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씨지사(鮑氏支祠) 

1561년에 세우고 1791년에 중수한 당월포씨사당(棠樾鮑氏祠堂). 패방군 바로 옆에 있다.

지사(支祠)는 가사(家祠), 종사(宗祠) 등과 함께 사당의 한 종류.

 

 

포씨지사(鮑氏支祠)  포현륜(鮑賢倫, 1955?~ ) 서 


포가남사(鲍家男祠)

 속담에:”황실에는 태표가 있고 백성에게는 사당이 있다라는 말이 있다.

고휘주백성들은 한가문끼리 집거해서 살았다.


조상들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또 같은 가문들을 한데 집결하기 위해서 매 백성들에게는 규모가 같지 않는 사당이 있었다.

사당은 종사,기사,가사 세 가지로 나뉘어진다. 그 중 종사가 규모가 제일 크다.

 

세효사(世孝祠)  청 가경(淸 嘉慶) 6년(1801)에 세운 남사(男祠)

글씨는 청대 서예가 등석여(鄧石如, 1743~1805)가 썼다.

 

등석여(鄧石如) 


1742년 건륭(乾隆) 8년, 안휘성(安徽省) 회녕(懷寧)의 집현관(集賢關)에서 출생, 초명(初名)은 염(琰), 자는 석여(石如)였는데
1796년 가경(嘉慶) 원년에 즉위한 청나라 인종(仁宗)의 이름이 전염(芮琰)이어서 ‘염’자를 피해 ‘석여’라 이름지었다.
자는 완백(頑白), 호는 완백산인(完白山人)이며 흔히 호를 취해서 완백(完白)이라 부른다.


완백의 부친은 이름이 일지(一枝)이며 목재(木齋)라 호를 쓴 박학한 분으로 사체서(四體書)를 잘 모각(摹刻)했으며,
성품이 우뚝 두드러진 분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며 집안 살림이 넉넉지 못해 완백은 어려서 마을 아이들을 따라 산에 나무를 해다 팔아
양식을 바꾸어 먹는 간구한 생활이었으나 틈만 있으면 마을의 유식한 어른을 찾아 경서를 배우고,
부친 목재 선생의 전각과 예서 및 각 체를 본떠 흉내를 내었다 한다.


그의 서가(書家)로서의 출발은 이렇게 부친을 사사(師事)하는 일로 시작되었다.
완백은 63세 때 이승을 하직하기까지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글씨와 전각을 팔아서 전각과 서예에 전념하였다.


영국(寧國, 절강성에 가까운 안휘의 동쪽 끝)에서 구강(九江, 양자강을 거슬러 강서성으로 들어간 곳)으로 전전하면서
글씨를 팔면서 여행을 하던 중 20대의 어느 날 환산산맥을 넘어 수주(壽州)에 이른 완백은
그곳 수춘서원(壽春書院)의 강의 책임자였던 양문산(梁聞山)을 만나게 된다.


수춘서원 원생을 위해 새긴 전각과, 부채에 써준 소전(小篆)이 양문산의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이 자그마한 우연이 등완백의 일생을 크게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된다.


문산은 완백을 강녕의 거인(擧人, 과거에 鄕試를 합격하여 중앙의 會試를 볼 자격을 얻은 사람) 매류(梅熊)에게 소개한다.
그는 북송(北宋) 이래의 명문가로 진한(秦漢) 이래의 금석(金石)의 명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으며, 부친 곡성(捻成)은
역술(曆術)과 산학(算學)의 대가로 강희제(康熙帝)의 수우(殊遇)를 받아 궁중에 비장한 보배를 많이 하사 받은 사람이다.


매류는 완백을 신임하여 그에게 의식(衣食)과 지묵(紙墨)의 비용을 아낌없이 주었으며, 원 없이 공부하게 해주었다.
완백은 환산산맥 최고봉의 기상이 있었으며 이것이 매류를 매혹했던 것이다.


매류의 비호 아래 8년의 세월을 그는 무섭게 면학에 몰두했으며,
그가 공부하던 열광의 모습은 포세신(包世臣)의 『완백산인전(完白山人傳)』에 자세하다.


그는 먼저 전서(篆書)로부터 시작하였다.
<석고문(石鼓文)>,  <역산각석(辣山刻石)>, <태산각석(泰山刻石)>, <개모묘석궐(開母廟石闕)>,
<배잠기공비(裵岑紀功碑)>, <선국산비(禪國山碑)>, <천발신참비(天發神讖碑)> 및
이양빙(李陽啣)의 <성황묘비(城隍廟碑)>, <삼분기(三墳記)> 등을 각각 백 번 임서(臨書)하였다.


또한 전서가 갖추어지지 않음을 고심한 끝에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스무 번 수사(手寫)하였다.
그밖에도 삼대(三代)의 종정(鐘鼎), 진한의 와당(瓦當), 또한 비액(碑額)까지 샅샅이 더듬었다.


공부에 임해서는 매일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 먹을 갈아 큰그릇에 가득 채우고서
밤늦게까지 그 먹을 다 쓸 때까지는 자지 않았다.


추위와 더위에도 계속 멈추지 않고 정진하여 5년만에 전서에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한다.
그는 이처럼 체력 또한 비범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그는 예서에 착수하여 3년이 걸려 예서를 습득한다.
완백이 매류와 작별하면서 새겨준 <청소당(淸素堂)>이란 전각과 <의여고회(意與古會)>란 인장은
건륭 45년(1780) 작이라 한다.


이로 보아 그가 매류의 비호를 받기 시작했을 때는 건륭 37년 30세로 역산(逆算)된다.
그 뒤 완백은 폐의파모(弊衣破帽)로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유람하면서 매예(賣藝)생활로 돌아간다.


때마침 양주(揚州)에서 『통예록(通藝錄)』이란 대저(大著)로 유명한 석학 정요전(程瑤田)의 지우를 얻는다.
요전과는 마음 깊이 허여하는 사이가 되며, 요전은 양주에서 김방(金姪), 장혜언(張惠言) 등을 소개한다.


『완백산인전』에 의하면 김방의 집에서 교수를 하던 장혜언이 시내에서 완백의 서를 보고 돌아와 김방에게
“오늘 이사(李斯)의 진적(眞蹟)을 보았다.”고 하면서 놀라는 김방에게 자상한 내용을 얘기하니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같이 가자고 졸라, 둘이서 시내의 폐허가 된 절간에 유숙하던 완백을 찾아간 이야기가 전한다.
이를 계기로 이들은 서도사(書道史)에 희귀한 걸작들을 함께 남기게 된다.


완백의 『사마온공가의예서책(司馬溫公家儀隸書冊)』에 장혜언이 쓴 발(跋)에는 완백을 만난 것이
1786년, 건륭 51년이라 쓰여 있으므로 이때 완백의 나이는 44세였음을 알 수 있다.


김방은 이미 완성된 자기 집의 장려(壯麗)한 가묘(家廟)의 현액(懸額)을 모두 완백에게 의뢰했으며,
또한 장혜언은 1년간 완백을 따라 전서를 배웠다 하니 이들이 완백에게 얼마나 경도되었나를 알만 하다.


완백은 이 무렵 김방을 통해 향리에 돌아온 태자태부(太子太傅)이자 호조상서(戶曹尙書, 현 재무부장관)
조문식(曹文埴)과 친교를 맺었다.


그의 청으로 완백은 『사체천자문(四體千字文)』의 횡권(橫卷)을 휘호하여 하루 안에 완성하니
조상서는 그의 필력에 경탄하여 사람들에게 완백의 사체서는 온 나라에서 제일이라고 칭송했다 한다.


유석암(劉石庵)이 72세 때에 완백의 서를 보고 크게 놀라서
“천수백년(千數百年) 내에 이런 걸작은 없다.”고 경탄해 마지않았다 한다.


1805년 가경(嘉慶) 10년 10월, 63세로 고향 환공산 아래에서 죽기까지 12년간은 제국을 방랑하면서
매예생활 중 1802년 가경 7년 강소성(江蘇省)의 진강(鎭江)에서 일생의 지기(知己) 포세신을 만난다.


포세신이 완백을 만난 것은 장혜언의 아우 장기(張琦)에 의해서였다 한다.
뒤에 포세신은 『예주쌍즙(藝舟雙楫)』을 간행했는데 이 책은 완원(阮元)의 유명한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과 함께 청조의 서법을 첩학(帖學)에서 비학(碑學)에로 전환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포세신은 그 자신 뛰어난 서가이면서도 자신의 서론(書論)의 중심에,
이를테면 자설(自說)의 심볼로서 놓은 것이 완백의 서, 그 중에서도 전서·예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28세 때 만난 완백에의 존경심이 그에게 서론(書論)을 쓰게 했다 함이 옳을런지도 모르겠다.


『예주쌍즙』 중 청대(淸代) 101인의 작품을 품평(品評)한 「국조서품(國朝書品)」은 서론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그 중 최고의 신품(神品)으로 단 한 사람인 등석여의 예서와 전서를 들고 있다.


세상에 전하는 여러 『완백전(完白傳)』 가운데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완백산인전』이며 완백이 죽은지 한해 뒤
1806년의 것으로서 아쉬운 정에 찬 이 글은 현대의 우리들이 읽어도 깊은 감명을 받는다


흡현 당월촌에 있는 돈본당은 당월포씨의 남자사당이다. 포씨가문의 각세 조상들을 모시고 있다.



사당은 목석으로 구조되었고 조각은 비록 복잡하게 많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정밀하고 대범함을 잘 표현해 내고 있다.

사당은 건립 당시에 종인이 가문에서 장유의 순위와 덕망이 높은 조상들을 존경한다는것을 표현하는 곳이다.


동시에 또한 외지에 나가 있는 상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에 그 기파와 재능을 현시하는 곳이이기도 했다.

사당의 건축 특색은 각양각색이었다.


예를 들어서 돈본당의 구조는 들보가 천정을 받들고 빛겨서 기둥도 받쳐주는 식으로 되었고, 
량타 ,작체는 보편적으로 사용되어 그때 당시 통용된 건축수단을 반영하고 있다.


구조재의 장식은 또 농후한 지방특색을 구비하여 동곽량의 머리 끝부부은
코끼리머리 형태로 되었는데 아주 생동감이 있고 조각은 또한 다양하다.


침당처마밑에는 단풍나무가 접혀져 있는 것같고
두공은 순전히 장식으고 천정에 무게를 부담하지 않게 설계하였다. 


삼진 다섯개 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규모가 웅장하며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향당구조는  넓고 훤하며 큰 재료들을 사용하여 그 기세가 아주 웅장하다.


사당 안에 의전규례비석과 가경황제상유비 등17개 패각이 있다.
위에는 “공의돈본호규례”가 새겨져 있다. 
사당은 한 가문에 있어서 정신적 핵심이고 그 가문의 위엄을 보여주는 성전이다.

낙선호시(樂善好施)  조문식(曹文埴, 1735-1798) 서

돈본당(敦本堂)  왕문치(王文治, 1730~1802) 서.

 

왕문치(王文治)

청나라 강소() 단도() 사람. 자는 우경()이고, 호는 몽루()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워 12살 때 시를 지을 수 있었으며, 서법에도 뛰어났다.


자라서 경사()를 내왕하며 한림원() 시독()이던 전괴()를 따라

유구()에 사절로 가면서 마침내 문장이 해외에 알려졌다.


건륭() 25년(1760) 전시(殿)에서 일갑삼명(, 즉 )으로 진사 급제하고

편수()에 임명되고 시독()에 발탁되었다.


나중에 운남() 임안지부()로 임명받았는데,

사건이 있어 직급이 낮아지자 병을 핑계로 휴가를 청해 귀향했다.


오월() 지방을 왕래하며 주로 항주()와 진강()의 서원에서 강의했다.
서예에 일가를 이루어 풍운()이 뛰어났다.


희곡을 즐겨 집안에 악기를 쌓아놓고 노비를 사들여 그들에게 작곡을 가르쳤다.

연출할 때는 거리를 따지지 않고 몸소 따라다녔다.


고종()이 남방을 순행하자 명을 받들어 9곡의 희곡을 지었는데,

이들을 아울러서 『영란신곡()』이라 일컬었다.


나이 오십이 되기 전에 불학()에 전념했다.

저서에 『몽루시집()』과 『쾌우당제발()』이 있다.

 

 

 


충효염절(忠孝廉節)  주희(朱熹, 1130~1200) 서.

 

주희(朱熹, 1130~1200) 주자.


중국 남송의 유학자. 이름은 희(熹), 자는 원회(元晦), 호는 회암(晦庵). 주자는 존칭이다.
신안(안휘성) 사람. 주자학을 집대성하였다.


19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관계(官界)에 들어갔으며 그 전후에 도학 외에 불교, 도교도 공부하였다.
24세에 이연평(李延平)과 만나 그의 영향 하에서 정씨학(程氏學)에 몰두하고 다음에
주염계, 장횡거(張橫渠), 이정자(二程子)의 설을 종합 정리하여 주자학으로 집대성하였다.


주자의 학문은 이기설(理氣說 : 존재론), 성즉리(性卽理)의 설(윤리학), 격물규리(格物窺理)와
거경(居敬)의 설(방법론), 경전의 주석이나 역사서의 저술, 구체적인 정책론으로 되어 있고,
그 모두에 중세 봉건사회의 근간인 신분혈연적 계급질서의 관점이 관철되고 있다.


그의 업적은 '군신(君臣)ㆍ부자(父子)ㆍ부부(夫婦)의 도'(三綱)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 오상 五常)을
영원불변의 '인리천리(人理天理)의 지'(至)로 보는 입장에 서서 그것을 초월적 또는 내재적으로 이론화한 것이다.


주자의 학문과 그 실제 정책은 모두 봉건 사회의 질서원리가 관철되고 있으며
철학적으로 강고하게 체계화시켰던 것으로 주자학은 봉건 사회의 이데올로기로서 오랫동안 군림하였다.


주요저서 : 四書集註, 周易本義, 資治通鑑綱目, 朱子語類


포씨오륜술(鮑氏五倫述)  등석여(鄧石如)의 예서.



포가여사(鲍家女祠)


포가여사당은 청이당이라고 부른다.
포씨가문에 역대정부열녀들을 찬양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남자사당하고 반대로 남쪽에 자리잡고 북쪽을 마주하고 있으며 동쪽벽 측문으로 들어간다.
구시대 여성들은 남자사당을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청이당은 전국에 유일한 여자사당이며 세계부녀대회에서 네 번째로 지정한 참관점이다.
이는 휘주종법제도와 휘주의 상업역사 연구에 생동하는 교재이며
중국에서 "여자는 사당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전례를 타파한 보기드문 여사당이다.


휘주문화특색에서 건축에는 패방,민가,사당 3절이 있다.
이들은 휘쥐여성들의 운명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불효유삼,무후위대>라는 유가신조 하에서 휘주남자들은 일찍 결혼하고 아이를 가진 후
짐을 싸서 차자식을 버리고 부모들을 남겨둔 채, 집을 떠나서 멀리로 돈벌이하러 나간다. 


그 이후 일부는 사방을 떠돌며 소식도 없이 결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기도 한다.

일부는 성공한 다음 외로움을 못참아 술집을 들락거리면서 소탈한 생활을 누리고 
집에 조강지처는 완전히 잊어버린다. 


일부는 부자가 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그때는 벌써 삼처사첩을 가진 몸이다. 
신첩 웃음이 이뻐보이고 구인의 눈물은 보이지도 않는다.


오랜 세월 동안, 남편이 멀리 나가 사업하는 휘주여자들은 결코 방촌누각에서 자폐하고
천정으로만 들어오는 일편의 빛으로 온갖 힘을 다해서 애들을 키우고 시부모를 모시며
어쩔수 없이 꽃다운 청춘을 흘러버리고  생명은 시들어가고  독수공방으로 세월을 보낸다. 


이것은 그들이 뛰어 넘을수없는 운명이었다.

정부열녀의 패방은 정신상 그녀들을 억제하고 가문에 사당은 가문의 규정으로
행동상 속박해 버리고 마두벽의 봉쇄는 신체상 그녀들을 묶어버린다.


지붕보다 높은 계단식 마두벽은 벽돌로 만들어졌고 방풍방화할 수 있다.
높게 싸아진 마두벽 바로 위에만 작은 창문이 만들어져 있는데 도둑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독방 여자들의 외부 출입을 막을수 있고,
그들의 마음을 마비시키고 감정을 끊어 그녀들의 바람행위를 막기 위해서이다.

“높은 벽안에는 고독하여 휘주는 침묵한다” 
길고 긴 휘상들이 남긴 발자국에는 수많은 휘주여자들의 피눈물이 뿌려져 있고
패방, 사당 마두벽 수묵그림과 같은 아름다운 휘주식 건축 뒤에는
수많은 부녀들의 암담하고 씁쓸하고 처량한 처지가 숨겨져 있다.

청의당(淸懿堂) 


중국에서 유일한 여사(女祠)로 포씨비사(鮑氏妣祠).

'청의(淸懿)'라는 이름은 '淸白貞烈 德行美好(청백정렬 덕행미호)'의 뜻을 취한 것이다.

우리나라 창덕궁에도 '청의정(淸懿亭)'이 있다. * 懿 : 아름답다, 훌륭하다 (의)

 

 

입구 옆 안내판에 한글이 씌여 있다.

 

 

정효양전(貞孝兩全)  증국번(曾國藩, 1811~1872) 서. 청의당(淸懿堂)  포엽(鮑鉩, ?~?) 서 

 

증국번(曾國藩)


호남() 장사부() 상향현() 사람

본명은 자성()이고, 자는 백함(), 호는 척생()이다.

청()나라 때의 대신()이자 군사가, 문학가이다.


증자(; 증삼)의 70세손으로 도광() 18년(1838)에 진사() 출신이다.

벼슬은 한림원서길사(), 한림원검토(), 문연각교리(), 시강학사(),

내각학사(), 예부시랑(), 예부우시랑(), 병부우시랑(), 양강총독(),

직례총독(), 무영전대학사(殿) 등을 역임했고, 의용후()로 봉해졌다.


시호는 문정().
중국 청나라 말 태평천국의 혁명을 막기 위해 호남성을 중심으로 편성한 반혁명 군대인 상군()을 창립하고,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다. 


홍장(), 좌종당(), 장지동()과 더불어 만청사대명신()으로 일컬어진다.

산문()에 능통하여 상향파()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저서로 《치학논도지경()》, 《지가교자지술()》, 《빙감()》,

《증국번가서()》 등이 있다.


 






 

참고   http://www.paifangqun.com/   http://blog.daum.net/zeroko2000/7847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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