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의 역사극장

수재를 사회주의자로 키운 경성사범

방준표가 사회주의를 배우고 노동운동조직을 만든 서울, 병들면 찾아가던 고향 통영

1948년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 시절의 43살 방준표.

 

통영은 남해안의 아름다운 항구도시다. 수목 울창한 언덕과 짙푸른 바다, 중첩한 섬들이 놀라운 경관을 만든다. 그곳은 16세기 일본의 침략을 막아낸 이순신 장군의 도시이기도 하다. 지명 자체가 ‘삼도수군통제영’의 약칭이다. 그뿐인가. 윤이상, 박경리로 대표되는 예술가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예술가들은 그곳에서 나거나 교육받았으며 결혼도 하고 가족을 잃기도 했다. 통영 골목길에는 그들 삶의 체취가 배어 있다.

 

고향에서 처음 해방운동 참가

 

이제 한 사람을 추가해야 하겠다. 바로 방준표(方俊杓)다. 6·25전쟁 때 전라북도 도당위원장으로서 빨치산을 이끌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통영’이라 쓰고 ‘토영’이라고 발음하는 현지 토박이다. 이력서처럼 중요한 문서에조차 통영을 가리켜 저도 모르게 ‘토영’이라고 잘못 적곤 했다.1 일제하 행정구역 명칭으로 하자면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읍 명정리 346번지’가 그의 본적이자 출생지였다. 거기서 1906년 4월28일에 태어났다. 지금도 이 주소지는 남아 있다. 이순신 사당인 충렬사 정문에서 멀지 않다. 150m쯤 떨어져 있으며, 걸어서 2분 거리다.

 

그의 형제자매는 남녀 9명이었다. 방준표는 그중 둘째 아들이었다. 당시 풍속으로는 자손이 번성해 다복한 가정으로 여겨질 만했다. 그렇더라도 대식구였다. 식솔을 거느리는 아버지 방한정은 해산물 상점의 사무원이었다. 하지만 ‘술 잘 먹는 사람’이었다. 가정 형편이 빈궁했다고 한다. 어머니 공재복이 생업에 나서야 했다. 그녀의 바느질품 노동이 가정을 지탱하는 한 기둥이 됐다.

 

방준표는 통영에서 서당을 3년간, 보통학교를 6년간 다녔다. 중등학교 진학차 서울로 향하던 17살 때까지 그 도시에서 성장했다. 유학 중에도 방학만 되면 고향에 내려와 친구들과 어울렸다. 유학 4년차이던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는 고향에 내려와서 통영수해구제회 활동에 참여했다. 간부 1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간부들이 3대로 대열을 나누어 통영 각지에 나가서 모금 활동을 했다. 그는 ‘재외유학생학우회’ 대표 자격으로 통영면 일대를 순회했다.

 

방준표가 해방운동에 처음 참가한 곳도 고향인 통영이었다. 1929년 24살 때 본격적으로 운동에 뛰어들었다. 본격적이라 함은 다른 직업 없이 그 일에 전업적으로 종사했음을 뜻한다. 그해 8월 통영청년단 위원장 자리에 취임한 것은 그 상징이었다.

 

본래 통영청년단은 3·1운동 참가자들이 중심이 돼 결성한, 합법 공개 영역의 청년단체였다. 만세시위운동이 사그라들던 1919년 7월 발족한 이후 통영 지역사회의 공개 대중운동을 이끌어가는 주도체 역할을 했다. 1923년에는 벽돌로 번듯한 2층짜리 회관 건물까지 건축할 만큼 현실적 영향력을 갖췄다.

 

1929~31년 방준표가 위원장으로 재임하던 통영청년동맹 회관.

 

가택수색, 체포, 검거… 위원장의 험난한 삶

 

위원장 방준표가 걷는 길은 험난했다. 경찰서 유치장과 형무소를 제집 드나들듯이 빈번하게 출입했다. 신문에 단편적으로 실리는 지방 기사만 훑어봐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위원장 취임 두 달 뒤인 그해 10월9일에 통영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에게 가택수색을 당했다. 같은 달 21일에는 결국 체포됐다. 이번에는 동래경찰서 고등계였다. 악명 높은 조선인 경찰간부 노덕술 경부가 지휘하는 수사망에 포착돼 부산까지 압송당했다. 동래청년동맹과 통영청년동맹 간부들이 비밀결사 공산청년회를 조직했다는 혐의였다. 10월28일에는 청년 12명이 검사국에 송치됐는데 증거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부산형무소 구치감에 수용돼 검찰 조사를 받던 중 11월6일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됐다.2

 

수난은 계속됐다. 이듬해인 1930년 8월1일 경찰에게 또 체포됐다. 청년동맹회관에서 통영학생회 정기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는데, 회관 한편 흑판에 ‘오늘은 적색 데이’라는 불온 메모를 의도적으로 기재해놨다는 혐의였다. 1932년에도 그랬다. 메이데이를 며칠 앞둔 4월26일 반일 격문이 발각돼 검거 선풍이 일었다. 통영 사회운동의 주요 간부 15명이 체포됐는데, 방준표도 포함됐다. 취조가 시작된 지 20여 일 지나 혐의자 가운데 3명이 검사국으로 송치됐다. 방준표는 마지막날까지 취조받은 유력한 혐의자였으나, 다행히 송치자 명단에는 들지 않았다.3

 

방준표는 그해 말에 또 검거됐다. 12월13일이다. 당시 그의 지위는 통영노동조합 간부였다. 어느 땐가 청년운동에서 노동운동으로 활동 분야를 옮겼던 것 같다. 혐의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노동조합 간부 3명, 소비조합 간부 4명을 검거한 것을 보면 통영지역 사회운동과 관련된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통영은 방준표에게는 어머니 같은 곳이었다. 객지에 나가서 병에 걸리면 치료차 되돌아오는 곳이었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호흡기질환을 자주 앓았다. 일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할 만큼 병이 악화하곤 했다. 첫 직장인 부산보통학교에서 교원 생활을 하던 중에도 그랬다. 교장과의 불화도 원인이 됐지만, 병 치료를 위해 고향으로 되돌아와야만 했다. 1929년 4월부터 10월까지 통영에 머물면서 치료에 전념했다. 24살 때 일이다.

 

35살 때도 그랬다. 서울에서 노동운동에 종사하던 중 폐질환에 걸렸다. 폐디스토마로 심한 각혈을 거듭했고 더는 몸을 지탱할 수 없었다. 그가 선택한 길은 귀향이었다. 1940년 4월부터 1942년 3월까지 무려 2년 동안이나 병고에 시달렸다. 하지만 병석에 오래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생계를 세워야 했다. 11년 연하의 어린 아내 ‘김정’이 있었고, 뒷날 세 아이를 얻었다. 뭔가 일해야 했다. 통영읍내 정미회사, 밀양읍의 인쇄소와 밀양의원 등에서 사무원이나 직공으로 일한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1922~28년 방준표가 재학한 경성사범학교 본관 건물.

 

조선인은 10명에 불과했던 수재 학교

 

식민지 수도 서울은 방준표에게는 가슴 설레는 중등학교 유학지였다. 17살 청소년 방준표는 1922년 이제 막 개교한 경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보통학교(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서 식민지 시기에 설립한 최초의 관립 사범학교였다. 인기가 매우 높았다. 입학생은 학비를 전액 면제받고 매달 생활비를 지급받았기 때문이다. 졸업 뒤에도 보통학교 교사로 취업이 보장됐고, 판임관 관등의 교육 관료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가정 형편이 어렵고 머리 좋은 학생들에게는 매력적인 곳이었다. 방준표에게도 그랬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집안 형편은 상급학교로 갈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마침 서울에서 사범학교가 설립돼 관비로 학생 모집을 하”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4

 

입학 시험은 매우 어려웠다. 방준표가 응시한 1922년도 입학정원이 102명이었는데, 응시자가 733명이었다. 대략 7 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민족별로도 입학정원이 할당돼 있었다. 대부분은 일본인 몫이었다. 조선인 합격자는 10명에 불과했다. 1922년 당시 조선인 응시자는 221명에 달했다. 상위 4.5%에 들어야만 했다.5 일본인 학생들이 뒷날 남긴 기록을 보면, 경성사범의 조선인 학생은 엄청난 입시 경쟁을 통과한 ‘진정한 수재’였다고 회고했다.

 

경성사범학교에는 기숙사가 있었다. 모든 학생이 원칙적으로 기숙사에 입사해야 했다. 황금정(을지로5가)에 위치한 캠퍼스에는 기숙사 3개 동이 있었고, 방 하나에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하지 않고 12명의 학생을 수용했다. 기숙사 학생들은 고도로 통제된 단체생활에 적응해야 했다. 밤 9시에는 야례(夜禮)라고 부르는 점호에 참석해야 했다. 각 방에는 상급생과 하급생 사이 위계질서가 엄격했다. 상급생에게는 존칭으로 ‘~상’을 붙이고, 하급생에게는 존칭을 붙이지 않았다. 오셋쿄(說敎)라는 집단 뭇매가 있었다. 단체기합이었다. 군대 내무반 생활의 복사판이었다.

 

방준표는 이 사범학교에서 6년 동안 기숙사 생활을 했다. “전부 일본인 학생이었고 조선인 학생은 1할 정도밖에 안 됐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놈들의 민족차별 대우에, 특히 민족적 자각과 일제에 대한 증오를 느꼈다”고 술회했다. 졸업에 즈음해서는 이미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책들을 탐독했다.

 

방준표가 사회주의를 수용한 배경에는 경성사범학교 체험도 있지만, 가족의 영향도 있었던 것 같다. 8살 위 큰형 방정표(方正杓)는 통영 3·1운동에 참가한 열혈 청년이었고, 통영청년단 창립멤버이기도 했다. 1920년대 중엽에는 사회주의 사상단체 정화회(正火會)에 참가해 기관지 <횃불> 편집인으로 일했다. 결국 필화사건에 연루돼 사상범으로 재판까지 받았다.

 

1920년대 중후반기 서울에서의 학창생활은 방준표에게 사회주의 이념을 가져다주었다. 서울은 그에게 사상의 고향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서울은 방준표에게 노동운동의 무대이자 비밀결사운동의 거점이었다. 그가 서울에서 노동운동에 참가한 것은 29살 때였다. 그의 회고를 들어보자.

 

“1934년 조선 사람은 조선에서 일해야 되겠다는 것을 느끼고 조선으로 나와 고향을 거쳐 서울에 왔다. 인쇄직공 견습으로부터 시작하여 6년 동안 기계공 노릇을 하면서 조선인쇄주식회사, 서적회사, 곡강인쇄소, 영등포 기린맥주공장, 용산철도공장 노동자 속에 공산주의 그룹 조직 활동을 했다.” 6

 

통영군 통영읍 명정리 346번지, 방준표 생가의 현재 모습.

 

인쇄직공으로 서울 적색노조 운동

 

1934년 5월부터 1940년 4월까지 6년 동안 서울에서 적색노동조합 운동에 참가했다는 진술이다. 서울로 상경하기 전에는 일본에서 얼마간 사회주의운동에 종사하기도 했다. 도쿄에서 토목노동에 종사하면서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일본공산당 활동을 했다고 한다. 아직 그에 관한 정보가 충분히 발굴되지 않았지만, 그런 활동 경험이 서울의 적색노동조합 운동에도 활용됐을 것으로 생각한다.

 

활동 구역은 영등포와 용산이었다. 서울에서 노동자가 가장 밀집한 대표적인 공장지대였다. 방준표는 인쇄직공 일을 익혔다. 이 기술은 노동운동에 매우 유용했다. 합법신분을 유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쇄소·서적회사 등에서 조직 활동을 하는 데 꼭 필요했다.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맥주공장, 철도공장 등 타 분야 노동자 사회에도 진출할 수 있었다. 특히 철도공장 노동자 내부 활동은 해방 이후에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다음 연재에 계속)

 

글·사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방준표, ‘간부리력서’, 1948. 8.10. 2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4 л.12~13об

2. ‘동래청년 12명, 검사가 석방’, <동아일보> 1929. 11.9.

3. ‘통영격문범 3명은 송국’, <동아일보> 1932.5.18.

4. 김준(방준표), <자서전>, 1948. 8.10. 1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4 л.14~16об

5. 안홍선, ‘경성사범학교의 교원양성교육 연구’, 서울대 교육학과 석사학위 논문, 2004, 154쪽

6. <자서전>, 1~2쪽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6, Shchedin.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A View of Sorrento near Naples with Tasso's House, 1825. by Sylvester F. Shchedrin. oil on canvas. 

91 х 129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6,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실베스터 쉬드린 (Sylvester Feodosiyevich Shchedrin 1791~1830)은 러시아의 풍경화가였다.
실베스터 쉬드린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유명한 조각가 페오도시 쉬드린(Feodosiy Shchedrin) 
제국 예술아카데미(Imperial Academy of Arts) 총장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풍경화가 세미온 쉬드린(Semion Shchedrin)은 그의 삼촌이었다. 


1800년 실베스터 쉬드린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제국 예술아카데미에 입학하여 풍경화를 공부했다. 
그의 교사 중에는 삼촌인 세미온 쉬드린, 표도르 알렉세예브(Fyodor Alekseyev), 
이바노프(M. M Ivanov) 및 토마스 토몬(Thomas de Thomon)이 있었다. 
1811년 그는 랜드 금메달을 포함, 여러 상을 수상하여 해외 유학을 위한 장학금을 받았다.

실베스터 쉬드린은 1818년 이탈리아로 떠났고 나폴레옹 전쟁으로 귀국이 연기되었다. 
이탈리아에서 그는 로마에서 옛 거장들을 공부했다. 
그는 러시아의 미하일파블로비치 대공이 주문한 수채화를 그리기 위해 나폴리로 갔다. 
그 후 로마로 돌아왔다. 

그는 각각 약간 다른 각도와 다른 세부 사항으로 그림의 8~10 가지 변형을 그렸다. 
연금이 1823년에 끝났지만 그는 프리랜서 화가로 해외에 머물기로 했다. 
1825년 실베스터 쉬드린은 알바노 호수의 작업을 마쳤다. 
그것은 그의 자연스러운 구성으로의 움직임의 새로운 단계였다. 
이 그림에서 그는 주제와 배경 사이의 경계를 완화하고 형식적인 색상 사용에서 이동했다. 

실베스터 쉬드린은 많은 의뢰를 받았으며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예술가로 성장했다. 
그는 로마와 나폴리에서 살았고, 공중에서 일하며 만과 절벽을 그리고 
작은 마을과 어부 마을의 전망을 그렸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모티프 중 하나는 바다가 보이는 덩굴의 테라스였다. 
"Midday Paradis"의 이미지라고 한다. 


1820년대 말, 실베스터 쉬드린은 불안하고 거의 악몽같은 야행성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는 점차 건강이 감소하는 데서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1830년 소렌토에서 세상을 떠났다. 
어떤 의미에서 쉬드린의 작품은 러시아 미술의 발전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시대를 시작했다. 

쉬드린은 러시아 예술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예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소위 포실리포(Posillipo) 학교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다. 
일부는 러시아로 반환하는 동안 그의 작품 대부분은 이탈리아 박물관에 있다. 
중요한 예술적 관찰로 가득찬 쉬드린의 편지는 1932년에 
책 (Shchedrin Letters from Italy )으로 출판되었고 1978년에 재인쇄되었다.

소렌토(Sorrento)는 캄파니아 지역의 나폴리 만 남쪽 해안에 위치한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이다. 
쉬드린은 1825년부터 소렌토에서 정기적으로 거주하고 일하며 주변의 많은 풍경을 그렸다. 

 

A View from Petrovsky Island in St Petersburg, 1816. by Sylvester F. Shchedrin. oil on canvas.
68 х 95,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6,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특히 이탈리아 풍경화로 유명한 실베스터 쉬드린은 그의 초기 작품에서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묘사했다. 
이러한 풍경에 묘사된 자연의 특성은 전통적인 색상과 선명한 레이아웃 분리가 있는 고전적인 구성이다. 
그림의 왼쪽에는 즈다노브카(Zhdanovka) 강 위의 나무 다리, 제 2생도 군단 본관 현관 및
블라디미르 스키(Vladimirsky) 대성당의 종탑이 있다. 
또한 투치코브(Tuchkov) 다리를 가로 지르는 요새화된 은행을 관찰할 수 있으며 오른쪽에는 
구 대마창고가 있으며 그 너머에는 구 증권거래소 건물과 겨울궁전 지붕이 있다.

 

Naples on a Moonlit Night. Via Partenope and the Castel dell'Ovo, 1829. 

by Sylvester F. Shchedrin. oil on canvas. 62 х 87.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6,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서쪽에서 동쪽으로 나폴리 제방의 전망이 제공된다. 
중앙에는 왕립 정원에서 산타 루치아(Santa Lucia)의 산책로로 가는 통로가 있는 거리이다.  
위로는 피조 팔콘(Pizzofalcone) 언덕과 산 프란시스코 디 파올라(San Francesco di Paola) 교회의 
돔에 있는 주택, 오른쪽은 캐스텔로 델 오보(Castello del Ovo)이다. 

실베스터 쉬드린은 그의 생애 말년에 밤 풍경을 많이 그렸다. 
대부분은 작은 작품으로 특별한 서정주의 작가가 

부드러운 달빛을 전달해 익숙한 풍경을 변형시킨다. 
그러나 그의 생애가 끝날 무렵 극적인 시작은 그의 작업에서 더욱 강해진다. 


그의 초기 작품에서 거의 고전적인 인식의 명확성에서, 
쉬드린은 존재에 대한 보다 극적인 인식으로 이동한다. 
이 그림 "달밤의 나폴리"에서 실베스터 쉬드린은 

달의 차가운 빛과 불타는 불의 불꽃을 결합한다. 
동시에 그는 도시의 밤 생활 특유의 불안과 긴장감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전달하여 
뚜렷하게 로맨틱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작품을 만든다.

 

View of Ariccia, 1836. by Mikhail I. Lebedev. oil on canvas. 54 х 44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6,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로마 근처에 있는 아리치아(Ariccia)의 풍경화이다. 
이 그림은 러시아 낭만주의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 중 하나다. 
19세기에 아리치아를 방문한 것은 러시아와 이후 미국의 
많은 귀족들이 소위 "그랜드 투어"의 일부였다. 
당시 남부 유럽을 통해 많은 화가들도 이 마을을 방문했는데 
1835년 경에는 주민이 1000명도 되지 않았다. 

미하일 이바노비치 레베데프(Mikhail Ivanovich Lebedev 1811~1837)는 

러시아 화가로 주로 낭만적인 스타일로 풍경을 그렸다. 
1829년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제국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막심 보로뵈프 지도 아래 풍경화를 공부했다. 
1832년에 그는 아카데미에서 두 개의 은메달을, 1833년에는 그레이트 골드 메달을 받았다. 
1834년 그는 장학금으로 이탈리아를 여행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칼 브률로프(Karl Bryullov)를 포함한 러시아 예술가들의 모임에 합류했다. 
그는 로마 주변 지역, 특히 알바로 라지에일(Albano Laziale)과 같은 주변 마을에서 그림을 그렸다. 

레베데프는 26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2년 전인 1835년 

러시아 예술 아카데미의 장학금을 받고 이 마을을 방문했다. 
안개가 자욱한 회색과 황량한 풍경에 익숙한 북부인에게 이탈리아의 무성한 자연, 
아름다운 건축물 및 밝고 밝은 색의 옷을 입은 평범한 사람들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레베데프는 분명히 그것에 지치지 않았다. 
여기에서 논의된 작업은 그가 동일한 뷰로 만든 거의 동일한 버전 중 첫 번째이다. 
현장에서 이루어진 일부 이전 연구도 알려져 있다.

그는 1837년 콜레라로 26세의 나이로 나폴리에서 사망했다.
그의 짧은 경력과 작은 일에도 불구하고 레베데프는 러시아 낭만주의의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그는 주로 풍경을 그렸고, 명암 대비를 많이 사용하고 

다채로운 세부 사항에 눈에 띄는 주의를 기울였다. 
이것은 1836년 로마 근처의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아리치아의 풍경화에서 두드러지게 표현된다. 
칼 브률로프는 그가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풍경화가 중 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그의 조기 사망으로 인해 그의 재능이 더 발전는 것을 보지 못했다.

 

A View in the Pavlovsk Park, 1845. by Voloskov A. oil on canvas. 89,5 х 125,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6,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파블로프스키 공원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인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 중 하나이다. 
이 그림은 슬라뱐카( Slavyanka) 강과 마리엔탈(Marientahl) 공원의 
측면에서 바라본 왕궁의 모습을 담고 있다. 
오른쪽 언덕 위의 나무들 사이에는 파브로브(Pavlovsk) 기지로 가는 오벨리스크가 있다. 

파블로프스크 궁전 (Pavlovsky palace)은 캐서린 2세가 아들이자 상속인인 폴 1세(Paul I )와 
그의 아내 마리아 페오도로프나(Maria Feodorovna)를 위해서 건축한 것이다.
후에 폴 1세가 죽은 후 이곳은 그의 미망인 마리아 페오로로프나의 집이 되었다.
궁전과 그것을 둘러싼 큰 영국식 정원은 이제 러시아 주립 박물관이자 공공 공원이다.

알렉세이 볼로스코프 (Alexey Yakovlevich Voloskov 1822~1882)는 러시아의 풍경화가였다. 
그는 상인 가족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삼촌 테렌티 볼로스코프 (Terentiy Voloskov 1729~1806)는 
교회 달력의 날짜를 계산한 초기 천문 시계의 발명가였다. 

그는 어린 시절의 질병 (아마도 소아마비 )으로 인해 목발의 도움 없이는 걸을 수 없었다. 
알렉세이 볼로스코프는 제국 예술아카데미에 입학해서 공부했다. 
1843년에 그는 은메달을 수상하고 1845년에 "자유 예술가"라는 칭호를 받았다. 
알렉세이 볼로스코프는 1851년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고 그곳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젊은 예술가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지위를 활용했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6,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A View of Amalfi near Naples, 1829~1830. by Sylvester F. Shchedrin. oil on canvas. 94,5 х 13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6,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크기와 구성면에서 이 그림은 "나폴리 근처의 소렌토 전망" 풍경과 한 쌍으로 생각된다. 
이 그림이 1829년 초 엘레나 파블로브나 대공비가 의뢰한 풍경의 일부였다. 
이 작품은 쉬드린이 아마도 1829~1830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아말피(Amalfi)는 이탈리아 살레르노 지방의 소렌토 남쪽 살레르노 만에 있는 해변 마을로, 
대주교이자 중세 해양 공화국의 수도이다. 콘스탄틴 대왕이 4 세기에 설립했다.

 

2019. 08. 22. 인증샷

 

New Rome. Sant'Angelo castel, 1823. by Sylvester F. Shchedrin. oil on canvas. 47 х 60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6,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티버(Tiber) 강의 오른쪽 둑에 위치한 로마의 성 천사의 성은 기본적으로 로마 황제의 무덤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재건되었고 중세에는 요새로 사용된 후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위층에는 전염병이 유행하는 동안 이곳에 
그레고리 교황에게 나타난 미카엘 대천사의 동상이 있다. 
고대에 지어진 산탄젤로 다리라고 불리는 다리가 성으로 이어진다. 
쉬드린의 그림에서 성 천사의 다리는 제방에서 티버 강의 왼쪽 둑에서 묘사된다. 
멀리서 성 베드로 대성당과 바티칸 궁전을 볼 수 있다.

 

Mergellina Waterfront in Naples, 1827. by Sylvester F. Shchedrin. oil on canvas. 65 х 88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6,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 풍경화는 실베스터 쉬드린의 가장 완전하고 사려 깊은 작품 중 하나이다. 
왼쪽에 있는 캔버스의 역동적인 부분은 일상적인 추구에 빠져 있는 
나폴리 서민들의 측면, 휴식, 시끄러운 군중과 함께 활기찬 분위기를 자아낸다. 
휴가 중인 어부들과 딸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여성 등.
그러나 이 군중에서 제방, 질서 및 구성 균형을 따라 흩어져 있다. 

실베스터 쉬드린은 회화적 질량과 색상의 특별한 분포로 그것을 달성했다. 
도로의 시작 부분에는 나무 십자가가 있다. 
오른쪽 수평선에는 물 위의 곶에 성모님에게 헌정된 나자로 교회가 있다. 
왼쪽 가장자리에는 바위가 많은 카프리 섬의 특징적인 실루엣이 있다.

 

Terrace on the Sea Shore. Capuccini near Sorrento, 1827. by Sylvester F. Shchedrin. oil on canvas. 
47.5 х 60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6,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실베스터 쉬드린는 나무의 녹지에 의해 형성되고 빛과 공기가 스며드는 
'풍경 인테리어'의 모티브를 그림에 사용했다. 
쉬드린은 특히 그림같은 나폴리의 가난한 사람들을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들은 "항구"와 "테라스"의 자연 거주자였으며 그림에 낭만주의자들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생생한 편안함과 "현지 풍미"를 부여했다. 
쉬드린은 또한 승려와 가톨릭 사제를 묘사했다. 

특징적인 건축물이 있는 테라스의 위치는 19세기의 알려지지 않은 
아마추어 예술가가 그린 그림 덕분에 확립되었다. 
그중에는 소렌토 근처의 카푸치니 마을을 묘사한 비문이 새겨진 이 테라스의 스케치가 있었다. 
쉬드린의 유산에는 "Verandah"또는 "Terrace"라는 이름을 가진 여러 그림이 있다. 
구성적으로는 그림이 서로 가까워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작가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View of Naples. Santa Lucia Waterfront, 1829. by Sylvester F. Shchedrin. oil on canvas. 92.5 х 134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6,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실베스터 쉬드린은 캔버스에 산타 루치아(Santa Lucia)의 나폴리 산책로를 묘사했고, 
노래와 시로 찬미를 받았으며, 이곳은 산책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였다. 
쉬드린은 산타 루치아의 산책로에서 몇 년 동안 살았는데
"나폴리 전체에서 최고의 장소"라고 불렀다.

이 작품의 운명은 러시아의 역사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이 작품은 1829년 실베스터 쉬드린이 그리기 시작했다. 
불행히도 그림은 위대한 작가 막심 고리키 (Maxim Gorky 1868~1936)가 

나중에 살았던 소렌토에서 39세의 작가 실베스터 쉬드린의 

죽음으로 인해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었다.
쉬드린이 죽은 후 이 그림은 그의 상속인에게 기증되었다.

1917년 10월 혁명 이전에 이 그림은 개인 컬렉션에 있었다.
1918년에 수용되어 슈발로프 궁전 박물관에 전시되고 1928년까지 남아 있었다.
1928년부터 1940년까지 이 그림은 러시아 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었다.
1940년에 그림 "나폴리의 전망"은 여행 전시회의 일환으로 크리미아의 
알루프카 궁전 박물관에 임시 보관 및 전시를 위해 러시아 박물관에서 이전되었다.

파시스트 군대가 크림 반도를 점령하는 동안 다른 전시품과 함께 이 그림은 
박물관의 전시관에서 사라졌고 시청자에게 영원히 잃어버린 것으로 간주되었다.
1957년 감사 기간 동안 러시아 문화부는 쉬드린의 이 그림을 
러시아 국립 박물관의 재고 목록에서 제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다. 
1978년에 이 그림은 얄타에서 발견되었지만 심하게 훼손된 상태에 있었다.
동시에 이 작품은 러시아 제국 마지막 황제의 크림 거주지인 리바디아 요양소로 옮겨졌다. 
1980년에 그림 "나폴리의 전망"은 마침내 키예프에 있는 우크라이나 문화부의 
국가 연구 워크숍으로 이전되었다. 
그곳에서 수많은 시련을 겪은 후 철저하게 복원되고 보존되었다.

 

[영상] Shchedin. Hall 16 in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TAppearance of Christ to the People, 1857. by Alexander A. Ivanov. oil on canvas.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알렉산더 안드레예비치 이바노프 (Alexander Andreyevich Ivanov 1806~1858)의 작품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모본과 습작들.


알렉산더 이바노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미술 아카데미 교수였던 

아버지 안드레이 이바노프(Andrey Ivanov)에게 어릴 때부터 그림을 배웠다.
그는 1830년 이탈리아에 유학한 뒤 생애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면서
종교화 특히 성서를 주제로 하여 예수의 인간성을 표현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데카브리스트 반란이 있은 후 알렉산더 이바노프는 사회의 모순에 
더욱 회의를 느꼈고, 제정 하의 권력자들과 타협하려 하지 않으려 했기에 
그가 평생에 가진 삶의 무게는 힘겹기만 하였다.

그의 그림 중 20년에 걸쳐 완성한 작품이 바로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림의 주제는 성경 요한복음 1장을 나타내고 있다. 
이바노프가 이탈리아에서 20년 동안(1837~1857) 정성을 들여 그린 작품이다. 

그 당시 이바노프에게는 고민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인류가 고뇌와 부정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인가? 
예수의 모습과 허망함과 슬픔 또 종교적 감정이 이바노프를 강하게 흔들었다. 
그리하여 '구원'이라는 모든 사람들의 꿈을 큰 그림으로 나타내고자 그는 작업을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일생의 대표작이 된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러시아에서 19세기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로 한 그림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이 
알렉산드르 이바노프의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작품은 러시아 회화사에서 수도 없이 거론되는 최고의 갈작 가운데 하나일 뿐 아니라, 
19세기 러시아 회화 특유의 '인자로서의 예수상'의 선구적인 모범이 되는 작품이다. 
이 대작 앞에 서면 누구든 예수와 역사의 현장에서 만나는 듯한 생생한 경험을 하게 된다.

1858년 이바노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얻지 못했다. 
6주 후 결국 52세의 나이로 이바노프는 죽음을 맞이했다. 
당시 장례식에 많은 예술인과 문화인이 참석했는데, 
그 중 이동파 화가 크람스코이도 있었다고 한다. 

 

The Appearance of Christ to the People, 1836~1855. by Alexander A. Ivanov. oil on canvas. 
172 x 247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바노프의 대작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모스크바에서 일반 경매로 붙여진다. 
그 당시 트레티야코프는 러시아 미술의 훌륭한 작품을 모아서 미술관을 설립하려는 꿈이 있었다. 
그리하여 트레티야코프가 이바노프의 대작을 구입한다.

이 작품의 원본은 540 x 750 cm나 되는 방대한 크기의 대작으로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Tretyakov Gallery)에 전시되어 있다. 
예수님을 가리키며 성령으로 세례해 주실 분임을 알리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 
가난한 이들과 녹색 얼굴의 노예는 반색하며 돌아보고 있고 
오른쪽의 흰 터번을 두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탐탁하지 않은 표정으로 수군거리고 있다. 
사람들에게 다가오고 계시는 예수님을 감싼 주위의 공기는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작품은 수많은 습작을 남기며 20년 만에 완성된 그림이다​.
화가는 화면에 배치된 인물 하나하나에 

저마다의 역할을 부여하기 위해 수많은 에튀드(습작)들을 거쳤다. 
습작의 수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다. 
심지어 전시실에 비치된 한 장짜리 해설문만 해도 

영어판에는 800개, 노어판에는 300개로 나와 있다. 

또 배경 표현을 위해 이탈리아의 풍경을 꼼꼼히 관찰하고 묘사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때까지 러시아 미술사에서 시간과 에너지 투자 면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운 엄청난 역작이요 대작인 것이다.
이 모든 결과물 가운데 일부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과 

러시아 미술관에 나뉘어 전시되고 있다.


이들 그림에서 우리는 햇빛과 미묘한 대기의 흐름 등, 

아직 프랑스 인상파가 대두되기 전인데도 
야외 공간에 대한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관찰과 표현을 볼 수 있다. 
이바노프가 감각적으로도 시대를 앞서가는 화가였음을 알 수 있다.​

 

Figure of Christ (Generated), 1833-1857. by Alexander A. Ivanov. oil on canvas. 62 x 44.7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알렉산더 이바노프가 "메시아의 모습"을 그린 스케치는 특별한 예술적 세계이다. 
수백 개의 스케치는 각각 독립적이고 내부적으로 완벽하며 완전한 작업이다. 
때로는 큰 그림과는 독립적으로 플롯되지만 이데올로기 및 미학적 접촉을 반드시 유지한다. 

 

Kopf eines Sklaven in zwei Varianten, 1837-1857. by Alexander A. Ivanov. oil on canvas. 62 x 44.7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눈물이 그렁그렁한 노예의 에튀드. 
그리스도의 출현을 가장 크게 기뻐하는 사람들은 화면의 중앙 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벗은 몸으로 등을 보이고 있는 몸짱 사나이의 왼팔에 

얼굴이 반쯤 가려 있는 노인이 그 중 하나이다. 

쇠약한 몸을 아들에게 의지해 요르단 강가에 나왔던 노인은 기력을 놓고 있다가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소식에 황급히 일어서려 한다.
가장 큰 기쁨은 그 앞에 쭈그리고 앉은 노예의 푸른 얼굴에서 찾을 수 있다. 
짐승처럼 목덜미가 줄에 묶여 있는 그는 아마도 주인님의 옷을 챙기려던 참인가 보다.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말에 손을 멈추고 돌아보는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다. 
세상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목줄 밖에 없을 노예가 구세주의 출현에 감격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바노프는 잃을 것이라고는 역시 쇠사슬밖에 없는 

조국 러시아의 민중들을 노예의 모습에 투영한 것이 아닐까. 
미술사가 A. I. 조토프에 의하면, 러시아 회화에서 학대받는 이의 모습을
이처럼 감동적이고 박진감 있게 묘사한 것은 이 그림이 처음이다.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우측 벌거숭이 사내의 에튀드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일어서려는 노인의 에튀드

가끔은 이처럼 고대 로마의 조각상을 인물의 원형으로 삼고 있다. 
조각상의 모습은 완성작에서 노인보다도 아래쪽 노예의 얼굴과 더 닮은 것 같다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초점은 아무래도 

그리스도보다 그를 영접하는 인간 군상들에게 있다. 

이바노프는 “나는 이 그림에서 타락한 지배자들이 민중을 억압하는 모습,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로마에 아부하는 천박한 유대 왕들의 행태, 
그리고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슬픔을 그려보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화가는 화면에 배치된 인물 하나하나에 

저마다의 역할을 부여하기 위해 수많은 에튀드(습작)들을 거쳤다. 

 

Head of John the Baptist, 세례 요한 습작. 1840s.

 

Naked Boy, Study. Late 1840s or 1850s. by Alexander A. Ivanov. oil on canvas. 47.7 x 64.2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풍경을 배경으로 한 나체 소년들의 스케치 시리즈는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그림을 위한 준비 연습 그림이다.  
전경과 뚜렷하게 분리된 배경의 무한한 공간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자연인 "역사적 시간"의 구체화이다. 
미술 평론가 알렌노프 M. M. Allenov의 발언에 따르면, 어린이만이 자연과 비슷하며 
구조를 파괴하지 않고 알렉산더 이바노프의 풍경에 들어갈 수 있다. 

 

A tree in the shade above the water, At the earliest 1846. by Alexander A. Ivanov. oil on canvas. 
45 x 58.2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 작품 "물 위 그늘에 있는 나무"의 배경은 카스텔 간돌포(Castel Gandolfo) 근처로 
로마에서 30km 떨어진 알바노 호수 위의 알바니아 언덕에 위치해 있다. 
면적이 6km²이고 깊이가 170m 인 이 호수는 한때 멸종된 화산 분화구에서 형성되었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Christ’s Appearance to Mary Magdalene after the Resurrection, 1835. 

by Alexander A. Ivanov. oil on canvas. 242 x 321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부활 후 막달아 마리아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이 작품은 이바노프가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제작하기 전에 그린 것으로,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미술을 열심히 연구하던 시절, 
르네상스 미술에 대한 화가의 짙은 애정이 잘 나타난 그림이다. 
이 작품의 예수는 비애미를 지닌 인간이라기보다 

로맨틱한 감상을 느끼게 하는 인간에 더 가깝다.

막달라 마리아 주제는 중세 때부터 애호되었지만, 
서양 미술사에서 집중 조명된 시기는 종교개혁이 일어날 무렵이다.  
프로테스탄트의 영항으로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전통 전반이 크게 위협 받자 
고해성사를 비롯한 전통을 지키기 위해 고해자의 전형으로 
막달라 마리아를 형상화한 그림이 많이 제작된 것이다.

이때 마리아 이미지는 머리를 길게 풀어헤치고 깊은 수심에 잠긴 모습이 대부분이다. 
풀어헤친 머리에서 보듯 이바노프의 막달라 마리아도 

그런 가톨릭 전통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좀더 깔끔하고 산뜻한 용모 때문에 세속적인 미인의 인상을 더 짙게 던진다. 
그 옆의 예수 그리스도도 군더더기 없는 '몸짱'에 상당히 수려한 인상이다.

얼핏 보면 이런 세속적인 아름다움이 두 사람을 마치 한 쌍의 연인처럼 느끼게 한다. 
한 사람은 사랑을 고백하고 다른 한 사람은 짐짓 이를 뿌리치는 듯한. 
주제로 보자면 이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예수가 그녀를 진정시키려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예수는 마리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를 붙들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주제가 지닌 이와 같은 성스러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이바노프의 그림은 
보면 볼수록 감상적인 낭만주의의 향기를 발산한다.

어두운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연극의 클라이맥스 같은 장면, 

선남선녀의 지극히 감상적인 몸짓...
마리아의 풀어헤친 머리는 전통적인 참회와 자기부정의 표시라기 보다는, 
다른 이들 앞에서는 머리를 단정히 가다듬고 있어도 남편 앞에서는 
머리를 풀어헤치는 여염집 여인의 사적인 친밀감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미묘한 뉘앙스가 이 그림을 향한 시선의 집중도를 높이고 

주제를 살뜰한 감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막달라 마리아의 해후 뿐 아니라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의 해후에 대한 연상을 불러온다. 
사실 그리스도가 신랑이요 교회가 신부라는 성경의 비유도 

이런 종류의 낭만주의적 감상에 적잖이 기대고 있다.

춘향에게 이몽룡이 그런 것처럼, 구세주는 단순히 불의를 벌하는 
어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스런 내 낭군이기도 한 것이다. 
이바노프의 붓질은 그 인간적인 기대를 그리스도와 막달라 마리아의 
인상적인 이미지 안에 섬세하게 녹여 놓았다.

종교적인 주제가 지닌 신성함과 세속적인 이미지가 주는 

감상주의 미학이 아름답게 결합된 작품이라고나 할까. 
왠지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리라"고 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언급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Bellerophon goes on a campaign against the Chimera, 1829. 

by Alexander A. Ivanov. oil on canvas. 130,5 x 113 cm .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벨레로폰(Bellerophon)은 그리스 신화의 영웅으로 카드모스(Κάδμος))와 
페르세우스(Perseus)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헤라클레스(Hercules) 이전의 
가장 위대한 영웅이며 괴물의 처단자이다. 
그의 공로는 키마이라(Chimaera)를 죽인 것이며, 그것은 호메로스(Homer)에 따르면 
사자의 머리, 양의 몸 그리고 뱀의 꼬리를 지녔고 화염을 뿜어 내었다.

벨레로폰은 고린토스의 왕 글라우스코스(Glaucus)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실제 그의 아버지는 포세이돈이었다.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머리를 베었을 때 흘러내린 핏속에서 태어난 날개달린 말 

페가수스는 지상과 공중을 뛰어다니며 인간의 접근을 허용치 않았다.

페가수스를 타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던 벨레로폰은 예언자인 
폴리이도스의 조언으로 마침내 페가수스를 탈 수 있게 된다. 
포세이돈의 아들인 벨레로폰이 포세이돈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메두사의 몸속에서 태어난 페가수스를 타게된 것이다. 

벨레로폰은 죄를 짓고 코린토스에서 쫓겨나 아르고슬로 피신을 가게 되는데, 
그곳의 왕비가 벨레로폰을 유혹했다. 
그러나 그가 이를 거절하자 왕비는 왕인 프로이토스에게 
벨레로폰이 자신을 유혹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프로이토스는 손님을 직접 죽이고 싶지 않아서 벨레로폰에게 
봉한 편지 한통을 주어 리키아에 있는 장인 이오바테스 한테로 보냈다. 
벨레로폰은 리키아에 도착하여 왕비의 아버지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그는 관습에 따라 9일 동안 벨레로폰을 잘 대접한 뒤 
10일째 되는 날 사위가 보낸 편지를 뜯어보았다. 
거기에는 이 편지를 가져가는 자를 죽이라는 내용이 씌어 있었다.

이에 이오바테스는 벨레로폰에게 리키아를 어지럽히고 있는 
키마이라라는 괴물을 퇴치해달라고 부탁했다. 
키마이라는 불을 뿜은 무서운 괴물로 신체의 전면은 
사자와 염소의 모습을 하고 있고 뒤쪽은 용이었다. 
왕은 키마이라에게 벨레로폰이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벨레로폰은 페가수스의 도움을 받아 괴물을 활로 쏘아 죽였다.

벨레로폰은 키마이라를 퇴치한 후 계속되는 이오바테스의 명령으로 
어려운 임무를 맡게 되는데, 모두 페가수스의 덕분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이오바테스 왕은 벨레로폰이 신들의 특별한 총애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여 그의 딸과 결혼시켰다.

그러나 후에 벨레로폰은 자만이 넘치고 오만하게 되어 신들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벨레로폰은 신들과 경쟁하기 위해 페가수스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려 했지만, 
제우스는 한 마리의 등에를 보내 페가수스를 찌르게 하고 
페가수스로 하여금 벨레로폰을 떨어뜨리게 하였다. 
그는 절름발이가 되고 눈이 멀었다. 
그 후 벨레로폰은 알레이안의 들을 사람들의 눈을 피하면서 

외로이 방황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 작품은 이오바테스 왕과 함께 위업을 위해 출발하는 

벨레로폰의 이별의 순간을 묘사한다. 
학문적 전통에 따르면 영웅은 알몸으로 제시된다. 
근처에는 날아갈 준비가 된 멋진 말이 있다. 
그 뒤에는 비행 여신 아테나(Athena)가 보인다. 
왼쪽에는 앉은 왕 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외면하는 공주 딜로노야(Dilonoya)가 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몹시 걱정하고 있다. 
그림의 엄숙한 분위기에서 주요 주제는 이상적인 전사 영웅의 위업에 대한 영광이다.

 

The Flagellation of Christ, 1814. by Alexei Y. Yegorov. oil on canvas. 260 x 207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알렉세이 예고로비치 예고로프 (Alexei Yegorovich Yegorov 1776~1851)는 
러시아 화가이자 조각가이자 역사 회화 교수였다.
그는 어린 시절 칼미크(Kalmyk) 대초원에서 코사크(Cossacks)에 의해 포로로 잡혀 
나중에 모스크바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그의 초기 기억 중 일부를 기반으로 할 때 칼미크(Kalmyk) 혈통으로 여겨졌지만 
그의 기원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했다. 

알렉세이 예고로프는 1782년에는 제국 예술아카데미(Imperial Academy of Arts)에 

입학하여 이반 아키모브 (Ivan Akimovich Akimov 1755~1814)와 

그리고리 우그류모프(Grigory Ivanovich Ugryumov 1764~1823)와 함께 공부했다. 
그는 1797년에 졸업하여 1803년에 학자가 되었고, 

그 후 로마에서 현장 작업을 하도록 파견되었다.
그는 그의 디자인과 채색의 단순함을 칭찬한 빈센조 카무치니 
(Vincenzo Camuccini 1771~1844)의 영향을 받았다. 
평균적인 이탈리아 사람보다 키가 훨씬 더 컸던 그는 "러시아 곰"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사람들이 주요 인물에 놓일 수 있는 금화의 수만큼 그의 그림을 살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교황 비오 7세가 그에게 궁정 화가로 남아 있으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정중하게 그 제안을 거절했다. 

1807년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아카데미의 조교수가 되었다. 
그는 또한 엘리자베스 알렉세예프나와 알렉산더 1세에게 개인 드로잉 레슨을 했다. 
신앙이 깊은 사람으로서, 그는 많은 귀족들의 초상화를 마지못해 제작했지만 
항상 자신의 종교 그림을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생각했다. 

 

1840년, 그는 캐서린 대성당을 위해 그린 성삼위일체의 이미지에 

불만을 품은 차르 니콜라스 1세에 의해 즉각 해고되었다. 
그러나 그는 연금으로 연간 1,000 루블을 받았다. 
아카데미와 단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 학생들은 여전히 ​​그의 새로운 작품에 대한 
그의 의견을 이끌어 내고 학생들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 그를 찾아왔다. 
그 결과 그는 남은 생애 동안 바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스몰렌스크 묘지에 묻혔다.

이 작품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의 마지막 날, 
십자가에서의 희생적 죽음과 고통 (열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복음의 마지막 부분을 기반으로 하는 수난주기의 일부이다. 
"매장"과 "부활"에 제자들, "구세주의 고문"이라는 구도는 매우 간결하다. 
작가는 그리스도와 사형 집행자들의 그룹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러한 구조와 색조 솔루션은 그림이 고전주의 회화의 전형적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Dmitry of the Don in the Kulikovo Battlefield, 1824. by Vasily K. Sazonov. canvas, oil. 131,5 х 194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프린스 디미트리 이바노비치(Prince Dimitri Ivanovich 1350-1389)는 1359 년 이후 모스크바를 통치했다. 
그는 칸 마마이(Khan Mamai)의 타타르(Tatar) 무리와 싸우기 위해 러시아 병사들을 연합했다. 
1380년 9월 8일, 타타르 족은 쿨리코보(Kulikovo) 필드 전투에서 압도적인 패배를 겪었으며 
드미트리 이바노비치는 '돈스코이(Donskoy)'라는 명예 별명을 받았다. 


디미트리 왕자가 이끄는 10만 명의 병사들이 적을 만나기 위해 크렘린 성문을 떠났다. 
그들은 쿨리코보(Kulikovo) 필드에서 영웅적으로 싸웠다. 
왕자는 단순한 전사처럼 전투에 뛰어 들어 군대의 사기를 올렸다. 
손실은 엄청났지만 전투에서 승리했다. 
드미트리 돈스코이(Dmitry Donskoy)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바실리 사조노프 (Vasily Kondratievich Sazonov 1789~1870)는 러시아의 역사화가이자
제국 예술아카데미(Imperial Academy of Arts) 회원이었다.
그는 니콜라이 루미안체프(Nikolay Rumyantsev) 백작의 농노로 태어났다. 
백작이 고멜 팰리스(Gomel Palace)에서 사냥하는 동안 젊은 사조논프는 스케치를 만들었다. 
미술에 대한 사조노프의 재질을 알아차린 백작은 1804년에 그를 
제국 예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도록 보냈다. 
그는 그곳에서 역사 ​화가인 그리고리 우그류모프(Grigory I Ugryumov 1764~1823)에게 

배웠고 백작이 자유를 주실 정도로 빠른 진전을 보여주었다. 

그는 그리고리 우그류모프의 스타일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역사 화가가 되었다. 
1812년 쿠즈마 미닌 (Kuzma Minin)의 한 장면으로 금메달을 받았고, 
1813년에는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점령에 대한 

저항을 묘사한 장면으로 또 다른 금메달을 받았다. 

그는 1815년 "예술가"라는 칭호로 졸업하고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약간의 봉급을 받았다. 
1817년에 루미안체프 백작은 그에게 해외로 갈 수 있는 충분한 돈을 주었다. 
그는 로마로 가서 견문을 넓히고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서 

두 가지 주요 역사적 작품을 제작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쿨리코보(Kulikovo) 전투에서 드미트리 돈스코이(Dmitry Donskoy)이다. 
나중에 그는 새로 재건된 변형 대성당의 상징을 그렸고 타우리드 궁전을 위한 장식을 만들었다. 
이 프로젝트로 그는 1830년에 Academician이라는 학자 칭호를 얻었다. 

 

Martha the Mayoress (Theodosious Boretsky the Hermit Awarding the Sword of Ratmir to Miroslav, 
Young Chieftain of the Novgorodians and Fiancé of Xenia, Daughter of Mayoress Marfa of Novgorod)
1808. by Dmitry Ivanovich Ivanov. oil on canvas. 161 x 196,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 작품에 등장하는 마르타(Martha) 시장 또는 노브고로드(Novgorod)의 
여왕 (Marfa Posadnitsa)으로도 알려진 마르파 보레츠카야(Marfa Boretskaya)는 
귀족 출신이었고 두 번 결혼했다. 
필립과의 첫 결혼에서 두 아들이 태어났으며 남편이 일찍 사망했다. 
사별한 그녀는 노브고로드(Novgorod) 시장 이삭 보레츠키(Isaac Boretsky)와 재혼했다. 
따라서 그녀는 포샤드니차(posadnitsa 관리의 아내)의 지위를 받았다. 
그녀는 부유한 여성이었고 노브고로드 통치자와 지역 수도원만이 그녀보다 더 부유했다.

횡포하고 야심찬 성격을 가진 마르타는 사람들을 그녀에게 끌어 들이고 
그녀를 자신의 의지에 종속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단호하고 의지가 강한 성격, 독립적인 사고를 가졌다. 
이것은 다른 역사적 조건에서 훌륭한 정치 경력을 쌓을 수 있는 여성이었다.
마르파는 노브고로드 독립 무역기의 마지막 통치자로 남았다.

이 그림은 1808년 3월 14일 연금 수급자와 4세의 
제국 예술아카데미 학생들에게 주어진 프로그램에 따라 그려졌다. 
구성의 중앙에는 노브고로드(Novgorod)와 이반 3세(Ivan III) 사이의 투쟁을 이끈 
장엄한 여성 마르타(Martha)가 그려져 있다. 
마르타의 지시에 따라 그녀의 할아버지인 테오도시우스 보레츠키 (Theodosius Boretsky)는 
노브고로드의 독립을 위해 싸울 검을 마르타의 딸 제니아의 남편으로 뽑힌 미로슬라프에게 준다.

드미트리 이바노프(Dmitry Ivanovich Ivanov)는 어느 나라에서나 
미술에 전념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일반적인 예술가 중 한사람이다. 
드미트리 이바노프는 미술사에 중요한 흔적을 남길만큼 위대하지도 않았다. 
그는 1803년부터 예술 아카데미의 학생이었고 유명한 스승이자 교사인 
그리고리 우그류모프(Grigory I Ugryumov 1764~1823)와 함께 공부했다.

1805년 이바노프는 예술 아카데미 명예회원인 포토츠키(S.O. Pototsky) 백작이 

제안한 프로그램 "인민 반란을 길들인 니콘 총 대주교의 용기있는 업적을 보여주기 위해"를 
완성하여 금메달을 받았다. 
1806년, 이바노프는 인생에서 그린 그림으로 크고 작은 메달을 받았으며 
한 프로그램에서 두 번째 금메달을 받기도 했다. 
그는 1급 자격증과 검을 가지고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이 작품은 1808년 3월 14일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주어진 프로그램에 따라 그려졌다. 
마르타(Martha)는 구도의 중앙에 그려져 있다.
그녀는 이반 3세(Ivan III)에 대한 노브고로드(Novgorod)의 투쟁을 이끈 장엄한 여성이다. 
마르타의 지시에 따라 그녀의 할아버지인 테오도시우스 보레츠키(Theodosius Boretsky)는 
노브고로드의 독립을 위해 싸울 검을 마르타의 딸 

제니아의 남편으로 뽑힌 미로슬라프에게 수여한다. 

테오도시우스 라트미르의 조상은 금색의 검에 

"적은 결코 그것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썼다. 
우리 앞에는 캐릭터의 인물과 캔버스에서 위치의 대각선 배열, 
윤곽선의 선명도 및 선형 리듬화, 색상 반점의 병치, 
빛과 그림자의 대비에 따라 엄격하게 검증된 고전적인 구성이 있다. 
이 작품으로 이바노프는 1808년 예술 아카데미에서 표창을 받았다.

 

The Heroism of a Young Kievian at the siege of Kiev by the Pechenegs in 968, 

About 1810. by Andrey Ivanovich Ivanov. oil on canvas. 204 x 177,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968년 페체네그족이 키예프를 포위하는 동안 젊은 키예프인의 위업. 1810 년
스바이예토슬레브(Svyatoslav) 왕자의 군대가 먼 캠페인을 벌일 때"


그림의 줄거리는 968년 페체네그(Pecheneg) 유목민이 키예프를 

포위하는 동안 알려지지 않은 젊은 키예프 영웅의 이야기로 

러시아 고대 연대기의 영웅적인 에피소드 중 하나다. 

젊은 영웅은 손에 굴레를 들고 적 진영으로 돌진했다. 
적들이 그를 불렀을 때 청년은 도망친 말을 찾고 있다고 대답했다. 
드니프르(Dnieper)를 건너면서 그는 러시아 분대를 발견하고 포위된 도시를 돕기 위해 돌진했다.

회오리 바람처럼 젊은 영웅은 적군 진영을 향해 돌진하고 추격 소리를 듣는 것처럼 
그림의 아래쪽 가장자리에 있는 좁은 물 조각인 드니프르에 도달한다. 
깊은 곳에서는 기병과 성벽의 윤곽을 볼 수 있다. 
작가가 묘사하는 순간은 작품의 아이디어를 구체적이고 간결하게 표현한다. 
애국적인 의무에 자신을 포기하는 사람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안드레이 이바노프 (Andrey Ivanovich Ivanov 1775~1848)는 역사적 장면을 
전문으로 하는 신고전주의 스타일의 러시아 화가였다.
그는 부모에 의해 버려졌고 모스크바 고아원에서 자랐다. 
그는 1782년에 제국 예술아카데미(Imperial Academy of Arts)의 초등학교 과정에 등록한 후 
그리고리 우그류모프(Grigory I Ugryumov 1764~1823)와 함께 1797년 졸업했다. 

안드레이 이바노프는 오래된 이탈리아 마스터와 그림 아이콘을 복사하는 데 종사했다. 
1812년에 그는 교수로 임명되고 1821~1831까지 수석 교수로 재직하다가 
1831년 니콜라스 1세에 의해 강제 은퇴당했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The Brazen Serpent, 1841. by Fyodor A Bruni. oil on canvas. 565 x 852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표도르 안토노비치 브루니(Fyodor Antonovich Bruni 1799~1875)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이탈리아 출신의 아티스트, 학회 회원 및 제국 예술 아카데미 교수였다.
표도르 브루니는 1799년 밀라노에서 저명한 예술가이자 복원가인 
안토니오 브루니(Antonio Baroffi Bruni 1767~1825)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피델리오(Fidelio)이다. 

오스트리아 군대의 최고 장교 지위에 있던 그의 아버지는 

수보로프(A. V Suvorov)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 군대의 스위스 전투에 참여했으며 

1799년 다리에 부상을 입어 군에서사임했다. 
폴 1세(Paul I)의 통치 기간 동안 아버지 안토니오 브루니는 

그림 복원가이자 천장 화가로 미카일로프스키(Mikhailovsky) 궁전을 만들고 

그 후 쿠라킨(Kurakin) 왕자의 명령에 따라 모스크바에서 일했다.

표도르 브루니는 10살에 제국 예술아카데미(Imperial Academy of Arts)에 입학했으며 
알렉세이 예고로프(Alexey Yegorov 1776~1851), 

안드레이 이바노프(Andrey. I. Ivanov 1775~1848) 및 

바실리 셰부에프(Vasily Kozmich Shebuev)의 지도 아래 공부했다.

젊은 브루니는 1818년에 은메달을 수여받고 과정을 졸업하여 예술가의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19세의 피델리오가 미술 교육이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바실리 셰부에프의 조언에 따라 

피델리오를 이탈리아로 보내 그림을 더 향상시키기로 결정했다. 
고대 예술가들의 모범적인 작품에 대한 연구는 마침내 브률로(Bryullo)가 
브률로프(Bryullov)라는 이름으로 명명된 것처럼 러시아에서 

표도르(Fyodor)로 이름이 바뀐 젊은 피델리오(Fidelio)의 방향을 결정했다.

여러 그림을 그린 후 아직 22 세가 되지 않은 표도르 브루니는 
1824년 로마 국회의사당에 그의 작품이 전시되었고 처음으로 대형 그림 
"호레이스의 자매 카밀라의 죽음"이라는 작품의 작업을 시작했다. 
이 작품은 10년 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전시되었고 
브루니는 상당한 명성을 얻었으며 학자 칭호를 받았다.

작품 '구리 뱀(The Brazen Serpent)'은 브루니의 대표작이다.
하늘에서 뱀이 떨어지고 땅에 있는 인간들의 절규가 

그림을 보는 관객에게까지 들리는 듯하다. 
엄청나게 큰 그림이기 때문에 실제로 보면 영화 화면으로 

그때의 상황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이 그림은 성경의 민수기에 나오는 사연을 바탕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 지라.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죄를 범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잼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민수기 6-9절)

역사화가였던 브루니의 명작 'The Brazen Serpent'를 보면서 떠올린다.
어느 시대나 우리가 떠들고 있는 '위험 사회'란 꼭지가 붙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삶의 위험을 견디기 위해, 우상을 만들고 섬겼던 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이제는 자본이란 우상, 신자유주의란 우상을 섬기면서, 
그저 경제합리주의란 미명 아래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간과하고 
그저 고개를 돌려 피함으로, 자신의 양심을 속여야 하는지 말이다.
죄 지은 자의 마음으로 그림 앞에 서니 꼭 뱀에 물려 죽을 것 같은 환영에 빠진다.

작가는 이미지를 개별화하고 이야기를 여러 장면으로 나눴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뱀 동상이 있는 기둥으로 

하나의 일반적인 움직임은 전체 그림을 관통한다.
이 움직임은 거대한 다중 형상 캔버스의 인상의 통합을 허용한다. 

전경의 인물은 브루니가 전체 크기로 그렸다. 
그는 캔버스에서 주인공을 골라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인물의 구성을 제시했다. 
작가는 각각의 이미지를 개별적으로 규정하고 일반 서사에서 고유한 성격과 역사를 부여했다. 
몇몇 캐릭터는 놋뱀과 함께 기둥 쪽으로 달려 갔다. 
두려움에 휩싸인 다른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탈출하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친척들을 애도한다.
그림의 중앙, 배경에서 주인은 서두르고 절박한 군중과는 매우 다른 사람들을 포착했다. 
이것은 예언자 모세이고 그의 조카는 대제사장 엘르아살이고 레위인은 제사장이다. 
그들의 수치는 자신감, 평온함, 강력한 힘을 표현하여 처벌하고 구원을 가져온다.

브루니는 1824년에 첫 번째 스케치를 만들고 1841년에야 이 작품을 완성했다. 
'The Brazen Serpent'는 러시아 역사 회화 장르에서 가장 큰 그림이다. 
이 작품의 크기는 폭 8.5m, 높이 5.6m에 달했다.
면적은 약 48㎡이고 작품의 무게는 거의 70kg이다. 
이 작품은 러시아 박물관 컬렉션에서 가장 큰 그림이다.
이 작품은 브률로프(K. P. Bryullov)의 "폼페이의 최후의 날" 만큼이나 인기가 있었다.

 

Death of Camilla, Sister of Horatius, 1824. by Fyodor A. Bruni. oil on canvas. 350 x 526.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 작품은 23세의 표도르 브루니 (Fyodor Antonovich Bruni 1799~1875)가 
로마와 알바 롱가(Alba Longa) 시의 전설적인 전쟁을 묘사한 그림이다. 
고대 로마 전설에서 로마와 알바 롱가(Alba Longa) 시 사이의 전쟁 중에 
로마 쪽에서 온 호라티이(Horatii)의 세 형제와 알바 롱가 쪽에서 온 

쿠리아티이(Curiatii)의 세 형제로 구성된 두 그룹이 각 진영을 위해 싸워야만 했다. 

호라티이 형제 진영은 쿠리아티이 진영을 물리치고 승리했지만 형제들 중 하나만 살아 남았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승리자 호라티우스(Horatius)가 로마로 돌아오고 
그의 여동생 카밀라(Camilla)를 만난다. 
그러나 호라티우스의 여동생 카밀라가 죽은 쿠리아티이 중 한 명과 
비밀리에 약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호라티우스는 애국심보다 
개인적인 사랑을 더 중요시했다는 데에 화가 나서 여동생 카밀라를 죽였다.

하지만 호라티우스의 영웅적 행동은 주변 사람들의 존경심이 아니라 
여동생 카밀라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 일으켰다. 
호라티우스는 그의 동료와 시민들 사이에 비극적인 오해가 생기고 외로운 처지에 빠진다.
표도르 브루니가 그린 "호라티우스의 승리"라는 이름의 이 작품은 
동시대 사람들이 "호라티우스의 여동생 카밀의 죽음"이라고 다르게 불리게 되었다.

 

Socrates Defending Alcibiades at the Battle ot Potidae, 1828. 

by Pyotr V. Basin. oil on canvas. 286 x 359.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표트르 바실리에비치 바신 (Pyotr Vasilievich Basin 1793~1877)은 

러시아의 종교, 역사 및 초상화 화가였다. 
그는 또한 제국 예술아카데미(Imperial Academy of Arts)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1813년 표트르 바신은 바실리 셰부예프 

(Vasily Kuzmich Shebuyev 1777~1855)의 학생으로 입학했다. 
졸업 후, 표트르 바신은 로마에서 11년 동안 유학을 했는데
그곳에 있는 동안 라파엘의 작품을 복사하고 거의 100점에 달하는 
자신의 그림을 그렸으며, 그 중 상당수는 신화적 주제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또한 시골의 풍경화가 중 한 명인 

실베스터 쉬드린(Sylvester Shchedrin 1791~1830)을 포함하여 초상화를 만들었다.

1830년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후 차르 니콜라스 1세가 프로젝트 작업을 위해 

소환된 그는 이 작품 "포티데아 전투에서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를 구하는 모습
(Socrates Defending Alcibiades at the Battle ot Potidae)"의 작품으로 학자로 선정되었다. 
그림 자체는 로마에서 운반한 배가 파손되어 물에 손상을 입히고 
도착하자마자 복원해야 했기 때문에 약간의 훼손이 불가피했다. 

그 후, 그는 제국 예술아카데미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여 1836년에 교수로 임명되었다. 
표트르 바신은 1869년 명예교수 겸 국무원이 될 때까지 예술아카데미에서 지냈다. 
그는 교수 시절에 수많은 초상화와 겨울 궁전 복원을 위한 우화적 장면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성 이삭 대성당의 40개의 그림과 아이콘이 포함되어 있다. 
표트르 바신은 진행성 안구 질환으로 인해 은퇴해야 했고 

1870년 말까지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포티데아(Potidae) 전투는 BC 432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직전 전투에 관한 것으로 기원전 430년에 아테네와 코린토스와 포티데아의 연합군과 
그들의 다양한 동맹군 사이에서 포티데아 근처에서 싸웠다.
이 전투에서 알키비아데스(Alcibiades)는 부상을 당했고, 소크라테스(Socrates)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알키비아데스의 생명과 무기를 보호하고 구했다. 
이 작품으로 표트르 바신은 1831년에 학자의 칭호를 받았다.

 

Faun Marsyas Teaches Olympus to Play the Flute, 1821. 

by Pyotr V. Basin. oil on canvas. 185 x 139,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표트르 바신 (Pyotr Vasilievich Basin 1793~1877)은 

19세기 전반의 학문적 그림을 대표하는 저명한 화가이다.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업적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성 이삭 대성당의 그림이었다. 
이 그림의 주제는 당시 러시아에서 유행했던 고대 그리스 신화의 장면이었다. 

한때 프리기아(Phrygia)의 들판을 헤매던 파운 마르시아스(Faun Marsyas)는 

리드 플루트(reed flute)를 발견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플루트를 연주하는 것이 그의 신성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손상시킨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아테나(Athena) 신에게 버림을 받았다. 
아테나는 자신의 발명품을 저주하며 이 플루트를 들고 연주하는 사람은 
누구나 엄한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테나의 뜻을 알지 못했던 마르시아스(Marsyas)는 플루트를 들고 

연주하는 법을 배워 모두가 이 음악을 듣게 되었다. 
마르시아스는 그의 재능의 힘을 믿었기 때문에 

음악의 수호성인 아폴로(Apollo)와의 경쟁에 도전했다. 
대담한 도전에 분노한 아테나는 마르시아스를 나무에 매달고 가죽을 벗기라고 명령했다. 
마르시아스의 피부는 프리기아(Phrygia)의 동굴에 매달려 있었고 

나중에 리드 플루트의 소리가 그 자그마한 동굴에 도달했을 때 

춤을 추는 것처럼 항상 움직이기 시작했고, 
시타라(cithara)의 장엄한 소리가 들렸을 때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Susanna Caught by the Elders in her Bath, 1831. 

by Grigory I. Lapchenko. oil on canvas. 202 х 150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두 명의 장로들이 수산나(Susanna)라는 젊은 기혼 여성의 목욕하는 모습을 염탐하고 있다. 
장로들은 수산나를 염탐하고 그녀에게 성적인 호의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남자들은 그녀의 명성을 망치겠다고 위협했지만 수산나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두 노인은 수잔나를 간음죄로 거짓 고발했다. 이는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이다. 
그러나 다니엘이라는 젊은 히브리 선지자 덕분에 그녀는 결백을 입증하게 되었고
거짓 증언을 한 장로들이 처형되었다. 

이 주제는 수산나의 겸손과 충실함의 미덕을 예시하면서 
16세기 유럽 미술에서 비교적 종종 인용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예술가들이 종종 남성 후원자의 즐거움을 위해 
여성 누드 묘사에 자신의 기술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수산나의 모델은 이탈리아의 미녀였고 가난한 와인 메이커인 
알바노-비토리아 칼도니(Albano-Vittoria Caldoni)의 딸로 나중에 작가 
그리고리 랩첸코의 아내가 된 칼도그노 비토리아(Caldogno Vittoria)였다. 
그녀의 부모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딸이 화가에게 포즈를 취하도록 허용했다. 

칼도그노 비토리아는 알렉산더 이바노프(Alexander Ivanov)를 비롯하여
세계 최고의 예술가들의 모델이 되어 유명해졌다.
그녀의 초상화는 노인이 된 괴테에게 보내지기도 했다.

그리고리 이그나티예비치 랩첸코 (Grigory Ignatyevich Lapchenko 1801~1876)는 
러시아의 예술가, 역사적 회화, 초상화 작가였다.
그는 우크라이나 코사크 이그나티 바실리예비치 라파(Ignaty Vasilyevich Lapa)의 아들이다. 
그림에 대한 그리고리 랩첸코의 조숙한 재능을 알아 본 보론초프(N. S. Vorontsov) 백작은 
그가 공식적인 예술 교육을 받도록 도움을 주었다. 

1822년 제국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이바노바(AI Ivanova)의 
지도 아래 역사 회화 수업을 받고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이탈리아로 유학을 갔다.
그는 러시아 및 이탈리아 예술가들과 의사 소통을하며 이바노프(A. A. Ivanov)와도 매우 친해졌다.

1834년에 그리고리 랩첸코는 거의 시력을 잃었다. 
1839년 그는 왕세자 알렉산더 니콜라에비치가 획득한 그림 
"미완성 왼팔로 머리에 바구니를 들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로마에서 전시했다. 
같은 해에 모델 칼도그노 비토리아(Caldogno Vittoria)와 결혼하였고
1840년대 중반부터 키예프 지방의 모쉬니(Moshny) 마을에서 살았다. 
1842년 바로 이 작품 "Susanna Caught by the Elders in her Bath"으로 학자의 칭호를 받았다. 

 

Portrait of the Writer and Musician Princess Zinaida Alexandrovna Volkonskaya, 
née Princess Beloselskaya-Belozerskaya (1879–1862), 

Dressed as Tancred (from the Opera by G. Rossini), 1820. 
by Fyodor Antonovich Bruni. oil on canvas. 188 x 130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지나이다 볼콘스카야 (Zinaida Aleksandrovna Volkonskaya 1792~1862)는 

러시아의 작가, 시인, 가수, 작곡가, 미용사 및 공주였다. 
그녀는 19세기 러시아 문화 생활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아마추어 오페라 가수로 파리와 런던에서 공연했다.

지나이다 볼콘스카야는 토리노에서 러시아 대사인 
알렉산더 벨로저스키(Alexander Beloselsky-Belozersky) 왕자의 가족으로 태어났다.
지나이다는 러시아의 알렉산더 1세 황제와 가까웠는데, 

아마도 연인일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이런 소문을 막기 위해 지나이다는 1810년 알렉산더 황제의 보좌관인 
니키타 볼콘스키 (Nikita Grigorievich Volkonsky 1781~1844)왕자와 결혼했다. 

지나이다는 1817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1822년에 모스크바로 이사했다. 
1820년대에 지나이다는 모스크바의 트베르스카야 거리에 문학 및 음악 살롱을 개관했다.
폴란드의 시인, 극작가, 수필가였던 아담 미키에 비츠 (Adam Bernard Mickiewicz 1798~1855), 
러시아 최고의 사상 시인 예브게니 바라틴스키 (Yevgeny Baratynsky 1800~1844), 
러시아의 낭만주의 시인 드미트리 베네비티노프 (Dmitry Venevitinov 1805~1827), 
러시아 근대문학의 창시자 알렉산더 푸쉬킨 (Alexander Pushkin 1799~18387) 등은 
그녀의 집을 자주 방문했다. 
푸쉬킨이 그녀에게 보낸 "음악과 아름다움의 여왕"이라는 구절 서신은 잘 알려져 있다.

알렉산더 1세가 죽은 후 지나이다의 시동생 세르게이 볼콘스키 
(Sergei Grigorievich Volkonsky 1788~1865) 왕자는 후계자 니콜라스에 대한 
데카브리스트 혁명(Decembrist Revolt)을 이끌었다. 
데카브리스츠(Decembrists)들은 시베리아로 추방되었고 

그들의 아내는 그들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지나이다는 이 여성들을 위한 작별 파티를 열었고 

이 일로 인해 니콜라스 1세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또한 러시아 정교회에서 가톨릭교로의 비밀 개종자이자 
예수회 요원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심을 받았다.

이러한 압력으로 인해 1829년 지나이다는 로마로 이주했다. 
그녀는 아들과 아들의 교사인 스테판 셰비료프(Stepan Shevyrev 1806~1864)를 동반했다. 
로마에 있는 그녀의 숙소 중에는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트레비 분수의 배경 건물인 
팔라조 폴리(Palazzo Poli), 빌라 볼콘스키(Villa Wolkonsky) 등이 있다. 
지나이다 공주는 1830년대에 팔라조 폴리(Palazzo Poli)에서 

호화로운 파티를 연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녀의 살롱은 러시아 화가 칼 브룰로프(Karl Brullov)와 알렉산더 이바노프(Alexander Ivanov), 
덴마크의 유명한 조각가 베르텔 토르발드센(Bertel Thorvaldsen 1770~1844), 
이탈리아 화가 빈센조 카무치니 (Vincenzo Camuccini 1771~1844), 
프랑스 작가 스탕달 (Stendhal 1783~1842), 스코틀랜드의 시인, 극작가, 역사 소설가 
월터 스콧 (Sir Walter Scott 1771~1832)이 자주 방문했다. 
러시아의 대문호 니콜라이 고골 (Nikolai Gogol 1809~1852)은 지나이다의 빌라에서 
"죽은 영혼(Dead Souls)"의 많은 부분을 집필했다.

지나이다 볼콘스카야 공주는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트레비의 성도 빈센조와 아나스타시오(Santi Vincenzo e Anastasio a Trevi) 성당에 묻혔다. 
지나이다는 죽음 이후에 시성(beata) 되었다. 
그녀의 영문 전기 "지나이다 볼콘스키 공주의 생애 (A life of Princess Zinaida Volkonsky"는 
1998년에 등장했다.

 

[영상] Alexander Ivanov, Fyodor Bruni. Hall 15 in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4 (Academic Hall). Brullov, Aivazovsky.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Venus, 1852. by Vitali I. P. Marble. 168 x 59 x 64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반 비탈리 (Ivan Petrovich Vitali 1794~1885)는 이탈리아 출신의 러시아 조각가였다 .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피에트로 비탈리의 견습생이었다. 
제국 예술 아카데미에 참석한 후 1818년 모스크바로 이사했다. 
그의 작품은 따뜻함과 성실함으로 가득차 있다. 
비너스 조각상의 절묘한 리듬에서 살아 있는 자연과 고대 예술의 
낭만적이고 신선한 조합이 주목을 받았다. 

 

Portrait of the Most Serene Princess Elizaveta Saltykova, 1841. 

by Karl P. Brullov. oil on canvas. 200 х 142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칼 브룰로프 (Karl Pavlovich Brullov 1799~1852)는 러시아 화가로 
신고전주의에서 러시아 낭만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에 핵심 인물로 여겨진다.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위그노 혈통 출신의 학자이자 목각가, 조각가인 
파벨 이바노비치 브리울로 (Pavel Ivanovich Briullo 1760~1833)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칼 브룰로프는 제국 예술아카데미(Imperial Academy of Arts)에서 훈련을 받았다. 
유망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학생으로 그는 학업을 마친 후 러시아를 떠나 로마로 가서 
1835년까지 초상화와 장르 화가로 일했다.
하지만 예술가로서 그의 명성은 그가 역사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나타났다.

브룰로프는 특히 역사, 초상화 및 풍경화에서 뛰어난 화가이다.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러시아 최초의 화가로, 러시아의 신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에 걸친 과도기의 주요 인물로 되어 있다.

'엘리자베타 살티코바 공주의 초상화'에서
살티코바 공주는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공작 깃털 팬을 들고 의자에 앉아 있다. 
그녀의 옆에는 열대 식물을 몇 가지 배치하고 바닥에 

표범 가죽을 깔아 이 그림에서 이국적인 세계를 표현했다. 
또한 살티코바 공주의 고귀함과 번영을 보여준다.
살티코바의 드레스는 실제로 사실에 가깝다. 
직물의 주름과 실크의 반짝이는 색상 (차분한 파란색, 빨간색, 짙은 녹색)이 빛을 비추는 것은 놀랍다.

엘리자베타 파블로브나 살티코바(Elizaveta Pavlovna Saltykova 1802~1863) 공주는
스트로가노프(P. A. Stroganov 1774~1817)와 소피아(Sofia Vladimirovna 1775~1845)의 딸이다. 
살티코바는 살티코프(I. D. Saltykov 1797~1832) 왕자와 결혼했다.

이 작품은 19세기 러시아 미술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러시아의 낭만주의 정신은 서양의 낭만주의와 다르다. 
서양에서 낭만주의는 조화, 균형 및 비율로 잘 알려진 고전 예술 전통의 지배에 대한 반응이었다. 
반면에 러시아에서는 낭만주의가 그 특징인 고귀하고 
환상적인 요소를 지닌 작품을 표시한 17세기의 감각인 원작에서 해석되었다. 

러시아의 낭만주의는 바이론(Byron), 푸쉬킨(Pushkin) 및 레몬토브(Lermontov)의 영향을 받았다. 
예의와 환상의 혼합된 성격은 일반적으로 왕실 구성원의 성격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브룰로프의 그림은 특히 낭만적인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흥미롭다. 
그의 뛰어난 그림 기술은 관객을 19세기 러시아 세계로 이끌 수 있다.

 

The Last Day of Pompeii, 1830. by Karl P. Brullov. oil on canvas. 651 x 466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칼 브룰로프 (Karl Pavlovich Brullov)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인 
폼페이 최후의 날 (The Last Day of Pompeii, 1830-1833)은 푸쉬킨과 고골이 
루벤스와 반 다이크의 최고의 작품과 비교한 것으로 그 구성이 방대하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브룰로프는 

당대 최고의 유럽 화가 중 한 명으로 자리 매김했다. 
이 작업을 마친 후 그는 러시아 수도로 성공적으로 돌아와 귀족과 지적 엘리트들 사이에서 
많은 친구를 사귀고 제국 예술 아카데미에서 높은 지위를 얻었다.

하늘에서 검은 비가 마구 쏟아지고, 하늘이 요동치면서 건물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시뻘건 불꽃과 용암이 도시를 휘감으며 집어삼킬 기세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질려 필사적으로 몸을 피하려 하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는 그림, 그 속엔 어떤 역사적 순간이 담겨 있는 걸까?

인간은 오랜 세월 발전을 거듭하며 힘을 쌓아 왔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막을 수 없는 게 있는데 그건 바로 자연재해다. 
지진 · 홍수 · 화산 폭발 등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카를 브룰로프가 그린 '폼페이 최후의 날'은 자연재해의 끔찍한 순간을 담고 있다.

폼페이는 고대 로마의 번성했던 도시였다. 
인구도 많고 사람들이 휴양지로 자주 찾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러나 폼페이는 서기 79년 8월 24일 이후 화산 폭발로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폼페이 인근에 있는 베수비오 화산이 갑자기 폭발하면서 도시를 순식간에 삼켜 버린 거다. 
뜨거운 용암과 화산재 · 화산암이 도시를 덮어 버렸고, 
사람들은 뜨거운 열기와 고온 가스에 질식되어 죽고 말았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 때 죽은 사람의 수가 무려 2,000여 명에 이르른다.

'폼페이 최후의 날'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화산 폭발로 폼페이가 사라지던 비극적인 순간을 담았다.
하늘을 뒤덮은 검은 비는 화산에서 날아온 화산재와 화산암이고, 
저 멀리 붉은 불꽃은 화산에서 흘러내리는 용암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들의 표정엔 극심한 두려움과 공포가 깃들어 있다. 
도망치려고 해도 도망칠 수 없는 절박하고 괴로운 모습들이 생생하게 잘 표현어 있다.

화산 폭발로 사라졌던 폼페이는 1,700여 년이 흐르고 나서야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냈다. 
폼페이의 잔해가 우연히 발견되며 18세기 중반부터 도시를 발굴하기 시작하면서다. 
엄청나게 두꺼운 화산재를 걷어내니, 당시의 건물 · 도로 · 상점 등이 그대로 드러났다. 
순식간에 덮친 화산재와 용암을 피하지 못해 죽어 간 사람들은 화석이 되어 남아 있었다.

카를 브룰로프는 폼페이 발굴 현장을 직접 보고 나서 그림을 그렸다.
그런만큼 생생하고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에 영감을 받은 에드워드 리턴이라는 작가는 
<폼페이 최후의 날>이라는 같은 제목의 소설을 쓰기도 했다.

한편 폼페이는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당시의 참상과 고대 로마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 주고 있다.

 

View of the Town of Bakhchisarai, Between 1798 and 1800. by Fyodor Y. Alexeyev. oil on canvas. 
197 х 178,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 그림은 1787년 러시아 남부를 여행하는 동안 황후 캐서린 2 세가 방문한 지역을 묘사한다. 
이 작품은 1795~1797년 러시아 남부를 여행하던 중 황후가 방문한 
"지역의 풍경을 담기 위해" 만든 자연 스케치를 바탕으로 작가가 그렸다.

바흐치사라이(Bakhchisarai)는 1783년 러시아에 합병된 크림 칸국의 수도이다. 
칸의 궁전 옆에 도시 광장이 그려져 있다. 
왼쪽에는 팔콘 타워가 있는 하렘 벽이 있다. 
오른쪽에는 두 개의 첨탑이 있는 칸자미 모스크가 있다. 

터번을 쓴 동양 기병과 나란히 가족이 있는 러시아 장교, 
왼쪽에는 두루마리를 들고 걷는 랍비가 있다. 
캐서린 2세는 1787년 5월 러시아를 여행하는 동안 
바흐치사라이를 방문하여 이곳에서 며칠을 보냈다.

화가 표도르 알렉세예브 (Fyodor Yakovlevich Alexeyev 1753~1824)는 
러시아 도시 풍경화 학교를 창립했다. 
그는 제국 예술아카데미(Imperial Academy of Arts)에서 과일과 꽃과 풍경화를 공부했다. 
1773년부터 1777년까지 그는 베네치아에서 펠로우 십으로 살면서 연극 예술가로 공부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에게 호소력이 없었고, 많은 시간을 풍경화와 옛 거장의 작품을 복사하는 데 보냈다. 

아카데미 당국의 불만을 불러 일으켜 그가 돌아 왔을 때 
그는 1786년까지 제국 극장의 장식가로 일하게 되었고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계속 그리며 천천히 인정을 받았다. 
1794년 "요새에서 바라본 궁전 제방의 전망"은 그에게 학자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1800년에 차르 폴 1세는 그에게 모스크바의 거리와 건축물을 만드는 일을 맡겼다. 
1803년부터 그는 아카데미에서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케르 손, 미콜라이프, 바흐치사라이, 
오룔과 캐서린 대왕이 방문한 남부의 다른 지역을 방문하여 플리인에어 스케치와 수채화를 제작했다. 
1810년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묘사한 일련의 작품을 제작했다.
말년에 그의 명성은 꾸준히 쇠퇴하고 가난하게 죽어 대가족을 떠났다. 
아카데미는 그의 장례비를 지불했다.

 

Sea shore, Calm. 1843. by Ivan K. Aivazovsky. Oil on canvas . 114 x 187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반 콘스탄티노비치 아이바조프스키(Ivan Konstantinovich Aivazovsky, 1817~1900)는  
러시아 제국의 크림반도에 있는, 페오도시야의 마을에서 가난한 아르메니아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가 유럽 전역을 여행하기 전인 그의 인생 전반기에는 풍경화와 바다 그림마다  
수상작이 되면서, 그는 해안 마을의 크림반도인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 후반기에, 해군 장면을 그린 작품들은  
러시아 해군으로부터 오랫동안 지속되는 직권을 부여받게 되었다.  

1845년, 아이바조프스키는 술탄 압둘마지드의 초대에 응해 콘스탄티노플로 갔다.   
그는 1845~1950년 사이 8회에 걸쳐 콘스탄티노플 도시를 여행했다.   
아이바조프스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긴 체류 기간 동안에, 몇 점의 그림들을 그리기 위하여   
오스만 술탄 압둘마지드와 압둘하지즈에 의해 황실 화가로 임명되었다.   
그의 작품들 중에 30 점은 현재 오스만 제국의 궁전과,   
터키의 돌마바흐체 박물관과 다른 많은 박물관들에 전시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시 미술관과   
우크라이나 페오도시야에 있는 아이바조프스키의 미술 작품전시관을 포함하여,   
러시아와 과거 소비에트 연방 전역의 박물관들에서도 수십 점이 발견된다.   
터키의 외무부 장관이었던 압둘라 귈의 장관실 벽에는 아이바조프스키의 그림들이 걸려 있다.  

아이바조프스키는 31세 때, 영국인 가정교사 줄리아 그레이브스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결혼했다.   
그들은 네 명의 딸을 두었다. 그들의 결혼생활이 끝나고, 아이바조프스키는 65세때,  
페오도시야의 젊은 아르메니아인 과부 안나 부나지언과 재혼했다.  

아이바조프스키는 1985년, 소아시아의 아르메니안들의 하미디안 대학살에 의해 짙은 영향을 받아,   
몇몇 작품들은 "터키 함선의 축출", "트라브존에서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과 같은 주제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콘스탄티노플에 있을 때, 모든 메달들의 수여를 거절하였다.  

그는 그의 인생 후반기를 페오도시아에서 보냈다.   
그는 데오도시아에서 그의 사유지로부터 마을에 불을 공급했으며, 예술 학교를 열었다.   
그는 그 지역에서 첫 고고학적 유적 발굴을 시작했고, 역사 박물관을 건축했다.   
그의 노력 덕분에 페오도시아에는 무역 항구가 건설되었고, 철도 기차역 네트워크가 연결되었다.   
아이바조프스키는 1900년 사망하였다.  

아이바조프스키는 바다 그림과 해안 장면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파도와 바다 거품의 아른아른 빛나는 움직임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그의 화법과 상상력에 특히 감탄하게 된다.   
특별히 인상적인 점은 달빛이 퍼짐을 묘사하는 그의 능력은 참으로 탁월했다. 
아이바조프스키 그림의 햇빛과 달빛은 대부분은 투명한 대기층에 있지만,   
구름 뒤로부터 퍼지기도 하고, 안개를 지나기도 한다.   

그가 그린 1840년대의 해군 전투 작품 시리즈들은 물과 구름에 반사된  
불타는 배의 불길을 묘사한 것과 함께, 그의 극적인 역량을 그림의 앞 부분에 나타나게 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농부의 삶과 콘스탄티노플 시민의 삶의 장면들을 포함하여, 풍경화들도 그렸다.   
몇몇 비평가들은 그의 그림은 콘스탄티노플 동양학자의 작품이라고 하며,   
그의 수백 점의 그림들은 반복적이고 멜로드라마적 일 수 있는 다른 느낌이 있다고 한다.  

아이바조프스키는 그의 일생동안 가장 많은 작품을 그렸다.   
1900년, 그가 죽을때, 6,000 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재산은 그가 예술가로써 데오도시아의 고향에서 예술 학교를 열고   
전시관을 개장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 성공적인 활동을 하는 동안에 축적되었다.  

2006년에는, 아비아조브스키의 작품들은 3,200,000 달러 정도의 가격에  
경매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의 국제적인 명성은 계속하여 커지고 있다.   
2007년 7월 14에는 그의 그림 "지브롤터 암초에 밀린 아르메니안 선박 
(American Shipping off the Rock of Gibraltar)"이  2,710,000 파운드에 낙찰되어 되어,  
그 가격은 "아이바조프스키 작품 중에서 경매 낙찰 최고가"이다.  
그는 모든 아르메니아인 화가들의 최고의 용광로라고도 불린다.  

1977년, 소비에트 천문학자 니콜라이 스테파노비치 체르닉에 의해 발견된   
소행성 아이바조프스키 3787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아이바조프스키는 안톤 체홉의 바냐 아저씨 작품 활동에도 참고되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아르메니아에서는 아이바조프스키의 작품이 담긴 우표가 발행되고 있다. 

사람들의 풍경과 옷으로 판단하여 "분홍색"으로 만든 이 작품은 
남부 이탈리아 해안을 재현하거나 적어도 그 기억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것은 아이바조프스키가 1841년 봄 이탈리아 남부를 떠나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작가의 방법의 특성, 기억으로부터의 많은 유형의 글쓰기, 종종 예비 스케치 없이도 
자연스러운 인상이 아닌 자신의 기억과 상상력을 보여준다. 

 

A View of Constantinople by Moonlight, 1846. by Aivazovsky I. K. oil on canvas. 124 x 192,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1836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반 아이바조프스키는 
제국 예술 아카데미의 학자 칭호를 받았고 러시아 해군에서 화가로 일했다. 
이러한 새로운 의무 덕분에 그는 러시아 선원이자 지리학자인 

표도르 리트케(Fyodor Litke)와 함께 터키, 그리스, 소아시아를 방문 할 수 있었다. 

이 여행을 통해 그는 새로운 영향을 흡수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그 다음 해에는 러시아 항해자이자 지리학자 표도르 리트케 (Fyodor Litke) 

원정대와 함께 터키, 그리스, 소아시아를 방문하여 새로운 인상을 받았다.

이반 아이바조프스키는 1846년 1월 15일에 

이 그림 작업을 시작했고 같은 해 3월 16일에 완성했다. 
이 그림은 1846년 3월 18일 페오도시아(Feodosia)에서 화가의 
예술작품 10주년 기념전에서 전시되었고 니콜라스 1세가 구입했다.

 

The Ninth Wave, 1850.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221 x 332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반 아이바조프스키가 그린 '제9의 파도(The Ninth Wave)'는 말 그대로 빛과 색채의 향연(饗宴)이다. 
무지개를 구성하는 모든 색이 이 그림 속에 넘쳐난다. 
화면을 비스듬히 가르며 위쪽 하늘 부분은 붉은색 계열의 난색(暖色)이, 
아래 쪽 바다 부분은 청록색 계열의 한색(寒色)이 강렬한 대비를 보인다. 

화면 아래쪽 중앙에 힘겹게 떠 있는 난파한 배의 돛대가 없었다면, 
이 그림은 하늘과 물이 강렬한 보색 대비를 이룬 자연의 광시곡(狂詩曲)에 다름 아니다. 
이 광시곡을 채우는 것은 강렬한 색채와 더불어 엄청난 소음일 것이다. 
사람 키를 넘는 거대한 파도가 시야를 가리고 광포하게 밀려들며 철썩거리는 소리, 
먹구름에 덮여 있는 하늘의 굉음, 배의 돛대를 부숴버리는 바람 소리가 
관객들을 위태로운 생사의 기로에 선 난파선의 사람들과 공감각적으로 감정이입하게 한다. 

참고로 제목인 '제9의 파도'는 파도 중 가장 높은 파고(波高)를 지닌 파도를 지칭하는 말이다. 
현재와 같은 과학적인 기기를 갖춘 것도 아닌 옛 시대의 선원들은 
그들만의 감각으로 폭풍우가 밀려드는 때의 불규칙한 파도를 몇 개의 단계로 구분했다.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제3의 파도를, 로마 사람들은 제10의 파도를 
가장 치명적인 파도로 간주하였고, 고대 선원들은 제9의 파도를 가장 치명적이라고 간주했다고 한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4 (Academic Hall). Aivazovsky.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Mercury Brig Meeting a Russian Squadron after her Victory over Two Turkish Vessels, 1848.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123,5 х 190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4.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1828~1829년 5월 14일에 발생한 러시아 배 "머큐리"의 영웅적인 서사시 에피소드 중 하나이다. 
터키 전함 "셀리미예(Selimiye)와 "리얼 베이(Real Bey)"의 공격을 받고 
알렉산더 코자르스키(Alexander Kozarsky) 중령이 지휘하는 18발의 함포 사격은 
숙련된 기동과 팀의 필사적인 용기 덕분에 적에게 상당한 손실을 입혔다. 
이반 아이바조프스키는 적의 군함에 많은 포탄 구멍을 뚫은 "머큐리(Mercury)"호가 
러시아 군함 그룹으로 이동하는 전투의 마지막 순간을 묘사했다.

 

A Russian Squadron on the Sevastopole Roadstead, 1846.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121 х 191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4.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1846년 5월 18일 페오도시아에서 전시회가 열렸는데, 여기서 이 작품이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크리미아에서 1846년 1월부터 5 월까지의 기간에 작성되었다. 
캔버스의 중앙이 황실의 기준을 높인 요트를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로 판단하면 
사람들은 해안에 붐비고 황제를 맞이하며 요트 앞에는 흑해 함대의 배들이 퍼레이드로 줄을 섰다. 
러시아 박물관에 있는 이 그림은 니콜라스 1세가 의뢰한 것이다.

이 작품에는 아직 세바스토폴 (러시아 왕관의 흑해 진주)과 다가오는 1853~1856년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 함대의 비극적인 운명을 예고하는 것이 없다. 
1841년에 발사된 러시아 흑해 선박의 기함인 "12 사도(The Twelve Apostles)"를 포함하여 
130척의 함포가 1854년 세바스토폴 만 입구에서 침몰되었다.
프랑코-앵글로-터키 함대가 바다에서 세바스토폴을 장악했다. 

아이바조프스키의 이 작품은 "The Twelve Apostles" 배와 관련하여 이 기간 중 가장 늠름한 모습이다. 
5 척의 군용 선박이 세바스토폴에서 페오도시아(Feodosia)로 이동하여 앞서 언급한 
아이바조프스키의 예술 활동 10주년 기념 작품 전시회를 축하한다. 

 

Wave, 1889.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304 х 50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4.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웅장한 캔버스 "파도(Wave)"는 아이바조프스키가 말년에 작업한 생생한 그림이다. 
그림 제작 당시 작가는 이미 72세였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파도의 움직임을 묘사한 화가는 자연의 사이클로 핀 
힘을 존경하고 인간의 노력의 무익함을 비교하는 것 같다. 

무거운 납 구름이 파도 위에 낮게 매달려 있고 심연은 부서진 배를 삼키려 한다.
탈출하려는 선원들을 위해 희망은 없어 보인다. 
그림의 채색은 차갑고 우울하다. 
여기서 화가는 팔레트의 초기 낭만적인 밝기에서 벗어나 현실적인 해결책에 접근한다.

 

2019. 08. 22. 인증샷

 

The Coast in Amalfi, 1841.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71 х 10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4.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아말피의 해안(The Coast in Amalfi)'에서 아말피는 이탈리아 소렌토 남쪽의 
살레르노 만 기슭에 있는 마을이다.
1840년 여름, 아이바조프스키는 작품을 위해 이탈리아로 보내졌다. 
같은 해 가을, 그는 나폴리에 도착하여 도시 주변과 섬을 여행했다. 
아이바조프스키는 나폴리 만과 살레르노 해안에서 장엄한 파노라마를 검색하는 것 외에도 
그가 존경했던 화가 실베스터 셰드린 (Sylvester Shchedrin 1791~1830)의 
붓이 포착한 장소를 답사하기 위해 노력했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4 (Academic Hall). Karl P. Brullov.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Portrait of Countess Yulia Samoilova Retiring from a Ball with her Foster Daughter Amazilia Pacini. 
Unfinished. Before 1843. by Karl P. Brullov. oil on canvas. 249 x 176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백작 부인 율리아 사모일로바(Yulia Samoilova)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부유한 가족으로 왕실의 친척에 속했다. 
그녀는 엄청난 재산을 소유했다. 
율리아 사모일로바는 니콜라이 1세(Nicholas I)와 갈등으로 이탈리아로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20년대에 이탈리아에서 그녀는 브룰로프를 만났다. 
그들의 관계는 가깝고 결혼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사모일로바는 자신의 자녀가 없었지만 두 명의 소녀를 입양하여 지속적으로 돌보았다. 

주홍색 커튼과 이오니아식 기둥의 강력한 줄기는 공간을 첫 번째와 두 번째 구획으로 나누며 
백작 부인 율리아 사모일로바의 밝고 예술적인 본성이 완전히 화려하게 드러나고 
그 옆에 그녀의 양녀가 있는 장면과 비슷하다. 

배경에는 중세 광대와 뱀이 얽힌 신들의 사자와 
터키 옷을 입은 수염난 귀족이 있는 헤르메스를 볼 수 있다. 
백작 부인이 가장 무도회를 떠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브룰로프(Karl Bryullov)가 우화적인 "인생의 가장 무도회"를 만들려고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테마는 환상적인 의상과 그림의 밝고 불같은 색을 모두 설명한다. 
사모일로바에 대한 작가의 태도는 경외심과 경계를 이뤘다. 
그는 백작 부인의 초상화를 반복적으로 그렸다. 
그녀의 모습은 브룰로프의 대표작 "폼페이 최후의 날"에서도 그 특징을 알아볼 수 있다.
이 초상화는 사모일로바가 가족의 이유로 러시아에 도착한 1839~1840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그려진 것이 분명하다. 

 

Portrait of the Shishmareva Sisters, 1839. by by Karl P. Brullov. oil on canvas. 281 x 213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쉬시마레바(Shishmareva) 자매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부유한 상인 중 한명인 
세바 야코블레브(Savva Yakovlev)의 손녀였다. 
이 그림은 브룰로프의 가장 훌륭하고 공식적인 초상화 작품 중 하나다. 
이 작품은 뛰어난 소질과 풍부하고 세련된 색채에 대한 브룰로프의 재능을 보여준다.

 

Portrait of Grand Duchess Elena Pavlovna, née Princess Friederike Charlotte of Württemberg, 
Wife of Grand Duke Mikhail Pavlovich, with her Daughter Grand Duchess Maria Mikhailovna, 1830.
by Karl P. Brullov. oil on canvas. 265 x 18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러시아 대공비 엘레나 파블로브나(Elena Pavlovna 1784~1803)는 
러시아 제국의 수도인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또한 매우 아름다워서 할머니인 황후 캐서린이 

그녀의 이름을 트로이의 헬렌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어린 시절 엘레나는 집에서 사적으로 교육을 받았으며, 첫해의 교육은 
러시아의 강력한 캐서린 2세인 친할머니가 감독했다 . 
그녀의 시대에 다른 왕족과 마찬가지로 대공비(Grand Duchess)의 교육은 

주로 예술, 문학 및 음악에 중점을 두었다. 
그녀의 진정한 삶의 목적은 결국 결혼을 잘하고 남편이 될 자녀를 낳는 것이다. 

1779년 5월 5일 엘레나 대공비는 잘 생긴 남자이지만 본질적으로 소박하고 
무지하지만 좋은 사람인 메클렌부르크 세습 왕자와 약혼하고 1799년 10월 23일 결혼했다. 
이 초상화는 1829년 로마에 있는 엘레나 파블로브나 대공비가 로마에 체류했을 때 제작되었다. 

 

Narcissus looking at the water, 1819. by Karl P. Brullov. oil on canvas. 162 x 209.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칼 브룰로프 (Karl Pavlovich Brullov)에 대한 일화는 톨스토이(Leo Tolstoy)의 에세이에도 나와 있다.
1836~1848년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동안 그는 신고전주의적 단순함과 잘 어우러진 
낭만적인 경향을 결합한 초상화 스타일을 개발했으며, 사실주의에 대한 그의 성향은 
흥미로운 수준의 심리적 통찰력에 만족했다. 

그가 성 이삭 대성당의 철탑에서 작업하는 동안 그의 건강은 갑자기 악화되었다. 
의사들의 조언에 따라 브룰로프는 1849년 러시아를 떠나 
그의 생애의 마지막 3년을 이탈리아 마데이라에서 보냈다. 
그는 로마 근처의 만찌아나(Manziana) 마을에서 죽었고 그곳의 
개신교 묘지(Cimitero Acattolico)에 묻혔다.

이 작품은 수선화의 신화를 묘사하고 있다.
수선화의 신화는 자신의 성찰에 반한 놀라운 아름다움을 지닌 청년의 이야기를 고찰한다. 
신화에서 자주 발생하는 것처럼, 이 전설은 하나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자기의 지식이나 사랑, 예술, 인간의 영원한 문제, 허영심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러한 이유로 입증된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수선화의 신화는 여전히 관련이 있다. 
자신의 성찰에 사랑에 빠진 유난히 아름다운 청년은 

우리에게 그를 주의 깊게 묵상하도록 초대한다. 

수선화 신화에는 여러 버전이 있으며 모두가 이것이 

비범한 아름다움을 지닌 청년이라는 데 동의한다. 
남녀 모두를 매료시킬 수있는 아름다움, 그러나 얻을 수없는 아름다움, 
수선화는 어떤 사랑의 발전에도 대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날 여신 람누시아는 그를 숲의 어두운 구석에 숨겨져 있는 돌이킬 수 없는 샘으로 유인했다. 
티레시아스가 예상했던대로 나르시스가 자신을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장소. 
오비드(Ovid)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 소년은 사냥의 수고로 피곤하고 더위에 엎드려서
그 장소의 아름다움과 봄이 흘렀고 그의 갈증이 진정되는 동안
소원, 갈증이 커지고 술을 마시면서 그녀를 보며 이미지에 사로 잡혔다.
몸이 없는 희망은 그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몸은 그것이 있는 그대로라고 생각한다." 

서로 만나는 것만으로도 사로잡혔다. 
그는 자신의 반성에 미친 듯이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그것은 인식되지 않았다. 
그는 물 속에 사는 또다른 젊은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를 껴안고, 만지고, 키스하려고 했다. 
단지 봄의 표면만이 그들을 분리시켰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는 데 시간이 걸렸다. 
수선화는 그의 지능이 아니라 그의 아름다움으로 두드러졌다.

 

Portrait of Count Alexei Tolstoy in his Youth, 1836. by Karl P. Brullov. oil on canvas. 134 x 104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알렉세이 톨스토이 (Alexey Konstantinovich Tolstoy 1817~1875)는 

러시아 시인, 소설가 및 극작가였다. 
먼 친척인 레오 톨스토이만큼 국제적으로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친 슬라브였던데 비해 
이런 스타일을 피하면서 상당한 업적을 기록한 작가였다.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유명한 톨스토이 백작의 

가문에서 태어나 "백작"이라는 칭호를 물려 받았다. 
그의 어머니 페로브스카야(A. A. Perovskaya)는 1816년에 나이 든 홀아비였던 
톨스토이(K. P. Tolstoy) 백작과 결혼했지만 곧 헤어졌습니다.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생후 6 주가 되었을 때 어머니와 함께 
외삼촌인 페로브스키(A. A. Perovskiy) 집에서 8세가 될 때까지 자랐다. 
그런 다음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곧 삼촌의 인맥의 도움으로 그는 같은 나이 또래인 

미래의 황제 알렉산더 2세(Alexander II)를 소개받았다.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고귀한 배경을 가진 다른 아이들 사이에서 

어린 왕자의 주말 놀이 친구가 되었다. 
이 관계는 알렉세이 톨스토이의 평생 동안 지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알렉산더 2세의 아내인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Mariya Alexandrovna) 황후는 
알렉세이 톨스토이의 재능에 높은 경의를 표하게 된다.

1826년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어머니와 삼촌과 함께 유럽을 여행했다. 
"그랜드 투어"는 부유한 러시아 귀족 가족을 위한 전통이었다. 
독일에서 그는 노인이 된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를 방문하였다. 
이탈리아는 예술, 건축 및 아름다운 도시로 소년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그들이 방문한 모든 마을에서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점점 더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1836년 모스크바 대학교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러시아 외교 사절단에 임명되었다. 
그해에 그의 삼촌은 죽었고 그에게 상당한 재산을 남겼다.
1850~1851년 겨울, 그는 궁전 무도회에서 기병 대령의 아내인 소피아 밀러를 만났다. 
알렉세이 톨스토이의 전체 가사 시가 그녀에게 전달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 로맨스가 폭풍우 치듯 밀려왔고 후에 소피아는 남편을 떠났다. 
소피아가 이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동안 두 사람은 공식적으로 결혼할 수 없었다. 

1861년 그는 시를 쓰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위해 퇴직했다.
황제와의 친밀한 우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진정한 목적없이 
평안한 삶을 살면서 단지 예의 중 한 사람이 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알렉세이 톨스토이가 공적인 경력을 더 쌓고 싶었다면 
아마도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예술"에 집중하고 싶어 했고 자신의 글쓰기에 전념했다.

이런 이유로 궁정 시인의 삶에 대한 그의 첫 번째 장편 시 
"이오안 다마신(Ioann Damaskin)"은 부분적으로 자전적이었다. 
알렉세이 톨스토이의 글이 계속됨에 따라 그의 문학적 명성은 더 높아졌다. 

1854~1855년에 그는 그의 사촌 두 명과 협력하여 코즈마 프룻코프(Kozma Prutkov)라는 
공동 필명으로 러시아 관료제에 대한 풍자를 써서 출판했다.
그의 역사 소설 <무법자의 왕자>는 이반 대제의 끔찍한 통치 기간에 관한 것이다. 
톨스토이가 어떤 부분을 기여했는지 구분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그는 훌륭한 유머 감각으로 유명했다. 
가장 유명한 시 중 일부는 1860년대의 경향에 대해 공개적으로 표현된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어 필연적으로 많은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풍자 외에도 그는 발라드, 역사 소설 등을 썼다. 
그의 작품의 대부분은 슬라브 주제로 가득 차 있다. 
그는 1875년 9월 28일 천식, 협심증 및 신경통으로 인한 
통증 완화로 처방된 모르핀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브룰로프는 이 작품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인 사냥으로 알렉세이 톨스토이를 그렸다. 
톨스토이의 걸음 걸이는 가볍고 움직임은 부드럽고 탄력적이다. 
그는 사냥용 재킷, 어깨에 매달린 트로피 가방, 손에 라이플을 착용하고 있다. 
톨스토이의 표백된 얼굴과 팔은 가볍고 부드럽게 모델링되었다. 
얼굴의 길쭉한 타원형과 손의 모양은 모델의 귀족성을 강조한다.

이를 구성하는 천의 문양과 색채의 부드러움과 멀리 바라보는 몽환적인 시선, 
짧은 획으로 전달되는 머리카락, 넓고 감성적으로 펼쳐지는 풍경 등은 
예술가가 그린 강아지와 함께 주인을 정성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사냥꾼의 얼굴에 기쁨이 보인다. 

톨스토이 자신이 나중에 말했듯이, 예술에 대한 그의 관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학 추구에 ​​대한 그의 관심은 사냥에 대한 열정과 결합되어 
자신의 시의 낙관적인 방향에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Alexei Perovsky, Pseudonym Anthony Pogorelsky, 1836. by Karl P. Bryullov. oil on canvas. 136 x 104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알렉세이 페로브스키(Aleksey Alekseevich Perovsky 1787~1836)는 
안토니 포고렐스키(Anthony Pogorelsky)라는 가명으로 작품을 쓴 러시아의 유명한 작가이다. 
"작은 러시아의 두 배 또는 나의 저녁"(1828), 동화 "검은 암탉 또는 지하 거주자", 
소설 "모나스 티르카"(1830-1833)의 저자. 

알렉세이 라주모프스키 (Alexei Kirillovich Razumovsky)와 
마리야 소볼레브스카야(Marya Mikhailovna Sobolevskay) 사이에 태어나 
집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그는 1805년 모스크바 대학교에 입학했다. 
1807년에 그는 철학 및 언어과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러시아어, 독일어 및 프랑스어 3개 과목을 강의했다. 

이 초상화는 1835년 12월 25일에 브룰로프가 도착한 모스크바에서 그려졌고 
1836년 5월 11일 이전에 완성되었다. 
페로브스키는 풍경을 배경으로 창가에 앉아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의 시선은 다소 긴장되고 세심하며 포즈는 자유롭고 매력적인 얼굴이다.

 

Portrait of Princess Z. A. Volkonskaya, 1842. by Karl P. Bryullov. oil on canvas.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지나이다 볼콘스카야(Zinaida Aleksandrovna Volkonskaya 1792~1862)는

공주의 환상적인 의상과 터번 모양의 고급 머리 장식, 동화의 세계로 이어지는 듯, 

모피로 장식된 진주의 부드러운 반짝임이 특히 눈에 띈다.

 

지나이다 볼콘스카야는 러시아의 작가, 시인, 가수, 작곡가, 미용사 및 공주였다. 
그녀는 19세기 러시아 문화 생활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아마추어 오페라 가수로 파리와 런던에서 공연했다.

 

지나이다 볼콘스카야는 토리노에서 러시아 대사인 
알렉산더 벨로저스키(Alexander Beloselsky-Belozersky) 왕자의 가족으로 태어났다.
지나이다는 러시아의 알렉산더 1세 황제와 가까웠는데, 아마도 연인일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런 소문을 막기 위해 지나이다는 1810년 알렉산더 황제의 보좌관인 
니키타 볼콘스키 (Nikita Grigorievich Volkonsky 1781~1844)왕자와 결혼했다. 

 

지나이다는 1817년에 러시아로, 1822년에 모스크바로 이사했다. 
1820년대에 지나이다는 모스크바의 트베르스카야 거리에 문학 및 음악 살롱을 개관했다.
폴란드의 시인, 극작가, 수필가였던 아담 미키에 비츠 (Adam Bernard Mickiewicz 1798~1855), 
러시아 최고의 사상 시인 예브게니 바라틴스키 (Yevgeny Baratynsky 1800~1844), 
러시아의 낭만주의 시인 드미트리 베네 비티 노프 (Dmitry Venevitinov 1805~1827), 
러시아 근대문학의 창시자 알렉산더 푸쉬킨 (Alexander Pushkin 1799~18387) 등은 
그녀의 집을 자주 방문했다. 

푸쉬킨이 그녀에게 보낸 "음악과 아름다움의 여왕"이라는 구절 서신은 잘 알려져 있다.

 

알렉산더 1세가 죽은 후 지나이다의 시동생 세르게이 볼콘스키 
(Sergei Grigorievich Volkonsky 1788~1865) 왕자는 후계자 니콜라스에 대한 
데카브리스트 혁명(Decembrist Revolt)을 이끌었다. 
데카브리스츠(Decembrists)들은 시베리아로 추방되었고

그들의 아내는 그들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지나이다는 이 여성들을 위한 작별 파티를 열었고 니콜라스 1세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또한 러시아 정교회에서 가톨릭교로의 비밀 개종자이자

예수회 요원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심을 받았다.

 

이러한 압력으로 인해 1829년 지나이다는 로마로 이주했다. 
그녀는 아들과 아들의 교사인 스테판 셰비료프(Stepan Shevyrev 1806~1864)를 동반했다. 
로마에 있는 그녀의 숙소 중에는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트레비 분수의 배경 건물인 
팔라조 폴리(Palazzo Poli), 빌라 볼콘스키(Villa Wolkonsky) 등이 있다. 
지나이다 공주는 1830년대에 팔라조 폴리(Palazzo Poli)에서

호화로운 파티를 연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의 살롱은 러시아 화가 칼 브룰로프(Karl Brullov)와 알렉산더 이바노프(Alexander Ivanov), 
덴마크의 유명한 조각가 베르텔 토르발드센(Bertel Thorvaldsen 1770~1844), 
이탈리아 화가 빈센조 카무치니 (Vincenzo Camuccini 1771~1844), 
프랑스 작가 스탕달 (Stendhal 1783~1842), 스코틀랜드의 시인, 극작가, 역사 소설가 
월터 스콧 (Sir Walter Scott 1771~1832)이 자주 방문했다. 
러시아의 대문호 니콜라이 고골 (Nikolai Gogol 1809~1852)은 지나이다의 빌라에서 
"죽은 영혼(Dead Souls)의 많은 부분을 썼다.

 

지나이다 볼콘스카야 공주는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트레비의 성도 빈센조와 아나스타시오(Santi Vincenzo e Anastasio a Trevi) 성당에 묻혔다. 
지나이다는 죽음 이후에 시성(beata) 되었다. 
그녀의 영문 전기 "지나이다 볼콘스키 공주의 생애 (A life of Princess Zinaida Volkonsky"는

1998년에 등장했다.

 

Self-Portrait, 1849. by Karl P. Bryullov. oil on canvas. 64.1 x 54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1849년의 칼 브률로프(Karl P. Bryullov) 자화상은 심각한 병을 앓고 나서 그린 것이다. 
그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씁쓸한 반성, 삶에 대한 환멸, 

까다로운 주인에 대한 창의적인 불만의 결과였다. 
그 구성과 고대 의복으로 예술가의 낭만적인 이미지는 루벤스의 초상화와 비슷하다. 
작가는 매우 빠르게 작업했다. 
트레티야코프 갤러리에 있는 자화상은 단 2시간 만에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자화상은 브률로프의 제자 루카쉐비치(N. A. Lukashevich)가 옷과 배경을 그리고 
브률로프는 손과 머리를 그렸다고 한다.

 

Italian Midday (Italian Girl Picking Grapes), 1827. by Karl P. Brullov. oil on canvas. 64 x 5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탈리아 정오 - 포도를 따는 이탈리아 소녀는 칼 브룰로프의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단순한 이탈리아 여성이 모델이 되었다. 
브룰로프는 맑은 정오의 햇살 아래 진짜 포도원에서 이 그림을 그렸다.
이 단순한 일상의 줄거리에서 자연에서 일하는 작가는 단순하고 일상적인 것에서 아름다운 것을 찾았다.

 

Girl picking grapes in the vicinity of Naples, 1827. by Karl P. Brullov. oil on canvas. 62 x 52.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탈리아에 머무르는 첫 해에 칼 브룰로프는 고

대 역사의 신화적 주제와 함께 장르 회화로 바꾸었다. 
그는 존재의 기쁨을 전달하는 장르 장면을 만든다. 
많은 낭만주의의 특징인 인간과 자연을 합치는 아이디어는 브룰로프가 
"나폴리 근처에서 포도를 따는 소녀"라는 작품에서 표현되었다. 
낭만적이고 동시에 낙관적인 디자인, 미묘한 그림 구조, 시적 인토네이션으로 
가득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임자로부터 예술가가 물려받은 고전주의의 견고한 기초를 유지한다.

 

Self-Portrait, 1833. by Karl P. Brullov. oil on canvas. 56.5 x 43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1833년 브레라 갤러리에서 "폼페이 최후의 날" 그림을 전시 한 후, 
브룰로프는 밀라노와 피렌체의 미술 아카데미, 볼로냐와 파르마의 
예술 아카데미의 명예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동시에 피렌체의 우피치 갤러리는 16세기부터 존재해 온 
유명한 자화상 컬렉션을 위해 작가의 초상화를 요청했다. 
이 초상화는 우피치 갤러리에 출품하기 위한 것이었다. 

 

Portrait of Grand Duchess Alexandra Nikolaevna, 1837–1844. by Karl P. Brullov. oil on canvas. 
90 x 71.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러시아 대공비 알렉산드라 니콜라에브나 (Alexandra Nikolaevna 1825~1844)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1세(Nicholas I)와 알렉산드라 페오도로브나(Alexandra Feodorovna)의 막내 딸이다.
알렉산드라는 재치 있고 활기찬 성격으로 상트 페테르부르크 사회에서 유명했다. 
그녀는 또한 유명한 소프라노 헨리에트 손탁(Henriette Sontag)의 

레슨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성악에도 재능이 있었다 .
그녀는 아버지 니콜라스 1세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1844년 1 월 16일에 그녀는 헤세(Hesse-Kassel)의 왕자인 
프레드릭 윌리엄(Friedrich Wilhelm 1820~1884)과 결혼했다.
알렉산드라는 결혼식 직전에 결핵으로 심하게 앓았으며 곧 임신이 복잡해졌다. 
그녀는 헤세(Hesse)로 가서 남편과 함께 새로운 직책을 맡을 만큼 건강하지 못했다. 
그들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머물렀고 그녀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다.

그녀는 출산 예정일 3개월 전에 조산에 들어가 아들 빌헬름을 낳았다. 
아기는 태어난 직후 죽었고 알렉산드라는 같은 날 늦게 죽었다. 
그녀는 부모의 자녀 중 처음으로 사망했다. 
그녀의 부모는 슬픔에 빠져 황폐해졌고 이러한 상태는 그들의 삶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녀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피터와 폴 요새(Peter and Paul Fortress)에 묻혔다. 

 

Portrait of Alexandra Feodorovna, wife of Nicholas I, Study for an unrealized group portrait, 1837.
by Karl P. Brullov. oil on canvas. 39.5 x 3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알렉산드라 페오도로프나 (Alexandra Feodorovna (1798~1860)는 
프로이센 왕 프레데릭 빌헬름 3세(Frederick Wilhelm III)와 루이스 여왕(Queen Louise)의 딸로 
1817년 러시아 대공이자 후에 황제가 되는 니콜라스 1세(Nicholas I)와 결혼했다.
결혼은 주로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정치적 연합을 강화하는 목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그녀는 행복하고 만족한 결혼 생활을 영위했다. 


1826년 그녀는 러시아 황후가 되었고, 1828년부터 파울 1세(Paul I)의 

아내이자 시어머니인 마리아 페오도로브나(Maria Feodorovna) 황후가 

사망한 후 그녀의 관할권에 있는 자선 기관의 수탁자가 되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은 알렉산드라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Portrait of Grand Duchess Maria Nikolaevna, Eldest Daughter of Nicholas I and 

Later Wife of Duke Maximilian Josephe Eugene of Leuchtenberg and Count Grigory Stroganov
Study for an unrealized group portrait. 1837. by Karl P. Brullov. oil on canvas. 47 x 38.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러시아 대공비 마리아 니콜라예브나 (Grand Duchess Maria Nikolaevna 1819~1876)는 
니콜라스 1세(Nicholas I) 황제의 장녀이자 알렉산더 2세의 누이였다. 
그녀의 부모인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스 1세와 프러시아의 샬롯 공주로 태어난 
알렉산드라 페오도로브나 황후는 서로에게 그리고 자녀들에게 헌신했다. 
그들은 따뜻하고 다정한 부모였지만 지나치게 탐닉하는 것은 피했다.  
니콜라스 1세는 그들과 함께 합창하는 것을 좋아했다. 

마리아 니콜라예브나는 자매 올가(Olga)와 함께 자랐다. 
겨울 궁전 1층에 위치한 그들의 방은 소박하고 사치스러웠다. 
소녀들은 사계절 내내 신선한 공기와 환경에서 자랐고 요리사들은 식단을 조절했다. 
수업은 오전 8시에 시작되었다. 
마리아(Maria)의 교육은 이전에 알렉산드라 페오도로브나(Alexandra Feodorovna)의 
러시아어 교사였던 자유주의 개인 상담가이자 시인 
바실리 주코프스키(Vasily Zhukovsky)의 감독 하에 진행되었다. 
주코프스키는 죽을 때까지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마리아와 그녀의 자매들은 춤, 음악, 그림 수업을 받았다. 
그녀의 어린 시절 스케치북 (1826~1830)은 지금까지 남아 있으며 
미국에 살고 있는 그녀의 후손들의 손에 있다. 
꽤 잘 그린 대공비 마리아는 나중에 수채화로 만들었다. 
그녀는 예술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았고, 수혜자이자 예술 수집가가 되었다. 
예술적으로 재능이 있는 그녀는 자신의 개인적인 스타일로 방을 꾸며 
인테리어 디자인에 초기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나중에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궁전을 도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으로 만들었다. 
세 자매는 모두 음악적 능력이 있었고 자선 활동에 참여했다. 
1835년부터 대공비 마리아는 엘리자베스 알렉세예프나 황후에 의해 설립된 
애국자 사회의 활동적인 일원이었다. 
이사회는 때때로 겨울 궁전에 있는 마리아의 방에서 만났다.

1839년 그녀는 로이히텐베르크(Leuchtenberg) 공작 막시밀리안(Maximilian)과 결혼했다. 
막시밀리안은 나폴레옹 1세의 첫 아내인 조세핀(Josephine) 황후의 손자로
인물이 잘 생겼고 교육을 잘 받았으며 문화적 추구에 관심이 있었다. 
올가 대공비가 일기에 기록한 것처럼 그는 외모와 매너로 

마리아 니콜라예브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러시아 황제의 딸에게는 바람직한 혼사가 아니었다. 
막시밀리안은 왕족 이하였으며 또한 정통파가 아닌 로마 카톨릭이었고 
그의 가족, 특히 바이에른의 어머니 아우구스타 공주는 이 결혼에 반대했다. 

더욱이 보나파르트 가문은 러시아의 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르는 그의 딸이 러시아를 떠나 

해외에서 살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결혼을 허가했다.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은 통치하는 가족의 일원이 아니기 때문에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거주하기가 쉬웠다.

결혼식은 1839년 7월 2일 겨울 궁전의 웅장한 교회에서 열렸다. 
그들의 결혼식 날 니콜라스 1세는 마리아에게 자신의 궁전을 선물하기로 결정했다. 
황제는 모이카(Moika) 강 유역에 있는 성 이삭 대성당 맞은 편에 
전략적으로 위치한 상트 페테르부르크 중심의 한 부지를 선택했다. 
건축가 안드레이 스태컨스나이더(Andrei Stackensneider)가 

특별히 의뢰한 젊은 부부를 위해 비용을 아끼지 않았으며, 

차르가 딸을 매일 방문할 수있을 만큼 겨울 궁전과 가까웠다. 


이 궁전은 1844년 말에 완성되었으며 마리아 니콜라예브나의 

이름을 따서 마린스키 궁전으로 명명하였다. 
그들의 궁전이 건설되는 동안 마리아는 세 자녀를 낳았다. 
부부는 보론초프(Vorontsov) 궁전에 살았다.

그랜드 공작 부인은 그녀의 취향과 우아함을 보여주면서 그녀의 집 장식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마리아 니콜라예브나는 순환 다리 문제로 고생했기 때문에 마린스키 궁전은 
메인 룸에서 멀리 떨어진 3층을 모두 연결하는 오른쪽 날개에 계단이 설치되지 않게 설계되었다. 
궁전은 예술 작품과 가족 유물로 가득차 있었으며 그중 일부는 조세핀 황후에게서 물려 받았다. 
마리아 니콜라예브나는 화려한 파티, 연극 공연 및 콘서트를 조직했다. 

마리아 니콜라예브나와 그녀의 남편은 예술적 성향이 있었고 

자선 및 예술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마리아의 남편은 러시아 전역에서 과학자로 유명해졌다. 
그는 과학에 관심을 갖고 광산 기술을 공부했으며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1844년 니콜라스 황제는 그를 광업 공학 부서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1843년 그는 예술 아카데미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마리아는 남편의 업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그를 학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1840년대 후반에 이 부부는 헤어졌다. 

마리아 니콜라예브나는 1854년 그레고리 알렉산드로비치 스트로고노프 
(Grigori A. Stroganov 1824~1879) 백작과 두 번째 결혼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 니콜라스 황제가 사는 동안 비밀로 유지되었다. 
공식적으로 결혼은 니콜라스 1세가 사망한 1856년 11월 16일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리아는 오빠인 알렉산더 2 세에게 두 번째 결혼을 인정하고 
그들이 러시아에서 살도록 허락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허락받지 못했다. 
대신 그는 결혼에 대한 비밀을 유지하면서 해외에서 계속 살 것을 제안했다. 
1862년에 마리아 니콜라예브나는 이태리 피렌체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거의 매일 박물관, 개인 소장품 및 골동품 상인을 방문했다. 
이탈리아에서 마리아 니콜라예브나는 집을 완전히 개조하기 위해 그림, 
조각품 및 가구를 구입하는 데 열성적이었다. 

마리아 니콜라예브나는 정맥류 또는 일종의 뼈 질환으로 고통을 받았고
1876년 2월 21일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56 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Portrait of Grand Duchess Yekaterina Mikhailovna, Later Wife of Grand Duke Georg of Mecklenburg-Strelitz
Not over yet. 1845 (6?). by Karl P. Brullov. oil on canvas. 43 (Circle)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러시아 대공비 예카테리나 미하일로브나 (Grand Duchess Ekaterina Mikhailovna 1827~1894)는 
러시아 대공 마이클 파블로비치 (Grand Duke Mikhail Pavlovich)와 
대공비 엘레나 파블로브나 (Grand Duchess Elena Pavlovna)의 셋째 딸이었다. 
그녀는 또한  메클렌부르크-스트렐리츠(Mecklenburg-Strelitz) 가문의 
게오르그 아우구스트(Georg August) 대공의 아내였다.

그녀는 훌륭한 자선가였으며 그녀가 지원하고 창설하는 데 도움을 준 많은 조직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운영되고 있다.

 

Portrait of Tsarevna Maria Alexandrovna, Second half of the 1840s. by Karl P. Brullov. oil on canvas.

43 (Circle)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4,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마리아 알렉산드로프나 (Maria Alexandrovna 1824~1880)는 
알렉산더 2세 황제의 첫 아내이자 정치 고문으로 러시아의 황후였다. 
그녀는 러시아 적십자사의 창시자 중 한 명이었다.

니콜라스 1세가 사망한 후 마리아 알렉산드로프나는 러시아 황후가 되었고 지성으로 유명했다. 
그녀는 러시아 적십자 기금을 조직하고 확장했고 러시아 최초의 여성학교를 설립했으며 
알렉산더 2세가 농노 제도를 종식하도록 도왔다. 
하지만 그녀는 1863년 부터 결핵에 시달렸고 혹독한 겨울을 피하기 위해 
남부 유럽에서 오래 머무르며 장남 니콜라스 알렉산드로비치가 사망한 후 병이 더욱 악화되었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비공식적으로 헤어졌지만 
마리아는 살아남은 가족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으로 대우를 받았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과 마린스키 궁전(Mariyinsky Palace)은 
그녀의 도움으로 지어졌고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영상] Hall 13 in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3. Venetsianov and his School. Pavel Fedotov.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A Girl in a Headscarf, End of 1820-s. by Alexey G. Venetsianov. oil on canvas. 38 х 27,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 (Alexey Gavrilovich Venetsianov 1780~1847)는 러시아의 장르 화가, 
초상화 화가였으며 농민 생활과 평범한 사람들을 그린 작품으로 유명했다.
베네치아노프는 모스크바의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9세기 초에 공무원에 들어갔고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베네치아노프는 먼저 에르미타주(Hermitage) 그림과 친구들의 초상화로 연습했다. 
그는 나중에 블라디미르 보로비코프스키 (Vladimir Borovikovsky 1751~1825)를 

알게 되었고 그의 집에서 견습생으로 살았다. 
베네치아노프는 프리랜서 초상화가로 일하려고 했지만 수수료를 거의 받지 못했다. 

1819년 순수 예술에 전념한 베네치아노프는 서비스를 그만두고 
트베리(Tver) 지방의 사폰코보(Safonkovo) ​​영지에 정착해서 살았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주변에서 관찰한 자연의 장면을 그렸다. 
그는 농민의 초상화와 시골 생활을 보여주는 장면을 그렸다. 
베네치아노프는 러시아 미술에서 농민의 삶을 처음으로 묘사했다. 
그의 작품은 1824년 전시회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베네치아노프는 제국 예술아카데미 (Imperial Academy of Arts)의 교수가 되기를 원했지만 
학자들은 그가 학업 훈련이 부족했기 때문에 승락하지 않았다. 
1820년 이전 몇년 동안 그는 가난한 배경의 젊은이들을 끌어들여 그림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820년대 중반에 그는 추종자 그룹을 갖게 되었고 자신의 그림 학교를 설립했다. 
'국가적 트렌드'를 알리는 것을 좋아했던 차르 니콜라스 1세는 그를 궁정 화가로 임명했다. 
이 직함은 그에게 수업료가 거의 무료인 학교 운영에 필요한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 
베네치아노프는 1847년, 마차가 가파른 경사 아래로 굴러떨어지면서 사고로 사망했다.

이 그림은 원래 베네치아노프의 오랜 지인이자 트베리(Tver) 지방 
비쉬네볼로츠크(Vyshnevolotsk) 지역의 지주인 밀류코프(V. I. Milyukov 1816~1864)의 소유였다. 

 

Free art print of View of the Dam in the Estate of Spasskoye, 1847. by Grigoriy V. Soroka. oil on canvas. 
68 x 88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그리고리 소로카(Grigoriy Vasilievich Soroka 1823~1864)는 베네치아노프 학교의 
가장 유명한 멤버 중 한 명인 러시아 화가였다.
소로카는 밀류코프(N. P. Milyukov) 가족이 소유한 트베리(Tver) 지방 
포크로프스코이(Pokrovskoye) 마을에서 농노로 태어났다. 
소로카는 1842~1847년에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Alexey Venetsianov)에서 
미술을 공부한 후 주인에게 돌아왔다. 

1850~1860 년대에 소로카는 고향에서 거주했고 그곳에서 정원사로 일했다. 
그는 주인의 딸 리디아와 사랑에 빠졌지만 이루지 못하고 강제로 농노 여자와 결혼해야만 했다. 
소로카는 정식으로 불만을 제기하지만 거부되었다. 
얼마 후 소로카는 제과실에서 목을 매달고 자살했다. 
그의 사랑하는 리디아 역시 곧 뒤따라 음독 자살했다. 

이 작품은 레페킨(Lepekhin) 귀족에 속한 탐보프(Tambov) 지방의 
스패스코이(Spasskoye) 저택과 부동산을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러시아 남부 지방의 전형적인 농민의 복장과 휴식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A Study in the House at Nikolai Milyukov's Ostrovki Estate, 1844. by Grigoriy V. Soroka. oil on canvas. 
54 x 6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 그림은 농노 화가 소로카의 소유자였던 지주 
페트로비치 밀류코프 (Nikolai Petrovich Milyukov)의 사무실을 묘사한다. 
방 뒤쪽에 두 개의 창문이 있다. 
트베리(Tver)의 열린 공간이 보이는 개구부를 통해 빛이 사무실로 들어온다. 


우리는 책상에 앉아 있는 사람의 위치에서 전체 그림을 본다. 
테이블에는 다양한 물건이 있다. 
시계, 주판, 가위, 지문 및 서류. 나폴레옹의 모습이 담긴 액자 등등. 
집 주인 밀류코프는 성격이 깔끔하고 현명할 것으로 추측된다. 
작품의 공간은 부동산 소유자의 아들인 코논 밀류코프(Nikolaevich Konon Milyukov 1835-1871)가 
손에 책을 들고 소파에 앉아 있는 소년의 모습으로 인상깊게 표현된다.

코논 밀류코프는 페트로비치 밀류코프의 셋째 아들로 자랐다. 
1853년에 그는 사역 장교로 복무했고 1860년에 중위 계급의 포병포대로 옮겨졌다. 
1863년 그는 주포 총국으로 임명되었다. 
1866년에 그는 소령으로 7대 벨로루시후사르 연대에 함장으로 이적한 후 얼마 뒤 해고되었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Reapers, Late 1820s. by Alexey G. Venetsianov. oil on canvas. 66,7 x 52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화가이자 판화가인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 (Alexei Venetsianov 1780~1847)는 
러시아 농민을 주제로 한 장르화의 선구자로 손꼽힌다. 
러시아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사립기숙학교에서 공부한 뒤 디자이너로 일했다.

1802년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 측량기사로 일하며 독학으로 회화를 공부했다. 
1820년대 초 공무원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가 생활 속의 장르화를 그렸다. 
미술 아카데미 등에서 전시회를 열었으며, 그의 많은 제자들은 '베네치아노프 파'를 형성, 
러시아 미술사의 주요한 풍속화가 그룹으로 성장했다. 
 베네치아노프는 사고로 길에서 비명횡사했다.

19세기 들어 농노 출신 화가가 늘어나자 마침내 화단에서도 
신분에 대한 차별이 노골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선봉에 선 사람은 미술아카데미 원장 올레닌이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아카데미에서 농노 출신 학생들을 추방하는 일에 적극 나섰다. 
아카데미 과정을 수료하고 외국 유학을 앞둔 학생들의 발목을 잡고 앞길을 막는가 하면, 
과정 중인 학생들은 지주에게 돌려보내 그들의 '신분에 걸맞은' 하인이나 요리사 등으로 일하게 했다.

이런 억압에 분노한 자유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였다. 
그는 하층 계급 출신들을 위한 작은 미술학교를 여는 것으로 나름의 대안을 모색했다. 
특히 1818년 아버지의 유산으로 트베리 현 사폰코보 마을의 땅을 사게 되자 
그곳에 학생들을 불러 모아 안정적인 교육을 행할 수 있었다.

시골 마을에 자리 잡은 것이 화가로서 베네치아노프에게는 큰 축복이었는데, 
바로 여기서 러시아 농민의 일상과 노동을 주제로 한 수많은 걸작들을 탄생시켰다. 
러시아 미술사는 베네치아노프를 러시아 미술사상 최초로 

농촌 세계를 본격적으로 형상화한 화가로 평가한다. 

베네치아노프는 농노들을 위한 미술학교를 세웠고, 소로카는 그곳에서 그림을 배웠다. 
농노에 대한 지배계층의 '평균적' 휴머니티는 매우 낮았지만, 

당시에도 'a few good men' 들은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을 착한 화가 베네치아노프. 
측량기사 출신으로 화가가 된 그는 당시 러시아 사회의 변혁을 꿈꾸던 
데카브리스트들과 교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데카브리스트의 영향으로 민중에게 봉사하는 예술가가 되고자 했던 베네치아노프는 
러시아 회화사에서 처음으로 농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화가이다. 
그의 그림은 흡사 밀레의 농촌 풍경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그 속에서 사회적 모순에 대한 치열한 번민과 문제제기를 찾아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사후인 1860년대에 “미술을 인민에게”라는 구호 아래 
러시아 화단을 뒤집어 놓았던 <이동파>의 정신이 그에게 닿아 있으며, 
바실리 페로프(1834~1882) 등이 꽃피운 러시아 풍속화의 원류도 

베네치아노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베네치아노프가 농노들을 위한 미술학교를 설립한 것은, 

1817년 A. 올레닌이란 냉혈한이 미술아카데미의 새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농노출신 학생들을 깡그리 추방한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아카데미에는 농노 신분의 학생들이 상당수 재학하고 있었다. 
그때 러시아 인구의 60% 이상이 농노였던 점을 생각하면 이는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농노 화가들이  잠시 신분을 잊고 

자유와 예술을 만끽하던 행복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올레닌에 의해 추방된 농노들은 다시 장원으로 돌아가서 

숙명처럼 고된 노동에 종사해야 했다. 
베네치아노프는 그들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그림을 가르치던 아카데미와는 달리 주변의 꽃과 가구, 실내장식을 스케치하며 

실제의 생활에서 부딪치는 대상들에 주목하도록 지도하였다. 

19세기 후반을 장식한 크람스코이와 레핀, 수리코프, 세로프, 브루벨에 이르면 
러시아의 그림들은 미학적 기준으로도 서구의 걸작에 뒤지지 않을 만큼 수려하다.
그러나 그 이전의 작품들은 주류로부터 때로 ‘키치 (Kitsch, 대중적 싸구려 문화)’로 
폄하될 만큼 세련되지 못한 점들이 있다. 
하지만 프랑스나 네덜란드의 회화와 러시아의 회화는 즐기는 방법이 달라야 하지 않을까.

19세기 전반까지의 러시아 그림은 비록 고급스럽지 못할지 모르지만 
그 배경과 내용에서 독보적인 역사성을 갖고 있다. 
모네나 고흐의 그림에서 거친 터치와 빛나는 색채를 몰역사적으로 즐기듯이,
19세기 러시아의 그림들로부터는 세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그 사회에서 어떻게 무르익어갔는지를 되새겨보는 것이 제 맛을 느끼는 방법이 아닐까.


미술 아카데미에서 쫓겨난 농노 화가들을 위해 트베르 지방의 시골에 학교를 세워 
그림을 가르쳤던 베네치아노프의 독특한 이력은, 당시 대부분의 동료화가들과는 달리 
그가 아카데미 출신이 아니라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그는 러시아 사회의 비주류로서 귀족들을 조롱하는 풍자화를 남기기도 한 사람이다. 
그러나 평화롭기만 한 그림 속 풍경이 시사하는 바처럼, 베네치아노프는 
사회적 모순을 깊이 인식하고 이를 시정하려는 투철한 의식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는 말자. 
그는 무엇보다 불행한 농노 화가들에게 어버이와 같은 사람이었으며, 
러시아 회화사에서 최초로 농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사람이고, 
파벨 페도도프(1815~52)를 거쳐 바실리 페로프(1834~82)에서 만개한 장르화(풍속화)를 
균형 있고 완전한 예술적 체계로 처음 정립한 사람이다. 
그것만 해도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는 우리가 주목할만한 화가인 것이다.

1820년대 말에 베네치아노프는 캐릭터가 삶의 스케치와 비슷한 작은 작품을 
계속 제작하면서 점차 일반화된 캐릭터의 비유적 특성을 지닌 대형 캔버스로 전환했다. 
그림은 본질적으로 베네치아노프의 창조적 유산에 많은 장르의 초상화이다. 
그러나 이미지는 강렬하고 그림같은 질감이 드러나며 번짐이 커지고 끈적거리게 된다. 
감상과는 거리가 먼 진지함과 성실함을 지닌 작가는 낭만주의 예술의 특징인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감정의 아름다움과 힘을 구현하고 있다.

작품 '리퍼(Reapers)'에서 어머니 손등에 있는 

나비를 바라보는 소년의 얼굴은 그의 기쁨을 말한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약간의 미소와 피로가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일이 끝난 후의 피로만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화가는 색상 대비와 이미지 정확도로 다시 재생되지만 약간의 부자연스러움은 여전히 ​​눈에 띈다.

 

Morning of a Landowner’s Wife (Landowner’s Wife Engaged in Housekeeping: 
Landowner's Wife Giving Flax to Peasant Women), 1823. by Alexey G. Venetsianov. oil on canvas. 
41,5 x 32,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베네치아노프의 이 작품은 평범하고 소박한 가구를 갖춘 집 주인과 집안의 일부를 묘사한다. 
이른 아침의 빛은 열린 창문의 좁은 가장자리를 통해 방으로 들어온다. 
테이블에는 실내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주인이 앉아 
위엄 있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농민 여성들에게 지침을 시달한다. 

그들 중 한 명은 무릎을 꿇고 붉은 천으로 싸인 양털꾸러미를 손에 들고, 
다른 한 명은 대화를 중단하고 시청자를 세심하게 바라보고 있다. 
농부 여성의 이미지에서 예술가는 차분한 존엄성을 전달한다. 
그림의 두 소녀는 젊은 지주보다 덜 중요하지 않다. 

전체 무대는 "고귀한 둥지"의 느긋하고 측정된 삶의 평화로운 평온함과 안락함으로 숨을 쉰다. 
말 그대로 삽화가 아니라 시적인 분위기를 지닌 “지주의 아침 (Morning of the Landowner)”은 
라린스(Larins)의 삶의 방식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불러일으킨다. 
오랜 전통에 따르면 이 그림은 사폰코보(Safonkovo)의 한 집에 있는 방에서 
베네치아노프의 아내 마르타 아파나시예브나(Martha Afanasyevna)를 묘사한다고 믿어졌다.

 

Studio of Artist Alexey Venetsianov in Saint-Petersburg, 1827. 
by Alekseyev Alexander Alekseevich. oil on canvas. 77 х 96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베네치아노프는 예술 아카데미와는 다른 자신의 방법으로 
농부의 삶을 묘사하기 시작한 러시아 최초의 화가 중 한 명이다. 
그는 농민 아이들을 가르쳤다. 
베네치아노프 학교의 예술 교육은 "매너의 혼합 없이" 자연을 쓰는 규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의 학생 알렉산더 알렉세예프(Alexander Alexeev)가 그린 이 작품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예술가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Alexei Venetsianov)의 작업장"은 
작가 자신을 포함한 젊은 화가들이 왼쪽에

러시아 민족 의상을 입은 소녀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묘사한다.

 

Winter Landscape (Russian Winter), 1827. by Krylov N. S. oil on canvas. 54 x 63,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러시아 예술의 첫 번째 겨울 풍경.
풍경은 작가 자신의 주도로 상트 페테르부르크 근교 토스노(Tosno) 인근 
니콜스코이(Nikolskoye) 마을의 삶에서 그 내용을 정리하고 작가가 선택한 장소에 
후원자의 도움으로 겨울에 작업할 수 있도록 오두막을 짓고 그렸다. 

크라이로브(Krylov)는 러시아의 겨울을 

"차가운 아름다움"으로 묘사한 최초의 러시아 예술가이다. 
예술가가 지정한 장소에서 상인 체르냐틴스키(Chernyatinsky, Chernyagins)는 
그를 위해 따뜻한 워크샵을 만들고 그림을 작업하는 동안 필요한 모든 것을 그에게 제공했다. 
그 후 체르냐틴스키는 "미래 재능의 성공"에 기여한 예술가 장려협회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그림은 일상적인 세부 사항에 대한 관심과 풍경, 

자연에 대한 인식의 무결성이 결합되어 매력을 느낀다. 
자연에 대한 충실함, 색상과 빛의 밝기로서의 아름다움에 대한 대중적인 이해는 
작품에 특별한 국가적 풍미를 부여하여 창작 당시부터 현재까지 

모든 전시회에서 끊임없는 성공을 보장한다.

 

The Major Makes a Proposal (Inspecting a Bride in a Merchant’s House), About 1851. by Pavel A. Fedotov. 
oil on canvas. 56 x 76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파벨 페도토프 (Pavel Andreyevich Fedotov 1815~1852)는 러시아 화가였다. 
그는 정신 병원에서 사망했을 때 겨우 37 세였다.
페도토프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제국 경비대 장교였다. 
당시 그의 동료들처럼 그는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플루트를 연주하고 미술 아카데미의 저녁 수업에 참석하여 회화에 집중했다. 
학생 시절 그는 특별히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육군에서는 장교와 
연대 장면의 초상화를 통해 연대 화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메이저의 결혼"에서 중매인은 신랑을 신부의 집으로 데려온다. 
당황한 딸은 달아나고 싶어하지만 어머니는 딸의 드레스를 잡고 있다. 
요리사는 쿨비야카(kulebyaka)를 가져오고 도우미는 와인을 가져온다. 
한 노파가 다른 방에 다가가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참견한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오는 중매인을 가리킨다. 

그림 속의 모든 캐릭터들 중에서 문 밖에서 서성이는 신랑 자신은 화가에게 가장 관심이 없다. 
구성의 중심에는 달아나는 신부와 그녀를 제지하려는 어머니가 있다. 
샴페인은 이미 의자 위의 쟁반에 있다. 
전면 앞에는 고양이가 손님을 씻어낸다. 

화가는 상인의 집에서 소란의 원인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인물로 배경을 그리고 있다. 
페도토프는 시청자가 무의식적인 느낌을 가지도록 방과 캐릭터를 배치하고, 
마치 창문 너머로 상인의 집에서 소동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듯 표현하고 있다. 
그림의 크기는 작지만 마무리는 매우 세심하다. 
이 작품에 대한 설명으로 페도토프는 유명한 "Racea"라는 시적 작품을 썼다. 

사진은 말한다 : 
"세상 사람들의 생활 방식에 대해
 다른 사람의 비용으로 다른 사람이 사는 방식,
그들은 스스로 일하기에는 너무 게으르고
그래서 그들은 부자와 결혼합니다. "

 

Portrait of N.P. Zhdanovich at the piano, 1849. by Pavel A. Fedotov. oil on canvas. 24.5 x 19.2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지다노비치 페트로브나 (Zhdanovich Nadezhda Petrovna )1836~1915)는 
1854년에 스몰리(Smolny)의 귀족 처녀를 위한 제국 교육협회에서 자랐다. 
그녀는 나중에 보병 장군이었던 핀란드 연대의  베르너(A. I. Werner)장교와 결혼했다. 

페트로브나는 스몰리 인스티튜드(Smolny Institute)의 학생 유니폼인 
흰색 앞치마가 있는 파란색 드레스로 묘사된다.
파란 드레스를 입은 소녀와 하얀 앞치마를 입은 소녀가 피아노 작품에 그려져 있다. 
페트로브나의 눈썹은 놀랍게도 살짝 들리고, 
그녀의 진지한 표정은 입술에 살짝 미소를 지어 흐릿하게 보인다. 
특정 구성 기술의 도움으로 아티스트는 시청자가 모델의 성격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중립적인 배경이 인물 주위에 약간 밝아져 
가벼운 공기 환경을 조성하는 동시에 캔버스에서 중앙 위치를 강조한다.

초상화는 자발성과 실행의 숙달로 구별된다. 
작지만 그림은 대담하고 활력이 넘친다. 
머리와 팔은 특히 명확하게 조각되어 있다. 
얼굴의 특징은 힘, 열정, 생동감과 동시에 모델 캐릭터의 부드러움을 나타낸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Threshing Barn, 1822~23. by Alexey G. Venetsianov. oil on canvas. 66,5 x 80,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베네치아노프(Alexey G. Venetsianov)의 이 작은 프로그램 캔버스를 고려할 때, 
우리는 농민들이 일상 업무로 바쁘게 지내는 오래된 탈곡장의 
낮게 돌출된 어두운 서까래 아래로 침투하는 것 같다. 

이 작품에서는 실제로 원근감이 그림을 지배한다. 
통나무와 광선으로 형성된 선이 하나의 소실점으로 조심스럽게 이동한다. 
작가는 또한 원근감 "이정표"로 수치가 필요하다. 
규모가 감소하면 공간의 깊이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작가가 자신의 건물에 있는 진짜 헛간 앞 벽을 잘라내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삶에서 그것을 칠하고 더 정확하게 조명을 전달한다. 

자연을 필요로 하는 "헛간" 작업은 아마도 1822년 여름에 시작되어 
1823년 여름에 사폰코보(Safonkovo)에서 계속되었다. 
1824년 4월 베네치아노프는 이 그림을 알렉산더 1세 황제에게 선물했고, 
4월 29일에 에르미타주 목록에 포함되었다. 
베네치아노프는 이 작품으로 3000 루블을 받았다.

 

Reaper, Mid-1820s. by Alexey G. Venetsianov. oil on canvas. 30 x 24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베네치아노프(Venetsianov)의 많은 작품과 마찬가지로 그림은 장르 초상화이다. 
젊은 농민 여성의 매력과 색다른 복장, 모습의 역동적인 반전, 그림에 감정적으로 
경쾌하고 축제적인 이미지를 주며 러시아 농민의 이상적인 정신적 상태를 상징한다.

 

A Peasant Boy Donning Bast Shoes, 1823~1826. by Alexey G. Venetsianov. oil on canvas. 
37 х 28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 작품은 베네치아노프의 장르와 초상화의 다소 전형적인 조합이다. 
1826~1827년 예술가 장려회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농민 구두"라는 그림이 전시되었다. 
그것은 19세기의 알려지지 않은 석판가에 의해 석판화되었다. 
젤렌트소프(K. A. Zelentsov)가 그린 그림의 사본은 트레치야코프 미술관 (State Tretyakov Gallery)에 있다. 

 

Sleeping shepherd, 1823~1826. by Alexey G. Venetsianov. Wood, oil. 27.5 x 36.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풍경 배경은 사폰코보(Safonkovo) ​​마을에 있는 베네치아노프의 집 창문에서 
보로지바(Vorozhba) 강의 전망을 나타낸다. 
이 그림은 예술가 장려협회에서 1826~1827 년에 처음 전시되었다.  
풍경 배경에서 전경을 "분리"하는 기술을 사용하면 풍경의 무한한 폭과 깊이를 느낄 수 있다. 
미묘하게 밝은 색상의 전환은 여름 더위에 의해 느려졌지만 깨지지 않고 
끝없이 다양한 삶의 흐름으로 인해 눈에 띄는 느낌을 준다. 

 

"Peasant children in the field" 1810s. by Alexey G. Venetsianov. oil on canvas. 38.5 x 30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베네치아노프의 농민 주제 그림 중 하나인 "현장의 농민들". 
줄거리는 단순하고 소박하며 평범한 일상 상황을 나타낸다. 
두 소녀가 현장에서 일하는 목자에게 점심을 가져온다. 
캔버스에는 고전적인 시골 풍경이 눈앞에 떠 오르고 여름날이 나타난다. 
들판의 무성한 녹색, 멀리 멀어져가는 들판, 나무로 자란 수평선, 창백하고 거의 투명한 하늘.

어린이 그림은 큰 크기로 작성되며 캔버스의 앞쪽 프레임에 가깝다. 
아이들은 옷이 좋지 않지만 깔끔하고 깨끗하다. 
밝은 회색 옷에는 얇은 벨트가 있고 소녀의 머리에는 파란색과 밝은 파란색의 숄이 있다. 
아이들은 단순한 인피부 신발을 신고 있다. 
분명하게 보이는 부드러움과 사랑인 아이들의 관계는 시청자를 매료시킨다. 
나이 많은 소녀는 소심하게 부끄러워 하며 양치기에게 빵을 건네준다. 
뒤에 서 있는 소녀는 앞에 소녀 어깨로 손을 부드럽게 안고 머리를 얹는다. 
소녀들은 손에 바구니를 들고 지칠 줄 모르는 일에 대해 말하고 부모를 돕는다. 
그들의 표정은 고요하다.

주변 풍경도 고요하고 평온함을 불어 넣는 것 같다. 
양 떼에서 몇 마리의 양만이 이 침묵을 깨뜨린다. 
캔버스에 묘사된 사건의 평범함과 그 규칙성에도 불구하고 전체 그림은 
서정적으로 영혼에 직접 침투하여 비정상적으로 따뜻한 인상을 남긴다. 

 

Cleaning the Sugar-beet, 1820, by Alexey G. Venetsianov. pastel on paper. 58 x 68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 작품은 시청자에게 노동의 중요성, 일상적인 업무의 중요성에 대해 알려준다. 
사실 우리 앞에는 농민의 그룹 초상화가 있다. 
작업은 양피지에 파스텔로 이루어진다. 
이 기술은 캔버스에 필요한 부부드러움을 제공한다. 
베네치아노프의 이 작품은 러시아 미술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림의 중앙에는 젊은 농부 소녀가 있는데, 맨발로 열심히 일을 하지만 약간 지쳐 있다. 
그녀는 잠시 일을 중단했다. 
아마도 그녀를 향해 기대는 남자가 불쾌한 소식을 전했는가 보다. 
오른쪽 구석에는 두 명의 소녀와 십대가 더 있고 배경에는 음식 한 그릇을 든 아이가 있다. 
양피지의 거의 전체 공간은 인간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 사이의 틈새에만 조건부 풍경 배경이 있다. 
황제는 예술가에게 "비트의 청소"를 위해 그 시간동안 기록적인 금액 천 루블을 지불했다. 
그림은 즉시 겨울 궁전의 다이아몬드 룸에 배치되었다.

 

A Peasant Woman with Scythe and Rake, 1824. by Alexey G. Venetsianov. oil on canvas. 
50 x 6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3,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영상] Hall 13 in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1, The White Hall.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2. Borovikovskiy, Matveyev, Martos.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View in Tivoli near Rome, 1819. by Fyodor M. Matveyev. oil on canvas. 99 х 72,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2.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표도르 미카일로비치 마트베예프 (Fyodor Mikhaylovich Matveyev 1758~1826)는 
러시아의 고전주의 풍경화가로 이탈리아 풍경 작품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러시아 최초의 풍경화가 중 한 사람이었다.

마트베예프는 제국 예술 아카데미 (Imperial Academy of Arts)에 입학하여 
1778년 Grand Gold 메달을 획득했다. 
그는 처음부터 풍경화가로 전문화되어 금메달을 받은 최초의 풍경화가가 되었다. 
마트베예프는 이후 아카데미의 재능 있는 졸업생들에게

흔히 있었던 것처럼 유럽 여행을 위한 펠로우십을 받았다. 
1779년에 마트베예프는 이탈리아로 여행하여 결국 그곳에 정착했다. 
그는 러시아로 돌아 오지 않았고 1826년 이탈리아에서 사망했다. 

마트베예프는 이탈리아와 주변 국가를 오가며 풍경을 그렸다. 
처음에 그는 이탈리아에 거주하는 러시아 귀족으로부터 의뢰를 받았다. 
마트베예프는 1789년과 1795년에 제국 예술 아카데미에 편지를 썼고, 
러시아로의 귀국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답장을 받지 못했다. 
1806년 마트베예프는 나폴리 주변에서 그린 그림을 아카데미에 보냈고 학자의 칭호를 받았다. 

마트베예프는 유화와 여러 그래픽 작품을 만들었다. 
대부분의 그림은 고전주의의 엄격한 규칙에 따라 만들어졌다. 
그는 색채주의자로서 보수적이며 제도사로서 훌륭한 자연의 이상적인 그림을 그렸다. 
규모를 나타내기 위해 풍경에는 ​​항상 사람들이 있다. 
마트베예프의 풍경은 사진의 정밀도로 원래 풍경을 나타내지 않는다. 
대조적으로 그의 그림은 낭만주의에 훨씬 더 치우쳐 있으며 
실제로는 러시아 최초의 낭만주의 풍경일 수 있다.

이 작품 '로마 근교 티볼리의 폭포'에서 티볼리(Tivoli)는 로마에서 24km 떨어진 
테베로네(Teverone) 강에 있는 라치오(Lazio) 지방의 중앙에 있는 도시이다. 

 

The Imatra Falls in Finland, 1819. by Fyodor M. Matveyev. oil on canvas. 98.5 х 73,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2.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작가 마트베예프는 고전주의 시대의 뛰어난 풍경을 보여준다. 
마트베예프는 풍경 구성을 엄격한 계산에 종속시키고 
계획적으로 분할하여 인위성과 장식 요소를 도입했다.


이마트라(Imatra)는 핀란드의 부옥사(Vuoksa) 강에 있는 폭포이다. 
19세기 초 낭만주의 시대에 폭포가 있는 풍경은 장관의 모습뿐만 아니라 
이미지의 상징적 의미로도 유명했다. 
여기서 폭포는 빠르게 흐르는 시간의 강과 관련이 있다. 

 

Portrait of Skobeyeva, Wife of the Smolensk Landlord D. Skobeyev, The second half of the 1790s.
by Vladimir Borovikovsky. oil on canvas. 72 х 57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2.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블라디미르 보로비코프스키 (Vladimir Lukich Borovikovsky 1757~1825)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저명한 러시아 제국 예술가였다. 
그는 19세기 초에 캐서린 대제 (Catherine the Great)의 궁정에서 봉사했으며 
러시아 제국의 초상화를 지배했다.

보로비코프스키는 처음 부친 밑에서 종교화를 그리고 있었으나, 페테르부르크로 옮겨 
드미트리 레비츠키 (Dmitry Levitzky 1735~1822) 밑에서 일을 계속했다. 
종교화에서 초상화로 바꾸고 고전주의의 틀을 벗어나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을 표현하여 러시아 초상화에 한 시대를 구획했다. 

​30세의 나이에 그는 페테르부르크로 옮겨 제국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레비츠키 (Dmitry Levitzky)와 오스트리아 화가 
요한 람피 (Johann Baptist Lampi 1751~1830)에게서 개인 레슨을 받았다.
그는 종교화에서 초상화로 바꾸어, 고전주의의 틀을 벗어나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을 표현하여 러시아 초상화에 한 시대를 구가했다. 

1795년에 보로비코프스키는 학자로 임명되었다 . 
그는 유명한 인물 화가가 되어 평생 약 500 개의 초상화를 창작했고 
그 중 400여 작품은 21세기까지 살아 남아 있다. 
그는 자신의 스튜디오를 가지고 있었고 
종종 초상화의 덜 중요한 부분을 페인트하기 위해 조수에게 의존했다. 
그의 시터에는 제국 가족, 예의, 장군, 많은 귀족, 러시아 예술계 및 문학계의 인물이 포함되었다. 
그의 초상화의 대부분은 친밀한 스타일이다.

이 작품 스코베예바(Skobeyeva)의 초상화에서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보로비코프스키는 이미 확립된 구성 계획을 사용했다. 
팔을 교차시킨 뚜렷한 초상화 특징이 있는 모델이 풍경 배경에 밝은 드레스로 묘사된다. 
큰 특징을 가진 개방적이고 활기찬 얼굴은 결단력과 용기를 표현하며 
묘사된 사람의 전기 사실에 의해 완전히 확인된다. 

스코베예바(Skobeyeva)는 크론스타트(Kronstadt) 선원의 딸이자 제자이며 
캐서린 대제(Catherine II)의 국무장관인 크로쉬친스키(D. P. Troshchinsky)가 좋아했다. 
하지만 모호한 입장에 저항하기 위해 스코베예바는 보호자에게서 도망쳐 
스몰렌스크(Smolensk)의 가난한 지주와 결혼한 버전이 있다. 

 

Portrait of Ekaterina Arsenieva, Pupil at the Smolny Finishing School, Mid-1790s. 

by Vladimir Borovikovsky. oil on canvas. 71,5 x 56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2.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 초상화는 명확한 형태의 가소성, 절묘한 그림 같음, 완벽하게 개발된 
통풍이 잘 되는 분위기와 같은 높은 그림 품질로 구별된다. 
진주 팔찌와 사과를 손에 든 하얀 드레스에 군 장군의 딸이 그려져 있다. 
연구원들이 "단코 얼굴을 가진 러시아 금성"이라는 별명을 붙인 
밝고 경쾌한 예카테리나 아르세니예바(Ekaterina Nikolaevna Arsenyeva 1778~?)이다. 
이 초상화는 1790년대의 일련의 "감상적인" 여성 초상화에 속한다.

예카테리나 아르세니예바는 이즈마일의 습격에 참여한 아르세니예브 (N. D. Arsenyev) 소장의 장녀로 
그녀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스몰니 인스티튜트(Smolny Institute)에서 교육을 받고 자랐다. 
1796년 11월 23일 졸업과 함께 그녀는 마리아 페오도로프나 황후에게 영예의 시녀를 받았다. 
1800년 11월 4일 그녀는 실제 주 의원인 코즐로프(P. F. Kozlov)와 결혼했다

 

Portrait of Prince Alexander Kurakin, 1799. by Vladimir Borovikovsky. 

oil on canvas. 178 x 137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2.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알렉산더 쿠라킨 (Alexander Borisovich Kurakin 1752~1818)은

러시아의 정치가 및 외교관의 일원이었다. 
모스크바에서 피터 대제와 가까운 동료였던 보리스 쿠라킨 (Boris Kurakin )의 증손자로, 
러시아 대사 보리스 알렉산드로비치 쿠라킨(Boris Alexandrovich Kurakin)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 1764년에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그는 미래의 러시아 황제 폴 1세인 대공 (Grand Duke) 파벨 페트로비치와 친해졌고 
그의 가장 신뢰받는 친구 중 한 명으로 남았다. 
하지만 이 우정은 당시 통치하던 캐서린 2세 황후의

승인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쿠라킨은 해외로 떠나야 했다. 
1776년에 그는 스웨덴 왕립 과학아카데미의 외국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캐서린 2세가 사망한 후 쿠라킨은 1796년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고 
1796년 부총장이 되어 경력을 다시 시작했다. 
알렉산더 1세 쿠라킨은 1806년 비엔나에서 러시아 대사가 되었다. 

 

Portrait of Olga Kuzminichna Filippova (1772-1829), 1790. by Vladimir Borovikovsky. 

oil on canvas. 66.5 x 51.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2.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화가 블라디미르 보로비코프스키는 그의 생애 동안 약 500여 점의

초상화 작품을 만들었으며 그 중 400 여 점이 우리 시대까지 남아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올가 쿠즈미니치나 필리포바 (Olga Kuzminichna Filippova 1772~1829)를 비롯, 
보로비코프스키으로는 황실 가족, 궁정 귀족, 장군 및 예술 및 
문학계의 사람들이 광범위하게 포함되어 있다. 
많은 초상화는 스타일에 따라 기밀이 유지된다.

 

Portrait of Alexandra Kokorin, 1769. by Dmitry Grigoryevich Levitsky. 

oil on canvas. 134 x 102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2.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알렉산더 필리포비치 코코리노프( Alexander Filippovich Kokorinov 1726~1772)는 
시베리아 출신으로 러시아의 뛰어난 건축가이자 교육자였다. 
그는 토볼스크 정부 서기의 가족으로 알렉산더 코코리놉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신부였다. 
알렉산더는 14세에 아르테미 볼린스키 (Artemy Petrovich Volynsky 1689~1740)의 
음모에 연루되어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추방된 자칭 건축가 
요한 블랭크 (Johann, Karl Blank의 아버지)와 훈련을 시작했다. 
1741년 엘리자베스가 사망하자 볼린스키 사건의 생존자들은 사면되었고 
요한 블랭크는 모스크바로 돌아와 코코리노프를 데리고 갔다. 

요한 블랭크가 사망한 후 1745년 알렉산더 코코리노프와 칼 블랭크(Karl Blank)는 
모스크바에서 예술과 건축을 전공했으며, 당시 엘리자베탄 바로크의 
주요 모스크바 건축가이자 모스크바 크렘린에 있는 건축 학교의 학장이었다. 
그는 모스크바 대학에서 수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1754년 코코리노프는 주니어 건축가로 전문 시험에 합격하고 
프란체스코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의 직원에 합류하여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모스크바의 설립자 이반 슈발로프 백작과 접촉했다. 

엘리자베스 황후는 아카데미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블 론델의 계획을 적용하는 임무는 이미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슈발로프(Shuvalov)의 집을 설계한 코코리노프에게 맡겨졌다. 
코코리노프는 바로크 스타일로만 훈련 받았으며 블 론델의 
프랑스 신고전주의 디자인에 어려움을 겪었고 1759년 슈발로프는 
코코리노프를 돕기 위해 다른 프랑스인을 고용했다. 

1761년 코코리노프는 아카데미의 이사로 임명되었지만 
1765년이 되어서야 교수가 되었다. 
건축가들이 그들의 제안을 마무리하는 동안 러시아는 표트르 3세의 
짧은 통치와 살해로 캐서린 2세가 계승하게 되었다. 
새로운 황후는 슈발로프(Shuvalov)를 그의 시골에 있는 영지로 사실상 유배를 보냈고 
이반 베츠코이(Ivan Ivanovich Betskoy 1704~1795)를 아카데미의 새로운 회장으로 임명했다. 

1764년 3월 18일, 캐서린 황후는 본격적인 건설 자금 조달을 승인하고 
코코리토프가 이끄는 건설위원회를 설립했다.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건축 직업이 건축 설계와 건축 관리로 나뉘어졌다. 
코코리토프는 1772년 사망했다. 
확인되지 않은 의견으로 그가 건축 비용 관계로 자살했다는 설이 있다. 

화가 레비츠키 (Dmitry Grigoryevich Levitsky)는 의식 초상화, 

인간 내면의 가치의 중요성과 자존심을 재정의하여 표현하고 있다. 
코코린(Kokorin)은 그 자체의 생생함과 단순함으로 홀로 인상적인 위치에 서 있다. 
그는 값비싼 선장의 바람을 보며 손으로 문양의 뒤쪽에 손을 얹고 있다. 
전체 검은 담비는 아름다운 새틴 카프탄으로 손질되고
금으로 수 놓은 캐미솔은 가장 얇은 색조로 표현된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2. Borovikovskiy, Matveyev, Martos.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Portrait of Countess Anna Bezborodko and her Daughters Lyubov and Cleopatra, 1803.
by Vladimir Borovikovsky. oil on canvas. 134 x 104.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2.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 작품은 가족 관계의 신성함이라는 주요 아이디어에 전념한다. 
초상화의 명확한 그림, 형태의 플라스틱 성형, 지역 색상은 

19세기 초 러시아 회화의 고전적 경향을 증언한다. 
그러나 동시에, 어머니의 머리에 "barbet"(골판이 있는 넓은 린넨 리본)로 만든 세련된 모자, 
자매의 헤어 스타일, 폭풍우가 치는 하늘을 배경으로 묘사된 여 주인공의 가벼운 드레스에는 
초기 낭만주의 시대의 시각 예술에 대한 화가의 의도가 드러나 있다.

안나 일리니히나 베즈보로드코 (Anna Ilyinichna Bezborodko 1766~1824)는 
베즈보로드코(I. A. Bezborodko) 백작의 부인이다.
쿠쉘레바 리우보브 일리니치나 (Kusheleva Lyubov Ilyinichna 1782~1809)는 
안나와 베즈보로드코 백작의 장녀로 스몰니 인스티튜트(Smolny Institute)에서 교육을 받고
1797년 마리아 페오도로프나 황후의 법정 시녀로 임명되었다. 
1799년부터 그녀는 쿠쉘레브 (G.G. Kushelev 1754-~1833) 백작과 결혼했다. 
그녀의 형제자매가 조기 사망하고 남성 계에서 베즈보로드코(Bezborodko) 백작의 자손이 
절손됨에 따라 그녀의 아들 알렉산더 (Alexander 1800~1855)가 1816년에 
쿠쉘레브 베즈보로드코 (Kushelev-Bezborodko) 백작이라는 권리를 이어 받았다.

베즈보르코 클레오파트라 일리니치나(Bezbordko Cleopatra Ilinichna 1787~1840)는 
안나와 베즈보로드코 백작의 막내 딸이다. 
1811년부터 그녀는 역사와 수집에 대한 열정으로 유명한 
로바노브 로스토브스키 (A. Ya. Lobanov-Rostovsky 1788~1866) 대장과 결혼했다. 

 

Catherine II Promenading in the Tsarskoye Selo Park 
(With the Obelisk to Count Pyotr Rumyantsev's Victories in the Background)
Late 1800s~ early 1810s. by Vladimir Borovikovsky. oil on canvas. 134 x 104.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2.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차르스코예 셀로(Tsarskoye Selo) 공원에서 산책하는 캐서린 2세의 초상화"에서
캐서린 대제는 왕실의 후광이 아니라 사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그녀는 때때로 자신을 "카잔(Kazan) 지주"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캐서린 대제는 지팡이에 기대어 차르스코예 셀로(Tsarskoye Selo) 공원의 골목을 천천히 산책한다. 
그녀 옆에는 헌신적인 개, 이탈리아 그레이하운드가 있다.

화가 보로비코프스키(Borovikovsky)를 그의 전임자와 구별하는 초상화 장르의 
작업에 대해 첫 번째 예로 황후 이미지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해석은 
작가가 망토와 모자를 쓴 캐서린 대왕을 “집에서” 선물했다는 것이다. 

이 초상화에서 류머티즘 때문에 지팡이에 기대고 있는 65세의 황후는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차르스코예 셀로 공원의 골목을 따라 산책을 한다. 
이탈리아 그레이하운드가 그녀와 동행한다.

알렉산더 골리친(Alexander Golitsyn) 왕자의 회고록에서 보면 
캐서린 대제가 화가를 위해 포즈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화가 보로비코프스키는 산책 중이나 궁전의 출구에서 캐서린 대제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따라서 황후의 얼굴에는 개별적인 특징이 없으며 그녀의 표준 이미지와 거의 유사하지도 않다. 

황후는 이 초상화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반복과 복사로 널리 퍼졌다. 

 

Portrait of Mikhail Trakhimovsky, Military Councillor and Godfather of Nikolai Gogol, 1802.
by Vladimir Borovikovsky. oil on canvas. 67 x 58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2.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트라키모프스키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Trakhimovsky Mikhail Mikhailovich)는 
인도주의적 박애주의를 지향하는 우애 단체인 프리메이슨(Freemasons)과 관련된 
유명한 우크라이나 자선가 의사인 트라키모브스키(M.Ya.Trakhimovsky)의  아들로 
마주모브스키(P. G. Razumovsky) 백작의 사생 딸인 안나 페트로브나(Anna Petrovna)와 결혼했다. 

 

Portrait of Major General Fyodor Borowsky, 1799. by Vladimir Borovikovsky. 

oil on canvas. 80,5 x 62,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2.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페도르 아르테미예비치 보로브스키 (Fedor Artemievich Borovski 1746~1805)는 

전투 장군으로 알렉산드르 수보로프(A. V. Suvorov 1729~1800),  

미하일 쿠투조프 (M. I. Kutuzov 1745~1813) 및 

니콜라이 레핀(N. V. Repnin 1734~1801)의 동료이다. 
 
1796년부터 모질레브(Mogilev) 근처에 주둔한 구사르 연대의 사령관이었고
1797년에 그는 거짓 비난으로 재판을 받았으며 그 결과 사임했다. 
1798년 3월 그는 체포되었지만 곧 특별위원회의 판결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은퇴하는 동안 파벨 1세(Paul I)의 개인 법령에 따라 그는 유니폼 착용 허가를 받았다. 


작가 보로비코프스키는 병역 상을 수상한 성 조지 훈장과 함께 
수 놓은 후사르 유니폼을 입고 보로프스키 장군을 묘사했다. 
그는 용감하지만 동시에 오히려 평범한 사람으로 관객 앞에 나타난다. 
그런 특성이 들어가는 것은 아마도, 초상화의 일반적인 경쾌한 음색에 
약간의 불일치가 있지만 무엇보다 작가의 예리한 관찰의 증거로 사용된다. 
활발한 머리의 회전은 초상화에 잘 알려진 애정을 준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2. Borovikovskiy, Matveyev, Martos.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Portrait of Paul I, 1800. by Vladimir Borovikovsky. oil on canvas. 266 х 202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2.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파벨 1세 (Paul I 1754~1801)는 로마노프 왕조의 9번째 군주로, 
표트르 3세와 예카테리나 2세의 아들이다. 
그러나 그의 생부가 누군가에 대해서는 계속 의혹이 제기되었다.

1754년 10월 1일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여름 궁전에서 러시아의 황태자 
표트르 표도로비치 대공(훗날의 표트르 3세)과 황태자비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훗날의 예카테리나 2세) 사이에서 태어났다. 
파벨의 출생에 대해선 원래 표트르 예카테리나 부부의 자식이 아니라, 
예카테리나와 그 애인인 세르게이 살티코프 백작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지만 별로 근거는 없다.

파벨은 아내인 다름슈타트의 빌헬미나(나탈리야 알렉세예브나)가 죽자 
1776년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러시아 이름은 마리아 표도로브나)와 재혼했다. 
1783년 어머니에 의해 가트치나의 영지에서 살게 된 그는 그 곳에 작은 궁정을 갖고 
영지를 관리하며 사병을 훈련시키고 정부 개혁을 계획하는 일에 몰두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파벨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알렉산드르 1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려 했으나 갑작스레 서거하여 1796년 파벨이 제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파벨 1세는 자신의 어머니 때문에 아버지가 살해되었고 따라서 표트르 3세를 
계승할 권리를 그녀가 침해했다는 피해의식 때문에 정신적으로 불안한 생활을 해 왔었다. 
그는 황태자인 동시에 정적으로서 항상 어머니의 감시에 시달려 왔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것이라면 모두 다 혐오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총애하던 신하와 측근들을 아무 이유 없이 미워하여 
국내정치와 대외정치의 정책 전반을 모두 거부하였다. 


이러한 과거의 쓰라린 경험의 영향으로 1797년 그는 법령을 발표하여 
제위계승법을 맏아들 상속의 원칙으로 확립했다. 
또한 프랑스의 혁명 사상과 투쟁을 더욱 거부하였고, 국내로 들어오는 
모든 사상 서적을 금지시켰으며 프랑스풍의 옷도 입을 수 없게 했다. 
이렇게 그의 통치 방식은 엄격하고 혹독한 규제로 일관되었다.

그러나 그는 음울하고 변덕이 심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그가 시행한 여러 정책들 간에 일관된 노선은 하나도 없었다. 
예를 들면 영지 경작을 위한 농노들의 노동 부역 일수를 주 3일로 줄었다. 
이는 사유지에 거주하는 농노들의 강제 노동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서 시행한 정책이었지만, 
반면 과거보다 더 많은 12만 명의 황실령지 농민을 지주 귀족에게 양도하여 
결과적으로 농노의 수를 늘려놓은 식의 정책이 되고 말았다. 
파벨 1세는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그 이유는 귀족들에게 왕권신수설을 내세우며 일방적인 충성을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1798년 파벨 1세는 프랑스와 맞서는 나라들과 동맹을 맺었고, 
러시아의 군대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군대와 함께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1799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다시 프랑스를 장악하게 되자 
그는 영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사실 파벨 1세는 아버지 표트르 3세만큼은 아니지만 약간의 정신 질환자의 기질이 있었다. 
파벨 1세가 사람들의 외모만 보고 판단해 잘 생겼다는 이유로 
무능한 사람들을 관료로 세우는 일이 있었고, 귀족들의 특권 중 
여러 개의 특권을 박탈하면서 귀족들의 불만을 갖게 되었다.

1801년 3월 23일 새벽, 파벨 1세는 침실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버닝젠 백작의 개인 소유 군인으로 추정되는 군인들이 

파벨 1세의 침실에서 들어와 퇴위를 강요하였다. 
이에 파벨 1세는 군인들에게 크게 화를 냈고, 군인들은 그 자리에서 파벨 1세를 처형하였다. 
일설에는 이에 아들 알렉산드르 1세가 동의했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Portrait of Murtaza Qoli Khan, 1796. by Vladimir Borovikovsky. 

oil on canvas. 284 х 189.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2.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모르테자 콜리 칸 카자르 (Morteza Qoli Khan Qaja 1750~1798)는 페르시아 카자르 왕조의 
왕자이자 아가 모하마드 칸(Agha Mohammad Khan 1742~1797)의 형제였다. 
18세기 중반, 아프샤르 제국의 창시자 나디르 샤(Nader Shah 1688~1747)가 살해된 후 
광범위한 위기가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결국 수십 년의 잔드(Zand) 시대 통치 끝에 카자르(Qajars) 부족의 
아가 모하마드 칸(Agha Mohammad Khan)이 승리하여 이란의 새로운 왕이 되었다. 

동일한 역사 과정과 관련이 있는 것은 러시아의 역할이었다. 
러시아는 거의 동시에 사파비족의 몰락과 1722~1723년의 

러시아-페르시아 전쟁 이후 이란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러시아의 정치적 야망은 강력한 네이더 샤(Nader Shah 1698~1747)가 

등장했을 때 멈췄지만, 1747년 네이더가 사망한 후 다시 시작되었다.

1787년 아가 모하마드 칸과 캐서린 대제 (Catherine II) 정부 사이에 
합의에 도달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가 있었다. 
그 후 러시아는 이란의 왕좌에 차리차의 가신으로 임명할 계획이었던 
그의 반란 형인 모르테 자 콜리를 상대하기로 결정했다. 
동생에게서 도망친 모르테자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왔는데 
그곳에서 페르시아에 대한 정치적 목표를 추구했던 캐서린 2 세 황후에게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캐서린은 1796년 원정까지 계획을 연기했다 .

모하마드 하산 칸 카자르 (Mohammad Hasan Khan Qajar 1715~1759)는 
1740년대 초에 아스타라바드(Astarabad)에서 쫓겨났지만 
1747년 네이더 샤가 사망한 후 샤루흐 아프샤르(Shahrukh Afshar)에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화가 블라디미르 보로비코프스키 (Vladimir Borovikovsky 1757~1825)는 
1825년 4월 6일, 갑자기 사망하여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알렉산더 네프스키 수도원의 나사로 묘지에 묻혔다.

 

[영상] Hall 11~12 in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임경석의 역사극장

1954년 그를 죽인 건 빨치산일까 국군일까

 

일제 때 혹독한 고문으로 하반신 장애 입었지만 다시 비밀결사 조직한 박영발…
6·25전쟁 발발로 늦깎이 러시아 유학 중단하고 빨치산으로

 

경북 봉화군 내성면 화천리 176번지 박영발 생가. 임경석 제공

 

‘피살 51년 만에 발견된 빨치산 비밀 아지트의 주인공’에서 이어짐

 

박영발이 앉은뱅이가 될 정도로 가혹한 고문을 당한 까닭은 무엇일까. 체포된 다른 동료들도 비슷한 고초를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독 그에게 혹독함이 부가된 이유가 있었다. 경찰 문서에 그 정황이 암시돼 있다. 동대문경찰서장이 작성한 검사국 앞 송치의견서에 이런 기록이 있다.

 

“박영발은… 소지하고 있던 서신을 삼키려고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뒤이어 정길성의 주소에 대해 취조를 받자, …파고다공원 5층탑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는 등 거짓말을 했다. 정길성이 잠복한 주소를 알면서도 그를 도망케 할 목적으로 사실을 공술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그 당시에는 정길성의 소재를 놓쳐서 체포할 수 없었다.”1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을 떠날 즈음에 촬영한 36살 박영발. 임경석 제공

 

비밀 서신 삼키려다 미수… 혹독한 고문

 

피의자의 허위 진술에 농락당한 일본 경찰의 분노가 선명히 떠오른다. 박영발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편지지를 씹어 삼키려 했다. 동료의 거처를 감추고자 거짓말도 했다. 서슬이 시퍼런 일본 경찰에 용납될 수 없는 행위였다. 그의 거듭된 기만행위로 경찰은 주요 피의자를 놓치고 말았다. 경찰은 그를 용서하지 않기로 결심했던 게 틀림없다.

 

박영발은 대가를 치렀다. 1932년 9월2일 체포된 지 한 달 만에 피투성이가 되어 동료의 등에 업혀서 경찰서 문을 나와야 했다. 그뿐인가. 앉은뱅이가 된 채로 4년이나 고향에서 갇혀 지내야 했다. 이 참혹한 사건은 박영발이 20살 때 겪은 일이다.

 

1936년 5월 다시 걸을 수 있게 된 박영발은 생업의 길로 나아갔다. 당시 그는 한 가족의 가장이었다. 16살 되던 1928년 이미 부모의 뜻을 좇아 2년 연상의 아내와 혼인식을 올렸다. 그는 어린 자녀 하나와 부친에게서 소박맞은 어머니를 부양해야 했다.

 

박영발은 봉화읍내 인쇄소에 취직해 2년간 문선공으로 일했다. 하지만 벌이가 시원찮았던 것 같다. 그는 대도시로 향했다. 만주를 거쳐서 중국 북경으로 갔다. 그곳에서 1년 8개월 간 동향 사람이 경영하는 양복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이어서 1940년 서울로 되돌아와 제화공장에서 4년 8개월 간 경리 사무직으로 근무했다.

 

“1944년 7월에 정재철, 신정균 등 동무와 함께 적은 크룹을 조직하였다. 처음에는 ‘무명 크룹’으로 그 후 혹은 ‘서울 크룹’이라고도 하였다. 책임자는 정재철 동무이며 나는 조직을 담당하였다. 영월탄광의 박항택, 영주의 김제욱, 대구의 김일식, 부평조병창 공사장의 한종일 등 동지를 통하여 조직을 키우기에 힘썼다.”2

 

박영발이 비밀결사에 다시 가담한 것은 32살 때인 1944년 7월이다. 해방되기 1년쯤 전이다. 조그마한 ‘크룹’이었다고 한다. 크룹이란 러시아어 클루프(клуб)에서 온 외래어로 영어의 클럽(club)에 해당한다. 클럽과 그 일본식 음역어인 구락부란 말이 주로 취미나 문화적 코드를 같이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가리키는 맥락에서 사용되는 데 반해, 크룹은 당조직이나 정치단체의 한 형태를 가리키는 뉘앙스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은 한 무리의 비밀운동 참가자들이 둘 이상의 소조직으로 나뉘어 일정한 연계를 갖는 조직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됐다. 하나의 독립적인 비밀단체를 가리키는 크루조크(소조)와 구별됐고, 다수의 세포단체와 그를 총괄하는 집행부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그루파(그룹)와도 달랐다.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생으로 추천하기 위해 남로당 부위원장 박헌영이 작성·서명한 박영발 평가서. 1948년 7월31일자. 임경석 제공

 

탄광과 무기공장에서 노동자 조직화

 

비밀결사 구성원들은 어떤 사람이었나. 박영발의 기록에는 구성원이 7명 나온다. 더 있겠지만 그중 역할이 뚜렷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가운데 4명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30대 초중반이었다. 또 20대에 사회주의운동에 참가한 공통 경력이 있었다. 다들 적색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운동 참가자였다. 출신지의 공통성도 눈에 띈다. 각각 영주(1명), 봉화(2명), 대구(1명)였다. 다들 경북 출신자였다.

 

비밀단체 ‘서울 크룹’의 책임자는 정재철이었다. 그는 12년 전 고문으로 몸이 망가진 박영발을 업고 나왔던 바로 그 사람이다. 박영발은 조직부 책임자 역할을 맡았다. 그가 역점을 둔 분야는 노동자 조직이었다. 특히 노력을 기울인 곳은 둘이었다. 하나는 영월탄광인데 이곳에는 수천 명의 탄광 노동자가 전시 에너지 공급을 위해 동원돼 있었다. 다른 한 곳은 부평조병창이었다. 이곳은 1939년 설립된 ‘인천육군조병창’이란 명칭의 대규모 무기공장으로서 일본의 대외 침략전쟁을 뒷받침하는 조선병참기지화 정책의 상징이었다. 그곳에는 1만 명 이상의 조선인 노동자가 일하고 있었다.3

 

전쟁 말기에 접어들자 무기 생산 능력 확대를 위해 조병창 인근에는 토목·건설 공사가 쉼 없이 계속됐다. 그 공사장이 서울 크룹의 조직을 확대하는 무대가 됐다.

 

비밀결사 결성 이후 근 1년 만에 핵심 멤버들이 경찰에 붙잡히는 위기가 찾아왔다. 창립 멤버 신정균이 1945년 5월 체포된 데 이어, 책임자 정재철과 대구 조직을 담당했던 김일식이 검거됐다. 하지만 이내 8·15 해방이라는 천운이 따랐다. 체포된 이들은 풀려났고, 비밀결사 조직은 유지됐다.

 

해방 후 불과 10일 만에 박영발과 동료들은 조선공산당재건준비회와 연결됐다. 사회주의 진영에서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그룹과 합류한 것이다. 박헌영이 이끄는 이 대열과 결합한 것에 박영발은 진정으로 기뻐했다. 과거에는 소규모 경험주의적인 조직운동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이제 이론과 사상적 결핍을 극복하고 체계적으로 올바른 조직 활동을 할 수 있게 됐노라고 자부했다. 그리하여 그해 9월20일 조선공산당에 입당하고 당증번호 1168번을 받았다.

 

모스크바 당학교에서 발급한 1950년 7월25일자 박영발 성적표. 임경석 제공

 

36살 모스크바 유학… 최상 레벨 성적

 

박영발은 합법 대중운동에도 진출했다. 해방 전부터 관계해오던 부평 지역 중심의 토건노동조합운동이 기반이 됐다. 해방되던 그해 9월 이미 경성토건노동조합을 설립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11월에는 전국 조직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결성에 참여하고 서울지방평의회 부위원장 겸 중앙위원으로 취임했다. 전평은 그의 주된 활동 거점이었다. 1947년 2월에는 중앙상임위원회 조직부 부책임자 직위에 올랐다.

 

비밀 당조직 활동도 열심히 했다. 입당과 동시에 토건세포 책임자가 됐고, 머지않아 서울시당 중구위원회 선전책, 서울시당 노동부 부책임자 역할을 맡았다. 나중에는 중앙당 노동부 소속 실무 간부로까지 진출했다. 당내에서도 노동조합 관련 직책에서 일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격렬한 대중투쟁을 지휘한 경력도 있었다. 그는 1946년 9월 총파업과 1947년 3·22 총파업 당시 두 차례에 걸쳐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 총무부 책임자를 지냈다. 전국적 총파업 투쟁을 중앙 지도부의 일원으로서 진두지휘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박영발은 해방 이후 정국에서 당과 노동조합 양 부문에서, 그리고 총파업 투쟁의 지휘 방면에서 없어서는 안 될 위치를 점했다.

 

이 때문에 그는 장래 당조직을 이끌 중견 지도자로 지목받았다. 최고위 간부 교육을 이수할 자격이 있다고 평가받은 것이다. 1948년 7월 그는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길에 올랐다. 36살 다소 늦은 나이였지만, 모스크바 조선노동당 간부학교 입학 대상자로 추천됐다. 부위원장 박헌영이 서명한 평가서가 남아 있다. 거기에는 박영발이 노동자들을 열성적으로 조직해왔고, 민주조선 건설 사업에 헌신했음을 인정한다는 문장이 쓰여 있다.4

 

6·25전쟁이 아니었다면 그의 유학 기간은 더 길었을 것이다. 그의 수학 기간은 1948년 9월15일부터 1950년 7월1일까지다. 2년 동안 그가 거둔 학업 성적표가 있다. 박영발은 도합 14개 과목을 수강했다. 시험 점수가 명시된 12개 과목 가운데 10개 과목에서 5점 만점을 받고, 2개 과목에서 4점을 받았다. 최상 레벨의 학업성적을 올렸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박영발은 전쟁이 발발한 고국으로 급히 되돌아왔다. 러시아 유학에서 돌아온 박영발에게 주어진 보직은 전라남도당 위원장이었다. 그는 북한군 제6사단이 전남 광주를 점령한 뒤 1950년 8월 초 임지에 부임했다.

 

3월19일 vs 2월21일 두 개의 사망일은 왜?

 

박영발의 사망 일자에 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그중 하나는 1954년 3월19일 국군 토벌대에게 교전 중 사살됐다는 기록이다. 사망 직후 신문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4인조로 이뤄진 국군 수색대가 반야봉 일대에서 작전하던 중 ‘무장공비’들이 은신한 동굴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에 박상옥 중사가 단독으로 동굴 속에 돌입해 공비 3명을 사살했는데 그중 하나가 재산(在山) 공비를 지휘하던 박영발이었다는 것이다. 박 중사는 이 전공으로 금성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5

 

또 하나의 견해는 박영발 사후 51년이 지난 뒤에야 나왔다. 빨치산 동료였던 박남진이 박영발 죽음의 진상을 언론에 공개적으로 증언했다. 그에 따르면 박영발의 사망 일자는 1954년 2월21일이다. 전투 중 치명상을 입고 절망감에 빠진 한 동료가 자포자기 심정으로 비밀 아지트 내에서 총기를 난사했고, 그로 인해 박영발을 포함해 대원 3명이 사망했다는 증언이다. 문제의 난사범은 다른 빨치산에게 사살됐다고 한다.6

 

두 가지 상이한 견해 가운데 박남진의 증언이 신뢰할 만하다고 판단된다. 증언 내용이 구체적이고 피살 정황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박영발과 함께 전남도당 소속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생존자들도 이 날짜에 맞춰서 추모제를 지냈다고 한다. 더욱 신빙성이 느껴진다. 토벌대 쪽 3월19일 설도 모순 없이 해석할 수 있다. 주검이 발견된 날짜인 것 같다. 전공을 탐하는 수색대가 교전 후 사살했노라고 허위 보고를 올렸을 것으로 보인다.

 

사망 일자를 확인하는 문제는 망자의 제사를 지내는 입장에서 보면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상이한 견해를 대비해본 까닭이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京城東大門警察署 道警部 奈良坂性依, ‘意見書: 孔元檜 外 28名’, 70~71쪽, 1932.10.18,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85-국편-0262-0002

2. 박창일(본명 박영발), <자서전>, 2~3쪽, 1948.8.9,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4 л.12~14об

3. 이상의, ‘구술로 보는 일제하의 강제동원과 인천조병창’, <동방학지> 188, 108쪽, 2019

4. Зам.Председатель ЦК Трудовой партии Южной Корея Пак Хенен(남로당 부위원장 박헌영), Характеристика на инструктора отдела труда ЦК Трудовой Паприи Южной Кореи, Пак Ен Бала (남조선노동당 중앙위 노동부원 박영발에 대한 평가서),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3 л.7 1948.7.31.

5. ‘從軍落穗 지리산’, <동아일보> 1954.4.12.

6. 김경대 기자, ‘박영발 위원장, 동지가 죽였다’, <시민의소리> 2005.2.24.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9,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Polycrates of Samos, 1790. by Mikhail I. Kozlovsky. Bronze. 114 x 56 x 42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9,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폴리크라테스 (Polycrates 570 BC~522 BC )는 아이아케스( Eaces)의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자기 동생들이 판타그노토스와 쉴로손과 같이 사모스섬을 통치했지만 
기원전 535년 경 판타그노토스는 살해하고 막내 쉴로손은 추방시켜 사모스섬을 독차지한다. 
권력을 차지한 폴리크라테스는 해군을 육성하고 이집트와 아케메네스 제국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펼쳐 세력을 확장하고 그 세력으로 레스보스같은 주변의 폴리스들을 공격한다.

여담으로 사모스 섬으로 돌아온 피타고라스가 다시 크로톤으로 이주한 것이 
당시 사모스 섬의 참주인 폴리크라테스의 독재 때문이라고 한다.
폴리크라테스가 추방시킨 사모스의 (폴리크라테스) 반대파들은 
크레타 섬에 퀴도니아라는 도시를 건설한 뒤 스파르타 도움을 요청을 한다. 
스파르타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사모스섬 공격을 준비한다. 
그리고 여기에 사모스에 원한이 있던 코린토스도 합세하기로 한다.

기원전 532년 스파르타 연합군이 사모스에 상륙해 포위 공격을 시작하자 
폴리크라테스는 별동대를 이끌고 강력하게 반격한다. 
스파르타도 번번히 공격에 실패하고 후퇴를 반복하자 40일 뒤 스파르타는 철수한다.
스파르타의 공격까지 이겨내며 기세가 오른 폴리크라테스는 
그리스 전체를 지배할 야망을 가지고 세력을 키워나간다. 
이런 사모스의 확장에 주변 세력들은 불만을 가지게 되고 
아케메네스 제국의 사르디스 지방관이었던 오로이테스는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폴리크라테스를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오로이테스는 폴리크라테스에게 사절을 보내 아케메네스 제국의 황제 
캄비세스 2세가 자신을 죽이려해서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폴리크라테스에게 귀순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직접 와 줄 것을 요청한다. 
때마침 세력 확장을 위해 군자금이 절실했던 폴리크라테스는 오로이테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것이 오로이테스의 함정이었다.
기원전 515년 폴리크라테스는 자신이 직접 해군을 이끌고 막대한 재산을 수송하러 
마그네시아 지역으로 갔으나 그곳에서 오로이테스에게 생포된 뒤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당한다.

작가 미하일 이바노비치 코즐로프스키 (Mikhail I. Kozlovsky 1753~1802)는 
다재다능한 예술가이지만 특히 조각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그는 군사 음악가의 가족에서 태어났다. 
코즐롤프스키가 어렸을 적부터 그림 그리기에 재능을 보이자 

그의 부모는 그를 예술 아카데미에 보냈다.

그는 고전 예술 작품과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캔버스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통해 많은 지식을 얻었다. 
1780년 마르세유 예술 아카데미는 그에게 학자라는 칭호를 수여했으며, 
이는 그의 작품이 해외에서 인기를 얻었음을 증명하는 사실이다.
그는 해부학에 대한 뛰어난 지식과 모델 작업을 통해 도움을 받기도 했다.

1794년에 코즐로프스키는 '그의 재능을 인정 받아' 교수로 임명되었고 
1797년에는 수석 교수로 임명되었다. 
1780년대 후반과 1790년대에 재능은 조각가로서 절정에 달했다. 
이 시기에 그는 애국 열풍으로 가득찬 영웅적인 주제에 매료되었다. 
코즐로프스키의 후기 작품 대부분은 영웅주의와 용감한 투쟁의 정신으로 표시되었다. 

코즐로프스키의 또 다른 최고의 업적이자 작품은 페테르고프(Peterhof)의 분수 중 
가장 아름다운 삼손과 사자 분수(Samson and Lion Fountain)이다.
삼손은 러시아를 의인화하고 사자는 패배한 스웨덴을 나타낸다. 
이 우화적 이미지는 18 세기 모든 사람들이 이해했다. 
삼손의 위력 있는 모습은 긴장감과 움직임으로 가득차고 복잡하게 꼬인 자세로 보여진다.

 

Zeus and Thetis. 1769, by Anton P. Losenko. Oil on canvas. 172 x 126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9,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 작품의 줄거리는 호머(Homer)의 일리어드(Iliad)에서 가져온 것이다.
제우스(Zeus)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하늘, 천둥과 번개의 신으로 전 세계를 담당하며 
올림픽 신들의 우두머리이고 속성은 방패, 양면 도끼 및 독수리이다.

테티스(Thetis)는 트로이 전쟁 영웅 아킬레스의 어머니인 바다의 여신이다.
제우스는 테티스와 결혼하기를 원했지만 프로메테우스는 테티스의 아들이 
그의 아버지보다 강할 것이라는 예언을 그에게 밝혔고, 제우스는 그의 아들이 
그를 전복시킬까 봐 두려워 테티스와 차르펠스가 결혼하게 했다. 

안톤 파블로비치 로센코(Anton Pavlovich Losenko 1737~1773)는 
역사적 주제와 초상화를 전문으로 한 러시아 신고전주의 화가이자 학자였다. 
그는 회화에서 러시아 제국 역사 운동의 창시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759년 제국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1760년 아카데미는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 죤 레스토트(Jean II Restout 1692~1768) 

밑에서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그를 파리로 보냈다. 
그곳에서 그는 기적적인 물고기 잡는 신약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큰 그림을 그렸다. 
1766~1769년에 로센코는 로마에서 일하며 이탈리아 미술, 특히 라파엘의 그림을 연구했다. 
그곳에서 그는 카인(Kain)과 아벨(Abel)의 두 그림을 그렸다.

1769년 로센코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그는 제국 예술 아카데미에서 학자 자격을 얻는 방법으로 

역사적인 그림을 제시하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Kievan Rus의 역사 에피소드에서 그는 키예프의 블라디미르 1세와 
폴로츠크의 로그네다의 고전적인 캔버스를 그렸다. 

이 그림은 그에게 학자의 칭호뿐만 아니라 교수직을 가져왔다.
임페리얼 아카데미에서 처음에는 1770년 겸임 교수였지만 1772 년부터는 
아카데미의 정교수이자 이사였다. 
이 위치에 있는 동안 로센코는 러시아 제국에서 몇 세대의 화가들에게 봉사한 
"인간 비율에 대한 짧은 설명"이라는 교과서를 썼다. 
그는 1773년 사망할 때까지 아카데미 이사로 일했다.

이 작품은1769년 초에 로마에서 완성되었다. 
이 캔버스에서 해부학적 전달의 정확성, 국소 색상, 모델링에서 
선형 플라스틱 원리의 우세함으로 연구원들은 예술가의 최고의 창작물 중 하나를 본다.

 

The Miraculous Draught of Fish, 1762. by Anton P. Losenko. oil on canvas. 159,5 х 194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9,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기적적으로 물고기를 잡는 스토리는 누가복음 (눅 5 : 1~11)에 묘사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시몬 베드로의 배를 선택하고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에게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물에 물고기가 너무 많아서 제임스와 요한이 구조하러 와야 했다. 
안톤 파블로비치 로센코(Anton Pavlovich Losenko 1737~1773)의 캔버스에 있는 장면은 
사람들이 주님의 기적을 보기 위해 모인 갈릴리 바다 해안을 묘사한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안드레아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그물을 끌고 있다. 

 

St. Andrew The Apostle, by Anton Pavlovich Losenko. oil on canvas. 33.9 × 42.8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9,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성 안드레아 사도 (St. Andrew The Apostle)는 사도 베드로의 형제였으며 
차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
신약성서에서는 안드레아가 요나(마 16:17) 또는 요한(요 1:42)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벳새다에서 태어났다(요 1:44). 

요한복음에 따르면 안드레아가 이전에 "하나님의 어린 양"(요 1 : ​​35-40)으로 
예수를 지적한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고 보고한다. 
안드레아는 처음으로 예수 안에서 메시아를 알아보고 그를 그의 형제에게 알렸다(요 1:41). 
곧 두 형제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 
사도직에 대한 결정적인 성소 이전에 그들은 위대한 친구로 정의되었고 
모든 것을 예수님을 따르도록 남겨 두었다 (눅 5:11; 마 4 : 19-20; 막 1 : 17-18).

복음서에서 안드레아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중요한 경우에 많이 참석한 것으로 나타 났지만 (막 13 : 3; 요 6 : 8, 12:22) 
사도행전에는 그의 모습에 대해 약간의 언급만 있다. (행 1:13)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9,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Portrait of F. G. Volkov, 1760. by Anton Pavlovich Losenko. oil on canvas. 67 x 53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9,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표도르 볼코프 (Fyodor Grigorievich Volkov 1729~1763)는 러시아의 배우로 
1750년 야로슬라블에 최초의 공공 극장을 설립했다.  
그는 러시아 신고전주의와 "러시아 최초의 위대한 비극 연기"로 가장 영향력 있는 배우 

이반 드미트리에프스키(Ivan Afanasyevich Dmitrevsky 1734~1821)와 함께 
큰 명성을 얻기도 했다. 
2년 후 표도르 볼코프와 그의 극장은 엘리자베스 황후에 의해 
그녀의 궁정에서 공연하도록 초대받았기도 했다. 


1756년 엘리자베스 황후는 알렉산더 수마로코프 (Alexander Sumarokov)의 지도 아래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최초의 영구 공공극장을 설립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표도르 볼코프는 수마로코프의 극장 관리를 도왔고 5년 후 감독이 되었다. 
볼코프는 국가적 중요성을 지닌 러시아의 전문 공공극장을 만들고 
진보적이고 극적인 예술과 함께 묶었으며 많은 러시아 배우의 길을 닦았다. 
그는 러시아 최초의 여배우 중 한 명인 마리아 안나니나(Maria Ananina)와 결혼했다.

볼코프의 초상화는 모스크바에서 1763년 로젠코(Losenko)가 그렸다. 
이것은 유명한 배우의 유일한 그림 묘사이다.
볼코프는 외투에 칼과 가면을 손에 들고 연극적 속성을 제공한다. 
얼굴은 솔직함, 지능 및 활동으로 매력적이다. 
그의 포즈는 경기 중 잠시 멈추는 것 같다. 
여기에서 화가 로젠코(Losenko)는 영적 운동에 대한 깊은 관심과 함께
특정하게 살아 있는 사람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Vladimir and Rogneda, 1770. by Anton Pavlovich Losenko. oil on canvas . 211.5 x 177.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9,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블라디미르(Vladimir Sviatoslavich 958~1015)는 노브고로드의 왕자, 대공으로 
980년에서 1015년까지 대왕으로 키예프를 통치했다. 
폴로츠크의 로그네다 (Rogneda of Polotsk 962~1002)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로그볼로드(Rogvolod)의 딸로 10세기 중반에 폴로츠크에 정착했다.
로그네다(Rogneda)는 블라디미르 대왕(Vladimir the Great)과의 사이에 여러 자녀를 두었다. 

블라디미르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안나 포르피로제네타 (Anna Porphyrogenita 963~1011)를 

아내로 취한 후, 그는 로그네다를 포함한 모든 이전 아내와 이혼해야 했다. 
그 후 로그네다는 수녀원에 들어가 안나스타시아(Anastasia)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

 

Prometheus makes a sculpture by order of Minerva, 1775. by Akimov Ivan Akimovich. oil on canvas. 
125 x 93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9,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프로메테우스는 미네르바의 명령에 따라 동상을 만듭니다." 
1764년부터 화가 이반 아키모비치(Akimov Ivan Akimovich 1754~1814)는 
예술 아카데미 (IAH)에서 코즐로프(G. I. Kozlov)와 로센코(A. P. Losenko)의 역사 회화 수업을 받았다. 
1773~1778년에 그는 이탈리아 아카데미 (로마 볼로냐)에서 유학했다. 
1779년부터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예술 아카데미에서 가르쳤다. 
그는 1782년부터 학자, 1785년부터 부교수, 1794 년부터 수석교수, 
1796~1800년 예술 아카데미 소장을 역임했다. 
1786년부터는 1791년부터 임페리얼 트렐리스 제조소의 관리자이자 감독관으로 일했다. 
그는 표트르 1세 (Pavel I)의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가 촉발한 거대한 프로메테우스는 
점토로 조각상을 만들어 신에 의해 애니메이션화 되어 인류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래서 최근에는 그 자체로 이미지가 없는 거친 질량,
이제 지구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이 신화 버전은 1770년대에 널리 퍼진 캐서린 대제(Catherine II)와 
아테나 팔라스(Athena Pallas)의 비교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이 은유는 특히 러시아 군사 승리를 계기로 인기를 얻었다. 
이러한 해석으로 표트르 1세의 역할은 문명의 창시자인 프로메테우스의 역할에 비유되었다.
이 그림은 나체 인체의 모든 모델링 및 구성 방법에 대한 작가의 웅장한 소유를 드러내며 
구성의 차분한 균형, 그림의 세련미, 각도 전달의 자유로 구별된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0,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Catherine II the Legislatress, 1789. by Shubin F. I. Marble. 198 x 114 x 88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0,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페도 슈빈 (Fedot Ivanovich Shubin 1740~1805)은 18세기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조각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캐서린 대제(Catherine II)의 우화적인 의식 초상화다. 
반암 받침대 위에 우뚝 솟은 하얀 대리석 조각상이 초목이 깜빡거리며 반짝이는 녹지에 잠겼다. 

머리에 월계관, 가슴에 주문 사슬, 왕권이 있는 왕관으로 묘사된 황후의 모습에서 
엄숙한 화려함은 특정 사람의 개별적인 특성과 결합된다. 
느슨한 키톤과 어민 가운은 나이 든 여성의 모습을 숨기지 않는다. 
황후의 의식적 모습에 대한 해석에서 작가 페도 슈빈은 
이미지에 대한 현실적인 해석으로 그의 신조에 충실했다. 
1794년 이 작품으로 페도 슈빈은 교수라는 칭호를 받았다.

 

Portrait of Catherine II the Legislatress in the Temple of the Goddess of Justice, 

1783. by Levitsky D. G. oil on canvas. 261 x 201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0,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캐서린 2세 (Catherine II, 예카테리나 대제 1729~1796)는 
러시아 제국의 황후이자 여제( 재임 1762년 ~ 1796년)다. 
로마노프 왕조의 8번째 군주로, 본래는 프로이센 슈테틴 출신의 독일인이었다. 
무능한 남편 표트르 3세를 대신해 섭정을 맡았으며, 
1762년 남편 표트르 3세를 축출하고 임페라토르가 되었다.

1745년 러시아의 황태자이던 표트르 3세와 결혼했으나 
지능이 부족하던 남편을 대신하여 섭정을 했다. 
그러나 남편 표트르에 대한 평판이 나빠지자 1762년 정변을 일으켜 
남편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표트르 대제의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면서 러시아를 
유럽의 정치무대와 문화생활에 완전히 편입시켰다. 

내각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제국의 행정과 법률제도를 개선했으며 
크림 반도와 폴란드의 상당부분을 차지함으로써 영토를 넓혔다. 
계몽주의 사상에 감명하여 볼테르 등과도 문학으로 교류하였고, 
문학과 예술, 학예와 교육 등의 장려에 큰 관심을 쏟았고 
각 지방관들로부터 직접 정무를 결재받음으로써 황권을 강화시켰다.

투르크와 싸워 영토를 넓혔으며 폴란드 분할의 주역의 한사람이었다. 
내각의 도움으로 러시아 제국의 행정과 법률 제도를 개혁했다. 
본래 이름은 조피 프레데리케 아우구스테 폰 안할트체르프스트
(독일어: Sophie Friederike Auguste von Anhalt-Zerbst)며, 
개명한 이름은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러시아어: Екатерина Алексеевна)다. 
루터교 세례명은 조피 프레데리케 아우구스테, 러시아 정교 세례명은 예카테리나, 
이후 그는 러시아 정교회 세례명을 이름으로 사용했다. 
행정 개혁과 내치, 문예 부흥 등의 공적을 높이 평가해 예카테리나 대제로 불리기도 한다.

드미트리 레비츠키 (Grigoryevich Levitsky 1735~1822)는 러시아의 화가다.
레비츠키는 키예프 출신으로 아버지로부터 첫 번째 미술 교육을 받고
나중에 세인트 앤드류성당을 그리기 위해 키예프에 온 러시아 예술가 
알렉세이 안트로포프 (Alexei Petrovich Antropov 1716~1795)의 제자가 되었다 .

1770년 레비츠키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제국 예술아카데미(Imperial Academy of Arts)에서 
초상화 6점을 전시한 후 초상화 화가로 유명해졌다. 
1772~1776 년에 레비츠키는 캐서린 대제(Catherine II)가 의뢰하여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스몰리 인스티튜트(Smolny Institute for Young Ladies) 
학생들의 일련의 초상화를 작업했다. 
소녀들은 춤, 음악, 연극을 공연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레비츠키는 많은 의뢰를 받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급여가 적었고 1822년에 빈곤으로 사망했다.

 

Portrait of Yekaterina Molchanova, 1776. by Levitsky D. G. oil on canvas. 181,5 х 142,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0,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1770년대 화가 드미트리 레비츠키 (Grigoryevich Levitsky 1735~1822)는 
캐서린 대제(Catherine II)가 의뢰하여 일련의 "스몰리얀카(Smolyanka)"를 연작으로 그렸다.
1764년 캐서린 대제가 서명한 법령에 따라 설립된 
'귀족 여성을 위한 스몰니 교육기관(Smolny Institute for Noble Maidens)'은 
유럽 최초의 소녀들을 위한 공립 교육기관이었다.

법령에 명시된 바와 같이 '귀족 여성을 위한 스몰니 교육기관'은 
"국가 교육을 통해서 가족과 사회에 고귀하고 능력을 겸비한 여성을 제공"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스몰니라는 이름은 타르 공장이 있는 스몰니 마을 근처에 
표트르 대제가 1729년에 지은 스몰니 궁전에서 유래했다.

처음에 학생들은 6~9세, 9~12세, 12~15세, 15~18세의 네 가지 연령으로 나뉘었다. 
이 기관은 모든 학생들을 위해 특정색의 특별한 유니폼 드레스를 착용했다. 
어린 나이에는 커피, 두 번째는 진한 파란색, 세 번째는 파란색, 시니어는 흰색이었다. 
갈색은 지구와의 근접성을 상징하며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용적이었다. 
밝은 색상은 교육과 정확성의 증가를 상징한다. 
소녀를 스몰니 교육기관에 보낸 부모나 친척은 
"교육 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어떤 상황에서도 그녀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서면 약속을 해야 했다.

훈련 기간 동안 하나님의 율법과 언어 (국내 및 외국)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교육 커리큘럼으로 러시아 문학, 지리, 산술, 역사, 음악, 그림, 프랑스어와 독일어, 
다양한 유형의 경제학, 우아한 매너, 노래, 춤, 악기 연주 등을 배웠다. 
또한 도덕 교육에 주된 관심을 기울였다.
Smolny Institute 학생들 'Smolyanka'는 종종 

프랑스 코미디를 연기하고 발레 공연이 열리기도 했다.

나중에 훈련 기간이 9년으로 단축되었다. 
황후 마리아 표도로프나 (Maria Fyodorovna)는 
"아이들은 오랫동안 부모로부터 젖을 뗐기 때문에 

과정이 끝날 때 혐오감을 안고 집으로 돌아 간다"

고 여겼으며 1797년에 가장 어린 나이 층이 없어졌다. 
이제 학생들은 "파란색", "회색", "백색"(시니어)의 세 연령으로 나뉘어졌다.

스몰니 교육기관 학생들의 최종 공개 시험에서 황제와 그의 가족은 대개 참석했다. 
1776년 5월 11일에 Smolny Institute의 첫 졸업식이 있었다. 
졸업생들은 금색 줄무늬가 있는 흰색 활에 착용한 캐서린 대제(Catherine II)의 
이니셜 형태의 금 모노그램 휘장 "코드"를 받았다. 

이 그림은 예카테리나 몰차노바 (Molchanova Ekaterina Ivanovna 1758~1809)의 초상화이다.
1776년 예카테리나 몰차노바는 금메달과 황후 이니셜 모양의 브로치로 디자인된 
캐서린 대제(Catherine II)의 휘장을 받고 교육 과정을 졸업했다. 
1776년부터 그녀는 1770년 후반에 캐서린 대제의 명예 시녀인 
마리아 페오도로브나(Maria Feodorovna) 대공 비의 시녀가 되었다. 

1780년 이후 그녀는 SA Olsufyev와 결혼하여 나중에 소장이 되었다.
이 작품에서 예카테리나 몰차노바는 스몰니 교육기관의 고학년(4 학년)에게 

의무적인 흰색 실크 드레스로 묘사되어 있다. 

 

Portrait of Glafira Alymova, 1776. by Levitsky D. G. oil on canvas. 183 х 142,5 cm. 
he Mikhailovsky Palace, Hall 10,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글라피라 알리모바 (Glafira Ivanovna Alymova 1758~1826)는 
이반 알리모브(Ivan Akinfievich Alymov) 대령의 딸이었다. 
그녀는 1764년부터 1776년까지 Smolny Institute에서 
첫 입학생 중 한 명으로 공부했으며 음악에 탁월했다. 
그녀는 당대 최고의 하프 연주자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1776년 졸업식에서 그녀는 5명의 최고 졸업생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고, 
캐서린 대제를 보좌하는 시녀가 되었다. 
캐서린 대제는 유머와 기질이 좋았기 때문에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는 1777년에 작가이자 귀족인 Alexei Rzhevskii의 두 번째 아내로, 
그리고 1805년에 번역가인 Maskle과 재혼했다. 
그녀보다 20살 젊고 사회적 지위가 낮은 남자와의 두 번째 결혼은 스캔들로 간주되었다.
그녀는 훗날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이 작품에서 하프를 연주하는 글라피라 알리모바는 시니어 연령대의 
학생들을 위해 설정된 흰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묘사된다.

 

Portrait of Alexandra Levshina, 1775. by Levitsky D. G. oil on canvas. 213 х 140,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0,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알렉산드라 레브시나(Alexandra Petrovna Levshina 1757~1782)는 
레브신 (P. I. Levshin) 소령과 타티아나 이바노브나 (Tatyana Ivanovna) 공주의 딸이다. 
그녀는 1764년부터 1776년까지 Smolny Institute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금색 줄무늬가 있는 흰색 활에 착용한 캐서린 대제(Catherine II)
이니셜 형태의 금 모노그램 휘장 "코드"를 받고 졸업했다.

그녀는 1778년부터 황후를 보좌하고 1780년 

체르카스키(P. A. Cherkassky) 왕자와 결혼했다. 
그녀는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이 작품에서 알렉산드라 레브시나는 Smolny Institute 극장에서 상연된 
발레 중 하나에서 춤을 추는 의상으로 묘사된다.
초록색의 분홍색, 잿빛 칙칙한 색조로 결합된 직물의 질감을 쉽게 읽을 수 있다. 
정확하게 우아한 움직임으로 옮겼다. 
이 초상화에서 춤 동작의 눈에 띄는 멜로디와 정교한 장식 그림은 
빛과 그림자의 표현적인 영향으로 보완된다.

그러나 17살짜리 소녀의 얼굴은 매우 성숙하게 보인다. 
춤 자세에 따라 약간 기울어지고, 호의적인 미소로 불이 붙었으며, 
진지함과 관심으로 가득 차 있다. 
검고 반짝이는 눈은 끊임없이 내려다 보았다. 
좀 더 성숙한 사람에게 더 적합할 것으로 보이는 레브시나의 
부드러운 제스처와 자세는 우리 앞에서 그림의 공간 구성을 부드럽게 만든다.

레브시나는 오른손으로 매우 넓은 스커트의 가장자리를 들어 올려 
깊은 배경의 어두운 공간을 채운다. 
팔꿈치에서 구부린 왼쪽 팔과 어깨는 다소 움츠러져 있다. 
이 기법을 사용하면 그림의 정면 부분과 그 배경을 연결할 수 있다. 

 

Portrait of Fedosia Rzhevskaya and Nastasia Davydova. 1772. by Levitsky D. G. oil on canvas. 
161 х 103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0,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오른쪽 르츠헤브스카야 스테파노브나 (Rzhevskaya Feodosia Stepanovna 1760~1795)는 
르체브스키(S. M. Rzhevsky) 중장과 소피아 니콜라예브나 (Sofia Nikolaevna)의 딸이다. 
그녀는 Smolny Institute의 초등학생을 위한 파란색 유니폼 세트로 묘사되어 있다. 
스테파노브나는 Smolny Institute를 졸업하고 마이크헤일 골리신
(Mikhail Nikolaevich Golitsyn 1796~1863) 왕자와 결혼했다.

왼쪽 나스타시아 미하일로브나 (Nastasia Davydova Mihaylovna 1764~?)는 

그루지야 왕자 가정 출신이다. 
그녀의 아버지인 다비도브(M.M. Davydov) 소장은 1780년대 탐보프의 주지사였다. 
그녀는 가장 어린 나이 그룹의 교복인 커피색 드레스로 그려져 있다. 
1780년대에 탐보프 아마추어 극장 공연에 참여한 특정 공주 
다비도바(Davydova)에 대한 언급이 그녀의 것일 수 있다. 

 

Portrait of Ekaterina Khruschova and Ekaterina Khovanskaya, 1773. 

by Levitsky D. G. oil on canvas. 164 x 129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0,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왼쪽에 예카테리나 흐루시초바 (Ekaterina Nikolaevna Khrushcheva 1761~1811)는 
니콜라이 흐루시오브(Nikolai Khruschov) 총리와 프라스코비아 볼콘스카야
(Praskovia Mikhailovna Volkonskaya) 공주의 딸이다. 
1767~1769년 Smolny Institute 에서 공부하고 졸업했다.
그 후 그녀는 캐서린 대제(Catherine II)의 시녀상을 수상했다. 
폰 로만(von Lohmann)과 결혼했다. 

오른쪽 예카테리나 코반스카야 (Ekaterina Nikolaevna Khovanskaya 1762-1813)는 
니콜라이 코반스키 (Nikolai Khovansky) 대령과 
마리아 니콜라에브나 쉐포티에바 (Maria Nikolaevna Schepotieva) 공주의 딸이다. 
1767~1769년 Smolny Institute에서 공부하고 졸업했다. 
1786년부터 시인 Yu. A. Neledinsky-Meletsky의 아내로 모스크바에서 살았다.

이 작품에서 예카테리나 흐루시초바와 예카테리나 코반스카야는 
Smolny Institute 연극에서 공연하는 의상을 입고 묘사된다. 
남자의 드레스를 입은 "양치기 소년" 흐루시초바는 농담으로 친구의 얼굴을 만진다.
그녀의 손으로 옷의 가장자리를 잡고 소심하게 서 있는 "양치기"는 코반스카야.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0,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Portrait of Yekaterina Nelidova, 1773. by Levitsky D. G. oil on canvas. 164 x 106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0,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예카테리나 이바노프나 넬리도바 (Yekaterina Ivanovna Nelidova 1758~1839)는
1765년부터 1776년까지 Smolny Institute에 재학하고 졸업했다. 
졸업하자마자 그녀는 두 번째 등급의 금메달과 캐서린 대제의 휘장을 받았다. 
그녀는 피터 3세 (Peter III)와 캐서린 대제 (Catherine the Great)의 유일한 아들인 
미래의 군주 폴 1세 (Paul I 1754~1796)의 왕실 여주인이었다.

넬리도바는 폴 1세와 충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넬리도바는 오페라 공연을 하는 재능으로도 유명했으며 

오페라를 좋아했던 왕세자의 사랑을 받았다. 
그녀는 Smolny Institute에서 인생의 마지막 몇 년을 보냈으며, 
그곳에서 여성 후원자의 비공식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이 작품에서 넬리도바는 연극 의상을 입고 연기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그녀는 Smolny Institute의 무대에서 춤을 추었다. 
작가 레비츠키는 희망을 약속하는 삶의 문턱에서 자연과 

유기적으로 융합된 시적인 자연적 존재, 낙천주의적 놀이와 함께 

우아하게 번쩍이는 모습으로 넬리도바를 표현하고 있다. 

 

Portrait of the Writer Alexander Khrapovitsky, 1781. by Levitsky D. G. oil on canvas. 60,5 х 49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0,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작가 크라포비츠키 바실리예비치 (Khrapovitsky Alexander Vasilievich 1749~1801)의 초상화.
그는 어린 나이부터 문학에 관심을 두고 공부했으며 번역에 종사하고 시와 "비극"을 썼다. 
1782년부터 1793년까지 캐서린 대제 (Catherine II)의 국무 장관이었다.
크라포비츠키는 11 년 동안 이 직책을 맡아 캐서린 대제에게 필요하고 자신감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 시기에 크라포비츠키가 캐서린 대제 연구에서 보고들은 모든 것을 
매일매일 짧게 기록하여 그의 유명한 "Diary"로 남아 있으며, 
여기에는 황후의 모든 단어, 리뷰 및 발언의 원본 텍스트가 포함되어 있다. 

크라포비츠키는 그의 문학 및 공식 활동이 아니라 이 "일기"로 ​​역사에 큰 공헌을 했다. 
어떤 책도 캐서린 대제의 마음, 성격 및 가정 생활에 대해 

이보다 더 나은 아이디어를 제공하지 못한다. 
하지만 캐서린 대제가 이 "일기"의 존재를 알게 되자 

크라포비츠키는 국무장관에서 해임되었다. 

 

Portrait of Alexander Lanskoi, 1782. by Levitsky D. G. oil on canvas. 151 x 117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1,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알렉산더 랜스코이 (Aleksander Dmitrijevitj Lanskoj 1758~1784)는 
1780년과 1784년 사이에 캐서린 대제 (Catherine the Great)를 사랑하는 러시아 장군이었다.
랜스코이는 1779년 그리고리 포템킨 (Grigory Potemkin 1739~1791)의 보좌관이 되었고 
1780년 포템킨에 의해 캐서린 대제에게 소개되었다. 
그는 캐서린 대제와 진정으로 사랑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들은 행복한 관계로 묘사되었다. 


그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고 뇌물을 받지 않았으며 
호의나 선물을 요청하지 않았고 캐서린의 문화적 이익을 공유했다. 
1782에서 랜스코이와 포템킨은 오를로브(Orlov) 백작을 법정에서 제거하기 위해 협력했다. 
그는 디프테리아로 사망했지만 그의 건강이 최음제에 의해 약해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초상화는 22세의 장교와 사랑에 빠진 캐서린 대제의 요청으로 1782년에 그려졌다. 
황후가 온갖 호의를 베푼 랜스코이는 공병대장의 유니폼을 입고 묘사되었다. 
"황후는 이 초상화를 너무 좋아해서 죽을 때까지 간직하고 있었다."
이는 화가 레비츠키가 작품을 통해 고객을 만족하게 할 수 있었다는 증거다. 

 

Portrait of Catherine II, 1782. by Levitsky D. G. oil on canvas. 165 х 132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1,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캐서린 대제(Catherine II)는 작은 황실 왕관과 풍성한 복장을 입고 묘사된다. 
오른쪽 어깨 너머에는 세인트 앤드류의 첫 번째 부름의 리본이 있고 
가슴에는 세인트 앤드류의 별이 있다. 
왼쪽에는 왕관, 구 및 홀이 있다.
1782년에 화가 레비츠키(Levitsky)는 이 초상화를 위해 500 루블을 받았다.

 

Portrait of Countess A. A. Vorontsova, Late 1780s~early 1790s. 

by Levitsky D. G. oil on canvas. 61 x 50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1,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보론초바 안나 아르테미에브나 (Vorontsova Anna Artemievna 1777-1854)는 
보론초브 (A. I Vorontsov) 백작과 페도로브나 (Praskovya Fedorovna)의 

둘째 딸로 D. P 백작과 결혼했다. 
1817년에 안나 아르테미에브나는 이탈리아로 떠났고, 
피렌체에서 일이 끝날 때까지 살다가 천주교로 개종했다.

 

Portrait of Countess P. A. Vorontsova as a child, 1790. by Levitsky D. G. 

oil on canvas. 62.5 x 49.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1,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보론초바 프라스코브야 아르테미에브나 (Vorontsova Praskovya Artemievna 1786-1842)는
보론초브 (A. I Vorontsov) 백작과 페도로브나 (Praskovya Fedorovna)의 막내 딸로 
스몰니 인스티튜트(Smolny Institute)를 졸업했다. 
1813년에 그녀는 부유한 농가의 아들이자 

토지 소유자인 티모피브(AU Timofeev) 백작과 결혼했다.

 

Portrait of Agasha Dmitrievna Levitskaya, 1783. by Levitsky D. G. oil on canvas. 123 × 90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1,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화가 레비츠키 (D.G. Levitsky)의 딸 아가샤 드미트리예브나 레비츠카야 
(Agasha Dmitrievna Levitskaya 1760년대~1805년 이전)는 러시아 북부 
농민 여성의 웨딩 드레스로 간주되었던 정장에 묘사되어 있다. 

사실 실크나 브로케이드선 드레스와 따뜻함, 셔츠 소매의 얇은 레이스, 
진주로 장식된 코코슈닉 또는 왕관, 실크 베일이 포함된 의상은 
18세기 후반기에 부유한 마을 사람들의 축제 드레스였다. 

초상화는 실크 직물의 질감, ​​전통적인 컷의 특징 및 가장 작은 장식의 세부 사항을 전달하는 
레비츠키의 독특한 기술로 실행되었으므로 화가가 묘사한 의상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민속 의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학문적 예술의 규칙을 
만족시키기 위해 바뀌지 않고 당시 회화에서보기 드문 현상이었다.

 

[영상] Hall 9~10 in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7, The Blttle near Poltava. KB Rastrelli.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The Sculptural group "Anna Ioannovna with arapchon", 1741. by K.B. Rastrelli. 

bronze. 223 x 160 x 228 cm ; 126 x 68 x 64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안나 이바노브나 (Anna Ioannovna 1693 ~ 1740)는 러시아 제국의 
여제 (재위 1730년 - 1740년)로, 로마노프 왕조의 4번째 군주다.
1693년 1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이반 5세 (Ivan V)의 둘째 딸로 태어나
아버지의 이복동생 표트르 1세의 궁전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710년에 

쿨란스키 공작과 결혼하고 4개월 후 공작이 죽은 후에는 주로 민타프에서 살았다. 

표트르 2세가 서거한 후 추밀원의 의원들은 자신들이 그의 권력을 제한한다는 조건으로 
안나를 러시아의 제위에 옹립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에 동의한 지 얼마 후 안나는 귀족 근위병의 의뢰에 따라 
그 계약조건을 파기하고 추밀원을 해산시켰다. 
안나 이바노브나는 1730년 4월에 모스크바에서 즉위하고
원로원을 복구시켰으며 외국인들의 도움과 지지를 받고 나라를 통치했다.

그녀는 1731년에 내각을 창설하고, 잔혹한 고문을 행하는 비밀경찰의 활동을 승인해 
정권에 대항하려는 반대 세력들의 어떠한 시도도 엄중하게 진압했다. 
그에 따라 돌고루코브이 가, 골리츠인 가, 볼르인스키 가 출신의 
많은 사람들이 유폐되거나 사형에 처해졌다. 


또한 안나는 정권을 획득하는 데 도움을 준 귀족들의 특권을 넓혀 주었다. 
장자 상속에 대한 법을 개정하였다.
 폴란드 소귀족 계급을 위한 육군 유년학교를 설립했고 
학교 이사장의 아들 중 한명이 이 영지를 관리하도록 했다. 
귀족의 국가 봉사를 35년으로 제한했다.

안나는 산림을 보호하고 보존할 목적으로 국가적인 벌채금지법을 만들도록 지시했으며, 
러시아 정교회의 순수성을 보호하고자 이단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다. 
이를 위해, 특히 그의 명령에 따라 러시아의 16개 도시에서 신학교가 개교되었다. 
1735년에는 신성모독을 하면 사형에 처하도록 지시했다.

안나는 미니흐가 주장한 군사개혁도 추진했는데, 
1737년에는 비론을 쿠를란스크와 세미갈리스크의 공작에 임명했다. 
표트르 1세 때에 합병되었던 카스피 해 연안의 영토를 페르시아로부터 
안전하게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영토를 페르시아에게 넘겨주었다. 


1735년부터 1739년까지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소극적인 외교정책으로 인해 러시아에 불리한 조건으로 
벨그라드와 체결한 국제 조약을 성공적으로 이행하지 못했다. 
이반 5세의 후손을 따르는 세력을 확보하고자 노력했으며 이를 위해 그는 
죽기 전에 이질녀 메클렌부르크의 안나의 아들 이반 안토노비치(이반 6세)를 
후계자로 지명했고 이반이 장성할 때까지 그의 섭정자로서 비론을 임명했다.

"작은 아랍촌(arapchon)이 있는 안나 이바노브나" 조각상은 
조각가 라스트렐리 (Karlo Bartolomeo Rastrelli))의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 
이 독특한 조형 예술 작품은 1732년부터 1741년까지 만들어졌다. 

황후는 엄숙한 의식에 참여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그녀는 작은 아라피가 주는 힘을 얻기 위해 잠시 멈췄다. 
홀을 쥐고 있는 손의 오만한 몸짓, 거만한 위엄과 시선, 귀중한 옷차림의 화려함과 

인물의 무게, 이 모든 것이 황후의 "시선"의 이미지를 큰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옷의 세부 사항을 만드는 데에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여러 부서에서 
라스트렐리를 돕기 위해 소환된 최고의 장인들이 거의 3년 동안 작업했다. 
세부 사항을 조심스럽게 마무리하면 이미지의 무결성이 더욱 풍부해진다.
황후는 멋진 대관식 복장을 입고 그녀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앞에는 동상이 아니라 전체 그룹이 있으며 각 인물에는 별도의 받침대가 있다. 


조각품은 모든 면에서 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큰 안나 이바노브나 상과 작은 소년상은 매우 정적이고 장엄한 황후와 
활기차고 민첩한 소년, 눈부시고 매끄러운 표면의 대비 얼굴, 
어깨, 손 및 무광택 반짝임, 황후의 보석과 바느질 표면 드레스로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동시대 사람들이 "여성보다 남성적"이라고 말했듯이 크고 뚱뚱한 얼굴을 가진 
안나 이바노브나는 강하고 거의 무서운 인상을 주기도 한다. 

 

Battle of Poltava, Tapestry. 1764. by Imperial Tapestry Manufactory. Wool, silk, weaving. 317 x 408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7,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태피스트리 "폴타바 전투"는 1716년 표트르 1세의 주도로 설립된 
피터스버그 태피스트리 제조소의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이다. 
전투는 러시아 예술의 새로운 장르로 북부 전쟁에서 러시아 군대의 눈부신 승리를 통해 실현되었다. 
폴타바(Poltava)에서의 승리는 특히 직조를 포함한 모든 유형의 예술에 구체화되었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8, Rokotov.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Portrait of an unknown woman in a black embroidered silver dress, 1750th. 

by Khristinek K. L. oil on canvas. 90 x 71.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8,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카를 크리스티네크(Karl Ludwig Khristinek)는 "독일에서 온" 최초의 러시아 화가로 
주로 중간 귀족, 군대, 지식인 등을 그렸다.
그의 작품은 "검은 수 놓은 은색 드레스를 입은 여성의 초상화"를 포함하여
약 100 여 점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Portrait of Count Alexei Bobrinsky, Illegitimate Son of Catherine II and Count Grigory Orlov, 

in Childhood, 1760년대 중반. by Rokotov F.S. oil on canvas. 59,5 х 47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8,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알렉세이 보브린스키 (Bobrinsky Alexey Grigorievich 1762-1813)는 
캐서린 2세 (Catherine II)와 올로프(Grigory Grigoryevich Orlov 1734~1783)의 사생아이다.
올로프(Orlov)는 여러 저명한 정치가, 과학자, 외교관 및 군인을 배출한 러시아 귀족 가문의 이름이다 . 

러시아 캐서린 대제는 그녀의 유일한 공식 사생아를 낳았다. 
캐서린은 임신 사실을 숨겨야 했다. 
이 아이는 삼촌이자 대부인 알렉세이 올로프 백작의 이름을 따서 알렉세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는 러시아와 서유럽 국가들을 오랫동안 여행했다. 
1796년부터 그는 백작, 소장이 되었다.
최초의 보브린스키 백작은 1813년 6월 20일 툴라 동쪽에 있는 보고로디크의 영지에서 사망했다.

표도르 로코토프 (Fyodor Stepanovich Rokotov 1736~1808)는 
초상화를 전문으로 하는 저명한 러시아 화가였다.
로코토프는 농노에 속하는 농민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예술아카데미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1750년대 말에 자유를 되찾은 후 그는 세련된 화가로 자리매김했다.

 

Portrait of Countess E. V. Santi, 1785. by Rokotov F. S. oil on canvas. 72,5 x 56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8,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18세기 말의 탁월한 예술가인 표도르 로코토프 (Fyodor Stepanovich Rokotov 1736~1808)의 장점은 
사람의 내면을 드러내는 초상화의 친밀하고 챔버같은 유형의 창조였다.
단순한 군 여단의 딸 엘리자베스 라치노바 (Elizabeth Vasilievna Lachinova)의 운명이 성공적으로 보였다. 
그녀는 부자인 산티(Santi)와 결혼하여 사회에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녹은색조, 절묘한 색감, 올리브 핑크색 색조의 연기가 자욱한 색감 등
이 그림은 로코토프의 재능과 맛을 보여주고 있다.

 

Portrait of Princess E. B. Yusupova, 1758~1759. by Fyodor Rokotov. 

oil on canvas. 57.0 х 44.0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8,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1765년 표도르 로코토프 (Fyodor Stepanovich Rokotov)는 학자로 선출되었지만 
그의 작품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 아카데미에서 교수로 오랫동안 일하지는 않았다. 
그는 1765년 모스크바로 돌아와서 여생을 살았다. 
그는 그곳에서 많은 의뢰를 받았으며 당시 최고의 초상화 화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로코토프는 장식이 많은 형식적인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피했다. 
대신 그는 광학 및 대기 효과에 주의를 기울여 심리적 초상화를 발전시킨 
최초의 러시아 화가 중 한 명이었다.

 

Portrait of Varvara Surovtseva, nee Pashkova, 1780년대 후반. 

by Rokotov F. S. oil on canvas. 67,5 х 52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8,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바바라 수로프체바(Varvara Nikolaevna Surovtseva)의 초상화는 
표도르 로코토프 (Fyodor Stepanovich Rokotov)의 성숙하고 정교한 회화 기술의 훌륭한 예이다.
모스크바, 칼루가, 사라토프 및 심비르스크 지방을 통과하는 수로브체프 (Surovtsovs)의 
가문은 16세기 초에 필사본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로코토프는 전체 구성뿐만 아니라 매끄럽고 유연하며 둥근 브러시 움직임을 타원에 배치한다. 
놀라운 관용과 전술로 그는 투명 천의 은빛과 잿빛 색조, 개화 꽃의 섬세한 핑크 색, 
리본의 피스타치오 색조, 가루 머리카락의 따뜻한 색조 및 젊은 여성의 얼굴을 
하나의 색정적인 전체에서 결합시킨다.

밝고 윤이 나는 이 그림은 예술가가 불허의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게 해 주며, 
색상의 가장 훌륭한 연출은 미묘하지만 다양하고 풍부한 감정의 뉘앙스를 전달한다. 
로코토프는 더 이상 기민한 분석가가 아니라 자신의 모델의 
영적 아름다움과 여성미에 매료된 몽상가이다. 
감정의 깊이, 온화함과 친절함의 매력, 그리고 때로는 도저히 슬프게 보이는 그늘을 포함하여 
로코토프적(rokotovsky) 유형의 여성의 얼굴이라는 개념이 이후에 나타났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8, Rokotov.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Portrait of Count Ivan Orlov, Retired Captain of the Preobrazhensky Life Guards. 

1762~1765. by Rokotov F.S. oil on canvas. 58,5 х 46,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8,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올로프(Orlov) 가문 형제 중 장남인 그리고리 올로프(Grigory Grigoryevich Orlov 1734~1783)는
캐서린 대제(Catherine II)가 가장 좋아하는 정인이 되고 사생아까지 낳았다.

네 명의 올로프 형제 중 가장 주목할만한 인물은 이 작품의 주인공 
이반 올로프 (Ivan Grigorievich Orlov 1733~1791)였다. 
1746년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 그는 가족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많은 가족 활동을 이끌면서 그는 항상 의도적으로 그림자 속에 머물렀다. 

1762년 표트르 3세 (Peter III) 황제 암살에 참여한 그는 같은 해에 백작 칭호를 받았다. 
궁전 혁명 이후에도, 올로프 가문이 중요해지고 막대한 재산을 얻었을 때 
그는 어떤 국가 경력과 직함도 거부하고 모스크바와 올로프 영지에서 계속 살았다.
모든 올로프 형제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아버지처럼 존경했다. 
그는 겸손한 삶을 살았고 올로프의 영지를 관리했다. 

작가인 로코토프는 이반 올로프를 지적이고 교활하며 활기찬 사람으로 묘사했다. 
그의 영웅의 내면 세계에 관심을 보이는 로코토프는 그의 영혼의 "움직임"을 따랐다. 
초상화는 절묘한 색 구성표로 매우 우아하게 표현되었다. 
이반 올로프는 블루벨벳 카프탄, 골든 캐미솔 및 레이스 프릴을 입고 있다.

 

Portrait of Vice-Admiral Samuel Greig, 1775. by Christinecke C. L. oil on canvas. 91,5 х 72,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8,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사무엘 그레이그 (Samuil Karlovich Greig 1735~1788)는 스코틀랜드 태생의 러시아 제독이었다. 
1770년 체스마(Chesma) 전투와 1788년 호글란트(Hogland)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아들 알렉세이 그레이그(Alexey Greig)는 또한 러시아 제국 해군에서 멋진 경력을 쌓았다.

카를 크리스티네크(Karl Ludwig Khristinek)는 "독일에서 온" 최초의 러시아 화가로 
주로 중간 귀족, 군대, 지식인 등을 그렸다.
그의 작품은 약 100 여 점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영상]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7~8.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6, 18th century. Vishnyakov, Antropov, Argunov.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Portrait of S. B. Shubin, 1774. by Serdyukov G. oil on canvas. 83,5 х 71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초상화에 묘사된 사프론 보리소비치 슈빈(Safron Borisovich Shubin 1727~1782 )은 
14세 소년으로 지역 생도군단(Land Cadet Corps)에 배정되었다.  
1760년 그는 7 년 전쟁 동안 수륙 양용 공격에 참여하여 중위에 임명되었고
1764년 해군 사관학교 생도 군단의 선장으로, 1771년부터는 군단 사령관을 역임했다. 
1772년 그는 준장 계급의 선장으로 승진했다. 
이 초상화는 해군 생도 군단의 준장 직급의 유니폼으로 묘사된다.

 

The Summer Palace of Elizabeth Petrovna from the Summer Palace in St.Petersburg, 
Third quarter of XVIII century. Unknown painter. oil on canvas. 72 х 117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러시아 미술에서 풍경화의 출현은 18 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연과 가장 관련이 있는 초상화와 같은 새로운 장르의 출현은 
주로 러시아 도시 계획의 발전 때문이었다. 

“서머 하우스의 전망”은 건축가 라스트렐리(Rastrelli)가 지은 웅장한 궁전의 이미지를 
우리가 볼 수 있도록 보존한 유일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목조 궁전은 서머 가든의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폰탄카로 흐르는 모이카 강으로 분리되었다. 
파르테르 정원이 궁전 앞에 놓여 있고 월계수와 주목이 난간을 따라 배치된다. 
그림의 오른쪽에는 종탑이 있는 성탄 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19 세기 초에 카잔 대성당(Kazan Cathedral)으로 대체되었다.

엘리자베터 페트로브나(Elizaveta Petrovna)는 여름 궁전을 매우 좋아했다. 
4월 말부터 5월 초까지 날씨가 허락하는 한, 황후의 겨울 거주지에서 이주한 페트로브나는 
대포의 포병 경례와 오케스트라 및 경비 연대의 참여와 함께 장엄한 의식으로 공식화되었다. 
여왕은 9월 말에 같은 의식을 가지고 돌아오는 여정을 시작했다.
1754년 9월 20일, 장래의 황제인 표트르 1세가 이 궁전에서 태어 났으며, 
여왕이 죽은 후에도 궁전은 여전히 ​​사용되었다. 

 

Portrait of Countess Anna Vorontsova, née Skavronskaya, 
Wife of the Chancellor Count Mikhail Vorontsov, 1763. by Antropov A. P. oil on canvas. 

81,5 х 6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6,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안나 보론초바(Anna Karlovna Vorontsova (1722~1776)는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zabeth Petrovna) 

황후의 사촌인 미하일 일라리오노비치 보론초프(M. I. Vorontsov 1714~1767) 총리의 아내이다. 
그녀는 아름답고 친절하며 매력적이고 기질이 강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1760년 2월 9일 안나 보론초바는 성 캐서린 대십자 훈장을 받았다. 

화가 알렉세이 안트로포프(Antropov A. P. 1716~1795)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군 목수의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예술적 성향이 일찍 나타났고 15살부터 미술학교에서 배웠다.
알렉세이 안트로포프는 17세기와 18세기의 전통적인 
가부장적 초상화를 사실주의의 발전하는 기술과 결합했다. 
그림 그리기 외에도 안트로포프는 교육 활동을 좋아했다. 

1765년에 8명의 학생이 있었고, 1789년에 자신의 집에 예술 학교를 개교하는 것에 대한 
안트로포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트" 발표가 나왔다. 
안트로포프의 수많은 학생 중 2명 드미트리 레비츠키(DG Levitsky 1735~1822)와 
드로진 피터(PS Drozhdin)은 러시아 미술의 역사가 되었다. 

 

Portrait of Countess Maria Rumyantseva, née of Countess Matveyeva, 
Wife of Count Alexander Rumyantsev, 1764. by Antropov A. P. oil on canvas. 62,5 x 48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6,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마리아 루미안트세바(Maria Andreevna Rumyantseva, 1698~1788) 백작 부인은 
18세기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중 한 명이다. 
그녀는 1710년까지 아버지가 대사로 일했던 비엔나와 

헤이그에서 생애 첫해를 살면서 유럽 교육을 받았다.

프랑스어에 능통하고 능숙한 댄서, 아름답고 활기찬 그녀는 표트르 대제의 관심을 끌었다. 
그녀는 1720년 7월 10일 알렉산더 루미안체프(Alexander Rumyantsev 1677~1749) 

백작과 결혼했고 그 부부는 군주로부터 귀중한 선물을 받았다.

초상화 작가 알렉세이 안트로포프(Antropov A. P. 1716~1795)는 
뚜렷한 마음과 활력이 넘치는 표현력 있는 눈을 가진 노인 여성을 묘사했다. 
이 초상화는 모델의 얼굴 특징과 의상의 수많은 세부 사항을 전달한다. 
렌더링 모양과 주변 물체의 정확성은 이 시대 러시아 초상화의 특징이다.

 

Portrait of F. I. Krasnoshchekova, 1761. by Aleksey Antropov. oil on canvas. 61 х 48,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6,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크라스노쉬체코프(Fedor Ivanovich Krasnoshchekov ? ~1764)는 1748년부터 
돈 코사크(Don Cossack) 부대의 장군으로 7년 전쟁을 수행했다. 
그는 안드레브스카야(Andreevskaya) 리본에 목 주위에 코사크(Cossack) 옷을 입고 그려져 있다. 
이는 페트로브나(Empress Elizabeth Petrovna) 황후의 
프로필이 있는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금메달이다.

화가 알렉세이 안트로포프(Antropov A. P. 1716~1795)는 엄숙한 포즈로 모델의 존엄성을 강조한다. 
이미지가 구축된 많은 양은 장식적으로 디자인된 패브릭 패턴과 유기적으로 결합된다. 
작가는 실물과 같은 설득력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이미지를 만든다.

 

Portrait of Empress Elizaveta Petrovna, 1758~1760. Unknown painter. Mosaic. 130 х 120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6,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zaveta Petrovna 1709~1762)는 
1741년부터 1761년까지 러시아 제국을 다스린 여제다. 
로마노프 왕조의 6번째 군주로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1세의 딸이다.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는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출생년도인 

1709년 보다 나중인 1712년에야 공식으로 혼인했기 때문에, 

그녀의 제위 권리는 정적들로부터 도전받을 소지가 있었다.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지적이며 발랄함과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그녀는 
황실 친위대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높았으나 
3대 황제 표트르 2세와 4대 황제 안나의 통치 기간 동안은 그녀의 정치적 역할은 미미했다. 


1740년 안나가 서거하자 안나 언니의 딸 레오폴도브나가 자신의 아들 
이반 6세의 섭정을 맡고 옐리자베타를 수녀원으로 추방하겠다고 위협하자, 
옐리자베타는 러시아에 대한 프로이센 왕국의 내정 간섭 배제와 
러시아의 친오스트리아 제국 · 반프랑스 왕국 외교 정책 폐지를 희망하는 
귀족들과 뜻을 같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옐리자베타는 1741년 11월 25일 밤 자신의 동지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어린 황제와 그 어머니 레오폴도브나 및 측근들을 체포하고, 
26일 아침 8시에 상트 페트르부르크 내 관료들과 주요 고위 성직자들을 소집한 후 
자신을 러시아의 황제로 선포하게 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32세였다. 
이 등극과 함께 로마노프 왕조의 남자 계보는 끊어졌다.

그녀는 이전 황제들이 채택했던 내각회의를 폐지하고 
아버지 표트르 1세가 만들었던 원로원을 정식으로 재구성했다. 
그 밖에도 이와 유사한 조치들을 취했기 때문에 그녀의 재위 기간은 
표트르 1세의 통치 원칙과 전통으로의 복귀가 두드러진다. 
그러나 원로원의 부활은 명목적이었을 뿐, 실제로는 총신들이 다스렸으며, 
아버지 표트르 1세의 주요 개혁의 일부는 철폐됐다.

게다가 아버지처럼 정치에 주력하기보다는 무도회나 연극 등 화려한 궁정 생활과 
교회 활동, 서유럽의 멋진 옷 등을 사들이는 데 열중했다. 
교육과 예술의 발전을 장려해 러시아 최초의 대학교인 모스크바 대학교와 
예술 아카테미를 세웠으며 엄청난 비용으로 겨울 궁전을 지었다. 
대부분의 나랏일을 고문과 총신에게 떠맡겨 궁정 내 음모가 끊이지 않아 
효율적인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재정 상태는 악화되었고 
지주들은 농민들의 희생을 대가로 폭넓은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대외 적극책을 추진하여, 
유럽의 강대국으로서 러시아의 위신을 드높이기도 했다. 
그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고 있던 알렉세이 베스투제프 류민의 지도로 
러시아는 친오스트리아 · 반프로이센 외교 정책을 강력히 고수했고, 
1741년에 러시아의 제위 계승과 관련된 내분을 틈타, 스웨덴이 침공했지만, 
20만 명의 대군을 파견해 맞서싸워 핀란드 남부를 병합했으며,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관계를 개선했다. 


말년인 1762년에는 7년 전쟁에서 프로이센에 대항해 베를린을 침공하여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를 패배 직전으로까지 몰아붙여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동맹국인 프랑스 및 오스트리아와 함께 
프로이센을 붕괴시키기 전에 갑작스레 서거하여 제위는 
그의 조카인 표트르 3세에게 돌아갔다. 
후계자 표트르 3세의 친프로이센으로의 정책 전환으로 프로이센은 
겨우 위기를 모면해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옐리자베타는 살아 생전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대신 수많은 남성 애인들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하지만, 
첫사랑의 죽음을 애도하여 평생동안 상복만 입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이질이었던 홀슈타인고트로프의 카를 울리히(표트르 3세) 공을 
러시아로 불려서 황위계승자로 책봉했으나 사이가 나빴다. 
하지만 카를의 아내인 예카테리나 2세는 매우 예뻐하여 한번은 
폐병에 걸려 치료를 받고 있던 예카테리나를 전염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찾아가서 꼭 안아주기도 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두 사람은 자주 러시아어로 편지를 주고 받았다고 한다.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통치에 대한 평가는 이전에는 궁정을 중심으로 사치에 빠지고, 
국제 전쟁에 휘말려 농노제가 강해진 시대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확실히 문화적 발전과 국제적 지위 향상,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으며, 
러시아가 강국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국정에 관심이 없었던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문화 사업에 그 열정과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한 러시아 궁정의 서구화를 열심히 진행했고, 패션에도 관심을 가졌다. 
또한 학예 보호에도 적극적이어서 서구의 학식을 수용하기 위해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를 지원하였다. 
과학자 미하일 로모노소프의 제의를 수용하여 1755년에는 모스크바 대학을 설립했다. 


예술가의 육성에도 노력을 기울였지만, 가장 중요한 사업 분야는 건축이었다. 
궁정의 수석 건축가 라스트렐리에게 명하여 수많은 궁전을 건축하거나 또는 
크게 개축하여 웅장한 러시아 바로크 양식으로 변모시켰다.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유혹하고 있는 여러 궁전의 대부분은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통치기에 세워진 것이다.

 

Portrait of Catherine II, 1763 by Ust-Ruditsk factory M. V. Lomonosov. Mosaic . 72 x 58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6,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예카테리나 2세 (Catherine II 1729~1796)는 러시아 제국의 황후이자 여제(1762년~1796년)다. 
로마노프 왕조의 8번째 군주로, 본래는 프로이센 슈테틴 출신의 독일인이었다. 
무능한 남편 표트르 3세를 대신해 섭정을 맡았으며, 
1762년 남편 표트르 3세를 축출하고 임페라토르가 되었다.

1745년 러시아의 황태자이던 표트르 3세와 결혼했으나 

지능이 부족하던 남편을 대신하여 섭정을 했다. 
그러나 남편 표트르에 대한 평판이 나빠지자 1762년 정변을 일으켜 

남편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표트르 대제의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면서 러시아를 

유럽의 정치무대와 문화생활에 완전히 편입시켰다. 


내각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제국의 행정과 법률제도를 개선했으며 
크림 반도와 폴란드의 상당부분을 차지함으로써 영토를 넓혔다. 
계몽주의 사상에 감명하여 볼테르 등과도 문학으로 교류하였고, 
문학과 예술, 학예와 교육 등의 장려에 큰 관심을 쏟았고 
각 지방관들로부터 직접 정무를 결재받음으로써 황권을 강화시켰다.

투르크와 싸워 영토를 넓혔으며 폴란드 분할의 주역의 한사람이었다. 
내각의 도움으로 러시아 제국의 행정과 법률 제도를 개혁했다. 
행정 개혁과 내치, 문예 부흥 등의 공적을 높이 평가해 예카테리나 대제로 불리기도 한다.

정교하게 타이핑 된 모자이크는 1763년 9월 22일 

"대관식의 엄숙한 축제"에 황후에게 선물되었다. 
황후는 옅은 분홍색의 브로케이드 드레스를 입고 프로필에 표시되며 
그 위에 황금빛 노란색 어민 망토가 드리워져 있다. 


초상화는 1740년대 후반에 유리 기술자이자 모자이크 예술가로 일하기 시작한 
로모노소프(M. V. Lomonosov)의 스튜디오에서 제작되었다. 
키예프의 성 소피아 성당과 노브고로드 교회에서 모자이크를 발견한 과학자는 
수년 동안 스몰트 (다양한 색조의 유색 유리 덩어리)를 만드는 비결을 찾고 있었다. 
러시아 최초의 화학 실험실에서 그는 스몰트 생산을 위한 기술을 개발했으며 
1750년대 초부터 창의적으로 연습하기 시작했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6, 18th century. Vishnyakov, Antropov, Argunov.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Portrait of Peter III, 1762. by Antropov A. P. oil on canvas. 242 x 174,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6,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표트르 3세 (Peter III 1728~1762)는 1762년 러시아 제국을 통치한 황제다. 
로마노프 왕조의 7번째 군주로, 홀슈타인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와 
표트르 1세의 딸인 안나 페트로브나의 아들이다. 
정식 이름은 표트르 표도로비치 로마노프(러시아어: Пётр Фёдорович Романов), 
카를 페터 울리히(독일어: Karl Peter Ulrich)이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에 의하면, 그는 정신적으로 미숙하고 
매우 친프로이센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못한 지도자가 되었다.

스웨덴의 칼 12세의 생질 카를 프리드리히 폰 슐레스비히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과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1세의 딸인 안나 페트로브나의 아들로, 킬에서 태어났다. 
1739년, 아버지가 죽자 작위를 물려받아 홀슈타인고트로프 공작이 되었다. 
따라서 그는 러시아 제국 황제와 스웨덴 국왕 양쪽 모두의 상속인으로 간주되었다.

1742년, 후사를 이을 아이가 없던 이모 러시아 제국의 여제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에 의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표트르는 14살이 되던 해부터 러시아 궁정에 살면서 
안할트제르프스트 공국의 공녀인 조피 프리데리케와 결혼했다. 
같은 독일 태생이었던 두 사람은 금방 친해졌으나 조피가 이름을 러시아식인 
예카테리나로 바꾸는 등 차츰 러시아인으로 변하며 국민적 지지를 얻을수록 
독일에 아직 강한 애착을 가졌던 표트르는 그녀를 멀리하고 
부재상 미하일 보론초프의 질녀 옐리자베타 보론초파라는 여인을 가까이 두었다.

1761년 12월 25일에 옐리자베타 여제가 서거함에 따라 

새 황제로 등극한 그는 표트르 3세로 선포되었다. 
표트르 3세는 옐리자베타의 장례기간 내내 사람들 앞에서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는가 하면, 
프로이센에 국가 기밀 정보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기도 했다. 
추도 기간이 끝난 후 표트르 3세는 즉시 프로이센 왕국과의 전쟁을 중지해, 
멸망 직전에 몰리고 있던 프로이센 왕국을 구해 주었다. 


당시 러시아는 프로이센과의 7년 전쟁에서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표트르 3세는 여전히 독일적 성향을 버리지 않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를 
우상처럼 숭배했기 때문에 승자로서 마땅히 적에게 항복의 조건을 요구하는 대신 
프로이센이 원래의 영토를 유지하게 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러시아군의 제복을 프로이센과 유사한 제복으로 바꾸어버렸다. 
그는 자국인 러시아의 국익보다는 프로이센의 안위를 더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또한 루터교의 교육을 받고 자란 그는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했음에도 
별로 신앙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황제가 된 후에는 
모든 교회의 재산을 몰수해 국유화해버렸고, 성직자들에게 수염을 깎고 
루터교의 목사처럼 옷을 입으라고 강요했다.

표트르 3세는 이제 공식석상에서도 정부인 옐리자베타 보론초바와 함께 지냈고 
오직 황족에게만 허용되는 여러가지 특권들을 그녀에게도 허용했다. 
그에 반면 아내인 예카테리나에게는 수시로 폭력을 휘두르거나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모욕을 주는 데다가 심지어는 감옥에 가두는 등 악행을 저질렀다. 
이렇게 계속되는 실정과 방탕한 생활로 표트르 3세는 급속히 민중으로부터 지지를 잃어갔다. 
그러나 황후 예카테리나는 그녀의 오랜 친러시아 성향과 교양 있는 행동으로 
점차 민중의 환심을 얻어 남편과 큰 대조를 이루었다.

드디어 1762년 여름 표트르 3세의 통치 반년 만에 예카테리나는 
황실 근위대의 도움을 얻어 남편 표트르 3세를 폐위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예카테리나 2세라고 선포하였다. 
국민적 지지를 얻은 그녀는 페테르부르크 주위의 모든 성문과 다리를 봉쇄할 것을 지시했다.

그 무렵 아무것도 모른 채 정부와 함께 페트르호프 별궁으로 가던 표트르 3세는 
잠시 후 예카테리나가 반란을 일으켜 러시아의 새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소식에 당황해 어쩔 줄 모르고 있던 표트르 3세에게 측근들은 
크론슈타트 해군 기지로 피신할 것을 권했다. 
거기에 있는 함대의 지지를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표트르 3세는 음식, 술, 의상 등을 배에 싣기 위해 시간을 낭비했고, 
반면에 예카테리나는 민첩하게 크론슈타트 군 지휘관들에게 
전갈을 보내 그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크론슈타트 해군들이 반란에 동참했다는 것을 알고 
표트르 3세는 경악해서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측근들은 다시 그에게 충성할지도 모를 군대가 덴마크의 침공에 대비해 
레벨항에 집결해 있으니 그 곳으로 가자고 권했다. 
그러나 표트르 3세는 이미 기진맥진하여 결단을 내릴 능력을 상실해버렸다. 
그는 그 곳으로 가는 대신 낮잠을 잤다.

6월 29일 표트르 3세는 예카테리나 2세가 제국에 대한 
모든 권리를 영원히 포기하라고 작성한 문서에 순순히 서명했다. 
이후 예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 3세를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의 

여름 별장으로 보내 오를로프 백작 형제로 하여금 감시하게 했다. 
그러나 예카테리나 2세는 정통성을 가진 표트르 3세가 살아있는 한 
자신의 제위가 결코 안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카테리나 2세가 제위에 오른 지 1주일 후에 사형판결을 내리고 
그녀의 오른팔인 알렉세이 오를로프에 의해 표트르 3세는 교살형을 당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표트르 3세는 심한 복통으로 인한 출혈로 사망했다고 공표되었다. 
표트르 3세의 사형을 예카테리나 2세가 직접 명령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녀가 바라던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초상화는 화가 알렉세이 안트로포프(Antropov A. P. 1716~1795)의 전문 기술, 
왕좌가 있는 왕실 설정의 액세서리, 왕권의 예복, 

고급스러운 가운에 인물을 배열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Portrait of Princess Ekaterina Lobanova-Rostovskaya, 1754. by Argunov I. P. oil on canvas. 
81,5 x 62,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6,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반 아르구노프(Ivan Petrovich Argunov 1729~1802) 작, 
에카테리나 로바노바 로스토브카야 (Ekaterina Lobanova-Rostovskaya 1735~1802) 공주의 초상화.

이반 아르구노프(Ivan Petrovich Argunov 1729~1802)는 러시아의 화가다.
1746~1749년 이반 아르구노프는 당시 러시아의 엘리자베스 황후가 고용한 
독일 화가 게오르그 그루트와 그림을 공부했다. 
이반 아르구노프는 러시아 초상화 학교의 창립자 중 한 명이다.
그는 1757년 제국 예술 아카데미가 열리기 전인 1753년부터 회화 수업을 가르쳤다. 

에카테리나 로바노바 로스토브카야 (Ekaterina Lobanova-Rostovskaya 1735~1802) 공주의 
초상화에서는 물체의 성질, 레이스의 질감, ​​귀걸이가 능숙하게 표현되고 있다. 
몸의 모양을 드러내지 않는 천의 주름은 전문적으로 처리되었다. 
그림은 차가운 레몬 색과 은색 톤이 지배적이다. 
초상화의 여 주인공은  붉은 망토에 그려져 있다.

 

Portrait of the Horse Guards Officer Prince Ivan Lobanov-Rostovsky, 1750. by Argunov I. P. oil on canvas. 
89 x 70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6,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반 이바노비치 (Ivan Ivanovich Lobanov-Rostovsky 1731~1791) 왕자는 오늘날 러시아에서 
로스토프 공국을 통치한 류릭(Rurik) 가문 한 분파의 자손이다.
15세기 말 로스토프 공국의 군주인 콘스탄틴 바실리 예비치의 증손자였던 
이반 이바노비치 왕자의 문장은 그들의 부계 조상이 통치했던 두 도시인 
키예프와 로스토프 공국의 상징을 결합한다. 
이 호화로운 집안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내의 로바노프-로스토프스키 궁전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 작품은 이반 아르구노프(Ivan Petrovich Argunov 1729~1802)의 가장 오래된 초상화이다. 
그것은 서유럽 의식 초상화의 구성 원리와 고대 러시아 

그림에서 나오는 강성과 평탄함의 특징을 결합한다. 
따뜻한 색조로 포화되고 짙은 색상이 두드러진다.

 

Building of the Twelve Collegia, Third quarter of the 18th century. Unknown artist. oil on canvas. 
72 x 121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6,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Painting, Desudeport. 1754. by Sukhodolskiy B. V. oil on canvas. 100 x 208 cm. (curly outline)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6,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데수드포트(Desudeport)는 궁전 옥외 장식이다.
이 작품은 벨스키(A.I. Belsky)와 허소프(I. Firsov)가 수코돌스키(Sukhodolsky B. V.)와 
동시에 작업한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예카테링고프 궁전을 위해 작성되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근처의 예카테링고프 궁전은 엘리자베스 페트로브나 황후 통치 기간에 
표트르 대제가 아내 캐서린에게 기증한 최초의 목조 궁전 부지에 지어졌다. 
1825년 궁전에 표트르 대제 시대의 박물관이 문을 열었고 
1848년 박물관의 전시물은 예카테링고프 궁전에서 겨울 궁전으로 옮겨졌다. 
1924년에 건물은 화재로 손상되었고 1926년에는 해체되었다.

 

Portrait of Count Wilhelm Georg von Fermor, Second half of the 1750. 
by Vishnyakov I. Ya. oil on canvas. 135 x 109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6,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화가 이반 비슈냐코프(Ivan Yakovlevich Vishnyakov 1699~1761)는 러시아의 초상화 화가였다.
그는 잠시 바니셔로 일한 후 1727년 건물총회 (Office of buildings)로 보내져 
러시아에 거주하는 프랑스 초상화 화가인 루이 카라바크(Louis Caravaque)와 
안드레이 마트베예프(Andrey Matveyev)에게 공부했다. 
그는 1739년 화가로 자격을 얻었고 안드레이 마트베예프가

일찍 사망하자 건물총회의 회화 책임자가 되었다.

이반 비슈나코프는 여름궁전, 아니치코프 궁전, 겨울궁전을 포함하여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그 교외의 많은 궁전과 교회에 벽화를 그렸다. 
그는 또한 초상화와 아이콘을 만들고 그림을 복원하고 외국 예술가의 작품을 평가했다. 
그의 초상화는 황실에서 선호하는 평평하고 정적인 스타일에서 출발한 최초의 인물 중 하나이다. 
하지만 비슈냐코프의 작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 초상화는 전해져 내려온 몇 안 되는 비슈냐코프의 작품 중 하나다. 

1746년부터 1757년까지 건물 총리를 맡은 빌헬름 퍼머(Wilhelm Fermor)는 종종 
"페인팅 팀"의 책임자인 비슈나코프와 함께 일을 해야 했고 

그래서 그에게 아이들의 초상화를 주문할 수 있었다. 

빌헬름 게오르그(Wilhelm Georg)는 빌헬름 퍼머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초상화에서 빌헬름 게오르그는 약 7~8세의 소년으로 묘사되어 
그림이 1750년대 후반에 기인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는 루돌프 폰 알브레히트(Ludolph von Albrecht) 대령의 딸과 결혼하여 

초상화가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Portrait of Sarah Eleanore Fairmore, 1749~1750(?). by Vishnyakov I. Y. oil on canvas. 
138 x 114,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6,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세라 엘레아노어 퍼머(Sarra-Eleanor Fermor 1740~1805)의 초상화.
이 초상화에 묘사된 10살 소녀는 스코틀랜드 귀족 빌헬름 퍼머(Wilhelm Fermor)의 딸이다. 
1742년부터 1757년까지 그는 건물 사무실을 이끌었고 경험이 풍부하고 숙련된 마스터인 
이반 비슈냐코프(Ivan Yakovlevich Vishnyakov 1699~1761)가 회화 작업팀을 이끌었다.

당시의 관습에 따르면 세라 퍼머는 손에 부채가 있는데 콜테무도회 가운을 입고 
곱슬 머리를 한 엄숙한 포즈와 복장을 한 성인 소녀로 묘사된다. 
몸의 뻣뻣함, 불균형하게 길쭉한 손, 흐르는 선의 절묘한 아름다움, 우아한 제스처, 
무거운 휘장, 기둥 및 난간이 있는 배경은 공식적인 의식 초상화의 전형이다. 
약간의 어색함과 움직임의 뻣뻣함, 자세의 긴장은 십대 소녀의 
생생하고 시적이며 감동적인 이미지의 생성을 방해하지 않는다. 

 

[영상] Hall 6, 18th century. Vishnyakov, Antropov, Argunov.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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