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ikhailovsky Palace, Hall 5. 18th century. Nikitin, Matveev.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Portrait of a Field Hetman, 1720s. by Ivan Nikitin. oil on canvas . 76 x 60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헤트만(Hetman)은 15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폴란드 왕국,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3국의 연합체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공화국)에서 
국왕 다음의 지위를 지닌 군 사령관직의 호칭이다. 
17세기 후반,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때에는 그 국가 원수의 칭호로써 계승되었다.

화가 이반 니키틴(Ivan Nikitin 1690~1741)은 초상화와 전투 작품을 그린 러시아 화가였다.
니키틴은 모스크바에서 정통 성직자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1716~1720년에 그와 그의 형제 로만 니키틴(Roman Nikitin)은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에 의해 이탈리아로 보내졌다. 
이 형제들은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회화 예술을 배웠다. 
러시아로 돌아온 후 니키틴은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가 가장 좋아하는 궁정화가가 되었다. 
그는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회화 작업을 했다.

1725 프트르 대제의 죽음 후에 니키틴과 그의 형제 로만 니키틴은
총독에 대한 팜플렛을 배포한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이반 니키틴은 
5년 동안 피터와 폴 요새에 수감된 후 토볼스크(Tobolsk)로 추방되었다.

1740년 러시아의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 황후는 
니키틴 형제들을 위한 사면에 서명했고 이들은 1741년에 사면되었다. 
러시아의 새로운 엘리자베스 황후의 요청으로 니키틴은 토볼스크에서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 1741년 말이나 1742년 초에 길가에서 죽었다.

니키틴의 초기 초상화는 전통적인 17세기 파스나 스타일의 강한 영향을 미쳤다.
대부분의 미술사 학자들은 이 작품 (Portrait of a Field Hetman)을 
니키틴의 작품 중 최고의 초상화로 평가한다.

 

Peter the Great on the deathbed 1725, by Ivan Nikitin. oil on canvas. 82 x 60.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표트르 대제가 죽은 직후 이반 니키틴(Ivan Nikitin)은 죽은 황제의 모습을 그리도록 초대되었다. 
초상화는 흰 셔츠를 입은 왕을 묘사하고 있으며, 
가슴을 노란색 커튼으로 덮고 파란색 맨틀에 족제비(ermine) 모피가 있다. 
표트르 대제의 초상화는 위엄 있고 엄숙하며 깊은 슬픔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죽은 황제의 이미지를 보면 그의 평생의 위대함을 이해할 수 있다.

 

Portrait of Tsesarevna Elizabeth Petrovna, 1724(?). by Louis Caravaque. oil on canvas. 56.5 x 50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루이 카라바크(Louis Caravaque 1684~1754)는 러시아에서 일한 프랑스 초상화 화가였다.
카라바크는 마르세이유(Marseilles)에서 태어났다. 
그는 러시아에 가서, 표트르 대제의 초상화,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의 초상, 
엘리자베스 황후의 초상화, 캐서린 2세의 초상화 등을 그렸다.
카라바크는 1754년 6월 9일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다. 

작품의 주인공은 엘리자베스 페트로브나(Elizabeth I Petrovna 1709~1761) 러시아 황후이다. 
엘리자베스 페트로브나는 1741~1761년까지 러시아를 통치했는데
그녀의 통치는 러시아의 계몽주의 시대의 도래와 군사 교육 기관의 개편과 관련이 있다. 
1744년에 초등학교 네트워크를 확장하기 위한 법령이 발표되었다. 
모스크바 (1755)와 카잔 (1758)에 최초의 체육관이 문을 열었다. 

1755년 모스크바 대학이 설립되었으며 1757년 예술 아카데미가 설립되었다. 
1756년에 그녀는 제국 극장 창설에 관한 법령에 서명했다. 
왕실 거주지 배치를 위해 막대한 자금이 재무부에서 할당되었다. 
그녀의 재임 기간에 건축가 라스트렐리(Francesco Bartolomeo Rastrelli 1700~1771)는 
러시아 군주의 주요 거주지로 사용된 겨울궁전(Winter Palace)과 

차르스코예 셀로(Tsarskoe Selo)의 캐서린 궁전(Catherine Palace)을 지었다. 

 

Self-Portrait with Wife, 1727~1729. by Andrey Matveyev. oil on canvas. 75,5 x 90,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안드레이 마트베예프(Andrey Matveyev 1701~1739)는 러시아 예술가였다. 
그는 1701년 노브고로드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마트베예프는 러시아에서 가장 초기의 현대적인 초상화 화가 중 한 명이다.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는 마트베예프의 초기 작업에 대해 알게 되고 
감동을 받아 그를 유럽에서 공부하도록 보냈다. 
1716년부터 그는 네덜란드와 플랑드르에서 11년을 지내면서 공부했다. 
1723~1727년에 그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엔터워프 왕립 예술아카데미 
(Royal Academy of Fine Arts, Antwerp)에서 지냈다. 
그는 러시아 밖에서 가르친 최초의 러시아 예술가였다.

1727년에 마트베예프는 러시아로 돌아와 상트 페테르부르크 법원의 수석 예술가가 되었다. 
1731년경부터 그는 피터와 폴 성당 (Peter and Paul Cathedral)의 인테리어와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 황후를 기리기 위한 개선문을 포함하여
여러 건축 프로젝트에 참여한 화가팀의 책임자였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아내와의 자화상이다. 
네델란드에서 돌아온 마트베예프는 대장장이의 딸인 
이리나 안트로포바(Irina Stepanovna Antropova)와 결혼했다. 
초상화 속의 작가는 오른손으로 젊은 아내를 껴안고, 왼손으로 그녀를 앞쪽으로 가져 와서 
보는 사람에게 더 가까이 가져 오는 것처럼 그녀를 지지한다. 
두 사람의 자세와 움직임은 허식이 없으며, 차분하고 자연스럽고 품위와 은혜로 가득 차 있다. 
초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당대에 예상하지 못한 깊은 서정으로 가득 차 있다. 

마트베예프가 만든 이미지는 개인적 특성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다. 
그는 이미지의 정서적 내용에 초점을 맞춘 자신만의 서정적 초상화를 만든다. 
러시아 미술사에서 매트베예프의 작품은 최초의 자화상이었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5, 18th century. Nikitin, Matveev.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Portrait of Baron Sergei Stroganov, Youngest Son of the Salt manufacturer Grigory Stroganov 
and his Wife Maria, 1726. by Ivan Nikitin. oil on canvas . 87 x 6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반 니키틴(Ivan Nikitin)의 작품으로 소금 제조업체를 세운 그리고리 스트로가노프(Grigory Stroganov)와 
그의 두 번째 아내 마리아 야코브레브나(Maria Yakovlevna)의 막내 아들, 
세르게이 스트로가노프(Sergei Stroganov 1707~1756) 남작의 초상화이다.

세르게이 스트로가노프는 라스트렐리(Francesco Bartolomeo Rastrelli 1700~1771)가 설계하고 건축한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넵스키 대로(Nevsky Prospect)에 위치한 스트로가노프 궁전의 소유자이다. 
세르게이 스트로가노프는 Stroganov Art Gallery의 수집가이자 창립자였다. 
1735년에 그는 소피아 나리쉬키나(Sofia Kirillovna Naryshkina)와 결혼했다. 
그의 아들 알렉산더 스트로가노프(Alexander Stroganov)는 Imperial Academy of Arts의 회장이 되었다.

이 초상화는 1804년 이반 니키틴(Ivan Nikitin)이 직접 서명하고 날짜가 적힌 작품으로 
작가의 서명과 날짜가 적힌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다. 
평론가들은 초상화의 기술이 매우 훌륭하고 다른 작품보다 잘 보존되어 
작가의 개별적인 태도를 더 분명하게 만든다고 평가한다. 

 

Portrait of Peter I, Late 1717. by Louis Caravaque. oil on canvas. 69 x 5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루이 카라바크(Louis Caravaque 1684~1754)는 러시아에서 일한 프랑스 초상화 화가였다.
카라바크는 마르세이유(Marseilles)에서 태어났다. 
그는 러시아에 가서, 표트르 대제의 초상화,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의 초상, 
엘리자베스 황후의 초상화, 캐서린 2세의 초상화 등을 그렸다.
그는 1754년 6월 9일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다. 

표트르 1세 (Peter I 1672~1725)는 차르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Alexei Mikhailovich)와 
그의 두 번째 아내인 나탈리야 나리시키나(Natalia Kirillovna Naryshkina) 사이에서 
알렉세이의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
1682년, 그의 형 테오도르가 죽은 후 그와 그의 형 이반은 차르 왕좌를 계승했다. 
이후 1689년 그는 소피아를 정교회 수녀원에 유배를 보내고 국사를 전적으로 지배했다.  

표트르 1세는 러시아에서 서구의 문물을 들여와 

국가를 발전시킨 위대한 개혁 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오늘날 러시아인들의 생활 속에 남아 있는 대부분의 문물들은 

모두 표트르 대제가 도입했던 것들이다. 
예를 들어 러시아인들이 제2의 빵이라고 여기는 감자와 커피, 담배는 모두 
표트르 대제가 서구를 여행하면서 발견하고 러시아에 들여왔던 문물이다.

또한 대륙국가이던 러시아에 해양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뜨게 한 것도 큰 업적이다. 
1704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아드미랄티 조선소를 건설했는데 

이후 수많은 함선들을 건조하게 되었고 현재까지도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조선소로 남아 꾸준히 선박을 건조하고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바닷가에는 바다를 향해 달리는 모습의 

표트르 1세 기마상이 있고 현재 러시아 해군의 주력함이자 

세계 최대의 수상 전투함인 키로프급 4번함의 함명이 표트르 벨리키다.

표트르 대제 이후 러시아의 가장 큰 변화는 표트르 이전과 이후의 러시아 역사가 
아예 다른 맥락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로 러시아 역사-문화에서 '중세'란 표현은 쓰이지 않고, 
표트르 대제 이전의 러시아는 '고대'라고 쓴다. 

이 고대 시기 러시아는 제국을 표방하기는 하나 '차르'라고 하는 왕정(슬라브족)일 뿐 
다른 국가에 거의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또한 류리코비치 왕조 이후 귀족의 권한도 강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표트르 이후 러시아는 세계사의 정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수도로 한 후 이전에 비해 러시아의 교역량은 수십배로 늘었으며, 
바르샤바에만 있던 대사관도 세계 여러 곳에 존재하게 되었다. 

표트르 대제 당시 쓰인 <차르 표트르 1세 폐하가 1700년 스웨덴 왕 카를 12세에 대항하여 
전쟁을 시작하게 된 정당한 법적 근거에 대한 강론>을 보면 
당시까지 국제무대의 구석에 있던 러시아가 유럽의 공식적 외교 용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로 외교적 부상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강대한 군대, 세련된 외교, 상트 페테르부르크로부터 전해지는 
수많은 외국 문물은 표트르 대제 즉위 30년간 러시아를 일변시켰다.

그리고 이때부터 귀족이라도 군공을 세우지 않으면 고위장교로 올라가기 힘들었기에 
귀족들이 러시아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되었으며, 
이는 조국 방어 전쟁 이후 러시아 최초의 개혁 운동이라 불리는 
데카브리스트의 움직임을 낳는 계기로도 이루어진다.

아울러 표트르 시대 때 러시아의 지도가 처음 만들어지는데, 
이때 우랄 산맥을 경계로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게 되었다. 
이는 러시아에게 그동안 있던 막연한 러시아라는 이미지가 아닌 유럽인으로의 정체성, 
혹은 정체성의 의문을 가지게 만들었으며, 이는 러시아 사상의 조류 중 
큰 줄기인 서구주의를 낳는 계기가 되었다. 
실로 표트르 대제가 남긴 영향력은 러시아의 어떤 군주들보다 컸다.

하지만 표트르 1세의 실책 역시 존재한다. 
표트르의 개혁은 어디까지나 왕권을 제약하는 보야르들을 타도하고 
표트르 1세의 왕권을 강화하는데에 그 목적이 있었지 백성들을 위하지는 않았다. 
개혁을 시행하는 와중에 벌인 상트 페테르부르크 건설 사업, 근대화 정책은 
많은 비용이 드는데 이 당시 러시아는 그것을 감당할만한 경제력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표트르 1세는 귀족과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여해서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려 했는데 이러한 이유로 귀족과 백성들의 개혁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다. 

특히 상트 페테르부르크 건설에 백성들을 강제 동원하여 노임도 제대로 안주고 
가혹하게 부려먹어 도시 건설을 한 것이 비판받는다. 
강제 노역에 백성들을 동원했다가 가혹한 노동과 열악한 대우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보다못한 신하들이 도시 건설을 중단해달라고 간언했는데도 오히려 이를 
힘으로 억누르며 강행했고 도시 건설이 완료될 때까지 죽은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또한 서구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차후 러시아의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었던 농노제를 개혁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더 강화하였다. 
급격한 서구화 정책에 거부감을 가지는 귀족들의 반발을 무마하려면 어쩔 수 없었겠지만 말이다. 
표트르 1세의 통치기 때부터 러시아의 농민 계층은 사유지 농노, 
교회 농노, 국가(국유지) 농노로 분리되었는데, 이 세 부류의 농민들은 
납세자 명부에 등록되어 인두세가 부과되었다. 

결국 농민은 귀족과 교회의 세금과 국가의 인두세에 이중으로 시달리게 되었다. 
게다가 1714년 공포된 칙령을 통해 귀족의 법적 지위를 공고히 하는 한편, 
토지 소유 형태에 대한 법적 통합을 규정하니 이는 귀족의 농노 지배를 더 강화하여 
러시아의 농노제가 공고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예카테리나 2세 때 일어난 푸가초프의 난을 계기로 이런 경향이 심해졌다.

 

Portrait of Princess Natalia Alekseevna, 1716 (?). by Ivan Nikitin. oil on canvas. 83 x 66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나탈리아 알렉세예브나(Natalya Alekseevna 1673-1716)는 1673년 차르 알렉세이와 
그의 두번째 부인인 나탈리아 나리쉬키나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겨우 3살 때 그녀는 아버지인 차르 알렉세이를 잃었으며 이후 그녀는 
어머니와 오빠인 표트르 (후에 표트르 대제)와 함께 지내게 된다.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늘 오빠인 표트르와 함께  지냈기 때문에 나탈리아는 
표트르와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오빠가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지지를 보내게 된다.

표트르 역시 이런 여동생을 아꼈으며 그는 여동생에게 늘 개인적 서신을 보내서 
여러가지 소식들을 알렸었는데 사소한 문제부터 자신이 이룩한 업적이나 
전투에서의 승리 등을 빠짐없이 동생에게 알렸다고 한다.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늘 자신을 지지해 온 여동생에게 오빠가 이렇게 
잘 하고 있단다 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은 마음이 어느정도 있었을 듯하다.

나탈리아는 오빠인 표트르가 서구화 작업을 추진했을 때 이에 대해 거부감을 느낀 
이복언니들과 달리 이에 대해서 어려움없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늘 지지했던 오빠의 일이기에 

자신이 지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여겼을 듯하다. 

표트르 대제가 자신의 첫번째 아내를 수녀원으로 보내버린 뒤, 
궁정에서 나탈리아는 가장 높은 지위의 여성이 된다. 
그리고 나탈리아는 궁정의 가장 높은 지위의 여성으로써 궁정을 이끌어나가게 된다. 
또한 표트르는 여동생을 통해서 그의 연인이 되는 여성들을 만났었다. 
표트르 대제는 다정한 오빠였으며 여동생에게 권위를 부여했었지만 
여동생을 시집보내려는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나탈리아 역시 언니들처럼 혼처를 구하기 애매했었을 듯하다. 
러시아 내에서 남편감을 찾기에는 정치적 위험 부담이 너무 컸었으며, 
그렇다고 러시아 밖에서 구하기도 애매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서구화 되기 시작했다고 러시아는 아직까지도 서유럽과는 좀 다른 나라였으며 
통혼하기가 애매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표트르 대제가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했을 때 나탈리아도 오빠를 따라 그곳에 가지만, 
아직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았던 나탈리아는 자주 모스크바에 머물렀다. 
이에 표트르 대제는 여동생에게 가트치나에 영지를 주고 

그곳에 나탈리아를 위한 궁전을 짓도록 했다. 
나탈리아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첫 병원을 설립했으며 

극장을 만들었고 배우들을 고용하기도 했었다. 
극장을 설립하고 배우를 고용하는 등의 일을 하면서 나탈리아는 스스로 연극 작품을 썼는데 
나탈리아의 연극은 서유럽식 의복 등을 입고 나오는 작품으로 
오빠가 추진하던 러시아의 개혁에 따르는 것이었다.

나탈리아는 표트르의 두번째 아내인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가 정교회로 개종할 때 참석했지만 
나탈리아와 표트르 대제 사이는 점차 벌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특히 1715년 나탈리아가 표트르의 첫번째 아내인 예브도키아 루프키나를 만나러 갔었고 
이에 대해 표트르는 매우 화를 냈다고 한다. 
하지만 나탈리아는 1716년 사망한다. 

제시된 초상화는 러시아 예술가들이 유럽 방식으로 그린 ​​러시아 예술의 가장 초기 작품 중 하나다. 
여 주인공의 모습, 드레스 스타일, 가발, 태도 등은 뉴 에이지 스타일을 말한다. 
그림의 해석에 있지만 여 주인공의 얼굴은 볼륨과 표현으로 작성되었다. 
회화에서 다른 시대의 특징, 예술적 솔루션의 이중성은 세속 예술 형성의 초기 단계에서 자연스럽다. 

 

Portrait of Princess Praskovya Ivanovna, 1714. by Ivan Nikitin. oil on canvas. 83 x 66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프라스코브야 이바노브나(Praskovya Ivanovna 1694~1731)는 1682~1696년 사이에 
표트르 1세와 공동 통치를 한 러시아의 차르 이반 5세(Ivan V)와 
그의 아내 프라스코브야 살티코바(Praskovia Saltykova)의 딸이다. 
그러니까 프라스코브야 이바노브나는 표트르 대제의 조카이자 
안나 이바노브나(Anna Ivanovna) 황후의 누이였다.
프라스코브야 이바노브나의 아버지는 그녀가 두 살 때인 1696년에 사망하고 
그녀는 그녀의 자매와 함께 자랐다.

 

Portrait of Andrei Besyachy by A. M. Apraksin. Between October 8, 1696 ~ 
no later than May 11, 1697. by Unknown artist. oil on canvas. 93 x 88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안드레이 마트비비치 아프락신 (Andrey Matveyevich Apraksin 1663-1732)은 
러시아의 차리나 마르파 마트베브나 아프락시나(Marfa Matveevna Apraksina) 여왕의 
형제로 아프락신(Apraksin) 백작 가문의 일원이다.

 

[영상] Mikhailovsky Palace, Hall 5, 18th century. Nikitin, Matveev.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4, Dionydius, Simon Ushakov, the Stroganov and Tver Icons.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The Mother of God Hodigitria, Circa 1502~1503. by Dionysius and the workshop.

gesso on wood. 141,2 x 105,7 x 3 cm. Mikhailovsky Palace, Hall 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성모는 오른손으로 오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왼손으로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그녀의 팔에 아기 그리스도와 함께 묘사된다. 
다른 도상 유형과 달리 가장 엄숙하고 장엄한 이미지를 나타낸다. 

이 아이콘은 러시아 국가와 군대의 후원자로 간주되었으므로 
이미지가 여러번 복사되어 러시아 전역에 배포되었다.
이것은 엄숙한 우아함과 그림의 정교함으로 구별되는 

고대 러시아 예술의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다. 

 

디오니시오스(Dionysius 1440~1508)는 아이콘 화가, 프레스코 화의 대가이다.
그는 모스크바 가정성당 (Moscow Assumption Cathedral, 1481)에서 

일했으며 모스크바의 시가소프 수도원(Chigasov Monastery), 

페프넛예보 보로브스카이(Pafnutyevo-Borovsky) 및 
조세프 볼로코람스키(Joseph-Volokolamsky) 수도원의 교회 아이콘을 제작했다. 

 

Descent into Hell, Around 1502 - 1503. by Dionysius and Workshop. 

Wood, pavoloka, gesso, tempera. 137.5 x 99.5 x 3 cm.

Mikhailovsky Palace, Hall 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복잡한 여러 부분으로 구성된 중심에는 황금 옷으로 빛나는 
죽음의 승리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있다.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는 검은 연기가 자욱한 구름 모양의 악마들이 

몸부림치는 검은 지옥의 동굴이 있다. 
그리스도는 열두 천사로 가득찬 영광의 푸른 빛으로 둘러싸여 있다. 
긴 창을 가진 천사가 악마를 쳐서 악을 의인화했다. 
천사의 손에는 미덕을 나타내는 흰색 구체가 있다.

 

Dormition, Novgorod. First half of the 16th century. Wood, gesso, tempera. 
146.6 x 117.5 x 3.6 cm. Mikhailovsky Palace, Hall 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 아이콘에서는 등장 인물 선택뿐만 아니라 중앙 장면에 묘사된 축복받은 
동정녀의 죽음에 대한 목격자들의 인물, 자세 및 제스처 등을 보여 주고 있다. 
신학자 요한의 본문에 따르면, 낙원에 들어가는 성모는 
다윗 왕이 그녀의 출신 가족을 맞이했다.

 

The Archangel Michaеl from the Deesis Tier, Mid- 15th century. 
Wood, gesso, tempera. 208 х 96 х 3,5 cm. Mikhailovsky Palace, Hall 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거룩한 대천사 마이클은 기독교, 유대교 및 이슬람과 같은 종교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천사 중 한 명인 주요 대천사이다.
정교회에서 마이클은 천사와 대천사의 거룩한 군대의 수장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미지의 유형은 15세기 중반의 그림을 위한 전통적이며 모스크바 크렘린의 
성모 영보 대성당에서 유사한 Deesis 아이콘의 도상학을 따른다. 
대천사는 빨간 망토와 파란 달마틱을 입고 있다.

 

Candlemas, Tver. About 1450. Wood, gesso, tempera. 103 x 81 x 3 cm.
Mikhailovsky Palace, Hall 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사십 일 된 아기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려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 의식은 모든 맏아들을 주님께 봉헌하는 구약의 율법에 근거하여 모세를 통해 
유대 민족에게 주어지고 모든 경건한 유태인이 거룩하게 지켰다. (출 13 : 2; 22:29). 
누가 복음 (2 : 22-38)에 요약된 평범해 보이는 이 사건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었다. 
작은 아기 형상을 가슴에 안고 있는 성모는 그녀의 독생자를 
세상의 구원의 제단으로 데려가는 여사제로 나타난다. 

 

Lord Almighty (Savior in Strength), from the Deesis tier, Tver. Mid 15th century.
Wood, gesso, tempera. 209 x 135 x 3.2 cm. Mikhailovsky Palace, Hall 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러시아에서 "힘의 구세주"라고 불리는 중심 이미지는
12~13 세기 비잔틴 예술에서 발전했다. 
그리고 예언자 에스겔서와 신학자 요한의 계시의 텍스트를 기반으로 했다. 
이미지의 상징주의는 복잡하고 다면적이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이 이미지는 하나님이 이해할 수 없고 
접근할 수 없다는 표시인 "말할 수 없는 신비"로 남아 있다. 

그리스도는 보좌에 앉아 계시고, 그의 손에는 열린 복음이 있고, 

그의 오른손은 축복의 몸짓으로 들렸다. 
그 뒤에는 빨간색 마름모, 두 가지 색상의 녹색 타원형 및 오목한 면이 있는 
빨간색 직사각형이 있으며 모서리에는 천사, 독수리, 송아지 및 
사자의 이미지와 같은 전도자의 상징이 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모습은 그의 왕권을 강조하고 삼위 일체의 두 번째 인격이자 
새 예루살렘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신성함을 드러냈다.

 

Raising Lazarus, Mid 15th century. Wood, gesso, tempera. 103 x 79 x 3 cm.
Mikhailovsky Palace, Hall 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주님의 기적 중 하나가 제시되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준비를 하신 부활절 6일 전에 그분은 베다니에 오셨고
그곳에서 죽은 친구 나사로를 기적적으로 부활시켰다. 
이 사건의 문학적 근거는 요한복음 본문이었다. 
무덤 근처에 붐비는 사람들 앞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나사로의 부활은 가장 중요한 사건, 즉 그리스도의 지옥으로의 하강, 
조상 아담과 하와의 지옥에서의 탈출, 그리스도의 부활에 앞서 있다.

 

The Archangel Gabriel from the Deesis Tier, Tver. Mid-15th century. 
Wood, gesso, tempera. 210 х 97 х 3,5 cm. Mikhailovsky Palace, Hall 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대천사 가브리엘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전능자의 천사 중 한 명이다. 
에녹서에서 대천사라고 불리는 가장 높은 천사 중 하나다. 
구약과 신약에서 그는 즐거운 전도의 전달자이자 최고의 계시 해석자 역할을 한다. 
그를 위해 환상을 해석하기 위해 다니엘에게 보내졌다.
신약에서 가브리엘 대천사는 세례 요한 (누가 복음 1, 8-22)의 탄생을 알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테오토코스에게 복음을 전한다. (누가 복음 1, 26-38).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4, Dionydius, Simon Ushakov, the Stroganov and Tver Icons.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Old Testament Trinity, Royal workshops. 1671. by Simon Ushakov.

Wood, gesso, tempera. 123 x 89.2 cm. Mikhailovsky Palace, Hall 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구약성서 삼위일체의 이미지는 기독교 종교의 근본적인 교리를 구체화하는데, 
그에 따라 하나님은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의 일체이시다.   
구약은 하나님이 세 명의 순례자 천사의 형태로 백 살의 의로운 노인, 
조상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나타나셨는지 알려준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맘레의 참나무 아래에서 여행자를 대한다. 
천사들은 그들에게 아들 이삭의 탄생을 예언한다.

아이콘의 색상은 흰색, 빨간색 및 베이지 색, 갈색 녹색 및 짙은 녹색, 
금색 및 은색을 조화롭게 결합하고 라일락과 빨간색 바니시가 풍부하다. 
천사의 로브와 날개 그림에 사용되는 분홍색과 보라색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날개 자체는 금 또는 은색으로 쓰여진 축과 미늘이 있는 깃털의 
"생생한" 해석과 하위 페룰이 없기 때문에 특이한 인상을 준다. 

아치 길에 보이는 흰색 방과 흰색 식탁보와 함께 구성에서 가장 밝은 부분은 
무성한 부드러운 컬로 둘러싸인 얼굴이다. 
얇은 분홍색 리본이 천사의 머리카락에 짜여져 있다. 
동시에 각 천사에게는 개별적인 모습이 주어진다.

 

사이몬 우샤코프 (Simon Fyodorovich Ushakov 1626~1686)는 

17세기 후반 러시아의 대표적인 아이콘 화가였다. 
사이몬 우샤코프의 초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의 생년월일은 아이콘 중 하나에 대한 그의 비문에서 추론된다. 
그의 원형 바로크 아이콘의 밝고 신선한 색상과 절묘한 곡선 라인은 
사이먼을 차르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에게 소개한 니콘 총 대주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는 왕실 가족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으며 보그단 키트로보(Bogdan Khitrovo)가 

운영하는 크렘린 무기고에 배정되어 일했다.

우샤코프는 많은 학생과 동료가 있었고 <A Word to Loving-Meticulous Icon Painting, 1664> 
이라는 제목의 아이콘 페인팅에 대한 짧은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대제사장 아브바쿰(Avvakum)과 같은 좀 보수적인 러시아 성직자들 중 일부는 
그의 아이콘이 그들의 취향에 비해 너무 서구적이었기 때문에 "악마의 음란한 작품"으로 간주했다. 
특히 아브바쿰은 우샤코프가 자신의 외모 이후 "육체 성도"를 그렸다고 주장했다.. 
그의 아이콘 중 일부는 서유럽으로 옮겨져 초기 러시아 회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는 1686년 6월 25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Our Father..." Guria Nikitin's circle. 1668-1669. Wood, gesso, tempera. 
131 x 77 x 2.5 cm. Mikhailovsky Palace, Hall 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우리 아버지 ..."와 " 신앙의 상징" 아이콘이 유래된 모스크바의 
볼샤야 폴리앙카(Bolshaya Polyanka)에 있는 네오케사리우스(Neokesariyskiy)의 
성 그레고리(St. Gregory) 교회는 알렉세이 황제를 위하여 오래된 목조 교회 부지에 돌로 세워졌다. 
포스트니코프 (Andrei Savvinovich Postnikov)는 니콘(Nikon) 총 대주교의 개혁을 지지했다. 
아마도 주요 기독교 기도문의 텍스트를 묘사하는 이미지에 포함된 것은 
신앙의 상징 텍스트가 편집된 "도서 참조"의 합법성을 강조하려는 열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이콘은 16세기 중반부터 널리 퍼진 소위 상징적 우화적

또는 신비주의적 교훈적 이미지에 속한다.
분명히 "우리 아버지 ..."라는 음모는 다소 드물다. 
신앙의 상징 주제에 관한 작품과 달리 주로 기념비적인 그림에서 발견된다.

 

"Our Father..." Guria Nikitin's circle. 1668-1669. Wood, gesso, tempera. 
131 x 77 x 2.5 cm. Mikhailovsky Palace, Hall 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마크의 순서 :
1. "우리 아버지는 하늘의 예술처럼." 신약 성서 삼위 일체는 

실체화되지 않은 힘으로 둘러싸여 있다.
2. "당신의 이름이 거룩해집니다." 
3. "왕국이 임하시오." 
4. "당신은 끝날 것입니다 ...". 십자가를지고
5. "우리 일용 할 양식 ...". 
6. "그리고 우리에게 우리의 빚을 남겨주세요 ...". 

탕자의 귀환. 무자비한 채무자의 비유.
7.“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8.“그러나 우리를 악한 자에서 구출하라”
9. "당신의 왕국은 ...". 다음 세기의 왕국.

 

“I Believe” (The Symbol of Faith), Workshop of the Moscow Armoury. 1668~1669
Wood, gesso, tempera. 130 х 77 х 2,55 cm. Mikhailovsky Palace, Hall 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 우리 아버지 ... "와 " 신앙의 상징 " 아이콘이 유래된 모스크바의 
볼샤야 폴리앙카에 있는 네오케사리우스의 성 그레고리(St. Gregory) 교회는 
알렉세이 황제를 위하여 오래된 목조 교회 부지에 돌로 세워졌다. 
포스트니코프는 니콘(Nikon) 총 대주교의 개혁을 지지했다. 
아이콘은 16세기 중반부터 널리 퍼진 소위 상징적 우화적 

또는 신비주의적 교훈적 이미지에 속한다.

문서에 따르면 “신앙의 상징” 아이콘은 이미 15 세기에 

러시아에 존재했지만 17세기부터 살아남은 기념비에서만 추적할 수 있다. 
아이콘은 12개의 특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도의 말씀에 대한 구성을 순차적으로 묘사한다. 

“I Believe” (The Symbol of Faith), Workshop of the Moscow Armoury. 1668~1669
Wood, gesso, tempera. 130 х 77 х 2,55 cm. Mikhailovsky Palace, Hall 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325년 니케아에서 열린 제 1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에서 

신앙의 상징이 작성되고 승인되었으며, 이는 콘스탄티노플의 

제 2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에서도 381년에 보완되었다.

특징의 순서 :
1-3. "나는 한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 세계 창조. 아담과 이브의 창조.
4. "우리를 위한 사람들을 위해서 ...". 출생. 포고
5.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심 ...". 큰 시련. 
6. "그리고 그는 셋째 날에 다시 일어났습니다 ...". 지옥으로 내려갑니다. 부활.
7.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 ...". 주님의 승천.
8. "그리고 영광과 함께 오는 팩 ...". 최후의 심판.
9. "그리고 성령 안에서 ...". 성령의 강림.
10.“... 말한 선지자들. 그리고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에서" 예언자. 
11. "하나의 세례를 고백합니다 ...". 사도 베드로의 설교. 
12. "죽은 자의 부활을 위한 차." 에스겔의 비전.
13.“그리고 다가올 세기의 삶. 아멘". 하늘의 예루살렘.

 

Old Testament Trinity "in being", Mid-second half of the 16th century.

Wood, gesso, tempera, metal. 160.7 x 125 x 3.4 cm. 

Mikhailovsky Palace, Hall 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 아이콘은 중보기도 교회의 ​​주요 신사 중 하나로 간주되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의 삼위 일체에 대한 교리의 진리를 구체화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의미론적, 이데올로기적 및 구성적 중심은 아이콘의 중심이다.
세 천사의 이미지에서 삼위 일체의 이미지. 
중앙 장식품의 도상학은 안드레이 루블레프 수도사의 "삼위 일체"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대에 아이콘 화가의 표준이 되었다. 

아이콘의 특징은 창세기에 설명된 주요 사건과 그에 대한 해석에서 

세계에 대한 자세한 그림을 제공한다. 
삼위일체의 "행동"을 묘사하는 유사한 아이콘이 16 세기 후반에 널리 퍼졌다. 
분명히 그들 모두는 1547년 의 참혹한 화재 이후 모스크바 크렘린의 
성모 영보 대성당을 위해 만들어진 패턴을 어느 정도 따랐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4, Dionydius, Simon Ushakov, the Stroganov and Tver Icons.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Coronation of the Mother of God, 1733. Wood, two mortise dowels, tempera, silk, gesso. 
94 x 69 x 4 cm. Mikhailovsky Palace, Hall 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성모의 대관식은 12세기 말부터 서양 도상학에서 널리 퍼져 왔다. 
교부 전통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의 가정 직후에 성모의 대관식이 하늘에서 열렸다. 
일반적으로 성모의 대관식은 "신의 어머니의 기숙사"라는 구성을 수반한다. 
그것은 17세기 말부터 러시아의 아이콘 그림에서 알려졌다. 
18세기와 19세기에 줄거리는 독립적인 작품으로 표현되었다. 

 

Nativity, Vologda. 1701. by Markov Ivan. Wood, board, without an ark,

two counter-mortise dowels, gesso, tempera. 119.9 x 88 x 3.3 cm. 

Mikhailovsky Palace, Hall 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아이콘 "그리스도의 탄생"은 악천후에 가축의 은신처 역할을 했던 

베들레헴 인근 동굴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누가 복음 (2 : 7-18)의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다. 
이 행사에는 천사의 노래가 동반되었다. 


아이콘의 중앙, 높은 조각된 다리의 요람에는 화이트 보드의 
밝은 녹색 후광에 싸여진 그리스도가 있으며, 그 끝은 성모 마리아가 잡고 있다. 
요람 반대편에는 요셉이 있다. 
아래는 붉은 옷을 입은 주님의 천사가 밤에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있다. 

아이콘의 윗부분에는 노래하는 천사들이 있고, 가운데 두루마리에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누가복음 2:14). 라고 씌여 있다.
아이콘의 중간 부분에서 계속 양치기의 숭배, 그들 중 하나는 
요셉 뒤에 서 있고 다른 두 명은 마리아 근처에 있다. 
젊은 목자는 손에 뿔을 쥐고 있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복음의 본문이 있다. (눅 2:15~18)

땅의 오른쪽 하단에는 "1701년 12월 18일 뉴욕에서 볼로그다시의 이 아이콘은 
마르코프의 아들인 아이콘 화가 이반 그리고레프가 제작했다." 라는 비문이 있다.

 

The beheading of St. John the Baptist, with 16 hallmarks of life, Pskov. XVI century. 
Wood, three planks with an ark, tempera, two opposite dowels, gesso. 87 x 71 x 3.5 cm.
Mikhailovsky Palace, Hall 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세례 요한의 머리 참수"라는 아이콘은 사원 이미지를 위해 특별히 작성되었다.
세례 요한은 제사장 스가랴와 의로운 엘리자베스의 아들이다. 
모성 측면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친척이었으며 그분보다 6개월 일찍 태어났다. 
세례 요한은 헤롯 왕이 베들레헴의 모든 아기를 죽이라고 명령했을 때 죽음을 피했다. 
그는 광야에서 자랐으며 엄격한 은둔 생활을 관찰하면서 금식하고 기도했다. 
낙타 털로 만든 거친 옷을 입고 가죽 벨트로 묶고 야생 꿀과 아카리 다 (메뚜기 속)를 먹었다. 

30세에 세례 요한은 요르단 강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주면서 
유대인들 사이에서 전도하기 시작했다. 
헤롯 대왕의 아들인 헤롯 안티파스 왕이 왕실 잔치 동안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는 
춤을 추며 헤롯을 기쁘게했고, 그 보상으로 세례 요한의 머리를 요구했다. 
헤롯 안티파스는 세례 요한의 머리를 잘라 살로메에게 주었고
세례 요한의 시신은 제자들에 의해 세바스티아시에 묻혔다. 
이 사건은 전도자 마태(Matthew)복음과 마가(Mark)복음에 기록되어 있다.

 

Christ the Almighty on the throne, OK. 1682(?), Wood, tempera. 

156.2 x 107.8 x 3.6 cm. Mikhailovsky Palace, Hall 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왼손에 열린 복음을 가지고 오른손에 축복의 몸짓을 한 

그리스도는 그를 보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그의 발에는 무릎을 꿇고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있다. 

아이콘의 색상 시스템에서는 특수한 색상 시스템이 사용되며, 
여기에서 스펙트럼적으로 반대되는 두 가지 색상인 빨간색과 녹색이 우세하다. 
상징적인 디자인의 맥락에서 그들은 상징적인 소리를 받는다. 
타오르는 붉은색은 그리스도의 고통과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상기시키고, 
녹색 (자연의 생명을 주는 힘의 색)은 부활과 갱신에 대한 희망을 불러 일으킨다. 


다색성을 지닌 야로슬라블(Yaroslavl) 아이콘 페인팅의 경우

이것은 진정으로 혁신적인 접근 방식이었다. 
구성 혁신은 또한 독창성으로 눈에 띄고 있다. 
배경에 제시된 복음 이야기의 에피소드는 전경에 나타난 사건을 

연대 순으로 앞두고 과거에 대한 일종의 언급 역할을 하여 

시간 관점에서 성스러운 역사의 과정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영상] 미하일로프스키(Mikhailovsky) 궁전 Hall 4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3, Andrei Rublev.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St Paul. From Deisus Tier. Moscow, Circa 1408. by Andrei Rublev. gesso on wood. 311 x 104 cm.
Mikhailovsky Palace, Hall 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사도 바울이 성경책을 들고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상징이자 동시에 바울 자신의 글, 
첫 그리스도인에게 보낸 편지에 대해 증언한다. 
전체 앙상블의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성도들의 개성적이고 정확하고 영혼적인 특성이 강조된다.

명확하고 정확한 실루엣과 디테일의 부족은 아이콘이 청중과 가장 먼 
우상 좌의 상부에 그려져 있다는 사실로 설명된다. 
사도 바울의 이미지는 특별함과 웅장함으로 구별되며 
온화함과 명상적 평화의 표현과 조화롭게 결합된다. 


그의 모습은 길쭉한 보드에 뛰어난 기술로 새겨져 있으며, 
실루엣은 자유롭고 유연한 선으로 윤곽이 그려져 있고, 
색 구성표는 주홍색, 짙은 녹색 및 황금빛 황토색의 청명하고 순수한 색조를 결합한다. 

이 아이콘은 안드레이 루블레프(Andrei Rublev 약 1370~약 1425)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동방 정교회 성화, 프레스코에 참여한 중세 러시아의 화가 가운데 하나이다.
안드레이 루블레프의 전기에 대한 확실한 정보는 거의 없다. 
삼위일체의 성 세르지오 수도원과 모스크바에 있는 구세주의 안드로니코프 수도원의 평신도로 
그리스인 테오파네스(Theophanes)와 함께 모스크바 크렘린 (1405)에 수태고지 대성당을 그리는 것을 도왔다.
루블료프는 1430년 1월 29일(또는 1428년 10월 17일) 안드로니코프 수도원에서 사망하였다. 
루블료프의 작품은 디오니시를 포함한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향을 주었다. 

 

Epiphany, About 1408. by Andrei Rublev. Wood, gesso, tempera. 124 x 93 cm.
Mikhailovsky Palace, Hall 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강의 푸른 개울에는 물고기 사이에 두 개의 작은 누드 인물이 묘사되어 있다. 
하나는 등을 돌리고 어깨에 뒤집힌 주전자를 들고 있고 두 번째 몸은 두 마리의 물고기에서 자란다. 
이것은 Yor와 Dan 강의 상징으로 지역의 신을 묘사하는 고대 전통의 반향이다. 
이것은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i Rublev)의 예술이 형성된 것을 
기반으로 한 거대하고 오래된 전통으로 드러난다.

 

Nativity, Early 16th century. Wood, gesso, tempera. 77 x 59 x 2.5 cm. 
Mikhailovsky Palace, Hall 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 아이콘은 알려지지 않은 아이콘스타시스(iconostasis)의 축제 행의 일부였다.  
12월 25일 정교회가 기념하는 대축일의 아이콘 버전 중 하나가 발표된다.
아이콘의 도해법은 복음 텍스트뿐만 아니라 교회 예배의 텍스트, 교부들의 글 및 해석에 기반한다. 


구성의 중심에는 밝은 빨간색 침대에 누워 있는 성모가 있다. 
그녀의 뒤에는 구유에 있는 어두운 동굴을 배경으로 소와 당나귀가 절을 하고 있고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 놓여 있다. 


중앙 이미지의 측면에서 별도의 그룹은 천사, 현자 및 목자 등 
그리스도가 세상에 기적적으로 출현한 증인을 나타낸다. 
아래 부분은 조셉과 장로와의 대화 (왼쪽)와 아기를 씻는 장면 (오른쪽)으로 구성이 마무리된다. 
아이콘의 이미지는 매우 전통적이다. 

 

Saint Gregory the Theologian, 1502~1503. Pavoloka Plank of two parts, 
with an ark, through dowels, gesso, tempera. 157 x 59 x 4 cm
Mikhailovsky Palace, Hall 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세인트 그레고리(St. Gregory)는 풍부한 신학적 유산을 남겼으며 그의 별명은 "신학자"이다. 
에큐메니칼 교사로서의 성 그레고리의 역할은 "신학자 성 그레고리의 교사들"로 묘사된 
페라폰토프(Ferapontov) 수도원의 탄생 대성당 그림에서 강조되었다. 

 

Archangel Gabriel, from the Deesis order, 1502. Wood, pavoloka, gesso, tempera. 
157 x 66 x 3.5 cm. Mikhailovsky Palace, Hall 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대천사 가브리엘(Gabriel)의 이미지는 오른손에 구가 있고 왼손에 척도가 있는 
왼쪽으로 3/4 회전하여 전체 길이로 제시된다. 
파란색 예복(dalmatic)과 녹색 히메이션을 입고 오른쪽 어깨에 매달렸다.

 

John Chrysostom, from the Deesis order,1502. Wood, pavoloka, gesso, tempera. 

157.5 x 58 x 4 cm. Mikhailovsky Palace, Hall 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요한 크리소스톰 (John Chrysostom, 4세기 초기~5세기)은 유명한 교회 작가, 
신성한 전례 본문의 저자로 성자들 중 가장 자주 묘사되는 성도 중 한명이다. 

 

The Incredulity of Thomas, Circa 1500. tempera on wood. 85 x 54 x 3,7 cm.
Mikhailovsky Palace, Hall 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아이콘의 줄거리는 복음 텍스트를 기반으로하며 iconostasis의 축제 행의 일부이다. 
이 아이콘은 부활 후 제자들에게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순간을 보여준다. 
스승이 부활하신 진실을 확신하고 싶은 토마스는 그의 상처를 만져 본다. 


건물을 배경으로 한 연단의 중앙에는 그리스도가 머리를 살짝 숙이고 
그의 상처를 토마스에게 가리키고 있다. 
토마스의 몸짓과 자세, 경외감과 두려움과 감탄. 
그의 손은 그리스도의 손을 뻗었고 그의 등의 실루엣은 그대로 선을 이어가고 있는데 
그 시작은 그리스도의 구부러진 손의 윤곽선이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3, Andrei Rublev.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St Peter. From Deisus Tier. Moscow, Circa 1408. by Andrei Rublev. Wood, gesso, tempera. 

312 x 105 cm. Mikhailovsky Palace, Hall 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이미지는 블라디미르에 있는 
가정 대성당의 아이콘인 큰그림 같은 앙상블에 포함되었다. 
이 아이콘은 높이가 3m 이상으로 매우 크다. 
iconostasis의 길이도 중요했다. 

원본 그림의 보존이 좋지 않아 사도 베드로 아이콘의 색상을 판단할 수 없지만 
선형 리듬이 눈에 띄게 약하고 비율이 거칠고 무겁다. 
심리적 표현력에서 사도 바울의 아이콘보다 열등하다. 

 

Candlemas, About 1408. by Andrei Rublev. Wood, gesso, tempera. 124 x 92 x 3 cm.
Mikhailovsky Palace, Hall 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1408년 아이콘 화가 다니엘(Daniel)과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i Rublev)는 
블라디미르에 있는 성모 가정의 "대성당" 교회의 벽화를 복원하도록 초대 받았다. 
프레스코화 외에도 유명한 모스크바 거장들은 대성당의 아이콘을 그렸으며, 
그들의 디자인은 이전에 만든 모든 것을 능가하고 나중에 그려진 모델의 모델이 되었다. 

이 아이콘은 성모와 요셉이 사십일 된 아기 그리스도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려오고, 
하나님을 받는 시몬과 여 선지자 안나를 묘사하고,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에게 메시아로서 간증하는 것을 묘사한다. 

 

Spas "Ardent Eye", Late 14~early 15 century. Wood, pavoloka, tempera, gesso. 

107.2 x 78.3 x 3 cm. Mikhailovsky Palace, Hall 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열렬한 눈"이라는 별명은 고대 신자들 사이에서 뒤늦게 받은 이미지이다. 
그는 죄 많은 인류를 심판하러 오실 그리스도의 강력한 재림을 지적했다. 
이 아이콘은 모스크바 예술의 뛰어난 작품 중 하나다. 


이미지는 머리의 부드럽게 흐르는 실루엣, 옷의 짙은 빨강과 회색-파랑 색상의 절묘한 조합, 
후광의 십자선, 미묘한 흑백 모델링, 얼굴의 체적 모델링.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이 아이콘은 14세기 말부터 

15세기 초 모스크바에서 그려진 작품 그룹과 비슷하다.

 

Saints Nicholas the Wonderworker and George the Victorious
Late 14 ~ early 15century. Wood, four boards, two stuffed dowels, 
four mortise dowels, gesso, tempera. 159 x 123 x 4 cm. 
Mikhailovsky Palace, Hall 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니콜라스(Nicholas)와 조지(George) 아이콘에서 성 니콜라스는 왼손에 책을 들고 

주교의 옷을 입은 전체 길이로 묘사하고 그의 외모는 절제되고 엄격하다. 
색 구성표는 어두운 십자가가 있는 흰색이 밝게 눈에 띄는 

펠로니온(phelonion)의 다소 어두운 색상을 결정한다. 
그의 목회 사역의 상징으로 가장 밝은 점은 복음이다. 
니콜라스는 책의 모서리가 그 옆에 서 있는 세인트 조지의 팔꿈치에 거의 닿도록 잡는다. 

복음은 외모와 삶의 경로가 매우 다른 두 성도를 하나로 묶는다. 
고령의 현명한 감독과 젊은 군인인 순교자이다. 
니콜라스처럼 세인트 조지는 기도하는 사람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창으로 오른손의 제스처는 성 니콜라스의 제스처에 리드미컬하게 가깝다. 
왼손은 낮추고 땅에 놓인 큰 검을 약간만 지지하며 손잡이는 십자가와 비슷하다. 
완벽한 기능을 갖춘 세인트 조지의 젊은 얼굴, 동일한 평온함과 선명함, 
그의 빨간 망토의 가장자리가 성 니콜라스의 옷에 닿았고 그 아래 부분이 사라졌다. 
전사의 가벼운 갑옷의 색상은 녹색과 빨간색이 지배적이지만 성스러운 순교자의 이미지에 대한 
일반적인 부드러운 구속과 깨달음에 해당하는 소리의 강도가 부족하다.

 

The Old Testament Trinity, Novgorod. Mid-16th century. 
tempera and gesso on wood. 149 x 113,5 x 3,2 cm. 
Mikhailovsky Palace, Hall 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신학적 사상은 세 천사의 식사와 아브라함의 환대를 복음 최후의 만찬의 
원형으로 여기고 그 위에 성체 성사를 세우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 에피소드는 하나님의 삼위 일체의 증거로 해석되었다. 
아이콘의 천사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신조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아이콘의 배경에 대해 묘사된 성경 이야기의 현실은 동시에 기독교 상징이다.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는 방은 그분의 지혜와 신성한 경륜의 상징이며,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 있는 참나무는 생명 나무이며 그분의 부활을 상징하며, 
성령 위의 산은 "휴거의 상징"이다. 

 

Praise of the Mother of God with Akathist in 24 hallmarks, 1550-1560th.
Wood, gesso, tempera. 147 x 113.5 x 3.8 cm. Mikhailovsky Palace, Hall 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성모의 찬양"을 묘사한 아이콘의 중심과 예수 그리스도, 성모, 성인 또는 
휴일을 찬양하는 교회 성가 아카티스트(Akathist)를 나타내는 특징은 
공통 이미지와 상징으로 연결된 단일 주제를 구성한다. 
왕좌에 앉은 마리아 주위에, 성모를 껴안고 있는 11 명의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기적에 바쳐진 예언의 텍스트와 
그녀가 이것들에서 비교되는 속성, 기호와 함께 두루마리를 펼쳤다. 

 

 

 

[영상] 미하일로프스키(Mikhailovsky) 궁전 Hall 3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 The Icons of Ancient Pskov and Novgorod.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Great Martir Demetrios of Thessalonica, Pskov. Second quarter of 15th century. 
Wood, gesso, tempera. 87,8 x 66,8 x 3,6 cm. Mikhailovsky Palace, Hall 2,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데살로니카의 데메트리우(Demetrios)스는 가장 존경받는 

비잔틴 전사 중 한 명이고 위대한 순교자 중 하나다. 
그는 3세기 후반~4세기 초에 고귀한 귀족 가정 출신으로 전사였다. 
일부 소식통에 따르면 테살로니키 총독이었다고도 한다.

 
고대 순교자들에 따르면, 그는 발칸반도 북부의 로마 도시 시르미움 (Sirmium)에서 
막시미안 황제 밑에서 기독교를 전파한 것으로 고통을 받았다. 
6세기 이후로 성자의 이름은 그의 유해 위에 성소가 세워진 테살로니키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세 시대에 성 데메트리우스(Demetrius)는 성자의 몰약 스트리밍 유물과 
그의 기적적인 아이콘이 큰 치유력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가장 유명한 순례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드미트리(Dimitri)의 귀족적인 모습은 프스코프 예술의 전형이 아니다. 
그러나 그 상징적인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아이콘은 

이 아트센터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다. 
이 아이콘은 얼굴의 특정 심리적 긴장감에 의해 

고대 프스코프에서 회화의 이전 표현 기간과 관련이 있다. 
이 작품은 프스코프의 위대한 순교자 바바라 교회에서 발견되었다. 

 

Miracle of St. George and the Dragon, Novgorod. Second half of the 15th century.
Wood, gesso, tempera. 58,5 x 43 x 3 cm. Mikhailovsky Palace, Hall 2,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284~305년까지 통치)에 의해 기독교인 박해 중에 처형된 
기독교 순교자 조지(George)는 러시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인 중 한 명이었다. 
아이콘의 오른쪽 상단 모서리에서 뻗어 있는 하나님의 손은 그것을 이해하는 열쇠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조지는 전능자에게 "좋은 징조,"라고 호소한다. 
조지가 용을 죽인 이미지는 모스크바의 첫 번째 대공인 유리다닐로비치 이후 
모스크바와 러시아 국가의 상징이 되었다.

 

The Raising of Lazarus, The Old Testament Trinity, The Purification, 
STs. John the Theologian and Prochorus. Four-parts icon. Novgorod. About 1497
Four-part icon: Three linden boards, two one-sided dowels, an ark, egg tempera. 

103 x 76.7 x 1.8 cm. Mikhailovsky Palace, Hall 2,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아이콘의 복잡한 구성은 4개의 독립적이고 동시에 상호 연결된 장면의 조합을 기반으로 한다.
"나사로의 부활(The Raising of Lazarus)"은 복음서에 묘사된 유명한 그리스도의 기적을 보여준다. 
"구약성서 삼위일체"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방문한 세 명의 순례자의 이미지로 표현된 
신성의 삼위일체 상징인 기독교 교회의 가장 큰 명절 중 하나의 전통적인 이미지이다.

만남은 자신의 운명을 예언한 신을 영접한 시므온과 함께 
처음으로 성전에 데려온 유아 그리스도의 만남 장면을 묘사한다. 
전도자 중 한 사람인 신학자 요한은 신성경의 말씀을 
프로초러스(Prochorus)에게 지시하는 신성한 조명의 순간에 나타난다.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는 놀라운 비례감이 특징이다. 
모든 구성은 자체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나사로의 부활은 움직임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의 모든 것은 영향의 감정을 향상시키는 대조를 기반으로 한다. 

불일치 리듬, 특히 산봉우리가 서로를 향해 돌진하는 것처럼 
선명도는 주된 색 덩어리인 주황색-따뜻함과 초록색-차가움의 뚜렷한 비교로 음영 처리된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발 아래 떨어진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의 주홍색 망토는 특히 표현력이 풍부하다.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으며 거의 ​​구별되지 않으며 
그의 옷 주름의 혼란스러운 리듬만이 이 이미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삼위 일체"의 구성이 더 균형을 이룬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크기로 강조된 가운데 천사의 사선과 둥근 모양의 반대를 느낄 수 있다. 
"프레젠테이션"에서는 인물과 그룹의 윤곽이 

비정상적으로 활성화되고 이들 사이의 멈춤이 강화된다.

아이콘의 색상은 황토색, 주홍색, 갈색 계피, 다양한 녹지 색, 검은 색 뼈 및 
금색 (배경, 금색 패턴 지원)을 기반으로 한다. 
작품의 모든 특징, 특히 뚜렷한 건축성과 색상 조화는 가장 높은 개화에 도달한 
15 세기 노브고로드 아이콘 그림의 특징이다. 
이 아이콘은 1919년 노브고로드에서 발견되었다.

 

Royal Doors with the image of the Annunciation, Novgorod. 

Late 15th~early 16th century. Wood, tempera. 166.5 x 81.5 x 5 cm. 

Mikhailovsky Palace, Hall 2,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수태고지 이미지가 있는 로얄 도어' 아이콘은 레닌그라드 지역 
고스티노폴리에 마을의 니콜스카야 교회(Nikolsky Gostinopolsky Monastery)에서 왔다. 
니콜스카야 교회는 스타라야 라도가(Staraya Ladoga)에서 멀지 않은 
볼호프(Volkhov) 강 유역에 위치한 가장 오래된 수도원 중 하나다. 


수도원의 건립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미 15세기에 존재해 있었다. 
이와 별도의 아이콘이 15세기 교회의 상징성으로 살아남아 있으며, 
현재는 국립 트레티야코프 갤러리와 러시아 국립 박물관 및 해외 개인 컬렉션에
Deesis 아이콘 6개, 휴일 아이콘 5개, 그밖에 아이콘 2개 등이 보관되어 있다.

'Royal Doors'는 신성한 예배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배의 특정 순간에 문을 열었다. 
그들을 통해 평신도의 친교를 위해 십자가, 복음, 거룩한 선물이 제단에서 나왔다. 
16세기부터 현재까지 이와 유사한 Novgorod의 여러 아이콘이 남아 있다. 
스타일 측면에서 게이트는 15~16 세기 초에 노브고로드 예술의 전형적인 예이다. 
그들의 예술적 구조는 밝고 울창한 색상, 짙은 황토색으로 칠해진 얼굴의 릴리프 몰딩과 
화이트 워시 하이라이트 및 부드러운 갈색이 특징이다. 

 

The Miracle of the Icon of the Holy Sign 
(Battle between the Novgorodians and Suzdalites) Novgorod. 
Early 16th century, gesso on wood. 87,8 х 63,8 х 2,2 cm. 
Mikhailovsky Palace, Hall 2,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 아이콘은 러시아에서 역사적 사건을 표현하고 있다. 
1169-1170 년에 블라디미르 수즈달 왕자 안드레이 보골류브스키

(Andrei Bogolyubsky)의 군대는 노브고로드(Novgorod)를 포위했지만 

볼호프(Volkhov)의 도시 주민들은 아이콘 "Sign"의 중보 덕분에 승리를 거두었다.

작품의 윗부분은 일린 스트리트(Ilyin Street)의 구세주 교회에서 
크렘린(Kremlin)으로 아이콘 "The Sign"이 이전된 것을 보여준다. 
중간 부분에는 요새 성문을 떠난 노브고로디안과 협상하기 위해 파견된 
수즈달 사람들의 의회 의원이 묘사되어 있다. 
동시에 수즈달 사람들은 교활하게 포격을 시작했고 

여러 개의 화살이 요새 벽 위로 올라간 아이콘을 쳤다. 
이를 위해 성모는 수즈달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쳤다.

아래 부분은 성 보리스와 글렙, 알렉산더 네프스키와 노브고로드 군대의 수장에 있는 
거룩한 전사 (아마도 조지)가 적을 만나기 위해 요새를 떠나는 방법을 보여준다.
이 아이콘은 벨리키 노브고로드(Veliky Novgorod)가 모스크바로부터 
독립을 방어해야 했던 15세기 말에 만들어졌다. 
아이콘에는 세 가지 알려진 버전이 있으며 그 중 가장 오래된 버전은 노브고로드 미술관에 있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 The Icons of Ancient Pskov and Novgorod.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Miracle of St. George and the Dragon, with Scenes from his Life, Novgorod. 
First half of the XIV century. Wood, gesso, tempera. 86 х 63 х 2,5 cm
Mikhailovsky Palace, Hall 2,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중세 러시아에서 가장 큰 중심지인 노브고로드(Novgorod)의 예술에 속하는 
가장 흥미로운 해지오그래픽(hagiographic 聖人傳) 아이콘 중 하나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284~305 년까지 통치)에 의해 기독교인 박해 중에 처형된 
기독교 순교자 조지(George)는 러시아에서 가장 인기있는 성도 중 하나였다.


특히 뱀에게 희생을 바친 조지(George)의 엘리사와 공주의 구원과 
"리비아 전체 국가"의 해방에 관한 전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 
뱀 전투기 조지의 이미지는 악의 세력을 정복하는 용감한 전사의 아이디어를 구체화하여 
러시아에서 그의 이름인 전승(Victorious)의 이미지를 구현했다. 
그는 전사 보호자이자 농업 노동의 조수이자 신부의 수호 성인으로 여겨졌다.
중심 이미지 주변에 있는 14개의 특징인 "중심부"는 성인의 삶을 보여준다. 

 

Saint Nicholas the Wonderworker, with a life in 16 hallmarks, 
The beginning of the XIV century. Wood, pavoloka pavoloka, gesso, tempera. 
107.5 x 75 x 2.6 cm. Mikhailovsky Palace, Hall 2,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밀리키아(Mirlikia)의 주교인 성 니콜라스(Saint Nicholas)는 

러시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직자이다. 
성자의 모습의 측면에는 많은 질병의 무상 치료로 유명한 형제 
의사 코즈마(Kozma)와 다미안(Damian)이 있다. 
그들은 또한 대장장이와 보석상들의 후원자로도 간주되었다. 


성 니콜라스 숭배와 같은 성스러운 의사 숭배는 북부에 널리 퍼져 있었다. . 
16개의 특징에는 성탄절, 어린 시절, 교회 계층 구조에 

니콜라의 위치, 성자의 수많은 기적이 제시된다. 
각인의 확장된 구성은 11세기 말부터 러시아에서 기록된 자료로 알려진 
니콜라스의 삶에 대한 아이콘 그림 이미지의 확립된 전통을 증명한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 The Icons of Ancient Pskov and Novgorod.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Descent into Hell, End of the XIV century. Wood, gesso, tempera. 134 x 108 x 2.8 cm.
Mikhailovsky Palace, Hall 2,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노브고로드(Novgorod) 아이콘의 도상 버전은 14세기에 형성되었다. 
그 특징은 장면의 깊은 공간 구성, 다양하고 복잡한 각도로 묘사된 상당수의 인물, 
캐릭터의 표현적인 제스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속히 아담에게로 돌이켰다. 
망토의 끝은 등 뒤에서 펄럭인다. 
이브(Eve)는 무릎을 꿇는다. 

지하 세계에서 해방된 구약의 의인은 얼굴을 돌리고 열린 손바닥을 구속 주께로 들어 올린다. 
그들의 거대한 인물과 넓은 주름의 옷은 활기찬 선으로 윤곽이 그려져 있다. 
얼굴은 풀칠하고 표현력이 풍부한 획으로 조각된다. 
그들의 옷의 진한 빨강, 파랑, 파랑 및 체리 색상은 황토 언덕을 배경으로 돋보인다. 

 

Sts. John of the Ladder, George and Blasius, Novgorod. 
Second half of 13th century. Wood, gesso, tempera. 109 x 67,4 cm. 
Mikhailovsky Palace, Hall 2,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존 클리마쿠스(John Climacus)는 시내산에 있는 수도원에서 6~7세기 기독교 수도사였다.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 동방 정교회 및 동방 가톨릭 교회에서 성인으로 존경받는다.
조지(George)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284~305 년까지 통치) 아래 기독교인 박해 중에 
처형된 카파도키아 출신의 기독교 위대한 순교자이다. 
그는 러시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인 중 한 사람이었다.
노브고로드 사람들의 주요 직업인 농업 및 가축 사육의 수호 성인
성 블라시오(St. Blasius)의 이미지는 이교도 판테온에서 존경받는 벨레스(Veles)로 돌아간다.

 

[영상] 미하일로프스키(Mikhailovsky) 궁전 Hall 2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 Oldest Icons.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러시아 박물관의 고대 회화 컬렉션은 러시아 전체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것 중 하나다. 
여기에는 약 5천 개 이상의 아이콘이 있다. 
미하일로프스키 궁전(Mikhailovsky Palace)의 러시아 박물관 처음 4개 홀에 있는 상설 전시는 
고대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예술 센터인 노브고로드(Novgorod), 프스코프(Pskov), 
블라디미르(Vladimir)에서 제작된 12~17세기의 가장 귀중한 작품들이 일부 선보이고 있다. 

 

Archangel Gabriel with Golden Hair, Novgorod school of painting. 12 century, 
Wood, gesso, tempera. 49 x 38.8 x 2.8 cm. Mikhailovsky Palace, Hall 1,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러시아 박물관 컬렉션에서 가장 오래된 이 아이콘은 

몽골 이전 시대의 가장 눈에 띄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 작품을 노브고로드(Novgorod) 회화 학교에서 작업한 것으로 본다. 
아이콘은 대천사 가브리엘 (Archangel Gabriel)을 묘사한다. 

이미지의 특성과 글의 특성은 비잔틴 예술의 전통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머리카락의 황금실은 고대 예술에서 위대함과 불멸의 상징이다. 
이 아이콘은 분명히 제단 장벽을 위한 것이었고 기도(Deesis) 의식의 일부였다. 

 

Saint Nicholas the Wonderworker, with selected saints in the background and in the fields, 
First half of the 13th century. Wood, three lime planks, traces of lost end dowels, 
two later counter dowels, no pavolok tempera. 67.5 x 52.8 x 2.4 cm
Mikhailovsky Palace, Hall 1,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배경과 들판에서 선택된 성도들과 함께 기적을 행하는 성 니콜라스

(Wonderworker Saint Nicholas)는 전통적이며 동양 기독교 예술에서 

가장 널리 퍼진 것 중 하나에 속한다. 
그러한 도상학 유형은 10세기부터 11세기 초까지 개발되었다.

우리에게 내려온 러시아 아이콘 그림에서 성자의 가장 초기 묘사는 
12~13세기 (Tretyakov Gallery)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브고로드(Novgorod)의 예술에서 아이콘은 게시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13세기 이전에 안정된 캐릭터를 획득했다.

주위에는 그리스도의 몸 주위와 마찬가지로 메달리온과 아이콘의 가장자리에 묘사된 
지상 및 하늘 교회의 성도들과 의인이 모인다. 
이미지의 상징주의는 성도들의 초상화와 함께 메달리온을 배치하여 강조된다. 
천사의 형상과 함께 그들은 그의 머리 위에 아치형 캐노피를 형성한다. 

 

Raising Lazarus, Late 14~early 15 century. Wood, gesso, tempera. 
53.5 x 44 x 4.5 cm. Mikhailovsky Palace, Hall 1,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베다니에서 나사로가 그리스도에 의해 부활한 유명한 복음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사도들과 함께 그리스도는 죽은 나사로가 나흘 동안 묻혀 있는 무덤으로 다가간다. 
나사로의 자매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발 앞에 엎드렸다. 
그리스도는 뻗은 손을 뻗고 "나사로야, 일어나라" 하고 외치자 
수의에 싸여 죽은 사람이 관에서 일어난다. 


나사로의 부활의 도상학은 6-7 세기에 비잔티움에서 형성되었다. 
고대 시대의 아이콘 그림은 풍부한 캐릭터 즉 수많은 유대인 그룹, 
나사로의 관을 해체하고 수의를 풀고 있는 여러 청소년, 
건축 요소가 있는 풍경 커튼 개발과 같은 구성적 특징이 독특하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 Oldest Icons.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The Mother of God of Tenderness of the White Lake, 12th century. 
Wood, gesso, tempera. 156,0 х 107,0 х 2,0 cm. Mikhailovsky Palace, Hall 1,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화이트 레이크의 부드러움의 성모(The Mother of God of Tenderness of the White Lake)'는 
13세기 초의 아이콘이자 극히 희귀한 고대 예술 작품이다. 
그리스도 아이가 어머니에 안겨 얼굴로 뺨을 부드럽게 비비는 
엘레우사(Eleusa) 아이콘은 12세기 이전에 비잔티움에서 확립되었다. 
아이콘 여백의 표현은 훨씬 오래된 전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작품은 예수의 미래에 닥칠 고통을 예견하는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친밀한 소통의 순간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고 전달한다. 
중앙 장식의 상단 모서리에 둥근 메달에 있는 대천사, 
가장자리에 있는 19개의 메달에 있는 선지자와 

거룩한 여성의 이미지는 뛰어난 자발성과 밝기로 구별된다.
사람들은 이러한 이콘에서 중보와 후원을 찾았다.

 

St Boris and St Gleb, Second part of the 14th century. 
gesso on wood. 142,5 x 94,3 x 2,5 cm. Mikhailovsky Palace, Hall 1,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성 보리스(St Boris)와 성 글렙(St Gleb)의 아이콘은 14세기 중반 
러시아 박물관 컬렉션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 중 하나다. 
보리스의 진한 파란색 망토와 빨간색과 금색의 장식 디자인이 빛을 발하면서 
아이콘에 엄숙하고 축제 분위기를 연출한다. 


보리스와 글렙은 러시아에서 기독교의 창시자인 블라디미르 왕자의 두 아들 형제다. 
불라디미르 왕자의 죽음으로 인테르네시네 전쟁이 발발했고 이 때 두 형제가 모두 사망했다. 
보리스와 글렙은 이후 러시아에서 신앙의 수호자로 존경받아 왔다.

보리스는 콧수염과 턱수염이 있고 글렙 (Gleb)은 어깨 위에 머리카락이 느슨하고 젊게 묘사되어 있다.
손에는 순교의 상징인 십자가와 왕권의 속성인 칼이 그려져 있다. 
보리스와 글렙의 이미지 중 러시아 박물관에 속한 이 아이콘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Deesis, First half of the XIV century. Wood, pavoloka, gesso, tempera, metal. 
140 х 110 х 3 cm. Mikhailovsky Palace, Hall 1,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디시스(Deesis)는 기도, 청원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이다. 
Deesis 구성의 중심에는 중보, 사람들을 위한 기도의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전능하신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있다. 
성모, 세례 요한, 대천사 및 성도들이 기도 포즈를 취한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 Oldest Icons.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ohn the Baptist from the Deesis order, Constantinople. 1387~1395. 
Wood, gesso, tempera. 150.5 x 98 x 3 cm. Mikhailovsky Palace, Hall 1,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 아이콘은 7 자리 벨트 모양의 디시스(Deesis) 작품의 일부로, 
6개의 아콘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State Tretyakov Gallery)에 보관되어 있다. 
성 요한은 주님의 선지자이자 세례자이다. 
러시아 국민은 세례 요한에 대해 특별한 경외심을 갖고 있다. 


그리스도와 성모의 아이콘과 함께 세례 요한의 아이콘은 

성상화의 디시스(Deesis) 핵심을 구성했다. 
이 아이콘은 엄격하고 슬픔에 잠긴 금욕적인 은둔자의 모습을 한 성인으로 묘사한다. 
색의 구성을 제한하여 이미지의 금욕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Apostles Peter and Paul, Beginning of the 13th century. 
Wood, gesso, tempera. 139 х 90 х 2,5 cm. Mikhailovsky Palace, Hall 1,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 아이콘은 거룩한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가장 초기에 남아 있는 이미지이다. 
일반적으로 갈색 또는 녹색 스트립의 형태로 아이콘의 아래쪽 부분에 지구를 지정한다. 
상징적으로 이 아이콘은 11세기의 유명한 비잔틴 기념물인 
노브고로드의 소피아 대성당에 있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아이콘과 가깝다. 


성도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받으며 정면으로 그려져 있다. 
그들은 키가 같고 몸짓과 옷이 거의 서로를 반복하여 영적 친밀감을 강조한다. 
그들 위에는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아이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축복하신다.

 

[영상] 미하일로프스키(Mikhailovsky) 궁전 Hall 1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미하일로프스키 궁전 (Mikhailovsky Palace)

 

넵스키 대로의 왼쪽 편에 위치한 미하일로프스키(Mikhailovsky) 광장의 중앙에는 

1825년, 알렉산더 1세 황제의 동생인 미하일을 위해 건립된 

미하일로프스키 궁전 (Mikhailovsky Palace)이 있다. 


한 팔을 벌려 환영을 표하는 푸쉬킨 동상이 서 있는 이 '예술 광장'에는
민속학 박물관, 뮤지컬 코미디 극장, 쇼스타코지치 필하모니, 

무소르그스키 오페라 발레 극장 등이 모여 있다.

이 문화의 중심지에서 단연 압도적인 자태를 뽐내는 것은 
푸쉬킨 동상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러시아 미술관이다. 
노란색의 우아한 건물은 미술관의 중심이 되는 미하일로프스키 궁전

(Mikhailovsky Palace)과 베누아 윙(Benois Wing) 전시관이다.
이 궁전은 1898년 이후 러시아 미술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푸쉬킨 동상과 미하일로프스키 궁전 (Mikhailovsky Palace)

러시아 미술관은 1898년 3월 7일 아버지 알렉산더 3세 (Alexander III)를 기념하기 위해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Nicholas II)가 개관했다.
러시아 미술을 위한 최초 관 주도의 러시아 미술품 전시관이었다.
미술관의 기본이 되었던 것은 니콜라이 2세의 선왕인 알렉산드르 3세의 컬렉션이었다.
여기에는 많은 아이콘화가 포함되어 있었다.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미술관과 에르미타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루미안체프 미술관 등은과감하게 미술품을 교환해서 소장품을 체계화했으며, 

1934년 고고학적 유물들을 분리시켜서 
지금과 같이 순수 미술품을 중심으로 개편되었다.
러시아 미술관은 모두 40만여 점의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미하일로프스키 궁전과 베누아 윙(Benois Wing) 전시관

현재 국립 러시아 박물관은 종합적인 미술 박물관으로,
총 6개의 건물과 2개의 정원을 사유하고 있다. 
본관인 미하일로프스키 궁전과 베누아 윙(Benois Wing) 전시관을 비롯하여
스트로가노프 궁전(Stroganov Palace),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대리석 궁전), 
미하일로프스키(Mikhailovsky) 성, 여름 정원에 있는 표트르 1세의 집으로 이루어져 있고, 
여름 정원(Summer Garden)과 미하일로프스키(Mikhailovsky) 정원을 포함하고 있다.

모스크바의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에 버금가는 방대한 전시량을 자랑하는 
이곳의 주 전시 작품으로는 고대 러시아의 미술품들과 18~19세기의 회화 및 
소비에트 시대의 미술로 그 소장 수가 30만여 점에 이른다. 
특히 이곳에는 러시아의 위대한 아이콘(성상) 화가인 안드레이 류블로프의 작품들을 포함, 
6000여 점이 넘는 성상화들이 전시되어 있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스트로가노프 궁전(Stroganov Palace)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오래 되고 최고의 귀족 거주지 중 하나인  
스트로가노프 궁전(Stroganov Palace)은 넵스키 대로와 
모이카(Moika) 강이 만나는 교차점 모퉁이에 있다. 
지금은 러시아 국립 박물관 컬렉션의 일부를 소장하고 있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스트로가노프 궁전 내부

스트로가노프(Stroganov) 가문은 15세기부터 저명한 상인이었지만,  
대북 전에서 차르의 군대에 상당한 재정적 지원을 한 덕분에
페트로 대왕 통치 때에 귀족 계급으로 올라갔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스트로가노프 궁전 내부

이 가문은 엘리자베스 황후 통치 당시 세르게이 그리고리예비치 스트로가노프 남작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주요 행정관이었던 그의 아들
알렉산더 세르게예비치 스트로가노프 백작에 의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스트로가노프 궁전 내부

궁전의 가장 인상적인 인테리어는 1790년대와 1800년대에  
알렉산더 세르게예비치 백작이 신고전주의 스타일로 인테리어 장식을 
개조하기 위해 고용한 카잔 대성당의 건축가 안드레이 보로니킨이 만든 것이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스트로가노프 궁전 내부

스트로가노프 궁전은 1918년에 국유화되었으며 

원래 귀족 생활박물관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1929년에 문을 닫았고 전시 유물들은 
에르미타주 박물관(Hermitage)에 넘겨졌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스트로가노프 궁전 내부

그 이후로 궁전은 식물연구소와 선박건조 연구 시설을 포함한
다양한 소련 기업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1840년대에 인테리어가 재장식되었고 1995년에 복원되었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스트로가노프 궁전 내부

이 건물은 1988년 정부에 의해 러시아 박물관으로 넘어 갔고  
그 이후로 스트로가노프 궁전은 집중적인 복원 작업의 대상이 되었다.  
2003년 외부 복원이 완료되었고 내부 작업 결과가 점차 공개되고 있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는 신고전주의 대리석 궁전으로 
여름 정원과 수보로프 광장 사이에 있다.
이 궁전은 캐서린 대제(Catherine the Great 1729~1796)가 가장 좋아했던 
그리고리 올로브(Grigory Grigoryevich Orlov 1734~1783) 백작을 위한 선물로 지어졌다.

그리고리 올로브는 캐서린의 남편인 러시아의 표트르 3세를 전복시킨 
쿠데타를 이끌었고 캐서린이 황후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몇 년 동안 그는 사실상 캐서린과 공동 통치자 였지만, 
캐서린과의 반복되는 불신과 다른 고문들과의 적대감으로 인해 권력에서 밀려났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내부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내부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내부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내부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내부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내부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내부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내부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내부

 

[영상]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과 정원

1990년대 초부터 미하일롭스키 성과 정원은 러시아 미술관의 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는 초상화 갤러리로 러시아 제국의 황제, 황후의 공식 초상화 등이 전시되고 있다.
엔지니어링 성(Engineering castle)이라는 애칭이 있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남쪽)

18~19 세기에 미하일롭스키 성(Mikhailovsky Castle)은 
표트르 1세(Paul I)의 주요 거주지로 지어져야 했다. 
폰탄카(Fontanka) 강과 모이카(Moika) 강이 합류하는 곳에 성을 건설하기로 한 것은
이곳이 표트르 대제 가족들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초, 모이카 강 유역을 따라 차르의 여름 정원이 뻗어 있고, 
여기에는 표트르 1세의  여름 궁전과 캐서린 1세의 황금 저택이 있었다.

1745년 이 지역에 엘리자베스 페트로브나 황후의 제 3의 여름 궁전이 지어졌고, 
그곳에서 미래의 황제인 파벨 페트로비치가 1754년에 태어났다. 
미하일롭스키 성(Mikhailovsky Castle)은 뛰어난 러시아 건축가 
바실리 바제노프(Vasily Ivanovich Bazhenov)에 의해 12년에 걸쳐 만들어졌지만 
표트르 대제가 직접 자신이 거주할 궁전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궁전 건설은 표트르 대제가 왕좌에 오른 후에야 시작되었다. 
표트르 대제는 이곳을 미하일롭스키 궁전(Mikhailovsky Palace)이라고 명명했다.

 

미하일롭스키 궁전 표트르 1세(Peter I) 기념비 

광장 중앙에는 1799년 3월 3일 표트르 1세의 법령에 따라 조각가 
프란체스코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 (Francosco Bartolomeo Rastrelli)의 
모델에 따라 만들어진 로마 황제의 형상에 표트르 1세의 승마 기념비가 세워졌다.

라스트렐리의 표현에 의하면 황제는 새로운 수도를 둘러보고 있다고 한다. 
표트르 대제의 모습은 놀랍도록 강력하다. 
그는 발에 로마 샌들을 신고 무릎 아래에 사자 반 마스크를 착용한 군용 갑옷을 입고 있다. 
그의 가슴과 어깨에는 구호의 외투가 달린 로브가 드리워져 있다. 
왼손에는 강한 말의 고삐를 잡고 오른손에는 사령관 막대가 있다.
조각품의 높이는 4.6m, 받침대 높이는 6.2m이다.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안뜰에 있는 표트르 1세(Peter I) 기념비

1797년 2월 26일에 새 저택의 기초가 세워졌다. 
표트르 대제는 4년 동안 건설 작업의 진행 상황을 직접 모니터링했다. 
새로운 거주지 "미하일롭스키 성(Mikhailovsky Castle)"의 이름은 
표트르 대제의 애착 때문이었다. 
중세 시대 성의 건축물이 그를 매료시켰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내부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의 남쪽 주요 정면은 광장을 향하고 있다. 
궁전은 사방이 물로 둘러싸여 있었다. 
모이카 강에 의해 씻겨진 섬의 북쪽 해안은 화강암으로 옷을 입었고 
대포가 설치된 두 개의 세미바스티언이 있었다. 
대포는 폰탄카 강변에도 설치되었다. 
운하는 서쪽과 남쪽에 만들어졌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내부

궁전의 계획은 둥근 모서리가 있는 정사각형이며 
그 중앙에는 팔면체 폐쇄 안뜰이 있다. 
주요 정면 측면에서 안뜰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3중 돌다리가 있는 부활의 문이 표시되어 있다. 
황실 가족과 외국 대사만이 다리의 중앙 경간을 통과 할 수 있었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내부

오른쪽으로 폰탄카 강이 흐르고 뒷쪽에 여름 정원과 화성 필드(Mars Field), 
왼쪽으로 미하일로프스키 정원(Mikhaylovskiy Garden)이 있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내부

표트르 대제의 법령에 의해 "성(Castle)"이라는 단어는 
도시와 교외의 다른 거주지 이름에도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겨울 궁전(Winter Palace)은 겨울 성(Winter Castle)이 되었다.
하늘 군대의 지도자인 대천사 미가엘-미하일(Mikhail)의 이미지도 표트르 대제가 애용했고
표트르 대제는 미하일을 하늘의 후원자로 받아 들였다. 
대천사 미가엘의 이름으로 성의 이름이 정해졌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내부

그러나 거주지의 이름 만이 중세 성을 연상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Mikhailovsky Castle"이라고 할 때 
일반적으로 붉은 벽돌로 된 건물 하나만을 의미한다. 
표트르 대제 당시 이 문구는 웅장한 궁전과 
여름 공원 앙상블이었던 황실 거주지를 의미했다. 
그것은 네바 강에서 넵스키 대로 방향으로 폰탄카 강을 따라 
광대한 영토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전 여름 정원을 포함하고 있었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내부

 

[영상] 미하일롭스키 성(Mikhailovsky castle) 둘러보기

 

국립 러시아 박물관 - 여름 정원과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네바(Neva) 강변에 있는 여름 정원(Summer Garden)은 기하학적 원리에 
충실하게 디자인되어 희귀한 꽃과 식물들을 식재하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유럽에서 들여온 새로운 대리석으로 분수와 조각을 만든 원조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여름 정원의 문장(紋章) 분수 (Heraldic fountain) 

 

국립 러시아 박물관 - 여름 정원

 

국립 러시아 박물관 - 여름 정원 숲 터널

 

국립 러시아 박물관 -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여름 정원

 

[영상] 여름 정원 둘러보기

 

국립 러시아 박물관 -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Summer Palace of Peter the Great)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Summer Palace of Peter the Great)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지어진 최초의 궁전이자 수도관이 있는 도시 최초의 건물이었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내부 

 

국립 러시아 박물관 -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내부 

 

국립 러시아 박물관 -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내부 

 

국립 러시아 박물관 -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내부 

 

[영상]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Summer Palace of Peter the Great)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미하일로프스키 궁전 (Mikhailovsky Palace)

미하일로프스키 궁전 (Mikhailovsky Palace)은 넵스키 대로 옆, 그리스도 부활성당 바로 옆에 있다. 
가장 가까운 지하철은 넵스키 프로스펙트 역이고 근처에 카잔 대성당도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중심가는 도보로 커버 가능한 범위기 때문에 찾아가기는 어렵지 않다.

에르미타시 박물관이 주로 서유럽 및 그 외 전 세계의 문화재들을 전시하고 있다면 
여기는 주로 러시아 본국의 명작들을 전시하고 있다. 
러시아인들은 에르미타시보다 여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정면이 아니라 가장자리에 조그마한 문에 있다.

 

입장 후 인증샷

 

 

 

임경석의 역사극장

피살 51년 만에 발견된 빨치산 비밀 아지트의 주인공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위원장으로 빨치산 이끌다
1954년 피살된 박영발의 청년 시절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을 떠날 즈음에 촬영한 36살 박영발. 임경석 제공

 

2005년 2월, 지리산 깊은 산중에서 박영발(朴榮發) 비트(비밀 아지트)가 발견됐다. 반야봉 중허리 함박골의 험한 산비탈에서였다. 세월이 흘러 백발이 성성한 빨치산 참가 생존자들이 찾아낸 이 천연동굴에는 놀랍게도 옛 자취가 남아 있었다. 무전 통신에 사용됐을 전선줄, 흰색 주사용 앰풀, 깨진 갈색 유리병, 수십 개의 폐배터리, 낡은 검정 고무신짝 등이 뒹굴고 있었다.1

 

주인공이 사망한 지 51년이 지났는데도 생전에 그의 손길이 닿았을 유품은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그뿐인가. 반경 10m 내에는 3층으로 쌓아올린 돌 위에 흙을 얹어 평평하게 다진 구들장이 있었고 근처 바위틈에서 인쇄용 등사기와 롤러, 잉크통이 발견됐다. 잉크통 속에는 마르지 않은 등사용 검정 잉크가 가득 차 있었다.2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위원장으로서 1954년 3월19일 피살될 때까지 최후 국면의 빨치산을 이끌던 박영발의 조난 장소 풍경이었다.

 

1932년 9월2일 체포 당일 동대문경찰서에서 작성한 피의자 박영발 신문조서 첫 장. 임경석 제공

 

“몰락해가는 부농층 봉건 가정”의 산골 소년

 

“1913년 6월12일 경북 봉화군 내성면 화천리에서 출생하였다. 곳은 산골 농촌이며, 집은 몰락해가는 부농층 봉건 가정이었다. …학교 입학은 거주하는 지리적 조건과 가정의 빈궁(어머니의 사정)과 불화로 인하여 불가능하였다.”3

 

박영발은 뒷날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길에 오를 때 작성한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산골 농촌’이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줄기가 나뉘는 산악지대에서 태어났다. ‘봉화군 내성면 화천리 176번지’, 이것이 그의 본적지이자 출생지 주소였다. 오늘날 도로명 주소로 표기하면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사계당길 17’에 해당한다.

 

자기 집을 ‘부농층 봉건 가정’이라고 표현한 점이 눈길을 끈다. ‘가정의 빈궁과 불화’로 인해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뒷부분 언급과 모순된다. 하지만 집안 사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문장 다 실제와 같았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부친은 1년에 40석 정도를 수확하는 부유한 농촌 거주자였다.4 중소지주였던 것 같다. 1910~20년대 농가 호당 평균 수확량이 5∼6석이었음을 고려하면,5 부친의 생활수준은 농촌 평균보다 7∼8배 더 유족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부친은 두 집 살림을 차렸다. 자신과 동갑내기인 아내가 35살이 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자, 8년 연하의 젊은 여성을 둘째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아마 ‘첩’이었을 것이다. 과연 새로 맞은 부인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첫아들을 낳은 데 이어 몇 년 뒤 둘째 아들도 출산했다. “첩 살림은 밑 빠진 독에 물 길어 붓기”라는 속담도 있듯이, 부친은 둘째 부인의 살림에만 돈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정실 부인이 36살에 뒤늦게 아들 박영발을 낳았음에도 부친의 편애 습성은 바뀌지 않았다. 박영발이 ‘가정의 빈궁과 불화’라는 말에 괄호를 달아서 ‘어머니의 사정’이라고 덧붙인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모스크바 유학 중 박영발이 직접 쓴 <자서전>. 임경석 제공

 

‘왕복 4시간’ 학교 대신 한문 서당에서 학업

 

박영발은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하나는 어머니가 가난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학교에 보낼 여력이 없었던 것 같다. 또 하나의 이유는 ‘지리적 조건’이었다. 그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초등 교육기관은 군청소재지인 내성면 포저리의 내성보통학교였다. 거리가 8.9㎞에 달했다. 성인 걸음으로 2시간15분이 걸렸다. 학교에 가려면 날마다 왕복 4시간30분을 걸어야 했다.

 

그 대신에 박영발은 전통 방식의 한문 교육을 받았다. 7살 되던 1919년부터 15살 되던 1927년까지 동네에 개설된 한문 서당에 통학했다. 학업이 중단된 적도 있었다. 집안의 농사를 돕기 위해서였다. 중단된 기간을 제외하면 그의 한문 수학 기간은 1919년 6월∼1922년 3월, 1925년 4월∼1927년 12월, 도합 5년5개월이다.

 

“1930년 7월에 동리에서 박학택, 황윤경 등 13인 동지들과 함께 독서회 조직에 참가하였다. 그것의 발전으로 1931년 5월에는 봉화적색농민조합 조직에 참가하였다. … 1932년 2월에 서울로 왔다. 그때 정길성 동지의 지도 밑에서 경성적색노조준비회라는 지하조직의 연락 공작을 맡았다.”

 

박영발이 처음 비밀결사운동에 참가한 것은 18살 때였다. 1930년 7월, 봉화군의 청년 13인이 은밀하게 만든 독서회를 통해서였다. 명단이 다 판명된 것은 아니지만 그중 지도적 역할을 맡은 이는 황윤경(黃潤慶)과 박항택(朴恒澤)이었다. 연령으로 보면 각각 7년, 4년 연상의 선배들이었다. 특히 황윤경은 1920년대 중반부터 이미 그 지역 사회주의운동에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었다. 프로운동자동맹, 봉화청년동맹, 경북청년연맹 집행위원, <조선일보> 봉화지국 기자, 신간회 봉화지회 조사부장 등이 그가 맡은 직책이었다. 독서회 참가자 가운데 박영발은 나이로 치면 막내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독서회란 18∼25살에 해당하는 봉화군 청년층이 비밀리에 조직한 사회주의 연구 단체였다.

 

독서회를 만든 그해에는 혁명적 고양기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대중 투쟁의 급격한 분출이 있었다. 반일시위와 동맹파업 등 전 조선의 학생 봉기가 고조된 게 바로 그해 봄이었다. 농민들도 움직였다. 해마다 평균 200건 안팎이던 소작쟁의가 700건 안팎으로 급증한 해가 1930~31년이다. 농민폭동도 자주 일어났다. 특히 함경도 일대에서는 마치 해방구를 연상하게 할 정도로 농민운동이 활발했다.6

 

박영발 비밀 아지트 출입구. 통일뉴스 김규종

 

경북 봉화군 청년들의 비밀 독서회

 

독서회 참가자들은 그 시기 혁명적 정세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들은 1년도 채 지나기 전에 봉화적색농민조합을 조직했다. 1931년 5월의 일이었다. 적색농민조합이란 모스크바에 소재하는 농민조합인터내셔널(크레스틴테른) 계열의 혁명적 농민단체를 가리키는 말인데, 지주와 부농을 배제하고 빈농·중농을 위주로 하는 농민단체였다. 당연히 비밀결사였다.

 

박영발도 적색농민조합에 참여했다. 그는 조직과 선전 분야를 담당했다. 각 마을 단위로 8개 농민야학을 설립했고, 그것을 중심으로 적색노조의 마을별 세포조직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자기가 사는 마을, 내성면 화천리에도 야학교를 세웠다. 농민 30여 명이 모여들었는데, 주로 조선어와 산수를 가르치고 계급의식 고취에 힘썼다. 특히 양반과 상민 사이 차별적인 계급적 언어를 폐지하고 평등한 언어를 사용하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존댓말과 반말을 구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하도록 이끌었다. 파격적인 시도였다. 오래된 언어 규범을 바꾸는 일이라 대도시에서도 어려웠을 터인데, 하물며 유교적 전통 규범이 강력하게 잔존한 경상북도 농촌지대에서야 말할 나위도 없었다.

 

농민야학, 반상 차별 반대, 소작료 인하 투쟁…

 

그해 12월에는 소작쟁의까지 이끌었다. 소작료 인하가 쟁점이었다. 당시 통용되던 소작료율 50%를 40%로 낮추려고 했다. 4·6제를 내건 것이다. 그에 더해 고용 농민인 머슴의 품삯 인상도 요구했다. 쟁의는 한때 성공했다. 그러나 마을 중소지주들은 대부분 그의 친척이었다. 그는 문중의 배척을 받았다. 친척 어른들에게 경제적으로 손해를 끼치는 것도 문제거니와, 양반·상민 사이 엄연한 위계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비밀결사의 존재가 노출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한 박영발은 고향을 떠나야 했다.

 

1932년 2월 경성으로 갔다. 봉화군에 인접한 이웃 고을 영주 출신인 정길성(丁吉成)의 인도를 받았다. 정길성은 7년 연상으로, 영주청년동맹, 신간회 영주지회에 참여한 이래 경성과 영주를 오가면서 적색노동조합과 사회주의운동에 줄곧 몸담은 신뢰할 만한 고향 선배였다. 박영발은 상경과 동시에 비밀결사 경성적색노동조합준비회에 가담했다.

 

“1932년 9월2일 종연방적(鐘淵紡績) 앞에서 살포된 격문 사건과 국제청년데이 경계수색을 겸하여 동대문 밖 신설리 방면에 출장하여 밀행하던 중, 신설리 132번지 앞에서 일견 노동자풍의 조선인 남자를 목격하고 거동이 수상한 자로 인정하여 현장에서 취조한바….” 7

 

동대문경찰서 순사부장 김승종은 상부에 올리는 ‘사건 인지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사건의 첫 단서를 얻은 경위에 관해서였다. 신설리 132번지 앞에서 잠복경계근무 중이었다고 한다. 오늘날 전철 신설동역 오거리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전날 밤 근처 방적공장에서 격문이 살포됐고 이틀 뒤에는 국제청년데이가 도래하기 때문에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다. 현장에서 거동이 수상해 뵈는 노동자풍의 조선인 남자를 포착했다. 아마 잠복근무 중인 사복경찰들을 발견하고서 쭈뼛거렸던 것 같다. 경찰은 그를 붙잡았다. 그게 뜻밖에도 ‘좌익노동조합조직준비회 사건’의 발단이 됐다고 한다.

 

연락원 임무 수행 중 경찰에 붙잡혀

 

박영발은 레포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레포란 연락원을 뜻했다. 그의 품에는 인텔리 출신의 저명한 국어학자이자 언론인인 대산(袋山) 홍기문(洪起文)에게 전하는 정길성의 비밀 편지가 감춰져 있었다. 전차를 타고서 동대문경찰서로 연행 중이었다. 박영발은 틈을 봐서 편지를 입속에 집어넣었다. 씹어 삼킬 작정이었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발각되고 말았다. 강제로 입을 벌려야 했고, 결국 유일한 증거물품이 압수됐다. 단지 의심스러웠을 뿐인 그의 혐의는 지극히 엄중한 것으로 바뀌고 말았다.

 

9월2일에 시작된 수사는 10월18일까지 계속됐다. 혐의자 백수십 명이 경찰에 피검됐고, 삼엄한 취조 끝에 비밀결사 관련자 29명이 검찰로 송치됐다. 이 기간에 박영발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문을 겪어야 했다. 그의 표현을 따른다면 “고문에 의하여 발병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다. 박영발은 제 발로 걸어 나오지 못했다. 함께 피검됐던 노동운동 동료 정재철에게 업힌 채로 경찰서 문을 나와야 했다. 그는 근육 위축으로 인한 앉은뱅이가 됐다. 필사적인 재활 노력 끝에 다시 걸을 수 있게 된 것은 4년이 지난 1936년 5월부터였다. (다음 연재에 계속)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김경대 기자, ‘전후 빨치산 비트 최초 발굴’, <시민의 소리> 2005. 2.19. http://www.siminsori.com/news(검색일 2021. 4.27.)

2. 이현정 기자, ‘살아남은 빨치산들, ‘박영발 비트’ 찾다’, <통일뉴스> 2005. 5.10., https://www.tongilnews.com/news(검색일 2021. 4.27.)

3. 박창일(본명 박영발), <자서전>, 1948. 8.9.,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4 л.12-14об

4. 경성동대문경찰서, ‘피의자신문조서(朴榮發)’, 4쪽, 소화 7년(1932) 9월2일.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85-국편-0259-0006

5. 김재훈, ‘1925-1931년 미가 하락과 부채불황’, <한국경제연구> 15, 233쪽, 2005

6. 이준식, <농촌사회변동과 농민운동>, 민영사, 465쪽, 1993

7. 京城東大門警察署 巡査部長 金昇鍾, ‘좌익노동조합조직준비회사건 인지보고’, 1~2쪽, 1932년 9월2일, 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 85-국편-0259-0005

 

 

 

상원 광장 (Senatskaya Ploshchad)

상원 광장 (Senatskaya Ploshchad)은 성 이삭 대성당 앞 네바 강 왼쪽 제방에 위치해 있다.
1782년부터 1925년까지는 피터 광장(Peter's Square)으로
1925년부터는 데카브리스트 광장 (Decembrists 'Square)으로 불렸다가
2008년부터 상원 광장 (Senatskaya Ploshchad)으로 바뀌었다.
여기에서 '상원'은 캐서린 대제의 통치 기간 동안 "상원 광장"으로 옮겨진
러시아 제국의 상원을 의미한다.

상원 광장은 동쪽의 해군성 건물로 둘러싸여 있다. 
서쪽에는 상원 건물과 현재 러시아 헌법재판소 본부 건물이 있다. 
표트르 대제를 기리는 동상인 청동 기마상 기념비는 1782년부터 광장에 세워져 있으며
이곳의 공식 명칭은 '피터 광장'이다.

데카브리스트 난은 1825년 12월, 러시아 제국에서 일부 청년 장교들이 
입헌 군주제의 실현을 목표로 상원 광장에서일으킨 난이다. 
'데카브리스트'는 12월을 뜻하는 러시아어 '제카브르'(декабрь, December)에서 기인했다.
이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유럽의 자유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일어난 일이었다. 
여기서 데카브리스트란, 개혁을 부르짖으며 

혁명을 일으켰던 청년 장교들을 총칭해서 부르는 말이다.

제1차 세계대전인 나폴레옹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고 파리를 점령한 것이 
데카브리스트 난의 발생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1814년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알렉산드르 1세는 비록 삽질을 거듭하긴 했지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권좌에서 축출하고 파리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이 때 황제를 따라 간 청년 장교들은 발전한 프랑스 사회의 모습과 
자유주의의 향기를 맛보고 조국 러시아의 낙후된 현실과 비교하게 된다. 

그들의 눈에 비친 건 전제 정치와 농노제에 신음하고 있는 러시아의 모습이었다. 
청년 장교들은 지배층이 스스로 개혁하지 않으면, 아래의 농노들이 
언젠가 들고 일어나 결국 지배층들을 몰락시킬 것이라는 위기감에 휩싸이게 된다. 
따라서 지배층이 먼저 개혁을 선제적으로 해나가는 
일종의 위로부터의 개혁을 자신들의 사상적 근거로 삼게 된다.

1816년, 러시아 황실 근위대에서 알렉산드르 무라비요프(Alexander N. Muravyov)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청년 장교들이 개혁을 꿈꾸며 

구제동맹(Salvation union)이라는 결사를 조직한다. 
이들은 시간이 지나며 이견이 생겨 공화정을 꿈꾸는 

남부 결사(Southern Society), 입헌군주제를 꿈꾸는 북부 결사(Northern Society), 

연방제를 주장하는 통일 슬라브 연맹 등으로 분리된다.

그러던 1825년,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나폴레옹 전쟁의 영웅 
알렉산드르 1세가 승하하고 난 뒤, 후계자가 분명하지 않아 일대 혼란이 발생한다. 
알렉산드르 1세는 아들이 없어서 동생 니콜라이 1세가 황위를 물려받았는데, 
이에 혁명가들은 알렉산드르의 동생이자 니콜라이의 형인 폴란드 총독 
콘스탄틴 파블로비치(1779~1831)를 옹립한다는 명분으로 
니콜라이의 즉위식 날인 12월 14일에 반란을 일으켜 상원 광장에 집결했다.

옹립 대상이었던 콘스탄틴 파블로비치는 원래 니콜라이보다 계승 순위가 앞섰다. 
또 나이 차이가 나는 니콜라이 1세와 달리 나폴레옹 전쟁에서 군인으로 활약해 추종자가 많았다. 
하지만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 출신 아내와 이혼하고 새 아내인 
폴란드 귀족 출신의 요한나 그루진스카(Joanna Grudzinska)와 재혼했는데, 
아내의 신분 때문에 알렉산드르 1세가 제정한 귀천상혼에 걸려 콘스탄틴의 후손은 계승권을 잃었다. 
이 때문에 본인도 황위에 뜻이 없어서 알렉산드르 1세가 승하한 직후 순순히 니콜라이에게 양보했다.

그런데 정작 니콜라이는 이 사실을 몰랐고, 계승권에서 형을 건너뛸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설득하기 위해 콘스탄틴 본인이 수도인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폴란드를 오가며 꽤나 고생했고, 결국 니콜라이가 계승을 받아들인 것이다. 

데카브리스트들은 이 공백과 혼란기 때 상원 광장에서 봉기했다.
그러나 데카브리스트들의 준비와 조직이 충분치 않았고, 
사령관을 맡기로 했던 사람들은 도망쳤다. 
니콜라이 1세는 즉위식 날부터 피를 보기 꺼려 유화적으로 나왔지만, 
결국 반란군 3천 명은 총격 끝에 포병까지 동원한 충성파 군대 9천 명에게 진압당했다.
결말이 이랬기 때문에 훗날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서 있는 혁명', 
'소리만 내는 혁명'이라는 비아냥을 얻기도 했다.

청년 장교들은 전원 체포되거나 사살되었다. 
니콜라이 1세는 살아남은 장교들을 가혹하게 처벌했다. 
체포된 자들은 시베리아 유배형에 처해져 다시는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이후 니콜라이 1세는 철저한 반동정치를 취하게 된다. 
그는 황제 중심의 독재체제를 확립시켰으며, 비밀경찰을 운용하고, 검열제도를 강화했다.
데카브리스트의 난 이후 콘스탄틴은 처벌을 받지 않고 
폴란드 총독직을 계속 맡다가 그 곳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100여년 뒤 결국 러시아 제정이 혁명으로 몰락하게 되면서 
귀족들이 모조리 숙청당하게 되고 특권을 내려놓지 않으면 결국 
다 같이 망한다는 그들의 생각이 맞았음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여담으로 이 사건으로 장교, 지식인들이 시베리아 등지로 

유배를 많이 갔는데 그 중 하나가 이르쿠츠크다. 
이르쿠츠크는 이들의 영향으로 문화, 예술 등이 상당히 발전해서 
오늘날 시베리아의 파리라는 이름이 불릴만큼 아름다운 도시가 되었다. 
이르쿠츠크 버스터미널 근처에 이들 중 한 명인 볼콘스키 공작이 
살았던 저택을 복원한 박물관이 있어 가 본 적이 있다.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이 보여준 순애보도 유명한데, 이혼과 재가를 전제로 

귀족 작위를 유지하든지 맨손으로 시베리아로 가든지 

택하라는 협박에 굴하지 않고, 남편을 따라갔다고 한다. 
다만 남편들은 실의에 빠져 술에 취해 살거나 현지 여자들과 
바람난 경우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별거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다시 돌아온 사람은 드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소련 시대에 강한 여성상을 나타내는 캐릭터들로 많이 띄워졌다.
2019년 개봉한 러시아 영화 <구제동맹(Union of Salvation)>이 
바로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주제로 한 영화이다.

 

[영화] Union of Salvation 2019 (Decembrist revolt 1825)

한글 자막 제공

 

청동 기마상 (Bronze Horseman)

청동 기마상은 러시아 황제 표트르 1세를 기념하는 기마상이다.
알렉산드르 푸쉬킨의 서사시 <청동의 기수>에서 유래한 이름이기도 하다.

<청동의 기수 / 푸쉬킨>

그곳, 황량한 파도 옆에,
그가 서 있었네, 
강인한 사고를 북돋우면서,

그리고 응시했네, 
오로지 먼 곳으로만
넓은 강 하구에 초라한 돛단배 한 척
네바 강을 표류하며 바다로 갔네, 저 혼자서.

진흙투성이의 강둑에는 이끼만 자라고 
서너 개 낡은 헛간만이 여기저기에 서 있었다네.

가여운 핀 족의 거처는 사람들로 그득한데
속삭이는 숲에는 햇빛이 닿지 않아
언제나 안개 속에 묻혀 있었다네.

그래서 그는 깊은 상념에 빠졌다네.
"여기서부터, 정말로 우리가 스웨덴을 공포에 떨게 할 수 있을까?"

위의 시는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드르 푸쉬킨(Aleksandre Sergeievich Pushkin)이 
1833년에 쓴 낭송시 <청동의 기수 (Bronze Horseman)>의 도입부이다. 
<청동의 기수>는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세워진 표트르 대제의 동상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1782년 그의 손자 며느리인 예카테리나 2세(Yekaterina Ⅱ)에 의해 봉헌되었으며, 
푸쉬킨은 그를 위하여 3장 476행으로 구성된 대 서사시를 썼다.

너를 사랑한다. 
표트르의 창조물이여.

나는 사랑한다. 
너의 엄숙하고 정연한 모습을.

네바 강의 힘찬 흐름을.
강변의 화강암 둑을.
고운 문양 새겨진 철책을.

생각에 잠긴 밤들의 투명한 어둠을.
백야의 섬광을.

시에서 푸쉬킨은 네바 강의 심한 홍수 동안 가난한 사람 예브게니(Evgenii)와 
그의 사랑하는 사람의 운명을 묘사한다. 
예브게니는 동상을 저주하고, 그처럼 부적합한 위치에 도시를 건설하고 
그의 사랑하는 사람을 간접적으로 사망시킨 표트르 대제에게 분노한다. 
기수는 살아나면서 도시를 통해 예브게니를 쫓는다. 
이 시는 강 가장자리에 떠 있는 폐허가 된 오두막에서 청년의 시체를 발견하면서 끝난다.

1903년에 예술가 알렉산더 베노이스(Alexandre Benois 1870~1960)는 
그의 삽화와 함께 시집을 출판하여 아르누보의 걸작으로 여겨지는 것을 창조했다.
이 시는 다른 장르의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라인홀드 글리에르(Reinhold Glière 1875~1956)는 이를 바탕으로 발레를 안무했고 
러시아 작곡가 니콜라이 미아스코프스키(Nikolai Myaskovsky 1881~1950)의 
교향곡 10번 심포니(1926~7)는이 시에서 영감을 받았다. 

 

청동 기마상(Bronze Horseman)

받침대의 오른쪽에 라틴어로
“PETRO primo CATHARINA secunda MDCCLXXXII”
"1782년 캐서린 2세가 페트로 1세에게" 라고 씌여 있다.

로마노프 혈통과 결혼한 독일 공주 출신 캐서린(Catherine) 2세는 
궁전 쿠데타를 통해 왕좌에 올라 법적 권리가 없었으며 자신을 
표트르 대제의 정당한 상속자로 대표하고 싶었다.
그녀는 청동기마상의 건축을 주문하면서 표트르 대제에 대한 존경심과 
위대한 러시아 통치자 계보에서 자신의 위치를 굳히기 위해 
청동기마상에 문구를 새겨 넣도록 했다.

전 유럽에서도 찾아 볼 수 없도록 거대한 청동 말의 앞다리가 번쩍 들려 있지만 
실제 동상의 무게를 오랜 세월 지탱하는 것은 뒤쪽의 말 꼬리가 
다리와 함께 삼각형을 이루어낸 조각술에 있다고 한다.

 

청동 기마상(Bronze Horseman)

받침대의 왼쪽에는 러시아어로
“ПЕТРУ перьвому ЕКАТЕРИНА вторая лѣта 1782”
"1782년 캐서린 2세가 페트로 1세에게" 라고 씌여 있다.

표트르 대제(Pyotr Alekseyevich, Peter the Great 1672~1725)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뛰어난 통치자이자 개혁자이다. 
전제정을 세우고 행정· 산업· 상업· 기술· 문화 등 나라의 모든 부분을 개혁했다.
어린 나이로 공동 제위에 올라 통상적인 황제가 받는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백성들의 생활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고, 
군대 놀이와 항해 놀이를 하면서 군사술을 익혔다. 

당시 후진국이었던 러시아는 경제 발전과 얼지 않는 해로를 확보하기 위해 
서유럽의 발전을 따라잡아야 했다. 
그는 이를 위해 절대주의 왕정을 확립하고 각종 개혁을 단행했다. 
또한 근대 정규군을 창설하고 서유럽의 역법을 도입했으며, 러시아 정교회를 국가에 예속시키고 
귀족의 지위를 관등표로 수정해 혈통이 아닌 업무에 따른 승급 체계를 갖추었다. 
제조업과 야금업을 바탕으로 러시아의 교역량은 7배 증가했다.

표트르 대제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근대 러시아를 설계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또한 표트르 대제는 우리에게 과연 '목표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까다로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종종 어떠한 숭고한 목표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경우, 그 목표에 도달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목표와 정반대되는 가혹하거나 비열한 방식을 사용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 그 숭고한 목표가 비열한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결론을 내기가 무척 어렵다.

 

The Transportation of the Thunder-stone in the Presence of Catherine II; Engraving 
by I. F. Schley of the drawing by Yury Felten, 1770.  
캐서린 2세 시대 선더 스톤의 이동; 1770년 I. F. 쉴리가 조각하고 유리 펠튼이 그림

천둥 스톤(Thunder stone)
청동기마상의 받침대로 사용되는 천둥 석(Thunder stone)은 거대한 원석 돌 위에 
천둥이 내리쳐서 조각을 냈다는 현지 전설에서 이름을 얻었다. 
청동 기마상을 제작한 에티엔 모리스 팔코네(Étienne Maurice Falconet 1716~1791)는 
원래 위치에서 석재를 조각하고 이동하기를 원했지만 캐서린 대제는 
바위를 절단하지 말고 원형 그대로 이동하도록 명령했다. 
습지 지형으로 땅이 견고하지 않아서 러시아인들은 거대한 돌을 
운반하는 방법을 새로 개발해야 했다. 

마리노스 하버리스(Carburis 1729~1782)그는 볼로냐에서 수학을 공부하고 
본에서 공학을 공부했고 그곳에서 학위를 받았다. 
1770년 그는 러시아의 캐서린 대제 공병단의 장교가 되었다.
하버리스는 노동자들에게 땅이 얼어 붙은 겨울을 기다리라고 지시한 다음 
큰 돌을 얼어 붙은 땅 위로 바다로 끌고 가서 도시로 운송하도록 했다. 
그는 직경 13.5cm (6 인치) 정도의 청동 구체 위를 궤도 위로 미끄러지는 금속 썰매를 개발했다. 
이 과정은 나중에 볼 베어링 발명과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했다. 

그 위업을 더욱 인상적으로 만드는 것은 노동이 전적으로 인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원래 장소의 돌을 상원광장으로 가져 오는 데 동물이나 기계가 사용되지 않았다. 
하버리스가 그 방법을 고안 한 후, 400 명의 남자가 돌을 옮기는 데 9 개월이 걸렸다.

캐서린 대제는 그들의 작업을 독려하고 감독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천둥석이 바다에 도착하자 천둥석 전용으로 거대한 바지선이 건설되었다. 
이 바지선은 두 대의 대형 전함이 양쪽을 지원해야 했다. 

절단되기 전의 돌의 크기는 7×14×9m였다. 
화강암의 밀도에 따라 무게는 약 1500톤으로 측정되었다 . 
프랑스 조각가 팔코네(Étienne Maurice Falconet)는 이 부분을 
잘라서 받침 모양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완성된 받침대의 무게는 상당히 적어졌다.

19세기 전설에 따르면 청동 기마상이 상트 페테르부르크 한가운데 서 있는 동안 
어떠한 적군도 이 도시를 정복할 수 없었다고 한다. 
1924년부터 1991년까지 도시의 이름이었던 레닌 그라드가 제 2차 세계 대전으로 
900일 동안 포위당하는 동안 동상은 모래주머니와 나무 보호소로 덮여 있었다. 
이렇게 보호하여 900일 동안의 폭격과 포병을 사실상 온전하게 유지했다. 

 

Opening of the monument to Peter the Great. Engraving by AK Melnikov, drawing by A.P. Davydov, 1782
표트르 대왕 기념비 개관식. AP Davydov, 1782년 AK Melnikov가 조각하고 A.P. Davydov가 그림

프랑스 조각가 에티엔 모리스 팔코네(Étienne Maurice Falconet)가 디자인한 청동 기마상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부에 자리해 있으며 도시의 설립자에 영원한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러시아의 지도자는 거대한 대리석 위에 뒷다리로 서 있는 
청동 말의 등에 걸터 앉아 네바 강을 가리키고 있다. 
상징적인 표트르 대제의 동상과 동상이 올려져 있는 유명한 석조 받침대를 살펴보자.

기념물은 1760년대에 외국인 왕비, 예카테리나 2세가 옛 군주와 자신을 연결시키고 
러시아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지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의뢰한 것이다. 
청동 기마상이 서 있는 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절대로 함락되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다. 
시민들은 힘겨운 레닌그라드 포위전 동안에도 이 동상을 보호했고 
여전히 반석 위에서 먼 곳을 내다보고 있는 표트르 대제의 모습은 
예언이 맞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가까이 보면 말이 발굽으로 뱀을 짓밟고 있다. 
이 뱀은 반역을 상징하는 것이다. 
조각상의 세부 묘사, 특히 뒷다리로 서 있는 말 다리의 

불룩 솟은 근육을 눈여겨 보면 팔코네(Falconet)는 이 정도 수준의 사실성을 

구현하기 위해 말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자세히 조사했다.

 

1782년 청동 기마상과 성 이삭 대성당 모습

 

러시아의 가장 유명한 황제, 표트르 대제가 성 이삭 대성당을 배경으로 
거대한 동상에서 네바 강과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지켜보고 있다.

러시아는 그 역사가 정확하게 어느 시점에서 시작되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기가 어려운 나라이다. 
러시아라는 이름 자체가 파생되어 나온 '루스(Rus)'라는 사람들은 
현재의 북서부 러시아에서 남하한 바이킹 부족들의 후예로 
슬라브 계열의 언어가 아니라 게르만 계열의 언어를 사용했다. 
이들은 9세기 후반에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현재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에 최초로 공국(公國)을 세웠다.

키예프의 뒤를 이어 교역 요충지나 넓고 비옥한 농지를 중심으로 
우랄 산맥 서쪽에는 '공(公, Prince)'이 통치하는 여러 개의 
독립적인 공국이 세워졌고, 이들은 서로 경쟁하면서 발전해 나갔다. 
공국들 중에서 패권을 잡은 통치자는 '대공(大公, Grand Prince)'이라는 지위를 차지했다. 
키예프 대공의 패권은 13세기에 류리크 왕조의 블라디미르 대공과 모스크바 대공에게 넘어갔다.

14세기에는 칭기즈 칸의 손자 바투의 정복으로 러시아 전체가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이 시기 러시아는 몽골의 지배보다는 약화된 러시아를 노리고 자주 침공한 
게르만의 튜튼 기사단과 스웨덴으로 인해서 더 큰 괴로움을 받았던 약소국이었다. 
이러한 러시아를 강대국으로 변모시킨 사람들은 두 사람의 난폭한 통치자들이었다.

 

청동 기마상과 성 이삭 대성당

류리크 왕조의 이반 4세(Ivan Ⅳ)에게는 '광제(狂帝, the Terrible)' 
혹은 '뇌제(雷帝, the Awesome)'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이반은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차르'라는 명칭을 사용한 강력하고 유능한 통치자였다. 
그는 전제주의적인 강력한 왕권을 세워 몽골 제국의 잔재인 
두 개의 작은 칸국을 정복했으며 태평양을 향한 동진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분노를 통제하지 못해서 

폭발적으로 난폭함을 드러내는 증상을 보이곤 했다.

이반의 비극은 아들의 죽음으로 절정을 맞이했다. 
그는 며느리가 얇은 옷차림으로 나타나자 발작을 일으켜 그녀를 때려 
임신 중이던 아이를 유산하게 만들었다. 
이 처사에 대해 아들 젊은 이반이 항의하자 
그는 다시 이성을 잃고 들고 있던 왕홀로 아들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젊은 이반은 치명상을 입었다. 
정신을 차린 차르는 아들을 껴안고 통곡했지만 젊은 이반은 사흘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반 뇌제도 그로부터 3년 후에 세상을 떠났으며 이것으로 9세기 중엽 
노브고르드(Novgord) 대공으로 시작된 류리크 왕조는 실질적으로 막을 내렸다. 
이반 4세의 치세 이후 치열한 권력 투쟁이 벌어졌으며 
마지막 승자가 바로 새로운 왕조를 이루게 될 로마노프 가문이었다. 
이 새로운 왕조는 여러 세력 사이에 이루어진 타협의 산물이었다.

수십 개의 동등한 명문가 중 하나였을 뿐인 로마노프 가는 
왕권 기반도 단단하지 못한 상황에서 군사 강국들인 독일 튜튼 기사단령 프로이센, 
폴란드, 스웨덴, 오스만 튀르크를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또한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분리주의자들과 높은 세금과 함께 
갖가지 의무와 지주들의 착취에 신음하는 농민들의 거센 도전도 헤쳐 나가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사람이 바로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대제(the great)'의 칭호를 얻게 될 표트르 1세였다.

 

네바 강과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바라보는 청동 기마상

패기와 야심에 찬 젊은 표트르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까지 40년 간은 러시아에 또 하나의 큰 전환기였다. 
대내적으로는 진보된 행정 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대외적으로는 
영토 확장, 문호 개방 등 강력한 국제적 지위를 다져가게 되었다. 
이것은 모스크바 공국 표트르 대제가 과감하게 전개한 개혁 정책의 결과였다.

17세기 초 러시아 개혁의 주역이었던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는 
1672년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차르와 그의 두 번째 황후인 
나탈리아 키릴로브나 나르이쉬키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여읜 탓으로 소년기와 청년기를 
크레믈린 밖에 있는 외인촌에서 지내야 했다. 
그래서 화려한 의식이나 불합리한 전통을 싫어했고 
실리적이며 과학적인 것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외인촌 생활은 여러 외국기술자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12세 때에는 석공술과 목수일을 배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때문에 젊은 나이에 십여 가지 이상의 전문적이고 특수한 기능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말에 편자를 능수능란하게 박는 일, 주거 공간을 힘들이지 않고 짓는 일, 
대포를 주조하는 일 등의 기술을 익히게 되었다.

이렇게 여러 방면에 관심을 쏟으며 생활하던 그는 
1689년 모스크바 대귀족의 딸 로푸하나와 결혼했다. 
이때부터 러시아 관습에 따라 성년의 시기를 맞이하였으나 국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소년병 부대들과 병정놀이를 하거나 기계 기구를 관찰하는 일이 생활의 전부였다. 
그러던 중 1695년 모스크바 정부는 흑해 진출로를 학보하기 위해 터키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이 전쟁을 계기로 표트르는 실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러시아 군대가 전쟁 초기에 돈 강 하구의 터키 요새 
아조프를 포위할 때 포병의 신분으로 참여했다. 
이 전쟁에서 아조프 포위 작전은 3개월이나 계속되었지만 
쉽사리 터키 요새를 공략할 수가 없었다. 


터키는 당시 그들의 함대를 이용하여 바다를 충분히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탄약이나 식량 공급은 물론 보충 병력까지도 바다를 통해 지원했다. 
그러므로 함대를 소유하지 않은 러시아로서는 이를 저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바다를 가까이 해 왔고 특히 백해에 있을 때 
영국이나 네덜란드 선장들로부터 항해술 및 선박에 관한 제반 지식을 습득했던 표트르가 
이러한 난국의 타개책으로 함대 건설을 생각하게 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우선 함대 건설 기지를 위한 적정 장소를 물색했다. 
그 결과 보로네즈가 선정되었고, 구체적 세부계획이 

완성되자마자 바로 기지 건설에 착수했다. 
그가 이처럼 함대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그 부문에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의 성격적인 면이 더 크게 작용했다. 


그는 빠른 속도로 함선을 건조하면서 한편으로 해군 병사들을 조직하기 위해 
수천 명의 젊은이를 강제로 끌어들여 훈련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1696년 봄 해군을 편성하여 다시 아조프를 공략해 쉽게 함락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터키와의 전쟁은 일단락지었고 이 전쟁으로 

표트르는 유럽 여러 나라에 알려지게 되었다.

같은 해 표트르의 형 이반이 죽었다. 
이때부터 표트르는 러시아의 유일한 전제군주가 되었다. 
표트르 대제는 터키의 압력에 맞서 좀 더 강력하게 대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외국과의 동맹 계획을 생각했다. 
이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 서유럽 여러 나라에 '대 사절단'을 파견했고, 
이때 서유럽의 문화를 배워올 수 있도록 사절단에 젊은 귀족들을 포함시켰다. 
표트르 자신도 표트르 미하일로프라는 가명을 쓴 채 

포병으로서 이 사절단에 합류해 행동을 같이했다.

1697년 봄, 기묘한 무리들이 서쪽을 향해 여행을 시작했다. 
마부, 고적수, 나팔수, 행상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었으며 

관복 차림의 사람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이들 중 유난스레 남루하고 초라한 옷을 걸친 표트르는 
행렬 속에서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했다. 
당시 25세의 나이로 7척이 넘는 장신이었던 그는 큰 키 외에도 턱 부분에 
독특한 혹과 유난스럽게 날카로운 눈초리 때문에 자신의 신분을 가리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동 행렬은 스웨덴 지배에 있는 발트 해의 리가 항을 지나 프로이센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표트르는 포병 하사관으로 가장하여 

프로이센 고위 지휘관에게 대포 조작 기술을 익혔다. 
그리고 네덜란드로 가서는 목수 신분으로 선박 건조 기술을 익혔다. 
이러한 여정 속에서도 그의 탁월한 성격은 자주 노출되었다. 


그는 곧 여러 분야에 걸쳐 지식을 쌓게 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실제 그 일에 종사하는 전문가보다 뛰어나기까지 했다. 
또한 관심의 폭을 넓혀 해부학과 응용과학에까지 손을 뻗쳤다. 
한번은 보오르하베의 외과교실에서 해부학 강의를 받던 중 그의 일행이 
시체 관찰을 기피하자 표트르는 느닷없이 이렇게 명령했다.

"저 시체의 힘줄을 입으로 물어뜯어라."
신분노출에 대한 염려보다는 신하들에게 서유럽의 선진 과학을 
많이 배워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이처럼 가차 없이 명령했던 것이다. 
그는 과학적이고 지적이며, 나름대로의 뚜렷한 목적 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표트르는 더 이상 자신의 신분을 감추지는 않았다.

그가 영국을 여행할 때 영국은 그를 위해 스피트헤드 앞 바다에서 

대규모의 모의 전쟁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표트르 대제를 상당히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그가 영국에 체류할 때 겉옷 하나만 걸치고 월리엄 3세를 방문했으며, 
그가 묵었던 곳은 전쟁 중의 야영장 같았고 고급 식기의 사용법이 서툴렀기 때문이었다.

표트르가 서유럽 여행을 하던 중 1698년 8월 모스크바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약 14개월 간의 여행을 중단하고 모스크바로 돌아와야 했다. 
그 뒤 유럽에서는 표트르 대제에 관한 갖가지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퍼졌다. 
여행 중 신분 노출을 꺼렸기 때문에 후에 그의 신분이 드러났음에도 
유럽 사람의 눈에는 대수롭지 않은 인물로 비쳐졌다. 


여러 곳을 다니며 큰 술잔치를 벌이는 습관이나 호색적인 일면 때문에 
그는 우스갯거리로 생각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깊은 관찰력을 가졌던 철학자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는 

표트르 대제를 '지혜로운 자'라고 높이 평가했다.

 

네바 강과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바라보는 청동 기마상

권력 투쟁으로 보낸 청년기
표트르 1세는 보통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이해하기가 힘든 인물이었다. 
극단적인 양면성을 지닌 사람으로, 그에 대한 평가도 가지각색이다. 
표트르 1세는 러시아가 후진성에서 벗어나 유럽 국가로 탈바꿈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영웅이자 동시에 수많은 국민들을 희생시킨 폭군이기도 했다. 
그는 잔인한 숙청이라는 면을 기준으로 하면 이반 4세를 훨씬 능가하는 기록을 남겼다.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로마노프(Pyotr Alexeyevich Romanov)는 열 살의 나이로 

후사가 없이 죽은 이복형 표도르 3세(Fyodor Ⅲ)를 계승해서 

차르가 되어 43년간 러시아를 통치했다. 
그렇지만 그의 치세는 처음부터 잘 풀리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알렉세이(Alexei)는 두 부인으로부터 12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알렉세이가 죽고 나서부터 명문가 출신이었던 부인들의 가문 사이에서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이 투쟁은 결국 유혈 충돌을 불러왔다. 
표트르의 외가 친척 두 사람이 그가 보는 앞에서 살해되었으며, 
만성질환으로 인해서 사실상 황제의 직위를 수행하기가 불가능했던 표트르의 형 
이반 5세(Ivan Alexeyevich Romanov)가 표트르와 공동 황제로 즉위하고 
표트르의 외가인 나르시킨(Narshkin) 가는 권력에서 제외되었다. 
심신이 허약한 청년과 열 살 먹은 소년을 명목상의 차르로 세워 놓고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사람은 표트르의 이복누나인 소피아(Sofia Alexeyevna)였다.

표트르는 어린 시절을 일반인들과 함께 보낸 귀중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알렉세이가 사망하고 이복형인 표도르 3세가 차르를 계승했을 때 그는 세 살이었다. 
이때에 그는 어머니 나탈리야(Nataliya Narshkina)와 함께 왕궁에서 나와 
모스크바의 외국인 거주지 부근에서 살았으며 그리 오래는 아니지만 백해 연안에서 살기도 했다. 
그는 차르가 된 이후에도 한동안 왕궁으로 옮기지 않고 줄곧 일반인들과 함께 생활했다.

표트르는 활발하고 호기심이 많은 장난꾸러기였다. 
그는 부근의 상가와 수공업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일반인들과 함께 인쇄, 석공, 목공 일을 배웠다. 
그는 특히 외국을 오가는 항해사들과 무역상들에 대해서 호기심이 무척 많았다. 
차르가 된 이후에도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그는 장난감 무기로 아이들을 무장시켜서 군대를 조직하여 병정놀이를 하는 데 열중했다.

표트르는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세 살 위의 아름다운 

에우도키아 로푸키나(Eudoxia Lopukhina)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표트르의 어머니 나탈리야가 실질적인 권력자인 

소피아를 상대로 거둔 정치적인 승리였다. 
소피아는 당시의 최정예 근위대라고 할 수 있는 스트렐치(Streltsy)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나 크림 전쟁에 개입해서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는 바람에 인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권력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누나 소피아는 스트렐치를 동원해서 쿠데타를 시도했다. 
소피아는 이미 한 번 쿠데타에 성공해서 병약한 이반을 표트르와 함께 
차르로 세우고 자신이 직접 정권을 장악했던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스트렐치도 그녀를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아 
수백 명 정도가 쿠데타에 가담했을 뿐이었다. 
여기에다 스트렐치 내부에서 표트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은밀하게 쿠데타 계획을 표트르에게 알렸다.

소피아는 쿠데타의 불발로 실각했다. 
그녀는 수녀원에 갇히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엄중한 감시를 받으면서 남은 평생을 베일을 쓰고 살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사건으로 표트르가 권력을 잡지는 못했다. 
열일곱 살의 표트르 대신 권력을 장악한 사람은 어머니인 나탈리야였다. 
표트르는 여전히 정치에는 무관심한 채 외국인 거주 지역을 들락거리면서 분주한 일과를 보냈다.

 

표트르가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된 시기는 어머니 나탈리야가 사망한 1696년 1월이었다. 
이즈음에 표트르와 로푸키나의 결혼도 그리 좋은 결말을 맺지 못하고 끝장났다. 
그들은 결혼 이듬해 후계자인 알렉세이(Alexei Petrovich)를 낳았지만 
두 사람의 개성은 서로 어울리기 힘들었다. 
표트르와 달리 로푸키나는 전형적인 대귀족의 취향을 고수했다. 
표트르는 로푸키나에게 그녀의 직위와 신분을 포기하도록 강요하고 수녀원에 집어넣어 버렸다.

일반인들 사이에서 생활했던 표트르는 러시아 민중들의 고통과 
러시아 사회 자체의 후진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선진 유럽 국가를 모방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그가 특히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바다를 이용한 교역의 확대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발트 해와 흑해로의 진출이 우선적인 과제였다. 
그런데 이는 각각 스웨덴과 오스만튀르크가 모두 봉쇄하고 있었다.

표트르가 처음으로 실제 전투에 참가한 것은 1695년이다. 
차르가 아니라 오스만튀르크와 벌어진 전쟁에 포병 장교 신분으로 종군한 것이다. 
러시아는 흑해로 진출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자 
돈 강 하구의 튀르크 요새 아조프를 포위하고 거센 공세를 가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러시아 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고 엄청난 포격을 퍼부었지만 
요새는 끄덕하지 않고 버텨 냈으며 러시아 군은 상당한 피해만 입고 퇴각했다.

오스만 튀르크 군이 선전했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그들이 러시아 군보다 
특별히 우수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스만 튀르크의 해군이 흑해를 통해서 
풍부한 군수물자는 물론 보충 병력까지 수송했기 때문이었다. 
해군을 보유하지 못한 러시아 군으로서는 이 광경을 뻔히 보면서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표트르는 이 전투를 통해서 해군과 함대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추진한 개혁에서 첫 번째 과제는 바로 이 부분이었다.

1696년에 표트르와 함께 공동 차르였던 이복형 이반이 사망하자 
그는 명실공히 유일한 절대 통치자가 되었다. 
그의 첫 번째 관심사는 아조프 요새를 함락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조프에서 철군한 다음 곧바로 함대를 만들기 시작해 우격다짐으로 
30척의 어설픈 전함을 만들었다. 
표트르는 다시 아조프 요새를 공격하면서 이 전함들을 이용해 튀르크 해군에 대항했다.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조직된 이 함대는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선박들로 이루어졌지만 
규모 면에서는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일단 아조프 요새를 지원하기 위해서 
올라오는 튀르크의 수송선단을 저지하는 데는 성공했다. 
표트르는 1696년 7월에 아조프 요새를 함락했다.

표트르는 아조프 요새를 함락하고 나서 유럽으로 파견할 사절단을 조직했다. 
지중해로 진출할 교두보를 확보하기는 했지만 사실 오스만 튀르크 제국은 
러시아 혼자 상대하기에는 벅찬 상대였다. 
그는 한 세기 전에 오스만 튀르크의 서방 진출을 효과적으로 저지했던 
유럽 국가들의 대튀르크 동맹을 다시 한 번 결성하려고 했다.

수백 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은 18개월에 걸쳐 인접국 폴란드, 
튀르크와 대치 중인 오스트리아와 네덜란드, 
영국 등 여러 나라를 순방할 계획으로 출발했다. 
표트르 자신도 포병 하사관 표트르 미하일로프(Pyotr Mikhailov)로 
신분을 위장해 함께 장기간의 해외 순방에 나섰다. 
이 대사절단은 스웨덴이 점령하고 있는 발트 해 연안을 따라 네덜란드로 들어갔다.

이들은 각자의 목적에 따라 여러 팀으로 나누어져 활동했는데 
표트르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조선소였던 암스테르담의 
동인도회사 조선소에서 직접 선박 건조 기술자로 일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신분을 계속 위장하는 데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일단 그는 키가 2m(203m)가 넘는 거인 장신인데다 커다란 눈이
 대단히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띄고 오래 기억되는 사람이었다.

 

Glaisher Street, Deptford의 표트르 대제 기념비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표트르 대제는 1698년 몇 달 동안 영국 런던 남동부 지역 
뎁트포드(Deptford) 왕립 조선소에 머물면서 조선 공부를 하는 동안 꽤 잘 해냈다.  
뎁트포드는 템즈 강의 남쪽 기슭에 있으며 표트르 대제의 체류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다.

이 사절단은 유럽 최고의 산업 현장을 돌면서 필요한 기술을 흡수하고 
뛰어난 외국인 기술고문들을 여러 명 고용하는 성과를 올렸지만 
대튀르크 동맹을 결성하려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당시 유럽 국가들이 후계자가 없는 스페인의 왕좌를 놓고 
계승 전쟁에 열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큰 성과를 기대할 수 있었던 오스트리아와는 제대로 협상을 
해 보지도 못하고 표트르는 급히 러시아로 돌아와야 했다.

본국에서 스트렐치가 또 다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 쿠테타는 그가 없는 사이에 손쉽게 분쇄되었으나 14개월 만에 

모스크바로 돌아온 표트르는 반란에 가담한 1,200명을 

모두 처형하고 시체들을 한동안 매달아 두도록 했다. 
스트렐치는 러시아의 최고 정예부대였으나 수십 년 동안 
정치 문제에 간섭해 오면서 러시아 정치의 고질병을 만들어 냈다. 
표트르는 스트렐치를 해산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표트르는 1699년 그동안 사용하던 러시아식 달력을 폐지하고 
율리우스력을 채택함으로써 자신의 정책 방향을 상징적으로 선언했다. 
이 정책의 목표는 그동안 러시아가 고수해 오던 폐쇄적인 
전통주의를 포기하고 유럽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흑해와 발트 해를 확보해야 하는데, 표트르는 먼저 
튀르크와의 전쟁이 불가피한 흑해로의 진출을 뒤로 미루고 
스웨덴이 지배하고 있는 발트 해에 초점을 맞췄다.

당시 스웨덴은 열여덟 살이던 카를 12세 (Karl Ⅻ)가 통치하고 있었다. 
표트르는 자신도 스물여섯 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이 어린 카를 12세를 우습게 생각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는 오스만튀르크와 그의 아조프 점거를 인정하는 선에서 평화 협정을 타결한 다음 
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당시 '잉그리아(Ingria)'라고 불리던 
발트 해 연안의 스웨덴 영토로 자신만만하게 진군해 들어갔다.

그렇지만 카를 12세는 군사적으로는 상당히 유능한 인물이었다. 
더욱이 스웨덴 군의 전투력은 유럽 최고였기 때문에 
이제 막 근대화가 시작된 허약한 러시아 군에게는 벅찬 상대였다. 
1700년 최초로 대회전이 벌어진 나르바에서 러시아 군은 불과 1만 명 규모의 
스웨덴 군에게 격파당해 거의 절반에 이르는 병력이 전사했다. 
이 승리 이후 카를이 표트르를 계속 추격했다면 후일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다행히 카를은 공격 방향을 돌려 폴란드를 침공했다. 
카를은 폴란드를 상대로 한 일련의 전투에서 연속적으로 승리를 거두며 
폴란드에 입성했으나 이후 그들 사이에 벌어진 내분에 말려들었다. 
그동안 표트르는 잃었던 전력을 회복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

전투는 여러 해 후에야 속개되었다. 
폴란드 문제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스웨덴의 카를 12세는 

4만 4,000명이라는 대군을 몰아 선공을 가했다. 
이번에 그는 곧바로 모스크바를 향했다. 
그가 직접 지휘하는 스웨덴 군은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면서 기세를 올렸지만 
표트르는 상당한 손실을 입은 카를의 부대를 보충하기 위해 
남하하던 스웨덴 군 병력을 도중에 요격해서 격파해 버렸다. 
그러자 카를은 퇴각하는 대신 방향을 돌려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모험을 선택했다. 
그곳의 코사크 인들이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판단은 정확했으나 보급선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나온 것이 문제였다. 
표트르는 스웨덴 군이 진군하는 방향의 앞쪽으로 넓은 지역에 
불을 질러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청야작전(淸野作戰)을 펼쳐 
스웨덴 군의 현지 보급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그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었다. 
보급도 거의 끊어진 상황에서 1708년 겨울을 
우크라이나의 대평원에서 보낸 스웨덴 군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카를은 다음 해 여름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남쪽에 있는 폴타바 요새를 포위했다. 
스웨덴 군은 절반으로 줄어 있었으며 동맹군인 코사크 기병대는 
러시아 군 기병대의 교란 작전에 말려 자신들의 근거지까지 내주고 멀찌감치 후퇴했다. 
표트르는 폴타바에 4만 5,000명의 병력을 파견해 놓고 있었다. 
병력의 열세와 기병대를 보유하지 못했다는 결정적인 약점에도 
스웨덴 군은 꼬박 이틀 동안 눈부신 선전을 했다.

그렇지만 6월 28일 정오 무렵에 스웨덴 군은 결국 와해되고 카를은 
가까스로 1,500명의 병력만 수습해서 오스만 튀르크 제국으로 탈출했다. 
표트르가 막강한 스웨덴 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자 
그때까지 표트르에 대해서 우호적이던 유럽 각국들은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1710년에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 아흐메드 3세(Ahmed Ⅲ)는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러시아의 도약에 불안을 느낀 프랑스가 꾸준히 그를 부추긴 결과였다.

1711년 표트르는 오스만 튀르크를 상대하기 위해서 발칸으로 남하했다. 
그는 강적 스웨덴을 격파한 기분에 들떠서 사태를 낙관하고 있었다. 
표트르는 오스만 튀르크의 지배를 받고 있던 그리스 정교도들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정작 발칸에 도착하고 나서 그들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오스만 튀르크의 대군에게 포위되자 인명 손실을 줄이기 위해서 항복을 선택했다.

아흐메드 3세는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는 아조프 요새를 돌려받고 
이제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흑해 함대를 인수받는다는 조건만으로 항복을 받아들였다. 
이 덕분에 스웨덴의 카를 12세도 고국을 떠난 지 5년 만에 귀국할 수 있었다.

 

표토르 대제의 동상 (Statue of Peter the Great), by Mikhail Chemiakin, 
Petropavlovskaya Fortress, St. Petersburg, Russia

표트르의 최대 업적으로 꼽히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건설은 
스웨덴과의 전쟁 도중에 시작되었다. 
이 도시가 들어선 네바 강의 하구는 원래 대단히 척박한 지역이었다. 
황량한 습지는 파도가 높은 날이면 바닷물이 들이치고, 
겨울이면 차가운 북풍을 정면으로 맞는 지역으로, 
스웨덴 군이 건설한 요새 니엔스칸스(Nyenskans)만 외롭게 서 있을 뿐이었다. 
표트르는 이 척박한 습지에 미래 러시아의 수도를 건설하기로 작정했다.

그는 1703년 이 지역을 확보하자마자 도시 건설에 착수했다. 
이전의 표트르는 다혈질이기는 했어도 뚜렷한 목적이 있지 않은 한 
다른 사람에게 두려움을 주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의 잔혹한 일면이 드러났다.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이외의 지역에서는 석조 건물의 건축을 금지시키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여기에 퍼부었다.

그가 투입한 자원에는 스웨덴 출신의 전쟁 포로들과 러시아 각지에서 
강제로 동원된 농노 수만 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이 도시를 건설하다 죽어 간 

수만 명의 목숨과 바꾼 거대한 위령비였다. 
그는 사람들을 무기로 위협하면서 강제로 고된 노동을 시켰다. 
질병과 과로와 추위를 견디지 못한 이들은 한겨울에 수백 명 단위로 죽어 나갔다.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러시아의 새로운 수도로 선언되던 당시는 
건설이 한창 진행 중인 상태였으며 스웨덴과의 전쟁도 마무리되지 않아 
영토의 소유권을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시점이었지만 
표트르는 그다음 해에 수도 이전을 강행했다. 
스웨덴의 카를 12세는 이미 러시아와 전력 차가 크게 벌어졌는데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줄기차게 전쟁을 지속하다 

1718년 겨울, 노르웨이 원정 중에 전사했다. 
이로써 비로소 두 나라의 전쟁이 막을 내렸다.

1721년 표트르는 스웨덴과 종전 협상을 벌이면서 대단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그는 새로운 수도가 들어선 지역에 대해서 장차 스웨덴과의 
소유권 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인근 지역 전체를 사들이는 형식을 취했으며, 
핀란드의 점령 지역은 스웨덴에 모두 돌려주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대해 전략적으로 위협이 될 만한 핀란드와의 접경 지역은 
제국의 명의가 아니라 러시아의 차르가 개인적으로 토지를 소유하는 것으로 협상을 타결했다.

1721년 스웨덴과의 평화 협정이 체결되고 나서 표트르는 
'모든 러시아의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처음 '동방의 황제'라는 칭호를 제의받았지만 거절했다. 
그에게 붙는 '대제(the Great, le Grand)'라는 칭호에는 절차가 수반된다. 
어느 나라든 먼저 국내에서 국민들에게 선출된 대의기관의 의원들이 먼저 의결하고 나서 
다른 국가에서 외교적으로 인정받는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표트르 대제 (Peter the Great)

표트르의 경우는 스웨덴과 폴란드가 즉시 이 칭호를 승인했고 점차 유럽 각국이 따랐으며 
마지막까지 승인을 보류하고 있던 프랑스는 그가 죽은 지 25년 후에 외교문서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이 칭호를 사용하여 국제적인 공인 절차를 마쳤다. 
표트르는 러시아를 근본부터 바꿔놓은 인물로 충분히 
'대제'라고 불릴 만한 자격이 있지만 그 과정은 험난하기만 했다.

표트르는 스웨덴과의 전쟁뿐 아니라 즉위 초기에 그의 권력 승계를 
반대하는 세력들과 갈등을 겪었으며, 통치 기간 내내 분리주의자들이나 
그 자신의 강압 정치에 반발한 민중들의 거센 도전에 직면했다. 
여러 차례의 반란 중에서도 가장 큰 고비는 

민중봉기의 성격이 강한 '불라빈의 반란'이었다. 
대북방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던 1707년에 발생한 이 거센 봉기는 
원인도 표트르였으며 목표도 표트르를 직접 겨냥한 것이었다.

표트르의 강압 정치는 강력한 개혁 정책과 맞물려서 고대의 
노예나 다름없었던 농노들의 삶 자체를 위협했으며 지방은 물론이고 
모스크바나 상트 페테르부르크 근교에서조차 도망치는 농노들이 속출했다. 
표트르는 이들에 대해서도 강경한 정책을 고수했다. 

그가 도망친 농노들을 추격하기 위해 현상금 사냥꾼 부대를 고용하자 농노들의 처지에

동정적이었던 코사크의 지도자 콘드라티 불라빈(Kondrati Bulavin)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불라빈이 농노를 추격해 그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현상금 사냥꾼 부대를 기습해 
전멸시키면서 시작된 이 반란은 비참한 상황에 있던 러시아 농민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어 
급격히 번져 나갔으며, 여기에 표트르의 개혁에 불만을 가진 성직자와 분리주의자들이 
가세하면서 러시아 남부 지방 전역이 2년 이상 표트르의 통치를 벗어난 상태가 지속되었다.

모든 분야에서 실행되었던 개혁 자체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표트르의 개혁은 제도, 행정 조직, 군대, 법률 같은 분야뿐 아니라 
권위주의와 부패의 온상이 되어 버린 러시아 정교회에 대한 개혁과 같은 
예민한 분야에서도 급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방법론에서도 
오직 힘으로 강하게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의 개혁에는 전통적으로 러시아 남성들이 기르던 수염을 밀어버리는 일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아무리 밝은 미래가 약속된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급격하게 변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당연히 표트르의 개혁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적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반란이나 개혁에 대한 저항보다 그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러시아에서 
관습화되어 버린 권력형 부패에 대한 승산 없는 싸움이었다.

수많은 인사들이 부패 혐의로 처형되거나 추방당하고 그 자리를 표트르의 신임을 받는 
동지나 친구 들이 채웠지만 그들 역시 쫓겨난 사람들만큼이나 부패한 인물들이었다. 
표트르의 측근들 중에서도 그를 가장 가슴 아프게 했던 사람은 오랜 친구이자 
개혁의 동지였던 알렉산드르 멘시코프였다. 
멘시코프는 야전에서도 이름을 날려 최종적으로 대원수(Generalissimo)까지 
오르는 인물로,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건설 책임자이기도 했다.

그는 점령 지역에 새로 만들어진 이조라 공작령 (Izhira, Dukedom of Ingria)의 초대 공작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과거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권력형 부패의 고리를 
끊지 못했으며 영지에서 가혹한 착취로 원성을 샀다. 
1711년에 표트르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엄중한 경고를 보냈다. 
사실 표트르로서는 이러한 경고 자체도 대단히 이례적으로 관대한 조치였다.

그러나 멘시코프 공작은 2년 후에 다시 10만 루블의 공금을 횡령해 
대형 부패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때에 멘시코프가 중병에 걸려 쓰러져서 사경을 헤매지 않았더라면 
표트르는 그를 처형하거나 유배를 보내거나 투옥했을 것이다. 
그가 극적으로 병에서 회복된 후 부정 행위에 대해서 용서를 받은 이유는 
그가 이제 갓 마흔을 넘긴 표트르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친구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표트르는 실질적으로 차르가 되었던 스물네 살 이후로 혼자서 
거대한 러시아를 상대로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강철 같은 신경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도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견디지 못하는 법이다. 
표트르의 심신은 젊은 시절부터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었다. 
그는 술에 의존해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려고 했고, 

알코올은 야금야금 그의 정신과 육체를 먹어 들어갔다.

알코올 중독 증상이 나타나면서 표트르는 점차 분노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고 
의심이 많아지면서 잔인하고 괴팍한 사람이 되어 갔다. 
명석했던 판단력도 급속도로 빛을 잃었다. 
정신적인 결함은 육체적으로도 이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안면 신경통에 시달리는가 하면 뚜렷한 이유도 없이 수시로 간질과 유사한 발작을 했다. 
위험한 상태로 간신히 버텨 오던 상황은 결국 비극적인 사건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일찌감치 후계자로 정해져 있던 황태자 알렉세이는 첫 번째 부인 

에우도키아가 낳은 왕자로, 표트르의 열다섯 자녀 가운데 

유아기를 무사히 넘긴 셋 중 하나였으며, 그중에서도 유일한 아들이었다. 
강제로 왕궁에서 쫓겨난 어머니와 얼굴도 보기 힘든 아버지 밑에서 
반동주의적인 성직자들에게 교육받은 알렉세이는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이러한 아들에게 표트르는 가혹하게 황태자 수업을 강요했다. 
알렉세이는 열세 살에 사병으로 군에 입대해서 그다음 해에 실제 전투에 직접 참가했고, 
열여덟 살에는 모스크바 시의 성곽 공사를 책임져야 했다. 
그 이후 표트르는 알렉세이에게 수행하기 쉽지 않은 임무를 계속 맡겼으며 
어린 알렉세이는 (당연하게도)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면 표트르는 열정이 부족하다며 아들을 비난하고 알렉세이는 아버지에게 반발했다.

알렉세이는 개혁에 반대하는 전통주의자들과 어울리다 
아예 이마저 포기하고 국정에는 개입하지 않으려고 했다. 
내재되어 있던 부자의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나게 된 계기는 알렉세이의 결혼이었다. 
1710년 표트르는 스무 살의 알렉세이를 그보다 네 살 연하인 독일의 명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둘째 딸 샬로트(Chalotte Christine Sofie of Brunswick-Wolfenbuttel)와 결혼시켰다. 
샬로트의 언니 엘리자베트는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인 합스부르크 가의 카를 6세와 결혼한 상태였다.

알렉세이는 자신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결혼에 크게 반발했으며 
결혼 생활은 당연히 초기부터 삐걱거렸다. 
샬로트가 1715년 둘째 아이인 후일의 표트르 2세(Pyotr Alexeyevich)를 낳고는 며칠 만에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뜨자 그녀의 장례식 날 표트르는 아들을 호되게 질책하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받은 알렉세이의 반응은 해외 도피였다.

그는 핀란드 출신 정부와 함께 동서인 오스트리아의 카를 6세에게로 피신했으며 
카를 6세는 알렉세이의 말만 듣고 표트르가 아들을 암살하려 한다고 굳게 믿어 
그를 나폴리로 빼돌리기까지 했다. 
부자의 오랜 갈등은 결국 파국을 맞이했다. 
1718년 알렉세이의 측근이나 친구들은 모두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러시아의 전통적인 반역자 처형 방식에 따라 긴 창으로 꿰어 매달아 놓는 페일 형(Pale)이나 
바퀴에 묶여 온 몸이 부서지는 잔인한 방식으로 처형되었다.

알렉세이의 어머니 에우도키아는 근거 없는 간통죄로 기소되었으며 
알렉세이도 법정에서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알렉세이가 정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나는 기필코 옛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을 것이요."라는 구절이 문제가 되었다. 
알렉세이는 끝이 갈라진 채찍으로 등을 맞는 나우트 형(knout)에 처해져 
두 번에 걸쳐 마흔 대를 맞고 나서 이틀 만에 사망했다.

알렉세이의 처형은 망가진 표트르의 정신 상태를 반영한 것이지만 
그에게도 회복이 불가능한 정신적 상처를 남겼다. 
1721년 힘겨웠던 스웨덴과의 대북방 전쟁이 승리로 마무리되고 
평화 시기가 도래하면서 표트르가 대제의 칭호를 받을 무렵 그는 이미 
세상사에 지칠 대로 지쳐버린 중증의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있었다.

예카테리나 (Yekaterina I)

표트르에게 유일하게 위안이 되었던 인물은 두 번째 부인인 
예카테리나(Yekaterina I)뿐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러시아라는 거대한 배의 
유일한 방향타인 표트르를 움직일 수 있는 지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보잘 것 없는 위치에서 시작해서 시간이 지나면서 
표트르에게 점점 더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표트르의 친구 멘시코프가 그에게 선물로 보낸 '성적 노리개' 정도의 존재였다.

예카테리나는 본명이 '마르타 엘레나 스코브론스카(Martha Elena Scowronska)'로, 
에스토니아 인(人)인데다 러시아 정교도가 아니라 루터파 신교도였다. 
열일곱 살의 나이에 스웨덴 군인과 결혼한 그녀는 결혼 직후 
러시아 군이 스웨덴 점령지 잉그리아를 정복하면서 포로로 잡혔으며 
여러 명의 장군들을 거쳐 최종적으로 표트르에게 보내졌다.

그녀는 비록 비천한 신분이었고 교육도 충분히 받지 못했지만 
선량한 품성과 진한 모성애를 가지고 있던 여인이었다.
두 사람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건설 현장에 그리 크지 않은 
목조 건물을 짓고 일반인들과 함께 어울려 살았다. 
또한 생활 여건도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았다. 
마르타는 아이를 여러 명 낳았지만 모두 유아기를 넘기지 못했다. 
표트르와 마르타는 이것이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부부 생활을 한 데 대한 
신의 징벌이라고 생각하고 멘시코프 부부만 증인으로 참석한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튀르크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귀환한 이후에야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마르타는 예카테리나로 개명하고 러시아 정교도로 개종했다. 
그녀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표트르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다. 
표트르는 모두 열다섯 명의 합법적인 자녀들을 낳았지만 
그들 중에서 아버지보다 오래 산 아이는 예카테리나가 비밀 결혼식 이후에 
연년생으로 낳은 두 딸 안나(Anna Petrova)와 옐리자베타(Yelizaveta)뿐이었다.

1722년에 표트르는 자신에게 닥쳐오는 어두운 그림자를 감지하고, 
왕위 계승을 둘러싼 혼란이 벌어질 것을 염려해 차르가 
스스로 후계자를 결정하도록 하는 왕위 계승법을 제정했다. 
표트르의 건강은 1723년 겨울부터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다음 해 여름 예카테리나를 공동 통치자로 내세우고 자신은 뒤로 물러났다. 
그는 그 시기에 방광에 이상이 생겨서 몹시 고통스러워했으며 
목숨을 건 대수술을 받고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그렇지만 그로부터 불과 여섯 달 후에 닥친 두 번째의 위기는 극복하지 못했다. 
그해 가을 핀란드 만 부근을 시찰하던 도중 물에 빠진 병사를 보고 그를 구출하기 위해 
차가운 물에 뛰어든 것이 병세를 악화시킨 것이다. 
1725년 2월 새벽에 급작스럽게 사망한 표트르는 후계자를 명확하게 지정하지도 못했다. 
마지막 순간 그는 후계자 문제를 문서로 남기기 위해서 애를 쓰다 기력이 떨어져 
결국 마무리하지 못하고 큰딸 안나를 불러 달라는 

부탁을 했으나 그녀가 도착하기 전에 숨을 거두었다.

표트르 대제는 분명히 '위대한 지도자'였다. 
어떠한 입장에서 생각하든 러시아 역사에 그가 없었다면 제정 러시아나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가설은 대단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 당시 러시아에서는 표트르 단 한 사람만 

러시아의 찬란한 미래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러시아 인들은 그가 죽고 나서 한참 후에야 그의 업적을 깨달았다. 
표트르 사후, 그리고 예카테리나의 짧은 통치 이후 

러시아는 10년이 넘게 '반동의 시대'를 보냈다. 
그의 작은 딸 옐리자베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후에야 완만한 개혁이 

다시 추진되기 시작했으나 그 개혁마저 완전하지 못해 심각한 사회적 모순을 

내포한 상태로 한 세기 이상의 시간을 낭비하다 결국 사회주의 혁명을 맞이했다.

표트르가 좀 더 오래 살았거나 후계 절차가 매끄러웠더라면 
러시아는 훨씬 더 일찍 개명한 강대국으로 탈바꿈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표트르와 동시대를 살았던 러시아 인들의 생각은 분명히 달랐을 것이다. 
그들은 대단히 억압적이고 권위적인데다 변덕스럽고 

난폭한 통치자를 섬기면서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표트르는 오직 자신만이 보고 있던 러시아의 미래를 위해서 자신이 추진하는 개혁에 
방해가 된다면 귀족, 평민을 가리지 않고 처형하거나 생존조차 어려운 땅으로 유배를 보냈다. 
적이라고 판단되면 아예 그 뿌리를 뽑아 버렸다.

 

Peter the Great Interrogating the Tsarevich Alexei Petrovich at Peterhof, 1871. 
표트르 대제께서 황제의 궁전 페테르호프에서 황태자 알렉세이 페트로비치를 심문하다. 
by Nikolai Ghe.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1 

그림의 배경이 되는 페트르코프는 황금빛 조각과 분수로 장식된 표트르 대제의 여름궁전이다 . 
표트르대제의 위업을 아름답게 빛내주는 이곳은 실내 벽면에  
대제가 수입한 서유럽의 명화들이 줄지어 걸려 있다.   

아버지 표트르대제는 자신감 있는 자세로 앉아 아들을 매섭게 노려본다. 
바닥에 떨어져 잇는 문서는 방금 그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테이블에 한손을 엊고 비스듬히 서 있는 아들 알렉세이의 허약한 실루엣은  
아버지의 당당한 풍채와 비교가 된다. 

표트르 대제의 발밑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나가는
체스판 모양의 바닥은 심리적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다 종국에는 반란까지 획책한  
아들을 심문하는 대제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표트르 대제에 대한 역사적 평가
표트르는 그의 개혁의지를 밀고 나가는 데 정말로 정열적이었다. 
그러나 그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국민의 무지와 

용감하게 싸운 기사 정신의 소유자로 보기는 어렵다. 
이반 뇌제와 비교할 때 잔인성에서는 그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울 정도다. 
그를 화나게 만들면 그의 손에 잡힌 모든 물건이 곧 무기였다. 
상대방의 코를 쇠꼬챙이로 쑤셔 찢어버리는가 하면 

고문이나 사형을 시킬 때도 사람을 몹시 괴롭혔다.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며 죽어간 사람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잔인성은 혈육이나 친지에게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의 아내 에브드키아 로푸히나가 고풍스럽고 마음이 
너그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1698년 강제로 수녀원에 보내졌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알렉세이도 그가 추진하는 
개혁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심한 고문을 가해 옥에서 죽게 했다. 

그리곤 아들의 체온이 채 식기도 전에 자신이 설계한 
선박의 진수식에 참여하기 위해 냉정하게 그 자리를 떠났다. 
그 당시 표트르는 리투아니아 농민 출신의 예카테리나라는 여자와의 사이에 
또 다른 자식을 낳고 수년 동안 함께 지냈다. 
1712년에는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하여 황후 칭호까지 주었다. 
그녀와의 결혼 생활은 뒤에도 매우 순조로웠다.

그러나 표트르는 죽을 때까지 안면신경통에 시달렸고 때로는 갑작스런 발작을 일으키는 
간질병과 유사한 병을 앓고 있었으며 중년이 되었을 때는 알코올 중독에 걸리기도 했다. 
후에 그는 합병증이 생겨 1725년 2월에 5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한편 그의 업적과 가치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많은 논란을 낳고 있다. 
19세기의 자유주의자 지식인들과 20세기 스탈린주의자들이 저마다 표트르 대제를 
자신들의 선구자라고 주장할 정도로 여러 가지 다양한 측면을 함께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일부 역사가들은 표트르 대제를 혁명가로 논하는가 하면, 
또 다른 역사가들은 점진적인 개혁주의자로 보기도 한다. 
표트르가 러시아에 새로운 물결을 몰고 온 것은 사실이지만 
통치 형태 그 자체를 변화시키지는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슬라브주의자들의 관점에서 표트르는 러시아 전통적 풍습과 문화를 경시한 배신자였고 
서구주의자 시각에서는 시대를 바꿔놓은 진정 위대한 영웅이었다. 
이처럼 표트르 대제를 놓고 붙여볼 수 있는 수식어, 정의어가 다양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그를 진정으로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없다. 
그가 죽은 지 200년 이상이 된 지금도 그의 모든 것을 함축하는 전기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다만 그의 업적 중 일부분에 대한 것만 일방적인 견해로 확립되어 있을 뿐이다.

분명한 것은 표트르 자신은 위대한 애국자였고 그가 행했던 모든 일이 
결과적으로 러시아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표트르는 러시아가 운명의 전환점에 있을 때 공을 세운 최초의 인물은 아니었다. 
과거에 기독교와 비잔티움 문화를 수용한 키예프 대공 

블라지미르도 분명히 나라를 구했던 인물이었다. 
알렉산더 네프스키, 이반 뇌제도 당시 국가를 

몰락의 구덩이에서 구한 위대한 인물들이었다. 
그럼에도 표트르 대제가 유난스럽게 두드러진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그의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러시아가 

세계 강국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표트르는 키가 2m나 될 정도로 매우 컸고 잘생겼으며 체력도 강했다. 
이전의 차르들과는 달리 비잔틴의 후광을 거부했으며 행동이 매우 소박했다. 
맥주 한 잔을 놓고 조선공이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한 

외국선원들과 대화를 즐기기도 했다.
활동적이고 정력적이었으며 충동적이었던 그는 

움직이는 데 걸리적거리는 화려한 옷을 좋아하지 않았다.
종종 낡은 구두와 모자를 쓰고 나타났으며 자주 군인복장을 하고 다녔다. 

그는 환락을 좋아했으며 조야한 농담을 즐기기는 했으나 즐겁게 노는 법을 알고 있었다. 
때로는 엄청나게 술을 마셔댔으며 그의 손님들도 그렇게 마시도록 만들었다. 
정직하지 못함을 참지 못하는 정의의 사나이였던 그는 화를 낼 때는 무서웠으며, 
반대에 직면하면 잔인해지기도 했다. 
그런 순간에는 그와 친밀한 사람들만이 그를 달랠 수 있었다. 


그가 사랑했던 2번째 부인 예카테리나가 그런 면에서는 최고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표트르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자주 그녀에게 부탁했다. 
때때로 표트르는 고위 관리들을 매로 때리기도 했다. 
심지어 그와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멘시코프 공도 많이 얻어맞았다.

정치가로서 표트르의 뛰어난 재능의 하나는 최고 귀족가문의 사람이건 

사회의 밑바닥 사람이건 고위직에 재능 있는 인물을 선택해 쓸 줄 아는 능력이었다. 
통치자로서 표트르는 전제적 영주의 방법, 즉 채찍과 자의적인 지배를 자주 사용했다. 
그는 국가의 강제력이 기적을 창출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전제군주로 늘상 행동했다. 


그러나 지칠 줄 모르고 일을 할 수 있었던 그는 자신이 국가의 머슴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가 아랫 사람들의 위치에 자신을 둘 때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정직함을 갖고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고 했다. 
그는 그의 군경력을 가장 낮은 계급으로부터 시작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직업을 그 기본부터 시작해서 완벽하게 익히고 
또 실질적으로 수행한 봉사에 따른 승진만을 기대할 것을 요구했다.

표트르의 인격은 러시아의 전 역사에 그 영향을 미쳤다. 
독창적이고 명민한 지성을 소유하고 원기왕성했으며 용기있고 근면했으며 
강철같은 의지를 지닌 그는 러시아의 전반적인 이익과 그 자신의 특별한 계획을 
일관성 있게 지탱하기 위해 복잡하게 변화하는 상황을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었다. 
물론 그는 러시아와 서유럽 국가들 간의 격차를 메우지는 못했지만 
국민경제· 교역· 교육· 과학· 문화· 대외 정책 등에 있어서는 상당한 진보를 이룩했다.

러시아는 강국이 되었으며 그때부터 러시아의 협력이 없이는 
어떠한 유럽의 문제도 해결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내정개혁은 이전의 어떠한 개혁자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진전을 보았다.

 

[영상] 청동 기마상 (Bronze Horseman)

 

 

 

성 이삭 성당의 나무 모형

정교회의 성당으로 지어질 당시에는 러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지어졌다. 
높이 101.52 m, 성당의 둥근 천장이 21.83 m, 길이가 11.2m, 폭이 97.6m인 이 성당은 
64~114톤에 이르는 72개의 거대한 원형의 돌들로 둘러싸고 있다. 
1만 4천명을 수용할 수 있다. 

 

성 이삭 대성당 모형

웅장한 금빛의 둥근 지붕이 특징인 성 이사악 성당은 현재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제정시대 교회의 막강한 권력을 상징하듯 높이도 고층빌딩 만해서 먼 곳에서도 잘 보인다.

 

성당을 만들 때의 목재 틀

늪지대 위에 대규모 성당을 짓기 위해서는 기초를 튼튼히 해야 했다. 
기초을 다지기 위해서 총 2만 4천 개의 말뚝을 밑에 박고 그 위에 성당을 올렸다.
40만 명이 동원되어 40년 만에 완공되었다.

 

몽페랑 흉상
 
오귀스트 드 몽페랑(Auguste de Montferrand 1786~1858)은 이 성당을 설계하고 
공사 감독한 프랑스인으로 약관의 20대에 전 유럽인이 참가한 콩쿨에서 입상하여 
40년간 러시아에서 성 이삭 대성당 및 성당 주위의 마린스키 궁전 등 건물과 
겨울궁전 내 지금의 1호 전시실인 표트르 대제의 방, 궁전광장 등을 
꾸미는 데도 참여하고 러시아에서 인생을 마감한다.
그는 러시아에 묻히길 원했지만 당시는 이미 다른 황제인 알렉산드로 2세가 
그의 시신을 그의 조국 파리로 돌려 보냈다고 한다.

 

성 이삭 성당 내부

내부 장식은 22명의 예술가에 의해 꾸며졌는데, 
성서의 내용과 성인을 묘사한 150점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 중에서 중앙 큐폴라에 그려진 카를 브리료프의 작품은 꼭 한 번 볼 만한 그림이다. 
모자이크도 63점이나 있고 그중 '예언자 에제키에리의 환상', 
'대홍수', '최후의 심판'이 볼 만하다.
성당을 장식하는 300점 이상의 부조와 동상, 무게가 10t인 3개의 문도 훌륭하다.

 

중앙홀의 정면

성 이삭 대성당의 내부 레이아웃은 18 세기 정교회 종교 ​​건물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내부 면적은 4,000 평방 미터가 넘는다. 
4 개의 거대한 철탑 위에 놓인 메인 돔의 높이는 69m, 측면 본당의 높이는 28m이다. 
사원 입구는 건물의 남쪽, 북쪽 및 서쪽에 3 개의 큰 문이 있다.

중앙홀 정면의 화려한 전경으로 녹색의 화강암 기둥과 가운데 
회중석으로 들어가는 왕의 문 (Royal Doors) 주변이 엄청 화려하다
이코노스타시스(iconostasis 성상화 칸막이) 중앙 황금의 문 안쪽 회중석에 
스테인드 글래스로 제작한 예수상이 돋보인다.

 

정교회에서 부활절에만 열리는 황금의 성문(Holy Doors)

궁정문(Royal doors) 사이로 1843년 뮌헨에서 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스테인드 글래스가 보인다. 
특이한 점은 흔히 푸른색으로 상징되는 동방정교회의 색 대신 
카톨릭을 상징하는 붉은색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제단 스테인드 글래스

대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금박을 입힌 조각, 공작석과 청금석 기둥의 아름다움, 
모자이크 이미지 등 다양하고 화려한 예술품들에 감동을 받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주요 제단의 왕실 문이 열리면 먼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제단 
스테인드 글래스 이미지에 관심이 끌리게 된다.

이는 녹색 에메랄드와 옅은 보라색 자수정으로 장식된 금 자수가 있는 
자주색 망토를 입고 황청색 하늘을 배경으로 묘사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제단 창문의 거의 전체 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 틀 안에서 곧 구주께서 성전에 들어가실 것 같다. 

창 아래 부분은 보기에 간신히 눈에 띄지 않는 구름이 
관객을 향해 떠다니고 있어 그리스도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다. 
그의 손에는 흰 십자가가 있는 흔들리는 주홍색 깃발이 있다. 

부활하신 구주의 웅장한 차원은 이미지의 중요성과 지배적인 위치를 나타낸다. 
반원형 아치 형태의 창 윗부분은 후광 광선의 역학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은 색을 밝게 하여 더 밝은 조명으로 강조된다. 
유사한 장식 요소는 가톨릭 교회의 전통이지만 정교회에서는 거의 유일한 것이다. 

 

면적이 28.5 평방미터인 스테인드 글래스 창문의 모습. 

그림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스타일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유럽에서 가장 큰 스테인드 글라스 창 중 하나이며 러시아에서 가장 큰 창이다. 
스테인드 글래스 창에 있는 보석은 납의 도움으로 삽입된 볼록한 프리즘이다. 
후광의 색상 효과는 3층 유리의 개별 레이어가 부분적으로 제거되어 
노란색이 녹색 색조를 띠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 

뮌헨의 장인들은 또한 단색 유리를 능숙하게 사용했다. 
그림의 구름은 단단한 스모키 그레이 유리로 만들어졌으며 십자가의 배너는 
루비로 만들어졌으며 배너의 십자가는 흰색으로 만들어졌다. 
스테인드 글래스 창문의 일부는 특수 페인트로 칠하고 
머플로에서 소성한 다음 기계 가공을 거쳤다. 

사람의 얼굴과 노출된 인체 부위를 스테인드 글래스에 
확실하게 전달하기 위해 소위 '양피지' 유리를 발명했다.
스테인드 글래스 창은 막대로 연결된 두 개의 금속 프레임으로 구성된다. 
두꺼운 거울 유리가 외부 유리에 삽입되고 스테인드 유리 창 자체는 
납 납땜으로 고정된 컬러 반투명 유리 요소로 내부 프레임에 장착된다. 
여닫이 창에서는 금속 패스너로 제자리에 고정된다. 

 

녹색의 화강암 기둥 사이에 성인들의 성상화가 많이 배치되어 있다.
오른쪽 성모자 상, 가운데 성냐 카테리나, 왼쪽 마리아 막달레나

 

성인들의 성상화들

 

천장화 <최후의 심판>

 

러시아 정교회의 특징은 홀과 회중석 사이에 이코노스타시스가 있고 
가운데 황금의 문이 설치되어 카톨릭 교회로 착각할 수도 있다.

 

중앙홀 상단에 있는 <최후의 만찬> 성상화

 

우측홀 아래쪽에도 회중석이 설치되어 가운데 성상화 칸막이 이코노스타시스가 보이고 
중앙의 문을 왕의 문(Royal Doors) 또는 황금의 문이라 부른다.

 

동쪽에는 고대 러시아 교회의 제단 장벽과 같이 주요 제단과 성상화 칸막이(iconostasis)가 있다. 
성상화 칸막이의 세 개의 큰 아치는 교회의 제단 입구로 사용된다. 
중앙 아치는 두 개의 청금석 기둥과 왕의 문(Royal Doors)으로 장식되어 있다.

사원의 호화로운 장식에서 메인 돔의 드럼 디자인은 매우 중요하다. 
벽면에서 튀어 나온 열두 천사상은 대리석 기둥과 함께 
하나의 수직을 형성하고 드럼의 명확한 분할에 기여한다. 


전기 도금법으로 만든 조각품 사이에는 열두 사도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북창에 의해 조명이 잘 비추는 천사의 금박이 벽 배경에 
밝은 점으로 돋보이며 그림과 함께 풍부한 장식 효과를 만든다. 

 

대성당의 내부 장식은 816 평방 미터의 면적을 가진 "영광의 성모"광장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캔버스의 원형 구성은 사원의 건축에 ​​의해 결정된다. 
장식판의 가장자리를 따라 그려진 난간은 건축 형태에서 
그림 같은 형태로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전환할 수 있다. 
환상은 드럼의 엔테블러처를 증가시키고, 이미지가 없는 플라폰드의 중심은 
공기 공간의 깊이와 궁창의 무한함을 불러 일으킨다. 

 

다양한 유형의 예술을 종합하는 관점에서 본 돔의 
드럼 디자인은 성 이삭 대성당에서 가장 성공적이다. 

대성당 내부 장식의 중요한 특징은 금으로 장식된 세부 사항, 
청동 주물, 부조 장식, 기둥의 베이스와 수도, 메달리온, 케이슨, 화환 등이다. 
총 300kg의 금이 대성당의 금박에 사용되었고 또 다른 100kg은 돔의 금에 사용되었다. 

 

성 이삭 대성당은 다양한 유형의 장식 및 응용 예술과 건축을 통합 한 놀라운 예이다. 
수많은 그림, 모자이크, 조각, 유색 돌과 금박의 환상적인 조합은 
풍부하고 포화된 색 구성표를 만든다. 

 

성당 내부에는 천장과 벽에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많은 이콘화들과 
성인, 종교 스토리가 담긴 그림들이 가득하다. 
이 당시 유명했던 러시아 화가 브를료프의 그림들이 많이 있다.

 

메인 돔 플라폰드의 구성은 딜레브(I. Dylev)가 만든 비둘기 조각으로 완성된다.
86.5m 높이의 금고 아래를 맴돌며 성령의 상징이다. 
비둘기 조각은 구리로 만들어졌으며 무게는 84kg이고 비둘기의 날개 길이는 2.06m이다. 
조각품의 빛은 전기 도금 방법으로 적용된 은층으로 제공된다.

 

돔 중앙의 비둘기 
비둘기는 기독교 삼위일체 중 성령을 의미한다.
비둘기의 시선으로 내려오면 성모 마리라가 있고 세레 요한도 있다.

 

약 3톤의 무게로 투각 도금된 샹들리에

 

실내 조각품은 성 이삭 대성당 내부 장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기에 사도, 선지자, 천사, 돔의 북과 이코노스타시스(iconostases)가 있다. 
조각, 건축 및 회화의 합성의 예는 르네상스의 전통으로 만들어진 메인 돔의 드럼이다. 
12개의 천사상이 있는 사도들의 그림과 같은 이미지로 장식되어 있다. 
천사 위에는 조각상과 하나의 수직을 형성하는 기둥이 있다. 
이 솔루션은 건축 구성의 가벼움과 무결성을 강조한다.

 

성전 서쪽 금고에 있는 선지자들과 동쪽에 있는 천사들이 복잡하고 역동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림, 모자이크 및 조각을 조화롭게 결합한 이코노스타시스의 장식이 특별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부활은 다섯 인물로 구성된다. 
그룹의 논리적이고 구성적인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양손을 들고 머리를 뒤로 젖히고 전체 인물에 역동성을 부여한다. 
주님의 열망이 위쪽으로 향한 동기는 왼쪽 천사의 포즈를 성공적으로 해결한다. 

이 조각품은 안정적이고 명확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아래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석한 군인들의 모습다. 
그들은 이탈리아 바로크 조각의 영향으로 시각적인 균형을 이룬다. 
주님이 뻗은 손의 모습은 유난히 가볍고 역동적인 것처럼 보이며 
선지자들은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금고, 돔의 드럼 및 이코노스타시스의 조각은 전기 도금 방법을 사용한 구리로 만들어졌으며 
성 이삭 대성당 건설 중에 처음으로 이러한 규모로 사용되었다. 
이 방법은 용기에 황산구리 용액으로 흑연으로 덮인 미래 조각품이 배치된다. 
양극은 그것에 연결되고 전기 배터리의 음극은 황산염(vitriol)로 낮아진 구리판에 연결된다. 
전류가 흐르면 조각된 흑연의 얇은 층에 구리가 증착된다. 
상대적으로 얇은 구리 층으로 인해 전기 주조 조각은 상당히 가볍다. 

이를 통해 몽페랑(Montferrand)은 대성당의 질량을 줄이고 정착지의 불균일성을 완화할 수 있었다. 
전기 도금 작업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공장에서 수행되었다. 
몽페랑의 제안에 따라 금고의 조각은 벽돌 세공이 아니라 
장식적인 내부 금고를 형성하는 특수 금속 구조물에 부착되었다. 
이것은 당시 건축 관행에서 볼 때 혁신이었다.

사원 문에 새겨진 조각은 청동으로 주조되었고 장식적인 푸른 녹으로 덮여 있었다. 
성 이삭 대성당에서 러시아 조각가들이 만든 350 개 이상의 작품은 
19 세기의 기념비적이고 장식적인 플라스틱의 독특한 컬렉션을 나타낸다.

 

러시아의 조각가 이반 비탈리(I.P. Vitali)가 제작한 여러 모양의 부조로 장식된 
3개의 각 오크 문 위에는 비문의 의미를 나타내는 줄거리가 있다. 
넓은 망토를 입고 정력적으로 논쟁하는 남자와 침착하게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철학자,
명상으로 가득찬 노인 아테네 인의 긴장된 모습, 
그리고 그 중심에는 구성을 결합한 바울 자신의 모습이 있다. 

 

북쪽 문의 부조는 흥미롭다. 
사원의 모든 내부 문에는 둥근 메달의 틈새와 흉상이 많이 있다. 
비탈리(Vitali)와 그의 조수는 기존의 이상화 된 이미지와 크게 다른 여러 이미지를 만들었다. 
많은 흉상은 누군가의 특정 기능을 재현한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에서 장식용 돌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1843년 몽페랑(O. Montferrand)이 개발한 실내 장식 
프로젝트가 승인되었으며 이에 따라 석재 샘플이 선택되었다. 


성당 내부의 바닥은 밝고 어두운 회색 러스킬라(Ruskeala) 대리석으로 된 석판으로 포장되었다. 
인테리어의 주요 건축 부문에 따라 분홍색 티비디안(Tivdian) 대리석 줄무늬가 디자인을 강조한다. 
돔 아래 바닥의 중앙 부분은 티비디안 대리석의 화려한 대리석 장미로 장식되어 있다. 
사원의 벽과 철탑은 쇼크샤(Shoksha) 반암으로 둘러싸여 있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코린토스 양식(Corinthian)의 수많은 플루트 기둥은 분홍색 
티비디안(Tivdian)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인테리어 장식 솔루션의 주요 색조를 정의한다. 
기둥의 도금한 수도 수준을 지나가는 프리즈의 황기도 그것으로 만들어진다. 
녹색 제노아(Genoese) 대리석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직사각형 프로파일 슬래브 형태의 
노란색 시에나(Siena) 대리석은 4 개의 중앙 철탑을 장식하여 따뜻한 색조로 내부를 활기차게 만든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주요 이콘스타시스 앞에는 쇼크샤(Shoksha) 반암 석판이 놓여 있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처마 장식 위에는 대성당의 다락방과 아치형 천장과 돔의 치장 벽토, 
"석고"라고도 불리는 인조 대리석이 있다. 
이 재료의 주성분은 초크, 설화 석고, 석회, 시멘트, 

대리석 칩 및 유색 안료를 포함하는 세립 석고이다. 


덩어리를 벽에 적용하고 경화 후 착색된 돌을 모방하기 위해 주어진 패턴에 따라 
오목한 부분을 긁어 추가 안료가 도입되어 자연석의 정맥과 내포물이 생겼다. 
인조 대리석은 부석과 백랍 재로 수작업으로 연마하고 

습지 말꼬리 식물의 줄기로 최종 광택을 내었다. 
이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일반적으로 성 이삭 대성당의 내부 장식은 뛰어난 광채와 다양한 마감재로 놀랍다. 
벽 클래딩에는 다소 밝은 석재가 사용되었지만 

색상 대비가 능숙하게 분포되어 잡 색감을 만들지 않는다. 
다양한 유형의 석재가 건물의 건축물을 강조한다. 
따라서 다른 색상의 도움으로 주문의 요소가 강조된다. 


분홍색 기둥은 벽의 흰색 표면에서 명확하게 읽히고 엔타블레이처의 색상은 
어두운 반암으로 명확하게 윤곽이 그려진다. 
일반적으로 사원 내부는 엄숙함과 축제의 느낌을 준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말라카이트는 불투명하고 깨지기 쉬우며 매우 아름다운 돌로 
밝은 청록색에서 새틴 광택이 있는 짙은 녹색에 이르기까지 색상이 다양하며 
밝은 말라카이트는 어두운 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 
미네랄은 쉽게 처리되고 연마된다. 

러시아에서는 18세기에 우랄에서 많은 공작석이 발견되었으며 
이는 구리 광산의 활발한 개발과 관련이 있다. 
화학적 조성 측면에서 말라카이트는 구리의 수성 탄산염이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비교적 작은 크기의 소위 "새싹"이라고 불리는 
둥근 형태의 형태로 가장 자주 발견된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왕실 문을 둘러싸는 기둥에는 황금빛 반짝임이 있는 진한 파란색 바다크 산 

청금석이 늘어서 있으며, 이는 품질면에서 세계 최고로 간주된다. 
아프간 청금석은 매우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색이 매우 강하며 
섭씨 1000도 이상 가열해도 색이 변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화가들이 이 돌을 사용하여 때때로 퇴색하지 않는 군청색 페인트를 만들었다. 
성 이삭 대성당과 같은 규모에서 청금석은 다른 곳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청금석 기둥의 높이는 약 5m, 지름은 0.5m이다.

기둥의 표면은 이 돌의 취약성 때문에 사용된 "러시아 모자이크" 방법을 사용하여 수행되었다. 
돌은 몇 밀리미터 두께의 얇은 판으로 절단되었다. 
그런 다음 돌의 패턴에 따라 잘라내어 아름다운 패턴을 만들고 
개별 판 사이의 이음새가 보이지 않도록 조정했다. 
세트는 뜨거운 왁스와 로진매스틱을 사용하여 금속 또는 석재 주형에 접착되었으며, 
불규칙한 부분은 매끄럽고 연마되었다. 

 

모자이크 프레스코화
아주 작은 돌들을 색깔별로 붙여서 만든 성화로 독특한 모자이크 프레스코화가 전시되어 있다.

 

[영상] Saint Isaac's Cathedral in Saint Petersburg, Russia 내부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과 성 이삭 성당 (St Isaac Cathedral)

성 이삭 성당 (St Isaac Cathedral)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정교회 성당이다.
이 성당 이름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믿음의 조상의 아들’이지 
그리스정교나 동방정교, 혹은 카돌릭에서 말하는 성인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 이삭은 ‘이삭 달마시안’이라고도 불리우는 
지중해 북동쪽의 작은 나라 달마시아의 성인이다.   

근데 왜 하필이면 그 먼 곳의 성인의 이름을 이 성당에다가 가져다 붙였을까? 
성 이삭의 축일이 5월 30일이었는데 그 날이 바로 표트르 대제의 생일이기 때문이란다. 
표면적으로는 정교 성인을 위한 성당을 바실리예프스키 섬에 지었지만 
그 저의에는 당시 막강한 권력의 정점에 있던 표트르 대제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상공에서 본 성 이삭 성당 (St Isaac Cathedral)

첫 번째 성 이삭 대성당은 1707년 표트르 대제 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바실리예프스키 섬에 세워졌다. 
길이 18m, 폭 9m, 높이 4~4.5m의 목조 건물로 된 소박한 규모였으며 
표트르 대제가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황후와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으나 강가에 너무 가까이 지은 탓에 건설된 지 

10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 건물에 사용된 자재가 썩기 시작했다. 

이에 1717년 원로원 광장으로 부지를 옮겨 공사에 들어가 
1727년 두 번째 대성당을 지었고, 바로크풍의 종탑도 추가했다. 
하지만 벽면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1735년에 벼락을 맞아 불타면서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러시아 정부는 다시금 성당을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세 번째 대성당은 예카테리나 2세 때인 1761년 건설을 시작해 
약 40년 후 파벨 1세 때인 1802년 5월 30일에 축성되었다.
세 번째 성 이삭 대성당이 완성된 뒤 겨우 6년밖에 지나지 않은 1808년, 
알렉산드르 1세 황제는 더욱 크고 아름다운 성당을 짓고자 

설계 공모를 몇 차례 했지만 만족스런 결과를 얻지 못하자, 

아구스틴 드 베탕쿠르(Agustín de Betancourt, 1758-1824)에게 
새로운 성당을 설계할 건축가를 찾으라고 명령했다. 

베탕쿠르는 프랑스 출신으로 당시까지 무명인 20대 후반 젊은 건축가 
오귀스트 드 몽페랑(Auguste de Montferrand 1786~1858)을 공사 책임자로 선정했다. 
알렉산드르 1세가 황제의 권위를 과시할 수 있는 장엄한 건물을 원하자 
몽페랑은 신고전주의를 바탕으로 삼아 성당의 평면구조를 그리스 십자가로 설정하고 
코린트식 열주와 박공지붕으로 된 파사드를 네 면에 두며, 
높게 세운 드럼 위에 43m 높이 돔을 얹는 대담한 설계도를 작성했다.

 

상공에서 본 성 이삭 성당 (St Isaac Cathedral)

본격적인 공사는 1818년 2월 20일에 황제의 승인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는데 
몽페랑이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바로 성당의 토대를 다지는 작업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습지대를 매립해 세운 도시기 때문에, 
공사 현장의 지반을 충분히 다지지 않으면 건물이 완성되기도 전에 
스스로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붕괴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땅을 파서 물을 퍼내고 길이 6.5 m, 두께 26~28 cm인 
나무 말뚝 10,762개를 수직으로 박는 기초 공사에는 5년이 소요되었다.

한편 성당의 파사드에 세울 원기둥 48개는 핀란드에서 채석한 화강암 원석을 
바지선에 실어 운송했는데, 기둥 하나의 무게가 125톤에 달했다. 
기둥들을 제자리에 세우는 데에만 3년 가까이 걸렸고(1828~1830) 
매끄럽게 연마하는 데 다시 4년 여가 더 걸렸다. 
각 파사드마다 12개씩 원기둥을 세웠고, 
그 위를 덮은 박공지붕은 12사도의 청동상으로 장식했다. 
그동안 벽돌공들은 성당의 주요 벽체와 볼트 천장을 마무리 지었다.

 

상공에서 본 성 이삭 성당 (St Isaac Cathedral)

40년 간 계속된 공사 끝에 마침내 1858년 5월 31일 네 번째 대성당이 완공되었는데, 
신성한 건물에 동물의 힘을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공사 기간 내내 
40만 명 넘는 사람들이 동원되어 오로지 인력으로만 건물을 지었다. 
공사 책임자인 몽페랑은 그로부터 한달 남짓 지난 7월 10일에 
72세를 일기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재미있는 것은 서양사회 치고 역술을 즐기는 러시아에서 
당시의 유명한 점장이가 성당이 완공되면 
그는 죽을 것이라고 초창기에 예언했다는 것이다.

세인트 폴 대성당 건설을 담당한 크리스토퍼 렌처럼 몽페랑 역시 
자신이 설계한 대성당이 완공되는 것을 지켜본, 유럽에서 보기 드문 
기록을 세운 건축가였지만 사후에 받은 대우는 렌보다 못했다. 

몽페랑은 평생을 바쳐 지은 성 이사악 대성당에 묻히기를 바랐고 
그의 아내도 남편의 마지막 소망을 들어줄 것을 러시아 정부에 청원했지만 
황제는 몽페랑이 정교회 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성당 내의 매장을 거부했다. 
결국 몽페랑의 유해는 아내가 프랑스로 운구해 그의 어머니 무덤 곁에 묻혔다.

 

상공에서 본 성 이삭 성당 (St Isaac Cathedral)

튀어 나온 건물의 주요 볼륨 모서리에는 4개의 
작은 종탑이 있어 사원의 실루엣을 성공적으로 보완한다. 
그들은 종탑 자체의 규모에 따라 크기가 결정되는 
가벼운 금박 돔으로 완성되었으므로 메인 돔보다 훨씬 작다. 
대성당의 피라미드 구조로 인해 메인 돔이 있는 거대한 드럼 위로 
역동성과 열망이 생기고 건물 전체가 주변 공간과 연결된다. 

19세기 중반까지 겨울궁전보다 높은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했기 때문에 
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 어디에서나 성당의 빛나는 금빛 돔을 바라볼 수 있다. 
주철로 건축된 성 이삭 대성당의 돔은 미국 국회의사당의 돔 건축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소련 시대에 정교회가 탄압받으면서 그 때부터는 성당이 아니라 
박물관으로 사용되지만 1990년부터 일정한 날에는 정교회 행사를 다시 열고 있다.
레닌그라드 포위전의 흔적이 남아 있어 기둥과 벽에서 총알자국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다른 건물들처럼 소실될 위기에 처하였다. 
당시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 성 이삭 성당의 황금 돔이 지나치게 눈에 띄어서 
독일군의 표적이 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소련측은 성당의 돔을 회색으로 덧칠하였다.
소련 정권이 붕괴된 후에는 종교용 건물로서의 이용이 재개하고 있다.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 (Alexander Garden)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 (Alexander Garden) 남쪽과 서쪽 외관을 따라 
해군성과 궁전광장, 네바 강으로 이어지고 동쪽에 성 이삭 대성당이 있다. 
공원을 벗어나 네바강 쪽으로 나가면 시야가 확 트이면서 세나츠카야 광장 복판에 
표트르 대제의 '청동 기마상'이 성당을 마주 보며 세워져 있다.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 (Alexander Garden)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에 파리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한 
2세기 로마 대리석상 '파르네스의 헤라클레스' 복제품이 서 있다.
조금 지친듯한 헤라클레스가 사자 가죽을 씌운 자기 몽둥이에 몸을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다. 
공원엔 고골리부터 글린카, 고르바초프에 이르는 여러 작가, 정치인의 조각상도 있다.

 

성 이삭 성당 (St Isaac Cathedral)

정면은 높이 17m, 무게 114 톤의 화강암 기둥이 있는 현관으로 장식되어 있다. 
기둥은 사원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는 화강암 기둥 위에 설치되었다. 
성 이삭 대성당 (St. Isaac 's Cathedral)은 세련된 화강암 기둥과 대리석이 사용된 
외부 장식에 있는 러시아 고전주의의 기념물의 유일한 기념물이다. 
현관의 짙은 빨간색 기둥, 메인 돔의 열주 및 회색 대리석 벽 클래딩과 
금박 돔이 있는 건물 지하의 멋진 조합은 전체 구조에 의식적인 느낌을 준다. 

대성당의 현관은 웅장함과 고귀함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16열로 된 현관 하나는 네바(Neva) 강과 청동 기수(Bronze Horseman)상을 향해 
북쪽을 향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성 이삭 광장(St. Isaac 's Square)을 향하고 있다. 
따라서 성전의 두 입구는 도시 계획 기능으로 인해 제단과 관련하여 측면으로 판명되었다. 
성전의 제단은 서쪽에 대칭으로 반복되는 8열 현관으로 외부에 표시되어 있다. 

대성당 벽의 매끄러운 평면은 상단에 거대한 판금과 

볼류트가 있는 커다란 아치형 창문으로 잘린다. 
건물의 웅장함한 인상을 강화하기 위해 건축가 몽페랑은 창문과 문의 크기를 
엄청나게 늘려 사원의 실제 크기에 대한 생각을 왜곡했다. 
동쪽 외관을 제외하고 세 개의 외부 문은 각각 

42평방 미터 크기의 현관과 조화롭게 연결되어 있다. 

벽의 전체 평면의 1/3은 불필요하게 주요 주문보다 

우세한 거대한 다락방으로 채워져 있다. 
그 크기는 세 번째 성 이삭 대성당의 동쪽 정면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봉헌된 부분은 해체할 수 없었다. 
몽페랑은 4개의 종탑의 수직 관절과 벽의 윗부분에 모돈이 있는 
수평 처마 장식으로 거대한 다락방을 다소 부드럽게 했다. 
모서리에 위치한 기둥은 건물의 주요 구획의 수직적 특성을 강조한다. 

성 이삭 대성당은 기념비적이며 장식적인 예술의 통일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대성당의 건축은 회화 및 조각과 직접적인 예술적 관계에 있다. 
외관의 장식용 솔루션의 특성은 무엇보다도 조각에 의해 결정된다. 

관람 파트는 두 부분으로 나눠지며 매표소에서 각각 따로 표를 판매한다. 
ISIC 카드 소지자 기준으로 두 곳 모두 입장하는데 300루블을 지불해야 한다. 
한 곳은 콜로네이드. 즉 성당 돔 지붕 테두리에 올라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며 나머지 한 곳이 
성당 내부 겸 박물관을 둘러 볼 수 있는 곳이다. 
성당 내부에서는 200루블에 오디오 가이드를 제공한다. 
성당 한쪽 구석에서 200루블에 기념 주화를 판매하는 자판기가 있다.

내부관람 시 특정구역을 제외하고는 사진 촬영이 허용되어 있다. 
여느 정교회 성당이 그러하듯 오후 6시에 매표소가 문을 닫은 뒤로는 
저녁기도 예식인 만과가 시작되고, 관광객 또한 무료로 입장이 가능하다. 
단 이때부터는 기도예식을 진행하므로 사진 촬영이 전면 금지되고, 
최대한 조용히 둘러보다가 나감을 추천한다. 
이때에는 당연하게도 여성 관광객들은 정교회 규칙에 따라 머리 부분에 천을 둘러야 한다.

 

성 이삭 성당 3D 레이아웃

메인 종은 이삭의 이미지와 표트르 1세부터 니콜라스 1 세까지 
러시아 주권을 묘사하는 5개의 메달로 장식되어 있다. 
외관 장식은 표현력이 풍부하고 빼어나다.
페디먼트 옅은 부조, 천사 동상, 외부 문 디자인은 성 이삭 대성당의 위대함을 강조한다. 
사원의 각 건축 세부 사항은 매우 상징적이다. 
정면은 흉내낼 수 없는 조각 주제로 장식되어 있다.

 

사원의 돔

4 개의 거대한 철탑 위에 놓인 메인 돔의 높이는 69m, 측면 본당의 높이는 28m이다. 
돔을 받치는 각 기둥은 특별히 개발된 설계에 따라 들어 올려졌다. 
100kg의 순금이 기둥의 도금에 사용되었다. 
대성당 콜로네이드는 도심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이다. 
대성당의 돔은 핀란드 만에서도 볼 수 있다.

평일, 공휴일 및 일요일에 하루 16시간 동안 4만 농노가 역사적인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 
농노 건축업자의 4분의 1이 사고와 질병으로 사망했다. 
1842년에 대성당은 3,200만 은 루블을 사용하여 세워졌다. 
대성당은 1858년 5월 30일에 봉헌되었고 예배를 위해 개장했다.

 

사원의 돔

건축가 몽페랑(Montferrand)은 40년 동안 장기 건설을 했다. 
전설에 따르면 점쟁이는 사원이 건축 된 후 건축가가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으며, 
이러한 이유로 몽페랑은 건축에 서두르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몽페랑은 작업 완료 후 한 달 남짓 후에 죽었다.
전설에 따르면 알렉산더 2 세가 성전을 조사하던 중 성도들의 조각품들 사이에서 
고개를 들고 달마티아의 이삭, 몽페랑 자신에게 절하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24천사가 돔 아랫부분을 에워싸고 있다. 
이 천사상은 거푸집에 지어부어 만드는 전통적 청동 주물 방식이 아니라 
전기 도금법을 응용해 정밀하게 뜨는 전기주물(electrotyping) 방식을 처음 적용한 동상이라고 한다.

돔에 금을 입힐 때도 당시로는 첨단 방식인 스프레이 페인팅을 했는데 
금 녹이는 용해액에 수은이 함유돼 금물을 뿌리던 인부 60명이 

수은 증기를 쐬고 중독돼 죽었다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 공습의 표적이 되지 않게 하려고 돔에 잿빛 칠을 했다. ​
돔 아래 둥글게 난간을 두른 곳이 계단을 통해 올라가는 전망대이다.

 

정면 윗쪽의 삼각박공 조각

장식 조각의 위치는 건물의 주요 부분에 해당하여 별도의 건축 덩어리를 통합하고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의 전환을 시각적으로 부드럽게 하여 
구조의 개별 요소의 역할과 중요성을 높여 준다. 

19세기 초 건물의 엄격함과 고상한 단순함은 화려함과 효과를 추구하는 것으로 대체되어 
벽의 가소성을 강화하여 페디먼트의 매끄러운 들판을 복잡한 옅은 부조로 채운다. 
이 모든 것이 성 이삭 대성당의 외부 장식에 완전히 반영되어 있으며
특히 성전 내부에서 생생하게 표현된다. 

 

외부 조각 

네 귀퉁이에 ​천사상과 불 밝히는 받침대를 세웠다.
기념비적이고 장식적인 조각품은 사원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 졌을 뿐만 아니라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에서 정교회와 러시아 군주제, 러시아 차르의 숭배를 강조했다.

 

외부 조각

 

북쪽 삼각박공 조각

네바 강 쪽에서 바라보는 성당의 북쪽 삼각박공에 새긴 부조상의 주제는 
조각가 ‘레 무아(F. Lemer)’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중앙은 무덤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이고 양쪽에는 천사상과 무덤을 지키는 군인과 여인들이 보인다.  
박공 상부에는 제자 요한 동상, 왼쪽에는 베드로, 오른쪽에는 바울의 동상이 있다
아래 길게 새긴 글귀는 "신이여, 왕이 당신의 권능 안에서 기뻐하게 하소서" 이다. 
'왕'은 표트르대제를 가리킨다.

 

남쪽 삼각박공

남쪽 현관의 벽에는 성모 마리아와 자녀, 측면에는 동방 박사가 있다. 
거대한 청동 고부조의 변위 위험을 피하기 위해 
강력한 금속 보강재로 둘러싸여 있으며 수많은 핀으로 고정되었다. 
덕분에 높은 부조는 처마 장식에 놓이지 않고 대리석 클래딩을 파괴하지 않는다. 

대성당의 현관은 사도의 부조와 동상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모서리는 램프로 천사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완성하고 
메인 돔의 난간에는 24개의 천사 동상이 있다. 

 

동쪽 삼각박공

4면 박공마다 부조상을 새겼는데 동쪽 박공은 성 이삭이 4세기 로마황제 발렌스를 
가로막고 서서 계속 가면 죽음을 맞을 것이라고 말리는 장면이다. 
조각과 건축 형태의 합성 관점에서 볼 때 동부 현관의 구호가 가장 성공적이다. 

 

사도 요한 조각

박공 위엔 세례 요한의 제자로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쓰고 있다.  
곁에 있는 독수리는 요한복음을 상징 한다.

 

4면 박공을 따라  열 두 명의 사도상이 서 있는데 사진 왼쪽이 베드로, 오른쪽이 바울이다.

 

베드로가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다.

 

서쪽 현관 "이삭(Isaac)은 황제 테오도시우스를 축복합니다"의 
높은 부조는 엄격하게 대칭으로, 차분하게 지어졌다. 
부조의 구석에는 성 이삭 대성당의 모형이 손에 든 골동품 토가에 
몽페랑(O. Montferrand)의 조각상이 있다. 

페디먼트 꼭대기에는 네 명의 전도자의 상징이 있는 조각이 있다. 
서쪽에는 사자가 있는 마가, 남쪽에는 천사가 있는 마태, 
북쪽에는 독수리가 있는 요한, 동쪽에는 누가가 있는 송아지. 
북부 페디먼트의 성 베드로, 폴 및 전도자 요한은 전기 도금으로 만들어지고 
나머지 9개는 청동으로 주조도었다.

 

외부 조각 - 천사상

천사상은 표현력이 뛰어난 작품이다. 
천사의 옷과 날개가 벽에서 약간 튀어 나와 조각품이 점차 
벽면으로 이동하고 천사는 유기적인 건축 세부 사항처럼 보인다. 
다락방 천사와 램프가 달린 천사는 전기 도금으로 만들어지며 인공 녹청으로 덮여 있다.

 

풍부한 야외 조각품은 성 이삭 대성당의 외관에 시각적으로 
과부하가 걸리지만 동시에 화려함과 엄숙함을 선사한다. 

 

정면에 선 코린트식 기둥이 웅장하다. 

한 개 무게가 많게는 114톤이나 되는 붉은 화강암 기둥이 모두 112개다.​ 
중앙 돔은 ​순금을 입힌 것으로도 유명하다. 
돔 성당으로는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 이스탄불 성소피아 성당과 함께 세계 3대 성당에 꼽힌다고 한다.

 

붉은 화강암의 굵은 원주들이 받치고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많은 뛰어난 건축 기념물 중 성 이삭 대성당은 건축 및 장식 과정에서 
다양한 종류의 유색 돌이 비정상적으로 널리 사용되었다는 사실로 유명하다. 
그들은 화강암, 다양한 유형의 대리석, 쇼크샤(Shoksha) 반암, 각력암(breccia), 
순지트(shungite) 슬레이트, 공작석 및 청금석을 사용했다. 

건축가 몽페랑은 거친 나뭇결의 핀란드 화강암인 라파키비(Rapakivi) 화강암을 건축 자재로 사용했다. 
라파키비 화강암은 강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큰 블록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구별된다. 
이 돌은 대성당의 주요 구조인 기초, 기단 및 112개의 기둥을 건설하는 데 사용했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화강암은 1740년대부터 개발된 거대한 비보르크 산괴의 영토에서 채굴되었다. 
피털락(Piterlax) 채석장은 핀란드 만 해안 근처의 여러 섬에 위치해 있어 
석재 블록을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쉽게 운송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 목적을 위해 특별히 지어진 배를 타고 물에 의해 대성당의 건설 현장으로 옮겨졌다. 

대성당의 기단 블록과 기둥을 연마하기로 결정했다. 
연마는 돌을 풍화로부터 보호하고 습기 침투를 방지하며 멋진 장식 효과를 주었다. 
붉은 화강암 기둥은 대리석 벽 클래딩의 밝은 회색 배경에 선명하게 눈에 띄며 
돔의 금과 결합하여 우아한 색 구성표를 나타낸다.  
따라서 성 이삭 대성당을 건설하는 동안 화강암은 

건설적인 것뿐만 아니라 장식적인 재료로도 사용되었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다양한 종류의 대리석이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으로 사용되었다. 
이 돌들은 다양한 색상이 될 수 있다. 
유색 대리석은 일반적으로 무늬가 있거나 줄무늬가 있다. 
처리하기 쉽지만 내구성이 떨어진다. 
대리석은 대기의 온도, 습도, 이산화황의 급격한 변화를 용납하지 않으므로 
러시아 건축에서는 외관 장식에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성 이삭 대성당은 외관과 내부가 대리석으로 된 몇 안 되는 건축 기념물 중 하나이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러스킬라(Ruskeala) 대리석은 성당의 정면에 사용되었다. 
이 돌의 퇴적물은 러스킬라 마을 근처의 북부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18 세기 중반부터 개발되었다. 
러스킬라 대리석 채석장은 밝은 황록색에서 짙은 녹색까지 다양한 색상의 돌을 제공했다. 
대리석은 색상과 구조가 균일하지 않은 패턴으로 처리되어 쉽게 처리되고 거울 광택을 냈다. 


그러나 러스킬라 대리석은 내후성이 충분하지 않으며 외부 장식에 사용될 때 중요한 단점이 있다. 
약 50-60 년 후에 부분 또는 전체 교체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 이삭 대성당의 정면은 그것과 마주하고 있으며, 
3개의 큰 문과 4개의 작은 외부 문이 새겨진 문이 그것으로 만들어졌다. 
밝고 어두운 회색 대리석은 비스듬한 바둑판 케이지 형태로 성전 바닥을 포장했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대성당 장식에서 티브디아(Tivdia) 대리석은 티브디아 마을 
북쪽의 칼렐리아(Karelia)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벨라야 고라(Belaya Gora) 광상에서 채굴되었기 때문에 때때로 벨로고르스크(Belogorsk)라고 불렸다. 
색상에서 분홍색과 빨간색 톤이 우세한 것은 미네랄 적철광의 존재 때문이다. 
이 대리석은 석영 함량이 높기 때문에 매우 단단하며 가공 정도면에서 가장 복잡한 그룹으로 분류되었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성당 내부에는 러시아산 석재와 함께 이탈리아와 프랑스 남부에서 수입된 석재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우선 흰색 이탈리아 세라베초 대리석으로 벽이 마주보고 있다.
짙은 회 녹색 제노바와 노란색 시에나 대리석도 이탈리아에서 구입했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붉은색 그리오토(griotto) 대리석은 프랑스 남부에서 가져왔다. 
이 돌은 짙은 체리 레드 또는 짙은 정맥과 작은 방해석 반점이 있는 밝은 빨간색이 매우 눈길을 끈다.
성 이삭 대성당은 실내 장식에 거의 사용되지 않는 돌 바위가 장식에 사용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어 쇼크샤(Shoksha) 반암은 진한 빨강색 또는 체리색을 띠고 규암 그룹에 속한다. 
주된 암석 형성 물질은 석영이며, 그 입자는 석영 물질에 의해 밀도가 높은 덩어리로 접합된다.
색상은 철 안료의 존재에 의해 결정되므로 규암은 대부분 빨간색, 분홍색 또는 갈색이다. 

성 이삭 대성당의 석재가 채굴된 쇼크신스코예 광상은 러시아에서 200년 넘게 알려져 왔으며 
페트로자보츠크에서 남쪽으로 60km 떨어진 오네가 호수 서쪽 해안에 위치해 있다. 
구조상 쇼크샤 반암은 내구성이 뛰어나고 내후성이 뛰어나다. 
가공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완벽하게 경면 마무리로 연마된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카렐리야(Karelia)에서는 각력암(breccia)도 채굴되었으며 복잡한 구성과 
구조의 암석으로 건물 장식에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세밀한 백운석-사문석 물질로 단단히 접합된 디아베이스 포르피라이트의 작은 조각으로 구성된다. 
이전에는이 ​​품종을 대리석이라고 했지만 더 취약했다. 
각력암의 추출 및 가공은 재료의 취약성으로 인해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큰 블록이 떨어져 나갔을 때 돌은 상당히 강한 단일체의 인상을 주었지만, 
추가 가공, 특히 연마할 때 다양한 크기의 조각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1m 40cm 높이의 벽과 철탑의 지하 부분에는 흰색 세라베조(Seravezzo)와 
분홍색 티브디안(Tivdian) 대리석이 있다. 
티브디안 광물 프레임에는 직사각형의 수평으로 길쭉한 패널과 둥근 격력암 메달이 있다. 
주각은 넓은 슬레이트 주각으로 바닥에서 끝나며 회색 대리석 바닥으로의 일종의 전환 역할을 한다. 

세라베조 대리석의 벽에는 약간 칙칙한 색조가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약하게 발음되는 패턴이 있다. 
흰색 카라라 대리석은 주 아이콘과 부 아이콘을 마주 보는 데 사용된다. 
주요 성상화 벽(iconostasis) 앞의 철탑 벽감과 난간 세부 사항도 그것으로 만들어졌다. 
주요 제단 측벽의 대리석 조각은 특별한 우아함으로 구별된다.

 

성 이삭 대성당 출입문

성당에는 3개의 청동으로 만든 대형 문이 3개 있는데 하나의 무게가 10톤 이라고 한다.
성경의 내용으로 장식한 조각들이 인상적이다.
출입문은 10톤의 청동주물로 만들어져 있다.

 

성 이삭 대성당 출입문

10톤의 청동주물로 만든 출입문과 문에 새긴 정교한 조각들은 
하나의 청동주물을 통째로 조각한 것이다.

 

전망대로 오르는 계단

성 이삭 성당은 옥상 전망대를 유료로 개방하고 있다. 
원통형의 125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 계단 10개 계단마다 번호가 쓰여져 있다 

 

성 이삭 대성당 전망대

성당 전망대에 올라가면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가 파노라마처럼 펼쳐 지는데 
도시를 한눈에 볼수 있어 인기가 있는 곳이다. 

 

성 이삭 대성당 전망대

사진의 앞쪽의 첨탑이 구 해군성 본부 건물이고 뒤쪽의 첨탑이 
페트로 파블로프스크 요새의 피터와 폴 대성당이다.

 

성 이삭 대성당 전망대
남쪽 방향으로 멀리 푸른 돔이 보이는 곳이 카잔 성당이다.

 

성 이삭 대성당 전망대
사진 뒤쪽에 황금색 돔과 첨탑이 보이는 곳이 그리스도 부활성당(일명 : 피의 구원성당)

 

성 이삭 대성당 전망대
성당의 지붕에는 중앙 꾸뽈(돔)과 작은 꾸뽈(돔) 4개가 있는데, 
꾸뽈은 모두 붉은색 화강암 기둥이 둘러싸고 있다.

 

[영상] Saint Isaac's Cathedral in Saint Petersburg, Russia 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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