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6, Nikolai N. Ge, The State Russian Museum.

 

니콜라이 게 (Nikolai Nikolaevich Ge 1831- 1894)는
러시아 사실주의 화가로 역사적, 종교적 그림으로 유명하다. 
니콜라이 게는 조부가 18세기에 러시아로 이민 온 프랑스 혈통의 귀족 가문 태생이다.   
그는 조실부모하고 농노 유모의 손에 컸다.   
키에프와 상 페테르부르그 대학에서 물리학과 수학 전공하다 황립예술학교로 옮긴다.   

니콜라이 게는 우크라이나 사실주의 화가이면서 상징주의자로,  
역사화와 기독교적 주제를 색다른 해석으로 진지하게 탐구했다.  
니콜라이 게의 작품은 점점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어려서부터 물리학과 화학을 공부하던 게(Ge)는 제정(帝政) 러시아 시절에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 대학 (Kyiv University)과 상트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공부하던 과학도였다.  
20세이던 1850년이 되어서 그동안 자신의 경력을 포기하고, 뒤늦게  
상트페테르부르크 제국 미술학교에 입학해서 화가 수업을 쌓았다. 

 

The With of Endor Summoning the Prophet Samuel's Spirit (King Saul at the Witch of Endor), 1856.
by Nikolai N. Ge. oil on canvas. 288 x 341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6,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중요한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자신의 운명을 알고 싶었다. 
엔도르의 마법사는 예언자 사무엘의 그림자를 불러들였다. 
선지자는 어느날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통치자와 그의 아들들이 끔찍한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1857년 니콜라이 게는 이 그림으로 제1위 금상과 미술가 칭호, 해외 출장을 받았다.

 

Peter I interrogates Tsarevich Alexei in Peterhof, 1872. by Nikolai N. Ge. oil on canvas. 134.5 x 173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6,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표트르 1세 대제께서 황제의 궁전 페테르호프에서 황태자 알렉세이 페트로비치를 심문하다. 
이 작품은 역사화라는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림의 배경이 되는 페트르호프는 황금빛 조각과 분수로 장식된 표트르 대제의 여름궁전이다.  
표트르 대제의 위업을 아름답게 빛내 주는 이곳은 실내 벽면에  
대제가 수입한 서유럽의 명화들이 줄지어 걸려 있다. 

당당한 풍채에 다리를 꽈아 자신감을 드러낸 대제에 비해  
큰 키에 마른 체형의 황태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나약한 인상을 풍긴다.  
강렬한 눈빛으로 자신을 배반한 아들을 노려보는 대제의 얼굴에서 비극이 암시된다.  
좌우로 나누어진 구도에 의한 대립적 인물 배치 역시 마찬가지다.  
비극에 대한 반복적인 복선을 설치한 작품이라 볼 수 있다. 

황제에 오르기 전 형인 이반과 동생인 소피아를 물리치고 
어머니 세력을 덥고 황위에 오른 표트르 대제는 총병들의 반란을 격은 후 
형, 동생과 그 세력을  척결하고 자리를 공고히 굳혔다.  
그리고 그 힘으로 서구화 정책을 밀고 나가기 시작한다.   
그후 유럽과의 통로 확보를 위해 스웨덴과 2차례 전쟁을 거쳐  
발트해 연안을 확보하고 상테폐테르부르크를 건설하였다.  

황태자 알렉세이는 표트르 대제와 첫 번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알렉세이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서 버림을 받았다.  
알렉세이는 아버지를 미워하면서 자라났으며 옛 러시아 방식을 숭상했다.  
대제의 개혁을 탐탁치않게 여겼던 보수주의자들은 알렉세이를 지지했다. 

이를 알고 있는 포트르대제는 아들에게 생활방식을 바꾸던지  
제위 계승을 포기 하던지 선택할 것을 강요했다.  
아들은 결국 제위 계승을 포기하고 국외로 도피한다.  
이것은 단순한 부자간의 갈등이 아니고 러시아의 미래에 대한 심각한 사상적 대립이었다.  

알렉세이는 1718년 러시아로 돌아왔으나 국가 반역죄로 체포된다.  
아버지는 아들을 고문하고 자백을 받아냈으며, 사형선고라는 잔혹한 결정을 내린다.  
그런데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알렉세이는 사체로 발견된다.  
그림 속에서 벌어진 논쟁의 결론은 일단 역사가 증명한다.  
제위 계승의 포기와 해외 도피로 이어진 알렉세이의 행보가 반증하듯이  
그에게는 표트르 대제의 정책을 뛰어 넘을 대안이라는 것이 없었다. 

실제로 이 그림이 그려진 1870년대 지식인들을 

행동하게 했던 것은 서구주의자들의 사상이었다.  
벨렌스키, 헤르첸, 바쿠닌의 사상은 헤겔 등의 독일 관념론에 기초한 것이며  
훗날 사회주의 혁명의 기반이 되는 마르크시즘 역시 서구 사상이었다.  
이들이 주장하는 진보와 발전, 이것은 당시 지식인들의 

마음 속 깊이 새겨진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은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는 법이다.  
헤르첸의 영향을 받은 인민주의자(나로드니키)들은 혁명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서  
민중 속으로 흩어져 들어가는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 운동가들은 민중들의 몰이해와 불신 속에서 좌초하고 말았다.  
진리는 현실에서는 결코 단선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결국 승리는 표트르 대제의 것이었지만,  
그는 아들을 살해한 혐의를 받은 인륜에 어긋난 아버지였다.  
그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 것인가?   
부정과 악에 대해서 예술이 어떤 답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스스로가 확신을 할 수 없었던 니콜라이 게는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가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대문호 톨스토이 때문이었다.  
니콜라이 게는 톨스토이 철학의 신봉자가 된다.  
화단에 복귀한 그가 남긴 명작 가운데 하나가 예수와 빌라도의 대화를 그린  
<진리란 무엇인가?> 라는 작품이다. 

1870년 역사 주제의 이 그림 '페테스부르크에서 알렉세이 황태자를 심문하는 표토르 대제'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같은 쟝르의 다른 그림들은 냉대를 받자 니콜라이 게는 
'화가는 농사를 지어먹고 살아야지 그림을 판다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 니콜라이 게는 우크레이나에 농장을 사서 이주했다.  
게는 톨스토이와 친하게 됐고 그의 철학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그림의 배경이 되는 페트르코프는 황금빛 조각과 

분수로 장식된 표트르대제의 여름궁전이다 . 
표트르대제의 위업을 아름답게 빛내주는 이곳은 실내 벽면에  
대제가 수입한 서유럽의 명화들이 줄지어 걸려 있다.   

아버지 표트르 대제는 자신감 있는 자세로 앉아 아들을 매섭게 노려본다. 
바닥에 떨어져 잇는 문서는 방금 그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테이블에 한손을 엊고 비스듬히 서 있는 아들 알렉세이의 허약한 실루엣은  
아버지의 당당한 풍채와 비교가 된다. 

표트로대제의 발밑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나가는
체스판 모양의 바닥은 심리적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다 종국에는 반란까지 획책한  
아들을 심문하는 대제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이 작품은 트레치야코프(Tretyakov) 미술관에 있는 1871년 동명의 그림을 반복한 것이다.

 

Portrait of Leo Tolstoy, 1884. by Nikolai N. Ge. oil on canvas. 96 x 71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6,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작가 레오 톨스토이의 초상
레오 톨스토이는 세상의 질서를 운용하는 진리를 찾기 위해 

문학작품을 쓴 작가이자 사상가이다.  
그의 작품의 예술성은 바로 치열한 진리 탐구로 생겨난 것이다.  
그럼에도 톨스토이는 자신의 작품들이 진리를 

직접 표현하지 못한다며 항상 불만스러워했다.  
그는 예술로 직접 진리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불멸의 진리를 밝혔음에도  
그는 독자들이 진리를 금방 알아챌 수 있도록 후기에는 아예 예술을 부정하고  
쉬운 민담 투의 단편이나 단순한 구도의 희곡, 심지어는 짧은 경구들을 쓰기까지 했다.  
톨스토이에게 예술로 하여금 진리작용을 일으키게 하는 점은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였던 셈이다.  


그런데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은 이동파 화가 니콜라이 게는  
<안나 카레니나>의 한 부분을 묘사한 그림 <진리가 무엇인가?>에서  
관람자가 직접 진리를 체험할 수 있게 표현했다.  
톨스토이가 평생 고민한 문제를 화가 니콜라이 게가 그의 영향을 받아 이룬 것이다. 

니콜라이 게는 톨스토이와 친하게 됐고 그의 철학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후기의 니콜라이 게는 종교화와 인물화로 돌아왔다.  
그의 신약에 근거한 종교화는 진보파의 환영을 받았으나, 동시에 보수파의 비난을 받았다.  
1894년 체르니코프주 이와노프촌에서 6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니콜라이 게는 자신의 그림을 스위스의 한 후견인에게 넘겼는데 그 후 행방이 묘연했다.   
1974년 스위스의 어느 수집가가 중고매매상에서 그림이 가치 있다 생각해 대부분 구입했다.  
그림들이 분산 소장되는 걸 막기 위해 결국 트레치코프 갤러리가 나서서  
러시아 국가 은행의 후원으로 전량 구매하여 영구 소장하게 되었다.

 

Portrait of Elena Likhacheva, 1892. by Nikolai N. Ge. oil on canvas. 103 x 71.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6,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작가이자 사회 운동가인 엘레나 리카체바(Elena Osipovna Likhacheva 1836~1904)의 
초상화 구성 솔루션은 니콜라이 게의 초상화 작업의 전형이 아니다. 
리카체바는 그녀의 서재 테이블에서 묘사되어 있다. 
다양한 오브제에 둘러싸여 검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작은 모습은 길을 잃은 것 같다. 
리카체바의 눈은 시청자를 집중적으로 바라보고 지성과 영적 깊이를 읽는다.
지적이면서도 조용한 노부인의 표정과 궤뚫어보느 듯한 예리한 시선이 매혹적이다. 
초상화 속의 나이든 여인이 살아 숨쉬며 바로 앞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6, Nikolai N. Ge, The State Russian Museum.

 

The Last Supper, 1863. by Nikolai N. Ge. oil on canvas. 283 x 382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6,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누군가 서 있다. 
어떤 불길한 예감이 찾아온 듯하다가 어둠 속에 놀란 베드로의 눈과 
호기심 가득한 제자들 사이에 예수가 마지막 만찬의 침상에 비스듬이 누워 있다. 
다가 올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다빈치의 것과는 다른 분위기가 당시의 분위기를 실감하게 한다.
“유다의 검은 그림자가 일으킨 화면의 균열은 마치 <죄와 벌> 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 (균열이라는 뜻의 단어 ‘라스콜’에서 유래)를 떠올리게 한다”

이 작품 최후의 만찬 (The Last Supper)은 압권이다. 
이제 최후를 맞아들여야 하는 예수의 고뇌에 찬 표정, 즐거운 작별의 만찬 모습은 아니다. 
그 순간 모든 제자들이 바라보고 있는 시선은 불길한 어둠 속의 검은 그림자를 응시하고 있다. 
정말 놀라운 그림이다. 

전통적인 최후의 만찬 그림은 서구식 식탁 의자에 두루 앉아 있는 모습이지만, 
니콜라이 게의 최후의 만찬은 예수께서 비스듬히 누워 마지막 만찬을 맞고 있다. 
십자가 처형에서 티(T)자형 십자가가 그렇듯이 유대인의 만찬 모습에 가까운 현장이다. 
그가 절절한 사실주의 화가이듯이 얼마나 고증에 충실했던 화가였는지를 보여준다. 

뛰어난 초상화이자 역사적 화가인 니콜라이 게는 윤리적, 

철학적 의미로 가득 찬 이미지와 주제에 끌렸다. 
'최후의 만찬'은 미술가의 첫 번째 주요 작품이자 최근 학생이자 예술 아카데미의 연금 수령자다. 
그리스도와 유다의 대조, 한 학생의 배신을 예견했지만 
자기 희생을 준비한 교사의 비극은 캔버스의 극적인 갈등의 기초이다. 
피렌체에서 썼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져 뜨거운 논란을 일으켰다. 

예술 아카데미는 그림이 "특별한 예술로" 완성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대담한" 붓으로 동시대의 표현으로 구체화된 복음 이야기의 비정경적 해석은 
저자에게 "유물론"과 "천박함"에 대한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교회 당국은 그림에 대해 반대했고, 그것을 복제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동시에 주요 비평은 작품의 중요성, 전통적인 플롯에 대한 깊은 인간적 해석, 
시대와 매우 관련이 있는 그림의 사회적, 도덕적 문제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했다. 
1863년 이 그림으로  니콜라이 게는 교수의 칭호를 받았다

 

Portrait of Leo N. Tolstoy, Bust. 1890. by Nikolai N. Ge. Bronze. 74 x 54 x 31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26,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1890년 가을 니콜라이 게는 톨스토이의 저택 야스나야 폴리아나(Yasnaya Polyana)에 
머무는 동안 레오 톨스토이의 흉상을 제작했다.
이 동상은 톨스토이의 첫 번째 조각 초상화가 되었다.

 

[영상] Nikolai N. Ge, Hall 26, The State Russian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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