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ppearance of Christ to the People, 1857. by Alexander A. Ivanov. oil on canvas.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알렉산더 안드레예비치 이바노프 (Alexander Andreyevich Ivanov 1806~1858)의 작품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모본과 습작들.


알렉산더 이바노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미술 아카데미 교수였던 

아버지 안드레이 이바노프(Andrey Ivanov)에게 어릴 때부터 그림을 배웠다.
그는 1830년 이탈리아에 유학한 뒤 생애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면서
종교화 특히 성서를 주제로 하여 예수의 인간성을 표현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데카브리스트 반란이 있은 후 알렉산더 이바노프는 사회의 모순에 
더욱 회의를 느꼈고, 제정 하의 권력자들과 타협하려 하지 않으려 했기에 
그가 평생에 가진 삶의 무게는 힘겹기만 하였다.

그의 그림 중 20년에 걸쳐 완성한 작품이 바로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림의 주제는 성경 요한복음 1장을 나타내고 있다. 
이바노프가 이탈리아에서 20년 동안(1837~1857) 정성을 들여 그린 작품이다. 

그 당시 이바노프에게는 고민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인류가 고뇌와 부정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인가? 
예수의 모습과 허망함과 슬픔 또 종교적 감정이 이바노프를 강하게 흔들었다. 
그리하여 '구원'이라는 모든 사람들의 꿈을 큰 그림으로 나타내고자 그는 작업을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일생의 대표작이 된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러시아에서 19세기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로 한 그림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이 
알렉산드르 이바노프의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작품은 러시아 회화사에서 수도 없이 거론되는 최고의 갈작 가운데 하나일 뿐 아니라, 
19세기 러시아 회화 특유의 '인자로서의 예수상'의 선구적인 모범이 되는 작품이다. 
이 대작 앞에 서면 누구든 예수와 역사의 현장에서 만나는 듯한 생생한 경험을 하게 된다.

1858년 이바노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얻지 못했다. 
6주 후 결국 52세의 나이로 이바노프는 죽음을 맞이했다. 
당시 장례식에 많은 예술인과 문화인이 참석했는데, 
그 중 이동파 화가 크람스코이도 있었다고 한다. 

 

The Appearance of Christ to the People, 1836~1855. by Alexander A. Ivanov. oil on canvas. 
172 x 247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바노프의 대작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모스크바에서 일반 경매로 붙여진다. 
그 당시 트레티야코프는 러시아 미술의 훌륭한 작품을 모아서 미술관을 설립하려는 꿈이 있었다. 
그리하여 트레티야코프가 이바노프의 대작을 구입한다.

이 작품의 원본은 540 x 750 cm나 되는 방대한 크기의 대작으로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Tretyakov Gallery)에 전시되어 있다. 
예수님을 가리키며 성령으로 세례해 주실 분임을 알리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 
가난한 이들과 녹색 얼굴의 노예는 반색하며 돌아보고 있고 
오른쪽의 흰 터번을 두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탐탁하지 않은 표정으로 수군거리고 있다. 
사람들에게 다가오고 계시는 예수님을 감싼 주위의 공기는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작품은 수많은 습작을 남기며 20년 만에 완성된 그림이다​.
화가는 화면에 배치된 인물 하나하나에 

저마다의 역할을 부여하기 위해 수많은 에튀드(습작)들을 거쳤다. 
습작의 수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다. 
심지어 전시실에 비치된 한 장짜리 해설문만 해도 

영어판에는 800개, 노어판에는 300개로 나와 있다. 

또 배경 표현을 위해 이탈리아의 풍경을 꼼꼼히 관찰하고 묘사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때까지 러시아 미술사에서 시간과 에너지 투자 면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운 엄청난 역작이요 대작인 것이다.
이 모든 결과물 가운데 일부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과 

러시아 미술관에 나뉘어 전시되고 있다.


이들 그림에서 우리는 햇빛과 미묘한 대기의 흐름 등, 

아직 프랑스 인상파가 대두되기 전인데도 
야외 공간에 대한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관찰과 표현을 볼 수 있다. 
이바노프가 감각적으로도 시대를 앞서가는 화가였음을 알 수 있다.​

 

Figure of Christ (Generated), 1833-1857. by Alexander A. Ivanov. oil on canvas. 62 x 44.7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알렉산더 이바노프가 "메시아의 모습"을 그린 스케치는 특별한 예술적 세계이다. 
수백 개의 스케치는 각각 독립적이고 내부적으로 완벽하며 완전한 작업이다. 
때로는 큰 그림과는 독립적으로 플롯되지만 이데올로기 및 미학적 접촉을 반드시 유지한다. 

 

Kopf eines Sklaven in zwei Varianten, 1837-1857. by Alexander A. Ivanov. oil on canvas. 62 x 44.7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눈물이 그렁그렁한 노예의 에튀드. 
그리스도의 출현을 가장 크게 기뻐하는 사람들은 화면의 중앙 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벗은 몸으로 등을 보이고 있는 몸짱 사나이의 왼팔에 

얼굴이 반쯤 가려 있는 노인이 그 중 하나이다. 

쇠약한 몸을 아들에게 의지해 요르단 강가에 나왔던 노인은 기력을 놓고 있다가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소식에 황급히 일어서려 한다.
가장 큰 기쁨은 그 앞에 쭈그리고 앉은 노예의 푸른 얼굴에서 찾을 수 있다. 
짐승처럼 목덜미가 줄에 묶여 있는 그는 아마도 주인님의 옷을 챙기려던 참인가 보다.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말에 손을 멈추고 돌아보는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다. 
세상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목줄 밖에 없을 노예가 구세주의 출현에 감격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바노프는 잃을 것이라고는 역시 쇠사슬밖에 없는 

조국 러시아의 민중들을 노예의 모습에 투영한 것이 아닐까. 
미술사가 A. I. 조토프에 의하면, 러시아 회화에서 학대받는 이의 모습을
이처럼 감동적이고 박진감 있게 묘사한 것은 이 그림이 처음이다.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우측 벌거숭이 사내의 에튀드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일어서려는 노인의 에튀드

가끔은 이처럼 고대 로마의 조각상을 인물의 원형으로 삼고 있다. 
조각상의 모습은 완성작에서 노인보다도 아래쪽 노예의 얼굴과 더 닮은 것 같다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초점은 아무래도 

그리스도보다 그를 영접하는 인간 군상들에게 있다. 

이바노프는 “나는 이 그림에서 타락한 지배자들이 민중을 억압하는 모습,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로마에 아부하는 천박한 유대 왕들의 행태, 
그리고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슬픔을 그려보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화가는 화면에 배치된 인물 하나하나에 

저마다의 역할을 부여하기 위해 수많은 에튀드(습작)들을 거쳤다. 

 

Head of John the Baptist, 세례 요한 습작. 1840s.

 

Naked Boy, Study. Late 1840s or 1850s. by Alexander A. Ivanov. oil on canvas. 47.7 x 64.2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풍경을 배경으로 한 나체 소년들의 스케치 시리즈는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그림을 위한 준비 연습 그림이다.  
전경과 뚜렷하게 분리된 배경의 무한한 공간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자연인 "역사적 시간"의 구체화이다. 
미술 평론가 알렌노프 M. M. Allenov의 발언에 따르면, 어린이만이 자연과 비슷하며 
구조를 파괴하지 않고 알렉산더 이바노프의 풍경에 들어갈 수 있다. 

 

A tree in the shade above the water, At the earliest 1846. by Alexander A. Ivanov. oil on canvas. 
45 x 58.2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 작품 "물 위 그늘에 있는 나무"의 배경은 카스텔 간돌포(Castel Gandolfo) 근처로 
로마에서 30km 떨어진 알바노 호수 위의 알바니아 언덕에 위치해 있다. 
면적이 6km²이고 깊이가 170m 인 이 호수는 한때 멸종된 화산 분화구에서 형성되었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Christ’s Appearance to Mary Magdalene after the Resurrection, 1835. 

by Alexander A. Ivanov. oil on canvas. 242 x 321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부활 후 막달아 마리아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이 작품은 이바노프가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제작하기 전에 그린 것으로,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미술을 열심히 연구하던 시절, 
르네상스 미술에 대한 화가의 짙은 애정이 잘 나타난 그림이다. 
이 작품의 예수는 비애미를 지닌 인간이라기보다 

로맨틱한 감상을 느끼게 하는 인간에 더 가깝다.

막달라 마리아 주제는 중세 때부터 애호되었지만, 
서양 미술사에서 집중 조명된 시기는 종교개혁이 일어날 무렵이다.  
프로테스탄트의 영항으로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전통 전반이 크게 위협 받자 
고해성사를 비롯한 전통을 지키기 위해 고해자의 전형으로 
막달라 마리아를 형상화한 그림이 많이 제작된 것이다.

이때 마리아 이미지는 머리를 길게 풀어헤치고 깊은 수심에 잠긴 모습이 대부분이다. 
풀어헤친 머리에서 보듯 이바노프의 막달라 마리아도 

그런 가톨릭 전통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좀더 깔끔하고 산뜻한 용모 때문에 세속적인 미인의 인상을 더 짙게 던진다. 
그 옆의 예수 그리스도도 군더더기 없는 '몸짱'에 상당히 수려한 인상이다.

얼핏 보면 이런 세속적인 아름다움이 두 사람을 마치 한 쌍의 연인처럼 느끼게 한다. 
한 사람은 사랑을 고백하고 다른 한 사람은 짐짓 이를 뿌리치는 듯한. 
주제로 보자면 이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예수가 그녀를 진정시키려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예수는 마리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를 붙들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주제가 지닌 이와 같은 성스러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이바노프의 그림은 
보면 볼수록 감상적인 낭만주의의 향기를 발산한다.

어두운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연극의 클라이맥스 같은 장면, 

선남선녀의 지극히 감상적인 몸짓...
마리아의 풀어헤친 머리는 전통적인 참회와 자기부정의 표시라기 보다는, 
다른 이들 앞에서는 머리를 단정히 가다듬고 있어도 남편 앞에서는 
머리를 풀어헤치는 여염집 여인의 사적인 친밀감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미묘한 뉘앙스가 이 그림을 향한 시선의 집중도를 높이고 

주제를 살뜰한 감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막달라 마리아의 해후 뿐 아니라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의 해후에 대한 연상을 불러온다. 
사실 그리스도가 신랑이요 교회가 신부라는 성경의 비유도 

이런 종류의 낭만주의적 감상에 적잖이 기대고 있다.

춘향에게 이몽룡이 그런 것처럼, 구세주는 단순히 불의를 벌하는 
어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스런 내 낭군이기도 한 것이다. 
이바노프의 붓질은 그 인간적인 기대를 그리스도와 막달라 마리아의 
인상적인 이미지 안에 섬세하게 녹여 놓았다.

종교적인 주제가 지닌 신성함과 세속적인 이미지가 주는 

감상주의 미학이 아름답게 결합된 작품이라고나 할까. 
왠지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리라"고 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언급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Bellerophon goes on a campaign against the Chimera, 1829. 

by Alexander A. Ivanov. oil on canvas. 130,5 x 113 cm .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벨레로폰(Bellerophon)은 그리스 신화의 영웅으로 카드모스(Κάδμος))와 
페르세우스(Perseus)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헤라클레스(Hercules) 이전의 
가장 위대한 영웅이며 괴물의 처단자이다. 
그의 공로는 키마이라(Chimaera)를 죽인 것이며, 그것은 호메로스(Homer)에 따르면 
사자의 머리, 양의 몸 그리고 뱀의 꼬리를 지녔고 화염을 뿜어 내었다.

벨레로폰은 고린토스의 왕 글라우스코스(Glaucus)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실제 그의 아버지는 포세이돈이었다.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머리를 베었을 때 흘러내린 핏속에서 태어난 날개달린 말 

페가수스는 지상과 공중을 뛰어다니며 인간의 접근을 허용치 않았다.

페가수스를 타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던 벨레로폰은 예언자인 
폴리이도스의 조언으로 마침내 페가수스를 탈 수 있게 된다. 
포세이돈의 아들인 벨레로폰이 포세이돈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메두사의 몸속에서 태어난 페가수스를 타게된 것이다. 

벨레로폰은 죄를 짓고 코린토스에서 쫓겨나 아르고슬로 피신을 가게 되는데, 
그곳의 왕비가 벨레로폰을 유혹했다. 
그러나 그가 이를 거절하자 왕비는 왕인 프로이토스에게 
벨레로폰이 자신을 유혹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프로이토스는 손님을 직접 죽이고 싶지 않아서 벨레로폰에게 
봉한 편지 한통을 주어 리키아에 있는 장인 이오바테스 한테로 보냈다. 
벨레로폰은 리키아에 도착하여 왕비의 아버지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그는 관습에 따라 9일 동안 벨레로폰을 잘 대접한 뒤 
10일째 되는 날 사위가 보낸 편지를 뜯어보았다. 
거기에는 이 편지를 가져가는 자를 죽이라는 내용이 씌어 있었다.

이에 이오바테스는 벨레로폰에게 리키아를 어지럽히고 있는 
키마이라라는 괴물을 퇴치해달라고 부탁했다. 
키마이라는 불을 뿜은 무서운 괴물로 신체의 전면은 
사자와 염소의 모습을 하고 있고 뒤쪽은 용이었다. 
왕은 키마이라에게 벨레로폰이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벨레로폰은 페가수스의 도움을 받아 괴물을 활로 쏘아 죽였다.

벨레로폰은 키마이라를 퇴치한 후 계속되는 이오바테스의 명령으로 
어려운 임무를 맡게 되는데, 모두 페가수스의 덕분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이오바테스 왕은 벨레로폰이 신들의 특별한 총애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여 그의 딸과 결혼시켰다.

그러나 후에 벨레로폰은 자만이 넘치고 오만하게 되어 신들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벨레로폰은 신들과 경쟁하기 위해 페가수스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려 했지만, 
제우스는 한 마리의 등에를 보내 페가수스를 찌르게 하고 
페가수스로 하여금 벨레로폰을 떨어뜨리게 하였다. 
그는 절름발이가 되고 눈이 멀었다. 
그 후 벨레로폰은 알레이안의 들을 사람들의 눈을 피하면서 

외로이 방황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 작품은 이오바테스 왕과 함께 위업을 위해 출발하는 

벨레로폰의 이별의 순간을 묘사한다. 
학문적 전통에 따르면 영웅은 알몸으로 제시된다. 
근처에는 날아갈 준비가 된 멋진 말이 있다. 
그 뒤에는 비행 여신 아테나(Athena)가 보인다. 
왼쪽에는 앉은 왕 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외면하는 공주 딜로노야(Dilonoya)가 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몹시 걱정하고 있다. 
그림의 엄숙한 분위기에서 주요 주제는 이상적인 전사 영웅의 위업에 대한 영광이다.

 

The Flagellation of Christ, 1814. by Alexei Y. Yegorov. oil on canvas. 260 x 207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알렉세이 예고로비치 예고로프 (Alexei Yegorovich Yegorov 1776~1851)는 
러시아 화가이자 조각가이자 역사 회화 교수였다.
그는 어린 시절 칼미크(Kalmyk) 대초원에서 코사크(Cossacks)에 의해 포로로 잡혀 
나중에 모스크바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그의 초기 기억 중 일부를 기반으로 할 때 칼미크(Kalmyk) 혈통으로 여겨졌지만 
그의 기원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했다. 

알렉세이 예고로프는 1782년에는 제국 예술아카데미(Imperial Academy of Arts)에 

입학하여 이반 아키모브 (Ivan Akimovich Akimov 1755~1814)와 

그리고리 우그류모프(Grigory Ivanovich Ugryumov 1764~1823)와 함께 공부했다. 
그는 1797년에 졸업하여 1803년에 학자가 되었고, 

그 후 로마에서 현장 작업을 하도록 파견되었다.
그는 그의 디자인과 채색의 단순함을 칭찬한 빈센조 카무치니 
(Vincenzo Camuccini 1771~1844)의 영향을 받았다. 
평균적인 이탈리아 사람보다 키가 훨씬 더 컸던 그는 "러시아 곰"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사람들이 주요 인물에 놓일 수 있는 금화의 수만큼 그의 그림을 살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교황 비오 7세가 그에게 궁정 화가로 남아 있으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정중하게 그 제안을 거절했다. 

1807년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아카데미의 조교수가 되었다. 
그는 또한 엘리자베스 알렉세예프나와 알렉산더 1세에게 개인 드로잉 레슨을 했다. 
신앙이 깊은 사람으로서, 그는 많은 귀족들의 초상화를 마지못해 제작했지만 
항상 자신의 종교 그림을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생각했다. 

 

1840년, 그는 캐서린 대성당을 위해 그린 성삼위일체의 이미지에 

불만을 품은 차르 니콜라스 1세에 의해 즉각 해고되었다. 
그러나 그는 연금으로 연간 1,000 루블을 받았다. 
아카데미와 단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 학생들은 여전히 ​​그의 새로운 작품에 대한 
그의 의견을 이끌어 내고 학생들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 그를 찾아왔다. 
그 결과 그는 남은 생애 동안 바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스몰렌스크 묘지에 묻혔다.

이 작품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의 마지막 날, 
십자가에서의 희생적 죽음과 고통 (열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복음의 마지막 부분을 기반으로 하는 수난주기의 일부이다. 
"매장"과 "부활"에 제자들, "구세주의 고문"이라는 구도는 매우 간결하다. 
작가는 그리스도와 사형 집행자들의 그룹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러한 구조와 색조 솔루션은 그림이 고전주의 회화의 전형적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Dmitry of the Don in the Kulikovo Battlefield, 1824. by Vasily K. Sazonov. canvas, oil. 131,5 х 194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프린스 디미트리 이바노비치(Prince Dimitri Ivanovich 1350-1389)는 1359 년 이후 모스크바를 통치했다. 
그는 칸 마마이(Khan Mamai)의 타타르(Tatar) 무리와 싸우기 위해 러시아 병사들을 연합했다. 
1380년 9월 8일, 타타르 족은 쿨리코보(Kulikovo) 필드 전투에서 압도적인 패배를 겪었으며 
드미트리 이바노비치는 '돈스코이(Donskoy)'라는 명예 별명을 받았다. 


디미트리 왕자가 이끄는 10만 명의 병사들이 적을 만나기 위해 크렘린 성문을 떠났다. 
그들은 쿨리코보(Kulikovo) 필드에서 영웅적으로 싸웠다. 
왕자는 단순한 전사처럼 전투에 뛰어 들어 군대의 사기를 올렸다. 
손실은 엄청났지만 전투에서 승리했다. 
드미트리 돈스코이(Dmitry Donskoy)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바실리 사조노프 (Vasily Kondratievich Sazonov 1789~1870)는 러시아의 역사화가이자
제국 예술아카데미(Imperial Academy of Arts) 회원이었다.
그는 니콜라이 루미안체프(Nikolay Rumyantsev) 백작의 농노로 태어났다. 
백작이 고멜 팰리스(Gomel Palace)에서 사냥하는 동안 젊은 사조논프는 스케치를 만들었다. 
미술에 대한 사조노프의 재질을 알아차린 백작은 1804년에 그를 
제국 예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도록 보냈다. 
그는 그곳에서 역사 ​화가인 그리고리 우그류모프(Grigory I Ugryumov 1764~1823)에게 

배웠고 백작이 자유를 주실 정도로 빠른 진전을 보여주었다. 

그는 그리고리 우그류모프의 스타일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역사 화가가 되었다. 
1812년 쿠즈마 미닌 (Kuzma Minin)의 한 장면으로 금메달을 받았고, 
1813년에는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점령에 대한 

저항을 묘사한 장면으로 또 다른 금메달을 받았다. 

그는 1815년 "예술가"라는 칭호로 졸업하고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약간의 봉급을 받았다. 
1817년에 루미안체프 백작은 그에게 해외로 갈 수 있는 충분한 돈을 주었다. 
그는 로마로 가서 견문을 넓히고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서 

두 가지 주요 역사적 작품을 제작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쿨리코보(Kulikovo) 전투에서 드미트리 돈스코이(Dmitry Donskoy)이다. 
나중에 그는 새로 재건된 변형 대성당의 상징을 그렸고 타우리드 궁전을 위한 장식을 만들었다. 
이 프로젝트로 그는 1830년에 Academician이라는 학자 칭호를 얻었다. 

 

Martha the Mayoress (Theodosious Boretsky the Hermit Awarding the Sword of Ratmir to Miroslav, 
Young Chieftain of the Novgorodians and Fiancé of Xenia, Daughter of Mayoress Marfa of Novgorod)
1808. by Dmitry Ivanovich Ivanov. oil on canvas. 161 x 196,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 작품에 등장하는 마르타(Martha) 시장 또는 노브고로드(Novgorod)의 
여왕 (Marfa Posadnitsa)으로도 알려진 마르파 보레츠카야(Marfa Boretskaya)는 
귀족 출신이었고 두 번 결혼했다. 
필립과의 첫 결혼에서 두 아들이 태어났으며 남편이 일찍 사망했다. 
사별한 그녀는 노브고로드(Novgorod) 시장 이삭 보레츠키(Isaac Boretsky)와 재혼했다. 
따라서 그녀는 포샤드니차(posadnitsa 관리의 아내)의 지위를 받았다. 
그녀는 부유한 여성이었고 노브고로드 통치자와 지역 수도원만이 그녀보다 더 부유했다.

횡포하고 야심찬 성격을 가진 마르타는 사람들을 그녀에게 끌어 들이고 
그녀를 자신의 의지에 종속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단호하고 의지가 강한 성격, 독립적인 사고를 가졌다. 
이것은 다른 역사적 조건에서 훌륭한 정치 경력을 쌓을 수 있는 여성이었다.
마르파는 노브고로드 독립 무역기의 마지막 통치자로 남았다.

이 그림은 1808년 3월 14일 연금 수급자와 4세의 
제국 예술아카데미 학생들에게 주어진 프로그램에 따라 그려졌다. 
구성의 중앙에는 노브고로드(Novgorod)와 이반 3세(Ivan III) 사이의 투쟁을 이끈 
장엄한 여성 마르타(Martha)가 그려져 있다. 
마르타의 지시에 따라 그녀의 할아버지인 테오도시우스 보레츠키 (Theodosius Boretsky)는 
노브고로드의 독립을 위해 싸울 검을 마르타의 딸 제니아의 남편으로 뽑힌 미로슬라프에게 준다.

드미트리 이바노프(Dmitry Ivanovich Ivanov)는 어느 나라에서나 
미술에 전념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일반적인 예술가 중 한사람이다. 
드미트리 이바노프는 미술사에 중요한 흔적을 남길만큼 위대하지도 않았다. 
그는 1803년부터 예술 아카데미의 학생이었고 유명한 스승이자 교사인 
그리고리 우그류모프(Grigory I Ugryumov 1764~1823)와 함께 공부했다.

1805년 이바노프는 예술 아카데미 명예회원인 포토츠키(S.O. Pototsky) 백작이 

제안한 프로그램 "인민 반란을 길들인 니콘 총 대주교의 용기있는 업적을 보여주기 위해"를 
완성하여 금메달을 받았다. 
1806년, 이바노프는 인생에서 그린 그림으로 크고 작은 메달을 받았으며 
한 프로그램에서 두 번째 금메달을 받기도 했다. 
그는 1급 자격증과 검을 가지고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이 작품은 1808년 3월 14일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주어진 프로그램에 따라 그려졌다. 
마르타(Martha)는 구도의 중앙에 그려져 있다.
그녀는 이반 3세(Ivan III)에 대한 노브고로드(Novgorod)의 투쟁을 이끈 장엄한 여성이다. 
마르타의 지시에 따라 그녀의 할아버지인 테오도시우스 보레츠키(Theodosius Boretsky)는 
노브고로드의 독립을 위해 싸울 검을 마르타의 딸 

제니아의 남편으로 뽑힌 미로슬라프에게 수여한다. 

테오도시우스 라트미르의 조상은 금색의 검에 

"적은 결코 그것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썼다. 
우리 앞에는 캐릭터의 인물과 캔버스에서 위치의 대각선 배열, 
윤곽선의 선명도 및 선형 리듬화, 색상 반점의 병치, 
빛과 그림자의 대비에 따라 엄격하게 검증된 고전적인 구성이 있다. 
이 작품으로 이바노프는 1808년 예술 아카데미에서 표창을 받았다.

 

The Heroism of a Young Kievian at the siege of Kiev by the Pechenegs in 968, 

About 1810. by Andrey Ivanovich Ivanov. oil on canvas. 204 x 177,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968년 페체네그족이 키예프를 포위하는 동안 젊은 키예프인의 위업. 1810 년
스바이예토슬레브(Svyatoslav) 왕자의 군대가 먼 캠페인을 벌일 때"


그림의 줄거리는 968년 페체네그(Pecheneg) 유목민이 키예프를 

포위하는 동안 알려지지 않은 젊은 키예프 영웅의 이야기로 

러시아 고대 연대기의 영웅적인 에피소드 중 하나다. 

젊은 영웅은 손에 굴레를 들고 적 진영으로 돌진했다. 
적들이 그를 불렀을 때 청년은 도망친 말을 찾고 있다고 대답했다. 
드니프르(Dnieper)를 건너면서 그는 러시아 분대를 발견하고 포위된 도시를 돕기 위해 돌진했다.

회오리 바람처럼 젊은 영웅은 적군 진영을 향해 돌진하고 추격 소리를 듣는 것처럼 
그림의 아래쪽 가장자리에 있는 좁은 물 조각인 드니프르에 도달한다. 
깊은 곳에서는 기병과 성벽의 윤곽을 볼 수 있다. 
작가가 묘사하는 순간은 작품의 아이디어를 구체적이고 간결하게 표현한다. 
애국적인 의무에 자신을 포기하는 사람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안드레이 이바노프 (Andrey Ivanovich Ivanov 1775~1848)는 역사적 장면을 
전문으로 하는 신고전주의 스타일의 러시아 화가였다.
그는 부모에 의해 버려졌고 모스크바 고아원에서 자랐다. 
그는 1782년에 제국 예술아카데미(Imperial Academy of Arts)의 초등학교 과정에 등록한 후 
그리고리 우그류모프(Grigory I Ugryumov 1764~1823)와 함께 1797년 졸업했다. 

안드레이 이바노프는 오래된 이탈리아 마스터와 그림 아이콘을 복사하는 데 종사했다. 
1812년에 그는 교수로 임명되고 1821~1831까지 수석 교수로 재직하다가 
1831년 니콜라스 1세에 의해 강제 은퇴당했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The Brazen Serpent, 1841. by Fyodor A Bruni. oil on canvas. 565 x 852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표도르 안토노비치 브루니(Fyodor Antonovich Bruni 1799~1875)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이탈리아 출신의 아티스트, 학회 회원 및 제국 예술 아카데미 교수였다.
표도르 브루니는 1799년 밀라노에서 저명한 예술가이자 복원가인 
안토니오 브루니(Antonio Baroffi Bruni 1767~1825)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피델리오(Fidelio)이다. 

오스트리아 군대의 최고 장교 지위에 있던 그의 아버지는 

수보로프(A. V Suvorov)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 군대의 스위스 전투에 참여했으며 

1799년 다리에 부상을 입어 군에서사임했다. 
폴 1세(Paul I)의 통치 기간 동안 아버지 안토니오 브루니는 

그림 복원가이자 천장 화가로 미카일로프스키(Mikhailovsky) 궁전을 만들고 

그 후 쿠라킨(Kurakin) 왕자의 명령에 따라 모스크바에서 일했다.

표도르 브루니는 10살에 제국 예술아카데미(Imperial Academy of Arts)에 입학했으며 
알렉세이 예고로프(Alexey Yegorov 1776~1851), 

안드레이 이바노프(Andrey. I. Ivanov 1775~1848) 및 

바실리 셰부에프(Vasily Kozmich Shebuev)의 지도 아래 공부했다.

젊은 브루니는 1818년에 은메달을 수여받고 과정을 졸업하여 예술가의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19세의 피델리오가 미술 교육이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바실리 셰부에프의 조언에 따라 

피델리오를 이탈리아로 보내 그림을 더 향상시키기로 결정했다. 
고대 예술가들의 모범적인 작품에 대한 연구는 마침내 브률로(Bryullo)가 
브률로프(Bryullov)라는 이름으로 명명된 것처럼 러시아에서 

표도르(Fyodor)로 이름이 바뀐 젊은 피델리오(Fidelio)의 방향을 결정했다.

여러 그림을 그린 후 아직 22 세가 되지 않은 표도르 브루니는 
1824년 로마 국회의사당에 그의 작품이 전시되었고 처음으로 대형 그림 
"호레이스의 자매 카밀라의 죽음"이라는 작품의 작업을 시작했다. 
이 작품은 10년 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전시되었고 
브루니는 상당한 명성을 얻었으며 학자 칭호를 받았다.

작품 '구리 뱀(The Brazen Serpent)'은 브루니의 대표작이다.
하늘에서 뱀이 떨어지고 땅에 있는 인간들의 절규가 

그림을 보는 관객에게까지 들리는 듯하다. 
엄청나게 큰 그림이기 때문에 실제로 보면 영화 화면으로 

그때의 상황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이 그림은 성경의 민수기에 나오는 사연을 바탕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 지라.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죄를 범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잼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민수기 6-9절)

역사화가였던 브루니의 명작 'The Brazen Serpent'를 보면서 떠올린다.
어느 시대나 우리가 떠들고 있는 '위험 사회'란 꼭지가 붙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삶의 위험을 견디기 위해, 우상을 만들고 섬겼던 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이제는 자본이란 우상, 신자유주의란 우상을 섬기면서, 
그저 경제합리주의란 미명 아래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간과하고 
그저 고개를 돌려 피함으로, 자신의 양심을 속여야 하는지 말이다.
죄 지은 자의 마음으로 그림 앞에 서니 꼭 뱀에 물려 죽을 것 같은 환영에 빠진다.

작가는 이미지를 개별화하고 이야기를 여러 장면으로 나눴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뱀 동상이 있는 기둥으로 

하나의 일반적인 움직임은 전체 그림을 관통한다.
이 움직임은 거대한 다중 형상 캔버스의 인상의 통합을 허용한다. 

전경의 인물은 브루니가 전체 크기로 그렸다. 
그는 캔버스에서 주인공을 골라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인물의 구성을 제시했다. 
작가는 각각의 이미지를 개별적으로 규정하고 일반 서사에서 고유한 성격과 역사를 부여했다. 
몇몇 캐릭터는 놋뱀과 함께 기둥 쪽으로 달려 갔다. 
두려움에 휩싸인 다른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탈출하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친척들을 애도한다.
그림의 중앙, 배경에서 주인은 서두르고 절박한 군중과는 매우 다른 사람들을 포착했다. 
이것은 예언자 모세이고 그의 조카는 대제사장 엘르아살이고 레위인은 제사장이다. 
그들의 수치는 자신감, 평온함, 강력한 힘을 표현하여 처벌하고 구원을 가져온다.

브루니는 1824년에 첫 번째 스케치를 만들고 1841년에야 이 작품을 완성했다. 
'The Brazen Serpent'는 러시아 역사 회화 장르에서 가장 큰 그림이다. 
이 작품의 크기는 폭 8.5m, 높이 5.6m에 달했다.
면적은 약 48㎡이고 작품의 무게는 거의 70kg이다. 
이 작품은 러시아 박물관 컬렉션에서 가장 큰 그림이다.
이 작품은 브률로프(K. P. Bryullov)의 "폼페이의 최후의 날" 만큼이나 인기가 있었다.

 

Death of Camilla, Sister of Horatius, 1824. by Fyodor A. Bruni. oil on canvas. 350 x 526.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 작품은 23세의 표도르 브루니 (Fyodor Antonovich Bruni 1799~1875)가 
로마와 알바 롱가(Alba Longa) 시의 전설적인 전쟁을 묘사한 그림이다. 
고대 로마 전설에서 로마와 알바 롱가(Alba Longa) 시 사이의 전쟁 중에 
로마 쪽에서 온 호라티이(Horatii)의 세 형제와 알바 롱가 쪽에서 온 

쿠리아티이(Curiatii)의 세 형제로 구성된 두 그룹이 각 진영을 위해 싸워야만 했다. 

호라티이 형제 진영은 쿠리아티이 진영을 물리치고 승리했지만 형제들 중 하나만 살아 남았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승리자 호라티우스(Horatius)가 로마로 돌아오고 
그의 여동생 카밀라(Camilla)를 만난다. 
그러나 호라티우스의 여동생 카밀라가 죽은 쿠리아티이 중 한 명과 
비밀리에 약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호라티우스는 애국심보다 
개인적인 사랑을 더 중요시했다는 데에 화가 나서 여동생 카밀라를 죽였다.

하지만 호라티우스의 영웅적 행동은 주변 사람들의 존경심이 아니라 
여동생 카밀라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 일으켰다. 
호라티우스는 그의 동료와 시민들 사이에 비극적인 오해가 생기고 외로운 처지에 빠진다.
표도르 브루니가 그린 "호라티우스의 승리"라는 이름의 이 작품은 
동시대 사람들이 "호라티우스의 여동생 카밀의 죽음"이라고 다르게 불리게 되었다.

 

Socrates Defending Alcibiades at the Battle ot Potidae, 1828. 

by Pyotr V. Basin. oil on canvas. 286 x 359.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표트르 바실리에비치 바신 (Pyotr Vasilievich Basin 1793~1877)은 

러시아의 종교, 역사 및 초상화 화가였다. 
그는 또한 제국 예술아카데미(Imperial Academy of Arts)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1813년 표트르 바신은 바실리 셰부예프 

(Vasily Kuzmich Shebuyev 1777~1855)의 학생으로 입학했다. 
졸업 후, 표트르 바신은 로마에서 11년 동안 유학을 했는데
그곳에 있는 동안 라파엘의 작품을 복사하고 거의 100점에 달하는 
자신의 그림을 그렸으며, 그 중 상당수는 신화적 주제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또한 시골의 풍경화가 중 한 명인 

실베스터 쉬드린(Sylvester Shchedrin 1791~1830)을 포함하여 초상화를 만들었다.

1830년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후 차르 니콜라스 1세가 프로젝트 작업을 위해 

소환된 그는 이 작품 "포티데아 전투에서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를 구하는 모습
(Socrates Defending Alcibiades at the Battle ot Potidae)"의 작품으로 학자로 선정되었다. 
그림 자체는 로마에서 운반한 배가 파손되어 물에 손상을 입히고 
도착하자마자 복원해야 했기 때문에 약간의 훼손이 불가피했다. 

그 후, 그는 제국 예술아카데미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여 1836년에 교수로 임명되었다. 
표트르 바신은 1869년 명예교수 겸 국무원이 될 때까지 예술아카데미에서 지냈다. 
그는 교수 시절에 수많은 초상화와 겨울 궁전 복원을 위한 우화적 장면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성 이삭 대성당의 40개의 그림과 아이콘이 포함되어 있다. 
표트르 바신은 진행성 안구 질환으로 인해 은퇴해야 했고 

1870년 말까지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포티데아(Potidae) 전투는 BC 432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직전 전투에 관한 것으로 기원전 430년에 아테네와 코린토스와 포티데아의 연합군과 
그들의 다양한 동맹군 사이에서 포티데아 근처에서 싸웠다.
이 전투에서 알키비아데스(Alcibiades)는 부상을 당했고, 소크라테스(Socrates)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알키비아데스의 생명과 무기를 보호하고 구했다. 
이 작품으로 표트르 바신은 1831년에 학자의 칭호를 받았다.

 

Faun Marsyas Teaches Olympus to Play the Flute, 1821. 

by Pyotr V. Basin. oil on canvas. 185 x 139,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표트르 바신 (Pyotr Vasilievich Basin 1793~1877)은 

19세기 전반의 학문적 그림을 대표하는 저명한 화가이다.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업적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성 이삭 대성당의 그림이었다. 
이 그림의 주제는 당시 러시아에서 유행했던 고대 그리스 신화의 장면이었다. 

한때 프리기아(Phrygia)의 들판을 헤매던 파운 마르시아스(Faun Marsyas)는 

리드 플루트(reed flute)를 발견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플루트를 연주하는 것이 그의 신성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손상시킨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아테나(Athena) 신에게 버림을 받았다. 
아테나는 자신의 발명품을 저주하며 이 플루트를 들고 연주하는 사람은 
누구나 엄한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테나의 뜻을 알지 못했던 마르시아스(Marsyas)는 플루트를 들고 

연주하는 법을 배워 모두가 이 음악을 듣게 되었다. 
마르시아스는 그의 재능의 힘을 믿었기 때문에 

음악의 수호성인 아폴로(Apollo)와의 경쟁에 도전했다. 
대담한 도전에 분노한 아테나는 마르시아스를 나무에 매달고 가죽을 벗기라고 명령했다. 
마르시아스의 피부는 프리기아(Phrygia)의 동굴에 매달려 있었고 

나중에 리드 플루트의 소리가 그 자그마한 동굴에 도달했을 때 

춤을 추는 것처럼 항상 움직이기 시작했고, 
시타라(cithara)의 장엄한 소리가 들렸을 때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Susanna Caught by the Elders in her Bath, 1831. 

by Grigory I. Lapchenko. oil on canvas. 202 х 150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두 명의 장로들이 수산나(Susanna)라는 젊은 기혼 여성의 목욕하는 모습을 염탐하고 있다. 
장로들은 수산나를 염탐하고 그녀에게 성적인 호의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남자들은 그녀의 명성을 망치겠다고 위협했지만 수산나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두 노인은 수잔나를 간음죄로 거짓 고발했다. 이는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이다. 
그러나 다니엘이라는 젊은 히브리 선지자 덕분에 그녀는 결백을 입증하게 되었고
거짓 증언을 한 장로들이 처형되었다. 

이 주제는 수산나의 겸손과 충실함의 미덕을 예시하면서 
16세기 유럽 미술에서 비교적 종종 인용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예술가들이 종종 남성 후원자의 즐거움을 위해 
여성 누드 묘사에 자신의 기술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수산나의 모델은 이탈리아의 미녀였고 가난한 와인 메이커인 
알바노-비토리아 칼도니(Albano-Vittoria Caldoni)의 딸로 나중에 작가 
그리고리 랩첸코의 아내가 된 칼도그노 비토리아(Caldogno Vittoria)였다. 
그녀의 부모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딸이 화가에게 포즈를 취하도록 허용했다. 

칼도그노 비토리아는 알렉산더 이바노프(Alexander Ivanov)를 비롯하여
세계 최고의 예술가들의 모델이 되어 유명해졌다.
그녀의 초상화는 노인이 된 괴테에게 보내지기도 했다.

그리고리 이그나티예비치 랩첸코 (Grigory Ignatyevich Lapchenko 1801~1876)는 
러시아의 예술가, 역사적 회화, 초상화 작가였다.
그는 우크라이나 코사크 이그나티 바실리예비치 라파(Ignaty Vasilyevich Lapa)의 아들이다. 
그림에 대한 그리고리 랩첸코의 조숙한 재능을 알아 본 보론초프(N. S. Vorontsov) 백작은 
그가 공식적인 예술 교육을 받도록 도움을 주었다. 

1822년 제국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이바노바(AI Ivanova)의 
지도 아래 역사 회화 수업을 받고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이탈리아로 유학을 갔다.
그는 러시아 및 이탈리아 예술가들과 의사 소통을하며 이바노프(A. A. Ivanov)와도 매우 친해졌다.

1834년에 그리고리 랩첸코는 거의 시력을 잃었다. 
1839년 그는 왕세자 알렉산더 니콜라에비치가 획득한 그림 
"미완성 왼팔로 머리에 바구니를 들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로마에서 전시했다. 
같은 해에 모델 칼도그노 비토리아(Caldogno Vittoria)와 결혼하였고
1840년대 중반부터 키예프 지방의 모쉬니(Moshny) 마을에서 살았다. 
1842년 바로 이 작품 "Susanna Caught by the Elders in her Bath"으로 학자의 칭호를 받았다. 

 

Portrait of the Writer and Musician Princess Zinaida Alexandrovna Volkonskaya, 
née Princess Beloselskaya-Belozerskaya (1879–1862), 

Dressed as Tancred (from the Opera by G. Rossini), 1820. 
by Fyodor Antonovich Bruni. oil on canvas. 188 x 130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지나이다 볼콘스카야 (Zinaida Aleksandrovna Volkonskaya 1792~1862)는 

러시아의 작가, 시인, 가수, 작곡가, 미용사 및 공주였다. 
그녀는 19세기 러시아 문화 생활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아마추어 오페라 가수로 파리와 런던에서 공연했다.

지나이다 볼콘스카야는 토리노에서 러시아 대사인 
알렉산더 벨로저스키(Alexander Beloselsky-Belozersky) 왕자의 가족으로 태어났다.
지나이다는 러시아의 알렉산더 1세 황제와 가까웠는데, 

아마도 연인일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이런 소문을 막기 위해 지나이다는 1810년 알렉산더 황제의 보좌관인 
니키타 볼콘스키 (Nikita Grigorievich Volkonsky 1781~1844)왕자와 결혼했다. 

지나이다는 1817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1822년에 모스크바로 이사했다. 
1820년대에 지나이다는 모스크바의 트베르스카야 거리에 문학 및 음악 살롱을 개관했다.
폴란드의 시인, 극작가, 수필가였던 아담 미키에 비츠 (Adam Bernard Mickiewicz 1798~1855), 
러시아 최고의 사상 시인 예브게니 바라틴스키 (Yevgeny Baratynsky 1800~1844), 
러시아의 낭만주의 시인 드미트리 베네비티노프 (Dmitry Venevitinov 1805~1827), 
러시아 근대문학의 창시자 알렉산더 푸쉬킨 (Alexander Pushkin 1799~18387) 등은 
그녀의 집을 자주 방문했다. 
푸쉬킨이 그녀에게 보낸 "음악과 아름다움의 여왕"이라는 구절 서신은 잘 알려져 있다.

알렉산더 1세가 죽은 후 지나이다의 시동생 세르게이 볼콘스키 
(Sergei Grigorievich Volkonsky 1788~1865) 왕자는 후계자 니콜라스에 대한 
데카브리스트 혁명(Decembrist Revolt)을 이끌었다. 
데카브리스츠(Decembrists)들은 시베리아로 추방되었고 

그들의 아내는 그들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지나이다는 이 여성들을 위한 작별 파티를 열었고 

이 일로 인해 니콜라스 1세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또한 러시아 정교회에서 가톨릭교로의 비밀 개종자이자 
예수회 요원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심을 받았다.

이러한 압력으로 인해 1829년 지나이다는 로마로 이주했다. 
그녀는 아들과 아들의 교사인 스테판 셰비료프(Stepan Shevyrev 1806~1864)를 동반했다. 
로마에 있는 그녀의 숙소 중에는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트레비 분수의 배경 건물인 
팔라조 폴리(Palazzo Poli), 빌라 볼콘스키(Villa Wolkonsky) 등이 있다. 
지나이다 공주는 1830년대에 팔라조 폴리(Palazzo Poli)에서 

호화로운 파티를 연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녀의 살롱은 러시아 화가 칼 브룰로프(Karl Brullov)와 알렉산더 이바노프(Alexander Ivanov), 
덴마크의 유명한 조각가 베르텔 토르발드센(Bertel Thorvaldsen 1770~1844), 
이탈리아 화가 빈센조 카무치니 (Vincenzo Camuccini 1771~1844), 
프랑스 작가 스탕달 (Stendhal 1783~1842), 스코틀랜드의 시인, 극작가, 역사 소설가 
월터 스콧 (Sir Walter Scott 1771~1832)이 자주 방문했다. 
러시아의 대문호 니콜라이 고골 (Nikolai Gogol 1809~1852)은 지나이다의 빌라에서 
"죽은 영혼(Dead Souls)"의 많은 부분을 집필했다.

지나이다 볼콘스카야 공주는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트레비의 성도 빈센조와 아나스타시오(Santi Vincenzo e Anastasio a Trevi) 성당에 묻혔다. 
지나이다는 죽음 이후에 시성(beata) 되었다. 
그녀의 영문 전기 "지나이다 볼콘스키 공주의 생애 (A life of Princess Zinaida Volkonsky"는 
1998년에 등장했다.

 

[영상] Alexander Ivanov, Fyodor Bruni. Hall 15 in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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