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부활성당 내부

이 성당의 가장 큰 포인트는 바로 '모자이크 화'이다. 
지금 사진으로 보는 모든 그림들이 다 모자이크 화다.
성당 안에 있는 모든 벽화가 사람이 일일이 조그마한 타일을 이어 붙인 모자이크화로 되어 있다.
벽화는 예수의 행적과, 성인들을 묘사하고 있으며, 
모자이크 그림 스케치를 하는 데에만 32명의 화가가 투입되었다고 한다.

교회의 장식에는 많은 화가, 모자이크 예술가, 요업 기술자, 유약 기술자들이 참여하였다.
외부 장식에는 모자이크가 광범위하게 쓰였고, 
둥근 지붕들은 귀금속 성분의 유약으로 칠해졌으며, 
천막 모양의 지붕들은 채색 기와로 씌워졌다.
그리스도 부활교회가 유명한 것은 308점의 현란한 모자이크 작품 장식으로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장소

성당 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은
알렉산드르 2세 (Alexander II 1818~1881)가 암살당한 장소다.
성당 안에서 상징적인 장소로 보존하고 있다.
기둥에 쓰인 돌들은 우랄 지역의 귀한 석재라고 한다.

알렉산드르 2세는 러시아 제국의 차르이다. 
로마노프 왕조의 12번째 군주로 러시아 제국의 근대화를 위해 앞장선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아나키스트에게 1881년 암살당했다.

알렉산드르 2세의 가장 중요한 개혁은 1861년 발표한 

농노 해방령이며 이 외에도 법률 제도를 재조직하고 지역 재판관을 

선출제로 바꾸었으며 가혹한 제도들을 폐지했다. 
이를 통해 알렉산드르 2세는 '알렉산드르 해방제'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지역 자치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군사 제도를 전반적으로 
개편했으며 귀족들의 특권 일부를 삭제하고 대학 교육과 산업 발전에 힘썼다.

대외적으로 그는 미국에 알래스카를 판매했으며 나폴레옹 3세나 빅토리아 여왕, 
오토 폰 비스마르크 같은 유럽 내 여러 인물들과 관계를 맺으며 평화를 추구했다. 
1872년 그는 삼제동맹에 가입해 유럽 지역의 안정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 발칸반도의 여러 슬라브 국가들과 연합해 1877년부터 1878년까지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으며 시베리아, 캅카스 산맥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투르키스탄을 병합했다. 


그는 동방 정책도 적극적으로 추진해 1860년 제2차 아편 전쟁을 중재한 대가로 
연해주를 얻었으며, 블라디보스토크를 건설하는데도 앞장섰다. 
그의 치세 동안 가장 큰 위기는 폴란드 지역에서 발생한 1863년의 1월 봉기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러시아 제국 내의 폴란드 영토에 별도의 
입법 기구를 마련하는 대신 그 입법 기구를 러시아 제국 직속으로 두었다.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장소

알렉산드르 2세는 아버지 니콜라이 1세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 37살이었다. 
그는 나약하고 선량한 기질의 인물로서 정책에 관한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못해 어떤 때는 아버지보다도 더 반동적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니콜라이 1세의 군대식 통치와 크리미아 전쟁의 패배로 인해 

형성된 여론은 알렉산드르 2세에게 여러 개혁을 추진하게끔 만들었다. 
이 때문에 농노 해방을 비롯한 그의 개혁은 ‘대개혁’이라는 

칭송을 받으며 러시아 역사의 이정표가 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때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861년에 행해진 농노 제도의 폐지였다.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사회개혁은 경제를 발전시켰으나, 
농노 제도를 폐지하자는 여론은 농노들을 술렁거리게 했다. 
정부는 이러한 동요가 대규모의 농민 반란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지주들이 솔선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하지만 귀족들은 이제까지 누려왔던 권리들을 빼앗길까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귀족들의 이러한 모습은 여론을 더욱 자극했고, 

마침내 알렉산드르 2세는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우선 귀족들에게 개혁에 관해 공개 토론을 시작하도록 강요했으며, 
해방된 농노들에게 농토를 분배해 주어야 한다는 원칙을 선포했다. 
결국 알렉산드르 2세는 대다수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몇몇 계몽 관료들과 
자유주의적 여론의 지지를 받으며 농노 해방령을 공포하여 농노제 폐지를 선포했다.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 해방 전에 
“아래에서 농민이 자신을 해방하는 때를 기다리는 것보다 
위에서 농노 제도를 폐지하는 편이 더 좋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장소 측면에서 보기

농노 해방 개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법적인 측면에서 나타났다. 
인간의 예속을 철폐하는 이 부분은 농노들에게 가장 반가운 소식이었다. 
농노 해방령으로 인해 4,000만 명의 농노가 자유로운 몸이 되었으며, 
이는 후대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법적 조처’로 칭송받는다.

하지만 농노 해방이 완벽한 개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지주들은 상실한 토지에 대해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았지만, 
토지를 분양받은 농민들은 49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토지대금을 상환해야만 했다. 
그리고 해방된 농노들에게 할당된 토지는 너무 적었으며, 상환금액은 지나치게 부담스러웠다. 
여기에 가장 치명적인 것은 토지가 개인에게 분양된 것이 아니라 
농민공동체 단위로 분양되었으며, 공동체에 속한 농민들에게 재분할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조처는 농민들에게 납세 의무와 토지 상환금에 대해 연대 책임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결정은 농민공동체의 기능을 상쇄시켰을 뿐만 아니라 

농업 발달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농노 제도가 철폐됨에 따라 종래 지주가 농노에 대해 행사했던 
독점적 재판권이나 치안 유지에 대한 권한 등은 자동적으로 소멸되었고, 
지주들이 누렸던 권위도 타격을 받았다. 
그리고 지주들에게 일임되었던 지방행정은 1864년 젬스트보 기구가 조직되어 재편되었다. 
젬스트보는 지주, 농민공동체, 도시민 세 계층이 대의원으로 모두 참여하였다. 
젬스트보에서는 주민들의 복지에 관한 사항만을 주로 다루었으며 
일반 행정과 공공권력의 행사는 중앙에서 임명한 행정관들이 맡았다. 


젬스트보에서는 기구의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 필요에 따라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젬스트보에서 이루어진 선거는 지주에게 유리하게 치러졌지만 

자치의 원칙이 정식으로 인정되었고, 지방의 생활조건 향상을 위해 

여러 사회계층이 협동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젬스트보의 의석은 귀족과 관리에게 42%, 농민에게 38%, 
상인과 기타 계층에게는 20%가 배정되었으며, 도로 건설, 의료, 식량, 
교육 등과 같은 뒤처진 농촌의 환경을 개선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알렉산드르 2세 (Alexander II)

지방행정 못지않게 많이 바뀐 곳은 법원이었다. 
계급차별주의 원칙을 근거로 한 개혁 이전의 재판은 권위주의와 
재화주의에 물들어 있는 재판관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재판은 비공개로 행해졌으며 피고를 대변할 변호인도 없었다. 
또 재판과정이 매우 느리고 많은 경비를 소모하게 되어 있었다. 


1864년의 개혁에는 ‘만인에게 평등한 법’이라는 원칙이 선포되었고 계급 차별도 없어졌다. 
사법부는 행정부로부터 독립되었으며 재판관은 종신제로 

임명되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재판은 공개되었고 배심원제도가 수립되었으며 변호사협회가 수립되었다. 
이로써 지방법원에서 고등법원에 이르는 전 부문이 완전히 개편되었다. 
이 때부터 러시아의 법원 조직은 어느 선진국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또한 군대의 개편이 실시되어 이전까지는 하층계급만이 징병에 대한 부담을 지었으나 
국민징병제가 실시되어 귀족과 평민에게도 군복무를 하게끔 만들었다. 
복무 기한도 25년에서 6년으로 축소되었고 병사들에 대한 대우도 
훨씬 나아졌으며 훈련도 인도적 원칙이 강조되었다. 
특히 사병들에 대한 초등교육이 실시되었다. 
이로써 새로 조직된 법원과 함께 개편된 군대는 러시아 근대화의 상징이 되었다.
더불어 검열을 완화하고 태평도 폐지하였다. 
서구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장교들의 반란인 데카브리스트당의 
반란 가담자들을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석방하기도 하였다.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 (1881년)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은 구체제가 세워 놓았던 계급 간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혁신이었다. 
즉 농노 제도의 폐지는 자유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근본적인 차별을 없앤 것이었다. 
해방된 농노들은 젬스트보에서 그들의 옛 주인과 자리를 같이 하였으며, 
원칙적으로는 다른 계급의 대표들과 동등한 대접을 받았다. 
새로 개편된 법원은 ‘만인에게 평등한 법’이라는 이상을 내걸었고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군대의 개혁도 국민 모두가 병역의 의무를 가진다는 민주적 원칙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암살 위기를 넘겨야 했고, 그가 가는 곳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암살 위기를 겪으면서 몇 해간 개혁 사상을 탄압하기도 하였지만, 
효과가 없음을 깨닫고 다시 개혁의 길로 들어섰으나 시간은 이를 허락해주지 않았다.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 (1881년)

 

1881년, 알렉산드로 2세는 사람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의회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궁으로 향했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 나로드니키(공화주의자)의 인민의 의지당 소속 
그리네비츠키, 소피아 페룹스카야 등의 폭탄테러와 조우했다. 
나폴레옹 3세가 선물한 방탄 마차 덕분에 호위병과 마부만 다치고 황제는 무사했으나, 
다친 호위병들을 살피러 마차 밖으로 나왔고 그 순간 
두 번째 폭탄에 맞은 알렉산드로 2세는 폭살당했다.

황태자 니콜라이가 22살에 요절하여 다른 아들 알렉산드르 3세가 뒤를 잇게 됐다. 
알렉산드르 3세는 자유주의 사상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이는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의 불만을 사 러시아 혁명의 원인이 되었다.

 

천장과 벽 등 내부가 온통 타일로 된 모자이크 화로 덮여 있다.

 

인증샷

 

성당의 바닥은 다채로운 종류의 이탈리아 대리석으로 만든 모자이크 '카펫'이다. 
다양한 색상의 12개 이상의 돌이 600 평방 미터가 넘는 면적의 
바닥 표면을 덮는 45개의 사실상 반복되지 않는 패턴으로 되어 있다.

 

인증샷

 

지성소

평소에는 문이 닫혀 있다가 성찬 예배를 할 때는 문이 열린다.
문 안에 제단이 있다.

성상화 벽 (iconostasis)은 섬세한 파스텔 색조의 이탈리아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교회 장식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므로 교회 예술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고 책임 있는 전문가가 작업 수행에 참여했다.
성상화 벽 (iconostasis)의 우아한 석재 조각은 흠 잡을 데가 없으며 나무 조각같은 느낌을 준다.

 

지성소

 

지성소는 유대교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이다.
전통적인 유대교는 지성소를 하나님의 임재가 거하는 곳으로 간주한다 

 

지성소

 

성인들을 묘사하는 타일 모자이크 화

 

천장 중앙에 예수 그리스도 모자이크 화

 

천장과 예수 그리스도 모자이크 화

 

천장과 예수 그리스도 모자이크 화

 

성상화 벽(iconostasis) 앞, 왼쪽과 오른쪽에는 클리로스 (kliros 성가대)와 
주요 성당 공간을 분리하는 아이콘 케이스가 있다. 
12년 동안 러시아의 석재 절단기로 최고의 장식용 돌을 사용하여 
각 아이콘 케이스를 만드는 작업을 했다. 

웅장한 반암 (quartzite) 석재 조각, 다양한 색상의 미네랄 조합이 
아이콘 케이스에 특별한 장식 효과를 준다.
그리스도 부활성당의 석재 장식 제작에 관한 모든 작업은 자연석의 아름다움이 
가장 좋은 방법으로 제시된 뛰어난 공예품 장인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스도 부활성당 난간에서 카잔 대성당 방향으로 인증샷

 

그리스도 부활성당 난간에서 인증샷

 

[영상] Cathedral of the Resurrection of Christ in St. Petersburg, Russia 내부

 

 

 

그리도예프 운하를 가로 지르는 노보 코니우쉔니(Novo-Koniushennyi) 다리

넵스키 대로에서 카잔 대성당 그리보예도프(Griboedova) 운하를 가로지르는 
카잔스키 다리(Kazansky Bridge)에서 상류 그리스도 부활성당 쪽으로 올라가
첫 번째 다리가 이탈리안 다리 (Italiansky Bridge)이고
조금 더 가면 노보 코니우쉔니(Novo-Koniushenny) 다리가 있다. 

이 다리는 피의 구세주교회 건설을 돕기 위해 

1880년대에 이곳에 최초로 목조로 건설되었다 . 
공사 기간 동안 다리의 너비는 115m에 달했다. 
비교하자면 오늘날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넓은 다리인 Blue Bridge의 너비는 97.5m다. 


1907년에 대성당이 완공되었을 때 다리는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Christ Bridge 부활의 교회로 명명되었다. 
이후 10월 혁명으로 1917년 이름이 바뀌었고 1975년에 

새로운 철근 콘크리트 다리가 건설되면서 이 다리는 

그리네프스키 다리(Grinevsky Bridge)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노보 코니우쉔니 다리 난간의 주철 조각

 

노보 코니우쉔니 다리에서 본 그리스도 부활성당

그리스도 부활 성당(Cathedral of the Resurrection of Christ)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다. 
또다른 명칭은 '피 흘리신 구세주 교회'(Church of Our Savior on Spilled Blood) 
약칭 '피의 구원사원'으로 흔히 불린다. 
1881년 3월 알렉산드르 2세가 피를 쏟았던 폭탄 테러 장소에 
후계자 알렉산드르 3세가 아버지를 애도하여 지은 성당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역사적 중심부인 미하일로프스키 정원과 
코뉴셴나야 지역의 그리보예도프 은행 근처에 위치한다. 
사원의 길이는 81m이며, 최대 수용인원은 1600명으로 
러시아 건축에서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며 박물관이다.

 

상공에서 본 그리스도 부활성당

이 사원은 알렉산드르 2세가 피를 쏟았던 폭탄 테러 장소에 
후계자 알렉산드르 3세가 아버지를 애도하여 지은 성당이다.
알렉산더 3세의 명령에 의해 1883년에서 1907년 동안 
건축가 알프레드 팔란다와 이그나탸의 공동 프로젝트로 건립되었다. 
“러시아 스타일”을 초안으로 만든 이 사원은 모스크바의 성 바실 성당과 다소 비슷하게 구현되었다. 
사원의 건설은 24년 동안 계속 되었으며, 1907년 8월 6일 변모축일에 문을 열었다.

공식 명칭은 그리스도 부활 성당(Cathedral of the Resurrection of Christ)이다. 
모자이크 프레스코로 장식된 이 교회는 알렉산더 2세 암살기도가 있었던 바로 그곳에 
1883∼1907년에 걸쳐 세워져서 일명 ‘피의 사원'이라고도 불린다. 
피의 사원에서 '피'는 1881년 이곳에서 암살당한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피를 가리킨다. 
교회의 내부는 27년간의 복구 끝에 1907년 첫개관 이후로 
90년 후 공개되었으며, 현란한 모자이크 장식이 아름답다.

 

상공에서 본 그리스도 부활성당

1881년 3월 13일 , 러시아 제국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사람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의회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궁으로 향했다. 
그런데 당일 사회주의(혹은 무정부주의, 공화주의) 운동가 인민의 의지파 소속 
이그나치 흐르니예비츠키, 니콜라이 리사코프, 소피아 페롭스카야 등에게 폭탄 테러를 당했는데 
첫 번째로 리사코프가 던진 폭탄에 맞았을 때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선물한 
방탄 마차의 안전장치 덕분에 안에 있던 본인은 무사했고 호위병과 지나가던 민간인만 다쳤다. 

알렉산드르 2세는 "난 괜찮다"라고 말하며 자리를 피하기는커녕 마차에서 나와 
폭발에 휘말려 다친 다른 사람들을 수습하려고 하다가 그 모습을 본 
흐르니예비츠키가 기다렸다는 듯이 두 번째 폭탄을 던졌다. 
두 번째 폭탄을 맞은 알렉산드르 2세는 비록 즉사하진 않았지만 

팔 하나와 두 다리가 잘려나가고 피투성이로 쓰러져 

"짐은 궁궐에서 죽고 싶다..."라는 말을 겨우 했다. 
이미 누가 봐도 가망이 없어서 신하들이 마지막 부탁대로 

궁궐로 데려갔고 결국 궁궐 안에서 사망했다. 
황제를 공격하는 동안 17명이 부상당했고 2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살해당한 황제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알렉산더 3세는 정치범들을 교수형에 처하고 
그의 아버지를 기념하여 비극의 현장에 회개의 사원인 기념 사원을 세울 것을 명령했다.
건축은 레온티 볘눈에게 위임, 빠른 진행으로 인해 
1881년 4월 17(29)일 예배당 헌당식(정화식), 기념 추도식을 지냈다. 
그로모프와 밀리틴 일급 상인 길드원이 건축비를 

부담하였기 때문에 국회는 단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이 임시 예배당은 1883년 봄 사원이 건축이 시작되기 전까지 보존되었으며 
이후 카뉴셴나야 광장으로 옮겨져 9년 동안 존재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대대적으로 약탈당해 많은 손상을 입었고, 
그 뒤로는 창고로 사용되었지만 어쨌든 건물 자체는 살아남았다. 
이후 1997년에 수리를 거쳐 박물관으로 재개관했다.
근현대에 지어진 건축물이지만 중세 러시아 성당건축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서 지었다. 
다섯 개의 화려한 돔은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있는 성 바실리 성당과 비슷한데 
실제로 성 바실리 성당을 모티브로 건축했다고 한다. 


내부도 매우 화려하다. 
성당 안에 있는 모든 벽화가 모자이크화로 사람이 일일이 조그마한 타일을 이어 붙인 것이다. 
따라서 바로크, 고전주의 양식이 많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다른 건축물들 사이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면모를 자랑한다.
이러한 건축 양식에는 정치적 의도가 있는데,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러시아의 서유럽화에 선을 긋고 
러시아적 전통으로 회귀하겠다는 알렉산드르 3세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그리스도 부활성당의 삼자 다리(Tripartite Bridge)

삼자 다리(Tripartite Bridge)는 그리보예도프(Griboedov) 운하를 가로 지르는 

15m 길이의 극장 다리와 모이카 강(Moika River)을 가로 지르는 18m 길이의 

말로-코유센니 다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둘 다 하나의 모이카 부두에 놓여 있다. 

 

그리스도 부활성당의 삼자 다리

삼자 다리(Tripartite Bridge)는 한 쌍의 작은 다리에 일반적으로 적용하는 이름으로, 
디자인과 장식이 비슷하고 그리스도 부활성당 앞에 서로 수직으로 위치한다.

 

그리스도 부활성당의 삼자 다리

삼자 다리(Tripartite Bridge)는 그리스도 부활성당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편리한 장소다.
이 다리는 실제로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신혼 부부들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이기도 하다. 
신혼 부부가 혼인 신고를 마치고 삼자 다리에 도착하면 오래 살면서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세 개의 다리를 모두 걸어야 하고 반드시 피 흘린 구세주 교회에 절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 부활성당의 남쪽 정면

운하길 끝을 가로막듯 선 그리스도 부활성당의 남쪽 정면 모습으로 
찬란한 반구 돔들과 박공 모자이크화, 다채로운 색깔로 치장한 성상들, 
광택 벽돌과 다색 타일, 이탈리아 대리석 등이 참으로 화려하다.
모스크바 붉은광장 한켠 성 바실리 성당 닮았는데 실제로 그 교회를 본떠 지었다고 한다.​ 
전면 너비 52m, 높이 81m에 이른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부는 유럽풍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건물로 넘치는데 
표트르 대제가 18세기 초 이 인공 도시를 건설하면서 유럽을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도시에서 유서 깊은 건물 가운데 17세기 모스크바공국 시대의 비잔틴 양식이 가미된 
러시아 특유의 건축 양식을 간직한 것은 19세기 말에 세운 이 성당이 거의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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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부활성당은 여러가지 이름으로 부른다.
피 위에 선 구세주교회, 뿌린 피에 선 교회, 그리고 우리에겐 피의 사원이라는 이름이 익숙하다.
19세기 중후반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제를 폐지해

2000만 명을 해방시켜 '해방자 짜르(황제)' 라고 불렀던 개혁 군주이다.​
​지방자치제 젬스트보를 도입했고 배심원 제도를 채택한 사법제도까지 진보적 제도를 정착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 유럽 유학을 다녀온 청년 장교들의 군사 혁명이 실패한 이래 
러시아에는 꾸준히 자유를 갈망하는 사회 개혁 움직임이 일었고 1870년대엔 
인민해방 운동과 직업적 혁명가들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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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운동가 그룹 중에 '인민의 의지'라는 급진 혁명운동 조직이 

1881년 아침 알렉산드르 2세가 마차를 타고 산책 나왔다가 

입헌제도 도입 방안에 서명하러 궁으로 돌아가던 길목에서 짜르를 습격한다.
조직원 두 명은 이곳 그리바예도프 운하 곁을 지나던 알렉산드르 2세의 마차에 수류탄을 던진다.
마차가 심하게 흔들렸지만 황제는 다치지 않았고 마차에서 내려 범인을 꾸짖는다. 


그 사이 다른 한 명이 폭탄을 터뜨려 자신은 죽고 황제에게 중상을 입힌다.  
황제는 서둘러 궁으로 옮겨졌지만 몇 시간 뒤 숨을 거둔다.
아들 알렉산드르 3세가 아버지를 추모해 아버지가 피 흘린 피습 장소에 세운 것이 
그리스도 부활성당이자 '피 위에 선 교회' 이다. 

 

러시아 정교회 건물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 구근(球根) 또는 양파 모양 돔으로 
피의 사원은 정면 가운데에 제일 높은 돔탑이 서 있고 좌우 앞뒤로 두개씩 
에나멜로 장식한 돔 네 개까지 모두 다섯 개가 있다.

사진에선 중앙 탑 좌우 에나멜 돔과 똑같은 것이 뒤쪽에도 있지만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맨 왼쪽 종탑과 오른쪽 측면에 황금빛 구근 돔 셋이 있어 모두 아홉 개에 이른다.

 

정면 제일 높은 탑 위 에나멜 돔은 똬리를 틀 듯 꼬아​서 인도 터번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탑 아래 실내에 반구형 돔 천장이 있는데 
이 돔탑에 나 있는 창을 통해 실내 돔 천장으로 빛과 공기를 공급한다. 
자연 채광과 환기를 하는 장치이고 장식도 겸하는 이것을 ​랜턴(등불)이라고 한다.

 

러시아 정교회 구근 돔은 ​대지에서 타오르는 하느님의 촛불을 상징한다.
돔의 직경이 아래쪽 탑의 원기둥 직경보다 크고​ 높이도 
여느 유럽 교회나 성당의 돔보다 훨씬 높아 금방 눈에 뛴다.

학자들은 구근 돔이 몽골 지배 이전 13세기에 러시아 고대 건축 양식의 헬멧 돔에서 출발한 것으로 본다.
헬멧 돔이란 러시아 영웅들이 썼던 헬멧 모양을 본뜬 돔으로 구근 돔은 이반 뇌제 때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러시아 정교회 말고도 바바리아 지방 카톨릭 성당과 중동 이슬람 사원, 인도 사원에서도 구근 돔을 볼 수 있다.
구근 돔이 셋이면 성령을 상징하고 다섯이면 예수 그리스도와 네 천사를 상징한다. 
에나멜 돔 중에 가장 많은 형태가 이렇게 초록과  푸른색, 하얀색을 교차해 쓰는 형태이다.

 

정면 돔 아래 박공에 모자이크화가 있다. 
가운데에 머리가 길고 수염을 기른 장년의 그리스도가 
오른손은 축복의 표시를 하고 왼손에는 복음을 나타내는 책을 들고 있다.
이런 예수상을 만물의 지배자, 만능의 주(主)를 의미하는 판토크라토르(팬토크레이터)라고 한다.
그런 판토크라토 상을 가운데 두고 오른쪽엔 세례 요한, 
왼쪽엔 성 게오르기우스(조지)가 무릎 꿇고 뭔가를 탄원하고 간청하고 있다.

성 게오르기우스 대신 성모가 요한과 함께 인류의 죄를 사면 해달라고 청원하는 그림을 
데이시스(디시스-Deisis)라고 하는데​ 성모 자리에 성 게오르그가 있는 그림은 매우 드물다.
성 게오르기우스는 유럽 전역과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많은 나라가 성인으로 받든다.
러시아에서는 국가 문장(紋章)에 넣을만큼 각별한 성인이어서 데이시스에 등장시킨 게 아닌가 싶다.

 

예수 모자이크 양쪽 탑 아랫부분엔 천사와 성인들을 묘사한 반원형 모자이크화들이​ 있다.

 

정면 왼쪽으로 치우친 현관은 화려하게 장식한 지붕과 
뾰족한 지붕 모양 탑을 이고 있고 탑 위엔 독수리상이 서 있다.

 

15세기 말부터 러시아 국가 문장(紋章)에
독수리 머리가 하나씩 왕관을 쓰고 중간 위쪽에도 왕관이 하나 더 있다. 
세 개의 왕관은 통합된 러시아를 상징한다. 

 

러시아 국가 문장(紋章)

두 마리 독수리 머리가 각기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러시아가 유럽과 아시아를 모두 포용하겠다는 것을 의미 한다.
실제 문장에는 독수리가 양 손에 뭔가를 쥐고 있다.
왼손의 황금 공은 전 세계를 그리스도화 하겠다는 뜻으로 지구 위에 
십자가가 놓인 형상을 하고 있고 오른손의 홀(笏)은 세속 통치자의 권위를 뜻한다. 

이 문장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폐기되고 낫과 망치가 들어간 소비에트 문장이 
등장했다가 1991년 소련방이 해체되면서 옛 문장이 다시 등장했다.
민주주의 시대에 맞춰 왕관의 의미가 바뀌었는데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을 의미한다.
독수리가 쥔 홀과 구(球)도 주권 수호 의지와 국가 통일성을 상징한다.
가운데 말을 타고 용을 무찌르는 기사는 정면 박공 그림 데이시스에도 들어간 성 게오르기우스이다.

 

지붕은 러시아 전통 주택에서처럼 사면을 따라 풀잎 무늬 장식을 했는데 금박 입힌 구리이다.​
지붕 박공에는 그리스도 부활성당이라는 교회 이름에 맞춰 예수 부활을 그려 놓았다.​

 

첨탑 아래쪽에도 반원형 아치를 만들고 천사상과 성인상 모자이크화를 넣었다.

 

정면 이층과 삼층에는 화려한 창문을 냈다. 
섬세하게 부조 장식을 새긴 창틀은 에스토니아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창문 사이와 양쪽 끝으로는 기둥 장식을 하고 

안에 화병과 쌍두 독수리 타일화를 번갈아 붙였다.

 

정면 일층 벽에 붙은 모자이크화는 프릴루키의 성 드미트리이다.
14세기 러시아에 여러 수도원을 세워 수도의 삶을 정립한 성자이다.

 

건물 오른쪽으로 돌아가 동쪽 측면을 보면 황금빛 구근 돔 셋이 동쪽을 보고 서 있다. 
가운데 돔 아래 그려진 예수상을 에워싼 아치가 끝이 뾰족하다.   
이런 모양의 반원 아치 양식을 가리켜 코코슈니크라고 한다.
코코슈니크 양식은 러시아 전통 건물, 특히 정교회에서 즐겨 쓴다.

 

북쪽 면 모습

알렉산드르 3세는​ 설계 공모를 거쳐 1883년 그리스도 부활성당을 착공한다.
무른 습지 기반을 다지고 화강암을 쌓아 기초 공사를 하는 데만 3년이 걸렸고 
모두 25년 세월을 들여 1907년 완공 한다.
건축비는 왕실 돈과 귀족들의 기부금으로 충당했고 일반 신자를 받는 교회가 아니라 
알렉산드르 2세를 추모하고 기리는 왕실 교회로 썼다.
레닌은 1917년 러시아 혁명에 성공한 뒤 피의 사원을 폭파하고 싶어했지만 
당시 큰 건물이 드물어 창고로 썼다.

1931년엔 알렉산드르 2세 테러를 기념하는​ '인민의 의지' 박물관을 안에 만들었다가 
자신에 대한 테러를 부추길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 스탈린이 3년 만에 폐쇄한다.
피의 사원은 그 뒤로도 여러번 소비에트 정권에 의해 폭파될 위기를 넘긴 끝에 
1969년 이삭성당 종교박물관의 분관이 된다. 
오랜 복구와 단장을 거쳐 1998년부터 일반에게 개방하고 있다. 


건물 뒷면 북쪽 모습이다.
매표소가 있는 관람객 출입구가 뒤쪽으로 나 있다. 입장료는 250루블이다.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열고 수요일엔 휴관한다.  
북쪽 구조는 남쪽과 똑같이 좌우만 다르게 선형(線型) 대칭으로 만들었다.  
정면 중앙 돔탑과 박공 사이, 그리고 창문들 위쪽도 코코슈니크 아치로 처리했다. 
교회는 모스크바 성 바실리교회를 본떠 정통 17세기 러시아 양식으로 지었지만 
당시로는 첨단이었던 전기 시설을 들여 전등 1689개를 밝혔다.

 

북쪽 면 박공에도 예수 부활 성화가 모자이크로 붙어 있다.
교회 안팎엔 당대 러시아 대표 작가들이 10년에 걸쳐 만든 모자이크 성화가 있는데 
그림 면적을 모두 합치면 7천 제곱미터, 2천 평이 넘는다.

 

북쪽 면 오른쪽에도 남쪽 정면과 마찬가지로 쌍두 독수리가 올라선 현관 탑이 솟아 있다. 

 

그리바예도프 운하를 건너 부활성당의 동북쪽 모습을 보니 수상택시들이 운하를 달린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쫓겨난 마지막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남쪽 짜르스코예 셀로(황제의 마을) 궁에서 텃밭을 일구며 소일한다.
해방자 알렉산드르 2세가 피 뿌린 지 37년,  마지막 짜르는 

볼셰비키들에게 가족과 함께 연행돼 시베리아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러시아 혁명은 제정 러시아의 전제 체제와 1차대전 때 드러난 
그 체제의 무기력함이 낳은 필연일 수 있지만 그래도 해방자 짜르가 테러에서 
살아 남았다면 러시아는 물론 세계 현대사가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종탑 아래 각진 다섯 면 가득 문장(紋章) 144개를 각기 붙여 놓았다.
제정러시아 시대 지역과 도시와 마을의 문장들을 모았다. 
온 나라가 황제의 피살에 애도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리바예도프 운하 건너편에서 서쪽 측면을 바라본 모습

 

창문 위 아치 모자이크에 두 천사가 천에 그린 
'천 위의 구세주 그리스도의 얼굴' 만딜리온(Mandylion)을 받쳐들고 있다.
성상화 이콘(Icon)은 러시아 정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기도 대상이자 숭배 대상이다.
300 가지에 이르는 이콘을 감상 대상인 예술품이 아니라 
신의 세계가 출현한 것으로 여겨 집마다 성소에 걸어두고 기도한다. 

 

십자가에 못박힘

 

아래쪽 감실, 못 박힌 손발에서 피 흘리는 모자이크 이콘 '십자가에 못박힘'을 본다.
교회 이름을 왜 그리스도 부활성당이라고 붙였을까?
알렉산드르 3세는 암살 당한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를 아마도 
인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에 비유하고 싶었을 것이다.

 

[영상] Cathedral of the Resurrection of Christ in St. Petersburg, Russia 외부

 

 

 

임경석의 역사극장

조선에 파견된 ‘파란 눈’의 혁명가

 

헝가리 출신 존 페퍼, 조선공산당 대회 준비 도우려
교수·기자로 위장하고 코민테른 특사로 찾아와

헝가리 혁명을 이끈 세 사람이 1919년 열린 헝가리공산당 대회장에서 걸어가고 있다. 가장 왼쪽이 존 페퍼다. 임경석 제공

 

코민테른(국제당)은 가맹지부에 문제가 생기면 결정서를 채택하곤 했다. 조선지부에 대해서도 그랬다. 1927년 4월29일자 조선문제결정서도 그중 하나다. 조선공산당 제2차 대회 대표자 김철수가 러시아 모스크바에 가서 국제당 외교를 승리로 이끈 결과였다. 당권이 제2차 당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회에 있음을 인정한 중요한 문서였다.

 

이 문서에는 차기 대회를 국제당 대표의 입회하에 열어야 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국제당 집행위원회 대표가 참가”해 가까운 장래에 조선공산당 대회를 소집하되, 민주주의적 방법으로 대의원을 선출해야 한다는 규정이었다.1 조선공산당의 조직 내 단결이 불충분하고 정치노선과 조직노선이 불완전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국제당 특사가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헝가리 혁명 지도자에서 떠도는 망명가로

 

국제당 특사가 찾아온다? 가혹한 식민통치에 신음하는 조선 현지에서 외국인이 참석하는 당대회 개최가 과연 가능할지 의심스러웠다. 파란 눈의 외국인이 조선에 들어올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는 결정이었다.

 

두 달 뒤 대표가 확정됐다. “조선공산당대회 준비를 위해 존 페퍼(John Pepper) 동무를 코민테른 대표로서 조선당에 파견한다”는 내용이었다.2 국제당 최고위 집행기구인 간부회가 내린 권위 있는 결정이었다.

 

존 페퍼는 누군가. 그는 헝가리 사람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대혁명의 파도가 전 유럽에 휘몰아칠 때,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폐허에서 혁명을 이끌던 요제프 포가니(1886~1938)였다. 그는 유명한 벨라 쿤과 더불어 1919년 3~7월에 고조된 헝가리 혁명의 주요 지도자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단명했지만 헝가리소비에트공화국의 요직도 맡았다. 국방인민위원, 외무인민위원부 차관, 교육인민위원 등을 역임했다. 하지만 그해 8월1일 군부의 정변으로 혁명정부가 전복되자, 소비에트러시아로 피신한 이래 평생토록 해외에서 떠도는 망명자가 됐다.

 

국제당은 망명자들에게 훌륭한 활동 무대가 됐다. 페퍼는 1921년 독일공산당의 혁명 봉기를 돕기 위해 독일로 파견됐다. 독일 ‘3월 행동’이 실패한 뒤 모스크바로 되돌아오긴 했지만, 그의 해외 편력은 계속됐다. 1922년 7월에는 미국으로 갔다. 미국공산당 내 헝가리계 당원들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존 페퍼란 이름은 바로 이 시기에 사용하던 필명이었다. 그곳에서 페퍼는 출중한 활동력을 발휘해, 당내 유력한 지도자 그룹의 한 사람으로 부상했다.

 

오른쪽 사진은 35살 무렵의 존 페퍼. 당시는 요제프 포가니로 불렸다. 임경석 제공

 

트로츠키 규탄하는 연설자로도 등장

 

1925년 모스크바로 소환된 페퍼는 국제당 각급 기구의 활동가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에 국제당 집행위 비서부와 조직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됐고, 선전선동국장에 임명됐다. 그때부터 페퍼는 국제당 내에서 전천후 임무를 수행하는 인물로 떠올랐다. 같은 시기에 국제당 주재 미국공산당 대표부를 이끌었고, 국제당 영국 비서부 비서로도 재직했다. 전세계 영어사용권 지역의 모든 문제에 의견을 피력하는 입장에 섰다.

 

페퍼는 부끄러움 모르는 기회주의자라는 악명도 얻었다. 이전까지 그는 국제당 의장 지노비예프의 후원을 받아온 측근이었다. 모스크바로 망명한 뒤 줄곧 그랬다. 하지만 당시 진행하던 권력투쟁에서 스탈린이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한 페퍼는 정치적 생존과 미래의 성공을 위해 옛 동료를 기꺼이 버리기로 결심했다.3 1926년 여름 <더 데일리 워커>(The Daily Worker)에 지노비예프를 비판하는 기고문을 게재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1927년 9월 국제당집행위 회의에서 트로츠키를 규탄하는 주요 연설자로 등단하기도 했다. 페퍼가 조선 문제에 대한 국제당 특사로 임명된 것은 이 시점에서였다.

 

1927년 11월7일을 며칠 앞둔 때, 페퍼는 일본 고베항에 도착했다. 러시아혁명 8주년 기념일이 코앞이었다. 경찰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혁명을 찬양하는 군중집회와 시위를 차단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경찰력을 총동원했다.

 

배에서 내리기도 전에 경찰이 다가왔다. 일본에 온 목적이 무엇이냐, 일본에 친구가 있느냐, 과거에 일본에 와본 적이 있느냐, 얼마나 오래 체류할 것이냐 등을 물었다. 페퍼는 자신을 <AP> 통신 베를린 지국에서 파견한 캐나다인 기자라고 했다. 도쿄지국에 보내는 추천서와 신분증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관헌으로부터 별다른 의심을 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취재차 일본 출장길에 오른 언론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다행히 그를 미행하는 감시인은 없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유럽인이 비합법적 업무를 보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페퍼가 보기에, 일본 최대 도시인 도쿄는 당시 인구가 200만 명이었지만 유럽인이 숙박할 수 있는 호텔은 2곳밖에 없었다. 페퍼는 그중에서 ‘임페리얼호텔’에 투숙했다. 바로 ‘일본의 영빈관’이라는 데이코쿠(帝國)호텔이다. 이처럼 값비싼 최고급 호텔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페퍼는 “나는 좀더 저렴한 룸을 구하려 노력했지만, 모두 차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라고 변명했다.4 국제당의 적잖은 공적 자금을 쓰는 처지라 윤리적으로 부담을 느꼈던 듯하다.

 

존 페퍼가 조선 방문에 앞서 장기 투숙한 일본 도쿄의 데이코쿠호텔 본관과 정원. 임경석 제공

 

조선인 유학생과 외국인 교수인 양 ‘비밀 접촉’

 

페퍼의 첫 과업은 비밀결사 조선공산당 집행부와 접촉하는 것이었다. 그가 시도한 방법은 일본에서 간행되는 조선어 신문 <대중신문>을 통하는 길이었다. <대중신문>은 조선공산당의 재일본 합법 기관지였다. 그가 가진 것은 그 신문사 주소뿐이었다. 과연 그를 통해 비밀결사 지도부와 연락할 수 있을까? 다행이었다. 페퍼는 서울의 비밀결사 집행부와 교신하는 데 성공했다.5

 

페퍼는 만남 장소로 도쿄를 희망했다. 조선공산당 집행부 구성원들더러 도쿄로 와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5명으로 구성됐다. 양명(梁明), 김세연(金世淵), 최익한(崔益翰), 최창익(崔昌益), 김영식(金泳植)이다.6 그들이 한꺼번에 경성을 떠나 도쿄로 이동하는 건 부자연스럽고 위험한 일이었다. 왜 이처럼 무리한 일을 요청했을까? 아마 페퍼는 공포를 느꼈던 것 같다. 비밀 회합을 하는 데 경성보다는 도쿄가 훨씬 더 안전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페퍼는 오래 기다려야 했다. 처음 예상한 것 이상으로 길었노라고 뒷날 회고했다. “그들의 도쿄 여행 일정은 거의 2주일이 소요됐습니다. 보통 서울에서 도쿄로 가는 여정은 이틀 이상 걸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여행에 2주일이 걸렸습니다.”

 

회합이 성사된 때는 12월 초쯤이었던 것 같다. 도쿄 시내의 유럽식 고급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페퍼는 도쿄에 있는 한 대학의 유럽인 교수로 꾸몄고, 조선인들은 도쿄를 떠나는 교수를 환송하는 대학생들로 위장했다. 환송연 장소에는 조선인 8명이 참석했다. 이 중 4명은 경성에서 온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이었다. 나머지 4명은 아마 같은 당 일본총국 간부였을 것이다. 참석자들은 새 넥타이나 모자 같은 것을 부랴부랴 장만해야 했다. 외국인 교수에게 고급스러운 환송연을 베풀 수 있는 유족한 학생들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에 유럽인 위한 호텔은 단 하나

 

의안은 제3차 당대회 준비에 관한 것이었다. 어디서 대회를 열 것인가? 페퍼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나 중국 상하이에서 대회를 열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조선 동무들은 조선 내에서 대회를 열어야 한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했다. 해외 개최론은 위험할 뿐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의견이었다. 13개 도와 2개 해외총국의 대의원들이 대거 해외로 이동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페퍼는 결국 조선 동무들의 의견에 동의했다.

 

다음 논점은 페퍼의 대회 참석 여부였다. 페퍼는 조선 내지에서 열리는 당대회라면 불참하겠다고 했다.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조선인 동료를 위험에 빠뜨릴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페퍼는 당대회에서 사용할 문서 네 종류를 제공했다. ①당대회 소집 원칙 ②행동강령 ③조직 문제 결의안 ④정치 문제 결의안이다. 페퍼는 이 문서들이 당대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대신할 것이라고 말했다.

 

페퍼가 조선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건 아니다. 그가 최종 목적지인 경성에 도착한 때는 12월10일 즈음이었다. 그의 소견으로, 경성은 ‘커다란 농촌’이나 다름없었다. 유럽인을 위한 호텔은 단 하나밖에 없고, 외국인이 경성에 도착하면 그것은 곧 사건이 될 정도였다. 자신과 같은 유럽인이 비밀활동을 하기엔 너무나 위험한 곳이었다. 경성에 도착해, 페퍼가 처음 외출한 곳은 조선총독부 청사였다. 거기서 문헌, 음악, 민속, 경제 사정 등에 관한 정보를 물었다. 정치 문제는 건드리지 않았다. 페퍼가 <AP> 통신 기자를 자임했음에 유의하자. 그는 취재를 위해 경성에 찾아온 언론인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페퍼는 단 한 사람의 조선인 동료도 만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그들과 연결을 맺는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머지않아 페퍼는 조선을 떠났다. 중국 상하이를 경유해 모스크바로 되돌아갔다. 그리하여 이듬해 1월21일 모스크바에서 평가 모임이 열렸다. 페퍼의 조선 출장 보고를 듣기 위해 국제당 영미비서부 회합이 열린 것이다. 당시 조선 업무는 일본과 더불어 영미비서부 소관으로 편제돼 있었다.

 

코민테른의 파견 결정은 ‘실패’였다

 

페퍼는 방어하는 데 노력했다. 자기 역할이 소극적이었다거나 실패했다고 보는 듯한 주위의 시선에 맞섰다. 그는 모스크바에선 조선에 관한 최신의 정확한 정보를 얻기가 어려움을 지적했다. 국제당이 이용할 수 있는 정보는 낡아서 실제 상황을 반영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무지를 고백했다. 하지만 자기뿐만이 아니었다. 그 점에 관한 한 국제당의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나는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우리의 결함들 중 하나는 우리가 전혀 모르는 것들에 관해 가끔 어떤 방침을 주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뼈아픈 지적이었다. 페퍼는 유럽인을 조선에 파견하기로 한 국제당의 결정이 애초에 무리였음을 시사했다. 조선 내에서 열리는 당대회에 참석하는 건 어떤 백인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단언했다.

 

페퍼의 체험담은 흥미롭다. 실패하지 않았다고 강변하는 대목은 설득력이 있는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실패 원인에 대한 토로는 경청할 만하다. 국제당의 현실에 대한 통렬한 자기비판이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김철수·김강 번역, ‘고려 문제에 관한 결정서’(1927년 4월29일의 결정), 2쪽, РГАСПИ ф.495 оп.45 д.13 л.113об

2. Minutes of the Korean Commission, РГАСПИ ф.495 оп.45 д.13 л.129, 1927. 6.28.

3. Sakmyster, Thomas L., A Communist Odyssey: The Life of József Pogány/John Pepper. Budapest and New York: Central European University Press, pp.136~144, 2012.

4. Report of Comrade Pepper to the Bureau of the Anglo-American Secretariat, p.6, 1928. 1.21.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56 л.10~27

5. Sen Katayama, On the Korean Communist Party Problem, p.2, 1928. 2.29.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56 л.116~119

6. ‘중앙집행위원회 보고, 제1호’ 3쪽,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56 л.69~74об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 도스토옙스카야 역 플렛홈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은 1955년 11월 15일에 첫 노선이 개통되었다. 
소비에트 연방 시대에는 레닌그라드 지하철이라는 이름이었다. 
모스크바 지하철처럼 화려한 내부 장식으로 이름이 높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도시내 고속 교통 기관에 관한 최초의 계획은 
적어도 1899년에는 존재했으며, 그것은 고가식 철도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 내전을 거치면서 러시아의 수도는 

모스크바로 옮겨졌고 계획은 10년 이상 나오지 않았다. 
1935년 모스크바 지하철의 개통을 계기로 1930년대 후반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하철 건설 계획은 다시 부상했다. 
하지만 모스크바와 마찬가지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지하 구조물 굴착은 
지하수와 지하 동굴 때문에 일반적으로 어렵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플렛홈 붉은 모자이크 벽을 배경으로 인증샷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현대적인 지하철망의 역사는 주요 철도의 터미널역을 
모두 연결하는 노선 건설이 시작된 1940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계획은 지연되었고, 이 노선은 1955년 11월 15일에 개통되었다. 
당초 구간에는 7개 역이 있으며, 몇 달 후에 8번째 역인 푸시킨스카야 역이 개통되었다. 
이 구간은 키롭스코 비보륵스카야 선의 일부가 되어, 
시 중심부 모스크바와의 열차가 발착하는 역인 모스크바 역과 
시의 남서부에 있는 키롭스키 공업 지대를 연결하고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

계속해서 북쪽으로 확장이 이루어지면서 1958년에는 네바강을 통과하는 구간이 개통되었고, 
나아가 1970년대 중반에는 새로운 주택 개발이 진행되던 
북쪽 구간을 연결하기 위하여 비보륵스키 지구까지 건설되었다. 
1978년에는 시의 경계를 넘어 레닌그라드주까지 연장되었다.

 

100 미터가 넘는 지하철 에스컬레이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거친 지질은 종종 지하철 건설공사를 방해했다. 
최악의 사례는 1970년대에 진행된 키롭스코 비보륵스카야 선의 터널 구간 공사 
도중에 일어났는데 이는 네바강 지하에 동굴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기술자들은 어떻게든 터널을 완성했지만, 1995년에 이 구간의 터널은 폐쇄할 수밖에 없었고 
레스나야 역-플로샤치 무제스토바 역 구간은 한동안 침수된 상태로 있었다. 
9년 이상 동안 이 노선의 이북 구간은 지하철망 이외의 구간에서 물리적으로 분할되었고, 
2004년 6월에 새로운 터널이 개통되면서 원래대로 회귀했다.

 

지하철 도스토옙스카야 역사

2008년에는 프라보베레즈나야 선의 일부가 분할되면서 
새로운 5번째 노선인 프룬젠스코 프리모르스카야 선이 되었다. 
프룬젠스코 프리모르스카야선은 북부에 위치한 프리모르스키 지구와 
남부에 위치한 프룬첸스키 지구를 연결하는 노선이다.
현재는 총 5개 노선이 운행하고 있다.

 

블라디미르(Vladimir) 광장 도스토예프스키 동상

도스토옙스카야 역 앞 블라디미르(Vladimir) 광장에 있는 
도스토예프스키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 1821~1881)의 동상이다.
러시아문학의 대표자이며 예언자, 선각자, 심리학자, 잔인한 재능을 지닌 시인 
등으로 불려지는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 11월 11일 모스크바의 구제병원 
부속관사에서 군의관을 아버지로 7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난다. 

아버지는 상당히 엄격했지만 그는 어릴 적부터 
조용한 성격이었고 독서를 무척 즐겼다고 한다. 
가정 형편은 부유하지 않았지만 세습사족으로 그런대로 살만은 하였다. 
13세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기숙학교에 들어가고 그의 어머니는 그가 15살 때 돌아가신다. 
아버지는 17세때 그의 영지에서 농노에 살해당한다.

1847년초, 도스토예프스키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미하일 페트라셰프스키의 집에서 매주 한 번씩 열리는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문학, 철학, 정치를 포함한 광범위한 주제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약 1년이 지난 어느날, 도스토예프스키는 새벽 4시에 잠에서 깼다. 
그의 방에 웬 남자가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이른바 ‘페트라 셰프스키서클’ 이라 불리는 비밀조직에 가담한 죄로 긴급 체포되었다.

당시 제정 러시아의 황제였던 니콜라이 1세는 

유럽 전역에 퍼진 정치적 불안에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프랑스에 공화정부가 들어선 마당에, 러시아에서도 혁명이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정치적 질서를 바로잡는 동시에 자신의 통치자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황제는 잠재적인 반체제단체를 면밀히 감시했다. 
그리고 운 없게도 페트라셰프스키 서클이 그 감시망에 걸려들고 말았다.

강도 높은 심문이 넉달이나 이어진 끝에, 
페트라 셰프스키 서클 구성원들에게 전원 총살형이 선고되었다. 
혹독한 추위가 살을 에는 듯하던 12월의 어느날 아침, 간수들이 스물 여덟 살의 

청년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롯한 죄수들을 어딘가로 끌고가 일렬로 세웠다. 
10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열 여섯 명의 사수(射手)들이 있었다. 
곧 이어 죄수들은 명령에 따라 세 명 씩 짝을 이뤄 나뉘었다. 
가장 먼저 처형될 세 명에게 두건이 씌워졌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속한 무리는 다음 차례였다. 
집행관의 우렁찬 신호가 울려 퍼졌다. 

“장전! 조준!”

뒤이어 정적이 흘렀다. 
“발사!” 신호는 없었다. 
대신 특사가 가져온 황제의 새 명령문이 큰소리로 낭독되었다. 
“죄인들의 목숨만은 살려주되, 사형대신 장기간 복역형을 명하노라!”

이 극적인 상황은 전부 니콜라이 1세가 꾸민 일이었다. 
그들이 죄의 무게를 확실히 깨달을 수 있도록 사형집행 
직전의 상황까지 몰고간 후에 형량을 감해 준 것이다. 
얼마 후 도스토예프스키는 옴스크로 이송되었다. 
그는 그곳에 도착한 1850년 1월부터 강제노동에 시달리며 4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여느때 처럼 고된 일과를 마친 후 무거워진 마음을 안고 침상에 누운 순간, 
작가의 뇌리를 스친 문학적 영감이 어두운 감방에 한줄기 빛을 드리웠다. 
그리고 그 빛은 훗날 <죄와 벌>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블라디미르(Vladimir) 광장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y)  동상

도스토예프스키는 옴스크에서 복역하던 시절에 이미 
‘범죄의 고백’을 다루는 이야기를 쓰기로 마음 먹었지만, 
1860년에 이르러서야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오랫동안 마음에 품었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딱 알맞은 실존 인물을 우연히 알게 된 덕이었다. 


당시 도스토예프스키는 친형 미하일이 창간한 월간지
<브레미아, (Vremya 시대)>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고 있었다. 
<브레미아>는 일반인의 사회 참여를 도모하는데 주력하는, 
자그마치 500쪽에 달하는 두툼한 잡지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기삿거리를 찾아 프랑스의 법정을 뒤지고 다니다가 
아주 이례적인 사건 하나를 접하게 되었다.

피에르-프랑수아 라스네르는 여느 범죄자와 확연히 달랐다. 
그는 재기 넘치고 박식하며 자의식이 강한 살인마였다. 
라스네르는 주먹다짐을 하던 상대가 죽어버린 일을 계기로 본인이 타고난 범죄자임을 깨달았다. 
죽어버린 상대 앞에서 그가 느낀 것은 죄책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 태어난듯 성취감마저 느꼈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는 관심사를 시 쓰기로 돌렸지만, 

시인으로서의 평온한 삶에 만족할 그가 아니었다. 


라스네르는 수차례에 걸쳐 강도 행각을 벌였고, 
매번 누군가의 목숨을 끊는 것으로 자신의 ‘범죄 예술’을 완성시켰다. 
그는 다시 감옥에 갇혔지만, 쇠 창살 안에서 보내는 시간을 

자신의 죄를 탓하는데 허비하지 않았다. 
그에게 감방이란 문학과 정치와 종교에 관해 조용히 사색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 비상한 범죄자의 사연에 매료된 도스토예프스키는 라스네르를 모델로 
<죄와 벌>의 타락한 주인공으로 지온 로마노비치 라스콜리니코프를 탄생시켰다. 
소설과 현실의 두 범죄자는 모두 살인을 돈버는 수단으로 치부하고, 
둘 다 죄질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는다. 
그러나 실상 라스네르는 라스콜니코프만큼 돈에 쪼들리는 형편은 아니었다. 
가난한 자의 비애에 관해서라면, 

감방에 갇힌 프랑스의 살인마보다 작가 자신이 훨씬 더 전문가였다.

 

도스토예스키(Dostoevsky) 기념관 건물

 

블라디미르 광장을 끼고 돌아가면 쿠드네치니 (Kuznetsjny Pereulok) 골목 5번가
모퉁이에응 도스토예프스키가 마지막 생을 살았던 집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끊임없이 빚쟁이들의 위협에 시달렸다. 
1865년, 그는 돈 문제를 잊고 집필에 집중하기 위해 독일의 비스바덴으로 떠났다. 
그렇지만 빚쟁이들에게서 벗어났을지언정 나약한 자신에게선 벗어날 수 없었던 그는 
그곳에서도 도박에 빠져 금세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가 모든 것을 잃었던 그 순간이 곧 <죄와 벌>이 탄생한 순간이기도 했다.
이전에는 머릿속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생각의 단편들이, 
‘파산의 충격’으로 한데 모여 하나의 이야기 틀로 짜인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집필에만 몰두했다. 
물론 돈이 절실했지만, 그래도 작가로서의 자존심을 꺾을 만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느날 갑자기 어느덧 꽤많은 분량으로 늘어난 <죄와 벌> 원고를 
깨끗이 포기하고 처음부터 새로 쓰기로 결정했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새로운 형식, 새로운 줄거리가 내마음을 사로잡았다.’면서, 
그때까지 쓴 원고는 모두 불태워 버렸다고 전했다. 
과연 작가의 본능은 옳았다. 
완전히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자, 펜이 종잇장 위를 
훨훨 날듯이 움직이며 엄청난 속도로 이야기가 진행됐던 것이다.

그로부터 약 3개월 후인 1866년 1월, <죄와 벌> 제1부가 
<러스키베스트니크 (RuskiiVestnik)>에 실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미 수많은 작품을 써왔지만, 

이번 작품은 그의 전작들을 모두 뛰어넘는 수작이었다. 


어느 평론가는 이 작품을 두고 ‘저자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러스키베스트니크>는 12개월 동안 <죄와 벌>을 연재했고, 
그동안 정기 구독자 수가 500명이나 늘어나는 특수를 누렸다. 
이렇듯 문예지를 통해 러시아 문학계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은 <죄와 벌>은, 
이듬해인 1867년에 두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도스토예스키(Dostoevsky) 기념관 건물

도스토예프스키는 사형을 언도받고 총살직전 황제의 특사로 4년 징역과 
4년의 병역 복무로 감형되어 시베리아 유배지 옴스크로 호송되는 중에
성서를 선물받아 유형지에서 탐독하게 되고 그의 삶이 바뀐다.
그의 인생관은 이 춥고 고독한 유형지에서 완성되고 이 경험은 <죄와 벌>에서 묘사된다.

그는 젊은 시절의 무신론에서 벗어나 윤리적 이상과 고난을 통한 구원 등을 확신하게 되고
열악한 환경과 다른 죄수들로부터 적대감과 따돌림을 당하는 등 그가 겪은 심리적 고통
또한 성경을 통한 새로운 인생의 변화 등이 그의 작품 속에 잘 나타난다.
온갖 부류의 죄수를 통한 러시아 민중의 실체를 깨닫고 

인간 행태에 대한 작가적 통찰력을 키우게 된다.

이 시기의 고통으로 간질을 앓게 되어 평생을 고생하게 된다.
1854년 옴스크에서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몽고 근처 세미 팔라틴스크의 

보병대대에 배치되고 36세에 하급관리 미망인 마리아와 결혼한다.

마리아는 알코올 중독자인 하급관리의 아내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금발의 매력적인 여자이긴 하지만 

서른 나이에 변덕스럽고 신경질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데도 도스토예프스키는 남편 있는 마리아를 사랑하는 데 이 여자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관심조차 없다가 미망인이 되고 나서 도스토예프스키가 

하급장교가 되자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등 뻔뻔스런 여인이었다. 
하물며 결혼 전날 밤에도 마리아는 다른 남자와 함께 지냈다고도 한다. 
폐병으로 죽어가는 여자와 일주일에 두 번 씩이나 간질 발작을 일으키는 
그들의 생활은 힘든 삶으로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1859년 도스토예프스키는 폐렴을 앓던 마리아와 함께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는 허가를 받게 되고 1864년 아내 마리아가 죽고 경제적 후원자인

동생마저 죽자 재정적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서도 도스토예프스키는 41~42세 때 당시 동료 남학생에 바람맞은 여대생

폴리나를 만나 함께 여행다니면서 별의 별 애정 행각을 다 벌이면서 여전히 도박에 빠진다.

 

특히 도박 롤렛을 좋아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수년 간 채권자를 피해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외국에서 도피 생활을 하게 된다.
44세까지 여행과 도박에 미쳐 빈털터리가 되고 폴리나는 그에 질려서 청혼을 뿌리치고 도망친다.

그러다가 사랑하는 폴리나를 만나기 위해 급전이 필요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1866년 악덕 출판업자와 불리한 계약을 하게 된다. 
계약 내용은 어리석게도 한 달 안에 새 장편소설을 완성해서

원고를 넘겨주지 않으면 모든 저작권을 출판사에 넘기기로 합의한다는 것이었다.

 

도스토예스키 기념관 입구

 

도스토예스키 기념관은 넵스키 대로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년 그의 탄생일에는 각종 축제가 열리고 또한 작품의 무대를 순례하는 
애독자 관광객들의 행렬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대표작 <죄와 벌>에 나오는 센나야 광장이나 

S골목(Stolyarnyi Lane) 하숙집, K다리 (Kokushikin Bridge)를 찾아다니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작가와 동시대를 교감해 울림을 맛보는 것이다.

간질과 빈곤 두 가지 재앙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던 이 대작가는 
계약을 이행하지 못할 경우 금전적으로 엄청난 불이익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고민 끝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라는 속기사를 고용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을 구술하고 안나는 그것을 속기로 받아 적는다. 
작업은 놀랍게도 26일 만에 끝난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작품이 바로 소설<도박꾼 The Gambler>이다.

1866년 <죄와 벌>,  1869년 <백치> 1872년 <악령> 등을 완성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1873년 러시아로 돌아왔을 때는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작가가 되어 있었다.
1880년 도스토예프스키는 마지막 소설 카리마조프의 형제들을 발표하고
1881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바로 이 기념관에서 60세의 나이로 폐동맥 재출혈로 사망했다.

 

도스토예스키 기념관 입구

작가와 속기사의 관계로 처음 만나게 된 두 사람은 

이후 서로 사랑을 느끼고 결혼까지 이른다. 
속기사에서 대문호의 부인이 된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예프스키는 
나중에 회고록을 남기게 되는데, 책 속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중년부터 말년까지 14년 동안의 삶을 정밀하게 묘사한다. 
남편으로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다음의 삽화는 특히 정겹다. 

안나가 임신을 하자 길눈이 어두웠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언제라도 산파를 부르러

갈 수 있도록 미리 길을 익히기 위해 매일 산파의 집까지 산책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안나가 고열에 시달리며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 
신심깊은 사제의 집에 찾아가 통곡하며 그녀없인 살수 없다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대작가의 진솔하고 순수한 사랑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입장권 매표소

안나와의 결혼 피로연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의 간질증세가 나타나 
‘사람의 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악마의 포효소리’를 안나의 가족들이 듣고 도망치지만 
안나 역시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지만 안나는 당황하지 않는다. 
더우기 안나의 신혼 집은 절대 빈곤할 뿐만 아니라 전처의 자식, 친구의 아들, 
조카 등이 들끓었고 남편의 지독한 도박광으로 안나의 결혼반지까지 저당 잡혀가며 
도박을 할 정도였다고 하니 안나와 도스토예프스키는 하늘이 맺여준 인연인가 보다. 

당시 러시아의 사회 풍토는 남녀 교제가 자유로울 뿐 아니라 
이혼도 쉬웠지만 어떤 고난과 시련도 그녀를 이기지 못했다. 
스물 다섯이나 많은 도박꾼에 간질병자인 남편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더욱이 그의 차남은 54세 때 늦게 보았지만 아버지의 간질 유전으로 세살 때 죽고 만다.

 

짐 보관소

세상에 남편을 위해 헌신 희생하는 숭고한 여인도 많지만 그녀가 살아가는 동안 
그녀도 결혼 반년 만에 도저히 참지 못하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그녀가 곁에서 오랫동안 도스토예프스키를 보좌해 지켜줌으로 
작가의 천재성에 지대한 영향을 남기게 되고 위대한 작품이 탄생된 것이다.
화를 내다가도 상대의 심정을 미리 이해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는 노력은 
정말 아름다운 여인의 희생이며 그를 위대한 작가로 탄생시킨 길이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이런 안나의 희생을 알고 있었던지
“나의 모든 미래는 그대에게 달려 있소. 그대는 나의 희망이자 행복이며 축복이오”
“나는 늘 꿈속에서 당신과 키스하고 있소. 당신의 몸에서 내 입술을 떼지 않고...”
이렇게 그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다.

 

기념관 1층 전시실에서 인증샷

도스토예프스키가 도박을 한 날에는 죄책감에 아내에게 꾸짖어 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맹세하고도 끊지 못했던 도박, 어김없이 다음날에 도박장에서 
망연자실하는 모습으로 앉아 있곤했다고 한다.

그와 함께 했던 그 가혹한 세월에 안나는 과연 무엇을 보았을까?
밤이 새도록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그의 순결한 영혼만을 사랑하며 
육체적인 고통을 감내하지는 않았을까?
남편이 사망한 후 38년 정도를 더 살았던 안나는 
자신이 사랑한 남자에 대한 추억으로 그 세월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인증샷

 

도스트예프스키 외모는 어땠을까?
“그는 보잘것없는 외모에다 사소 무뚝뚝하며 수염은 약간 불그스름한 빛을 띠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여위어 있고 오른쪽 빰에는 사마귀가 나 있었다. 
의심과 불신으로 때때로 불타오르는 눈은 슬픈 표정을 띠고 있었다. 
그 두 눈에 깊은 생각과 번민을 읽을 수 있었다.. 
그의 그로테스크한 괴기스런 극도로 부자연스런 흉측하고 
우스꽝스런 모습에 더 놀랐을 여인들이지만 그녀는 그 곁에 남아 있었다..

과거의 불행을 한방에 날릴 도스트예프스키의 위대한 

작가의 탄생은 헌신적인 안나의 뒷받침 때문이었다. 
작가로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내가 없이도 존재했지만 

개인으로서 그는 안나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술의 위대성은 고난과 고뇌와 불우한 환경에서 더 현실적인 위대함이 탄생될 수 있다.
예술의 가장 위대한 원천은 사랑이다. 
한없이 부어주는 사랑과 그 단절 속에 갈증이 샘물같은 예술의 원천이 된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레프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문호이다. 
그의 문학 작품은 19세기 러시아의 불안한 정치, 사회, 영적 분위기에서 
인간의 심리를 탐구하며, 다양한 현실적인 철학과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의 작품과 사상은 당대의 내로라하는 지성들에게 큰 영향을 끼첬고 
많은 인물들에게 천재 또는 위대한 작가, 사상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안타깝게도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는 생전에 한 번도 서로 만나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1878년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의 
철학 강의가 열린 솔랴노이 고로독이 그 장소였다. 
당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는 같은 장소에 있었던 것이다. 
톨스토이의 동행이었던 비평가 니콜라이 스트라호프는 자신을 아무에게도 소개시키지 말라는 
톨스토이의 부탁 때문에 그를 자신의 친구인 도스토예프스키에게도 소개시키지 않았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매우 안타까워 했으며 스트라호프를 원망했다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 사후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내 안나 도스토옙스카야로부터 
이 일화를 전해 들은 톨스토이 역시 그 강의에 도스토예프스키가 있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고 그를 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했다. 
톨스토이는 안나에게 도스토예프스키는 톨스토이 자신에게 귀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한 답을 줄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후배 작가 톨스토이에게 강한 열등감이 있었다. 
당대의 비평가 스트라호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트라호프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높게 평가하는 것에 불만을 제기했다는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도 <안나 카레니나>의 완성도에는 감탄했는데 
이 작품을 읽고 도스토예프스키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길거리를 뛰어다니며 
"톨스토이는 예술의 신이다!"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이러한 열광적인 반응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일기에서도 확인된다. 
거기서 이 작품을 '완전 무결한 예술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톨스토이에 대한 그의 열등감에는 톨스토이의 경제력도 한몫했다. 
그토록 뛰어난 실력을 갖춘 사람이 태생도 백작 가문 출신이라 느긋하게 
퇴고를 할 수 있으니, 속기사까지 불러가며 작품을 재빨리 완성해야 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입장에서는 톨스토이를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지 않았다. 
막심 고리키가 쓴 톨스토이 회상록에서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자신이 병들어 있기에 모든 사람들이 병들어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톨스토이가 그나마 가장 높게 평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죽음의 집의 기록인데, 
시베리아 유배지에서의 생활을 담은 내용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작들처럼 
등장 인물의 심리 묘사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등장 인물이 처한 험악한 환경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에 보통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작으로는 간주되지 않는 작품이다.

톨스토이도 나이가 들면서 사상적인 변화가 있었고 
급기야 자기가 썼던 대작들조차 셀프 디스하던 회심(回心) 시기에 접어든다. 
이때 톨스토이는 '자신의 작품을 포함한 모든 문학서를 불살라 버려도 상관없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책들은 모두 보존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악령>을 읽고 감탄했다고도 한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톨스토이가 임종을 맞을 때 
그의 침대 곁에 놓여 있었던 책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말년에는 서로에 대해 존경 비슷한 감정을 가지게된 것 같다. 
서로의 작품에서 각자의 이름이 언급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톨스토이의 후반부 대작 부활의 주인공 네플류도프와 카츄샤가 
젊은 시절 즐겨 읽었던 작품의 작가가 도스토예프스키이며, 
역시 도스토예프스키의 후반부 대작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주인공

이반 표도로비치가 악마와 대화를 하는데 이 때 악마가 이반 표도로비치를 자극하며 
'인간의 예술적 섬세함은 그 대단한 레프 톨스토이도 따라가지 못한다' 라고 말한다.

 

19세기 센나야광장은 죄와 벌의 무대
이 그림은 <죄와 벌> 거의 백년 후의 작품인데, 분위기가 내용과 잘 어울린다.

차가운 족쇄가 도스트예프스키의 발목에 채워졌다. 
그는 시베리야의 옴스크에 위치한 감옥에서 이 무거운 족쇄를 질질 끌고 4년을 보낸다. 
읽거나 쓰는 행위는 일체 금지였고, 종일 중노동에 시달린 뒤에야 고단한 몸을 뉘일 수 있었다. 
비참한 감옥살이를 이어가는 동안,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과 같은 
신세에 처한 허구의 인물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 인물이 겪고 느끼는 일들이 하나하나 그의 머릿속에 펼쳐졌다. 
그는 반드시 살아 남아서 이 이야기를 글로 옮기겠다고 결심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집 계단은 죄와 벌 주인공의 하숙집.

훗날 작가는 <죄와 벌>이 이 감옥에서 지은 이야기라고 전하며 
“나 자신을 잃어가는 것 같은 기분에, 슬픔으로 무거워진 

마음을 안고 침상에 누워서 이야기를 떠올렸다.”
고 회고했다. 

 

감옥 생활을 계기로, 도스토예프스키는 범죄와 

그 동기에 관해 진지하게 숙고해 보게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은 살인자가 아니었지만, 한 인간이 

죄를 짓고 벌을 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똑똑히 이해한 

상태에서 이야기 속 주인공을 살인자로 만들었다.

 

기념관 3층
3층에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이 그대로 복원되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서재 겸 집필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곳에서 그의 마지막 대작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집필했다.
그리고 탈진한 작가는 이곳 소파에서 숨을 거두었다.

 

서재 겸 집필실 - 그가 죽은 1월 28일 8시 38분에 시계는 멈춰 섰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트에서 28년을 살면서
주소를 스무 번이나 바꾸었다.
그는 이 도시를 많이 산책하고 여행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 도시에서 느낀 것을 자신의 작품에 아낌없이 반영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첫 대작은 <죄와 벌>인데 여기 사람들은 이 소설을
페테르부르크의 소설가가 쓴 페테르부르크의 소설이라고 부른다.

 

거실
소박한 거실 테이블 위에는 작가가 생전에 소장했던 담배곽이 놓여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애용하던 담배곽

 

다이닝룸

 

가족 사진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의 방
안나가 썼던 책상, 커텐 뒤에서 찰랑이는 빛을 받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안나는 작가와 속기사로 처음 만났다. 
안나는 당시 속기 교육을 받아 처음 일을 시작하는 단계였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빚 때문에 빠듯한 마감 안에 원고를 완성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불가능해 보였던 탈고를 그들은 멋지게 해냈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결혼을 서두른다. 

25살이라는 나이 차이는 그들의 결혼생활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지독한 가난과 도스토예프스키의 건강이 더 큰 괴로움이었다. 
그러나 둘은 서로에게 좋은 동반자로서 그 문제들을 극복해나가며 
14년 동안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간다. 
안나의 회고록에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했던 행복과 고통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한 작품을 읽을 때 작가에 대한 정보와 작품이 쓰일 당시의 
시대적 상황 등을 함께 놓고 보면 더 풍부한 해석이 가능하다. 
안나의 회고록은 작가이기도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를 엿보게 해준다. 
가족과 빈민들에게 턱없이 부족한 재산을 내주고, 
욱하는 성격에 질투가 강하면서 마음은 무척 여린, 
도박을 좋아하면서 작가로서 성실함을 거스르지 않는 모습들. 

아내인 안나의 눈으로 바라보고 서술한 그들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고 생생해서 한 편의 장편소설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노름을 위해 기계적으로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비판도 존재하지만, 
안나는 오히려 찢어질듯한 가난과 빚 독촉으로 시달리는 상황에서도 
창작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던 그를 존경했다. 
작가로서 도스토예프스키를 평가할 때 그가 놓인 경제적, 
정신적 고난을 고려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회고록에도 담겨있다.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의 방

 

문단과 사회에서는 자주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과 다른 재능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비교하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이 
너무 복잡하고 혼란스러우며 너저분하게 쌓인 잡동사니 더미인 반면, 
다른 작가들의 작품은 잘 다듬어져 있다고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난하곤 했다. 

또한 다른 작가들이 살았던 여건과 작업 환경을 남편의 환경과 비교하거나 
그런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곤차로프 등은 거의 대부분 건강하고 유복한 사람들로서 
자기 작품을 충분히 구상하고 다듬을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두 가지 힘든 질병에 시달렸고, 대가족과 빚을 짊어지고 있었으며, 
내일에 대한, 절박한 빵에 대한 괴로운 생각에 짓눌린 사람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자기 작품을 다듬는다는 것이 가능했겠는가?


2, 3장은 이미 잡지에 실렸고, 4장은 인쇄에 들어갔고, 
5장은 우편으로 <러시아 통보>에 보냈는데, 나머지는 아직 쓰지도 못한 채 구상만 하고 있는

그런 피말리는 경우가 그의 생애 마지막 14년 동안 한두 번 있었던 게 아니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미 인쇄되어 나온 자기 소설을 읽다가 
한순간 잘못 쓴 부분이 확연히 눈에 들어와 자신의 애초 구상이 
훼손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절망에 빠진 적이 너무 많았다.

“되돌려 놓을 수 있다면” 하고 그는 종종 말하곤 했다. 
“수정할 수만 있다면! 무엇 때문에 글이 잘 안 풀렸는지, 
내 소설이 왜 성공하지 못할 지 이제야 보이는군. 
어쩌면 이 실수로 내 ‘사상’을 완전히 죽인 셈인지 몰라.”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안나는 결혼 후에도 속기로 그의 집필을 도우면서 집으로 찾아오는 그의 손님을 환대하고 
채무업자들을 상대하는 등 남편이 작품에 매진할 수 있도록 했다. 
또 빚에 허덕이는 가계 관리를 도맡았는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대한 수입을 늘리기 위해 출판사업을 시작하기도 한다. 
러시아 최초의 도전적인 직업 여성으로 안나를 평가하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없었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후기 작품들은 쓰여지기 어려웠을 거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가정을 지켜내는 아내이면서 작가의 정신적 동반자이기도 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일찍이 자신의 작가 활동에 미치는 안나의 영향력을 인정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를지라도 안나의 회고록을 읽어본다면 그녀는 한시도 한눈 팔지 않고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지켜주고 배려했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에 의해 서술된 도스토예프스키를 우리는 연민을 가지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책상에 놓여있는 노트를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그녀가 관리했던 서적의 숫자들이 빽빽하게 적혀있었다. 
그 책상에 앉아 왼편을 보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서재 입구가 보인다. 
아마도 그녀는 그가 글을 쓰는 중에 굳게 닫힌 문을 종종 바라보았을게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을 마음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채우고서. 


신혼초 안나의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가 나에게 매달려 울면서 몽땅 잃었다고 했을 때 나는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다만 그의 비참한 몰골을 보는 것이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나는 그를 껴안고 ‘울지 말아요’하고 달랬지만 그는 
‘나 같은 놈은 당신의 남편이 될 자격이 없어’하고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내조의 여왕, 안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것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의 주옥같은 작품 <백치>, <도박꾼>, <악령>,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등은 
안나에 의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60세에 폐기종으로 숨을 거둘 때까지 안나는 아내로서, 
독순술(讀脣術)까지 동원한 속기사 비서로서, 출판 동업자로서 헌신적인 역할을 했다. 
아니, 남편이 죽은 후에도 그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고 그를 찬미하는데 헌신했다.

 

딸 류보프의 방

 

류보프 도스토예프스카야

도스토예프스키와 아내 안나의 둘째 딸 류보프 도스토예프스카야 
(Lyubov Fyodorovna Dostoevskaya 1869~1926).
이들의 첫 번째 딸 소냐는 1868년에 태어나 같은 해에 사망했다.

류보프는 결혼하지 않았다. 
나중에 류보프는 어머니와 멀어지고 1913년 치료를 위해 해외로 여행한 후  
1926년 이탈리아에서 악성 빈혈로 사망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어린 시절

 

이 방은 세면실이라고 되어 있던 듯

 

기념관 2층
기념관 2층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애와 작품 등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고 있다. 

 

유리 칸막이 너머로 전시된 전시물들은 LED 조명 처리로 아주 보기 편하게 되어 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데드 마스크(Death mask)가 인상적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육필 원고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 작품 중 하나인 <죄와 벌>의 육필 원고
작가 생전의 체취가 느껴지는 듯 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 작품 속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 곳곳을 잘 묘사하고 있다. 

 

작가가 묘사한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모습을 그림으로 복원해 
전시하고 있는 것은 기념 문학관으로 시사하는 바가 컸다.

 

어둠 속에서 인증샷을 해 본다.

 

도박광 도스토예프스키를 상징하는 도박용품까지 전시되어 있다.

 

1880년 도스토예프스키 사진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러시아의 저명시인 네크라소프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러시아 여성들의 힘은 추위와 굶주림, 무엇보다 무능한 남자들을 
참고 견뎌야만 하는 기구한 숙명에서 온 것이다.”라고.

그녀에게서 과거 한국 여인의 ‘종부상(從夫像)’을 떠올린다.
한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숨을 거둘 때 판명난다고 한다. 
작가의 기념관은 고증은 잘 되어 있었지만 세계적 대작가 기념관 치고는 작고 초라했다. 
하지만 작가가 실제로 쪼들리며 살았고, 미완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집필하며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고 죽어 간 곳이기 때문에 의미는 각별했다. 
그때 그대로 작은 대문에 반지하 형태의 집에 문구류 역시 그의 손때가 묻어 있었다. 
이 모든 것에서 안나의 숨결도 느낄 수 있었다.

 

[영상] Dostoyevsky Museum in Saint Petersburg

 

 

 

Room of Auguste Rod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52.

오귀스트 로댕 (Auguste Rodin 1840~1917)은 프랑스의 조각가이다. 
근대 조각의 시조이며, 근대 조각 사상 가장 위대한 조각가이다.
프랑스 파리 중산층 가정에서 어머니 메리 체퍼와 경찰청 사무원이었던 
아버지 진 밥티스트 로댕 사이에서 출생했다. 
로댕은 10세 때부터 혼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14세부터 17세까지 미술과 수학이 전문화된 프티 에콜(Petite École)

이라는 학교에서 드로잉과 페인팅을 공부했다. 

로댕은 르코크 드 브아도드랑(Horace Lecoq de Boisbaudran)으로부터 
드로잉을 비롯한 미술 교육을 받았다. 
르코크 드 브아도드랑은 그의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관찰한 것을 
그리는 것이 학생들의 인격을 발전할 수 있게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사상은 로댕의 조각품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Eternal spring, early 1900s. by Auguste Rodin. marble, height 7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52

 

조각 "영원한 봄 (Eternal spring)"은 "지옥의 문"이라고 불리는 파리 장식 및 
응용 예술 박물관의 미완성 정문의 구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러나 이 복잡한 작품의 구성 중 하나인 "키스(The Kiss)" 조각과 주제 면에서 인접해 있다. 
이 작품은 처음에는 "제퍼와 지구(Zephyr and the Earth)" 또는 "젊음(Youth)"이라고 불렸다. 

연인의 이미지는 젊은 마음에 떠오른 감정을 의인화한다. 
로댕은 석재 가공의 특별한 방법을 적용했다. 
오목한 부분에서 대리석을 완전히 선택하지 않고 형태를 일반화했다. 
결과적으로 인물은 모호한 윤곽을 얻고 약간 빛을 투과하는 대리석의 흰색 층은 
사랑 장면의 순수함과 순결한 인상을 준다.

 

Cupid and Psyche, 1905. by Auguste Rodin. marble, height 2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52

 

장난으로 또는 의무감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열병을 앓게 만들었던 에로스가 
처음으로 너무나 아름답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인간 여인인 
프쉬케 (Psyche, 영혼을 의미)와 사랑에 빠져 버렸다.

1857년 로댕은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에 입학하기 위해 
자신의 동료를 모델로 만든 찰흙작품을 제출하지만 입학하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두 작품을 더 제출했지만 그마저도 거부되었다. 
그랜드 에콜에 입학하기 위한 요청사항이 그 당시 높지 않았는데도 
입학이 거부되었기 때문에 로댕은 심히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작품들이 거부되었던 가장 큰 원인은 판정가들이 
로댕의 새로운 감각적인 조각품들보다는 신고전주의적인 
작품들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1857년 로댕은 프티 에콜을 떠나게 된다. 
그 후에는 생활비를 위하여 조각가의 조수 등을 지냈는데, 
이는 오히려 관학의 형식주의적 타락을 막아주는 결과가 되었다. 
20여 년간을 장식품들과 건축장식들을 제출하는 일을 하는 장인으로 살았다.

24세 때 최초의 걸작 <코가 망그러진 사나이>를 살롱에 출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862년 그의 누이였던 마리아(Maria)가 수도원에서 복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에게 믿음직스럽지 않은 구혼자를 소개해 주었던 로댕은 

이 일에 죄책감을 느끼고 괴로워한다. 
로댕은 결국 조각을 그만두고 로마 가톨릭 교회 신앙을 가졌는데, 
로마 가톨릭 교회 사제인 피터 주리안 데이말드(Peter Julian Eymard) 
신부는 로댕이 다시 조각을 하도록 격려하였다. 
데이말드 신부가 보기에 로댕은 교회에서 활동하는 것보다 조각을 하는 게 맞는 사람이었다. 

 

Romeo and Juliet, 1905. by Auguste Rodin.  marble, height 7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52

 

로댕은 장식품들을 조각하는 일을 다시 시작했으며, 동물 조각가였던 
앙투안루이 바리(Antoine-Louis Barye)의 수업에 참여했다. 
동물들이 움직일 때의 정교한 근육조직들을 훌륭히 표현했던 
바리의 작품들은 로댕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875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는데, 그것은 자연으로부터의 
새로운 출발의 의미가 있으며, 〈청동 시대〉를 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1864년 평생의 반려자인 재봉사 로즈 뵈레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아들 오귀스트 외젠 부렛(Auguste-Eugène Beuret)을 
낳았으며, 처음으로 조각 전시회를 가졌다. 
전시회를 계기로 명성 높은 조각가 카리에 벨뢰즈 아틀리에(Albert-Ernest Carrier-Belleuse)의 
작업실에서 작업을 했는데, 지붕, 계단, 그리고 출입문 장식들을 도맡아 하였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인해 로댕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나 카리에 벨뢰즈 아틀리에의 요청으로 벨기에 브뤼셀에서 
증권 거래소 건물 장식들을 만들며 미술활동을 계속했다. 
1875년부터 이탈리아에서 체류했고 1877년에 프랑스로 귀국했다. 

 

Poet and muse, early 1900s. by Auguste Rodin. marble, height 6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52

 

로댕의 연인은 카미유 클로델이다.
1881~1882년 로댕은 자신의 제자이자 동업작가인 
카미유 클로델(작가 콜로델의 누이동생)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클로델은 16년 뒤 그와의 결별 후 정신이상자가 되었지만, 로댕은 <칼레의 시민들>, 
<빅토르 위고>, <발자크> 같은 중요한 여러 작품의 주문을 받는다. 
이 중 마지막 두 작품은 거절을 당한다. 

1900년에 로댕은 조각가로서 대성공을 거둔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1905년 그의 비서로 활동했으며, 
1908년에는 현재의 로댕 미술관인 비롱 호텔을 빌리도록 촉구하였다. 
1916년 작품과 전시물을 국가에 기증하고, 1917년에 세상을 떠났다.

19세기에 들어 조각계에는 뤼드나 바리, 카르포 등이 등장했으나, 
조각은 여전히 회화에 종속되어 있어, 이 3인의 출현도 
아카데믹한 경향에 저항하는 소수의 움직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조각의 고정관념을 근저로부터 깨고 새로운 전도(前途)를 개척하여 
조각에 대한 인식을 회화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은 로댕의 제작이었다. 
그러나 로댕은 생활에 쫓겨서 조각작품의 발표가 늦어졌다. 

 

Bronze Age, between 1877 and 1914. by Auguste Rodin. gypsum, height 1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52

 

로댕이 최초로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것은

〈청동시대(靑銅時代 1896)〉를 발표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그것은 공격의 대상이었다. 
심사원은 그 생생한 청년상을 보고 산 사람을 방불케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최선을 다한 로댕의 오랜 기간의 탐구와 관찰로 이루어진 것으로, 
조각을 하나의 형(型)에 따라 제작하는 사람이나, 
고정된 미(美)의 관념으로 보는 사람은 이해하지를 못하였다. 

그것은 인간의 외형을 단순하게 묘사한 것이 아니고, 작가가 포착하고 생각한 인간상을 
한 사람의 청년의 육체를 통해 생명 있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로댕은 시종 기성관념과 충돌하여 가지만, 그는 살아 있는 것같이 조각하는 것이 아니라 
조각 속에 산 인간을 놓고 생명의 상호 접촉을 실현시켰다. 
그러므로 빛과 그늘의 역할을 아주 크게 비약케 하여 
조각의 면(面)이나 요철(凹凸)을 내적 생동에 결합시키고 있다. 

 

로댕은 〈지옥의 문〉을 구상하여 초인적인 노력으로 인체의 비밀을 탐구하였다. 
인상(人像)은 외치고, 두려워하고, 노호하면서, 공간에 머물러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순간적 모습을 보여 약동의 분방성(奔放性)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창조된 것은 기왕에 걸쳐 있던 건조의 구렁으로부터 
끌어 내어 점토에 살아 있는 언어를 부여했다. 
더욱이 만년에는 〈발자크 상(像)〉(1898)을 발표하여 더 한층 물의를 자아냈다. 

그것은 문호(文豪)가 잠옷 바람의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인데, 이 제작은 부분을 떠나 
조상을 거대한 덩어리로 조형하여 모든 것을 내부에 포함시켜 
외면의 묘사로서는 불가능한 내면적인 웅대성을 파악하였다. 
그것은 조각 분야에 다시금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으로, 
로댕은 전생애를 통해 조각에는 별재(別在)하는 웅변이 있음을 입증하고, 
전무후무하다고 할 수 있는 기술을 통해 표현의 방법을 모조리 개선하여, 
조각을 근대적인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시켰다.

가장 전형적인 작품이 1880-1900년 제작된 
186인의 인체를 높이 6.50m의 문에 조각한 <지옥의 문>이다. 
1895년 <칼레의 시민>, 1900년 <입맞춤> 등을 계속 발표하였다. 
이어서 1904년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 1907년 <걷는 사람>, 
1913년 <클레망소> 등을 비롯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미켈란젤로 이후의 최대의 거장으로 예리한 사실의 기법을 구사하여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의 감정 안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약동을 표현하려 하였다. 
이로써 근대 조각에 새로운 방향을 여는 동시에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Auguste Rodin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oom of Henri Matisse,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438~440번 홀은 20세기 프랑스 야수파 화가 앙리 마티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1869~1954)는 20세기 프랑스 미술계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로 
회화 작품으로 유명하지만 판화, 조각 분야에서도 미술사에 길이 남을 걸작을 남겼다. 
‘색채의 마법사’로 통할 만큼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감각으로 색을 사용했다. 
20세기 초반 야수파 운동을 주도하며 파블로 피카소를 비롯해 유럽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파블로 피카소는 마티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늘 경쟁의식을 느꼈다.

1869년 프랑스 북부 시골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고향에서 서기로 일했다. 
스무 살 되던 해 맹장염 수술을 받고 요양하던 중 취미로 그림을 그리던 
이웃 사람의 권유로 풍경화를 그리면서 예술가의 길에 들어섰다. 
1891년 파리에 있는 국립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 Arts)에 

입학시험을 치렀으나 떨어졌다. 

이듬해 저명한 상징주의 화가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의 화실에 들어가 그림을 배웠다. 
모로는 당시 고전주의 미술과 아방가르드 미술이 공존했던 프랑스 미술계의 다리 같은 존재였다. 
마티스는 그에게서 색채의 중요성에 대해서 깨달음을 얻었고, 고전주의적 화풍부터 
인상파 화가들의 화법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그림을 실험했다. 
1895년 에콜 데 보자르에 합격하여 학교를 다니면서도 1898년까지 모로에게 그림을 배웠다.

 

Room of Henri Matisse,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1905년 마티스와 함께 야수파 운동의 선구자로 유명한 앙드레 드랭(André Derain)을 만났고 
둘은 색과 빛에 대한 새로운 스타일의 실험적인 그림을 그렸다. 
1905년 그들의 전시회를 본 비평가 루이 보셀은 그들의 그림을 혹평하며 
‘야수(Les Fauves)’와 같다고 조롱했고 이후 야수파라는 명칭을 얻었다. 

1905년 거트루드 스타인의 소개로 파블로 피카소를 만났고 친구이자 라이벌로 평생 교류했다. 
두 예술가는 서로 영향을 받으며 폴 세잔 이후 현대 미술의 양대 축을 이룬 예술가로 성장한다. 
1906년 북아프리카 여행에서 아라베스크 무늬와 이국적인 조형물에 
큰 감동을 받았고 그 영향은 이후 그의 작품에 반영되었다.

1907년부터는 과감한 색채가 특징인 야수파 스타일을 버리고 장식적이고 단순한 형태의 그림을 그렸다. 
아울러 회화에서 인체 형태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조각에도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당시 40대 중반이었던 그는 징병을 면했다. 
하지만 전쟁은 그의 예술세계에 영향을 미쳐 이 당시 그린 그림에서는 마티스 특유의 
화려하고 현란한 색채 대신 우울하고 칙칙한 무채색 톤의 그림을 그렸다. 
1917년에 파리를 떠나 니스로 거처를 옮겼고, 더욱 강렬하고 대비가 두드러지는 색채를 사용했다. 
1925년에는 프랑스 정부에서 주는 최고의 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Room of Henri Matisse,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1930년대 이후 마티스는 자신의 예술이 과거를 답습한다는 느낌을 받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타히티, 미국 등지를 여행했고, 직물 디자인, 유리 공예, 

책 삽화, 성당 벽화 등 다양한 분야의 작업을 했다. 
1939년 부인과의 이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등은 예민한 예술가였던 그에게 
큰 스트레스가 되었고 급기야 1941년에는 암 수술을 받았다. 
수술 이후 휠체어에 의지하게 되면서 정상적인 작품 활동이 어려워지자 
안락의자나 침대에 누워 붓 대신 가위를 들고 색종이 작품을 만들었다. 
색종이 작품으로 사물의 본질적인 면을 표현하면서 그의 예술 세계는 더욱 풍부해졌다. 
말년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프랑스 남부 로제르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역시 
색종이 작업에서 영감을 받은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마티스는 단순 명쾌한 선과 밝고 순수한 빛의 색으로 
평면 회화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인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색에 있어서 천재적인 감각을 보여 준 그는 
특히 ‘마티스 블루’라는 이름이 붙은 파란색을 즐겨 사용했다. 
회화 외에도 조각, 동판화, 직물 디자인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954년 그가 37년 동안 살았던 니스에서 암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후 니스에 마티스 미술관이 건립되었으며, 
그의 작품은 현재 세계 각국의 유명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Room of Henri Matisse,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주로 니스에 머무르면서, 모로코 · 타히티 섬을 여행하였다. 
타히티 섬에서는 재혼을 하여 약 7년 동안 거주하였다.
만년에는 색도 형체도 단순화 되었으며, 밝고 순수한 빛의 광휘와 청순 명쾌한 선에 의하여 
훌륭하게 구성된 평면적인 화면은 '세기의 경이'라고까지 평가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시작하면서 1951년에 완성한 

반(Vannes) 예배당의 장식은 세계 화단의 새로운 기념물이다.

그는 '동비중(同比重) · 순일(純一) · 절도(節度)'를 자기 스스로 표현의 3원칙이라 말했다. 
마티스의 이러한 질서에 대한 감각은 자연법칙을 최상으로 하는 

리얼리즘의 입장에서 본다면 길에서 벗어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본질적으로는 
명석한 형식감정을 존중하는 라틴적인 조형정신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균형이 잡힌 무구(無垢)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지쳐버린 사람에게 조용한 휴식처를 제공하는 것과 같은 그림을”

포브 시대의 마티스 그림에 〈호사(豪奢)· 정밀(靜謐)· 쾌락을 위한 에튀드〉라고 하는 작품이 있다. 
보들레르의 시에서 얻은 이 세 낱말은 마티스의 예술적 생애를 단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항상 색채를 호사하게 탕진하는 일에 대하여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고, 
동시에 조용하게 다양한 통일을 추구하였다. 
쾌락이란 그에 있어서 방종을 규제하는 질서 속에서 절도 있는 사치에 속한 것이었다. 
만년에 80세의 고령인 마티스가 5년의 세월에 걸쳐 완성한 반의 〈마티스 예배당〉은 
그 예술의 집약이며 명쾌함과 단순함에 넘치는 조형으로 평가된다.

 

Dance, 1909~1910.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260 x 39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이 작품은 러시아 상인이자 남작이었던 세르게 슈츄킨(Sergei Shchukin)의 주문으로 그려졌다. 
슈츄킨은 마티스가 파격적인 색채와 단순한 형태를 갖추고 
프랑스에 유명해지기 전까지 열렬히 후원해주던 사람이다.
이 작품을 그리면서 마티스는 
"세 가지 색이면 충분하다. 
하늘을 칠할 파란색, 인물을 칠할 붉은색, 그리고 동산을 칠할 초록색이면 충분하다. 
사상과 섬세한 감수성을 단순화시킴으로 우리는 고요를 추구할 수 있다. 
내가 추구하는 유일한 이상은 '조화'다."
라고 말했다.

캔버스에 그려진 춤추는 사람들 사이에는 둥근 모양의 리드미컬한 움직임이 형성된다. 
한편, 쫙 뻗은 두 사람의 손이 닿을 듯 말 듯한 지점에는 
마티스가 불어넣은 역동적인 긴장감이 감돈다. 
선, 색채, 형태의 혁명적 적용을 달성한 이 그림은 20세기 회화의 
중요한 운동이라 할 수 있는 표현주의와 추상주의의 씨앗을 뿌리는 쾌거를 이루었다.

음악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는, 본능적이고 근원에 가까운 행위를 다룬 이 작품은 
2006년 말 영국 가디언 신문에서 '죽기 전에 봐야할 그림'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두 개의 장대한 짝을 이루는 패널 "Dance"와 "Music"은 마티스가 
1908~1913년 사이에 제작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다. 

5 개의 인물은 명확하게 윤곽이 그려져 있고 표현력이 풍부하며, 
변형은 열정적인 흥분과 모든 것을 소비하는 리듬의 힘을 표현한 것이다. 
빠른 관절 운동은 불굴의 활력으로 몸을 채운다. 
그리고 "약간 밀도가 다른" 붉은 ​​색은 내부 열의 상징이 된다. 
물들은 코스모스의 진한 파란색에서 춤을 춘다. 
푸른 언덕은 무용수들의 에너지로 가득차 있으며 발 아래로 떨어지고 탄력적으로 솟아 오른다. 

그러나 캔버스의 구성에서 볼 때 마티스는 "댄스"에서 

줄거리의 과도한 감정을 억제하여 표현하고 있다. 
논리와 비례감은 본능과 의식을 조화로운 전체로 통합한다. 
그것은 또한 그림에서 작용하는 원심력과 구심력의 균형에 있다.

 

Music, 1910.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260 x 38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Number 440

 

'음악(Music)'은 1910년에 그린 '춤(Dance)'과 짝을 이루는 작품이다.  
마티스는 예비 스케치 없이 '음악'을 커다란 캔버스에 작업했다. 
구성을 여러번 다시 생각한 흔적이 캔버스에 변형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화가의 열정처럼 완전한 창작의 몰입에 빠져 있다.

'음악'은 춤과 동일한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었다. 
녹색, 빨강, 파랑의 동일한 표현의 조화이다. 
음악가와 가수의 단순화된 다섯 명의 인물은 춤에서도 일치한다. 
'춤'에서 인간은 지상과 하늘을 동시에 향유하는 존재의 모습이다. 
그들은 춤을 추면서 언덕을 올라간다.  
일상에서 벗어나 시공의 바깥에 존재하는 상징화된 이미지이다. 
반면 '음악'은 응축된 고요와 고립된 인물들의 절대적 부동성을 보여준다. 

인물들의 악기 연주 및 노래에 대한 총체적 집중은 감상자를 몰입하게 하고 놀라게 한다. 
열린 입은 공명을 발하는 것 같다. 

노래 부르는 인물들에서 감상자는 인간의 목소리를 육체적으로 경험한다. 
악보의 표기처럼 배치된 인물들은 자신들의 음악에 몰입하고 있다. 
음악으로 전체가 하나로 묶여 있는 공간은 단지 캔버스 안의 세계만이 아니다. 
인간 개개인이 바라는 미지의 세계이며 구현 가능한 세계이다. 
음악으로 조화로운 세계이며, 춤으로 함께 하는 세계. 

춤 작품에 매우 만족한 슈추킨이 다음으로 주문한 것이 음악이다. 
보통 마티스와 피카소는 비교해서 많이 이야기한다. 
마티스의 그림은 사물을 자신의 감성대로 최대한 표현하려고 했다면, 
피카소의 그림은 비판, 분석으로 사물 자체보다는 은유로 바꾸어 그린 그림이다. 
피카소는 사물을 기억해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Bowling, 1908.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15 x 14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이 작품에서는 세 명의 청년, 아마도 마티스의 아들과 조카가 공놀이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쇠로 된 공을 교대로 굴리며 표적을 맞추는 놀이에서 마치 
그의 대표작인 춤(Dance)의 미래를 보는 것 같다.  
마티스는 게임을 인간의 창의성의 표현이자 삶의 코드를 이해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로 본다. 

보색 관계를 교묘히 살려 그의 예술은 차차 성숙해진다. 
청결한 색면 효과 속에 색의 순도를 높여, 확고한 자기만의 예술을 구축해 나간다. 
누군가 그를 '색채의 마술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마침내 그의 경쟁자이던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회화의 지침이 되어 그 성격을 결정지었다.

 

Nymph and satyr, 1908.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89 x 11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8

 

"요정과 사티로스(Nymph and Satyr)"에서 마티스는 자연의 배경에 알몸을 그린다. 
언덕은 부드럽게 하늘로 올라가고 맑고 빛나는 지구의 색은 아쿠아 마린 물을 진정시킨다. 
그리고 녹색-파란색 톤의 세계에 마티스는 두 가지 선명한 색상 악센트를 도입했다. 
분홍색(님프의 몸 색깔)과 붉은 색 (사티로스 satyr)이다. 

인물의 수를 2개로 줄였고 마티스는 다시 두 개의 아치형 인물의 

상호 관계에 의해 생성된 하모니를 사용했지만, 이제는 큰 손을 뻗은 

의도적인 남성 인물의 접근 방식에 의해 더욱 위협적이 되었다. 
여성 인물이 잠든 것처럼 보이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설명이 누락되었을 수 있다. 

이 작품의 솔직한 에로티시즘은 예술가에게는 드문 일이다. 
그림의 주제는 아폴로와 다프네, 판과 시린가의 고대 신화를 떠올리게 하며, 
열정과 탈출이라는 두 성별의 영원한 반대를 담고 있다.

 

Fruits, flowers, panel 'Dance', 1909.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89.5 x 117.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마티스는 그림의 깊이로 빠르게 멀어지는 각도에 

테이블을 펼치고 이젤에 설치된 대형 패널 "춤(Dance)"에 관심을 

집중하면서 자신의 스튜디오로 시청자를 끌어들인다. 


패널 "춤(Dance)"은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림의 에너지 센터 ​​중 하나가 여기에 집중되어 있으며 
Dionysian thyrsus를 연상시키는 긴 꽃 줄기의 힘에 해당한다. 
테이블, 패널, 들것, 바닥의 명확하게 윤곽이 잡힌 평면은 

수직, 대각선, 수평의 롤 뿐만 아니라 색상 반점에 의해서도 상호 작용하여 

마티스가 가치 있는 논리와 선명도를 그림 구성에 가져온다.

 

Moroccan Amido, 1912.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46.5 x 61.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이 작품은 마티스가 1912년 모로코를 처음 여행했을 때 그린 것이다. 
모로코 아미도(Moroccan Amido)에는 일반적인 동양적 이국주의도, 

민족주의적인 요소도 없지만 모델의 자연스러운 용이함, 

태양으로부터의 축복을 생각하는 기쁨이 있다. 

빛으로 가득 찬 색, 탕헤르 호텔에서 포즈를 취하는 10대 신랑은 단순하고 자연스럽다. 
그의 긴 다리가 있는 경쾌한 인물은 마티스가 설정한 캔버스의 좁은 형식에 자유롭게 들어 맞아 
청년의 마른 구조와 그림의 공간을 구성하는 컬러 평면의 강조된 수직 리듬을 모두 충족시킨다. 
마티스는 그을린 피부, 하얗게 빛나는 셔츠와 조끼, 짧은 바지의 순수한 색 반점을 포착한다. 
아미도의 몸매는 볼륨감과 무게감이 동시에 가볍고 약간 비대칭적이며 
마티스가 공간에 배치해 역동성을 만들어 낸다. 

 

Standing Zora, 1912.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46.5 x 6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1913년 마티스의 작업에서 매우 중요한 모로코 그림 여러 점이 
세르게 슈츄킨(Sergei Shchukin) 컬렉션에 등장했다. 
그중에서 "스탠딩 조라(Standing Zora)"는 1912년 말 
모로코를 두 번째로 여행하는 동안 마티스의 작품이다. 
이 그림은  "모로코 아미도"(Hermitage)와 한 쌍으로 구상되어 그려졌다. 
두 그림은 같은 크기의 캔버스에 그려졌다. 

그러나 그 소리에서 "Standing Zora"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림의 구성과 색상 등 전체 구조는 작가가 받은 깊은 인상을 보여준다. 
마티스 방식의 인상은 "Standing Zora"에서 변형되었으며 
아티스트가 가장 좋아하는 모델은 신비한 동양의 표시가 되었다. 

그림의 공간은 캔버스의 평면을 따랐다. 
짙은 녹색 로브를 입은 조라 초상상이 전면에 배치되어 
매우 밝은 진홍색을 배경으로 선명하게 눈에 띈다. 
검은색 장식 점선이 있는 흰색 테두리는 거의 균일한 색점으로 
리드미컬한 분해를 도입하고 미묘한 느낌을 향상시킨다. 
매혹적인 색의 마법, 명확하게 윤곽이 잡힌 아몬드 모양의 눈을 멈춘 시선의 요술 등 
모든 것이 외국 문화의 위대한 비밀을 구현하여 마티스에게 강력한 창조적 충동을 부여한다.

 

 Standing Moroccan in green clothes, 1912.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46.5 x 97.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이 작품은 마티스가 1912년 말 두 번째 모로코를 여행하는 동안 그렸다. 
모델로 거무스름하고 넓은 어깨를 가진 밝은 녹색의 옷을 입은 남자를 묘사한다. 
평등하고 엄숙한 부동성은 캔버스의 전면을 거의 완전히 채우는 
엄격하게 정면으로 설정된 인물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상한 방식으로, 아랍의 이 위엄있는 인물에는 어떤 애매함이 있는 것 같다. 

그림은 녹색, 파란색, 분홍색 황토색과 같은 빛나는 색상으로 구체화되며 
가볍고 투명한 캔버스 레이어가 흰색 바탕에 놓여 있다. 
그림의 차가운 색조는 마치 뜨거운 공기 속의 오아시스의 신기루, 
훅하면 사라질 수 있는 신기루와 같다. 
구성 라인의 역할이 최소화되어 눈의 윤곽이 그려지고, 
입과 코, 버너스 후드의 윤곽이 그려진다.

 

Bouquet of flowers. Callas, 1912.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46 x 9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이 작품은 마티스가 1912년 10월부터 1913년 2월까지 

두 번째로 모로코를 여행 할 때 그렸다.
정물, 인테리어, 풍경이 포함된 이 구성은 공기로 가득 차 있다. 
녹색과 회색-청색 톤의 대비는 신중하고 표현력이 풍부하다. 


부드럽게 빛나는 노란색과 함께 희미한 햇살을 연출한다. 
마티스는 채색되지 않은 흰색 영역과 색상 패치를 번갈아 표시한다. 
마티스는 전체 그림의 밝은 색상 구조와 일치하는 스모키 그레이 색상의 
가볍고 정확한 윤곽선으로 쌀쌀하고 세련된 꽃의 윤곽을 그린다.

 

Family portrait 가족 초상화, 1911.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43 x 19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Arab coffee shop, 1913. by Henri Matisse. glue paints on canvas, 176 x 21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아랍 커피 숍(Arabian Coffee House)"은 모로코 연작을 완성하는 가장 중요한 구성이다. 
마티스가 1913년 초 제작한 이 작품은 같은 해 4월 그림에 포함된 
명상적 성격을 미묘하게 감지한 세르게 슈츄킨(Sergei Shchukin)이 구입했다. 
이 작품에서는 절대적인 내면의 침묵, 자신의 몸의 느낌을 잃어버린 
움직이지 않는 인물들의 명상적 분위기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금붕어가 있는 어항과 뒤편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 그리고 지극히 평온한 상태...
마티스가 항상 추구하던 이 평화로운 공간은 따뜻한 색상의 황토색과 
핑크, 파스텔톤의 청록색과 연회색으로 조화시킨다.
형태는 최대한 단순화시키고 동양적인 곡선의 형태는 남겨 놓는다.
간결한 마티스의 동양 정신에 대한 낭만적인 표현이 구체화되었다. 
현실과 관습의 교차점에서 작가의 상상력으로 태어난 세상은 높은 시학과 평화를 발견한다.

 

Portrait of the artist's wife, 1913.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46 x 97.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마티스 아내의 초상화는 1913년 여름 파리 근교 자신의 집 정원에서 그려졌다. 
아내 아밀리(Amelie)는 우아하고 캐주얼하며 동시에 
녹색 정원 의자에서 남편을 위해 포즈를 취한다. 
마티스는 자세를 표현하는 데 있어 표현적으로 정확하며 옷의 완벽한 맛을 강조한다. 
그림을 만드는 동안 작가는 의식적인 세속적 초상화의 
전통적인 계획을 사용했지만 완전히 색다른 소리로 채웠다. 
작가가 만든 세계는 다른 현실이다. 

아내 아밀리(Amelie)의 얼굴은 녹색 그림자에 잠겨 있다. 
단단하게 짜여진 회로도 기능으로 간결하게 윤곽이 그려졌다. 
그리고 이 가면은 모델의 내부 본질을 숨길 뿐만 아니라 
마음의 명료성과 논리를 거스르는 비밀을 구현한다. 
그리고 그녀의 생생한 긴장감과 조화를 이루고 신비하게 교란하며, 
전체적으로 퍼지는 파란색과 파란색-검정색 톤의 그림, 내부에는 밝은 녹색이 있다. 
1914년 "예술가의 아내 초상화"는 S. I. Shchukin 컬렉션에 인수되었다.

 

Conversation, 1908~1012.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77 x 21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대화(Conversation)"는 1908~1913년에 제작진 마티스의 주요 작품 중 하나이다. 
청록색의 구도는 1909년 여름 마티스가 시골집에서 그린 것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인 마티스와 그의 아내 아밀리(Amelie)는 이미지를 
극도로 단순화 했음에도 불구하고 초상화의 유사성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보다 더 주목해야 할 대목은 변화하는 삶의 특정 순간부터 시작하여 마티스는 
"현실에 대해 보다 안정된 해석을 위한 예술가의 출발점 역할을 하는 더 진실하고 깊은 의미를 포착한다" 
고 말한다. (Matisse. "Painter 's Notes")  

잠옷차림의 마티스와 실내복을 입은 아내가 마주하고 있다. 
여기서 지배적인 것으로 보이는 남편은 높은 위치에 그림 밖으로까지 솟아있는 반면, 
낮은 위치의 아내는 의자 안에 자루같은 가운데 휩싸여서 매우 수동적으로 보인다.
외부의 배경도 남편은 나무와 아내는 연못과 매치된다.  
곧게 뻗은 나무에 비해 3개의 연못은 모두 잘린채 보인다.

마티스는 단순 명쾌한 선과 밝고 순수한 빛의 색으로 
평면 회화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인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색에 있어서 천재적인 감각을 보여 준 그는 
특히 ‘마티스 블루’라는 이름이 붙은 파란색을 즐겨 사용했다. 
회화 외에도 조각, 동판화, 직물 디자인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이 작품에서도 파란색이 주제가 되고 있다. 
이것은 카펫이나 벽의 색상이 아니다. 
그것이 불러 일으키는 연관성으로 인해 그 자체로 
공간에 대한 아이디어와 물리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 색상은 감정적으로 중요하며 깊이 또한 매혹적이다. 

파란색의 다차원성에 순종하여 녹색은 잔디의 색일 뿐만 아니라 
지구의 표시, 생명의 표시가되며 곧고 강한 나무 줄기인 "생명의 나무"에 의해 강조된다. 
순수한 색의 빛, 이상적인 세계에서 두 가지 
영원한 시작을 구현하는 기호를 우리는 엿볼 수 있다.
서로에 대한 반대와 중력에서 직선 (남성적 원리의 논리)과 기발한 곡선 
(예측 불가능, 여성의 감성)은 존재의 신비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분리하고 연결하는 주철 격자는 그 그림과 함께 
과거의 불가사의하고 읽을 수 없는 모노그램과 닮았다. 

 

Young woman in a blue blouse (Portrait of L. N. Delectorskaya), 1936.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35.4 x 2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파란 블라우스를 입은 젊은 여인 리디아 델렉토르스카야의 초상
리디아 델렉토르스카야는 1935~39까지 마티스의 화풍에 
빼 놓을 수 없는 모델이 되어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1939년에 아내와 결별한 마티스에게 있어 리디아는 더 이상 모델일 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40년부터 리디아는 모델 일에는 거의 손을 떼고, 
아내와 지금으로 치면 관리이사의 역할을 같이 해야 했다.
집안을 꾸려나가야 하고 모델의 급료의 지급, 방문자의 선별, 
그리고 아픈 마티스를 위해 간병인의 역할도 도맡아 했다.

 

Portrait of Lydia N. Delektorskaya, 1947.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64.5 x 49.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리디아 델렉토르스카야의 초상
리디아는 러시아 출신의 골격과 체격이 큰 모델로 마티스를 만나기 전까지 다소 비참한 생활을 했다.
12살에 고아가 되어 파리로 흘러들어 와, 소르본 의대를 다녔지만 돈이 없어 곧 그만두고
상점 점원과 약간의 모델일, 그리고 이것저것 닥치지 않고 생활고를 해결해야만 했다.
그러던 그녀가, 1932년 22살 때 우연히 마티스의 작업실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Blue pot and lemon, 1897.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39 x 4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이 작품은 에르미타지 박물관에 보관된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의 가장 오래된 그림이다. 
1897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인상주의적 비전이 그의 작품에 
어떻게 들어가는 지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것은 자연과의 직접적인 접촉에서 그 자체로 나타나며, 
이는 하나가 밝은 색상의 통일로 표현된 세계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창에서 은은하게 쏟아지는 빛은 컬러 반사 신경으로 화면의 분위기를 채운다. 
레몬과 파란색 냄비는 색의 본질과 그림의 중요한 요소로서 소리의 색채가 될 수 있지만 
마티스는 일관되게 인상주의적인 방식으로 색을 빛에 종속시킨다. 

 

Sunflowers in a vase, 1898~1899.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46 x 3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꽃병 속의 해바라기'는 마티스가 툴루즈의 코르시카에서 그린 작품이다.
밝은 남부의 자연과 눈부신 태양의 빛을 만나는 코르시카로의 여행은 
마티스가 변덕스럽고 깜빡이는 인상주의적인 빛 공기 요소에서 벗어나도록 도왔다. 
마티스는 마치 세잔처럼 공기를 두껍게 하고 빛과 형태를 강화한다. 
그리고 아마도 우연이 아니라 절단 이미지가 있지만 태양 에너지, 해바라기를 계속 방출한다. 
이 꽃들과 활기 넘치는 반죽의 본질은 반 고흐의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Fruit and coffee pot, 1898.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38.5 x 4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1898년 말에 제작된 이 작품은 부드럽게 시뮬레이션된 과일, 
접시, 컵 등이 밝은 환경에 담겨 있지만 용해되지는 않는다. 
반대로 넓은 획이 있는 커피 포트의 정력적인 조각은 
가소성의 느낌을 높이고 색상 윤곽은 각 개체를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그림의 색상은 이전 작품에 비해 분명히 더 큰 독립성을 얻고 있다. 
커피 포트 표면의 다채로운 반사 신경의 강도, 식탁보의 짙은 색 그림자,  
이 모든 것이 정물의 색채 사운드를 향상시킨다. 
마티스가 만든 세계는 구체적인 현실에 덜 의존하게 된다. 

 

Dishes on the table, 1900.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97 x 8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1898년에서 1903년 사이에 제작된 대부분의 마티스 작품은 날짜가 없다. 
이 작품의 오른쪽 하단에는 서명과 1900년이 적혀 있다. 
작가의 작업 연구자들은 1900년 정물 그룹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을 강조한다. 
인상주의에 대한 열정은 과거의 일이다. 

"테이블 위의 접시"에서는 색상의 도움으로 형태를 구성하는 세잔의 방법이 채용된다. 
그림 공간은 엄격하게 구성되어 있다. 
구성의 역동적이고 안정적인 요소는 절대적으로 균형을 이룬다. 
마티스는 차가운 반사 신경에 의해 짙은 청색과 적색의 비율로 그림을 만든다. 
이 칙칙한 색조로 자랑스럽게 서 있는 초콜릿 그릇에 순수하고 빛나는 색상이 빛나고 
흰색 그릇에 이국적인 라일락, 핑크, 블루 반사 신경이 나타난다. 
그림의 축제 성격을 결정하는 색상이다. 

 

Dishes and fruits, 1901.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51 x 6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접시와 과일"이 제작된 1901년은 오래 전 세상을 떠난 반 고흐의 회고전이 열렸다. 
반 고흐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이 그림에서 색의 선택은 아마도 전시회 방문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정물화에서 순수한 색은 강렬하다. 

마치 태양의 열을 흡수하는 것처럼 깊고 복잡한 라일락-바이올렛 톤과 
오렌지 주전자의 강력한 코드를 제공한다. 
밝은 빨간색 정강이가 있는 차가운 그늘의 노란색 레몬은 
잘 익은 토마토뿐만 아니라 캔버스의 전체 그림같은 구조에서도 공명한다. 
강렬한 색상, 다이나믹한 스미어는 화면에 활력을 더 해준다.

 

Vase, bottle and fruit, 1906.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73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이 정물화의 첫인상은 캔버스 표면을 지배하는 차분한 색상의 깜박임이다. 
하지만 언제나 마티스와 마찬가지로 "그림은 감정이자 논리다." 
그림의 공간에 펼쳐지는 활기찬 다이아몬드 모양의 테이블은 안정된 중심을 형성한다. 
과일의 밝고 순수한 색상, 눈에 띄지 않게 드러난 캔버스의 중앙 축 
(우유 용기 및 어두운 병) 및 주변의 물체의 명확한 배열은 
스트로크의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구성에 거의 고전적인 선명도를 제공한다. 

엑스레이 연구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마티스가 다른 그림 위에 그렸다. 
어두운 바탕은 정물의 배경을 통해 보여진다. 
마티스는 느슨하게 배치된 흰색 도료, 노란색, 빨간색, 녹색 페인트의 
"흩어진" 장식용 획을 사용하여 이 바닥을 걸었고, 
이것은 떠오르는 푸르스름한 검정색 톤에 환상적인 진동을 주었다. 
이 그림은 마티스의 야수파(Fauvist) 작품의 대표적인 사례다. 

 

Luxembourg garden, 1901.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59.5 x 8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1901년경 마티스는 룩셈부르크 정원(Luxembourg garden)의 전망과 함께 여러 풍경을 그렸다. 
인상파들에게 사랑받는 장르로 작업하지만, 작가는 
자신의 세계를 특정한 느낌과 논리에 따라 만들어 낸다. 
인상주의적인 매력을 희생하는 것을 선호하지만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룩셈부르크 정원(Luxembourg Gardens)의 구성은 큰 색점으로 그려졌다. 
그림에는 스테인드 글라스 효과가 있다. 
색상은 밝은 가을날의 인상을 준다. 

마티스는 양식을 단순화하고 세부 사항은 생략한다. 
"자연을 모방하는 데 얼마나 관심이 있는가. 중요한 것은 주제와 

예술가 사이에 발생하는 관계, 그리고 그가 자신의 감각과 감정을 구성하는 힘"
이라고 마티스는 말했다.

 

Lady on the terrace, 1907.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65 x 8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이 작품은 마티스가 1907년 여름 프랑스 남부의 콜리어(Collioure)에서 그렸다. 
열린 테라스에 앉아 있는 여성은 마티스의 아내 아밀리(Amelie)다.  
이 작품은 모든 것이 극도로 단순화되었다. 
작가는 컬러 윤곽선으로 윤곽이 잡힌 큰 컬러 평면으로 컴포지션을 만든다. 


그림은 그림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색상과 마찬가지로 캔버스의 리드미컬한 구성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을 주장한다. 
활기찬 선으로 수평 난간, 물 위의 움직이는 요트, 언덕의 부드러운 모양, 
아내의 품위 있는 여성스러움을 보여주는 마티스는 
삶의 맥박과 엄숙한 평화가 느껴지는 세상을 만든다. 

 

Collioure's view, 1905.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59.5 x 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지중해 연안의 남쪽 마을인 콜리어(Collioure)에서 
마티스는 1905년 여름과 1906년 봄과 여름을 보냈다. 
이 작품의 색상은 매우 강렬하다. 
밝은 남쪽 자연의 느낌, 눈부신 햇살이 채색된 그림자를 사용하지 않고 만들어진다. 
그것은 기와 지붕을 짓는데 사용되는 주황색, 빨간색, 라일락 분홍색, 
진홍색 점, 태양에 의해 "구워진" 지구, 집의 벽 및 바다 위에 있는 
교회의 종탑의 복잡한 병치에서 발생한다. 

물의 붉은 색과 차가운 파란색의 대비가 더위를 더 해준다. 
덮이지 않은 흰색 흙의 부분은 페인트를 밝게 만들고 캔버스를 여분의 빛으로 채운다. 
1905년 가을에 악명 높은 살롱이 문을 열었고 마티스와 그의 친구들이 전시한 그림은 
전례없는 개방적인 색감, 단순한 기술, 충동성 등으로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예술가들은 비평가 복셀에게 그들을 "fauves, wild"라고 부르는 이유를 주었다. 
여기에서 "fauvism(야수파)"이라는 이름이 20세기 예술의 트렌드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야수파의 수명은 1905년에서 1907년까지로 짧았지만 
마티스는 이 기간 동안 자신의 예술 장르를 소유하게 되었다. 

 

Dishes and fruits on a red and black carpet, 1906.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61 x 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1906년 봄과 여름, 알제리 비스크라 여행을 마치고 마티스는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인 콜리우르에서 지내면서 이 정물화를 그렸다.. 
민속 공예가의 작품인 빨간색과 검은색 목도리 깔개는 비스크라(Biskra)의 예술가가 가져왔다. 
양식화된 반복 패턴으로 덮인 밝은 깔개는 캔버스의 거의 전체 면에 걸쳐 펼쳐진다. 


접시와 과일을 그 위에 올려 놓은 마티스는 그것들을 
평평한 공간에 "보관"하여 색이 있는 장식적인 장소로 바꾸려고 한다. 
자랑스러운 유리 용기만이 상대적인 독립성을 보여준다. 
가느다란 모양은 캔버스를 구성하는 직사각형의 "놀이"에 건설적인 수직성을 제공한다.

 

Bouquet (Vase with two handles), 1907.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74 x 6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Bouquet"의 색 구성표는 순수하고 축제적이다. 
그림을 만드는 역동적인 붓놀림이 생생한 숨결을 불어 넣는다. 
정물 작업을 할 때 마티스는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인상에서 진행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자연의 노예적인 복제물"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법칙이 작용하는 세계이다. 


따라서 방 공간, 일상 생활의 산문적인 세부 사항을 정확하게 재현하지 못한다. 
사진의 중앙 부분에 집중된 블루톤의 차가움은 이 이웃에 깊이, 
밝은 노란색-오렌지색을 제공하여 화면의 평면을 "유지"한다. 
테이블의 분홍색-진홍색 표면이 이를 확인한다.

 

Seated woman, 1908.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80.5 x 5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이 작품은 작가가 색채, 그림 및 구성 분야에서 발견한 것을 사용하여 
작가가 자연과 어떻게 작업하는지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검은색 윤곽선은 플랫폼에 편안하게 앉아 있는 모형의 
크고 흠 잡을 데 없이 구성된 인물을 포함한다. 
노란색이 풍부한 아름다운 녹색 색상은 자연스러운 일광 느낌을 만든다. 

명확하고 중단된 윤곽선은 이제 거의 완전히 사라지고 
빛이 몸과 상호 작용하여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며 
그 부피는 빛과 그림자의 비율로 드러난다. 
검은 윤곽선과 검은 그림자는 여성의 몸의 따뜻함을 향상시킨다. 
이 모델은 1908년 마티스의 여러 작품에 등장한다. 

 

Nude woman. Black with gold, 1908.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00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8

 

마티스는 이 작품에서 모델의 그림을 캔버스의 절대 중심으로 만든다. 
공간의 해답이 완전히 바뀌어 작가는 공기의 착시를 주는 밝은 배경과 내부 요소를 제거한다. 
이 모든 것이 여성 이미지를 상징적이고 중요하게 만들었다. 
주요 변형은 색상에서 발생했다. 
마티스가 인물의 볼륨을 강조하는 검정색과 노란색은 신체의 흑백 발달이 아니다. 
검은색과 노란색의 대담한 대비는 금이 있는 곳에서 
번쩍이는 골동품의 어둡게 패티닝  청동 느낌을 준다.

 

Nude woman, 1908.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60.5 x 5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8

 

"앉은 여인(Seated woman)"과 같은 모델을 그린 이 작품은 앞의 그림 
"누드. 블랙 위드 골드(Nude woman. Black with gold)"의 변형이다. 
"앉은 여인(Seated woman)"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델의 모습은 상당히 표시된 공간에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마티스는 캔버스의 수직의 위엄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서서 그린다. 
벌거벗은 몸통의 위치, 엉덩이에 천을 잡고 있는 손의 위치는 
그리스의 멀고 영원한 이미지 중 하나인 아프로디테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모델의 몸은 "크레프트 업", 살아 있는 관능미가 떠났고, 
그 비율이 더욱 "클래식"하게 되었다. 
마티스는 생성된 이미지에서 명확성을 추구하고 
모델의 얼굴에 약간 눈에 띄는 슬픔으로 채색한다.

 

The Red room, 1908.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80.5 x 22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8

 

1908년, 회랑 정원이 내려다 보이는 파리의 작업장에서 마티스는 
1908~1913년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인 "The Red Room"을 만들었다. 
이 작품은 유명한 러시아 수집가 세르게 슈츄킨(S. I. Shchukin)의 

모스크바 저택 식당을 위한 것이다. 


마티스는 꽃병, 과일, 꽃으로 방을 장식하는 특성으로 전환했다. 
빨간색과 진홍색 톤의 고급스러운 패브릭, 파란색 패턴의 활기찬 곡선이 벽에서 내려온다. 
그녀는 테이블의 평면을 차지하여 단일 전체를 형성하고 
방의 3 차원 공간을 흡수하며 캔버스 평면의 장식 가능성을 권위있게 주장한다. 


이 기법은 마티스가 이 작품 The Red Room에서 타협없이 처음 사용했다. 
그러나 마티스는 붉은색의 평탄함을 확인하면서 그 안에 
꽃병을 휘두르는 여성 인물이 움직일 수있는 공간과 
꽃이 만발한 나무가 있는 푸른 정원이 열리는 창문의 폭을 연출한다. 

여성의 모습의 부드러운 윤곽, 창 밖의 나무의 부드러운 윤곽과 함께 
일직선이 조화를 이루는 것은 조용하고 침묵을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드러난 조화의 밑에 있는 "명확함과 질서"를 긍정한다. 
뒤에 꽃이 만발한 나무가 있는 녹색 정원이 열리고 캔버스 깊이로 눈이 움직인다. 
그림의 구성 리듬은 완벽하게 디버깅되고 의미가 있다. 
직물 장식에 존재하는 압력, 성장의 힘은 느낌과 열정에 대한 은유이다. 

 

Still life with a blue tablecloth, 1909.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88.5 x 11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8

 

이 작품은 1909년 마티스가 만든 최고의 정물화 중 하나다. 
마티스는 그가 사랑하는 파란색 식탁보를 사용하여 꽃병, 병 및 과일과 
앞의 작품 "The Red Room"에서 변형된 형태로 그렸다. 

 

Lady in green, 1909.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65 x 5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이 작품은 마티스가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에서 여름에 그렸다. 
모델은 다른 여러 작품에서도 등장한 여인으로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직립 자세, 날씬한 목, 자신감 있는 머리 위치, 달 모양의 타원형 얼굴 등. 
그림의 녹색은 장식적이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깊고 풍부하며 개발하기 어렵고 수심과 울창한 녹지의 
시원함을 불러 일으켜 신비와 삶의 의인화가 된다. 

그러나 겉보기에 유비쿼터스 그린의 마법은 인간의 
내재적 가치에 대한 인식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 있고 간결하게 윤곽이 그려져 있으며 완전히 독립적이다. 
밝은 초록색 블라우스, 정확히 그림 중앙에, 전체 이미지를 고정하는 것처럼 
빨간 카네이션-브로치와 같은 유일한 밝은 점이 켜진다. 
젊은 아가씨는 차분하고 엄숙하며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검은 눈동자에 약간 신비하다.

 

Girl with tulips, 1910.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92 x 7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Number 440

 

이 작품은 마티스가 집을 빌린 파리 근처의 이씨 레 물레노I(ssy-le-Mouléno)에서 그렸다. 
아티스트를 위해 포즈를 취한 소녀는 마티스의 이웃인 쟌느 바드렌(Jeanne Vaderen)이다. 
그림의 여 주인공의 모습에는 일종의 부드러움과 우울함, 
고통스러운 연약함과 정교함이 있다. 


모델의 그림을 약간 구부림으로써 마티스는 캔버스 구성에 약간의 비대칭을 도입했다. 
마티스는 중심 축 안에 쟌느의 머리와 팔, 분홍빛을 띠는 
두 개의 몸매를 유지하면서 탄력 있는 새싹의 톤을 강화했다. 
색상과 인물의 병치 및 상호 작용은 그림의 주요 주제 중 하나다. 
중요한 색채와 리드미컬한 악센트가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 
강력하고 찢어진 튤립 줄기, 날카로운 강한 잎의 짙은 녹색, 
모든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꽃의 성장 에너지를 전달한다. 


그리고 그 옆에는 블라우스의 밝고 쉽게 발달된 녹색 톤, 
닫힌 손의 타원형, 거대한 눈의 슬픔은 사람의 내면 세계의 비밀이다. 
자연과 인간은 서로의 특이성을 가리는 조화로운 전체를 형성하고 
색의 일관성과 타원형과 둥근 모양의 리드미컬한 롤을 고수한다. 
이 삶의 조화는 예술가가 보라색-파란색과 옅은 노란색의 넓은 영역의 
대조를 방해하는 긴장감으로 만들어 반 고흐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Pink figurine and a jug on a red chest of drawers, 1910.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90 x 11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이 작품 역시 마티스가 집을 빌린 파리 근처의 이씨 레 물레노I(ssy-le-Mouléno)에서 그렸다. 
집 근처의 정원에 마티스는 넓고 가벼운 작업장을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대화" (작업장이 내려다 보이는 방의 창에서), "댄스(Dance)", 
"음악(Music)"과 같은 대형 작품이 그려져 있다. 

정물의 배경을 이루는 이 공방의 판자벽은 이번 작품에서 많이 그려져 있다. 
마티스는 자신의 작품을 화면에 도입하는 것을 좋아했다. 
여기 기울어진 여성의 분홍색 조각상이 있다. 
마티스는 그것을 높이 평가하고 그의 작품에서 여러번 발표했다. 
주전자와 유연한 한련 줄기와 그릇처럼 현실 세계의 주제가 아니라 주어진 구성의 주제가 된다.

 

Seville still life, 1910~1911.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90 x 11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8

 

이 작품은 마티스가 1910년 10월에 떠난 스페인 세비야에서 그렸다. 
마티스는 세비야 호텔 방에서 이러한 작업을 했다. 
꽃과 새가 보이는 소파의 에메랄드 장식의 멋진 장식은 
세상에 피는 제라늄의 밝은 점을 유기적으로 포함하고 
테이블에 있는 노란색 목도리의 작고 어두운 패턴과 충돌한다. 

풍부한 색상 반점과 복잡한 장식품의 대비와 에코는 놀라운 다양성으로 구별되며 
밝은 핑크 톤과 함께 인테리어의 답답한 향신료를 향상시킨다. 
그러나 연한 초록색 커튼이 펄럭이면서 신선한 바람의 숨결이 그림에 들어오고 
보이지 않는 창문의 존재가 눈에 띄게 된다. 
그리고 강렬하고 빛나는 핑크 톤이 아침 햇살에 대한 은유처럼 들리기 시작한다. 
벽과 바닥을 하나의 평면으로 결합함으로써 마티스는 
화려하고 장식적인 폭동을 수용하여 그림 공간을 조화시킨다. 

 

Spanish still life, 1910~1911.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89.5 x 116.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8

 

이 작품도 마티스가 스페인 세비야 같은 호텔방에서 그렸다.
그러나 그림의 구성은 익숙한 동기에 대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테이블과 소파는 캔버스의 전면에 접근하여 "세비야 정물"의 전경 물체를 대체했다. 
색 반점이 커지고 색조가 더 강해져 장식적인 리듬이 변경되었다. 


직물은 그림의 아래쪽과 중간 부분을 특히 적극적으로 채우는 크고 선명한 패턴으로 덮여 있다. 
그러나 이 장식적인 고급스러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식탁보의 활기찬 디자인과 진한 파란색 직물의 눈길을 끄는 양식화된 과일과 꽃은 
테이블 위의 제라늄과 고추의 살아 있는 아름다움을 침범하지 않는다. 
마티스는 캔버스와 화분, 그리고 두 개의 주전자의 구조에서 물리적 존재와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들은 구도의 중심이되어 이 화려한 세상에 안정감을 가져다 준다.

 

Vase with irises, 1912.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17.5 x 10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꽃 창포가 있는 꽃병 (Vase with irises)"은 마티스가 

1912년 겨울을 보냈던 모로코를 처음 방문했을 때 그렸다. 
"Spanish Still Life"에서와 같이 작가는 호텔방 한 구석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이 캔버스는 1904~1910년의 작품과 비교할 때 
자연의 전이에 있어서의 자발성과 신선함으로 표시된다. 


그림은 간단하고 명확하다. 
구성의 기초는 고전적인 무대에서 마티스가 

꽃이 만발한 화병을 선물한 대리석 꼭대기에 화장대이다. 
라일락 색상의 강렬한 스트로크는 꽃잎의 자연스럽고 기발한 장식을 이끌어낸다. 

꽃과 강한 녹색 줄기를 둘러싼 흰색 캔버스의 작은 영역은 

색조를 감소시키지 않고 그림에 빛을 가져온다. 
나무와 도자기의 따뜻한 갈색 - 붉은 질감이 아름답게 느껴지고 돌의 시원한 표면과 
표현력이 매우 뛰어나며, 꽃의 강렬한 삶에 비해 역동적인 패턴이 차분한 것 같다. 


마티스가 창조한 시각 감각 세계는 거울이 객관적인 환경을 반영하지 않고 
기묘한 빛과 신비한 검은 색으로 가득 차 있어 일상의 법칙이 작동하지 않는 
신비로운 거울의 세계와 나란히 살고 있다. 
공간의 색상 변화는 그림의 배경에서 계속되며, 녹색 톤이 검정을 통해 놀랍게 깜박인다. 

 

Ballerina, 1927.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65 x 5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1920년 마티스는 7년 이상 그의 모델이 되어 니스 시대의 

많은 작품의 정신을 알리는 19세 소녀를 만났다. 
헨리에트(Henriette Darricarrère)가 발레를 공부하고 있었다. 

마티스는 자신의 외모, 잘 조각된 강인한 형태뿐만 아니라 

예술성에도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 없다. 


그녀는 자신을 오다 리스크 , 스페인 여성, 바이올리니스트, 

피아니스트, 댄서로 쉽게 변신시킬 수 있었다. 
발레리나는 색 구성표와 구성 균형의 단순함으로 유명하다. 
배경은 거의 추상적이다. 
그림을 강조하는 서로 다른 색상의 4 개의 수평 띠가 있다. 
헨리에트(Henriette)가 무엇에 앉아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의상의 벽과 끈은 같은 색이며, 발레리나의 스타킹과 바닥도 가까운 색조다.

 

Henri Matisse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Winter Landscape. 1909. by Wassily Kandinsky. oil on canvas, 70 x 9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3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Vasilievich Kandinsky, 1866 ~ 1944)는  
러시아의 화가, 판화제작자, 예술이론가이다.  
피카소와 마티스와 비교되며 20세기의 중요한 예술가 중의 하나로 평가되는 그는  
초기 추상미술의 주요 인물 중 한명이다.  
일반적으로 그는 최초의 현대 추상작품을 그린 작가로 평가된다. 

칸딘스키는 모스크바에서 출생해 오데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과 경제를 배웠고, 전문가로서 인정받아 대학교수가 되었다.  
거기에서 30세 때에 그림 공부를 시작하여, 모델 데생, 스케치, 해부학을 배웠다. 

1896년에 뮌헨에 정착하여 사립학교와 미술 아카데미에서 수학하였다.  
러시아 혁명이 끝난 1918년에 모스크바로 돌아왔으나, 모스크바의 예술 이론에  
동의하지 않아 모스크바 미술아카데미의 교수직을 버리고 1921년에 독일로 돌아왔다. 

1922년에서 1933년까지 예술과 건축을 위한 학교인 바우하우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가 담당한 것은 벽화 공방이었는데, 이후 바우하우스가 바이마르에서 데사우로,  
나아가서 사학으로 격하되어 베를린으로 이전하고 1933년 정치적 압력으로,  
나치로 인해 폐쇄당하는 날까지 계속 그 자리에 있었으며,  
바우하우스의 말기에는 부교장의 자격으로서 널리 신망을 모았다고 전해진다. 
이후에는 프랑스로 옮겨 여생을 살았으며, 1939년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였고  
1944년 파리 근교 뇌이쉬르센(프랑스어: Neuilly-sur-Seine)에서 사망하였다. 

 

Sketch for composition V. 1911. Series : Compositions. by Wassily Kandinsky. oil on canvas, 
95 x 13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3

 

이 작품으로 칸딘스키의 추상적 표현주의가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무엇인가를 연상케 하며 여러 가지의 자유롭고 유기적인 형태가 떠돌아 다니기도 하고, 
어떤 운동성을 나타내기도 하는 형태시(形態詩) 또는 드라마를 전개하고 있다. 
칸딘스키의 조형 언어가 유감없이 표현된 역작이라고 하겠다.

<즉흥 Improvisation> 시리즈, <인상 Impression> 시리즈와 아울러  
<구성 Composition> 시리즈도 칸딘스키에겐 중요한 계통적 작품군(作品群) 이다. 
<즉흥 Improvisation>은 내적 필연성이 무의식적 · 우발적 · 음악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상태이며,  
<인상 Impression>은 대상을 평면적으로 용해하여 새로운 표현의 전개를, 
<구성>은 1910년 최초로 발표한 이래 죽음에 이를 때까지 10점이 제작된 연작으로 
칸딘스키 예술의 중핵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작품군이다. 

 

Sketch for composition VI, 1913. Series : Compositions. by Wassily Kandinsky. oil on canvas, 
300 x 19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3

칸딘스키는 실제 장면에 기초해서 추상화를 그리곤 했다. 
그림을 보면 폭발하는 듯한 색채와 절제된 폭력, 오른쪽에 충돌하고 있는 두 척의 배, 
크게 흔들리고 있는 노, 가운데 배처럼 생긴 형체는 거대한 파도 아래로 미끄러지고 있다. 
밝은색의 사선은 대포를 암시하고 오른쪽 위에는 로마군기가 보인다. 
이 그림은 어느 해전을 그린 것으로 보이며 어느 시대의 그것과 같이 이 작품도 거칠고 혼란스럽다.

이 장면은 다분히 폭력적이고 칸딘스키는 이 그림을 통해 
배나 폭풍우를 표현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런 느낌을 전해주려 했다고 본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색채와 형상만을 이용했다. 
이 그림을 언뜻 보면 어두운 그림으로 보일지는 모르나  
절제되어 있는 여러 부분으로 인해 경쾌한 작품이 되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에 칸딘스키의 이러한 그림들은 
민중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당국의 미움을 받았다.

 

Landscape. 1913. by Wassily Kandinsky. oil on canvas, 
88 x 10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3

칸딘스키의 초상화를 그린 가브리엘 뮌터 (Gabriele Münter 1877~1962)에 대하여 살펴보자.
그녀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적부터 그림 공부를 착실히 한 표현주의 화가였다. 
당시 여성화가에 대한 위상이 좋지 않았던 시절, 
둘은 동병상련의 아픔을 안고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칸딘스키 36세, 뮌터 나이 25세 의 뮌헨의 작은 마을
무르나우(Murnau)에서 만나 사랑하며 함께 그림과 여행을 즐기게 된다. 

두 사람은 바이에른 지방의 무르나우에서 동거를 하며 활발한 예술 활동을 했다. 
1911년에 창립된 '청기사'와 교류하며 활동을 하였으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청기사파는 자연적으로 해산이 되고 
결혼까지 약속했던 칸딘스키는 러시아로 떠나면서 둘은 헤어지게 되고,  
꾸준한 서신 교환을 통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1915년 스톡홀름에서 둘은 잠시의 만남이 있었지만,  
이는 이후의 오랜 동안 이별하게 되었다. 
둘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고, 뮌터는 그를 기다렸지만,  
칸딘스키는 1917년 러시아에서 장군의 딸과 결혼한다. 

칸딘스키를 기다리던 뮌터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뮌터는 한동안 그림도 그릴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고  
그 후에도 칸딘스키와 함께했던 무르나우에서 홀로 고독하게 지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재평가를 받기 시작한 뮌터의 작품에는  
그녀 삶의 모든 정서와 풍경이 담겨져 있다. 
맑고 상징적인 색채와 대담하고 단순한 형태 
그리고 검고 뚜렷한 윤곽선으로 내면의 정서를 담아 형상화하였다.

무르나우에 남겨진 칸딘스키의 작품을 나치로부터 온전하게 지켜낸 뮌터는  
후에 자신의 작품과 함께 뮌헨 시립미술관에 모두 기증하고 
1962년 85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영상] Wassily Kandinsky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Little schoolgirl, 1907. by Henri Le Fauconnier. oil on canvas, 73 x 92.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앙리 르 포코니에 (Henri Victor Gabriel Le Fauconnier 1881~1946)는 
헤스딘(Hesdin)에서 태어난 프랑스 입체파 화가였다. 
1901년 앙리 포코니에는 프랑스 북부에서 파리로 이주하여 법을 공부한 후 
장 폴 로렌스 (Jean-Paul Laurens)의 스튜디오에서 회화 수업에 참석한 다음 
아카데미 줄리안(Academie Julian)에서 회화 수업을 들었다. 
그는 그의 이름을 Fauconnier에서 Le Fauconnier로 변경하고 1904년과 1905년 
살롱 데 인디펜던트(Salon des Indépendants)에서 전시하여 Henri Matisse 와 일치하는 대담한 색상을 구현다. 
그는 1907년 에 브리타니로 이주하여 플루 마낙의 바위 풍경을 
단순한 형태를 구분하는 두꺼운 외곽선으로 갈색과 녹색의 징계 톤이 특징인 원형 입체파 스타일로 그렸다.

 

Village in the mountains, 1910. by Henri Le Fauconnier. oil on canvas, 74 x 9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4

 

앙리 포코니에는 개인적인 스타일을 탐구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폴 세잔(Paul Cézanne)의 영향으로 그는 자신의 입체파 형태를 개발했다. 
제 1차 세계 대전 이 시작될 때 앙리 포코니에는 네덜란드로 이주하여 6년 동안 머물렀다. 
당시 그의 작품은 입체파와 표현주의를 결합하여 네덜란드에서 상당한 성공과 영향력을 가져왔다. 
그는 1920년에 프랑스로 돌아와 그의 그림이 더욱 사실적이 되었다.
그는 파리 (1946)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Lake, 1911. by Henri Le Fauconnier. oil on canvas, 92 x 72.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Signal, 1915. by Henri Le Fauconnier, oil on canvas, 80 x 9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Number 437

 

Luxembourg Gardens. Monument to Chopin, 1909. by Henri Rousseau. oil on canvas, 

38 x 4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앙리 루소(Henri Rousseau 1844~ 1910)는 프랑스의 화가이다.
가난한 배관공의 자제로, 프랑스 마옌 데파르트망(Department) 라발에서 태어났다. 
전문적인 미술 교육 없이, 파리 세관에서 세관원으로 근무하며 틈틈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어떠한 계기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30대 중반에 이미 환상과 전설, 원시성이 서식하는 이미지의 세계를 보여 주었다. 
독학으로 주말마다 그림을 그렸기에 ‘일요화가’의 대명사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미술을 시작한 이 시기에 르 두아니에(Le Douanier:세관원)란 애칭을 얻게 되었다.

1885년부터 살롱 드 샹젤리제에 2점의 작품을 출품한 이후 
1886년 이후는 앙데팡당전과 살롱 도톤에 출품하였다.
앙리 루소의 작품은 초기에는 그가 독학으로 미술을 시작했다는 것과 
어색한 인체 비례, 환상과 사실의 색다른 조합 등의 이유로 조소와 비난의 대상이 되었지만, 
사후에 <경악(驚愕 : 숲속의 폭풍 1891)> <잠자는 집시, 1897> <뱀을 부리는 여인, 1907>
<시인의 영감, 1909>과 같은 그의 그림은 참신성과 원시적인 자연스러움을 근거로 높이 평가되었다. 
그의 원시림과 같은 원초적인 세계에 대한 동경과 환상성, 
강렬한 색채는 현대예술의 거장 피카소, 아폴리네르 등에 영향을 크게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앙리 루소는 20세 때 지원병으로 육군에 입대하여 군악대에서 클라리넷 연주자로 근무, 
안지애에 주둔한 51보병연대 음악대에서 복무했다. 
이때 그가 미술에 특별한 재능을 나타내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 복무 5년째 되던 해 부친이 사망하여 제대하였고, 
파리에서 모친과 함께 살며 서기로 있다가 71년 첫 번째 아내 
클레망스의 연고지에서 파리시 입시세관(入市稅關) 직원이 되었다. 
이때 르 두아니에(Le Douanier:세관원) 루소라는 별명 혹은 애칭을 얻게 된다. 

이후 22년간 세관원 생활을 계속하다가, 49세가 되던 해에 그림만을 그리기 위해 스스로 나온다. 
루소는 매달 받는 연금 50프랑만으로는 생활을 해 나갈 수가 없어 
공예 학교에 나가 소묘도 가르치고 그의 화실에서 아이들에게 
음악과 그림을 가르치는 등 여러 가지 일에 종사했다.

 

View of the area from the Vanves Gate, 1909. by Henri Rousseau. oil on canvas, 

31 x 4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루소는 가난했을 뿐만 아니라 가정적으로도 행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25세 때 10년 아래인 15세의 크레망스와 결혼하여 일곱 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그 중 다섯 명이 죽고 크레망스마저 1888년 34세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0여 년 동안을 부인 없이 지낸 루소는 55세 때인 1899년 미망인인 조세핀누와 재혼했는데 
조세핀누 역시 4년 후인 1903년에 사망하고 만다. 
루소는 1890년에 그린 <나 자신, 초상 : 풍경>이란 작품 팔레트 뒷면에 
이 두 여인의 이름을 써 넣어 먼저 간 크레망스를 추모하고, 재혼한 조세핀누의 건강을 빌었다.

1884년 루소는 루브르 미술관에 나가 옛 대가들의 그림을 모사하였다. 
그는 미술관에 의해 모사증을 받았는데, 이를 몹시 자랑스럽게 여겼다. 
1885년 이후부터는 열정적으로 전시회에 참여하는데, 
살롱 드 샹젤리제에 2점의 작품을 출품한 것을 시초로 
1905년부터는 3년에 걸쳐 계속 살롱 도톤에 출품하였다. 

1886년부터는 앙데팡당전(展)에 출품했다. 
앙데팡당전에의 출품은 1899년, 1900년 두 해를 제외하고는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때 고갱, 르동, 쇠라 등과 친교를 맺었다. 
1893년에는 세관을 퇴직하고 가난한 연금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아이들에게 음악과 그림을 가르치는 사숙(私塾)을 개설, 가르치면서 그림에 전념했다.

 

A tiger attacking a bull. In the rainforest, 1908~1909. by Henri Rousseau. oil on canvas, 46 x 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오늘날 루소를 환상적인 천재로, 또는 입체파의 선구자적인 존재로 기록하는 이유는 
그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환상과 전설, 그리고 단순화된 형태와 기하학적인 구성에 연유한다. 
그의 그림은 전문적인 기교보다는 소박하고 순수한 열정을 통해 
원시적인 세계를 환상에 기반해 제시했다는 점에서 
서투름과 투박한 뒤에서 역설적이게도 숭고한 신비로움을 준다.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 사이에 일어난 기존 가치관의 전도와 새로운 가치 기준, 
새 질서에의 욕구 의지는 급속한 템포로 예술 분야의 변혁을 촉구했고, 
특히 유럽의 정신 세계는 세기말적인 ‘~주의(-ism)의 과잉', '사상의 혼돈'이 찬양되는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루소의 어린이 같고 환상적인 화풍은 
회화사의 새로운 시도로 평가될 수 있었다. 


그의 그림은 전반적으로 사실주의 기법과 닮아 있으나 
실제로 화폭을 면밀히 들여다 보면 인물의 신체 비례는 너무나 어색하고 과장되어 있고, 
등장하는 동식물 또한 자연과 닮아 있지 않아 
오히려 추상적 형태보다 환상성을 더욱 자극하기도 한다. 
예컨대 그는 우거진 나뭇잎이나 풀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커다란 잎사귀 몇 개를 그려 우거진 나무로 표현하였고 
풀의 모양에 있어서도 실제의 형태와 전혀 다른 것으로 그렸다. 

열대의 밀림에 신비롭게 된 꽃도 루소 자신이 만든 창조물이며, 
거기에 배치되는 하나하나의 장면도 루소의 공상 속에서 만들어 낸 것이다. 
루소가 그린 밀림 지대에는 건조한 초원에서 서식하는 사자가 살고 있고 
미녀가 숲속에서 나체로 드러누워 있는 것으로 보아, 
밀림의 생태적인 현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의 머리에 
떠오른 상념 속의 열대 밀림을 창작했음이 분명하다. 
실제로 어느 미술 사학자가 미국의 저명한 식물학자에게 루소가 그린 열대 식물의 

진/부 감정을 위촉한 결과 실존하는 식물과 꼭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회답해 왔다고도 한다.

 

St. Trinity in Paris, 1911. by Albert Marche. oil on canvas, 81 x 6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알버트 마르쉐 (Albert Marche)의 작품은 다른 포브스의 그림과는 달리 
놀랍도록 단순하고 자연색의 변형이 거의 없는 색으로 억제되어 있다. 
그러나 마르쉐가 Fauvist 취미를 통과하지 못했다면, 
그는 표현과 색상 및 구성 해법의 표현의 간결함을 거의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풍경에서 작가는 무한한 세계의 조화와 삶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었다. 
인상주의자들처럼, 마르쉐는 연중 다른 시기에 글쓰기를 좋아했다. 
순수한 색채, 그래픽 윤곽은 그의 작품에 지각의 역동성을 부여한다. 

Still life. Dishes, 1920. by Amede Ozanfan. oil on canvas, 72 x 6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7

 

아메데 오장팡 (Amédée Ozenfant 1886~1966)은 프랑스 입체파 화가이자 작가였다. 
1909년에서 1913년 사이에 그는 러시아,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를 여행했고 
파리의 Collège de France에서 강의에 참석했다. 
1915년 Max Jacob 및 Guillaume Apollinaire 와 공동으로 오장팡은 1916년까지 편집한 
잡지 L' Elan을 창간했으며 그의 순수주의 이론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중에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거주지와 스튜디오에 
자신의 아틀리에인 l' Académie Ozenfant를 설립했다. 
그는 1936년 런던으로 이주하여 그해 5월에 오장팡(Ozenfant) 

미술아카데미를 설립한 후 약 2년 후 뉴욕으로 이주했다. 
뉴욕에 있는 Ozenfant School of Fine Arts는 1939년부터 1955년까지 운영되었다. 
그는 1944년 미국 시민이 되었다. 
오장팡은 1955년 프랑스로 돌아와 1953년에 재귀화 될 때까지 미국에서 널리 가르치고 강의했다. 
그는 남은 생애동안 그곳에 머물렀고 1966년 칸에서 사망했다.

 

Still life with a mirror, 1912. by Jean Rod Joveno. oil on canvas, 92 x 7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Still life with a cat, 1921. by Jean Rod Joveno. oil on canvas, 78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Landscape, 1925. by Leopold Survage (Sturzwage), oil on canvas, 54.3 x 73.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7

 

레오폴 쉬르바주 (Léopold Survage 1879~1968)는 핀란드 출신의 프랑스 화가였다. 
22세에 심한 병을 앓은 후 쉬르바주는 그의 경력을 다시 생각하고 
모스크바 회화, 조각 및 건축 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1910년 모스크바에서 Jack of Diamonds 그룹과 함께 전시했으며 
1911년 Salon d 'Automne 에서 Archipenko의 촉구로 프랑스에서 자신의 작품을 처음 선보였다.
1922년까지 쉬르바주는 신고전주의자들을 찬성하여 입체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쉬르바주는 상징과 신비주의에 점점 더 매료되었다. 

 

Postcard, 1932~1948. by Fernand Leger, oil on canvas, 92.3 x 65.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7

 

페르낭 레제 (Fernand Léger 1881~1955)는 프랑스의 화가이다.
노르망디에서 출생하여 파리의 미술 학교, 아카데미 쥐리앙에서 배웠다. 
페르낭 레제는 인상파 마티스, 세잔의 영향을 받아 1911년경부터 

입체파 운동에 참가하여, 현대 추상화의 길을 열었다. 
그는 기계적인 동적 미를 흡수하여 명쾌한 구도로 정물 · 인물을 그렸다. 

 

Composition, 1924. by Fernand Leger, oil on canvas, 73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7

 

페르낭 레제는 뒤에 무대 장치와 영화에도 관심을 기울여, 
순수 영화를 제창함으로써 전위 영화의 길을 열었다. 
1930년 전후부터 곡선을 자주 사용하고, 동적인 구도를 취하여 심리적인 표현을 더하였다. 
대표작으로 〈결혼식〉, 〈아담과 이브〉, 〈트럼프놀이〉등이 있다.

 

Court scene, 1928. by Eve Alix, oil on canvas, 61 x 5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7

 

Green landscape, 1920~1921. by Andre Lot, oil on canvas, 55 x 4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7

 

Diana on the hunt, late 19th - early 20th centuries. by Edmond Ann Antoine Tapisier, 
oil on canvas, 310 x 13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Allegorical scene, late 19th - early 20th centuries. by Edmond Ann Antoine Tapisier, 
oil on canvas, 279.5 x 84.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Landscape in Provence, 1928. by Alexander Truin. oil on canvas, 
50 x 6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Female figure, 1924. by Andre Favori, oil on canvas, 72 x 4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Number 437

 

Catching herring, 1964. by Andre Fougeron. oil on canvas, 146 x 11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4

 

Bridge, 1964. by Andre Fougeron. oil on canvas, 195 x 9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4

 

Breton coast, 1911. by Leon Hubert. oil on canvas, 46 x 6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onoring the midshipman, 1950. by Guy de Vogue. oil on canvas, 
80 x 4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Protracted conversation, mid-19th century. by Karl Spitzweg (?). oil on canvas, 
68.5 x 4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Female portrait, late 19th century. by Caspar Ritter. oil on canvas, 
55 x 3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Female portrait, early 1890s. by Franz von Pieces. oil on canvas, 
61 x 5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Warrior with a banner, 1821. by Franz von Pieces. oil on canvas, 
59.6 x 4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Bathing Diana, 1872. by Friedrich Preller. oil on canvas, 
41.2 x 59.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Sea view, 1837. by Friedrich Preller. oil on canvas, 63 x 8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Boy with dog, 19 century. by Unknown German artist. oil on canvas, 

97 x 72.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Female portrait, around 1900. by Ludwig Hoffmann. oil on canvas, 
41 x 3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Forest landscape, around second half of the 19th century. by Fritz Ebel. oil on canvas, 

41 x 3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Landscape with a lake, 1840~1860. by Unknown German artist. oil on canvas, 

107 x 14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Peasant children, first half of the 19th century. by Edward Ackerman. oil on canvas, 

42 x 6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Shipwrecked, 1855. by Johann Wilhelm Cordes. oil on canvas, 
120.5 x 18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Scenery, 1828. by Unknown artist. oil on canvas, 80 x 11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of Maurice Vlaminck and Andre Dera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430번 홀은 모리스 블라맹크 (Maurice de Vlaminck 1876~1958)와 
앙드레 드랭 (André Derain 1880~1954)의 작품을 전시한다. 
모리스 블라맹크는 프랑스의 화가로 1899년 앙드레 드랭과 

사귀면서 자연을 대상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블라맹크는 마티스 등과 더불어 야수파 운동에 참가했다. 
처음에는 고흐의 영향을 받아 원색의 밝은 색조로 

점과 곡선을 사용하여 유동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 후 세잔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나, 1918년부터는 새로운 사실주의의 작품을 그렸다. 

'예술에 있어서 이론이란 의사의 처방과 같은 정도로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병자임에 틀림없다. 지식은 본능을 말살해 버린다. 
그림의 창작은 유통(流通)이 자재(自在)로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이렇게 단언하는 모리스 드 블라맹크는 가장 야수파적인 화가였으며 

포비즘 속에 산 화가이기도 하였다. 


블라맹크는 1876년 파리에서 출생했으나 그 집안은 플랑드르 출신이라 한다. 
양친은 음악가로 자제의 교육에는 무관심한 보헤미안 기질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하였고, 바이올린을 켠다든지 
자전거 경주 선수를 해 가면서 자수성가(自手成家)의 인생을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도 그는 본능에 의하여 화가가 되려고 했다. 

 

Room of Maurice Vlaminck and Andre Dera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모리스 블라맹크는 "화가란 무정부주의자와 같아 직업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나는 어린이의 눈으로 사물을 본다"라고도 하였다. 
그는 앙드레 드랭과의 교우로 마티스와 사귀어 포비슴 운동에 가담하였다. 
블라맹크는 무엇보다도 생명력의 표현을 화면에서 추구해 보려던 화가이다. 

"나는 미풍양속에 혁신을 불러일으키고 싶다. 
진부한 이론과 의고전주의(擬古典主義)에서 해방된 자연의 활달함을 보여주고 싶다"
고 말하던 블라맹크의 패기는 색채의 과잉과 범람으로 화면에 마구 넘쳐 흘러 
야수파 중에서도 더한층 높은 음색의 절규가 되었다.

 

Room of Maurice Vlaminck and Andre Dera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앙드레 드랭 (André Derain 1880~1954)은 프랑스의 예술가, 화가, 조각가이다. 
앙리 마티스와 함께 야수파을 주창하였다.
드랭은 1880년 파리 외곽의 일드프랑스, 이블린, 샤투에서 태어났다. 
블라맹크와 마티스를 만난 뒤 그림을 기리기 사작했다는 주장과는 달리, 
앙드레 드랭은 1895년에 그림을 혼자 공부하기 시작했다. 
1898년 Académie Camillo에서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수학하는 동안 
그는 외젠 카리에르가 지도하는 회화 수업에 출석했고 그곳에서 마티스를 만났다. 

1900년에 드랭은 모리스 블라맹크를 만나 스튜디오를 공유하였고, 
함께 인근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1901년 9월부터 1904년까지 
Commercy에서의 군 복무로 인해 작업은 중단되었다. 
퇴역 후 마티스는 드랭의 부모에게 드랭이 공학 공부를 포기하고 미술에 전념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설득하였고 이후 드랭은 줄리안느 아카데미에 출석했다. 

드랭과 마티스는 1905년 여름동안 지중해 마을 콜리우르(Collioure)에서 함께 작업했으며, 
같은 해 말에 살롱 도톤에서 매우 혁신적인 그림을 공개했다. 
생생하고 부자연스러운 색상으로 인해 비평가 루이 복셀은 그들의 작품을 
"les Fauves" 또는 "야수"라고 조소적으로 불렀고, 이것이 야수파 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Room of Maurice Vlaminck and Andre Dera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1906년 3월, 유명한 미술상 앙브루아즈 볼라르(Ambroise Vollard)는 
앙드레 드랭을 런던으로 보내 런던을 주제로 한 일련의 그림을 그리게 했다. 
30점의 그림(그 중 29 점은 아직 현존)에서 드랭은 휘슬러나 모네와 같은 
이전의 화가의 작품과 완전히 다른 런던의 초상을 선보였다. 

대담한 색상과 구성으로 드랭은 템스강과 타워 브리지가 등장하는 여러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을 보고 미술 평론가 T. G Rosenthal는 이렇게 평가했다.
"모네 이후로 런던을 그렇게 신선하게 묘사하면서도 
영국적인 본질을 유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드랭은 템즈강을 묘사할 때 여러 개의 점을 찍는 점묘법을 사용하였는데, 
지금까지도 그 점들은 더욱 커지고 있기 때문에, 분할 점묘라고 불리는 색상의 분리 그 이상이며, 
햇빛을 받으며 흐르는 강물 안에서 분할된 색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Seine view, 1906. by Maurice de Vlaminck. oil on canvas, 54.5 x 6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Town by the lake, 1909. by Maurice de Vlaminck. oil on canvas, 81.3 x 100.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Town, 1908~1909. by Maurice de Vlaminck. oil on canvas, 73.4 x 92.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Bougival, 1909. by Maurice de Vlaminck. oil on canvas, 73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Landscape with a house on a hill, 1925~1926. by Maurice de Vlaminck. oil on canvas, 
33 x 4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Port, 1905.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62 x 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The road among the mountains, 1907.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81 x 10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Houses by the water, 1910.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61 x 102.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The rocks, 1912.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60.5 x 8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Still life. Clay jug, white napkin and fruit, 1912.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61 x 5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Still life. Basket with bread, jug and glass of red wine, 1913.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100.5 x 11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Table and chairs, 1912.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88 x 8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Still life with a skull, 1912.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72 x 11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Grove, 1912.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116.5 x 81.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Landscape with a boat near the coast (Quarry-Senis-Denis), 1915.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100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Martigues. Harbor in Provence, 1913.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141 x 9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Portrait of an Unknown Man Reading a Newspaper (Chevalier X), 1911~1914.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162.5 x 97.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Girl in black, 1913.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93 x 6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Portrait of a girl in black, 1913.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116.5 x 89.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영상] Maurice Vlaminck and André Derain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Room of fauvist Artist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422번 홀은 강렬한 색상의 페인팅이 주된 역할을 하는 

야수파(fauvist)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거의 모든 그림은 20 세기 초반에 제작되었다. 
야수파(野獸派) 또는 포비즘(fauvism)은 20세기 초반의 

모더니즘 예술에서 잠시 나타났던 미술 사조이다. 
20세기 미술은 반자연주의를 기조로 하는 혁신적 유파(流派)와 사조가 
어지럽게 뒤바뀌게 되지만 그 발단이 되는 것은 야수파의 운동이다.

야수파는 강렬한 표현과 색을 선호했다. 
야수파의 흐름 자체는 1900년 경에 시작되어 1910년 이후까지 지속되기는 했으나, 
실제 야수파 운동은 1905년부터 1907년까지 약 3년 동안 
세 차례의 전시회를 갖는 데 그쳤으며 결속력도 약했다. 
이 운동의 기수로는 앙리 마티스와 앙드레 드레인이 있었다.

기법상의 특징은 강한 붓질과 과감한 원색 처리, 

그리고 대상에 대한 고도의 간략화와 추상화이다. 
눈에 보이는 색채가 아닌 마음에 느껴지는 색채를 밝고 거침없이 표현했다. 
이지적인 큐비즘과는 달리 감정을 중시한다. 
표현주의의 한 형태로도 볼 수 있다.

Room of fauvist Artist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야수파의 주요한 화가로는 파리 미술학교의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 문하생인 
앙리 마티스(Henri Émile-Benoit Matisse), 알베르 마르케(Albert Marquet), 
앙리 망갱(Henri Charles Manguin)을 중심으로 하고 여기에 라울 뒤피(Raoul Dufy),

오통 프리에스(Othon Friesz), 오귀스트 차보드(Auguste Chabaud) 등이, 
또 개인적인 교우를 통하여 키스 반 동겐 (Kees van Dongen), 조르주 뒤푸이 (Georges Dupui),

오귀스트 에르뱅(Auguste Herbin), 진 푸이(Jean Puy), 오귀스트 에르뱅(Auguste Herbin)

피에르 폴 지리유드(Pierre-Paul Girieud) 등이  참가하고 있었다. 

 

마티스를 리더로 한 이들 화가는 거의 1870년대 태생이라는 
같은 세대의 연대감에 서서 이론적인 기반에서보다 기성 회화에 대하여 
어떻게 하든 일격을 가하려고 하는 젊은 패기와 야심에서 공통되고 있었다. 
그들이 당면한 적으로 삼은 것은 시각의 진실을 추구한 나머지 
창조의 주체성과 내면적인 감동을 잃어버린 인상주의(印象主義)였으며, 
따라서 이 인상주의에 중요한 수정을 시도한 선배 고흐의 격정과 
고갱의 원시적 생명력의 표현은 그들을 한결같이 분발하게 하는 모범이 되었다.

파괴와 혁신에 불타는 야수파의 유일한 무기는 색채였다. 
그것도 빛깔의 인상을 조금씩 칠해 가는 타율적인 색채가 아니고, 
단숨으로 캔버스에 범람시킨 강렬한 원색, 이것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다이너마이트의 뇌관(雷管)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강렬한 원색이 작렬(炸裂)하는 가운데 감성의 해방과 자아의 고양(高揚)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젊고 창조적인 에너지의 대담한 연소를 다하려고 하였다. 

 

Room of fauvist Artist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이러한 젊은 생명력의 연소와 그것이 기성 회화에 끼친 적잖은 충격에 
그들의 야수 중에도 야수다운 영역이 있으며, 거기에 포비슴이 수행한 
역사적인 역할의 거의 전부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그러한 패기에 앞서서 확고한 이론을 갖지 못하고 
다만 같은 세대라고 하는 친밀감을 바탕으로 나오게 된 포비즘 운동은 
흩어지는 것도 또한 빨랐다. 

그리하여 1908년에는 이미 클럽으로서의 결속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마티스는 독특한 장식체계의 확립으로, 마르케는 중후한 풍경화로, 
드랭은 고전으로, 그리고 브라크는 세잔에게서 본을 딴 엄밀한 화면 구성으로, 
각자가 자기 본래의 자질을 지향하여 떨어져 나갔다.

 
관점을 바꾸어 말한다면 밖으로 향했던 혁신의 기개에 불탄 젊은이들이 
안에서 각자의 개성의 차이를 발견해 내는 기회와 장소로 삼은 것이
 클럽으로서의 포비즘의 의미였다고도 할 수 있다. 
포비즘은 에콜(流派)이 아니라고 하는 의견도 이 때문에 나오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고하는 화려한 '색의 계절풍(季節風)'이었다.

이처럼 야수파는 9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의 미술활동이었지만 
20세기 현대미술의 신호탄과 같은 주요 사조로써 평가된다. 
그 이유는 야수주의를 시작으로 화가의 주관이 색채로 표출되는, 
즉 관념적 사상이 색채로써 표출될 수 있는 색채의 추상성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야수파의 화가들은 하늘과 바다는 푸른색, 나무가 울창한 산은 초록색이라는 
색채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감정을 표현하는 매개체로써 개성 강한 색채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은 아프리카와 같은 3세계 미술의 성향인 원시주의(Primitivism)에 
영향을 받아 더욱 과감하고 강렬하게 색채를 왜곡해 나갔다. 
여기에 더해진 생략된 묘사와 허술한 표현 그리고 성의없어 보이는 
붓질의 흔적이 더해진 야수파의 작품은 당시 비평가들에게 ‘추한 그림 ’ 
그리고 ‘미치광이의 반란’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그들은 야수파의 작품들을 야수적이라고비꼬았으며, 
'야수파'의 미술적 사조에 가담된 화가들을 ‘야수들’이라 조롱하는 가운데 
'야수파'라는 새로운 사조가 탄생하게 되었다.

 

Red dancer,1907. by Kees van Dongen. oil on canvas, 99.7 x 8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키스 반 동겐 (Kees van Dongen 1877~1968)은 네덜란드 출신의 프랑스 화가이다.
1877년 1월 26일 로테르담에 가까운 구시가지인 항구도시 델프스하븐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예술에 재능을 보인 그는 15세 되던 1892년 
로테르담의 왕립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하여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야간 과정에서 공부한 그는 많은 시간을 부둣가에 나와 

선원들과 매춘부들을 스케치하며 보냈다. 
1897년 공부를 마치고 파리로 가 몽마르트르의 보헤미안적인 분위기 속에서 
간판에 그림을 그리거나 시사풍자 잡지에 삽화 그리는 일을 하기도 했다.

반 동겐은 마티스 이후 야수파를 일군 인물 중 한 사람으로서 
특히 감각적으로 그린 여인의 초상화들로 유명하다. 
선원가문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예술적 재능을 나타낸 그는 
가난한 집안의 사정 때문에 1896~1898년에서야 

로테르담 예술학교에서 화가로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그의 보헤미안같은 생에 대한 태도와 미술학교에서의 수업에 대한 불만 등으로  
화가 마티누스 실트(Martinus Schilt)의 작업실 이층으로  옮긴 뒤 
이곳에서 삼년동안 지내게 되며 그동안 주로 창녀들이나 
배의 선원들을 그의 그림의 테마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퇴페적인 여자들의 그림들이 이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Antonia La Coquinera, 1906. by Kees van Dongen. oil on canvas, 100 x 8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반 동겐은 로테르담 왕립 아카데미를 다니다가 20세 때인 1900년 파리에 옮겨간 후 
몽마르트르 지역의  보헤미안적인 분위기 속에서 칠장이, 풍자 답지 삽화가, 
카페 예술가, 신문을 배달할만큼 가난에 찌들어진 생활이었지만 
이곳에서 몇몇 무정부주의자들과의 친분을 맺고 주간지에 그의 삽화를 기재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다소 인상주의적인 방식으로 작업하던 반 동겐은 
1902년부터 점차 채색 중심의 대담한 화풍의 그림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1904년 앙브루아즈 볼라르(Ambroise Vollard)의 화랑에서 100여 점의 작품을 전시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5년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앙드레 드랭(Andrè Derain) 등과 함께 살롱 도톤전에 참여했다.

​이때 미술 비평가 루이 보셀(Louis Vauxcelles)은 이들의 작품을 두고 
‘레 포브(Les Fauves)' 즉, 야수들의 그림이라고 비꼬았다. 
반 동겐은 원색조의 강렬한 색채와 정적인 관능미가 돋보이는 
<팜므파탈 (Femme Fatale 1905)>을 출품하여 야수파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Woman in black hat,1908. by Kees van Dongen. oil on canvas, 100 x 8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반 동겐은 1906년 몽마르트르의 세탁선(바토 라부아르)으로 거주지를 옮겨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를 비롯한 수많은 화가와 시인, 
음악가들과 친분을 맺고 그로부터 예술적인 영감을 받았다. 
이 때 피카소의 연인인 페르낭드 올리비에(Fernande Olivier)의 초상을 그리기도 했다.

​풍부한 예술적 토양과 환경 속에서 그는 자유분방한 보헤미안의 이미지를 만들어갔다. 
1906년 포비즘 운동에 참가하여 신선한 색채와 
힘세고 북돋운 것 같은 필치로 독자적 화풍을 형성하였다.   

동겐은 1907년 피카소 그림의 판매인이었던 다니엘 헨리 칸바일러와 
계약을 맺은 뒤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1908년에는 당시 드레스덴에 본거지를 두었던 독일 표현주의 그룹 
'다리파(Die Brucke)'에 참여해 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그의 솔직하면서도 색채효과가 뛰어난 초상화 양식은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선풍적으로 유행했다.​

한편, 반 동겐은 1908년 독일 표현주의 그룹인 다리파에 가담하여 
드레스덴에서 열린 다리파 전시회에 참여했다. 
그는 유일한 야수파 화가로 프랑스의 야수파와 독일 표현주의 회화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했다.

 

Lucy and her partner, 1911. by Kees van Dongen. oil on canvas, 130 x 9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반 동겐은 주로 서커스나 카바레 같은 도시의 유흥시설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여인들의 누드와 밤의 도시 생활을 주제로 택해 
감성적이면서도 긴장과 불안감이 엿보이는 작품 세계를 펼쳤다. 
그는 순수한 색채와 유혹적이되 정적인 관능미가 넘치는 인물 표현으로 
사교계의 큰 호응을 얻어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는 
사교계의 공식적인 초상화가로 널리 알려졌다.

​후기에는 병적이고 퇴폐적인 미가 부각되었지만, 오히려 상류 사회의 호평을 받아 
저명인사나 유명 여배우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이러한 작품들에서 그는 권력과 부로 치장된 화려한 외관 속에 감추어진 
부패하고 타락한 실상을 냉소적으로 표현했다.

특히 퇴폐적인 관능성을 견디어 낸 초상화를 그려 크게 인기를 얻었다. 
만년에는 사교계의 총아로서 오로지 유명인의 초상을 그렸다. 
초상화와 삽화를 그리는 화가로 서구에서는 마티스와 같이 야수파의 거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동겐은 풍부한 색채의 바다 풍경과 과감하고 간결한 양식의 파리 풍경도 여러 점 그렸다.

Spring, 1908. by Kees van Dongen. oil on canvas, 81 x 10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반 동겐은 초기에 인상파 풍(風)의 그림을 익히고 있었으나, 1906년 포브 운동에 참가하여 
생생한 원색을 사용하여 인물과 풍경을 그렸는데 당시는 마티스의 영향이 현저했다. 
후에는 드레스덴의 '브뤼케' 파(派)에도 가입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표현파의 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1905∼1913)의 제작을 동겐에게 있어서 절정이라고 보는 비평가가 많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 초상화가로서의 재능도 결코 무시할 수가 없다. 

그는 여기에 일찍이 공감해 마지않던 수틴의 작풍을 받아들여서 사교계의 히로인과 은행가 
그리고 무희 등을 신랄하게 그려 내어 그의 붓은 그들에게 아첨할 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반 동겐이라고 하면 경묘한 필치로 표현한, 
세련된 부인들과 그녀들의 멋장이 유행 감각에만 맴돌았다고 평한다.

파리에서 거주하고 있는 동안 반 동겐은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가지기도 하고 1908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키쉬너(E.L. Kirchner) 등 4명의 대학생들로 창립된 독일 인상파주의 그룹 
다리파(Die Bruecke/Bridge)의 회원이 되기도 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그의 그림들은 더 사실적으로 변하고 
미술가로서의 명성을 떨치게 되며 반 동겐은 1929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고 
화가 라울 뒤피(Raoul Dufy)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반 동겐은 1926년에는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1927년에는 벨기에 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1929년 프랑스 정부는 그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반 동겐은 1959년부터 모나코에서 살았고, 
1968년 91세를 일기로 몬테카를로의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Roofs and Cathedral in Rouen, 1908. by Otho Friez. oil on canvas, 119 x 9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오통 프리에스(Othon Friesz 1879~1949)는 프랑스의 포비스트(야수파) 운동 예술가였다. 
프리에스는 오랜 조선소와 선장의 아들로 르 아브르(Le Havre)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5~96년 르 아브르의 미술학교(Le Havre School of Fine Arts)에서 
공부하는 동안 평생 친구인 뒤피(Raoul Dufy)를 만났다. 

 

Temptation (Adam and Eve), 1910. by Otho Friez. oil on canvas, 73 x 6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프리에스와 뒤피는 1895~96년 더 많은 연구를 위해 장학금을 받고 함께 파리로 가서 
에콜 드 보자르에서 보나의 교실에 입실하고 귀스타브 모로의 교실에 있었던 
마티스(Henri Matisse), 마르케(Albert Marquet),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를 만났다. 
프리에스는 야수파의 일원이 되어 1907년 그들과 함께 전시했다. 

 

Tulips and daisies, 1910. by Otho Friez. oil on canvas, 65 x 8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1908년 프리에스는 노르망디(Normandy)로 돌아왔다. 
그는 1912년 자신의 스튜디오를 열고 1914년까지 가르쳤고, 전쟁 기간 동안 군대에 입대했다. 
그는 1919년 파리에서 다시 살았고 1949년 사망할 때까지 
툴롱과 쥐라 산맥으로의 짧은 여행을 제외하고 그곳에 머물렀다.

 

Still life with a statuette of Buddha, 1909. by Otho Friez. oil on canvas, 51 x 4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프리에스의 생애의 마지막 30년 동안, 그는 이전 동료들과 
동시대 사람들의 스타일에서 완전히 벗어난 스타일로 그림을 그렸다. 
희미한 바로크 풍미는 그의 풍경, 정물화 및 인물화에 활력을 더했다.

 

Hill, 1908. by Otho Friez. oil on canvas, 61 x 7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생동감 넘치는 아라베스크와 야수파 시절의 화려한 색채를 포기한 프리에즈는 
더 냉정한 팔레트로 돌아와 논리적 구성, 단순한 색조, 볼륨의 견고함 및 
평면의 뚜렷한 분리에 대한 세잔(Cézanne)의 아이디어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그렸다. 

 

Autumn works, 1907. by Otho Friez. oil on canvas, 54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프리에스는 1949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파리 교외에 있는 몽파르나스(Montparnasse) 묘지에 묻혔다.

 

Rural landscape, 1910. by Auguste Chabo. oil on canvas, 77 x 107.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오귀스트 차보드(Auguste Chabaud 1882~1955)는 프랑스 화가이자 조각가였다.
그는 프랑스 남부 님(Nimes)에서 태어났다. 
14세에 차보드는 아비뇽의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 합류했다. 
1899년에 그는 아카데미 줄리안(Academie Julian)과 에콜 데 보자르에서 
예술 훈련을 계속하기 위해 파리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마티스(Henri Matisse)와 앙드레 드랭(André Derain)을 만났다. 
1900년에 그는 프랑스 남부에 있는 그의 부모의 포도원으로 돌아왔다. 
그 사업이 그곳의 위기로 인해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1901년에 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파리를 다시 떠나야 했다. 
그는 배에서 일하면서 서아프리카 해안을 알게 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파리의 밤 문화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의 스튜디오가 있는 파리 인근 몽마르뜨에서 그는 파리 생활의 다양한 장면을 그렸다.

1903년부터 1906년까지 튀니지에서 군 복무하는 동안 차보드는 사람들과 풍경화를 그렸다. 
그는 이후 파리로 돌아와 야수파(Fauves)와 함께 전시했다. 
수년 동안 그의 파리의 밤 문화 그림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주제를 포기하자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은 점차 줄어들었다. 

차보드의 입체파 단계는 1911년에 시작되어 조각 작업을 시작했다. 
다음 해에 그는 1913년 뉴욕을 포함하여 많은 전시회를 가졌으며 
그의 작품은 마티스, 드랭, 블라맹크(Vlaminck) 및 피카소(Picasso)와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과 함께 전시되었다.

1920년부터 그는 "푸른 시대"를 보냈다. 
그는 그의 작품에서 유일한 색으로 프러시안 블루를 사용했다. 
그때부터 그는 프랑스 남부에만 집중했다. 
그는 시골 생활, 농부, 알필(Alpilles)의 언덕과 산책로의 장면을 그렸다. 
그는 1955년 Graveson에서 사망했다.

 

Flowers, 1906. by Auguste Herbin. oil on canvas, 81 x 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오귀스트 에르뱅(Auguste Herbin 1882~1960)은 프랑스에서 태어나 
1898년부터 1901년까지 릴의 에콜 데 보자르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서 

드로잉을 공부하고 파리에 정착하였다.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화풍으로 시작했는데 이후 피카소, 브라크, 후앙 그리 등과의
만남을 통해 입체주의에 관심을 두었다고 한다.
1917년에 처음 추상 작품을 제작하였고 추상화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하였다.

 

Mill on the Marne, 1911. by Auguste Herbin. oil on canvas, 22 x 3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Peonies, 1906. by Pierre-Paul Girieud. oil on canvas, 81.5 x 6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피에르 폴 지리유드(Pierre-Paul Girieud 1876~1948)는 1876년 6월 17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프로방스에서 자라 독학으로 화가가 된 그는 1900년에 군 복무를 마치고 
몽마르뜨의 테르트르 광장 근처로 이사한 후 현대 미술의 거장들,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알베르 마르케(Albert Marquet), 앙리 망갱(Henri Charles Manguin), 

샤를 카무앙(Charles Camoin),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등과 함께 활동했다. 

그곳에서 피에르 지리유드는 몽마르뜨 크리에이티브 클러스터의 본사이자 
유명한 카페인 "Lapin Agile"에 정기적으로 참석한다. 
지식인과 예술가들 사이에서 중요한 인물인 피에르 지리유드의 

그림에 대한 접근 방식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그는 전통적 표현의 경계를 넘어 포비즘과 표현주의의 발전에 참여하기 위해 노력했다.

 

Quay Notre Dame in Le Havre, 1908. by Georges Dupuis. oil on canvas, 58 x 7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조르주 뒤푸이 (Georges Dupuis 1874-1932)는 프랑스 화가이다.

 

Portrait of Suzanne Dufy, the artist's sister, 1904. by Raoul Dufy. oil on canvas, 

46 x 3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라울 뒤피 (Raoul Dufy 18877~1953)는 프랑스의 화가로 
직물, 도자기 디자이너 사이에서 유행한 다채롭고 장식적인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1877년 르 아브르에서 태어난 뒤피는 23세에 파리로 나와 오로지 
인상파의 드가를 생각하게 하는 그림을 약간 어두운 색조로 그렸다. 
라울 뒤피가 자기의 묘화 과제에 대하여 스스로 계발(啓發)된 계기는 
마티스의 작품 <호사 · 정밀 · 쾌락>을 접한 때라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그림을 보고 나는 그린다고 하는 참다운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정말 놀라운 발명이라 할 이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인상주의적인 리얼리즘의 매력은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린다."

포비슴의 운동에 참가한 후부터 그는 자랑으로 여긴 속필(速筆)을 유감없이 구사하여 
삶의 기쁨을 다채롭게 표현하는 화가가 되었다. 
보트 경주, 수욕장 풍경, 길거리 축제 등 환희의 소리가 울리는 

장소와 장면은 그가 애호하는 모티프가 되었다. 
그 후에 그는 큐비즘으로 접근했으며, 한때는 화상(畵商)도 위험시하는 

실험가인 척도 하였지만 그 금욕적인 분석과 구성의 수법은 결국 

그의 기질과 맞지 않아 그는 또다시 자칭 '바캉스의 화가'로 회귀하였다. 
특히 그는 생활을 위하여 디자인을 하는 일에도 손을 대어 
장식 미술가로서도 높이 평가를 받아 그 힌트에 의하여 회화도 충실하였다.

 

Portrait of the artist's wife, 1909. by Jean Puy. oil on canvas, 131.5 x 9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1876 년 11월 8일 프랑스 로안에서 태어난 진 푸이(Jean Puy)는 

파리의 Académie Julian에서 공부하고 1905년에 다른 야수파(Fauves)와 함께

Salon de Indédependants 및 Salon d' Automne에 작품을 전시했다. 

 

Landscape, 1903. by Jean Puy. oil on canvas, 48.5 x 7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오늘날 진 푸이의 그림은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 런던의 Courtauld Institute of Art 등에 영구 소장품으로 전시되어 있다. 
진 푸이는 1960년 3월 6일 프랑스 Roanne에서 사망했다. 

 

Landscape in Saint-Tropez, 1905. by Henri Charles Manguin. oil on canvas, 50.5 x 6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앙리 망갱 (Henri Charles Manguin 1874~1949)은 프랑스 야수파(Fauves) 화가였다.
앙리 망갱은 국립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에 입학하여 
구스타프 모로(Gustave Moreau)에게 사사하고 마티스(Henri Matisse ), 

마르케( Albert Marquet), 키스 반 동겐 (Kees van Dongen), 

오통 프리에스(Othon Friesz), 라울 뒤피(Raoul Dufy) 등과 교유하며, 
1905년 살롱 도톤의 유명한 포비슴(野獸派) 출품 사건에 참가하였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지중해의 태양 아래서 만들어졌고, 
자연의 찬가를 노래하듯이 격렬한 색채의 하모니를 이루고 있으나, 
다른 포비스트에 비하면 종래의 형태나 구도에 집착하여, 

온화한 경지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였다. 

 

Path in Saint-Tropez, 1905. by Henri Charles Manguin. oil on canvas, 73 x 9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Morning in the Cavaliere, 1906. by Henri Charles Manguin. oil on canvas, 81.5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Flowers, 1915. by Henri Charles Manguin. oil on canvas, 41.7 x 3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8

 

 

 

Room of Charles Guer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421번 홀은 샤를 프랑수아 프로스페르 게랭(Charles-François-Prosper Guérin 1875~1939)
프랑스 포스트 인상파 화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샤를 게랭은 파리의 보자르 드 파리(l' École des Beaux Arts) 에서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와 마티스, 마르케와 함께 공부했으며 1910년 
그래프턴 갤러리(Grafton Galleries)에서 작품 전시회를 가졌다. 

 

Room of Charles Guer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Lady with rose 장미를 든 여인, 1901.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52.5 x 37.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stroll, 1921.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79.5 x 16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Girl with a book, 1906.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73.5 x 5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Walk in the park, 1910.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44 x 5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Gallant scene, 1908.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45.5 x 54.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Terrace, 1909.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55 x 4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Musician, 1907.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61 x 4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Expectation, 1907.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66 x 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Nude woman, 1910.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116 x 8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Portrait of a young woman, 1909.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52 x 5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Moonlit night in the forest in Montmorency, 1897.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38 x 6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영상] Charles-François-Prosper Guérin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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