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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버신부의 1910년대 대한민국 사진◈  






차 한국방문 1925년 5월14일 ~ 10월2일

베버 신부는 한국에 대해
"내가 그렇게도 빨리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나라였다." 라고
고백 했습니다. 1925년 촬영된 영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는
한국에 대한 한 독일인 선교사의 지극한 사랑과 연민의 기록입니다.

베버 신부는 직접 영화에 출연해 당시 영화를 보는 독일인 관객들을 위해
칠판에 지도를 그려가며 한국을 유럽의 이탈리아 반도와 비교해서 묘사
하기도 했습니다.
 

 1925년 수도 서울 시가지의 모습 



혜화문(동소문) 태조 1397년 건립, 일제강점기 전차공사 중 헐렸다.




1925년 북한산의 모습


1925년 북한산의 모습


1925년 서울 도성 성곽 모습

베버 신부는 서울이 오목한 분지이고 희고 단단한 성곽이 능선을 따라서
산으로 기어 올라가는 것 같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산을 구름속에 솟아 있는 산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서울의 마을들이 주로 산 밑에 모여 있는 것을 주목 했습니다.
그리고 쌀을 좀 더 많이 재배하기 위해서 넓고 좋은 땅은 농토로 삼았고
집은 비좁은 산 비탈에 잡았다고 분석했습니다.







베버 신부는 한국인들은
"자연과 더불어 살며 하루 종일 자연과 함께하다가 석양을 뒤로 하고
맑은 미소를 머금은 채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고, 자연을 정복하기 보다
그 찬란함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꾼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버 신부는 한국의 문화를 존경했습니다.
독일 민족이 아직 숲에서 뛰어 다닐 때 한국은 이미 고도의 문화를 가진
민족이라 여겼습니다. 그에게 감동을 주었던 한국 '문화' 그 중에 하나는
'효도' 입니다. 천년 이상 지속된 유교전통에 따라 복종과 순종 그리고
권위에 대한 인정은 한국인들이 태어나면서 배워오고 있었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조상과 어른에 대한 감사와 존경이 삶의 일부가
되어있는 것을 보고 깊은 감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가족에 대한 책임과 사랑은
그를 사로 잡았습니다.





















 


베베 신부는 한국의 농경 문화에 주목하면서
특히 품앗이라는 노동 형태에 매료 되었습니다.
그는 세계 어디어서도 볼 수 없는 높은 수준의 공동체 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다고 생각 했습니다.

 '노동을 통해 성숙된 공동체문화'

이는 카톨릭 공동체에 거대한 뿌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베버 신부는 일본의 신민지 폭력성 앞에서 아름답고 고귀한
한국의 공동체 문화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1925년 금강산 장안사, 6•25 전쟁 때 완전히 불에 타 사라지고
지금은 축대, 비석 등만 남아 있다.


1925년 금강산 장안사 승려들의 모습


1925년 금강산 장안사 대웅전

베버 신부 일행은 1925년 6월초 약 열흔간의 일정으로 금강산을 여행합니다. 
그리고 금강산 장안사의 가람의 배치와 명칭에 대해 정확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대웅전의 화려한 장식을 보고 마치 마법과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제단을 덮고 있는 우아한 지붕, 그것은 수없이 많은 붉은 나무들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매력적으로 짜 맞춘 것입니다.

베버 신부는 한국의 사찰이야말로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비록 한국이 유교 국가였지만 민중의 삶에는 불교 문화가
훨신 강력한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그가 보기에 불교는 한국의 역사에서
역사와 민중의 편에 가까이 있었습니다.



 

베버 신부는 한국을 떠나면서
그는 "1911년에는 내가 그리도 빨리 사랑에 빠졌던 한국과 이별할 때
작별의 아픈 마음으로 '대한만세'를 불렀다.
그로부터 10년이 넘게 지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한국과
그 나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함께 가져오게 되었다." 라고 했습니다.
예술가였고, 문학가였으며 겸손한 목자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
그는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
1956년 영원한 안식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사랑과 연민의
기록은 먼 세월을 돌아 우리의 곁에 와 있습니다.


세월호 1주기 강우일 주교 강론

 

오늘 우리는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았다.
 
세월호는 출항해서는 안 될 배였다.
1년 전 그날 인천항은 악천후였고, 가시거리는 800미터밖에 안 되었다.
그 때 출항한 배는 세월호 단 한 척뿐이었다.
그리고 출항 당시 세월호는 규정된 물량의 약 2배를 과적했고, 엄청난 화물들을 고정하지도 않고 적재했다.
그리고 화물을 더 싣기 위해 배의 균형을 잡아주는 배 밑바닥의 평형수를 절반 이상 빼버렸다. 출항 전에 인천항 운항관리자는 배 안으로 들어가 보지도 않고 안전점검 보고서에 ‘양호’라고 기재하고 출항허가를 내주었다.
심각한 기상악화가 풀리지 않아 단원고 아이들은 세월호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유가족들은 ‘아이들을 다시 태우고 돌아올 버스가 인천항으로 출발했었다.’고 증언한다.
그런데 세월호는 왜 무리한 출항을 했을까? 누가 그런 결정을 내렸는가? 아무것도 밝혀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도대체 왜 갑자기 세월호가 침몰했는지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검찰은 침몰 원인으로 급변침을 지목하며 ‘조타미숙으로 선체가 크게 기울었으며, 과적 및 고정 불량과 평형수 부족으로 복원력을 상실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급변침은 사고의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라고 한다.
세월호가 왜 급하게 방향을 틀었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7천 톤이나 되는 세월호가 100여분 만에 완전 침몰했고 선체가 1초에 14도나 기울어졌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급격한 침몰과 변침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세월호에서 자기 발로 나온 사람 말고는 해경이 들어가서 구조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세월호는 사고 후 1시간 동안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으라.’라고 하는 안내방송 외에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침몰 당시 아이들은 유리창을 두드리며 구조 요청을 했지만, 해경은 선실 유리창을 깰 생각도 안 했고, 탈출 안내도 하지 않다가 10시17분, 해경 함정 123정이 도착한 후 47분 만에 현장에 있던 해경 헬기와 선박, 잠수부는 돌연 일시에 철수했다.
후에 실종자 수색에 나섰던 잠수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해경이 “언딘”의 작업을 위해 철수를 요구했다.’ 고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일이다.
사고 해역 근처에 있었던 4만톤 급의 미 함정의 지원도 거부했다.
해군참모총장이 두 번이나 통영함 출동을 명했는데도 해경이 해군함정의 도움을 거절했다.
그리고 일본 해상보안청의 구조협력 제안도 거절했다. 이해가 안 된다.
 
그리고 사고의 원인과 경과를 분석해 줄 전문가들이 침묵하기 시작했다.
어떤 언론사에 따르면 세월호 문제를 제기해 온 전문가들이 4월21일부터 인터뷰에 응하지 않기 시작했다고 한다.
익명의 대학교수는 인터뷰에서 ‘압력이 들어온다. 주로 정보 부처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4월22일 방송통신위원회는 ‘세월호 관련 재난상황반 운영계획’이라는 문건을 통해 방송사 조정 통제 및 대응 임무를 하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
세월호는 국내 여객선 중 유일하게 해양 사고 발생 시 국정원에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국정원은 4월16일 오전 9시10분, 청해진해운 사장 등으로부터 사고 문자 메시지를 받았고, 9시28분에 해경상황실에 전화해 ‘원인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세월호 내부에서 발견된 자료에 의하면 국정원은 세월호에 99가지의 상세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왜 민간 여객선이 배의 시설 아주 작은 부분까지, 그리고 선원들의 수당이나 휴가까지 국정원 지시를 받아야 했는지 아무도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지난 3월 한국 주교단이 함께 로마를 방문하고 프란치스코 교종을 뵈었다.
5년마다 한 번 하도록 되어 있는 정기 행사다.
그 때 교종께서 우리에게 제일 처음 던지신 질문이 ‘세월호 문제는 어떻게 되고 있는가?’였다.
이 질문에 대해 나는 이렇게 답했다.
‘정부가 세월호 진상을 조사하겠다고 조사위원회 조직은 구성했는데 실제로 조사는 전혀 한 발자국도 진척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밖에 답할 수 없는 우리 현실이 너무 부끄러웠다.
교종께서는 아직 세월호 가족들의 비통함이 잊을 수가 없고 가슴 속에 가라앉아 있다고 하셨다.
 
세월호 참사 한 달 후인 5월16일 대통령은 가족들과 만난 자리에서 분명히 ‘특별법은 만들어야 하고, 검경수사 외에 특검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낱낱이 조사를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는 말씀까지 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도록 위원회는 한 발자국도 못 내딛고 있고, 해양수산부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의 독립적 진실규명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시행령을 발표했다.
해양수산부는 세월호 사고를 유발한 원인 제공 기관들인 한국해운조합, 지방항만청, 한국선급, 선박안전기술공단과 직접 연결된 상부 기관이다.
간단히 말하면 직접 사건의 피고가 되거나 피고와 아주 가까운 부서다.
피고 신분의 공무원이 세월호 진상 규명의 실무 전체를 책임 조정하는 역할을 맡도록 하는 시행령은 진실 규명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피고의 한 가족에게 판결을 내리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정부는 희생자 가족에게 보상비는 몇 억 원씩 줄 것이라고 흘리며 돈다발을 자꾸 펄럭이며 마치 유가족들이 돈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처럼 국민 여론을 오도한다.
이것은 유가족들에 대한 인격모독이다.
대통령이 눈물 흘리며 한 약속을 이런 식으로 변형하고 왜곡하면 국민은 국가를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이제 그만하면 되지 않았나 한다.
어떤 이들은 광화문 광장에 기한도 없이 농성하고 노숙하고 있는 가족들, 시민단체 사람들의 존재가 불편하고 피곤하고 혐오스럽게 느낀다.
언제까지 세월호 문제에 붙잡혀 있을 것인가, 나라 경제도 불황이고 민생 문제도 산적한데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마치 강도 만나서 얻어맞아 초죽음이 되어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웃을 보고도 내 갈 길이 바쁘다며 길 건너편으로 돌아서 지나가버리는 레위인이나 사제와 다를 바 없다.
이웃 형제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어질 수 없는 오늘의 메마른 우리 영혼이 서글프다.
형제의 신음 소리가 전혀 우리 가슴에 공명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콩크리트 벽 같은 불통의 우리 마음이 참으로 원망스럽다.
304명이나 되는 이웃 형제와 아이들이 하루아침에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버린 사건의 충격이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 오늘의 개인주의적 문화가 참으로 개탄스럽다.
국민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국가기관이 외면하고 밝히려 하지 않는 의혹 가득한 사건을 그냥 잊고 덮어버리자고 하는 것은 우리 몸에 돋아난 종기의 뿌리를 도려내지 않고 겉에 붕대만 감고 말자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종기는 속에서 더 곪아서 뼈 속까지 썩어 들어가고 나중에는 세월호보다 더 큰 재앙이 찾아올 것이다.
 
우리는 세월호의 비극을 잊으려하기보다는 도리어 거듭 상기해야 한다.
희생자들의 고통과 참담한 최후를 기억해야 다시는 그런 참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와 회심을 열매 맺을 수 있다.
세월호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자꾸 상기하여 질문하고 밝히려고 해야 진실한 원인에 접근할 수 있고 그 사악한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억으로 끊임없이 회귀하고 거기 머물고 있는 가족들과 연대하며 그들의 아픔을 함께 공감하고 나누고 아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걸린 몹쓸 개인주의의 염병에서 치유될 수 있다.
상처는 회피하고 어설프게 봉합해서는 속에서 갈수록 더 곪아간다.
 
우리는 오늘 성체 앞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억해내야 하겠다.
고인들의 명복을 빌고, 가족들의 상처를 주님께서 어루만져주시기를 청하도록 하자.
그리고 동시에 이런 참혹한 비극을 직접 초래한 사람들이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고 유가족들과 국민에게 용서를 청할 용기를 내도록 기도하자.
 
예수님은 진리의 증언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 치셨다.
우리는 오늘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죽음을 둘러싼 불의와 의혹과 고통에 대해 침묵하지 말고 살아있는 증언을 하도록 초대 받고 있다.

 

Helene Fischer / Ave Maria


독일인이 자랑하는 미녀가수 Helene Fischer의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가슴이 떨려온다.
헬레네 피셔는1984년 8월 5일에 러시아시베리아에서 출생,
1988년에 독일로 이주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프랑크프루트에 있는 예술대학교에서 뮤지컬배우를 전공,
대학에 다니는 동안에도 Rocky Horror Show(록키 호러 쇼)나
Fifty-Fifty같이 여러 뮤지컬에 참여했고.
그동안 헬레네의 어머니가 녹음한 데모씨디를 유명한 프로듀서한테 보냈는데
그의 주선으로 음반계약을 하면서 유명해지게 된다.


Ave Maria! Jungfrau mild,
er hore einer Jungfrau Flehen,
aus die sem Felsenstarrund wild
soll mein Gebet zu dirhin wehen.
Wir schlafen sicherbis zum Morgen,
ob Menschen noch so grausamsind.
O Jungfrau sichder Jungfrau Sorgen,
O Mutter, hor ein bittend Kind!


Ave Maria!

Ave Maria!  Unbefleck!
Wenn wir auf diesen Fels hinsinken
Zum Schlaf, und uns dein Schtz bedeckt
Wird weich der hancte Fels uns dunken.
Du lachelst, Rosendufle wehen
In dieser dumpfen Felsenkluft,
O Mutler, hore kindes Flehen,
O Junfrau, eine Jungfrau ruft!


Ave Maria!

Ave Maria!  Reine Magd!
Der Erde und der Luft Damonen,
Von deines Auges Huld verjagt,
Sie konnen hier nicht bei Schicksal beugen,
Da uns dein heil`ger Trost anweht;
Der Jungfrau wolle hold dich neigen,
Dem Kind das furden  Vater fleht.
Ave Maria!


아베마리아!  자비로우신 동정녀여,
이 어린 소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은 이 험한 세상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고통 가운데서 우리를 구해주십니다
쫒겨나고 버림받고 욕받을지라도
당신의 보살핌으로 우리는 편히 잠듭니다
동정녀여. 이 어린 소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성모여, 이 어린 소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아베 마리아!


아베 마리아!  순결하신 동정녀여! 
지금 우리는 곤고한 잠자리에 들어야하나
당신이 우리 위에서 돌보아 주신다면
솜털이나 새털 잠자리처럼 편안합니다.
암울한 이 동굴 속 공기도
당신의 미소가 함께 한다면 향유와 같습니다
하오니 성모여, 이 소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성모여, 이 어린아이의 간구를 들어주소서!
아베 마리아!


아베 마리아!  정결하신 동정녀여!
땅과 하늘의 사악한 마귀들이
지금 여기 이렇게 나타나지만
당신께서 임하시기 전에 사라질겁니다
당신의 보살핌에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이 어린 소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아버지가 아이의 바램을 들어주듯이.
아베마리아!


아베 마리아'는 가톨릭교회의 기도문 중 하나인 '성모송'을
많은 작곡가들이 노래로 만든 것이다.
라틴어로서 Ave는 "안녕하십니까?"  혹은 "문안드립니다."라는 뜻이고
Maria는 예수를 낳으신 여인을 말한다.
그래서 이 부분만 직역한다면 "마리아님, 안녕하십니까?"라는 뜻이 될 것이다.
‘마리아를 찬양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때론 천사의 기도(Angelic salutation)로 불리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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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6장] 88년의 거인 나래를 접다

2013/02/27 08:00 김삼웅

 

 

늙어가면서도 젊은이들 못지않게 맑은 정신으로 청청하게 활동하고 글을 쓰던 함석헌이 큰 수술을 받은 뒤부터는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 나이는 이미 미수(米壽)에 이르렀다. 거인은 1989년 2월 4일 새벽 5시 25분 88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서울대병원 12층 108호실에서였다. 빈소에서 <씨알의 소리>후원회가 구성되고, 준비위원장에 장기려 박사가 추대되었다. 장례는 2월 8일 오산학교 강당에서 오산학교장으로 거행되었다. 2,000여 명의 조문객이 참석하여 거인의 가는 길을 애도했다. 장지는 연천군 진곡읍 감파리 마차산 기슭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2002년 8월 15일, 그를 독립유공자로 선정하여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수여하고, 2006년 10월 19일 대전 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정부는 2001년 4월 ‘이달의 문화인물’ 로 선정하여 그의 업적을 기렸다.

함석헌은 1988년 11월 22일 오산고등학교 전제현 교장에게 ‘유언’을 남긴 바 있다.

남강(남강 이승훈 - 저자) 선생께서 이루지 못하신 소원을 내 유해를 가지고라도 이루어 드리면 좋겠습니다. 내 뼈를 골격표본으로 만들어 오산학생들이 공부하게 해 주시고 내 대뇌와 심장 등 모든 장기도 방부제에 담아서 두고 공부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내 살던 작은 집과 터가 있는데 그것도 남강재단에 드리니 써주세요. (주석 4)

함석헌의 ‘표본’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유족과 지인들은 장례준비 과정에서 유체를 표본으로 만들었을 경우 보관문제와 자칫 우상의 대상이 되어 고인의 뜻과는 달리 이용될 지 모른다는 점, 그리고 종교적 윤리적으로도 어려운 문제라는 의견에 따라 유택에 안장하게 되었다.

함석헌은 지인들에게 “내가 죽으면 비석을 세우지 말라” 면서 “만일 누가 비석을 세운다면 벼락을 쳐서라도 부셔버리겠다” 고 당부하였다. 지인들이 후대를 위해서라도 무슨 말이라도 새겨야 한다고 설득하자 “정말 무슨 말을 쓰고 싶으면 “겨울이 만일 온다면 봄이 어찌 멀었으리오” 라는 그 말만 조그마하게 써 달라”고 하였다.

장례 뒤 묘소를 정비하면서 유족이 기념사업회 쪽에 돌책에 세울 고인의 말씀을 50~60자로 골라달라고 요청하였다. 그이와 같은 거인의 생애를 50~60자로 압축한다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몇몇이 의논하여 유일한 시집 <수평선 너머>에서 고르기로 하였다.

“결국 생전에 함 선생님과 제일 가까운 사이였다고 생각되는 안병무 박사에게 의뢰했다. 안 박사님은 다음과 같은 시를 선정해 주셨다.

나는 빈 들에서 외치는 사나운 소리
살갗 찢는 아픈소리
나와 어울려 부르는 너희 기도 품고
무한으로 갔다 내 다시 돌아오는 때면
그 때는 이 나 소리도 없이
고요한 빛으로 오리라 - <나는 빈들에서 외치는 소리> 중에서”
(주석 5)

함석헌 부부에게는 2남 5녀가 있었다.
장남 국용, 차남 우용, 장녀 은수, 차녀 은삼, 3녀 은자, 4녀 은화, 5녀 은선이다. 함석헌이 1947년 3월 월남한데 이어 차남이 1948년 6월 30일 용암포를 통해 단신 월남했다. 그리고 이어서 부인과 남은 가족이 1950년 월남하고, 어머니와 장남, 장녀는 용천에 그대로 남았다. 어머니가 고향에서 사망한데 이어 장남이 1958년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북한에는 장녀 은수가 살아 있었으나 함석헌은 끝내 딸을 만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함석헌은 죽을 때까지 유영모처럼 매일 산 날짜를 그날그날 달력에 기록하였다. 탁상용 달력 1988년 8월 8일자에 31925를 기록한 것이 남았다. 8월 12일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뒤 귀가하지 못한 채 눈을 감은 것이다. 날짜로 정확히 31929일을 살았다.

1988년 5월의 화재로 장서 5천여 권이 다 소실된 이후 새로 준비한 1천여 권과 쌍문동의 낡은 집 한 채, 20여 권의 저서와 역서 몇 권이 유산의 전부였다. 함석헌 사상의 본향이고 <씨알의 소리>의 산실이었던 원효로 4가의 옛집과 부지 82평은 오산학교에서 운영하는 남강문화재단으로 기증, 소유권을 이전하였다.

함석헌의 별세 뒤 공석 중이던 <씨알의 소리> 발행인 및 편집인에는 1948년부터 함석헌을 사사하면서 고려대학에서 두 차례나 해직되는 등 민주화운동에 헌신해온 김용준 박사가 선임되었다. <씨알의 소리> 후원회는 명칭을 ‘함석헌선생기념사업회’로 바꾸고 후원회장 장기려 박사를 기념사업회 초대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주석
4> 전제현 <함석헌 선생님을 보내드리고>, <함석헌선생추모문집>, 324쪽, 오산학교동창회 편, 1994,.
5> <씨알의 소리>, 1989년 5월호, 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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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6장] 88년의 거인 나래를 접다

2013/02/26 08:00 김삼웅

 

 

노태우가 6.29 항복선언을 하던 날 함석헌은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리고 7월 13일 췌장, 담낭, 십이지장 등 종양부위의 절제수술이 4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입원 두 달 만인 8월 29일 잠시 퇴원했다가 9월 4일 백병원에 다시 입원하였다. 수술 상태가 좋지 않아서였다. 군부독재의 항복선언의 날에 함석헌이 입원한 것은 하늘의 섭리였는지 모른다. 독재세력의 항복으로 이제 그의 저항도 마무리할 시점이라는 섭리였을까, 그는 ‘섭리사관’을 믿어왔었다.

함석헌은 재입원하면서 <씨알의 소리> 복간의 뜻을 밝히었다.
1980년 7월 강제폐간 당한 지 7년 째가 되었다. 6월 항쟁으로 5공세력의 기가 어느 정도 꺾이면서, 그리고 직선제 개헌과 대선 국면으로 전환되면서 느리게나마 민주화가 진척되고는 있었다. 해서 <씨알의 소리> 복간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악명 높은 언론기본법이 폐기되고 언론출판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함석헌은 12월 22일 <씨알의 소리> 복간을 신청했다. 하지만 문공부는 꿀 먹은 벙어리였다. 12월 16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양김이 함께 출마하여 노태우에게 어부지리를 안겨주게되고, 6월항쟁은 결국 군부정권을 5년간 연장시키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노태우 정권이 <씨알의 소리>의 복간을 미루게 된 정치적 백경이 되었다.

함석헌은 12월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성치않은 몸으로 단일화를 위해 음으로 양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김대중ㆍ김영삼의 단일화가 되어야만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양김이 각각 잇따라 대통령 후보 출마를 선언한 후 그의 자택에는 양김과 그들의 측근들의 발길도 잦아들었다. 그리고 선거 결과를 예감한 듯 쌍문동 자택을 찾아온 양김 가운데 한 후보의 부인과 그 부인의 절친한 여성운동가 앞에서 <노자> 제29장의 한 구절을 써서 풀이해주었다고 한다.

將慾取天下而爲之 吳見基不得己 天下神器 不可爲也

장차 천하를 먹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자를 보면 나는 그 먹지 못함을 볼뿐이다. 천하란 신령스런 그릇이므로 거기에 무엇을 어쩌지는 못함을 볼뿐이다. 천하란 신령스런 그릇이므로 거기에 무엇을 어쩌지는 못하는 것이다.
(주석 2)

제96호(1988년12월호) 복간호

6월 항쟁으로 민주세력이 집권하지는 못했으나, 1988년 4.26총선에서 여소야대로 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면서 5공과 같은 폭압은 사라지고, 어느 정도 민주주의가 진행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씨알의 소리>는 1988년 7월 18일 폐간 8년만에 정기간행물 등록증을 교부받았다. 등록번호 <라 - 3676>였다. 법적 처리기간은 신청한지 1개월내로 내주게 되었으나, 정부는 무려 7개월 만에 등록증을 내주었다. 군사독재 잔당들에게 함석헌과 <씨알의 소리>의 존재가 그만큼 두려웠던 것이다.
함석헌은 새편집위원으로 계훈제ㆍ김경제ㆍ김동길ㆍ김용준ㆍ김영호ㆍ노명식ㆍ법정ㆍ송건호ㆍ송기득ㆍ안병무ㆍ이태영ㆍ조요한ㆍ한승헌을 위촉하고, 이중 김용준(위원장)ㆍ김영호ㆍ한승헌으로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편집기획과 자문 역할을 맡겼다.

1988년 12월호로 복간호를 발행하였다. 200여 쪽에 내용도 풍부했다. 함석헌의 <절대승리>, 특집 <씨알ㆍ반핵ㆍ통일>, 조요한의 <군사문화는 청산되어야 한다>는 시론, 박두진의 축시 <깃발>, 김경재의 <자유혼, 인간 김재준>, 김준엽ㆍ송건호ㆍ법정ㆍ계훈제의 <복간축사> 등이 실렸다.

함석헌은 8년 만에 다시 쓴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의 <씨알 뒤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에서 통한의 사연을, 그러나 정제된 언어로 정리한다.

저들은 씨알을 칼로 자르면 쉽게 죽을 줄 알았겠지만 씨알은 죽지 않습니다. 죽는 법 없습니다. 죽이면 죽은 것 같으나 다시 살고, 다 죽어 없어졌다가도 굳은 땅껍질을 들추고 일어나는 들풀같은 씨알입니다.

나는 그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불의한 세력들은 나를 연금, 미행, 도청 등 갖은 방법을 다해 나의 입을 막고 나의 붓을 꺾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보려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전국 곳곳, 어느 산 어느 골짜기 골짜기마다 이름모를 수많은 씨알들의 꿈틀거림, 작은외침, 부르짖음이 함성이 되고, 마침내 도도한 물결을 이루어 불의의 세력들을 밀어부친 것이 작년 6월의 싸움이 아닙니까? 이때 나는 갑작스런 병을 얻어서 병원에 누워 있었고 마침내 대수술을 받게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오늘까지 병원을 드나들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주석 3)

함석헌은 퇴원을 했으나 노령인데다 큰 수술을 하여 건강이 예전치 못했다. 그러나 타고난 건강체질과 정신력으로 <씨알의 소리> 발행에 전력하였다. 복간호에 이어 1988년 1.2월호에는 특별한 글을 쓰지 않았다. 4월호가 통권 100호이기에 여기 준비를 서둘렀다. 평상시라면 창간 10년에 통권 100호가 발행되지만 <씨알의 소리>는 독재와 싸우느라 두 차례나 목이 졸려서 19년 만에야 100호가 나오게 되었다. 통상적이라면 200호가 나올 시점이었다.

함석헌은 재복간과 100호 준비, 그리고 몇 차례 시국강연으로 다소 무리를 한 것인지, 8월 3일 서울대병원에 다시 입원하였다. 1년 만이었다. 의사는 안정을 권하였다.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제24회 서울올림픽이 개최되었다. 노태우정부는 올림픽평화대회의 공동의장으로 함석헌을 추대하였다. 그리고 올림픽개최의 날 노태우와 함께 평화대회의 공동의장으로서 평화의 문에 불을 지폈다.

노태우는 전두환과 함께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5공의 제2인자로서 헌정 유린과 인권탄압에 핵심적 역할을 한 장본인이었다. 위기에 몰리자 6.29선언을 통해 국면을 전환하고, 야당분열의 선거전에서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나마 전두환과 다른 점이라면 1988년 7월 7일 ‘대북정책 특별선언’을 통해 대북 화해무드를 조성한 것이다.

함석헌이 민주진영 일부로부터 “망령이 들었다” 는 격한 비난을 들어가면서 병중의 몸으로 서울올림픽평화대회 추진위원장으로서 노태우와 평화대회의 공동의장이 된 것은 올림픽의 평화정신과, 대북 화해 분위기를 살리고자 했던 것 같다. 이제까지의 삶과는 달리 군사정권이 주최한 ‘행사’에 참여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이에 앞서 1987년 10월 12일에는 동아일보사가 제정한 ‘인촌 언론상’을 수상했다.
인촌 김성수의 일제말기 친일행적을 둘러싸고 지인들 사이에서 비판이 제기되었다. 함석헌의 수상 소식이 알려지면서 지인들과 <씨알의 소리>독자들이 이 상을 거부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었다. 그러나 함석헌은 이 상을 수상했고, 상금 전액을 오산학교 남강문화재단에 장학기금으로 내놨다. 그는 1984년 남강 이승훈을 기리는 ‘남강문화재단’을 오산학교에 설립하고 원고료와 강연료 등을 털어 기금으로 희사해왔었다.


주석
2> 이치석, 앞의 책, 637~638쪽, 재인용.
3> <씨알의 소리>, 복간호 10~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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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6장] 88년의 거인 나래를 접다

2013/02/25 08:00 김삼웅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폭로> 20년 전 박종철 씨가 공안당국의 고문에 의해 사망했을 때 군사독재정권은 이를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신부들의 용기 있는 폭로가 있었기에 암흑 속에서 한 가닥 희망의 빛을 발견하게 되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자료사진

 

국민은 전두환 독재정권에 언제까지 굴종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청년ㆍ학생들이 금단의 철벽에 도전하였다. 1982년 3월 18일 일군의 학생들이 부산 미문화원에 방화하면서 광주학살에 미국의 역할을 성토한 것이 반독재 항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어서 1983년 9월 30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 결성되어 투쟁하면서 5공의 철옹성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경향 각지에서 노동자들의 저항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1984년 5월 18일 김영삼ㆍ김대중 계의 야당인사들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하면서 저항운동은 야당 진영에까지 확대되었다.

80년대 초기 민주화운동의 선두 그룹에는 유신체제에 저항하면서 연대를 이루어 온 재야인사들이 있었다. 1983년 5월 31일 함석헌ㆍ문익환ㆍ홍남순 등 재야 지도급 인사들은 “광주학살 진상” 등을 요구하는 <긴급민주선언>을 발표하고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이에따라 6월 16일 양심수가족협의회가 NCC사무실에서 양심수 석방 등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가고, 이것은 고려대학을 필두로 대학가의 시위로 확산되었다.

시대는 다시 함석헌을 부르고 있었다. 함석헌이 새시대를 열어가고 있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전두환의 폭정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가 형성되면서, 5공은 날이 갈수록 더욱 흉폭해지고 민심의 이반속도가 빨라졌다. 정부는 저항하는 민주인사들을 고문하고 용공으로 몰았다.

함석헌은 김재준ㆍ윤반웅ㆍ홍남순ㆍ이민우ㆍ문익환ㆍ지학순ㆍ김대중ㆍ김영삼 등과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1985년 11월 11일 <고문용공조작은 절대로 은폐될 수 없다>는 성명에 이어 농성을 시작했다. 위원회는 <우리의 주장>에서 5가지를 주장했다.

-. 고문과 용공조작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
-. 고문과 가혹행위를 자행한 수사기관원들을 색출ㆍ처단하라.
-. 국회에서 위증한 내무장관과 법무장관은 인책ㆍ사퇴하라.
-. 우종원 군의 사인을 공개수사를 통해 밝혀라.
-. 현정권은 다시는 고문 및 용공조작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국민과 세계 앞에 공약하라.
-. 우리는 국민의 자유로운 정부 선택권과 언론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총력을 경주할 것이다.
(주석 1)

많은 학생과 노동자, 시민들이 분신ㆍ투신ㆍ할복 등 극한적으로 저항에 나섰다. 전두환 정권은 막나갔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고문을 당하다가 숨졌다. 함석헌 등 민주인사들은 1월 26일 기독교회관에서 ‘고 박종철군 국민추모회준비위원회’ (추모위)의 발족식을 갖고, 고문살인 사건의 진상규명과 이 땅에서 영원히 고문 등 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을 추방하기 위한 국민연대를 결성했다. 그리고 박종철군 국민추모대회를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 ‘추모위’는 이후 민주쟁취의 대장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함석헌은 6월 5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국민운동본부)가 발족하면서 홍남순ㆍ강석주ㆍ문익환ㆍ윤공희ㆍ김지길ㆍ김대중ㆍ김영삼과 공동으로 고문을 맡아 이 단체를 이끌었다. ‘국민운동본부’ 는 전국에서 노도처럼 일어나는 6월항쟁의 중심이 되었다. 함석헌은 많은 집회와 시위 대열에서 빠지지 않았고, 국민운동본부의 주요 성명을 발표할 때이면 이를 낭독하였다.

시민의 궐기에 견디지 못한 신군부 정권은 6월 29일 마침내 노태우가 항복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것은 한국수구세력의 교활한 국면 전환용 전략이었다. 그들은 위기에 몰리면 어김없이 유화책을 쓰고, 가라앉은다 싶으면 다시 칼을 빼드는 숫법이었다. 최근에는 이명박이 촛불집회로 위기에 몰리자 반성하는 듯 하다가 곧 공안카드를 꺼낸 바있다.

들불처럼 번지던 6월항쟁은 6.29선언과 함께 보수야당이 체제내로 귀환하면서 곧 대선 정국으로 전환되고, ‘전두환 타도’의 열기는 사라졌다. 이번에도 혁명적 열기로 치솟던 민중의 역량이 비등점에서 사그라지고 말았다. 매번 그랬다. 반유신 항쟁이 10.26사태로, 반전두환 6월항쟁이 6.29선언으로, 반이명박 촛불집회가 MB의 반성 발언으로 수그러들었다.

함석헌이 늘 걱정했던대로 국민적 ‘의분’ 이 모자랐다. 4월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하자 눈물로 전송하고, 박정희가 암살되어 장례를 치를 때 수많은 국민이 연도에 나와 눈물을 흘렸다. 전두환이 백담사에 유폐되었을 때도 많은 국민(신도)들이 그를 찾아갔다. 인정이 많은 국민인지, 의분이 없는 국민인지, 그래서 압제의 역사가 되풀이 되는 것일 터이다. 1911년 중동, 아프리카 국가들의 반독재 투쟁의 치열했던 것과도 비교된다.


주석
1> <6월항쟁 10주년기념자료집>, 45쪽, 6월민주항쟁 10주년사업 범국민추진위원회 엮음, 사계절,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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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5장] 살육의 5공시대, <씨알의 소리> 또 폐간

2013/02/24 08:00 김삼웅

 

 

983년 3월 한길사

함석헌의 80순을 넘긴 1982년 암담한 시국에서도 지인들이 ‘함석헌선생 8순기념문집 간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씨알ㆍ인간ㆍ역사>라는 390쪽 분량의 문집을 발간하였다. 문집편집위원에는 김동길ㆍ김성식ㆍ김용준ㆍ송건호ㆍ법정ㆍ안병무 등이 참여했다.
문집은 안병무의 <선생님께 드리는 글>, 박두진의 기념시 <빙원행>에 이어 제1부는 안병무의 <순수와 저항의 길>, 송건호의 <언론인 함석헌>. 김경제의 <뜻ㆍ역사ㆍ민족>, 송기득의 <함석헌의 저항론>을 묶었다.
제2부는 양호민의 <마르크스ㆍ레닌의 민족이론>, 박현채의 <한국농업의 상황과 농업혁명에의 길>, 장을병의 <평등이념의 정치적 접근>, 제3부는 안병무의 <세례요한과 예수>, 유동식의 <한국사상과 기독교신학>, 장일조의 <인간의 자기해방과정으로서의 역사>, 남정길의 <정의관념의 붕괴와 그 결과에 대한 고찰>, 제4부는 장회익의 <인간:우주적 실재에 대한 역사적 모형>, 김용준의 <분자생물학의 현재>, 장기홍의 <지구의 초기사>, 제5부는 김성식의 <이집트 문화의 재음미>, 김정환의 <페스탈로찌의 정치철학적 저작 연구>, 이태영의 <자녀의 양육에 관한 연구>가 쓰였다.

한길사는 1983년 3월부터 함석헌전집 편찬위원회를 구성하고 1988년까지 20권의 전집을 펴냈다.
편집위원은 계훈제ㆍ고은ㆍ김동길ㆍ김성식ㆍ김용준ㆍ법정ㆍ송건호ㆍ안병무로 구성되었다.
전집은
1. 뜻으로 본 한국역사.
2. 인간혁명의 철학.
3.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4. 죽을때까지 이 걸음으로.
5. 서풍의 노래.
6. 수평선 너머.
7. 간디의 참모습 / 간디 자서전.
8.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9. 역사와 민족.
10. 달라지는 세계의 한길 위에서.
11. 두려워 말고 외치라.
12. 6천만 민족 앞에 부르짖는 말.
13. 바가바드 기타.
14.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15. 예언자 / 퀘이커 3백년 외.
16. 사람의 아들 예수 / 예언자 [칼린 지브란]
17. 민족통일의 길.
18. 씨알의 옛글 고쳐 읽기.
19. 영원의 뱃길.
20. 함석헌의 삶과 사상.
(주석 14)

당시 생존 인물의 저작물이 20권의 전집으로 묶여나온 것은 최초의 일이었다. 함석헌은 80여 년의 생애에서 그만큼 많은 글을 쓰고 강연, 인터뷰 그리고 여러 권을 번역한 노력의 결정이었다. 편집위원회의 간행사 몇 대목이다.

“이 시대에 살면서 글줄이나 읽은 사람치고 ‘함석헌’이라는 이름 석 자를 기억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삶과 뜻을 훌륭하다 칭찬하는 사람, 또는 부질없다 나무라는 사람, 또는 마땅치 않다 욕하는 사람이 다 있어 그 의견이 한결같을 수는 없으나, 그 누구도 함석헌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잡아떼지는 못할 것이다. 뭐니뭐니해도 해방 후 40여 년, 아니 그 이전 일제시대부터의 이 나라 이 민족 역사에 있어서 그의 이름은 언제나 그 현장에 있었고 또 매우 아름다운 이름이 되어오고 있다.”

“그러나 막상 ‘함석헌이 어떤 사람인가?’하고 누가 묻는다면 성큼 ‘이런 사람이다’ 라고 대답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그런 인물이다. 금강산에는 만물상이 있는데, 이렇게 보면 이런 것 같고 저렇게 보면 저런 것 같아서 무어라 이름 짓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이런 면이 있는가 하면 또 저런 면이 있으니, 어떤 형용사도 그 바위산의 특정을 나타내지 못하여 만물상이라는 이름이 붙였을 것이다.”

“학자이기도 하고 학자가 아니기도 하고, 문인이면서 문인이 아닌 함석헌은 또한 종교인이면서 종교인이 아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 기독교를 배우고 우찌무라ㆍ유영모 같은 이들의 여향을 받았으며, 현재는 퀘이커 교도들 모임에 몸을 담고 있는 그가 크리스찬인 것만은 확실하지만, 그러나 그는 전통적인 신앙의 기독교인은 아니다.”

“그는 정치와는 아주 거리가 먼 곳에서 늘 살아왔지만 해방 이후 이땅의 가파른 정치사에 큰 선을 긋는 영향을 미쳤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언론인이 아니지만 칼날같은 날카로운 붓끝으로 한 시대의 잘못을 고발한 언론인이 또 누구이겠는가? 그의 붓끝을 따라 한 시대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였다.”

“함석헌은 누구인가? 만물상이기 때문에 뭐라고 잘라서 말하기는 어렵다. 몇 마디로 굳이 표현하자면, 그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이며 ‘죽어가는 시대의 양심’이다. 그는 ‘민중의 대변자’로서 ‘시대의 예언자’로서, 이 날 이 시간까지 살아왔다. 그는 ‘씨알’을 위해 씨알과 더불어 깊이 생각하고 멀리 내다보면서 가시밭길 80년을 헤치고 예까지 걸어온 우리 시대의 자랑스런 얼굴이다. 에머슨이 ‘위대한 것은 오해받기 마련’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지만, 인간 함석헌은 바로 그럴 수밖에 없는 삶과 역사를 살아온 우리 시대의 참 인간상이다.”
(주석 15)

함석헌전집은 민주화의 열기를 타고 20권의 분량에도 불구하고 공전의 인기를 불러모았다. 그런데 뒷날 함석헌기념사업회는 이 전집의 많은 오ㆍ탈자를 비롯 문장의 부분적인 탈락 등편집상의 여러 가지 부실성을 들어 판매금지를 요구하고, 출판사가 이를 수용하면서 서점에서 절판되었다. 전집 편찬 이후에 발굴된 각종 자료까지 포함하여 새 전집의 발간이 기대된다. 


주석
14> <씨알ㆍ인간ㆍ역사>, 차례, 한길사, 1982.
15> <전집>, <함석헌전집 간행에 부쳐>, 3~5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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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5장] 살육의 5공시대, <씨알의 소리> 또 폐간

2013/02/23 08:00 김삼웅

 

 

한승헌 변호사가 조작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생계형’으로 삼민출판사를 차렸다. 그리고 1982년 5월 함석헌의 <씨알의 옛글풀이 하늘 땅에 바른 숨 있어>를 펴냈다. 그동안 <씨알의 소리> 등에 연재한 동양고전을 묶은 것이다. <제1장, 동양정신의 뿌리>, <제2장 장자>, <제3장 둬두는 정치 (속 장자)>, <제4장, 노자>, <제5장 맹자>, <제6장 잡편>이다. <예와 이제(古今)>이란 서문의 한 대목을 보자. 그의 고전에 관한 인식의 편린을 알게 된다.

길을 찾기 위해 나는 옛길을 다시 읽어보자는 것이다. 왜? 그 안에야말로 인간의 인간다운 기본적인 모습, 그리고 그렇게 살고 죽는 길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 때야말로 초창시기기 때문에 사치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고, 비교적 간사한 지혜가 없이 순전히, 너도 살고, 나도 살며, 나도 인간답게 죽고 너도 인간답게 죽어, 이 인생을, 이 생명을 이 하늘을 한 뜻 속에 실현해보려고 애썼던 것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중략) 세상 풍조는 새것만을 좋아하고 옛것을 존중할 줄 모르지만 뜻 있는 이는 그렇지 않다. 옛날에 위대했던 이들은 예외 없이 다 옛길을 찾았다. 모든 종교, 모든 철학이 그것을 증거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고등기술의 급작스런 발달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날마다 변하는 새 풍조만을 따르고 옛 정신을 거의 무시하게 됐지만, 이대로 오래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주석 11)

이 책의 <잡편>에 풀이한 굴원(屈原)의 글 <고기잡이 늙은이가 묻기를>에서는 이 무렵 함석헌의 심기와 통함을 느끼게 한다.

굴원이 이미 내침을 받음에 강담에 놀아 못가에 걸으며, 읊조리니 낯빛이 바싹 마르고 모양이 마른 나무처럼 시들었더라. 고기잡이 늙은이가 보고 묻기를, 그대 삼려대부가 아닌가. 무슨 까닭으로 여기 이르렀는고,

굴원이 가로되, 온 세상이 다 흐렸는데 나 홀로 맑았고, 뭇 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 홀로 깨었노라. 이러므로 내침을 보았노라. 고기잡이 늙은이가 가로되, 어진 이는 무엇에나 걸림이 없어 세상으로 더불어 잘 어울려 옮겨가는 것이다. 온 세상이 다 흐렸거든 어찌하여 그 진흙을 휘저으며 그 물결을 일으키지 않는고. 그러고는 깊이 생각하고 높이 서서 스스로 내침을 받도록 하는고. 굴원이 가로되, 나는 들으니 새로 머리 감은 이는 반드시 감투를 튕겨서 쓰고 새로 몸 씻는 이는 반드시 옷을 털어서 입는다하니, 어찌 내 몸의 깨끗함을 가지고 남의 얼룩덜룩한 것을 받을 수 있겠는가. 차라리 소상강에 나가 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낼 지언정 또 어찌 차마 희고도 흰 맑음을 가지고 더러운 세상의 티끌을 무릅쓸 수 있겠는가. 고기잡이 늙은이 빙긋이 웃고 뱃삯을 쳐 떠나가면서 노래하기를, 창랑물 맑거들랑 내 갓끈을 씻읍세나, 창랑물 흐리거들랑 내 발을 씻읍세나. 드디어 가 버린 다음 서로 다시 말이 없더라.
(주석 12)

함석헌은 죽을 때까지 퀘이커교인으로 생활하였다. 세계적으로 연대를 갖고 국제 모임은 물론 국내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였다. 그리고 1985년 11월에는 삼민사에서 <현대의 선(禪)과 퀘이커신앙>을 편역하기도 했다. 함석헌은 영문학자로서 일본 퀘이커의 원로인 이기에 유끼오의 <퀘이커의 길>은 1958년 호주 퀘이커 연회에서 퀘이커신앙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소개할 목적으로 펴낸 것을, 그쪽에서 한국의 청소년들을 위하여 펴내기를 희망하여 번역하게 되었음을 서문에서 밝힌다.

이 책은 <제1부 기독교는 달라져야 한다>, <제2부 종교의 원천을 찾아서>, <제3부 퀘이커의 길>로 구성되었다. 1부는 함석헌이 퀘이커 예배모임에서 발표한 내용이고, 2부는 유끼오의 글을 조형균의 번역, 3부는 부길만이 각각 옮겼다. 함석헌은 이 책을 펴내는 이유를 말한다.

이상하게도, 그 진실하고도 담대한 정신의 개척자들이 북아메리카에도 가고, 아프리카에도 가고, 인도에도 가고, 일본에까지 오면서도 오직 우리, 졸고 있는 은둔자라 불리던 우리에게만 늦었다. 그래서 인류역사에서도 드물게 보는 끔찍한 환난인 6ㆍ25에 와서야 비로소 그 개척자들의 발길이 우리나라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먼저 그 물결에 접한 우리의 정성이 부족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이 수난의 여왕의 지침이 너무해서 그랬는지, 30년이 넘는 동안 우리는 이렇다할 만한 새 정신의 증거를 한 것이 없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차차 젊은 혼들로부터 “퀘이커란 무엇입니까” 하는 고마운 질문을 받게 된다. 지금 여기 펴내는 조그만 책자도 그러한 질문에 대답을 함으로써 새로 남의 꿈틀거림을 일으켜보자는 하나의 움직임이다. (주석 13)

여기서 함석헌의 책 얘기를 덧붙이기로 한다. 그의 사회적인 명성이 높아지면서 출판사들의 책 출판이 이어졌다. 1959년 3월 생각사에서 처음으로 펴낸 <새 시대의 전망>은 반응이 좋아지면서 1979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게재하여 몇 달 만에 5쇄까지 찍었다. 기왕에 발표했던 글을 묶은 책이다.

이에 앞서 1969년 1월 칼릴 지브란의 번역서 <예언자>가 삼중당에서, 역시 번역한 지브란의 <사람의 아들>이 1976년 5월 한샘문화원에서 출판되었다. 1978년 10월 휘문출판사가 <씨알은 외롭지 않다>, 1979년 4월 동광출판사가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1985년 11월 한길사가 산문을 모은 <들사람 얼>을 각각 펴냈다. 이들 책에는 중복된 내용이 많아서 독자들을 실망시켰다는 평도 따랐다. 휘문출판사는 1989년 “나의 인생관” 시리즈 10권을 편찬하면서 함석헌의 책을 <씨알은 외롭지 않다>라는 제목을 달아 펴냈다.


주석
11> 함석헌, <하늘 땅에 바른 숨 있어>, 5~6쪽, 삼민사, 1982.
12> 앞의 책, 315~316쪽.
13> 함석헌 외, <현대의 선과 퀘이커의 신앙>, 2~3쪽, 삼민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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