자유를 요구했다. 
그러나 그 요구가 받아 들여지지 않자 졸업 직전 아카데미에서 나왔다. 
스스로를 '14인의 반란자'라 칭하며 '페테르부르크 예술가 조직'을 결성한 이들은 
작업실과 주거지를 공유하는 공동체 생활에 들어갔다.

1870년 이반 크람스코이는 비평가 스타소프(V.V. Stasov)와 전격적인 합의로 
'러시아 이동 전시 협회'를 창립하였다. 
여기에는 일리야 레핀(Ilya Repine), 바실리 수리코프(Vasily Surikov), 

바실리 페로프(Vasily Perov), 이사크 레비탄(Isaak Levitan) 등 

19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러시아 화가들이 참여했다. 
이 그룹은 여러 도시를 이동하면서 전시회를 개최한다는 의미에서 

스스로 '이동파'라는 이름을 붙였다. 
몇몇 특수한 사람만을 위한 미술 전시회가 아닌 모든 사람이 함께 

미술품을 감상하고 즐기자는 취지로 거의 해마다 개최된 이 전시는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이후 러시아 미술의 성격을 결정적으로 규정지었다.

이반 크람스코이는 시대에 대한 의무와 정의감에 넘치는 인물들을 주로 그렸다. 
1873년에 발표한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초상화는 위대한 사상가의 결단과 
강인한 정신이 크람스코이 특유의 한색 계열의 색감으로 표현되었다. 
이 초상화가 그려질 당시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쓰고 있었고 
크람스코이를 모델로 미할코프라는 인물을 창조하였다. 
한편 크람스코이는 1883년 《미지의 여인》을 발표하는데, 
이 작품의 모델이 바로 톨스토이 소설의 주인공 안나 카레니나라는 설이 유력하다.

 

 

Portrait of Ivan I. Shishkin, 1880. by Ivan N. Kramskoy. oil on canvas. 115.5 x 83.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9,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초상화의 모델 이반 쉬스킨 (Ivan Ivanovich Shishkin 1832~1898)은 러시아의 풍경화가이다.
이반 쉬스킨은 1832년 러시아의 엘라부가에서 태어났다. 
1852년부터 1856년까지 모스크바 예술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이어 상트 페테르부르크 제국 예술아카데미 (Imperial Academy of Arts)에 입학해 
1860년 최고 영예의 금메달을 수상하며 학업을 마쳤다. 

이 때 그는 최고 성적을 받은 학생에게 주어지는 정부 장학금으로 
유럽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1862년부터 1866년까지 스위스의 취리히와 
독일의 뮌헨, 뒤셀도르프, 체코의 프라하 등지에서 공부했다.  

이반 쉬스킨은 귀국 후 모스크바의 예술가 모임에 참여했다. 
보수적인 아카데미 미술교육에 반대하는 젊은 화가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이 모임은 1870년 이동파로 발전했다. 
이동파는 러시아 전역을 돌며 순회 전시회를 갖는 미술계의 브나로드 운동으로, 
쉬스킨은 화가인 크람스코이와 비평가 스타소프 등과 함께 
이 운동의 창립 멤버이자 주요 인물이 되었다. 

쉬스킨은 러시아 미술에 '숲의 풍경'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숲의 황제', '고독한 참나무', '늙은 소나무' 등으로 불렀으며, 
쉬스킨이 그린 숲은 자연 그 자체이며, 삶의 원천으로서 
러시아 사람들에게 그들의 대지와 숲이 얼마나 장엄하고 위대하며 
아름다운지를 새롭게 일깨워 주었다. 
특히 그는 북러시아 곳곳을 돌아다니며 각 지역의 토속 식물들을 세심히 관찰하고, 
다양한 숲의 형태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애썼다. 

쉬스킨은 1873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왕립 아카데미의 교수로 취임해 
그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후학을 가르쳤다. 
하지만 개인적인 삶은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두 번 결혼을 했는데, 두 아내 모두 먼저 세상을 떠났다.  
첫 번째 부인은 그의 제자였던 화가 F. 바실리예프의 누이 엘레나로 1874년에 죽었고,  
두 번째 아내는 화가 올가 라고다였는데 역시 1881년 병으로 죽었다.  
1870년대 중반에 쉬스킨은 두 명의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아픔을 겪었지만  
작품에서 만큼은 슬픔을 드러내지 않았다. 

창작활동 초기에 열정적이었던 그는 그러한 아픔을 겪고 난 한 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기도만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말년의 20여 년은 창작에만 몰두,  
결국 자신의 화실에서 ‘숲 속의 왕국 (Forest kingdom)’이라는 작품을 그리다가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작품 속에는 찬란한 햇빛과 생명의 기운이 넘쳐 나며, 
젊고 강인한 러시아의 기질이 숨을 쉬는 듯하다. 
쉬스킨은 1898년 66세를 일기로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 초상화를 그린 이반 크람스코이(Ivan N. Kramskoy)는 
러시아 본성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평생을 바친 현실적인 풍경화의 가장 위대한 대가인
이반 쉬스킨의 초상화를 여러번 그렸다. 
크람스코이는 쉬스킨을 '러시아 풍경화의 길을 연 위대한 교사'라고 그를 칭송했다. 

 

 

Mina Moiseyev, 1882. by Ivan N. Kramskoy. oil on canvas. 56.5 x 4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9,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 초상화의 모델은 평범한 마을 주민 미나 모이세프(Mina Moiseev)였다.
미나 모이세프의 이 초상화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는 
이반 크람스코이(Ivan Nikolaevich Kramskoy)의 능력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농부의 모습에서 자유롭고 구속되지 않은 자세에서 내면의 평온함과 독립성이 느껴진다. 
주름진 노인의 얼굴은 인간의 따뜻함과 친절을 발산하며 지혜와 삶의 경험을 증언한다.

 

 

Portrait of Alexei Suvorin, 1881. by Ivan N. Kramskoy. oil on canvas. 108.5 x 88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9,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초상화의 모델 알렉세이 수보린 (Alexei Sergeevich Suvorin 1834~1912)은 
러시아 신문과 서적 출판사이자 언론인으로, 작가, 연극 평론가 및 극작가로 
러시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미술은 세계 미술사에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자기만의 색을 드러낸다. 
러시아 미술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이동파'가 등장한 것이다. 
이동파는 정치적 경제적으로는 후진국이면서도 정신적으로 이것을 극복하려고 했던 
지식인들 중심의 민주적인 미술 유파였다.

세계 미술사 곳곳에서 미술이 정치와 갈등을 일으킨 적은 있지만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반체제적 성격을 유지한 미술운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동파는 '삶의 진실'의 추구라는 러시아 미술의 전통을 극대화시켰다. 

이동파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 바로 이반 크람스코(Ivan N. Kramskoy)였다. 
크람스코이는 뛰어난 화가이자 탁월한 미술 비평가였으며, 
레핀과 야로센코와 같은 훌륭한 제자들을 키워 낸 

스승이자 이동파를 결성한 탁월한 조직가였다.

그는 19세기 후반기 러시아 문화계의 대표적인 민주 인사였다. 
지방 하급 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크람스코이는 귀족과 농민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직종의 중간 계급을 뜻하는 소위 잡계급 출신의 전형적인 러시아 인텔리겐챠였다. 

그의 활동과 작품은 당시의 '양심적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 준다. 
젊은 시절의 자신을 그린 자화상은 이런 사회적 책임 의식에 가득찬 지식인 
크람스코이의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 준다. 

인텔리겐치아는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책무에 충실하기 위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고 헌신적으로 만연한 사회악과의 고독한 싸움을 수행해 나갔다. 
크람스코이가 남긴 여러 그림에는 이런 지식인적 책무에 충실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크람스코이가 지식인으로서, 또 화가로서 러시아 미술계에 미친 영향은 막대하다. 

사건은 1863년 크람스코이가 상트 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직전에 시작된다. 
아카데미 졸업 작품 주제로 얼마 전 일어났던 농노 해방이 선정되었다. 
그러나 이 불완전한 농노 해방은 더 큰 불안 요인이 되어 사회를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그런데 정부에서 이 주제를 학생들에게 그리라고 하는 것은 

차르의 치적을 찬양하라는 의도였다. 
크람스코이를 포함한 열 네 명의 학생들은 이에 반발해 
졸업 작품 주제 선정의 자유를 요구하며, 졸업 직전 집단 자퇴를 한다. 
화가로서의 안정적인 길을 포기한 이 겁 없는 젊은이들은 

스스로를 '14인의 반란자'라고 불렀다. 

아카데미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예술 아카데미의 교수이며 레핀의 스승이었던 크람스코이는 
러시아 미술계의 방향을 틀은 ‘14인의 반란'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예술아카데미의 정형화된 교육에 반대하여 몇몇의 

뜻있는 화가들과 결합하여 자신들만의 전시회를 열고 이로부터 이동파, 

방랑자파 등의 러시아의 새로운 화파가 등장하게 된다.

14인의 반란자들은 작업실과 주거지를 공유하는 생활 공동체 

'페테르부르크 예술가 조직'을 결성한다. 
이것은 1863년에 발표되어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체르니세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제시한 이상적인 생활 공동체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또 이런 생활 공동체에 관한 생각은 러시아 전역을 포괄하는 전시 공동체인 
이동파의 탄생을 예감하게 하는 것이었다.

1860년대 러시아 화가들은 광범위한 활동을 통해 
보다 조직적인 단체를 결성할 수 있을 만큼 세력을 키워 갔다.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던 바실리 페로프를 중심으로 한 여섯 명의 화가들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화가들 사이에 공동체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1870년 크람스코이와 비평가 스타소프의(V. V. Stasov) 전격적인 합의로 
'이동 전시협회'를 결성함으로서 마침내 미술사에 '이동파'라는 이름이 등장하게 된다. 

이동파의 목표는
첫째, 러시아의 모든 사람들에게 동시대 예술 작품의 감상 기회를 주는 것,
둘째, 러시아 사회에 대한 애정을 함양하는 것,
셋째, 작품 판매를 보다 용이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즉 한편으로는 미술계의 민주화를 추구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관과 중앙 귀족들에게 국한되어 있던 

컬렉터 층을 확보해 작가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려는 의도였다. 
여러 도시로 이동해 가며 전시회를 개최한다는 의미에서 '이동파'라는 이름을 붙였다.

특수한 몇몇 사람이 아니라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전시회를 볼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미술계 브나르도 ('민중 속으로'라는 뜻의 러시아 말) 운동이었다. 
거의 해마다 개최된 이 전시들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이후 러시아 미술의 성격을 결정적으로 규정지었다.

반면 아카데미 미술은 급격히 쇠퇴해 갔다. 
위기감을 느낀 아카데미가 1893년 거장 레핀을 교수로 영입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이동파는 재야 조직으로서의 의미가 다소 퇴색하기는 했지만, 
1923년 마지막 전시를 갖고 혁명 정부 하에서 조직 개편을 위해 해체되기까지 
무려 52년간 존속했던, 세계 미술사상 유래 없이 장수한 화가 그룹이었다.

 

 

Portrait of the Sculptor Mark Matveevich Antokolsky, 1876.
by Ivan N. Kramskoy. oil on canvas. 108.5 x 88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9,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초상화의 모델 마크 안토콜스키 (Mark Matveyevich Antokolsky 1842~1902)는 
리투아니아 유대인 혈통의 러시아 제국 조각가였다.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제국 예술아카데미(Imperial Academy of Arts)에서 공부했다. 
마크 안토콜스키는 처음에 "유대인 재단사", "현명한 나단", "유대인에 대한 종교 재판소의 공격",
 "탈무드 토론"과 같은 유대인 주제, 조각상으로 시작했다.
젊은 조각가의 작품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아카데미에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1868년부터 1870년까지 마크 안토콜스키는 베를린에 살았다. 
1871년 안토콜스키는 그의 첫 번째 '러시아' 조각작품인 "이반 4세(Ivan the Terrible)"로
모든 평가자와 예술 감정가들에게 엄청난 인상을 남겼다. 
알렉산더 2세 황제가 이 조각품을 보았을 때 그는 청동 사본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고 
안토콜스키에게 4,000루블의 선불금을 할당했다. 
파벨 트레치야코프(Pavel Tretyakov) 또한 자신의 갤러리를 위해 대리석 사본을 주문했다. 
이렇게 해서 받은 자금으로 안토콜스키는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1871년 안토콜스키는 부유한 빌니우스(Vilnius) 상인의 딸인 
옐레나(Jelena Gene)를 만나 1872년 9월 6일에 결혼했다.

안토콜스키는 조각이 사회적이고 인간적인 이상이라고 믿었다. 
그는 쇠약해진 건강을 개선하기 위해 1871년 이탈리아 

휴양지로 이주하여 6년 후 파리에 정착했다.
만성 위병이 심해지면서 안토콜스키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안토콜스키는 특별한 마차가 달린 기차로 빌니우스를 경유하여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프레오브레젠스코이(Preobrazhenskoye) 묘지의 유대인 지역에 묻혔다. 
그의 무덤과 묘비는 입구 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여전히 찾을 수 있다.

 

 

Portrait of Vladimir Solovyov, 1885. by Ivan N. Kramskoy. oil on canvas. 113 x 94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9,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초상화의 모델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 (Vladimir Sergeevich Soloviev 1853~1900)는 
러시아의 철학자, 신학자, 시인, 팸플릿 및 문학 비평가로 19세기 말 러시아의 
철학과 시의 발전과 20세기 초의 영적 르네상스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역사가 세르게이 미카일로비치 솔로비요프 (Sergey Mikhaylovich Solovyov 1820~1879)의 
아들이자 역사 소설가 브세볼로드 솔로비요프 (Vsevolod Solovyov 1849~1903)와 
시인 폴리세나 솔로비요바 (Polyxena Solovyova 1867~1924)의 형제로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폴리세나 블라디미로브나(Polyxena Vladimirovna)는 폴란드계 가족에 속했으며 
그녀의 조상 중에는 사상가인 그레고리 스코보로다(Gregory Skovoroda 1722~1794)가 있었다. 

 

 

Inconsolable grief. 위로할 수 없는 슬픔. by Ivan N. Kramskoy. oil on canvas.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9,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여인은 누구를 떠나보낸 것일까.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저만큼 깊은 상처를 준 것이라면 
아무래도 남편이나 부모 보다는 자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아이를 길러본 사람은 그 의미를 안다. 
게다가 당시 러시아 귀족사회에 만연해있던 외도와 스캔들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뒤에 찾아본 자료에 따르면 역시 이 작품은 자식을 잃은 크람스코이의 아내를 그린 것이었다.    

모스크바의 트레차코프 갤러리에도 <위로할 수 없는 슬픔>의 다른 버전이 전시되어 있다. 
이만한 그림이라면 아마도 더 많은 에튀드(습작)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걸작의 에튀드들을 보노라면, 우리가 찬탄하는 최종작품이 나오기까지
작가가 어떤 고심을 했는지를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작품에 대해 가졌던 신비감이 어째 덜해지는 부작용도 있는 것 같다. 
세상의 좋고 싫은 것들은 그처럼 양날의 칼인 경우가 많다. 

 

 

Portrait of Ekaterina Kornilova. 1880. by Ivan N. Kramskoy. oil on canvas.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9,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러시아의 국민화가 일리야 레핀 평생의 스승인 이반 크람스코이는 
러시아 사실주의 발전의 공로자이고 이동파 결성의 주역이다.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은 문학과 음악 분야뿐만 아니라 회화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대부분이 수도사인 정교회의 이콘 화가들을 제외하고, 서구 화풍의 영향을 받은 
러시아의 근대 화가들은 주로 황실에 소속되어 황제 일가나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사실주의적인 세계관의 영향을 받아 민중들의 
일상적 삶의 풍경이나 러시아 역사를 주제로 한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1860년대에 들어와 인텔리겐치야들의 영향을 받은 바실리 페로프와 같은 
화가들은 술을 마신 성직자나 마을의 어린이, 장례식 등과 같은 
러시아 민중들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들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
러시아 민중들의 정서를 반영하는 사실주의 화풍은 1870년대에 들어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반 크람스코이의 주도로 결성된 이동파가 그것이다.

이동파 화가들 사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던 크람스코이는 
인물의 외면적인 모습만을 재현하는 초상화 기법과 아카데미즘 화풍의 
구태의연한 기법에서 벗어나 러시아 민중들에게 역사적이고 종교적인 주제들을 선보였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9,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Portrait of Sophia Kramskaya, the Artist's Daughter. 1882. by Ivan N. Kramskoy. oil on canvas. 
118 X 70.1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9,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초상화의 모델 소피아 이바노브나 크람스카야(Sophia Ivanovna Kramskaya 1866~1933)는
이반 크람스코이의 딸이자 러시아 화가였다.
그녀는 1916년에 사망한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변호사 게오르그 준케르(George Junker)와 결혼했다. 
그녀는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열린 1893년 세계 컬럼비아 박람회에서 작품을 전시했다. 
소피아 크람스카야는 반혁명적 선전을 위해 시베리아에서 수년간 망명 생활을 했다. 
크람스카야는 1933년에 사망했다. 

 

 

Insulted Jewish Boy. 유대인 소년. 1874. by Ivan N. Kramskoy. oil on canvas.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9,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크람스코이는 특이하게도 누군가 유대인 소년을 모욕한 장면을 그리고 있다. 
소년은 상대방에게 뭔가 대꾸를 하지 않지만 그의 눈빛에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다.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상대방을 응시하는 눈빛 속에서 

소년은 자신의 세계관을 만들어갈 것이다. 


소년은 어쩌면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할지도 모른다. 
소년은 말이 없고 자존심이 강할 것이다. 
소년은 오랫동안 눈물을 참을 것이다. 
나중에 한꺼번에 폭발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편견이 소년의 인격의 상당 부분을 만들어간다. 
그것을 어떻게 소화할지는 오로지 소년의 몫으로 남겨진다. 
누군가를 모욕하고 모멸감을 안겨준다는 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멸시당한 소년은 벌써 그 나이에 인생의 쓰라림과 진실을 알아가고 있을 것이다. 

 

 

Portrait of the Photographer Andrey Denier. 1883. by Ivan N. Kramskoy. oil on canvas.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9,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초상화 모델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데니어 (Andrey Ivanovich Denyer 1820~1892)는 
러시아 인물 사진가이자 예술가였다.
그는 스위스에서 온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안드레이 데니어는 제국 예술아카데미(Imperial Academy of Fine Arts)에 입학하여 
칼 브률로프(Karl Bryullov)의 지도 아래 역사 회화를 공부했다. 
그동안 그는 또한 새로운 사진 예술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1849년 그는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2년 후 그는 이미 유리판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작은 은판 사진(daguerreotype) 스튜디오를 열었다. 
1854년에 안드레이 데니어는 넵스키 대로에 더 큰 스튜디오로 옮길 수 있었다. 
그는 수채화 강화 사진을 실험하면서 경쟁에서 눈에 띄기 위해 
"아티스트 스튜디오"라고 광고했으며 러시아에서 콜로디온 프로세스를 사용한 
최초의 사진 작가 중 한 명이었다.

1860년에 안드레이 데니어는 "황제의 폐하 사진 작가"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이를 통해 간판에 국가 상징을 붙일 수 있었다. 
3년 후, 그는 더 큰 스튜디오로 옮겨 죽을 때까지 운영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수많은 국내 및 국제 전시회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865년에는 사진 작가 소시에테 프랑세즈(Société française)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반 크람스코이(Ivan Kramskoi)와 미하일 툴리노프(Mikhail Tulinov)를 포함하여 
나중에 유명해 질 몇몇 예술가와 사진가들이 그의 스튜디오에서 교정일을 했다. 

안드레이 데니어는 1872년 폴리테크닉 전시회(Polytechnic Exhibition)에서 
사진관을 조직하는 데 도움을 준 공로로 큰 금메달을 수상했다. 
그는 1890년에 은퇴하고 같은 해 러시아 시민이 되었다. 
그는 2년 후 72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볼코보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영상]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9, Kramskoy. The State Russian Museu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7, Orest A. Kiprensky.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오레스트 키프렌스키 (Orest Adamovich Kiprensky 1782~1836)는 
낭만주의 시대 러시아의 주요 초상화가였다. 
그의 가장 친숙한 작품은 아마도 알렉산더 푸쉬킨 (1827)의 초상화로 
푸쉬킨은 "거울이 나를 아첨한다"고 언급하게 만들었다.

오레스트 키프렌스키는 아담 슈발베(Adam Shvalbe)의 농노로 태어났지만 
출생하자마자 농노에서 풀려났고 양아들이 되었다. 
나중에 그의 양아버지는 1788년 오레스트가 겨우 6살이었을 때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제국 예술아카데미(Imperial Academy of Arts)의 기숙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도왔다.

키프렌스키는 1803년까지 기숙학교와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그는 메이저 금메달을 획득하는 데 필요한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연금 수급자로 3년 더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키프렌스키는 유럽에서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해외로 나갈 수 있었다.

졸업 1년 전인 1804년에 그는 그의 양아버지인 아담 슈발베의 
초상화를 그렸고 이 작품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초상화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 후 키프렌스키는 1809년 모스크바, 1811년 트베리(Tver), 

1812년 상트 페테르부르그에서 살았다.
1816~1822년에는 로마와 나폴리에 살았다. 
그는 이탈리아 지방의 어려운 가정의 소녀 안나 마리아를 데려와서 고용했다.
이탈리아를 떠날 때 그는 그녀를 로마 가톨릭 수녀원으로 보냈다.

그 후 이탈리아로 다시 돌아왔을 때 키프렌스키는 안나 마리아가 
다른 수녀원으로 옮겨진 것을 알고 그녀를 찾아 1836년에 결국 그녀와 결혼했다. 
그는 이 결혼을 위해 러시아 정교회에서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해야 했다. 
키프렌스키는 그해 말 로마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는 센트안드레아 델 프래트(Sant'Andrea delle Fratte) 교회에 묻혔다.

 

Portrait of Life Guard Colonel Evgraf Davydov, 1809. by Orest A. Kiprensky. oil on canvas. 
162 x 116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7,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작품의 모델 에브그라프 블라디미로비치 다비도프 (Evgraf Vladimirovich Davydov 1775~1823)는 
모스크바 남쪽에 위치한 툴라 고버노레이트(Tula Governorate)의 러시아 귀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다비도프는 1791년 16세의 나이로 표트르 대제 통치 때 설립된 
라이프 가드 기병연대 (Life Guard Horse Regiment)의 워치 마스터 (Wachtmeister)가 되었다. 

1803년 4월 12일, 다비도프는 대령( polkovnik )으로 승진했으며 
1805년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전투에 참여해 싸웠다. 
2년 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으로 4차 연합전쟁 중, 

다비도프는 거트시타트 데펜(Guttstadt-Deppen) 전투, 
하일버그(Heislberg) 전투 및 프리드랜드(Friedland)의 전투에서 싸웠다. 
훗날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에브그라프 다비도프는 심한 부상을 입고 
오른쪽 팔과 왼쪽 다리를 잃었다. 

오레스트 키프렌스키(Orest A. Kiprensky)의 이 작품에서 다비도프는 
세이버의 칼자루에 손을 대고 자랑스럽게 자유로운 자세로 서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용감하고 동시에 꿈꾸는 전사의 영성은 반 어둠의 낭만적인 분위기에 의해 
강화되고 빛의 활공 지점이 스며든다. 
밝고 우아한 색상 조합은 초상화를 화려하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이 에너지와 내면의 존엄성으로 가득 찬 이미지를 만든다. 

 

Portrait of Ekaterina Avdulina, 1822~1823. by Orest A. Kiprensky. oil on canvas. 81 x 64.3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7,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 초상화의 모델 예카테리나 세르게브나 아브둘리나 (Ekaterina Sergeevna Avdulina 1788~1832)는 
전체 주의원의 딸이자 여러 명령을 보유한 라이프 가드 기병연대(Life Guards Cavalry Regiment) 
야코블레바(Yakovleva) 소장의 아내였다. 

이 초상화는 오레스트 키프렌스키(Orest A. Kiprensky)의 첫 번째 해외 유학 중 완성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파리에서 만들어졌는데 루브르 박물관 모나리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고

19세기 상반기 러시아 미술에서 가장 뛰어난 이미지 중 하나로 평가된다. 
하지만 동시대 사람들은 세부 사항을 마무리하는 탁월한 기술에 주목했다. 

얼굴, 목, 손의 아름답게 옮겨진 얇은 피부, 어깨에 걸친 목도리 패턴, 
손의 목걸이와 팔찌, 그리고 손에 정맥이 보이는 등 표현력이 매우 풍부한 모습은 
이 작품에서 무의식적으로 주의를 분산시킨다. 

모델의 영혼이 가득한 외모, 섬세한 특징을 지닌 병든 얼굴, 
창에 희미해지는 깨지기 쉬운 히아신스, 캔버스의 전체 예술적 구조의 정교함으로 인해 
동시대 사람들은 그를 레오나드로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작품과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몽환적인 슬픔이 가득한 이 초상화는 작가의 전성기를 상징한다. 
이 초상화는 푸쉬킨(A.S. Pushkin)의 유명한 초상화와 함께 
오레스트 키프렌스키의 예술을 대표하는 작품에 속한다.

 

Vorozheya with a candle, 1830. by Orest A. Kiprensky. oil on canvas. 64 x 51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7,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오레스트 키프렌스키는 같은 해 "시빌 티부르틴(Sibyl Tiburtina)"의 그림을 위한 
일종의 준비 스케치로 나폴리에서 이 그림을 그렸다. 
키프렌스키는 그의 편지 중 하나에서 
"불로 페인트와 조명을 잘 배우기 위해 에튜드 대신 촛불을 미리 사용했습니다." 라고 썼다. 
또 다른 편지에서 그는 이 그림을 "촛불을 든 젊은 집시 여인"이라고 불렀다. 

 

Young Gardener, 1817. by Orest A. Kiprensky. oil on canvas. 62 x 49.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7,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 초상화는 로마에서 그려져 상트 페테르부르크 
엘리자베스 알렉세예브나(Elizabeth Alexeevna) 황후에게 보내졌다. 
"젊은 정원사(Young Gardener)"는 의심할 여지없이 옛 거장들의 
작품의 영향을 받아 예술가의 태도 변화를 증언한다. 
오레스트 키프렌스키 자신은 그가 첫 번째 영감을 받은 인물로 라파엘(Raphael)을 꼽았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유럽의 낭만주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밀스러운 개인적 경험과 감성에 접한 로맨틱한 분위기가 있다.

 

Portrait of Aleksey I. Korsakov, 1808. by Orest A. Kiprensky. oil on canvas. 64 x 5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7,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초상화의 모델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코르사코프 (Aleksey Ivanovich Korsakov 1751~1821)는
러시아 군 포병의 관리자, 상원 의원을 역임했다. 
그는 14세기부터 노브고로드(Novgorod)의 명문 귀족 출신이다.

코르사코프는 1780년대에 그림과 조각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꽃이 있는 마돈나"와 "영원한 아이를 가진 신의 어머니" 등은
그가 수집한 작품들이었고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박물관, 
에르미타주, 모스크바의 푸쉬킨 미술관 등등에 그의 컬렉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7, Orest A. Kiprensky.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Portrait of B. Thorvaldsen, 1833. by Orest A. Kiprensky. oil on canvas. 79.5 x 6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7,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초상화의 모델 베르텔 토르발센 (Bertel Albert Thorvaldsen 1770~1844)은 

덴마크의 조각가이자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메달리스트로, 

그의 생애 대부분을 이탈리아에서 보냈다. 
토르발센은 코펜하겐에서 덴마크와 아이슬란드 노동계급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11세에 덴마크 왕립 예술 아카데미에 합격했다. 
나무 조각가였던 아버지와 시간제로 일하면서 토르발센은 

아카데미에서 많은 영예와 메달을 받았다. 
그는 로마를 여행하고 교육을 계속할 수 있는 급여를 받았다.

로마에서 토르발센은 조각가라는 이름을 부여 받았다. 
도시에서 대규모 작업장을 유지하면서 그는 신고전주의 스타일로 일했다. 
그의 후원자는 유럽 전역에 거주했다. 
1838년 덴마크로 돌아온 토르발센은 국민적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1820년대 초, 알렉산더 1세 황제의 흉상을 만든 조각가 

토르발센은 러시아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1830년대 초, 오레스트 키프렌스키 (Orest Adamovich Kiprensky)가 
그의 초상화를 작업할 때 토르발센은 이미 유명한 학문적 고전주의 책임자이자 
로마와 코펜하겐 아카데미 (Roman and Copenhagen Academy)의 회장이었다. 

초상화는 이미 경험이 풍부한 화가의 손에 의해 실행되었다. 
베르텔 토르발센의 얼굴은 아름답게 조각되고 날카로운 회전은 

자연의 에너지를 강조하며 망토의 넓은 주름은 토르발센의 모습에 기념비적이다.

 

Portrait of Count Grigory G. Kushelev, 1827. by Orest A. Kiprensky. oil on canvas. 126 x 98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7,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초상화의 모델 그리고리 쿠셀레브 (Grigory Grigorievich Kushelev 1754~1833) 백작은 
러시아 정치 및 군사 지도자, 제독으로 폴 1세 (Paul I) 통치 기간 동안 
그는 러시아 함대의 실제 지도력을 수행했다. 

1799년에 그리고리 쿠셀레브는 백작으로 승격되었으며 
폴 1세로부터 광범위한 토지를 하사 받았다. 
45세 홀아비였던 쿠셀레브는 당시 러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신부였던 16세의
류보프 일리니히나 베즈보로드코 (Ilyinichna Kusheleva Bezborodko 1783~1809) 백작과 
1799년 두 번째 결혼 이후 재산이 급격히 증가했다. 

1799년에 사망한 그녀의 삼촌인 베즈보로드코(A. A. Bezborodko) 왕자로부터 
상속받은 몫의 동산 및 부동산은 자본을 제외하고 천만 루블 이상으로 추정되었다.
이 불평등한 결혼은 백작 자바도프스키(Zavadovsky)에 의해

마련되었고 신부는 기꺼이 결혼에 응했다고 한다.

폴 1세(Paul I)는 쿠셀레브의 결혼에 대해 극도로 불만족스러워서 그를 탐욕으로 의심했다. 
황제에 대한 이러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1800년 쿠셀레브는 
물 통신 및 도로 부서의 수석 이사로 임명되었다.
쿠셀레프는 알렉산더 1세가 왕좌에 오른 직후 업무에서 제거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은퇴 후 그는 그의 아내가 아이들과 함께 살았던 상트 페테르부르크 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프스코프 영지에서 살았지만 거의 방문하지 않았다. 

 

Portrait of Alexei R. Tomilov, 1808. by Orest A. Kiprensky. oil on canvas. 68 x 55.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7,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수집가이자 예술 애호가인 알렉세이 토밀로프 (Alexei Romanovich Tomilov 1779~1848)의 
진지한 26세 청년의 초상화는 세련되고 절제된 우아함으로 밝은 얼굴에 초점을 맞춘다.
포병 장교 출신인 알렉세이 토밀로프는 러시아와 서유럽의 

회화 및 그래픽 작품을 대규모로 수집했다. 
그는 장군이자 상원의원이었던 로만 토밀로프

(Roman Nikiforovich Tomilov 1741~1796 )의 아들로 태어났다. 

1791년에 알렉세이 토밀로프는 아버지의 부관으로서 엔지니어 대장의 지위로 복무했다. 
1799년에 그는 크론슈타트에서 농노 작업을 지휘했다. 
그는 1808년에 병역을 떠났지만 1812년에는 대령으로 상트 페테르부르크 
민병대에 합류했고 폴로츠크를 점령하는 동안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그는 미술에 전념했고 그의 집은 

예술가, 문학가 및 음악가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그는 예술가 장려협회의 창립자이자 위원회의 영구 회원이 되었다.

알렉세이 토밀로프와 오레스트 키프렌스키의 오랜 우정은 

작가가 수행한 초상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처음에는 예술 애호가이자 수집가인 알렉세이 토밀로프, 나중에는 그의 딸 
알렉산드라 토밀로바 (Alexandra Alekseevna Tomilova 1815~1878)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런 다음 컬렉션은 20세기 초 러시아 박물관에 많은 전시회를 기증한 
예브게니 쉬와르츠(Evgeny Grigorievich Schwartz)에 의해 상속되었다. 

 

Dmitry Donskoy on the Kulikovo field, 1805. by Orest A. Kiprensky. oil on canvas. 118 x 167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7,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프린스 디미트리 이바노비치(Prince Dimitri Ivanovich 1350-1389)는

1359년 이후 모스크바를 통치했다. 
그는 칸 마마이(Khan Mamai)의 타타르(Tatar) 무리와 싸우기 위해 러시아 병사들을 연합했다. 
1380년 9월 8일, 타타르 족은 쿨리코보(Kulikovo) 필드 전투에서 압도적인 패배를 겪었으며 
드미트리 이바노비치는 '돈스코이(Donskoy)'라는 명예 별명을 받았다. 

디미트리 왕자가 이끄는 10만 명의 병사들이 적을 만나기 위해 크렘린 성문을 떠났다. 
그들은 쿨리코보(Kulikovo) 필드에서 영웅적으로 싸웠다. 
왕자는 단순한 전사처럼 전투에 뛰어 들어 군대의 사기를 올렸다. 
손실은 엄청났지만 전투에서 승리했다. 
드미트리 돈스코이(Dmitry Donskoy)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이 작품은 "마마이(Mamai)를 제압한 후 남은 러시아 왕자와 다른 병사들이 마침내 
숨을 거둘 뻔한 상황에서 그를 발견할 때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를 소개하는 작업"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실행되었다.
1805년 이 이 작품으로 오레스트 키프렌스키는 첫 번째 가치의 금메달을 받았다.

 

[영상]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7, Orest Kiprensky, The State Russian Museu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8, Schwartz, Chistyakov, Jacobi.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Grand Duchess Sophia Vitovtovna at the wedding of Grand Duke Vasily the Dark in 1433 tears off 
the belt from Prince Vasily the Slanting, 1861. by Pavel P. Chistyakov. oil on canvas . 147.5 x 201.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8,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 작품의 제목은 "1433년 장님 바실리의 결혼식에서 리투아니아의 소피아가 바실리 코소이의
눈물을 닦아준 허리띠는 바실리의 조부 드미트리 돈스코이 바실리의 조부의 것이었다." 이다. 

소피아(Sophia Vitovtovna 1371~1453)는 리투아니아의 대왕 비타우타스(Vytautas)의 
무남독녀로 러시아 드미트리 돈스코이(Dmitry Donskoy 1350~1389)의 아들 
바실리 1세 (Vasily I Dmitrievich 1371~1425)와 결혼하였고 바실리 1세가 죽자 
10세인 어린 아들 바실리 2세 (Vasily II Vasilievich 1415~1462)의 

섭정으로 가장 오랫동안 봉사한 배우자였다. 
바실리 2세는 전투 도중에 시력을 잃어 장님 바실리 2세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작품은 이반 3세(Ivan III 1440~1505)의 아버지 

바실리 2세의 비극적인 운명과 관련된 그림이다.
리투아니아 대공의 딸이자 모스크바 대공의 아내인 소피아와 
드미트리 돈스코이의 아들인 바실리 1세는 강한 의지와 결단력 있는 성격으로 구별되었다. 
1425년 남편이 사망한 후 아들 바실리 2세의 후견인이 된 그녀는 국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433년 보롭스크의 마리아 야로슬라브나 (Maria Yaroslavna 1418~1484)와
바실리 2세의 결혼식이 모스크바에서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축하 행사의 실제 호스트는 신랑의 어머니인 소피아(Sophia Vitovtovna)였으며 
그의 사촌인 바실리 코소이(Vasily Kosoy)와 드미트리 세미야카(Dmitry Shemyaka)는 
가장 중요한 손님으로 초대받고 활동했다. 
그들의 아버지인 유리(Yuri Dmitrievich 1374~1434)는 

비록 신부의 삼촌이었지만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했다. 

한편 모스크바에서는 축하 행사가 한창 진행되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결혼식 잔치가 시작되었다. 
소피아는 이 결혼식에서 즈베니고로드(Zvenigorod)의 유리(Yuri Dmitrievich 1374~1434) 

왕자가 보석 금 벨트를 착용하고 결혼식에 왔다고 통보 받았다. 
모스크바 왕가에 속한 이 벨트는 한때 도난당했다. 

잠시 후 소피아는 바실리 코소이에게 뛰어 올라 주변 사람들 앞에서 귀중한 벨트를 찢었다. 
그로인해 모스크바와 즈베니고로드 왕자 가족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유리(Yuri Dmitrievich)는 바실리 2세를 두 번 물리치고 모스크바를 두 번 점령했다. 
그는 또한 1434년 6월 대공으로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사촌 바실리 코소이(Vasily Kosoy)는 1436년 5월 
체레카(Cherekha) 강에서의 전투에서 패배할 때까지 계속 싸웠다.
  
피비린내 나는 내전과 폭력으로 얼룩지는 동안 바실리 유리에비치(Vasily Yuryevich)는 
1434년 바실리 2세의 명령으로 눈이 멀게 되었다. 
바실리 코소이(Vasily the Kosoy)의 친척들은 1446년에 복수로 불타오르고 
바실리 2세를 붙잡아 눈을 멀게했고, 이후 바실리 2세는 장님이 되었다.

그랜드 금메달을 위한 학술 프로그램으로 작성된 화가의 이 작품은 
이미지의 심리적 발전으로 바뀌고 낭만주의 시대의 전통적인 병상에서 벗어나는 
역사적 장르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파벨 치스차코프 (Pavel Petrovich Chistyakov 1832~1919)는 

러시아 제국의 화가이자 미술 교사였다. 
역사 및 장르 장면과 초상화로 유명하다.
그의 아버지는 부동산 관리자로 일했던 해방된 농노였다. 
재정적인 부담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들이 적절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처음에는 크라스니 콜름(Krasny Kholm)의 교구 학교에서, 
그 다음 베제츠크(Bezhetsk)의 중등 학교에서 공부하게 했다.

1849년 파벨 치스차코프는 제국 예술아카데미(Imperial Academy of Arts)에 

입학하여 표트르 바신(Pyotr Basin 1793~1877)과 

막심 보로비에프(Maxim Vorobiev 1787~1855)와 함께 공부했다. 
1854년부터 1858년까지 파벨 치스차코프는 감옥에 있는 모스크바의 총 대주교 
헤르모게네스(Hermogenes)를 묘사한 공로로 은메달 2개와 금메달 1개를 받았다.
 
1861년 그는 이 작품 "...아들 바실리 2세의 결혼식에서 리투아니아의 소피아 그림.."으로 
또다른 금메달과 "예술가"라는 칭호와 유학비를 받을 수 있는 권리로 졸업했다. 
유럽으로 떠나기 전에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예비 학교에서 잠시 가르쳤다.

1862년에 그는 독일로 향한 후 파리와 로마를 오랫동안 방문했다. 
1870년에 돌아온 그는 집으로 보낸 여러 작품으로 "학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시간이 지난 후 그는 주로 제국 예술장려협회에서 가르치는 데 전념했고, 
그 다음에는 아카데미에서 직접 관찰과 과학 연구를 결합한 자신의 교수 방법을 개발했다. 
그의 몇몇 작품은 대부분 역사적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사건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깊이를 불어 넣으려고 했다.

그는 1872년에 아카데미의 부교수가 되었고 

1892년에 개편된 후 학술위원회의 위원이 되었다. 
1890년부터 1912년까지 그는 모자이크 부서장을 역임했으며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과 성 이삭 대성당 등에서 여러 모자이크 프로젝트를 감독했다. 

화가 예고르 마이어(Yegor Meyer 1823~1867)의 딸인 

그의 아내 베라(Vera)도 주목할만한 예술가였다. 
그가 살았던 거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1987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교외에 있는 그의 집은 박물관이 되었다.

 

Giovannina, Sitting on the Windowsill, 1864. by Pavel P. Chistyakov. oil on canvas. 147.5 x 201.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파벨 치스차코프 (Pavel Petrovich Chistyakov 1832~1919)의 작품으로
열린 창문에서 보이는 파노라마 풍경을 배경으로 이탈리아에서 그린 이 초상화는 
19세기 중반 예술적으로 뛰어나고 웅장하며 모델 해석에 있어 매우 혁신적이다. 
비정상적으로 가로로 길쭉한 캔버스 형식을 선택해도 눈에 띄는 전체 주제와 환경,
작품은 또한 놀랍도록 미묘하고 서정적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Peter the Great Visiting the Marquise de Maintenon in 1717, 1887. 
by Konstantin N. Gorsky. oil on canvas. 70 х 92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8,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피터 1세가 1717년 마담 멘테논을 방문하다"
이 작품은 알렉산더 3세 황제의 명령에 따라 파리의 예술가가 그렸으며 
1717년 두 번째 해외 여행 중 표트르 대제가 프랑스 수도에 머물렀던 일화 중 하나를 묘사한다. 
도시의 명소를 방문하는 동안 표트르 대제는 루이 14세의 모그나틱(morganatic) 아내인 
마담 멘테논(Marquise de Maintenon)이 설립한 유명한 여학교 "Françoise d' Aubigny"를 방문했다. 

표트르 대제는 이 모범적인 교육 기관의 교실을 답사한 후, 존경심을 느꼈던 
루이 14 세의 "위대한 세기"의 살아 있는 표상인 마담 멘테논을 만나 보기로 결정했다. 
미지의 저돌적인 통치자와의 만남을 두려워한 멘테논은 아프다고 거절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실례를 무릅쓰고 표트르 대제는 허락없이 그녀의 방에 들어가
침대 옆의 커튼을 들어 올리고 병든 것 같은 여자를 바라 보았다.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고르스키(Konstantin Nikolayevich Gorsky 1854-1943)는 
1876​년부터 1881년까지 제국 예술아카데미 학생으로 은메달과 금메달을 받고 졸업했다. 
1881~1886년에 그는 아카데미의 연금 수령자로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를 유학했다. 
그후 스트로가노프(Stroganov) 예술 및 산업 대학 (1902~1943), 
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 (1896~1917), 모스크바 토목공학연구소 (1930~1943)에서 가르쳤다.

 

Ivan the Terrible shows the treasures to the British Ambassador Horsey, 1875. 
by Alexander Litovchenko. oil on canvas. 153 x 236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8,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알렉산더 리토브첸코 (Alexander Litovchenko 1835~1890)는 
16세기와 17세기 러시아의 모스크바 대공국을 전문으로 묘사한 러시아 화가였다.
리토브첸코는 제국 예술아카데미(Imperial Academy of Arts)에서 공부했으며 
다른 여러 젊은 화가들과 함께 아카데미에서 

널리 퍼진 학업 정신에 도전했고 금메달을 받았다.
1863년 프리랜서 화가가 되었고 1876년 이동파의 전신인 러시아 현실주의 

예술가 그룹 페레드비즈니키(Peredvizhniki) 운동에 합류했다.

이 작품 "영국 대사 제롬 호시에게 보물을 보여주는 이반 4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더 3세(Alexander III) 박물관을 위해 황제가 구매했으며 
차르 알렉시스(Tsar Alexis)와 니콘(Nikon) 대주교, 필립 총 대주교 유물을 숭배하는 
니콘(Nikon 1886)은 파벨 트레티야코프가 구입했다.  
리토브첸코는 또한 모스크바의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에 있는 7개의 벽화와 
세바스토폴의 크림 전쟁 기념관 아이콘 세트의 저자로 기억되고 있다.

 

Ice House, 1878. by Valery I. Jacobi. oil on canvas. 133.5 x 216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8,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아이스 하우스(Ice House)는 1740년에 알렉세이 타티시체프(Alexey Danilovich Tatishchev 1697~1760)가 
안나 이오안노브나(Anna Ioannovna) 황후를 위해 건축한 것이다.
안나 이오안노브나는 이반 5세의 딸이었다. 
이반 5세는 유명한 표트르 대제의 형이었으나 정신적으로 불안정했기 때문에 
공동 통치를 했고, 얼마 후 사망하면서 표트르 대제가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표트르 대제도 아주 흥미진진한 황제이지만 현시점에서 문제는 
표트르 대제의 왕위를 이어받을 유일한 손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 
이제 후계자는 공주들만 남았다는 것이었다.

오래도록 통치했던 표트르 대제의 딸들이 왕위에 오르느냐, 
어찌되었든 형인 이반 5세의 딸들에게 왕위가 넘어가느냐의 문제 속에서 
허수아비 왕을 올려놓고 권력을 탐하고자 했던 최고 추밀원 위원들은 
평생 조신하고 정숙한 아내가 될 교육만을 받은 

안나 이오안노브나를 왕위에 올리기로 계략을 짰다. 


안나는 본인의 권력을 제한한다는 추대 조건에 서명하면서 왕위에 올랐지만 
사실 그녀는 추밀원이 생각한 대로 얌전한 여자가 아니었다. 
안나는 황제가 되자마자 주변 신하들의 지지로 최고 추밀원을 해체해 버리고는 
비밀경찰 역을 하는 친위대를 만들어 정적을 숙청해 나갔다.

이제 권력을 잡았으니 성군이 되었다면 좋았겠지만, 

권력의 맛에 취한 안나는 괴상한 놀이에서 즐거움을 찾기 시작했다. 
아무 이유 없이 새벽에 소방 종을 울려 사람들이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하고 귀족들에게 입으로 토끼에게 먹이를 주라고 

시키거나 바닥을 기어 다니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안나가 행한 가장 유명하고 괴상한 일은 ‘얼음 궁전의 결혼식’이었다. 
나이가 많았던 골리친 공작은 동방정교회가 아닌 가톨릭 신자인 

이탈리아 여자와 결혼을 했는데, 안나는 자신의 허락을 

받지 않은 이 결혼을 두고 배반이라고 생각했다. 
새 신부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자 안나는 이 기회를 틈타 복수를 하기로 했다. 


안나는 나이 든 공작의 지위를 어릿광대로 바꾼 후 가장 못생긴 하녀와 

재혼하라며 첫날밤을 보낼 멋진(?) 궁전을 지어주었다. 
궁전은 높이만 20m에 달하였으며 궁전을 비롯해 안의 인테리어까지 
모두 얼음으로 만들어졌었다고 한다. 
벽과 기둥뿐만 아니라 나무, 종달새, 의자, 침대, 심지어 벽난로와 
그 안의 불까지도 대단한 정성을 들여 얼음으로 만들었다.

만족한 안나는 골리친 공작과 새 신부를 광대로 분장시키고 

코끼리에 태운 뒤 서커스 동물들과 행진을 시킨 후 

얼음 궁전 안에서 발가벗고 하룻밤을 보내라고 명령하였다. 
러시아의 매서운 겨울에 발가벗고 얼음 위에서 자야 하다니, 
죽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지만 새 신부는 결혼 선물로 받은 진주 목걸이를 
문지기의 낡은 코트와 맞바꾸는 기지를 발휘했고, 덕분에 부부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힘겹고 추운 밤을 함께 보낸 덕분인지 안나가 1년 뒤에 사망한 뒤에도 
공작과 새 신부는 쌍둥이도 낳고 알콩달콩 오순도순 잘 살았다고 한다.
왕위에 오른 지 고작 10년이 된 황제, 안나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을 때 
그녀는 후계자 걱정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후손에게 권력을 주고 싶으나 자식이 없었던 안나는 

왕위를 조카의 아들에게 넘겨주기로 한다. 
문제는 그 아들이 아직 태어난 지 백일도 되지 않은 아기라는 것이었다. 
안나는 갓난쟁이를 왕위에 올려놓고 세상을 떠났고, 얼굴도 기억나지 않을 
이모할머니의 잘못된 결정에 황제가 된 아기, 이반 6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왕위에서 쫓겨나 평생 감금된 채로 살다가 고작 23살의 나이에 사망하게 된다. 


결국 얼음 궁전에 가둬 사람을 얼려 죽이려던 계획도, 아버지의 후손을 
왕위에 남기려던 계획도 실패한 안나는 러시아를 쥐락펴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괴상한 짓을 즐기던 이상한 황제로만 이름을 남기고야 말았다.

발레리 자코비 (Valery Ivanovich Jacobi 1834~1902)는 러시아 화가, 교수, 학자, 
제국 예술아카데미 학술위원회 위원, 여행 미술전시회 창립자이다. 
그는 임페리얼 카잔대학교에 학생으로 입학했지만 그곳에서 과정을 마치지 못했다. 
크림 반도 캠페인에 참여하기 위해 카잔 지방에 민병대가 형성되었을 때 
자코비는 자원하여 전쟁터로 갔지만 그곳에서 분리와 함께 전쟁이 중단되었다.

그런 다음 자코비는 학교에서도 느꼈던 사랑을 그림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1856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여 제국 예술 아카데미 수업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1859년에 큰 은메달, 861년 작은 금메달과 큰 금메달을 받고 해외 유학을 나갔다.
처음 독일을 방문한 자코비는 스위스를 여행하고 파리, 나폴리, 로마에서 살았다. 
자코비는 1869년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고 1년 후 그린 "비론 공작의 체포"로
제국 예술 아카데미 교수직으로 승진했으며 1870년에 학술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1878년 그는 파리에서 6개월 동안 지역 세계 전시회에서 

러시아 미술 부서의 위원으로, 러시아에서 온 국제 심사 위원으로 일했다. 
1883년에 그는 아카데미위원회의 일원으로 남아 있으면서 그 수업에서 교수로 임명되었다. 
자코비는 1891년에 아카데미의 급격한 변화의 결과로 이 두 직책에서 해고되었고, 
그의 생애의 마지막 몇 년을 주로 알제리와 프랑스 남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보냈다.

자코비는 똑똑한 사람이었고 의심할 여지없이 재능이 있었지만 
너무 빨리 예술 학교를 통과한 것이 그의 작품에 불리하게 반영되었다. 
자코비는 나중에 유명한 작가가 된 알렉산드라 니콜라예브나
(Alexandra Nikolaevna Yakobi)와 결혼했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8,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The Donkey Walk of tsar Alexis, 1865. by Vyacheslav G. Schwarz. oil on canvas.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8,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당나귀 산책은 1561년부터 1655년까지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시작되어

현재의 성 바실리 대성당인 트리니티 대성당에서 끝났지만 

1656년 니콘 총 대주교는 행렬 순서를 뒤집었다. 
예수 그리스도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계시를 기념하는 축제일인 주현절(Epiphany)은 
당나귀 산책과 동방 정교회의 종교 의식에서 자주 사용되는 

성수에 대한 황제의 존중을 강조하는 의식이었다.
이 의식은 1678년까지 여러 도시에서 시행되었다가 표트르 1세( Peter I)에 의해 폐지되었다.
이 당나귀 산책은 2000년대에 가끔 재현되었다.

뱌체슬라브 쉬와르츠(Vyacheslav Grigorevich Schwarz 1838~1869)는 

러시아 역사 및 장르 화가였다.
그는 현재의 아제르바이젠 지역인 자카탈리(Zakatali) 자치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중장이었고 1846년 그는어머니와 함께 모스크바로 이주하여 
모스크바 드로잉 학교에서 첫 번째 미술 수업을 받았다. 
이듬해에 그는 러시아의 귀족 군사학교인 페이지 군단에 입학 허가를 받았지만 
그의 어머니는 그가 군 경력을 갖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복무하지 않았다. 
그는 1851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옮겨졌고 이듬해 

알렉산더 리시움(Alexander Lyceum)에 등록했다. 
쉬와르츠는 또한 재능이 있는 언어 학자였으며 열 살 때까지 프랑스어, 
독일어 및 영어에 대한 실무 지식을 습득했다.
리시움에 있는 동안 그의 그림은 미술 교수진의 관심을 끌었다. 

쉬와르츠는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제국 예술아카데미(Imperial Academy of Arts)
수업에 참석하고 고대 러시아 역사화에 전념했다.
1861년 그는 주로 베를린에서 6개월을 유학하면서 기술을 연마했다 . 

쉬와르츠는 1863년에 또 다른 여행을 시작하여 파리에서 많은 스케치를 그렸다. 
그는 이탈리아를 방문 할 계획을 포기하고 1864년 러시아로 돌아와 랴잔에서 살다가 

이 작품 “알렉시스 차르 시대의 종려 주일(The Donkey Walk of tsar Alexis)”을 
발표했고 이로인해 학자로 지명되었다.

1867년 초, 쉬와르츠는 아카데미를 대표하여 파리로 세 번째 해외 여행을 하고
국제 박람회에서 러시아 전시회를 준비하여 여러 메달을 획득했다. 
여행 중 복통을 앓던 그는 의사를 만나 애디슨병 진단을 받았다. 
1868년 중반에 쉬와르츠는 일을 계속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마지막 완성 작품 중 일부는 아카데미에서 명예 회원 자격을 얻었다. 

그해 말에 약간의 호전을 느꼈던 쉬와르츠는 시골의 공기와 평화로운 분위기가 
그의 회복에 도움이되기를 바라며 아버지와 함께 살기 위해 쿠르스크로 돌아왔다. 
하지만 오히려 건강이 악화되어 1869년  3월에 사망했다. 
쉬와르츠는 인근 화이트 웰 마을에 있는 아버지의 영지에 묻혔다.

 

[영상]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8, The State Russian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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