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주고성경구(徽州古城景区)는 중국역사문화도시 흡현의 핵심이며 휘주부 소재지로서 산수가 아름다워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경구내 고민가 촌락은 구조가 아름답고 고대의 다리, 탑, 거리, 골목길, 제방, 패방들이 잘 어울려서 소박한 풍채을 보여주며 마치 호장한 박물관과 같다.

휘주고성경구 6개 관광지: 동방개선문—허국석방,   휘주고성표지—휘주부,   강남제일거리—두산가.   휘상의근원 – 어량고항,   휘주대관원- 휘원,   전국애국주의교육기지 –토싱즈기념관.   http://blog.daum.net/choemh/16140891

 

 

  

 

 

 

 

 

 휘주고성경구(徽州古城景区)관람도     http://www.guhuizhouta.com/


 

 휘주부서(徽州府署) 휘주부 관아

 

 

 


명경고현(明鏡高懸) 높게 매달려 있는 맑은 거울 - 오장육부가 훤히 비춰보이는 거울이라는 뜻

 

시비(是非)를 분명하게 따져 판단하는 공정무사(公正無私 : 사심없이 공평하게 처리함)한 법관을 비유함.

한(漢)나라 때의 괴담이나 전설, 일화 등을 수록한 서경잡기(西京雜記) 3권에는 진(秦)나라 때의 신기한 거울(鏡 경)

이야기가 실려있다.

진(秦)나라의 함양(咸陽)궁(宮)에 소장된 진귀한 보물 가운데, 너비가 4(四尺 : 1m 20Cm), 높이가 59

(五尺九寸 : 1m 77Cm) 앞뒷면이 모두 밝게 빛나는 거울이 하나 있었다. 사람이 그 앞에 서면 거울에는 그 모습이

거꾸로 선 모습이 나타나고, (- 옛날의 사진기는 파인더를 들여다 보면 피사체가 거꾸로 보였다는~)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비춰보면 그 사람의 오장(五腸 : 폐. 심장. 비장. 간장. 신장)이 나타나는 거울이었다.

몸에 병이 있는 사람이 비추면 몸의 환부(患部)가 나타나 병을 알아보아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신기한 거울이었고

심지어는, 사람이 품고 있는 흉중(胸中 : 가슴 속)에 있는 심보(心褓)까지 알 수 있어 함부로 나설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인 거울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진시황(秦始皇)은 이 거울을 이용하여 궁궐 안의 모든 사람들의 충성심을 비춰 확인하였는데 특히 면전

(面前)에서 심장이나 쓸개가 급히 뛰는 사람을 발견하면 진시황은 즉각 그를 체포하여 심문(尋聞)하고 처벌했더란다.

그러나, 이 거울은 진나라 말기(末期) 유방(劉邦)이 함양(咸陽)을 공격하던 혼란 와중에 그만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大學士 허국(許國)  1527~1596

휘주부() 흡현() 사람으로 자는 유정()이다. 명()나라 때의 대신()이다.

가정() 44년(1565)에 진사() 출신으로 벼슬은 검토(), 국자감제주(), 태상시경(), 첨사(), 예부시랑(), 이부시랑(), 예부상서(), 동각대학사(), 태자태보(), 무영전대학사(殿) 등을 역임했다. 일찍이 조선()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시호는 문목()이다. 저서로 《허문목공집()》이 있다.

허국석방(許國石坊)은 흡현시내에 위치하며 중국내에서 보기드문 전형적인 명대 석방형식의 건물이다. 1584년도에 처음 지어졌으며 8개의 기둥이 口자의 형태로 되어 있다. 그래서 "八脚牌楼(팔각패루)"라고 명명 되기도 한다. 남북으로 길이 11.54m, 동서로 넓이 6.77m, 높이 11.4m, 면적은 78.13㎡이다.

 

동기창(童其昌)  1555~1636  패방의 글씨는 중국 명대 후기의 서예가이자 화가인 동기창이 썼다.

동기창의 자는 현상(). 호는 사백(), 향광() 화정( 상하이시 송강 ) 사람. 만력 17년(1589) 수석으로 진사가 되고 한림원서길사, 황태자의 강관()이 된다. 그후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하고 다시 관직에 들어가기도 함을 수차 반복하였다. 태창 원년 (1620) 태상소경, 천경2년(1622) 태상사경겸 시독학사, 『신종실록()』 편집에 참가하여 동 3년 예유시랑, 이어서 좌시랑, 동 5년에는 남경 예부상서를 지내고 다음해 은퇴. 숭정 4년(1631) 옛 관직에 복직, 동 8년에 예부상서겸 태자태보로 끝난다. 시호는 문민(), 서화에 능하고 고금의 명필을 연구하였으며 또 선리()를 시문서화()의 이론을 응용하여 설하였다. 서는 처음에 미불()을 종()으로 하였고, 진나라 사람의 평담 자연의 경을 이상으로 일가를 형성하였다. 형동() 미만종() 장서도()와 함께 ‘형장미동()’이라고 불리었으며, 또한 ‘남동 북미’라고도 칭하였음. 감식, 수장한 법서를 모아 『희홍당법첩()』을 만들었고 서 작품으로서는 『행초서권』(동경 국립 박물관), 『경원변묘지명고』, 『일월시권』등 많이 남아 있다. 호는 오파 문인화의 정계()를 이어 받아 원말 4대가 특히 황공망()에서 동원()에 올라갔으나, 구도법, 필묵법은 명말의 개성주의적 경향으로 기울어졌으며, 특히 장년기 까지의 작품에는 표현주의와 추상주의의 날카로운 감각이 나타남. 대표작은 『형계초은도권()』(1613뉴욕 개인 소장), 『청변산도()』(1617 클리브랜드 미술관). 또 화론가()로 남북 양종으로 나눠 그 계보를 만들고, 상남폄북론()을 전개하여, 그 화풍 ᆞ 화법과 함께 명말 청초 이후 남종화 전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저서에 『용태집()』, 『화선실() 수필』 등이 있다.

 

 

 

 

 

 도행지(知) 1891 ~ 1946

안휘성(省) 출생. 1914년 진링[]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에 유학하여 컬럼비아대학에서 J.듀이에게 교육학을 배우고 1916년 귀국하여 후스[] 등과 그 교육론 보급에 힘썼다. 난징[]고등사범학교(후에 국립 ) 교수로 근무하였고, 1923년 이후로는 민족자본을 기금으로 한 민간교육운동에 헌신하며 강단에 서지 않았다. 장제스[] 정부하에서 창조적인 형태의 학교를 개설하고, 노동존중과 사상의 자유에 철저하여 공산당원을 옹호하였으며, 많은 혁명청년을 양성하였다. 난징의 사오좡[]사범학교, 상하이[]의 산하이공학단(), 충칭[]의 육재()학교 ·사회대학 등을 경영하였다.

1935년 이후 항일 민족통일전선 운동에 참가하여, 교육은 어린이와 대중의 생활해방을 위해 민족해방에 봉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상하이에서 내전반대 ·정치민주화를 주장하다가 1946년 7월 뇌일혈로 갑자기 죽었다. 전생애를 통해 반식민지인 중국 사회에 근대교육의 원칙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추구하여 오늘날 중국 신민주주의 혁명기의 애국주의자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의 교육이론은 중국의 교육이론에 계승되고 있다.

 

흡현(셔시엔, 歙县, Shexian) 

휘(徽) 지역의 중심지이자 수도이다. 아마 와 보면 '중국 전체의 상업을 휩쓴 집단이 이 작은 시골에서 시작되었다니' 하고 의아할 것이다. 당연하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고향을 떠나 다른 대도시에서 성공하고, 이곳에는 자기 원래 집터에 큰 집을 짓는 순서였으니까. 그래서 흡현은 고상(삐딱해서 Sorry)하게 서당/사당의 역할을 한다. 그래도 상인들이라 재고를 관리할 수 있는 곳도 있고. 그곳이 어량(위량, 渔梁, Yuliang)이다. 그래서 같은 유적이라고 해도, 흡현은 먹물 냄새가 많이 나고 엄숙한 느낌이 강하다. 반면에 어량은 돈 냄새가 꽤 많이 나는 편, 그리고 활발했던 느낌이 많이 난다.

흡현의 옛 이름이 휘주(徽州), 즉, 이 지역의 수도 역할을 했었다. 송대부터 중국 역사상 유명인사를 기록한 사전에 등록된 사람만 200여명에 달하고 사당, 서당, 서원이 120여개에 달했다고 하나, 그 정도에 비하면 너무 남아 있는게 없다. 중국 정부가 2006년 정도부터 야심차게 수도 복원 사업을 했다는데, 한 결과가 운치라고는 찾을 수가 없는 성곽의 붉은 벽과 위에서 얘기한 요란스러운 (브랜드 옷 가게로 즐비한) 상가 거리였다.

하지만, 양화문(양허먼, 阳和门, Yanghemen)을 들어서 허국석방(许国石坊)을 지나면 나타나는 요란무쌍한 흡현 시내는 2008년인가에 새로 칠한 화장일 뿐, 두산가(더우샨지에, 斗山街, Doushanjie) 들어 서면, 높고 큰 오래된 저택들이 즐비한 좁은 길을 걷게 된다.

 

휘상()

명청() 시기 안후이성() 휘주부() 지역에 적을 둔 상인() 혹은 상인집단()의 총칭으로 신안상인()이라고도 하며 속칭 휘방()이라고도 한다. 당시의 휘주부()는 안휘의 서현(, 섭현), 슈닝현(, 휴녕현), 우위안현(, 무원현), 치먼현(, 기문현) 이현(), 지시현(, 적계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휘상()은 동진() 시기에 태동되어 당송() 대에 성장하였고 명대()에 전성하였으며 청말()에 쇠퇴하였다.
휘상()은 모두 빈한한 산지 지역 출신으로 농업으로 생존하기 어려운 환경조건하에서 상업에 전념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상업을 통해 부를 창출하였으며 이를 통해 문화적 소질을 갖추었고 또한 인적자본을 축적하며 경영활동에 한층 더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이 이들의 성공 과정 중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전국에 퍼져 있었으며 취급하는 물품이 소금, 면포(), 양식(), 차(), 문구필묵() 등이었으며 고통을 감내하고 근검절약하며 소자본 경영을 위주로 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또한 부츨 축적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가 사회의 공익을 위한 사업과 자선활동을 하는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이로 인해 휘상은 돈을 버는 것을 일종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관직에 나가는 것을 영예롭게 여겨 청 건륭에서 가경제에 이르는 70여 년간 265명이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갔으나 당시의 진상() 자제는 단지 22명에 불과하였다.

 

문방사우(文房四友)

서예작품은 서화가들이 (붓 필), (먹 묵), (종이 지), (벼루 연)이라는 문방사우를 이용하여 글씨를 써서 만든 것이다.

’은 짐승의 털을 대나무 막대에 넣어서 만든 붓을 한 손으로 들고 있는 형상을 본뜬 것이다.
붓은 늦어도 상나라 때에 이미 있었다. 어떤 갑골에는 붓으로 써넣은 붉은색 부호가 보존되어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붓은 1954년 중국 호남성 장사()의 좌가공산()의 전국시대 분묘에서 출토된 것인데, 붓이 작은 대나무 통 안에 함께 들어있었다. 대나무로 된 붓자루는 길이가 18.5㎝, 지름이 0.4㎝이고 붓의 털이 토끼털이며 털의 길이가 2.5㎝이다.
중국에서 가장 좋은 붓은 선필()과 호필()이다. 안후이성() 선주()의 경현()에서 생산되는 붓은 송나라 때의 유명한 시인 구양수()에 의해 “, .”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이 말은, 붓이 너무 부드럽거나 딱딱하지 않아 사람이 손으로 잡기에 매우 적합하고 백 개의 붓 중에 질이 떨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당시 이 붓은 “천금을 주고 사려해도 시장에는 없었다.(.)”고 한다. 저쟝성() 호주시()에서 생산되는 호필은 외국에서 더욱 유명하다.

’(먹)은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쓰는 검은색 안료이다. ‘’은 회의자로, ‘’과 ‘’로 구성된다. 빛깔과 광택이 밝고 윤기가 흐르며, 재질이 부드러우며, 고색이 창연한 먹은 서예가들의 필수품이다. 현재 안후이성 흡현() 등의 지역에서 만든 ‘휘묵()’이 이름을 떨치고 있다.
제지술은 고대 중국의 사대 발명 중의 하나이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글씨를 쓰는 재료로 갑골이나 청동기, 죽간, 견직물, 비단 등이 있었다. ‘’(종이 지)자의 편방은 ‘’인데, 이것은 종이가 실과 관련이 있음을 설명해준다. ‘’는 본래 실을 빨 때 도구의 밑바닥에 남는 솜 모양의 물질인데, 한나라 때 사람들이 삼, 어망, 나무껍질, 헤진 천조각 등을 원료로 하여 종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채륜

동한(25~220년) 때 채륜()이 제지술을 개선하여 만들어낸 종이는 가볍고 얇으며 깨끗해서 ‘채후의 종이()’라고 불렸다. 저렴한 종이가 나오면서 글씨를 쓰는 것이 더욱 편리해졌다. 종이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좋은 것이 선지()로, 중국 안후이성 선주의 경현에서 생산된다. 선지의 품질은 순백색으로 곱고, 부드러우면서도 질기고 견고하며, 광채가 나지만 미끄럽지 않고, 빛이 통하면서도 빛깔과 광택이 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래 보관해도 부패하지 않고 여러 번 접어도 손상되지 않으며 노화에 강하고 벌레나 좀을 방지해준다. 이 때문에 ‘천년의 수명을 가진 종이’라는 칭찬을 받고 있다.
’자는 ‘’을 편방으로 하며 출현시기가 늦은 편이다. 이것은 돌로 된 먹을 가는 도구이다.
붓, 먹, 종이, 벼루는 ‘문방사우’라고 불린다. 사람들이 이것으로 아름다운 한자를 써내고 독특한 풍격의 서예 예술을 창조해 내었다.

 


휘주10.jpg
0.13MB
휘주131.jpg
0.12MB
휘주09.jpg
0.14MB
휘주13.jpg
0.08MB
휘주03.jpg
0.16MB
휘주14.jpg
0.21MB
휘주11.jpg
0.08MB
휘주08.jpg
0.14MB
휘주01.jpg
0.19MB
휘주06.jpg
0.09MB
휘주02.jpg
0.09MB
휘주17.jpg
0.11MB
휘주16.jpg
0.17MB
휘주011.jpg
0.18MB
휘주15.jpg
0.18MB
휘주04.jpg
0.14MB
휘주05.jpg
0.25MB
휘주07.jpg
0.15MB
휘주12.jpg
0.09MB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