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체촌 [西遞村 시디춘]


  안후이성() 남부 황산시() 이현()의 촌락으로

2000년 완난고촌락(, Ancient Villages in Southern Anhui : Xidi and Hongcun)으로 훙촌(, 굉촌)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중국역사문화명촌(1차, 2003)으로 지정되었다.


시디(西, 서체)는 송() 철종()의 원우 연간에 건축되기 시작하였으며,

하천이 마을을 관통해 서쪽으로 흘렀기 때문에 원래의 명칭은 시촨(西, 서천)이었으나

이곳이 이전에 역참(驿)이 있었기 때문에 시디(西, 서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시디(西)의 시조는 당 소종() 이엽()의 아들로 변란을 맞게 되자 민간으로 피난하여

호씨()로 개명하였으며 이후 호씨()와 함께 명운을 달리하게 되었다. 


시디촌(西)은 동서로 마을을 관통하는 큰 도로와 양측에 각각 평행한 도로가 있어 각각의 골목으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으며

동서 길이 700미터, 남북 길이 300미터인 마을 중앙을 중심도로가 가로지르고 주변으로 수많은 골목이 미로처럼 뻗어 있는 구조다.  


경애당(), 이복당(), 자사패루() 등 공공건축물 앞에는 작은 광장들이 배치되어 있다.

현재 124동의 완전한 명청 건축이 보존되어 있으며 가장 오래된 것은 역사가 600년이 넘는다.


주요 건축물로는 명 만력 6년(1578) 건립된 청석패방()과 청 강희 30년(1691) 건축한 대부제() 등으로

대다수의 민가는 관광객들에게 내부까지 공개되는데 가구와 내부장식도 대부분 원형대로 보전되어 있다. [www.xidi.cn]


 건물 외부는 대부분 검정과 흰색(흰색 벽에 검정색 지붕)으로 담백한 느낌을 주며 조각을 비롯한 장식이 정교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시디춘의 실세였던 후(胡) 씨의 사당인 징아이탕(敬愛堂), 마을 입구의 츠슈파이로우(刺史牌樓), 잔지아로우(轉角樓) 등이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건축물뿐 아니라 주변 경관도 빼어나 예로부터 무릉도원 안에 있는 마을이라 불렸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69837&cid=43792&categoryId=43794


서체촌 고건축군 (西递村 古建築群)  여기에서 递는 遞의 간체자. 갈마들체 역참(체) 여인숙을 의미함.


  西递村是安徽省黄山市最具代表性的古民居旅游景点,座落于黄山南麓,距黄山风景区仅,素有“桃花源里人家”之称。西递镇村前的牌坊西递始建于宋朝的元祐(宋哲宗)年间,由于河水向西流经这个村庄,原来称为“西川”。因古有递送邮件的驿站,故而得名“西递”

  서체촌은 안후이성 황산시에서 가장 대표적인 고대 민가를 갖춘 관광지이다.


이것은 황산의 남쪽 산기슭에 위치해 있으며 황산 관광지역에서 40km 떨어져 있고 “무릉도원이 민가 안에 있다”라는 호칭을 받고 있다.

서체촌 앞 패방은 송나라의 원우(송철종)때 지어지기 시작하였고 하천이 서쪽으로 흘러 이 마을을 경유한다고 하여

원래는 “서천”이라 불렀는데 후에, 옛날에 이곳에 우편배달하는 우체국이 있어서 배달한다는 ‘递’글자를 따서 “西递(서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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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디나 홍춘이 있는 이현()은 예로부터 도연명(陶淵明)의 시에 나오는 도화원(桃花源)으로 불려졌다.

이는 이현의 자연환경이 도연명이 묘사한 도원동(桃源洞)과 흡사하다고 하여 붙은 이름인 듯하다.

실제로 도원동이라는 마을이 있고 1956년 도로공사를 하면서 바위 절벽에 새겨진 도원동(桃源洞)이라는 글씨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시디는 이현에서도 사방이 산으로 막힌 벽촌으로 지금 황산시 중심지인 툰시(屯溪)로부터 5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옛날에는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 도원동이란 마을 앞에 배를 대고 도원동을 통과하여

산과 계류를 따라 꼬불꼬불한 길을 한참을 가서야 비로소 시디 마을에 다다를 수 있었다고 한다.

 

자(字)가 태백(太白)인 시선(詩仙) 이백(李白;701~762)은 이곳 황산을 여행하다가 시디[西遞]에 들렀을 때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를 떠 올리고 이곳 시디를 무릉도원이라고 생각하면서 시를 남긴 것 같다.


    黟縣小桃源 이현소도원 ; 이현의 작은 무릉도원에는 
    煙霞百里間 연하백리간 ; 연기가 백리에 이를 정도로 아득하고 
    地多靈草木 지다령초목 ; 땅에는 신령스런 초목들이 가득하구나
    人尙古衣冠 인상고의관 ; 사람들은 옛 옷을 지금껏 입고 있나니    

    http://blog.daum.net/ydoy0000/17019928


▲  연못가 광장에 이 일대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패방이 우뚝 서있는데 호문광(胡文光)의 패방이다.

‘자사패방(刺史牌坊)’, 또는 ‘서체패루(西遞牌樓)’라고도 하며 시디마을의 표시이기도 하다.

호씨(胡氏) 마을의 조상이 이씨(李氏)인 사연

시디(西遞)의 원래 이름은 시추안(西川) 또는 시시(西溪)였다고 한다.
이는 마을 안에 세 줄기의 냇물이 동에서 서로 흐르는 데서 취한 것이다.
또 휘주부(徽州府)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일찍이 일종의 역참(驛站)인 "포체소(鋪遞所)"가 설치되었는데
이로 인해 이름이 서체로 바뀌게 되었다.

역사상 비교적 전란의 침습을 적게 받았으며 외부로부터 큰 경제적 충격이나 영향을 받은 적도 없었다.
이는 이곳이 옛 마을 본래의 모습을 완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던 이유로 생각된다.

현재 마을 안에 남아있는 명청대 전통가옥은 모두 124채이며 그 중 사당이 3채이다.
또 마을 안의 도로나 수계(水系)가 원 모습을 유지하고 있고 40여개가 넘는 골목(巷,弄)들은
모두 특유의 청석판이 깔린 채로 본래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래서 시디 마을이 휘주 지역 고촌락 중의 본보기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마을은 동서 약 800미터이고 세 줄기의 냇물이 마을 북과 동에서 흘러 들어와서
마을 뒤를 돌아 남쪽에서 만난다.

주택들은 주로 이 냇물에 의존하여 배치되어 있으며
경애당(敬愛堂)과 추모당(追慕堂) 두 사당건물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사당이나 패방 등의 공공건축물 앞에는 비교적 널찍한 공터가 있어서
마을사람들이 집회를 갖거나 또는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시디를 산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을 전체가 동서로 길게 누워 있어 마치 배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마을은 서쪽에서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입구에는 연못이 있어 근처 농지에 물을 대주고 있고
여름이면 색색의 연꽃들이 피어 마을을 찾는 이들을 맞아준다.

연못가의 넓은 광장에 이 일대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패방이 우뚝 서있는데
이 마을의 대표적인 역사적 인물 호문광(胡文光)의 패방이다.
이 패방은 호문광자사(胡文光刺史) 패방(牌坊), 또는 "서체패루(西遞牌樓)"라고도 하며
시디 마을의 표지이기도 하다.

호문광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마을은 호씨들의 동성마을이다.
그러나 처음 이 마을에 들어온 사람들은 호씨가 아니라 이(李)씨였다.

호씨 문중의 족보에 의하면 시디 마을 호씨의 시조는 당나라 소종(昭宗) 이엽(李曄)의 아들이다.
서기 904년 당 소종이 양왕(梁王) 주전충(朱全忠)의 협박을 받고 황급하게 도망을 나섰는데
도중에 황후 하(何)씨가 아들을 낳게 되었다.

그때 신안(新安)의 우위엔(?源) 사람인 호삼(胡三)이 몰래 태자를 데리고
휘주 우위엔의 카오쉐이(考水)로 돌아왔다.

그 후 태자의 이름을 창익(昌翼)이라 하고 성을 호(胡)로 고쳤다.
그렇게 해서 창익(昌翼)은 시디호씨(西遞胡氏)의 시조가 되었다.

그 후 서기 1047년 호창익의 후손 호사량(胡士良)이 공무로 진링(金陵)에 가게 되었는데
도중 시디를 지나게 되었다.

그는 그곳의 지세가 산에 둘러싸이고 풍경이 수려하며 토질이 비옥한 것을 보고 길지라 생각하여
우위엔 카오쉐이에서 집안을 이끌고 시디로 옮겨왔다.

이로부터 시디는 호씨의 마을이 되었고 농사와 학문을 함께 힘써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그들이 당나라 황족의 후예로서의 긍지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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村头有座明万历六年(公元1578)建的三间四柱五楼的青石牌坊,结构精巧,是胡氏家族地位显赫的象征。

마을 입구에는 명나라 만력 6년(서기 1578년)에 지어진 네 개의 기둥과 5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청석으로 되어 있는 세 개의 패방이 있는데 구조가 정교하고 호씨 가족의 찬란한 지위를 상징하는 것이다.


호문광(胡文光 1521~1593) : 명대 산동(山東)의 교주자사(膠州刺史), 신종(神宗)황제 때 형번수상

이 마을에서 태어난 호문광은 명나라 嘉靖34년(1555) 과거에 급제하고 만재현(万載縣)의 현령이 되었다.
그는 현령으로서 마을을 보호하는 성장(城墻)을 세우고 또 학교도 세워 나라와 백성을 위한 많은 일을 했다.

뒤에 순무추천(巡撫推薦)을 거쳐 교주자사(膠州刺史) 겸 이해운(理海運)이란 벼슬을 지냈고
이후 형주왕부장사(荊州王府長史)가 되었다.

형주왕(荊州王)은 호문광에게 봉직대부(奉直大夫)를 주어서 그는 드디어 대부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는 맡은 일마다 성심으로 했고 뛰어난 능력과 성실함으로 인해 명 만력6년(1578) 황제는
시디 마을 사람들에게 공덕패방을 세우도록 허가했다.



호문광자사 패방과 휘주지역의 다른 패방들은 양식상 차이를 보인다.
일반적인 패방의 형태는 우리나라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주문처럼
한 줄로 서 있는 기둥위에 문루를 올려 하늘로 솟구친 형상을 한 "충천주식(?天柱式)"인데
호문광의 것은 3단으로 된 뚜렷한 층차를 보이는 5개의 지붕을 가진 누각 형태로 된
소위 "누각식(樓閣式)"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패방을 따로 "패루(牌樓)"라고 부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높이 12.3미터, 폭 9.95미터이고 조각은 소박하면서도 정밀하며
전체적인 조형에서는 장엄하며 또 화려함도 보여준다.


호씨(胡氏)는 1465년부터 상업에 종사하여 성공을 거두었고
이곳에 대규모의 건물을 짓고 사원을 수리하였으며 교각을 건설하였다.


17세기 중엽 가문에서 관리가 배출되어 촌락은 더욱 발전하게 되었고
18세기에서 19세기 동안 번영은 최고조에 달하여 당시 마을에는 600여 채의 화려한 주택이 있었다.




광고재(曠古齋)

청나라 초기 강희년간(1662년)에 세워진 건축물로 총 면적은 130평방미터.


이곳의 원래 주인은 상업에 능해 관직까지 지내고, 그 후에도 상업활동을 더 활발히 했던 문인으로 유명한 분이고

후손들은 더 발전하여 다른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겼다고 한다.


천정을 통해 보는 휘주 건축의 특징


시디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대문을 동쪽 측면으로 냈는데 이는 풍수적인 원인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대문을 들어가면 집안에는 바로 천정(天井)을 만나게 된다.


천정이란 대청과 대문 사이의 마당을 말한다.

천정은 대문과 "ㄷ"자 모양의 집을 덮은 지붕으로 둘러싸인 장방형의 하늘과 꼭 같은 크기의 장방형으로 되어 있고

그 둘레는 좁은 수로를 파서 배수가 되고 또는 저수도 할 수 있게 되어있다.


지붕에서 천정바닥으로 빗물이 내려오는 홈통이 벽을 따라 설치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서 지붕의 빗물은 모두 천정으로 모이게 된다.


이는 휘주 사람들에게 옛날부터 전해오는 "四水歸堂" 즉 온 세상의 물이 모두 집으로 들어온다라는 말과 관련된다.

또한 좋은 물은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는다는 비유가 있는데 실제로 천정은

휘주 사람들이 재산을 모으려는 바람을 나타낼 뿐 아니라 "사람을 모으는(聚人)"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천정은 또한 가족들이 함께 생활하는 공동공간이기도 하다.

낮에 청당 즉 대청에 앉아서 책을 본다거나 차를 마시면서 휴식을 취한다거나 할 때

하늘에서 천정으로 내려온 햇볕은 천정 바닥에 반사되어 대청 안을 부드럽게 밝혀준다.

이것은 한국의 한옥에서 마당에 내려온 햇볕이 마루에 반사되고 그래서 온 집안을 부드럽게 밝혀주는 것과 통한다.


천정에 바로 면한 대청은 청당(廳堂)이라고 하는데 정면 벽에는 당호를 새긴 편액이 위쪽으로 높게 걸려 있고

그 아래 중당화(中堂畵)라고 하는 큰 폭의 그림이 걸려 있고 그림의 양쪽으로는 교훈적인 내용의 대련이 걸려 있다.


그림의 아래에는 좁은 상이 놓여 있는데 상 위에는 중앙에 자명종 시계,

왼쪽으로 도자병(陶瓷甁), 오른쪽에는 조각 장식을 한 나무받침 위에 거울이 놓여 있다.

이를 소위 "동병서경(東甁西鏡)"이라 한다.


이는 표의문자인 한자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는 중국인들의 민속으로

매 시간마다 정시가 되면 자명종이 울리는 것을 들으며 집주인은 "종생평정(終生平靜)"

즉 평생을 평안하고 조용하게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시계를 의미하는 "종(鐘)"이란 글자가 "終"과 같이 "쫑"이라고 발음하며

또 "병(甁)"은 평안을 의미하는 "平"과 같이 "핑"이라고 발음하고

거울을 뜻하는 "경(鏡)"은 고요하다는 "靜"과 같이 "징"이라고 발음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중국의 건축에서는 이와 비슷하게 발음이 같은 글자를 취하여 여러가지 상징기호를 만들어내는 예를 많이 만날 수 있다.

대청은 주로 손님을 접대하는 장소이며 남자들의 주 생활 공간으로 한국에서의 사랑채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시디 마을의 집들 뿐 아니라 휘주의 건축은 밖에서 보면 매우 폐쇄적임을 알 수 있다.

창문이 없는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집들은 마치 감옥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집의 규모에 비해 좁은 대문을 들어가서 처음 천정을 만나게 되면

이 집이 밖에서 보던 그 감옥처럼 꽉 막힌 집이란 사실을 잊게 된다.


그것은 천정을 통해서 하늘을 볼 수 있으며 바람 불고 비가오고 또 따스한 햇볕이 집안을 밝게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곧 외부에서 볼 때는 엄청나게 폐쇄적인 집이지만 집안으로 들어오면 또한 매우 개방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고

자연과 조화된 집이란 점에서 휘주의 집은 사람들에게 매우 건강한 삶을 유지하게 해주는 것이다.

휘주 사람들이 이 천정을 통해서 천지의 바른 기운을 받아들인다고 믿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西递村建房多用黑色大理石,两条清泉穿村而过,99条高墙深巷,各具特色的古民居,使游客如置身迷宫。

 서체촌의 가옥들은 대부분 검은색 대리석으로 지어졌고 양 갈래로 맑음 샘물이 관통하고 있고

높은 벽으로 둘러싼 99 갈래의 골목들이 있어 각각 옛 민가의 특색을 가지고 있고 여행객들을 미궁 속에 빠지게 한다.



조상을 존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경애당(敬愛堂)


경애당은 본래 호씨 14세조인 사형공(仕亨公)의 주택이었다.

처음 지은 것은 명(明) 만력년간(萬曆年間,1573~1620)인데 뒤에 화재로 크게 훼손되었다.


청(淸) 건륭년간(乾隆年間,1736~1795)에 중건하고 나서 호씨자손이 크게 번성했고

이후 점차 더욱 더 왕성하게 되었기 때문에 드디어 문중사당 즉 종사(宗祠)로 확장하여 짓게 되었다.

현재 면적은 1800여 평방미터이다.


경애당의 대문 처마는 하늘로 오를 듯 날렵하게 위로 솟구쳤는데

대문을 들어가면 장방형의 천정(天井)이 나오고 들보 위에는 붉은 채등(彩燈)이 걸려 있다.


중문 위에 높다랗게 "경애당(敬愛堂)"이란 해서의 편액이 걸려 있다.

경애당이란 이름은 후손들에게 노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라(敬老愛幼)고 계시한 것이며

또한 문중 사람들이 서로 공경하고 사랑하라는 뜻과 서로 화목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종사(宗祠)는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지만 이곳은 과거 상업이나 문중 일을 의논하기도 했고

또는 혼사나 그 밖의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행사를 하기도 하며 불효한 사람을 벌주는 장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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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忠), 효(孝), 렴(廉), 절(節)


경애당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관심을 끄는 것은 문루 위에 걸린 3미터에 이르는 큰 편액이다.

이것은 "효(孝)" 한 글자를 쓴 것인데 남송 대철학가이며 교육가이고 이학의 집대성자인 주희가 쓴 것이라 한다.


당시 그는 충(忠), 효(孝), 렴(廉), 절(節) 네 개의 큰 글자를 썼는데

문화대혁명 때 훼손되어 충, 렴, 절 세 글자의 편액은 없어져서 많은 사람들이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다.


지금 효(孝)자의 편액이 남은 것은 당시 촌민 한 사람이 효자 편액을 집으로 가지고 가서 곡식창고의 덮개로 사용했는데

그 때문에 지금 남아 있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그는 이 편액의 귀중함을 모르고 함부로 집으로 가져가서 창고 덮개로 사용했으나

지금은 오히려 그 덕에 이 편액 하나만이 유일하게 남게 되었으니 세상일은 참으로 예측하기 어렵다.


호씨족보서(胡氏族譜序)

据史料记载,西递始祖为唐昭宗李晔之子,因遭变乱,逃匿民间,改为胡姓。故自古文风昌盛,到明清年间,一部分读书人弃儒从商,他们经商成功,大兴土木,建房、修祠、铺路、架桥,将这里建设得非常舒适、气派、堂皇,当时村里有大约600家华丽的住宅。


역사자료의 기록에 의하면 서체의 시조는 당나라 소종 이엽의 아들이 변란을 맞아 민가로 숨어들어가게 되고

성을 호로 바꾸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옛부터 문화를 숭상하는 풍조가 만연했는데 명청시기에 이르러 일부학자들이 학문을 포기하고 상업에 뛰어들어 성공을 하게 되면서

대규모 토목공사가 이루어지고 집을 짓고 사당을 복원하고 도로를 놓고 다리를 세우는 것 등이 활발해졌다.

이곳의 건축물들은 편하고 분위기 있으며 웅장하였고 당시 마을안에는 대략 600여개의 화려한 저택들이 있었다.


백대증상(百代蒸嘗) 경애당의 편액. 蒸은 겨울제사를 뜻하고 嘗은 가을제사를 뜻한다.



종중을 존경하고 조상을 공경하라는 뜻







리복당(履福堂)

村中有座康熙年间建造的“履福堂”,陈设典雅,充满书香气息,厅堂题为“书诗经世文章,孝悌传为报本”、“读书好营商好效好便好,创业难守成难知难不难”的对联,显示了儒学向建筑的渗透。


마을에는 강희년에 건립된 “리복당”이 있는데 장식이 우아하고 선비집안의 숨결이 숨쉬고 있다.

이곳의 테마로 “책과 시와 문장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고, 효와 윗사람 공경을 근본으로 한다”,

“독서는 상업적으로의 효과를 더욱 극대화시키고 창업시 그 어려움을 알면 더이상 어려움이 아니다”라는 현수막을 달아서

유학이 건축물에 얼마나 깊숙히 스며들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대부제(大夫第)

村中另一古宅为“大夫第”,建于清康熙三十年(公元1691年)。“大夫第”为临街亭阁式建筑,原用于观景,楼额悬有“桃花源里人家。

”六个大字“有趣的是,近人多将此楼当作古装戏中小姐择婿”热抛绣球所在,现已成为西递村举办此项民俗活动的场所。


마을안에 있는 또 다른 건물인 “대부제”는 청나라 강희 30년(서기 1691년)에 지어진 것으로서 길에 인접해있는 정자식 건축물이다.

원래는 “무릉도원이 민가안에 있다”는 말을 써서 관광지로 이용되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최근 많은 사람들이 이 건물들을 고대 전통극 중 아가씨들이 남편감을 고르는데 사용되던 것으로 여겨서

현재 서체촌은 이러한 민속적인 행사를 개최하는 장소가 되었다.


“大夫第”门额下还有“作退一步想”的题字,语意双关,耐人寻味。此外,村中各家各户的富丽宅院、精巧的花园、黑色大理石制作的门框、

漏窗,石雕的奇花异卉、飞禽走兽,砖雕的楼台亭阁、人物戏文,及精美的木雕,绚丽的彩绘、壁画,都体现了中国古代艺术之精华。


 “대부제” 문 윗쪽 아래에는 “作退一步想(한발짝 물러 생각하라)”라는 글귀가 있는데 이는 두 가지의 의미심장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 외에도 마을내의 각 집집마다 화려한 정원한 정교한 화원들을 가지고 있고 검은색 대리석으로 만든 문틈과 창문,

돌로 새긴 진기한 꽃들과 풀, 그리고 조류와 야생동물들이 있고 벽돌로 쌓아올린 누각과 정자들,

인물을 묘사한 전통극, 또한 정교하고 아름다운 목조품들, 화려한 채색화, 벽화등이 있어

이는 모두 중국 고대 예술의 우수성을 표현한 것들이다.


历经数百年社会的动荡,风雨的侵袭,虽半数以上的古民居、祠堂、书院、牌坊已毁,但仍保留下数百幢古民居,

从整体上保留下明清村落的基本面貌和特征。


수백년에 이르는 사회의 풍랑들을 거쳐서 비록  반세기 이상의 고대 민가, 사당, 서원, 패방들은 모두 훼손되었지만

여전히 보존되고 있는 백개의 고대 민가들이 있고 전체적으로 명청시기 촌락의 기본적인 형태와 특징이 보존되고 있다.

http://cafe.naver.com/jlyge/289


송석도(松石圖)


매죽도(梅竹圖)


공산당원의 집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고 중국역사문화명촌으로 지정된 마을답게 풍경을 그리는 학생들이 곳곳마다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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