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의 역사극장

파리강화회의 조선 대표가 모스크바로 간 이유는

딱 100년 전, 한민족 해방에 더해 ‘세계 대동’을 목적한 세계인 김규식
미국 워싱턴회의 대신 러시아 극동대회로 향해

극동민족대회 개회식 당시 단상에 자리잡은 의장단. 이 중에 김규식이 포함돼 있다. 임경석 제공

 

김규식(40)이 러시아어 신원 증명서를 발급받은 날은 1921년 10월27일이었다. 이르쿠츠크의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는 혁명단체 신한혁명당의 대표자 자격을 인증하는 서류였다. 그런데 날짜가 촉박했다. 대회 개막일이 그해 11월11일로 예정돼 있었다.1 불과 14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 기간에 중국 상하이를 출발해 시베리아의 동쪽 중심지까지 이동해야 했다.

 

서류는 손바닥만 한 천 조각에 작성됐다. 고려공산당 위원장 ‘Ман Гем Ким’(김만겸)의 러시아어 필기체 서명과 서기 ‘Pyengchanan’(안병찬)의 영어 필기체 서명이 쓰여 있고, 고려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붉은 직인이 찍혀 있었다. 깨알만 한 글씨였다. 러시아 국경을 넘기 전까지 일본군이나 백계 러시아군, 혹은 중국 군경의 예기치 않은 신체 수색의 위험을 넘겨야 했다. 또 소비에트러시아 영토에 진입한 뒤에는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어야 했다. 어떻게 휴대해야 할까? 지갑이나 호주머니에 지니는 것은 위험했다. 책갈피나 짐 속에 숨기는 것도 안전하지 않았다. 옷 솔기를 뜯어서 그 속에 넣고 꿰매는 방법이 가장 안전했다. 자그마한 천 조각으로 증명서를 만든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변장도 소용없는 밀정의 눈초리

 

다행히 혼자가 아니었다. 상하이 망명자 사회에서 출발하는 사람이 김규식을 포함해 16명이나 됐다. 대표를 보내는 단체는 신한청년당(1명), 독립신문사(2명), 화동(華東)한국학생연합회(2명), 대한애국부인회(1명), 이팔(二八)구락부(1명), 조선기독교 대표(1명), 고려공산당 중앙위원회(6명)와 상하이지부(1명), 고려공산청년회 상하이지부(1명) 등이었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를 근거지로 활동하는 조선인 망명자들의 단체였다. 이들은 서너 명씩 짝지어 출발하기로 협의했다. 지극히 위험하고 모험에 찬 여정이 그들을 기다렸다.2

 

김규식 일행은 셋이었다. 신한청년당의 동료이자 상하이 한인거류민단장인 여운형(35),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 중 2·8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중국으로 망명한 나용균(25)이 길동무였다. 여운형은 고려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임장, 나용균은 상하이에 망명한 일본유학생 단체 이팔구락부의 위임장을 소지했다.

 

처음에는 만주 경유 노선을 택했다. 철도를 이용하는 편리한 노선이었다. 상하이에서 톈진까지, 톈진에서 펑톈을 경유해 하얼빈까지, 하얼빈에서 만주리 국경을 넘어 러시아 영내로 진입하는 노선이었다. 그러나 산해관을 넘어 만주 권역으로 들어서면 일본 세력 범위였다. 산해관 이북 남만주철도에 탑승하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었다.

 

일행은 11월2일 철도로 북상했다. 여행길에 나선 중국인으로 변장했다. 그러나 열차 내부에 상주하는 밀정들의 눈초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중국옷을 입은 어떤 조선 사람’과 ‘양복쟁이 하나’가 일행을 주시하고 있음을 느꼈다. 다행히 만주에 진입하기 전 위험을 감지해, 산해관 진입을 포기했다. 두 번이나 시도했으나 마찬가지였다.

 

이르쿠츠크로 떠날 때 옷 솔기를 뜯어서 그 속에 숨겼던, 천 조각 위에 깨알같이 작성한 김규식의 신원 증명서. 임경석 제공

 

워싱턴회의 대항 차원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

 

길을 바꿔야 했다. 만주가 아니라 몽골을 경유하는 노선으로 변경했다. 베이징에서 장자커우를 지나 몽골의 사막지대를 뚫고 러시아로 입국하는 코스였다. 밀정에게 발각될 위험은 적지만 교통상 어려움이 컸다. 그뿐 아니라 치안도 불안정하던 때였다. ‘로만 표도로비치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남작이 이끄는 2만 명 규모의 러시아 백위파 군대가 붕괴된 직후였다.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혁명정부가 막 들어섰고, 각지에서 약탈을 일삼는 마적단이 출몰하곤 했다. 자동차를 임대하고, 연료용 휘발유를 넉넉히 준비해야 했다. 초겨울 사막지대의 혹한을 견딜 두꺼운 방한구, 긴 여행 중에 부패하지 않을 식료품도 비축했다. 예기치 못할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권총·소총 등 무기류도 준비해야 했다.

 

1921년 11월25일, 김규식 일행은 몽골~러시아 국경을 넘었다. 김규식은 극동민족대회 출석 대표자의 신원 조사서인 <조사표>에서, ‘합극도’(合克圖)를 거쳐서 입국했노라고 썼다.3 러시아명으로는 트로이츠코삽스크(Троицкосавск)라고 부르던,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와 베르흐네우딘스크(현재 울란우데)를 잇는 국경 소도시였다. 오늘날의 캬흐타(Кяхта)다. 당시 인구는 약 5천 명이었고, 오래전부터 러시아와 중국의 교역 중심지였다. 중국인이 이 도시를 매매성(賣買城)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거기 있었다.

 

11월11일 열릴 예정이던 대회 개막이 뒤로 미뤄졌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대표자들의 도착이 지체됐기 때문이다. 조선인 대표자 가운데 예정일까지 대회 장소인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사람은 16명이었다. 대표단 전체의 30%에 불과했다. 김규식 일행도 그랬다. 그들이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시점은 12월9일이었다. 예정보다 한 달 가까이 지체됐다. 이런 사정은 중국이나 몽골, 일본 대표단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부득이 개막일을 연기해야 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워싱턴회의의 진행 경과를 헤아리기 위해서였다. 극동민족대회는 처음부터 워싱턴회의에 대항하려 개최된 것이었다. 대회가 연기된 이유를 상하이 <독립신문>이 보도했다. “본월 11일 러시아령 이르쿠츠크에서 열리는 원동민족혁명단체총연맹 회의는 1개월간 연기하기로 되었다는바, 이는 아마 워싱턴회의에서 되는 결과를 보아 거기 적합한 대응책을 취하고자 함”이라는 것이었다.4 대회는 두 차례 연거푸 연기됐다. 워싱턴회의(1921년 11월12일∼1922년 2월6일) 종료에 즈음한 시기로 옮겨졌고, 대회 장소도 궁벽진 시베리아가 아니라 소비에트러시아의 수도에서 열리는 것으로 변경됐다. 그리하여 1922년 1월21일부터 2월2일까지 코민테른 주최로 모스크바에서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1921년 12월10일자로 이르쿠츠크에서 극동민족대회 대표자 김규식이 작성한 신원 조사서 <조사표>. 임경석 제공

 

중국어·영어는 능숙, ‘법·덕·아·일’은 ‘약간’

 

대회 개막 일주일 뒤인 1월27일 현재, 조선 대표단은 54명이었다. 이는 결의권을 가진 전체 대표자의 43%에 이르는 수였다. 중국 대표단 37명, 몽골 대표단 14명, 일본 대표단 13명에 견주면 두세 배 되는 규모였다. 극동민족대회 대표단 가운데 가장 수가 많고, 비중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조선 대표단 가운데 김규식의 존재가 두드러졌다.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대표로 파견돼 널리 이름을 떨친데다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장, 학무총장 등과 같은 고위직 출신이었다. 그는 조선 대표단의 단장으로 선출됐다. 외국어 능력도 고려했던 것 같다. <조사표>에는 “어느 외국말을 아시오?”라고 묻는 항목이 있다. 이 항목에 대해 김규식은 6개 외국어를 나열했다. 중국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일본어가 그것이다. 놀라운 재능이었다. 그중에서 중국어와 영어는 능숙했고, “법, 덕, 아(俄), 일” 네 개 외국어에는 ‘약간’이라고 단서를 달았다.

 

특히 영어를 잘 구사한다는 점이 중요했다. 대회의 공식 언어가 영어와 러시아어였기 때문이다. 대회를 취재한 미국인 기자의 취재에 따르면 200명 안팎의 대표 가운데 영어를 하는 사람은 30명이었고, 각국 대표단 가운데 적어도 누구 한 명은 영어를 알고 있었다. 조선 대표단 가운데 영어를 이해한다고 자임한 사람은 6명이고,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사람도 6명이었다. 김규식은 극동민족대회 전체 대표들 속에서도 주요한 역할을 맡았다. 대회 첫날 선출된 16명의 의장단에 포함됐고, 조선 대표단장 자격으로 본회에서 인사말을 했다.

 

김규식은 왜 모스크바로 갔을까? 그는 불과 1~2년 전만 해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조선 대표이자,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장이었다. 미국에 대한 외교활동을 조선 독립의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았던가. 옛 동료들은 여전했다. 상하이임시정부는 포고문을 발표해 워싱턴회의가 한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절실하고 중대한 생사의 문제’가 된다고 표명했다. 구미위원부도 한·일 양국의 대판결이 이뤄지리라는 기대감을 드러냈다. 서방 외교를 중시하는 망명자들은 1천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를 맞았다고 흥분했다.5 김규식은 달랐다. 그는 워싱턴회의로 향하지 않고 모스크바의 극동민족대회로 향했다.

 

김규식의 <조사표>에 흥미로운 문항이 있다. ‘목적과 희망’이라는 항목에 대해, 김규식은 “한민족 해방 급 세계 대동”이라고 답했다. 홍범도가 같은 항목에 대해 “고려 독립”이라고만 적은 것과 대비된다. 김규식은 조선 독립에 더해 ‘세계 대동’을 추가했다. 바로 세계 혁명의 이상이었다. 세계적 범위에서 억압과 착취를 배제하고 새로운 이상향을 추구한다는 점을 뚜렷이 했다.

 

김규식은 이즈음 사회주의를 수용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공산당에 입당했다. 대회에 참석한 이시당(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후보당원 명단에 이름이 보인다. 미국인 기자의 취재에 따르면 조선 대표단장 김규식은 사회주의자임을 자처했다.

 

모스크바에서 정신적·물질적 희망을 찾자

 

크렘린궁전에서 극동민족대회가 개막되던 날, 단상에 오른 김규식은 왜 모스크바에 왔는지 설명했다. 그는 미국과 러시아를 날카롭게 대비시켰다. 과거에 워싱턴은 민주주의와 번영의 중심지였는데, 모스크바는 전제군주제와 제국주의적 팽창의 표상으로 간주돼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역전됐다고, 그는 힘주어 강조했다. 모스크바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 운동의 중심지’로서 극동 피압박 민족의 대표자를 환영하는데, 워싱턴은 ‘세계의 자본주의적 착취와 제국주의적 팽창의 중심’으로서 존재하게 됐다는 것이다.6 그는 조선 대표단이 모스크바에 온 이유를 이렇게 천명했다. 하나의 불씨, 세계 제국주의·자본주의 체제를 재로 만들어버릴 불씨를 얻기 기대한다고.7 김규식의 이 연설은 회의장에 모인 140여 명의 대표자와 수많은 방청객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요컨대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와 구미위원부 경험을 통해 미국을 비롯한 서방에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정신적·물질적 희망을 찾지 못한다면 조선 독립은 불가능했다. 동시대 다른 많은 조선 사람이 그랬듯이, 독립에 대한 열망이 그에게 사회주의를 수용하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는 최후의 기대를 걸고 있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Удостоверение (Ким-кью-сик), no.41(김규식 증명서), РГАСПИ ф.495 оп.154 д.178 л.14.

2. 임경석, ‘극동민족대회와 조선대표단’, <역사와현실> 32, 한국역사연구회, 1999년

3. 김규식, <조사표> 1921년 12월10일. РГАСПИ ф.495 оп.154 д.178 л.13

4. ‘일쿠스크회의 연기’, <독립신문> 1921년 11월26일

5. 임경석, ‘워싱턴회의 전후 한국 독립운동 진영의 대응’, <대동문화연구> 51,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80~281쪽, 2005년

6. Речь от Ким-Гюсек [Пак-Киен](김규식[박경]의 연설), РГАСПИ ф.495 оп.154 д.159, л.18

7. 高屋定國·辻野功 譯, <極東勤勞者大會,議事錄全文> 東京, 合同出版, 37쪽, 1970년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임경석의 역사극장

일본 경찰과 밀정을 피할 ‘암호’를 만들라

비밀결사 조직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김재명의 결심
교신 위해 한글·아라비아숫자 조합해 해독 어려운 암호 만들어내

 

체포되고 한 달쯤 지난1928년 8월11일 초췌한 모습의 김재명. 경기도경찰부 형사과에서 촬영. 임경석 제공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회 책임비서 김재명은 우편물을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각 도 위원회 책임자와 원거리 교신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식민지 통치기구가 관장하는 우편제도를 활용하는 것은 비밀결사 간부로서 위험한 행위였다. 교신하려면 안전을 보장하는 두터운 장치가 필요했다. 무엇보다 믿을 만한 통신 연락장소가 있어야 했다.

 

그런 곳을 포스트(Post)라고 불렀다. 각 도에 하나씩 포스트를 세웠다. 예를 들어 경기도 포스트는 ‘경성부내 조선지광 잡지사’였고, 함경남도는 ‘함남 덕원군 적전면 당하리 장명강습소 박조산 앞’이었다. 국외 조직에도 포스트를 뒀다. 만주총국 포스트는 ‘용정촌 대성중학교 내 우광섭 앞’이고, 일본총국은 ‘도쿄시 간다구 니시키초 3-12 나이토가타 장심덕 앞’이었다. 국내외 각지에 모두 14곳의 포스트가 설립됐다.1 그곳에 우편물이 도착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도위원회 책임자에게 전달되도록 조직을 꾸렸다.

암호 통신문은 사용 뒤 곧바로 소각

 

포스트만으로 부족했다. 안전을 보장하려면 또 하나의 장치가 있어야 했다. 암호였다. 당사자만이 알아볼 수 있는 언어로 통신문을 작성할 필요가 있었다. 예기치 않게 문면이 노출되더라도 쉽사리 판독돼서는 곤란했다. 그래서 통신문은 암호로 작성하되, 사용 뒤에는 곧바로 소각하기로 약속됐다. 발각될 단서를 남기지 않도록 보안장치를 겹겹이 수립했다.

 

어떻게 암호체계를 짤 것인가? 김재명 책임비서는 이 고난도의 과제를 다른 곳에 맡기지 않았다. 맡길 곳도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직접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결국 조선인이라면 쉽게 제작·판독할 수 있는 체계를 고안했다. 동료 강진과 협의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의 암호체계는 조선어 자모 구성에 입각했다. 한글 자모음 24글자와 아라비아숫자 9개를 네 유형으로 대응시켰다. 한글 자모를 사용한 만큼 일본인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어려운 체계였다. 정보 분석관이나 암호해독 전문가가 조선어를 잘 알지 못하는 일본인이라면 판독하기 곤란했을 것이다.

 

김재명의 암호체계는 조선어 문장을 숫자로 치환했다. 한글 자모를 숫자에 대응시키는 논리적 알고리즘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함경남도 도위원회 책임자 박문병에게 “속히 상경하라”고 지시하는 메시지를 보낼 일이 생겼다고 하자. 통신문 속에 “7355614782 97486861544147516448”이라는 수열을 표시하면 그만이었다. 어떻게 이런 대응관계를 만들었을까.

 

첫째, 숫자판을 만들었다. 김재명은 종횡으로 각 10행씩 선을 그었다. 그렇게 바둑판 모양의 숫자판을 만들고, 맨 윗줄과 맨 왼쪽줄에 1부터 9까지 숫자를 적었다. 가로줄은 올림 순서로, 세로줄은 내림 순서로 적었다.

 

둘째, 열쇳말을 만들었다. 세 음절로 이뤄진 열쇳말을 정해, 교신 당사자끼리 공유했다. 예컨대 공청 중앙부와 함남도위원회 사이의 교신 열쇳말은 ‘금강산’이었다. 이 열쇳말에서 중요한 것은 음절이 아니라 ‘음소’였다. ‘금강산’은 ㄱㅡㅁㄱㅏㅇㅅㅏㄴ이라는 9개 음소로 분해되고, 각 음소는 숫자판의 첫 번째 세로줄에 차례대로 배치됐다. 한글의 자음과 모음이 어떤 순서로 쓰이는지는 교육받은 조선 사람에게 이미 상식과 같은 것이었다. 자음은 ㄱㄴㄷㄹㅁㅂㅅㅇㅈㅊㅋㅌㅍㅎ 순으로, 모음은 ㅏㅑㅓㅕㅗㅛㅜㅠㅡㅣ순으로 불리지 않는가. 이 순서대로 숫자판의 여백을 채우면 됐다.

 

김재명은 전국 각지의 산하기구와 통신하기 위해 네 개의 열쇳말을 만들었다. ‘금강산’은 강원도, 전라북도, 함경남도, 일본총국 위원회를 위한 것이었다. 그 외에 ‘백두산’(전라남도·충청남북도·함경북도), ‘남극성’(황해도·경기도·경상남도), ‘대동강’(평안남북도·경상북도·만주총국)이라는 열쇳말을 사용했다.

 

셋째, 말하려는 문장의 음소를 숫자판에서 추출하게 했다. 숫자판에는 한글의 자음과 모음 글자가 다 들어 있었다. 하나만이 아니라 둘 이상 포함됐다. 보기를 들어 ‘ㅅ’은 여섯 곳에 분포했다. 세로 9행과 가로 7행, 세로 8행과 가로 9행, 세로 7행과 가로 3행, 세로 6행과 가로 7행, 세로 3행과 가로 1행, 세로 1행과 가로 6행에 있었다. 이 중에서 아무것이나 임의로 선택해도 좋았다. 세로 7행과 가로 3행이 마음에 드는가? 그렇다면 암호 통신문 발신자는 73을 선택하면 그만이었다.

 

김재명이 책임비서 자격으로 서명한 1928년 4월8일자 국제공청 대표 강진의 신임장. 임경석 제공

 

숫자판·열쇳말·음소 조합, 탁월한 암호

 

이처럼 암호화 과정에는 불규칙하고 우연적이며 비논리적인 속성이 포함됐다. 이 점이 김재명의 암호화 알고리즘에 내재하는 탁월성이었다. 이 속성은 추적을 허용하지 않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작용했다. 난수표에서 논리적 연관을 추출해야 하는 암호해독 전문가에게 풀기 어려운 문제였다. 열쇳말과 숫자판의 비밀을 알지 못하고서는 어떤 우수한 전문가도 김재명의 난수표를 해독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김재명은 이 간명하고도 뚫기 어려운 암호 알고리즘 작성 능력을 어디서 얻었을까? 그의 교육 경력에 관해서는 광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거나, 유학 중인 재종형제들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서 중등교육을 이수했다는 견해가 엇갈린다. 의문을 해소할 확정적인 정보를 아직 얻을 수 없기에 단정하기는 곤란하지만 어느 쪽이든 중등 수준 교육을 이수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런 교육 경력에 더해 그의 타고난 재능과 천품이 암호체계의 개발 능력을 가져다준 게 아닐까 생각한다.

 

김재명이 비밀결사의 중앙부 핵심으로 부상한 것은 1928년 2월 조선공산당 제3회 대회에서였다. 서울 근교의 한 농가에서 은밀하게 열린 당대회에는 전국 각 도의 대의원 11명이 참석했다. 충남북을 제외하고는 각 도 대의원이 다 모였고, 중앙간부와 준비위원회 대표도 참석했다. 그중에서 김재명은 전남 대의원 자격으로 출석했다.

 

김재명은 이 당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회 7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1년 뒤 예정된 제4회 당대회 때까지 비밀결사를 이끌어갈 최고 집행부였다. 그는 이 집행부 첫 회의에서 고려공산청년회를 지도하는 책임자로 선임됐다.2 당규약에 따른 조처였다. 규약 제48조와 제49조에 따르면 공산당은 고려공청을 지도하며, 당 중앙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 고려공청 중앙집행기관 책임자를 맡게 돼 있었다.

 

이 비밀결사는 당 바깥 인사들로부터 ‘2월당’ 혹은 ‘엘(L)당’, ‘엘엘(LL)파’라고 불렸다. 1928년 2월 열린 당대회에서 출범했기 때문에 2월당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레닌주의 동맹’이라는 당내 비공식 결사가 주도했다는 의미에서 엘당·엘엘파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이 명칭은 조선공산당이 1927년 말~1928년 초에 두 대열로 분열된 사실을 반영했다. 이들에 맞서는 또 하나의 대열을 ‘12월당’ 혹은 ‘춘경원당’, ‘서상파’라고 부르는 것에 대칭되는 이름이었다.

 

김재명이 공청 책임비서로 선임됐음을 보여주는 1928년 3월10일자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제1회 결의록. 임경석 제공

 

고향 뒷산 ‘음달’을 가명으로 사용

 

이 비밀결사의 최고위급 지도자는 어떤 사람들인가? 선거위원회에서 은밀히 선출된 위원 7명의 명단은 국제당 보고 문건에도 가명으로 표기됐다. “하균, 석철, 음달, 양명, 임두우, 금성, 한석”3이 그들이다. 이 중 ‘양명’만이 실명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가명이었다. 일본 고등경찰과 밀정의 조밀한 감시망이 깔렸던 일제강점기 서울 한복판에서 비밀활동을 수행하려면 꼭 필요한 조처였다. 과연 누굴까? 이 가명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밝히는 것은 연구사의 한 과제가 된다.

 

해결 방법이 있다. 코민테른 문서 여기저기에 산재한 가명 정보를 모으고, 뒷날 작성된 일본 수사기록과 대비해 살펴보는 것이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하균(차금봉), 석철(김한경), 음달(김재명), 임두우(안광천), 금성(이성태), 한석(한해) 등이었다. 이론에서나 실천력에서나 모두 쟁쟁한 사람들이었다.

 

김재명의 가명에 눈길이 간다. ‘음달’(陰達)이라는 이름이 평범하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가명이든 본명이든 ‘그늘 음’ 자를 넣어서 이름을 짓는 건 드물었다. 무슨 뜻이 담겼을까? 그것은 고향과 관련됐다. 그의 출생지이자 성장기를 보낸 곳은 남해의 유명한 섬 거문도였다. 음달은 거문도 장촌마을의 뒷산 이름이었다. 음달산은 해발 233m에 달하는 자그마한 산이지만, 해발고도 0m에서 시작한 만큼 상당히 높고 지세가 험난했다. 낮은 산록에는 부모와 조상의 무덤들이 자리잡고, 정상에 올라가면 동서남북으로 탁 트인 망망대해를 조망하던 곳이었다. 그 뒷산 이름을 따서 비밀혁명운동의 가명으로 사용했다.4

 

책임비서 재임 몇 달 만에 경찰에 체포

 

비밀 간부로 재임하는 중에 줄곧 그랬던 것 같다. 1928년 3월10일자 당중앙 제1회 결의록, 3월15일자 제2회 결의록에는 예외 없이 ‘음달’이라는 이름이 기재돼 있다. 서명이 필요한 곳에는 영문 알파벳을 썼다. 필기체로 ‘DalUm’이라는 필적을 남겼다. 국제기관에 파견하는 대표 신임장에도 그 이름을 사용했다. 1928년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국제공청 제5차 대회에 고려공청 대표로 강진을 파견할 때, 그가 휴대할 신임장 서류에도 어김없이 그 이름을 사용했다.

 

뛰어난 암호체계를 독자적으로 개발할 만큼 명민했던 김재명의 재능은 고려공청 책임비서 직무 수행에도 발휘됐다. 김재명이 재임했던 1928년 전반기 조선의 청년운동과 학생운동은 그와 무관할 수 없었다. 시군 단위 단일청년동맹 조직운동, 일본 유학생의 조선 순회강연 개최 캠페인, 전국 40여 개 중등학교에서 고조된 동맹휴학운동 등이 그 보기다. 하지만 김재명의 책임비서 직무수행은 1928년 7월13일 갑작스레 중단됐다. 경찰에 체포된 것이다.5 그의 재능과 활동력이 충분히 꽃피기도 전에 들이닥친 일대 비극이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京畿道, ‘京高秘第8036号, 秘密結社朝鮮共産黨並に高麗共産靑年會事件檢擧の件’, 1928년 10월27일. 梶村秀樹·姜德相 共編, <現代史資料> 29, 東京, みすず書房, 134~135쪽, 1972년.

2.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책임비서 河均, <중앙집행위원회 보고>, 1928년 3월15일, 1쪽,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56 л.66-68

3. 선거위원회 대표 이경호, <제3회 당대회 선거위원회 보고>, 1928년 2월28일, с.1,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56 л.107

4. 음달이 거문도 장촌마을 뒷산에서 유래한다는 정보는 김해 김씨 사군파 문중 대표 김영식 선생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김재술 편, <김해 김씨 사군파 계보 및 유적록>, 1969년 8월 참조.

5. ‘익선동을 포위, 청년 1명 검거’, <중외일보> 1928년 7월16일.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임경석의 역사극장

냉전시대 명변론의 대가는 처절했네

‘위조지폐 사건’ 검찰의 유죄 소견을 뒤엎은 김용암 변호사,

변론 이후 합법적 생활 포기하고 러시아행

 

김용암 변호사의 최후 변론을 보도한 <독립신문> 1946년 10월25일치 기사. 

작은 표제 속의 ‘김변호인’이란 김용암을 가리킨다. 임경석 제공

 

*제1420호 ‘위조지폐 사건의 진실 다툰 조선 변호사 김용암’에서 이어집니다.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2255.html

 

정판사 사건 제25회 공판이 열린 1946년 10월24일, 김용암 변호사는 최후 변론에 나섰다. 사흘 전에 피고인들이 중형을 구형받은 뒤 처음 열리는 공판이었다. 구형량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담당 검사는 피고인 열 사람 가운데 넷에게는 무기징역형을, 셋에게는 15년형을, 남은 셋에게는 각각 10년형을 구형했다. 방청석의 피고인 가족들 속에서는 탄식과 함께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오전 10시를 조금 넘긴 때 시작된 김용암의 변론은 오래 계속됐다. 점심시간마저 훌쩍 건너뛴 오후 2시까지 피고인들의 무죄를 논하는 열변이 이어졌다. 이 최후 변론은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열렬하고도 장쾌한 명변론”이었으며, “듣는 사람에게 큰 흥미와 감격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1

 

김용암의 러시아 모스크바 중앙당학교 유학 시절 성적표. 임경석 제공

 

왜 특정 시점 이후, 피고인들의 진실이 일치할까

 

김용암 변호사의 변론은 검사의 유죄 소견을 논박하는 내용으로 이뤄졌다. 그는 가장 먼저 자백의 임의성 문제를 제기했다. 고문과 유도심문에 의거해 얻어진 자백은 증거능력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방대한 조서 기록 안에 앞뒤 모순된 사실이 기재됐음을 지적했다. 위조지폐 인쇄 횟수, 발행 금액, 참가 인원 등과 같은 사실관계를 둘러싸고 여러 피고인의 진술 내용이 다 다른데 특정 시점 이후 일치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각 피고인의 진술도 조서 작성 회차마다 달라졌음을 지적했다. 고문이 이뤄지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피고인들도 호응했다. 경찰의 고문 사실을 법정에서 과감하게 폭로했다. 고문 장소는 서울 본정(중부)경찰서였고, 고문 행위는 그해 5월7일부터 11일까지 닷새 동안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위조지폐 수사를 공산당에 연루시키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집단 폭행, 물고문, 비행기 태우기, 장시간 무릎 꿇고 의자 들기, 협박과 유도심문 등이 이뤄졌다. 피고인들은 혹독한 고문 양상을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김창선은 “긴 널판의자에 눕힌 후 포승으로 포박하고 장시간에 걸쳐 약 두 되가량 드는 주전자에 채운 물을 코와 입으로 부어” 넣는 고문을 겪었다. 또 “포승줄로 두 어깨를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묶어 약 30분 내지 한 시간 동안 매달아서 손끝의 혈액순환이 정지되어 시퍼렇게” 탈색되기도 했다. 피고인 신광범은 “나는 일제시대에도 고문을 당해본 경험이 있으나, 이렇게 계속적으로 혹독한 고문은 못 보았다”고 술회했고, 박상근은 “기가 막히고 억울하오. 경찰서에서 죽을 줄 알았는데 이와 같이 살아나온 것은 기적”이라고 말했다. 송언필은 “5월7일 검거당한 이래 10일 밤까지 만 4일 동안 밥 한술 안 먹고 계속적으로 고문당하였다”고 고발했다.2

 

김 변호사가 제기한 또 하나 역점 사항은 검찰 쪽 증거의 증명효력 문제였다. 검찰이 제시한 위조지폐 제작의 물증은 열 가지였다.(증거 제1, 2, 3, 35, 40, 41, 42, 43, 45, 47호) 김용암 변호사는 그 증명효력을 낱낱이 분석했다. 이 중 네 가지(제41, 42, 43, 47호)는 종이와 잉크류인데, 어느 인쇄소에서든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서울 시내에만도 20여 곳에서 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정판사가 인쇄소임을 증명하는 데만 유용했을 뿐이다. 다음으로 크고 작은 징크판이 문제였다. 징크판이란 화폐를 찍어내는 아연 재질의 인쇄기 부품을 가리키는데, 이 징크판 12개로 이뤄진 다섯 가지(제1, 2, 3, 35, 40호) 증거는 별건의 범죄사실인 ‘뚝섬 위폐 사건’의 증거품이지, 정판사와는 무관했다. 마지막으로 증거 제45호(백원권 위조지폐 33장)는 정판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인쇄됐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당시 서울에서 유통되던 9개의 상이한 원판으로 찍은 40종류의 백원권 위조지폐 가운데 일부였다. 이 물증은 피고인들의 유죄를 확증하는 것이 아니라, 수사와 재판이 증거주의를 심각히 위배함을 보여줬다.3

 

김용암이 숨진 사실을 전하는 메모.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РГАСПИ) ф.495 оп.228 д.808 л.2 임경석 제공

 

한반도 냉전의 시작을 알린 정판사 사건

 

김용암 변호사의 변론 중 세 번째 요점은, 공산당이 과연 위조지폐를 실제로 사용했는가 하는 문제였다. 검찰이 제시한 증거 중에는 미군 방첩대(CIC)가 조선공산당 본부를 압수수색할 때 적발한, 1945년 11월24일에서 1946년 5월14일까지의 재정 장부가 포함됐다. 여기에는 재정부장 이관술 명의로 차입된 28회의 수입 내역이 적혀 있었다. 검사는 이 28회의 입금 내역을 유죄의 증거라고 간주했다. 그러나 김용암은 이 주장도 효과적으로 논박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입금 합계액이 수백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검찰이 주장하는 위폐 총액 1200만원과 너무 거리가 멀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28회 입금액은 대다수 기부금이었다. 기부자들은 자신의 실명이 알려지는 것을 꺼렸으므로, 그들의 명의는 당연히 기록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 외에 검찰의 주장을 논박하는 세부적인 논점이 더 있었다. 위조지폐 인쇄일로 지목된 6개 날짜에는 야간 인쇄가 불가능했다거나, 위조지폐 제작을 모의했다는 정판사 사장 박낙종의 알리바이를 입증할 수 있다는 등의 논점이 그것이다.

 

김용암은 검사의 유죄 소견이 전부 논파됐다고 자부했다. 이제 검사가 해야 할 일은 ‘공소’를 모두 취소하는 것이었다. 만약 취소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검사가 “논리의 지배를 받는 게 아니고, 한 가지 목적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고 단언했다.4

 

정판사 사건은 한반도에서 냉전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이끌어낸 힘은 파시즘에 반대하는 국제적 연대였고, 8·15 해방은 그 소산이었다. 이 국제적 연대는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지속됐으나 존속 시기가 너무 짧았다. 불과 9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정판사 사건이 일어난 1946년 5월은 냉전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김용암은 정판사 사건을 수임한 9인 변호인단 가운데 선두에 섰다. 그는 유능한 변호사였다. 그의 변론은 검찰의 유죄 소견 근거를 완전히 뒤엎었다. 순수하게 법리적 관점에서 본다면 정판사 사건은 무죄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변론의 대가는 컸다. 공산당의 위신을 추락시키려는 음모에 앞장서 맞선 까닭에 그는 합법적 생활을 포기해야 했다. 미군정 경찰의 체포망을 피해 1946년 12월부터 지하생활로 숨어들었다. 도피 생활은 근 1년간 계속됐다. 경찰의 추적은 갈수록 집요해졌다. 1947년 8월에는 ‘남로당 계열의 8·15 폭동 음모 사건’의 7인 지도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목되기까지 했다.5

 

‘올 A+’ 모스크바 유학 생활

 

김용암은 결국 비합법적 도피 생활을 접고 38선 이북으로 올라갔다. 자필 이력서에는 그가 맡았던 직위와 책임에서 벗어난 때가 한결같이 ‘1947년 11월’이라고 적혀 있다. 보기를 들면 법학자 동맹 조직부장 재임 기간은 1946년 1월에서 1947년 11월까지이고, 남로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상무위원, 정치위원 재임 기간은 1946년 12월부터 1947년 11월까지였다. 민주주의민족전선 지방선거강령실천대책위원회 지도책임을 맡은 기간도 1947년 2월부터 11월까지였다. 월북 시점이 바로 그때였음을 보여준다.

 

홀로 월북했던 것 같다. 가족으로는 아내 윤명숙과 12살, 5살 난 어린 딸들이 있었다. 이들 ‘서울시 중학동 41의 1번지’, 광화문 의정부터 뒤편에 있는 도심 속 주택가에 살고 있었다. 가족을 두고 단신으로 월북한 배경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소련 모스크바에 있는 중앙당학교 유학생으로 추천됐기 때문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39살로, 이미 대학 교육을 마친 인텔리였다. 더욱이 이미 당 중앙의 상무위원이자 정치위원에 재임 중인 핵심 간부였다. 그럼에도 유학생에 선발된 것을 보면 그에게 거는 당의 중망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최상층 지도자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당내 미래 인재로 지목됐던 것 같다.

 

평양에 도착한 김용암은 모스크바 유학을 위한 예비학교에 입교했다. 용강군에 있는 ‘평양학교’에서 6개월간 러시아어를 배웠고, 뒤이어 평원군의 ‘송석학원’으로 자리를 옮겨 러시아어 학습을 계속했다. 그즈음 그의 러시아어 구사 능력은 높지 않았던 것 같다. 자신의 외국어 능력을 묻는 설문에 답하기를 ‘일본어 강, 영어 중, 러시아어 약’이라고 적었다.

 

모스크바 유학은 1948년 8월부터 1950년 6월까지 계속됐다. 원래 4년 예정의 대학교 교육과정이었는데, 6·25전쟁이 일어나 중단된 것으로 판단된다. 중앙당학교의 성적표가 남아 있다. 김용암의 학업 성취는 눈부셨다. 2년의 수학 기간 중 도합 14개 과목을 수강했는데, 그중에서 시험 점수가 명시된 12개 과목에서 5점 만점을 받았다. 오늘날과 비교하면 ‘올 A+’를 맞은 셈이다. 교과목 제목을 훑어보자. 자본주의 정치경제학, 사회주의 정치경제학, 변증법적 유물론, 역사적 유물론, 소련사, 현대사, 소련 국제관계와 대외정책의 역사, 법과 소비에트 건설, 소련경제론, 소련공산당사, 당건설론, 러시아문학, 러시아어 등이었다. 혁명운동의 이론과 정책을 다각적으로 연구하며, 러시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유능한 사회주의자를 양성하는 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1951년 ‘사망’ 전언 메모를 마지막으로

 

모스크바 중앙당학교의 교무행정을 맡은 소련공산당 조사관 니콜라예프는 김용암의 유학 생활을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유능한 수강생임을 보여줬고,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을 터득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특히 소련공산당의 경험을 연구하는 데 큰 관심을 보였다고 적었다.6

 

모스크바 유학 이후 김용암의 행적에 대해서는 정보를 구할 수 없다. 그도 다른 유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에 휩싸인 고국으로 되돌아왔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떤 역할을 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유학 시절 김용암의 개인 기록을 보관하는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에 눈길을 끄는 메모가 있다. 중앙당학교 교무행정을 맡았던 니콜라예프의 필적이다.

 

1951년 8월25일 조선민주청년동맹 중앙위원장 김욱진 동무가 니콜라예프와 행한 개인적인 담화에서 전한 소식에 따르면, Ким Ен Ам(김용암) 동무는 1951년에 조선에서 사망했다고 한다.7

 

앞뒤 맥락에 관한 정보는 전혀 기재돼 있지 않다. 아마도 전쟁 중에 액운을 만났던 것 같다. 반일 학생운동의 지도자이고, 냉전에 맞서 정판사 사건의 진실을 향해 고투하던 법률가 김용암, 그 사람에 대해 좀더 깊이 알 기회가 또 오리라 기대한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변호사 변론 개시, 정판사위폐 건’, <조선일보> 1946년 10월25일

2.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한국외국어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67~169쪽, 2015년

3. 고지훈, ‘자료소개, 정판사사건 재심청구를 위한 석명서’, <역사문제연구> 20, 360~369쪽, 2008년 10월

4. ‘피고의 무죄를 주장’, <동아일보> 1946년 10월25일

5. ‘전율! 국제적 대폭동 계획’, <동아일보> 1947년 10월14일

6. Учебная характеристика на слушателя Корейсокой партийной школы Ким Ен Ам(중앙 당학교 학생 김용암 성적표),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808 л.5

7. Реферант Д.Николаев. Справка(확인서), 1951년 9월25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808 л.2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임경석의 역사극장

‘위조지폐’ 사건의 진실 다툰 조선 변호사 김용암

돋보인 논리적 변론 탓에 미군정 체포령… 도피 중에도 방대한 분량의 상고이유서 작성

 

김용암의 40살 때 모습. 1948년 러시아 모스크바 중앙당학교 유학 시절에 찍었다. 임경석 제공

 

해방 이듬해인 1946년 7월29일, ‘정판사 사건’ 제1회 공판이 열렸다. 서울 시내 정동에 자리잡은 지방법원 일대에는 새벽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재판을 방청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개정 예정 시간인 오전 9시가 되기도 전에 이미 군중은 수천 명에 달했다. 법원 정문(북문)과 후문(서문)에 인파가 운집했다. 법원으로 향하는 길에도 사람들이 들어찼다. 남대문로, 정동예배당, 덕수궁 대한문 앞까지 늘어섰다.

 

법원 안팎에 무장 경찰대가 삼엄한 경계망을 폈다. 기마대도 동원됐다. 수갑을 찬 피고인들이 트럭으로 호송돼 오자, 그를 목격한 군중이 점차 격앙됐다. “피고는 무죄다” “모략 재판을 분쇄하라” “재판을 공개하라”는 구호를 외쳤고, 해방의 노래와 혁명가를 불렀다. 급기야 군중의 압력으로 법원 출입문이 열렸다. 사람들은 물결처럼 법원 안으로 쓸려 들어갔다. 그때 총성이 울렸다. 무장 경찰대가 군중을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경동중학교 3학년생 전해련이 숨졌다. 탄환이 왼쪽 뺨을 뚫고 들어가 왼쪽 아래턱뼈를 부수고 뒷목 근육 속에 박혀 있었다고 한다. 또 현장에서 체포된 사람 가운데 50명이 미군 포고령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됐다.1

 

“공산당의 위조지폐 범죄” vs “도덕성 훼손하려 고문 조작”

 

이처럼 커다란 소용돌이를 일으킨 ‘정판사 사건’이란 도대체 어떤 사건인가? 그것은 조선정판사라는 명칭의 인쇄소에서 위조지폐를 발행했다는 혐의로 13명의 피의자를 기소한 사건을 말한다. 피의자 중에는 조선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 정판사 사장 박낙종 등 거물급 인사가 포함됐다. 미군정에 따르면, 이 사건은 조선공산당의 파렴치한 범죄였다. 공산당 중앙간부가 직접 나서서 당 경비를 조달하고 남한 경제를 교란할 목적으로 1200만원어치의 막대한 위조화폐를 만들어 유통했다고 한다.

 

그러나 피고인들의 주장은 달랐다. 이 사건은 공산당의 도덕적 위신을 추락시키려 날조한 것이며,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 외에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고 호소했다. ‘정판사 사건’의 피고인들을 대변하는 9명의 변호사가 있었다. 가나다순으로 하면 강중인, 강혁선, 김용암, 백석황, 오승근, 윤학기, 이경용, 조평재, 한영욱이 그들이다.

 

그중에서 김용암(金龍巖, 1909~1951)이 주목된다. 그는 변호인단 속에서도 두드러졌다. 4개월에 걸친 공판 투쟁에서 지도적 역할을 했다. 예컨대 최종 변론에 임하여 4시간 동안 17개 조항에 걸쳐 열변을 토했다. 그의 변론은 가장 상세하며 논리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적극적인 변론 때문에 그는 미군정 경찰의 체포령을 받았다. 1946년 12월부터 도피생활에 들어가야 했다.

 

그는 도피 중에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47년 2월에는 방대한 분량의 상고이유서(An Explanatory Statement for Appeal to the Superior Court for ‘Counterfeit Case at Jung-Pan-Sa’)를 작성했고,2 4월에는 <소위 ‘정판사 위폐사건’의 해부–반동파 모략의 진상을 폭로함>을 집필했다. 요컨대 그는 ‘정판사 사건’의 진실을 다투는 가장 적극적인 이론가였다.

김용암의 필적. 1948년 8월9일 작성한 <자서전> 첫 페이지.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에 보관돼 있다. 임경석 제공

 

29살에 조선변호사시험 합격

 

김용암이 변호사가 된 것은 1938년 7월 시행된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한 때부터였다. 합격자는 13명이었다. 이 중 조선 사람이 10명, 일본 사람이 3명이었다. 조선인 가운데는 뒷날 6선 국회의원을 지낸 윤길중, 대검찰청 차장검사직에 오른 소진섭, 대법원 판사 사광욱도 포함됐다.

 

시험은 3단계로 이뤄졌다. 맨 처음 예비시험을 치렀다. 지원자 256명이 응시했고 그중 28명이 합격했다. 예비시험이란 시국관을 테스트하는 것인데, 전문학교 수준의 학력을 요구했다. 그해 예비시험 문제는 ‘봉공의 정신을 논하라’ ‘시국하의 생활개선을 논하라’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골라 작문하라는 내용이었다.3 법률전문학교나 제국대학 예과를 졸업한 수험생은 예비시험을 면제받았다. 김용암도 예비시험 면제자였다. 일본 와세다대학 전문부 법률과를 졸업했기 때문이다.

 

2단계는 필기시험이었다. 민법, 상법, 형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국제사법, 경제학 등의 과목을 나흘에 걸쳐 응시했다. 예비시험 합격자 28명과 면제자 106명을 합한 188명이 시험을 봤는데, 13명이 합격했다.4

 

3단계 구술시험은 민법, 상법, 형법, 민사소송법 및 형사소송법 가운데 3과목을 치렀는데, 떨어진 사람은 없었다. 이 시험은 일종의 요식행위였던 것 같다. 요컨대 전체 응시자 가운데 상위 3.6%에 해당하는 사람만 최종 합격할 수 있었다. 바늘구멍이었다. 그 구멍을 통과한 몇 안 되는 사람 속에 김용암도 포함됐다. 29살 때의 일이었다.

 

<조선총독부관보> 제3469호(1938년 8월9일)에 실린 1938년도 조선변호사시험 합격자 명단. 김용암의 이름이 13명 명단 가운데 네 번째로 올라 있다. 임경석 제공

 

경성고보 시절 진보적 사회의식 싹터

 

김용암은 1년6개월간의 ‘변호사 시보’ 시절을 거쳤다. 변호사 시보란 1936년 개정된 ‘조선변호사령’에 의거한 제도인데, 개업 중인 기성 변호사 사무실에 출근해 그 근무방식을 관찰하며 실무를 익히는 수습 변호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고객 응대, 사건 수임, 법정 변론 등의 사무를 익혔다.

 

김용암이 변호사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개업한 것은 1940년 8월이다. 변호사는 안정적인 고수입과 사회적 영향력으로 각광받는 직업이었다. 1930년대 중반 변호사 평균 수입은 월 250원이었다. 같은 시기 다른 직업군의 경우를 보면, 신문기자 70원, 목사 50~60원, 금융조합 이사 70원, 식산은행원 95원, 판검사 초봉 100원 등이었다.5 그 시기 중상층 전문직종의 급여보다 세 배 정도 더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화문 동십자각 건너편 중학동에 변호사 사무실을 내고 해방될 때까지 변호사업에 종사했다.

 

김용암이 진보적인 사회의식을 갖게 된 것은 10대 후반 경성(鏡城)고등보통학교에 재학할 때였다. 함경북도 길주군 동해면 창촌리 양상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17살 되던 해에 경성고보에 입학했다. 고향에서 80㎞ 떨어진 객지였으므로 학비며 숙식·생활비 등으로 적지 않은 유학비가 들었지만, 부유한 종조부가 뒤를 댔다. 아버지가 9살 때 돌아가시고 유산이라고는 밭이 4천 평가량 있을 뿐이었다.6 홀어머니가 두세 살 터울의 어린 남동생과 누이를 거느리고 어렵게 살림을 이어갔다. 종조부의 학비 지원을 받은 것을 보면 김용암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했던 것 같다.

 

항일 동맹휴학·연합시위로 두 번 퇴학

 

경성고보는 그의 사상의 고향이었다. 5년간 재학 중에 두 번이나 퇴학당했다. 한 번은 3학년 되던 1928년 봄 일본인 교원 배척을 위한 동맹휴학 사건 때문이었다. 그는 주동자로 지목됐던 것 같다. 가장 높은 수준의 징계 처분인 퇴학을 당한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이듬해 봄 복학할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전 조선에 걸친 동맹휴학 퇴학생 복교령을 발령한 까닭이었다.

 

복학 1년 만에 또다시 퇴학 처분을 당했다. 이번에는 광주학생운동이 도화선이 돼서 발발한 전조선학생운동 때문이었다. 1930년 1월25일 한낮에 함경북도 경성고보와 경성농업학교의 연합거리시위가 벌어졌다. 경성 읍내 서문 밖에 두 학교 학생 1천 명이 집결해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시위운동에 나섰다. 8개의 대형 깃발이 앞장섰다. ‘광주학생사건의 실제 내막을 사회에 고하라’ ‘학원의 독립을 기할 것’ 등의 요구사항을 적은 깃발이었다. 시위대는 길거리에 ‘우리는 단결하자’고 쓴 격문과 태극기를 살포했다. 이윽고 경찰대가 긴급 투입됐고, 현장에서 학생 100여 명이 체포됐다.7

 

주목할 점은 운동 양상의 선진성에 있다. 연합거리시위는 학생운동의 가장 높은 수준의 운동 형태였다. 둘 이상의 중등학교가 연대해 동시에 거리에 진출해 시위운동을 전개하는 양상은 학생운동이 매우 발달한 곳에서만 나타났다. 1929년 11월3일과 11월12일 광주에서 두 차례 출현했고, 서울에서도 1929년 12월9일과 1930년 1월15~16일 두 차례 나타났다. 그 뒤로는 평양에서 1월21~22일 이 운동 양상이 나타났을 뿐이다.

 

더 놀라운 현상이 있었다. 도시 주민층이 호응하고 나선 점이다. 상인층이 움직였다. 시내 조선인 상점 대다수가 동맹 철시해 학생들에게 동정의 뜻을 표했다. 시위 이튿날에는 학부모를 중심으로 시민대회도 열렸다. 그 자리에서 학생들의 석방을 교섭하기 위한 대표단이 선출됐다. 그뿐 아니라 사상단체와 경성청년동맹 같은 사회단체도 움직였다. 학생시위에 호응하는 집회를 개최하려는 형세가 있었다. 이런 양상은 전국적으로도 보기 어려운 획기적인 것이었다. 3·1운동 이후 처음 표출된 현상이었다. 거대한 민중봉기로 나아갈 가능성을 갖는 징검다리 같았다.

 

학생운동 주도… 한 달 옥살이 뒤 일본 유학

 

놀라운 일은 또 있었다. 1930년 1월27일 경성고보 학생들이 또다시 거리시위를 감행했다. 한낮에 수십 명의 학생이 ‘전조선 학생을 석방하라’는 글씨를 쓴 붉은 깃발 8개를 앞세우고 만세를 부르며 경찰 주재소로 압박해갔다. 종이로 만든 태극기를 들었고 격문 수백 장을 살포했다. 제2차 거리시위를 조직할 만큼 놀라운 조직력과 용기를 지녔음을 보여준다.

 

김용암은 경성고보 학생시위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는 뒷날 작성한 이력서에서 자신과 함께 맹종호, 이홍우, 최청룡 등이 경성고보 학생운동을 이끈 조직자들이라고 술회했다.8 그는 학생운동에 참가한 대가로 경성고보생 31명과 함께 청진검사국으로 송치됐다. 그 후 청진형무소에 약 1개월간 갇혔다가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출옥했다.

 

그 후 김용암은 부유한 종조부의 경제적 후원을 받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교토 료요(兩洋)중학교를 거쳐, 와세다대학 전문부 법률과를 졸업했다. 그는 변호사가 된 뒤에도 청년 시절의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다.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나이에 함북 경성고보에서 익힌 사회의식을 줄곧 견지했던 것이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5년, 68~72쪽

2. 고지훈, ‘자료소개: 정판사사건 재심 청구를 위한 석명서’, <역사문제연구> 20, 2008년 10월

3. 전병무, ‘일제하 한국인 변호사의 자격 유형과 변호사 수입’, <한국학논총> 44,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2015년, 318쪽

4. ‘변호사시험 13명 합격’, <동아일보> 1938년 8월9일

5. 전병무, 앞의 글, 331~332쪽

6. 김용암, <자서전> 1948년 6월9일, 1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808 л.14-16об

7. ‘경성고보, 농교생 일시에 만세시위’ <조선일보> 1930년 1월27일

조선총독부 경무국, <光州學生事件及其ノ影響 其ノ二, 新學期開始後ニ於ケル學生事件裏面策動ノ狀況> 1930년 1월, 114쪽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8. 김용암, ‘간부리력서’, 1948년 6월9일, 4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808 л.12-13об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https://drive.google.com/file/d/1GSLIinp340KAR915iPVV3TH3z92myRzV/view

 

 ‘음악 영화’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클래식이든 대중음악이든, 개인이 주연이든 공동체가 주연이든 ‘음악 영화’는 대개의 경우 소외나 우울, 빈곤을 극복하고 마침내 행복을 찾는다는 스토리로 감동을 전한다. 기승전결의 구조가 명확해서 관객이 쉽게 공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음악 또한 아름답고 결말은 주로 해피엔딩이기 때문에 잠시나마 관객들에게 정신적 순화를 선물한다. 영화 ‘피아니스트와의 마지막 인터뷰’는 이 범주에 충실하다. 영화의 원제는 ‘CODA’이다. 음악과 관련해서 ‘coda’는 긴 연주곡의 마지막에 연주되는 종결부이다. 이 영화에서 종결부가 의미하는 것은 어느 날 무대 연주에 대한 공포증에 시달리게 된 노년의 피아니스트가 어떻게 자신의 우울과 공포를 극복하고 예술가로서의 삶을 승화 시키는가이다.
영화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열정’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의 연륜이 깊은 손을 클로즈업한 화면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렇지만 열정이라는 의미가 무색하게 피아니스트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열정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적이며 장면들은 유명 음악당이나 뉴욕의 센트럴파크, 남프랑스, 알프스 자락에 자리 잡은 스위스의 실바플라나와 같은 전원적 풍경들이다. 이 고전적이고 목가적인 풍광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세계적인 명망을 지닌 거장 피아니스트의 예술가적인 기품과 닮아있다. 그렇지만 세월의 흐름을 초월하는 음악이나 억겁의 시간을 안고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자연과는 달리 이 영화의 주인공인 헨리는 피해갈 수 없는 세월의 무게와 아내를 잃은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정신적 병이 있었던 사랑하는 아내를 헌신적으로 보살폈지만 아내는 스스로 삶을 끝냈기에 그의 슬픔은 더욱 깊었다. 또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피아니스트이지만 완벽한 무대 연주에 대한 압박감과 두려움은 어느 날 갑자기 그를 연주에 대한 공포로 몰아넣는다. 심지어 연주를 하려는 피아노의 검은 건반들이 사라져버리는 악몽을 꾸기도 하고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모인 기자들 앞에서는 공황상태가 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 처한 그에게 그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온 음악 평론가인 헬렌이 다가온다. 헬렌은 과거 피아니스를 꿈꾸었었지만 유명 콩쿠르에서 예선 탈락을 하고 난 이후 글을 쓰는 평론가가 되었다. 헬렌이 이 피아니스트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헨리의 훌륭한 실력이기도 하지만 과거 헬렌이 참가한 마스터 클래스에서 피아니스트에게 중요한 것은 ‘느낌’이라고 말할 만큼 깊었던 예술에 대한 그의 내면적 성찰이었다. 그토록 고매한 정신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피아노 연주 실력을 가졌던 그가 현재 처해있는 트라우마를 지켜보면서 헬렌은 어떻게든 그가 다시 훌륭한 연주자로 되돌아오도록 곁에 있어 준다. 

그러던 어느 날 헬렌은 헨리에게 자신이 콩쿠르에서 떨어지고 나서 머물렀던 자연에서 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던 바위를 보고 낙심을 털어내고 마음의 자유를 회복했던 순간을 회상한다. 헬렌이 이때 언급한 비유는 니체의 ‘영원 회귀’이다. 그녀는 영원 회귀는 무한 순환이 아니라 오랫동안 이어온 이야기와 시간을 묵묵히 안고 그 자리를 지키는 바위처럼 고난과 기쁨이 반복하는 삶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라고 헨리에게 설명한다. 그러면서 헬렌은 헨리에게 니체에게 영감을 준 스위스 호수와 산이 있는 한적한 산골 마을에서 당분간 휴식을 취할 것을 권한다. 헨리는 그녀가 권한대로 그곳에 머무르며 매일 긴 계곡물이 흐르고 멀리 눈 덮인 알프스 정상이 보이는 산길을 산책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또한 그곳에는 자연만이 아니라 그의 침울함을 조용히 지켜보는 중년을 넘어선 호텔의 프론트맨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존경하는 유명 피아니스트가 그 호텔에 묵게 된다는 것을 알고 그 일을 자원한 것이다. 어느 날 그는 “우리는 앞으로 무엇이 다가올지 절대 알 수 없다”고 말하면서 패색이 짙었던 헨리와 두던 체스 게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게임의 상황을 뒤집는다. 이 순간의 유쾌함으로 인해 헨리는 그동안 잊고 지냈던 웃음과 유머를 되찾게 된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헨리는 매일 지나치던 커다란 바위를 보는 순간 헬렌처럼 지난 과거의 슬픔이나 강박증적인 연주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된다. 자연의 생명력 속에서 에피파니처럼 삶의 의미를 체득한 헨리는 숲속 벤치에 잠시 앉아, 함께 자전거를 탈 때 헨리가 바퀴에 걸려 넘어질까 봐 한쪽 바짓단을 양말 속에 넣어주었던 헬렌의 행동을 떠올리며 조용한 미소와 함께 스스로 바짓단을 양말 속에 집어넣는다.
이제 용기를 다시 되찾은 헨리는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페달을 밟으며 예술가의 삶을 이어갈 것이다. 이것이 베토벤의 피아노 소타다 열정으로 시작하고 서정적이고 잔잔한 스카를라티의 건반 소나타 23번으로 마무리하는 피아니스트의 나이든 손의 연주가 전하는 메시지이다. 열정과 고요, 격랑과 잔잔함이라는 악상의 차이는 있지만, 그의 연주는 오랫동안 풍상을 견뎌온 바위와 같이 수많은 이야기와 시간을 품고 있는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삶은 살아 있는 생명력이고 그것이 헬렌이 말하듯 “사랑하는 관객을 위해, 자신을 위해 연주“를 계속해야 하는 예술가로서의 존재 가치가 될 것이다.
어쩌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주인공인 영화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는 멀리 떨어진 이야기일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영화의 이야기의 공감력은 노년층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이 겪는 삶의 어려움에 던지는 위로에 있다. 행과 불행이 반복되는 삶에서 묵묵히 자기 길을 가고 견뎌내는 것만이 자기다운 삶을 지켜내는 것이라는 위로 말이다.

 

임경석의 역사극장

백남운과 어깨 나란히 한 노동자 출신 역사학자 이청원

사회주의 시각으로 첫 조선 전체 역사 써… 3대 일간지에 동시 연재하기도

35살 때의 이청원. 1948년 러시아 모스크바 중앙당학교 유학 시절에 촬영했다. 임경석 제공

 

이청원(李淸源)은 백남운(白南雲)과 병칭되는 사람이다. 둘 다 사적유물론에 입각해 한국사를 체계화하려 한 식민지 시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였다. 1930년대는 ‘과학적 조선학’을 표방하는 신진 연구자가 다수 출현한 시기였다. 그 연구자들 속에서 둘은 항상 첫째, 둘째로 손꼽혔다.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영향력 있는 학술 단행본을 출간했다.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1933)와 <조선봉건사회경제사(상)>(1937)을 간행했고, 이청원은 <조선사회사독본>(1936), <조선독본>(1936), <조선역사독본>(1937)을 펴냈다. 이 저작들은 두 사람의 평판을 한껏 고조시켰다.

 

사회주의 조선 역사학의 쌍두마차

 

백남운의 첫 책은 한국사학사상 하나의 획을 긋는 사건이고, 조선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성립을 의미하는 징표로 간주됐다. 당시 민간 3대 신문이라 일컫던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는 앞다투어 출간 소식을 전했다. 또 여운형, 송진우, 백낙준 같은, 신문사 사장과 전문학교 교장으로 이뤄진 서울의 쟁쟁한 명사 20여 명이 출판 축하회를 열어줬다.1 백남운의 학문적 명성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

 

이청원의 첫 책이 지닌 의미도 그에 지지 않았다. <조선사회사독본>은 한국인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가 저술한 최초의 한국사 통사였다. 이청원도 “과학적 통사로서는 최초의 책”이라고 자부했다.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그는 일약 명사로 떠올랐다. 조선학계를 대표하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두 사람은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라는 점에서는 같았지만 차이점도 있었다. 무엇보다 저술의 주안점이 달랐다. 백남운은 역사발전의 세계사적 보편성 속에서 조선의 역사를 관찰했다. 그 결과 5권으로 이뤄진 거창한 조선사를 기획했고, 그중 제1권이 바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생애 첫 저작이었다. 그의 책은 학계 내부 소통에 중점을 둔 아카데미즘의 자장 속에 있었다.

 

그에 반해 이청원의 저술은 학계보다는 대중 사이 소통에 중점을 뒀다고 볼 수 있다. 신문과 잡지 등 언론매체 지면을 널리 이용했고, 단행본도 모두 ‘독본’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는 사실에 주목할 만하다. 독본은 교과서 형태로 출간된 텍스트면서, 동시에 ‘노동자·농민 대중의 계몽’을 위한 텍스트였다. 그의 책이 소수 지식인에게만 유통되고 읽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농민 대중의 의식화와 자기 주체화를 의도했음을 잘 보여준다.2

 

두 역사가의 학력과 사회적 직위도 달랐다. 백남운은 동경상과대학(현재 히토쓰바시대학)을 나온 일본 유학생 출신이고, 졸업 이후에는 조선으로 돌아와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그에 반해 이청원은 학력도 잘 알려지지 않았고, 일본에 체재하면서 사회주의 비밀운동에 종사하는 것 같다는 수군거림을 받았다.

 

이청원의 필적. 1948년 8월10일 작성한 ‘자서전’의 첫 쪽.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에 보관돼 있다. 임경석 제공

 

이청원의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

 

백남운에 대해서는 연구 성과가 많은 편이다. 그에 관한 연구는 두텁고 그의 저술과 삶, 사상은 비교적 자세히 밝혀졌다. 그와는 달리 이청원에 대한 관심은 크게 일지 않았다. 그에 관한 학문적 검토가 이뤄진 것은 최근 10년의 일이다. 히로세 데이조, 박형진, 홍종욱 등이 이청원 연구에 참여했다. 이분들의 연구 성과 덕분에 이청원에 관한 우리의 이해가 크게 확장됐다.

 

이청원은 문필이 뛰어난 사람이다. 앞서 거론한 세 도서 외에도 신문과 잡지를 매개체로 활발한 기고 활동을 했다.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식민지 시기에 그가 출간한 저서는 4권이고, 미디어 기고문은 도합 36건이었다. 저서는 모두 일본어로, 기고문은 3분의 1이 일본어로, 3분의 2는 조선어로 쓰였다.3 특히 1935년 말부터 1937년 말까지 2년간의 활동상이 눈부셨다. 미디어 기고문 대다수가 이 연대에 몰려 있었다. 심지어 1936년 1월에는 같은 시기에 3대 신문에 연재 기사 투고를 병행할 정도였다. <동아일보>에는 ‘조선인 사상에 있어서의 ‘아세아적’ 형태에 대하야’(전 5회)와 ‘작년 중 일본학계에 나타난 조선에 관한 논저에 대하여’(전 4회)를 연재했다. <조선일보>에는 ‘고전연구의 방법론’(전 3회)과 ‘시사소감’(時事小感·전 3회)을, <조선중앙일보>에는 ‘작년 조선학계의 수확과 추세 일고(一考)’(전 11회)를 기고했다. 눈길을 주는 신문마다 이청원의 이름이 도배돼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과거에는 이청원이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인텔리 출신으로 간주됐다. 연구가 활발하기 전에는 그랬다. 자연스러운 추정이었다. 미디어를 통한 저술 활동이 왕성했을 뿐 아니라 재일본 유학생들의 사회주의 비밀결사를 ‘지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일본으로 도항했으나 유학이 목적은 아니었다.

 

이청원의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였다. ‘이력서’에 따르면, 1923년(10살)부터 1929년(16살)까지 함경남도 풍산군 이인면 신풍리에 소재하는 풍산공립보통학교에서 배운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풍산공립보통학교는 1925년 개교했다는 총독부 기록이 있다. 왜 이러한 불일치가 생기는지는 확실하지 않다.4 여하튼 이청원은 중등학교 진학을 희망했으나 집안 형편이 허락하지 않았다. 가난한 부모는 아들의 공부하려는 정신을 높이 평가했지만 학자금과 도회지 유학 경비를 뒷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상급학교 진학 기도는 좌절됐다.

 

이청원의 첫 저작 <조선사회사독본>(도쿄 하쿠요샤출판, 1936) 표지. 임경석 제공

 

독서 통해 스스로 독립정신 갖게 돼

 

이청원은 도대체 어떻게 학식을 쌓았을까? 비결은 독서에 있었다. 그는 사회과학과 역사학에 큰 흥미를 갖고 있었다. 마치 빨려들듯이 그에 관한 책과 팸플릿을 탐독했다고 한다. 그의 술회에 따르면 보통학교 4학년 때 겪은 6·10 만세운동이 그에게 역사와 사회과학에 관한 관심을 일깨워줬다. 신문에 게재된 사건 관련 기사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조선 민족의 행복과 자유는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국을 독립시켜야만 얻을 수 있음을 이해했다. 13살 소년의 마음에 민족해방 사상이 일어났다. 이청원의 회고에 따르면 불꽃 일어나듯 타올랐다고 한다.

 

이청원은 사회과학 연구와 실천에 대한 갈망을 끝내 억누를 수 없었다. 17살 되던 봄에 그는 마침내 도회지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그가 선택한 곳은 일본 도쿄였다. 인구 499만의 대도시이자 일본제국의 수도 도쿄에 도착한 것은 1930년 5월이었다. 1934년 당시 서울 인구 39만 명에 견주면 도쿄 인구는 12배나 됐다. 처음 목격한 도쿄는 세계 대공황의 내습으로 위기 현상에 휘말려 있었다. 실업자는 나날이 늘고 혁명적 열기는 고조되던 때였다. 뒷날 이청원은 혁명운동의 격화가 눈에 보이는 듯이 강렬해서 크게 놀랐다고 회고했다.

 

청년 이청원은 생계를 위해 최하층 노동시장에 몸을 던졌다. 낫토 행상, 막노동, 고물상 등을 가리지 않았다. 그중 가장 중히 여긴 것은 토목건축 노동이었다. 건설 현장의 고된 육체노동을 다행히 감당할 수 있었고, 원하는 만큼 일자리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일용직 육체노동자가 밀집해 있기 때문에 노동조합운동을 전개하는 데도 유리했다.

 

이청원은 연구자이자 동시에 혁명운동가의 역할을 겸했다는 평을 받는다. 도대체 그는 어떤 지하운동, 비밀결사와 연관을 맺었을까. 이 의문을 종래에는 충분히 해명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제 당사자가 작성한 기록에 힘입어 명시적으로 인지할 수 있다. ‘자서전’에 따르면, 이청원은 도쿄에 도착한 지 불과 두 달 만에 노동조합운동에 가담했다.5 1930년 7월에 도쿄 토목건축노동조합 성서지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됐다. 노동조합의 하급 간부 직위에 오른 것이다.

 

1930년 도쿄 건너가 노조운동 시작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이청원은 성서지구를 거점으로 혁명운동 참가 범위를 동심원처럼 확장해갔다. 그해 11월에는 반제동맹에도 가담해 성서지구 위원직에 올랐다. 노동조합운동과 반제운동에서 보인 열성 덕분일까, 그는 1931년 2월에는 비밀결사 일본 공산당에도 가입할 수 있었다. 놀라운 일이다. 일본에 도항한 지 10개월밖에 되지 않은 18살 식민지 청년이 일본혁명운동의 총본산인 일본 공산당에 입당했으니 말이다. 그에 멈추지 않았다. 이청원은 공청(공산청년회)운동에도 발을 내디뎠다. 19살 되던 1932년 12월에는 일본공산청년동맹의 중앙부에도 진출했다. 중앙위원회 조사자료부 지도원으로 선임된 것이다.6 중앙위원은 아니지만 그 직할 아래서 조사업무의 고급 책임자로 일하게 됐음을 알 수 있다.

 

주목되는 점이 있다. 사회주의 비밀결사 내부에서 그가 담당한 직무는 조사였다. 혁명운동의 주·객관 조건에 관련된 정보의 수집과 분석이 그가 하는 일이었다. 풍부한 독서에 더하여 논리적인 언변과 문필력이 뒷받침돼야 하는 업무였다. 일본에 건너간 뒤에도 사회과학 탐구 열정을 더욱 불태웠음을 짐작게 한다. 이청원은 육체노동·비밀운동과 관련을 맺으면서도 글을 읽고 쓰는 일을 한때라도 중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청원은 일본어에 능했다. 외국어 능력을 묻는 설문에 그는 일본말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고 적었다. 일본인과 다름없는 언어구사력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언어능력이 그에게 비밀결사에서 조사업무를 가능하게 했고, 또 1935~1937년 왕성한 ‘과학적 조선학’ 저술을 펴낸 동력이 됐다.

 

이청원은 인문사회과학 방면의 뛰어난 수재였다. 백남운이 정규 고등교육을 이수하고 학계에서 오랜 연구 끝에 첫 저작 <조선사회경제사>(1933)를 펴낸 것은 40살 때였다. 이에 비해 이청원이 사적유물론에 입각한 최초의 한국사 통사 <조선사회사독본>(1936)을 펴낸 것은 23살 때였다. 이청원은 백남운보다 나이가 20살이 더 적음에도, 동시대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로 지목받고 있었다.

 

연구 현장은 ‘사회주의 비밀결사 조사부’

 

이청원은 노동자 출신의 역사학자였다. 그의 저술 활동은 고된 토목건축 노동과 동시에 병행된 것이었다. 또 노동조합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실천에 가담함과 동시에 ‘과학적 조선학’ 연구를 수행했다. 달리 말하면 그는 기층계급 출신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였다. 그의 연구 현장은 고등교육기관의 연구실이 아니라 사회주의 비밀결사의 조사부였다. 그의 저술은 학계 전문가 내부의 소통이 아니라 노동자·농민 대중의 의식화를 염두에 두고 집필됐다. 이러한 특성으로 이청원의 삶과 저작은 앞으로도 깊이 들여다볼 만한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조형열, ‘식민지 조선 역사학의 방향 전환,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1933)’, <내일을 여는 역사> 78, 156~157쪽, 2020년 봄호

2. 박형진, ‘1930년대 아시아적 생산양식 논쟁과 이청원의 과학적 조선학 연구’, <역사문제연구> 21-2, 역사문제연구소, 249쪽 각주 21 참조, 2017년

3. 위의 글, 248~249쪽

4. 홍종욱, ‘제국의 사회주의자-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이청원의 삶과 실천’, <상허학보> 63, 상허학회, 123쪽, 2021년

5. 리청원, ‘자서전’, 3쪽, 1948.8.10.,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809 л.18-21об

6. 리청원, ‘간부리력서’, 4쪽, 1948.8.10.,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809 л.16-17об

 

 

임경석의 역사극장

39년 삶 중 다섯 번 10년 감옥에 갇혔던 윤가현

살아 있었으면 대통령감이라는 말 듣는 사회주의자,

일제와 미군정 감옥살이 뒤 빨치산으로 삶 마감

 

윤가현이 1948년 러시아 모스크바의 노동당 중앙당 학교에 유학할 때 찍은 사진. 임경석 제공

 

“윤가현이라는 분이 있어. 그분이 하자고 해서 그랬다고 하드만. 그 사람이 살았으면 대통령감인데 죽었다. 만약 그분이 안 계셨으면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안 죽었을란가도 몰라.”1

 

마을의 한 여성 노인은 이렇게 회고했다. 윤가현(尹珂鉉)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세 가지를 말한다. 그 사람의 영향력이 매우 커서 마을 사람들은 그가 권하는 대로 사회주의를 지지했다. 그는 사람됨이 출중했다. 한 나라의 대통령감이라는 평판을 얻을 만큼 두드러졌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6·25전쟁을 거치는 동안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숨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일본인 학교에서 겪은 천대와 모욕

 

이 마을은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수동리를 가리킨다. 해남 윤씨 집성촌으로서, 1995년 당시 128가구로 이뤄진 큰 마을이었다. 수동마을은 경찰의 표적이었다. 6·25전쟁 때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 27명이 총살당했다. 이 마을에서는 이미 개전 초기에 보도연맹 사건으로 26명이 목숨을 잃었다. 개전과 함께 불과 3개월 남짓한 기간에 마을 사람이 54명이나 학살당했다.2 성인 남성의 씨가 마를 정도였다.

 

마을 사람들에게 내면의 공감과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윤가현은 어떤 사람인가? 그가 남긴 개인 기록에서 삶의 윤곽을 더듬어보기로 하자.

 

윤가현은 수동마을에서 “비교적 생활이 유족한 소지주의 말자로 출생”했다. 그 덕분에 생활고를 모르고 순조롭게 성장했다. ‘말자’란 4남1녀의 형제자매 가운데 막내아들이었음을 가리킨다. 장남 윤정현, 차남 윤남현, 장녀 윤내순, 3남 윤삼현, 4남 윤가현의 순서였다. ‘현’자 항렬의 돌림자를 받아 작명했음을 알 수 있다. 막내인 만큼 장남과는 나이 차이가 많았다. 20년이나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장남의 큰아들, 즉 장조카 윤순달(尹淳達)과는 거의 동년배였다. 이력서에 따르면, 윤가현의 생년월일은 “1912년 5월17일”이고, 조카 윤순달은 그보다 2년 뒤인 1914년생이다. 뒷날 저명한 사회주의자로 성장하는 두 사람은 숙부·조카 사이이지만 한마을에서 거의 같이 자랐음을 알 수 있다.

 

윤가현은 9살부터 13살까지 4년간 수동리에 설립된 대구보통학교를 다녔다. 어릴 때는 잦은 잔병치레로 허약했지만, 학교에 다니면서 건강이 좋아졌고 학업 성적도 우수했다. 그러나 읍내의 일본인 학교인 강진심상소학교 고등과에 진학한 뒤로는 달랐다. 그는 학교생활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민족 차별 때문이었다. ‘조선 민족에 대한 열등시, 온갖 모멸, 천대’를 겪어야 했고 그것은 “그 당시 나의 어린 심정에는 말할 수 없는 큰 충격과 자극을 주었다”고 한다.3 첫 두 해에는 학업 성적이나 열의가 남에게 지지 않았지만 점차 상황이 나빠졌다. 결국 어느 땐가 일본인 학생과 다툼이 일어났는데, 그 다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교장에게서 참지 못할 모욕을 당했다. 윤가현은 결국 학교를 중퇴했다. 1928년, 그의 나이 16살 때의 일이었다.

 

윤가현의 친필. 1948년 8월10일치로 작성한 <자서전> 첫 페이지. 임경석 제공

 

전교생 90% 설득해 동맹휴학

 

피억압 민족의 해방을 위해 첫 행동에 나선 것은 1930년이었다. 광주에서 폭발한 학생들의 반일 시위가 전 조선으로 퍼지던 그해 1월, 윤가현은 모교인 강진 대구보통학교 학생들을 동맹휴학 투쟁으로 이끌었다. 당시 작성된 경찰의 취조 기록이 남아 있다. ‘1월18일 강진군 대구면 공립보통학교’에서 벌어진 ‘맹휴 및 불온 기획 상황’을 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윤가현을 포함한 9명의 주도자가 있었다. 졸업생이거나 5·6학년 재학생이었다. 이들은 1월14일부터 수차례 모인 끝에 광주학생사건에 호응하는 동맹휴학 투쟁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그 결과 1월18일 장날을 디데이로 잡았다. 전교생 101명 가운데 88명을 설득해 동맹휴학에 나서게 했고, 교장 앞으로 수감자 석방을 비롯해 여러 항목의 요구서를 제출했다. 또 대구면 내 이장들, 강진군에 있는 8개 보통학교와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에게 격문을 우편으로 발송했다.4

 

이런 행동을 벌이려면 조직과 선전 활동을 너끈히 수행하는 사회적 능력이 필요했다. 전교생의 90%에 가까운 학생을 결속하고, 네 종류의 상이한 문서를 작성하는 준비 작업이 요구됐다. 윤가현은 그 수모자로 지목돼, 결국 체포됐다. 18살 때의 일이었다. 유죄판결을 받았고 이듬해인 1931년 1월까지 꼬박 1년간 목포형무소에 수감돼야 했다.

 

이것이 윤가현의 첫 번째 감옥살이였다. 그는 생애에 수감생활을 다섯 번이나 겪었다. 외세의 지배에 항거하다가 겪은 고난이었다. 두 번째 감옥살이는 사회주의 비밀결사에 연루됐기 때문이다. ‘전남운동협의회’라고 부르는 비밀 농민조합 조직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그는 1934년 2월에서 1937년 1월까지 또다시 목포형무소에 수감됐다. 전라남도 9개 군에서 청년 558명이 검거되고, 8개월 장기간의 가혹한 취조 끝에 57명이 기소된 큰 사건이었다. 검찰에 송치된 비밀결사 구성원은 강진과 그곳을 동서남북으로 둘러싼 4개 군(해남·완도·장흥·영암) 거주자였다. 이들은 19~35살 청년이었다. 광주학생운동을 거치면서 배출된 신세대 반일운동가였다. 윤가현은 강진군의 적색농민조합건설준비위원회 책임자가 됐다.5 마을마다 농민야학을 열고, 저축계와 독서회를 운용했으며, 소작쟁의가 일어나면 농민 편에 서서 지원활동을 했다. 동지들을 어업조합과 해태(김)조합, 관변 성향의 농촌진흥회 같은 합법단체에 가입시킴으로써 합법성과 대중성을 얻으려 힘썼다.

 

일제와 미군정 폭압정치에 고초

 

두 번째 감옥살이를 마치고 나왔을 때 그는 중매로 배필을 맞았다. 45㎞ 떨어진 보성군 회천면 출신의 정일남을 맞아서 가족을 꾸렸다. 1938년 봄이었다. 신랑은 26살, 신부는 19살이었다.

 

아내가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남편은 또다시 수감되고 말았다. 세 번째 옥살이였다. 1939년 2월부터 12월까지 강진경찰서 유치장에 장기간 구금됐다. 뚜렷한 범죄의 물증도 없고, 법원의 판결도 거치지 않았다. 수상해 보인다는 고등경찰의 판단만으로 10개월씩이나 갇혀 지내야 했다. 중일전쟁이 장기화하고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삼엄한 시기였다. 사상범 출옥자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극단적으로 악화하고 있었다.

 

1939년 4월17일(음력 2월28일)에 첫딸이 태어났다. 아빠가 유치장에 구금됐을 때다. 수감 중에 딸의 출생 소식을 들은 윤가현은 옥중에서 이름을 지었다. 순할 순(順), 처음 초(初)자를 택해 윤순초라 작명해서 전보로 보내왔다고 전한다.

 

강진경찰서에서 석방된 뒤, 윤가현은 고향을 떠나 상경길에 올랐다. 농촌지대의 엄혹한 감시망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다. 그의 자서전 기록에 따르면, 서울로 간 의도는 상업에 종사하는 한편 동지들과 연락해 비밀결사운동을 재개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1년 이상 무직 상태로 지냈다.

 

네 번째 투옥은 서울에서 당했다. 비전향 사회주의자를 아무런 범죄 혐의도 없는데 재판 없이 수감할 수 있는 사상범예방구금령에 걸렸다. 윤가현은 1941년 3월에 시행된 이 폭압 정책의 희생자가 됐다. 1941년 6월에서 1945년 8월까지, 경성형무소와 청주예방구금소에 4년2개월 동안 갇혔다. 역대 수감생활에서 가장 길고 혹독했던 이 감옥살이는 8·15 해방이 돼서야 겨우 끝났다.

 

다섯 번째 투옥은 해방 이후에 겪었다. 이번에는 일본 경찰이 아니라 미군정 경찰이 그를 잡아넣었다. 미군포고령 위반 사건이었다. 1946년 4월부터 1947년 9월까지 17개월간 광주형무소에 투옥돼야 했다. 이번에도 옥중에서 아들의 출산 소식을 들었다. 1946년 8월31일(음력 8월5일) 광주형무소에 수감 중일 때 아들 윤광이 태어났다. 해방 직후 광주에서 누렸던 짧은 가정생활 덕분에 회임할 수 있었던 아기다. 아내 처지에서 보면 기가 막힐 일이었다. 처음 딸도 그랬고, 두 번째로 낳은 아들도 그랬다. 남편이 옥중에 있을 때, 젊은 여성 혼자 출산을 감당해야 했다.

 

“아부지 원망 마라”

 

윤가현은 39년간의 길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나마 다섯 차례 걸쳐 도합 10년5개월의 감옥살이를 겪어야 했음을 고려하면 그의 생은 더욱 짧게 느껴진다. 그는 6·25전쟁 때 대둔산을 근거지 삼은 충남 빨치산 부대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전투 중에 숨졌다고 알려졌다.6

 

아내가 남편과 함께 살았던 기간은 다 합쳐도 3년이 채 되지 않았다. 자녀는 아버지의 부재 속에 성장해야 했고, 철든 뒤로는 연좌제 탓에 고통을 겪었다. 큰딸 윤순초는 가끔 엄마에게 물었다. “왜 아버지는 안 해도 될 일을 하셔서 우리를 고생시켰단가요?” 젊어서 홀로된 채 두 아이를 어렵게 길러야 했던 정일남은 남편을 원망하는 말을 용납하지 않았다. “우리 두 사람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큰 차이가 났다. 느그 아부지는 혼자만 아니라 모두 다 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좋은 일을 하셨다. 원망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정일남은 어디에서 들었는지 모르지만, 남편이 대둔산에서 숨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노년에 접어든 그는 “내가 죽으면 대둔산에서 흙 한 삽 떠서 같이 묻어주라”는 말을 자식에게 남겼다.7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염미경, ‘전쟁과 지역권력구조의 변화’, <전쟁과 사람들>, 한울아카데미, 136~137쪽, 2003년.

2. 주희춘 기자, ‘비운의 공산주의자 윤순달(9)’, <강진일보> 2012년 9월4일.

3. 윤남(윤가현), <자서전>, 1쪽, 1948년 8월10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803 л.12-14об.

4. 朝鮮總督府警務局, ‘光州學生事件及其ノ影響其ノ二, 新學期開始後ニ於ケル學生事件裏面策動ノ狀況’, 52~53쪽, 1930년 1월.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5. ‘전남운동협의회사건 진상’, <조선일보> 호외 1934년 9월7일.

6. 임방규,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9)’, <통일뉴스> 2018년 3월17일.

7. 김병균, ‘일제강점기 강진농민운동과 사회주의자 윤가현(3)’, <강진일보> 2020년 3월26일.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임경석의 역사극장

간악한 고문에도 2주간 입을 다문 전홍섭

현금 호송 정보 넘겨주고 고문 견뎌내며 동료들 도피 시간 마련…
감옥에서 모범수로 지내며 10여 년 치밀한 계획

 

전홍섭. 드물게 남아 있는 흐릿한 증명사진이다. 임경석 제공

 

현금 호송대가 습격당했다는 급보를 접하자마자 용정 주재 일본총영사관 경찰부는 즉각 수사에 착수했다. 1920년 1월4일 밤 10시에 11명의 경관대를 현장으로 급파했다.1 사건이 일어난 지 4시간이 지난 뒤였다.

 

현장 조사 결과, 도로에서 10m가량 벗어난 두 곳에 핏물이 낭자하게 고인 자국이 있음을 발견했다. 현장에서 즉사한 호송 경관 나가토모 순사부장과 하복부 관통상을 입고 이튿날 숨진 회령의 조선 상인 진길풍이 조난당한 자리였다. 그곳에서 90m 떨어진 밭 속에서 범행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구식 엽총의 부러진 총신 34㎝짜리가 버려져 있었다. 핏자국이 있었다. 현금 행낭과 함께 수송 중이던 우편물 행낭 4개도 그곳에서 109m 지점 산등성이에 내팽개쳐진 것이 발견됐다. 어느 것이나 다 봉인된 채였다. 범인들은 현금 행낭 외에 관심이 없었음이 분명했다.

 

사라진 현금 행낭, 교란책에 휘말린 일본 경찰

 

그날 밤부터 현장 주변 농촌지대에 광범위한 수색 작업이 이뤄졌다. 경찰은 피습 지점인 용정 남쪽 6㎞ 지점, 승지촌을 중심으로 다중 동심원을 그리면서 수색 범위를 넓혔다. 수색은 이틀간 밤낮없이 계속됐다.

 

이튿날인 1월5일 저녁 8시, 용정에서 서남방 12㎞ 지점의 골짜기에 말 두 마리가 방치돼 있다는 제보가 접수됐다. 현금과 우편물 수송에 사용한 말이었다. 현장에는 말 외에 일본식 남성용 상의인 하오리 2벌, 현금 포장용 녹색 보자기 2장, 고액권 다발 묶음용 띠지 등이 흩어져 있었다. 경찰은 그곳에서 범인들이 현금을 분배해 어딘가로 도주한 것으로 이해했다. 범인의 종적을 찾기 위해 부근 마을을 샅샅이 수색했다. 범인들의 도주로는 오도구(五道溝)를 거쳐서 세린하(細麟河) 방면으로 이어졌으리라고 추정했다. 용정에서 서남쪽 방향이었다. 그곳에 수사력을 집중했다.

 

경찰은 초동수사를 그르쳤다. 범인들이 도주할 시간을 벌기 위해 세운 교란책에 휘말린 탓이었다. 범인 가운데 한 사람인 임국정은 일행과 떨어져서 단독으로 서남쪽 12㎞ 지점까지 말들을 몰고 갔다. 현장을 검증할 일본 경찰에게 혼선을 초래할 목적으로, 일부러 눈밭 위에 찍히는 말발굽 자국을 서남쪽 백두산 산중 방향으로 향하게 했다.

 

경찰이 수사 방향을 전환한 것은 1월9일부터였다. 사건이 터진 지 닷새가 지난 뒤였다. 범인들의 도주로는 용정 서남쪽이 아니라 북동쪽 방향임을 비로소 인지했다. 그동안 정반대되는 곳을 뒤졌던 것이다. 이때부터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습격자들의 연고가 있는 명동 장재촌, 와룡동, 소영자 등지에서 대대적인 일제 수색이 이뤄졌다. 와룡동의 경우를 보자. 일본영사관 경찰 37명과 협조 요청을 받은 중국 쪽 군경 53명이 1월10일 이른 아침, 전격적으로 와룡동을 포위했다. 목표는 습격자 최봉설의 집이었다. 하지만 범인들이 이미 그곳을 거쳐간 뒤였다. 일본 경찰은 100여 민가를 낱낱이 수색했다. 야만적인 폭행이 자행됐다. 혐의자의 행방을 추궁하는 거침없는 폭행과 윽박질이 마을 사람들에게 가해졌다.

 

경찰은 범인들의 도주 방향이 러시아 연해주라고 판단했다. 중국·러시아 국경으로 통하는 도로와 교통 요지에 겹겹이 비상선을 설치했다. 도로와 고갯길에서는 오가는 사람들을 검문하고 죄 없이 구타하느라고 통행이 두절될 정도였다.

 

밀고자는 황량한 밭에서 주검으로 발견

 

일본인들은 의문을 느꼈다. 범인들이 도대체 어떻게 현금 호송 정보를 정확히 알 수 있었을까? 조선은행 회령출장소에서 국경 너머 용정출장소까지 무장 기마 경찰의 호위하에 현금을 수송한다는 정보는 외부에서는 쉽게 알 수 없었다. 은행 내부의 협력자와 내통하지 않고서는 현금 호송대를 습격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조선은행 회령출장소 이시이 소장이 혐의자를 지목했다. 용정출장소 은행원 전홍섭(全洪燮)이었다. 나이는 31살,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입사해 1918년 6월부터 용정출장소에 근무하는 자였다. 회령경찰서는 1월4일 밤에 그를 체포했다. 습격 사건이 벌어진 바로 그날 밤이었다.

 

필자는 한때 오해했다. 일본 관헌 쪽의 범인 추적이 급진전을 보인 것은 전홍섭이 체포된 직후였다고 봤다. 그를 취조하는 과정에서 일본 경찰이 궁금하게 여기던 정보를 확보했다고 오인했다. 경찰이 조선은행권 15만원 탈취 사건 범인들의 이름과 신상을 인지하고, 1월9일부터 수사 방향을 전환한 것은 전홍섭의 체포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파악했다.2 하지만 이 판단은 잘못됐다.

 

일본 경찰의 내부 기록에 따르면, 전홍섭이 범행을 자백한 시점은 체포된 뒤 무려 2주나 지난 다음이었다. 그가 범행 내용을 진술하기 시작한 때는 1월20일이었다.3 전홍섭이 체포되자마자 곧바로 공모자들의 신상을 자백한 게 아니었음이 판명됐다. 얼마나 고초를 겪었을까. 그는 무려 2주 동안이나 취조 경찰의 고문을 견뎌냈다. 요컨대 동료들이 경찰의 추적을 피해 무사히 국경을 넘을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전홍섭의 심문 투쟁 덕분이었다. 사건 발생일로부터 국경선을 넘는 데 필요한 4~5일간의 시간 말미를 보장해줬다.

 

그러면 1월9일 이후 경찰의 수사 방향이 전환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어떤 경로로 범인들의 이름과 거주지를 알게 됐을까. 이 의문을 풀 단서는 경찰의 정보문서에 암시돼 있다. “과거에 내탐했던 각종 사항을 종합하여 판단”한 결과 범인들의 성명을 인지하게 됐다고 한다.4 밀정의 거듭된 제보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총독부 기관지의 보도 기사에는 좀더 뚜렷이 표현돼 있다. 영사관에 ‘사환’으로 고용된 조선인 김아무개가 “공모자의 주소명 및 범죄의 행위를 하려고 사들인 흉기 등에 대하여 자세한 밀고”를 해왔다고 한다. 밀고한 ‘김아무개’가 누구인지 보여주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신상은 알려진 게 없다. 하지만 당대인들에게는 그가 누구인지 잘 알려졌던 것 같다. 그는 사건 발발 2개월여 뒤 주검으로 발견됐다.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해 황량한 밭 가운데에 버려졌다고 한다. 일본 언론은 그의 죽음이 밀고에 대한 보복살인이라고 보도했다.5

 

서울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1921년 8월25일 ‘15만원 사건’에 관련된 3명(임국정, 윤준희, 한상호)이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임경석 제공

 

급성폐렴으로 병보석 허가 얻어

 

재판이 시작됐다. 함경북도 청진지방법원에서 제1심이 이뤄졌고, 경성복심법원에서 제2심이, 경성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제3심 재판이 진행됐다. 1921년 4월4일, ‘15만원 사건’의 공동 피고인 4명에 대한 선고가 있었다. 현금 호송대 습격에 가담한 세 사람(임국정, 윤준희, 한상호)은 사형, 기밀을 누설한 혐의를 받는 전홍섭은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체포를 면한 또 한 사람의 습격 가담자 최봉설에게도 궐석 사형이 선고됐다.6

 

사형선고를 받은 피고인들의 처형은 예상보다 이르게 이뤄졌다. 1921년 8월25일 서울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에서 임국정, 윤준희, 한상호 세 사람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그날 날씨는 흐렸고, 한낮 기온이 28도였다고 한다. 무더위는 한풀 꺾였지만, 여전히 덥고 음울한 날이었다. 사형장에 나가면서 피고인들이 남겼다는 말이 전해진다.

 

“일본 강도들이 자그마한 우리 육체는 죽이지마는 우리의 조선 독립할 정신과 강경한 마음은 점점 살아 있다. 조선은 해방될 것이오, 일본은 멸망하고야 말 것이다.”  7

 

동료들의 사형이 집행된 뒤 전홍섭은 큰 충격을 받았다. 삶의 의욕을 잃고 식음을 끊었다. 일주일 동안 계속 그랬다. 다행히 청진 감옥으로 이감된 뒤 그는 기력을 되찾았다. 그는 탈출을 꿈꾸기 시작했다. 탈출을 위해 먼저 모범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감옥 내 규율에 한 치도 어김없이 복종했으며, 온순하고 성실한 태도를 보였다. 3년 동안 줄곧 흐트러짐 없이 그 자세를 견지했다. 그 결과 간수들의 신임을 얻었고, 다소나마 운신의 폭을 넓혔다. 아내가 면회를 왔을 때 간수의 주의를 따돌린 채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었다.

 

전홍섭의 1단계 목표는 병보석으로 감옥 문을 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몸이 아프다고 자주 눕고, 식사량도 극한적으로 줄였다. 잇몸을 깨뜨리거나 구강 내에 피를 내어 토혈했노라고 주장했다. 겉모습이 폐병 환자나 다름없었다. 삐쩍 말라서 피골이 상접하고, 기력이 쇠잔해졌다. 어느 때 아내가 면회 오는 날에 맞춰 면회실에서 피를 토하고 졸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내가 눈물로 호소했다. “우리는 늙은 어머니, 철모르는 딸 이렇게 세 식구가 저 남편을 하늘같이 믿고 사는데, 이제 옥 속에서 다 죽게 되었으니 우리도 함께 죽여달라”고 통곡했다. 결국 간수부장, 계호주임, 교무주임 등이 동정한 덕분에 급성폐렴으로 인한 병보석 허가를 받아낼 수 있었다.

 

안락한 미래를 희생한 의지의 사나이

 

2단계 목표는 밀항이었다. 국경을 넘어서 일본 통치 구역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거처를 접경 항구도시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웅기의 북만양행에 근무하는 당질이 살림이 넉넉하므로 그에게 의지해 병을 치료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다행히 거주 이전이 허용됐다. 밀항을 위해서는 은밀하게 배를 구하고, 병보석 죄수의 동태를 감시하는 경관들의 시선을 따돌리는 게 필요했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그는 노모와 작별하고 아내와 딸을 데리고 한 어선을 빌려 탔다. 목적지는 블라디보스토크였다.8 정확한 시기는 특정하기 어려운데, 징역형을 받은 지 12년쯤 되는 때에 그러했다니, 아마도 1932년께의 일이었다고 추정된다.

 

전홍섭의 삶은 기억할 만한 값어치가 있다. 조선 독립의 대의를 위해 소시민으로서 안락한 미래를 희생하고서 현금 수송의 비밀을 넘겨준 용기가 그렇다. 또 동료들의 안전을 위해서 2주 동안이나 혹독한 고문을 견뎌낸 그의 고투가 그렇다. 그뿐인가. 10여 년간의 긴 인내 끝에 억압의 땅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 그의 지혜와 노력이 더욱 그렇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재간도총영사대리, ‘長友巡査 조난급 조선은행권 약탈사건’, <外務省警察史, 間島の部 第2>, 290~291쪽, 1920년 1월8일.

2. 임경석, ‘일제의 돈을 갖고 튀어라’, <한겨레21> 제1177호, 2017년 9월4일.

3. ‘會憲機제64호, 공금약탈범인에 관한 건’, 1920년 1월31일.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8, 종교운동 편>, 국사편찬위원회, 322쪽, 2002년.

4. 재간도총영사대리, ‘長友巡査 조난급 조선은행권 탈취범인 수사의 건’, <外務省警察史, 間島の部 第2>, 298쪽, 1920년 1월17일.

5. ‘15만원 사건 밀고자를 참살’, <매일신보> 1920년 3월31일.

6. 고등법원 형사부, ‘大正10年刑上第42,43號 判決(全洪燮 등 4인)’, 1921년 4월4일. <독립군의 수기: 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 XII, 러시아 편 (2)>, 국가보훈처, 358쪽, 1995년.

7. 崔溪立, ‘간도 15만원 사건에 대한 40주년을 맞으면서’, 1959년 1월. <독립군의 수기: 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 XII, 러시아 편 (2)>, 국가보훈처, 322~323쪽, 1995년.

8. 林炳哲, ‘朝銀 15만원 탈취 사건’, <신천지> 1-3, 1946년 4월.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임경석의 역사극장

혁명가로 키우려던 김익상의 딸은 어디로 갔는가

상하이 황포탄 의거 이틀 전야 동지에게 부탁한,
“여성 혁명가가 되도록 교도해달라”던 유언의 주인공 점석씨는 어디에

 

김익상의 친동생 김준상. 황포탄 의거 이후 용산경찰서에 체포돼 취조받을 당시 모습. 

1922년 4월 초부터 26일 사이에 촬영. 임경석 제공

 

재판이 시작되자 상하이 황포탄 의거의 주역 김익상의 신원이 신문 기사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기사에 따르면 피고인 김익상의 나이는 28살, 직업은 ‘철공’이었다.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 286번지가 그의 본적지였다.

 

본적지를 생가라고 오인하는 견해도 더러 있다. 하지만 본적지란 호적이 있는 지역을 이르는 말이다. 호주의 첫 신고로 새 호적이 편제될 때 지정되는 것으로, 호주의 출생지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위 본적지는 김익상이 결혼해 호적상의 가(家)를 창설할 때 그가 기재해 넣은 신혼 살림집 주소였다.

 

잎담배 상자를 빼돌려 자금 마련

 

대지 21평의 조그만 집이었다. 그나마 자기 소유도 아니었다. 집주인은 따로 있었다. 60살쯤 되는 초로의 홍상수라는 사람이었다. 집주인을 인터뷰한 기사에 따르면, 김익상은 1919년 7월께부터 자기네 곁방에 세를 들어 살던 세입자였다. 가세가 매우 가난했으나, 성격은 그늘진 데 없이 강렬했다고 한다.1

 

누추한 단칸방이지만 젊은 아내와 둘이 지내는 호젓한 신혼살림이었다. 아내는 한 살 연하의 송씨 부인이었다. 부부는 이 집에서 아이를 하나 낳았다. ‘점석’이라고 이름 지은 딸이었다. 뒷날 황포탄 거사 이틀 전야에 동지들에게 남긴 “딸을 공부시켜 여성 혁명가가 되도록 교도하기를 부탁한다”는 유언의 주인공이었다.

 

김익상의 직업을 ‘철공’이라고 지칭한 것은 대체로 사실에 부합했다. 그는 결혼 전후한 시기에 담배회사인 ‘광성(廣成)연초상회’의 기계공으로 취업해 있었다. 이 회사는 매출 규모상으로 손꼽히는 담배 제조·판매 회사였다. 1920년 6월 중 담배 수출·이출 통계자료에 따르면, 광성연초상회는 경기도 안에서 서열 4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수출하는 곳은 블라디보스토크, 안둥현, 칭다오, 다롄, 장춘, 하얼빈, 펑톈, 북간도 등이었다.2 조선을 둘러싼 러시아 연해주, 중국 만주와 산둥반도 일대가 이 담배회사의 주요 시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21년에 김익상은 광성연초상회 펑톈 지점으로 파견됐다. 식민지 통치당국이 재정 수입을 늘리기 위해 조선에 담배 전매제도를 시행한 사정 때문이었다. 그해 4월1일 조선담배전매령이 공포되고, 7월1일부터 담배 전매제도가 시행됐다. 광성연초상회 경영진은 마케팅 전담기구인 연초도매회사의 주식을 배당받는 방식으로 상황에 대처했지만, 그에 만족하지 않았다. 더욱 근본적인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전매제도가 미치지 않는 중국 만주시장으로 진출하기로 결정했다. 김익상이 펑톈 지점 ‘기계감독’으로 발령받은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김익상은 가족을 데려가지 않았다. 단독으로 국경을 넘어 임지에 부임했다. 가족을 동반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펑톈 파견을 정치적 망명의 기회로 삼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3·1운동의 체험이 그에게 영향을 준 것 같다. 3·1운동 당시 그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지만, 불길처럼 타오른 그 운동의 세례를 받고 조선혁명에 헌신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김익상은 회삿돈에 손을 대기로 했다. 잎담배 여섯 상자를 빼돌려 창고회사에 갖다 두고, 그 회사로부터 받은 창고증권을 할인해 300원을 얻었다. 신문기자 월급이 40∼50원 하던 시절이었다. 상층 봉급생활자의 6∼7개월치 급여를 확보했던 것이다. 그는 비행기 학교에 입학하기를 바랐다. 비행기가 독립운동을 위한 선전 활동이나 전투행위에 활용할 수 있는 유용한 첨단 기기로 간주되던 때였다.

 

김익상의 아내 송씨 부인. 임경석 제공

 

짐마차 마부로 형의 식솔까지 부양하던 동생은

 

송씨 부인 입장에서 보면 난데없는 일이었다. 가장이 집안 살림은 돌보지 않고 천하를 도모하는 일에 빠져버린 셈이었다. 송씨에게는 생계를 도모할 별다른 재주나 수단이 없었다. 두 살배기 어린 딸을 데리고 거친 세파를 뚫고 나아가야만 했다.

 

송씨 부인이 기댈 수 있는 곳은 시집뿐이었다. 그는 본적지의 방을 빼서 ‘이태원리 288번지’에 있는 시집과 살림을 합쳤다. 하지만 시집 살림도 보잘것없었다. 시부모는 돌아가셨고, 3형제 가운데 큰형도 이미 숨진 상태였다. 둘째 김익상이 옥중에 갇혀 있으니, 성인 남성이라고는 남편의 동생 김준상뿐이었다. 다른 식구 5명은 여성이거나 노약자였다.

 

김준상의 어깨는 무거웠다. 그러잖아도 생활 곤란으로 고통을 겪어오던 터였다. 감옥에 갇힌 형의 남은 식구까지 건사해야 했다. 가진 거라고는 이태원에 있는 조그만 집 한 채뿐이었다. 그는 집을 담보로 어느 일본인에게서 200원을 빌렸고, 그 돈으로 말 한 마리를 샀다. 화물마차 운반용 말이었다. 그는 짐마차 마부가 되어 식솔을 부양했다. 일터는 주로 용산 제탄소였다고 한다. 석탄 운반하는 업무를 도급받았던 것 같다. 김준상의 성실한 노동 덕에 식솔들은 수삼 년간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1924년 여름에 변을 당했다. 무더위 속에서 과중한 짐을 끌던 말이 그만 탈이 났다. 그러다 끝내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 집의 유일한 재산이라 해도 좋을 자산이었다. 다시 말을 살 돈이나, 돈 될 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김준상은 타인의 말을 빌려 짐마차 노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빌린 말로는 궁핍한 삶이나마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는 다시 한번 빚내서 상황을 타개하려 꾀했다. 채무자는 저당권 설정을 요구했다. 그렇게 하면 다시 말을 살 수 있게 대부금을 증액해주겠노라 약속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기였다. 이미 대출한 돈을 회수하기 위한 일본인 채무자의 사탕발림이었다. 저당권을 설정받은 뒤에도 그자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결국 집의 소유권마저 남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집을 뺏긴 것이다. 저 하나 바라보고 목숨을 부지해가는 여섯 식구가 길거리에 나앉아야 할 판이었다. 김준상은 한탄에 한탄을 거듭했다.

 

1925년 6월6일이었다. 며칠째 쌀과 소금이 떨어져 끼니를 잇기 어려웠다. 말다툼 끝에 아내 이씨 부인이 한강 변에 위치한 친정집으로 식량을 구하러 간 참이었다. 다른 식솔도 밖에 나가서 집이 비어 있었다. 김준상은 마구간으로 사용하던 창고 건물의 들보에 노끈을 걸었다. 그날 오전 11시의 일이었다.

 

김익상의 본적지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 286번지’를 기념하는 표석. 

황포탄 의거 100주년이 되는 2022년 3월28일, 서울 마포구 아현주민센터 앞 공터에 건립됐다. 

실제 본적지 터는 170m 떨어진 ‘삼성 래미안 공덕3차아파트’ 후문 안쪽에 위치한다. 임경석 제공

 

인터뷰 당시 설빔을 입고 있던 딸

 

시신은 오후 5시께 집으로 돌아온 아내에게 발견됐다. 얼마간 식량을 구해 귀가한 이씨 부인은 그 비참한 광경을 보고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고 한다. 남은 식구는 장례를 치를 형편도 되지 못했다. 며칠간 시신을 집 안에 뉘어놓고 염습도 하지 못한 채 울고만 있었다. 그 모양이 차마 볼 수 없을 만큼 연민을 자아냈던 것 같다. 동네 사람들이 돈을 모아 상여를 산 덕분에 간신히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3

 

유족은 5명이었다. 아내 이씨 부인, 형수 송씨 부인, 6살 난 조카 점석이, 69살 큰어머니, 큰형의 소생인 조카 기복(基福)이. 집안의 유일한 성인 남성을 잃어버린 이 가족이 과연 무사히 생존해나갈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뿐인가. 살던 집의 소유권마저 채무자 손에 넘어간 상태였다.

 

김익상의 가족에 관한 언론기관의 관심은 1926년까지는 계속 이어졌다. 그해 설날 즈음해 인터뷰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아내 송씨 부인과 딸 점석이에 관한 기사였다. 거주지 주소가 바뀐 게 눈에 띈다. ‘이태원리 280번지’였다. 근저당이 설정된 탓에 채무 미변제로 종전 주거 ‘이태원리 288번지’에서 더는 살 수 없게 된 것으로 보인다. 가족 수는 4명이었다. 김익상의 아내 송씨, 딸 점석이, 동서 이씨(김준상의 아내), 조카 기복이가 그들이다. 1년 전에 견줘볼 때 연로한 큰어머니가 눈에 띄지 않는다.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겼거나, 아니면 그새 생사가 갈렸던 것 같다.

 

기자가 물었다. 생활을 어떻게 영위하느냐고. 송씨 부인은 스무 살 조카 기복이가 저울회사에 취직해 벌어오는 적은 돈으로 그럭저럭 살아간다고 답했다. 화제가 옥중에 갇힌 남편에게 미쳤다. 김익상은 1922년 11월6일 나가사키 공소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고, 1924년 1월 일본 황태자 결혼식에 즈음한 은사령으로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상태였다. 송씨 부인은 치마끈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어느 때나 생각이 안 나겠습니까만 설을 당하면…” 하고 말끝을 맺지 못했다. 이어서 딸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생전에 만나볼 것 같지 않아요. 이것이나 알뜰히 키울랍니다”라고 답했다. 딸 점석이는 벌써 일곱 살이었다. 설날이라 새 옷을 갈아입고 철 모른 채 웃으며 엄마 곁을 지키고 있었다.

 

해방 뒤 귀국한 의열단장 김원봉은 김익상을 찾았다. 당사자 종적이 묘연했다. 그 대신에 “김원봉 선생께서 찾는 김익상씨는 나의 아저씨입니다.” 조카 김기복이 나타났다. 여전히 이태원에 살고 있었다. 그는 김익상의 마지막 모습을 전했다.4

 

해방 뒤 공동체 성원의 도덕적 의무

 

사형선고를 받은 김익상이 일본 황태자 결혼, 일황 즉위 등을 계기로 세 차례 감형받았고, 결국 13년 감옥살이를 마치고 1936년에 출옥했다는 이야기. 출옥 이후에도 예비검속, 요시찰 감시 등으로 고통을 겪었다는 이야기, 1941년 8월 노량진에서 용산경찰서 경찰과 조우해 격투를 벌이다 다시 수감되느니 차라리 자결하겠다고 한강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 등을 증언해주었다. 김익상의 최후는 아마도 사상 전향과 예방구금제도 시행에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1941년 2월 공포된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에 따르면, 만기 출옥한 시국 범죄자로 사상 전향에 응하지 않는 자는 언제라도 다시 감옥에 수감돼야 했다.5

 

딸은 어떻게 됐는가? 유감스럽게도 김기복은 김익상의 아내와 딸 소식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았다. 과연 김익상은 그의 가족과 재회했을까? 자기 한 몸과 가족을 희생해 피억압 동포의 해방을 꾀한 한 독립운동가의 마지막 유언은 끝내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던 것 같다. “딸을 공부시켜 여성 혁명가가 되도록 교도하기를 부탁한다.” 이 유언을 이행해야 할 사람은 이제 의열단장 김원봉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해방된 세상에 살고 있는 공동체 성원들이 마땅히 지키고 이행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되고 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金益相의 본가는 시외 孔德里로 판명’ <동아일보> 1922년 4월6일

2. ‘객월 製煙 이출액’ <동아일보> 1920년 8월1일

3. ‘불운아! 김익상의 實弟가 縊首 자살’ <동아일보> 1925년 6월9일, ‘김익상 弟 자살’ <조선일보> 1925년 6월9일, ‘田中대장 저격 범인의 實弟 자살’ <京城日報> 1925년 6월20일

4. ‘옥중 생활로 轉身하며 조국 해방에 바친 일생’ <조선일보> 1945년 12월5일

5. 장신 ‘1930∼40년대 조선총독부의 사상전향 정책 연구’ 성균관대 박사학위 논문, 2020년, 146∼164쪽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임경석의 역사극장

‘독립운동가’ 김성근은 밀정이었나

3·1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에서 비밀결사체 구국모험단 이끈 폭탄 전문가 김성근임시정부로부터

‘밀정’으로 의심받아 조선으로 피신… 이후 ‘조선총독부 협력’ 보도

 

50살 전후의 김성근. 국가보훈처 제공

 

1920년 4월29일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오후 3시30분께였다. 조선인 밀집 주거지인 애인리(愛仁里) 24호에서 폭탄이 터졌다.1 한두 발이 아니었다. 다수의 폭탄 더미가 터진 듯 대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사건이 일어난 집은 물론이고 이웃 가옥들의 담장까지 무너졌다. 다행히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지만 사고 현장에 거주하던 일가족이 모두 부상을 입었다. 그뿐이랴. 폭발 사고는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현장에 출동한 프랑스영사관 경찰부 소속 경관들이 잔해를 뒤지며 수색할 때 다시 한번 폭발이 일어났다. 경찰 3명이 다쳤는데 그중 한 사람은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급진 독립운동’ 뛰어든 27살 유학생

 

사고가 일어난 곳은 조선인 김성근(金聲根)의 가옥임이 밝혀졌다. 아내 이선실과 함께 사는 집이었다. 경찰은 집주인의 소재를 찾았으나 이미 도주한 뒤였다. 사건 현장에선 잔류 폭탄 약간과 권총 한 자루가 발견됐다. 경찰은 현장 주변에서 사건에 관련된 것으로 의심되는 혐의자를 8명이나 체포했다. 그중에는 김성근의 아내, 중국인 하녀 1명, 조선인 노파 1명, 조선인 남성 3명이 포함됐다. 애인리 일대에 경찰의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졌고, 현장 인근의 모든 통행로는 차단됐다. 프랑스 경찰부에 고용된 베트남인 순경 여럿이 경계근무를 섰다.2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누군가 정치적 목적으로 폭탄을 투척했을까, 아니면 개인 원한을 풀려 앙갚음했을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불의의 사고가 난 것일까. 그랬다. 맨 후자였다. 구국모험단이라는 비밀결사의 단장 김성근이 동료 임득산(林得山)과 함께 폭탄을 제조하다가 잘못해 폭발을 일으켰던 것이다. 집 안에는 그간 제조한 폭탄이 비축돼 있었는데 그마저 함께 폭발하고 말았다.

 

김성근은 함경남도 함흥 출신의 27살 청년이었다. 원래 남경(난징) 금릉대학에 재학하던 유학생인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혁명적 기운이 고조되자 그에 공감해 상하이로 뛰쳐나온 참이었다. 그해 7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함경도 의원으로 선출됐고, 상임위원회 체계로는 군무위원회에 배속됐다. 임득산은 3·1운동 시기에 나타난 좀더 전형적인 유형의 망명 청년이었다. 평안북도 출신의 25살 청년으로서 창성군 3·1 시위에 가담한 이후, 상하이와 국내를 오가며 비밀 연락과 독립자금 모금에 참여한 혁명가였다.

 

1919∼1920년 상하이에는 이런 조선인 청년이 넘쳤다. 1919년 3월 이전에 상하이 거주 조선인 수는 백수십 명 수준이었는데, 3·1운동 발발 뒤에는 프랑스 조계로 몰려든 망명자들 때문에 1919년 말에는 천수백 명으로 늘었다. 이 청년들은 제각기 활동 경험과 연고, 이념에 따라 크고 작은 비밀결사에 가담했다.

 

구국모험단도 그중 하나였다. 이 단체는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모험 수단’을 표방하는 급진적인 독립운동 단체였다. 모험이란 무기나 폭탄 등을 사용해 폭력적인 방법으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행동 양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단체의 규약이 남아 있다. 거기에는 “본 단체의 단원들은 한국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 “폭탄으로 구국의 위임을 부담한다” 등 죽음을 무릅쓴 결연한 각오가 표명돼 있다.3

 

‘상해밀정사건’이라는 제목 아래 김성근의 밀정 사실을 보도한 신문기사. <동아일보> 1925년 9월27일치

 

뜨거운 의욕과 차가운 현실의 괴리

 

구국모험단이 발족한 시점은 1919년 6월12일이었다. 파리강화회의가 폐막하던 때였다. 수백만 군중의 참여를 이끌어낸 만세시위운동과 국제회의 대표 파견론이 아무런 소득도 없이 저물고 있었다. 테러를 수단으로 삼는 격렬한 운동론이 망명 청년들 사이에 호소력을 갖게 된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경찰 추산에 따르면 단원 수는 약 40명이었다. 발족 당시 여운형이 단장으로 선출됐지만 머지않아 사임했다고 한다. 그 후임으로 단장에 취임한 이가 곧 김성근이다. 둘 사이에 남경 금릉대학 유학생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음이 주목된다.

 

구국모험단의 주요 활동은 의열투쟁을 위한 무기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조선 청년들에게 폭탄제조법을 교육하고 실제로 폭탄을 만들어 비축하는 것에 활동의 주안점을 두었다. 단체 발족과 동시에 3개월 과정의 폭탄제조법 강습소를 열었다. 강사로 영국인 1명과 중국 남방 광둥성 사람 1명을 초빙했다. 단원들의 호응도가 높았다. 제1회 강습은 1919년 6월부터 8월까지 3개월간, 제2회는 그해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간 계속됐다. 수강생 수는 제1회 때는 20명, 제2회 때는 7명이었다.4 김성근은 제2회 수강생이었다.

 

3·1운동 3주년인 1922년 3월1일 김성근은 <독립신문>에 기고문을 실었다. ‘결심을 실행’이라는 글이었다. 길지 않으므로 직접 한번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나는 부끄러움으로 제4회의 삼일절을 맞이합니다. 과거 오늘에 결심한 사업을 실현치 못함에 대하여 나는 어디까지든지 통절하게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과 새 복음을 준 오늘을 기쁨과 부끄럼으로 맞는 나는 최초의 대결심과 대용단을 한번 더 굳게 하여, 또한 맹렬하게 흥기하고 용감히 분투하여, 금년 안으로는 기어코 한반도를 진동하고 불천지를 만들어, 적으로 하여금 백기로써 항복하게 하려 합니다.”

 

여전히 모험 행위를 투쟁 수단으로 삼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금년 안으로는 기어코 한반도를 진동하고 불천지를 만들어 적으로 하여금 백기로써 항복”케 하고 말겠다는 표현을 보라. 그가 생각하는 독립운동은 시종일관 의열투쟁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을 읽으면 전반적으로 과장됐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뿐 아니라 실현 불가능성이 점점 고조되고 있음을 본다. ‘금년 안으로 기어코’ 뭔가를 하겠다, 한반도를 진동하고 불천지를 만들겠다, 급기야는 일본이 항복하게 만들겠다고 한다.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진위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허장성세가 느껴진다. 내면의 의욕은 활활 타오르는데, 객관적 현실은 그에 배치되는 방향으로만 나아갔다. 이러한 불일치가 지속된다면 개인의 정체성에 어떤 영향이 초래될까.

 

독립운동계 중진이 무사히 석방된 까닭은

 

어느 때부터인가 김성근은 상하이 조선인들로부터 일본의 밀정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렇게 된 계기가 있었다. 일본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된 뒤부터 그랬다. 구국모험단 단장으로서 폭탄 제조의 전문가이자 독립운동계 중진인 김성근이니만큼 무사하기 어려웠다. 본국으로 압송돼 중형을 받기에 십상이었다. 그러나 어떤 까닭인지 김성근은 무사히 석방됐다. 그 뒤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그는 상하이 시내를 활보했다. 사람들은 미덥지 못하다고 수군거렸다.

 

김성근은 자신이 밀정으로 지목받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변명했다. 자기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서 그렇게 오해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영사관에 잡혀갔다가 무사히 나올 수 있었던 까닭은 유력한 중국인들과의 친분을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변호했다. 중국인 유력자들의 주선으로 일본 총영사에게 선처를 호소했다는 말이었다.

 

위기가 닥쳤다. 1925년 8월께였다. 자기 집에 세들어 사는 신혼부부의 아내가 임시정부를 찾아가서 김성근이 밀정이라고 고발했다. 그는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낱낱이 진술했고 구체적인 확증을 제시했다고 한다. 그가 고발을 결심한 까닭은 사적인 데 있었다. 김성근의 아내 이선실이 자기 남편과 부적절한 관계를 했는데, 그 정황을 아는 김성근이 이를 제지하려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성근이 아내의 부적절한 관계를 묵과하는 이유는 자신의 밀정 정체가 폭로될까 두려워서였다고 한다.

 

임시정부 경무국 업무는 독립국의 경찰과 달랐다. 그 소임은 “왜적의 정탐 활동을 방지하고 독립운동자의 투항 여부를 정찰하여, 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침입하는가를 살피는”5 것이었다. 말하자면 정보기관이자 밀정 대책기구였다. 임시정부 경무국장직에 5년간 재임했던 김구의 말에 따르면, 범죄자 대책은 두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훈계’ 아니면 ‘사형’이었다. 사안이 경미하다면 전자에 해당하겠지만, 김성근 같은 경우 후자에 해당했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아도 김성근의 행동을 의심쩍게 주목해오던 임시정부 경무국이었다. 그 구성원들은 활동을 개시했다. 이러한 정황을 눈치챈 김성근은 종적을 감췄다.

 

당사자의 말을 들어보자. 김성근이 말하기를, 어떤 친구가 어서 피하라고 밀통해줬다고 한다. 임시정부 경무국 내부에 그를 동정하는 친구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어디로 숨을 것인가? 제때 피신하는 데 성공한 김성근은 서슴없이 상하이 주재 일본총영사관으로 찾아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압박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으니 신변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영사관은 기꺼이 그를 받아들였다. 그에게 은신처와 조선 귀국의 편의를 제공했다. 김성근은 재산까지 살뜰히 챙길 수 있었다. 돈이 될 만한 가산과 집기를 모두 매각하는 데 성공했다. 영사관의 알선으로 조선으로 출항하는 배에 탑승한 때는 1925년 9월12일이었다.6

 

경성에 도착한 뒤에도 김성근은 독립운동에 참가한 이유로 처벌받지 않았다. 이따금 조선총독부에 출입한다는 근황이 언론에 보도됐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는 총독부 경무국 관계자와 함께 해외 독립운동 대응책을 협의했다.7

 

문책은커녕 서훈

 

김성근은 해방 이후까지 살았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사망 연월일은 1950년 2월5일이다. 향년 59살이었다. 죽을 때까지 일본영사관 경찰부의 밀정 노릇을 한 것에 대해 책임을 묻는 일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러기는커녕 그는 사후에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1963년 3월1일 독립유공자상훈심의회의에서 건국공로훈장 단장(短章)을 수여받았다. 오늘날 건국훈장 독립장에 해당하는 높은 훈격이었다.

 

김성근은 지금도 독립유공자로 등재돼 있다. <독립유공자 공훈록>(국가보훈처)에 이름이 올라 있으며, 최근 발간한 <독립운동인명사전>(독립기념관)에도 실려 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에도 그의 이름이 나온다. “일제강점기 구국모험단을 조직하여 단장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기림을 받고 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참고 문헌

1. 상하이시 치안국 경비대, ‘조서’, 1920년 4월29일.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3, 국사편찬위원회, 125쪽, 2008년.

2. 안창호, ‘일기’, 1920년 4월29일. <도산안창호전집> 제4권,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2000년.

3. 송민수, ‘상해 구국모험단의 조직과 활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02, 178~179쪽, 2020년.

4. 警務局, ‘上海在住不逞鮮人의 行動’, 不逞團關係雜件-鮮人의 部-在上海地方 (2), 19~20쪽, 1920년 6월.

5. 김구, <백범일지>(도진순 주해), 돌베개, 302쪽, 1997년.

6. ‘4각관계로 폭로된 상해밀정사건 3’, <동아일보> 1925년 9월27일치.

7. ‘문제의 인물 金聲根, 입경하자 경무국’, <동아일보> 1925년 9월28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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