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의 역사극장

피살 51년 만에 발견된 빨치산 비밀 아지트의 주인공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위원장으로 빨치산 이끌다
1954년 피살된 박영발의 청년 시절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을 떠날 즈음에 촬영한 36살 박영발. 임경석 제공

 

2005년 2월, 지리산 깊은 산중에서 박영발(朴榮發) 비트(비밀 아지트)가 발견됐다. 반야봉 중허리 함박골의 험한 산비탈에서였다. 세월이 흘러 백발이 성성한 빨치산 참가 생존자들이 찾아낸 이 천연동굴에는 놀랍게도 옛 자취가 남아 있었다. 무전 통신에 사용됐을 전선줄, 흰색 주사용 앰풀, 깨진 갈색 유리병, 수십 개의 폐배터리, 낡은 검정 고무신짝 등이 뒹굴고 있었다.1

 

주인공이 사망한 지 51년이 지났는데도 생전에 그의 손길이 닿았을 유품은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그뿐인가. 반경 10m 내에는 3층으로 쌓아올린 돌 위에 흙을 얹어 평평하게 다진 구들장이 있었고 근처 바위틈에서 인쇄용 등사기와 롤러, 잉크통이 발견됐다. 잉크통 속에는 마르지 않은 등사용 검정 잉크가 가득 차 있었다.2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위원장으로서 1954년 3월19일 피살될 때까지 최후 국면의 빨치산을 이끌던 박영발의 조난 장소 풍경이었다.

 

1932년 9월2일 체포 당일 동대문경찰서에서 작성한 피의자 박영발 신문조서 첫 장. 임경석 제공

 

“몰락해가는 부농층 봉건 가정”의 산골 소년

 

“1913년 6월12일 경북 봉화군 내성면 화천리에서 출생하였다. 곳은 산골 농촌이며, 집은 몰락해가는 부농층 봉건 가정이었다. …학교 입학은 거주하는 지리적 조건과 가정의 빈궁(어머니의 사정)과 불화로 인하여 불가능하였다.”3

 

박영발은 뒷날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길에 오를 때 작성한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산골 농촌’이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줄기가 나뉘는 산악지대에서 태어났다. ‘봉화군 내성면 화천리 176번지’, 이것이 그의 본적지이자 출생지 주소였다. 오늘날 도로명 주소로 표기하면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사계당길 17’에 해당한다.

 

자기 집을 ‘부농층 봉건 가정’이라고 표현한 점이 눈길을 끈다. ‘가정의 빈궁과 불화’로 인해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뒷부분 언급과 모순된다. 하지만 집안 사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문장 다 실제와 같았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부친은 1년에 40석 정도를 수확하는 부유한 농촌 거주자였다.4 중소지주였던 것 같다. 1910~20년대 농가 호당 평균 수확량이 5∼6석이었음을 고려하면,5 부친의 생활수준은 농촌 평균보다 7∼8배 더 유족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부친은 두 집 살림을 차렸다. 자신과 동갑내기인 아내가 35살이 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자, 8년 연하의 젊은 여성을 둘째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아마 ‘첩’이었을 것이다. 과연 새로 맞은 부인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첫아들을 낳은 데 이어 몇 년 뒤 둘째 아들도 출산했다. “첩 살림은 밑 빠진 독에 물 길어 붓기”라는 속담도 있듯이, 부친은 둘째 부인의 살림에만 돈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정실 부인이 36살에 뒤늦게 아들 박영발을 낳았음에도 부친의 편애 습성은 바뀌지 않았다. 박영발이 ‘가정의 빈궁과 불화’라는 말에 괄호를 달아서 ‘어머니의 사정’이라고 덧붙인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모스크바 유학 중 박영발이 직접 쓴 <자서전>. 임경석 제공

 

‘왕복 4시간’ 학교 대신 한문 서당에서 학업

 

박영발은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하나는 어머니가 가난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학교에 보낼 여력이 없었던 것 같다. 또 하나의 이유는 ‘지리적 조건’이었다. 그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초등 교육기관은 군청소재지인 내성면 포저리의 내성보통학교였다. 거리가 8.9㎞에 달했다. 성인 걸음으로 2시간15분이 걸렸다. 학교에 가려면 날마다 왕복 4시간30분을 걸어야 했다.

 

그 대신에 박영발은 전통 방식의 한문 교육을 받았다. 7살 되던 1919년부터 15살 되던 1927년까지 동네에 개설된 한문 서당에 통학했다. 학업이 중단된 적도 있었다. 집안의 농사를 돕기 위해서였다. 중단된 기간을 제외하면 그의 한문 수학 기간은 1919년 6월∼1922년 3월, 1925년 4월∼1927년 12월, 도합 5년5개월이다.

 

“1930년 7월에 동리에서 박학택, 황윤경 등 13인 동지들과 함께 독서회 조직에 참가하였다. 그것의 발전으로 1931년 5월에는 봉화적색농민조합 조직에 참가하였다. … 1932년 2월에 서울로 왔다. 그때 정길성 동지의 지도 밑에서 경성적색노조준비회라는 지하조직의 연락 공작을 맡았다.”

 

박영발이 처음 비밀결사운동에 참가한 것은 18살 때였다. 1930년 7월, 봉화군의 청년 13인이 은밀하게 만든 독서회를 통해서였다. 명단이 다 판명된 것은 아니지만 그중 지도적 역할을 맡은 이는 황윤경(黃潤慶)과 박항택(朴恒澤)이었다. 연령으로 보면 각각 7년, 4년 연상의 선배들이었다. 특히 황윤경은 1920년대 중반부터 이미 그 지역 사회주의운동에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었다. 프로운동자동맹, 봉화청년동맹, 경북청년연맹 집행위원, <조선일보> 봉화지국 기자, 신간회 봉화지회 조사부장 등이 그가 맡은 직책이었다. 독서회 참가자 가운데 박영발은 나이로 치면 막내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독서회란 18∼25살에 해당하는 봉화군 청년층이 비밀리에 조직한 사회주의 연구 단체였다.

 

독서회를 만든 그해에는 혁명적 고양기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대중 투쟁의 급격한 분출이 있었다. 반일시위와 동맹파업 등 전 조선의 학생 봉기가 고조된 게 바로 그해 봄이었다. 농민들도 움직였다. 해마다 평균 200건 안팎이던 소작쟁의가 700건 안팎으로 급증한 해가 1930~31년이다. 농민폭동도 자주 일어났다. 특히 함경도 일대에서는 마치 해방구를 연상하게 할 정도로 농민운동이 활발했다.6

 

박영발 비밀 아지트 출입구. 통일뉴스 김규종

 

경북 봉화군 청년들의 비밀 독서회

 

독서회 참가자들은 그 시기 혁명적 정세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들은 1년도 채 지나기 전에 봉화적색농민조합을 조직했다. 1931년 5월의 일이었다. 적색농민조합이란 모스크바에 소재하는 농민조합인터내셔널(크레스틴테른) 계열의 혁명적 농민단체를 가리키는 말인데, 지주와 부농을 배제하고 빈농·중농을 위주로 하는 농민단체였다. 당연히 비밀결사였다.

 

박영발도 적색농민조합에 참여했다. 그는 조직과 선전 분야를 담당했다. 각 마을 단위로 8개 농민야학을 설립했고, 그것을 중심으로 적색노조의 마을별 세포조직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자기가 사는 마을, 내성면 화천리에도 야학교를 세웠다. 농민 30여 명이 모여들었는데, 주로 조선어와 산수를 가르치고 계급의식 고취에 힘썼다. 특히 양반과 상민 사이 차별적인 계급적 언어를 폐지하고 평등한 언어를 사용하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존댓말과 반말을 구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하도록 이끌었다. 파격적인 시도였다. 오래된 언어 규범을 바꾸는 일이라 대도시에서도 어려웠을 터인데, 하물며 유교적 전통 규범이 강력하게 잔존한 경상북도 농촌지대에서야 말할 나위도 없었다.

 

농민야학, 반상 차별 반대, 소작료 인하 투쟁…

 

그해 12월에는 소작쟁의까지 이끌었다. 소작료 인하가 쟁점이었다. 당시 통용되던 소작료율 50%를 40%로 낮추려고 했다. 4·6제를 내건 것이다. 그에 더해 고용 농민인 머슴의 품삯 인상도 요구했다. 쟁의는 한때 성공했다. 그러나 마을 중소지주들은 대부분 그의 친척이었다. 그는 문중의 배척을 받았다. 친척 어른들에게 경제적으로 손해를 끼치는 것도 문제거니와, 양반·상민 사이 엄연한 위계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비밀결사의 존재가 노출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한 박영발은 고향을 떠나야 했다.

 

1932년 2월 경성으로 갔다. 봉화군에 인접한 이웃 고을 영주 출신인 정길성(丁吉成)의 인도를 받았다. 정길성은 7년 연상으로, 영주청년동맹, 신간회 영주지회에 참여한 이래 경성과 영주를 오가면서 적색노동조합과 사회주의운동에 줄곧 몸담은 신뢰할 만한 고향 선배였다. 박영발은 상경과 동시에 비밀결사 경성적색노동조합준비회에 가담했다.

 

“1932년 9월2일 종연방적(鐘淵紡績) 앞에서 살포된 격문 사건과 국제청년데이 경계수색을 겸하여 동대문 밖 신설리 방면에 출장하여 밀행하던 중, 신설리 132번지 앞에서 일견 노동자풍의 조선인 남자를 목격하고 거동이 수상한 자로 인정하여 현장에서 취조한바….” 7

 

동대문경찰서 순사부장 김승종은 상부에 올리는 ‘사건 인지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사건의 첫 단서를 얻은 경위에 관해서였다. 신설리 132번지 앞에서 잠복경계근무 중이었다고 한다. 오늘날 전철 신설동역 오거리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전날 밤 근처 방적공장에서 격문이 살포됐고 이틀 뒤에는 국제청년데이가 도래하기 때문에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다. 현장에서 거동이 수상해 뵈는 노동자풍의 조선인 남자를 포착했다. 아마 잠복근무 중인 사복경찰들을 발견하고서 쭈뼛거렸던 것 같다. 경찰은 그를 붙잡았다. 그게 뜻밖에도 ‘좌익노동조합조직준비회 사건’의 발단이 됐다고 한다.

 

연락원 임무 수행 중 경찰에 붙잡혀

 

박영발은 레포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레포란 연락원을 뜻했다. 그의 품에는 인텔리 출신의 저명한 국어학자이자 언론인인 대산(袋山) 홍기문(洪起文)에게 전하는 정길성의 비밀 편지가 감춰져 있었다. 전차를 타고서 동대문경찰서로 연행 중이었다. 박영발은 틈을 봐서 편지를 입속에 집어넣었다. 씹어 삼킬 작정이었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발각되고 말았다. 강제로 입을 벌려야 했고, 결국 유일한 증거물품이 압수됐다. 단지 의심스러웠을 뿐인 그의 혐의는 지극히 엄중한 것으로 바뀌고 말았다.

 

9월2일에 시작된 수사는 10월18일까지 계속됐다. 혐의자 백수십 명이 경찰에 피검됐고, 삼엄한 취조 끝에 비밀결사 관련자 29명이 검찰로 송치됐다. 이 기간에 박영발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문을 겪어야 했다. 그의 표현을 따른다면 “고문에 의하여 발병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다. 박영발은 제 발로 걸어 나오지 못했다. 함께 피검됐던 노동운동 동료 정재철에게 업힌 채로 경찰서 문을 나와야 했다. 그는 근육 위축으로 인한 앉은뱅이가 됐다. 필사적인 재활 노력 끝에 다시 걸을 수 있게 된 것은 4년이 지난 1936년 5월부터였다. (다음 연재에 계속)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김경대 기자, ‘전후 빨치산 비트 최초 발굴’, <시민의 소리> 2005. 2.19. http://www.siminsori.com/news(검색일 2021. 4.27.)

2. 이현정 기자, ‘살아남은 빨치산들, ‘박영발 비트’ 찾다’, <통일뉴스> 2005. 5.10., https://www.tongilnews.com/news(검색일 2021. 4.27.)

3. 박창일(본명 박영발), <자서전>, 1948. 8.9.,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4 л.12-14об

4. 경성동대문경찰서, ‘피의자신문조서(朴榮發)’, 4쪽, 소화 7년(1932) 9월2일.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85-국편-0259-0006

5. 김재훈, ‘1925-1931년 미가 하락과 부채불황’, <한국경제연구> 15, 233쪽, 2005

6. 이준식, <농촌사회변동과 농민운동>, 민영사, 465쪽, 1993

7. 京城東大門警察署 巡査部長 金昇鍾, ‘좌익노동조합조직준비회사건 인지보고’, 1~2쪽, 1932년 9월2일, 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 85-국편-0259-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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