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의 역사극장

일본으로 인도되는 이동휘를 구하라

박진순의 행적으로 살펴본 연해주에서 출현한 최초의 사회주의자들

 

 

전로한족중앙총회 제1회 대회가 열린 장소(우수리스크). 이 대회에서 케렌스키 임시정부 지지 노선과 볼셰비키 지지 노선으로 나뉘는 현상이 나타났다. 임경석 제공

 

연해주 한인사회는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발원지다. 그곳에서 어떻게 최초의 사회주의자들이 출현했는가? 이 물음의 답을 찾는 데 박진순의 행적이 도움된다. 그는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청년이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됐는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1917년 2월혁명 이후 교직 생활을 그만두고 재러시아 한인 정치 망명자들의 중심지인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겼습니다. 대한국민회 블라디보스토크 지부 비서로 일했습니다. 얼마 후 케렌스키 정부가 인터내셔널 활동을 문제 삼아 ‘독일 스파이’ 혐의로 이동휘 동무를 체포했습니다. (…) 나는 이동휘 동무와 가장 가까운 동료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반(半)합법 상태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나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동휘 동무를 일본 정부에 넘기려는 것에 반대하는, 석방 캠페인을 이끌었습니다.” 1

 

혁명의 격정이 박진순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는 문장이다. 1917년 러시아에서 전제군주제를 무너뜨린 혁명이 발발했다. 바로 2월혁명이었다. 니콜라이 2세가 폐위되고 의회를 기반으로 하는 부르주아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혁명은 수도 페트로그라드만이 아니라 전체 러시아를 휩쓸었다. 20살 청년 박진순도 이에 가담했다. 연해주 남부 농촌지대 한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그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교직을 사임하고 극동지방의 중심 도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나아갔다.

 

독일 스파이로 공격받은 레닌처럼

 

그는 대한국민회 블라디보스토크 지부에 가담했다. 여기서 말하는 대한국민회란 어떤 단체일까? 러시아어 철자로 ‘대한국민회’(Дайхан-Гукмин-Хве)라고 똑똑히 기재한 것을 보면 고유명사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단체의 실체를 밝히기가 쉽지 않다. 3·1운동 당시 북간도에서 설립된 같은 이름의 단체가 있긴 하다. 하지만 2년 뒤 일이므로 그와는 다른 단체일 것이다.

 

그렇다면 블라디보스토크 거주 한인의 자치단체를 가리키는 게 아닐까? 그즈음 연해주 한인 이주민은 약 20만 명이었는데, 블라디보스토크에만 7600명이 살았다. 그중 4천 명이 신한촌에 집단으로 거주했다. 그들을 결속한 민회였을 가능성이 있다.2 혹은 비밀결사일 가능성도 있다. 모국의 독립을 목표로 하는 소수 구성원의 혁명적 민족주의 단체였다면 비공식적으로 은밀하게 존재했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어느 것이라고 단정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어쨌든 연해주의 수도라 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박진순은 한인 기반의 혁명단체에 깊숙이 관여했음이 명백하다.

 

‘독일 스파이’ 혐의란 무엇인가? 이동휘가 그 혐의를 받아 부르주아 임시정부 관헌에게 체포됐다고 한다. 1917년 5~6월 일이다. 당시 러시아는 전시체제였다. 제1차 세계대전 주요 참전국으로서 독일을 상대로 전쟁 수행 중이었다. ‘독일 스파이’ 혐의란 교전 중인 적대국과 내통한다는 것이었다. 그해 4월의 레닌을 연상하게 한다. 2월혁명이 발발하자 스위스에 망명 중이던 레닌은 독일 지원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페트로그라드에 귀환한 레닌은 유명한 4월 테제를 발표하여 전쟁 중단을 요구했다. 또 의회민주주의에 반대하고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 노선을 천명했다. 급진적인 반정부 운동을 지휘하는 레닌은 반대파에 의해서 독일 스파이로 공격받았다.

 

이동휘도 그랬다. 러시아가 독일과의 전쟁을 종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만 러시아-일본 동맹이 취소될 가능성이 열릴 터였다. 제1차 세계대전 개전 초기에 이동휘를 비롯한 반일운동 지도자 21명이 러시아 영외 추방령을 당했다.3 러일 동맹 파기는 연해주에서 한인들의 반일 독립운동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전제조건이었다.

 

박진순의 사진, 20대 후반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임경석 제공

 

전로한족중앙총회의 다수파와 소비에트 분파

 

일본 정부는 수감된 이동휘에게 눈독을 들였다. 반일 독립운동의 지도자를 이번 기회에 포획하고자 했다. 일본대사관은 외교 루트를 통해서 이동휘의 신병 인도를 요청했다. 일본은 러시아의 동맹국이었다. 서쪽 방면의 대독일 전쟁에 전념하려면 동쪽 방면에서 일본과의 동맹을 굳게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이동휘의 운명이 위기에 처했다. 아니, 이동휘로 대표되는 조선 독립운동의 전투적인 흐름이 위기에 처했다고 봐도 틀리지 않았다.

 

박진순이 나섰다. 이동휘의 일본 인도를 저지하기 위해, 더 나아가 이동휘를 석방시키기 위해 사회적 압력을 조직했다. 대한국민회 블라디보스토크 지부 비서라는 직위가 도움을 줬을 것이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사회의 3인 대표단 일원으로 선발됐다. 러시아 중앙과 지방정부 요로와 협상하기 위해서였다. 협상 상대 파트너는 극동임시정부 루사노프 전권위원이었다. 케렌스키 중앙정부로부터 연해주 일원의 통치를 위임받은 요인이었다. 그러나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이동휘의 석방은 10월혁명으로 정권이 다시 한번 뒤바뀐 뒤에야 이뤄졌다.

 

2월혁명의 방향을 둘러싸고 러시아 전역에서 갈등이 고조된 것과 마찬가지로 연해주 한인사회에서도 분열이 발생했다. 이 분열은 현지 한인 권익 옹호 기관인 전로한족중앙총회의 미래를 둘러싸고 표출됐다.

 

“러시아에서 최고의 한인 기관이던 전로한족중앙총회 내에서는 반소비에트적인 분자가 다수파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한명세, 김야꼬프, 문창범 등의 입헌민주당·사회혁명당 계열의 정상배들에 의해 지도되고 있었습니다. 전로한족중앙총회 내에서 소비에트 권력과 볼셰비키의 강령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소수파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두 분파 사이의 투쟁은 10월혁명 이후 한층 첨예화됐습니다. 나는 소비에트 분파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4

 

전로한족중앙총회는 1917년 6월 니콜스크우수리스크(현재 우수리스크) 시에서 결성된 러시아 한인의 권익단체였다. 차르 체제 붕괴 이후 새로운 정치제도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됐다. 그러나 이 회의에 참가한, 각지에서 온 대표자 96명은 분열됐다. 부르주아 임시정부가 주도하는 헌법제정회의에 한인 대표를 파견하는 문제가 쟁점이었다.

 

‘두루미’라 불린 가난한 사람들

 

대표 파견을 주장하는 다수파는 연해주 한인사회의 유력자층이었다. 대부분 러시아 국적을 가진 귀화인이었다. 경제적으로도 유족했다. 이 사람들을 가리켜 으뜸 ‘원’자를 써 원호(元戶)라고 했다. 의식주 생활이 러시아화한 사람들이었다. 남녀가 서로 팔짱 끼고 걸어다니는 것이나, 부부 동반하여 슬라브정교회 성당에 예배 보러 가는 것이나 러시아인과 다름없었다. 러시아말로 대화를 나누는 것에 조금도 어색한 빛이 없었다. 결혼도 그들끼리만 했다.

 

이 세력의 지도자로 꼽히는 이는 최재형, 문창범, 한명세 등이다. 이 가운데 최재형과 문창범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설립될 당시 각각 재무부 총장, 교통부 총장에 선임될 정도로 신망이 높았다. 비록 임시정부 보이콧을 주장하며 취임을 거절했지만 말이다. 한명세는 1920년 이후 볼셰비키 지지로 노선을 바꿔서 이른바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의 수장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2월혁명 정세 속에서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행보를 보였다. 대독일 전쟁 정책을 지지함에 따라, 러일 동맹 유지 정책에도 호의적이었다.

 

대회장에는 헌법제정회의 대표 파견을 반대하고 노동자·병사 소비에트의 정권 장악을 주장하는 대표자들이 있었다. 볼셰비키 정치노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대회에서는 소수파였다. 박진순은 바로 이 대표자 그룹 일원이었다. 이 그룹에는 이동휘 석방 캠페인을 벌인 동료들이 포진했다.

 

이들은 연해주 한인사회의 다수를 점하는 가난한 비귀화인을 대표했다. 비귀화인은 조선이나 북간도에서 건너간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니만큼 러시아말이 서툴렀다. 또 대체로 가난했다. 도시와 농촌에서 불안정한 하층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들을 가리켜 남을 ‘여’자를 써 여호(餘戶)라고 했다. 여호층의 심리 속에는 모국 조선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강렬했다. 그들은 독일과의 전쟁 지속 정책이 민중의 삶을 도탄에 빠뜨리고 세계 평화에도 저촉된다고 생각했다. 또 러시아와 일본의 동맹이 지속하는 것도 찬성하지 않았다. 이들은 전쟁 반대, 임시정부 반대를 표방하는 볼셰비키 노선에 공감했다. 한자어 표기에도 어렴풋이 드러나듯이 원호들은 비귀화인을 ‘레베지’(두루미)라고 부르며 깔보는 경향이 있었다.5 외출할 때 흰옷을 입고 줄지어 가는 것이 마치 두루미 같다는 뜻이다. 문명화된 자신들에 비해 가난하고 야만적인 사람이라는 어감이 내포됐다.

 

대회장의 의석 분포는 대략 7 대 3으로 나뉘었다. 70%의 다수를 점한 원호 그룹은 헌법제정회의 대표 파견을 의결하고 러시아 임시정부 지지를 선언했다. 소수파는 대회장을 탈퇴함에 따라 양쪽 갈등은 오래 지속됐다. 뒷날 독립운동사를 얼룩지게 한 상하이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의 갈등, 상하이파 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의 분쟁이 이 대회장에 연원을 둔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 사회주의는 한인사회 계급투쟁의 소산

 

전로한족중앙총회 제1회 대회장을 탈퇴한 비귀화인 그룹은 독자 행동을 강화했다. 이동휘가 이끄는 한국 독립운동의 전투적 집단, 이동휘 석방 캠페인을 전개했던 동료들, 전로한족중앙총회 대회장에서 비귀화인을 대표한 사람들, 독일과의 전쟁 종결을 꾀하는 반전주의자들, 일본과의 동맹 파기를 희망하는 반일운동가들이 모였다. 이들의 공통된 사상적 기반은 마르크스주의였다. 활동 무대는 하바롭스크였다. 왜냐하면 그곳 지방정부를 볼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좌파 연립세력이 장악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두 갈래 사업을 준비했다. 하나는 독자적인 러시아 한인 최고기관을 설립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 정당을 결성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1917년 11월 두 개의 준비위원회가 조직됐다. 하나는 ‘극동조선인혁명단체통합대회 준비위원회’였다. 이 위원회는 사료에 따라서 ‘아령한인총회’ ‘한족중앙총회’ 등의 이름으로도 나온다. 박진순은 이 준비위원회의 부의장으로 선임됐다. 다른 하나는 ‘한인사회당 창립대회 준비위원회’였다. 박진순은 이 위원회에도 참여했다. 직위는 비서였다.

 

결국 한인사회당이 창립됐다. 1918년 4월 하바롭스크에서였다. 박진순은 제1회 대회에 출석한 창립당원일 뿐 아니라 강령작성위원으로서 당의 정강 정책을 수립하는 일에 참여했다. 이 정당은 볼셰비키 강령에 기반하여 성립한 한국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정당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한국 사회주의는 민족해방운동의 급진적 그룹 속에서 분화돼 나타났으며, 해외 한인사회의 계급투쟁 소산이었음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Пак Диншунь(박진순). Автобиографические сведения в Интернациональную Контрольную Комиссию(이력서, 국제통제위원회 앞). 1928년 12월22일, с.2,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81 л.76-82об

2. <독립신문> 1919년 10월16일, 3면

3. 김슬기, ‘제1차 세계대전 시기 러시아 한인사회의 정치적 동향’,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22쪽

4. Пак Диншунь(박진순), Автобиография(自傳), 1937년 10월10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81

5. 李智澤, ‘시베리아의 3·1운동’, <월간중앙> 1971년 3월, 194쪽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1987년 6월 10일. 6.10 항쟁은 대한민국의 방향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었다. 
마치 3.1항쟁이 수많은 사람들을 각성시키고 그 운명을 바꾸는 결단을 내리게 했듯이.  
숙명여대 약학대학 4학년 고미애도 그랬다. 
유복한 집안의 딸. 공부 열심히 하며 약사의 꿈을 실현해 가던 대학생은 
6월 항쟁을 맞아 그 인생을 바꾸게 된다. 

 

 

 


46년 만의 초혼, 여덟 송이 동백꽃 
인혁당 재건위 사건 희생자 여덟 분의 영혼에 바치는
이산하의 시와 글 
김정희의 곡
2021.10.6.(수) 오후 7:30 돈화문국악당

작사가의 말               --이산하(시인)

‘인혁당 사건’의 죽음 앞에서는
유가족만 상주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상주이다.
뒤늦게나마 여기 8개의 향불을 피운다.
꽃필수록 아프다.


작곡가의 말               --김정희   

말과 글로 차마 다 못하여
노래한다
목소리로, 악기로
 
말과 글로 차마 다 못한
아픔과 슬픔, 분노와 절망, 
그리움과 적막함을 

*여덟 송이 붉은 동백꽃의 영혼 앞에 
이제야 진혼곡을 바칩니다. 

(공연 후 유가족분들의 발언이 이어집니다.
끝까지 시청 바랍니다.)


임경석의 역사극장

‘동양의 레닌’이 재간을 키운 곳

식민지 시기 넘치는 재주로 주목받은 박진순을 통해 본 조선 사회주의의 기원

 

안경을 쓴 젊은 시절의 박진순. 20대 초반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박진순(朴鎭順)이라는 사람이 있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 살았던 이다. 1930년대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는 잡지 <삼천리>에 그 사람의 인물평이 실려 있다. 그는 러시아 거주 재외동포였다. 조선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단체 한인사회당 창립에 참여하고, 국제당 제2차 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했다. 유창한 러시아어로 열변을 토해 ‘각국 공산당 거두를 경탄’케 했다고 한다. 재주가 넘치는 사람이며, 조선어 저술도 가능했다. 춘우(春宇)라는 필명으로 경성에서 간행되는 신문과 잡지에 시사 문제에 관한 논설을 기고했다. 듣기로는 모스크바에 소재하는 대학과 고등교육기관에서 교수로 재임 중이며 변증법과 사회주의 철학에 조예가 깊다고 소개했다.1

 

시베리아 3대 재사의 한 명

 

또 다른 잡지 <동광>도 그 사람을 거론했다. 당시에 조선어 신문이 세 종류 간행됐는데, 이들을 통합해 하나의 거대 신문사를 설립한다면 그 간부에 적합한 사람들은 누구겠냐? 이런 질문을 내놓고 인물평을 했다. 편집자는 쓸데없는 공상이라는 비판에 신경이 쓰였나보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하지 말라. 오늘의 지상공론이 내일의 실제가 될는지 누가 아느냐”고 의미심장하게 되물었다.2 뒷날 독립된다면 정부를 구성할 인재들이 누구냐를 묻는다는 뜻이었다. 설문에 응한 사람들은 각 신문사에 근무하는 조선인 기자 44명이었다. 그 결과에 따르면 박진순은 ‘구미 특파원’으로 지목됐다. 뒷날 독립 정부의 외무부 장관감이라고 암시함을 알겠다.

 

일본 경찰도 주시하고 있었다. 고등경찰이 남긴 첩보 기록에 의하면, 박진순은 함경북도 경원 출신의 연해주 거주 조선인으로서 ‘매우 재간 있는 청년’이며 ‘동양의 레닌’이라고 일컫는다고 한다.3 레닌과 나란히 병칭된 점이 흥미롭다. 혁명운동에 헌신하고, 이론적 재능과 조직적 수완이 남달리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혁명운동의 동지들은 어떻게 보았는가? 사회주의운동사에 관한 폭넓은 회고담을 남긴 노년기 김철수의 증언에 따르면 “시베리아 3대 재사(才士)의 하나인데, 그 사람이 나보다 세 살 덜 먹었는데, 참 똑똑한 사람”이었다.4 재사란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3대 재사’라는 표현은 그 시절 유행이었던 것 같다. ‘동경 3대 재사’라는 표현은 1910년대 일본 도쿄 유학생 사회에서 걸출한 재능으로 인정받은 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홍명희, 최남선, 이광수가 그들이다.5 그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조선인 사회에서도 ‘3대 재사’가 있었던 것 같다. 다른 두 사람이 누군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박진순이 그에 포함되는 것은 틀림없다. 김철수는 그의 재능을 높이 샀다. 재사라는 말도 부족해서 “참 똑똑한” 사람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김철수가 태어난 해가 1893년이므로, 박진순은 1896년생으로 알려졌음을 짐작게 한다.

 

박진순에 대한 세평에 한결같은 점이 있다. 동료들은 물론이고 언론 지면이나 경찰의 비밀사찰 기록에서도 그를 초창기 사회주의운동의 걸출한 투사로 지목하고 있다. 이론 능력이 뛰어나고 국제 외교에 공로가 큰 인물이라고들 말한다.

 

박진순이 1928년 12월22일에 작성한 러시아어 이력서 첫 페이지.

 

이력서 말미에 쓴 박진순의 친필 서명.

 

이동휘와 2대에 걸친 유대

 

하지만 디테일에 문제가 있다. 전해 듣거나 기억에 의존한 정보인 까닭에 불분명하거나 잘못된 점이 뒤섞여 있다. 우선 출생 정보가 그렇다. 경찰이 언급한 ‘함경북도 경원군’은 박진순이 아니라 그 부모의 출신지였다. 아버지의 성관은 고성(固城) 박씨였다. 가문의 항렬표에 따르면 제26세손의 항렬자가 진(鎭)이다. 박진순의 이름도 그에 맞춰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집안은 16세기에 함경북도로 유배된 이래 300년간 뿌리내리고 살았다고 한다. 경원군 경원면 증산동은 고성 박씨의 집성촌 가운데 하나로 유명한데, 아마도 박진순 집안의 내력과 관련됐을 것이다.

 

박진순 부모가 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이주한 때는 1890년대였다. 두홉스코이 연흑룡주 총독의 우호적인 이주정책으로 러시아 극동의 조선인 수가 급격히 증가하던 시절이었다.6 정착한 곳은 수찬이었다. 조선인들이 수청(水淸)이라고 부르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북쪽으로 32㎞ 떨어진 농촌 지역이었다.

 

박진순은 바로 그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출생연도를 1898년이라고 적었다. 부모가 그곳에 정착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말하자면 박진순은 재러시아 동포 2세였다. 앞서 살펴본 김철수의 증언과 비교해보면 출생연도에 2년의 차이가 있음이 눈에 띈다. 어느 쪽이 사실일까? 박진순이 기록한 출생연도는 러시아 공문서에서 사용한 것이고, 김철수가 거론한 해는 가까운 동지들 간에 알려진 정보다. 당사자가 직접 거론한 것이니만큼 일단 1898년생 설을 신뢰하기로 한다. 하지만 공식 기록에 등재된 출생연도가 실제와 다른 경우가 종종 있음을 고려하면, 가까운 동지들의 기억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둘 중 어느 쪽이라고 단언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그는 1남 3녀 가운데 외아들이었다. 남아를 선호하는 당시 풍습을 고려하면 매우 귀하게 자랐을 것이다. 박진순은 그의 집안이 부농에 가까운 생활을 영위했다고 회상했다. 비교적 유족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반일의식이 강렬한 사람이었다. 을사늑약과 일본의 한국 강점에 맞서 의병운동이 고조됐을 때 연해주 조선인 사회에서도 투쟁 열기가 높았다. 박진순의 러시아어 기록에 의하면, 아버지는 그때 ‘조선의병지원단’ 수찬 지부장이었다. 조선의병지원단이란 무엇을 가리킬까? 1908년에 결성된 ‘동의회’(同義會)이거나, 수찬 등지에 조직됐던 ‘국민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혹은 단체명을 드러내지 않은 비밀결사일 수도 있겠다.

 

아들의 회고에 따르면, 아버지는 반일 의병운동의 중심인물인 이동휘의 가까운 친구였다.7 주목되는 정보다. 박진순의 아버지는 이동휘(1873년생)와 동년배로서, 애국계몽운동, 신민회, 의병운동, 권업회, 사회주의운동으로 이어지는 이동휘의 반일 혁명운동 족적과 궤를 같이했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뒷날 성년이 된 아들 박진순도 이동휘와 보조를 같이했음을 보면, 2대에 걸쳐서 형성된 동지적 유대감이 얼마나 강력했을지 짐작이 간다.

 

러시아의 조선인 학교들

 

성장기 박진순의 첫 교육은 조선인 학교에서 이뤄졌다. 러시아 영토 안인데도 그랬다. 1905년부터 1911년까지 6년 동안 그곳에서 공부했다. 8살부터 13살에 이르는 시기였다. 유교 고전과 한문 교육에 한정하는 구식 서당이 아니었다. 서구식 초등교육기관이었다. 그 시기 수찬 일대에 산재한 조선인 마을에는 조선어와 한문,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초등학교가 곳곳에 있었다. 보기를 들면 신영동의 신영학교와 합성학교, 사명동의 사명학교, 바들남재 청구학교, 금향동의 일신학교, 인수동 의성학교, 금점동 진명학교, 소성 큰령의 망남학교, 우지미 오봉동의 흥동학교, 청지거우 청지학교, 홍석동 홍석학교 등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박진순이 다녔다는 조선인 학교란 이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 학교들은 조선 본국에서 1905~1910년 시기에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방방곡곡에 설립됐던 신식 초등교육기관과 같은 유형의 것이었다. 이 학교들의 교육 이념은 저항적 민족주의에 가까웠다. 보기를 들면 블라디보스토크 한민학교의 교육 이념은 “자주독립을 창도하여 우리 인민의 지위를 존중케 하며, 우리나라의 국권을 회복게 하여 오늘 우리의 비참한 경계를 면하게 할”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었다.8 조선의 국권과 자주독립을 전면에 내세우는 조선 민족주의 교육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당국은 자국 영토에서 외국어로 이뤄지는 교육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인가 없이 설립된 학교는 모두 폐지한다는 방침을 견지했다. 당시 연해주에서 당국의 인허를 받아 합법적으로 설립된 조선인 학교는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의 한민학교 하나뿐이었다. 박진순의 회고에 의하면, 자신이 다니던 초등학교는 선생님이 없어서 종종 학업이 중단됐다고 한다. 농촌 지대의 비인가 조선인 학교를 단속하려 이따금 경찰이 출동했기 때문이다. 박진순은 조선인 사설 학교의 존재 방식이 반합법적이었다고 술회했다. 법외 학교이기 때문에 여러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존속할 수 있었던 상황을 그렇게 표현했다.

 

1912년 박진순은 러시아어로 교육하는 중등학교에 진학했다. 블라디미로·알렉산드롭스크 시에 있는 고등소학교였다. 15살 때였다. 그곳에서 1916년까지 4년 동안 수학했다. 이 학교는 중등 수준의 사범학교였던 것 같다. 졸업과 함께 초등학교 교사 자격을 얻은 것을 보면 말이다. 19살 되던 해에 박진순은 졸업과 동시에 블라디보스토크 근교 시디미 마을의 조선인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게 됐다.

 

박진순의 출생지 수찬(한국어 명칭 수청)은, 블라디보스토크 동북쪽 32㎞ 지점이다. 오늘날에는 파르티잔스크로 명칭이 바뀌었다.

 

신조선의 젊은 세대, 혁명적 민족주의자

 

러시아 사범학교 체험은 박진순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박진순은 이 학교 교육을 통해서 조선어와 러시아어 두 가지를 모국어처럼 구사할 수 있게 됐다. 그뿐 아니라 재학 중에 혁명사상을 접했다. 특히 교무주임 야료멘코 선생이 학생들에게 진보적인 영향력을 끼쳤다. 박진순은 그의 훈도 아래 제정 러시아의 저명한 혁명사상가 게르첸과 체르니솁스키의 저작을 탐독했다고 한다. 또 플레하노프 같은 마르크스주의자, 바쿠닌과 크로폿킨 같은 무정부주의자의 저술에도 큰 흥미를 느꼈다.

 

재학 중 특기할 만한 것은 처음으로 혁명단체에 가입했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18살 되던 1915년에 비밀결사 ‘대한독립단’에 가담했다. 이 단체는 조선인 혁명가 ‘Ким-Ин-Нер’(김인열로 읽히지만 실제 누구를 가리키는지 미상)이 조직했는데, 그는 조선의 유명한 의열투사 안중근의 동료였다. 대한독립단은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목표로 하는 민족주의 혁명단체였다. 박진순은 당시 혁명적인 민족주의자임을 자임했고, 미국식 민주공화국을 가장 이상적인 국가제도로 이해했다고 한다. 그 시기 ‘신조선의 젊은 세대’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고 자평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사회주의의 기원은 서유럽과 달리 노동운동 분화 속에서 형성된 게 아니라, 혁명적 민족주의운동의 가장 급진적인 경향에서 분화되어 나왔다는 사실을. 박진순이야말로 그 과정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글·사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金世鎔, ‘2백만 재외동포 안위 장래 - 西伯利亞의 조선인 활동’, <삼천리> 1930년 10월, 9쪽

2. ‘新聞戰線總動員, ‘大合同日報’의 幹部公選’, <동광> 제29호, 1931년 12월27일, 64쪽

3. ‘高警 제28235호, 上海在住 不逞鮮人의 近況’, 1921년 10월14일, 不逞團關係雜件-鮮人의 部-在上海地方(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DB

4. ‘遲耘 金錣洙’,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 1999년

5. 류시현, <동경삼재>, 산처럼, 2016년

6. 이항준, ‘제정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과 한인 이주’, <러시아·중앙아시아 한인의 역사(상)>, 국사편찬위원회, 2008년

7. Пак Диншунь(박진순). Автобиографические сведения в Интернациональную Контрольную Комиссию(이력서, 국제통제위원회 앞). 1928년 12월22일, 1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81 л.76-82об

8. <大東共報> 제69호, 1909년 9월9일

 



임경석의 역사극장

‘키맨’ 홍도, 베일 속 불꽃같은 삶

초기 사회주의 운동사 의문점 열쇠 쥔 홍진의,

1935년 러시아에서 반혁명 활동 체포 뒤 기록 찾을 수 없어…

해방 뒤 61년 만인 2006년 애국장 받아

 

홍도의 사진, 1921년(27살)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의 코민테른 파견 대표로 활동하던 시기.

 

노년기의 김철수는 국내 첫 사회주의 단체에 대해 구술 기록을 남겼다. 그에 따르면, 3·1운동 다음해인 1920년 가을에 사회혁명당이라는 단체가 만들어졌다. “우리 조선 안에 공산주의 비밀결사로는 처음” 조직된 것이었다. 절대 비밀이었다. 어지간한 동지는 다 떼어내버렸다. 3·1운동에 헌신한 이 중에서도 결심이나 각오가 평균보다 약간 더한 수준의 동지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직 ‘사생을 같이할 사람들’만 들였다. 죽음마저도 기꺼이 함께할 수 있는, 가장 신뢰하는 동지들만 규합했다.

 

김철수 회고담 “오직 사생을 같이할 사람들의 앞자리”

 

구성원은 열대여섯 명이었다. 김철수는 기억을 더듬어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밝혔다. 그중 앞자리에 호명한 한 사람에게 눈길이 간다. “저 홍진이라고, 시베리아에서 죽었어. 홍도라고 별명을” 불렀다고 한다.1

 

‘홍진이’라고 적은 것은 구술을 녹취한 사람의 착오였다. 김철수가 의도한 발음은 ‘홍진의’였다. 기록에 따라서는 더러 홍진의(洪鎭義)라고도 표기됐지만, 그의 본명은 ‘홍진의(洪震義)’이다. 동지들 사이에서는 홍도(洪濤)라는 가명으로 즐겨 불렀다. 본명은 아버지가 지었으므로 자식의 의중이 실리지 않는다. 하지만 가명은 자신이 직접 지으므로, 그의 내면 의식이 담기기 마련이다. ‘큰물 홍’ ‘큰 물결 도’라는 글자를 선택한 데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일제의 식민통치 체제를 쓸어버리는 대혁명의 큰 파도를 염두에 뒀던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 그 큰 물결이 되려 했다.

 

김철수의 회고담에 따르면, 홍도의 역할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국외 연락이었다. 비밀 사명을 띠고서 “홍도라고 하는 사람이 상해를 갔다 왔”다고 한다. 국외의 한인사회당과 연락해 전국 규모의 통일된 공산당을 조직한다는 사명을 띠고서 왕래했다는 말이다.

 

김철수의 회고담을 다른 관점의 자료로 검사할 가능성은 없는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홍도가 작성한 자필 이력서가 남아 있다. 그 속에 홍도 자신의 시선으로 본 전후 사정이 적혀 있다. 왜 중국 상하이에 왕래했는지, 그 의미를 뚜렷이 보여준다.

 

“1919년 2월에 다시 내지에 들어가서 내외지간의 연락 급 3·1운동에 직접 노력하다가, 체포를 피키 위하여 이해(그해) 5월에 다시 상해에 망명함. 1919년 9월에 해삼(블라디보스토크)에 갔다가 이곳에서 개최된 한인사회당 제2차 당대회에 참가하였으며, 또 입당하였음. 1920년 6월에 한인사회당의 사명을 가지고 비밀히 내지에 들어가서 한인사회당 내지부 조직에 대하여 일하다.”2

 

1919년 2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1년4개월 동안의 행적을 썼다. 인용문에서 말하는 ‘내지’란 바로 조선 국내를 가리킨다. 국경을 넘어다니면서 참으로 분주하게 투쟁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1930년 작성된 홍도의 이력서 러시아어 번역본 첫 페이지.

 

한자, 러시아어 등 3개 언어로 쓰인 홍도의 1930년 3월20일치 자필 서명.

 

한인사회당과 사회혁명당 연대의 매개 역할

 

이 기록에는 기왕에 어느 역사책이나 논문에서도 밝힌 적이 없는 미지의 중요 사실이 포함돼 있다. 홍도가 1919년 한인사회당 제2차 당대회에 참석했고, 또 한인사회당 내지부 조직을 위해서 국내로 다시 잠입했다는 진술에 유의하자. 초기 사회주의운동사의 한 비밀을 드러내는 정보이기 때문이다. 이 대회는 독립운동사상 전환점이 되는 결정을 여럿 채택했다. 박진순·박애·이한영 3인 대표단을 러시아 모스크바에 파견해 코민테른(국제공산당)에 가입하게 한 점, 책임비서 이동휘 등을 중국 상하이로 파견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게 한 점, 활동의 중점을 조선 내지에 두려고 노력한 점 등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주의할 점은 세 번째 사안이다. 종래에는 이 결정 사항이 어떻게 실행에 옮겨졌는지 알지 못했으나, 이제 홍도의 기록을 통해 실마리를 얻게 됐다. 서울 복판에 한인사회당의 내지부를 조직하기 위해 홍도가 직접 파견됐다고 한다. 김철수가 회고한 국내 최초의 사회주의 비밀결사 사회혁명당이 곧 한인사회당 내지부의 위상을 가짐을 시사한다.

 

이로 인해 초창기 사회주의운동사의 큰 의문점이 해소됐다. 1921년 5월 상하이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 대의원을 파견한 두 개의 단체, 한인사회당과 사회혁명당이 어떻게 연대했는가 하는 의문이다. 사회혁명당은 성립 당초부터 한인사회당과 연계했을 뿐 아니라 그 내지부라는 조직 위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관계를 매개하고 실행에 옮긴 이가 바로 홍도였다.

 

홍도의 자필 이력서는 역사학자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그런 점에서 흥미롭기 짝이 없다.

 

그는 20살 되던 1914년 서울에서 보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에 비밀결사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1928년 러시아로 망명할 때까지 쉼 없이 혁명운동에 참여했다. 배달모듬, 신아동맹단, 신한청년당, 한인사회당, 사회혁명당, 고려공산당, 적기단, 조선공산당. 이것이 그가 가담했던 비밀결사 목록이다.

 

이 단체들의 근거지는 러시아를 포함해 동아시아 4개국에 널리 분포했다. 홍도의 동선을 뒤따라가보자. 함경남도 함흥(보통학교), 서울(보성고등보통학교, 배달모듬), 도쿄(메이지대학, 신아동맹단), 상하이(신한청년당), 서울(3·1운동), 상하이(임시의정원), 블라디보스토크(한인사회당), 서울(사회혁명당), 상하이(고려공산당), 모스크바(국제당 파견 대표), 베르흐네우딘스크(고려공산당 연합 당대회), 상하이(국민대표회), 함흥(노동동무회), 서울(적기단 사건, 서대문형무소), 함흥(조선공산당, 함흥농민조합), 블라디보스토크(망명) 등의 도시가 줄을 잇는다. 어지러울 정도다. 그가 불꽃같은 삶을 영위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출옥 후 조선공산당 최고위 간부 대열에

 

30살 되던 해에 홍도는 시련을 겪었다. 1924년 8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북간도에 본부를 둔 비밀단체 적기단에 연루된 혐의였다. 함흥의 부호 고형선에게서 거액의 군자금을 받아낸 적기단원 이정호를 후원했다는 죄목이었다. 불행한 일이었지만, 다행스러운 점도 있었다. 상하이파 공산당의 비밀 당원이던 홍도는 일본 경찰의 가혹한 취조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당 조직의 노출을 막는 데 성공했다. 이 사건으로 홍도는 감옥살이를 겪었다.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서 1927년 8월까지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출옥 뒤 얼마 안 돼 홍도는 운동 일선에 복귀했다. 1927년 12월 비밀리에 열린 조선공산당 제3차 당대회에서 중앙간부 9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3 당의 최고위 간부 대열에 올랐다. 그는 합법 운동 내에도 거점을 구축했다. 고향인 함흥으로 되돌아가 현지 사회운동에도 참여했다. 함흥농민조합 위원장에 취임했고, 신간회 함흥지회에서도 위원으로 선출됐다. 합법·비합법 양 방면으로 국내 사회운동에 뿌리를 내리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출옥 1년 만에 홍도는 다시 체포될 위험에 처했다. 이번에는 공산당 조직 자체가 노출됐다. 1928년 4월부터 몇몇 당 간부가 체포된 것을 시작으로 수사망이 조여들었다. 수사망을 피해가며 비밀조직을 지휘하던 홍도는 부득이 그해 7월에 국외 망명길에 올랐다. 목적지는 소비에트러시아였다. 8월1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는 환대받았다. 한글신문 <선봉>의 기자로 일한 데 뒤이어,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해 혁명 이론과 전술을 본격적으로 연수할 기회를 가졌다.

 

다시 김철수 노인의 회고담에 주목해보자. 그는 홍도가 시베리아에서 사망했노라 말했다. 도대체 소비에트러시아로 망명한 홍도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홍도의 러시아 망명 사실은 조선 국내의 지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1932년 3월 서울에서 간행된 월간지 <동광>에는 망명자 홍도의 안부를 묻는 기사가 실렸다.

 

“러시아에는 조선의 선배인 이동휘씨도 있거니와, 청년 활동가로서도 상당한 인재가 집중되어 있으니, 필자가 아는 이름만 얼른 열거하여 보면 윤해, 박진순, 주종건, 홍진의(홍도) 등 제씨가 그것이다. …앞으로 세계전쟁이 인다면 그것은 소비에트러시아의 소위 세계혁명에 대하여는 일대 호기회일 것이므로, 동양 방면에 대한 재러시아 동포의 활동이 상당히 유력시될 것을 넉넉히 추측할 수 있다.”4

 

적기단 사건으로 3년 복역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한 홍도. 1927년 8월.

 

기대 속에 러시아 망명, 반혁명 활동 혐의로 체포

 

러시아에 망명한 사회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홍진의(홍도)의 이름이 거론됐다. 이들 망명자에게 거는 국내 지인들의 기대는 컸다. 앞으로 자본주의 열강의 모순이 격화돼 세계대전이 도래한다면, 세계적 범위의 혁명적 위기가 고조될 것이다. 러시아는 세계혁명의 참모부를 자임했으므로, 그때는 소비에트러시아에 망명한 조선인 혁명가들의 역할이 강력하게 작용할 것이다. 이렇게 기대하고 있음을 본다. 낙관적인 전망이었다.

 

그러나 실제는 달랐다. 1935년 12월 홍도가 연해주 포시에트 지구 우스치시디미 마을에 거주할 때였다. 두만강 건너 조선~러시아 국경선에 가까운 곳이었다. 이웃 마을 베르흐네시디미에 있는 트랙터정비소 정치부 보조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달 19일 홍도는 비밀경찰 기구인 내무인민위원부 요원들에게 체포됐다. 반혁명 활동 혐의였다. 스탈린 시기 소비에트 국가폭력이 맹렬하던 때였다. 홍도는 항변이나 해명도 변변히 하지 못한 채 취조를 받았다. 그리하여 체포된 지 11개월 만에 내무인민위원부 처분으로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5

 

그 뒤 홍도의 삶에 관한 정보는 발견되지 않았다. 시베리아 깊은 곳 케메로보 수용소에서 복역했다는 기록 외에 알려진 것이 없다. 형기를 무사히 마쳤다면 아마 1940년 12월에는 출옥했을 텐데, 과연 그러했는지를 알지 못한다. 홍도가 시베리아에서 사망했다는 김철수의 증언은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아마 사실일 것만 같다.

 

그에게 들씌워진 반혁명 혐의는 근거 없는 것이었다. 홍도는 스탈린 사후 소련 정부에 의해 무혐의로 인정받았다. 1955년 10월 범죄구성요건 부재로 판정받아 복권됐다. 그의 조국에서는 훨씬 더 늦게야 명예가 회복됐다.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던 한국 정부는 마침내 해방된 지 61년이 지나서야 태도를 바꿨다. 한국 정부는 2006년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애국장을 수여했다.

 

글·사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지운 김철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 1999년

2. 洪濤(Мальцев), ‘리력서’, 1930년 3월20일, 1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384 л.25-26

3. 김영만·김철수, ‘중앙집행위원 명부’ 1928년 2월24일, с.1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55 л.9

4. ‘國際波瀾에 부대끼는 海外同胞의 安否’, <동광> 제31호, 1932년 3월

5. ‘홍도 Хон До, 말리체프 Мальцев’, <스탈린시대 정치탄압 고려인 희생자들 (인명편2)>, 한국독립운동사자료총서 제47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601쪽, 2019년

 

 


임경석의 역사극장

우물 속 주검을 둘러싼 교활한 각본

‘살모사건’으로 불렸던 송하살인사건, 농민조합을 집단범죄자로 만들기 위한 일제의 계략

1931년 성진농민조합의 메이데이 기념사진. 구성원 가운데 여성이 다수를 차지한 점이 이채롭다. 임경석 제공

 

이른 아침 동네 우물에서 주검이 발견됐다. 1932년 5월23일 함경북도 성진군 학중면 송하마을에서였다. 170가구쯤 있는 큰 동네였다. 철길 건너 송상마을까지 합하면 300가구가 넘는 번성한 농촌 마을이었다. “성진농민조합운동의 가장 강력한 근거지요, 검거 바람이 그칠 줄 모르는” 동네로 이름난 곳이었다.

 

주검을 발견한 사람은 이웃집 아낙이다. 평소와 다름없이 무심코 우물에 두레박을 내려뜨린 여성은 으레 듣던 출렁하는 물소리가 아니라 둔탁한 충돌음을 들었다.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조심스레 우물 속을 내려다봤으나, 아직 날이 채 밝지 않아서 잘 보이지 않았다. 우물 귀틀 안에 얼굴을 박은 채 한참 동안 내려다보려니까, 그제야 희멀끔한 것이 시선에 들어왔다. 머리칼이 쭈뼛이 일어서는 것을 느꼈다.1

 

성진농민조합 검거에서 아들 구하려

 

주검의 주인공은 동네 주민인 농부 허간씨의 아내 김씨였다. 54살의 초로에 접어든, 평범한 농촌 여성이었다. 남편도 있고 다 자란 아들딸을 거느린 유복한 가정의 안주인이었다. 집에는 28살 아들 허철봉을 비롯해서 큰딸 허어금(19)과 작은딸 허주화(17)가 함께 거주했다. 김씨 부인은 조선 여느 집안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특히 아들 사랑이 지극했다.

 

아들 허철봉은 열성적인 운동권이었다. 20살이 되자 청년운동에 참여했고, 민족통일전선 단체인 신간회 운동에도 뛰어들었다. 머지않아 면 단위 조직의 간부로 성장했다. 1928년 3월11일 열린 성진청년동맹 학중면 지부 설립대회에 참석해 집행위원 24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됐다. 이듬해 12월24~25일 신간회 성진지회 제4회 대회에서 집행위원 후보로 선출될 만큼 비중이 커졌다. 군 단위 운동단체의 간부 반열에 이름이 오른 것이다. 1931년 사회운동이 농민조합 중심으로 개편될 때도 허철봉은 그 흐름의 한가운데 있었다. 5월30일 성진농민조합 창립대회에서 집행위원 2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성진농민조합은 조합원 수만도 2천 명에 이르는 큰 단체였다. 지부 조직이 14개고, 기층 세포단체인 반의 수가 45개였다.2 1930년대 격렬한 함경도 농민운동을 대표하는 유명한 농민조합들 가운데 하나였다.

 

김씨 부인에게 불행이 닥친 것은 그해 12월 말 어느 새벽이다. 아들 허철봉이 성진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덜컥 체포되고 말았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눈이 펑펑 퍼붓는 날 해가 뜨기도 전인 새벽 5시께 패검(차는 칼) 소리를 요란스레 쩔렁거리며 정복 경찰대 30명이 송하마을을 습격했다.3 이날 청년 30여 명이 체포됐고 그 속에 허철봉이 포함됐다. 검거는 계속됐다. 이른바 ‘성진농민조합 제1차 사건’이다. 1931년 9월에 개시된 검거가 해가 바뀐 뒤에도 계속됐다. 성진군 전역에서 젊은이 700여 명이 체포됐다.

 

김씨 부인은 노심초사했다. 아들의 석방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면 주재소와 읍내 경찰서를 연거푸 찾아다녔고, 경찰에 선이 닿는 사람을 만나려고 노력했다. 어머니의 노력 덕분일까? 허철봉은 성진경찰서 유치장에서 석방됐다. 여전히 갇혀 있는 다른 수감자의 처지에 비하면 이례적인 조치다. 1932년 5월 초순의 일이다.

 

소설 <설봉산>(1958년 재판)의 마지막 페이지, 탈고 날짜 ‘1955.11.5.’가 기재돼 있다. 임경석 제공

 

일제 경찰은 “딸들이 살해했다”

 

경찰은 김씨 부인 죽음을 살인으로 간주했다. 경찰이 타살로 보는 관점은 사건 당일이 아니라 그 이튿날에야 수립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일 오전 현장에 나타난 주재소 순사는 이 사건을 심드렁하게 대했다. 그런데 하루 만에 태도가 바뀌었다. 이튿날 경찰은 주검 확보에 관심을 기울였다. 주검은 면 주재소를 거쳐 읍내에 있는 성진도립병원으로 옮겨졌다. 의사의 검시 소견을 얻으려는 목적이다. 시신 이송 과정에 성진경찰서 고등계가 개입했음을 시사한다. 의사는 경찰의 요구에 호응했다. 육안 검시에 더해 해부까지 했다. 그 결과 주검의 옆구리와 후두부에 타박상이 있고 그것이 치명상이라는 검시 소견을 냈다.

 

경찰은 이 소견을 근거로 주검이 타살의 결과라고 못박았다. 남은 문제는, 누가 왜 죽였느냐를 밝히는 것이었다. 경찰은 가족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허어금, 허주화 두 딸이 혐의를 받았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두 자매가 힘을 합해서 곤봉과 기타 흉기로 어머니 김씨를 난타해 기절시킨 뒤, 부엌에 들여다 눕혔다. 그곳에서도 난타를 그치지 않아 결국 22일 밤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그 뒤 범죄 사실을 감추기 위해 주검을 동네 우물 속에 버렸다고 했다.4

 

왜 죽였는가. 경찰 조사에 따르면 김씨 부인이 아들의 석방을 위해 농민조합의 비밀을 경찰에게 누설했음이 알려졌기 때문이란다. 피신 중이던 다른 농민조합 간부의 체포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허철봉은 어머니의 행위를 비난했고, 동지들에게 차마 얼굴을 들고 대할 수 없다며 집을 떠나버렸다. 5월17일 일이다. 그 뒤 어머니와 두 딸의 갈등이 깊어졌다. 딸들은 오빠를 동정하고, 어머니를 비난했다. 경찰 취조에 따르면, 갈등은 언쟁에 머물지 않고 폭행 양상으로 번졌으며 급기야 살인사건으로 나아갔다.

 

자매는 살해 혐의를 부인했다. 어머니와 갈등을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폭행을 가해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아니라고 항변했다. 어머니는 스스로 우물에 몸을 던져 자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처가 왜 났는지는 자신들도 모르고, 아마 투신 중에 부딪쳐서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두 자매는 법정 심문에서도 일관되게 그와 같이 진술했다.

 

그러나 총독부 판사는 자매의 주장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피고인들의 유죄를 인정했다. 그리하여 두 자매는 청진지방법원 공판에서 각각 징역 10년형과 7년형을 선고받았다. 살인사건치고 형량이 매우 낮다는 여론 때문이었을까. 경성복심법원에서 행한 공소(항소) 재판에서는 자매의 형량이 더 늘었다. 큰딸에게는 징역 15년형, 작은딸에게는 징역 10년형이 선고됐다.

 

해방 전 함경북도 성진군 지도. 붉은 점 찍은 곳이 성진군 학중면 송하마을이다. 임경석 제공

 

농민운동 추락시킬 호재

 

송하살인사건은 농민운동의 위신을 추락시킬 수 있는 호재였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밀정이라고 어머니를 때려죽이는 것이 주의상으로 보아 옳은 일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저주받을 죄’ ‘뱀같이 쌀쌀한 태도’ ‘동정할 길이 없는 대죄악’ ‘저주하는 분노성’ ‘말세가 된 세상’ 등의 수사로 농민운동과 사회주의에 대한 혐오를 부추겼다.5

 

사건 자체가 갖는 센세이션 때문일까. 다른 신문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논조를 보였다. 언론 보도는 이 사건을 ‘살모사건’이라고 불렀다. 두 자매는 어머니를 살해한 악녀로 지목받았다. 손가락질의 대상이 됐고 사회적으로 고립됐다. 형기를 다 마치고 출소했다면 큰딸 허어금은 34살에, 작은딸 허주화는 27살에 세상에 다시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이후 삶이 어떠했는지 알려주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일본 경찰과 재판부의 시선이 아닌, 농민운동 쪽 기록은 없을까? 송하살인사건의 진실을 보여주는 자료 말이다. 다행히 있다. 허성택이 1936년에 작성한 성진농민조합 활동에 관한 자전적 기록이다. 허성택은 성진에서 나고 자랐으며, 1931~1933년 성진농민조합에 주도적으로 참가했고, 뒷날 소련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유학했다. 그에 따르면 “송하스파이사건 검속자 구원으로 각 동에서 구조사업”을 행했다.6 ‘송하스파이사건’이란 곧 송하살인사건을, ‘검속자’란 허어금과 허주화 자매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성진군의 여러 마을에서 그들을 돕기 위해 구조사업을 수행했다고 한다. 이 기록 안에 두 자매에 대한 비난의 함의는 없었다. 오히려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도와줘야 할 대상으로 보는 시선이 담겨 있다.

 

또 있다. 작가 한설야가 집필한 <설봉산>이라는 장편소설을 주목할 만하다. 1956년 북한에서 간행된 이 작품은 일제하 성진농민조합운동을 소재로 다뤘다. 특히 송하살인사건 관련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소설 형식을 띠고 사건이 일어난 지 20여 년이 지난 뒤에야 나왔음에 유의해야 한다. 다만 일정한 조건하에선 사실을 반영한다고 봐도 좋으리라. 왜냐하면 작가가 집필에 앞서 성진농민조합운동 자료를 조사하고 참가자들의 증언을 널리 청취했기 때문이다. <설봉산> 내용에서 경찰 자료와 신문 보도 등으로 교차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실로 간주해도 좋다고 본다.

 

예를 들면 이런 정보다. 김씨 부인은 자살하기 며칠 전 농민조합 사문위원회에 출석했다. 마을 뒤 산중에 구축한 대형 토굴에서였다. 50~60명이 함께 들어갈 수 있는 넓은 공간이었다. 그 자리에 여러 마을의 농민조합 간부와 열성자들이 모였다. 불을 켜지 않아서 서로 얼굴도 볼 수 없고, 어디에 누가 앉아 있는지도 알기 어렵게 만든 조건에서 문답이 이뤄졌다. 농민조합 간부를 하나 잡아주면 아들을 석방해준다는 약속을 받은 일이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김씨 부인은 그 사실을 끝내 부인했다.

 

오욕을 짊어질지언정

 

성진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은 교활한 취조 전략을 구사했음이 드러났다. 그들의 첫 노림수는 농민조합을 집단범죄자로 낙인찍는 것이었다. 김씨 부인의 밀정 행위를 알아챈 조합원들이 작당해 그를 타살했다는 각본을 짰다는 것이다. 그러나 딸들은 끝내 이 각본에 응하지 않았다. 아무리 고문해도 바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경찰은 부득이 차선의 계책을 택했다. 딸들을 살해범으로 만드는 길이었다. 요컨대 허씨 자매는 스스로 오욕을 짊어질지언정 무고한 농민조합에 죄를 뒤집어씌우는 일은 결단코 거절했던 것이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한설야, <설봉산>, 조선작가동맹출판사, 355쪽, 1958년(재판). 이 자료를 성균관대 김성수 교수에게서 받았다. 감사드린다.

2. ‘성진농민조합 사건 81명, 10일 송국’, <동아일보> 1932년 9월14일

3. ‘경관과 지주협력 50여 촌민 검거’, <조선일보> 1932년 1월3일

4. ‘친모 살해한 양 자매, 控訴公判 금일 개정’, <동아일보> 1932년 11월15일

5. <매일신보> 1932년 11월19일

6. 김일수, <연역(이력서)>, 6쪽, 1936년 4월3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40 л.12-20об

 

 


임경석의 역사극장

형무소에서도 세 개의 이름을 가졌던 농민운동가

농민운동 지원 덕에 모스크바 유학 갔다 온 허성택, 러시아에서는 김일수로 학업 뒤

감옥에선 허성택·허국택·허영식으로 기록, 해방 후 21만 조합원 ‘전평’ 위원장

 

1934~1937년 러시아 모스크바에 체류하던 시기의 허성택. 사진 뒷면에

러시아어 필기체로 ‘김일수’라는, 모스크바에서 사용하던 이름이 적혀 있다. 임경석 제공

 

허성택은 해방 후에 전평 위원장을 지낸 사람으로 유명하다. 전평이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준말로서 해방되던 그해 11월에 설립된 전국적 노동자단체였다. 16개의 산업별 단일노동조합과 1개의 합동노동조합을 아울렀고, 그 내부에 194개의 분회 조직과 21만 명의 조합원을 지닌 힘있는 단체였다. 전체 노동자 수 추정치가 212만 명이던 때였다.1 10%의 조직률을 자랑하고 있다. 허성택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해방 전에 무슨 일을 했기에, 해방공간에서 그와 같이 영향력 있는 단체의 지도자로 나설 수 있었을까?

 

‘언변 좋아 선동 분야 사업 종사 적합’ 평가

 

양복을 갖춰 입은 젊은 남성의 사진이 있다. 이제 막 이발소를 다녀온 듯, 잘 다듬은 하이칼라 머리가 눈에 띈다. 양복 깃이 넓고, 십자 무늬로 멋을 낸 넥타이도 두껍다. 1930년대 중엽 그 당시 유행하는 패션인 것 같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갸름하게 잘생긴 얼굴이다. 하지만 왠지 부자연스럽다. 흑백사진이라 불분명하지만 얼굴색이 검은 편이라서 그런 것 같다. 늘 양복을 입는 사람이라면 느껴질 자연스러움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증명사진을 찍기 위해서 평소에는 잘 입지 않는 복장을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사진 뒷면을 뒤집어 보았다. 이름이 적혀 있다. 러시아어 필기체로 ‘김일수’(Ким-Ир-Су)라고 쓰여 있다.

 

‘김일수’는 허성택이 러시아 모스크바에 체류하던 시기에 사용한 이름이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재학할 당시 작성한 자필 이력서가 그를 증명해준다. 거기에는 자신의 본명이 허성택이고 그 외 허국봉, 허성봉이라는 이름도 썼으며, 지금은 김일수라는 이름을 사용한다고 쓰여 있다.2

 

실제로 공산대학의 각종 기록에서는 일관되게 김일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입학 첫해 겨울에 작성된 학적부 기록을 보면, 김일수의 학업 성적은 ‘정치 상식’에서는 최우수, ‘모국 문제’에서는 우수 평점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35년 6월7일자 평정서에도 그의 이름은 김일수로 표기돼 있다. 학과장 김단야가 작성한 평정서에 따르면, 김일수는 입학 때부터 그때까지 학업에서나 학과 내 정치·사회 생활 분야에서 가장 열성적인 학생 집단의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학업 성취가 빨랐다. 신입생 때에는 지식이 부족했으나, 그사이 큰 진전을 봐서 독립적으로 소논문을 쓸 수 있을 정도가 됐다고 한다. 다만 문장력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문필력은 그저 그렇습니다만 언변은 좋습니다”라고 기재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래서 졸업 이후에는 다른 어떤 업무보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선동 분야 사업에 종사하는 것이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았다.3

 

공산대학 내에서만이 아니었다. 모스크바에 체류하는 동안 줄곧 그 이름을 사용했던 것 같다. 보기를 들면 국제당 제7차 대회에서도 그랬다. 허성택은 1935년 7월25일부터 8월21일까지 개최된 그 국제대회에 조선을 대표하는 대의원 자격으로 참석했다. 그는 대의원 신상 조사서를 작성하도록 요구받았다. 18개 항목에 걸쳐서 여러 가지 신상 정보를 기재하도록 인쇄된 서식이었다. 그는 각 항목에 응답한 뒤 이 문서의 마지막 페이지 날짜 및 서명란에 ‘1935년 7월17일, 김일수’라고 적었다.4

 

국제당 제7차 대회는 파시즘의 위협적인 대두에 맞서서 ‘인민전선 정책’을 도입한 것으로 유명한 국제대회였다. 그 정책은 조선 같은 식민지 처지에 있는 나라에서는 제국주의에 맞서는 ‘민족통일전선 정책’의 부활을 뜻하는 것으로 간주됐다. 그래서 허성택의 출석은 눈길을 끈다. 그가 앞으로 민족통일전선 정책의 부활을 선도하는 역할을 맡게 되리라고 예측되기 때문이다.

 

허성택이 1936년 4월3일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재학 중에 작성한 자필 이력서. 임경석 제공

 

농민운동을 주도한 사회주의 비밀결사

 

허성택이 모스크바에 유학할 수 있었던 동인은 무엇일까. 돈이 많거나 우수한 시험 성적을 올렸다고 해서 모스크바 유학생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혁명운동에 대한 헌신성과 투쟁 경력이었다. 허성택이 선발될 수 있었던 것은 함경북도 성진군의 농민조합운동에 헌신한 덕분이었다.

 

성진 농민조합운동은 1931~1932년 두 해 동안 절정에 달했던 대중적인 농민운동이었다. 그것은 1930년대 함경남북도를 휩쓴 혁명적 농민운동의 한 고리였다. 그중에서도 함경남도의 단천, 영흥, 정평, 홍원군과 함경북도의 성진, 길주, 명천군의 농민운동이 특히 거셌다. 이 운동들은 예외 없이 사회주의 비밀결사가 주도했다는 특징이 있다. 함경도 해안의 농업지대가 광범하게 혁명화했던 것이다.

 

허성택은 성진군 토박이였다. 아버지는 1.3정보(4천 평) 규모의 농지를 가진 소농이었다. 여러 자식 가운데 맏아들만 중등교육까지 뒷바라지했다. 보통학교를 거쳐 길주농업학교를 졸업하게 했으나, 둘째 아들인 허성택부터는 교육시키지 않았다. 아니, 돈이 없어서 시킬 수 없었다고 한다. 허성택은 어릴 때는 소를 먹이러 다녔고, 봄가을에는 나무하러 다녔으며, 10살 때부터 농업 노동에 참가했다.

 

그는 교육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부모는 돈이 없다고 다니지 말라고 하는데도 고집부려서 겨울철을 이용해 한문 서당을 다녔다고 한다. 3개월 통학하는 데 4원의 학비가 들었다. 12살 때부터 6년간 그렇게 했다. 그래서 성인이 됐을 때 국한문 혼용으로 쓰인 일간 신문 지면을 읽을 수 있었다. 일본어는 읽지 못하지만, 한자가 많이 섞인 책은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정도였다.

 

허성택이 학식이 있어서 농민운동에 두각을 나타냈던 것은 아니다. 소년기 이래 농민 사회의 네트워크에 익숙해 있었고, 헌신적으로 농민조합에 참여한 덕분이었다. 그는 10대 중반부터 신양소년단에 참가했고, 20살에는 성진청년동맹 학상면지부에 가담했다. 농민조합에 가입한 것은 23살부터였다. 한번 발을 내디딘 이후에는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각종 농민운동에 참여하다 감옥으로

 

보기를 들어보자. 1930년 1월, 출옥동지 환영회를 대대적으로 거행했다. 서대문형무소 복역을 마치고 귀환한 3인의 출옥자가 성진역에 도착하자 2천 명 군중을 이끌고 붉은기를 휘날리며 굉장한 시위행진을 벌였다. 허성택은 그 행진의 지도자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 행진은 대대적인 검거 사건의 단서가 됐다. 이른바 제1차 성진농조 검거 사건을 초래했다.

 

그해 5월에는 메이데이 기념식을 조합원끼리만 산속에 들어가서 비밀리에 거행했는데, 어떤 경로인지 경찰에 발각돼 쫓기게 됐다. 허성택은 이때부터 ‘망명’하게 됐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망명이란 국외로 피신하는 것이 아니라 산속에 토굴을 파는 등으로 거처를 마련하여 산중 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했다.

 

1931년 9월에는 학중면 농성동의 지주 김상초 일족 반대운동에 가담했다. 이른바 ‘농성시위사건’은 농민 수백 명이 몽둥이를 들고 지주 쪽 아성인 농성동을 습격한 사건이다. 양쪽에 충돌이 일어나 다수의 부상자가 나왔다고 한다. 지주 김상초는 기독교회 장로인데, 교회와 교인들을 이용해 재산을 증식하고,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농민조합의 비밀을 누설하는 등 관청과 유착한 인물이었다.

 

1932년 6월에는 성진군 농민조합 중앙부의 임원으로 선임됐다. 제1차 성진농조 사건으로 타격을 받은 집행부 조직의 재건에 참가한 것이다. 그는 아지프로(선전선동) 부장을 맡았다. 그뿐 아니라 사회주의 비밀결사에도 가입했다. 성진군의 공산당 준비기관 설립에 참여해 자위부와 농민부 책임을 맡은 것도 그즈음이었다. 이외에도 허성택이 참여하거나 지도한 투쟁 사례는 더 많았다. 차용증서 36종, 액면가 6천여원의 빚문서 소각 투쟁, 학동면 수립조합 반대투쟁, 신작로 개설 반대운동, 수동마을 소작쟁의 등이 있었다.

 

옥중에서 촬영한 한 남성의 사진이 있다. 머리카락을 박박 밀었고 죄수가 입는 수인복 차림이다. 가슴에 성명과 수인번호를 기재한 표시판을 달았다. ‘허국택(許國澤) 729’라고 적혀 있다. 머리 모양은 길쭉한 말머리형이다. 코가 쭉 내리뻗고 좀 두꺼운 듯한 입술을 앙다물고 있는, 건강해 보이는 30살 청년이다. 눈동자가 카메라 아래쪽을 응시해 표정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간수의 지시에 순응하는 듯하지만 내면의 자아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고투하는 표정으로 읽힌다.

 

허국택이란 이름은 허성택이 모스크바에서 되돌아온 이후 국내에서 사용하던 가명 가운데 하나였다. 허영식이라는 이름도 썼다. 그래서일까. 형무소 당국이 작성한 허성택의 수감자 카드는 세 종류가 남아 있다. 각각 허성택, 허국택, 허영식이라는 서로 다른 표제 이름을 달고 있지만 내용은 사실상 동일하다. 옮겨적는 과정에 생긴 것으로 보이는 미세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1938년 6월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한 허성택의 사진. 치안유지법,

폭력행위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징역 4년형을 언도받았다. 임경석 제공

 

출감하자마자 예방 구금

 

허성택이 모스크바에서 귀환한 때는 1937년 3월께다. “김일수 동무의 출발 및 파견시 행동 지침에 관한 요청을 허락한다”는 공문서가 발급된 시점이 그해 3월8일이다.5 그로부터 얼마 안 된 시점에 국경을 넘어서 조선으로 되돌아왔을 것이다. 그는 지체 없이 함경도 일원에서 사회주의 비밀결사 운동에 복귀했다. 각 군에 비밀리에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을 복원하는 사업이 그 핵심이었다. 그러나 활동 기간이 길지 못했다. 얼마 안 돼 성진경찰서에 검거되고 말았다.

 

그의 혐의가 형무소 수감자 카드에 적혀 있다. “공산주의에 공명하고 조선독립을 열망하는 자이고, 성진 농민조합원으로서 학교급 문중의 채권 장부를 소각·폐기하고 자기 행위에 방해되는 자를 구타하여 상해를 입혔다”는 내용이다.6 구체적인 혐의 사항이 모두 1931~1932년의 농민조합 활동에 관련돼 있다. 다시 말해서 일본 경찰은 모스크바 유학과 국제당 제7차 대회 사안은 전혀 탐지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허성택의 출소 예정일은 1942년 6월6일이었다. 그러나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941년 3월부터 시행된 이 법령은 ‘재범의 우려가 현저하다’는 검사의 판단만으로 인신을 구속하는 악법이었다. 허성택도 그에 해당했다. 일본 관헌 쪽의 치열한 전향 공작을 뚫고 끝까지 비전향을 고집했던 것 같다. 그는 출감하자마자 예방 구금됐다. 다시 감옥에 갇혔다. 기약 없는 수감생활이 계속됐다. 그는 해방돼서야 비로소 감옥 문을 나설 수 있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안태정,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현장에서미래를, 2005(제2판), 100쪽

2. 김일수, ‘연혁’, 1936년 4월3일, 1-15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40 л.12-20об

3. Зав.секцией Ким-Даня(학과장 김단야), Харатеристика Ким-Ир-Су(김일수 평정서), 1935.6.7.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134 л.10

4. Анкета Ким-Ир-Су(김일수 신상조사서), 1935.7.17, РГАСПИ ф.494 оп.1 д.480 л.72-73об

5. Отношение от 8/Ⅲ-37 г. за N4/585 (1937년 3월8일부 공문서, 번호 4/585),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134 л.2

6. ‘許國澤’(隆熙 2년 5월16일생),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임경석의 역사극장

암살용 사제폭탄과 함께 등장한 이름 ‘의열단’

일본 경찰이 대경실색한 대규모 폭발물, 김원봉이 밝힌 사건의 진상

 

갸름한 술병 모양의 암살용 폭탄(위)과 대형 통조림 모양의 파괴용 폭탄(아래). 임경석 제공

 

의열단 사건이란 1923년 3월에 발각된 폭발물 비밀 반입 사건을 가리킨다. 언론매체에서는 으레 의열단 사건이라고 불렀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제2차 대암살·파괴 계획’이라고 지칭했다. 그것은 1920년 6월 ‘제1차 암살·파괴 계획’(일명 밀양 폭탄 사건)에 뒤이어, 의열단이 두 번째로 주도한 더욱 큰 규모의 의열투쟁 계획이었다.

 

김상옥 이어 또 폭파 계획 “끈기도 무섭다”

 

계획이 발각된 때는 1923년 3월15일이다. 김상옥 사건에 대한 총독부의 보도 금지가 해제된 날이기도 했다. 김상옥 사건이란 1월17일 삼판통(현재 서울 용산구 후암동)과 1월22일 효제동에서 벌어진 총격전을 아울러서 부르는 명칭인데, 두 달간 줄곧 보도가 금지됐다. 일본 경찰 간부 4명이 숨지거나 중상을 입은데다, 일본 경찰 수천 명이 동원돼 관련자 체포에 혈안이 됐던 사건이다. 그 보도 금지 조처가 이날 풀렸다. 일간신문들은 앞다퉈 호외를 발간했다. 대문짝만한 굵은 글자로 김상옥 사건의 전말을 전하는 기사와 사진을 내놓았다.

 

그 지면 한쪽에 이채로운 기사가 실렸다. ‘관공서 폭파 계획 발각’이라는 제목 아래 총독부 경무국의 또 다른 발표 내용이 자그맣게 게재됐다. 국경지대와 경성 시내에서 폭발물 수십 개와 권총, 탄환, 불온 유인물 등이 대량 압수됐고 관련자 다수가 체포됐다는 내용이었다. 의열단 사건에 관한 첫 보도였다.

 

비록 작은 기사였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컸다. 온 경성을 떠들썩하게 했던 김상옥 사건이 일단락되자마자 또 다른 의열투쟁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의열투쟁 사건이 끊임없이 터져나오는 현실이 사람들에게 경외감마저 가져다줬다. 일간지의 한 편집기자는 “한 가지 사건이 겨우 끝나면 또 한 가지 사건이 뒤를 이어 일어나니, 경관의 괴로움도 많으려니와, 뒤를 이어 계속하여 일으키는 사람들의 끈기도 무섭다”고 논평했다.1 신문기사는 경성의 민심이 소란하고 흉흉하다고 전했다.

 

두 군데였다. 국경도시 신의주와 식민지 수도 경성, 두 도시에서 대규모 폭발물이 은닉됐음이 드러났다. 신의주경찰서는 3월14일 밤에, 경기도경찰부는 3월15일 새벽에 일제히 검거 작전에 착수했다. 그 결과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성과를 올렸다. 폭탄 36개, 폭탄장치용 시계 6개, 권총 5자루, 실탄 155발, 뇌관 6개, ‘조선혁명선언’과 ‘조선총독부 관공리에게’라고 제목을 단 불온 문서 900여 장을 압수했다. 또 연루 혐의자로 조선인 18명을 체포했다.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폭탄이었다. 한두 개가 아니라 무려 36개였다. 경찰은 폭탄 성능이 어느 정도인지 전문가들에게 감정을 의뢰했다. 폭발물은 용도에 따라 세 종류로 이뤄졌고, 각자 놀랄 만한 위력을 가졌음이 밝혀졌다.

 

의열단 사건의 세 주체 가운데 하나인 조선공산당(내지당) 지도자 김한. 임경석 제공

 

파괴용·방화용·암살용으로 분류된 폭탄

 

하나는 경찰의 이름 붙이기에 따르면 ‘파괴용’이었다. 대형 통조림처럼 생겼는데, 셋 중에서 가장 크고 무거웠다. 무게가 3.06㎏이었다. 일본군이 쓰던 대정 10년도(1921년) 제작 ‘10년식 수류탄’이 530g이었으니, 그보다 6배나 무거웠다. 사람이 팔을 휘둘러 던지기에는 부적절한 것으로 미뤄보아 투척용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내부 충전재로 젤리그나이트(Gelignite)가 가득 들어 있었다. 조물조물 빚어 형태를 만들 수 있는 가소성 폭약으로, 폭발력이 강하고 외부 충격에 저항성이 뛰어난 맹렬한 폭약이었다.2 내부 바닥에는 기폭용 뇌관이 장치돼 있었다. 요컨대 대형 통조림 폭탄은 은밀한 곳에 숨겨놓았다가 도화선이나 전기 발화 기구 등을 써서 기폭시키는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다. 철교나 건축물 폭파에 적합했다. 폭탄장치용 시계를 도화선에 연결해 예정된 시간에 폭발시킬 수도 있었다. 압수된 폭발물 가운데 2개가 이 유형에 속했다.

 

다른 하나는 ‘방화용’이었다. 외부에 발화용 돌출 장치가 있는 대추씨 모양의 폭탄인데 무게는 980g이었다. 이것은 곧바로 사용해도 좋을 만큼 완성도가 높았다. 감정을 맡은 폭약 전문가는 군용 수류탄과 매우 비슷하다고 평가했다. 돌출부를 뽑아내거나 외부에 드러난 나선 장치에 힘을 가하면, 판자 모양의 격철이 회전하면서 내부에 있는 뇌관을 쳐서 발화시키는 장치가 내장돼 있었다. 그 폭발로 표면의 철갑이 다수의 파편이 되어 살상용으로 쓸 수 있고, 그와 동시에 불길이 맹렬히 일어나서 주위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었다. 폭약 전문가는 이 폭탄이 고관의 마차나 자동차를 표적으로 삼아 투척하기에 적합하다고 평가했다. 그 효력을 예상하자면, 폭발 위치에서 반지름 4~5m 이내의 사람은 확실히 살해할 수 있고, 22~23m 이내의 사람은 살해하거나 중상을 입히기에 충분했다.

 

마지막 하나는 ‘암살용’이었다. 갸름한 술병처럼 생겼는데, 모양만 다를 뿐 기계부 발화장치는 앞에서 말한 ‘방화용’과 동일했다. 무게는 850g으로 세 종류 폭탄 가운데 가장 가벼웠다. 몸통 부분에는 폭약을 채워넣었고, 잘록한 입구 모양의 약실 내에는 다량의 황린을 담았다. 황린이란 노란색을 띤 화학물질인데 독성이 강하고 공기 중에 발화하는 특성이 있다. 한번 폭발하면 강철 파편 조각과 함께 황린이 사방으로 튀어나가는 장치였다. 황린이 인체에 조금이라도 닿으면 곧바로 발화해 뼛속까지 타들어가게끔 의도된 것이었다. 결국 인 중독을 일으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폭탄이었다.

 

일본 경찰은 대경실색했다. 이처럼 살상력 높은 폭탄을 범죄자들이 어떻게 획득할 수 있었을까? 폭약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이 폭탄들은 어느 열강의 군용 기성품이 아니었다. 사제 폭발물이었다. 경찰은 체포된 혐의자들의 입을 통해 진실을 알려 했다. 하지만 속 시원히 진상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그저 유대계 러시아인 폭약 전문가가 중국 톈진 방면에서 제작한 것이 아닌가 추정할 뿐이었다.

 

의열단 사건의 한 주체인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시당)의 내지부 위원이자 조선총독부 경무국 경부 황옥. 임경석 제공

 

자금은 소비에트러시아가, 제조는 헝가리 청년이

 

뒷날 의열단 단장 김원봉은 이 폭탄들을 어떤 경로로 얻었는지 술회했다. 해방 직후 작가 박태원과 한 수차례 인터뷰에서다. 성능 좋은 폭발물을 입수하는 건 의열투쟁을 성공하기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예컨대 1921년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사건이 김익상의 결사적인 모험 끝에 단행됐지만 겨우 회계과 마룻바닥에 작은 구멍을 뚫고 사무실 집기를 부수는 데 그쳤음을 보라. 폭탄 성능이 부실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두 개를 던졌는데, 한 개는 불발이었다. 위력적인 폭탄을 얻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자금과 기술이 필요했다. 자금 문제는 소비에트러시아 정부의 원조에 힘입어 해결할 수 있었다. 조선혁명자금 제2회분 26만원을 관장한 한형권의 결산보고서에 따르면, 4만6700원을 의열단에 지급했다고 한다.3 지방부 신문기자 월급이 40원, 사무관급 관료 월급이 50원 하던 때다. 오늘날 현금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대략 23억원에 해당한다. 이 금액은 폭발물 전문가 고용비, 폭발물 재료비, 중간 연락거점 유지비, 운송비 등에 지출됐다.

 

기술 문제를 해결한 폭약 전문가는 헝가리 청년 ‘마쟈르’였다. 중국 상하이 프랑스조계의 서양식 주택을 임차해 그곳에서 폭발물을 제조했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마쟈르라고 불렸다는 점 외에 그의 신상은 알려진 바가 없다.

 

의열단 사건의 숨겨진 논점 가운데 하나는 주체 문제일 것이다. 강력한 폭발물을 국내에 반입해 암살과 파괴를 실행에 옮기려는 이 거창한 의열투쟁의 주도자가 누구냐 하는 문제다. 아니, 의열단 사건의 주도자는 그 단체의 리더인 김원봉이 아닌가, 그 외에 달리 주도세력을 설정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의열단 단독 주도론의 기원은 사건 발발 당시 일본 경찰의 관점에서 연유한다. 경찰 당국은 이 사건을 가리켜 “김원봉을 단장으로 한 의열단이 러시아공산당에서 자금을 받아서 대관을 암살하고 관공서를 파괴함으로써 조선을 적화하고 독립운동을 일으키려고 계획한 음모”라고 간주했다.4 또 경찰과는 정반대 입장에서 작성된 기록 <약산과 의열단>도 마찬가지다. 그 사건은 의열단의 제2차 암살·파괴 계획이며 시종일관 김원봉 단장의 다각적인 노력의 결과로 이뤄진 것으로 묘사됐다. 이 견해에 따르면 사건 가담자들은 의열단원이거나 개인적 협력자들로 이해된다. 무산자동맹회장 김한, 경기도경찰부 소속 경부 황옥 등의 가담이 개인적 협력의 두드러진 사례로 간주된다.

 

두 공산당 주요 간부들 참여 의미는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의열단 사건의 피고인은 18명이었는데, 이 중에서 몇몇 사람은 의열단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정치단체의 구성원이었음이 확인된다. 황옥은 이시당(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내지부의 위원이었고, 장건상은 이시당의 최고 간부인 중앙위원이었다. 김시현과 권정필은 이시당의 국내 활동을 위해 1922년 3~5월 잠입한 당원이었다. 말하자면 의열단 사건 가담자 가운데 적어도 4명은 이시당의 간부이거나 중요 당원이었음이 뚜렷하다.

 

김한의 협력도 개인적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망명자 중심의 양대 고려공산당(상하이파, 이르쿠츠크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인 조선공산당(일명 내지당, 중립당)의 간부였다. 단지 간부의 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아쉬움이 느껴지는 영향력 있는 간부였다. 1922년 당시 국내 사회주의운동을 이끄는 양대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요컨대 1923년 의열단 사건을 의열단이 단독으로 이끌었다고 보는 것은 사실과 배치됨을 확인할 수 있다. 의열단과 더불어 두 공산당(이시당, 내지당)이 ‘제2차 암살·파괴 계획’의 공동 주도세력이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글·사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휴지통’, <동아일보> 1923년 3월16일

2. 明石東次郞 외, ‘爆彈鑑定書’, 1923년 3월21일. <정보(경찰부의 1부)>, 경성지방법원검사국, 1923년(아세아문제연구소 희귀문헌 29)

3. 조철행, ‘국민대표회 개최 과정과 참가 대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1, 44쪽, 2009년

4. ‘의열단사건 내용발표’, <동아일보> 1923년 4월12일 호외

 

 

 

임경석의 역사극장

조훈이 두 차례나 국내 잠입했던 이유는

‘국제공산청년회’ 조훈의 두 번의 서울 비밀 잠입, 그 목적은

 

위조증명서에 첨부된 조훈의 사진. 중국식 교복을 입고 안경을 쓴, 유학생 분위기를 잘 자아내고 있다.

 

조훈이 비밀활동을 위해 서울에 처음 잠입한 때는 1922년 7월이었다. 26살 때의 일이었다. 그는 밀입국하던 전후 사정을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1921년 8월 국제당 극동비서부에 의해 국제공청 해외뷰로 전권위원 자격으로 상해에 파견됐다. 1922년 7월 말 국제공청 해외뷰로 업무차 서울에 체류했다. 9월에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국제공청 제3차 대회에 파견됐다.”1

 

이력서 등속에서 볼 수 있는 특유의 건조한 문장이다. 하지만 문장마다 두텁고 복잡한 서사가 배후에 깔렸음을 느끼게 한다. 국제당, 국제공청, 상해, 모스크바 등의 어휘가 그런 느낌을 준다.

 

서울에 몰래 들어온 당시 그의 직책이 드러나 있다. ‘국제공청 해외뷰로 전권위원’이었다. 국제공청이란 ‘국제공산청년회’라는 단체의 줄임말로, 1919년 11월 독일 베를린에서 창립대회를 가진 국제기구였다. 1921년 7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차 대회부터 비(非)서구 여러 민족의 사회주의 청년운동도 포함하는 명실상부한 국제기구가 됐다. 조훈은 바로 그 제2차 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했다.

 

4년 만에 벌목 노동자에서 국제공청 조선 대표로

 

놀랍다. 32명의 사관생도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우랄산맥 페름현 나제진스크 목재소에서 벌목노동에 종사하던 무명 청년이 불과 4년 만에 국제대회의 조선 대표로 선임된 점이 말이다. 도대체 4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관생도 다수가 연해주로 되돌아간 데 반해, 조훈을 비롯한 4명의 생도는 현지에 잔류하는 길을 택했다. 그 의도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 상급학교 진학을 희망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들은 시베리아의 대도시 예카테린부르크로 나아갔다. 그곳에서 세탁소 고용원, 담배말이 노동 등에 종사했다. 러시아 내전이 소용돌이치던 시절이다. 조훈도 시베리아 일대에서 내전에 휩쓸렸다. 적위파 일원으로서 말이다. 그래서 한때 재판도 없이 총살당할 뻔한 위기도 겪었다. 1919년 10월에는 이르쿠츠크에서 평생의 동지 남만춘을 만났다. 그보다 5살 연상의 믿음직한 선배였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상 ‘이르쿠츠크파’라고 불리는 공산주의 그룹의 중추 멤버로 성장했다. 조훈이 국제공청 제2차 대회에 조선 대표로 나가게 된 배경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제2차 대회에서 조훈은 국제공청 집행위원으로 선임됐다. 아울러 이르쿠츠크에 있는 국제공청 극동비서부 위원직도 차지했다. 이 기관은 동아시아 지역의 공산주의 청년운동을 지휘하는 부서였다. 조훈이 관장하는 지역은 그의 조국인 조선이었다. 조선 내지에 국제공청 지부를 결성해 신진 세대 속에서 사회주의 사상과 운동을 보급하는 것이 그의 소임이었다.

 

조훈은 기민한 사람이었다. 국제공청 제2차 대회가 끝난 지 불과 한 달 만에 고려공산청년회 집행부를 조직하는 데 성공했다. 1921년 8월 중국 베이징에서였다. 집행부를 ‘중앙총국’이라고 불렀다. 위원은 5명이었다. 국제공청을 대리하는 조훈 자신 외에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파견한 위원 1명, 각지 공청 세포기관에서 발탁한 위원 3명이 구성원이었다. 상하이 공청 세포기관에서 온 박헌영이 그 속에 포함된 점이 이채롭다.2

 

고려공청 중앙총국의 긴급한 과제는 활동 근거지를 조선 내지로 옮기는 데 있었다. 조훈은 그 과제 수행을 위한 거점으로 상하이를 선택했다. 국내로 공청 기반을 옮기는 데는 그곳이 최적의 중개 기지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비롯해 각종 단체와 비밀결사가 잠행하는 곳이고, 갖가지 이상을 품고서 몰려온 조선인 망명객과 청년들이 은신하는 대도시였기 때문이다. 조훈은 중앙총국 위원진을 재구성했다. 5명이었다. 국내 공작을 수행하는 데 적합한 인물들로 새로운 진용을 짰다.

 

1922년 7월 조훈이 첫 번째 국내 잠입 때 사용한 위조 신분증. 중국 광둥중학교 2학년을 수료한 유학생 김창일로 위장했다.

 

총국을 베이징에서 서울로, 중개기지는 상하이

 

1922년 중앙총국 소재지를 국내로 이전하기 위한 노력이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중앙총국 5명 위원 가운데 조훈은 상하이에서 국제공청과의 연락을 맡고, 다른 4명은 모두 국내에 잠입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원활하게 집행되지 못했다. 책임비서 박헌영과 총국의 두 위원 김단야와 임원근이 국경선을 넘는 도중에 체포됐기 때문이다. 잠입에 성공한 위원은 고준 한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혼자로는 역부족이었다. 수개월 동안 고준이 조직한 세포단체는 단 1개에 지나지 않았다.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조훈은 1922년 7월 조선으로 직접 잠입하기로 결심했다.

 

밀입국 때 사용한 위조 신분증이 남아 있다. 그는 중국 광둥중학교에 유학 중인 조선의 전라북도 무주군 출신 김창일(25)로 행세했다. 신분증은 정교했다. 한문 활판으로 인쇄된 증명서 양식에 고유명사를 세필로 써넣은 증명서였다. 인지 석 장이 붙어 있고, 광둥중학교장 야오궈시의 개인 도장에다, 학교장 직인까지 붉게 찍힌 감쪽같은 재학증명서였다.3 2학년을 마친 뒤 질병으로 휴학했으며, 치료차 고국에 돌아온 중국 유학생인 것처럼 꾸몄다.

 

서울에 무사히 안착한 조훈은 공청 조직운동의 방향을 바꿨다. 독자적으로 세포를 늘려가는 대신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국내에서 왕성한 사회주의 운동 열기를 이끄는 비밀결사 대표들을 고려공청 중앙총국 위원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그해 8월 새로운 중앙총국을 출범시킬 수 있었다. 세 번째 형성된 간부진이라는 의미로 ‘고려공청 제3차 중앙총국’이라고 불렀다. 위원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5명이었다. 종래의 두 위원에 더해 3명을 받아들였다. ‘내지당’ 혹은 ‘중립당’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신생 비밀결사 조선공산당 대표 김사국, 대중적 영향력을 지닌 공개단체 노동연맹회 대표 전우, 서울청년회 대표 김사민이 그들이다.4 책임비서에는 김사민이 선임됐다. 당시 국내 사회주의 운동의 실제를 잘 반영한, 최선의 인선이었다고 생각된다.

 

서울 한복판에 고려공청 중앙총국을 설립한 직후 조훈은 다시 국외로 빠져나갔다. 국제공청과의 연락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1922년 9월의 일이었다. 서울에 비합법적으로 체류한 지 한 달 남짓했을 뿐인데도, 획기적인 성과를 올리는 데 성공했다. 국경 밖으로 빠져나가는 그의 어깨에는 그해 12월 개최 예정인 국제공청 제3차 대회에 출석할 고려공청의 대표자라는 자격이 부가돼 있었다.

 

일상생활 중에 자연스레 찍은 조훈 사진.

 

의열투쟁과의 제휴를 둘러싸고도 이견

 

조훈이 다시 국내로 잠입한 때는 1년6개월이 지나서였다. 1924년 2월 두 번째로 서울에 나타났다. 그의 <자서전>을 들여다보자.

 

“1924년 2월부터 5월까지 국제공청집행부 전권위원 자격으로 조선에서 활동했다. 6월 국제공청 제4차 대회에 참석했고, 국제공청 중앙위원으로 선출됐다.”

 

두 번째로 잠입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조선 내지에 설립한 고려공청 중앙총국 위원이 둘로 분열됐기 때문이다. 분열을 낳은 문제는 국외 기반의 기존 두 세력(상해당·이르쿠츠크당)을 공산당 건설에 포함할지였다. 책임비서 김사민과 당대표 김사국은 두 세력의 배제를 주장했다. 왜냐하면 공고한 공산당을 건설하려면 국내 대중에 기반을 둬야 하고, 국외 두 세력은 과오가 많았기 때문이다.

 

의열투쟁의 전술 적합성 문제도 분열을 낳은 또 하나의 진원이었다. 김사국 그룹은 의열투쟁을 반대했다. 그것은 대중 속에 투쟁 의욕을 북돋기는커녕 광범한 대중과 혁명 세력을 유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었다. 따라서 의열단과 제휴해 폭탄 반입을 추진하는 내지당의 다른 간부들에게 반발했다. 김사국과 김사민은 고려총국 중앙총국 위원직을 사임했고, 내지당에서도 탈당했다. 대신 비밀결사 고려공산동맹을 결성해 독자 노선을 걸었다. 이 비밀결사는 합법단체 서울청년회를 거점으로 삼아서 활동했기에 ‘서울파’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 분열은 조선혁명운동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비밀운동은 물론이고 공개 합법 영역에도 그랬다. 국제공청 집행부는 갈라진 두 그룹이 통합하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양자 통합을 실행하는 책임을 조훈에게 부여했다. 조훈은 ‘국제공청 집행부 전권위원’ 자격으로 통합 공청을 실현하는 소임을 띠고서 국내로 잠입했다.

 

조훈은 자신의 소임을 두 단계로 나눠서 추진했다. 첫 단계는 이완된 고려공청 중앙총국을 정비하는 일이었다. 책임비서 직위에 있던 신철을 해임하고, 중앙총국을 새 위원들로 재조직했다. 1923년 4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책임비서 자격으로 국내 공산청년운동을 이끈 신철이 해임된 이유는 ‘사보타주’ 혐의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 사건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국제공청 집행부 전권위원 조훈의 권한 행사 범위가 넓고도 강력했음을 잘 보여준다. 새로운 중앙총국 위원진의 중핵은 일찍이 1922년 3월 밀입국 도중에 체포된 트로이카(삼두마차)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이었다. 그들은 출옥하자마자 곧바로 비밀결사운동에 복귀했음을 알 수 있다.5

 

두 번째 단계는 통합 공청을 결성하기 위해 고려공산청년회창립대회준비위원회를 설립하는 일이었다. 당시 조선 내에는 조훈의 과업 수행에 유리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대통합 움직임이 일었다. 합법 공개 영역의 청년운동도 그랬고, 비밀 사회주의 운동도 그랬다. 국내에 존재하는 내지당과 고려공산동맹, 양대 비밀결사가 주동이 되어 ‘6인회’라는 명칭의 조선공산당창립대표회준비위원회를 출범했다. 그 덕분에 조훈이 추진하는 고려공청 통합운동은 6인회가 이끄는 공산당 통합운동과 나란히 굴러갈 수 있었다.

 

실패한 두 번째 밀입국, 그러나 망외의 소득

 

양대 공청 그룹의 협상 테이블이 가동됐다. 그리하여 많은 문제가 논의 석상에 올랐다. 고려공청 중앙총국이 기득권을 포기하고 해산할 수 있는지, ‘6인회’로 대표되는 공산당 지도부의 지휘를 받을지, 국외에 소재하는 공산그룹들과 연계를 단절할지, 통합 공청대회 대의원을 야체이카(세포단체)에서 선출할지 아니면 개인별로 초청할지 등이 쟁점이 됐다.

 

그러나 조훈은 1924년 5월 출국할 때까지 자신의 소임을 완성하지 못했다. 통합 공청 결성은 달성하기 어려운 난제였기 때문이다. 성과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비록 통합 공청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그 뒤 공청 운동의 큰 흐름이 되는 근간을 수립하는 데 성공했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의 두 번째 밀입국이 거둔 망외의 소득이었다.

 

글·사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조훈 동무의 자서전 (Автобиография тов.Те-Хуна), 3쪽, 1927년 3월28일, РГАСПИ ф.531 оп.1 д.247 л.14-17

2. 작자 미상, <高共靑一般進行情況> 1쪽, РГАСПИ ф.533 оп.10 д.1908 л.1-11

3. 廣東中學校, <修業證書, 金昌一>, 중화민국11년(1922) 5월2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40 л.5

4. <高共靑一般進行情況>, 4쪽

5. 윤상원, ‘국제공산당과 국제공산청년회 속의 한인 혁명가’, <마르크스주의 연구> 55, 경상대학교, 2019년

 

 

 

 


임경석의 역사극장

러시아 벌목장, 막일하는 사관생도들

조훈 등 나자구 사관학교 32명 생도들,
학교가 폐쇄 위기에 빠지자 페름현 산악지대에서 육체노동해 재개 자금 모아

 

1921년 7월 국제공청 제2회 대회 대표증에 첨부된 증명사진. 임경석 제공

 

조훈은 19살 되던 해에 나자구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의 전후 사정을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상하이에서 나는 미국으로 밀입국하려고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간도로 갔다. (…) 그 후 의병 투쟁을 위한 비합법 속성 군사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자금 결핍 때문에 학교는 단지 11개월 동안만 존속할 수 있었다. 1915년 말이었다.”1

 

대전학교 혹은 동림무관학교, 도미 실패 뒤 향한 곳

 

평양의 기독교계 중등학교에서 수학하던 조훈은 식민지 조선의 교육 환경에 울분을 품고서 미국행을 꿈꿨다고 한다. 미국인 선교사들의 영향 때문이리라. 평안남북도의 기독교 청년 가운데 미국 유학을 떠나는 사람이 꽤 있었다. 조훈이 중국 상하이로 간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세 명의 학우가 행동을 같이했다. 그러나 장벽이 높았다. 태평양을 건너는 뱃삯도 문제려니와 출입국 서류를 마련하는 일이 큰 난제였다. 식민지 조선인이 미국으로 건너가려면 일본 정부가 발급하는 여권과 출국 서류, 미국 정부가 발급하는 입국비자가 있어야 했다. 선교사들의 후원을 받지 않고서는 출입국 서류를 떼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밀입국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상하이는 미국, 영국, 프랑스 조계지가 자리잡은 대도시이자 동아시아와 유럽·북미를 잇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그곳에만 가면 어떻게든 길이 열릴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미국 밀입국의 길은 열리지 않았다.

 

진로를 변경해야 했다. 고심 끝에 조훈이 선택한 곳은 북간도였다. 두만강 국경 너머 조선인 이주민이 수십만 명 거주하는, 그곳으로 나아갔다. ‘의병 투쟁을 위한 비합법 속성 군사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나자구 사관학교에 입학하는 길이었다.

 

중국 길림성 왕청현 나자구에 있는 이 학교의 정식 명칭은 ‘왕청현 제1고등국민학교’였다. 중국 교육법상 정규 중등교육기관의 하나로서 지방정부 길림 동남로 행정 당국의 승인을 받아서 개설된 학교였다. 설립 당시 지방정부 수반으로부터 3천원의 특별지원금까지 받을 정도로 합법적 지위를 갖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은 중국인이었다.

 

사관생도 전체는 아니지만 그중 45%에 이르는 54명의 이름과 나이를 확인할 수 있다.2 최연소자는 20살이고, 연장자는 30살이었다. 오늘날 대학교 1~3학년에 해당하는 20~22살 주니어층이 15명이고, 대학교 4학년에서 석사과정에 해당하는 23~25살 중간층이 22명이었다. 대학원 박사과정생에 해당하는 28~30살 시니어층이 13명이었다. 평균 24.4살이었다.

 

나자구라는 지명은 일명 대전자라고도 불렸다. 그래서 이 사관학교를 조선인들은 대전학교라고도 불렀다. 자료에 따라서는 동림무관학교라는 호칭도 쓰였다. 나자구 사관학교를 포함한 이 명칭들은 모두 비공식적인 것이었다. 조선인들끼리 은밀하게 부르는 이름이었다.

 

사관학교를 유지하려면 자금이 필요했다. 교육을 맡은 교수들이 보수를 받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설립 과정에서 토지와 건물은 장만했지만, 생도들의 의복과 식비를 다달이 마련해야 했다. 일본 관헌의 첩보에 따르면 매달 700루블의 경비가 필요했다. 학교 당국은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머지않아 재정난에 빠져들었다.

 

32명의 사관생도에 관한 회상기를 담고 있는 조훈 자서전 첫 쪽. 임경석 제공

 

1년은 2년으로 노임은 절반으로, 포드랴치크의 농간

 

1915년 12월 혹은 이듬해 3월에 결국 나자구 사관학교는 폐쇄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일본 영사관 쪽 방해 공작도 영향을 끼쳤지만 주로 자금난 때문이었다. 사관생도들은 독립군 장교 양성 사업이 중단되는 것을 차마 지켜만 볼 수 없었다. 조훈의 회고담을 들어보자.

 

“이 학교의 120명 사관생도 가운데 32명이 결사를 맺고서 군사학교 재개 자금을 벌기 위해서 러시아로 갔다. 우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선인 청부업자에게 고용됐다. 그는 우리를 페름현 나제진스크 공장으로 보냈다. 그들은 우리를 6개월간 장작 제조공으로 채용하고, 선불금을 받고서 달아났다.”

 

사관생도 32명이 동맹을 맺었다는 문장에 눈길이 간다. 사관학교 재개를 위한 자금을 벌기 위해 육체노동에 종사하기로 결심했다. 공공선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의 사적 이익을 기꺼이 내려놓기로 작정한, 수준 높은 윤리적 행동이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구체적인 성명에 관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 참가자의 이름이 알려진 경우는 예외적이다. 보기를 들면 뒷날 독립자금 조성차 일본은행 현금 수송대를 습격한 15만원 사건의 주역이 되는 임국정, 이 글의 주인공이자 뒷날 국제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이 되는 조훈 등이다. 앞으로 언젠가 사료 여건이 개선돼서 그 외 사관생도들의 신원을 알게 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당시는 전시였다.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래서 러시아에서는 군수 생산을 위한 노동력 수요가 증가하고 있었다. 32명의 사관생도는 일자리를 찾아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나아갔다.

 

그들은 조선인 청부업자의 힘을 빌렸다. 저 멀리 시베리아 너머 우랄산맥 깊은 곳에 있는 페름현 산악지대에서 벌목노동에 종사하기로 고용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그 청부업자는 정직하지 않았다. 그자는 사관생도들이 러시아어에 서툰 점을 악용해 근로계약서를 위조했다. 1년 기한을 2개년으로 몰래 늘렸고, 약정된 근로 할당량을 채우려면 밤낮 가리지 않고 일하도록 꾸몄으며, 노임 수준도 통상 임금의 절반도 안 됐다. 약정 내용을 달성하지 못하면 고용 기한이 다 찼더라도 작업장을 이탈할 수 없었다. 노예계약이나 다름없었다. 사관생도뿐만이 아니었다. 청부업자의 농간으로 페름현의 공장과 사업소에서 노예노동에 얽매인 조선인 수는 수천 명에 달했다.

 

청부업자는 ‘포드랴치크’라고 부르는데, 러시아어에 능숙하고 이미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이들이 맡았다. 그들은 철도 공사장이나 광산, 어장 등지에 노동자를 모집해주거나 관청과 군대에 물품을 조달하는 일에 종사했다. 러시아어를 잘 모르는 신이주민과 관청 일에 어두운 러시아어 문맹자는 일자리를 얻으려면 그들을 통해야만 했다. 근로계약의 관행도 청부업자에게 유리했다. 그들은 고용주에게서 노동자의 임금 총액을 직접 수령해, 소관 노동자 개인에게 나눠주는 권한이 있었다. 연해주 조선인 사회에서 큰 영향력이 있던 문창범, 최봉준, 최재형, 김두서 등은 모두 이 직업을 통해 재산을 일으킨 사람들이었다.

 

사관생도 32명이 독립군자금을 벌기 위해 고용돼 일하던 러시아 페름현의 위치. 구글지도

 

벌목장 착취에 주목한 김알렉산드라

 

문제의 청부업자는 김병학이라는 자였다. 그는 사관생도 등 조선인 노동자 몫의 임금 선불금을 받고서 자취를 감췄다. 그도 연해주 조선인 사회의 유력자였다. 시베리아철도 건설공사 청부, 러시아 군납용 쇠고기 조달업 등으로 재산을 모았다. 1912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민회 회장, 민족운동 단체 권업회의 외교부장 등의 직책을 맡기도 했다.

 

사관생도들은 노예노동의 고통을 견뎌내야 했다. 그들의 고난은 1년 이상 계속된 뒤에야 끝났다. 사관생도들이 억류에서 벗어난 시점이 눈에 띈다. 1917년 6월이었다. 바로 그해 2월에 일어난 러시아혁명이 그들의 운명에 영향을 끼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벌목장의 사관생도들이 노예노동의 처지에서 벗어난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하나는 1917년에 발발한 러시아 2월 혁명 덕분이었고, 다른 하나는 조선인 최초의 사회주의자 김알렉산드라가 우랄산맥의 조선인 노동자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항의 캠페인을 조직한 덕분이었다.

 

김알렉산드라는 이주민 2세로 러시아의 정규 초등, 중등학교를 졸업한 여성이었다. 그는 재학 중에 혁명사상을 수용해 비밀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사관생도들이 우랄산맥에서 노예노동에 종사하던 그때, 김알렉산드라도 페름현 일대에서 거주했다. 왜냐하면 혁명당의 일원으로 지목돼 우랄산맥 방면으로 추방당했기 때문이다. 그는 페름현 벌목장에서 노동과 착취에 고통받는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주목했다. 특히 사관생도 그룹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는 뜨거운 동지애를 느꼈다고 한다. 김알렉산드라는 조선인 노동자를 조직하는 한편, 그들의 대표자로서 노사 교섭의 현장에 섰다.

 

김알렉산드라는 가능한 모든 종류의 합법투쟁을 밀어붙였다. 조선인 노동자를 대리해 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는 전술도 병행했다. 그러나 요지부동이었다. 지방법원의 판사들은 시종일관 자본의 편에 섰다.

 

2월 혁명이 일어났다. 그 덕분에 페름현 조선인 노동자 소송 사건은 여론의 주목을 받는 일대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사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폭발했다. 지방법원 둘레에 수만 명의 사람이 에워쌀 정도였다. 마침내 법원의 최종 판결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이처럼 조선 노동운동사의 첫 페이지는 32명의 사관생도와 김알렉산드라에 의해 열렸음을 알 수 있다.

 

 

1년간 노동해 2개월치 학교 경비 벌어

 

2월 혁명 이후 전 러시아가 혁명적 정세에 휩싸인 조건 속에 사관생도들은 연해주로 되돌아갔다. 그들은 청부업자 김병학에게서 1200루블을 받아냈고, 그 돈을 우랄동맹 31명의 명의로 북간도 무장투쟁 준비사업에 기부했다. 왜 32명이 아닌가? 유감스럽게도 사관생도 한 사람이 우랄산맥 벌목공장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이름이 뭔지, 어떤 사람인지는 아직 알지 못한다.

 

1년여 세월에 걸친 사관생도 32명의 용기와 모험치고는 성과가 보잘것없다고 보는 독자도 있겠다. 북간도로 송금한 1200루블은 나자구 사관학교의 약 2개월치 경비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돈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헌신 결과는 고조된 조선 독립운동을 지탱하는 근간으로 자랐음에 주목해야 한다. 1920년 초 독립군이 발흥하던 때였다. “오늘날 중국·러시아 영토에서 독립을 위해 헌신하는 청년은 나자구 사관학교에서 나온 자가 가장 다수”라는 평가가 나왔다.3 그 한가운데에 바로 32명의 사관생도가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참고 문헌

1. 조훈 동무의 자서전(Автобиография тов.Те-Хуна), с.1, РГАСПИ ф.531 оп.1 д.247 л.14-17, 1927년 3월28일.

2. 琿春副領事 北條太洋, ‘機密公信第10号, 汪淸縣ニ於ケル不逞鮮人ノ設定ニ係ル學校職員並生徒名簿ニ 關スル件’,3~5쪽, 1916년 3월11일.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の部-在滿洲の部> 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

3. 四方子, ‘北墾島 그 過去와 現在’, <독립신문> 1920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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