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은 소년 시절에 이미 시를 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성격은 활달하였다.

깊은 학식과 검술를 갖춘 이백은 정치에 뜻을 두었으나 벼슬에 오르지 못하고, 시인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어느 날, 현종은 이백을 불러서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하였다.

"벼슬 한 자리 내리시려나 ?"
이백은 가슴이 부풀었으나, 그 기대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잔치 때, 짐 곁에서 시나 좀 지어 주고 지내시오."
그것은 궁정 시인이 되라는 부탁이었다.


이백은 궁정에서 시를 짓는 사람들과 어울려 술이나 마시면서 지냈다. 

'아 ! 고향에 가고 싶구나.'


이백은 궁정 생활이 따분하기 그지없었다.

하루는 이백이 궁궐을 빠져나와 번화가의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술에 잔뜩 취했을 때, 이 무렵의 명가수인 이귀년이 찾아왔다.


"폐하께서 시를 지으시라 하오.그것을 내가 불러야 하는데………."
이귀년은 술이 곤드레 만드레 취한 이백을 들쳐 업고 궁궐로 돌아갔다.

당시 궁중 실력자이던 환관 고력사(高力士)가 이백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이백의 신발을 벗기는 고력사(高力士)


당나라 현종은 흥경궁 공원에서 붉은빛, 자줏빛, 분홍빛, 새하얀 빛의 모란이 만발한 침향정(沈香亭)가에

음악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양귀비(楊貴妃)와 빠져 지냈다.


양귀비와 술을 마시며 모란을 감상하던 현종이 갑자기 한림학사(翰林學士) 이백(李白)을 불러오라 명한다.

공교롭게도 이백은 잔뜩 취해 있다.


황제 앞에 불려 와서도 여전히 취한 상태다.

현종은 그를 곁으로 올라오게 한다.


"내 신, 신 좀 벗겨."
이백은 당대 궁중의 실력자 환관 고력사에게 발을 내밀었다.


황제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던 고력사이건만 무릎을 꿇고 이백의 신발을 벗겨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노여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술만 안취했으면 뺨이라도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찬물을 얼굴에 뿜어도 이백은 술이 깨지 않았다.


겨우 정신을 차린 이백에게 현종이 어서 시를 지으라고 재촉한다.

붓을 집어든 이백은 일필휘지로 시를 써 내려간다.


바로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이다.

이귀년은 그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불렀다.


양귀비를 선녀에 비유한 뒤, 마지막에는 아름다운 꽃(모란)과 미인(양귀비) 덕분에

온갖 근심을 날리고 침향정 난간에 기대어 웃음 짓는 군왕(현종)을 노래했다.


하지만 현종과 양귀비를 모두 만족시킨 이 시가 뜻밖에도 화근이 될 줄이야!

조비연(趙飛燕)도 양귀비보다 못할 거라는 구절이 문제였다.


한나라 성제(成帝)의 황후였던 조비연은 왕실을 망가뜨린 악녀의 전형이다.

물론 이백은 조비연을 미인의 대표 격으로 인용했지만,

무릎 꿇고 이백의 신발을 벗겨야 했던 고력사가 이 구절을 트집 잡아 양귀비에게 참소한다.


"이백은 귀비를 한나라 성제의 총희인 조비연에 비유하여 비난하고 있습니다."
양귀비는 이 말을 듣고 이백을 미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현종은 이백에게 궁을 떠날 것을 명한다.

〈청평조의 가사〉에는 사실 양귀비를 비난하는 내용이 숨겨져 있었다.


이 시는 이백의 명작이다.

이백은 스스로를 ‘술에 취한 신선’이라고 했다.


이백은 청평조사에서 ‘경국(傾國)’이라는 말로 미인을 표현했다.

경국이란 나라를 기울게 할 정도의 미모, 황제가 미혹되어 나라의 위기조차 감지하지 못할 정도의 아름다운 여인을 일컫는 말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미인에겐 죄가 없다.

미혹된 황제가 죄인일 뿐. 현종도 그리고 태종도 자신의 갖가지 욕망 앞에서 무너졌다.

그들의 진짜 죄는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은 죄다.


淸平調詞 -1  청평조(淸平調)라는 음악의 곡조에 맞추어 지은 가사(歌詞)라는 뜻


雲想衣裳花想容 운상의상화상용
春風拂檻露華濃 춘풍불함노화농
若非群玉山頭見 약비군옥산두견
會向瑤臺月下逢 회향요대월하봉

구름은 옷을 꽃은 얼굴을 생각하게 하고
봄바람은 난간을 스치고 꽃에 맺힌 이슬은 짙게 영그네.
만일 군옥산 머리에서 본 님이 아니라면
필시 달 밝은 요대에서 만난 님이 틀림없네.


淸平調詞 -2 


一枝濃艶露凝香 일지농염노응향
雲雨巫山枉斷腸 운우무산왕단장
借問漢宮誰得似 차문한궁수득사
可憐飛燕倚新粧 가련비연의신장

한가지 농염한 모란꽃에 엉긴 이슬 향기
무산의 구름비 하염없는 단장의 슬픔이여.
한나라 궁중의 누구와 비할소냐.
조비연이 산뜻이 단장하여 아리땁구나.


淸平調詞 -3   


名花傾國兩相歡 명화경국양상환
常得君王帶笑看 상득군왕대소간
解釋春風無限恨 해석춘풍무한한
沈香亭北倚欄干 침향정북의란간

모란꽃과 경국지색 서로 반기니
왕은 웃음 띄우고 바라보네.
봄바람에 끝없는 한을 풀어 녹일 때
미인은 침향정 북쪽 난간잡고 기대네.








이백 친필 1 시권장류(詩卷長留)


두보(杜甫)의 시 - 송공소부사병귀유강동겸정리백(送孔巢父謝病歸遊江東兼呈李白,747年)
공소부가 병으로 사임하여 강동으로 돌아가 쉬려 하니 송별을 겸해서 이백에게 드린다


巢父掉頭不肯住,(소부도두불긍주)
東將入海隨煙霧。(동장입해수연무)
소부는 머리를 흔들며 머물지 않으려 하고,
강동에서 장차 바다로 가 안개 따라가려 하네


詩卷長留天地間,(시권장류천지간)
釣竿欲拂珊瑚樹。(조간욕불산호수)
길이 남을 시집을 세상에 남겨두고,
낚싯대로 산호수에 앉은 먼지 터네。


深山大澤龍蛇遠,(심산대택룡사원)
春寒野陰風景暮。(춘한야음풍경모)
깊은 산 큰 못으로 용과 이무기 멀리 떠가고,
추운 봄날 음산한 들녘에 풍경은 저물어 가네。


蓬萊織女回雲車,(봉래직녀회운거)
指點虛無是征路。(지점허무시정로)
봉래산 직녀가 구름수레 되돌려,
허황된 점 지적하니 이것이 가야 할 길이네。


自是君身有仙骨,(자시군신유선골)
世人那得知其故。(세인나득지기고)
본래 그대 몸은 비범한 골격인데,
세상 사람들이 어찌 그 까닭을 알겠는가。


惜君只欲苦死留,(석군지욕고사류)
富貴何如草頭露。(부귀하여초두로)
다만 그대를 아끼기에 한사코 머물게 하고 싶지만,
부귀란 것이 어떤가 풀잎 끝 이슬이거늘。


蔡侯靜者意有餘,(채후정자의유여)
清夜置酒臨前除。(청야치주림전제)
채후는 조용하고 마음이 넉넉하여,
맑은 밤 술을 놓고 섬돌 앞에 있었네。


罷琴惆悵月照席,(파금추창월조석)
幾歲寄我空中書。(기세기아공중서)
거문고 마치고 서글프게도 달은 자리를 비추는데,
그 어느 해에나 나에게 하늘서신 보내려나


南尋禹穴見李白,(남심우혈견리백)
道甫問訊今何如。(도보문신금하여)
강남에서 우 임금 무덤 찾아 보다가 이백을 만나거든,
두보가 지금은 어떠신지 묻더라고 안부 전하게。


*孔巢父: 徂徠山 竹溪六逸의 한 사람 -> 李白: 魯郡東石門送杜二甫 참조
學問을 좋아했고 永王燐이 반란을 일으키고 幕下로 불렀으나 거절했다
*珊瑚樹: 庭園樹의 한 種類
*蓬萊: 方丈, 瀛洲와 함께 三神山의 하나로 神仙이 산다고 한다.
*苦死: 한사코, 반드시
*蔡侯靜者意有餘,清夜置酒臨前除:  채후는 조용하고 마음이 넉넉하여, 맑은 밤 술을 놓고 섬돌 앞에 있는 고고한 사람이었지만 宣王의 명을 받드는 것을 알지 못해 죄인이 되어 오랏줄에 묶인 것을 비유하여 富貴何如草頭露의 부분의 부귀란 것이 덧없다는 예를 들고 있다.
<劉向新序 雜事二 50>에  <전략> 蔡侯之事故是也。蔡侯南遊乎高陵,北經乎巫山, 逐麋麇麞鹿,彉谿子隨, 時鳥嬉遊乎高蔡之囿, 溢滿無涯,不以國家為事,不知子發受令宣王, 厄以淮水,填以巫山, 庚子之朝,纓以朱絲,臣而奏之乎宣王也。<후략>
*蔡侯: 蔡나라(BC11c~BC447)는 주대에 중국에 존재한 侯國이다. 諸侯의 성은 姬이며, 爵位는 侯爵이다. 蔡侯는 蔡나라 마지막 諸侯 姬齊(BC450~BC447)의 爵位다.
*禹穴: 禹 임금이 藏書한 동굴로 浙江省 會稽山 뒤에 있다. 禹임금이 巡狩 중 會稽山에서 崩御하여 그 자리에 장사했다.

*道: ~로부터


이백(701~762)은 장안을 떠나 방랑의 길에 올라 여행을 하다가 두보(杜甫)를 만나고 두 사람은 형제같은 사이가 되었다.

두 시인은 함께 하남 지방과 산동 일대를 두루 돌아다니며 시를 읊고 술을 즐겼다.

그러다가 이백은 두보와 헤어져 각각 여행을 떠났다. 이백은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두보(712~770)는 양양에서 태어나 하남성 공현으로 이사하였다.

자(字)는 '자미(子美)'이고, 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 할아버지인 두심언(杜審言) 또한 뛰어난 시인이었다.


시인의 가문에서 자란 두보는 7살 때 (봉황시)를 지어 천재라는 말을 들었다. 두

보는 20살 때 여러 곳을 유람하면서 많은 시를 썼다.


"과거나 한번 볼까 ?'
장안에 올라가서 과거를 보았으나, 두보는 떨어지고 말았다.


그뒤, 두보는 낙양에서 이백과 작별하고 다시 장안으로 올라왔다.

두보는 인재를 널리 구하기 위해 현종이 실시한 시험을 보았으나 또 떨어지고 말았다.


이 무렵, 간신 이림보는 자기 보다 나은 인재가 조정에 들어올까봐 시험을 본 사람 전체를 낙방시켰다.

두보는 장안에 머물며 가난에 쪼들리는 생활을 하였다.


두보는 자식이 굶어 죽는 것까지도 보아야 하는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두보는 권력자들의 향락과 사치를 미워하는 시를 지었다.


그뒤,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두보는 반란평정에 뛰어들었다.

이때, 이백은 영왕 인(璘)의 요청으로 그의 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영왕이 숙종에게 반역자로 몰려 토벌당하는 바람에 이백도 체포되었으나 간신히 죽음을 면하였다.


이백은 강남일대를 방랑하다가 62살로 세상을 떠났다.

두보는 반란군에게 체포되었으나 간신히 도망쳐 나왔다.


여러 곳을 방랑하던 두보는 낡은 배 안에서 59살 때 병으로 죽었다.
이백과 두보는 각각 1천수가 넘는 시를 지었고, 많은 명작을 후세에 남겼다.

이백은 시선(詩仙) 으로, 두보는 시성(詩聖)으로 일컬어진다.



이백 친필 2














이백기념관(李白記念館)


안후이성[安徽省] 마안산[馬鞍山] 서남쪽에 있는 양쯔강[揚子江] 동쪽 끝에 위치한

채석기(采石磯) 풍경 명승구 내에 있다.


풍경구의 4대편구(片区) 특색은 각기 달라 차이스기편구(采石矶片区)는 위대한 시인 이백(李白)과 관련된 문화를 위주로

전쟁문화와 종교문화가 곁들어진 지역이며 복당편구(濮塘片区)는 양호한 생태환경을 기초로

대나무 경관과 대나무 문화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대한 감상과 휴식 위주의 지역이다.


칭산편구(青山片区, 청산편구)는 이백문화와 사조문화(谢脁文化) 위주로 종교문화와 휴식오락 기능이 추가된 관광유람구이며

헝산편구(横山片区, 횡산편구)는 자연생태경관을 특색으로 하고 있는 관광지역이다.


차이스기편구(采石矶片区)의 지형은 매우 험준하여 금릉(金陵)으로 향하는 문호역할을 하며

역대 전략적 중요지역으로 춘추시기부터 민국 연간에 이르기까지 이곳에서는 20여 차례의 유명한 전투가 발생하였다.


경내의 광제사(广济寺)는 삼국시기 적오(赤乌) 3년(239) 건립된 중국 초기 불교사찰의 하나이며

소주화산(小九华山)의 지장왕묘(地藏王庙)도 한때 번성하였었다.







태백루(太白樓) 곽말약(郭沫若 1892~1978)의 글씨


당이공청련사(唐李公靑蓮祠) · 적선루(謫仙樓)라고도 한다.

당나라의 시인 이백은 말년에 차이스지 부근의 당투현[當塗縣]에 은거하다가 사망하였는데,

얼마 뒤 사람들이 그를 기려 지은 사당이 청련사이다.


산세에 따라 축조되었으며, 주루(主樓)와 2개의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2개의 정원은 전원과 후원으로 분리되면서도 연결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 주루가 있다.


홑처마 헐산식(歇山式) 구조의 대문(大門)은 아치 모양의 문이 3개 있다.

가운데 문에는 '당이공청련사(唐李公靑蓮祠)'라고 크게 적힌 현판이 걸려 있고,

양쪽 벽에는 〈중수태백루비기(重修太白樓碑記)〉와 이백의 사적을 소개한 비각 등이 있다.


주루는 누각식(樓閣式) 목조 건물로, 구조가 교묘하고 장식이 화려하다.

모두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겹처마 헐산식 지붕이다.


3층 지붕 아래에 '태백루'라고 크게 적힌 편액이 걸려 있다.

1층에는 이백이 차이스지를 유람하는 그림을 담은 커다란 병풍이 있고,

2층과 3층에는 황양목(黃楊木)으로 조각한 이백의 입상(立像)과 와상(臥像)이 있다.


벽에는 송나라 화가 왕단(王端)이 그린 인물화와 청나라 시인 정섭(鄭燮)이 그린 묵죽도(墨竹圖)가 걸려 있다.
차이스지의 절벽에는 착월대(捉月臺)라는 튀어나온 돌이 있는데,

술에 취한 이백이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고 이 돌에서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전설이 담겨 있다.


차이스지 부근에는 이백의 의관총(衣冠冢)도 있는데,

어부들이 강 하류에서 그의 의관을 발견하고는 당투현에 매장하였다가 이곳으로 이전한 것이라고 한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women/746886.html


사회여성

이화민주동우회 창립 주도 박혜숙 열사 추모

등록 :2016-06-05 18:47



이화민주동우회는 5일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서 유가족과 함께 박혜숙 열사의 추모제를 열고
 ‘공적 안내판’을 세웠다. 박 열사는 1972년 이대 약대에 입학해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부회장을 비롯
민가협 결성에 참여했고, 위암 투병중에 건강사회를 위한 전국약사회와 이민동 창립을 주도하다 2004년 별세했다.
명동 YWCA위장결혼식 사건과 민청련 운영위원장으로 고초를 겪은 최민화씨의 부인이다.


참고


























采石磯(채석기)


안후이성[安徽省] 마안산[馬鞍山] 서남쪽에 있는 양쯔강[揚子江] 동쪽 끝에 위치하며,

난징[南京]에서 남서쪽으로 50km 떨어진 곳이다.


고칭 우저기(牛渚磯), 마안산시(馬鞍山市)에서 남으로 6km떨어진 취라(翠螺)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세가 험준하고 웅장하며 경치가 수려하고 고적이 많아 남경(南京)의 연자기(燕子磯),

악양성능기(岳陽省陵磯)와 나란히 "장강삼기"(長江三磯)로 불린다.


인구는 약 1만 명(1990년 기준). 총면적 64.85㎢의 국가급풍경명승구(4차, 2002)로 차이스기편구(采石矶片区),

복당편구(濮塘片区), 칭산편구(青山片区, 청산편구), 헝산편구(横山片区, 횡산편구)로 이루어져 있다.


이 풍경구는 시선(诗仙) 이백(李白)의 혼이 살아 숨 쉬며 깊고 두터운 역사와 문화가 깔려 있는

산악형 자연경관을 특색으로 문화, 자연관광 및 휴식을 위주로 한 종합형 풍경구이다.


풍경구는 역사가 유구하고 문화가 풍부하여 창강삼기지수(长江三矶之首)의 자연경관을 대표하는

차이스기(采石矶, 채석기)와 시선 이백(李白)의 문화를 대표로 하는 자연과 인문경관이 결합된 곳이다.


채석기는 강옆에 우뚝 솟아있는데 절벽이 가파르고 강을 사이두고 천문산(天門山)과 마주하고 있으며

만리 장강이 호호탕탕 흘러와 기세가 방대하다.


채석기가 위치한 최라산은 삼면이 우저하에 에워쌓여 있고

서북쪽으로 강과 접해있어 마치 수면의 푸른 고둥어 같아 이 이름을 얻었다.


산위에는 초목이 울창하고 돌들이 서로 기이함을 다투며 환경이 그윽하고 누각이 솟아있다.

고금중외 수많은 문인들이 다투어 이곳을 찾아왔는데

이백, 백거이(白居易), 왕안석(王安石), 소동파(蘇東波), 육유(陸游), 문천상(文天祥)등이 대량의 시구를 이곳에 남겼다.


태백루(太白樓), 상영정(賞?亭), 착월정(捉月亭), 관란정(觀瀾亭),

삼원동(三元洞), 이백관총(李白冠塚) 등 명승고적이 있다.


태백루는 일명 "적선루"(謫仙樓), "청련사"(靑蓮祠)라고도 한다.

당나라때 세워지고 청나라 옹정(雍正) 연간에 재건되었으며

높이 18m, 길이 34m, 너비 17m로 금색 오지기와로 되어 있고 처마가 건뜻 들린 3층 고건축이다.


웅위롭고 가관이며 무창(武昌)의 황학루(黃鶴樓), 악양(岳陽)의 악양루(岳陽樓), 남창 (南昌)의 등왕각(騰王閣)과 나란히

 "삼루일각"(三樓一閣)으로 불린다.


누각내 태백 친필서한과 각종 판본의 시집, 역사 명인들의 시편, 편액 등이 진열되어 있으며

특히 이백의 친필서한이 가장 진귀하다.


누각에 올라 멀리 바라보면 "천문이 중단되고 초강(楚江)이 열리며 푸른물이 동으로 흘러 이곳을 에돌아가고

두 기슭 청산이 서로 마주보는 가운데 외로운 배 한척이 일출따라 오는" 정경을 느낄 수 있어 황홀하다.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저기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옥도끼로 찍어내고 금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짓고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 지고


우리가 어렸을 적에 즐겨 부르던 전래 동요이다.

이태백이 채석기 강변에서 배를 타고 달을 벗삼아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술에 취하고 강물에 넘실거리는 달에 취해서 물 속의 달을 잡기 위해 뛰어들어 죽었다는 곳. 


이백은 청련향(靑蓮鄕:사천四川 면주綿州 창명현彰明縣)에 살았으므로 호를 청련거사(靑蓮居士)라 하였다.
26세 때 벼슬을 하기 위해 사천을 떠나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그는 운몽(雲夢)에서 재상을 지낸 허어사(許圉師)의 손녀와 결혼하여 다음해 딸을 낳았다.
산동으로 옮겨 임성(任城)에 거주하면서 배정(裴政), 장숙명(張叔明), 도면분(陶沔汾) 등과 조래산(徂徠山)에 모여

종일토록 음주, 작시하며 즐겨 놀았는데, 죽계육일(竹溪六逸)이라 일컬었다.


한편 절강에서 알게 된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이백은 당 현종의 부름을 받아 장안으로 갈 수 있었다.
현종은 이백에게 한림학사의 벼슬을 주었지만 장안에 머무는 3년 동안 자유분방한 생활은 여전하였다.


이때에 태자의 빈객이었던 하지장(賀知章)은 이백의 시를 읽고 "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이라고 찬탄하였다.
현종은 이백의 시재를 좋아하여 늘 그를 불러 시를 짓도록 하였으며, 이와 같은 처우에 이백은 불만이 커 날로 광기에 음주가 심하였다.


황제의 총신인 고력사(高力士)에게 신발을 벗기도록 하고 양귀비에게 벼루를 받쳐 들게 하였다는 등의 일화도 남겼다.
이처럼 성정이 오만한 이백으로서는 권신들의 비방, 질시 등을 참을 수 없었고, 높은 벼슬의 대우도 해주지 않아 장안을 떠났다.


낙양에서 두보(杜甫)를 만난 이백은 고적(高適)과 함께 양(梁)에서 노닐기도 하였다.
두보와 헤어진 이백은 다시 유랑생활을 했다.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 55세(천보天寶 14, 755)의 나이로 안부인 송씨(宗氏)와 함께 피난,

여산(廬山)에 은거하여 많은 시작을 하였다.


그러나 부인의 만류를 듣지 않고 이린(李璘 :영왕永王)의 막료가 되었으나, 이린의 난이 실패로 끝나자 투옥되었다가,

야랑(夜郞:지금의 귀주貴州 동재桐梓)으로의 유배 도중에 사면되었는데, 그의 나이 59세였다.


몸 붙일 곳이 없었던 이백은 당도(當塗:지금의 안휘安徽 당도當塗)의 이양빙(李陽冰)을 찾아가 얹혀살았다.
여전히 통음(痛飮)하는 날을 보내다가 병을 얻어 사망했는데 62세였다.


근처 채석기(采石磯)에서 물 속에 뜬 달을 건지려다가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는 뒤에 생겨난 전설이다.
이백은 세속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으며, 구선(求仙)의 마음은 간절했으나, 도교를 믿지 않았고 도경을 학습하지도 않았다.


그는 오로지 현재의 쾌락을 추구했다.
이백의 천성은 호쾌하여 사람들과 쉽게 사귀었다.


술을 좋아하여 가는 곳마다 친교를 맺을 수 있었는데, 위로는 왕공, 귀족, 관리,

아래로는 주옹(酒翁), 낚시꾼, 승, 도인 등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두보는「주중팔선가(酒中八仙歌)」에서 “이백은 한 말 술이면 시가 백 편, 장안의 술집에서 잠을 자네. 천자가 불러도 배에 오르지 않고,

자칭하여 신은 주중선이란다 (李白斗酒詩百篇 長安城裏酒家眠 天子呼來不上船 自稱臣是酒中仙)”고 했듯이, 술이 없으면 시가 없었다.

이백이 얼마나 술을 좋아했는지「월하독작(月下獨酌)」을 통해 알 수 있다.


월하독작 (月下獨酌) - 이백(李白)


[1]
花間一壺酒(화간일호주)  활짝 핀 꽃 속에서 술 단지 곁에 두고
獨酌無相親(독작무상친)  짝도 없이 홀로 술을 마신다.
擧杯邀明月(거배요명월)  잔을 들어 밝은 달을 부르니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  달과 나와 그림자 셋이 되었네.
月旣不解飮(월기불해음)  달은 원래 술을 못하고
影徒隨我身(영도수아신)  그림자는 나를 따를 뿐이네.
暫伴月將影(잠반월장영)  잠시나마 달과 내 그림자 함께 벗 삼아
行樂須及春(행락수급춘)  봄이 다가기 전 함께 즐긴다.
我歌月俳徊(아가월배회)  내가 노래하면 달은 주위에서 서성이고,
我舞影零亂(아무영영란)  내가 춤을 추면 그림자도 따라 춤추네.
醒時同交歡(성시동교환)  취하기 전에는 함께 즐겁게 놀고
醉後各分散(취후각분산)  취한 후에는 각자 흩어져 가세.
永結無情遊(영결무정유)  영원히 걸림 없는 교유를 맺어
相期邈雲漢(상기막운한)  아득한 은하에서 다시 만나리.


[2]
天若不愛酒(천약불애주)  하늘이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酒星不在天(주성부재천)  하늘에 주성(酒星)이 어찌 있으며
地若不愛酒(지약불애주)  땅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地應無酒泉(지응무주천)  땅에 어이 주천(酒泉)이 있으랴.
天地旣愛酒(천지기애주)  하늘과 땅이 이미 술을 사랑하였거니
愛酒不愧天(애주불괴천)  술을 사랑함이 어찌 하늘에 부끄러우리.
已聞淸比聖(이문청비성)  듣기로 맑은 술은 성인에 비하고
復道濁如賢(복도탁여현)  또한 탁주는 현인과 같다 하였네.
聖賢旣已飮(성현기이음)  성현을 이미 몸속으로 마셨거늘
何必求神仙(하필구신선)  구태여 신선이 되길 원하랴.
三杯通大道(삼배통대도)  석 잔이면 대도에 통하고
一斗合自然(일두합자연)  한 말이면 자연과 하나가 된다.
但得酒中趣(단득주중취)  다만 술 마시고 얻은 즐거움이니
勿爲醒者傳(물위성자전)  깨어 있는 자에게 전할게 뭐랴.


[3]
三月咸陽城(삼월함양성)  삼월의 함양성은
千花晝如錦(천화주여금)  온갖 꽃이 다 피어 비단 같구나.
誰能春獨愁(수능천독수)  누가 봄에 홀로 수심에만 잠기랴
對此徑須飮(대차경수음)  봄이라면 술잔을 마땅히 들지.
窮通與修短(궁통여수단)  인간세상 빈부와 길고 짧음은
造化夙所稟(조화숙소품)  일찍이 조화로 정해졌느니
一樽齊死生(일준제사생)  한 동이 술로 생사가 덧없고
萬事固難審(만사고난심)  인생 만사 가리기는 어렵기만 하네.
醉後失天地(취후실천지)  취하면 온 세상 잊어버리고
兀然就孤枕(올연취고침)  쓰러져 홀로 자면 되지.
不知有吾身(부지유오신)  내 몸이 있는 줄을 나도 모르니
此樂最爲甚(차락최위심)  이보다한 즐거움이 더 있을쏜가.


[4]
窮愁千萬端(궁수천만단)  답답한 수심 천만갈래니
美酒三百杯(미주삼백배)  맛있는 술 한없이 마시리
愁多酒雖少(수다주수소)  수심은 많고 술은 비록 적으나
酒傾愁不來(주경수부래)  술잔을 기울이니 수심이 사라지네.
所以知酒聖(소이지주성)  술이 좋은 것이라는 까닭을 이제야 알겠노라.
酒酣心自開(주감심자개)  술이 거나하면 마음은 절로 열리는 것
辭粟臥首陽(사속와수양)  수양산에 누워 조를 사양한 백이숙제,
屢空飢顔回(루공기안회)  쌀뒤주가 노상 비어 주렸다던 안회
當代不樂飮(당대불락음)  모두 당대에 즐겨 마시지 못하였나니
虛名安用哉(허명안용재)  후세의 헛된 이름 무슨 소용 있는가.
蟹螯卽金液(해오즉금액)  게 가제 안주가 바로 신선의 선약이요
糟丘是蓬萊(조구시봉래)  쌓인 술지게미 봉래산이로다.
且須飮美酒(차수음미주)  이제 마냥 좋은 술 마시고
乘月醉高臺(승월취고대)  높은 대 위에 올라 달과 함께 취하리.


행로난(行路難) - 갈 길 어려워라


金樽美酒斗十千 (금준미주두십천); 황금 항아리의 좋은 술 한 말에 일만 금
玉盤珍羞直萬錢 (옥반진수치만전); 옥 쟁반의 진수성찬 만 냥에 달하건만
停杯投箸不能食 (정배투저불능식); 차마 먹을 수 없어 잔 내려놓고 젓가락 던져둔 채
拔劍四顧心茫然 (발검사고심망연); 칼 빼어들고 주위를 돌아보니 마음은 아득하누나
欲渡黃河氷塞川 (욕도황하빙색천); 황하를 건너자니 얼음물로 막히었고
將登太行雪暗天 (장등태항설암천); 태항산 오르자니 눈보라가 하늘을 뒤덮었네
閒來垂釣坐溪上 (한래수조좌계상); 차라리 강태공(姜太公)처럼 세월이나 낚을까
忽復乘舟夢日邊 (홀부승주몽일변); 이윤(伊尹)을 흉내내 꿈이라도 꾸어볼까
行路難 行路難 (행로난 행로난) ; 갈 길 어렵구나 갈 길 어렵구나
多岐路 今安在 (다기로 금안재); 갈림길 많으니 지금 여기 어드매냐
長風破浪會有時 (장풍파랑회유시); 긴 바람 거친 물결 만나는 날
直掛雲帆濟滄海 (직괘운범제창해); 구름같은 돛 달고 푸른 바다 건너리라


- 閒來垂釣碧溪上: 강태공(姜太公)이 周문왕을 기다리며 위수(渭水) 반계(磻溪)에서 세월을 낚은 고사.
- 忽復乘舟夢日邊 ; 은(殷)나라 현신(賢臣) 이윤(伊尹, 摯)이 꿈에 탕(湯) 임금의 명을 받아 배를 타고 해뜨는 곳(帝都)에 이르렀다(伊摯將應湯命夢乘船過)는 고사. ≪송서(宋書)≫에 나온다.
- 日月之旁: 탕(湯) 임금이 붕어한 뒤 아들 태갑이 무도하므로, 이윤이 그를 동궁(桐宮)으로 추방했다가, 삼년 뒤 개과천선하자 임금으로 세우고 그를 섬겼다는 고사.
- 長風破浪 = 남북조 시대 종각(宗慤)은 어렸을 때 그의 숙부가 포부를 묻자, "저는 긴 바람을 타고 만리의 파도를 넘고자 합니다"(我願乘長風破萬里浪)라고 대답했다. ≪남사(南史)≫(卷37) <종각(宗慤)>전에 나온다.
- 후진타오(胡錦燾) 중국 주석은 2006년 4월 19일 미국 시애틀시 기업인 및 미-중 우호단체가 공동주최한 오찬에서, 이 시의 마지막 구절(長風破浪會有時 直掛雲帆濟滄海)을 인용해 미-중 관계의 미래를 요약했다.
-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언급하여 세인에게 더 널리 알려졌다. 인생살이는 누구에게도 힘들고 어렵다. 황하를 건너려니 얼음이 가로막고, 태산을 오르려니 눈발이 세고, 그러나 아무리 힘들고 갈림길이 많아 선택이 어렵더라도 준비하고 기다린다면 큰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렁거리는 때가 올 것이다. 바로 그때 돛을 달고 푸른 바다를 건너가자. 이 시는 특히 마지막 2연 또는 마지막 4연이 절창이라 시진핑이 아니더라도 중국몽(中國夢)을 부르짖는 중국 지도자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자주 인용하는 시다. 이백의 '행로난'은 이 시외에도 두 수가 더 있다.






채석기에 있는 이백의 소상


달을 따러 강물에 뛰어든 이백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자유인 같다.


달을 따기 위해 강물로 뛰어든 적선(謫仙) 이백,

그래서 후세의 사람들은 그를 다시 고래의 등에 태워 하늘로 돌려보내려고 하였다.


이백이 야량으로 유배 가던 도중 백제성 근처에서 풀려난 후, 그의 말년은 대부분 안휘성에서 보내게 된다. 

소상 아래에는 이백이 임종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쓴시 임종가(臨終歌)가 씌여있다.


임종가(臨終歌)


大鵬飛兮振八裔(대붕비혜진팔예)
中天儶兮力不濟(중천혜혜력부제)

余風激兮萬世(여풍격혜만세)
遊扶桑兮掛左襼(유부상혜괘좌예)

後人得之傳此(후인득지전차)
仲尼亡兮誰爲出涕(중니망혜수위출체)


온 천지 진동시키며 날던 대붕이
하늘 중간에서 날개가 꺽였구나

그 바람이 오랜 세월 동안 일렁이고
부상에서 노닐다가 옷소매가 걸리었다

후세 사람들이 이를 알고 전한다 해도
공자가 이 세상 뜬 이후이니 누가 눈물 흘려줄꼬


- 대붕(大鵬): 붕의 날개는 몇천리가 된다고 하는 새
- 부상(扶桑): 중국 전설에서 해가 뜨는 동쪽바다 속에 있다고 하는 상상의 나무


이태백은 임종시에도 장자의 대붕을 떠올렸으며, 자신과 대붕을 동일시 했다.
부상에서 노닐다가 옷소매가 걸리었다는 부분에서는 대붕이 장삼을 입은 이백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백은 이처럼 대붕을 꿈꾸었다.

다음 감상할 시도 이 무렵(761)의 시이다.

 

야박우저회고(夜泊牛渚懷古)
밤에 우저 강가에 배를 대고서 회고하다 / 이백


牛渚西江夜(우저서강야) 우저산 앞 장강의 밤에
靑天無片雲(청천무편운) 푸른 하늘에 조각구름도 없네
登舟望秋月(등주망추월) 배에 올라 가을 달을 바라보니 
空憶謝將軍(공억사장군) 공연히 사장군을 그리워하네
余亦能高詠(여역능고영) 나 역시 능히 높게 읊을 수 있지만
斯人不可聞(사인불가문) 이 사람(사장군)은 들을 수 없네
明朝掛帆席(명조괘범석) 내일아침 배에 돛 달고 떠나면
楓葉落紛紛(풍엽낙분분) 단풍잎이 어지러이 떨어지겠지


 <야박우저회고(夜泊牛渚懷古)>는 과장이 없는 시로, 이백의 서글픈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백이 말년에 배를 타고 장강을 유랑하다가 우저기 곧 채석기에 잠을 자기 위해 배를 정박했던 것이다. 


동진 때, 사상(謝尙, 308~356) 곧 진서장군(鎭西將軍)으로 사장군이라고도 하는데, 그 사상이 선성 지역에서 현령을 지냈다.
그가 어느 달밤 우저기에서 뱃놀이를 하는데, 어디서 영사시(詠史詩) 읊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시 읊는 사람을 데려 오게 하였는데, 세곡(稅穀)을 나르는 뱃사공 원굉(遠宏)이었다.

두 사람은 날이 샐 때까지 놀았고, 그 후 사장군의 추천으로 원굉은 벼슬자리에 나아가게 되었다.


이백은 인생 말년에 채석기에 와서 자신의 신세를 돌아보게 되었다.

옛날에는 사장군 같이 인재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인재를 등용했는데

지금은 사장군 같은 인재를 알아봐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천리마는 세상 어디에도 있는데, 그 천리마를 알아봐주는 백락이 없다.

그래서 이백은 원굉처럼 목소리 높여 시를 읊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나의 시 읊은 소리를 들어 줄 사람이 없어 그저 쓸쓸할 뿐이다.

이백은 가을 달처럼 자신의 재능을 알아 줄 사람을 갈망하고 있지만, 그런 사장군 같은 사람은 이제는 없다.

그래서 공연히 그리워만 할 뿐 그저 쓸쓸하고 허망할 따름이다.


이백의 시는 호쾌하면서도 과장된 표현이 많이 있는데, 이 시는 담담한 어조이다.

그래서 더욱 슬퍼 보인다.


이백은 <소가행(笑歌行)>에서 "우습구나 우스워, 영무자와 주매신은 나각 불며 장작지고 노래하며 다녔는데,

오늘 그대 만나도 몰라주니 어찌 미친 척하지 않으리."라고 하여, 춘추시대 나각 불던 영무자와 한 무제 때

나무꾼이었던 주매신도 재능을 인정받아 출사를 하였는데, 이백 자신은 이들과 같은 재능이 있는데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으니 미친 척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노년 이백의 좌절감이 절로 느껴진다.

지금도 안휘성 마안산시 채석기에 가면 이백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채석기(采石磯)의 원래 지명은 우저기(牛渚磯)였다.

우저기는 '쇠자갈모래톱'이라는 뜻이다. 


장강가에 있는 삼각주로 그곳에는 우저산이 있다.

소가 엎드린 모습의 삼각주라해서 우저산이라 한다. 


채석기에는 이백이 달을 잡으려다가 장강에 빠졌다는 착월대(捉月臺)와 의총(衣塚) 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적선루와 이태백기념관도 있다.







송재소 교수의 중국인문기행

 

1. 우리나라 한문학의 대가인 송재소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직접 유적지 안내와 해설을 위해 동행합니다.
2. 일반 여행사를 통해서는 갈 수 없는 특별하고 의미있는 중국 유적지(아름다운 한시의 배경이 된)를 방문하게 됩니다.
3. 여행내내 명실상부 최고의 호텔과 음식은 물론, 여행지 곳곳에 숨어있는 중국 전통 차와 술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매력적인 시간이 마련됩니다.
4. 더불어 역사, 문화에 관심있고 품격있는 참가자들과의 소중한 인연, 좋은 만남을 약속합니다.

* 일정 : 2015년 6월 15일(월)~ 20일(토) 5박 6일

 

일 정 표

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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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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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산

 

 

 

 

 

 

 

OZ359

 

 

 

 

 

 

 

 

 

09:30

12:40

14:00

 

 

 

 

 

 

 

 

 

인천국제공항 3M카운터 집결

인천국제공항 출발

항주국제공항 도착 (2시간 20분 소요)

황산으로 이동 (3시간 30분 소요)

청대옛거리 : 송나라때 형성되어 명과 청에

가장 발전한 건물과 거리 모습을 재현한 곳

호텔 투숙 및 휴식

HOTEL : 크라운플라자

(TEL: 0559-259-1888)

:XXX :현지식

6/1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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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산

정감촌

 

 

흡 현

 

 

이 현

기 문

 

 

황 산

 

 

 

 

 

버스

전 일

호텔 조식 후

정감촌으로 이동(50분 소요)

정감촌 : 명나라때의 건축물이 완전하게 남아

있는 곳

흡현으로 이동(35분 소요)

흡현고성 : 중국의 4대고성 중 하나

허국석방 : 전형적인 명나라 석방건축물

당월패방군 : 포씨가 일족의 공적을 기념하여

세운 것

이현으로 이동(30분 소요)

서체촌, 굉촌 :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대민

가 건축군

황산으로 이동

호텔 투숙 및 휴식

HOTEL : 헌원국제대주점

(TEL: 0559-850-8828)

:호텔식 중:현지식 석:한식

 

 

일 자

지 역

교통편

시 간

일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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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산

경 현

 

 

 

신 성

 

 

마안산

 

화 현

 

 

 

 

버스

전 일

호텔 조식 후

경현으로 이동(2시간 소요)

도화담 : 이백이 이곳에서 필묵을 적시며 시편

을 많이 남김

신성으로 이동(1시간 소요)

사조루 : 강남의 4대명루중 하나이며, 중국

고대의 유명한 시인들이 와서 시를 짓던 곳

경정산 : 이백의 시로 인해 강남시산이 되었다

마안산으로 이동(1시간 30분 소요)

누실공원 - 17:00 입장

호텔 투숙 및 휴식

HOTEL : 마안산 해외해 황관홀리데이

(TEL: 0555-238-8888)

:호텔식 중:현지식 석:현지식

6/1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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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안산

 

 

 

저 주

 

 

 

남 경

 

 

 

 

 

 

버스

전 일

호텔 조식 후

청산 이백묘 : 당대의 시인 이백의 묘가 안치되어 있는 곳

채석기(태백루) : 이백이 여러번 올라 시를 남긴 곳

저주로 이동(2시간 소요)

취옹정 : 취옹정기로 유명한 구양수가 있던 곳

남경으로 이동(1시간 30분 소요)

명효릉 : 명 태조 주원장의 능원

중산릉 : 중국 근대화의 혁명정치가 손중산 선생의 묘가 안치됨

호텔 투숙 및 휴식

HOTEL : 은하소피텔

(TEL: 025-8371-8888)

:호텔식 중:현지식 석:현지식

 

 

일 자

지 역

교통편

시 간

일 정

6/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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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경

버스

전 일

호텔 조식 후

석두성 : 손권이 남경으로 도읍을 옮겨 왕궁을

세울때 전초기지

연자기 : 청대 초기 시단의 영수 왕사진

시에서 언급되며, 남경의 북쪽 관음산에 위치하

여 장강을 바라보기 좋은 공원

중화문 : 명대에 있었던 13개의 성벽중에서

가장규모가크고 웅대했던 명나라 도성의 정남문

문묘 : 공자에 제사를 지내는 곳

왕사고거 : 육조 명문귀족 왕씨와 사씨의 병칭 고거

미향루, 진회하선유

오의항 : 동진의 지배귀족이던 왕씨와 사씨가 거주하던 지역

호텔 투숙 및 휴식

HOTEL : 은하소피텔

(TEL: 025-8371-8888)

:호텔식 중:현지식 석:무궁화식당

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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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경

 

 

 

인 천

 

 

 

OZ350

 

 

 

 

 

14:55

18:20

 

호텔 조식 후

포구로 이동(1시간 20분 소요)

봉황각

남경 대학살기념관 :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일

본인들의 잔인한 만행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

공항으로 이동

남경국제공항 출발

인천국제공항 도착 (2시간 25분 소요)

:호텔식 중:현지식



** 중국인문기행이 기대되는 이유!!**


송재소 교수님의 말씀.
“이들 유적을 기행하면서 역사의 흥망성쇠를 체감하고 오늘의 중국을 있게 한 중화문명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번 여행은  중국의 ‘인문학적 유산'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아울러 중국 문화의 불가결의 요소인 중국술과 중국차에 대해서도 가능한 많이 소개하려고 한다. 술과 차를 빼놓고 중국문화를 이야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이번 여행의 행선지는 일반인들이 쉽게 가기 어려우면서도 인문학적 유적이 풍부한 안휘성의 황산에서 강소성의 남경까지 이어지는 기행이 될 것이다“
“안휘성에는 도처에 이백의 유적이 산재해 있다. 이백이 달을 잡으려 강으로 투신 했다는 채석강과 이백의 무덤 등을 둘러보며 그의 자취를 더듬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 여기에는 구양수의 취옹정과 풍락정이 있고, 풍자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유림외사'의 작가 오경재의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안휘성의 남쪽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서체촌과 굉촌이 명청시대 민간 건축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안휘성은 또한 흡연, 휘묵, 선지 등 문방사우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여기에다 덤으로 황산의 빼어난 경관도 즐길 수 있는 곳이 안휘성이다.”
"강소성의 남경은 육조고도라는 별칭에 걸맞게 수많은 고적을 보유하고 있다. 두목의 시로 유명한 진외하, 유우석의 시로 유명한 오의항과 석두성, 이백이 시를 읊었던 봉황대가 있다. 세계문화유산인 주원장의 무덤 명효릉의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고 태평천국의 유적도 눈길을 끈다. 그뿐만 아니라 손문의 무덤인 중산릉의 위용도 볼만하다. 중국 현대사의 아픈 상처인 남경 대학살의 실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념관도 이곳에 있다. “

 

< 중국인문기행(송재소 교수 저) 관련 기사>
*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3/08/2015030801338.html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 artid=201503062111205&code=960205
*머니투데이
http://www.mt.co.kr/view/mtview.php type=1&no=2015032515010864992&outlink=1

 

<이 글을 연재하는데 참고한 사진과 글 등 자료의 출처>

1. 중국인문기행에 함께 동반한 사진전문가 고형남 님이 사진작품을 공유할 수 있도록 보내 주셔서 연재하는데 전적으로 참고하였습니다. 사진 자료 중 거의 90% 이상을 고형남 님 작품 사진에 의존한만큼 일일이 사진 출처를 밝히지 않은 점 양해바랍니다.


2. 함께 동반한 고영표 시인 님의 블로그 ㅡ 고산지(高山芝) 블로그 http://blog.daum.net/zeroko2000 에서 기행 장소와 시간 공간, 사진 자료 등 자세한 해설을 참고하였습니다. 일일이 출처를 밝히지 않은 점 양해바랍니다.


           

연세동문회보 / 이달의 여동문

박정희 (신학 72입) 대전 변동중학교 교장

 

도자기를 빚는 마음으로 교육 한 길

“식물이 자라기 위해서 양분이 필요하듯이 한 아이가 바르게 성장하려면 사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한 학생 한 학생에게 관심과 사랑을 주는 그런 교사가 되고자 했습니다.”
신학과를 졸업하고 연합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교육학을 전공한 뒤 1981년 고등학교 윤리교사로 처음 교단에 섰을 때 박정희 동문의 각오는 남달랐다. 특히 학교에서 문제 학생으로 낙인찍힌 아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주고자 했다. 하지만 1984년 12월 시골의 한 병원에서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그의 인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난산 끝에 산모는 정신을 잃었고 아이는 제대로 숨을 쉬지 못했다. 이후 아들은 잠을 거의 자지 않고 젖을 삼키지 못해 애를 태우더니 목을 가누는 것도, 뒤집는 것도, 일어서는 것도 유난히 더뎠다.
세 살 무렵 의사로부터 뇌성마비 판정을 받았다. 커갈수록 점점 더 뒤처지는 아들에게 조바심을 내며 “똑바로 걷지 너는 왜 자꾸 넘어지니”, “침 좀 흘리지 마라”라고 다그치기도 했다. 한동안 직장을 그만둘까 고민했으나 일을 포기하고 아이에게 매달린다 해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장애가 있는 아들과 사는 것을 힘겨워하던 남편은 아들이 일곱 살 무렵 영영 떠나버렸다. 그는 위자료나 양육비 대신 친권을 챙겼다.
“아이가 밤에 잠을 안 자고 설치는 경우가 많아서 밤새 시달리다 아침 7시30분에 집을 나서 아이를 스쿨버스에 태워주고 출근했죠. 친정어머니께서 아이를 돌봐주셨지만 그래도 그 무렵 하루가 48시간이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를 만큼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오직 쉼, 여유, 위안, 안식, 평안 이런 단어들이었어요.”
한동안 실패한 인생이라는 생각에 우울증에 빠졌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도자기를 접하고 활력을 되찾았다. 주말마다 흙을 주무르고 두드리고 빚다 보면 현실 세계의 절망감과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성취감도 컸다. 대전교원미술전 공예부문 1등급 상과 전국백제토기물레경연대회 은상을 수상했고, ‘정신지체 학생의 작업기능 신장을 위한 생활도자기 만들기 지도자료’로 교육과학기술부장관상을 받았다. 다시 공부를 시작해 침례신학대 사회복지대학원에서 ‘도예 활동을 통한 집단상담이 장애아 어머니의 양육 스트레스 및 자기 효능감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도 썼다.
“특수학교에 근무할 때 장애아들에게 도자기 수업을 했는데, 평소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이던 아이들이 도자기를 만드는 동안에는 가만히 앉아서 흙을 만지더군요. 부드럽고 촉촉한 흙을 만지며 원하는 모양을 만들고 불에 구워 작품이 완성될 때 아이들은 성취감을 느끼죠. 작년부터 자폐아와 가족들에게 도자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자폐아들이 도자기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면서 대인관계와 사회적응력을 키우고, 부모들도 자녀를 더 이해하게 되고 양육 스트레스도 풀 수 있지요.”
박정희 동문은 2013년 7월 도자기를 시작한 지 14년 만에 첫 개인전을 열었고 올 11월에 두 번째 개인전을 열 계획이다. 지난 해에는 교장으로 승진해 교육자로서 도예가로서 모두 성공적인 길을 걷고 있다. 한때 눈물과 한숨이 서렸던 그의 도자기에 지금은 사랑과 기쁨이 넘친다.
“여전히 일상생활을 스스로 하지 못해 옷을 입히고 양치질을 해줘야 하지만 아들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아들의 순수하고 천진한 미소가 나를 정화시키고 아름답게 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해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글·김현미(신방 86입) 동아일보사 주간동아 팀장


원본 http://www.yonsein.net/ebook/dong/1505/201505.pdf    13 of 24

인용 http://blog.daum.net/choemh/16140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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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라는 초등학교 여교사가 있었다 .
개학 날 담임을 맡은 5학년 반 아이들 앞에 선 그녀는

아이들에게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하였다 .

 

그 것은 아이들을 둘러보고

모두를 똑같이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


그러나 바로 첫 줄에 구부정하니 앉아 있는 작은 남자 아이 ,

철수가 있는 이상 그것은 불가능했다 .


K 선생은 그 전부터 철수를 지켜보며
철수가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옷도 단정치 못하며 , 잘 씻지도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
때로는 철수를 보면 기분이 불쾌할 때도 있었다 .

 

결국은 철수가 낸 시험지에 큰 X 표시를 하고

위에 커다란 ㅇ 빵점을 써넣는 것이 즐겁기까지 한 지경에 이르렀다 .

 

그런데 K 선생님이 근무하는 학교에서는 ,

담임 선생님이 아이들의 지난 학년의 생활기록부를 다 보도록 되어 있었다 .

그러나 그녀는 철수것을 마지막으로 미뤄두었다 .
그러다 마지막으로 철수의 생활기록부를 보고는 깜짝 놀랄수 밖에 없었다 .

 

철수의 1학년 담임선생님의 기록은 이렇게 써 있었다 .
“ 잘 웃고 밝은 아이임 .

깔끔하게 잘 마무리하고 예절이 바름 .
함께 있으면 즐거운 아이임 . ”


2학년 담임선생님의 기록은 이렇게 써 있었다 .

“ 반 친구들이 좋아하는 훌륭한 학생으로 ,

어머니가 불치병을 앓고 있음 .
가정생활이 어려울 것으로 보임 . ”

 

3학년 담임선생님의 기록은 이러 하였다 .
“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마음 고생을 많이 함 .
최선을 다하지만 아버지가 별로 관심이 없음 .

어떤 조치가 없으면 곧 가정생활이 학교 생활에 까지 영향을 미칠 것임 . ”


철수의 4학년 담임선생님은 이렇게 썼다 .

“ 내성적이고 학교에 관심이 없음 .
친구가 많지 않고 , 수업시간에 잠을 자기도 함 . ”


여기까지 읽은 K 선생은 비로소 철수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뒤 늦게 깨달아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
반 아이들이 화려한 종이와 예쁜 리본으로 포장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가져왔는데 ,

철수의 선물만 식료품 봉투의 두꺼운 갈색 종이로 어설프게 포장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더욱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

 

K 선생은 애써 다른 선물을 제쳐두고 철수의 선물부터 포장을 뜯었다 .

알이 몇 개 빠진 가짜 다이아몬드 팔찌와 사분의 일만 차 있는 향수병이 나오자 ,

아이들 몇이 웃음을 터뜨렸다 .

 

그러나 그녀가 팔찌를 손목에 차며

와아!! 정말 예쁘구나~ 감탄하고 ,
향수를 손목에 조금 뿌리자 아이들의 웃음이 잦아들었다 .


철수는 그날 방과 후에 남아서 이렇게 말했다 .

“ 선생님 , 오늘은 선생님에게서 꼭 우리 엄마에게서 나던 향기가 났어요 . ”

 

그녀는 아이들이 돌아간 후 한 시간 넘게 울었다 .
바로 그날부터 그녀는 읽기 , 쓰기 , 국어 , 산수 가르치기를 그만두었다 .

그리고 아이들을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


K 선생은 철수를 특별히 대했다 .

철수에게 공부를 가르쳐줄 때면 철수의 눈빛이 살아나는 듯했다 .
그녀가 격려하면 할수록 철수는 더 빨리 반응하였다 .

 

그 해 말이 되자 철수는 반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되었고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겠다는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가장 귀여워 하는 학생이 되었다 .


1 년 후에 그녀는 교무실 문 아래에서 철수가 쓴 쪽지를 발견 했다 .

거기에는 그녀가 자기 평생 최고의 교사였다고 쓰여져 있었다 .


그로부터 6 년이 흘러 그녀는 철수에게서 또 쪽지를 받았다 .

고교를 반에서 2등으로 졸업했다고 쓰여 있었고 ,

아직도 그녀가 자기 평생 최고의 선생님인 것은 변함이 없다고 쓰여 있었다 .

 

4 년이 더 흘러 또 한 통의 편지가 왔다 .
이번에는 대학 졸업 후에 공부를 더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쓰여져 있었다 .

이번에도 그녀가 철수에겐평생 최고의 선생님이었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

하지만 이번에는 철수를 나타내는 이름이 조금 더 길었다 .
편지에는 ‘ Dr. 박철수 박사 ’ 라고 사인 Sign 되어 있었다 .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
그해 봄에 또 한 통의 편지가 왔다 .
철수는 여자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

아버지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으며 ,

K 선생님에게 신랑의 어머니가 앉는 자리에 앉아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

그녀는 기꺼이 좋다고 화답했다 .


그런 다음 어찌 되었을까 ?

그녀는 가짜 다이아몬드가 몇 개 빠진 그 팔찌를 차고 ,
어머니와 함께 보낸 마지막 크리스마스에 어머니가 뿌렸었다는 그 향수를 뿌렸다 .

 

이들이 서로 포옹하고 난 뒤 이제 어엿한 의사가 된 박철수는 K 선생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

" 선생님 , 절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제가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해주셔서 ,

그리고 제가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

 

K 선생은 또 눈물을 흘리며 속삭였다 .
“ 철수 너는 완전히 잘못 알고 있구나 !
내가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바로 너란다 .

내가 널 만나기전 까지는 제대로 가르치는 법을 전혀 몰랐거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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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이 , 아니 이 이야기가 꼭 아이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

누군가를 믿어주고 칭찬해준다면 어른일지라도 분명 큰 일을 해내리라 믿습니다 .

 

내 입술이라고 상대방을 내 잣대로 판단해 배우자를 , 자녀들을 ,

또는 주변의 사람들을 함부로 비난하지는 않았는지 ?

K 선생님을 보며 ,다시 한번 나를 점검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

 

" 격려는 귀로 먹는 보약이다 ! "
"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 "

 

우리 모두 이 시간이후부터는 남의 말을 좋게 하십시다 .
상대를 좀 더 이해하고 격려하고 북돋우고 칭찬해 주십시요

아울러.. K. 선생님께선 저히 초등학교 선생님이 셧 습니다.

올해 70순을 바라보고 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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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동지'를 꿈꾸며...(김진숙지도위원 편지글)

http://bsnodong.tistory.com/m/post/30

 

 

집회도 없고 수련회도 없는 휴일은 외려 잠이 일찍 깨요.
아무 일도 없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언제부터 저는 평화가 실감나지 않는 삶을 살게 된 걸까요.

아무 일도 없는 이상한 토요일.
아니나 다를까. 텔레비전 화면에 뉴스속보가 뜨는군요.


“노무현 전 대통령 뇌출혈로 입원”


검찰조사가 시작되면 입원으로 시작해서

휠체어나 마스크가 구명보트처럼 등장하는 꼴을 늘 봐오긴 했습니다만
당신은 그런 쇼를 할 사람은 아닌지라 스트레스가 어지간했나보다 생각했습니다.

10 여분 후 “노무현 전대통령 사망한 듯”이라는 자막이 뜨고

그제서야 뒹굴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나날이 일구 우일구하기 여념없는 시시껍절한 방송이 중단되고 속보가 이어지더군요.
경호원, 사저뒤편, 부엉이 바위, 세영병원, 양산부산대병원, 심폐소생술, 열상 따위의

일상과 밀접하지 않은 단어들이 바퀴벌레처럼 툭툭 튀어나와 소름을 돋게 했습니다.
정신적 공황상태까진 아니었지만 불면 탓으로 약간 멍한 채로 이틀을 보냈고

월요일 아침 부산역까지 가긴 했으나 조문은 못하고 역 광장을 몇 바퀴 빙빙 돌다 왔습니다.

선뜻 신발을 벗고 절을 하는 문상객들의 거리낌없는 몸놀림이 참 부럽다고 생각하며.
잠이 안오대요.


다음 날 다시 부산역엘 갔습니다.
역 광장을 또 빙빙 돌다가 그냥 돌아가면 다시 닥칠 불면의 밤이 성가셔
문상객들의 뒤에 얼른 붙어 섰습니다.
방명록에 몇 줄 쓰기도 했습니다. 잠을 자야하니까.


“오랜 세월 동지였고 짧은 시간 적이었습니다.
90년 변호사 접견 오셨을 때처럼
봉하마을 어딘가에 앉아 각자의 위치가 만들어 낸
그동안의 원망과 미움들을 두런두런 털어낼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곧..
고맙고 죄송합니다.“
 
90년. 제가 첫 징역을 살 때였습니다.
접견을 오셨었지요.
보통 변호사 접견은 재판 전날 와서(사실 재판 전날도 안 오는 변호사도 많습디다만)
재판절차를 일러주고 이빨도 맞추고 하는데 재판날짜와는 아무 상관없는 시기였던지라
많이 의아했던 만큼 20년 전인데도 이리 생생하네요.


접견실에 먼저 오셔서 기다리시더군요.
보통은 재소자들이 한 시간 이상씩 주리를 틀면서 기다리는데.
요샌 교도소 반찬이 뭐가 나오냔 얘기, 여사에선 뭐하고 노냐는 얘기,

변호사가 해주던 징역살이 얘기, 남사에선 뭐하고 논다는 얘기,
법무부 시계도 가니까 재밌는 놀이를 많이 개발해서 징역을 잘 깨라는 얘기.
변호사가 접견을 와선 재판이야긴 한마디도 없이 노닥거리기만 하다

그 더디기로 유명한 법무부시계가 세상에 한 시간이나 흘렀습니다.

 

“가야겠네” 일어서시길래 하도 황당해서 물었습니다.
“왜 오셨어요?”
“진숙씨 징역살이 힘들까봐 놀아 줄라고 왔지요”

 

그리고 당신은 정치권으로 갔고,
정치권으로 갔다는 건 권력을 탐하는 변절로 규정하는데 한치의 주저함도 없었으니
변호사 비용을 거침없이 떼먹고도 사기꾼의 돈을 떼먹은 것 마냥 일말의 부채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복직하면 갚으마. 유전 발견하면 갚으마.

보물선 찾는대로 갚으마. 막연한 약속이 선임비였던 시절이었으니.
그게 인권변호사의 당연한 책무였으니.
이제와 생각해보니 상실감이었어요.

 

그 시절 당신은 우리들의 유일한 빽이었는데.
공돌이 공순이 편을 들어주는 가장 직책 높은 사람이었는데.
당신이 있어 우린 수갑을 차고도 당당할 수 있었는데.


그때 직감적으로 생각했어요.
이제 더 이상 우리 편이 아니겠구나.
재판장 앞에서 수갑을 찬 채 잔뜩 주눅 든 우리를 향해, “피고인은 무죕니다.”
외쳐 줄 사람이 이젠 없겠구나.
이제 재판에서 지더라도 찾아가 울 데도 없겠구나.
노동자들이 그들의 부엉이바위인 크레인 위에 올라갈 때 따라 올라가지도 않겠구나.

 

그리고 당신을 잊었습니다.

용감해서가 아니라 아무도 없어서 혼자 진행했던 1심 재판에서 당연히 지고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
“왜 항소를 안했어요?” 라는 질문에 “항소가 뭔데요?” 라고 되묻던 저에게
“노동자가 항소를 알면 그건 노동자가 아니지.” 하던 말도 잊었고,
노동자도 이론이 있어야 세상을 바꾼다며 함께 했던 소모임도 잊었고,
군사정권 시절 해고된 노동자의 그 막막한 눈빛을 들여다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유일하게 내 얘기를 그대로 들어주던 무료법률 상담소도 잊었고,
어느 날은 밤에 오라 길래 밤에 찾아갔더니 그날이 전태일이라는 노동자의 기일이라고
변호사 사무실 구석에 조촐한 제상을 차려놓고 아무 말도 없이 유령들처럼 절을 하던
그 뭉클하던 밤도 잊었고,
함께 같은 거리를 달리던 6월 항쟁도 잊었고,
최루탄 가루가 싸락눈처럼 내린 범냇골 국민운동본부 옥상에서 막걸리를 나누던 걸판지던 뒤풀이도 잊었습니다.

 

그리고 침례병원이 초량에 있을 때였습니다.

노동조합 조합원 교육에 초청을 받았는데 앞 시간 강사가 당신이었더군요.
당신은 내려오고 나는 올라가던 계단에서 마주쳤습니다.
난 참 어색하기가 짝이 없습디다.
그냥 모른 척 할라고 했습니다만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지요?”
굳이 손까지 내미시더군요.
그때 대답을 했거나 웃기라도 좀 했으면 지금 잠을 이루기가 좀 쉬웠을까요.
 
그리고 당신이 출마한 대선에서 전 4번을 찍었습니다.
단 한 번도 단 한순간도 고민하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외포리를 한번도 벗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평생 1번을 벗어난 적이 없는
큰언니가 전화를 했더군요.


“이 노무헤니가 그 노무헤니지? 니 벤호사. 그 사람 찍었다.

너 인쟈 깜빵 안가지? 복직두 되갓지?”

 

얼른 대답할 말이 떠오르질 않더군요.

제가 왜 “내 변호사”를 놔두고 4번을 찍었는지 우리 큰언닌 죽을 때까지 이해 못할 거예요.
2번과 4번의 극심한 차이를 설명하는 일도 이리 막막한데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그 미세한 차이를 설명하는 일은 저의 재주로는 난망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기뻐서 우는 사람도 있습디다만

이회차이가 당선된 거보다 노무혀이가 당선된 게 노동자들에게는 더 힘들 거라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고립은 깊어졌고 고착화되었습니다.


김영삼이가 당선되었을 때 운동권이 1/3이 떨어져 나갔고,

DJ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이른바 재야가 사라졌고,
당신이 대통령이 되면서는 그야말로 오롯이 노동자들만 남았습니다.


한 사업장에서 수천 명이 한꺼번에 해고될 때 그 무지막지한 자본을 향해 호통쳐주는 어른 하나 없습디다.
노동자들이 핏발 선 눈으로 거리로 나설 때 역성들어주기는커녕 죄 우리만 나무랍디다.


그거 아세요.

당신은 조중동이랑 열심히 싸우셨습니다만 우리에겐 조중동이랑 한편처럼 보인 거.

 

 “야~ 기분좋다!” 시며 봉하로 가셨을 때 오리농법보다 더 중요한 일은 농민들의 삶의 실상을 들여다보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왜 목숨 걸고 한미 FTA를 반대했는지.
그리고 전용철, 홍덕표 그들의 죽음에 당신이 늦게나마 사과를 하면 참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랬다면 제가 봉하마을을 갔을까요. 아마 갔겠지요.
그리고.. 김 주익 얘기도 했을까요. 아마 그 얘긴 못했을 거예요.
말로 꺼내긴 크나큰 상처였으니까.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그 말씀.


유난히 노동자들에겐 가혹하셨습니다.
2003년도 한진중공업에서 저는 한꺼번에 두 명의 지기이자 동지를 잃었습니다.
김 주익은 600여명 조합원의 명퇴에 맞서 2년을 싸웠고 노사가 합의를 했고
그 합의를 회사가 번복을 했고 그래서 크레인에 올라갔고 그 크레인 위에 129일을 매달려 있다가
아시다시피 목을 맸습니다.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그런 시대는 정말 지났을까요.
벼랑 끝에 몰린 노동자들에게 종종 삶과 죽음은 자연의 한조각인 것을..

 

저는 당신을 부정한 게 아니라 당신을 넘어서고 싶었습니다.
착한 사람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지배가 없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시대에 그 꿈은 가장 허황되고 지리멸렬해졌습니다.
때론 우리가 품은 꿈이 너무 초라했고 궁색했습니다.


당신의 시대에 가장 많은 노동자가 짤렸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구속됐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비정규직이 됐고 그리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귀족으로 격상됐고 그들은 언론과 자본은 물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조차 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이기주의를 꾸짖으십디다만 동료가 수백 명씩 짤리는 걸 목격한 노동자가

비정규직에게 내밀 손이 남아 있겠습니까.
저 살아남는데 써야지.

 

징역을 살 때 만난 사형수가 있었어요.

이 여잔 영치금이 한 푼도 없는 개털이었는데
새로 신입이 들어오면 아주 불쌍한 표정으로 샴푸나 속옷을 사달라는 거예요.
출소한 사람들이 쓰다만 물건들도 다 그 여자 차지였죠.
언제 죽을지 모를 사람이 사소한 물건에 집착하는 게 도덕의 눈으로 보자면 참 추접스럽습디다.
그 여자 집행되고 보니 샴푸나 속옷 나부랭이가 구석구석에서 쏟아져 나옵디다.
백분의 일도 못쓰고 죽었죠. 생에 대한 나름의 집착이었던 거죠.
샴푸 생길 때마다 빌었겠죠. 이거 다 쓰고 죽자.


정규직 노동자들은 삶의 벼랑에서 그런 심정으로 잔업하고 철야를 합니다.
얼마가 남았을지 모를 정규직의 삶을 그딴 식으로 저축하면서.


그 무렵쯤이었을 거예요.
변호사비용을 이제 그만 갚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당신의 시혜나 은전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 건.
적이 될 거라면 호적수이고 싶었습니다.
실력도 한참 모자라고 열정도 전만 못하고 진정성마저 잃어 그리 되진 못했습니다.
그게 참 부끄러워요.


똑똑한 사람들은 다 떠나 우리를 속속들이 아는 가장 무서운 적이 되었고

남은 자들은 동네북이 되어 초딩들마저 두들겨대고 천덕꾸러기가 되어

크레인엘 올라가고 굴뚝엘 기어 올라가도 언놈 하나 눈길주는 놈이 없어졌습니다.

당신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고등학교 밖에 못나온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입 달린 사람은 죄다 침이 마릅디다만
고등학교도 못나온 저 같은 노동자들은 당신의 시대에 대부분 절감해야 할 원가가 되어
구조조정 당했고 효율화를 위해 비정규직이 됐습니다.


차라리 군사독재 시절엔 대드는 노동자만 짤렸으나 당신의 시대엔 남녀노소가 짤렸습니다.
서민의 벗이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나 부자와 빈자의 간극은 훨씬 더 까마득해졌습니다.
당신이 변호사에서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는 24년의 세월 동안

전 아직 복직도 못한 해고노동자로 찌질한 50대가 됐습니다.


생각해보니 짧은 시간 동지였고 오랜 세월 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뜨겁고 바른.
만고 씰데없는 소립디다만 그래서 대통령 같은 거 하지 말았으면 참 좋았겠단 생각
지금도 해요.

 

불안하고 불길한 기운으로 떠돌던 예감이 당신의 죽음으로 확연해집니다.
한 시대가 갔다는..

이제 상고출신이 변호사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양양한 가도가 보이고 그 길을 편하게 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의 있습니다!”
외칠 때, 그 외침에 뒤돌아보는 사람도 이제 더는 없을지도 몰라요.

 

만 명이 울어주면 천국에 간다했던가요.
천국에 가셨을 거라 믿어요. 진심으로.


김주익 곽재규 배달호 김동윤 최복남 이용석 이해남 이현중 정해진 하중근 박수일 허세욱..
당신의 시대에, 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서러움으로 억울함으로 목 놓아 울었던
죽음들입니다.

당신처럼 벼랑 끝에 내몰렸던..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죽음을 당신이 이해해주길 바란 적이 있었어요.
하도 야속해서. 노동자의 삶을 안다는 사람이 어찌 저럴 수가 있나 너무 미워서.
아무리 야속하고 미워도 그런 바람은 품지 말걸 그랬다 싶어요.
애증도 부질없어 졌습니다.

언젠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말들이, 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말들이 기형도의 시처럼
떠돌다 때때로 부딪히겠지요.


이제 변호사비용은 영원히 안 갚아도 되게 생겼습니다.
다음 생에 오실 땐, 너무 똑똑하게 오지 마시구려.
사법시험 같은 것도 합격하지 마시구요.

그냥 태생대로 기름밥 먹는 노동자로 만났으면 해요.


저는 당신에게 변절이라 손가락질 할 일 없이,

당신은 절더러 경직되었다거니 세상을 모른다거니 한심해 할 일 없이.

떠날 일도 보낼 일도 없이 그냥 내내 동지로.
그래서 언젠가 하셨던 말씀대로 자본가가 지는 해라면 노동자는 뜨는 해다.
그 멋진 말씀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순수한 열정, 남다른 정의감 그대로 만날 수 있길.
다시는 미워할 일도 상처 받을 일도 이렇게 미어질 일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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